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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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2018/02'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8.02.26
    [艦これ] 고장난 제독의 전황보고
  2. 2018.02.17
    [艦これ] 고장난 제독의 최종결전
  3. 2018.02.16
    [단편] 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9) (2)
  4. 2018.02.14
    [단편] 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8)
  5. 2018.02.13
    [단편] 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7) (2)
  6. 2018.02.12
    [단편] 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6)
  7. 2018.02.09
    [단편] 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5)
  8. 2018.02.05
    [단편] 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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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전단부 해역 돌파.

마지막 이벤트답게 난이도가 높아
의외로 자원소모가 심한 편이지만,
이래저래 재미있는 요소가 많아 심심하지 않네요.




“European Combined Grand Fleet 기함 워스파이트! 전장해역에 도착!”
“지금부터 Friend Fleet를 원호합니다! 전함대 돌격!”


“좋아, 다들 괜찮나? 북방연합함대가 지금부터 원호하겠다.”
“동지제군, 준비는 되었나? 좋아, 우라(Ура)!”


 특히 일부 해역에서 보스를 상대시 야간전에 지원으로 도착하는 NPC우군함대가 정말 매력적.
 전력적으로도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함대마다 ‘특정대사’를 외치며 도착하는 게 굉장히 분위기가 불타오르네요.

 이런 면에선 칸코레 이벤트의 어려운 난이도가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하는데, 공략에 난황을 겪고 있을 때는 이런 식의 보조가 ‘진짜’ 기쁘게 다가오더군요. 맥락은 좀 다르지만 칸코레가 뜨게 된 계기 중 하나로 평가 받는 이른바 히라노 쇼크도 유저에게는 엄청난 리스크인 굉침 시스템이 시발점이었으니…….

 위키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항아리 게임으로 유명한 『Getting Over It』의 개발자도 과거 ‘좌절감의 11가지 맛’이란 글에서, 게임 속에서의 좌절감은 불가결의 요소임을 강조하기도 했다더군요. 물론 우리는 결코 벌을 받기 위해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니 적당한 곳에서 선을 지켜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최하난이도 정丁 작전의 추가는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네요.



 2해역 돌파 특전인 히부리(日振)와 드롭함인 다이토(大東).
 개인적으로 시바후 작가 특유의 둥글둥글한 그림체는 구축함보다도 어린 유아체형의 해방함에게 더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는데, 기대 이상의 시너지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실제로 다른 제독분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은 듯. 딱 여기서 끝났다면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을 텐데



 유망주 중 한명인 영국 구축함 저비스(Jervis).
 기대했던 만큼 귀엽게 잘 나와 마음에 드네요. ‘럭키 저비스’란 별칭에 걸맞게 운 수치가 초기부터 50으로 매우 높은데, 취향이 아니라 유키카제를 쓰지 않는 제 입장에서는 앞으로 귀중한 전력이 될 것 같아요. 일단 열심히 키우고 있는 중.

 여담으로 일러스트레이터와 성우분, 그리고 캐릭터성 때문에 저비스는 ‘작은 콩고’ 혹은 ‘콩고의 딸’ 같은 느낌이 드는데…….



 농담 반 진담 반 제게 있어 저비스는 콩고와 워스파이트의 딸이라는 인상이 강하네요.
 기본적으로 워스파이트는 아크 로열과의 커플링을 지지하긴 하지만, 이런 쪽의 조합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언젠가 그림 실력이 더 오르면 해당 커플링의 백합 일러스트도 그려보고 싶네요.


(before)


(after)


 화제의 무사시 2차 개장.
 성능도 성능이지만, 비주얼적으로도 더 멋지게 변해서 매우 마음에 드네요. 모 그림 사이트에서 팔로우하고 있는 어떤 분은 ‘내 남편이 드디어 옷을 입었다! 너무 멋져서 흥분된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라고 관련 일러스트를 연이어 투고할 정도. 사실 그분의 정체는 키요시모




 성능은 확실히 괴물.
 무장하면 200이 가볍게 넘어가는 화력에 최초로 구현된 5슬롯. 보강증설까지 하면 실질적으로 6슬롯이나 마찬가지라 터빈과 보일러를 달아주면 저속이라는 약점도 커버를 할 수가 있으니... 실제로 4해역 공략에 써보니 그 굉장함이 실감이 되더군요.

 그동안 야마토급은 실제 역사를 반영하듯(...) 화력과 내구도, 장갑은 높은 반면 다른 활용도가 떨어져 실질적으로 이벤트 공략에서조차 외면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 저 역시 이번 이벤트에서 야마토급을 처음 사용;;; - 이제는 종종 써먹게 될 것 같네요.

 다만, 그렇지 않아도 많이 먹는 자원을 더 많이 먹게 된 건 요주의. 특히 대파된 2차 개장 무사시를 도크에 넣으니 강재를 1700 이상 소모하더군요(...) 그래도 자원 먹는 값은 확실히 한다는 게 제 인상이에요.



 또한 즈이호의 2차 개장도 추가.
 일러스트도 예쁘며 설계도도 소모하지 않고 적은 자원으로 컨버트도 가능해 여러모로 ‘초심자를 위한 배려’가 느껴지는 업데이트였네요. 개인적으로는 1차 개장의 녹색 미채복보다 처음 하얀 궁도복이 마음에 들었는데, 이번 2차 개장의 乙컨버트로 다시 하얀 복장으로 돌아올 수 있어 더욱 기쁘더군요.



 이번 전단부 해역 최대 성과인 4해역 특전함 갬비어 베이(Gambier Bay).
 아키라 작가의 일러스트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매우 만족스러운 캐릭터네요. 다만 심약한 성격이 성능에도 반영돼(...) 심심하면 중파나 대파를 당하는 게 육성이나 운영에 애로사항이 될 듯^^;;






 위의 우군함대 스샷에서 눈치 채신 분도 계시겠지만, 후단작전해역도 상당 부분 진행 중.
 5해역부터 이른바 ‘시즈메탈’이라 불리는 보컬곡이 흘러나오는 등 여러모로 신경 쓴 점이 많이 드러나네요. 최종해역 클리어특전이 꽤 호불호가 갈리는 일러스트라는 점에서 아쉬운 점이 있긴 하지만, 그밖에 다른 장점들을 보며 끝까지 달리려고 해요.

 그럼 다른 제독분들도 무사히 돌파하실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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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0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이벤트 개시.
대규모 작전이다 보니 전단부터 4해역이 꽉 차 있네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발렌타인 분위기였던 함대에
순식간에 긴장감이 감도니 그 격차가^^;;

그래도 개인적으론 푹 잘 쉬고 싸운다는
느낌이라 그리 나쁘진 않네요.




 이번 이벤트에서 주목할 만한 것 중 하나는 병丙 작전보다도 한단계 난이도를 더 낮춘 『정丁 난이도』의 추가가 아닐지.

 그동안 칸코레는 상대적으로 높은 난이도 때문에 유저들의 원성이 심한 편이었는데, 리뉴얼을 앞두고 신규 유저 확보 및 의견 반영 차원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대신 정丁작전을 선택시 아이템 보수나 함선 드랍율은 많이 떨어질 모양.

 그래도 처음 참가한 이벤트이자 유일하게 완주하지 못한 이벤트에서 아이오와를 놓친 이래 2년 가깝게 재등장을 기다리고 있는 제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일단 초보 유저도 어떻게든 클리어할 수 있게 만든 것은 매우 긍정적이라 보고 있어요.



 말 많던 무사시의 2차 개장도 추가. 소모 자원 외에도 무려 개장설계도 3장, 신형포공병장자재 3개, 전투상보 하나가 필요하다는 정신 나간 구성이지만, 다행히 병丙 난이도 이상으로 전단 작전을 클리어하면 이 재료들을 전부 보수로서 준다고 하는군요.

 운영의 배려에는 감사하지만, 이 이벤트가 끝난 후에 새로 유입되는 신규 유저들은 그 부족한 재료들을 어떻게 마련할지...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신규 퀘스트를 추가해 얻을 수 있게 해줄 듯...?)

 전 설계도가 부족해 아직 손가락만 빨고 있는 형편이지만, 훈장에 여유가 있는 최고참 제독분들이 발 빠르게 올린 글을 보면 일러스트도 성능도 재료 먹는 값은 충분히 하는 것 같더군요. 이벤트를 클리어해야 될 동기가 하나 더 추가~

 또한 레이테 전편처럼 머리띠를 두른 결전 모드 일러스트와 신규 보이스도 추가가 되었는데······.


(Before)


(After)

“이것이 내 결전이니까……!”


 즈이카쿠의 경우에는 아예 결전 모드 일러스트가 새롭게 그려져 한층 이벤트 분위기를 띄우고 있네요! 이왕이면 언니인 쇼카쿠도 같이 해줬으면 하지만, 아마 역사상 쇼카쿠는 이번 이벤트의 모티프가 되는 해전 이전에 침몰했기 때문에 나오지 못한 듯. 아무튼 편성이 맞는다면 최종해역에서 꼭 기함으로 쓰고 싶어요+_+

 그밖에 클리어 특전 보수함으로 받게 되는 호위항모 갬비어베이(Gambier Bay), 에식스급 대형정규항모 인트레피드(Intrepid)를 비롯해 영국과 소련의 구축함, 일본 구축함, 해방함 등 총 7척의 신규함선이 추가되는 풍성한 이벤트가 될 것 같네요. 일부 분들이 걱정했던 것처럼 난이도는 어렵고 보수는 짠 이벤트가 아닐 것 같아 정말 다행이에요.

 아무튼 앞으로 어떻게 리뉴얼이 되든 '지금의' 칸코레에서는 마지막 이벤트이니 만큼 최대한 즐기고 싶네요. 그럼 그동안의 플레이를 돌아보는 영상을 하나 첨부하며 저는 이만.






제목:【MMD칸코레】누구를 위해(슬라이드 쇼)
니코동: http://www.nicovideo.jp/watch/sm31361597
제작자: メイハイ 님

(의역이 심하며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世界の果てで あなたと探し出した明日を
세상 저 끝에서 당신과 함께 찾은 내일을
震える両手が 抱きしめている
떨리는 두 손으로 끌어안고 있네

黄金色に萌え咲く 荒野の夢を見ていた
금빛으로 물드는 황야의 꿈을 보고 있었어
希望乗せた綿毛たちが 西風に弾け飛び
희망을 품은 솜털들이 서쪽 바람에 흩어지고

歓喜の声の裏で 孤独の予感がしてる
환희에 찬 목소리 뒤편에 고독한 예감이 들어
こんなときはあなたの言葉 思い出す
이럴 때면 당신의 말이 떠오르네

どうか泣かないで 手を繋いだら
부디 울지 말아 줘 서로 손을 잡으면
同じ未来の背中を今 見てるよ?
같은 미래를 지금 볼 수 있으니

ひとりきりじゃ取り戻せない 高く突き抜ける空
혼자서는 되찾을 수 없어 높이 솟아오른 하늘
誰がために その手を差し出せる生き方が
누구를 위해 그 손을 내미는 삶의 방식인가

繋いでゆく新世界を 守り続けるのなら
이어져 가는 신세계를 지켜나갈 수 있다면
歓びの裏にある
기쁨의 뒤편에 있는
その孤独は わたしが引き取る
그 고독은 내가 끌어안을게

向かう先に必ず 未来があるはずだよと
향하는 곳에 반드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ただ夢中で飛び出しては 空回りしてる
그저 정신없이 뛰어들어 헛돌고 있네

こんなにも無力だと 思い知るとき初めて
이렇게나 무력하다고 절감했을 때 비로소
肩を支えた腕の ぬくもりに気付く
어깨를 받치는 팔의 온기에 눈치 채네

隣に並ぶ手を取り合えば
곁에 있는 그 손을 맞잡으면
悲しみの連鎖壊せると 信じた
슬픔의 연쇄를 끊을 수 있다고 믿었네

こんな道を選んだのは 間違いじゃないのかと
이런 길을 고른 건 잘못이 아니었을까 하는
こみ上げる弱さを 押し込めた問いかけに
치밀어 오르는 약한 마음을 밀어 넣는 물음에

あの大きなあなたの手が 西風に姿を変えて
저 커다란 당신의 손이 서쪽 바람으로 모습을 바꾸어
この涙をぬぐい まだ震える両手を包んだ
이 눈물을 닦아 아직 떨리는 두 손을 감싸는구나

ひとりきりじゃ取り戻せない 高く突き抜ける空
혼자서는 되찾을 수 없어 높이 솟아오른 하늘
誰がために その手を差し出せる生き方が
누구를 위해 그 손을 내미는 삶의 방식인가

繋いでゆく新世界を 守り続けるのなら
이어져 가는 신세계를 지켜나갈 수 있다면
歓びの裏にある
기쁨의 뒤편에 있는
その孤独は わたしが引き取る
그 고독은 내가 끌어안을게

長い時が過ぎて 或る日
긴 세월이 흐른 어느 날
あの懐かしい影が
저 그리운 그림자가
光る綿毛が舞う 黄金色の大地に 再び……
빛나는 솜털이 춤추는 금빛 대지에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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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막장 스토리입니다)







BGM: よるのないくに - 錦上に花を添えるが如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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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9)]


 별의 의식구조체에 접해 관념을 물질화시킬 수 있는 것이 마녀라 불리는 이들의 선천적인 능력.
 무형정원의 관리사들은 후천적인 수단을 통해 그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세계를 하나의 커다란 신체라 가정할 때, 전기자극과도 같은 모종의 힘을 가해 일정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 이것이 바로 일반적으로 ‘마법’이라 불리는 현상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단순히 개념적으로만 보면 마녀와 관리사는 마치 상하관계에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으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가령 인간은 어떤 맹수보다도 약하지만, 인간이 만든 기중기는 그 어느 짐승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간접적이더라도 세계의 반응魔法을 이끌어내는 데 골몰한 관리사들의 힘은, 최소한 물리적인 파괴력에서는 결코 마녀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더욱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마녀들과 달리 관리사들은 ‘무형정원’이라는 하나의 조직을 이루어 협력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세력은 월등히 앞선다고 볼 수 있었다.

 - 힘을 가진 자의 의무는 뭐라고 생각해?

 관을 짊어진 금발의 소녀 유화流花는, 활동을 개시하기 전 언제나 스승Master과의 문답을 떠올리는 버릇이 있었다.
 기억 속의 유화는 이렇게 답했다.

 - 그 힘을, 남용하지 않는…… 것이요.

 기억 속의 스승Master은 웃음을 지었다.

 - 나쁘지 않은 대답이군. 하지만 충분한 대답은 아니야. 분명 사람들이 네가 말한 것만 잘 지킨다고 해도 세상은 훨씬 평화롭고 원활하게 굴러 가겠지. 대부분의 정치체제가 어떻게 하면 ‘권력의 남용을 막을 수 있나’라는 고민을 담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스템, 거시적인 시점에서의 대답이다. 힘을 가진 ‘개인’은 그보다 좀 더 멀리 보아야 해.

 기억 속의 유화는 다른 답변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직 그녀는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스승Master은 잠시 기다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넌 머리가 좋은 만큼 괜히 쓸데없이 복잡하게 생각하다 사고가 정지하는 게 흠이지. 답은 바로 ‘행동’하는 거야. 자신이 가진 힘을 올바른 일에 ‘행사’하는 거지.

 기억 속의 유화는 그 답의 허점을 금세 찾아냈다.

 - 무엇이, 올바른지…… 어떻게 알 수 있죠……? 그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악행을 저지르게 될 뿐인 건……? 그저, 남용에 불과하게…… 되지 않을까요?

 기억 속의 스승Master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 경우도 있지. 천국을 만들려는 시도가 지옥을 낳을 뿐인, 그런 불행한 경우가.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 사람들은 모르고 있을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제대로 알 수 없는 걸까?

 - 예? 그게, 무슨…….

 기억 속의 유화는 머뭇거렸지만, 기억 속의 스승Master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사실 사람들은 알고 있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않고 있을 뿐이야. 현실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그 후 기억 속의 스승Master은 더 이상 그 주제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는 유화의 영원한 숙제로 남고 말았다.

 「마스터는, 끝까지 힘 있는 자의 의무를…… 다하려 했어. 전쟁터에서도, 재난현장에서도……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구했지…….」

 질질. 질질. 쇠사슬에 이어진 은색 관을 끌며 유화는 중얼거렸다.

 「마스터의 뜻을 이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정원관리사로서, 세상의 올바른 흐름을 지키기 위해…….」

 석양을 등에 지고 나루와 대치한 유화는, 단호하게 매듭을 지었다.

 「지금부터, 정의를 집행한다.」






 시진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루는 관을 끄는 금발의 기묘한 소녀가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황하는 기색 없이 입을 열었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줄 알고 있었죠. 내가 이 능력에 눈을 뜬 날. 불행을 ‘참살’할 수 있는 힘을 얻은 날. 그때부터 쭉 생각했어요. ‘세상에 이런 힘이 존재한다면, 나만이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 텐데’ 하고 말이죠.”

 「현명한, 인식이야……. 보통 우발적으로 ‘힘’을 얻은 자들은, 폭주하기 십상이지……. 자기만이, 세상에서 특별하다는 착각에 빠져서…… 하지만 넌 그런 멍청이들과는, 다른 모양이군…….」

 “그거 고맙네요. 좋게 봐줘서. 전혀 달갑진 않지만. 아무튼 난 이 힘을 손에 넣은 덕분에 누가 얼마만한 ‘살상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누가 내게 ‘살의’를 가지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당신은 왜 날 죽이려 하는 거죠? 무슨 능력자들을 통제하는 단체에서 오기라도 했나요?”

 나루는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안광으로 날카롭게 상대를 노려보며 물었다.
 평소부터 줄곧 생각해 왔던 일. 세상에 어떤 초상적인 힘이 이미 법칙으로서 성립하고 있다면, 나만이 그 힘을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사람은 모두 세계라는 공통된 무대 위에 서 있으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수십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음에도 그런 능력자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단지 픽션 속 존재로만 여겨지고 있다. 이는 국가적 또는 초국가적 모종의 단체가 능력자들을 통제하거나 제거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이런 나루의 의문은 눈앞의 상대가 등장함에 따라 사실로 드러났다.

 「비슷해. 엄밀히는, 다르지만……. 하지만, 네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겠지. 내가 널 죽이는 이유는, 단 하나…… 결국 너도, 자기 힘을 다스릴 줄 모르는, 살인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무형정원의 관리사 유화는 쇠사슬을 크게 휘둘러 은색의 관을 나루와 시진을 향해 날려 보냈다.

 “……!”

 쿵. 나루는 시진을 보호하듯 막아서며 식칼을 꺼내들고 잔뜩 경계했지만, 유화가 날린 관은 두 사람을 멀찌감치 비껴서 떨어졌다.

 “빗나간, 건가? 아니…… 이제 시작이야……!”

 나루의 판단은 정확했다. 유화가 날린 관은 공격이 아니라 그저 공격의 신호에 불과했다.

 「올드 다크, 전개.」

 유화의 말에 호응하듯 관이 열리며 그 안에서 사람 같은 형상의 무언가가 하나하나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루는 시진을 지키기 위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좁은 데 어떻게 저게 다 들어 있었던 거지?”

 관에서 바깥으로 나온 것은 모두 열셋의 사람만 한 크기의 인형.
 소녀의 형상을 한 인형들은 하나 같이 검은 드레스 차림새에 한손에는 물결치는 칼날이 아름답고도 흉포한 검Flamberge을 한 자루씩 들고 있었다. 인형들의 얼굴은 유화와 매우 닮아 있었는데, 머리가 은발이고 눈동자가 붉어 실질적으로는 꽤 다른 인상을 주었다.
 양자가 충돌하기 직전, 이번에는 시진이 나루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넌 이 아이가 살인마라서 죽이겠다고 했나!? 그렇다면, 그건 오해야! 분명 이 아이는, 나루는 과거에 4명을 죽인 적이 있어. 하지만 그건 살인강도들이었다! 강도놈들에게 가족을 잃고, 자신마저 죽을 위기에 어쩔 수 없이 대응한 것뿐이야! 말하자면 정당방위…….”

 그러나 유화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난, 과거의 살인을…… 묻는 게 아니야. 미래의 살인을, 규탄하는 거지…….」

 “미래의, 살인……?”

 「그래. 네가 감싸는, 저 아이는 앞으로…… 700명 이상을 학살할 거야. 난, 그 비극을 막기 위해…… 이 도시에 온 거다.」

 “그게, 무슨…….”

 「더 이상, 말은 필요 없다.」

 정원관리사의 차가운 선고. 동시에 13체의 인형이 장검을 치켜들고 나루에게 덤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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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02.28 09:29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아앗, 아우프헤벤님이 좋아하시는 은발 적안의 전투인형들이 지금 여기에 등장!! >_<

    그나저나 유화의 다소 주저하는 듯한 어조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의, 그 누구보다도 세심하고 사려깊은 성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니 역시 사람은 첫인상만으로 판단하면 안된다는 점을 새삼 깨닫고 말았네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운명의 조율자라 생각했던 유화 본인의 행보조차 실질적으로는 세계라는 무대 위에서 춤추는 또 하나의 마리오네트에 불과하여, 이 날 나루와 시진을 습격한 일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시진에게 회복불가의 치명적 피해를 줌으로써 복수의 광기에 물든 나루가 미래의 살인귀로 거듭나게 하는 결정적 기폭제(Trigger)로 작용하고 마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감이 들기도 했답니다.

    덧 - 주위엔 다들 연인들뿐인데다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은 이미 반려가 있는 상황! 왠지 리얼충 폭발해라를 외치는 진아의 모습이 상상되는 것 같아요. ^^;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3.05 12:05 신고 address edit/delete

      헤벤 님께서도 은발적안의 캐릭터를 좋아하시는군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소녀 안드로이드 계열의 캐릭터는 역시 은발적안이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유화도 세심하게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실히 예언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오이디푸스의 얘기처럼 실제로 그것을 피하거나 막으려고 한 행위가 오히려 나쁜 미래를 현실로 만드는 비극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지요;;;

      또 무슨 짓을 해도 미래가 변하지 않는 세계관이 아니라면, 예언자가 미래를 본 것 자체가 본인을 비롯한 미래를 알게 된 관계자 전원에게 영향을 미쳐 변수가 다량 발생해 이번에는 반대로 아예 통제할 수 없는 미래를 맞이하는 경우도 있는 등 참 난점이 많은 것 같아요^^;;

      이번 소설은 그렇게까지 미래예언에 대해 깊숙이 파고드는 정교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재미는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은 마음이네요!


      (실은 리얼충을 향한 솔로의 분노를 폭발시켜 진정한 힘을 각성해 세계를 구원하는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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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막장 스토리입니다)







BGM: Blue Reflection ► Sayonara -神産巣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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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8)]


 누구에게나 삶의 위안은 필요하다.
 마녀에게 있어선 자신의 연인이 바로 그러했다. 마녀는 넓은 챙을 가진 검은 모자도, 검은 망토와도 같은 거추장스러운 다른 옷가지들도 전부 벗어던진 채, 블라우스 한 장으로 연인의 품에 안겨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역시, 제가 너무 매정한 걸까요. 제가 치러야 할 대가는 분명 작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사람처럼 절박하지도 치명적이지도 않은데…… 그렇다면 제가 희생하는 게 옳았을까요……?”

 무장처럼 두른 장식들을 걷어낸 마녀의 체구는 자그마했다. 앉은 채로 마녀를 품고 있는 그 연인 설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희생에 옳고 그름이란 없어. 있는 건 납득할 수 있느냐 없느냐 뿐. 또 납득을 시키느냐 하느냐의 문제일 뿐.”

 한없이 빛을 빨아들이는 칠흑 같이 검은 긴 머리와 겨울철 잔잔한 호수를 닮은 푸른 눈동자. 흠 하나 찾아보기 힘든 갸름한 얼굴과 군더더기 없이 균형 잡힌 호리호리한 몸매. 서큐버스와 인간 사이의 혼혈이라는 설란은 그 외모만큼이나 목소리 또한 마성이 깃들어 있었다.
 설란은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투명하게 잘 울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납득을 하고 각오를 했다면, 난 말리지 않겠어. 하지만 지금의 넌 그렇게 보이지 않아. 죄책감에 떠밀려 무언가를 마지못해 하는 것은, 그건 전혀 납득한 것도 각오한 것도 아니야. 그저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한 도피에 불과하지. 그 도망친 끝에는 후회밖에 기다리고 있지 않아. 게다가…….”

 “선배……?”

 설란이 드물게 말끝을 흐리자 마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기색을 살폈다. 설란은 그 눈길을 피하듯 시선을 조금 위로 올렸다.
 잠시간의 침묵. 바깥에서 내리는 빗소리만이 두 사람의 정적에 고요히 말을 걸고 있다. 마치 그 리듬에 격려를 받기라도 한 듯 설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설령 네겐 아무것도 아닌 상처라 해도, 네가 상처입고 아픈 건…… 내가 싫어.”

 두 사람이 사귀게 된 결정적인 계기.
 일전 마녀는 죽을 위기에 빠진 설란을, 시간을 되돌려 구한 적이 있었다. 그 대가 없는 헌신의 대가로서, 마녀는 전신이 으스러지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물론 특유의 재생력과 주술적인 조치로 죽지 않고 상처 하나 없이 회복될 수 있었지만, 설란의 입장에서는 그런 상황이 반복되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다.
 자신은 마녀의 연인이지만, 마녀 역시 자신의 연인이기도 하니까.

 “아……! 정말, 선배는 너무 귀여워요……!”

 마녀는 마음 깊은 곳에서 샘솟는 사랑스러운 마음에 있는 힘껏 등을 기대 설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등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감촉. 사람이 살과 살을 맞대 온기를 나누는 것은, 역시 좋은 일이라고 마녀는 생각했다.

 “네, 죄책감에 떠밀려 절대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게요. 선배 말이 맞아요. 납득하지 못한 일에 희생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죠. 분명 나중에 후회하고 말 거예요. 그래도…….”

 마녀가 무언가 말을 이으려 할 때, 순간 밖에서 까까까까까! 하고 까마귀들이 싸우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마녀는 급하게 설란을 향해 물었다.

 “선배! 지금 몇 시에요!?”

 “4시 44분. 왜 그래? 무슨 일 있는 거야?”

 “미안해요.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잠시 더 확인할 게 있어서요.”

 마녀는 조심스럽지만 서둘러 연인의 품에서 빠져나온 뒤 창가로 향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 챈 설란은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역시, 비가 그쳤어…….”

 멍하니 바깥 풍경을 내다보는 마녀의 뇌리에 관을 진 인형 같은 소녀의 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단지 입으로만 떠들어 신용이 가지 않는다면, 작은 재주를 하나 보여줄게. 이틀 뒤, 불길한 시각에 불길한 새들이 서로를 주장할 때…… 천상의 보석太陽이 잠깐 그 모습을 드러낼 거야.」

 다소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하긴 했지만, 정원사가 예언하고자 하는 말을 해석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마녀는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큰소리 친 만큼은 보이는 모양이네…… 그러니 운명은 정해졌다고, 그에 합당한 심판을 내릴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야……?”

 살인마를 처단하기 위해 이 도시를 찾았다는 무형정원의 관리사. 마녀는 기억 속의 그 뒷모습을 향해 선언하듯이 말했다.

 “그래도 난 믿고 싶어. 사람에게는, 정해진 인과를 비틀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만약 그 계기가 찾아온다면 나는…….”

 결심을 굳힌 마녀는 창가에서 설란을 향해 등을 돌렸다.
 아무 말 없이 자기를 기다려준 연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이번 일은 위험하니 절대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모순된 당부를 전하기 위해.






 우울한 하늘.
 어제 그렇게 비가 내리고도 다음날 하늘은 맑지 않았다. 더욱이 빗줄기에 떨어진 꽃잎들이 사람의 발길에 밟혀 지저분하게 거리에 흩어져 있는 모습은 한층 보는 이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꽃잎 자체에 잘못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아…….”

 대체 이 찝찝한 기분은 뭘까. 진아는 사고가 난 교차로를 지날 때마다 드는 왠지 모를 초조함과 상실감에 불안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
 하지만 그 중요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모래 폭풍 같은 노이즈 속에 스쳐지나가는 환영은 피투성이가 된 손…….

 “으……!”

 여기서 조금만 더 기억을 더듬으려 하면 꼭 찌르는 듯한 강렬한 두통이 엄습해 제대로 사고할 수가 없다. 사고현장에서 사고할 수가 없다니. 그런 재미없는 농담을 떠올려 봐도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난 진짜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구나…….”

 진아는 자조하며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 봤다.
 네일샵에서 예쁘게 꾸민 손톱들. 하지만 이 화려한 손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글을 잘 쓸 줄 아는 것도 아니고,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 만들 수 있을 만큼 손재주가 있지도 않다. 마치 겉만 번지르르한 이 손이야말로 자신을 대변하는 것만 같아서 진아는 한층 기분이 우울해졌다.

 “아니, 할 줄 아는 게 딱 하나 있기는 한가…….”

 하지만 그건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항상 화려하게 꾸미고 다니는 이 외양은 바로 그 결심을 더욱 확고한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진아는 얻는 것 없이 허무한 그 나날로 다시 돌아가기 싫었다.

 “이래선, 선생님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도 없겠지…….”

 진아의 우울한 기분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자신에게 과연 선생님과의 사랑을 꿈꿀 자격이 있을까. 행복하게 만들어 드리기는커녕 짐만 될 게 빤한데도? 그런 면에선 정신적으로는 불안정하긴 해도 나루가 훨씬 선생님에게 어울리는 상대일지도 모른다…….

 “음? 저 사람은…….”

 답답한 마음을 끌어안은 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등을 돌린 진아는 문득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설란 선배.
 교내 제일의 미녀로 이름 높은 그 선배의 외양은, 확실히 보는 것만으로 여러 잡다한 생각을 잊게 만들어주는 압도적인 미美를 자랑하고 있었다. 일절 꾸밈없는 청순한 차림새이면서도 어딘가 요염함이 느껴지는 마성.

 “누굴 기다리는 모양인데…… 혹시 애, 애인인 걸까…….”

 천박한 호기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진아는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저만큼 예쁜 사람이라면, 역시 사귀는 쪽도 굉장한 걸까. 어느 수준의 외모가 되어야 과연 서로 어울린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그러나 설란의 상대는 진아의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했다.

 “선배――! 오래 기다렸죠――!”

 저 멀리서 달려와 뛰어들 듯 설란에게 안긴, 엉망으로 머리가 헝클어진 소녀. 진아는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애는 유하리…… 설마 쟤가 선배랑 사귀고 있다고……?”

 하리는 평소 교내에서 마녀 같은 차림새로 다니는 기행으로 유명했다. 게다가 무슨 약 같은 걸 팔고 있다는 수상한 소문까지 돌고 있는 형편이었다. 꾸미면 제법 예쁠, 귀여운 얼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외모가 어떻고 하는 수준의 문제를 벗어나 있는 것이다.

 “잠깐, 마녀…… 마녀라니……?”

 이제야 눈치 챈 위화감. 지금은 정상적인 차림새를 하고 있지만, 학교에서의 하리는 할로윈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챙이 넓은 검은 모자나 검은 망토 같은 걸 두르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런데도 다들 ‘독특’하다고 생각할 뿐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걸까. 어째서 교사들마저 아무런 주의를 주지 않았던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진아의 머릿속에 하얀 문양이 복잡하게 새겨진 어떤 문의 환영이 떠올랐다.

 “윽……!”

 다시금 엄습하는 날카로운 두통.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불쾌감이 든다.

 “안 돼…… 여기서 멈추면…… 안 돼!”

 그럼에도 진아는 계속해서 기억을 더듬었다. 확신은 없지만,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흐릿한 안개 너머에 손을 뻗을 수 있는 최후의 기회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머리를 쪼개 뇌수를 긁어내버리고 싶을 만큼 강렬하면서도 끈질긴 거미줄 같은 고통. 그래도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한발 한발 착실하게 칼바람 같은 노이즈의 폭풍을 헤쳐 나간다.

 “아…….”

 고통이 끝나고 새하얀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진아는 어느새 훌쩍 거리를 좁혀 하리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진아는 스스로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채 있는 힘껏 외쳤다.

 “내 기억을, 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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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 들은 BGM이 겻들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막장 스토리입니다)







BGM: G線上の魔王 - 道は氷河な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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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7)]


 - 하여간 너희들은 왜 이리 극단적이냐. 움직이기 전에 한번만 더 생각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진은 무사했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충돌하기 전에 낌새를 눈치 챈 시진이 밖으로 나와 말린 덕분에 아무 일 없이 끝날 수가 있었다.

 - 이래선 마음 놓고 샤워도 할 수가 없군. 걱정해준 건 고맙지만, 다음부터는 좀 더 침착해.

 모든 건 오해였다. 시진은 잠시 몸을 씻느라 전화를 받지 못한 것뿐이었고, 나루는 어젯밤 줄곧 집에 있었다고 한다.

 - 어제 일어난 살인사건이 내 탓인 줄 알았다니 날 어떻게 보고…… 내가 그렇게 분별없이 아무나 죽이는 미친 살인마로 보여요?

 응. 맞아. 잘 알고 있네.
 진아는 이렇게 답해주고 싶었지만, 더 이상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빈정거림을 꾹 삼켰다. 솔직히 어젯밤 나간 일이 없다는 나루의 말을 그대로 신용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선생님이 무사한 시점에서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진아 역시 할 말이 없지는 않았다.

 - 서, 성급하게 넘겨짚은 건 분명 내 잘못이지만…… 너, 넌 또 왜 대뜸 식칼부터 들고 덤벼들려고 한 거야? 호, 혹시 찔리는 데라도 있어?

 딴에는 상대에게 곤란한 질문을 던진 셈이었으나, 나루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 그야 언니가 샤워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 그, 그게 무슨 상관이야?

 - 그쪽이 욕탕이라도 훔쳐보려는 줄 알았죠. 아니, 실은 그런 목적으로 왔다가 지금 둘러대고 있는 거 아닌가요?

 경멸스럽다는 듯이 눈을 흘기는 나루를 향해 진아가 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 너, 넌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 네? 그야 발정 난 변태죠.

 - 너 정말……!

 진아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나직한 목소리가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 한번만 더 싸우면 둘 다 내쫓을 거야. 조용히 차나 마셔.

 반한 쪽이 진 거라고 했던가. 시진의 한 마디에 진아와 나루는 순식간에 온순한 강아지처럼 얌전해졌다.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셋이 차를 거의 다 비웠을 무렵. 문득 나루가 혼잣말처럼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뭐 그래도…….

 또 무슨 일로 시비를 걸려고 하나. 괜한 일로 싸우다 선생님한테 미움 받고 싶진 않은데. 참자. 참고 또 참자. 이렇게 마음을 다스리던 진아의 귀에 의외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 이유야 어찌됐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달리는 모습은 나쁘지 않네요…….

 “……!”

 현실로 돌아온 진아는 거울을 보지 않고도 귀까지 빨개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말 무심코 중얼거렸을 나루의 혼잣말. 원체 본바탕이 예쁜 탓일까. 평소의 적의 대신 들려온 순수한 호의의 한마디는 진아의 가슴을 강렬하게 관통했다.

 “으, 나 이렇게까지 지조가 없었나.”

 선생님을 향한 마음이 변한 건 아니다. 하지만 점점 나루도 귀엽게 보이는 자신에게 진아는 가벼운 환멸감을 느꼈다.

 “아니, 이건 우정, 친애, 인류애…… 그래! 그냥 같은 학년으로서, 같은 사람으로서! 잘 지내고 싶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인간적인 감정일 뿐이야……!”

 진아는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급히 새로 싹트려는 감정을 얼버무렸다. 대신 진아는 오늘 맛본 행복을 곱씹으며 되도록 즐거운 일을 상상하려 했다.

 “벌써 두 번이나 선생님 집에…… 후후, 이대로 서로 가까워진다거나 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꼭 가능성이 없는 망상만도 아니다. 비록 좋지 않은 일이 계기가 되긴 했지만, 이번 일을 통해 선생님과 번호도 교환하고 개인적인 친분도 쌓게 됐다.

 “나루는… 아직 좀 많이 무섭지만…….”

 칼을 들고 설치는 것만 어떻게 한다면, 어쩌면 서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루의 성격이 거칠고 행동이 극을 달리는 것은 분명 어릴 적 겪은 불행이 원인. 그렇다면 그건 나루 본인의 탓만이 아니다. 오히려 주변에서 그 아이를 위로하고 치유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선생님도 곁에 계속 있어주는 것일 테고…….
 이렇게 관점을 바꾸니 진아는 조금은 더 나루를 좋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진짜 친구가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지만…….”

 친구 사이에 좋아하는 상대가 같다는 것만큼, 즉 서로 연적이라는 것만큼 비극도 없지 않을까. 사랑이란 감정은 결코 깨끗하고 숭고한 것만이 아니다. 끊임없이 갈구하게 되는 거무칙칙한 욕망. 분명 그런 측면도 내포하고 있다. 진아는 그 심연에서 태어난 불타는 진흙 같은 적의를 친구에게 향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그런 미래가 있을 수 있다면……으!”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진아가 어제와 같이 트럭이 카페로 돌진한 사고현장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날카로운 두통이 그녀의 사고를 꿰뚫었다.

 “그, 그런 미, 미래가…….”

 미래? 그런 미래가, 있을 수 있나? 왜냐하면, 이미 ■■은 끝났는데…….

 “여긴…….”

 진아가 극심한 두통에서 벗어나자마자 그 눈에 들어온 것은, 검정을 기조로 흰색의 나뭇가지 같은 문양이 복잡하게 수를 놓고 있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문이었다.






 손님을 알리는 종소리에 마녀는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처음…… 뵙는 분이 아니네요. 이렇게나 빨리 두 번째 방문을 하시다니 이곳이랑 파장이라도 잘 맞는 걸까요, 아니면 아직 버리지 못한 미련이라도 강하게 남은 걸까요. 좋아요. 얘기해 보세요. 제 힘이 닿고 대가가 충분하다면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으니까요.”

 하얀 그림자 같은 방문자는 스스로의 소망을 입에 담았다.
 그러나 마녀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들어줄 수 없네요. 자신이 빈 첫 번째 소원이 뭔지 잊었어요? 아무리 사람의 마음이 변덕스럽고 제멋대로라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심했네요.”

 하지만 하얀 방문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마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전 딱히 심술을 부리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빈 소원과 대가가 일체화되어 있는 게 문제죠. 설령 제가 받은 걸 돌려주고 싶어도 그것이 동시에 소원이기도 한 이상 대가관계는 성립되지 않아요. 전 시혜가 아닌 계약의 마녀. 제 속성상 일방적으로 베푸는 건 불가능해요. 물론 제 자신이 대가를 치른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 당신은 자신의 변덕에 저보고 희생하라고 말할 생각인가요?”

 하얀 그림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떨구었다. 마녀의 말마따나 이기심으로 가득 찬 소원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그것을 손에 놔서는 안 됐다. 아무리 아파도, 설령 그 가시가 살을 찢고 심장을 뚫는다 해도 꼭 품에 안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마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너무 짓궂었군요. 저도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에요. 사랑이란, 참 소중하면서도 힘든 감정이죠. 이런 공간의 틈새까지 다시 찾아온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절실한지는, 잘 알고 있답니다. 그래도,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없네요. 조심히 돌아가세요.”

 상냥하면서도 단호한 슬픈 어조. 그 어떤 거친 말보다도 확실하게 마녀는 거절의 뜻을 전달했다.

 - 아, 아아…….

 어느새 바깥으로 나온 자신. 문이 닫히는 소리. 하얀 그림자는 움직일 수 없는 현실 앞에 한줄기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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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02.13 15:54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이제는 단지 그리운 울림의 잔향으로 化해버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난날의 소중했던 과거...

    간만에 반가운 이름이 등장해서 반색하다가, 이내 나래의 근황 소식에 일순간 안타까움을 느끼고 말았네요.

    또한 그 추억의 편린이 유일한 삶의 의미이자 표상이 되어버렸음을 깨달은 시진의 고뇌 역시...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평행 우주의 이야기일지도...? +_+;)


    아무튼 시진의 능력은 원거리 보조형의 마법사에 가까운 편이니, 나루야 말로 그 성정은 물론 광기의 능력 상으로도 근거리에서 시진에게 부족한 공격과 방어를 벌충해줄 수 있는만큼 이래저래 잘 어울리는 한쌍이 아닐까 싶습니다. :D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2.14 03:48 신고 address edit/delete

      앗, 예전 소설들의 등장인물들도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정확하게 봐주신 것처럼 위의 시진과 나래는 일종의 평행세계의 인물들이라 할 수 있어요. 그것도 원본과는 상당히 다른데, 굳이 비유하자면 죠죠 시리즈의 '일순 후의 세계'의 인물들처럼 예전 캐릭터가 모티프가 되었을 뿐인 전혀 '다른 인물'이라 할 수 있네요.


      여기서의 시진은 평범한 일반인에 가깝고, 나루 역시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디오와 디에고만큼이나 차이가 있네요^^;;

      자세한 내용은 차후 전개에서 밝혀나가도록 할게요~











(글을 쓸 때 들은 BGM이 겻들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막장 스토리입니다)







BGM: 11eyes arranged soundtrack - 赤き死のワル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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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6)]


 마녀는 차를 내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상에 맹신을 경고하는 이야기는 많지요. 실제로 누군가를, 무언가를 ‘무조건적’으로 믿는다는 건 매우 위험한 행위에요. 뜨거운 불속에 스스로 뛰어드는 것처럼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파멸로 치달을 수 있으니까요.”

 마녀는 찻잔을 입가로 옮긴 뒤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모든 걸 철저히 의심하고 따져 보자는 말 또한 현실성이 없고 문제점이 많죠. 우선 그렇게 행동하는 데는 너무나도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돼요. 짧은 인생, 빠르게 바뀌는 상황, 순간의 결단력을 요하는 시점에서 매번 그런 자세를 유지하다가는 마찬가지로 파멸하고 말겠지요. 게다가…….”

 관을 짊어진 금발의 소녀가 뒷말을 가로챘다.

 「의심의 중요성을, 이용당할 수 있지. 어느 개인, 어느 집단을 흔들고 싶은, 악의에 찬 선동가에게…….」

 “예, 진위를 파헤치자는 명목으로 애꿎은 사람을 잡거나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겠죠. 뭐 이런 부분은 세계의 여러 조직들과 암투를 벌이고 계신, 무형정원의 관리사 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비아냥거림이 섞인 마녀의 말에, 관을 진 인형 같은 소녀는 눈썹 하나 미동하지 않고 답했다.

 「우리는, 정치꾼이 아니야. 그저 올바른 이치의 흐름에 따라, 세계라는 정원을 관리하고 있을 뿐. 잘못된 가지는 쳐내고 해충을 잡아, 사랑스러운 꽃과 나무들의 성장을 돕고 있을 뿐…….」

 “와아. 이학의 정원사들께서 암투에 관심이 없으시다니, 용이 재화를 싫어한다는 얘기만큼 설득력이 있네요. 뭐 좋아요. 제가 묻고 싶은 건, 당신들이 말하는 ‘올바른 이치’와 ‘잘못된 가지’라는 구분이 정말 옳은지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전 굳이 치자면 맹신하다 파멸하기보다는 의심하다 파멸하자는 주의거든요.”

 가시가 돋친 마녀의 물음에, 금발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난, 너와 논쟁하러 온 게 아니야……. 허가를, 받으러 온 것도 아니고. 난, 단지 양해를 구하러 왔어. 이 도시의 마녀에게, 내 활동을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만약 양해할 수 없다면?”

 「장애는, 배제할 뿐이지.」

 관으로 손을 옮기며 회색 눈동자를 예리하게 빛내는 금발소녀.
 마녀는 챙으로 한쪽 눈을 가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건 양해가 아니라 ‘통보’죠. 아무래도 언어공부를 다시 하셔야 될 것 같네요.”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배려를 했어. 대답은……?」

 얼버무릴 여지를 주지 않는 재촉에 마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걸 꼭 입으로 말해야 해요? 본업은 일개 여고생에 불과한 제가 당신들에게 대적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아니면 뭔가요? 저처럼 불쌍한 약자에게 굳이 항복 선언을 들어야 속이 풀리는, 사디스트인가요?”

 「지나친 겸손은, 오만이야. 선천적으로 별의 의식구조체에 접할 수 있는 너와 같은 마녀들……. 너희들은, 우리들 이학사가 평생을 걸려도 닿을 수 없는 영역에, 처음부터 발을 딛고 서 있지……. 농담으로라도, ‘불쌍’하다는 말은 쓰지 마…….」

 상대의 회색 눈동자에서 검은 불꽃같은 정념을 발견한 마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얼마간 축복 받은 체질이라는 건 사실이니 귀담아 듣죠. 애당초 당신들과 싸우면 엄마들이 곤란해할 테니 일을 크게 벌일 생각은 없어요.”

 「엄마들…… 공간정형자와 별의 총애를 받는 따님인가……. 나도 그녀들과 부딪치고 싶지는 않아. 그래서, 너를 찾아온 것도 있지.」

 “흥. 그럴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라면 당신 같이 300년 묵은 괴물이 나 같은 애송이에게 양해를 구하는 척이라도 할 리가 없으니까요. 아무튼 난 다른 마녀들과는 달라요. 이 도시의 지배자도 자경단도 아니에요. 약간의 대가를 받고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동화 속 마법사 같은 존재라고 할까요. 당신에게 직접적으로 방해될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하죠.”

 체념하듯 입을 놀리던 마녀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당신도 한 가지 명심해 주세요. 지금 이 도시에는, 저는 물론 당신조차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존재가 있다는 것을. 진정한 밤의 지배자가 있다는 사실을.”

 「밤하늘의 고래를 쓰러뜨린 흡혈귀…… 지금은 엘리자베스라 불리고 있었나.」

 “역시 정원사들도 알고 있었군요. 그럼 이야기가 빠르죠. 더 잘 아시겠지만, 부디 자중하세요. 너무 일을 크게 벌이다 자칫 그녀의 혈속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이 도시 자체가 증발할지도 모르니까요.”

 위협과 걱정이 절반씩 섞인 마녀의 주의에 인형 같은 소녀는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걱정 마. 내 일은, 영원을 사는 자들과는 관계없으니까……. 오히려, 우리 유한한 인간들과 관련된 일이지……. 아까, 무엇이 올바른 이치고 무엇이 잘못된 가지인지 어떻게 장담할 수 있냐고 물었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알 수 있어. 무엇이, 어떤 열매를 맺는지, 보이니까…….」

 관을 진 소녀는 가슴께의 은색 펜던트를 꼭 쥐며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난 지금부터, 대형살인마를 처단하러 갈 거야.」






 목이 달아난 한 구의 시신과 심장이 꿰뚫린 두 구의 시신.
 본래 보도통제가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나, 언론의 자유를 갈구하는 어떤 발 빠른 기자에 의해 손 쓸 틈도 없이 세간에 공개되고 만 이 잔인한 사건에, 진아는 해가 진 거리를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선생님, 제발……!’

 뉴스를 보자마자 진아는 그 사건이 나루가 저지른 일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어떤 확증도 없었지만, 자신에게 무턱대고 식칼을 휘두르던 그 소녀가 언제 어떤 참상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전 가르쳐준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아무도 받지 않자, 이미 진아의 몸은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바깥을 뛰고 있었다.

 ‘설마 목격자를 처리하기 위해, 벌써……!?’

 나루가 감추고 있던 살인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이윽고 사람을 죽이고 만다. 하필이면 그 사실을 선생님에게 들킨다. 나루는 죄를 감추기 위해 선생님마저…….

 ‘아냐! 그럴 리 없어!’

 진아는 불길한 상상을 내쫓듯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루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시진이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하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빨리, 더 빨리……!’

 진아의 각력은 이미 상궤를 일탈해 있었다. 달리는 차에도 뒤처지지 않는 빠르기.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 눈을 의심하며 경악했지만, 그녀는 오로지 좋아하는 선생님의 안부를 한시라도 빨리 확인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주변에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다, 왔다……!”

 진아는 가볍게 숨을 돌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딱 한 번 와봤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풍경. 좋아하는 시진 선생님이 살고 있는 골목의 풍경이다. 진아는 고요한 이 골목처럼 선생님에게도 아무 일 없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나 아담한 빨간 벽돌집의 대문 너머에서 들린 목소리는 그녀가 기대하던 음색이 아니었다.

 “역시나 다시 왔군요. 언니에 대한 미련을 그렇게 버릴 수 없다면, 내가 몸소 끊어주는 수밖에 없겠네요. 문자 그대로.”

 끼익. 문이 열리고 가로등 불빛 아래 비친 모습은, 검붉은 식칼을 쥐고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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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막장 스토리입니다)







BGM: Fate / Extra CCC ost Aeri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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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5)]


 불길한 까마귀 같은 밤의 정적.
 아스라한 환영 너머 실재가 몸을 숨기고 몽환의 그림자가 그 세를 과시하기 시작할 때, 관棺을 끄는 소녀는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은, 누구나가 앞을 못 보는 맹인……. 인생은, 불빛 하나 없이 그 어둠 속을 더듬는 것…….」

 달빛에 반짝이는 길고 가는 금발. 깊게 침전된 어두운 회색 눈동자. 유리 세공품처럼 무기질한 미모를 뽐내는 소녀는,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크고 헐렁한 검은 코트로 감추고 있었다.

 「만약,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둠을 밝힐 수단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소녀의 큼직한 코트를 군데군데 고정하듯 묶고 있는 녹슨 쇠사슬. 그 검붉은 강철의 고리들은 소녀가 끌고 있는 은색 관에도 연결되어 있었다.

 「사람의, 올바른 성장을 방해하는 존재들……. 세상의, 원활한 흐름을 저해하는 장애들…….」

 소녀가 걸음을 옮기는 밤벚꽃의 오솔길. 옅은 가로등 불빛에 그 자태를 뽐내는 무수한 꽃잎들이 바람에 흩날려 춤추듯 한들거린다.

 「그것들, 모두를…… 제거할 책임을, 완수해야 돼…….」

 소녀가 끄는 관이 활짝 열린 순간, 흐드러지게 핀 벚꽃들이 깊은 어둠 속에 흩어졌다.






 모든 것은 필연이다.
 세상은 거대하고도 복잡한 인과관계로 엄밀하게 이루어져 있으며, 모든 일은 마땅한 원인 위에 합당한 과정을 거쳐 타당한 결론을 도출해낸다.

 하지만 그것은 범우주적이고도 초월적인 전지자의 시점에서나 가능한 말.
 한치 앞도 제대로 보기 힘든 사람의 지성으로는 그 모든 방대한 구조를 이해하고 해석하기란 요원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불행이란,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악의에 찬 우연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일가족 몰살.
 5년 전 어린 나루의 일상에 예고 없이 닥친 압도적인 현실에 이름을 붙이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4인의 살인강도들은 다짜고짜 현관으로부터 당당히 침입해 그녀의 양친을 칼로 난도질했다.

 거기엔 아무런 이유도 맥락도 없었다.
 그저 사람을 죽이고 금품을 빼앗겠다는, 즉 먹잇감을 사냥해 배를 채우겠다는 원초적인 욕망만이 폭주하고 있었을 뿐.

 후일 밝혀진 부검결과에 의하면 이 강도들은 불법적인 약물에 취해 있었다고 한다. 그밖에 막대한 빚이나 누적된 전과 등으로 밑바닥까지 떨어진 인생들이라는 점에서도 범행동기를 유추할 수 있었으나, 당장 위기에 몰린 나루 가족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실들이었다.

 - 나, 나루야! 빠, 빨리…… 여기! 여기로 도망쳐……!

 3살 많은 나루의 언니는 부모가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도 울음을 꾹 참으며 침착하게 동생을 피신시키려 했다. 하지만 소녀들의 기지와 행동에는 한계가 있었고, 탈출은 실패한 채 곧 강도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 오, 오지 마! 내 동생한테서, 떨어져! 저리 꺼져!

 궁지에 몰린 나루의 언니는 급한 대로 부엌의 식칼을 필사적으로 휘두르며 동생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그 행동은 도리어 강도들의 화만 돋우었을 뿐으로, 나루의 언니는 부모들처럼 허망하게, 그리고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 하하, 하하하…….

 죽은 언니의 시체를 눈앞에 두고, 나루는 웃었다.
 웃었다는 사실은 5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왜 웃었는지는, 아무리 기억을 반추해 봐도 알 수 없었다.

 - 하.

 단지 나루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그건 언니가 떨어뜨린 식칼을 자신이 주웠다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해친 놈들에 대한 증오가 모든 것을 압도했다는 감각뿐이었다. 이를테면, 세상의 이치마저도.






 검게 가라앉은 정적으로 치장된 밤.
 서로가 서로를 소중하게, 하지만 확연한 거리를 두고 품고 있는 한 여성과 한 소녀. 한껏 무르익은 여성의 육체 안에 갓 피어난 싱그러운 소녀의 몸은 지친 듯이, 하지만 평온히 잠들어 있었다.
 시진은 나루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아직도, 꿈을 꾸면 우는군…….”

 분명 시진의 품에 안긴 나루의 얼굴은 고요했다. 그러나 눈가에 맺힌 작은 이슬은, 그녀의 상처가 어떤 위안으로도 씻어낼 수 없음을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다.

 “언니…… 나래 언니…….”

 잠결에 죽은 언니 나래를 부르며 한줄기 눈물을 흘리는 나루. 시진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그 누구보다 그 눈물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넌, 나래를 아주 잘 따르고 좋아했지. 숭배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언니 나래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빼어난 외모에 다정한 성격. 겉과 속이 크게 다르지 않은 데다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하면서도 타인에게는 절대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는 법이 없어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죽음은, 끝인 동시에 완성이지…….”

 나래는 목숨이 위험한 극한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동생을 지키려다 죽었다. 그 죽음의 순간은 나루의 망막에 강렬히 새겨졌고, 그 숭배는 흔들림 없는 영원성을 획득했다.

 “넌, 날 사랑하는 게 아니야. 단지 나래의 그림자에 기대고 있을 뿐이지.”

 지금 나루가 마음을 주고 있는 건 시진이 아니라 시진 「언니」에 불과하다. 죽은 친언니의 대체물에 시진을 선택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진실과 마주하기에는, 나루의 정신은 너무나도 위태로웠다.
 시진은 잠든 나루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래도, 지켜줄게. 끝까지 함께 해줄게. 나래를 사랑했고, 나래가 사랑했던 사람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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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막장 스토리입니다)







BGM: よるのないくに2 OST - 黒衣の円舞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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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4)]


 달빛이 일렁이는 커피를 머금는다.
 맛이 쓰다거나 저녁에 마시면 잠을 이루기 힘들지 모른다거나, 그런 생각은 진아의 머릿속에 일절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으로 들어와 보는, 좋아하는 선생님의 집.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진아는 일시적이나마 극도의 충만감을 느꼈다.

 ‘엄청 깨끗해…….’

 잔잔한 조명 아래 가지런히 정리된 가구들.
 학교에서의 정갈한 인상을 투영이라도 한 듯 시진의 집안은 너저분한 구석 없이 모든 게 깔끔했다. 예고도 없이 방문 – 이라기보다는 불법침입이었지만 – 하게 되었으니 딱히 치울 틈도 없었을 터. 이는 시진의 평상시 생활모습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기대이상이야.’

 진아는 점점 고조되는 흥분을 멈출 수 없었다.
 물론 좋아하는 상대가 얼마간 의외의 일면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로 진아는 쉽게 그 마음을 접을 생각은 없었다. 설령 치우기 싫어해 지저분하게 하고 산다거나, 생각보다 입이 거칠어 천박해 보인다 해도 진아는 환멸하지 않고 받아들일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환상은 깨지지 않을수록 좋다.
 종종 결혼하거나 오래 사귄 커플이 별다른 갈등 없이 깨지는 경우가 있는 것도 서로에게 탐할 환상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매체에서 결혼 후에도 상대를 위해 ‘꾸미는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아주 발정 난 얼굴이네요. 미리 말해두지만 이 집은 다 제가 치운 거예요. 언니는 그쪽이 생각하는 것만큼 깔끔한 성격 아니니까, 괜한 환상 갖지 말아요.”

 옆에서 들려오는 적의에 찬 나루의 목소리. 덕분에 꿈이라도 꾸듯 둥실둥실 들떠 있던 진아의 기분은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진정될 수 있었다.

 ‘얘, 진짜 뭐야……!’

 진아는 말없이 눈매를 좁히며 자신을 감시하듯 날카롭게 응시하는 나루의 얼굴을 마주 노려봐주었다.
 펌이라도 한 듯 보기 좋게 부푼 단발머리와 체형에 딱 맞춰 입은 맵시 있는 교복. 얼굴도 그 차림새만큼이나 단아해 당장 아이돌 가수들 틈에 껴 있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것만 같다. 기본적으로 연상취향인 진아마저 순간 침을 꿀꺽 삼키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미모였다.
 하지만.

 ‘멀쩡한 건 겉뿐. 속은 완전 맛이 갔어!’

 방금 전까지 식칼을 휘두르던 귀기 어린 모습을 목격한 진아로서는 도저히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애당초 좋아하는 상대의 입술을 빼앗은 시점에서 연적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표정들 좀 풀어라. 차분히 대화를 하려고 들어오라고 한 건데,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면 될 얘기도 안 돼.”

 무언의 교착상태가 계속되자 보다 못한 시진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시진은 간단하게 준비해온 과자를 상 위에 내려놓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할 얘기는 여럿 있지만 우선 중요한 것부터 물어볼까. 우리 집은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학교에선 말하기 힘든 상담거리라도 있는 거야?”

 “그, 그게…….”

 시진의 부드러운 어조에 진아는 머뭇거리며 좀처럼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자신의 숨겨온 마음을 적나라하게 밝힐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고민은 오래 가지 못했다.

 “뭘 빤한 걸 묻고 그래요. 이 사람, 언니가 좋으니까 몰래 집까지 쫓아온 거예요. 완전 스토커 같은…… 아니, 그냥 스토커죠 이 경우는? 아, 소름끼쳐!”

 과장되게 양팔로 몸을 감싸며 눈을 흘기는 나루.

 “…….”

 진아는 소름끼치는 건 너라며 반박하고 싶었지만, 스토커 같은 짓을 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기에 가만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야?”

 미심쩍은 듯이 되묻는 시진에게 진아는 잔뜩 빨개진 얼굴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진은 난처한 듯 머리를 살짝 긁은 뒤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음은 고마워. 하지만 네 마음에 응해 줄 수는 없어. 교사로서, 학생과 사귈 수는 없으니까. 이해해주길 바라.”

 틀에 박힌 거절문구.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채 학교에서 들은 말이었다면, 학창시절 실연의 아픔으로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정을 다 알고도 이대로 물러나는 일은, 이제 불가능했다.

 “그, 그런 변명하지 마세요! 그럼 얘는, 이 나루인지 뭔지 하는 얘는 뭔가요!? 얘랑은 키, 키스도 하고, 도, 동거까지 하고 있으면서……!”

 진아는 결코 눈썰미가 나쁘지 않다. 언뜻 화려하게 꾸미고 다니기나 좋아하는 생각 없는 여자애라는 편견을 가지기 쉽지만, 실제로는 항상 날카롭게 주위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진아는 이 집에 들어오며 대강 눈에 둔 가정용품이나, 방금 나루의 ‘자신이 집을 치웠다’라는 말에서 두 사람이 같이 살고 있음을 눈치 채고 있었다.
 나루는 팔을 뻗어 시진의 목을 감싸 안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야 그쪽은 일개 학생 A에 불과하지만, 난 엄연히 언니의 히로인이니까요.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같이 살고 있는 게 뭐가 이상한가요?”

 슬슬 머리에 열이 올라 죄책감이 옅어진 진아도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넌 좀 닥쳐! 난 지금 선생님한테 물은 거니까. 게다가 뭐야, 그 재수 없는 존댓말은? 너 나랑 같은 학년이라며? 하나도 예의 바르게 안 보이고 그냥 열 받기만 하니까 요자 붙이면서 빈정거리지 좀 마!”

 그러나 나루는 더 도발하듯이 비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그쪽이 열 받든 말든 내 알바 아니죠. 그리고 난 지금 그쪽을 존대하는 게 아닌데요? 조금이라도 더 거리를 두고 싶어서 일부러 요자를 쓰는 거지. 서로 말 놓으면 친해 보일 수도 있잖아요. 근데 난 그쪽이랑 조금도 친하게 지낼 생각이 없거든요.”

 “그, 그럼 선생님한텐 왜 존댓말을 쓰는데? 가, 가까운 사이라며?”

 힐난하듯이 따지는 진아에게 나루는 한심하다는 듯이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연장자한텐 존대를 해야죠. 그런 것도 몰라요? 아, 물론 그쪽이 연상이었다면 당연히 난 반말을 했겠지만. 나이 먹었다고 무조건 존경 받을 수 있다는 환상에선 일찌감치 벗어나세요.”

 “으……!”

 언변이 그다지 좋지 못한 진아로서는 나루의 말발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런 진아를 약 올리듯이 나루는 시진에게 한층 얼굴을 가까이하며 입을 열었다.

 “그쪽처럼 말로는 못 알아먹는 사람에겐 확실하게 ‘보여주는’ 게 제일이죠. 언니랑 저 사이에 제3자가 파고들 틈이 없다는 걸 다시 한 번……아푸!”

 나루는 재차 키스를 시도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시진의 손에 막혀 버리고 말았다. 시진은 불만스럽게 목소리를 높이는 나루의 항의를 무시하며 진아를 향해 지친 음색으로 말했다.

 “전혀 설득력 없게 들리겠지만, 나루와 난 결코 그런 사이가 아니야. 난 이 아이의…… 보호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지러진 푸른 달 아래 진아는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니 벌써 날은 제법 어두워져 있었다.

 - 밤중에 혼자 보내 미안하다.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망설이지 말고 전화해. 곧장 달려갈 테니. 집에 도착해서도 전화주고.

 처음에는 시진이 바래다준다고 했으나, 나루의 살기가 워낙 무시무시해 결국 그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만약 시진이 진아와 함께 나섰다면 다시 한 번 칼부림이 벌어졌을 것이다. 사실 진아는 나루가 날뛰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좋아하는 선생님이 곤란한 얼굴을 하는 게 싫어 혼자를 자청했다.

 “대체 뭐가 뭔지…….”

 한꺼번에 너무나도 많은 것이 벌어진 날.
 충동적으로 좋아하는 선생님을 미행했더니, 사실 그 선생님은 어떤 여자애와 동거하며 서로 키스까지 나누는 사이였고, 그 모습을 몰래 훔쳐보다 들킨 자신은 그 여자애에게 칼로 찔려 죽을 뻔했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진아는 오늘 자신이 겪은 일에서 더욱 현실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선생님의 말마따나 둘이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는 건 진짜인 것 같아…….”

 변명이 아닌 담담하게 사실을 전하는 시진의 어조. 본인에게 미리 간단하게 양해를 얻고 시작한 이야기에 따르면, 나루는 5년 전 어떤 불행한 사건으로 가족을 잃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모양이다. 그렇게 고아가 된 나루를 이제 간신히 사회 초년생 딱지를 뗀 시진이 몸소 거두었다고 한다.

 - 나루에겐 달리 친척도 없었거든. 반면 우리 집은 전부터 나루네 집과 교류가 있었고, 또 난 나루의 친언니와 각별한 사이였던 것도 있어서…… 뭐, 아무튼 그런 경위로 내가 이 아이의 보호자가 된 거야.

 보호자라고는 해도 집안일은 내가 더 도움을 받고 있지만, 하고 시진은 쑥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진아는 그 웃음에 한층 선생님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젊은 나이에 남의 집 아이를 선뜻 맡겠다는 결심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아가 그 마음을 전하자 시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 아니,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나루가 날 잘 따라줘서 감사하지.

 -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언니 같은 분을 만난 거야말로 정말 감사할 일이죠! 정말 일생일대의 행운이에요.

 나루의 호감은 어디까지나 일방적일 뿐. 시진에겐 나루를 향한 가족의 정은 보여도 연애감정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출발선상은 같다. 자신과 나루 사이에 결정적인 우열은 없을 터. 적어도 이때의 진아는 그렇게 낙관하고 있었다.
 대충 이야기가 매듭이 지어지자 시진은 고개를 숙이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 교사로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 정말 미안하지만, 여기서 있었던 일은 다 잊어주었으면 해. 나루도 더는 일을 크게 키우지 않을 거야. 약속하지.

 - 그건 그쪽하기에 달렸죠. 혹시라도 이번 일을 빌미로 시진 언니를 협박한다거나 하면…….

 나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아는 좋아하는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나루는 멍한 얼굴로 잠시 진아를 바라보다 곧 표정을 다 잡았다.

 - 말로는 뭐든지 할 수 있죠. 뭐 만약의 경우가 생겨도 넷에 하나가 더해지는 것뿐이니까…….

 또 어디선가 꺼내든 식칼을 쓰다듬으며 섬뜩하게 중얼거리는 나루. 그 말의 진의를 묻기도 전에 시진이 부드러우면서도 엄격함이 깃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너희들이 내게 호감을 품어주는 건 고맙고 기쁘게 생각해. 하지만 너희들이 아직 어리기 때문이야. 아직 학교라는 좁은 세상밖에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 같이 한심한 어른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거지. 때가 되면 너희들에게 어울리는 진짜 상대가 나타날 거야. 그때까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좀 더 소중하게 여겨.

 진아와 나루는 그렇지 않다고 격렬하게 부정했지만, 시진은 슬프게 웃을 뿐 어떤 대답도 돌려주지 않았다.

 “이 마음은, 한때의 감정錯覺 같은 게 아닌데…….”

 가슴을 꼭 움켜쥐고 달을 올려다보며, 진아는 여기 없는 상대를 향해 작은 항의의 목소리를 울렸다. 물론 달이 대답할 리는 없었고, 그녀는 허무하게 위로 올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여긴…….”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번화가의 교차로.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진아가 사는 아파트가 나온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집으로 가는 길목이 아닌 엉망진창으로 무너진 1층의 한 카페였던 장소였다.

 “며칠 전, 트럭이 돌진했다고…….”

 원인은 음주운전이었나 졸음운전이었나. 가게의 대부분이 파손되고 운전사를 비롯해 사망자가 여럿 나온 참사였다고 한다. 분명 그때 자신도――――

 “으……!”

 흐릿하게 피투성이가 된 손을 떠올리는 순간, 진아는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더 이상은 안 된다. 더는 떠올려 봤자 괴롭기만 할 뿐이다. 그래도 떠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떠올려 봤자 결말은 바꿀 수 없이 마음만이 무너질 뿐이다――――

 “뭐야, 대체…….”

 진아는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초조함에 몸을 덜덜 떨며 급히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우울한 자신을 감싸주듯 포근하게 느껴지던 달빛이, 지금은 뒤에서 비웃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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