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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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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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선택의 순간 (前)


 칼날 같은 눈보라가 거세게 휘몰아치는 대륙의 최북단.
 자연의 눈먼 살의가 인간의 침입을 허용치 않는 이 만년설의 땅에는 일견 생명의 숨결이나 문명의 산물 따위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이 보인다. 하지만 날씨가 맑은 날 산맥들 사이를 잘 응시해 보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웅장한 겨울궁전이 풍경과 동화되듯 조용히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얼음궁전에 살고 있는 이는 단 하나. 이제는 세상에 단 한 마리밖에 남아 있지 않은 일각수Unicorn의 마지막 왕녀 트리슈아 라 오벨리오 베르나이드였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과 에메랄드빛을 띠고 있는 이마의 보석 같은 뿔.
 인간형태를 하고 있을 때의 그녀들Unicorn에게는, 어딘가 흉측하고 이질적인 구석이 있는 수인獸人들과는 다르게 마치 신화 속의 여신과 같은 고귀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지금의 그녀에게는 주변 분위기를 한없이 가라앉게 만드는 침울한 기색 또한 같이 풍기고 있었다.

 그녀가 상복처럼 걸치고 있는 검은 드레스. 이는 실제로 멸종당한 자신의 종족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입고 있는 것이었다. 또한 그녀는 눈가를 항상 검은 천으로 감아 숨기고 있었는데, 이는 인간들이 점령한 더러운 세상을 보고 싶지 않아 스스로 눈을 뽑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클립스 님…….”

 조용히 선대 마왕의 이름을 입에 담는 유니콘의 공주. 그녀에게 있어 증오스러운 인간들의 세상을 철저하게 유린한 선대 마왕은 신앙에도 가까운 숭배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영웅의 성검 센트럴 도그마에 쓰러졌다고 알려진 선왕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끔찍한 사실에 트리슈아는 한때 멀어버린 눈에서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 절망했었다.

 “하지만, 그분은 희망을 남기고 가셨어…….”

 이클립스의 뒤를 이은 마왕의 딸. 선왕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딸 역시 악마들의 정점에 서 인간세상을 부수기에 충분한 자격과 힘을 갖추고 있다. 비록 지금은 용종이라는 변수 때문에 잠시 싸움을 멈추고 있지만, 때가 되면 그분의 딸이 다시 분연히 일어나 더러운 인간들을 멸절시킬 것이라고 트리슈아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허락도 없이 남의 침실에 멋대로 숨어들다니, 여전히 불쾌한 녀석이군.”

 일순 온화했던 트리슈아의 어조가 날카로워졌다. 동시에 그녀의 이마에서 뿔이 빛나자 얼음궁전에 맺혀 있던 굵직하고 뾰족한 고드름 중 하나가 뚝 떨어져 벽 한쪽을 향해 고속으로 질주했다. 하지만 그 얼음말뚝은 벽에 부딪치는 일 없이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 우뚝 멈춰 섰다.

 “어머, 무서워라.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스르르. 허공에서 큼직한 얼음의 말뚝을 붙잡은 채 모습을 드러낸 금발의 미녀.
 트리슈아와는 대조적으로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성의 등에는 옷차림과 색을 맞추듯 백조를 닮은 두 장의 새하얀 날개가 돋아 있었다. 또한 금발의 머리에도 작은 날개가 돋아 있었는데, 그것은 앙증맞은 장신구처럼 여성의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하였다.

 인간들의 경전에서 전하는 천사를 떠올릴 만큼 청초하고 신비로운 인상. 하지만 이 여성은 엄연히 악마 일족 중의 하나로서,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인간의 정기를 주식으로 삼는 몽마Succubus였다.

 그녀의 이름은 루시 루시드 드림. 본명이 아닌 가명이었지만, 악마들 중에서 딱히 그녀의 진짜 이름을 궁금해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보다 그녀는 선대 마왕의 오랜 친구이자 자칭 비서관, 그리고 현 마왕군의 참모역할을 맡고 있는 서큐버스로 그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네놈이 내 성에 침입한 것만큼 기분 나쁜 일이 또 있을까. 네놈의 가식적인 옷차림에는 구역질이 난다.”

 트리슈아는 냉랭하게 상대를 매도했지만, 루시는 조금도 웃는 얼굴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제 자리에서 빙글 한 바퀴를 돌아 드레스 자락을 우아하게 춤추게 하며 말했다.

 “「악마는 모두 아름답다. 그래야 인간을 유혹할 수 있을 테니까.」 200년 전쯤 인간들의 어떤 신학자가 남긴 말이야.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악마란 실재하는 우리가 아니라 그네들 종교의 악역을 말하는 거지만, 최소한 우리 서큐버스에게는 정확히 해당돼. 단순히 천박하고 음란하기만 한 모습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쉽게 끌 수 없거든. 물론 이 드레스 속에는 매우 강렬한 자극이 숨어 있지만.”

 “눈이 썩겠군.”

 요염하게 미소 지으며 한쪽 눈을 깜박이는 서큐버스에게서, 유니콘의 공주는 천에 가린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루시는 개의치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시력을 버려도 다 보이는 모양이네. 과연 일각수의 초감각. 내 차림새는 물론 이공간은신까지 단번에 알아챈 걸 보면 오히려 눈이 멀기 전보다 감도가 더 좋아진 거 아니야?”

 세상만물의 파장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일각수의 뿔.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와 같은 보석을 닮은 그녀들Unicorn의 뿔은, 단지 장식품으로 보기에만 좋은 게 아니라 연금술의 소재나 만병을 통치하는 약재료, 일시적으로 신체를 강화하는 고급각성제의 원료로도 효능이 높았다. 그 결과 뿔의 가치를 탐낸 인간들의 무분별한 사냥으로 일각수들은 이 지상에 단 한 마리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
 루시의 말에서 아픈 과거를 떠올린 트리슈아는 더욱 거칠게 입을 열었다.

 “네놈이 쥐새끼처럼 침소에 숨어들었다는 건 뿔로 감지할 것도 없이 알 수 있었다. 그 시궁창 같이 역한 인간들의 냄새가 진동을 했으니까.”

 마지막 남은 일각수의 왕녀가 내뱉은 말은 절반 정도 사실이었다. 인간들을 증오하는 그녀는 그 냄새에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질색했는데, 수시로 인간과 정을 통하는 서큐버스에게서 어떤 냄새가 풍길지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하지만 루시는 서늘하게 웃으며 트리슈아가 숨긴 나머지 절반의 진실을 말했다.

 “한 가지 물어도 될까? 나는 그렇다 쳐도 넌 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그렇게 인간이 싫다면 평소에도 본모습으로 돌아가 있어야 하지 않아? 혹시 인간형태가 생활하기 편해서? 그럼 네 분노라는 건 고작 생활의 편의성에 접어둘 수 있을 만큼 하찮은 거였어?”

 “어디서 그런……! 날 모욕하지 마! 이 모습은 인간들의 전유물이 아니야! 원류를 따지자면 용종들의……!”

 “흐응, 그렇게 나오시겠다. 하지만 남에게 묻어온 냄새조차 역겨울 정도로 인간들이 싫은 건 사실이잖아? 그런데도 인간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인간들의 옷을 입고 지내는 건 모순이라 생각하는데.”

 “그건…….”

 말을 흐리는 트리슈아. 루시는 가차 없이 추궁을 계속했다.

 “내게서 풍기는 냄새가 역겨워? 그럴 리가! 본래 너희 일각수들은 순결한 동정녀의 영혼, 정확히는 어린 소녀들의 순수한 사념에서 큰 매력을 느끼는 성정을 가지고 있지. 내가 인간 여자들과 정을 통하며 배를 채우고 기쁨을 얻는 것만큼이나 순수한 소녀의 마음에서 평온을 얻는 것이 너희들Unicorn의 당연한 본능이야. 설마 고작 100년 전만 해도 나랑 같이 소녀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일을 잊었다고 하진 않겠지? 근데, 바로 어젯밤에도 세상모르는 어린 꽃 한 송이를 꺾고 온 내게서 역한 냄새를 느낀다고? 반대겠지! 넌 오히려…….”

 루시는 끝까지 말을 마칠 수가 없었다. 거대한 얼음기둥이 떠올라 그녀가 있던 벽 한쪽을 아예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릴 만큼 강하게 충돌했기 때문이다.

 “왜? 정곡을 찔렸어?”

 물론 루시는 무사했다. 순백의 서큐버스는 어느새 트리슈아의 뒤에 서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닥치고 사라져.”

 트리슈아는 힘의 행사도 포기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저 상대에게 여기서 나가라고만 명령조의 말을 무력하게 던졌다. 일각수의 왕족이 가진 환수로서의 잠재력을 생각하면 힘으로 서큐버스 한 마리쯤 강제로 내쫓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지만, 그녀에게는 더 이상 그럴 의욕이 남아 있지 않았다.
 루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시해라. 뭐 됐어. 나도 재미없는 상대에겐 흥미 없으니까. 그 아이한테나 가봐야지.”

 “…그 아이? 설마 그분의 따님을 말하는 거냐?”

 맥락상 대상을 알 수 없는 모호한 표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트리슈아는 단번에 루시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아차렸다.

 “뿔의 감지능력은 그런 데서도 발휘되는 거야? 굉장하네. 맞아. 난 아가씨의 참모니까 수시로 찾아가 뵙고 있어. 왜 부러워?”

 루시의 가벼운 도발에 트리슈아는 이를 갈았다.

 “어째서 너 같이 천박한 게 선왕뿐만 아니라 그분의 따님에게까지……!”

 “어머, 정말 모르겠어? 그건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야.”

 전에 없이 진지한 루시의 목소리. 여전히 몽마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지만 그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트리슈아가 입을 닫은 채 대답이 없자 루시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인간에게 절망해 떨고 있는 동안 난 줄곧 마왕님과 함께 전장을 달려 왔어. 네가 스스로 눈을 뽑아 세상을 거절하고 얼음동굴 속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난 줄곧 인간들을 탐하고 즐기고 죽이고 먹어치우며 그들을 배워왔고. 덕분에 여전히 난 인간들의 권위자야. 우리惡魔들 중 누구보다 인간들의 환심을 사 유혹하고 이용할 줄 알고, 반대로 인간들의 적의와 교활한 잔꾀를 알아채 함정을 피하는 법도 알고 있지.”

 “…….”

 “하지만 넌 어때? 네가 가진 뿔의 초감각과 강대한 마력은 마왕군에, 아니 마왕님께 어떤 도움이 되었지? 그리고 네가 가진 100년 전 인간사회의 지식은 현재에도 통용될 수 있을까? 또 서로 무리를 이루어 싸움을 벌일 때 힘을 쓰는 요령과 기본적인 전략들의 운용방법은? 이런 것들만 봐도 왜 네가 아니라 내가 마왕님께 신뢰를 얻고 있는지는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

 트리슈아는 시선을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시는 살짝 고개를 저은 뒤 허공에서 하얀 양산을 꺼내들며 다시 말했다.

 “옛정을 생각해 마지막으로 충고할게. 도망치는 것과 포기하는 건 전혀 달라. 언뜻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설탕과 소금만큼 다르지.”

 말을 마친 루시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양산을 활짝 펼쳤다. 순간 그녀는 수많은 꽃잎을 흩날리며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화창하고 맑은 날씨.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깊고 푸른 하늘.
 근 100년 동안 세상은 이상기후의 영향인지 여름과 겨울만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덕분에 그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선선한 봄과 가을은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산들바람만큼이나 짧아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슬퍼했다. 특히 가혹한 여름의 더위를 견디고 혹독한 겨울의 추위에 대비해야 하는 찰나의 가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야속함을 느꼈다. 동시에 그 가을의 존재가 전보다도 한층 귀하고 고맙게 여겨졌다. 그런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그 계절에 진한 애정과 아쉬움을 담아 새로운 수식을 붙여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황금의 가을’이라고.

 “이런 날 심부름이나 해야 하다니…….”

 절로 나오는 불평. 이처럼 공기만 마셔도 기분 좋은 날에는 햇볕 잘 드는 장소에서 한가롭게 책을 읽는 게 제일이다. 그럼에도 사무용품을 구입하기 위해 이리저리 발품을 팔며 소란스러운 거리를 돌아다녀야 하다니. 딱히 몸을 움직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게는 고역이나 다름없다.

 아니, 이렇게 좋은 날씨에 한해서라면 바깥에 나오는 것도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다. 문제는 역시 사람. 같이 나온 상대가 누구이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것이다.
 마침 서서히 물들어가는 단풍을 구경할 여유조차 주지 않고 갈 길을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꾸물거리는 거야? 빨리 움직여. 외출허가시간 내에 돌아가려면 좀 더 서둘러야 해.”

 가늘고 긴 백금색 머리카락을 보기 좋게 묶고 있는 붉은 리본. 새하얀 피부에 살짝 위로 치켜 뜬 눈매가 어딘지 여우같은 인상을 주는 얼굴. 정식으로 궁정예절을 교육을 받은 것이 분명한 품위 있는 몸동작과 고급스러운 귀걸이…….

 그녀의 이름은 세실리아 F. 하이젠베르크. 구귀족 가문의 영애로서 ‘현재의’ 나보다 3년 먼저 이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는 선임 사서이기도 하다. 물론 실제로는 내 쪽이 100년 정도 까마득한 선배이긴 했지만.

 “네네, 알겠어요.”

 난 대충 손을 저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새로 신분을 세탁한 이번의 나는 다소 무기력한 문제아를 연기하고 있었다. 이는 본래 내 성격이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지난번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안배이기도 했다. 다시는 그 바쁜 나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후배였던 선배의 뒤를 쫓으며 나는 속으로 불평을 토했다.

 ‘하다못해 네리랑 나왔다면 산책하는 기분이라도 들었을 텐데. 얘는 너무 딱딱해서 답답해.’

 이 세실리아라는 아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고지식한 귀족 아가씨’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인류연합에서는 공식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었다. 몇몇 소왕국들도 대부분 입헌군주정으로 전환했으며 기존의 귀족들은 법적으로 평민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동등한’ 신분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그동안 쌓아놓은 자산과 인맥으로 사업을 벌여 크게 성공해 다수의 기업체를 소유한 이른바 ‘자본귀족’으로서 여전히 과거의 지위와 영광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그런 재벌가의 여식 중 한 사람으로서 어릴 적부터 고급교육을 받아왔고, 이른바 귀족으로서의 의무noblesse oblige도 철저하게 몸에 익혀 왔다. 덕분에 다른 재벌가의 주니어들처럼 오만하게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예절과 규율을 깐깐하게 따지는 재미없는 성격이 된 것이다. 단적인 예로 네리와 함께 나왔다면 가벼운 간식거리라도 사먹을 수 있었을 테지만, 이 아가씨에게 그런 제안을 하면 당장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지금 우리는 업무시간 중이야. 그런 사적인 용도로 낭비할 시간은 없어. 더욱이 관장님의 명으로 공금으로 사무용품을 구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오해를 받을 만한 일은 더욱 해선 안 되지.”

 이것이 바로 도서관장이 세실리아에게 물품구입을 맡긴 이유.
 헤미스피어 도서관은 단순한 문화시설이 아니라 중요 문화재에 속하는 건축물로서 국가에서 상당한 지원금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물론 전쟁이 터진 뒤에는 그 액수도 꽤 줄었고, 심지어 직원들 급료조차 현물로 지급하는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지만, 아직까지 지원금 자체가 끊어지지는 않았다.

 설령 액수가 적다고 해도 명색이 국가에서 나오는 지원금인 만큼 그것들은 전부 질이 좋은 금화나 은화이다. 이것을 고지식하게 시장에서 그대로 거래하지 않고 환전소나 암시장에서 장난을 친다면 몇 배 이상으로 불리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공무원이 공금으로 그런 불법거래를 하는 것은 당연히 위법사항이지만, 요즘 같은 어려운 시절에도 그 유혹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 계신 고지식한 아가씨처럼 재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 거리에 나가 돈을 쓰기에는 제격인 것이다.

 반면 내가 세실리아의 동행으로 선정된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 쉽게 말해 난 그녀의 경호원인 셈이다. 이곳 도서관장은 내 정체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사실들을 알 길 없는 세실리아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본을 잘못 보인 걸까. 넌 정말 3년이 지나도록 변함이 없네. 하아, 카타리나 님이 계셨더라면…….”

 “네? 카타…… 아, 3년 전에 사서직을 그만두었다는 그 선배 말인가요?”

 “맞아. 카타리나 님은 내가 아는 한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완벽한 여성이셨어. 정말 유능하고 현명하고, 아름다우셨지. 그분이 계셨더라면 너도 분명 감화돼 제대로 일하게 되었을 텐데.”

 열띤 어조로 옛 선배에 대해 이야기하는 세실리아를 향해 난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카타리나 님’이라는 건 다름 아닌 지난번의 나였기 때문이다.

 ‘정말 미친 짓이었지.’

 한때 재미있게 읽었던 활극소설의 만능 주인공에게 영향이라도 받았던 걸까. 지난번 이름과 직급을 바꿀 때의 나는 인식장애뿐만 아니라 변신마법까지 사용해 스스로를 키 크고 멋진 여성으로 꾸몄었다. 단순히 외견뿐만 아니라 100년 동안 쌓인 사서로서의 지식과 마법의 힘까지 슬쩍 곁들여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했던 것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어.’

 모두에게 칭찬 받고 동경 받는 생활. 도서관의 직원들뿐만 아니라 거리의 사람들마저 내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고, 그중에는 대담하게 연심을 고백해오는 처녀들도 있었다. 이 정도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지 몰랐던 나는 한껏 들떠 한층 ‘완벽한 카타리나 씨’를 연기했다.

 ‘적당히 했어야 했는데.’

 의지가 의존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 관장이 따로 불러 우려를 표할 만큼 도서관 사람들은 모든 일을 일단 내게 물어보고 진행하게 되었으며, 사생활이 없어질 정도로 과도하게 달라붙으며 집착을 표하는 아이들도 생겨났다.

 나는 더 이상 그 숨 막히는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해서 어느 시골학교의 교사와 사랑에 빠져 그녀의 고향으로 결혼하러 떠난다는 거짓말로 ‘카타리나’를 떠나보내고는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신입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대체 어떤 암여우가 카타리나 님을 홀린 건지……! 전쟁만 터지지 않았다면 뒷조사를 했을 텐데……!”

 드물게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리는 세실리아. 당시 이 아이가 이 정도로 나를, 정확히는 카타리나를 좋아하고 있는 줄은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날 의지해온다거나 그밖에 다른 사적인 감정을 드러낸다거나 하는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강철 같은 자제력으로 참고 있었던 모양이다.
 난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뭐 그래도 전쟁은 이제 끝났죠. 아직은 별 실감이 나지 않지만 앞으론 점점 좋아지지 않을까요?”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거리 또한 전에 비해 활기가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지긋지긋한 더위가 끝나고 황금의 계절이 시작된 덕분도 있겠지만, 역시 당분간 마물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안심을 가져다주고 있는 게 아닐까. 적어도 난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야 내가 한 일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뜻이 될 테니.

 “과연 그럴까. 끝난 건 아무것도 없어. 이건 종전이 아닌 휴전에 불과하니까. 게다가 난 이 가짜 평화가 얼마나 갈지 의문이야.”

 가시 돋친 세실리아의 말에 내 눈썹이 꿈틀했다.

 “가짜, 평화요……?”

 “응. 물론 용왕들의 공중요새까지 모습을 드러낸 이상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극악무도한 마왕군과 평화협정을 맺는 일은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어.”

 “…놈들이 언제 약속을 깨고 뒤를 칠지 모르니까?”

 “그것도 있지만, 오히려 협정이 잘 지켜져도 문제야. 만약, 정말 만의 하나 이대로 싸움이 벌어지지 않고 평화가 오래 지속된다고 생각해 봐. 그럼 지금까지 죽은 사람들은 뭐가 되는 거야?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상처는 어디서 보상 받아야 하지? 마왕군과의 전쟁이 시작된 이래 공식적으로 사망이 확인된 사람만 1억 명에 가깝다고 하지. 생존자들 중에는 가족은 물론 고향, 심지어 나라까지 통째로 잃은 사람들도 적지 않아. 그들에게는 모두 자신의 원수에게 복수할 권리와 의무가 있어. 그럼에도 이 평화가 계속된다면, 그들의 마음은 대체 어디서 위로 받아야 하는 걸까…….”

 내게 대답을 요구한다기보다는 거의 감정의 토로에 가까운 세실리아의 말.
 확실히 분노를 머금은 그녀의 힐난에 가까운 물음은 지당했다. 서로 악수하며 화해한다고 깨끗하게 갈등이 해소되는 것은 동화책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환상이다. 개인 간의 싸움에도 화해의 이면에는 앙금이 쌓여 있는 경우가 허다한데, 국가 간 종족 간 전쟁에서 분노와 증오와 슬픔으로 뒤엉킨 질척질척한 감정들의 총량은 오죽하랴. 내가 루치아와 함께 추구하는 평화에 그 상처 입은 마음들을 짓밟는 측면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 마음들을 다 받아줄 수는 없어.’

 폐허에서 루치아에게도 한 말이지만, 마왕군에도 인간들의 도시에 밀려나 삶의 터전을 잃고 종족마저 멸살당해 ‘복수’를 위해 싸우는 이들은 다수 존재한다. 선대 마왕이 마물들에게 그토록 강력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여자가 가진 카리스마뿐만 아니라 그 전쟁 자체가 인간들에게 원한을 가진 마물들의 울분을 충분히 풀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여자를 필두로 단지 살육이나 사투가 좋아 참가한 구제불능의 멍청이들 또한 적지 않았지만.

 ‘뭐 애초에 칭찬 받으려고 하는 일도 아니니까.’

 난 파멸을 부르는 전쟁보다 나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생물에게 있어 생존이 최우선조건이듯이 일단 모두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일은 피하고 봐야하지 않을까. 난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말을 가볍게 내뱉는 사람을 경멸한다.
 그래서일까. 세실리아의 혼잣말이 내 귀에 무척 거슬렸던 것은.

 “나도 곧 19세……. 휴전협정만 맺어지지 않았다면, 창기병을 타고 전장으로 나가 의무를 다할 수 있었을 텐데…….”

 도서관에서는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 귀족 아가씨는 사실 전쟁에서 활약하는 기사라는 허상에 과도한 낭만을 품고 있었다. 지금도 입으로는 의무 운운했지만, 본심은 백은의 영웅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고 있는 자신을 망상한 것이다.
 도저히 불쾌한 기분을 참을 수 없었던 나는 한 마디를 툭 내뱉고 말았다.

 “3초.”

 세실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갑자기 무슨 말이야?”

 “3초 만에 살 거 사고 빨리 돌아가자고요.”

 물론 네가 전장에 나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이 3초라는 뜻이다, 이 철부지 아가씨야!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라 이건 냉혹한 사실이다. 인간과 달리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마물들은 완전히 죽지 않는 이상 다음 전장에 말끔히 회복된 상태로 복귀할 수가 있다. 덕분에 현재 마왕군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수인이나 마수들은 여러 차례 끔찍한 사투를 거치고 살아남은 정예 중의 정예들이다. 이들은 선대 마왕을 제하더라도 인류에게 큰 위협이 되는 막강한 존재들이었는데, 만약 인류연합군이 신형창기병의 보급과 공중전함의 개발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내가 개입하기 훨씬 전에 이미 궤멸적인 피해를 강요받았으리라.

 “음…….”

 세실리아는 내 부자연스러운 얼버무림에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역시 속마음까지는 간파하지 못했는지 우리와 주로 거래하는 도매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어두운 골목에서 무언가 툭 튀어나와 세실리아의 허리에 매달렸다.

 “꺅!? 뭐, 뭐야!? 어, 어린애……? 아니, 이건…….”

 난데없이 세실리아의 허리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것은, 녹색 눈동자에 녹색 머리카락 그리고 등에 반투명하고 옅은 잠자리 같은 날개가 돋아 있는 자그마한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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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10.22 00:2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차회 연재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_<)

    역시 양측의 인적 역학관계들이 복잡다단하게 얽혀있었군요... llorz

    자아 이 것으로 주인공도 루치아도 모두 이마의 주름살 증식 확정! (끌려간다)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10.22 22:48 신고 address edit/delete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세계를 양분하는 큰 싸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니 간단하게 넘기기 힘든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제 역량으로 모든 것을 잘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주인공들의 분투기를 될 수 있는 한 섬세하게 그려내고 싶은 마음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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