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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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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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미로의 입구


 드넓은 평원의 한편을 살벌하게 메우고 있는 갑주의 대열.
 인류연합군의 주축을 이루는 짙푸른 창기병들의 병장기가 석양빛에 반사돼 번쩍거리며, 곳곳에 설치된 둔중한 잿빛 포탑들이 그 거대한 구경을 뽐내며 군단의 진지를 지키고 있다.

 그 반대편 평원에는 지평선에 닿을 만큼 우글거리는 검붉은 이형의 무리들.
 언뜻 사람과 닮았으면서도 기괴한 짐승의 형상을 일부 몸에 품고 있는 수인獸人들부터 집 한 채는 그대로 집어삼키고도 남을 거대한 흰 뱀, 벼락을 부르는 신성한 뿔을 가진 흑사자, 전신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사조 등 온갖 마수와 환수들이 마왕군의 진영을 가득 메우고 있다.

 「…….」

 꽃잎을 연상시키는 유려한 투구와 갑주로 온몸을 감싼 백은의 영웅. 인류군의 최선두에 서 있는 그녀는 찬란히 빛나는 성검 센트럴 도그마를 양손에 쥔 채 눈앞의 마물들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루치아의 의지를 힘으로 옮기는 하얀 기사는, 비록 말수는 적었지만 그 압도적인 무력武力으로 전장의 병사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었다.

 「마왕의 딸…….」

 영웅의 시선은 마물들 중에서도 특히 가장 앞으로 나와 있는 새로운 마왕에게 가 있었다.
 피처럼 붉은 산양의 뿔, 칠흑 같이 어둡고 무거운 긴 흑발, 사상의 본질을 꿰뚫는 황금색 눈동자, 통상공간에 가시화 되어 있는 박쥐를 닮은 4장의 악마 날개, 심층공간에 숨어 있는 7장의 그림자 날개…….

 신들조차 능가할 것만 같은 절대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던 선대 마왕에 비하면 다소 위압감이 떨어지는 면은 있었지만, 그것도 백은의 영웅과 같은 동등한 수준의 실력자나 루치아와 같이 초월적인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나 식별이 가능한 차이. 달이나 태양이나 지상의 한갓 인간들에게는 똑같이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천체이듯이, 마왕의 딸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선대 마왕 못지않게 절망적인 공포 그 자체였다.
 새로이 등극한 마물들의 왕이 입을 열었다.

 - 빛에 눈이 멀어 어둠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이여. 죄의 늪에 빠져 그 진흙으로 함부로 세상을 더럽히는 그대, 비천한 인간들이여. 아직도 스스로의 아둔함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의 섭리에 그 녹슨 칼날을 겨누는가!

 강대한 마력을 품고 평원에 울려 퍼지는 마왕의 목소리. 그것만으로도 마왕군의 마물들은 온몸에 활력이 샘솟는 반면, 인간병사들은 그 기세에 눌려 주춤거리고 움츠러들었다. 그나마 신형창기병Gigantic-Frame이 갖춘 갑주의 보호기능이나, 마도사들이 미리 펼쳐놓은 항마결계 덕분에 이 정도 선에 끝날 수 있었던 것이지, 아무런 대비책도 없었다면 방금 고함소리만으로도 마음이 약한 이들은 제정신을 잃고 발광하고 말았을 것이다.
 마왕의 말은 계속됐다.

 - 난 섭리의 대행자, 위대한 선왕 이클립스의 후계자. 그대들이 지금이라도 뉘우치고 이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뒤를 쫓지는 않겠다. 세계를 독점하겠다는 오만을 버리고 세상 어느 한구석의 그림자를 벗 삼아 다시는 바깥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다면 종의 멸절만은 피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겠다. 하지만 그대들이 우둔하게도 내 손길을 뿌리친다면, 그대들이 저지른 온갖 죄악을 다름 아닌 그대들의 피로 씻어내야 할 것이다!

 쿵. 쿵. 쿵. 마왕의 외침이 재차 울려 퍼지자 전장의 창기병들 중 일부가 무릎을 꿇었다. 항마력 조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왕의 마력이 그 한계치를 돌파한 바람에 기력이 쇠한 몇몇 병사들이 기절하고 만 것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마물들은 마왕의 마력을 받아 점차 그 흉흉함을 더해가고 있었다.
 그때 마왕의 목소리에 대항하듯 낭랑한 보석의 음색이 인류군 병사들 사이에 울려 퍼졌다.

 「우리에게 밤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용종들의 부유석 처리기술을 훔쳐 개발된 13척의 공중전함. 그중 기함 임페리얼 제이드에 승선하고 있는 인류군 최고지도자인 루치아가 직접 확성장치를 통해 입을 열었다.

 「섭리는 따르는 것이 아니라 고르는 것. 우리人間는 언제나 길을 만들어 가고 싶은 곳을 향해 걸어왔다. 우리가 선택한 길은 밤이 없는 세상, 더는 어둠에 떨지 않아도 되는 백야의 세계. 어디서나 빛이 비춘다면 그림자는 생기지 않는다!」

 루치아가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 의지를 대변하는 하얀 기사가 성검을 휘둘렀다.
 세계에서 존재원형을 말살하는 법리의 일부가 구현된 파멸의 빛. 검에 직접 찔리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거기에서 파생된 참격은 수천수만 마리의 마물들을 단번에 일소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렬한 파괴력을 품고 있었다.

 - 어리석긴.

 그 빛을, 마왕은 한쪽 손을 휘두르는 것으로 간단히 튕겨내었다. 마왕의 손에 의해 궤도가 뒤틀린 성검의 참격은 평원 저편 산맥들의 산봉우리를 풀을 쳐내듯 말끔히 소멸시켰다.

 - 대답은 잘 들었다. 그것이 너희가 선택한 길이라면, 그 파멸의 대가도 감당해 보아라!

 적흑의 마왕과 백은의 영웅은 공중으로 떠올라 상공에서 치열하게 격돌했다.






 무너지는 마음.
 왜일까. 난 단지 봄날의 볼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햇살처럼 작은 행복을 바랐을 따름인데. 그런데도 어째서 세상은 자꾸만 멋대로 내 기대를 배신하는 걸까.

 내 바람이 그렇게도 몹쓸 것이었을까. 아무리 어지러운 세상이라도 정당한 대가를 꿈꾸며 하루라도 즐겁기를 바란 것이 그리도 과분한 것이었을까.
 하지만 언젠가 지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 세상이 널 배신한 게 아니야. 이미 네 기대가 세상을 배신하고 있었던 거지.

 기대란 객관적인 예측이 아닌 이기적인 소망.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니 기대란 언제나 현실의 조건을 무시한 채 보고 싶은 것만 보이게 하기 마련이다. 신랄하게 말하자면 어린애가 떼를 쓰는 심정에도 비슷한 것이다.
 지인의 냉정한 지적에는 십분 동의하는 바이지만, 역시 나는 눈앞의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 월급은, 현물지급…….”

 보리와 옥수수가 반 포대, 그리고 약간의 소금과 설탕. 이것이 바로 게시판의 공지사항에 적혀 있는, 금월 도서관 임직원들에게 주어지는 급료의 전부였다.

 …물론 안다. 알고 있다.
 패배 직전까지 몰린 마왕군과의 전쟁으로 나라의 재정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또 물자가 부족해진 탓에 물가가 있는 대로 치솟아 얼마 안 되는 급료보다는 차라리 소량이라도 현물이 훨씬 나을 수 있다는 것도.

 그럼에도 역시 급료로 돈 대신 곡식 꾸러미를 받는 것은 정신적으로 상당히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발군의 효과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처럼 지쳐있을 때는 더욱 더.

 “아하하하, 선배! 왜 이리 기운이 없어요? 잠 못 잤어요?”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부수고 들어오는 밝은 목소리. 동시에 몸이 붕 떠오르는 부유감이 느껴진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리. 난 고양이가 아니야. 당장 내려놓지 않으면 네 손가락이 창기병 다리처럼 변해도 책임 안 져.”

 군사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지만, 이번 인류군에 새로 보급된 신형창기병들은 모두 다리가 역관절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으음?”

 하지만 뒤에서 날 안아든 상대는 딱히 그쪽에 지식이 없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할뿐. 나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직접적으로 말했다.

 “손가락 꺾어버린다고.”

 “으헥!? 선배, 너무 폭력적이에요!”

 내 옆구리를 잡고 있는 손가락을 잡고 살짝 힘을 주자, 상대는 기겁을 하며 양손을 풀었다. 덕분에 공중에서 떨어진 나는 정말 고양이처럼 바닥에 착지하고 말았다.

 “와!”

 짝짝짝. 내 불쾌한 심정도 모르고 태평하게 박수를 치는 후배 녀석. 하지만 화를 내봤자 진만 빠지는 건 나다. 그녀 또한 선대 마왕과는 다른 의미로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네리 네리아우스.
 3년 전에 들어온 후임 사서로서, 양처럼 고불고불 말려 있는 머리카락과 풍만한 몸매, 그리고 낙천적인 성격이 특징인 여자애다. 전쟁이 터져 도서관의 인원충원이 중지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막내 자리에 있는, 한편으로는 불쌍한 녀석이었지만, 본인은 딱히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난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저리 가. 지금은 기분이 별로라서 놀아줄 마음의 여유가 없어.”

 “역시 수면부족이에요? 그럼 안 돼요! 잘 자야지 빨리 크죠. 아, 물론 선배는 그대로인 편이 귀엽긴 하지만…… 아무튼 졸려서 그런 거면 이리 오세요. 제가 무릎베개 해드릴게요!”

 네리는 왠지 모르게 살짝 흥분된 기색으로 내게 다가와 또 껴안으려고 했다. 그녀는 나보다 머리 두 개는 컸는데, 이는 딱히 후배 녀석의 신장이 평균을 넘어서는 게 아니라 내 키가 어린애 같은 것이었다. 마성을 드러냈을 때와 다르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내 덩치는 이상할 정도로 작았다.
 난 다가오는 네리의 얼굴을 밀어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졸린 거 아니니까 필요 없어!”

 정말 졸리지는 않다. 하지만 의외로 날카롭게 정곡을 찌른 부분은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요 한달 동안 연이어 전투를 치른 탓에 몸이 나른한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강행군이었어…….’

 일전 루치아와 가진 비밀회담에서 우리는 평화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양 집단의 우두머리가 멋대로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싸우지 않기로 결정한다고 해서 다른 구성원들 또한 그 합의에 순순히 따라준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전쟁처럼 서로 다른 종족 간에 원한이 쌓일 대로 쌓인 경우는 한층 일을 세심히 진행할 필요가 있다.

 ‘그걸 위한 평원에서의 대충돌…….’

 평화협정을 다른 이들에게도 납득시키기 위해 우리는 오히려 싸움을 크게 키웠다. 다섯 차례 연달아 양군의 무력을 총집결시켜 평원에서 대회전大會戰을 벌인 것이다. 물론 양측 병사들은 어디까지나 들러리. 무고한 희생을 줄이기 위해 양군의 무력을 대표하는 신마왕인 나와 인류군의 하얀 기사가 주로 일대일 대결을 펼치는 형식으로 싸움을 유도해 갔다.

 ‘뭐, 그렇다고 희생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아무리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도 휘말리는 자들은 반드시 나온다. 전장의 지형을 변형시킬 정도의 충돌이었으니 어쩔 수 없기도 했지만, 역시 해묵은 원한과 전쟁으로 인해 다시 새롭게 쌓인 원한으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달려드는 이들이 마왕군에도 인류군에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앞으로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죄업…….’

 정당화시킬 생각은 없다.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이란 말은 구역질이 난다. 설령 그것이 평화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해도 우리의 싸움에 휘말린 병사들의 죽음이 ‘개죽음’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 입장에서는 같은 죽음이라도 모순을 품은 평화보다는 미워하는 인류/마물을 멸절시키는 승리를 위한 초석이 되기를 바랐을 테니까.

 ‘그래도 원하는 건 거의 다 얻을 수 있었어.’

 결국 사람은 결과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걸까. 나와 영웅이 벌인 ‘보여주기 식 싸움’의 효과는 우리가 노린 것 이상으로 확실했다.

 우선 난 선대의 뒤를 이은 새로운 마왕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마물들은 내 힘을 경배하며 충성을 맹세했으며, 인간들은 내 힘에 절망하며 공포에 떨었다.

 백은의 영웅 또한 다시 한 번 인류의 구원자는 누구인가를 확실하게 모두에게 각인시켰다. 인간들은 신의 피가 섞인 성검의 소유자가 마왕의 딸에게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고무되었으며, 마물들은 인간들의 영웅이 자신들 중 가장 오래된 환수마저 간단히 도륙할 수 있다는 것에 전율을 느꼈다.

 ‘하여간 그 녀석, 죽일 기세로 달려들기는!’

 지난 싸움을 떠올리며 난 속으로 인간들의 영웅님을 향해 불평을 토했다.
 당연히 우리들 중 어느 한쪽이 진짜로 죽어선 안 되기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는 분명 적당히 힘을 조절하자고 합의를 했었다. 하지만 정작 싸움이 시작되자 그 아이는 성검의 힘을 조금도 억제하지 않고 발휘를 한 것이다.

 ‘아마도 절반 정도는 진짜 죽어도 괜찮다는 마음이었겠지.’

 선대 마왕에게 한 것처럼 정말 전력을 다한 공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당히 연기로 치부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공격도 아니었다. 사실 양자 간의 평화협정에 동의한 것은 루치아의 생각으로서, 영웅으로 칭송 받는 그 아이는 우리가 서로 손을 잡는 것에 꽤 회의적으로 보였다. 열렬히 루치아를 믿고 따르는 아이인 만큼 정면에 나서서 평화협정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갈 곳 없는 불만이 이런 식으로 분출된 것이 아닐까 싶다.

 덕분에 성검의 참격을 맨손으로 쳐낸 내 왼손에는 아직도 붕대가 감겨 있다. 평범한 상처라면 팔이 뜯겨나가도 금방 재생하겠지만, 센트럴 도그마에 당한 상처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잘 낫지 않는다. 그 성검의 특성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리라.

 그래도 ‘결과적으로’ 그 아이의 돌발행동은 성공적이었다. 덕분에 우리의 충돌이 한층 치열하고 거대하게 포장될 수 있었으니까. 만약 당초 계획대로 진짜 ‘연기’를 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잘 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끝내 놈龍들도 불러낼 수 있었으니.’

 우리가 로제 아르카디아 대평원에서 충돌을 벌인 진정한 이유. 그건 바로 용왕들의 개입을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로제 아르카디아는 일명 ‘용들의 정원’이라고도 불리는 곳으로서, 쉽게 말하자면 용족들의 영역 중 일부였다. 그런 장소에서 대놓고 수차례 싸움을 벌이며 땅을 망쳐 놓았으니, 세간에서는 거의 전설적인 존재로까지 여겨지고 있는 그들도 오랜 침묵을 깨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야말로 화룡점정, 이라 해야 할까.’

 인간들은 새로운 마왕을 보고, 마물들은 백은의 영웅을 보고 자신들로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강대한 적이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에 더해 초월자들 다음으로 한때 세상을 지배했다던 용왕들이 가진 거대한 힘의 편린을 목격하자 다들 본능적으로 위기를 자각하고 만 것이다.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이 싸움에 저들마저 개입하면 남는 건 파멸밖에 없으리라고.

 이렇듯 모두와 함께 위기의식을 공유하게 된 다음에는 상대적으로 일이 쉽게 풀렸다. 물론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시적으로라도 휴전을 맺자는 제안까지는 서로에게 납득시킬 수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앞으로의 노력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월급봉투는…….’

 오랜만에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왔지만, 상황은 금방 나아지지 않는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 나는 자꾸 옆에서 왜 기분이 안 좋으냐고 집요하게 묻는 후배 놈에게 현실을 들이밀었다.

 “게시판 공지 아직 안 봤냐? 눈이 있으면 읽어 봐.”

 “네? 뭐라고 적혀 있는데요?”

 네리는 눈을 크게 뜨고 이번 달 월급은 돈 대신 소량의 곡식으로 대신한다는 글을 천천히 읽었다. 잠시 동안의 침묵. 말은 없었지만, 그녀의 들뜬 머리 중 일부가 마치 강아지 귀처럼 축 늘어진 것으로 기분을 짐작할 수 있다. 근데 대체 저건 무슨 원리일까.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난 입을 열었다.

 “이제 내 마음을 알았지? 그러니 귀찮게 하지 말고 다른 데 가 있어.”

 쫑긋. 하지만 그녀의 강아지 귀 같은 머리카락의 일부가 다시 일어서는 순간 분위기도 반전됐다.

 “하지만, 선배! 뭐든 받잖아요!”

 “……뭐?”

 “물론 이걸로는 물물교환으로도 사탕이나 쿠키랑은 바꿀 수 없을 테니 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굶지는 않을 수 있으니 다행이지 않아요?”

 몸을 돌려 나와 눈을 맞추며 활짝 웃는 네리. 이 웃음이 진심인지 아니면 억지로 강한 척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는 내가 우울해 하고 있기 때문에 웃음을 지었다는 사실이다.
 그 상냥함에 차마 침을 뱉을 수 없었던 나는 그녀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래그래. 그렇게라도 생각해야지 별 수 있나. 그나저나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빨리 용건이나 말해. 참고로 사탕이라면 없으니까 기대하지 말고.”

 “앗, 정말 없나요!? 이상하네, 선배한테 분명 달콤한 향기가 나는데…….”

 “우와, 이 변태. 어딜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거야? 저리 꺼져.”

 질색하는 척 하며 가볍게 넘기긴 했지만, 사실 난 그녀가 말하는 ‘달콤한 향기’라는 것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건 다름 아닌 내 마력의 냄새다. 마도사로서 뛰어난 소질이 있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마력을 오감으로 감지할 수가 있는데, 네리의 경우는 그게 후각인 모양이다. 마성을 감춘 인간으로서의 나는 아크메이지라도 쉽게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을 텐데, 아무 지식도 없는 일반인의 몸으로 어렴풋이나마 내 마력을 감지하다니. 만약 그녀가 마도사의 길을 걸었다면 대성했을지도 모르겠다.
 난 마력의 냄새에서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나라고 언제나 사탕을 가지고 다니는 건 아니라고. 시절이 이렇다 보니 단 거에 끌리는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없는 건 어쩔 수 없으니 포기해.”

 네리가 내게서 사탕을 찾는 건 단지 마력을 후각으로 감지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에도 종종 나는 그녀에게 여러 번 사탕을 준 적이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마왕으로 불릴 만한 힘이 있고, 인간 기준으로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내게 있어 기호품을 손에 넣는 것쯤은 전란의 시대에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휴전을 이끌어 내기 위해 평원에서 피곤한 싸움을 벌이느라 도무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내 말에 네리는 뾰로통 볼을 부풀리며 입을 열었다.

 “우, 물론 주시면 감사하긴 하지만, 사탕 얻어먹으려고 선배를 귀찮게 하지는 않아요! 제가 선배를 찾은 건 관장님이 같이 풀 뽑으라고 시키셨기 때문이에요.”

 “……또?”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 전쟁이 길어지며 임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지급할 수 없게 된 도서관에는 말할 것도 없이 인원 또한 대폭 축소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본래는 청소부나 정원사가 해야 할 일도 남은 인원들에게 분배돼 사서가 직접 화장실 청소나 제초작업까지 해야 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요즘 날이 좋다 보니 풀들이 잔뜩 자라서…… 아, 근데 선배 손이 다쳤으니 작업을 할 수가 없겠네요!”

 붕대를 감은 내 왼손에 눈길을 주며 허둥거리는 네리. 일전 성검 센트럴 도그마에 당한 상처는 인간으로 돌아와도 물론 낫지 않고 회복에 시간이 걸리고 있다. 주변에는 대충 넘어져서 삐었다고 둘러대고 있는 형편이다.
 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딱히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풀 뽑는 것 정도는 문제 없…….”

 그러나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안 돼요! 다친 사람은 푹 쉬어야죠!”

 “그래? 그럼 미안하지만 맡길…….”

 “그러니 선배는 옆에서 봐주세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네리를 향해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라고?”

 “아뇨! 그늘에서 쉬거나 책을 읽어도 돼요!”

 “왜 굳이 그런 비효율적인 짓을…….”

 “음, 옆에 누가 있으면 힘이 되거든요. 그게 선배라면 더욱 더!”

 저런 부끄러운 말을 아무런 사심 없이 그냥 내뱉을 수 있다니.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나는 백기를 흔들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래 알겠어. 뒤뜰이지? 먼저 가 있을 테니까 너도 준비해서 와.”

 “네, 선배! 작업도구 가지고 금방 갈게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콧노래를 부르며 사라지는 네리. 나는 차가운 손을 화끈거리는 볼로 가져가 식히며 혼자 중얼거렸다.

 “나랑 있는 게 뭐가 즐겁다고 강아지처럼 따르는지 원.”

 일순 차라리 마력을 조금 살포해 도서관 주위의 풀들을 전부 죽일까도 생각했지만, 내 발걸음은 어느새 뒤뜰과는 반대방향으로 향해 있었다.

 “저 녀석, 준비하는 데 적어도 10분은 걸릴 테니 충분하겠지. 잠깐 다녀올까.”

 목적지는 종교도시 세인트 헬레나. 변경지역에 위치한 소도시로서 발전이 더딘 시골마을 같은 곳이지만, 전란의 중심지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덕분에 현재는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곳이기도 했다. 헤미스피어 도서관에서 고속철을 타고도 3일 이상은 달려야 하는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내 본모습으로 날아가면 1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그곳 수도원에서 만드는 것들은 하나 같이 질도 좋으니까.”

 세인트 헬레나의 특산품은 포도주와 잼, 그리고 수녀들이 만드는 빵과 과자들. 술은 안 되겠지만, 나머지 것들은 제초가 끝난 뒤에 먹으면 한층 맛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후배에게 간식을 사주기 위해 마왕이 되어 하늘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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