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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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자유를 지배하는 자는 오직, 그들의 양심을 편하게 해 줄 수 있는 자뿐이다. 빵과 함께 너에게는 확실한 깃발이 주어졌다. 빵보다 더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빵을 주면 인간은 경배할 것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너 이외의 누군가가 그의 양심을 지배하게 된다면 – 오, 그러면 인간은 너의 빵마저도 버리고 자신의 양심을 사로잡는 그자를 따를 것이다.

 이 점에서 너는 옳았어. 왜냐면 인간 존재의 비밀은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에 있으니까.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에 대한 확고한 관념이 없다면 인간은, 설령 그의 주위가 온통 빵 천지라 할지라도, 사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지상에 남느니 차라리 스스로를 박멸할 것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Ⅰ, 민음사, 536면. -










■■■








4-00. 구원으로부터의 고뇌


「세상은 환상이다.」

 어지럽게 가라앉는 가을빛 물결 속에 광인覺者은 조용히 진언戱言을 읊조렸다.

「모든 것은 허상이다. 말하자면 한갓 꿈에 불과하다.」

 입을 여는 광인은 낙엽을 짓이기며 걸었다. 쇠락을 자극하는 단말마가 검은 염소의 뿔을 타고 한들한들 피어오른다.

「꿈은 그 무엇도 아니다. 꿈은 아무런 죄가 없다. 꿈에는 어떤 책임도 없다.」

 근원天神을 부정하는 광인은 당연히 그 파생물도 인정하지 않는다. 영원한 설원에 흩날리는 불티처럼 있을 수 없으며 있어도 의미가 없는 것과 같다.

「세상은 부조리다. 세상은 고통이다. 세상은 절망이다.」

 광인은 세상의 본질虛僞을 입에 담았다. 동위이자 상이한 말로써 그 의의를 치장했다.

「세상은 무의미다. 세상은 망상이다. 세상은 미정이다.」

 광인의 논리法理는 파탄으로 점철돼 있다. 모든 의의를 거부하는 깨달음에 그 귀결은 당연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 파탄은 지극히 올바른 결론일 것이다.
 지고한 반역자大天使는, 눈에는 불길을 입에는 얼음을 담아 물었다.

- 그러니, 싸움을 포기하라는 거냐.

 무상한 각자狂人는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거짓에 의미는 없다.」

- 그러니, 분노를 버리라는 거냐.

「착각에 가치는 없다.」

-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거냐.

「기원에 구원은 없다.」

 광인의 답은 변함없이 단호했다. 실재하는 세상이 부존하는 만큼 그 정처 없는 깨달음의 확실성은 더할 나위 없이 굳건하다. 진실 없는 세상에 유일한 이치를 설파하는 광인의 언어는 그 자체로 진실한 모순이었다.
 반신반인Demigod의 대천사는 깊이 숨을 들이쉰 후 그것을 토해내듯 선언했다.

- 잘 알겠다. 그렇다면 나는 날개理想를 찾겠다. 날지 못하는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해.






4-01. 정적으로부터의 고뇌 (1)


 짙은 먹구름을 뒤에 두고 순백으로 투명한 유리 구조물.
 제단과도 같이 높이 쌓인 상석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한 아리따운 공주가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다.

“음.”

 은빛 공주의 시선은 초조하게 떨리며 아래를 향해 있었다. 한창 사투가 펼쳐지고 있는 원형 경기장. 지금 그곳에는 근엄한 제복으로 몸을 감싼 순도 높은 천연석의 청년 무관이 가련한 한 시녀를 사냥감처럼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간다!”

 잠시 거리를 재던 청년 무관은 이윽고 힘껏 고함을 지르며 자신의 법칙을 행사했다. 무수히 분열되어 날아드는 빛나는 창槍. 수백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는 광경을 연상시키는 압도적인 위력이다.

“…….”

 보석실로 짜인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붉은 머리 시녀는, 그 앞에 무력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당연하다. 한갓 모조석에 불과한 일개 시녀가, 그것도 눈도 보이지 않는 가냘픈 여성이 천연석의 귀족 무관을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걸로, 끝이다!”

 청년 무관은 물론, 그 싸움을 관람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때, 이변이 일어났다.

“아, 네네. 이걸로 끝이네요.”

 놀랍게도 눈을 가린 시녀는 멀쩡했다. 그것도 단순히 무사한 것만이 아닌 어느새 청년이 던진 분열된 창 전부가 부러져 땅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것이다.

“어, 어떻게…….”

 청년 무관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시각적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머리로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라니……. 그냥 전부 쳐서 떨어뜨렸을 뿐인데요.”

 눈을 가린 시녀는 소매 속에서 꺼낸 홍옥紅玉의 단검을 들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물론 그것이 청년에게 있어 납득할 만한 대답이 되었을 리 만무하다.

“우, 웃기지 마! 내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고!”

“아, 그야 그쪽이 눈이 나쁜가 보죠. 그보다…….”

 잠시 하품을 참느라 말을 멈춘 시녀는, 살짝 눈물을 머금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이만 끝내도 되죠?”

“아, 잠깐……!”

“감사합니다.”

 퉁. 이번에는 관객들을 배려한 건지 적당히 시인이 가능한 속도로, 하지만 청년 무관이 대응할 수 없을 만한 빠르기로 움직인 시녀는 단검의 손잡이로 그의 머리를 때렸다.

“————”

 쓰러진 청년은 기절한 채 말이 없었고, 붉은 머리 시녀는 더는 참지 못하고 마침내 하품을 했으며, 관객들은 예상치 못한 결말에 다들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그때, 유리 구조물 전체를 진동시키는 큰 목소리가 높게 울려 퍼졌다.

“제1회 다나 공주 쟁탈전 종료! 승자는 직속 시녀 홍연우! 후후, 정말이지, 멋지고도 한심한 시합이었네요. 물론 한심한 게 어느 쪽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겠죠? 원하는 사랑은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 우리 흑색연맹의 전통! 시녀도 넘어서지 못하는 주제에 그 모시는 분과 맺어지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기를. 다음 구혼 상대야말로 우리 연맹의 위상을 떨쳐 주기를 기대하겠어요. 아무튼 다들 멋진 시합을 보여준 연우 양에게 박수를!”

 자칭 뇌운제雷雲帝, 아나스타샤 카잔차스키 대공의 풍부한 음색에 정신을 차린 관객들은, 이제야 환호성을 지르며 승자를 상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아나스타샤는 풍성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다시 자리로 돌아와 다나 공주에게 말을 걸었다.

“후후. 저 널브러져 있는 젊은이는 금번 생도들 중에서 손가락에 꼽을 만큼 성적도 우수할 뿐만 아니라 집안도 좋아 여러모로 꽤 장래가 유망한 편에 속하는데, 아쉽게 되었네요.”

 다나 공주는 꾸밈없는 미소를 꾸미며 부드럽게 답했다.

“예, 아쉽게도 그분은 저와 인연이 없었던 모양이에요. 분명 저보다 더 좋은 분을 만나실 수 있을 거라 믿어요.”

“겸손도 참. 하기야 저 정도 사내에게 공주님을 넘기긴 아깝죠. 최소한 공주님의 시녀를 뛰어넘을 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은 돼야 저도 마음 편하게 식을 주재할 수 있을 테니 말이에요.”

“아, 아니 전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앞으로도 구혼 상대들이 줄을 서고 기다리고 있으니 기대하고 계세요! 호호호호호!”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은 뒤 높은 목소리로 웃는 뇌운공 앞에서 다나 공주는 변함없이 미소를 꾸미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은발의 다나 공주, 아니 여자 행세를 하고 있는 단 소년은, 그 온화한 표정과는 달리 속으로는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간절히 경기장에 서 있는 연우에게 기원했다.

‘젠장, 왜 내가 이런 꼴이! 아무튼 부탁한다. 제발, 앞으로도 계속 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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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5.06.22 12:47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마, 마지막 부분의 반전이이이이!!!; ㅇ>-< (털썩)

    그나저나 이번에도 연우 남매는 꽤나 골치 아픈 임무를 떠맡게 되었군요.

    자아, 이렇게 제4번째의 막을 올린 별세계의 별리! 다음 이야기가 벌써 기다려지네요~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5.06.22 22:04 신고 address edit/delete

      이번 이야기도 눈을 두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단 소년의 과감한 변신(?)은 과연 좋아해 주시는 분이 계실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본래 초안대로 밀어붙이고 말았네요^^;;

      아무튼 전보다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 who 2015.06.24 18:1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YES! 별세계의 별리인것입니다아아아!!! 이번에도 좋은 글을 읽게 해주셔서 미리 감사드립니다!
    ...그나저나 단 소년은 대체 뭘 어째서 흑색연맹에서 여장을...(어딘가의 은철 공주님이 생각나는데 설마?)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5.06.24 21:08 신고 address edit/delete

      아앗,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감사드려요>.<
      말씀처럼 이번 이야기의 플롯은 철옹성 에피소드와 일부 유사한 부분이 있네요^^

      으, 과연 좋은 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글이 될 수 있도록 힘내겠습니다! >.<

  3. 2015.07.01 19:39 address edit/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5.07.02 07:11 신고 address edit/delete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흐르고 말았네요!
      매번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이라도 재미있게 읽어주실 수 있도록 힘내고 싶은 마음이네요>.<

  4. 2015.07.03 15:04 address edit/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5.07.04 08:11 신고 address edit/delete

      새로 스타일이 바뀐 연우도 마음에 들어해 주시니 기쁘네요! >.<

      연우가 눈을 가리게 된 것에는 말씀하신 이유도 있고 또 다른 이유도 있는데, 크게 대단한 것은 아니라 내용이 밝혀지면 살짝 허탈하실지도^^;;

      저야말로 언제나 감상과 격려에 감사드려요!
      다음 화도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5. Favicon of http://heben.tistory.com BlogIcon 아우프헤벤 2015.07.21 17:5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으으... 트랙백 전송이 안 되네요. ;ㅁ;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5.07.21 19:54 신고 address edit/delete

      아앗, 그러고 보니 바로 http://notice.tistory.com/2207 이 사태 때문에 모든 글에 트랙백 차단을 했던 걸 깜박하고 있었네요;;; 무시무시한 스팸 트랙백 러쉬로 하루에도 수십이 넘는 트랙백이 달린 적이 있어서...OTL

      지금은 다시 차단 설정 해제 완료! 으으, 제 부족한 소설을 소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토록 멋진 일러스트까지 그려주시다니 정말 기쁘네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

    • Favicon of http://heben.tistory.com BlogIcon 아우프헤벤 2015.07.22 08:18 신고 address edit/delete

      그런 일이 있었군요.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해제해 주신 덕에 다시 트랙백 걸었어요. 써 주시는 글에 비해 많이 부족한 그림이지만 마음에 들어해 주셔서 다행이에요. 앞으로도 좋은 글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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