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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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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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얼어붙은 시간


 푸른 달빛이 흩어지는 폐허.
 한때 인류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수도의 중심부도 지금은 옛 위용은 온데간데없이 형태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스러질 수밖에 없다는 쓸쓸한 진리를 체현하고 있을 따름이다.

 돌이킬 수 없는 상실. 회복할 수 없는 영광.
 지상의 모든 것을 제패하고 천상까지 길게 손을 뻗으려 했던 고귀한 인간들의 도시는, 신이 아닌 마왕의 손에 의해 그 오만을 심판받았다.

 - 모든 것은 모래로 그린 그림…… 참으로 덧없군.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혼잣말. 마치 검정 물감으로 세상을 덧칠하듯, 스스로도 진저리가 날 만큼 오싹하고 눅눅한 음색이다. 확실히 본모습을 드러낸 나는, 세상 그 어떤 인간보다도 그 여자를 닮았다. 인간들의 세상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은 그 여자를.

 “아직, 우리는 끝나지 않았다.”

 그때, 내 우울한 감상에 저항하는 금빛 목소리가 짙은 어둠絶望 속에 맑게 울려 퍼졌다. 나는 뒤를 돌아 상대를 바라보며 음미하듯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 임페리얼 루치아. 인류의 마지막이자 첫 번째 희망, 루치아 안젤리나 임페리얼 제이드.

 밤을 밝히듯 춤추는 화려한 금색 머리카락. 불처럼 강렬하면서도 얼음 같은 침착함을 내포한 짙은 녹색 눈동자. 초연의 내음이 깊숙이 스며든 붉은 제복이 권위 있는 여왕처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그녀Lucia는, 실제로 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직위에 앉아 있었다.

 인류연합 최고대표. 인류군 총사령관.
 역대 그 어떤 권력자도 동시에 가져본 적이 없는 최고 권력을 양손에 쥐고 있는 루치아 임페리얼. 하지만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지금 그녀가 앉은 자리를 탐내거나 부러워하진 않으리라.

 “그야 그렇겠지. 너희들 마왕군의 공격에…… 아니, 마왕 이클립스의 힘에 유린당한 탓에 인류의 세력권은 절반 이상 축소되고 말았으니까. 패전의 책임에선 누구나 도망치고 싶어 하지.”

 내가 삼키고 있던 말을 눈치 챈 걸까. 루치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하지만 눈빛에는 확실한 분노를 담아 날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용기 있는 자들은 일찍이 다 죽었다. 다름 아닌 네놈들의 손에. 남은 건, 나 같이 어둠에 벌벌 떨며 간신히 서 있는 게 고작인 잔챙이들뿐. 아주 통쾌하겠군. 인간을 먹이로밖에 보지 않는 너희 마물 놈들에게는.”

 과소평가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지나친 자기비하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힘 있고 의무 있는 자들부터 도망친 최악의 상황에서도 무릎 꿇은 사람들을 독려하고 규합해 마왕군과 호각으로 맞선 그녀Lucia를 누가 비웃을 수 있을까. 아마 그녀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난 그녀야말로 진정한 인간들의 왕이라 생각한다. 그런 그녀를 조소하는 것은, 설령 그 본인이라도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입장상 난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밝힐 수는 없었다. 대신 난 한껏 폼을 잡으며 상대를 내려다보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 그런 것치곤 제법 배짱 있는 인간이군. 내 손짓 한 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약하고 미약하고 허약한 존재가, 겁도 없이 홀로 나와의 회담에 응하다니. 대담한 용기일까 아니면 단순한 만용일까. 어느 쪽인지 심히 궁금한데.

 떠보는 내 물음에 루치아의 입가가 살짝 비틀렸다.

 “미안하지만, 난 혼자가 아니야.”

 쿵. 굉음과 함께 하늘에서 떨어지듯 착지한 백은의 기사. 빈틈없이 갑옷으로 온몸을 감싼 하얀 영웅은 말없이 오색으로 찬란히 빛나는 검을 날 향해 겨누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난 모른 척하며 입을 열었다.

 - 그렇군. ‘선대’ 마왕의 심장을 꿰뚫은 초차원 성검…… 인류의 마지막이자 두 번째 희망인 반신demigod의 영웅이 함께라면 내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겠어.

 루치아가 인류의 정신적 지주라면, 이 백은의 기사는 물리적 지주.
 성검에게 선택 받은 영웅은 인류군이 무참히 패주하는 상황에서도 단신으로 마물들의 공세에 맞서 몇몇 도시들을 지켜냈다. 그 모습에서 다시금 희망을 찾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루치아와 함께 그 기사를 칭송하기 시작했다.

 「…….」

 말없이 노려보는 시선. 투구로 얼굴은 가려도 살기까지 감출 수는 없다.
 루치아는 그 무구한 살의의 대변자가 되어 입을 열었다.

 “경솔했군. 이런 자리에 어떤 대비도 없이 혼자 나오다니. 마왕이 죽은 지금, 구심점인 너마저 사라지면 마왕군은 더 이상 세력을 유지할 수 없다. 급속도로 붕괴하고 말테지. 너희 마물들은 ‘왕’없이는 절대 뭉치지 못하는 존재. 아무리 각 개체가 강하다 해도, 그것만으로 ‘인류’는 이길 수 없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정확한 지적. 지상을 지배하고 있던 인류문명을 붕괴직전까지 몰아넣은 이 악마 놈들이 얼마나 구제불능의 멍청이들인지는, 어떤 인간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애초에 내 몸에 흐르는 피의 절반은 그들과 같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난 입장상 그 말을 가만히 수긍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 글쎄, 그대라는 지도자가 없어지면 무너져 내리는 건 인간도 똑같지 않나? 오지 않을 구원자를 고대하며 발걸음을 멈추고, 누군가 이끌어주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야말로 인간들의 종족적 특성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물론 그 또한 인간의 나약한 일면이지. 하지만 사람에게는 그 나약함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강함이 있다. 설령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손에 죽는다 해도 결코 우리人間는 멈추지 않아. 다면성을 갖지 못하는 너희 악마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미래에 대한 신뢰로 강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사람을 향한 찬가를 노래하듯 선율과도 닮은 그녀Lucia의 목소리에 난 그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지금의 난, 싫어도 악마들을 대변해야만 하니까.

 - 시험해볼까. 정말 그대를 죽여도 인간들이 절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지를.

 눈을 가늘게 뜨고 힘을 아주 조금만 발산한다.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상대를 죽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럼에도 이 일대는 폭풍이라도 휘몰아친 것처럼 폐허의 잔해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역시 이 모습으로 힘을 조절하는 것은 어렵다.

 “이건, 교섭결렬의 의지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아니면 달리 해명할 말이 있나?”

 다행히 먼지가 걷힌 후 모습을 드러낸 루치아는 멀쩡했다. 백은의 기사가 성심력을 펼쳐 내 마력방출을 중화시킨 것이다. 난 내심 안도하며, 동시에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한층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과연 인간들의 영웅님. 이 정도는 문제없이 막아내는군. ‘마왕을 쓰러뜨릴 때 입은 상처’가 아직 남아 있다 해도.

 「……!」

 덜그럭. 짧지만 강렬한 동요. 하얀 기사는 아직 루치아만큼 능숙하게 마음을 다스리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뭐 잘 숨겼어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내게는 무의미한 일이었겠지만.
 난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인 하얀 영웅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 잠깐 기다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죽을 각오로 자살특공을 하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모든 일이든 서두르고 보는 건 짧은 시간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들의 좋지 않은 습성이지. 비록 그것이 때로는 신들조차 예상치 못한 위업을 달성하는 경우가 있다 해도. 뭐 좋다. 방금 질문에 대답해주마. 난 교섭결렬의 뜻으로 내 힘을 너희에게 보인 게 아니야. 단지 말 그대로 너희들을 시험해 봤을 뿐이다. 너희들이 날 ‘교섭이 가능한 상대’인지 가늠해 보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처럼.

 루치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Lucia는 손을 들어 기사의 성검을 내리게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좀 더 생각을 들려주면 고맙겠군.”

 이제부터가 진짜 승부. 난 미리 준비된 대답을 꺼냈다.

 - 그대의 말마따나 스스로의 힘에 취해 쉽게 통솔되지 않는 우리惡魔는, ‘왕’없이 오래 결속을 유지할 수 없다. 내가 분발해봤자 선왕처럼 무리를 규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지. 내게는 그만한 지도력charisma이 없으니까. 분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들이 다시 유리해질 것이라는 그대의 예측은 크게 빗나가지 않을 거다. 하지만…….

 난 루치아의 맑은 녹색 눈동자를 위안 삼아 내키지 않은 말을 이었다.

 - 고작 우두머리를 잃는 정도로 한번 결집한 세력이 하루아침에 쉽게 무너지지도 않지. 설령 너희가 이 자리에서 날 죽이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마왕군이 당장 해체되는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 오히려 일시적으로나마 마왕군 전체가 고무될 가능성마저 있다. ‘비겁한 수’에 선왕의 후임자가 암살당했다고 말이야. 우리 쪽에도 그 정도 기교를 부릴 책사 한둘쯤은 있으니까. 그런 상황이라면…….

 고맙게도 다음 말은 루치아가 대신 받아 이어주었다.

 “싸움은 한층 격렬해지는 동시에 교착상태로 접어들겠지. 마왕군이 당장 붕괴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로, 쇠락할 대로 쇠락한 인류 또한 당장 강성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거기에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용왕들이 개입이라도 하는 날에는…….”

 - 양쪽 모두 극심한 피해를 입을 테지. 운 나쁘면 사이좋게 공멸일 테고, 운 좋게 어느 한쪽이 이긴다 해도 상처뿐인 승리 그 이상 이하도 아닐 터. 더 이상 우리가 전쟁을 벌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내 결론을 들은 루치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 생각과 비슷하군. 다행이야. 그쪽이 마왕과 달리 말이 통하는 상대라서. 죽은 마왕과는…… 일전에 딱 한번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도저히 교섭이 가능한 상대가 아니었다. 혹시나 비슷한 성향일까 걱정했지만 그저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이군.”

 음. 이해한다. 확실히 어떤 대단한 화술을 지닌 인간이라도 그 여자와 무언가 교섭을 한다는 건 불가능했으리라. 기본적으로 그 여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밖에 하지 않는다. 예외적으로는 자기가 좋아하는 얘기밖에 하지 않고.

 “하지만, 과연 우리에게 교섭이 가능할까. 서로에게 타협의 여지가 있을까. 인류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희생을 치렀다. 마왕군의 공세에 멸망한 나라만 열셋, 파괴된 도시는 수천을 헤아린다.”

 웃음기도 잠시. 루치아의 얼굴에 다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여기엔 나도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너희 인간들이 도시를 세우기 위해 불태운 숲은 본래 누구의 것이었나? 너희들이 악마나 마물 등으로 뭉뚱그려 부르는 숲의 주민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이번 마왕군과의 전쟁에서 죽은 이들은, 공식적으로 사망이 확인된 자만 1억 명에 가깝다. 너희들은 너무 죽였어. 전쟁터의 병사들뿐만 아니라 민간인, 병자, 갓난아기까지 가리지 않고 전부 학살했지.”

 - 인간들이 지상의 패권을 쥔 이후 희생시킨 다른 존재들은 셈하지 않나? 보기에 멋지다고, 연금술에 도움이 된다고, 심지어는 맛있다고…… 너희들은 탐욕스럽게 인간 이외의 다른 종족들을 죽이고 범하고 사육하고 멸종시켰지. 이제는 지상에 단 한 마리밖에 남지 않은 일각수의 비극은, 결코 인간들의 유일한 죄악이 아니다.

 교차하는 시선과 시선. 충돌하는 주장과 주장. 이대로는 아무리 말을 나누고 또 나누어도 양자 간의 간극을 좁힐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입을 열면 열수록 앙금은 커지고 골은 깊어져만 갈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Lucia와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 그대와 나는, 우리와 너희는, 결코 타협할 수 없다.

 “우리가 서로 손을 잡기에는, 그 사이에 너무나도 많은 죽음이 가로막고 있다.”

 - 하지만 타협이란, 바로 타협할 수 없는 걸 타협하기 위해 하는 것이지.

 언젠가 들은 문장가의 말을 입에 담은 순간,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럼 협상을 시작해볼까, 마왕의 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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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08.24 14:09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와이, 와아아~ 안단테님의 신작이다요! >_<


    흡사 은세계의 은월을 떠올리게끔 하는 머나먼 미래의 포스트아포칼립스적 풍광에, 마왕용사의 첫화에서 느낄 수 있었던 산뜻함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는 것 같아 다시금 시선이 가네요.

    수많은 부조리와 참상의 연쇄 끝에 비로소 도달하게 된 화합으로의 길,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너무나도 많은 피해 앞에 벌어지고 곪아버린 서로의 물리적 상처와 심리적 거리감이 크나큰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것은 참 서글픈 일이 아닐까 해요.

    수많은 서브컬쳐계 창작물의 이야기 속 세력간의 대립이 그러했고, 현실의 한반도를 포함한 분단국가들의 현실이 그러하듯이...


    ... 하지만 중요한건 이게 아니라(?) 신작의 향후 전개가 기대된다는겁니다 +_+ 므흐흐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8.25 18:04 신고 address edit/delete

      이번에도 눈을 두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마왕과 용사가 실은 협력관계에 있다는 유명한 장르의 힘을 빌린다면 부족함이 많은 제 글에도 조금은 재미있는 요소가 생기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쓰고 보니 의외로 크게 변한 게 없는 것 같아 살짝 좌절하기도 했네요^^;; 그래도 다른 실력 있는 분들이 앞서 다져 놓은 장르의 힘을 믿고 시간 날 때마다 천천히 이야기를 진행시킬 생각이에요.


      말씀처럼 치열하게 대립하던 두 세력이 서로 화해하고 협력의 길에 도달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고, 현실에서는 오히려 그 시도가 좌절되는 경우가 압도적이지요.

      사실 이번 소설은 코미디(...)를 예정하고 있어 그런 암울하고 복잡한 배경에 대해 자세하게 다룰 예정은 없지만, 그래도 이른바 세상의 정의나 평화를 추구하는 데 있어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작중에서 조금이라도 표현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면, 제가 쓰는 글에도 얼마간 의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럼 다시 한번 읽어주신 데 감사의 말씀드리며, 좋은 하루되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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