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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최후의 배심원] ~존 그리샴~

리는 살아가면서 흔히 인간의지의 승리, 변하지 않는 사랑, 진실한 우정, 거짓 없는 신뢰관계 등을 말하며 그것을 매우 긍정적이고 당연한 가치처럼 평가를 하는 것으로 개인이 노력만 한다면 세간의 거친 파도 따위에는 쉽사리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굳센 마음을 가진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환상을 사회전반에 세뇌시키는 일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게으름 피는 일 없이 참여하고 있다.

러나 그것이 당연히 되는 일이라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처럼 실상 개인이란 상황과 분위기에 힘없이 휩쓸리기 쉬운 존재이며 특히 그것이 시대의 거대한 물결일 경우 어느 누구든지 그 속에서 영향을 받지 않고 변화하지 않을 방도는 없다. 즉, 우리가 그토록 중요시여기는 지고한 가치들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초상이지 인간이 당연히 해낼 수 있는 모습들이 아님을 나타낸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약자를 응원하고 주위 상황을 개선하려 하는데 힘을 쓰는 것이며 약간 다른 비유이긴 하지만 맹자의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도 없다”는 말도 넓게 보자면 바로 이런 이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시대와 개인은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이며 격동하는 시대 속에서 변화해나가는 개인의 모습은 항상 많은 문학 작품에서도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곤 했다. 전쟁 속에서 러시아 문학이 발전해나간 것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

특급 베스트셀러 작가라 불리는 존 그리샴의 이 작품은 여태까지 그가 써왔던 책들 중에서도 가장 시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그 속에서 변화해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세밀하게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런어웨이(사라진 배심원, Runaway Jury)”의 원작자로도 유명한 그는 미국이란 나라, 그리고 배심원 제도라는 특유의 상황 속에 미스테리 형식을 빌리는 것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해내는 법정 스릴러 작가로서 명성이 높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개 그의 작품에서 법정이란 특수공간에서 벌어지는 숨 막히고 특이한 전개를 기대하지만 그는 이번 작품에서 그가 보여줄 수 있는 문학적 역량은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여기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최후의 배심원」으로 존 그리샴은 과거의 명성에 기대어 성공을 기원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라고 소개를 하는데 신문광고라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꽤 공정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후의 배심원의 무대는 그의 데뷔작인 ‘타임 투 킬’과 같은 1970년대 미시시피 주의 포드 카운티이다. 이 당시 미국은 인권운동의 바람으로 백인과 흑인의 인종간의 갈등이 크게 이슈가 되고 있었고, 밖으로는 베트남 전쟁에서 죽어나가는 조국(미국)의 젊은이들의 참상 때문에 젊은이들 사이에 반전(反戰)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격동의 시대였다. 작가는 여기에 대학졸업을 1년 앞두고 학업을 계속해야 할지, 아니면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할지 고민하는 윌리 트레이너라는 청년을 내세워 그러한 시대상의 변화를 밀접하게 반영한다.

인공 윌리는 지방신문사가 들이는 노력에 비해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친구의 말에 솔깃해 구두쇠지만 돈 많은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포드 카운티의 <타임스>라 불리는 작은 신문사를 인수한다. 당시 포드 카운티는 작은 시골마을로 별 시시한 것이 이야깃거리가 되고 추문이 되고 미담이 되는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실제로 그러한 마을에서 자라보거나 혹은 군대를 다녀오신 분은 알겠지만 작고 폐쇄적인 집단일수록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릴 곳이 적어 정말 별 것이 소문이 되어 사람들의 입담을 오르내린다. 이처럼 주인공은 신문사를 운영하기 위해 마을의 크고 작은 일에 관련하게 되고, 이에 때맞추듯이 패드깃이라는 이름의 시골 마피아의 살인사건, 백인과 흑인 아이들의 합동학교, 베트남 전쟁 찬반여론 등의 문제가 연이어 터지면서 그는 시대의 물결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며 점차 변화하고 성장하게 된다.

품은 정말 시대의 많은 것을 다루고 있다. 애송이 청년 신문사장을 내세워 루키의 성공일대기적인 재미를 주는 한편, 신문이란 매체특성을 이용해 흑인을 비롯한 소수인종의 애환과 사람들의 편견을 꼬집기도 하고, 한동안 강대한 재력과 폭력으로 보안관과 마을 사람들을 휘두른 시골 마피아 패드깃 집안과 관련된 살인사건을 설정해 작품 전반적으로 스릴러의 숨 막히는 긴장감을 놓치지 않도록 만든다. 이중 한 가지만 제대로 다루려고 해도 삐그덕거리기 십상일 벅찬 소재들을 자연스럽게 한 그릇에 쓸어 담아 멋진 요리로 재탄생시키는 존 그리샴의 솜씨는 그가 단순히 법정 스릴러란 장르적 특성을 이용해 반짝 떠오른 스타가 아님을 여실히 증명해낸다.

설에는 수많은 사건과 여러 개성적인 케릭터가 등장해 매끄럽고 흥미롭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가지만 나오지만 그 중에서 내게 특히 사색을 유도했던 건 당시 흑인들과 융화해야 했던 미국인들의 어려움이었다. 우리는 흔히 흑인을 차별하는 백인(특히 미국인)을 두고 매우 야만스럽고 냉혈하며 때로는 원죄적인 잘못을 저지른 족속들로 평가하곤 한다. 그러나 여기서 과연 되묻고 싶은 것이 우리는 얼마나 공정한 존재인가 하는 점이다. 지금은 미디어 매체는 물론 인터넷이 활성화되어 외국이 그리 멀지 않고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숫자도 늘어 이제는 외국이란 존재가 그렇게 낯설지 않지만 아직까지도 우리는 단일민족으로서 같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같은 사상과 역사를 지닌 동족들과 살고 있다. 그런 우리들에게 당시 미국인들이 처했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다. 과연 우리들 중 몇이나 실제로 흑인과 직접 대면하고 오랜 시간 같이 생활해봤나.

러니저러니 해도 겉모습이란 중요하다. 사람은 자신과 다른 존재에게 두려움을 느끼며 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가장 효율 좋고 본능적인 방법은 바로 공포의 대상을 공격하는 것이다. 예전 나는 실제로 흑인과 마주했을 때 두려움을 느꼈었다. 검은 피부에 나와는 다른 생김새.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 흑인은 내게 공포를 주는 대상이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흑인은 물론 심지어 동남아인조차도 무서워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이 뭔가 잘못을 저질렀다거나 TV 등에서 가끔 이미지가 나쁘게 나오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생김새가 무섭다는 것이다. 즉, 자신과 다름으로서 느껴지는 두려움은, 물론 그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당연히 있는, 억누르거나 치환할 수는 있지만 부정할 수는 없는 감정이라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 피부색은 물론 당시에는 문화마저도 상이했던 백인이 흑인에 대해 느꼈던 공포나 편견은 오죽했으리라. 게다가 그 때는 지금처럼 인권개념도 확실히 잡혀있지 않은 시대였다.

해의 여지가 있을까 노파심에 첨언하자면 아프리카에서 함부로 흑인들을 노예로 끌어온 그들의 선조, 그리고 그렇게 끌려온 흑인들을 차별하고 억압해온 백인들의 행동을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그것은 잘못된 행동이며 쉽게 잊혀져가도, 면죄 받을 수도 없는 오점일 것이다. 그러나 설령 선조들의 정복심에서 비롯된 자업자득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후손인 백인들이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지의 존재와 마주치며 겪었을 고통을 우리는 이해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단순하게 이미 남들이 만들어놓은 인권제도의 혜택을 받아 개념적으로만 인종 간 평등을 논한다면 결국 똑같은 실수는 반복될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수많은 동남아의 불법입국자들을 차별하고 있다. 동남아로 여행을 간 어느 목사가 한국 악덕공장주에게 괴롭힘을 받다가 귀국한 그 나라 사람들과 마주쳐 몰매 맞을 뻔한 위기에서 일본인이라 거짓말을 하고 간신히 빠져나왔다는 일화는 우리가 어떤 과오를 저지르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밖에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배심원 제도의 폐해였다. 흔히 말하는 사법재판의 스포츠화, 국가형벌권 거래의 문제들. 증거가 확실한 데도 변호사의 말빨과 배심원 매수 등을 통해 검은 게 하얀 게 되고 하얀 게 검은 것으로 변화해버린다. 물론 시대배경은 1970년경이며 존 그리샴 본인도 책의 마지막에 “이곳에 나오는 법의 오점은 지금은 개선된 것들이지만 소설의 진행을 위해 억지로 오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 점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봐달라”라고 첨언하고 있긴 하지만 본작품은 준비되지 않은 배심원 제도가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날카롭게 파고들고 있다. 이런 것들은 최근 국민참여재판제도 등을 통해 서서히 배심원 제도의 성격을 들여오려고 하는 우리나라에서도 큰 의미를 가지는 화두가 아닐까 싶다.

작품의 주인공 윌리 트레이너는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작은 마을 신문사를 운영해나가는 것을 통해 애송이 대학생에서 ‘삶의 기술’을 익힌 제법 듬직한 사회인으로 성장해나간다. 분명 개인은 시대의 물결을 거스를 수 없으며 그에 따라 변화해나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변화해나갈 지 그 방향 정도는 충분히 스스로 정할 수 있으며 개인 노력의 여하에 따라 심도를 깊게 하거나 얕게 하는 건 가능할 것이다.

활심리학에서는 “바꿀 수 없는 80%에 매달리기보다는 바꿀 수 있는 20%에 전념하라”는 말이 있다. 이상(理想) 높은 이들에게는 타협하는 말이며 도망치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나 나는 인간은 신(神)이 아니며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부질없는 허황된 논리에만 매달리거나 어차피 개인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다며 좌절하기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제대로 포착해 실현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시대의 물결에 맞서야 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진정한 역할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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