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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단테♪



[아라카와 언더 더 브리지] - 나카무라 히카루


synopsis

주인공 이치노미야 코우는 유명 대기업 회장 아버지를 둔 재벌 2세로서, 본인도 벌써 몇 개의 우량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엘리트 청년이다. 코우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타인에게 빚을 지지 말라”라는 가훈에 따라 철저하게 훈련받아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게 되면 천식발작이 일어날 정도로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다. 그런 코우가 어느 날 모종의 사고로 물에 빠졌다 노숙자 소녀에게 구조되어 생전 처음으로 타인에게 ‘생명의 은인’이라는 아주 무거운 빚을 지게 된다. 허나 노숙자 소녀는 전혀 바라는 게 없다며 도통 그에게 빚을 갚을 기회를 주지 않는다. 하도 코우가 은혜를 갚게 해달라며 집요하게 달라붙자 - 그는 타인에게 빚을 갚지 않으면 천식으로 고통스러워 한다는 설정 - 소녀는 그에게 그렇다면 자신과 ‘연인’이 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다. 그것을 계기로 엘리트 재벌 2세 청년 코우는 ‘리쿠르트’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아 하천다리 밑의 이상한 노숙자 주민들과의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시놉시스만 보면 마치 3류 순정만화가 연상되는 이 작품은 실제로는 상식을 초월하는 4차원 황당 코미디 만화이다. 혹시 〈멋지다, 마사루〉라거나 〈엑셀사가〉라는 만화를 보신 적이 있는 분이라면 좀 더 이해가 빠르시리라. 짐작하신대로〈아라카와 언더 더 브리지〉에서는 정상적인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히로인인 니노는 귀여운 외모의 소유자이지만 항상 촌스러운 추리닝 차림에 자신을 ‘금성인’이라고 주장하는 전파소녀이며 노숙자들에게 촌장이라 불리는 사내는 캇파(거북이를 닮은 일본의 물귀신) 인형 탈을 뒤집어쓰고 본인을 요괴라고 우긴다. 무허가로 지은 게 분명한 수상쩍은 교회에는 총을 난사하는 키가 2m에 가까운 ‘외국인 사내’가 무려 ‘수녀’복장을 하고 미사를 올린다. 이런 이상한 인물들이 잔뜩 득실거리는 공간을 묶는 것이 ‘개그코드’이니 과연 내용이 정상일 리가 없다. 언제나 아라카와 하천부지에서는 기묘한 인물들이 기상천외한 일들을 벌인다.

허나 〈아라카와 언더 더 브리지〉는 마냥 엽기적인 코드로만 무장해 독자의 값싼 웃음을 먹고 사는 안이한 작품은 아니다. 이렇게 황당한 소재를 폭탄처럼 잔뜩 싣고도 작품은 ‘건강한 웃음’과 ‘휴머니즘적인 감동’을 주고 있는데, 그것은 작품 속 인물들이 ‘법과 상식’은 무시해도 ‘도덕과 인정’은 중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라카와 하천의 노숙자들의 공간은 단순히 대중들에게 웃음을 파는 낙오된 광인(狂人)들의 수용소가 아닌 무정부주의자들의 이상(理想)에서나 나올 법한 진정한 ‘해방’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하천 노숙자들의 생활을 보면 마치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본래 긍정적인 의미의) 집단농장이 연상된다. 그들에게는 차별이 없으며 어떤 탄압과 편견도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부분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자급자족하여 그들만의 생활을 꾸려나가는데, 물질적인 풍부는 없을지언정 그 생활에 빈곤은 찾아볼 수 없으며 정신적으로는 매우 풍요롭다. (만약 이런 식의 만화가 우리나라의 5공 시절에 나왔다면 당장 국가보안법에 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이런 오순도순 아라카와 하천의 평등사회는 그들의 ‘역할극’이 무조건적으로 존중된다는 점에서 궁극의 방점을 찍는다. 이곳에 모이는 이들은 전부 과거를 버리고 촌장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는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인물설정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뻔히 사람의 살결이 보이는 데도 자신을 푸른색의 물귀신이라 우겨도 상관없으며, 총을 든 장신의 외국인 사내가 수녀가 될 수도 있고, 멀쩡한 여자가 꿀벌을 연상시키는 요상한 차림새로 1만 마리의 남편과 3만 마리의 자식들을 가진 여왕벌이라 주장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가면무도회의 가면처럼 자신을 숨기고 어두운 욕망을 드러내기 위한 방종의 광기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진정 열망하는 삶을 구현하는 긍정적인 자아실현에 가깝다. 이곳에서는 재벌 2세이자 몇 개 기업의 청년회장인 이치노미야 코우도 그저 항상 어설픈 양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리쿠르트(신입사원)에 불과하다. 허나 그것이 반드시 굴욕적인 일만은 아니다. 본래 있던 사회에서는 엘리트일지언정 아버지에게조차 정(情)을 허락받지 못했던 그가 여기서는 하천부지의 마돈나라 할 수 있는 니노의 연인이라는 자격을 부여받으니까.

또한 그렇기에 리쿠르트(이치노미야 코우)는 계속해서 하천주민들과 (유쾌하게 그려지긴 하지만)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는 다른 하천부지의 주민들처럼 완벽한 탈바꿈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재벌2세이자 기업의 우두머리로서 사회와의 연결고리를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것조차 아라카와 하천부지에서는 균열의 씨앗이 아닌 생동감의 원천으로서 관대하게 받아들여지고, 그 덕분에 리쿠르트는 바깥 ‘독자’들의 눈을 대변하는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행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아라카와 언더 더 브리지〉의 균형감각은 참으로 절묘하다. 작가는 현실과 허구, 일상과 비일상, 웃음과 감동의 경계를 별다른 위화감 없이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여러 가지 즐거우면서도 의미심장한 에피소드를 뽑아낸다. 말하자면 단순한 엽기적인 개그만화로도, 웃음 속에 감동코드를 숨긴 치유계 만화로도 양쪽으로 읽을 수 있는 현명한 노선을 취하고 있는데, 작가의 속을 알 길은 없지만 일단 겉으로 판단하기에 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고 자연스러워 합격이다. 이광택 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즐기긴 즐기되 그 즐거움 뒤에 무언가 남”는 것이 있는, 실로 맛 좋은 작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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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dreamist.tistory.com BlogIcon 연꿈술사 2010.02.04 15:55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전 읽으면서 이렇게 깊이 생각하며 읽지 못했었는데ㅎ
    잘 보고 갑니다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0.02.04 17:59 신고 address edit/delete

      한편으로는 "너무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냐"하고 비판 받을까봐 걱정했는데, 좋게 봐주시니 안심이 되네요. 감사드려요^^

  2. Favicon of http://tsuyodung.tistory.com BlogIcon dung 2010.02.04 22:07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그러게요. 저도 그냥 즐거워하면서 봤는데. ^^;;
    음...하고 읽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4월이 매우 기다려집니다. 성&형님 한국어판 이야기가 있다가 사라졌는데 <아라카와~> 애니가 붐이 되면 절판된 중간권도 재판되고 라이센스도 진행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거든요.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0.02.05 20:51 신고 address edit/delete

      원작도 좋지만 제작이 신보 감독이라 한층 더 기대되더군요. 정말 말씀하신 것처럼 저 또한 절판된 권수도 증판되고, 세인트☆영맨도 정발되었으면 싶더군요~ 특히 <아라카와~>는 다른 권수는 다 있는데, 딱 3권만 사지 못해서 증판이 더더욱 절실ㅠ_ㅠ

    • Favicon of http://tsuyodung.tistory.com BlogIcon dung 2010.02.06 09:22 신고 address edit/delete

      저는 그거 알라딘에서 중고로 구했어요.^^;; 혹시 모르니까 중고쪽 한번 찾아보세요.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0.02.07 14:26 신고 address edit/delete

      그렇군요! 정보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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