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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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환상정원 가꾸기'에 해당되는 글 480건

  1. 2018.11.10
    아즈마 림, 한 VTuber의 좌절과 기업윤리에 대한 단상 (11. 12. 추가)
  2. 2018.10.26
    [혼혈마왕의 전후처리] 03. 선택의 순간 (後) (2)
  3. 2018.10.21
    [혼혈마왕의 전후처리] 03. 선택의 순간 (前) (2)
  4. 2018.10.11
    [혼혈마왕의 전후처리] 02. 미로의 입구
  5. 2018.09.08
    [혼혈마왕의 전후처리] 01. 마왕이 된 이유 (2)
  6. 2018.08.23
    [혼혈마왕의 전후처리] 00. 얼어붙은 시간 (2)
  7. 2018.07.31
    역사는 증오하기 위해 배우는 게 아니다 (2)
  8. 2018.06.15
    기회 또한 위기일 수 있다 (10)
  9. 2018.03.13
    [단편] 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完) (2)
  10. 2018.03.12
    [단편] 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15) (2)






※ PC기준으로 작성된 포스팅입니다.

※ 기업 쪽의 해명 없이 해당 VTuber의 트위터 고발만을 참조해
작성한 글로서 차후 사실관계가 변동될 수 있습니다.

※ 11. 12. 사측의 사과문이 발표돼 번역과 함께 첨부합니다.










자작 그림이 곁들어 있습니다.
부족한 실력이니 심미안이 민감하신 분들께서는
살짝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주세요.











출처: https://twitter.com/azuma_lim


 솔직히 조금은 기대했었다.

 아무래도 팬들에 의한 유튜브 수익이 기반인 버츄얼 유튜버라면 기존 예능계나 성우계에 비해 좀 더 깨끗하고 순수한 일면이 있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역시 ‘돈과 기업’이 관련되는 이상 어디서나 비슷한 일은 일어나는가 보다. 심지어 내가 몰랐을 뿐으로, 다른 분들의 댓글을 보니 이미 유사한 전례가 VTuber계에서도 두 차례나 있었다고 한다.

  물론 기업도 자선사업을 하는 게 아닌 만큼 엄연히 그 투자를 받았다면, 될 수 있는 한 그들의 의향에 따라주어야 함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기업이 돈을 투자했다는 것만으로 어떤 콘텐츠를 형성하는 데 지대한 기여를 한 중심인물의 뜻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아예 자르기까지 하는 일이 마음대로 허용되어도 괜찮은 걸까.

 이번 사안에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분들도 케모노 프렌즈의 타츠키 감독 강판사태나, 코나미 사에서 내쫓기듯이 퇴사한 메탈기어 시리즈의 코지마 히데오 감독을 떠올리는 모양이다. 특히 1년 전, 타츠키 감독 강판사태 시 어떤 분이 모 그림 사이트에 올린 댓글에 매우 공감을 했었는데, 잠시 소개해 보겠다.



 매일 같이 신문지상을 차지하는 기업들의 횡포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사업주에 해당하는 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분 또한 갑질 회장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업주의 생각을 요약하자면, ‘내 돈을 내가 마음대로 쓰겠다는 데 남들이 웬 참견이냐’라는 것과 야근하는 직원들을 향해 ‘남의 돈을 받으려면 당연히 고생을 해야지’라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용기가 없어 ‘그건 남의 돈이 아니라 그들이 정당하게 일해서 받은 대가입니다’라고 받아치지 못한 게 아직도 한으로 남아 있다.

 아마 그런 사람들이 자기 돈과 회사 돈을 구분하지 못하고 함부로 사용하다가 횡령죄로 처벌 받곤 하는 것이리라. 횡령죄에 대한 판례를 보면 설령 1인 회사의 1인 주주라도 함부로 회사의 금원을 처분하면 업무상 횡령죄가 성립하는데, 나는 이 법리가 단순히 법적으로 회사와 주주가 별개의 인격으로 규정되어 있어 그런 판결을 내린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사견이지만, 그러한 법리의 배경에는 아무리 개인 소유라도 일단 회사가 설립된 이상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해야 하고, 마찬가지로 그 회사에 근무하는 근로자들의 권리 또한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즉, 내 돈이라고 해서 마냥 내 마음대로 쓸 수는 없다는 얘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곧 명예와 권력으로 이어진다. 힘 있는 자의 이른바 ‘갑질’이 옳지 않다는 데 동의하시는 분이라면, 자본을 투자했다고 해서 곧 무한한 권리를 행사할 수는 없다는 데 역시 동의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 11. 12. 사측의 사죄문 추가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간단히 요약하자면, 버츄얼 유튜버 아즈마 림의 의향을 존중하지 않고 일을 진행해 소동을 일으키게 되어 모두에게 죄송하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아즈마 림은 본인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강제로 변화하는 일 없이 활동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는 데 서로 합의를 봤다는 내용이다.

 이에 아즈마 림 역시 본인의 유튜브 채널에 이번 일에 대해 모두에게 폐를 끼쳐 죄송하고 또 도와줘서 고맙다는 사죄 & 감사 동영상을 올리는 것으로 우선은 일단락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부디 기업의 사죄가 단지 이슈를 잠재우기 위한 일시적인 것이 아니기를, 또한 해당 VTuber 역시 국내 모 항공사의 모 사무장 사례처럼 복귀 후 음성적인 보복을 받아 고생하는 일 없기를 바랄 따름이다. 아무튼 CyberV의 사과문과 결정이 진정성 있는 것이라는 전제 하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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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








03. 선택의 순간 (後)


 “왜 마족 어린애가 거리 한복판에 있는 거지……?”

 자신의 허리를 꼭 붙들고 있는 녹색머리 소녀에게 세실리아가 보인 감정은 공포나 혐오 이전에 당혹감이었다. 그녀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이곳은 좀처럼 마물들을 찾아보기 힘든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도서관의 이름을 그대로 딴 이 헤미스피어 시市는, 인류의 세력권 깊숙이 위치하고 있다. 덕분에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도 ‘아직은’ 마물들의 위협이 직접적으로 닿지 않는, 몇 안 되는 안전지대 중 하나였다.
 난 잠시 상황도 살필 겸 우선은 사소한 사항부터 정정하기로 했다.

 “걘 어린애가 아닌데요. 엄연한 요정fairy의 성체에요.”

 “페, 페어리라고……? 그것들, 손바닥에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작은 게 아니었어!?”

 세실리아의 귀여운 오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하하, 소문은 과장이 섞이기 마련이죠. 이미 말했듯이 다 자란 게 저 크기인 데다, 개체의 따라선 더 작은 녀석들도 없는 건 아니니 그런 인식이 생길 수도 있겠네요.”

 “우……. 모를 수도 있지 웃을 것까지야…….”

 내 태도에 마음이 상했는지 세실리아는 살짝 눈을 흘기다 다시 자신의 허리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요정 소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아이, 덜덜 떨고 있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요정 소녀를 걱정하는 세실리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왕군을 용서할 수 없다는 그녀도 역시 이런 작은 아이에게까지 적의를 드러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난 그녀를 이중적이라 비난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적敵을 온전히 적으로밖에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의 적이 아닐까.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거, 생각보다 일이 귀찮아질 수도 있겠는걸.’

 요정fairy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부 ‘여왕’으로 분류되는 극소수의 특수개체를 제외하면 대부분 별다른 마력도 없고 육체적인 힘도 떨어지며 성격마저 소극적인 겁 많은 종족에 불과하니까. 다만 요정들은 정안淨眼이라 하여 선한 존재와 악한 존재를 간파할 수 있는 신비한 눈을 가지고 있다. 표현은 거창하지만 요는 누가 위험하고 그렇지 않은지 본능적으로 민감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는 뜻이다.

 ‘뭐 나보다 세실리아를 고른 건 그렇다 쳐도, 문제는 요정이 위협을 느끼고 도망치게 만든 누군가가 있다는 뜻인데…….’

 불길한 예감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아! 저기 있다! 거리까지 도망쳐 나오다니, 하여간 사람 귀찮게 하기는!”

 크게 소리 지르며 골목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두터운 방어구에 대검과 소총으로 무장한 험상궂은 인상의 한 용병이었다. 그녀가 용병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던 것은 딱히 내 통찰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의 기계식 의수와 의족에 용병협회의 인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용병은 천천히 우리에게 접근해오며 입을 열었다.

 “이봐, 거기 아가씨들! 내 페어리를 ‘보호’해줘서 고맙군. 많이는 못 주지만 조금은 사례할 테니 순순히 넘겨…….”

 - La___Da___De___Na___IE___Ah____!!!

 하지만 용병은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요정 소녀가 갑자기 울부짖으며 한층 세실리아에게 꼭 매달렸기 때문이다.

 “뭐, 뭐야!? 뭐라고 하는 거야?”

 혼란스러워 하는 세실리아를 향해 난 간단히 설명했다.

 “납치범에게서 살려달라고 하네요. 자기는 숲에서 과일을 따먹으며 지내고 있었을 뿐인데, 무서운 사람들이 와 다 불태우고 이렇게 낯선 곳으로 끌고 왔다는 모양이에요.”

 요정들의 말은 일종의 압축언어로서 발음뿐만 아니라 소리의 크기, 길이, 높낮이, 그리고 무엇보다 마력의 함유량이 한 단어에 복합적으로 들어가 중첩적으로 뜻을 이루고 있다. 때문에 지성 없는 마물들은 물론 학식 높은 언어학자들 중에서도 마력을 감지할 수 없는 사람은 요정들의 언어를 배울 수가 없었다.

 “저 짧은 말에 진짜 그런 뜻이……? 아니, 잠깐! 너 이 아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거야!?”

 멍하니 감탄하다 날카롭게 위화감에 눈치 챈 세실리아. 아니 실은 아직도 당황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눈앞의 용병보다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고 있는 걸 보면. 아무튼 실수한 건 어쩔 수 없으니 대충 얼버무리자.

 “아…… 실은 어렸을 때 요정들에게 납치Changeling당한 적이 있어서요. 다행히 무사히 돌아오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때부터 마물들이 하는 얘기를 대충 알아들을 수가 있네요.”

 “어쩐지…… 그래서 그런 성격이…….”

 아련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혼자 무언가 납득하는 세실리아. 음, 이런 허술한 변명에도 속아 넘어가는 건 다행이지만,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반면 우리에게 대놓고 무시당하고 있던 용병은 뭐가 좋은지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어이, 꼬맹이! 너 진짜 페어리 말을 알아듣는 모양인데! 마침 잘 됐어. 아무래도 요정언어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저 녀석도 좀 더 비싸게 팔아치울 수 있겠지. 이봐, 꼬마야! 이 언니 좀 도와주지 않을래? 용돈은 섭섭지 않게 쥐어줄게.”

 음, 꼬맹이라는 건 설마 할 것도 없이 날 말하는 거겠지. 게다가 자기 사업을 보조해주는 상대에게 지급하겠다는 대가를 용돈 취급. 처음부터 협조할 생각도 없었지만, 말할 것도 없이 사회적으로 절대 어울려서는 안 되는 신용 없는 부류다.
 하지만 내가 거절하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세실리아였다.

 “잠깐, 팔겠다니…… 설마 이 페어리를 인신매매하겠다는 건가요?”

 용병은 눈을 가늘게 뜨며 사납게 웃음을 지었다.

 “이봐이봐, 아가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 되지. 페어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어디가 ‘인신’매매라는 거냐?”

 “그, 그건…… 하지만 이 페어리는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고 독자적인 언어를 말할 줄 아는 지성체에요. 그렇다면 유사인류권익보호법에 저촉되는…….”

 “푸, 후하하하하하하하하하!”

 용병은 큰 웃음으로써 세실리아의 말을 무참히 묻어버렸다.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그럼에도 용병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웃었다. 그 웃음은 어쩐지 비명처럼 들리기도 했다.
 잠시 후 웃음을 멈춘 용병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전쟁에서 마물들에게 사람들이 얼마나 죽은 지 알고도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놈들의 이빨 앞에서도 어쩌구 보호법 얘기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

 세실리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물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개하다 이번에는 허울 좋은 법 규정을 들먹이며 이상론을 펼치는 자신. 내실 없이 상황에 따라 ‘멋진 모습’만을 취하려고 하는 자신이 얼마나 얄팍한지 모를 만큼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다.

 ‘변명이지만, 이게 내가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였지.’

 나는 인간들 쪽에 상당히 기울어진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인간들을 지키기 위해 마왕군에 맞서 싸운 적은 거의 없었다. 딱히 선대 마왕이 무서웠던 건 아니다. 문제는 내 망설임. 인간들이 다른 종족들에게 벌여온 갖은 만행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선뜻 마물들을 칠 기분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론 어느 쪽이든 크게 다르지 않아.’

 그렇다고 쉽사리 마물들의 손을 들어줄 수도 없는 것이, 그들 역시 과거 강성했을 때는 나약한 인간들을 한갓 먹잇감으로밖에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세력구도의 역전이 일어난다면 이번에는 인간들이 비참한 처지에 빠지고 말 것이다.

 - La___

 작게 소리 내어 울며 걱정스럽게 세실리아를 올려다보는 요정 소녀.
 자, 과연 이 아가씨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자기가 품은 모순을 인정하는 것도, 반대로 거기서 눈을 돌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악취미란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은 없지만, 난 그녀가 어떤 길을 고를지 궁금해졌다.
 세실리아는 고개를 숙여 요정과 한번 눈을 마주친 후 다시 시선을 앞으로 하며 입을 열었다.

 “…페어리들이 팔리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되죠?”

 “이봐, 아가씨! 괜한 생각 말라고. 아가씨가 거기까지 알 필욘…….”

 난 용병의 말을 끊으며 진실을 전했다.

 “마도연구의 실험재료로 쓰이는 게 일반적일 테지만, 요정들에겐 한 가지 용도가 더 있어요. 이들은 얌전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데다, 외부자극에 꽤 민감한 편이에요. 자신의 부적절한 욕망을 양심의 가책 없이 누군가에게 마음껏 풀고 싶은 사람들에겐 딱 좋은 대상이죠.”

 “…….”

 세실리아의 얼굴이 얼음 같이 딱딱하게 굳었다. 냉정해졌다기보다는 혐오와 분노가 허용량을 넘어서 다른 감정들을 억누른 탓에 결과적으로 무표정하게 보이는 것뿐이다.

 “잠깐 이 아이를 부탁할게.”

 세실리아는 허리에 매달린 요정 소녀를 부드러운 손길로 떼어내 내게 넘긴 뒤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 페어리는 포기하세요. 당신 같은 사람에게 넘길 순 없습니다. 불법포획에 대해선 눈 감아 드릴 테니…….”

 “보자보자 하니까…… 이 미친 도둑년이……!”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용병은 더 이상 말은 필요 없다는 듯 곧장 검을 뽑아 치켜세우고 달려들었다.

 “이, 이그니션!”

 세실리아는 당황하면서도 호신용 단검을 뽑아 시동어를 외쳤다. 검에 새겨진 마법문자가 반응해 내장된 마력으로 마도현상을 일으켰다.

 “……!”

 화륵. 용병을 감싸는 큼직한 불꽃. 하지만 용병은 그 불길 속에서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튀어나왔다.

 “싸워본 적도 없는 애송이가! 그딴 성냥불이 통할 것 같냐!”

 퍽. 용병은 검을 휘두를 것도 없이 비어 있는 다른 쪽 주먹으로 세실리아의 명치 부근을 가격했다.

 “컥…….”

 힘없이 허물어지는 세실리아. 예상대로 전장에서 돌아온 용병은 마법내성이 높은 장비들을 갖추고 있었다. 마물들과 사투를 벌여본 경험이 있는 베테랑 전사에게는 당연한 소양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용병은 괴롭게 숨을 헐떡이는 세실리아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난 전쟁에서 손과 발을 잃었다. 마물들에게 뜯어 먹혔지. 그래도 난 운이 좋은 편이야. 우리 부대원들 중에 살아남은 건 나를 포함해 딱 셋뿐이니까. 그렇게 불구가 돼 퇴역했지만 당연히 사회에서도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일상생활조차 어려웠으니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가. 결국 난 굶어죽지 않기 위해 용병협회에 빚을 지고 이 의수와 의족을 달았지.”

 “…….”

 “내가 이 녀석들을 팔아치우는 건 당연한 권리다! 이걸로도 한참 부족해! 내가 잃은 것들을 되찾기는커녕 입에 풀칠하기도 버겁단 말이지!”

 “아윽!”

 노성과 함께 세실리아의 옆구리를 걷어차는 용병. 땅바닥에 쓰러진 그녀는 무참하게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소동이 벌어지는 데도 그녀를 구하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작금의 불안한 정세 속 험한 일에 잘못 말려들어 피해를 입어도 제대로 보상 받을 길이 없으니 다들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이다.

 ‘슬슬 말릴 때가 됐나.’

 방금 전 감정에 찬 용병의 발길질은 전혀 힘 조절이 되어 있지 않았다. 아마 세실리아의 늑골 몇 대쯤은 부러졌으리라. 그녀가 어떤 답을 내릴지 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더 지체했다가는 경호대상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뭐, 경호라는 행위 자체는 이미 충분히 실패했지만. 나중에 녀석에게 무슨 잔소릴 듣게 될지.’

 어떻게 변명해야 도서관장의 귀찮은 추궁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하며 힘을 행사하려고 할 때, 세실리아가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화, 확실히 난…… 허울 좋은 소리만…… 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당신 같은 사람들이…… 지킨 평화 속에서…… 꿈만, 꾸고…… 있던 걸지도…….”

 “이제야 좀 주제 파악이 된 거냐? 늦게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군. 하여간 철부지들에겐 매가 약이라니까.”

 용병은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지만, 세실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결국 당신은…… 약자에게, 분을 풀고 있을 뿐이야……! 자기보다 약한 존재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 비열함이 올바른 현실이라면…… 난, 계속해서 꿈을 꾸겠어!”

 극도의 고통을 견디며 초점조차 맞지 않는 눈으로 호신용 단검을 상대에게 겨누는 세실리아. 그리고 그녀는 다른 쪽 손에 머리에서 풀린 붉은 리본을 꼭 쥐고 있었다. 그 리본은 내가, 정확히는 카타리나가 성목절 축제 때 건넨 선물이었다.
 용병은 잠시 세실리아의 모습을 지켜보다 의수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사람 제대로 돌게 만드는군. 그 적갈색 제복과 고급 장신구, 헤미스피어 도서관 소속의 귀족가 영애 맞지? 권력자 딸 건드려 봤자 좋을 거 없을 테니 웬만하면 일 크게 안 만들려고 했는데…… 안 돼. 도저히 안 되겠어.”

 성큼성큼. 칼을 들고 세실리아에게 다가가는 용병의 눈빛은 아까와는 달리 살기에 넘쳐 있었다.

 “어차피 이런 세상…… 잡힐 것 같으면 외국으로 튀지 뭐. 어디나 살긴 다 거지 같으니까. 그러니 넌 오늘…… 내 손에 죽어라!”

 심상치 않은 기색에 위기감을 느낀 세실리아는 시동어를 외쳤다.

 “이그니션!”

 “그딴 불장난 안 통한다고 했지!”

 용병이 크게 칼을 휘두르자 단검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은 연기처럼 간단히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 2차례 연달아 화염마법을 발동시켰지만 용병에게는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그리모어 없이는 역시…….”

 자신의 무력감에 한탄하며 분한 듯이 중얼거리는 세실리아. 본래 하이젠베르크 가家는 마도서를 해독하고 연구하는 일을 전문으로 삼는 일족이다. 특히 그들 일족에게 대대로 발현된다는 석안釋眼은 마법문자를 통해 직접적으로 마력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즉 평범한 마법사에게는 단순한 참고서밖에 되지 않는 마도서도 그들 손에 들어간다면 엄청난 마력 증폭기가 되는 셈이다. 대신 순수한 마법사로서의 기량은 결코 우수하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마도서 없이는 이처럼 무력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세실리아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리본을 활짝 폈다.

 ‘저건…….’

 리본에는 세실리아가 직접 마력을 담아 쓴 문자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마도 카타리나를 향한 남몰래 간직하고 있던 연심. 세실리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것을 소리 내어 외쳤다.

 “Meine Liebe ist grün! 설령 그분이 남긴 물건은 사라져도, 내 사랑은 변하지 않아!”

 마력이 담긴 글자가 그 힘을 발휘하자 리본은 산산조각 찢어지고, 대신 호신용 단검에서 발하는 불길이 한층 그 기세를 더했다.

 “끝까지 발버둥치기는! 그래봤자 소용……윽!?”

 쩍. 용병은 그 자신만만한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가지고 있던 검이나 방어구 등 갖은 항마력 장비들에 금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 말도 안 돼! 이런 일이……!”

 거센 폭발음과 함께 방어구가 부서지며 저 멀리 날아가 잡동사니 속에 처박힌 용병. 조금 꿈틀거리는 것으로 보아 죽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타격이 심했는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난 쓰러진 용병을 향해 속으로 중얼거렸다.

 ‘끼어들어서 미안하군. 하지만 네 편을 들어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어.’

 확실히 세실리아가 최후의 기력까지 짜내 펼친 공격은, 본래대로라면 용병의 방어를 뚫을 수 없었다. 내가 슬쩍 마력을 보태지 않았다면 말이다.

 “으…….”

 한계에 다다른 세실리아는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크게 휘청거렸다. 다행히 나는 그녀가 땅바닥에 고꾸라지기 전에 부축할 수 있었다.

 “에고, 조심하세…….”

 “카, 카타리나 님……?”

 예상치 못한 세실리아의 말에 난 순간 자리에서 멈칫 했다.

 “아아, 카타리나 님……! 돌아와 주셨군요……!”

 손을 들어 내 볼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면서도 기쁘게 웃는 세실리아. 그녀의 눈은 흐린 채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은 상태였다.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로 심한 폭행을 당한 데다, 얼마 안 되는 마력을 있는 힘껏 쥐어짜내 사투를 벌인 탓에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것이다.

 즉 날 카타리나로 혼동한 것은 단순한 그녀의 착각.
 네리처럼 마력의 잔향이라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지금 보고 있는 카타리나는 완전한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내게 그 환상을 부정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훌륭했어요. 자부심을 갖고 편히 쉬세요.”

 난 세실리아에게 무릎베개를 해주며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네…… 카타리나 님…….”

 세실리아는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고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그 옆에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녹색 머리카락의 요정이 하나. 요정은 자신을 지켜준 용감한 소녀를 위해 조용히 숨겨둔 힘을 발휘했다.






 다음 날. 다행히 난 도서관장에게 세실리아가 상처 입을 때까지 내버려둔 일로 추궁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상처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녹색머리의 요정은 드물게 치유술을 행사할 수 있는 개체였는데, 그 힘으로 자신의 은인에게 보답을 한 것이다.
 하지만 부상에서 말끔히 회복된 세실리아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하아, 어째서 다들 믿지 않는 걸까. 어제 정말 카타리나 님이 날 구해주셨는데.”

 의식을 되찾은 세실리아는 기절하기 전에 본 환상과 기억이 이상하게 뒤섞였는지, 수년 전 도서관을 떠난 ‘카타리나 님’이 돌아와 자신을 구해준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물론 도서관의 동료들 중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쟁 후 행방이 묘연한 카타리나가 갑자기 그 순간에 나타나 백마 탄 영웅님처럼 세실리아를 구해주고 떠났다는 이야기 자체가 너무나도 작위적인 데다가, 실제로 거리의 군중들 중에는 세실리아가 화염마법으로 용병을 물리친 모습을 목격한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렇군요. 음, 어제 많이 힘드셨을 텐데, 오늘 하루는 푹 쉬시는 게 어때요?”

 세실리아가 흥분하며 카타리나의 활약을 전할 때마다 도서관 사람들은 애매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휴식을 권했다. 다들 그녀가 충격적인 일을 겪어 일시적으로 기억에 혼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상냥하게 응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당사자에겐 그 상냥함이 도리어 상처가 되는 모양이지만.
 여러 차례 같은 취급을 당한 세실리아는 볼을 부풀리며 내게 힐난하듯이 말했다.

 “너도 옆에서 같이 봤잖아!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상대하기 귀찮았던 나는 강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그나저나 그 용병, 잡히기 전에 도망쳤다고 하네요.”

 세실리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하지만 그 긴장은 두려움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내게 복수하러 온다면 언제든지 상대해 줄 생각이야. 그때야말로 전용 그리모어를 가지고 확실하게 쓰러뜨려 개심시키고 말겠어.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이 아가씨의 장점은 고지식한 만큼 자신의 결의에 대해서도 진지하다는 점이다. 아마 또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다음번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아, 그 요정은 어떻게 됐나요? 직접 보호소에 맡긴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난 아무렇지 않은 듯 짓궂은 질문을 던져봤다. 예상대로 세실리아는 말을 더듬었다.

 “으응? 아, 물론 그렇게 했어. 버, 법대로 해야지.”

 빤히 보이는 거짓말. 전쟁이 터지기 전이라면 모를까,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리 유사인류로 분류되는 종족이라도 마물로 취급되는 이상 좋은 대접을 받을 리 없다. 운이 좋아야 실험실 행일 테고, 운이 나쁘면 용병 대신 보호소 직원들에 의해 누군가에게 팔려나갈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런 시대였다.

 ‘뭐 다른 사람에겐 안 보이겠지만.’

 세실리아의 몸 전체에서 반짝이는 페어리의 날개가루. 그 가루들은 영체인지라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인체에 특별한 악영향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약간은 정신이 맑아지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정도 양이 몸에 묻어 나오려면 요정과 한곳에서 생활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강아지를 몰래 키우는 것도 아니고.’

 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하지만 그건 비웃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친근감을 느끼는 상대 앞에서 무심코 나오고 마는, 그런 편한 웃음이었다. 동시에 난 그녀에게 무언가 배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기 집 앞에 떨어진 아기 새 한 마리를 구하면, 그걸로 되는 걸까.’

 그 누구라도 세상의 모든 이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누군가를 돕는 일쯤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모든 이가 각자 누군가를 돕는다면 결국은 모든 이가 도움을 받는 것과 같다는 동화 같은 환상. 하지만 어쩌면 그게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참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네. 혹시 보, 볼 일이라도 보고 싶은 거야? 그럼 빨리 다녀와. 오늘은 망가진 책상과 의자들 수선해야 해서 바쁘니까.”

 다시 고지식한 태도로 돌아온 세실리아. 하지만 전처럼 그 모습이 답답하게 여겨지지만은 않았다. 나는 “이제 우리가 사서인지 잡일꾼인지 모르겠네요”라고 가벼운 말을 던지며 앞서 가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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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10.26 16:07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아아앗... 이 훈훈함의 폭풍, 견딜 수 없어요! >_<);;

    그러고보니 유기동물을 구조하여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캠페인 관련 문구 중 ‘하나의 버림받은 아이를 구한다고하여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그 동물에게 있어서는 세상 그 자체가 변하는 것이다’ 라는 내용이 문득 떠오르네요.

    이런 사람(?)이 신임 마왕이라면 인류와 마족 양측의 절묘한 힘의 균형을 유지시켜, 차선책으로써의 약 수십년간에 걸친 평화의 시대정도는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나요, 후후... :D (... 양제독님! 그립읍니다 ㅠ_ㅠ)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10.27 21:56 신고 address edit/delete

      너무 원만한 결말이라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좋게 봐주신 것 같아 안심이 되네요>.<

      동물보호 캠페인 문구 중 그런 멋진 말이 있었군요! 저 또한 위의 내용은 예전에 읽었던 한 순정만화에서 한때의 선의로는 모든 버려진 동물을 돌봐줄 수 없다는 냉정한 지적에 '각자가 자기 앞에 버려진 강아지를 한 마리씩이라도 구하는 걸로 충분'하다는 주인공의 말에 영향을 많이 받았네요.

      물론 사회적인 인식과 구조적인 시스템을 개선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지만, 애초에 그 인식과 시스템이 변화하기 위해선 개인들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주인공도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히 양 제독님을 비롯한 은영전의 멋진 캐릭터들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거대한 두 세력의 대립 간에 줄타기를 하면서도 소소한 일상을 보내는 모습을 재미있게 그리고 싶은 마음이에요.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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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선택의 순간 (前)


 칼날 같은 눈보라가 거세게 휘몰아치는 대륙의 최북단.
 자연의 눈먼 살의가 인간의 침입을 허용치 않는 이 만년설의 땅에는 일견 생명의 숨결이나 문명의 산물 따위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이 보인다. 하지만 날씨가 맑은 날 산맥들 사이를 잘 응시해 보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웅장한 겨울궁전이 풍경과 동화되듯 조용히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얼음궁전에 살고 있는 이는 단 하나. 이제는 세상에 단 한 마리밖에 남아 있지 않은 일각수Unicorn의 마지막 왕녀 트리슈아 라 오벨리오 베르나이드였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과 에메랄드빛을 띠고 있는 이마의 보석 같은 뿔.
 인간형태를 하고 있을 때의 그녀들Unicorn에게는, 어딘가 흉측하고 이질적인 구석이 있는 수인獸人들과는 다르게 마치 신화 속의 여신과 같은 고귀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지금의 그녀에게는 주변 분위기를 한없이 가라앉게 만드는 침울한 기색 또한 같이 풍기고 있었다.

 그녀가 상복처럼 걸치고 있는 검은 드레스. 이는 실제로 멸종당한 자신의 종족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입고 있는 것이었다. 또한 그녀는 눈가를 항상 검은 천으로 감아 숨기고 있었는데, 이는 인간들이 점령한 더러운 세상을 보고 싶지 않아 스스로 눈을 뽑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클립스 님…….”

 조용히 선대 마왕의 이름을 입에 담는 유니콘의 공주. 그녀에게 있어 증오스러운 인간들의 세상을 철저하게 유린한 선대 마왕은 신앙에도 가까운 숭배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영웅의 성검 센트럴 도그마에 쓰러졌다고 알려진 선왕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끔찍한 사실에 트리슈아는 한때 멀어버린 눈에서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 절망했었다.

 “하지만, 그분은 희망을 남기고 가셨어…….”

 이클립스의 뒤를 이은 마왕의 딸. 선왕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딸 역시 악마들의 정점에 서 인간세상을 부수기에 충분한 자격과 힘을 갖추고 있다. 비록 지금은 용종이라는 변수 때문에 잠시 싸움을 멈추고 있지만, 때가 되면 그분의 딸이 다시 분연히 일어나 더러운 인간들을 멸절시킬 것이라고 트리슈아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허락도 없이 남의 침실에 멋대로 숨어들다니, 여전히 불쾌한 녀석이군.”

 일순 온화했던 트리슈아의 어조가 날카로워졌다. 동시에 그녀의 이마에서 뿔이 빛나자 얼음궁전에 맺혀 있던 굵직하고 뾰족한 고드름 중 하나가 뚝 떨어져 벽 한쪽을 향해 고속으로 질주했다. 하지만 그 얼음말뚝은 벽에 부딪치는 일 없이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 우뚝 멈춰 섰다.

 “어머, 무서워라.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스르르. 허공에서 큼직한 얼음의 말뚝을 붙잡은 채 모습을 드러낸 금발의 미녀.
 트리슈아와는 대조적으로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성의 등에는 옷차림과 색을 맞추듯 백조를 닮은 두 장의 새하얀 날개가 돋아 있었다. 또한 금발의 머리에도 작은 날개가 돋아 있었는데, 그것은 앙증맞은 장신구처럼 여성의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하였다.

 인간들의 경전에서 전하는 천사를 떠올릴 만큼 청초하고 신비로운 인상. 하지만 이 여성은 엄연히 악마 일족 중의 하나로서,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인간의 정기를 주식으로 삼는 몽마Succubus였다.

 그녀의 이름은 루시 루시드 드림. 본명이 아닌 가명이었지만, 악마들 중에서 딱히 그녀의 진짜 이름을 궁금해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보다 그녀는 선대 마왕의 오랜 친구이자 자칭 비서관, 그리고 현 마왕군의 참모역할을 맡고 있는 서큐버스로 그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네놈이 내 성에 침입한 것만큼 기분 나쁜 일이 또 있을까. 네놈의 가식적인 옷차림에는 구역질이 난다.”

 트리슈아는 냉랭하게 상대를 매도했지만, 루시는 조금도 웃는 얼굴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제 자리에서 빙글 한 바퀴를 돌아 드레스 자락을 우아하게 춤추게 하며 말했다.

 “「악마는 모두 아름답다. 그래야 인간을 유혹할 수 있을 테니까.」 200년 전쯤 인간들의 어떤 신학자가 남긴 말이야.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악마란 실재하는 우리가 아니라 그네들 종교의 악역을 말하는 거지만, 최소한 우리 서큐버스에게는 정확히 해당돼. 단순히 천박하고 음란하기만 한 모습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쉽게 끌 수 없거든. 물론 이 드레스 속에는 매우 강렬한 자극이 숨어 있지만.”

 “눈이 썩겠군.”

 요염하게 미소 지으며 한쪽 눈을 깜박이는 서큐버스에게서, 유니콘의 공주는 천에 가린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루시는 개의치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시력을 버려도 다 보이는 모양이네. 과연 일각수의 초감각. 내 차림새는 물론 이공간은신까지 단번에 알아챈 걸 보면 오히려 눈이 멀기 전보다 감도가 더 좋아진 거 아니야?”

 세상만물의 파장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일각수의 뿔.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와 같은 보석을 닮은 그녀들Unicorn의 뿔은, 단지 장식품으로 보기에만 좋은 게 아니라 연금술의 소재나 만병을 통치하는 약재료, 일시적으로 신체를 강화하는 고급각성제의 원료로도 효능이 높았다. 그 결과 뿔의 가치를 탐낸 인간들의 무분별한 사냥으로 일각수들은 이 지상에 단 한 마리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
 루시의 말에서 아픈 과거를 떠올린 트리슈아는 더욱 거칠게 입을 열었다.

 “네놈이 쥐새끼처럼 침소에 숨어들었다는 건 뿔로 감지할 것도 없이 알 수 있었다. 그 시궁창 같이 역한 인간들의 냄새가 진동을 했으니까.”

 마지막 남은 일각수의 왕녀가 내뱉은 말은 절반 정도 사실이었다. 인간들을 증오하는 그녀는 그 냄새에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질색했는데, 수시로 인간과 정을 통하는 서큐버스에게서 어떤 냄새가 풍길지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하지만 루시는 서늘하게 웃으며 트리슈아가 숨긴 나머지 절반의 진실을 말했다.

 “한 가지 물어도 될까? 나는 그렇다 쳐도 넌 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그렇게 인간이 싫다면 평소에도 본모습으로 돌아가 있어야 하지 않아? 혹시 인간형태가 생활하기 편해서? 그럼 네 분노라는 건 고작 생활의 편의성에 접어둘 수 있을 만큼 하찮은 거였어?”

 “어디서 그런……! 날 모욕하지 마! 이 모습은 인간들의 전유물이 아니야! 원류를 따지자면 용종들의……!”

 “흐응, 그렇게 나오시겠다. 하지만 남에게 묻어온 냄새조차 역겨울 정도로 인간들이 싫은 건 사실이잖아? 그런데도 인간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인간들의 옷을 입고 지내는 건 모순이라 생각하는데.”

 “그건…….”

 말을 흐리는 트리슈아. 루시는 가차 없이 추궁을 계속했다.

 “내게서 풍기는 냄새가 역겨워? 그럴 리가! 본래 너희 일각수들은 순결한 동정녀의 영혼, 정확히는 어린 소녀들의 순수한 사념에서 큰 매력을 느끼는 성정을 가지고 있지. 내가 인간 여자들과 정을 통하며 배를 채우고 기쁨을 얻는 것만큼이나 순수한 소녀의 마음에서 평온을 얻는 것이 너희들Unicorn의 당연한 본능이야. 설마 고작 100년 전만 해도 나랑 같이 소녀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일을 잊었다고 하진 않겠지? 근데, 바로 어젯밤에도 세상모르는 어린 꽃 한 송이를 꺾고 온 내게서 역한 냄새를 느낀다고? 반대겠지! 넌 오히려…….”

 루시는 끝까지 말을 마칠 수가 없었다. 거대한 얼음기둥이 떠올라 그녀가 있던 벽 한쪽을 아예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릴 만큼 강하게 충돌했기 때문이다.

 “왜? 정곡을 찔렸어?”

 물론 루시는 무사했다. 순백의 서큐버스는 어느새 트리슈아의 뒤에 서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닥치고 사라져.”

 트리슈아는 힘의 행사도 포기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저 상대에게 여기서 나가라고만 명령조의 말을 무력하게 던졌다. 일각수의 왕족이 가진 환수로서의 잠재력을 생각하면 힘으로 서큐버스 한 마리쯤 강제로 내쫓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지만, 그녀에게는 더 이상 그럴 의욕이 남아 있지 않았다.
 루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시해라. 뭐 됐어. 나도 재미없는 상대에겐 흥미 없으니까. 그 아이한테나 가봐야지.”

 “…그 아이? 설마 그분의 따님을 말하는 거냐?”

 맥락상 대상을 알 수 없는 모호한 표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트리슈아는 단번에 루시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아차렸다.

 “뿔의 감지능력은 그런 데서도 발휘되는 거야? 굉장하네. 맞아. 난 아가씨의 참모니까 수시로 찾아가 뵙고 있어. 왜 부러워?”

 루시의 가벼운 도발에 트리슈아는 이를 갈았다.

 “어째서 너 같이 천박한 게 선왕뿐만 아니라 그분의 따님에게까지……!”

 “어머, 정말 모르겠어? 그건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야.”

 전에 없이 진지한 루시의 목소리. 여전히 몽마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지만 그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트리슈아가 입을 닫은 채 대답이 없자 루시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인간에게 절망해 떨고 있는 동안 난 줄곧 마왕님과 함께 전장을 달려 왔어. 네가 스스로 눈을 뽑아 세상을 거절하고 얼음동굴 속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난 줄곧 인간들을 탐하고 즐기고 죽이고 먹어치우며 그들을 배워왔고. 덕분에 여전히 난 인간들의 권위자야. 우리惡魔들 중 누구보다 인간들의 환심을 사 유혹하고 이용할 줄 알고, 반대로 인간들의 적의와 교활한 잔꾀를 알아채 함정을 피하는 법도 알고 있지.”

 “…….”

 “하지만 넌 어때? 네가 가진 뿔의 초감각과 강대한 마력은 마왕군에, 아니 마왕님께 어떤 도움이 되었지? 그리고 네가 가진 100년 전 인간사회의 지식은 현재에도 통용될 수 있을까? 또 서로 무리를 이루어 싸움을 벌일 때 힘을 쓰는 요령과 기본적인 전략들의 운용방법은? 이런 것들만 봐도 왜 네가 아니라 내가 마왕님께 신뢰를 얻고 있는지는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

 트리슈아는 시선을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시는 살짝 고개를 저은 뒤 허공에서 하얀 양산을 꺼내들며 다시 말했다.

 “옛정을 생각해 마지막으로 충고할게. 도망치는 것과 포기하는 건 전혀 달라. 언뜻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설탕과 소금만큼 다르지.”

 말을 마친 루시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양산을 활짝 펼쳤다. 순간 그녀는 수많은 꽃잎을 흩날리며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화창하고 맑은 날씨.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깊고 푸른 하늘.
 근 100년 동안 세상은 이상기후의 영향인지 여름과 겨울만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덕분에 그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선선한 봄과 가을은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산들바람만큼이나 짧아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슬퍼했다. 특히 가혹한 여름의 더위를 견디고 혹독한 겨울의 추위에 대비해야 하는 찰나의 가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야속함을 느꼈다. 동시에 그 가을의 존재가 전보다도 한층 귀하고 고맙게 여겨졌다. 그런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그 계절에 진한 애정과 아쉬움을 담아 새로운 수식을 붙여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황금의 가을’이라고.

 “이런 날 심부름이나 해야 하다니…….”

 절로 나오는 불평. 이처럼 공기만 마셔도 기분 좋은 날에는 햇볕 잘 드는 장소에서 한가롭게 책을 읽는 게 제일이다. 그럼에도 사무용품을 구입하기 위해 이리저리 발품을 팔며 소란스러운 거리를 돌아다녀야 하다니. 딱히 몸을 움직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게는 고역이나 다름없다.

 아니, 이렇게 좋은 날씨에 한해서라면 바깥에 나오는 것도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다. 문제는 역시 사람. 같이 나온 상대가 누구이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것이다.
 마침 서서히 물들어가는 단풍을 구경할 여유조차 주지 않고 갈 길을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꾸물거리는 거야? 빨리 움직여. 외출허가시간 내에 돌아가려면 좀 더 서둘러야 해.”

 가늘고 긴 백금색 머리카락을 보기 좋게 묶고 있는 붉은 리본. 새하얀 피부에 살짝 위로 치켜 뜬 눈매가 어딘지 여우같은 인상을 주는 얼굴. 정식으로 궁정예절을 교육을 받은 것이 분명한 품위 있는 몸동작과 고급스러운 귀걸이…….

 그녀의 이름은 세실리아 F. 하이젠베르크. 구귀족 가문의 영애로서 ‘현재의’ 나보다 3년 먼저 이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는 선임 사서이기도 하다. 물론 실제로는 내 쪽이 100년 정도 까마득한 선배이긴 했지만.

 “네네, 알겠어요.”

 난 대충 손을 저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새로 신분을 세탁한 이번의 나는 다소 무기력한 문제아를 연기하고 있었다. 이는 본래 내 성격이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지난번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안배이기도 했다. 다시는 그 바쁜 나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후배였던 선배의 뒤를 쫓으며 나는 속으로 불평을 토했다.

 ‘하다못해 네리랑 나왔다면 산책하는 기분이라도 들었을 텐데. 얘는 너무 딱딱해서 답답해.’

 이 세실리아라는 아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고지식한 귀족 아가씨’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인류연합에서는 공식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었다. 몇몇 소왕국들도 대부분 입헌군주정으로 전환했으며 기존의 귀족들은 법적으로 평민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동등한’ 신분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그동안 쌓아놓은 자산과 인맥으로 사업을 벌여 크게 성공해 다수의 기업체를 소유한 이른바 ‘자본귀족’으로서 여전히 과거의 지위와 영광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그런 재벌가의 여식 중 한 사람으로서 어릴 적부터 고급교육을 받아왔고, 이른바 귀족으로서의 의무noblesse oblige도 철저하게 몸에 익혀 왔다. 덕분에 다른 재벌가의 주니어들처럼 오만하게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예절과 규율을 깐깐하게 따지는 재미없는 성격이 된 것이다. 단적인 예로 네리와 함께 나왔다면 가벼운 간식거리라도 사먹을 수 있었을 테지만, 이 아가씨에게 그런 제안을 하면 당장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지금 우리는 업무시간 중이야. 그런 사적인 용도로 낭비할 시간은 없어. 더욱이 관장님의 명으로 공금으로 사무용품을 구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오해를 받을 만한 일은 더욱 해선 안 되지.”

 이것이 바로 도서관장이 세실리아에게 물품구입을 맡긴 이유.
 헤미스피어 도서관은 단순한 문화시설이 아니라 중요 문화재에 속하는 건축물로서 국가에서 상당한 지원금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물론 전쟁이 터진 뒤에는 그 액수도 꽤 줄었고, 심지어 직원들 급료조차 현물로 지급하는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지만, 아직까지 지원금 자체가 끊어지지는 않았다.

 설령 액수가 적다고 해도 명색이 국가에서 나오는 지원금인 만큼 그것들은 전부 질이 좋은 금화나 은화이다. 이것을 고지식하게 시장에서 그대로 거래하지 않고 환전소나 암시장에서 장난을 친다면 몇 배 이상으로 불리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공무원이 공금으로 그런 불법거래를 하는 것은 당연히 위법사항이지만, 요즘 같은 어려운 시절에도 그 유혹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 계신 고지식한 아가씨처럼 재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 거리에 나가 돈을 쓰기에는 제격인 것이다.

 반면 내가 세실리아의 동행으로 선정된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 쉽게 말해 난 그녀의 경호원인 셈이다. 이곳 도서관장은 내 정체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사실들을 알 길 없는 세실리아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본을 잘못 보인 걸까. 넌 정말 3년이 지나도록 변함이 없네. 하아, 카타리나 님이 계셨더라면…….”

 “네? 카타…… 아, 3년 전에 사서직을 그만두었다는 그 선배 말인가요?”

 “맞아. 카타리나 님은 내가 아는 한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완벽한 여성이셨어. 정말 유능하고 현명하고, 아름다우셨지. 그분이 계셨더라면 너도 분명 감화돼 제대로 일하게 되었을 텐데.”

 열띤 어조로 옛 선배에 대해 이야기하는 세실리아를 향해 난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카타리나 님’이라는 건 다름 아닌 지난번의 나였기 때문이다.

 ‘정말 미친 짓이었지.’

 한때 재미있게 읽었던 활극소설의 만능 주인공에게 영향이라도 받았던 걸까. 지난번 이름과 직급을 바꿀 때의 나는 인식장애뿐만 아니라 변신마법까지 사용해 스스로를 키 크고 멋진 여성으로 꾸몄었다. 단순히 외견뿐만 아니라 100년 동안 쌓인 사서로서의 지식과 마법의 힘까지 슬쩍 곁들여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했던 것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어.’

 모두에게 칭찬 받고 동경 받는 생활. 도서관의 직원들뿐만 아니라 거리의 사람들마저 내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고, 그중에는 대담하게 연심을 고백해오는 처녀들도 있었다. 이 정도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지 몰랐던 나는 한껏 들떠 한층 ‘완벽한 카타리나 씨’를 연기했다.

 ‘적당히 했어야 했는데.’

 의지가 의존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 관장이 따로 불러 우려를 표할 만큼 도서관 사람들은 모든 일을 일단 내게 물어보고 진행하게 되었으며, 사생활이 없어질 정도로 과도하게 달라붙으며 집착을 표하는 아이들도 생겨났다.

 나는 더 이상 그 숨 막히는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해서 어느 시골학교의 교사와 사랑에 빠져 그녀의 고향으로 결혼하러 떠난다는 거짓말로 ‘카타리나’를 떠나보내고는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신입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대체 어떤 암여우가 카타리나 님을 홀린 건지……! 전쟁만 터지지 않았다면 뒷조사를 했을 텐데……!”

 드물게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리는 세실리아. 당시 이 아이가 이 정도로 나를, 정확히는 카타리나를 좋아하고 있는 줄은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날 의지해온다거나 그밖에 다른 사적인 감정을 드러낸다거나 하는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강철 같은 자제력으로 참고 있었던 모양이다.
 난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뭐 그래도 전쟁은 이제 끝났죠. 아직은 별 실감이 나지 않지만 앞으론 점점 좋아지지 않을까요?”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거리 또한 전에 비해 활기가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지긋지긋한 더위가 끝나고 황금의 계절이 시작된 덕분도 있겠지만, 역시 당분간 마물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안심을 가져다주고 있는 게 아닐까. 적어도 난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야 내가 한 일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뜻이 될 테니.

 “과연 그럴까. 끝난 건 아무것도 없어. 이건 종전이 아닌 휴전에 불과하니까. 게다가 난 이 가짜 평화가 얼마나 갈지 의문이야.”

 가시 돋친 세실리아의 말에 내 눈썹이 꿈틀했다.

 “가짜, 평화요……?”

 “응. 물론 용왕들의 공중요새까지 모습을 드러낸 이상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극악무도한 마왕군과 평화협정을 맺는 일은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어.”

 “…놈들이 언제 약속을 깨고 뒤를 칠지 모르니까?”

 “그것도 있지만, 오히려 협정이 잘 지켜져도 문제야. 만약, 정말 만의 하나 이대로 싸움이 벌어지지 않고 평화가 오래 지속된다고 생각해 봐. 그럼 지금까지 죽은 사람들은 뭐가 되는 거야?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상처는 어디서 보상 받아야 하지? 마왕군과의 전쟁이 시작된 이래 공식적으로 사망이 확인된 사람만 1억 명에 가깝다고 하지. 생존자들 중에는 가족은 물론 고향, 심지어 나라까지 통째로 잃은 사람들도 적지 않아. 그들에게는 모두 자신의 원수에게 복수할 권리와 의무가 있어. 그럼에도 이 평화가 계속된다면, 그들의 마음은 대체 어디서 위로 받아야 하는 걸까…….”

 내게 대답을 요구한다기보다는 거의 감정의 토로에 가까운 세실리아의 말.
 확실히 분노를 머금은 그녀의 힐난에 가까운 물음은 지당했다. 서로 악수하며 화해한다고 깨끗하게 갈등이 해소되는 것은 동화책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환상이다. 개인 간의 싸움에도 화해의 이면에는 앙금이 쌓여 있는 경우가 허다한데, 국가 간 종족 간 전쟁에서 분노와 증오와 슬픔으로 뒤엉킨 질척질척한 감정들의 총량은 오죽하랴. 내가 루치아와 함께 추구하는 평화에 그 상처 입은 마음들을 짓밟는 측면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 마음들을 다 받아줄 수는 없어.’

 폐허에서 루치아에게도 한 말이지만, 마왕군에도 인간들의 도시에 밀려나 삶의 터전을 잃고 종족마저 멸살당해 ‘복수’를 위해 싸우는 이들은 다수 존재한다. 선대 마왕이 마물들에게 그토록 강력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여자가 가진 카리스마뿐만 아니라 그 전쟁 자체가 인간들에게 원한을 가진 마물들의 울분을 충분히 풀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여자를 필두로 단지 살육이나 사투가 좋아 참가한 구제불능의 멍청이들 또한 적지 않았지만.

 ‘뭐 애초에 칭찬 받으려고 하는 일도 아니니까.’

 난 파멸을 부르는 전쟁보다 나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생물에게 있어 생존이 최우선조건이듯이 일단 모두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일은 피하고 봐야하지 않을까. 난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말을 가볍게 내뱉는 사람을 경멸한다.
 그래서일까. 세실리아의 혼잣말이 내 귀에 무척 거슬렸던 것은.

 “나도 곧 19세……. 휴전협정만 맺어지지 않았다면, 창기병을 타고 전장으로 나가 의무를 다할 수 있었을 텐데…….”

 도서관에서는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 귀족 아가씨는 사실 전쟁에서 활약하는 기사라는 허상에 과도한 낭만을 품고 있었다. 지금도 입으로는 의무 운운했지만, 본심은 백은의 영웅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고 있는 자신을 망상한 것이다.
 도저히 불쾌한 기분을 참을 수 없었던 나는 한 마디를 툭 내뱉고 말았다.

 “3초.”

 세실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갑자기 무슨 말이야?”

 “3초 만에 살 거 사고 빨리 돌아가자고요.”

 물론 네가 전장에 나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이 3초라는 뜻이다, 이 철부지 아가씨야!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라 이건 냉혹한 사실이다. 인간과 달리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마물들은 완전히 죽지 않는 이상 다음 전장에 말끔히 회복된 상태로 복귀할 수가 있다. 덕분에 현재 마왕군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수인이나 마수들은 여러 차례 끔찍한 사투를 거치고 살아남은 정예 중의 정예들이다. 이들은 선대 마왕을 제하더라도 인류에게 큰 위협이 되는 막강한 존재들이었는데, 만약 인류연합군이 신형창기병의 보급과 공중전함의 개발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내가 개입하기 훨씬 전에 이미 궤멸적인 피해를 강요받았으리라.

 “음…….”

 세실리아는 내 부자연스러운 얼버무림에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역시 속마음까지는 간파하지 못했는지 우리와 주로 거래하는 도매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어두운 골목에서 무언가 툭 튀어나와 세실리아의 허리에 매달렸다.

 “꺅!? 뭐, 뭐야!? 어, 어린애……? 아니, 이건…….”

 난데없이 세실리아의 허리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것은, 녹색 눈동자에 녹색 머리카락 그리고 등에 반투명하고 옅은 잠자리 같은 날개가 돋아 있는 자그마한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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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10.22 00:2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차회 연재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_<)

    역시 양측의 인적 역학관계들이 복잡다단하게 얽혀있었군요... llorz

    자아 이 것으로 주인공도 루치아도 모두 이마의 주름살 증식 확정! (끌려간다)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10.22 22:48 신고 address edit/delete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세계를 양분하는 큰 싸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니 간단하게 넘기기 힘든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제 역량으로 모든 것을 잘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주인공들의 분투기를 될 수 있는 한 섬세하게 그려내고 싶은 마음이네요! >.<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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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미로의 입구


 드넓은 평원의 한편을 살벌하게 메우고 있는 갑주의 대열.
 인류연합군의 주축을 이루는 짙푸른 창기병들의 병장기가 석양빛에 반사돼 번쩍거리며, 곳곳에 설치된 둔중한 잿빛 포탑들이 그 거대한 구경을 뽐내며 군단의 진지를 지키고 있다.

 그 반대편 평원에는 지평선에 닿을 만큼 우글거리는 검붉은 이형의 무리들.
 언뜻 사람과 닮았으면서도 기괴한 짐승의 형상을 일부 몸에 품고 있는 수인獸人들부터 집 한 채는 그대로 집어삼키고도 남을 거대한 흰 뱀, 벼락을 부르는 신성한 뿔을 가진 흑사자, 전신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사조 등 온갖 마수와 환수들이 마왕군의 진영을 가득 메우고 있다.

 「…….」

 꽃잎을 연상시키는 유려한 투구와 갑주로 온몸을 감싼 백은의 영웅. 인류군의 최선두에 서 있는 그녀는 찬란히 빛나는 성검 센트럴 도그마를 양손에 쥔 채 눈앞의 마물들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루치아의 의지를 힘으로 옮기는 하얀 기사는, 비록 말수는 적었지만 그 압도적인 무력武力으로 전장의 병사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었다.

 「마왕의 딸…….」

 영웅의 시선은 마물들 중에서도 특히 가장 앞으로 나와 있는 새로운 마왕에게 가 있었다.
 피처럼 붉은 산양의 뿔, 칠흑 같이 어둡고 무거운 긴 흑발, 사상의 본질을 꿰뚫는 황금색 눈동자, 통상공간에 가시화 되어 있는 박쥐를 닮은 4장의 악마 날개, 심층공간에 숨어 있는 7장의 그림자 날개…….

 신들조차 능가할 것만 같은 절대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던 선대 마왕에 비하면 다소 위압감이 떨어지는 면은 있었지만, 그것도 백은의 영웅과 같은 동등한 수준의 실력자나 루치아와 같이 초월적인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나 식별이 가능한 차이. 달이나 태양이나 지상의 한갓 인간들에게는 똑같이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천체이듯이, 마왕의 딸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선대 마왕 못지않게 절망적인 공포 그 자체였다.
 새로이 등극한 마물들의 왕이 입을 열었다.

 - 빛에 눈이 멀어 어둠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이여. 죄의 늪에 빠져 그 진흙으로 함부로 세상을 더럽히는 그대, 비천한 인간들이여. 아직도 스스로의 아둔함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의 섭리에 그 녹슨 칼날을 겨누는가!

 강대한 마력을 품고 평원에 울려 퍼지는 마왕의 목소리. 그것만으로도 마왕군의 마물들은 온몸에 활력이 샘솟는 반면, 인간병사들은 그 기세에 눌려 주춤거리고 움츠러들었다. 그나마 신형창기병Gigantic-Frame이 갖춘 갑주의 보호기능이나, 마도사들이 미리 펼쳐놓은 항마결계 덕분에 이 정도 선에 끝날 수 있었던 것이지, 아무런 대비책도 없었다면 방금 고함소리만으로도 마음이 약한 이들은 제정신을 잃고 발광하고 말았을 것이다.
 마왕의 말은 계속됐다.

 - 난 섭리의 대행자, 위대한 선왕 이클립스의 후계자. 그대들이 지금이라도 뉘우치고 이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뒤를 쫓지는 않겠다. 세계를 독점하겠다는 오만을 버리고 세상 어느 한구석의 그림자를 벗 삼아 다시는 바깥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다면 종의 멸절만은 피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겠다. 하지만 그대들이 우둔하게도 내 손길을 뿌리친다면, 그대들이 저지른 온갖 죄악을 다름 아닌 그대들의 피로 씻어내야 할 것이다!

 쿵. 쿵. 쿵. 마왕의 외침이 재차 울려 퍼지자 전장의 창기병들 중 일부가 무릎을 꿇었다. 항마력 조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왕의 마력이 그 한계치를 돌파한 바람에 기력이 쇠한 몇몇 병사들이 기절하고 만 것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마물들은 마왕의 마력을 받아 점차 그 흉흉함을 더해가고 있었다.
 그때 마왕의 목소리에 대항하듯 낭랑한 보석의 음색이 인류군 병사들 사이에 울려 퍼졌다.

 「우리에게 밤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용종들의 부유석 처리기술을 훔쳐 개발된 13척의 공중전함. 그중 기함 임페리얼 제이드에 승선하고 있는 인류군 최고지도자인 루치아가 직접 확성장치를 통해 입을 열었다.

 「섭리는 따르는 것이 아니라 고르는 것. 우리人間는 언제나 길을 만들어 가고 싶은 곳을 향해 걸어왔다. 우리가 선택한 길은 밤이 없는 세상, 더는 어둠에 떨지 않아도 되는 백야의 세계. 어디서나 빛이 비춘다면 그림자는 생기지 않는다!」

 루치아가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 의지를 대변하는 하얀 기사가 성검을 휘둘렀다.
 세계에서 존재원형을 말살하는 법리의 일부가 구현된 파멸의 빛. 검에 직접 찔리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거기에서 파생된 참격은 수천수만 마리의 마물들을 단번에 일소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렬한 파괴력을 품고 있었다.

 - 어리석긴.

 그 빛을, 마왕은 한쪽 손을 휘두르는 것으로 간단히 튕겨내었다. 마왕의 손에 의해 궤도가 뒤틀린 성검의 참격은 평원 저편 산맥들의 산봉우리를 풀을 쳐내듯 말끔히 소멸시켰다.

 - 대답은 잘 들었다. 그것이 너희가 선택한 길이라면, 그 파멸의 대가도 감당해 보아라!

 적흑의 마왕과 백은의 영웅은 공중으로 떠올라 상공에서 치열하게 격돌했다.






 무너지는 마음.
 왜일까. 난 단지 봄날의 볼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햇살처럼 작은 행복을 바랐을 따름인데. 그런데도 어째서 세상은 자꾸만 멋대로 내 기대를 배신하는 걸까.

 내 바람이 그렇게도 몹쓸 것이었을까. 아무리 어지러운 세상이라도 정당한 대가를 꿈꾸며 하루라도 즐겁기를 바란 것이 그리도 과분한 것이었을까.
 하지만 언젠가 지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 세상이 널 배신한 게 아니야. 이미 네 기대가 세상을 배신하고 있었던 거지.

 기대란 객관적인 예측이 아닌 이기적인 소망.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니 기대란 언제나 현실의 조건을 무시한 채 보고 싶은 것만 보이게 하기 마련이다. 신랄하게 말하자면 어린애가 떼를 쓰는 심정에도 비슷한 것이다.
 지인의 냉정한 지적에는 십분 동의하는 바이지만, 역시 나는 눈앞의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 월급은, 현물지급…….”

 보리와 옥수수가 반 포대, 그리고 약간의 소금과 설탕. 이것이 바로 게시판의 공지사항에 적혀 있는, 금월 도서관 임직원들에게 주어지는 급료의 전부였다.

 …물론 안다. 알고 있다.
 패배 직전까지 몰린 마왕군과의 전쟁으로 나라의 재정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또 물자가 부족해진 탓에 물가가 있는 대로 치솟아 얼마 안 되는 급료보다는 차라리 소량이라도 현물이 훨씬 나을 수 있다는 것도.

 그럼에도 역시 급료로 돈 대신 곡식 꾸러미를 받는 것은 정신적으로 상당히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발군의 효과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처럼 지쳐있을 때는 더욱 더.

 “아하하하, 선배! 왜 이리 기운이 없어요? 잠 못 잤어요?”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부수고 들어오는 밝은 목소리. 동시에 몸이 붕 떠오르는 부유감이 느껴진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리. 난 고양이가 아니야. 당장 내려놓지 않으면 네 손가락이 창기병 다리처럼 변해도 책임 안 져.”

 군사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지만, 이번 인류군에 새로 보급된 신형창기병들은 모두 다리가 역관절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으음?”

 하지만 뒤에서 날 안아든 상대는 딱히 그쪽에 지식이 없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할뿐. 나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직접적으로 말했다.

 “손가락 꺾어버린다고.”

 “으헥!? 선배, 너무 폭력적이에요!”

 내 옆구리를 잡고 있는 손가락을 잡고 살짝 힘을 주자, 상대는 기겁을 하며 양손을 풀었다. 덕분에 공중에서 떨어진 나는 정말 고양이처럼 바닥에 착지하고 말았다.

 “와!”

 짝짝짝. 내 불쾌한 심정도 모르고 태평하게 박수를 치는 후배 녀석. 하지만 화를 내봤자 진만 빠지는 건 나다. 그녀 또한 선대 마왕과는 다른 의미로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네리 네리아우스.
 3년 전에 들어온 후임 사서로서, 양처럼 고불고불 말려 있는 머리카락과 풍만한 몸매, 그리고 낙천적인 성격이 특징인 여자애다. 전쟁이 터져 도서관의 인원충원이 중지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막내 자리에 있는, 한편으로는 불쌍한 녀석이었지만, 본인은 딱히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난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저리 가. 지금은 기분이 별로라서 놀아줄 마음의 여유가 없어.”

 “역시 수면부족이에요? 그럼 안 돼요! 잘 자야지 빨리 크죠. 아, 물론 선배는 그대로인 편이 귀엽긴 하지만…… 아무튼 졸려서 그런 거면 이리 오세요. 제가 무릎베개 해드릴게요!”

 네리는 왠지 모르게 살짝 흥분된 기색으로 내게 다가와 또 껴안으려고 했다. 그녀는 나보다 머리 두 개는 컸는데, 이는 딱히 후배 녀석의 신장이 평균을 넘어서는 게 아니라 내 키가 어린애 같은 것이었다. 마성을 드러냈을 때와 다르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내 덩치는 이상할 정도로 작았다.
 난 다가오는 네리의 얼굴을 밀어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졸린 거 아니니까 필요 없어!”

 정말 졸리지는 않다. 하지만 의외로 날카롭게 정곡을 찌른 부분은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요 한달 동안 연이어 전투를 치른 탓에 몸이 나른한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강행군이었어…….’

 일전 루치아와 가진 비밀회담에서 우리는 평화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양 집단의 우두머리가 멋대로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싸우지 않기로 결정한다고 해서 다른 구성원들 또한 그 합의에 순순히 따라준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전쟁처럼 서로 다른 종족 간에 원한이 쌓일 대로 쌓인 경우는 한층 일을 세심히 진행할 필요가 있다.

 ‘그걸 위한 평원에서의 대충돌…….’

 평화협정을 다른 이들에게도 납득시키기 위해 우리는 오히려 싸움을 크게 키웠다. 다섯 차례 연달아 양군의 무력을 총집결시켜 평원에서 대회전大會戰을 벌인 것이다. 물론 양측 병사들은 어디까지나 들러리. 무고한 희생을 줄이기 위해 양군의 무력을 대표하는 신마왕인 나와 인류군의 하얀 기사가 주로 일대일 대결을 펼치는 형식으로 싸움을 유도해 갔다.

 ‘뭐, 그렇다고 희생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아무리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도 휘말리는 자들은 반드시 나온다. 전장의 지형을 변형시킬 정도의 충돌이었으니 어쩔 수 없기도 했지만, 역시 해묵은 원한과 전쟁으로 인해 다시 새롭게 쌓인 원한으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달려드는 이들이 마왕군에도 인류군에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앞으로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죄업…….’

 정당화시킬 생각은 없다.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이란 말은 구역질이 난다. 설령 그것이 평화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해도 우리의 싸움에 휘말린 병사들의 죽음이 ‘개죽음’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 입장에서는 같은 죽음이라도 모순을 품은 평화보다는 미워하는 인류/마물을 멸절시키는 승리를 위한 초석이 되기를 바랐을 테니까.

 ‘그래도 원하는 건 거의 다 얻을 수 있었어.’

 결국 사람은 결과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걸까. 나와 영웅이 벌인 ‘보여주기 식 싸움’의 효과는 우리가 노린 것 이상으로 확실했다.

 우선 난 선대의 뒤를 이은 새로운 마왕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마물들은 내 힘을 경배하며 충성을 맹세했으며, 인간들은 내 힘에 절망하며 공포에 떨었다.

 백은의 영웅 또한 다시 한 번 인류의 구원자는 누구인가를 확실하게 모두에게 각인시켰다. 인간들은 신의 피가 섞인 성검의 소유자가 마왕의 딸에게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고무되었으며, 마물들은 인간들의 영웅이 자신들 중 가장 오래된 환수마저 간단히 도륙할 수 있다는 것에 전율을 느꼈다.

 ‘하여간 그 녀석, 죽일 기세로 달려들기는!’

 지난 싸움을 떠올리며 난 속으로 인간들의 영웅님을 향해 불평을 토했다.
 당연히 우리들 중 어느 한쪽이 진짜로 죽어선 안 되기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는 분명 적당히 힘을 조절하자고 합의를 했었다. 하지만 정작 싸움이 시작되자 그 아이는 성검의 힘을 조금도 억제하지 않고 발휘를 한 것이다.

 ‘아마도 절반 정도는 진짜 죽어도 괜찮다는 마음이었겠지.’

 선대 마왕에게 한 것처럼 정말 전력을 다한 공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당히 연기로 치부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공격도 아니었다. 사실 양자 간의 평화협정에 동의한 것은 루치아의 생각으로서, 영웅으로 칭송 받는 그 아이는 우리가 서로 손을 잡는 것에 꽤 회의적으로 보였다. 열렬히 루치아를 믿고 따르는 아이인 만큼 정면에 나서서 평화협정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갈 곳 없는 불만이 이런 식으로 분출된 것이 아닐까 싶다.

 덕분에 성검의 참격을 맨손으로 쳐낸 내 왼손에는 아직도 붕대가 감겨 있다. 평범한 상처라면 팔이 뜯겨나가도 금방 재생하겠지만, 센트럴 도그마에 당한 상처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잘 낫지 않는다. 그 성검의 특성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리라.

 그래도 ‘결과적으로’ 그 아이의 돌발행동은 성공적이었다. 덕분에 우리의 충돌이 한층 치열하고 거대하게 포장될 수 있었으니까. 만약 당초 계획대로 진짜 ‘연기’를 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잘 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끝내 놈龍들도 불러낼 수 있었으니.’

 우리가 로제 아르카디아 대평원에서 충돌을 벌인 진정한 이유. 그건 바로 용왕들의 개입을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로제 아르카디아는 일명 ‘용들의 정원’이라고도 불리는 곳으로서, 쉽게 말하자면 용족들의 영역 중 일부였다. 그런 장소에서 대놓고 수차례 싸움을 벌이며 땅을 망쳐 놓았으니, 세간에서는 거의 전설적인 존재로까지 여겨지고 있는 그들도 오랜 침묵을 깨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야말로 화룡점정, 이라 해야 할까.’

 인간들은 새로운 마왕을 보고, 마물들은 백은의 영웅을 보고 자신들로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강대한 적이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에 더해 초월자들 다음으로 한때 세상을 지배했다던 용왕들이 가진 거대한 힘의 편린을 목격하자 다들 본능적으로 위기를 자각하고 만 것이다.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이 싸움에 저들마저 개입하면 남는 건 파멸밖에 없으리라고.

 이렇듯 모두와 함께 위기의식을 공유하게 된 다음에는 상대적으로 일이 쉽게 풀렸다. 물론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시적으로라도 휴전을 맺자는 제안까지는 서로에게 납득시킬 수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앞으로의 노력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월급봉투는…….’

 오랜만에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왔지만, 상황은 금방 나아지지 않는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 나는 자꾸 옆에서 왜 기분이 안 좋으냐고 집요하게 묻는 후배 놈에게 현실을 들이밀었다.

 “게시판 공지 아직 안 봤냐? 눈이 있으면 읽어 봐.”

 “네? 뭐라고 적혀 있는데요?”

 네리는 눈을 크게 뜨고 이번 달 월급은 돈 대신 소량의 곡식으로 대신한다는 글을 천천히 읽었다. 잠시 동안의 침묵. 말은 없었지만, 그녀의 들뜬 머리 중 일부가 마치 강아지 귀처럼 축 늘어진 것으로 기분을 짐작할 수 있다. 근데 대체 저건 무슨 원리일까.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난 입을 열었다.

 “이제 내 마음을 알았지? 그러니 귀찮게 하지 말고 다른 데 가 있어.”

 쫑긋. 하지만 그녀의 강아지 귀 같은 머리카락의 일부가 다시 일어서는 순간 분위기도 반전됐다.

 “하지만, 선배! 뭐든 받잖아요!”

 “……뭐?”

 “물론 이걸로는 물물교환으로도 사탕이나 쿠키랑은 바꿀 수 없을 테니 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굶지는 않을 수 있으니 다행이지 않아요?”

 몸을 돌려 나와 눈을 맞추며 활짝 웃는 네리. 이 웃음이 진심인지 아니면 억지로 강한 척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는 내가 우울해 하고 있기 때문에 웃음을 지었다는 사실이다.
 그 상냥함에 차마 침을 뱉을 수 없었던 나는 그녀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래그래. 그렇게라도 생각해야지 별 수 있나. 그나저나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빨리 용건이나 말해. 참고로 사탕이라면 없으니까 기대하지 말고.”

 “앗, 정말 없나요!? 이상하네, 선배한테 분명 달콤한 향기가 나는데…….”

 “우와, 이 변태. 어딜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거야? 저리 꺼져.”

 질색하는 척 하며 가볍게 넘기긴 했지만, 사실 난 그녀가 말하는 ‘달콤한 향기’라는 것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건 다름 아닌 내 마력의 냄새다. 마도사로서 뛰어난 소질이 있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마력을 오감으로 감지할 수가 있는데, 네리의 경우는 그게 후각인 모양이다. 마성을 감춘 인간으로서의 나는 아크메이지라도 쉽게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을 텐데, 아무 지식도 없는 일반인의 몸으로 어렴풋이나마 내 마력을 감지하다니. 만약 그녀가 마도사의 길을 걸었다면 대성했을지도 모르겠다.
 난 마력의 냄새에서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나라고 언제나 사탕을 가지고 다니는 건 아니라고. 시절이 이렇다 보니 단 거에 끌리는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없는 건 어쩔 수 없으니 포기해.”

 네리가 내게서 사탕을 찾는 건 단지 마력을 후각으로 감지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에도 종종 나는 그녀에게 여러 번 사탕을 준 적이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마왕으로 불릴 만한 힘이 있고, 인간 기준으로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내게 있어 기호품을 손에 넣는 것쯤은 전란의 시대에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휴전을 이끌어 내기 위해 평원에서 피곤한 싸움을 벌이느라 도무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내 말에 네리는 뾰로통 볼을 부풀리며 입을 열었다.

 “우, 물론 주시면 감사하긴 하지만, 사탕 얻어먹으려고 선배를 귀찮게 하지는 않아요! 제가 선배를 찾은 건 관장님이 같이 풀 뽑으라고 시키셨기 때문이에요.”

 “……또?”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 전쟁이 길어지며 임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지급할 수 없게 된 도서관에는 말할 것도 없이 인원 또한 대폭 축소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본래는 청소부나 정원사가 해야 할 일도 남은 인원들에게 분배돼 사서가 직접 화장실 청소나 제초작업까지 해야 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요즘 날이 좋다 보니 풀들이 잔뜩 자라서…… 아, 근데 선배 손이 다쳤으니 작업을 할 수가 없겠네요!”

 붕대를 감은 내 왼손에 눈길을 주며 허둥거리는 네리. 일전 성검 센트럴 도그마에 당한 상처는 인간으로 돌아와도 물론 낫지 않고 회복에 시간이 걸리고 있다. 주변에는 대충 넘어져서 삐었다고 둘러대고 있는 형편이다.
 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딱히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풀 뽑는 것 정도는 문제 없…….”

 그러나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안 돼요! 다친 사람은 푹 쉬어야죠!”

 “그래? 그럼 미안하지만 맡길…….”

 “그러니 선배는 옆에서 봐주세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네리를 향해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라고?”

 “아뇨! 그늘에서 쉬거나 책을 읽어도 돼요!”

 “왜 굳이 그런 비효율적인 짓을…….”

 “음, 옆에 누가 있으면 힘이 되거든요. 그게 선배라면 더욱 더!”

 저런 부끄러운 말을 아무런 사심 없이 그냥 내뱉을 수 있다니.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나는 백기를 흔들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래 알겠어. 뒤뜰이지? 먼저 가 있을 테니까 너도 준비해서 와.”

 “네, 선배! 작업도구 가지고 금방 갈게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콧노래를 부르며 사라지는 네리. 나는 차가운 손을 화끈거리는 볼로 가져가 식히며 혼자 중얼거렸다.

 “나랑 있는 게 뭐가 즐겁다고 강아지처럼 따르는지 원.”

 일순 차라리 마력을 조금 살포해 도서관 주위의 풀들을 전부 죽일까도 생각했지만, 내 발걸음은 어느새 뒤뜰과는 반대방향으로 향해 있었다.

 “저 녀석, 준비하는 데 적어도 10분은 걸릴 테니 충분하겠지. 잠깐 다녀올까.”

 목적지는 종교도시 세인트 헬레나. 변경지역에 위치한 소도시로서 발전이 더딘 시골마을 같은 곳이지만, 전란의 중심지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덕분에 현재는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곳이기도 했다. 헤미스피어 도서관에서 고속철을 타고도 3일 이상은 달려야 하는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내 본모습으로 날아가면 1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그곳 수도원에서 만드는 것들은 하나 같이 질도 좋으니까.”

 세인트 헬레나의 특산품은 포도주와 잼, 그리고 수녀들이 만드는 빵과 과자들. 술은 안 되겠지만, 나머지 것들은 제초가 끝난 뒤에 먹으면 한층 맛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후배에게 간식을 사주기 위해 마왕이 되어 하늘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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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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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마왕이 된 이유


 헤미스피어 대도서관.
 인류의 빛나는 지혜들이 무수한 별처럼 반짝이는 서적의 바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제정시절 황제의 권위를 뽐내기 위해 지어진 이 반구형의 거대한 건축물은, 오로지 장서의 보관과 심미적인 외관에만 중점을 두고 설계된 탓에 이용자들의 편의는 조금도 고려되지 않은 게 특징이었다.

 그 비효율성을 극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바로 도서관 중심부의 풍경.
 장엄한 돔 아래 특수하게 가공된 합금서장이 벽을 따라 15층 건물의 높이까지 솟아올라 있고, 그 안에는 온갖 역사적인 장서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주위에는 책장을 밝힐 화려한 보석등불이 촘촘히 박혀 있으며, 오색으로 찬란한 색유리stained glass 아래 당대 유명한 예술가들의 대리석 조각상과 금은의 장식품들이 천상의 방문객 마냥 내부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
 계단도 사다리도, 그밖에 다른 무엇도 아무것도 없다. 하늘을 바라보듯 고개를 젖혀야 그 끝이 보이는 책장 저 끝까지 닿을 수단은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굳이 사람 키를 넘어서는 상단 부분의 책장까지 손을 뻗고 싶다면 고층 사다리를 준비하든지, 부유마법을 사용하든지, 아니면 최근 전쟁에서 발명된 부유석을 장착한 비행 장비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서적이 아닌 업적을 보는 공간.
 내용이 아닌 위용에 감탄하는 공간.

 호의를 갖고 포장하자면 풍성하고 강성했던 제국시절 최전성기의 흔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악의를 갖고 매도하자면 단순한 허세라고 일축할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단연 후자 쪽이라 생각하지만 말이야. 평범한 사람들도 종종 단 한번 읽어본 적 없는, 괜히 어려워 보이는 책들을 책장에 진열해 두곤 할 때가 있잖아? 남들이 그걸 보고 자신의 교양과 학식을 과대평가해주길 은근히 기대하면서. 이 도서관은 그런 흔해 빠진 심리가 국가적 규모로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아. 말하자면 이 도서관 전체가 황제의 책장이었던 셈이지.

 난 어둠 속에서 언젠가 지인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전적으로 그 의견에 동의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도서관 어딜 가나 중심부와 비슷한 꼴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책상과 의자가 생긴 것도 제정시절이 끝난 후대의 일로써 그 전까지는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조차 제대로 없었다고 한다.

 영원히 가는 영광이란 없다.
 한때는 수천의 보석등불이 도심지의 야경처럼 환하게 밤을 밝히던 도서관 내부도 지금은 여느 파괴된 도시들처럼 어둠에 잠긴 채 고요하다. 마왕군과의 극심한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해진 탓에, 더는 도서관에 연료를 공급한다는 ‘사치’를 부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뭐 내 입장에선 딱 좋지만.”

 슥. 난 책장을 넘기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빛도 사람도 없는 밤의 도서관은 독서를 하기에 정말 좋은 환경이다. 조용한 것도 조용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사람 눈치’를 전혀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주위에 보는 사람만 없다면 공중에 누운 채 아주 편한 자세로 책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어둠 또한 독서에 어떤 방해도 되지 않는다. 악마의 피가 흐르는 내게 있어 빛은 사물을 인식하는 필수조건이 아니니까.
 하지만 내 안식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 여어, 딸내미. 잘 있었냐. 여전히 우중충하게 살고 있군.

 세상을 한없이 잠식해 들어가는 검은 목소리. 불청객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마왕, 이클립스……!”

 마치 왕관처럼 머리를 감싸고 있는 큼직한 황금색 산양의 뿔. 그 아래 홍옥Ruby처럼 빛나고 있는 불타는 적색 머리카락. 박쥐를 닮은 표층차원의 흉측한 여섯 장 악마의 날개.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심층차원에 숨어 있는 열세장의 그림자 날개. 털 하나하나가 대마법을 행사할 수 있는 막대한 마력을 내포하고 있는 악마의 사자꼬리…….
 현재 인류의 최대 천적이라 할 수 있는 마왕이 지금 내 앞에 불쑥 나타난 것이다.

 “알비노스 왕국의 아크메이지 클래스의 마법장벽들은……. 쳇, 아예 발동조차 하지 않았군.”

 덤으로 내가 몰래 쳐놓은 다차원수호결계도 마찬가지.
 사실 충분히 힘 있는 존재에게 이런 방어막을 부수는 것쯤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힘 자체를 갖추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그러나 부수지 않고 그냥 통과한다는 것은 단순히 힘이 있고 없고의 문제를 떠나 또 다른 차원의 초월성이 요구되는 난제이다.

 가령 어떤 사람을 여러 겹의 튼튼한 줄로 촘촘히 묶어 두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줄 하나하나마다 조금만 흔들려도 심하게 소리가 나는 종을 잔뜩 매달아 두었다고 하자. 이야기 속의 영웅처럼 충분히 힘이 세다면 근육을 부풀리는 것만으로도 실처럼 줄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또는 관절을 기묘하게 빼거나 뒤틀 수 있는 재주를 가진 달인이라면 어떻게든 줄을 헐겁게 해 탈출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자들에게도 아예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속박에서 자력으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리라.

 이 여자가 마도사들의 마법장벽이나, 내 다차원결계를 무시하고 여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그런 종류의 기적 같은 솜씨에 가까웠다.
 과연 마왕. 악마들의 왕이자, 마법의 왕이라 불릴 만 하다.

 - 하하. 이봐, 딸. 너무 기죽을 거 없어. 다른 떨거지들과 다르게 네 다차원결계는 꽤 훌륭했으니까. 솔직히 좀 놀랐다. 설마 심원영역의 잠행까지 차단하고 들어올 줄이야. 역시 내 딸들 중에선 네가 제일 잔재주가 뛰어나.

 웃으며 말하는 마왕. 일단 딸이라고 치켜세워주는 걸까? 하지만 ‘잔재주’라 칭한 시점에서 이미 칭찬이고 뭐고 없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욕하는 걸로 간주하고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였을지 모르지만, 이 여자는 이게 순수한 감탄의 토로이니 상대하기 곤란하다. 뭐 싸워봤자 이길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니 무시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다.

 “……요즘 문명파괴에 다망하신 분이, 대체 무슨 일로 여기에 오신 건지?”

 잔뜩 비아냥거리며 물었지만, 사실 난 이 여자가 왜 날 찾아왔는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소름끼치도록 아름답고 차갑게, 달빛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마왕. 하지만 언제나 변함없을 것 같은 이 여자의 완결성에는 지금 작지만 커다란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비유 같은 게 아니다. 문자 그대로 마왕의 왼쪽 가슴은 심장과 같이 뻥 뚫린 채 피가 철철 흘러나오고 있었다.

 ‘설마 소문이 진짜였다니……. 낮의 소란은 이게 원인이었군.’

 영웅이 드디어 마왕을 쓰러뜨렸다는 사람들의 환호성. 이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나는 그저 헛소문이라고 치부했다. 사실 전쟁 중에는 사람들의 소망을 투영한 근거 없는 이야기rumor가 민들레 홀씨처럼 이곳저곳 떠도는 게 일상다반사다. 하지만 언제나 올바른 사람이 있을 수 없듯이, 언제나 틀린 소문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만큼은 소문이 진실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가 단지 부상만 입고 돌아온 줄 알았는데 이런 업적을 올렸을 줄은. 아무래도 내가 인간 측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 피들, 어떻게 하지?’

 마왕의 상처에서 쏟아지는 혈액은 순수한 마력덩어리라 전부 공중에 흩어질 뿐, 물리적인 흔적을 남기거나 하지는 않는다. 청소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건 좋지만, 고농도의 마력은 산소와 마찬가지로 생물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만약 이대로 두면 이 일대는 한동안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이 되고 말리라.

 물론 최악의 경우 내가 그 마력들을 먹어치우면 된다. 실제로도 그럴 생각이긴 하지만, 그때는 마성魔性이 짙어져 인간성을 아예 상실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어디선가 발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본적으로 이 도서관에서 책만 읽으며 지내고 싶은 내게는 매우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내 심정을 알 리 없는 마왕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 무슨 일로 왔냐고? 그냥 딸내미 얼굴 좀 보려고 왔지. 너 300년인지 400년인지 여기서만 계속 일하고 있던데, 지겹지도 않냐?

 “내가 여기 속하게 된 지는 이제 곧 100년이야. 지겹기는커녕 아주 잘 지내고 있고. 그리고 내 나이는 아직 300살. 400년 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어.”

 - 그랬나? 딱히 나이 같은 건 평소 생각해 본 적도 없어서 실수했군. 뭐 100년도 제대로 못 사는 인간들처럼 세월에 민감할 이유가 없으니 이런 쪽은 아무래도 둔감해지네. 네가 이해해라. 아! 근데 100년이라도 인간들 기준에선 꽤 긴 세월이잖아. 너 여기서 그렇게 오래 있어도 돼? 인간들은 수명이 짧아서 늙지 않는 존재는 이상하게 생각하던데. 음, 나도 그 아이…… 그러니까 네 모체 되는 여자랑 잠깐 같이 살 때 그걸로 좀 고생했지.

 여전히 무신경한 발언. 하지만 화를 내봤자 내 손해다. 어차피 죽어가는 괴물, 조금은 친절히 대해줘도 문제될 건 없으리라.

 “당신이 말하는 ‘잔재주’로 인식장애 마법을 걸고 있으니 괜찮아. 주기적으로 직급과 이름을 바꾸며 다른 사람처럼 꾸미고 있기도 하고.”

 - 그거 괜찮은 방법이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나도 그때 그런 방법이 떠올랐다면 그 애랑 좀 더 같이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는 듯이 탄식하는 마왕. 이해는 된다. 손짓 한번으로 가볍게 도시 하나는 소멸시킬 수 있는 존재가 인간들의 사고방식에 맞춰 자신을 꾸며야 한다는 발상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으리라. 오히려 나를 낳아준 어머니를 생각해 겉모습이나마 인간처럼 꾸미고 30년 넘게 같이 지냈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처럼 놀라운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쓸쓸한 죽음을 목격한 나는 이런 말을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무슨……. 당신이 우리 엄마를 사랑하기는 했어?”

 - 당연하지! 그렇지 않으면 네가 태어날 리가 없잖아. 아직도 그 아이는 내 기억 속에 선명해. 뭐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딱히 이 여자를 위해서가 아니다. 여기서 잘못 힘을 개방하면 내가 안식처로 삼고 있는 이 도서관 자체가 붕괴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후…….”

 진정하자. 이 여자가 무신경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까.
 200년 전에도, 이 여자는 불쑥 내 앞에 나타나 엄마를 찾았었다.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넘은, 끝까지 마왕을 그리워하다 외롭게 눈을 감은 우리 엄마를. 내가 엄마의 죽음을 전하자, 이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 아, 그러고 보니 인간들은 수명이 짧았지. 난 생각이 짧았고. 하하. 간만에 얼굴 좀 보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그 뒤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난 피투성이로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으니까.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변할 만큼 이성의 끈이 끊긴 내가 마왕에게 덤벼들었다가 도리어 신나게 얻어맞고 빈사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때 싸움의 여파로 대륙 북부의 산맥 하나가 등이 끊어지고 만 것은 내 부끄러운 사춘기의 흔적이다.

 - 응? 이 녀석이 날 죽이려고 한 게 아니었다고? 내 자리를 노리거나 날 넘어서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럼 왜 덤빈 건데? 엄마에 대한 애정에서 오는 섭섭함? 음, 잘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넌 인간들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

 참고로 내가 그 싸움에서 죽지 않은 것은 마왕의 자비 따위가 아니다. 이 여자는 설령 자기 딸이라도 덤벼온다면 용서 없이 처리하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살 수 있었던 것은, 마왕의 오랜 친구이자 비서관을 자처하는 한 몽마Succubus가 내 심정을 설명하며 죽이지 말 것을 요청한 덕분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때 이후로 난 이 여자에게 무언가 인간적인 감정을 기대하는 것을 포기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이 여자는 인간이 아니니까. 게다가 나도 이제 300살. 감정에 휘둘릴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나고 또 지났다.
 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입을 열었다.

 “빨리 용건이나 말해. 오늘은 읽고 싶은 책이 좀 많으니까. 정말 내 얼굴만 보러 온 건 아닐 거 아니야.”

 - 응. 맞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 말이야. 이런 어두침침한 데서 100년이나 일했다면 좀 지겹지 않냐?

 여전히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여자다. 하지만 대화를 포기할 게 아니라면 이쪽에서 맞춰주는 수밖에 없다.

 “아니, 아까도 말했지만 안 지겨워. 딱 내 성정에 맞고 좋아.”

 - 그러니까 말이지, 너 내 뒤를 이어라. 나 대신 마왕군 좀 지휘해. 그럼 심심하지 않고 딱 좋잖아? 어때 마음에 드는 제안이지?

 “…….”

 아, 진짜 대화를 포기하고 싶다. 여기가 내가 일하는 도서관만 아니었다면 이미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여자는 상대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강행수단’을 써서 억지로 말을 듣게 만든다. 물론 내 힘으로는 이 여자와 싸워서 이기는 건 무리라도 도망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유서 깊은 헤미스피어 대도서관은 폐허조차도 아닌 평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심장을 잃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해도 이 여자에게는 아직 그만한 힘이 남아 있다.
 그래도 역시 이 여자가 날 찾아온 이유는 예상한 대로다. 난 상대가 듣지 않는다 해도 최대한 진심을 담아 거절의 말을 꺼냈다.

 “싫어. 그런 건 당신의 다른 자식들, 내 언니들이나 동생들에게 부탁하라고. 혼혈인 나와 달리 순혈종인 그 녀석들이 어차피 나보다 힘도 세잖아. 당신 뒤를 잇기에는 더 강한 쪽이 낫지 않아?”

 내게는 위로는 언니가 넷, 아래로는 여동생이 둘, 배가 다른 자매들이 있다. 한명을 빼고는 다들 이 여자를 닮아 손쓸 도리가 없는 잔학한 폭군들이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이 여자를 닮아 힘만큼은 확실하다. 솔직히 마왕의 자리에는 나보다 다른 자매들이 훨씬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마왕은 고개를 저었다.

 - 언니들과 동생들이 아니라 ‘언니와 동생’이다. 나머지는 다 죽었어.

 “……뭐?”

 -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야.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자세한 얘기를 들으니 다른 자매들은 요 200년 동안 내가 관심을 끊고 있는 사이 전멸한 모양이다. 언니들 중 둘은 엄마인 마왕의 자리를 뺏기 위해 도전했다가 죽었고, 나머지 자매들은 서로 영역 다툼을 벌이다가 공멸했다고 한다. 그 싸움에서 언니와 동생 중 각각 하나가 살아남았지만, 둘 다 깊은 상처를 입고 잠에 빠져들어 향후 수백 년은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모양이다.
 ……과연 이 여자의 딸들답다. 동시에 내게도 같은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끔찍하다.

 - 그런 이유로 내 뒤를 이을 사람은 너밖에 안 남았다. 뭐 꼭 내 딸이 아니더라도 다른 능력 있는 녀석이 있으면 뒤를 물려줄 생각이었지만, 인간이나 용종들과의 싸움에서 많이들 죽은 탓인지 쓸 만 한 것들이 안 보이더라고. 해서 나 다음으로 현재 네가 실질적인 마왕군 2인자야. 기쁘지?

 아니 하나도. 그래도 이 여자가 내 기분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지껄여준 덕분에 나 역시 양심의 가책 없이 함부로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내 대답은 변하지 않아. 난 당신의 뒤를 이을 생각 없어. 마왕군 따위 망하든지 말든지. 아니 차라리 망하면 속 시원하겠군. 최소한 내가 사는 지역이 위협당할 일은 없어질 테니까. 무조건 인간들 편만 들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내게는 인간들이 더 친숙해. 인간들의 문명을 즐기는 내 입장에선 마왕군을 응원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 음, 그럼 우리 딸이 많이 곤란해질 텐데…….

 “하! 내가 왜? 곤란한 건 당신이겠지. 이제 곧 죽을 사람이 위협해봤자 소용없어.”

 - 응? 죽는다고? 누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는 듯이 묻는 마왕. 난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의 뻥 뚫린 왼쪽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성검에 심장이 꿰뚫린 당신이 죽지 내가 죽겠어? 설마 그런 어설픈 연기로 얼버무릴 수 있다고…….”

 - 아아! 그러고 보니 오늘 한방 먹었었지! 그래서 그런 착각을 하고 있었군. 잠시만 기다려.

 마왕이 가볍게 말하며 가볍게 손을 상처로 가져가자, 파괴된 심장이 단번에 재생하며 출혈이 멎고 뚫린 가슴이 순식간에 메워졌다.
 난 경악에 표정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다.

 “마, 말도 안 돼! 영웅의 성검, 센트럴 도그마에 심장이 뚫리고도 어, 어떻게……!? 그 성검은 예지계의 존재원형을 직접 파괴하는 살신殺神의 법리를 가졌어! 단지 물리적으로만 대상을 멸하는 게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세계에서 지우는 힘을 가졌다고! 초월자들조차 그 검 앞에서는…….”

 그러나 마왕은 이해하지 못하는 날 오히려 이해하지 못했다.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존재하는 데 왜 세계가 필요해? 나는 나로서 존재할 뿐인데. 그걸로 충분하잖아.

 질렸다. 이 여자가 상식을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난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던 모양이다. 대체 뭘 어떻게 실수하면 세상의 온갖 법칙을 무시하는 이런 무지막지한 존재가 튀어나올 수 있는 걸까. 이런 여자가 지금껏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다.

 - 이봐, 딸. 그게 네가 하고 있는 두 번째 착각이야.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한 마왕의 지적.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 난 딱히 세상을 멸망시키고 싶은 게 아니야. 단지 놀고 싶은 거지. 그걸 위해 이 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거고. 성과는 나름 있었어. 너도 봤다시피 내가 가슴에 입은 상처……. 분명 이건 인간들에게 영웅이라 칭송 받는 그 아이가, 이번에도 무력하게 쓰러질 거라 생각한 그 아이가, 예상을 뛰어넘고 죽을 각오로 없는 힘까지 짜내 내게 입힌 상처다. 박수를 보내 마땅한 투지였고, 실제로 나도 감동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물러나 주었지.

 마왕은 모험을 꿈꾸는 어린아이처럼 두근거리는 얼굴로 오늘의 싸움을 회상했다. 하지만 그 표정은 곧 유년기의 꿈을 잃은 지친 어른의 얼굴로 변했다.

 - 동시에 깨달았다. 이게 인간들의 한계라는 것을. 인간들의 세력이 최절정기에 달했을 때, 인간들 사이에 신들의 힘을 이어받은 역대 최고의 영웅이 등장했을 때, 신들마저 죽일 수 있는 최강의 무기가 그 영웅의 손에 들어갔을 때 싸움을 걸었지만, 그래도 인간들은 날 죽일 수 없었어. 물론 용왕들이나 내 힘을 이어받은 딸들마저도. 더 이상 내가 이곳에서 지금까지 얻은 이상의 자극을 얻을 리는 없겠지.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미친 괴물이라고는 알고 있었던 이 여자가 누군지 다시 모르게 되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반쯤은 알 수 없는 공포심에 쫓기며 물음을 던졌다.

 “당신은, 대체 뭘 할 생각이야?”

 마왕은 간명하게 대답했다.

 - 떠날 거다.

 “떠, 떠난다고? 어디로?”

 아직 감정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당혹해하는 나와 대조적으로 마왕은 표표한 시선으로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 아예 이 세계를 벗어나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떠나려고. 그렇군. 우선은 초차원성검을 벼려낸 초월자들의 세계에 가볼까. 그들이라면 충분히 내 상대가 될 수 있겠지.

 초월자. 다른 이름으로는 해탈자. 또는 먼저 떠난 이들. 혹은 앞서 빛이 된 자들.
 초월자란 인류나 다른 마물들이 있기 훨씬 전, 이 지구상에 존재했다는 전설 속의 첫 번째 종족을 가리키는 말로서, 초고도문명을 이룩한 끝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신적인 존재가 되어 상위차원으로 떠났다고 전해지는 이들이다. 인간들 사이에 신神으로 숭배되는 존재가 다름 아닌 그들로서, 성검 센트럴 도그마는 과거 이들 종족이 실존했다는 역사적 증거 중 하나였다.

 “이, 이길 수 있겠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마왕은 씩 웃으며 답했다.

 - 그걸 모르겠으니까 가보려는 거야.

 다시 꿈꾸는 아이 같은 표정을 짓는 마왕. 그 얼굴에 이것저것 모든 게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든 나는 큰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초월자들이 우리랑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엄청난 재앙이겠군. 난데없이 이세계에서 침략해 오는 마왕이라니, 완전 B급 소설이잖아. 뭐 잘 알겠어. 당신이 얌전히 다른 곳으로 떠나준다면, 우리 입장에선 참 고마운 일이지. 근데 내가 왜 떠나는 당신 뒤를 이어야 하는 거지? 이제 와서 당신이 이끌던 마왕군에게 책임감이라도 느끼는 거야?”

 마왕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상하군. 넌 내 딸들 중에선 제일 머리가 돌아가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도발 아닌 도발에 발끈한 나는 고속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각 개체는 강하지만 결속력이 없는 마물들…… 루치아의 기치 아래 단단히 뭉쳤지만 심하게 쇠퇴한 인간들……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용왕들……. 그렇군. 당신이 갑자기 사라지면 싸움이 한층 격렬해질 수가 있겠어. 자칫 멈춰야 할 시기를 놓치면 이 지상의 문명은…….”

 - 사라지거나, 적어도 엄청나게 퇴보를 하겠지. 그건 곧 네가 한가롭게 여기서 책을 읽을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잠깐, 뭐야. 그러지 마. 이제 와서 무슨…… 웃기는 소릴…….”

 믿을 수 없지만 예상되는 대답을 부정하기 위해 고개를 저었지만, 마왕은 언제나 그렇듯 거리낌 없이 자기 할 말을 했다.

 - 그래, 널 위해서다.

 전에 없이 진지한, 그리고 상냥한 눈빛. 사고가 정지된 내가 침묵하는 동안 마왕은 말을 이었다.

 - 나야 이 세계에 아무런 미련이 없으니 그냥 떠나도 상관없지만, 넌 아니잖아? 너 정도의 힘이라면 설령 세상이 멸망해도 혼자 살아갈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넌 지상의 문명을 사랑하는 모양이니 기회를 주는 거야. 내 뒤를 이어 상황을 수습하라고. 이 세상 문명의 몰락을 막으라고 말이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 거창하게 말하자면, 마왕이 돼 세상을 지켜라. 내 친구Succubus에게 말해 뒤를 이을 준비는 다 해뒀으니 넌 그냥 수락만 하면 돼. 물론 거절하는 것도 네 자유야. 그 결과를 네가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지.

 “잠깐, 잠깐만……!”

 - 그럼 작별이다.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래도 난 이 세계에서 제법 즐거웠어. 그러니 너도 즐겁게 살길 바란다, 내 딸아.

 마왕은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하며,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다는 듯이 사라졌다. 붙잡을 새도 한방 먹일 새도 불평 한마디 할 새도 없이.

 “빌어먹을……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무책임한 여자……!”

 확실히 마지막까지 이 여자는 최악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딸의 마음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딸이 즐겁기를 바란다는 그 유언 아닌 유언만큼은 진심이었다는 것을 어쩐지 알 수 있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이미 벌어진 일에 불평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어. 해야 될 건 문제에 절망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것. 최대한 빨리 세상에서 당신의 흔적戰災들을 지우고, 평온하게 살아주겠어!”

 그렇게 난 그 여자의 뒤를 이어 마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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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09.10 18:50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아앗... 이 것은 마치 잔뜩 망친 조별 과제의 마무리를 떠맡은 임시 조장(전임 조장은 도망감)의 기분! ㅠ_ㅠ

    만약 제가 작중 신임 마왕의 상황이라면 인류연합군측과의 협의를 거친 후 적절하게 짜여진 판에 마왕군의 병력을 의도적으로 축차투입•축차소모시키는 과정을 통하여 마왕군의 궤멸을 유도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난 이후에는 연합군 수뇌부측과의 사법거래(?)로 다시 평화로운 독서생활 속으로 Comeback & Dive~ >_<)/


    ... 하지만 이는 단지 막연한 계획일뿐 마왕군 세력 내부에도 나름의 신임 마왕의 능력 검증과 견제 및 감시를 위한 안전장치라든가 머리 좋은 책사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을테니 쉽지는 않을테지요. 흑흑(/orz)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9.12 06:57 신고 address edit/delete

      다음 편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별과제... 딱 적절한 비유를 들어주신 듯-_-b 오히려 중고등학교보다 대학교에서 무책임함이 난무하는 모습은 참 안타까웠던 기억이 나요ㅠ_ㅠ


      확실히 평온을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주인공인 마왕의 딸이 직접 마왕군을 내부에서부터 빠르게 붕괴시키는 것이겠지만, 말씀처럼 마왕군 수뇌부가 견제하는 것도 있고, 또 무엇보다 주인공 본인이 그런 일을 바라지 않고 있기도 하네요. 주인공은 비록 인간 쪽에 더 호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혼혈로서 나름 마물이라 불리는 다른 종족들에 대한 이해도 있는 편이라 더욱 대등한 관계에서 소강상태로 끌고 가려는 마음이 있기도 해요.

      저번 댓글에서도 살짝 말씀드린 것처럼 최대한 무겁지 않게 가려고 생각 중이기 때문에 작중에서는 이런 사정이 자세히는 나오지 않을 예정이지만, 분위기를 망치지 않는 선에서 위와 같은 내용도 다루어 보고 싶네요^^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








00. 얼어붙은 시간


 푸른 달빛이 흩어지는 폐허.
 한때 인류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수도의 중심부도 지금은 옛 위용은 온데간데없이 형태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스러질 수밖에 없다는 쓸쓸한 진리를 체현하고 있을 따름이다.

 돌이킬 수 없는 상실. 회복할 수 없는 영광.
 지상의 모든 것을 제패하고 천상까지 길게 손을 뻗으려 했던 고귀한 인간들의 도시는, 신이 아닌 마왕의 손에 의해 그 오만을 심판받았다.

 - 모든 것은 모래로 그린 그림…… 참으로 덧없군.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혼잣말. 마치 검정 물감으로 세상을 덧칠하듯, 스스로도 진저리가 날 만큼 오싹하고 눅눅한 음색이다. 확실히 본모습을 드러낸 나는, 세상 그 어떤 인간보다도 그 여자를 닮았다. 인간들의 세상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은 그 여자를.

 “아직, 우리는 끝나지 않았다.”

 그때, 내 우울한 감상에 저항하는 금빛 목소리가 짙은 어둠絶望 속에 맑게 울려 퍼졌다. 나는 뒤를 돌아 상대를 바라보며 음미하듯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 임페리얼 루치아. 인류의 마지막이자 첫 번째 희망, 루치아 안젤리나 임페리얼 제이드.

 밤을 밝히듯 춤추는 화려한 금색 머리카락. 불처럼 강렬하면서도 얼음 같은 침착함을 내포한 짙은 녹색 눈동자. 초연의 내음이 깊숙이 스며든 붉은 제복이 권위 있는 여왕처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그녀Lucia는, 실제로 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직위에 앉아 있었다.

 인류연합 최고대표. 인류군 총사령관.
 역대 그 어떤 권력자도 동시에 가져본 적이 없는 최고 권력을 양손에 쥐고 있는 루치아 임페리얼. 하지만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지금 그녀가 앉은 자리를 탐내거나 부러워하진 않으리라.

 “그야 그렇겠지. 너희들 마왕군의 공격에…… 아니, 마왕 이클립스의 힘에 유린당한 탓에 인류의 세력권은 절반 이상 축소되고 말았으니까. 패전의 책임에선 누구나 도망치고 싶어 하지.”

 내가 삼키고 있던 말을 눈치 챈 걸까. 루치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하지만 눈빛에는 확실한 분노를 담아 날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용기 있는 자들은 일찍이 다 죽었다. 다름 아닌 네놈들의 손에. 남은 건, 나 같이 어둠에 벌벌 떨며 간신히 서 있는 게 고작인 잔챙이들뿐. 아주 통쾌하겠군. 인간을 먹이로밖에 보지 않는 너희 마물 놈들에게는.”

 과소평가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지나친 자기비하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힘 있고 의무 있는 자들부터 도망친 최악의 상황에서도 무릎 꿇은 사람들을 독려하고 규합해 마왕군과 호각으로 맞선 그녀Lucia를 누가 비웃을 수 있을까. 아마 그녀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난 그녀야말로 진정한 인간들의 왕이라 생각한다. 그런 그녀를 조소하는 것은, 설령 그 본인이라도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입장상 난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밝힐 수는 없었다. 대신 난 한껏 폼을 잡으며 상대를 내려다보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 그런 것치곤 제법 배짱 있는 인간이군. 내 손짓 한 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약하고 미약하고 허약한 존재가, 겁도 없이 홀로 나와의 회담에 응하다니. 대담한 용기일까 아니면 단순한 만용일까. 어느 쪽인지 심히 궁금한데.

 떠보는 내 물음에 루치아의 입가가 살짝 비틀렸다.

 “미안하지만, 난 혼자가 아니야.”

 쿵. 굉음과 함께 하늘에서 떨어지듯 착지한 백은의 기사. 빈틈없이 갑옷으로 온몸을 감싼 하얀 영웅은 말없이 오색으로 찬란히 빛나는 검을 날 향해 겨누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난 모른 척하며 입을 열었다.

 - 그렇군. ‘선대’ 마왕의 심장을 꿰뚫은 초차원 성검…… 인류의 마지막이자 두 번째 희망인 반신demigod의 영웅이 함께라면 내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겠어.

 루치아가 인류의 정신적 지주라면, 이 백은의 기사는 물리적 지주.
 성검에게 선택 받은 영웅은 인류군이 무참히 패주하는 상황에서도 단신으로 마물들의 공세에 맞서 몇몇 도시들을 지켜냈다. 그 모습에서 다시금 희망을 찾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루치아와 함께 그 기사를 칭송하기 시작했다.

 「…….」

 말없이 노려보는 시선. 투구로 얼굴은 가려도 살기까지 감출 수는 없다.
 루치아는 그 무구한 살의의 대변자가 되어 입을 열었다.

 “경솔했군. 이런 자리에 어떤 대비도 없이 혼자 나오다니. 마왕이 죽은 지금, 구심점인 너마저 사라지면 마왕군은 더 이상 세력을 유지할 수 없다. 급속도로 붕괴하고 말테지. 너희 마물들은 ‘왕’없이는 절대 뭉치지 못하는 존재. 아무리 각 개체가 강하다 해도, 그것만으로 ‘인류’는 이길 수 없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정확한 지적. 지상을 지배하고 있던 인류문명을 붕괴직전까지 몰아넣은 이 악마 놈들이 얼마나 구제불능의 멍청이들인지는, 어떤 인간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애초에 내 몸에 흐르는 피의 절반은 그들과 같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난 입장상 그 말을 가만히 수긍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 글쎄, 그대라는 지도자가 없어지면 무너져 내리는 건 인간도 똑같지 않나? 오지 않을 구원자를 고대하며 발걸음을 멈추고, 누군가 이끌어주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야말로 인간들의 종족적 특성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물론 그 또한 인간의 나약한 일면이지. 하지만 사람에게는 그 나약함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강함이 있다. 설령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손에 죽는다 해도 결코 우리人間는 멈추지 않아. 다면성을 갖지 못하는 너희 악마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미래에 대한 신뢰로 강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사람을 향한 찬가를 노래하듯 선율과도 닮은 그녀Lucia의 목소리에 난 그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지금의 난, 싫어도 악마들을 대변해야만 하니까.

 - 시험해볼까. 정말 그대를 죽여도 인간들이 절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지를.

 눈을 가늘게 뜨고 힘을 아주 조금만 발산한다.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상대를 죽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럼에도 이 일대는 폭풍이라도 휘몰아친 것처럼 폐허의 잔해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역시 이 모습으로 힘을 조절하는 것은 어렵다.

 “이건, 교섭결렬의 의지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아니면 달리 해명할 말이 있나?”

 다행히 먼지가 걷힌 후 모습을 드러낸 루치아는 멀쩡했다. 백은의 기사가 성심력을 펼쳐 내 마력방출을 중화시킨 것이다. 난 내심 안도하며, 동시에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한층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과연 인간들의 영웅님. 이 정도는 문제없이 막아내는군. ‘마왕을 쓰러뜨릴 때 입은 상처’가 아직 남아 있다 해도.

 「……!」

 덜그럭. 짧지만 강렬한 동요. 하얀 기사는 아직 루치아만큼 능숙하게 마음을 다스리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뭐 잘 숨겼어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내게는 무의미한 일이었겠지만.
 난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인 하얀 영웅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 잠깐 기다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죽을 각오로 자살특공을 하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모든 일이든 서두르고 보는 건 짧은 시간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들의 좋지 않은 습성이지. 비록 그것이 때로는 신들조차 예상치 못한 위업을 달성하는 경우가 있다 해도. 뭐 좋다. 방금 질문에 대답해주마. 난 교섭결렬의 뜻으로 내 힘을 너희에게 보인 게 아니야. 단지 말 그대로 너희들을 시험해 봤을 뿐이다. 너희들이 날 ‘교섭이 가능한 상대’인지 가늠해 보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처럼.

 루치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Lucia는 손을 들어 기사의 성검을 내리게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좀 더 생각을 들려주면 고맙겠군.”

 이제부터가 진짜 승부. 난 미리 준비된 대답을 꺼냈다.

 - 그대의 말마따나 스스로의 힘에 취해 쉽게 통솔되지 않는 우리惡魔는, ‘왕’없이 오래 결속을 유지할 수 없다. 내가 분발해봤자 선왕처럼 무리를 규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지. 내게는 그만한 지도력charisma이 없으니까. 분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들이 다시 유리해질 것이라는 그대의 예측은 크게 빗나가지 않을 거다. 하지만…….

 난 루치아의 맑은 녹색 눈동자를 위안 삼아 내키지 않은 말을 이었다.

 - 고작 우두머리를 잃는 정도로 한번 결집한 세력이 하루아침에 쉽게 무너지지도 않지. 설령 너희가 이 자리에서 날 죽이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마왕군이 당장 해체되는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 오히려 일시적으로나마 마왕군 전체가 고무될 가능성마저 있다. ‘비겁한 수’에 선왕의 후임자가 암살당했다고 말이야. 우리 쪽에도 그 정도 기교를 부릴 책사 한둘쯤은 있으니까. 그런 상황이라면…….

 고맙게도 다음 말은 루치아가 대신 받아 이어주었다.

 “싸움은 한층 격렬해지는 동시에 교착상태로 접어들겠지. 마왕군이 당장 붕괴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로, 쇠락할 대로 쇠락한 인류 또한 당장 강성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거기에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용왕들이 개입이라도 하는 날에는…….”

 - 양쪽 모두 극심한 피해를 입을 테지. 운 나쁘면 사이좋게 공멸일 테고, 운 좋게 어느 한쪽이 이긴다 해도 상처뿐인 승리 그 이상 이하도 아닐 터. 더 이상 우리가 전쟁을 벌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내 결론을 들은 루치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 생각과 비슷하군. 다행이야. 그쪽이 마왕과 달리 말이 통하는 상대라서. 죽은 마왕과는…… 일전에 딱 한번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도저히 교섭이 가능한 상대가 아니었다. 혹시나 비슷한 성향일까 걱정했지만 그저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이군.”

 음. 이해한다. 확실히 어떤 대단한 화술을 지닌 인간이라도 그 여자와 무언가 교섭을 한다는 건 불가능했으리라. 기본적으로 그 여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밖에 하지 않는다. 예외적으로는 자기가 좋아하는 얘기밖에 하지 않고.

 “하지만, 과연 우리에게 교섭이 가능할까. 서로에게 타협의 여지가 있을까. 인류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희생을 치렀다. 마왕군의 공세에 멸망한 나라만 열셋, 파괴된 도시는 수천을 헤아린다.”

 웃음기도 잠시. 루치아의 얼굴에 다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여기엔 나도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너희 인간들이 도시를 세우기 위해 불태운 숲은 본래 누구의 것이었나? 너희들이 악마나 마물 등으로 뭉뚱그려 부르는 숲의 주민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이번 마왕군과의 전쟁에서 죽은 이들은, 공식적으로 사망이 확인된 자만 1억 명에 가깝다. 너희들은 너무 죽였어. 전쟁터의 병사들뿐만 아니라 민간인, 병자, 갓난아기까지 가리지 않고 전부 학살했지.”

 - 인간들이 지상의 패권을 쥔 이후 희생시킨 다른 존재들은 셈하지 않나? 보기에 멋지다고, 연금술에 도움이 된다고, 심지어는 맛있다고…… 너희들은 탐욕스럽게 인간 이외의 다른 종족들을 죽이고 범하고 사육하고 멸종시켰지. 이제는 지상에 단 한 마리밖에 남지 않은 일각수의 비극은, 결코 인간들의 유일한 죄악이 아니다.

 교차하는 시선과 시선. 충돌하는 주장과 주장. 이대로는 아무리 말을 나누고 또 나누어도 양자 간의 간극을 좁힐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입을 열면 열수록 앙금은 커지고 골은 깊어져만 갈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Lucia와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 그대와 나는, 우리와 너희는, 결코 타협할 수 없다.

 “우리가 서로 손을 잡기에는, 그 사이에 너무나도 많은 죽음이 가로막고 있다.”

 - 하지만 타협이란, 바로 타협할 수 없는 걸 타협하기 위해 하는 것이지.

 언젠가 들은 문장가의 말을 입에 담은 순간,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럼 협상을 시작해볼까, 마왕의 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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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08.24 14:09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와이, 와아아~ 안단테님의 신작이다요! >_<


    흡사 은세계의 은월을 떠올리게끔 하는 머나먼 미래의 포스트아포칼립스적 풍광에, 마왕용사의 첫화에서 느낄 수 있었던 산뜻함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는 것 같아 다시금 시선이 가네요.

    수많은 부조리와 참상의 연쇄 끝에 비로소 도달하게 된 화합으로의 길,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너무나도 많은 피해 앞에 벌어지고 곪아버린 서로의 물리적 상처와 심리적 거리감이 크나큰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것은 참 서글픈 일이 아닐까 해요.

    수많은 서브컬쳐계 창작물의 이야기 속 세력간의 대립이 그러했고, 현실의 한반도를 포함한 분단국가들의 현실이 그러하듯이...


    ... 하지만 중요한건 이게 아니라(?) 신작의 향후 전개가 기대된다는겁니다 +_+ 므흐흐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8.25 18:04 신고 address edit/delete

      이번에도 눈을 두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마왕과 용사가 실은 협력관계에 있다는 유명한 장르의 힘을 빌린다면 부족함이 많은 제 글에도 조금은 재미있는 요소가 생기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쓰고 보니 의외로 크게 변한 게 없는 것 같아 살짝 좌절하기도 했네요^^;; 그래도 다른 실력 있는 분들이 앞서 다져 놓은 장르의 힘을 믿고 시간 날 때마다 천천히 이야기를 진행시킬 생각이에요.


      말씀처럼 치열하게 대립하던 두 세력이 서로 화해하고 협력의 길에 도달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고, 현실에서는 오히려 그 시도가 좌절되는 경우가 압도적이지요.

      사실 이번 소설은 코미디(...)를 예정하고 있어 그런 암울하고 복잡한 배경에 대해 자세하게 다룰 예정은 없지만, 그래도 이른바 세상의 정의나 평화를 추구하는 데 있어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작중에서 조금이라도 표현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면, 제가 쓰는 글에도 얼마간 의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럼 다시 한번 읽어주신 데 감사의 말씀드리며, 좋은 하루되시길 바라요!










※ PC기준으로 작성된 포스팅입니다.
※ 심미안 주의!









자작 그림이 곁들어 있습니다.
부족한 실력이니 심미안이 민감하신 분들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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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소설에서 그린 약소국으로서 조선의 운명이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사드 배치를 두고 중국에 압박을 당하고 있다


 A. "나는 전문가가 아니라서 그에 대한 정돈된 견해는 없다. 다만 약소국가로서 강대국 틈에 끼어 살아가야 하는 게 우리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병자호란 항복 후 우리의 주권은 훼손됐다. 군사·외교 주권을 다 포기해야 했고, 여자들 잡아다 청나라에 바치며 200년 이상을 살았다. 청에 대해 굴욕적 사대를 한 것이다. 그 전에는 명에 대해 사대를 바쳤다.

 나는 이런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니다. 치욕스런 역사다. 하지만 영광과 자존만으로 인간 역사를 구성할 수는 없는 것이다. 치욕과 모멸 또한 역사의 중요한 일부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사대는 약자가 강자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술로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사대를 옹호하는 게 아니다. 그게 자랑이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교과서에서도 그 점을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빼거나 뭉개려고 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 중앙일보, 소설가 김훈의 『남한산성』 100쇄 기념 간담회 인터뷰 중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아마 한국에서는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종종 언급되곤 하는 매우 유명한 문구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세간에서는 흔히 신채호 선생이 이러한 말을 남겼다고 전해지지만, 위키에 따르면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이는 누가 남긴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출처 불분명한 문구로서, 처칠이 남겼다는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과거를 잊은 국가에게 미래는 없다)가 원형이 되었으리라는 추측이 있을 따름이다.

 아무튼 위 문구의 출처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역사에서 배워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나 사고방식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든지 존재한다. 나 역시 역사 배움의 중요성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사람은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한데 정말로 그런가? 정말 우리 사회에서 역사 교육은 국가와 시민들을 과거의 잘못에서 보다 나은 길로 이끄는 올바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

 내가 보기에는,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 어느 나라에나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역사 교육은 도리어 민족감정과 국가 간 대립을 자극해 과거의 잘못을 부추기는 경향마저 존재한다.

 본래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배워야 할 역사가, 단지 과거의 치욕을 설욕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변질된다. 과거 전쟁의 참상에서 그 무엇보다 평화가 우선임을 배우기보다는, 다음 전쟁에서는 우리 민족이 승자여야 비참한 꼴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비뚤어진 결의만을 굳힐 따름이다.

 자신의 배경이 되는 국가나 민족의 영광은 드높이는 반면 굴욕은 되갚아주고 싶은 것이 사람의 당연한 심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사고방식이 지금껏 어떤 비극을 일으켰는지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진정한 이유는 바로 그 비극의 연쇄를 끊기 위해서라고 난 생각한다.

 “서로 싸움에 임하는 데 있어 그 유일한 목적이 평화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디선가 듣기로 문호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 역시 무엇을 위해 역사를 배우는지, 그 목적을 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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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08.05 15:3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보다 나은 미래로의 일보 전진을 위해 편찬되고 가르침이 이어져야 할 역사의 분야가, 고도의 정치적 계산 하에 증오의 연쇄와 진영논리에 기반한 국민과 대중 선동의 수단으로써 악용되기도 한다는 현실이 참 씁쓸하고 안타까워요... ;ㅁ;

    그러고보니 며칠 후 개봉할 영화 <공작>에서 실화를 토대로 각색되어 다루어진 북풍 사건의 전말을 보며 안단테님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네요. (관람 후기를 작성하는 조건으로 개봉전 시사회에 참여할 수 있었어요)

    불현듯 단지 가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은하영웅전설 자유행성동맹 말엽의 사회상이 그 비극의 궤적 위로 겹쳐보이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지... 그래도 분명 대한민국 사회는 점차 나아지고 있고, 또 새로운 희망의 여지를 보여준만큼 제 다음 세대에는 그러한 씁쓸함과 안타까움의 반복이 일소되길 바랄 따름이예요. >_<

    덧 - 단발머리 소녀 귀여워요!!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8.07 04:28 신고 address edit/delete

      말씀처럼 역사 교육의 의의가 현실에서는 조금도 살아나지 못한 채 다른 목적들에 악용되는 모습을 보면 여러모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현실이 언제나 이상을 반영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정반대 방향으로 질주하는 건 정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정치나 외교는 물론 사소한 일상에서조차 가령 모 인기 모바일게임 관련해서는 오히려 이벤트 내용이 우익사관을 비판하는 전개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1945년이 배경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비난부터 가하고 보는 분위기라든지, 얼마 전 월드컵에서는 '어떤 나라를 응원할 수 없는 이유'라면서 그동안 한국이 침략이나 불이익을 받은 사실을 쭉 나열하며 상대국을 마음 놓고 야유해도 된다는 논리를 전개하는 사람들을 꽤 본 적이 있는데, 그게 과연 정말 올바로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인지 심히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북한과 관련해서도 말씀하신 은영전에서 자유행성동맹과 은하제국 간의 해묵은 대립에서 벌어지는 불필요한 소모들을 생각해 보면 여러모로 반성할 점과 얻을 교훈이 많지요. 그럼에도 역사적 사실들이 단지 '원한을 되새김질하고 복수를 부추기는 장치'로밖에 작용하지 못하는 점은 참(...)


      결국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역시 민족주의 국가주의적인 세계관이 크게 작용하고 있지 않나 싶더군요.

      은연중 혹은 대놓고 자신의 정체성을 민족과 국가에 동일시 시키는 것으로 인해 '개인의 자존심'이라는 감정적인 부분이 역사적인 판단에도 섞여 들어가 문제를 올바르게 바라보는 데 심한 장애를 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 또한 어릴 적부터 민족주의 교육을 주입받아온 사람으로서 그런 감정에서 아주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그럴 때면 자기 선조가 누구냐는 질문에 '10억년 전쯤 바다의 해파리 같은 생물'이라고 대답한 양 제독님의 현답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네요.

      말씀처럼 저희 다음 세대는 좀 더 자유롭고 공정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날 수 있도록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부족한 그림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PC기준으로 작성된 포스팅입니다.
※ 심미안 주의!









자작 그림이 곁들어 있습니다.
부족한 실력이니 심미안이 민감하신 분들께서는
살짝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주세요.












 완전한 압승의 순간이란 없다. 승리도 패배도 있는 지속적 싸움의 과정이지만, 장기적으로 민중의 의식은 성장한다. 그렇기에 참을성과 끈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승리’하지 않을 때에도 다른 모두와 함께 가치 있는 일에 참여했다는 즐거움과 성취감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1999년에 남긴 말 -



 선거가 끝났다. 모든 결과가 만족스럽진 않지만,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은 부적절한 정당이 다시금 관에서 기어 나오지 못하도록 못질을 했다는 점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었다고 본다. 죽어야 될 것이 무덤에서 기어 나오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는, 이미 우리는 수많은 영화와 소설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다만, 당연히 불안한 요소도 많이 남아 있다. 당선된 민주당 후보 중에서도 전근대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는 수준 미달의 의원들이 있으며, 진영 논리에 따라 표를 던지는 분위기도 여전하고, 민주당을 견제하고 자한당을 대체할 만한 제2정당이 확립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쉽게 다가온다.

 더욱이 교육감 선거에서 매우 부적절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후보들이 의외로 지지율이 있어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아마도 거기에는 이런 조직표 또한 작용한 모양이다.








 저런 식의 사고방식을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고 안타까운 기분이 든다.

 분명 한국 사회에서 아직 여성들이 많은 차별을 받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는 남녀 모두가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하며, 여기에 대한 이견은 일절 없다.

 한데 저런 부류의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당신은 페미니스트이기 이전에 이 사회의 구성원이다.

 자, 한번 생각해 보자. 왜 우리 사회에서 여성차별을 철폐하고 남녀평등을 이뤄야 할까? 그건 남녀 불평등으로 인해 부조리한 권력구조가 발생하고, 거기서 여성이 사회적 약자로서 ‘차별과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페미니즘이 약자보호와 양성평등의 가치를 저버리는 순간 다른 사회 구성원들에게 지지를 호소할 당위성도 같이 상실한다.

 그래 맞다. 분명 페미니즘은 여성해방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주의이다. 즉, 남녀평등이 목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여성의 이권 확장에 진정한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딱히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연히 누구나가 그렇듯 ‘~~이스트’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엄밀히 말해 우리 사회에서 여성인권이 신장되어야 하는 것은, 결코 여자가 우월하기 때문도 아니고 남자보다 소중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를 누구나 누려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페미니즘도 휴머니즘의 기반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휴머니즘적인 요소를 도외시하고 페미니즘을 이기적으로 추구하겠다? 그럼 안타깝지만, 사회적 공감대도 얻을 수 없을 뿐더러 연대는 파괴될 수밖에 없다.

 (아마 보신 분도 많겠지만) 이에 대해선 내 빈약한 말보다는 이분의 말이 훨씬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이런 의견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른바 '맨스플레인'이라고 말이다-_-

 하지만 이런 충고를 무시하고 위의 트위터와 같이 독단적인 태도를 계속해서 견지한다면······.
 그럼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다.



 다른 분들이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사회를 바꾸기 위한 싸움은 이제 막 시작한 수준이다. 비록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하긴 했어도 그 불만의 에너지는 마치 스프링처럼 반대 진영에 더 축적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쇄신의지가 무뎌진다면, 그리고 트위터 등지에서 자신들의 ‘이즘’에 따라 과격한 주장을 펼치는 이들처럼 사회 공통의 연대와 정의를 외면하고 배타적 독단적인 이권 주장만을 반복한다면, 우리도 금세 우경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고 본다.



덧. 우경화에 대한 우려나 트럼프의 정치성향에 대한 내 불호와는 별도로, 북미회담을 비롯한 현재 트럼프의 대북정책 행보는 매우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그런 트럼프의 성과를 어떻게든 깎아내리기 위해 왜곡을 행하는 미국 내 언론의 태도와 지난 미대선 때 트럼프와 그 가족들에게까지 과도한 모욕과 비난을 일삼은 미국 좌파들의 행태는 올바르지 않았다고 본다.

위의 유튜브 영상 캡쳐 내용을 첨부한 이유는 트럼프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식의 과도하고 부당한 비난이 장기적으로는 반대진영의 세를 불리고 자신들의 입지를 줄이게 될 수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위의 캡쳐 내용에서도 트럼프에 대한 독설을 걸러내고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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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7.09 14:04 address edit/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7.09 19:57 신고 address edit/delete

      안녕하세요! 과분한 말씀에 많이 부끄럽네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도 제 글에 관심이 없으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시 읽고 싶다고 말씀해 주시니 기쁠 따름이네요. 어느 글인지 말씀해 주시면 설정을 다시 공개로 전환할게요.

      잊지 않고 찾아주신 것에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드리며, 좋은 하루 되시길 바라요!

  2. ㅇㅇ 2018.07.09 14:0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티스토리 처음 써봐서 비밀댓글이 작성자한테도 안보이는 줄 몰랐네요.
    혹시 저거 보이시나요?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7.09 19:58 신고 address edit/delete

      예, 잘 보인답니다. 아마 비로그인 비밀글의 경우는 해당 블로그 유저에게만 보이고, 로그인 비밀글의 경우에 블로거와 작성자분 모두에게 보이는 것 같네요.

  3. ㅇㅇ 2018.07.10 16:19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글 전부 정독하는 중이었는지라 전부 열어주신다면 제일 좋겠지만 마지막으로 보던건
    어느 은하수 다방의 대장장이 스토리가 생각 나는데 제목을 모르겠네요..ㅜ
    사실 도입부만 보고 제일 끌리는 것 부터 조금씩 구경해와서 모든 작품을 조금씩은 읽었어요.
    어느 대학생 밴드가 역할문제로 갈등하던 내용도 기억 나네요.
    해와 달의 생사여탈권은 폰에 넣어놓고 꺼내볼정도로 크게 감명 받았습니다ㅎㅎ
    계속 작품연재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문체가 풍부하셔서 배경묘사나 감각묘사가 웬만한 웹소설 작가 보다 훨씬 출중하시다고 생각해요.건필하셨음 좋겠네요!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7.11 06:48 신고 address edit/delete

      과찬의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지난 작품도 기억해 주시고, 또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글쓴이로서 정말로 감사하고 힘이 되는 말씀이에요.

      비공개로 돌린 글들은 틈이 날 때마다 다시 공개로 돌리도록 할게요. (제가 아직 티스토리 사용법을 잘 몰라서 그런지 일일이 수동으로 풀어야 해서;;;)

      음, 다만 제가 비공개로 돌린 글들은 대개 카테고리 앞에 [보류]라고 붙인 글들인데, 이 글들은 앞으로 다시 쓸 생각은 없고, 나중에 리메이크를 하게 된다 해도 제목만이 같을 뿐 아예 딴 내용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가령 세계관은 같아도 캐릭터가 전혀 다르다든지, 캐릭터 이름은 같아도 성격이나 역할은 물론 심지어 성별조차 달라진다든지 등등) 그런 부분은 너그럽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 글을 써가는 데 있어 조금이라도 기대에 미칠 수 있도록 힘내고 싶은 마음이에요. 다시 한번 보내주신 응원과 격려에 감사의 말씀 드려요.

      그럼 좋은 하루 되시길 바라요!

  4. ㅇㅇ 2018.07.11 21:14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네 감사합니다ㅎㅎ다른 작품들도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7.12 06:35 신고 address edit/delete

      저야말로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5.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07.14 17:31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안단테님,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ㅠ_ㅠ); 나름 친밀한 티스토리 이웃으로서 활동하려했는데 이렇게 다시금 올려주신 글을 한달만에야 발견하다니 부끄러움에 얼굴이 다 화끈거리네요. llorz


    자아 이제 다시 본론의 화제로 돌아가서, 저 역시 지난 지역 선거 때 주위의 지인 및 가족들과 많은 토론을 나누고 또한 투표에도 참여했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소불위에 가까운 권력과 민중의 지지도로 기염을 토하던 정당이, 그 열성적 지지자였던 50대 이상 어르신들에게마저 외면받고 있다는 사실에 한번 놀라고 또한 새롭게 권좌에 오른 여당 역시 (설령 극히 일부의 사례일지언정)다소 방만한 마인드 하의 국정 운영 방침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재차 경악하고 말았네요.

    이번 선거 때는 투표장에 가기 앞서 중앙선관위에서 공개한 후보자관련 정보를 꼼꼼히 살펴보기로 했는데, 놀랍게도 제가 속한 거주지의 여당 후보가 어쩌면 향후 재정 파탄을 초래할지도 모를 막연한(예산 한계치는 없이, 돈이 모자랄때마다 국고에서 더 끌어오면 된다는 식) 계획안을 공표한 반면 그 대치점에 선 야당측 인사는 의외로 전문성을 갖춘 인재에다 나름의 안전장치로써 예산 한도를 설정해둔 상황이라 정말 웃픈 심정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답니다. (흡사 삼국지 게임마냥, 쇠락해가는 군소 세력에도 쓸만한 사람은 있는걸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지난날의 여당이 그토록이나 유리한 위치와 환경을 부여받고도 작금의 처지로 전락한 것은 그만큼 대다수 민중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줄만큼의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며, 그 반작용으로써 현재의 여당 또한 다소의 미흡한 부분들이 상존함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에 가까운 국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게 된 것이 아닐까 싶어요.

    즉 서브컬쳐계 식 표현으로 요약하자면 이 모든 것은 인과율의 섭리... (퍼퍽)

    마지막으로 지난 정권 하의 국정 농단 사태를 상기해볼 때, 건설적인 견제와 균형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모색되어야 하지 않나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분명 현직 대통령님은 한 국가의 통치자로서 바로 전임자와 비교해볼 때 정말 헌신적으로 잘해주시고 계시지만, 그 휘하의 관료 중에서 부패와 전횡의 사례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말이예요.


    덧 - 국내 트위터 생태계가 서비스 초창기만 하더라도 지금같은 질척질척 진흙탕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그마나 조용히 일상잡담계로 활동하시던 유저들마저 하나 둘 떠나는 상황이네요. 흑흑 역시 퍼거슨 감독님의 말이 맞았던 걸까요... ;ㅁ;

    덧2 - 지난 몇 달 간 신규 발행 게시물의 부재 상황이 지속되는 것을 지켜보며 혹시나 안단테님께서 독자층의 반응 저조에 상심하여 떠나신게 아닐까하고 안타까워 했었어요. ‘사실 이렇게 홀대 받으실 필력의 소유자가 아닌데...’ 하고 말이예요. 에... 가끔씩은 글 올려주실거죠? 하하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7.15 17:29 신고 address edit/delete

      오랜만에 안녕하세요! 저야말로 자주 찾아뵙지 못할 뿐만 아니라 포스팅마저 뜸해 여러모로 부끄러울 따름이네요^^;;


      말씀처럼 부패하고 무너져 가는 정당에도 난사람은 있지요. 한창 그들의 세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분석한 어떤 신문기사를 본 기억이 나는데, 그 기사에 의하면 오히려(?) 당시 한나라-새누리당의 하부 조직에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인재가 많았다고 하네요.

      생각해 보면 한 나라의 실권을 쥐고 있고, 자금도 충분히 공급되고 있는 정당에 뜻을 펼치고 싶은 엘리트들이 모여 드는 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 같은 인터넷 젊은층의 편견과는 달리 당시 여당의 공약 중에는 사회 문제점을 정확히 찌르고 있는 현실적이고 필수적인 내용들도 많았고, 당시 민주당을 비롯한 여타 야당들이 급하게 그 공약들을 베껴서 주먹구구식으로 선거를 치르기도 했다는군요.

      (물론 기사의 논점은 그래서 한나라-새누리당이 대단하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여당에게 부당하게 운동장이 기울어진 상황을 지적하며 야당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꼬집은 것)

      하지만 이미 우리가 알다시피 아무리 좋은 공약들이 있어도 그건 전부 空約으로 그칠 뿐이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모든 역량을 재벌이나 정치 권력자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만 다 쏟아부으며, 심지어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고 과거 독재정권을 미화하는 데까지 나아갔지요.

      사회에서 내놓으라 하는 경력을 가진 엘리트들이 죽은 독재자의 계승자들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곡학아세할 수밖에 없는 전근대적인 구조, 반대의견은 검열하고 반대자들은 배제하는 그 비민주주의적인 권위주의적 통치가, 단기적으로는 그들의 세력을 강화시켜주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결국 조직을 부패시키고 실질적인 국정운영능력도 잃어버려 모든 지지기반을 상실하는 내리막길로 들어서게 하는 악수였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저도 위에서는 잘난 듯이 진영논리를 비판하는 글을 썼지만, 사실 한국의 정당정치 지형에서 진영논리에서 자유로워지기는 힘들다고 봐요. 일부 열심히 잘 하는 사람이 있거나 번지르르한 공약을 내건다고 해도 정당을 이끄는 주요 인사들에게 문제가 있으면 그런 긍정적인 요소가 구단위를 넘어 사회에 반영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요. 오히려 그런 일부 괜찮은 요소가 부패한 상층부의 실책과 횡포를 가리는 방패막이로 이용되기까지 하고 말이에요.

      그래서 문 대통령이나 더민주에 대한 높은 지지율은 분명 국정을 수행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되고 있지만, 일부 친문 사이트에서 보이는 찬양에 가까운 과도한 지지에는 다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해요. 어차피 더민주도 영원히 정치권력을 잡을 수는 없고, 그것이 바람직하지도 않은 이상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비슷한 수준의 다른 정당이 빨리 대두했으면 좋겠네요. 최소한 더민주가 실책했을 때 새누리 잔당들이 다시 반사적 이익을 얻어 무덤에서 기어 나오는 최악의 사태만은 막아야······.


      결국 지금 한국의 선거에서는 최선은 물론이거니와 '차선'을 뽑는 일조차 여의치 않다고 생각해요. 그저 현재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악'을 피하는 일이 아닐까 싶더군요. 최악의 집단이 정치권력을 잡는 일을 막으며 조금씩이나마 사회 부조리를 고쳐 나가다 보면, 후대에는 '차선'을 뽑을 수 있는 정치환경이 갖춰지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이 있네요.


      덧. 전 트위터의 경우 가끔 온라인 이웃들의 안부나 어떤 사건이 있었을 때 사람들 반응이 궁금해 살펴 보는 정도밖에 이용하지 않아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말씀처럼 예전과 달리 분위기가 많이 험악해졌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하네요.

      정말 그 악화가 사실이라면, 얼마간 공간이 열려 있어 다양한 의견이 오갈 수 있는 대형 사이트의 게시판과는 달리 차단 기능을 통해 싫은 사람과 그 의견은 아예 원천봉쇄를 하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만 팔로우를 통해 모여 폐쇄적인 커뮤니티 속에서 계속 자기들의 의견만 배타적으로 강화시킬 수 있는 토양이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현 SNS의 구조적 특성상 오히려 온라인 속에서 이용자들의 배타성과 폐쇄성이 강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인 듯... 물론 그에 못지 않은 순기능도 많으니 마냥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도 없다고 생각하지만요. (...라고 SNS를 써본적 없는 문외한이 말하고 있...;;;)


      덧2.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기쁜 말씀이지만, 역시 그동안의 제 글과 캐릭터들은 진정한 '재미와 감동'보다는 자기만족적인 요소가 더 강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는 읽어주시는 분들에게도 재미를 드릴 수 있는 내용과 캐릭터를 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과연 잘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힘내겠습니다>.<











(글을 쓸 때 들은 BGM이 겻들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막장 스토리입니다)







BGM: 相州戦神館學園 八命陣 『Timnat-sera』






■■■








[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完)]


 부드럽게 하늘을 물들이는 석양 아래 마녀는 자신의 연인과 함께 인형사를 전송했다.

 「설마 네가 협조를 해줄 줄은 몰랐다. 덕분에 빨리 회복…… 아니 전보다 상태가 더 좋아졌을 정도야. 넌 날 성가시게 생각하지 않았나? 한데 왜 내게 손을 내민 거지?」

 유화는 고마워하면서도 자신이 입은 호의를 미심쩍어하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마녀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물론 성가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몸을 수리하는 데도 도움을 준 거고요. 빨리 고쳐야 빨리 나가실 거 아니에요.”

 그러나 유화는 마녀의 위악적인 태도에 넘어가지 않았다.

 「넌 계약의 마녀지. 아무리 바라는 게 있어도 아무런 대가 없이 호의를 베풀지는 않아. 내게 원하는 게 있다면 빨리 말해라. 그래야 나도 준비를 할 테니.」

 마녀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괜히 오래 산 게 아니라니까. 예, 사실 원하는 게 있어요. 별 건 아니고, 제게 도움을 받은 걸 빚으로 생각하신다면, 그걸 갚는 셈치고 앞으로 그 두 사람을 건드리지 않기를 부탁드리고 싶네요.”

 여기서 두 사람이란 진아와 나루를 뜻하는 말. 마녀는 두 사람의 일상을 더 이상 망가뜨리지 않을 것을 관리사에게 요구했다.

 「이건…… 네가 떠올릴 만한 발상이 아니군. 제안을 한 건 그쪽의 연인이신가?」

 유화는 칠흑 같은 검은 머리에 호수 같이 푸른 눈동자가 매혹적인 마녀의 연인, 설란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설란은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유화를 응시하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화는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마라. 이미 그 아이들의 운명은 바뀌었다. 그 진아라는 아이가 곁에 있는 한, 심애의 광인이 다시 눈을 뜨는 일은 없겠지.」

 확언을 받아낸 마녀는 다소 짓궂은 어투로 말했다.

 “당초 예상이 성대하게 빗나가고 말았네요. 당신이 본 미래에선 수백 명 이상이 죽어나가고, 그 미래를 막기 위해선 반드시 한명이 희생되어야했지만, 결국 아무도 죽지 않고 잘 끝날 수 있었으니까요. 어때요, 이만 자신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인정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의외로 용서 없는 추궁에 정원관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 일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해. 죽어서까지 잿더미나 마찬가지인 몸을 이끌고 헌신적인 희생을 한 유령, 그리고 선천적으로 영웅의 신체를 가지고 태어난 무신. 이 두 사람이 한 소녀를 위해 힘을 합친다는 기적적인 희생이 있었기에 이번 결과가 나올 수 있던 거다. 매번 이런 요행을 바랄 수는 없어.」

 마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뭐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요. 당신처럼 긴 시간 동안 줄곧 한길만 걸어온 사람이라면 더욱 더.”

 확실히 그 말대로. 300년 가까이 한 가지 방식을 고수해온 인형 같은 인형사가 이제 와서 변하기란 요원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유화에게는 아직 입으로 꺼내지 않고 가슴 속에 묻어둔 말이 있었다.

 - 사실 사람들은 알고 있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않고 있을 뿐이야. 현실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어릴 적부터 줄곧 간직해온 스승Master의 말. 여태껏 그 진의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유화는 스승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이 틀렸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아이들이 한 일이 올바르다는 사실. 그것만큼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정원관리사는 오랜 시간 고민해온 답에 작은 결론을 내린 채 석양빛을 받으며 마녀가 사는 도시를 뒤로 했다.






 떠들썩한 교실의 점심시간.
 진아는 은근슬쩍 자신을 훔쳐보는 이런저런 시선에 압박을 느끼며 눈앞의 상대에게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말이지. 나, 나 혼자 먹을 수 있는데…….”

 하지만 나루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숟가락을 진아에게 들이밀었다.

 “원래 왼손잡이라면서요. 나 때문에 다친 거니, 내가 책임져야죠. 자, 입 벌려요. 아~~하세요. 아~~”

 “으…….”

 며칠 전 나루의 광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분투했던 진아는 왼손에 심한 상처를 입어 붕대를 둘둘 말고 있었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붕대였지만 그건 마녀가 특별히 제작해준 일급품으로 형체만 남아 있다면 어떤 외상이든 회복시킬 수 있는 효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 다만 겉보기에는 다 나은 것처럼 보여도, 왼손에 예전처럼 힘이 돌아오지는 않을 거예요.

 진아의 손을 치료해준 마녀는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광기에 당한 상처는 보통 쉽게 낫지 않는다고 한다. 광인들의 힘에는 기초법칙과 궤를 달리 하는 이질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세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한 아무리 마법이라 해도 완전한 대응은 불가능하다는 모양이다.

 ‘뭐 다 나으면 일상생활은 가능하다고 하니…….’

 하지만 진아는 별로 괘념치 않았다. 이번에는 어쩌다 험한 일에 또 끼어들고 말았지만, 본래 그녀는 평범한 삶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가 벌인 일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고…….’

 나루가 폭주한 여파는 마녀와 관리사가 최대한 처리를 해 가스관 폭발 정도로 마무리가 되었고 한다. 사상자가 없는 덕분에 딱히 이슈화되지도 않았으니 금세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리라. 아마도 그녀들의 일상이 더 이상 위협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정말 문제는, 얘야……!’

 오히려 진아에게는 지나간 사건보다 최근 나루의 행동이 훨씬 난처하게 느껴졌다. 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마다 교실에 찾아와 손이 불편한 자신 대신 이것저것 수발을 들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마음은 고마웠지만 그때마다 교실의 이목이 집중되니 은근히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결국 진아는 포기하고 입을 벌렸다. 나루가 집요하다는 것은 다름 아닌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아에게 밥과 반찬을 먹여준 나루는 웃음을 지었다.

 “후후, 어때요? 맛있어요?”

 “으, 응…….”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그 대답은 진심이었다. 나루의 도시락은 정말 맛있었다. 선생님 대신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때 나루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쪽이 거짓말 했다는 건 알아요.”

 “응? 아, 아니야! 진짜 맛있…….”

 “아니요. 그거 말고. ……내가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워 구해줬다는 거 말이에요.”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살짝 목소리를 낮춘 나루. 담담한 음색이었지만, 역시 직접 입 밖으로 꺼내는 건 부끄러웠던 모양인지 얼굴이 조금 빨개져 있었다.

 “……거짓말은 아니야. 정말 그렇게 느낀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역시 선생님이 부탁한 영향이 더 컸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어.”

 얼버무려도 소용없다고 생각한 진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루는 자조하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아.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내가 생각해도 그쪽이 날 좋게 볼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목숨까지 던지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완전 놀아나고 말았네.”

 “그, 그건…….”

 진아는 변명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나루를 구하기 위해서였다고는 해도 ‘선생님의 유언’을 지키고 싶다는 자신의 독선으로 상대를 농락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루는 무언가 다짐하듯이 작게 중얼거렸다.

 “뭐 그러니 여기서부턴 내가 노력할 차례겠죠.”

 “응? 지금 뭐라고……읍!”

 나루는 아까보다 좀 더 붉어진 얼굴로 진아의 입을 막듯이 반찬을 집어넣었다.

 “음…….”

 역시나 맛있다. 문득 진아는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선생님도 집에선 항상 나루가 해주는 음식을 드셨겠지. 그런 연상을 한 것이다.

 마녀의 위화감 어쩌구 하는 마법 덕분인지 시진이 되살아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진아 일행밖에 없었다. 모두들 이시진 선생은 카페에서 충돌사고가 있었던 그날 죽었다고 알고 있다.

 선생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건 조금 쓸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시진의 그 일주일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었고, 그녀가 죽음에 저항한 덕분에 나루가 파멸로 향하는 미래를 막는 계기를 마련할 수가 있었다.

 ‘선생님…….’

 아직 진아는 첫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그건 나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통해 맺어진 인연 속에서 두 사람은 느리고도 착실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잿더미 속에서 꽃이 피어날 날은 언제 올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진아는 나루와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이제는 그다지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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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03.14 12:23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이, 이 것이 젊음...! (쿠쿵)

    역시 화끈한 사람은 뭔가 다르군요.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3.15 07:00 신고 address edit/delete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최대한 청춘 같은 분위기를 내고 싶었는데 잘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글을 쓸 때 들은 BGM이 겻들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막장 스토리입니다)







BGM: よるのないくに2 - Молчание и гнев






■■■








[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15)]


 세계를 수많은 법칙으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법전이라고 했을 때, ‘광기’라 불리는 힘은 그 세계대법전의 예외조항에 해당하는 현상을 통칭하는 말이다.

 마녀나 관리사들이 사용하는 일명 ‘마법’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힘.
 그들이 일으키는 마도현상은 직접적이건 간적접이건 간에 별의 의식구조체에 자극을 주어 관념을 물질화시키는 데 그 기본원리가 있다.

 하지만 ‘광인’이라 불리는 이능력자들은 개인의 심리心理를 통해 세계의 법리法理를 변형시킨다. 말하자면 침략자. 생물학적으로만 인간일 뿐이지 그 정신구조는 외계外界에서 침공해 들어오는 우주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아아, 또…… 또 떠나버렸어. 결국 마지막에 이기는 건 불행…… 언제나 내게서 소중한 것들을 가져가 버리고 말아…….”

 나루의 광기心理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심애深愛』.
 그 특성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협하는 그 모든 것을 베어낼 수 있는 참살법리. 나루狂人에게 ‘불행’으로 지정된 것은, 어떤 사물이건 어떤 사람이건 간에 처참히 난도질당할 운명에서 도망칠 수 없다.

 “불행은, 언제나 밖에서 와…… 아무리 잘라내도…… 아무리 베어내도…… 아무리 갈기갈기 찢어발겨도…… 계속, 계속, 계속 다시 나타나…….”

 나루는 어느새 다시 손에 식칼을 들고 있었다.
 물론 그 식칼은 실제 현존하고 있는 도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과거 자신을 지켜주었던 친언니의 상징으로서 매번 나루에게 소환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진정한 원흉은……!”

 촤악. 거세게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 나루는 식칼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그리고는 팔을 크게 휘둘러 그 피를 마치 행위예술가의 페인트라도 되는 마냥 공중에 흩뿌렸다.
 진아는 나루를 걱정할 새도 없이 그 기이한 광경에 멍하니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날개……?”

 공중에 흩뿌려진 핏줄기는, 그대로 땅에 떨어지지 않고 진아의 말마따나 나루의 등 뒤에 날개 같은 형상의 기이한 무언가를 형성했다.

 징벌의 천사, 타락한 천사, 또는 악마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핏빛의 무시무시한 구조물.
 그것은 위력 또한 그 겉모습만큼이나 흉포했다.

 “진짜 원흉은 바로 세계! 이 세상 자체야! 이 세상이 내게 자꾸 불행을 가져와! 그럼, 그럼 없앨 수밖에 없잖아? 원흉世界 그 자체를 잘라내는 수밖에 없잖아!?”

 피눈물을 흘리며 일그러진 웃음을 짓는 나루. 금색 눈동자가 강렬히 반짝이는 순간 등 뒤의 핏빛 날개가 거세게 움직였다.

 “……!”

 바둑판처럼 잘게 나뉘어 허물어지는 담벼락. 종잇장처럼 사정없이 찢겨나가는 승용차. 보이지 않는 거대한 괴수가 할퀴고 지나간 듯이 깊숙이 파인 콘크리트 바닥……. 나루의 피로 형성된 핏빛 날개는 그 자체가 거대한 칼날이나 마찬가지였다.
 유화는 쓰러진 채로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결국 저 아이는, 완전히 폭주發狂하고 말았다……. 내가 본 미래에선, 나와 마녀가 온전히 힘을 합쳐도…… 폭주한 저 아이를 막는데, 7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거늘……. 한데 지금 난 네놈에게 당한 덕분에, 행동불능이지……. 상황은, 최악이다…….」

 “…….”

 진아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유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멍청한, 놈…… 이제,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좀 알겠느냐……? 지나간 일을 탓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지……. 어서, 도망쳐라…… 그리고 마녀에게 가서, 협조를 구해……. 날 쓰러뜨린 그 실력이라면, 마녀의 제작품artefact으로 중무장을 하고 겨룬다면, 어쩌면 승산이…….」

 그러나 진아는 오히려 앞으로 한걸음을 내딛으며 불쑥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악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굳이 치자면 선한 쪽에 속하는 사람이겠죠. 보다 많은 사람들의 평온을 위해 스스로 죄를 짓는 걸 감수할 만큼은. 하지만, 당신의 방법은 분명히 잘못되었어요.”

 「또 그 얘긴가…… 그럼, 나도 다시 묻지……. 달리 방도가, 있나……? 난, 신이 아니야…… 원인을 미리 제거하는 데만도, 힘에 부친다…… 그런데도 넌, 사람들을 구할 방도가…… 달리 있었다고 말할 셈이냐……?」

 유화의 물음에 진아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아니요, 없어요. 하지만 그걸로 된 거예요. 어차피 사람은 ‘사람들’을 구할 수 없어요. 저도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질 수 없었겠죠.”

 「무슨, 뜻이지……?」

 “별 거 아니에요. 우리 손이 한줌밖에 안 된다는,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했을 뿐이에요.”

 더는 시간이 없다. 진아는 나루가 광기의 칼날을 사람들에게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진아의 기척을 느낀 나루가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응? 아직도 거기 있었어요? 내게 죽기 전에 도망치라고 최대한 무시하고 있었는데 스스로 찾아오다니 정말 바보 같네요. 음? 하지만 이 세상 모든 걸 다 찢어버릴 예정이니까, 어차피 지금 죽나 나중에 죽나 큰 차이는 없나? 아하하하하.”

 피눈물을 흘리는 금빛 눈동자. 진아는 밤의 그림자로 짜인 장갑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과연, 괜히 ‘광인’이라 불리는 게 아닌가 보네. 솔직히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언제나 불행이 세상을 통해서 온다면…… 아니 이 세계 자체가 불행이라면……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선, 세계를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는 걸요. 이제 언니들도 없는 세상이라면, 더는 미련 가질 것도 없으니 잘 됐죠!”

 나루의 등 뒤에 떠 있는 핏빛 날개 중 한쪽이 길게 늘어나 진아를 향해 덮쳐왔다. 하지만 진아는 가만히 나루의 얼굴을 마주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

 주룩. 진아의 목덜미에서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린다. 핏빛 날개는 진아의 목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주 살짝 방향이 빗나갔어도 절명했을 위험한 순간이었으나, 진아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루는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흐응. 왜 도망치지 않나요? 다음은 없다고요?”

 “알고 있어. 하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지. 그렇다면, 나도 널 믿을 뿐이야.”

 진아의 조용한 대답과 대조적으로 나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믿어? 믿는다고? 뭘? 누구를? 언제나 불행을 날아오는 세상을? 아니면 거기에 허덕이는 나를? 어느 쪽이든 역겨워…… 역겹다고요……!”

 재차 진아를 향해 뻗어오는 핏빛 날개. 이번에는 빗나가는 일 없이 정확히 진아의 목을 노려 날아들고 있었다.

 “한계를 넘어섰네. 뭐 좋아. 나도 처음부터 말로 끝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쩡! 진아는 칼날 그 자체인 나루의 날개를 피하지 않고 주먹으로 그대로 받아쳤다.




BGM: よるのないくに2 - 戦恋歌


 “……!”

 예상치 못한 충격에 비틀거리는 나루. 진아는 그 틈을 타 한발자국 더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가, 오지 마……!”

 나루의 강한 거절. 핏빛 날개가 어지럽게 요동을 치며 깃 하나하나가 칼날이 되어 진아를 절단하기 위해 쇄도해온다.

 “싫어.”

 쩡쩡쩡쩡쩡쩡. 진아는 놀리듯이 짧게 답하며 자신을 포위한 붉은 궤적을 한순간에 전부 쳐냈다.
 그 여파에 부셔지고 갈라지고 넘어가는 벽들과 차들과 나무들. 진아는 언뜻 토네이도라도 휩쓸고 지나간 것만 같은 참상을 곁눈질하며, 관리사가 이 근처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술법을 걸어놓아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나저나, 손에 통증이…….’

 어떤 충격도 흡수하는, 밤의 그림자로 짜인 검은 장갑. 이론상으로는 낙하하는 운석과 충돌해도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있지만, 광인의 힘은 그 어떤 추론도 무색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광기의 진정한 무서움. 개인 내면의 소우주가 세상 외부의 대우주를 압도해 집어삼키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쩡. 쩡. 쩡. 인체에 치명적인 급소를 노리고 들어오는 핏빛 날개를 모두 쳐내며 진아는 입을 열었다.

 “선생님을 잃어 슬픈 마음은 알아. 물론 주제넘게 네 슬픔을 전부 이해한다고 말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나도 선생님을 좋아했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

 그러나 진아의 말은 도리어 나루의 살의를 자극할 뿐이었다.

 “나와 슬픔을, 공유할 수 있다고……? 웃기는 소리! 그럼 왜 그렇게 멀쩡한 거죠!? 어째서 미치지 않을 수 있나요!? 언니를, 시진 언니를 죽게 내버려둔 세상을 어떻게 증오하지 않을 수 있죠!?”

 나루의 안광에 금빛이 더해지며 손에 들고 있는 식칼이 상어의 뼈를 닮은 흉측한 대검으로 크게 성장했다. 동시에 피로 물든 날개가 폭주해 주변을 더욱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윽……!”

 뚝뚝. 장갑의 찢어진 틈 사이로 핏방울이 떨어진다. 진아는 가까스로 자신을 향한 나루의 참격을 막아냈지만, 검은 장갑의 무효화 효과까지 뚫고 들어오는 충격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진아는 여전히 물러서지 않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맞아…… 분명 난 너만큼 선생님에게 마음을 쏟지 않았을지도 몰라. 연상의 멋진 동성을 동경하는, 그런 한때의 가벼운 감정이었을지 모르지. 그러니, 내가 네 슬픔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할 수도 있어…….”

 “알고 있으면, 좀 닥쳐―――!”

 정확히 진아의 심장을 노리고 질주하는 날개의 참격. 진아가 그것을 주먹으로 쳐내는 순간, 드디어 검은 장갑의 내구도가 한계에 다다랐는지 핏줄기가 사방에 튀었다.
 그럼에도 진아는 고통을 무시하고 나루를 향해 한층 거리를 좁히며 소리쳤다.

 “하지만, 하지만 사랑에 우열이 있는 거야!? 분명 내 마음은 너처럼 절실하지 않았을지는 몰라. 그렇다면 내 사랑은 가짜였던 거야……!?”

 “으……!”

 나루는 당혹감에 잠시 주춤거렸다. 누군가 함부로 자신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에는 분노했지만, 역으로 그녀는 사랑에 진지했기에 타인의 사랑 또한 함부로 비웃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 폭주發狂한 나루를 아직 일상으로 되돌릴 수 있는 단서가 있었다.
 바로 한발자국 앞까지 다가온 진아는 계속해서 외쳤다.

 “설령 너만큼 뜨겁진 않았다 해도, 선생님을 향한 내 마음은 진짜였어! 그리고, 난 그 사랑했던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부탁한 일을 반드시 해내고 싶어. 난 널, 너 자신의 광기로부터 지켜내고 싶어……!”

 너무 거리가 가까워 날개를 쓸 수 없는 나루는 상어뼈를 닮은 대검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나랑 상관없는 그런 독선적인 이유로, 날 방해하지 마……!”

 퍽. 진아는 대검을 왼손으로 받아냈으나, 검은 장갑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찢어지면서 칼날이 손바닥에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손이 잘리고도 남을 위력이었겠지만, 영웅의 신체를 가진 진아는 아직 얼마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멀쩡한 것은 아니다. 진아는 급속도로 왼손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끼며 속으로 ‘어쩌면 앞으로 손 못 쓰게 될지도 모르겠네’라고 떨면서도 고통을 꾹 참고 입을 열었다.

 “그, 그런 말을 네가 할 자격이 있냐고 묻고 싶지만, 뭐 그건 나중으로 돌리고…… 확실히 선생님의 뜻을 이어 널 구하고 싶다는 내 마음은, 독선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너랑 상관없다는 말은, 틀렸어…….”

 나루는 싸늘한 눈으로 진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랑 어떻게 상관있다는 거죠? 어디 한번 말해 봐요. 유언으로 들어줄 테니.”

 키리리릭. 핏빛 날개의 형태가 짧은 거리도 닿을 수 있게 변형되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아니 어떤 말을 내뱉든지 처참히 찢겨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 하지만 진아는 일절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나도 널 구하고 싶어. 선생님의 뜻만이 아닌, 내 스스로의 의지로 말이야.”

 동요한 걸까. 핏빛 날개가 부르르 떨렸다.

 “왜…… 어째서죠? 그쪽과 내가 만난 지는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는데…… 시진 언니를 빼면 아무런 접점도 없는 생판 남인 나를 왜…….”

 진아는 각오를 하듯 가볍게 숨을 들이쉰 후 답했다.

 “귀엽다고 생각했으니까. 처음 봤을 때부터.”

 “……네?”

 처음으로 나루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진아는 담담히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예쁜 애가 세상에 절망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너는 건 아깝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응. 뭐 흑심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네.”

 “무무무무무, 무, 무슨, 소리를……!”

 귀 끝까지 새빨개진 나루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너, 넌 지조도 없어요? 언니가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바람을 가르는 무서운 소리. 나루가 고함을 칠 때마다 핏빛 날개가 매섭게 움직여 진아에게 참격을 가했다.

 “아, 아니면 그건가요? 이상한 말로 날 방심시켜…… 기, 기습이라도 할 생각이었나요? 미, 미안하지만 난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아요!”

 붉은 궤적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볼에서 팔에서 다리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

 하지만 진아는 칼날을 붙잡은 채 나루를 가만히 응시할 뿐, 다른 움직임은 일절 취하지 않았다.

 “헉헉…….”

 나루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참격을 멈추었을 때, 진아의 주변은 돌멩이 하나 남아 있지 않을 만큼 모든 게 잘게 잘려 있었다. 하지만 진아 본인은 살갗에 살짝 베인 상처를 입은 것을 제외하면 무사했다.
 나루의 숨이 좀 진정되자 이윽고 진아가 입을 열었다.

 “널 처음 봤을 땐 솔직히 위험한 애라 생각했어. 그래서 피하고 싶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동시에 귀여운 애라 느꼈던 것도 사실이고.”

 “거짓말…….”

 “또 그렇게 가혹한 일을 겪고도 위축되지 않고 당차게 살아가는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야. 선생님이 없으면 세상이 멸망해도 좋다고 여길 만큼 사랑에 모든 걸 바치는 모습이 무서우면서도 예쁘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고.”

 “거짓, 말…….”

 나루는 못 믿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으나, 진아는 칼날을 잡은 손에 힘을 넣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널 구하고 싶다는 내 마음은, 진심이야! 선생님의 영향이 없다면 그야 거짓말이 되겠지만, 거기에는 분명 내 의지도 들어가 있어! 널 귀엽고 예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널 멋지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구하고 싶은 거라고!”

 “으, 그런 값싼 멘트로 누굴…….”

 즈즈즈즈. 하지만 말과 달리 나루의 등 뒤에 떠 있던 핏빛 날개는 서서히 날카로움을 잃고 크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나도 알아. 내가 주제넘다는 거. 너를 구한다느니 어쩌니 거창한 소리를 했지만,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어. 힘으로 널 제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선생님을 되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진아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쨍그랑. 어느새 상어뼈를 닮은 거대한 검은 평범한 식칼로 돌아왔고, 나루는 그것을 땅바닥에 힘없이 떨어뜨렸다. 떨어진 식칼은 금세 붉은 사철이 되어 시진이 그러했던 것처럼 바람에 날려 흩어졌다.
 진아는 아직 멀쩡한 오른손을 들어 나루의 피눈물을 닦아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역시, 너와 함께 슬픔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해. 같이, 불행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린, 서로 같은 사람을 좋아했으니까…….”

 “……!”

 빈손이 된 나루는 상처 입은 진아의 왼손을 감싸 쥐며 소리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나루의 눈동자는 금색에서 다시 원래의 밤색을 되찾았고, 다시 흘러나온 그녀의 눈물은 볼에 스며든 핏물을 조금씩 조금씩 씻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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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03.13 00:08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음음, 역시 사랑의 힘은 위대한 것!

    전통의 궁극기 민메이 어택(?)이 대성공했군요.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3.13 08:56 신고 address edit/delete

      All I need is love.

      이번 화를 한줄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될지도... 창작물에서 사랑의 힘이란 위대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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