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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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 토머스 게이건



“노력한 사람이 잘 살고, 게으른 사람이 못 사는 건 당연한 일 아니야? 경쟁이 왜 나쁘지?”

 언젠가 본 잡지의 칼럼에서 글쓴이의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명문대를 나와 젊은 나이에 기업의 간부 자리에 오른 그 사람은, 최근 불거지기 시작한 복지논쟁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는 모양이다.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평등이 아닌가?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는 이미 무너진 공산국가들이 증명했잖아. 왜 그 실패한 전철을 되밟아야 하는 거지?

“우리 기업의 경쟁력은 ‘고노동 · 저임금’에 있다네.”

 현재 한국 대법원에는 주 40시간 법정근로를 다한 근로자가 휴일에 또 근무를 했을 때, 연장근로수당과 휴일근로수당을 중복해서 지급해야 하는지에 대한 소송이 심의 중이다. 이에 대해 당연히 중복 지급해야 한다는 한 노동법 교수의 주장에, 그녀의 저명한 스승은 고개를 저으며 기업을 우선시하는 저러한 대답을 했다고 한다.

“70년대 말까지 거의 동물적 생존본능으로 버텨온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영화 『국제시장』을 감상한, 그 영화의 주인공과 같은 세대라는 어떤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는 우리의 경제성장이 ‘생존’을 ‘생활’로 바꾸어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었는지에 대한 평가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고 본다.

“인간의 활동은 자칫하면 풀어지기 쉽고, 인간은 걸핏하면 절대적인 휴식을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나는 인간에게 친구를 붙여 자극하거나 움직이게 하여 악마로서의 일을 시키는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한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신神이 하는 말을 ‘놀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을 정도이니 말이다. 쉬는 것은 어쩐지 사치 같고, (노는 것 이외에) 무언가 하지 않으면 굉장히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다는 죄책감이 언제나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한강의 굴레. 나는 종종 독일 라인강의 기적에서 유래한 ‘한강의 기적’이란 단어를 이렇게 부르고 싶을 때가 있다. 물론 윗세대의 노력과 그 성과를 전적으로 부정할 마음은 없다. 분명 우리 세대는 그 수혜를 듬뿍 받아 전후 어떤 세대보다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즐겨온 것이 사실이니까.

 하지만 바로 그 성공 때문에 우리 사회는 행여 그 성과물을 잃지는 않을까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눈을 흐리고 있다. 위에 든 사례에 더해 실질적인 능력이나 올바른 정치적 견해 및 도덕성 등을 갖추고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경제를 살린다’는 슬로건을 내건 정당과 그 후보에게 많은 지지를 보내는 한국 유권자의 현실이 그 단적인 예가 아닐까.

 공정거래위원회의 자료에 의하면 현재 한국 사회는 소위 30대 재벌이라 불리는 기업들이 국민경제의 약 4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재벌들이 흔히 그렇듯 그 기업들의 대부분은 총수를 중심으로 한 친인척 족벌경영을 하고 있다. 약간 과장 섞어 말하자면, 고작 30인 남짓한 총수들과 그 친인척들이 한국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이다. 재벌들이 휘두르는 온갖 전제적인 권력 행사의 폐해는 말할 것도 없으며, 소수의 기업에 국민 경제력이 집중되어 있는 탓에 재벌들이 한 번 실수하게 되면 나라 전체가 기우뚱하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가와 국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재벌들을 지원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같이 죽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재벌들이 기울어 나라가 흔들릴까 언제나 전전긍긍하며 그들을 대우해준다. 부정을 저지른 기업가들이 툭하면 특별 사면으로 풀려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곧 심각한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로 이어진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말처럼, 그리고 한 번 죽이기가 어렵지 두 번 죽이기는 쉽다는 말처럼, 경제를 살린다는 명목 아래 경제인들의 범죄를 눈감아 주는 행태에서, 국민 전체의 준법의식과 윤리의식이 영향을 받지 않기란 힘든 일이다. 아마 국내 심의기관이 위선적인 도덕성 강조와 불필요한 매체 검열에 열을 올리는 것도 얼마간은 그 우려에 대한 반동이리라.

 그럼에도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말을 선뜻 꺼내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경제를 살려야 하니까. 자칫 황금알 낳는 거위 배를 가르는 꼴이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 사회를 개선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 한강의 굴레奇蹟에 사로잡혀 있다.

 반면,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의 저자 토머스 게이건(이하 필자)은, 단호하게 그런 사회를 끔찍하다 말하며 거침없이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필자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미국 사회의 자본주의에 대한 폐해이지만, 이는 한국의 경우에도 놀라우리만치 밀접하게 해당되는 사안들이다. 과연 한국 사회를 두고 과잉 미국화나 총체적 미국화라 지적하는 말이 괜히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진솔한 경험과 친숙한 입담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내용이 전개될수록 서서히 날카로운 분석을 드러낸다. 마치 (부정적인 의미에서) 급진적 구성주의자라도 되는 것 마냥 입맛대로 사실을 호도하여 독일 모델의 우수성을 감추는 미국 언론을 비판하며, 종합적 체계적 분석을 통해 진실을 드러내는 필자의 글에선, 학자다운 성실성뿐만 아니라 탐정이 사건을 추리하며 범인을 밝혀내는 통쾌함마저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GDP에 대한 질적인 비교였다. GDP도 다 같은 GDP가 아니다. 설령 미국이 그 부분에서 수치상 독일을 앞서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독일인의 GDP는 문화여가생활을 즐기면서 나오는 것임에 반해, 미국인의 그것은 뼈 빠지게 일하다 망가진 몸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비와 지나치게 높은 교육비 등에서 형성된다는 지적은 가슴이 아플 정도로 깊게 스며들었다.

 실제로 미국과 닮은 한국에 살고 있는 내 부친은 과로로 인한 뇌출혈로 쓰러져 오랜 기간 치료를 받았으며, 나 또한 병간호로 휴학기간이 길어지고 그때의 무리로 인해 아직도 매일 같이 아세트아미노펜 계열의 신세를 지고 있다(갚아야 할 학비 대출 빚도 2천만 원이 넘는다).

 그밖에 직장평의회 및 노동조합의 예를 들어 노동자의 힘이 강한 것이 단순히 근로자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기업 유지에도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사회 안전망의 확충이 얼마나 국가의 안정과 국민들의 생활을 지켜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필자는 상세한 자료와 경험, 그리고 그에 근거한 논리를 통해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물론 필자는 이에 대한 반박도 경시하지 않고 있다. 분명 독일도 변화하고 있으며, 애당초 독일 모델 자체도 완벽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필자는 결코 독일 모델이 완벽하기 때문에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 모델이 너무나도 끔찍한 사회를 낳고 있기 때문에 그 처방책 중 하나로 제시하는 것뿐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필자의 주장을 잘 알 수가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비웃을지 모른다.

“당신은 노사공동결정제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독일의 노동자가 모두 그 대상인 것은 아니잖아.”

 그렇다. 노동조합이 없는 회사가 더 많다. 모든 노동자가 직장평의회에 가입해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독일 노동자의 약 40퍼센트만이 노동조합이나 직장평의회가 있는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미국의 민주주의가 한창 활기를 띠었던 앤드루 잭슨 대통령 시절이나 뉴딜 시대에도 모든 미국인이 그 혜택을 만끽했던 것은 아니다. 역사가 숀 윌렌츠(Sean Wilentz)가 주장했듯이 어떤 민주주의라 해도 경계선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 시절에도 흑인과 여성 등은 소외되었고, 뉴딜 시대에도 미국 남부는 뚜렷한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때만큼 민주주의의 열기가 크게 달아오르고 평범한 시민의 정치적 힘이 컸던 때는 없었다.

 이렇게 민주주의의 기세가 고양될 때에도 경계선이 늘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문제는 이런 경계선이 줄어드는가, 혹은 늘어나는가 라는 게 윌렌츠가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 토머스 게이건,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부키, 164면. -



 물론 이것만으로는 전부 대처할 수 없는 반박도 있다. 필자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강렬한 성공과 승자독식의 삶을 원하는 소위 ‘알파형 인간Alpha Male’들은 독일 모델과 같은 사회에서는 충분한 만족감을 느끼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은 미국과 같은 사회로 떠나고 ‘덕분에’ 독일 사회는 팍팍한 인간들이 줄어 한층 평온해진다.

 여기서 나는 왠지 북유럽 신화의 발할라Valhalla 또는 발할Valhall이 떠올랐다. 전사戰士들의 천국이라 할 수 있는 그 신들의 궁전은, 여자와 병들어 죽은 자, 그리고 침대에서 편히 죽은 자는 갈 수 없는 매우 차별적인 이상향이라고 한다.

 동양에도 발할라와 매우 닮은 개념이 하나 있다. 바로 육도윤회六道輪廻 사상 중 하나인 수라도修羅道이다. 업이 많고 싸우기 좋아하는 자가 아수라 귀신으로서 다시 태어난다는 그곳은, 발할라의 전사들처럼 각자가 자신만의 무기를 가지고 매일 같이 죽고 죽이며 되살아나기를 반복하는 세상이라고 한다.

 수라도는 비록 지옥도나 아귀도보다는 나은 세상이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지옥이나 다를 바 없는 곳이다. 누군가의 천국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옥이 될 수 있다는 건 아주 흔한 일. 이는 칼 포퍼의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시도가 항상 지옥을 만들어낸다’는 말과도 통하는 맥락이 있다.

 나는 미국과 심하게 닮은 한국 사회가 바로 그러한 알파형 인간들의 수라도를 구현하는 건 아닌지 두렵다. 아니, 어쩌면 이미 널리 펼쳐져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아수라 귀신들 사이에서, 그 귀신들이 되어 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맹자는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도 없다’고 말했다. 여기서의 항산을 단순한 재산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해나가기 위한 ‘사회적 조건’이란 말로 이해한다면, 나는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물론 맹자는 선비는 항산이 없어도 항심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 모양이지만, 난 그 선비 자체도 일단 항산으로 항심을 갖춘 후에야 형성될 수 있다고 본다.

 어떻게 하면 항산을 갖출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수라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한강의 기적이란 이름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미국 모델의 폐해를 상쇄하거나 완화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단서 역시 필자의 저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득 의문이 솟았다. 왜 유럽의 문제점만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지? 어쨌거나 유럽인은 1년에 6주의 휴가를 누린다. 왜 이런 것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게다가 다른 지역 사람들이 ‘심각한 눈으로 바라봐야 하는 문제’가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역설적으로 유럽이 더 매력적인 것이다. 내 말은 유럽은 최소한 시도라도 해 봤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 토머스 게이건,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부키, 195면. -



 반복하지만, 분명 사회민주주의적 이상을 일부 구현한 독일 모델이라는 필자의 처방은 완벽한 것이 아니고, 그 사실은 충분히 필자도 주지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미국 모델보다는 훨씬 낫다는 점과, 또 그것을 실시하며 생기는 문제점에서도 이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점이, 바로 필자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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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5.06.24 11:51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건국 직후 찾아온 전쟁의 참화와, 그 힘겨웠던 재건의 여정길...

    비록 그 과정에서 일본과 미국의 사회 모델을 대폭 참고하며 달려온 끝에 이만큼 국가가 성장할 수 있었지만, 그러한 롤모델이 지니고 있었던 일련의 부작용들 역시 결국 피해갈 수 없었다는 점은 틀림 없는 주지의 사실이 아닐까 싶어요.

    그 일례로 현재 대한민국의 사회는 바로 옆 일본이 걸어간 사회 변화의 흐름을 약 5~15년의 간격으로 착실하게(?) 따라가고 있으며, 또한 대한민국의 건국 이후 법과 행정학 구조의 개관에서 결코 적지않은 비중을 차지해온 미국이 겪었던 여러가지 난항들의 풍경이 현재 진행형으로 펼쳐지고 있기도 하니 말이예요.


    물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60~70년대의 처절했던 시대에 비해서는 사회 구성원의 삶이 상당 부분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서도, 왠지 아직도 부의 재분배 논란이 일때마다 소위 '공산주의자'라는 과거 이데올로기의 잔영을 투사하며 몰아세우려는 경우를 보면 아직은 갈 길이 멀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또한 작금의 북유럽 선진국들이 자랑하는 복지 정책은 지속적인 경제 성장의 약진이 확실시되던 1950년대의 상황을 기준으로 설계된 것인바, 더이상 그러한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어진 이후의 시점부터는 일단의 혁신과 수정이 불가피하며 따라서 미래의 북유럽 선진국 젊은이들이 받는 혜택은 점차 축소되어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니 너무 부러워하지 말라는 의견 역시 접하게 되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재 미국이나 동북아시아지역의 상당수 거주자들이 처한 현실에 비하면 역시 낫다는 생각이 드네요. ㅠ_ㅠ) ( 더불어, '서양 코쟁이들 사정은 거기 사정이고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이 있다!' 며 늘어놓는 훈계와 일장연설 앞에서는 그저 Orz Orz Orz... )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5.06.25 07:37 신고 address edit/delete

      예, 말씀하신 바에 저도 전적으로 공감하네요.

      가령 오늘자(24일) 중앙일보에 의하면, 한 여당 의원이 사회주의 요소가 들어있는 경제법 발의에 동조했다고 하여 모 보수단체 회원들이 '대통령을 배신했다', '사회주의는 용납할 수 없다'는 등 강경하게 반발하며 그 의원을 규탄했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들의 발언이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이,

      1. 아무리 정당적인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해도 입법부의 의원이 행정부의 수장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몽테스키외 등이 주장한 권력분립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한국 정치 시스템에 대한 몰이해이며,

      2. 대통령에 대한 '배신' 운운하는 것 또한 그저 국민 대표자에 불과한 행정부 수반을 마치 '군주' 취급하는 전제적인 발상이고,

      3. 법안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점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저 '사회주의적 요소'라는 이유만으로 비난하는 것도 사상 및 이념에 대한 총체적인 무지에서 연유한 일종의 혐오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밖에 없지요.

      애당초 자본주의의 반대 개념은 공산주의이며, 사회주의는 개인주의의 반댓말, 그리고 민주주의의 반대가 독재 등 권위주의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보면 민주주의의 반대가 사회주의라는 어처구니없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아마 이 사람들도 그쪽에 속하지 않을까 싶어요. 까놓고 말해 북한의 실질적으로 전제정이나 다름 없는 소위 우리식 사회주의를 사회주의의 전부인 양 오인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게다가 세상의 많은 국가들이 어느 한 요소만으로 성립되는 경우는 없으며, 자본주의적 요소, 공산주의적 요소, 사회주의적 요소, 개인주의적 요소가 한데 아우러져 법과 제도가 성립돼 사회가 돌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느 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금기인 것처럼 말하는 것 자체가 심히 넌센스에 불과하죠.

      이러한 점만 봐도 한국의 소위 반공 이념 따위가 얼마나 수준 미달의 세뇌적인 혐오 교육에 불과한지 잘 알 수가 있겠더군요. 개인적으론 모든 걸 북한을 중심으로 놓고 보는 소위 멸공주의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종북주의자가 아닐까 싶어요-_-

      (전 북한을 위험하지만 지성 없는 맹수를 상대하듯 사냥꾼이나 조련사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컨트롤하려고 해야지, 같은 지평선상에서 싸우거나 경쟁해야 될 대상은 아니라고 봐요. 북한을 무려 '주적'씩으로나 상대해 주는 것 또한 70년대 말까지 북한이 우리보다 강성했던 시절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착오적인 낡은 관념에 지나지 않죠.)

      그밖에 우리만의 방식 운운하는 훈계와 일장연설이 질린다는 말씀에도 격하게 공감이 가네요. 사안은 다르지만, 최근 성 소수자 퍼레이드와 관련해 '동성애는 정신질환이고 동성애자는 정신병자이다'라고 혐오 발언을 마구 쏟아붓는 호모 포비아가 있더군요.

      거기에 대해 제가 평소 논리대로 '세계보건기구나 정신의학회 등 학계의 주류 입장은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보지 않는 것이며, 미국의 일부 주, 프랑스, 영국, 독일 등에서는 동성 결혼을 허용하며 동성애자 시장이 선출되어도 아무 문제없이 사회가 돌아가고 있다'고 반론했네요.

      그러자 그 포비아는, '왜 우리가 서양을 따라해야 하냐. 우리 국민들은 동성애를 싫어한다. 그렇게 동성애가 좋으면 이민 가라'라는 의미의 내용을 아주 험한 말을 섞어 저에게 내뱉더군요-_-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사실 재미없지만-_-) 점은, 열정적으로 '우리식' 운운하며 반대자들을 사대주의자라 욕하는 사람들치고, 정작 해당 사안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나 합리적인 근거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어요.

      문득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 '만들어진 신'에도 소개된, 진화론 등을 부정하며 창조론을 교과서에 실어야 한다고 열광적으로 주장하는 목사가 정작 법정에서 상대편 변호사에게 추궁당하자 그쪽 관련 논문은 거의 읽어본 적이 없다고 마지 못해 실토해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네요.


      아무튼 현재 한국 사회의 주요 현안은 맹목적인 시스템 옹호의 예속화에서 벗어나는 일과, 전반적으로 시민들이 여러 사안에 있어 최소한의 교양과 지식을 갖추어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는 일, 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전근대적인 야만성에서 탈피하는 일이 시급하지 않나 싶어요.

      우선 이 두 가지가 이루어진 후에야 비로소 보수적인 정책이 옳은지 진보적인 정책이 옳은지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2. aa 2018.03.27 19:3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경제현상을 통계물리학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학문이 있습니다.
    물리학자들은 파레토의 법칙을 컴퓨터시뮬레이션에 적용해보기로 했습니다.
    프로그램을 이용해 인공세계를 만든다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투자 능력을 부여했습니다.

    처음에는 동일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비슷한 부(富)를 창출합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우연히 부(富)를 조금 더 얻은 사람들이 등장하자,
    곧이어 사회 전체의 부가 순식간에 소수에게 쏠리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부의 규모에 따른 부자의 숫자들은 정확하게 복잡계 이론과
    네트워크 과학에 적용되는 멱함수 법칙을 따르게 됩니다.

    원래 기존의 생각으로는 사람들의 키(cm) 분포도에 나오는 것처럼
    최상위는 극소수, 최하위는 극소수, 중간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정규분포를 따를줄 알았습니다.

    근데 사회현상속에 나타나는 네트워크 모델들을 분석해보면
    사회현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현상들이 정규분포 그래프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멱함수 형태의 그래프를 따르고 있었다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1.
    유튜브보면, 강남 스타일처럼 조회수가 1억씩 나오는 동영상 있습니다.
    반면, 조회수가 1만도 채 안되는 동영상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럼 강남스타일의 조회수가 1억씩 나오니까, 강남스타일은 기득권이고
    조회수 1만도 채 안되는 동영상을 올린 업로더들은 피해자일까요?

    대도서관, 보겸같이 조회수 100만씩 나오고, 구독자수 50만 or 100만 나오는 BJ들은 기득권이고,
    조회수 1만도 채 안되는 BJ들은 전부 피해자일까요?

    강남스타일이란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혼자 조회수 1억씩 해쳐먹으니까,
    다른 동영상 업로더들이 불쌍해서 조회수를 나눠먹어야 할까요?

    2.
    SNS팔로워수를 조사해보면, 소수의 계정이 대다수의 팔로워를 가지고 있고
    다수의 계정이 소수의 팔로워를 가지는 현상을 관측할 수 있습니다.
    즉 소수의 사람이 대다수의 친추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팔로워수 100만명인 사람한테
    "야.......너만 왜 팔로워가 많냐? 나한테도 좀 팔로워 보내라."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3.
    수천명의 올림픽 선수들 중에서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우 선수들은 극소수입니다.
    쇼트트랙 경기를 보면, 최민정 선수같이 극소수의 선수들이 항상 2관왕~3관왕을 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선수가 최민정한테 "금메달 좀 양보해달라." 라고 할 순 없는 노릇입니다.

    4.
    클래식 작곡가 100명이 있으면, 그 중 10명의 작곡가들이 모든 사람들이 듣는 곡의 절반을
    창작해냅니다.
    그 10명이 만든 1000곡 중 30곡이 또 총 재생 횟수의 절반을 기록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야....왜 너만 해쳐먹냐? 나도 좀 먹어보자." 라고 할 순 없는 노릇입니다.

    5.
    대한민국 1000만 영화가 있는 반면에, 10만~20만 영화가 넘치고 넘칩니다.
    그렇다고 해서 관객들에게 "1000만 영화 보지 말고, 10만 영화 좀 봐라." 라고
    강요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대다수의 무언가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현상.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에서만 나타나는게 아닙니다.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인간관계 등등 모든 현상에 근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자본주의를 없앤다고 강남스타일의 조회수랑 내가 올린 동영상의 조회수가 같아질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복지를 통해 사회의 부의 쏠림을 막으려고 할 지 모르겠지만, 정작 스웨덴을 보면
    "자산격차(소득격차가 아닌 자산격차)"는 그만큼 또 불평등해집니다.

    복지사회를 이룩할 순 있지만,
    "강남스타일은 조회수 1억씩 찍고, 내가 올린 동영상은 왜 1만 밖에 안보지?"
    이런 현상 자체를 궁극적으로 막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가 있다면 결과의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유가 있다는 것은 각 개개인이 타인과 다를 자유가 있다는 뜻이며,
    이것은 곧 격차의 자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살기 위해서 수렵, 채집 생활만 할게 아니라면, 어떤 체제든지 일단
    쌀, 빵, 소고기, 돼지고기, 짬뽕, 자장면, 치약, 칫솔, 비누, 반도체,
    석유화학, 디스플레이, 철강 등등 이러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해야만 합니다.


    인간들을 자유롭게 그냥 가만히 놔둔다고 칩시다.

    그러면 인간들은 스스로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생산활동을 하기 마련이고
    이러한 생산활동은 서로간의 자연스러운 경쟁을 불러오게 됩니다.

    "나는 짬뽕을 더 잘만들거야. 나는 국수를 더 잘만들거야."
    개개인의 자유로운 생산활동은 서로간의 경쟁과 격차를 낳게 됩니다.

    인간들을 자유롭게 가만히 놔두면, 그 가운데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 생기고,
    그 가운데서 천재가 생기고, 온갖 창의성있는 별종들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누군가는 유튜브 방송을 해서 조회수 1000만을 찍으면서 인터넷 스타가 되고,
    누군가는 주식 투자를 잘해서 주식 부자가 될 수 있고,
    누군가는 수학을 잘해서 유명 강사가 되어 학원 원장이 될 수 있고,
    누군가는 축구를 잘해서 주급 1억을 받는 팀의 핵심선수가 될 수 있고,
    누군가는 수영을 잘해서 올림픽에서 혼자 8관왕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로운 사회는 필연적으로 서로간의 격차와 불평등이 존재하길 마련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자유를 만끽하려면 그만큼 서로간의 격차와 불평등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최민정 선수가 쇼트트랙 3관왕을 했다고해서,
    다른 선수들에게 금메달 양보하라고 강요할순 없습니다.
    메이웨더가 50전 50승을 한다고 해서, 다른 선수들에게 져달라고 강요할 순 없습니다.




    그에 반해,
    [모두가 평등한 유토피아 사회]라는 생각은 필연적으로 전체주의와 독재를 불러오게 됩니다.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선, 각 개개인의 격차를 없애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각 개개인의 격차를 없앤다는 것은 각 개개인의 생산활동의 격차를 없애야 한다는 의미이고,
    그만큼 각 개개인의 경제활동을 일일이 통제하고, 지시해야 하는 초월적인 힘을 가진
    중앙권력이 존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최민정, 안현수, 마이클 펠프스, 우사인 볼트에게
    "왜 당신들만 계속 금메달을 따느냐? 다른 선수들도 금메달을 따야하지 않느냐?" 라면서
    그들을 강제로 올림픽에서 뛰지 못하도록 막을 순 없습니다.

    메이웨더, 파퀴아오에게
    "왜 당신들만 계속 이기느냐? 다른 선수들도 이겨야 하지 않느냐?"라면서
    그들을 강제로 경기에서 지도록 만들 순 없습니다.

    인간을 자유롭게 가만히 놔두면, 서로간의 격차가 생기길 마련인데,
    그것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려다보니 필연적으로 개인에 대한 탄압과 억압이 생기게 됩니다.


    고통을 제거하려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타인들의 행복을 보살펴 줄 권리는 그들과
    가까운 친구와 가족에게 한정된 것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타인의 고통을 같이 하라." 라고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사회가 고통이 없고, 싸움이 없고, 경쟁이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고, 부자도 없고,
    1등이 없고, 꼴지가 없고,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는,
    마치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은 아주 위험하고 잘못된 발상입니다.

    세상을 인위적으로 통제해서 유토피아를 만들어보겠다는 그런 발상이
    독일에서는 나치즘을 낳았고, 소련에서는 공산주의를 낳게 되었습니다.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3.27 20:27 신고 address edit/delete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사례들에 온전히 동의하기는 어렵군요. 위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동떨어진 내용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가령 현 정부의 슬로건 중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부분이 있지요.

      윗글의 주요 논점은 바로 현사회가 그 '기회'와 '과정'이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결과 또한 부당하여 필요 이상으로 승자독식하게 되는 사회를 개선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예로 드신 것 중 대한민국 1000만 영화의 경우는 스크린 독점에 의한 작위적인 목표달성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습니다. 만약 순전히 영화의 내용과 수준이 높아 많은 관객을 끌어들인 것이라면 하등 문제가 없겠으나, 대기업 배급사 등이 상영관을 몰아주어 그런 현상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언론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해 영화 선전에 일조하게 했다면 그건 평등한 기회도 공정한 과정도 정의로운 결과라 할 수도 없겠지요.

      올림픽의 경우도 요즘에는 과거 메달에만 치중하는 분위기를 부정하고, 선수들의 노력이나 올림픽 자체의 의의를 중시하자는 목소리들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메달을 딴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양보할 필요는 없지만, 올림픽 자체가 메달을 따기 위한 경기로 변질되거나,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는 멸시당하며 다른 기회를 얻기도 힘든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그 또한 올바르다고 할 수 없겠지요.

      유튜브, SNS 등은 아예 예를 잘못 드셨다고 봅니다. 조회수나, 채널 구독, 팔로우 등은 한 사람이 다른 영상에도 중복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누가 독점한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가 없지요. 그리고 유튜브, SNS 등도 지나치게 인기 유저들만 상위에 노출되도록 시스템이 짜여 있어 하위 유저들이 상대적으로 자신을 노출할 수 있는 기회를 극단적으로 빼앗긴다면 그 시스템에 대한 개선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평등한 유토피아 사회라는 생각은 필연적으로 전체주의와 독재를 불러온다고 하셨는데, 반대로 제한 받지 않는 경쟁과 자본주의가 얼마나 끔찍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지는 산업혁명시대 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과 현재도 진행 중인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봐도 여실히 알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견이 있겠지만, 전 폭력적인 공산주의는 다름 아닌 그 시대의 천민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공정거래위원회가 존재하고, 독과점의 폐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는지 한번 다시 고심해 보시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애당초 저도 그렇고, 위에서 주장하는 바도 그렇고, 모든 것을 강제적으로 아예 평등하게 만들자는 주장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하신 것처럼 열심히 노력한 개인에게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이 정당하게 돌아가게 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인간은 결코 개인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각 개개인이 보다 풍요롭게 살아가고, 좀 더 거창하게 말해 인류 전체가 한층 높은 계단으로 올라가기 위해선 '공동체'의 발전이 필수적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는 국가주의나 전체주의에서 신성시하는 국가나 민족 따위가 아닌, '각 개인이 보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공동체를 뜻합니다. 즉 통합이 아닌 연대를 지향하는 것이지요.

      그 공동체의 건설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지나친 경쟁보다는 연대가 좀 더 중시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사회적 안전망의 필요성과 대기업 등에 의해 결과와 과정이 공정하지 못하게 되는 폐해를 제거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방도를 강구하는 데 있어 (결코 완벽하지는 않지만) 유럽의 복지국가를 참조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 위 감상글의 논점으로, 지적하신 것처럼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억제하고 무조건적인 평등을 지향하자는 글을 쓴 것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3. aa 2018.03.27 20:14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위에 이어서 씁니다.

    글쓴이님의 댓글중 "자본주의의 반댓말은 공산주의이고, 민주주의의 반댓말은 독재다."
    라고 하셨습니다만, 사실 경제체제는 정치체제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제가 위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놔두면 서로간에 경쟁이 자연스럽게 생기고, 격차가 생긴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유가 있다는 것은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고, 남과 다를 자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글쓴이님께서는 중국집에서 탕수육을 시킬때, 제일 맛있게 탕수육을 요리하는 중국집에
    전화하지,
    [모든 중국집은 평등해야 한다]면서 일부러 맛없는 중국집에 전화하지는 않을거 아닙니까?

    글쓴이님께서는 청소기를 구입할때, 글쓴이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지,
    [모든 청소기는 평등해야 한다]면서 일부러 성능이 좋지 않은 청소기를 고르지는
    않을거 아닙니까?

    그래서 결국 자연스럽게 경쟁이라는게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경쟁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자연스러운 현상" 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격차와 경쟁을 없애고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들려는 시도는
    결국 인간 개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탄압하게 됩니다.

    가령, [모든 중국집은 평등해야 한다]라면서, 모든 시민들에게
    "일단 무조건 평등하게 모든 중국집에 똑같이 전화를 해야 한다." 라면서 강제로 중국집 할당을
    한다면 어떻습니까?

    가령, [모든 영화는 평등해야 한다]라면서, 모든 시민들에게
    "이 영화는 500만이나 봤으니, 이제 보면 안된다. 대신 다른 영화들을 봐라. 모두 평등하게
    봐야 하는 것이다." 라면서 강제로 다른 영화를 보도록 하면 어떻습니까?

    가령, [모든 선수들을 평등해야 한다]라면서, 올림픽에 참여하는 선수들에게
    "너는 저번에 금메달을 땄으니, 다른 선수들에게 양보해라." 라고 강제하면 어떻습니까?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격차를 억지로 없앤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공산주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 개개인의 선택과 생산활동에 개입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전체주의나 독재로 연결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 개개인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욕망과 자유를
    탄압하게 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공산주의 체제는 반드시 계획경제와 함께 독재를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자유로우면서 공산주의가 가능하지 않느냐? 절대 불가능합니다.


    국가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데, 개인의 선택은 힘이 없습니다.

    레온 트로츠키 曰 : 국가가 유일한 고용주인 나라에서 국가에 맞서는 자는 천천히 굶어죽는다."

    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개인이 스스로 선택하고, (자유)
    개인이 스스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개인이 스스로 소비할 물건을 고르고, (시장경제)
    개인의 사유재산이 보장되고, 개인의 권리가 존재해야만 민주주의가 제대로 가능합니다.

    국가에 맞서는 힘, 국가의 정책에 반대하는 힘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는 민주주의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지금 현재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그 밑바탕이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역사가 그걸 증명해줍니다.

    물론 자본주의 국가라고 해서 반드시 민주주의는 아닙니다. 독재 국가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자유를 이룩하기 위해선 우선 경제적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줍니다.

    그래서 경제와 정치체제는 서로 떨어진게 아니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3.27 20:29 신고 address edit/delete

      의견 감사드립니다.

      글의 내용이 위에 쓰신 것과 대동소이하다고 생각해 윗글에 단 저의 댓글로 답변을 대신하겠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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