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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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동성애'에 해당되는 글 28건

  1. 2017.04.27
    전 지나친 PC에 반대합니다
  2. 2017.04.26
    동성애는 반대를 받을 이유가 없다
  3. 2016.04.08
    [단편] 내 피는 영원과 같이 (完) (2)
  4. 2016.04.04
    [단편] 내 피는 영원과 같이 (19) (2)
  5. 2016.03.31
    [단편] 내 피는 영원과 같이 (18) (2)
  6. 2016.03.28
    [단편] 내 피는 영원과 같이 (17)
  7. 2016.03.25
    [단편] 내 피는 영원과 같이 (16)
  8. 2016.03.23
    [단편] 내 피는 영원과 같이 (15) (2)
  9. 2016.03.20
    [단편] 내 피는 영원과 같이 (14)
  10. 2016.03.18
    [단편] 내 피는 영원과 같이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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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 당신이 옳았소. 세계를 변혁시키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남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타인의 의지(SENSE)를 존중하고, 그리고 스스로의 의지(SENSE)를 믿는 것. 그것이 당신의 유지(SENSE)였소…….”

- 코지마 프로덕션, 메탈기어 솔리드 4 중 -



 저도 성 소수자이지만, 상대에게 PC, 즉 지나치게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애당초 언어 자체가 애매모호한 성질이 있으며, 사람마다 주관이 다르기에 쓰이는 맥락도 다릅니다. 거창하게 비트겐 아무개 선생을 댈 것도 없이 당연히 그 사람의 평소 생각과 쓰인 상황까지 고려해 그 워딩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판단해야지요.

 한데, 다소 과격한 페미니스트 분들이나 성 소수자 분들 중에는, 너무 대의에만 눈이 멀어 앞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 경우가 있는 것 같더군요. (아니면 단순히 '가르치는' 우월감에 젖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정확하게 기억 나는 건 아니지만 칼 포퍼라는 사람이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더군요.

 '어떤 사람이 전체주의를 민주주의라는 뜻으로 쓰고 있고,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용어를 바로잡는 데 지나치게 구애 받을 필요는 없다.'

 또 이런 말을 했다고도 합니다.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 수도 있다. 진리에 가까이 가는 것이 누가 옳고 그른지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이 논의가 끝날 때쯤 우리 모두 이 문제를 전보다 더 명확하게 볼 수 있기를 바라자. 이러한 목표를 염두에 둘 때에만 우리는 토론에서 자신의 입장을 최대한 옹호할 수 있다.”


......
 지난 토론에서 동성애에 대한 문재인 후보의 입장은 분명하게 동성애 차별에 반대한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당선 가능성이 낮은 심 후보를 제외한 다른 어떤 후보보다 동성애에 우호적인 입장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성 소수자로서 문재인 후보의 발언에 아쉬운 점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말 그대로 그건 아쉬운 점일 뿐입니다. 우리의 의견을 전달하고 토론해 점차 이해자를 늘려나가면 될 일이에요. 그것을 마치 문 후보가 동성애를 혐오했다고 몰아붙이며 공격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 지나친 정치적 올바름의 강요는 상대에게 실례가 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불쾌감을 유발해 이해와 협력을 저해하는 역효과가 훨씬 크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도 일상 생활에서 이성애자 분들의 아무렇지 않은 한 마디(가령 이성을 만나 가정 꾸려 애 낳고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등)에 가끔 상처를 받을 때도 있지만, 전 그것이 그분들의 '선의'라 생각하고 한편으로는 고맙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만큼 저에게 신경을 써준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요.

 실제로 제가 성 소수자임을 알고 있는 친구와 대화할 때, "난 결혼할 생각도 아이를 낳을 생각도 없지만, 너의 그런 말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축복으로 생각한다"고 전하니, 친구도 그 말에 동의하며 정말 좋은 뜻으로 한 말이었다고 하더군요. 이처럼 무턱대고 투쟁하며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하는 것보다는 상대방과 이해를 하고 대화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투쟁과 정치적 올바름의 강조가 중요한 시점도 있습니다. 바로 이번 대선의 홍준표 씨 같은 경우나 기독교, 이슬람의 근본주의자들, 여타 호모포비아들을 겨냥할 때가 바로 그렇지요.

 위의 인용에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남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란 표현 또한 무조건 수구적으로 세상을 정체시키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후손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지금 있는 세상의 좋은 가치와 문화들을 파괴하지 말고 지키자는 맥락이지요. 당연히 극우주의자나 근본주의자들의 극단적인 주장은 지금까지 '발전해온 세상'을 파괴시키는 것이니 충분히 싸울 명분이 있습니다. 그 화살을 애먼 사람에게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친박 집회의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날린다고 하여 그들이 대한민국과 미국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듯, 과격한 성 소수자 단체들의 부적절한 행동이 성 소수자들을 대변한다고 전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의 행동에 성 소수자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나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 역시 사회의 일원으로 대표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저 그런 인식이 더는 퍼지지 않도록, 그리고 성적지향 이전에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람'으로서, 더 좋은 삶과 사회를 만들기 위해 서로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행동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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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폭력에 대한 사회의 잘못된 인식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여성이 매력적이거나 먼저 유혹했기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가 된다는 것이다. 군대에서 남자 성폭력 피해자의 대한 시각도 마찬가지다. 군대에서 남성이 성범죄 피해를 입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동성애자 혹은 여자만큼 예쁜 사병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성폭력 피해자들도, 가해자들도 자신을 동성애자로 인식하지 않으며, ‘여성적 매력’이 성폭력 원인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중략)

 그렇다면 성폭력은 혈기왕성한 성욕 때문에 발생한다는 주장은 사실일까? 물론 이것도 거짓이다. 그 이유는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연령 분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학자들은 이를 ‘권력 행사 욕구’로 해석한다. 교도소와 같은 집단 수용시설에서의 강간을 살펴보면 내부 권력 갈등에서 권위를 세우기 위한 우월감 경쟁에서 비롯되어 발생한다는 것이다. (중략)

 글로벌 인권단체인 휴먼라이트워치(Human Right Watch)의 보고서에 따르면 성폭력의 주요 원인은 성적 욕구나 성적 만족이 아니라 모든 순간에서 자신의 결정권과 자율성이 상실된 무력감이라고 한다. 심리적 무력감과 마주한 인간에게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보강하려는 본능적 욕구가 강하게 작동한다. 힘이 있는 인간이고 싶고, 누군가를 통제하는 인간이고 싶은 것이다.

 병사들은 2년 동안 자유를 반납하고 위계질서에 편입되어 지위가 가장 낮은 조직원이 된다. 먹는 것, 입는 것, 일상생활의 매우 소상한 부분까지 제약이 가해진 삶 속에서 이들은 권력과 자율을 박탈당한다. 이들은 박탈당한 자유만큼 보충해야 할 본능을 발견하며 이를 다른 한편에서 채우려는 것이다.


- 이창무 · 박미랑, 왜 그들은 우리를 파괴하는가, 메디치, 63면 이하. -



 이번 대선후보 토론회에서도 이슈가 되었습니다만, 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동성애는 결코 군내 동성 간 성범죄의 원인이 아닙니다. 이는 박민규 작가의 지구영웅전설에서 미국의 패권주의를 상징하는 영웅 중 한 명인 배트맨이 수하인 로빈이나 주인공 바나나맨을 굴복시키기 위해 강간을 한다든지, 몇몇 유인원 중 무리의 수컷 우두머리가 다른 수컷에게 우위를 과시하기 위해 성폭행을 행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가 있죠.

 마찬가지로 동성애가 군내 전력을 약화시킨다고 하는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가령 유명한 군사국가 스파르타의 경우 동성애를 유대관계 강화에 좋은 문화라 보고 오히려 권장하기도 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스파르타의 소년기숙사에는 ‘누군가 비겁한 행위를 한다면 그의 소년애인이 대신 벌금을 낸다’는 규정이 있을 정도로 공식화되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밖에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테베에는 300명의 게이 커플로 구성된 ‘신성부대’라는 집단도 존재했습니다. 위키에 따르면 플라톤은 향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는군요. “연인으로만 이루어진 국가나 군대를 만들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모든 병사들이 연인과 함께 싸운다면 아무리 적은 세력이라도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부대로 명성이 높았으며, 스파르타 군을 격파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심지어 동성애를 탄압한 것으로도 악명 높은 나치스의 히틀러조차 직전까지 그 조치에 망설였다고 합니다(『나치즘과 동성애』 참조). 왜냐하면 당·친위대·돌격대·히틀러청소년단 등 나치 체제를 뒷받침했던 주축 조직이 대개 ‘남성동맹’이었는데, 바로 근대 부근까지만 해도 동성애는 오늘날처럼 크게 금기시되지 않고, 오히려 위에서 말한 사례처럼 서로의 유대를 강화하는 요소로 인정받았기 때문이지요.

 이와 같은 사례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군내 사기를 저하시키고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강요에 의한 성폭력이지 결코 동성애가 아닙니다. 성폭력은 이성애/동성애를 불문하고 개인의 인격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금지되어야 마땅한 행위이며, 동성 간 성범죄조차 위 인용의 사례처럼 그 주체는 동성애자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저기, 형. 만담 중에 외눈박이 나라 얘기 있잖아.”

 “응, 나도 안다. 상당히 블랙유머지, 그거.”

 어떤 남자가 변경에 있는 외눈박이 나라를 찾아갔다. 외눈박이를 잡아 데려와 구경거리로 삼으려고 계획했던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자신이 그들에게 붙잡혀 ‘신기한 두눈박이 인간’으로 구경거리가 되고 만다.

 오랫동안 구경거리가 되는 사이에 사내는 두눈박이인 자신이야말로 이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해, 결국 자신의 한쪽 눈을 없애 버렸다. 다수가 정상이고 소수가 이상하다고 단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비웃는 이야기다.


- 다나카 요시키, 창룡전創竜伝 3권, 소미미디어, 188면. -



 물론 단순히 군대 문제를 벗어나 사회 차원에서도 동성애 등 성 소수자의 성적지향은 반대를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전 스스로가 성 소수자인 동시에 동성애를 비롯한 여러 성적지향이 이성애자의 그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논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얼마 전 올렸던 내용에 살짝 수정을 더했습니다.)


 첫째, 흔한 세간의 편견과 달리 동성애 등은 정신질환이 아닙니다. 세계보건기구나 미국정신의학회의 질병분류기준에서는 동성애를 질병으로 분류하지 않으며, 성 소수자 집단 특유의 어떤 유전적인 결함이나 사회심리학적 부적응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둘째,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여러 국가에서는 동성 결혼을 인정하거나 그에 준하는 동성 커플제를 운용하고 있으며, 파리나 베를린 등에서는 게이라고 커밍아웃을 한 동성애자 시장이 당선 및 재선된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실 그들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그런 동성애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부정하는 일부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테러입니다.

 셋째, 동성애를 비롯한 성 소수자는 선천적으로 그런 성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학계의 다수설이라 하며, 이는 6살 때 이미 자신이 성 소수자임을 자각한 제 경험과도 일치합니다. 즉, 이성애자가 이성을 사랑하는 데 특별히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잘못될 것도 없는 것처럼 동성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넷째, 에이즈는 동성애자가 많이 걸리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는 ‘남성과 성관계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많이 걸리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남성과 성관계 경험이 없거나 적은 독신주의자나 레즈비언 여성은 에이즈 감염률이 이성애자보다 낮다는 뜻이 됩니다. 만약 에이즈 감염률을 근거로 동성애자(특히 게이)를 배척하는 호모포비아들의 논리대로라면,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성적지향은 이성애가 아닌 여성동성애나 무성애가 될 것입니다.

 남성 간 성관계 경험자에게 에이즈 감염률이 높은 것은, 에이즈 감염은 주로 혈액이나 정액 등 체액 교환을 통해 일어나는데, 남성 간 성관계는 특성상 출혈 가능성이 높고 콘돔을 착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에이즈 감염은 단순히 성관계 방식에 따른 문제로서 동성애가 옳지 않다는 부정적인 증거로는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이제는 에이즈 바이러스 자체도 숙주를 죽이지 않기 위해 점점 약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의학의 발전으로 약만 잘 먹어도 기대수명까지 건강관리가 가능한 수준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최소한 에이즈를 빌미로 동성애 등을 부정하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 얼마나 부적절한지는 충분히 설명이 되었으리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성 소수자 중 특히 동성애자나 무성애자는 아이를 낳지 않아 후대를 잇지 못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라 비판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독신주의자나 또는 유전적인 결함이나 후천적인 사고 등에 의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된 사람들의 사랑이 부정 받을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동성애자 등의 사랑 또한 부정될 수 없다는 반박이 가능합니다.

 [KISTI 과학향기] 정자와 난자의 수정 없이 후손이 탄생?

 [인공 난자 첫 성공, 불임-유전병치료 새 길 열려]

 더욱이 위 링크된 기사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줄기세포를 이용한 무성생식이나 동성 간 임신 가능성도 동물실험 단계에서 얼마간 성과가 나왔다고 합니다(일반 체세포에서 인공으로 생식세포인 정자와 난자를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여성으로부터 '인공정자'를, 남성으로부터 '인공난자'를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기술이 문제없이 적용될 수준으로 발전되어 안정되기 전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사회적 거부감과 기존의 윤리문제를 넘어서는 데도 여러 진통이 예상됩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는 가까운 미래에 충분히 실현이 가능한 기술이라는 점입니다. 쉽게 말해 성 소수자 반대파의 최후의 보루였던 종족번식의 문제에서도 더 이상 동성애 등 성 소수자의 성적 지향은 반대를 받을 이유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여담으로 위키에 따르면, 동성애는 무리생활을 하는 다른 동물들에게서도 흔히 발견된다고 합니다. 가령 펭귄의 경우는 약 5%가, 양은 10%, 검은 고니는 무려 25%에 달하는 비율이 동성 커플이라 하는데, 특히 검은 고니의 경우는 오히려 동성커플의 알 부화율이 이성커플보다 높다고 합니다.


 저는 위의 인용에서의 블랙유머처럼 외눈박이가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것도 원하지 않고, 반대로 두눈박이가 자기 눈 하나를 스스로 빼버리는 세상도 원하지 않습니다. 더 보스(MGS)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인의 뜻을 존중하며 자신의 뜻을 믿을 수 있는 것.’ 바로 그런 세상이 되기를 원합니다.




.........
......
...

얼마 전 인상 깊게 본 만화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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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분명 본질은 변하지 않아. 난 그 시절 그대로인 걸…….”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라고, 침묵이 방안에 감돌았다.
 하지만, 정적을 깨며 그건 아니라고, 난 단언했다.

“이봐, 치도리. 전에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지?”

“……응. 그러니까 난 변하지 않아. 성악설을 믿는걸.”

“그렇군, 나도 너처럼 성악설론자다.”

 이렇게 말하자, 침대에 누워 있는 아미티에가 경직된 게 느껴졌다.
 난 일부러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잘 들어. 성악설이란 악인은 악인, 사람은 날 때부터 범죄자,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순자가 말한 성악설이란 건 말이지, 이 경우의 악惡이란 학습하지 않고 배우지 않는 인간을 가리키는 거야.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니 처음에는 악하지만, 자력으로 배워 나가 선인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란 말이지.”


- Innocent Grey, FLOWERS 여름편 中 -










■■■








[내 피는 영원과 같이 (完)]


 작은 보석 알갱이처럼 다채롭게 반짝이는 전구장식. 듣는 이의 발걸음까지 흥겹게 만드는 경쾌한 선율carol. 저물어 가는 한 해를 아쉬워하듯, 다가오는 새해를 환영하듯, 거리의 불빛은 겨울이 깊어질수록 현란해져만 간다.

 먼 과거에는 태양의 부활을 기뻐하고, 한때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념하다, 이제는 단순한 연말 이벤트 중 하나에 그치게 된 축제기간christmas. 그렇기에 비로소 더 많은 사람들이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된 이 시기에, 불행히도 난 마음 편하게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후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하얗게 흘러나오는 한숨. 방금 전까지 난 학교에 있었다. 지금은 평범하게, 수업을 받고 귀가 중이다.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끝장 난 줄만 알았던 ‘일상’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기뻐하고 감사해야 마땅한 일이겠으나, 난 도저히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음?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나? 괜찮다면, 이 혈주에게 털어나 봐. 웬만한 일은 다 해결해주지.”

 가슴을 펴며 믿음직스럽게 입을 여는 엘리자베스. 전과 달리 어딘가 생기가 넘치는 표정이 한층 그녀의 미모에 매력을 더한다.

“흥.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주로 부수는 것밖에 없으면서 뭘 잘난 듯이 말하는 거죠? 괜히 엄한 사람 곤란하게 만들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기다렸다는 듯이 신랄하게 엘리자베스를 쏘아 붙이는 율리아나. 하지만 거기에 전처럼 증오심이나 적대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하하. 혈속으로서 부정해주고 싶지만, 확실히 우리 혈주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지. 오래 산거에 비하면 인간사회에 대한 지식도 의외로 허술하고 말이야.”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일 만큼 크게 웃으며 엘리자베스를 놀리는 데 참가하는 카린. 마찬가지로 그녀의 얼굴도 절망에 지쳐 어둡던 첫 만남의 인상과 달리 환하게 밝아 보인다.

“으음. 전부 사실이니 반론하기가 어렵군. 그래도 막내血屬 앞에서 위신이 떨어지니 좀 봐주지 않겠나. 가끔은 나도 폼 좀 잡게 도와줘.”

 엘리자베스 또한 곤혹스러워 하면서도 그리 싫은 얼굴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놀리는 두 사람의 어조에는 얼마간 친근감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와 율리아나. 그리고 카린.
 각각 흡혈귀와 악마퇴치사, 혈주를 증오하는 혈속이라는 복잡하고 뿌리 깊은 원한관계에 얽혀 있었던 세 사람의 사이는, 최근 급속도로 개선이 되었다.

 원인은 무너진 성당에서 있었던 그날 밤의 사건.
 떠올려 보면 조금 낯부끄럽긴 하지만, 고맙게도 이들은 내 풋내 나는 각오를 진지하게 받아주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모든 응어리가 다 풀린 것은 아니겠지만, 애초에 그녀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미워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들에게는 작은 계기가 필요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단지 그 계기 자체를 만드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는 점이 문제였다면 문제였겠지만.

‘뭐, 우연이라도 내가 그 역할을 잘 해낸 거라면 다행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이건…….’

 난 내 곁에 있는 그녀들을 한 번 슬쩍 돌아본 후 마음속으로 크게 외쳤다.

‘이건, 교복은, 좀 아니잖아――!’

 그렇다. 교복. 그녀들은 여전히 내가 다니는 고교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와 율리아나는 물론, 카린마저.

- 네 말대로, 이제부터는 나도 나 자신을 위해 살아 보기로 했다. 마침 마녀가 적당히 자리도 마련해 주었으니 한 번‘학생’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며칠 전, 엘리자베스는 내게 고맙다고 말하며, 내가 전혀 고마워할 수 없는 선언을 뜬금없이 내뱉었다.

- 어, 어쩔 수 없군요! 당신들 같은 위험한 흡혈귀를 감시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저, 저도 당분간, 가, 같이 해야겠어요.

 율리아나는 볼을 붉히며 본인 딴에는 적당한 이유라 생각했는지 마찬가지로 학생을 자처했다.

- 흠, 왠지 재미있을 것 같은데. 마침 나도 신경 쓰이는 녀석이 있으니 함께 해볼까.

 카린 또한 제 혈주를 따라 거리낌 없이 우리 교실에 들이닥쳤다.
 여기서 의외로 카린만큼은 인식장애 같은 이상한 술수가 아닌 진짜 신분증명서 등을 가지고 정식으로 입학을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도 기분 나쁜 미소만 지을 뿐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궁금증은 나중에 하리를 통해 풀 수가 있었다.

- 아, 카린의 경우는 저래 봬도 몇 백 년 전부터 세계 각국의 정재계에 영향을 미쳐온 거물급 인사라 새롭게 신분을 만드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에요. 어떤 의미론 순혈 흡혈귀나 교단의 성녀보다 성가신 인물이라 해야 할까요. 뭐, 그녀가 단순한 몽상가만은 아니었다는 얘기겠죠.

 카린은 과거 고대 제국의 재건을 목표로 엘리자베스의 첫 번째 혈속인 옥타비아와 함께 진력을 다한 적이 있었다. 그 활동은 본인들의 비상한 머리와 재기才器, 그리고 흡혈귀로서의 특성을 십분 활용한 덕분에 꽤 성과를 보았다고 한다. 그런 그녀들도 비록 시대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었지만, 오랜 세월 쌓아온 정계에의 영향력과 숨겨둔 재력은 상당 부분 남아 있다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그녀들이 되지도 않는 학생 흉내를 내며 내 평온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것이다. 난 마녀에게 어떻게든 해결해 줄 수 없느냐고 요청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부정적이었다.

- 음, 마음은 이해하지만 현재로선 딱히 해가 되는 것도 없거든요. 오히려 싸울 생각을 버린 율리아나가 감시 명목으로 이대로 있어 준다면, 당분간은 교단에서도 새로 전력을 파견하는 일 없이 조용할 테니 이득이에요.

 하리의 말에 의하면, 엘리자베스나 카린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서운 존재로서, 세계 뒤편에서 암투를 벌이는 세력들에게는 거의 ‘마왕’이나 다를 것 없는 엄청난 취급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런 두 사람을 율리아나가 성공적으로 견제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 그 공로를 인정받아 교단 내에서 그녀의 입지가 한층 강화되는 것은 필연. 그에 따라 차후 교단의 성가신 개입도 얼마간 그녀의 선에서 차단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 아무튼 그런 이유로 뭔가 새로운 변화가 생길 때까지는 특별하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그러니 그쪽도 우선은 느긋하게 크리스마스를 즐겨 보는 게 어때요? 전 이번에야말로 선배랑 성야性夜를……후후후후.

 내 입장에서는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지만, 마녀는 혼자 결론을 내리고 뭔가 위험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마왕, 이라…….”

 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교복 차림으로 어느새 길거리에서 산 와플을 각자 한손에 들고 있는 흡혈귀와 성녀. 누가 봐도 영락없는 평범한(?) 여고생이다.
 난 그녀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위화감을 발견하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잠깐! 흡, 혈귀는 인간의 피밖에 마시지 못하는 거 아니었어?”

 머리가 지쳐 있는 탓일까. 그 탓에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카린은 단순히 와플을 들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한입 베어 물어 삼키기까지 한 것이다.

“응? 그건 또 무슨 말이냐. 난 처음 듣는데. 왜 우리가 피밖에 못 마셔. 우리도 평범하게 식사할 수 있다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한쪽 눈을 찡그리는 카린.
 난 다소 당황해 하며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전에 하리……마녀가 ‘흡혈귀는 오로지 인간의 피밖에 마시지 못한다’고 말했는데…….”

“아마도 그건 표현상의 문제였을 것 같은데. 실제로 우리가 ‘힘’을 얻을 수 있는 건 인간의 피 뿐이니까. 하지만 다른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딱히 해가 되는 건 아니야. 그저 영양분이 되지 않을 뿐, 맛도 그대로 느낄 수 있지.”

“……정말? 그럼 엘리 씨도 나랑 같이 점심시간에 ‘먹는 척’을 했던 건 왜 그랬던 거지?”

“그냥 혈주의 취향일 걸. 저 사람, 피 외의 다른 건 그다지 먹고 싶어 하지 않거든.”

 카린은 와플을 든 손으로 엘리자베스를 가리켰다. 그녀의 말마따나 엘리자베스는 기껏 산 와플을 아직 입에도 대지 않은 채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보고만 있었다.
 난 떠오르는 단어를 소리 내어 입에 담았다.

“혹시, 결벽증?”

 내 목소리가 들린 걸까.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돌리며 부정했다.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다. 그저, 우리는 소량의 피만 섭취해도 오랜 시간을 버틸 수가 있는데, 음식을 먹는 건 심한 낭비처럼 느껴져서 말이지. 무엇보다 식사란 ‘다른 생명’을 빼앗는 것. 꼭 필요하지 않다면 하고 싶지 않아.”

 ……뭐랄까. 굉장히 환경 친화적인 흡혈귀다. 이쯤 되면 누가 괴물인지 원. 가까운 미래에는 엘리자베스와 같은 이들이 재평가를 받게 되고, 오히려 교단 같은 독선적인 교조주의자들은 사회에 해가 되는 한갓 광신자 취급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당신은 옛날부터 지나치게 복잡하게 생각하는 게 문제에요. 그러고 보면 예전에 제가 만든 치즈를 거절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요. 가끔은 그냥 즐겨 보라고요!”

 율리아나는 자신이 들고 있던 와플의 일부를 떼어내어 강제로 엘리자베스의 입에 넣었다.

“웁!”

 엘리자베스는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율리아나의 손길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순순히 율리아나가 입에 넣은 와플을 뱉어내지 않고 삼켰다.

“어, 어때요?”

 율리아나의 물음에 엘리자베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맛있어.”

 우와. 뭐냐 이건. 그냥 연인 사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동반자살을 꾀했을 만큼 애증이 깊은 사이였으니 거기서 증오가 사라지면 남는 건 사랑뿐인가.
 하지만 아무래도 그 마음은 일방통행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죄책감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군. 역시 먹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먹는 건 잘못된 일이야. 그렇다고 먹을 걸 버리면, 그것이야말로 도리어 생명을 모독하는 짓이 되겠지.”

 엘리자베스의 말에 율리아나가 옆에서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다고요! 그러니 모처럼 제가 골라준 거 끝까지 먹…….”

 엘리자베스는 도중에 율리아나의 말을 끊으며 들고 있던 와플을 건넸다.

“자, 네가 대신 먹어. 이러면 아무 문제없겠지. 먹을 필요가 있는 사람이 먹는 거니까.”

 아아. 저질렀다. 둔감한 것도 저런 수준까지 가면 죄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응? 뭐야. 왜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지? 아, 혹시 이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맛인가? 아니면…….”

 엘리자베스는 잔뜩 볼을 부풀린 채 고개를 돌린 율리아나를 달래느라 진땀을 빼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도와줄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저 사람은 좀 곤혹스러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후후. 우리 혈주 머리가 좀 굳어 있어야 말이지. 옥타비아랑, 나도 얼마나 답답한 적이 많았는데. 그나저나 이거, 내가 아는 와플이랑은 생판 다르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하군. 너도 좀 먹을래?”

 카린은 킥킥거리며 들고 있던 와플을 반으로 잘라 큰 쪽을 내게 주었다. 내가 고맙다고 인사하자 카린은 “별 말씀을”하고 붉은 머리카락을 흔들며 씩 웃었다.

‘의외로 호감이 가는 사람이야.’

 최악이었던 그날 밤의 인상과는 달리, 사람이 변한 혹은 원래대로 돌아온 카린은 꽤나 붙임성이 좋은 소탈한 성격이었다. 긍정적인 의미로 ‘어른’이라고 해야 할까. 방금 ‘옥타비아’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살짝 눈빛이 흔들리긴 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엘리자베스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지 않고 평정을 유지했다.

‘덕분에 나도 율리아나랑 화해할 수 있었지.’

 날 죽이고 다미를 납치하기까지 했던 교단의 성녀. 예전의 나라면 절대 그녀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린이 엘리자베스와의 관계를 회복한 것을 보고 나도 간신히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물론 율리아나 또한 우리에게 정중하게 사죄를 했다.

- 아, 앞으로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면……. 하, 하지만 또 도토리한테 손대면, 저,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다미는 잔뜩 떨면서도 날 위해 있는 힘껏 목소리를 높였다. 율리아나도 이번 일로 느낀 바가 있었는지 다미의 용기를 비웃지 않고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며 재차 약속을 해주었다.

‘그럼 가볼까. 다미에게 줄 선물을 사러.’

 난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즐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다미와 난 매번 생일 이외에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서로 선물을 준비해 교환을 해왔다. 오늘 귀갓길에 다미랑 같이 하지 않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지금쯤 다미도 어딘가에서 내 선물을 고르고 있으리라.
 하지만 난 슬슬 꿀꺽 삼키는 데 한계가 있어 내뱉어야 할 말이 있었다.

“저기, 다들 한가해? 이만 각자 볼일 보시지? 난 지금부터 개인적으로 따로 들를 곳이 있는데.”

 눈치 없게도 졸졸 따라오는 흡혈귀 둘과 성녀가 하나. 아무리 다미와 내가 아직 친구 사이라고는 해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모습을 지인들에게 보이고 싶진 않다. 부끄러우니까.
 그러나 내 혈주에게 그런 섬세함은 기대할 수가 없었다.

“따로 들를 곳이 있다고? 무슨 일이지? 괜찮다면 나도 함께 하지. 뭔가 도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다, 당신이 간다면, 저, 저도 내키진 않지만, 함께 해야겠군요. 가, 감시해야 되니까.”

 여기에 얼빠진 성녀가 한 명 더 추가. 요즘 들어 율리아나는 마음의 족쇄가 풀린 탓인지 엘리자베스만 연관이 되면 순식간에 바보가 되고 만다. 뭐, 그만큼 엘리자베스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듣기에는 좋겠지만, 내 입장에선 민폐가 아닐 수 없다.

“뭐야, 애인한테 선물이냐? 그런 거라면 보석을 추천한다. 나도 옥타비아한테 30캐럿짜리 팬시 다이아몬드들로 조각된 보석장미 꽃다발을 선물한 적이 있었지. 혹시 보석에 대해 잘 몰라 고민 중이라면 같이 골라줄까?”

 카린은 예리하게 내 목적을 간파했지만, 다른 쪽으로는 마찬가지로 눈치가 없었다. 덧붙여 그 보석 꽃다발은 살 수 있고 없고를 떠나 절망적으로 악취미라 생각한다.

 왜 이들은 이렇게나 내게 간섭하는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수 있으면 마음은 편하겠지만, 사실 난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 적어도 인간으로서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줄 순 있어!

 그날 밤 내가 외친 선언. 난 그녀들의 절망을 막고자 기약 없는 희망을 던졌다. 그것을 그녀들이 받아들인 이상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쯧. 어쩔 수 없군.”

 난 한 번 가볍게 혀를 찬 뒤,

“따돌리는 수밖에.”

 마침 주위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후후. 귀여운 짓을 하는군. 한 번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조금 기다려줘 볼까.”

 예상대로 혈주 일행은 날 곧장 쫓지 않았다. 아마도 금방 따라잡을 수 있다고 얕보고 있는 것이리라.

“좀 열 받는데. 좋아, 누가 이기는지 한 번 해보자고!”

 오늘 목표는 혈주 일행에게 잡히지 않고 무사히 다미의 선물을 준비하는 것. 방심은 금물이라는 사실을 톡톡히 일깨워주겠다.

“…….”

 고작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는 데도 이런 고생을 해야 하다니. 대체 앞으로도 얼마나 그녀들에게 시달리게 될까. 솔직히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면 거짓말이 되리라.

“후후, 후후후.”

 하지만 힘껏 달리면서 난 분명, 웃고 있었다.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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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6.04.08 14:29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무무무무무무무엇을...! ;ㅁ;

    이 것은, 틀림 없이 정진정명한 좌충우돌 ☆하렘 라이프☆의 시작이 아닌가요!!! (쿠쿵)

    크흑, 역시 주인공 보정 앞에 모든 것은 무의미하군요~ C=C=C=ㄴ(ㅠ_ㅠ)ㄱ [ - 눈물을 흘리며 석양 속으로 달려나간다 - ]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6.04.10 10:17 신고 address edit/delete

      말씀처럼 이번 편은 특히 가볍고 행복한 느낌의 엔딩으로 마무리를 지었네요~

      실은 '모든' 캐릭터가 도토리에게 완전히 반하는 백합하렘 엔딩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내용을 표현하기에는 아직 제 실력이 많이 부족해 지금과 같은 분위기로 안정(?)되게 되었어요^^;;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어림짐작으로 만들기 시작한 인형이, 그럴 듯한 모양새가 되었을 무렵.
 기다리던 남편은, 전장에서 바퀴의자에 의지해 돌아왔다. 우리는 그동안 있었던 일. 그리고, 앞으로 있을 두 사람의 장래에 대해 달이 해가 될 때까지,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나라에 이런 시대에 태어나는 것이, 과연 우리 아기에게 행복한 일이 될까. 생각할수록 알 수가 없어…….”

“여보. 당신이 맞이한 아침을, 당신이 보낸 밤을, 헤매고 상처 입으면서도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을, 그리고 앞으로의 나날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가 있다면, 우리 아이 또한 삶을 사랑할 수 있을 거야.”


- Sound Horizon, 9th Story 『Nein』, 눈물로는 끌 수 없는 불꽃 中 -










■■■








[내 피는 영원과 같이 (19)]


 처음부터 확신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단지 강렬한 위화감만이 존재했을 뿐.

‘저게 뭔지 모르겠지만, 절대 엘리 씨에게 닿게 하면 안 돼!’

 천사로부터 형성된 은색의 창으로 엘리자베스를 찌르려 하는 율리아나. 지금까지 성녀가 불러낸 여러 흉흉한 것들에 비하면 오히려 얌전해 보이는 물건이었지만, 강렬한 오한에 몸이 떨려온다.

‘젠장, 이대론 늦겠어! 역시 몸으로 막아내는 수밖에 없나!’

 난 직감적으로 엘리자베스가 위험하다고 느꼈다. 분명 진심으로 힘을 발휘하면서 내 혈주가 압도적으로 천사들을 유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불안감은 점점 강해지기만 했다. 그래서 난, 그녀들 사이에 뛰어들었다.

“……쯧. 더럽게 아프구먼. 도취하고 있는 도중에 미안하지만, 천국행 열차는 운행중단이야.”

 치익. 치이이익. 배를 관통한 은철의 창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오른다. 아까 천사의 칼에 찔렸을 때보다 더 극심하게 느껴지는 고통. 하지만 오히려 상처는 더 얕다는 감각이 확실히 전해져 왔다.

“왜, 당신이……!”

“……하. 제대로 맞아들었군.”

 성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난 자신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이 창은 내가 맞았기에 ‘이 정도’로 끝난 것이다. 흡혈귀로서 반쪽짜리였던 것이 역으로 도움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진짜’ 흡혈귀에 비하면 인간이나 다름없는 내 ‘마성’에도 이처럼 강렬하게 반응하는 공격을 엘리자베스가 맞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기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명확히 말로 표현할 순 없었지만, 뭔가 이상했어.’

 단번에 날 무력화시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점에 따라선 훈련이라도 시켜주듯 적당히 상대했던 카린.

 마찬가지로 카린과 동등한 혹은 그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검은 경전을 통해 엘리자베스를 견제하는 것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던 율리아나.

 분하지만 두 사람이 마음만 먹었다면 나 따위는 당장 재생하지 못하도록 문자 그대로 가루로 만들어 놓고 다미를 죽이는 일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앞에서 천사를 시켜 내 몸에 칼을 찔러 넣었던 것도, 흡혈귀 혈속의 불사성을 생각하면 물러터지기 짝이 없는 방법이다.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약해빠진 나한테 강자 특유의 가학심리를 드러냈을 뿐이다? 카린이라면, 혹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율리아나는 다르다. 그녀는 교단에 속한 성녀. 인간에게 해가 되는 존재를 말살하는 악마퇴치사. 말하자면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예외도 있긴 하지만, 해당 분야의 전문가는 대체로 효율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꼭 본인이 그런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떤 일에 전문가라 불릴 만큼 ‘숙달’되면 자연스럽게 군더더기는 배제되고 만다. 그런 전문가가 비효율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숨은 이유가 있다.

‘분명한 「다른 목적」이 존재한다고 봐야겠지. 굳이 날 아슬아슬하게 살려둘 만한 이유가 있다면…….’

 엘리자베스를 불러들이는 일. 그녀는 자기 혈속을 소중히 여긴다. 며칠 지내지 않은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오랜 세월 그 뒤를 쫓아온 교단의 성녀가 모를 리는 없을 터. 내게 있어 다미가 그렇듯, 엘리자베스에게 있어선 내가 바로 인질인 셈이다.

‘하지만 다미랑 달리 난 완전히 죽지 않아.’

 그 점을 고려하면 내 인질로서의 가치는 확연히 떨어진다. 기껏 엘리자베스를 이곳까지 불러낸다 해도 날 죽인다는 식으로 무저항을 요구할 수는 없다.

‘실제로도 율리아나는, 엘리 씨가 보는 앞에서 날 함부로 찔러댔지.’

 이 시점에서 난 서서히 성녀의 의도를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녀는 오로지 엘리자베스를 도발하고 자극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격분시키려 하고 있었다.

‘엘리 씨를 화나게 해서 얻는 이득이 뭘까. 모르겠어.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 배를 관통하고 있는 이 창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마녀나 혈주에게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교단에는 자신들 특유의 교리狂氣에 따라 상대의 ‘틀’을 제멋대로 설정해 파멸시키는 무서운 힘도 존재한다고 한다. 어쩌면 그걸 위한 준비였는지도 모르겠다.

“…….”

 냉정을 되찾은 걸까.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은 말 그대로 핏기가 빠지듯 검정에서 빨강으로, 이윽고 평소의 금발로 되돌아왔다. 물론 그녀의 현란한 혈갑도 공중에 녹아들 듯 희미하게 옅어지다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후우……”

 난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만을 노려보며 다른 데는 안중도 없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율리아나의 창을 받아내는 것도, 무섭고 아프긴 했지만 천사의 무자비한 칼날에 비하면 참을 만했다. 다만, 엘리자베스의 혈갑을 견뎌낼 자신만큼은 없었다.

‘혈속을 생각하는 당신의 마음이, 진짜여서 다행이야.’

 내게 닿기 직전 스르르 사라지기 시작한 핏빛 물결. 만약 엘리자베스가 조금만 늦게 손을 멈추었어도 난 카린이 매우 부러워하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내게는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지만.
 그러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높은 목소리가 귓속을 찢어발기듯 앙칼지게 들려왔다.

“왜, 왜 방해하는 거죠!? 이번에야말로, 죽일 수 있었는데……! 죽을 수 있었는데……!”

 율리아나는 창에서 손을 놓으며 흐느끼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애송이가! 쓸데없는 참견질을……! 혈주에게 죽든 혈주가 죽든, 삶에서 해방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망쳐 놓다니……!”

 카린은 피 웅덩이에서 일어나 절규하듯이 날 힐난했다.

“…….”

 그 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을 뿐인 엘리자베스. 말없이 침묵을 지키고만 있는 그늘진 얼굴이, 어쩐지 한결 슬프게 느껴진다.
 난 그 모든 시선과 목소리를 견디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난 말이지. 영생이란 참, 끔찍하다고 생각해.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는 건, 확실히 저주야.”

 자신은 삶의 노예가 아니라는 카린의 외침. 비록 난 그녀만큼 세월 속에 절절히 체험한 건 아니라고 해도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강요당하는 삶은, 정말 끔찍하다고 생각한다.

“뚫린 입이라고 어딜 함부로……! 그걸 아는 놈이 우릴 방해한 거냐!?”

 성큼성큼. 노성을 지르며 흉흉한 기세로 날 향해 다가오는 카린. 그녀가 화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설픈 공감은 도리어 상대의 역린을 건드리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난 말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삶에 패배해도 좋다는 이유가, 될 수는 없어.”

“패배……? 패배, 라고……?”

 우뚝 멈춰 선 카린. 난 주제넘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죽음이, 당신들이 ‘납득’할 수 있는 결말이라는 건, 알겠어. 하지만 행복한……아니, ‘바라던 결말’이라고, 할 수 있나?”

 카린의 얼굴이 다시 무섭게 일그러졌다.

“무슨 헛소리를 하나 했더니……! 당연하지! 난 진심으로 삶에서 해방되는 걸 바라고 있다! 정말 죽고 싶은 거라고!”

“왜? 왜 죽음을, 바라지? 소중한 사람과 행복한 일생을 보내고, 더 이상 미련이 남아 있지, 않아서? 아니면, 이루고 싶은 꿈을 다 이루어, 충분히 만족했기 때문에?”

“그, 그건…….”

 예상대로 카린은 망설였다. 엘리자베스에게 미리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약점을 파고드는 것은 비겁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난 뱃속을 불태우는 아픔을 참으며 단숨에 소리쳤다.

“당신은, 그냥 도망치고 있을 뿐이야! 꿈도 동료도 잃은 슬픔에서, 눈을 돌리고 싶은 것뿐이라고! 그걸 위한 죽음이, 진정 스스로 원하는 결말이라고 할 수 있어?”

 납득할 수 있는 죽음. 설령 어떤 결말이라 해도 본인이 자기 인생의 막을 내리기로 결정했다면, 누구에게도 그걸 막을 권리는 없으리라. 하지만, 난 아직 어른이 아니다. 납득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시 사람은 행복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녀는 그런 내 유치함의 허점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아무것도 책임질 것 없는 어린애답게 입만 살았군요. 맞아요, 당신 말대로 우리는 삶에 진 패배자들일지도 모르죠. 그래서? 그런 당신은, 우리에게 행복한, 바라는 결말을 줄 수가 있나요? 아니, 그런 결말에 다다르는 방법이라도 알고 있나요?”

“…….”

“그런 것도 모르면서 우리의 죽음을 막고, 우리를 매도한 당신은 대체 뭐죠? 삶을 강요하는 건 끔찍하다고 말하면서 결국은 자기가 우울한 기분이 되기 싫으니까 남에게 단지 살아갈 걸 강요하는 비열한 위선자가 아닌가요?”

 냉정 속에 열기를 담고 있는 율리아나의 말은 신랄했다.

“그건…….”

 솔직히 제대로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의 말은 일정 부분 정곡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난 타인의 불행을 보기 싫다는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그녀들의 죽음을 방해했으니까.

“그건―――윽!”

 그래도 어떻게든 말을 자아내려 할 때 다시 한 번 뱃속을 태우는 강렬한 고통이 엄습해 왔다.

“……쯧.”

 거의 습관적으로 혀를 차고 마는 자신. 별로 좋지 않은 버릇이긴 하지만, 아프거나 힘들거나 할 때 혀를 차면 왠지 조금은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허세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 다미를 따라 하다가 이런 버릇이 들었나…….’

 물론 다미는 나처럼 혀를 차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녀처럼 강해지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거칠게 행동하다 나도 모르게 든 버릇인 것이다.

‘뭐, 이런다고 사람이 금방 변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난 저편에 서 있는 다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겁먹은 얼굴이지만 강한 눈빛으로 날 지켜봐주고 있었다.

‘평범해졌다고 생각한 다미에게도, 사라지지 않은 게 있었어. 어린 시절의 다미를 닮고 싶었던 내 유치함도 무언가를 남긴 게 있었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율리아나에게 대답할 말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과연 그녀가 만족할 만한 내용일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내게 있어선 부끄러움 없는 대답이다.

“당신 말대로 난 정답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아. 당신들을 이끌어줄 만한 기량도 없고. 하지만…….”

 난 아까부터 성가시게 배를 태우고 있는 은색의 창에 손을 댔다. 치지이이익. 푸른 불꽃이 일렁이며 손바닥마저 타오른다.

“적어도 인간으로서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줄 순 있어!”

 하지만 내 말에 반발하듯 창이 불꽃으로써 대답한다. 넌 인간이 아니다. 넌 괴물이다. 넌 이 세상에 용납 받지 못한다. 그러니 어서 사라져라. 이것이 바로 고통의 정체. 검은 경전의 파편은 내 안의 마성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나 자신을 부정하고 있었다. 시끄럽다. 거슬린다. 그렇다면 아예 내 목소리로 덮어버리자.

“인간은, 사람은, 단순히 생물학적이나 존재형식의 분류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야. 사람이 생각하는 사람의 초상理想은 분명…….”

 창을 쥔 손도, 창에 찔린 배도, 계속해서 고통이 늘어만 간다. 그래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사람이고자 하는 의지……아니, 나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이 되고자 하는 자세 그 자체에 있어! 설령 몸은 괴물이라도, 또는 기계라도,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 해도, 그 무엇이라도! 누군가를 바라볼 눈과 누군가를 감싸줄 손과 누군가를 떠올릴 마음이 있다면, 그리고 꿈을 좇는 정신이 있다면, 그게 바로 사람이라고!”

 이것이 다미와 나를 통해 내가 내린 결론. 내게 있어 떳떳한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다. 아무리 변했어도 어릴 적 다미의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듯이, 나 또한 그녀의 모습을 일부 닮아 있듯이,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변했어도 그때의 꿈과 그때의 마음을 떠올릴 수 있다면, 괴물이건 영원에 사로잡혀 있건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최소한 삶에 패배할 변명은 되지 않는 것이다.

 창을 쥔 손에 한층 힘을 주자 푸른 불길이 더욱 크게 타오른다. 난 타오르는 손을 무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선언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넌 이만 닥쳐라. 괴물은,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는 너다.”

 부르르. 점점 진동이 커지던 창이 어느 순간 환하게 빛나며 활활 타올라 재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날 태우던 자신의 불꽃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소멸하고 만 것이다.

“이럴, 수가……. 죄인을 벌하고 마를 멸하는 천상의 의지를 구현한 창이, 스스로를 오류라고 인식했다고요……?”

“말도 안 돼……. 저런 무기엔 나도 당해본 적이 있지만,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아무리 흡혈귀로서 반쪽이라곤 해도, 저런 애송이가 어떻게……!”

 경악을 금치 못하는 율리아나와 카린. 경전으로 만들어진 창을 소멸시킨 일은, 아무래도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대단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내 미숙하기 짝이 없는 치기에 다소는 설득력이 보태질 테니.

“……, ……, …….”

 이어서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다리도 후들거리고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창을 소멸시키는 와중에 상처가 더 깊어져 서 있는 것도 곧 한계다. 그녀들이 내 대답에 만족했을지는, 안타깝지만 당장 확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아.”

 힘이 빠져 넘어지려는 날 부축해 주는 부드러운 손길.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냄새로 누군지 알 수 있다. 난 최후로 기력을 짜내 그녀에게도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엘리 씨도, 이젠, 기대하지, 마……. 혈속들이, 자기 삶을 대신, 살아주기를……. 엘리 씨 인생은, 엘리 씨밖에, 살 수 없어…….”

 과연, 들렸을까. 모르겠다. 들렸어도, 그저 애송이의 건방진 소리로 치부하고, 무시하거나 반발심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래도,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귀담아 주었으면 기쁘겠다는 생각을 하며, 난 눈을 감았다.

“후…….”

 내 쪽으로 점점 가깝게 다가오는 분주한 발소리는, 아마도 다미의 것. 난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의식의 끈을 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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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6.04.04 14:13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아, 아앗... 낚였다!!! @_@ (파닥, 파닥 파닥 파닥! )

    분명 저렇게 건들거리는 말투라면 카린이겠지 싶었는데 말이예요. 하하핫;; llorz

    아무튼 이 것은 틀림없이 열혈의 전개로 불타오르며 사건을 일소하는, 정진정명한 주인공의 보정!! +ㅁ+


    설령 언제나와 마찬가지의 힘들고 암울한 일상들만이 이어질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상 그 여정 속의 풍광과 궤적은 매일 조금씩 달라지기 마련이며 또한 일견 무가치해보이는 삶의 소유자일지라도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나름의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법.

    이거 이거 신비와 비일상의 편린으로 점철된 마도의 세계에 막 발을 들인 신참 주제에, 꽤나 경력이 오래 쌓인 선배들에게 진짜 통쾌한 일침 한방을 먹인 셈이로군요. >_<)

    왠지 리아나 하린이라면 이 상황을 멀리서 지켜보며 그래도 엘리자베스가 인재를 보는 안목은 있다며 내심 감탄을 할지도 모르겠어요. 후후...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6.04.08 12:58 신고 address edit/delete

      이번 편은 엘리자베스-도토리(주인공)-카린이 비슷한 어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헷갈리셨을 수도 있을 듯싶어요. 그런 면에서는 일본의 장르작품에서처럼 여러 개성적인 말투가 확실하게 정형화되어 있는 문화가 살짝 부럽기도^^;;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평소의 완성형 또는 숙련형 주인공과는 다른 타입의 캐릭터를 그리기 위해 노력을 해보았는데, 역시 그 경우는 시련을 넘어서는 장면이라든지, 또는 후반부의 볼거리에서 활약을 시키는 게 상대적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그렇기에 그런 부분을 잘 그려주면 한층 흥미진진하게 불타오로는 전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제 실력으로는 아직 부족한 면이 많은 듯... 그저 최대한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작중에서 엘리자베스가 하린-리아 부부와 교류하는 내용이라든지, 흡혈귀의 특성을 이용해 여자 사이에 아이를 갖는 방법을 설명하는 내용이라든지 하는 등의 에피소드도 넣고 싶었지만, 예상 외로 분량이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아쉽게도 그 부분은 빼게 되었어요ㅠ_ㅠ 언젠가 다른 이야기에서 그런 소재도 재차 다루고 싶은 마음이네요.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당시 데블린 법관은 동성애에 대한 비범죄화와 매춘에 대한 제한적 규제를 권고하는 “월펜던 위원회 보고서(The Wolfendon Report, 1957)”에 대하여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이는 『도덕의 법적 강제(The Enforcement of Morals, 1959)』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그에 의하면, 사회는 법이라는 수단에 의하여 내·외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권리가 있다. 사회는 이념적 공동체로서 공통적인 도덕이 준수되지 못할 경우 해체될 수밖에 없으므로 사회는 부도덕 그 자체에 대하여 입법할 권리를 갖는다.

 이에 대하여, 하트는 『법, 자유, 그리고 도덕』에서 밀의 해악원리에 기초하여 사회는 타인에 대한 해악(harm to others)을 방지하기 위해서만 개인의 자유에 간섭할 수 있을 뿐이며 도덕적으로 훈육하기 위해서는 개입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하였다(Law, Liberty and Morality, Ⅱ, 2).

 특히 동성애에 대한 규제에 대해서는, 동성애와 같은 부도덕이 사회를 해체한다는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동성애를 지진의 원인라고 믿었던 것만큼이나 근거가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 오세혁, 법철학사, 세창출판사, 327면. -










■■■








[내 피는 영원과 같이 (18)]


 참상斬象. 혹은 사상절단事象絶斷.
 엘리자베스의 혈갑血花이 가지는 최대의 특성을 어떻게든 말로 표현하자면 이런 명칭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세상만물의 결합을 무엇이든 해체하는 성질. 상대가 마치 피안개가 되어 흩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대상이 아주 잘게 분해된 자리에 일시적으로 혈갑의 잔해가 부유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검은 경전의 힘을 빌려 한정적이나마 창조를 행하는 율리아나의 광기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힘. 파괴는 창조보다 강하다. 성녀에게 있어선 극히 상성이 좋지 않은 특성으로 천적이라 불러도 크게 빗나가지 않으리라.

「…….」

 엘리자베스는 침묵과 함께 천사들을 도륙했다. 한쪽 눈에서 한줄기 피눈물을 흘리는 것과 달리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하지만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죽을 각오를 하지 않은 이상 누구나 이 자리에 있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화를 내고 있었다.

‘어째서, 너희들은…….’

 천년의 세월을 흘러온 엘리자베스. 그녀도 어떻게 자신이 태어났는지 모른다. 단지 눈치 채고 보니 영원한 생명과 강대한 힘을 가지고 ‘순혈의 흡혈귀’라 불리며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을 뿐.

‘왜, 너희들은…….’

 사람의 모습으로 사람의 마음을 가진 초상의 괴물. 사람이 아니더라도 사람과 닮은 이상,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외로우니까. 고독은, 설령 몸이 버틴다고 해도 마음이 버티지 못한다.

‘삶을 견디지 못하는 거냐……!’

 엘리자베스는 지금까지 걸어오며 수많은 이들의 절망과 비탄을 보아 왔다. 한때 싱싱하고 힘찬 뜻을 품었던 젊은이도 시간의 물결에 시든 육체와 정신으로 자기가 믿었던 이상理想에마저 침을 뱉는다. 죽음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있다고 자신하던 연인들도 어느새 상대를 원수처럼 여기며 헤어지기만을 바란다. 고작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행복해 하는 인간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처음에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죽을 운명의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가질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비극이라 여겼다.

‘그래서, 내 피를, 영원을, 주었거늘.’

 끝이 없는 삶. 예정된 죽음과 노화가 없다면, 인간들도 절망하지 않고 마음껏 제 뜻을 펼치며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그녀는 혈속을 만들었다.

‘하지만, 다들 내 곁을 떠나고 말았지.’

 그녀의 혈속들도 처음에는 혈주를 찬양했다. 죽음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신들의 처지를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100년이 흐르고, 200년이 흐르고, 계속해서 시간이 흐르자 서서히 그 삶을 또 다른 속박으로 여기는 혈속들이 속출했다.

‘결국, 내 손으로 다시…….’

 혈속들 중 일부는 폭주해 자아를 잃은 완전한 괴물이 되었다. 또 어떤 혈속들은 살아갈 의미를 잃었다며 자진해서 죽음을 청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어쩔 수 없이 그런 혈속들의 목숨을 거두어야만 했다.

 쩍.
 그럴 때마다 금이 가며 갈라지는 마음. 그 혈속들의 죽음에는 지금까지 스쳐 지나온 다른 인간들의 죽음과는 질적으로 다른 한 가지 커다란 차이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그녀가 직접 손을 대어 변질시킨, 어떤 의미로는 새로 낳은 생명이라는 점. 다시 말해 혈속들의 실패와 절망은 그녀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엘리자베스는 버틸 수 있었다.
 아직 첫 번째 혈속이었던 옥타비아가 꿈을 잃지 않고 전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내 그녀마저 삶을 거부하는 모습을 본 엘리자베스는 문득 자신 또한 잔뜩 마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린에겐, 미안한 짓을 했지.’

 율리아나의 지적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성녀의 말마따나 삶에 지쳐 슬픔만이 남게 된 이 순혈의 흡혈귀는, 더 이상 자신의 혈속을 죽일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는 그저 자신의 이기심일 뿐. 미움 받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자신을 원망하는 것은 이해한다. 자신을 죽이려 드는 것도 충분히 용납할 수 있다.

‘그게 새로 피어난 꽃을 꺾을 이유는 될 수 없어!’

 엘리자베스는 말없이 성녀를 노려보며 허공에 피의 꽃을 수놓았다.

「!」

 저항할 도리 없이 무참히 흩어지는 천사들. 이제 남은 천사의 숫자는 채 절반도 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하지만 착실하게 성녀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율리아나…….’

 예전 옥타비아를 죽이고 있는 대로 지쳐 있던 자신을 위로해주었던 활기찬 소녀. 더없이 순수했던 소피와 함께 다시금 행복한 시간을 자신에게 주었던 어여쁜 아이.

‘너도, 날 원망하는구나. 그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날 이후 갈색머리에 녹색 눈동자가 잘 어울렸던 그 상냥한 여자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있는 것이라곤 냉혹한 악마퇴치사로 변한 은발의 성녀뿐.

‘하지만, 나도 그 아이를, 소피를 죽이고 싶지 않았단 말이다……!’

 엘리자베스의 마음 속 절규에 호응하듯 핏빛 물결이 거세게 요동친다.

「――――」

 급감하는 천사들의 숫자에 따라 엘리자베스 또한 조용해졌다. 겉으로만이 아니라 속으로까지 말이 없어진 것이다.
 지금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분노였다.






“그래요. 당신에게는, 아직 마음이 남아 있어요. 슬픔 이외의 감정도.”

 율리아나는 하나둘씩 흩어지는 천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당신은, 정말 괴물이에요.”

 순혈이라 불리는 흡혈귀들은 대개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신체강도와 재생력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엘리자베스는 특출 난 편에 속했는데, 극단적으로 말해 갑자기 이 별이 폭발한다고 해도 멀쩡하게 우주공간 속에 살아남을 수 있는 초월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교단에는 단순한 물리적인 힘 외에도 얼마든지 괴물을 퇴치할 방도가 존재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순혈의 흡혈귀들과 같은 계통으로 추정되는 고대의 마수魔獸들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이 아닌 존재를 말살하는 신학적 구상의 현실화.
 세계라는 대법전의 다른 조문을 이용하는 것으로 교단은 지금까지 자신들의 기준에서 벗어난 ‘악마’들을 처단해 왔다. 가설 속 절대자의 뜻을 멋대로 날조해 자신들의 의지로 삼는 광기로써 그것을 실현시킨 것이다.

‘그녀는 인간의 마음을 가진 괴물. 그래서, 죽일 수 없었어.’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경우에는 한없이 인간에 가까운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마물에게는 치명적인 독이나 다름없는 신학병장神學兵仗도 엘리자베스의 인성 부분이 방해돼 중화가 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완전한 인간이 아닌 이상 일정 부분 그 위력이 통하기는 했으나, 그 정도의 상처는 역으로 순혈 흡혈귀의 재생력 덕분에 순식간에 회복이 가능했다. 마성과 인성. 본래는 대립해야 될 두 성질이 충돌하는 대신 상호보완을 통해 서로의 약점을 덮어 결과적으로 무적상태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성적인 부분을 공략하면 어떨까 하는 발상도 있었지만…….’

 다음으로 교단이 떠올린 것은 상대를 ‘인간’으로 의제해 처단하는 것이었다. 괴물이 아닌 인간이라도 ‘죄인’이라면 얼마든지 ‘단죄’가 가능하다. 그러나 교단은 이 발상을 조금 일찍 떠올렸어야 했다.

‘이미 그녀에겐, 슬픔밖에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교단의 교리는 슬픔을 죄악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분노도 욕망도 심지어 웃음마저 죄악으로 보는 견해가 있긴 해도 눈물을 금하는 내용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슬픔은 신도들에게 은연중 권장되는 감정이기도 하다.

 이제 와서 교리에 억지로 슬픔을 부정하는 내용을 넣어 봤자 신학의 질만 떨어질 뿐. 때문에 교단은 오랫동안 엘리자베스의 존재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거의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했어. 차라리 그녀의 모든 감정이 마모돼 아예 자아를 잃은 괴물이 되는 걸 기다리는 편이 빠르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기적으로 엘리자베스와 충돌을 벌이던 율리아나는, 우연한 일을 통해 아직 그녀가 다른 감정의 싹을 품고 있음을 눈치 챘다. 그건 바로 자신들의 싸움에 말려 죽은 한 소녀를 새롭게 혈속으로 만든 일이었다.

‘의식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마음에 드는 사람」밖에 혈속으로 삼지 않아.’

 이 순혈의 흡혈귀는 실로 이기적이다. 평범한 인간처럼 재산 등에 욕심이 많거나 몸을 사린다는 얘기가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밖에 돕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저런 꼬맹이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부분은 생명의 기척을 민감하게 느끼는 흡혈귀 나름의 취향이 존재하는 거겠지. 어떤 의미로 보자면, 엘리자베스의 혈속들은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타입의 여자들이라 할 수 있어.’

 이렇게 말하니 굉장히 경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초상적인 괴물을 공략하는 데 있어선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소한 요소들도 매우 중요하다.

 약간의 이질성이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과 닮은 마음을 가진 이상 ‘편애’의 감정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를 건드리는 데 화를 내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율리아나가 이번 일에 구태여 카린을 끌어들인 것도 조금이나마 그 효과를 더하기 위함이었다.

‘계산은, 제대로 들어맞았어.’

 율리아나는 엘리자베스를 격분시키는 데 성공했다. 단순히 혈속을 고문하는 것만으로는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 그 혈속의 친한 친구를 죽이는 척해 정신적으로 몰아세운다는 비열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어쨌든 성공은 성공이다.

 그렇다. 율리아나는 ‘화’를 냈다. ‘분노’한 것이다.
 분노란 예로부터 교단에서 금하는 대표적인 죄악 중 하나. 초기에는 그저 부당한 일에 반발하는 민중들의 심리를 억눌러 지배체제에 예속시키기 위해 고안된 교리에 불과했으나, 이제 와서는 오랜 역사와 다양한 견해가 스며든 훌륭한 신학적 사상 중 하나가 되었다. 충분한, 광기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침묵하는 엘리자베스의 혈갑 앞에 이제 천사들은 다섯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율리아나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가장 가까이 있는 천사에게 손을 대며 입을 열었다.

“존재형식 확인.”

 대리석의 천사는 하얀 눈을 엘리자베스에게 향하며 무기질의 음색을 발했다.

「존재형식 분류. 인과굴절단형체. 통칭 흡혈귀 순혈종으로 인식.」

“개체형식 확인.”

「개체형식 분류. 밤에 피는 붉은 꽃. 개체명 엘리자베스로 인식.」

“개체형식 변경.”

 천사는 율리아나의 지시에 따라 빠르게 해석을 재설정했다.

「개체형식 변경. 분노하는 붉은 용. 개체명 드라고나로 변경완료.」

 분노라는 죄악과 용이라는 마수. 지금의 엘리자베스는 ‘감정’과 ‘마성’이라는 부분에서 양자에 통하는 면이 있다. 물론 사실과 동떨어진 제멋대로의 해석이긴 하지만, 바로 그 제멋대로의 해석을 세상에 관통시키는 것이야말로 교단의 광기敎理다.

「――――」

 이윽고 율리아나의 곁에 있는 천사를 제외한 모든 적을 없앤 엘리자베스. 마지막 남은 원흉을 처리하기 위해 그녀의 혈갑이 허공을 물들인다.
 이 순간이야말로, 율리아나가 기다리던 때였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될 지어다≒Auctoritas, non veritas facit legem.」

 순식간에 흩어지며 빛의 종잇장으로 되돌아온 천사. 그것은 곧장 은빛으로 번쩍이는 매끄러운 창으로 재구성됐다.

 신창神槍 게오르기우스.
 용퇴치 일화를 가진 성인의 특성을 토대로 신학자들이 구상한 천상의 처형도구. 율리아나는 그것을 들고 엘리자베스에게 똑바로 겨누며 말했다.

“평상시의 당신이라면, 아마 통하지 않았겠죠. 하지만 이제 당신은 단순한 괴물이자 죄인.”

 마성과 인성. 그동안 엘리자베스를 무적으로 만들어 주었던 두 특성이, 한순간 균형이 깨어진 지금만큼은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이 신독神毒을 섞는 순간 그녀는 아마 절명하고 말리라.

“오랜 여정도, 기약 없는 영원의 저주도 여기서 끝입니다.”

 그러나, 율리아나 또한 결코 무사할 수는 없었다. 이미 지척까지 덮쳐오는 혈갑의 물결. 설령 게오르기우스로 엘리자베스를 찌르는 데 성공한다 해도 이미 그때는 율리아나 역시 해체되어 있을 것이다.
 율리아나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걱정 말아요. 저도, 나도 소피의 곁으로 같이 가줄 테니까.”

 이것이 바로 율리아나가 숨기고 있던 또 하나의 목적. 교단의 다른 협력자들을 끌어들이지 않았던 진정한 이유. 그녀는 처음부터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엘리자베스와 함께 죽을 생각이었다.

“아아…….”

 율리아나는 분명 소피를 괴물로 만들고 죽이기까지 한 엘리자베스를 원망하고 있다. 동시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사실 그 일은 그녀의 탓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그 모순은 언제나 율리아나의 마음을 괴롭혀 왔다.

“다시 한 번 그날의 꿈을 꿀 수 있도록…….”

 죽은 뒤 하늘에서 재회하자.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인간이니 괴물이니, 그런 거 관계없이 소피와 함께 셋이서 즐겁게 지내자.

 물론 죄 많은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아니, 애초에 사후세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율리아나는 교단에서 성녀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비탄에 가득 찬 이 세상을 방치하는 절대자의 존재에 심한 회의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생애 마지막 순간에 달콤한 꿈 좀 꾼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해가 될 건 없으리라. 애당초 신앙이란 ‘고작’ 그런 거에 불과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창을 내찔렀다.

 푹. 확실하게 손끝에 전해지는 감촉. 그러나 율리아나의 귀는 그녀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쯧. 더럽게 아프구먼. 도취하고 있는 도중에 미안하지만, 천국행 열차는 운행중단이야.”

 용퇴치의 창을 대신 맞은 것은 엘리자베스가 아닌, 그녀의 자그마한 혈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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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6.03.31 15:39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설마 카린이...! (앙대!!! llorz)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바로 이 순간, 이러한 형태로 츤데레의 미학(?)을 여지 없이 발휘할 줄이야!! ;ㅁ;

    분명 나중에 엘리자베스에게 따끔하게 한소리 듣기는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이 한번의 선택을 통하여 새로운 일상의 계기를 마련하는데 성공하지 않았나 싶어요.

    덧 - 결국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토리의 주인공 보정이 한 없이 묻혀버리고 말았... (/먼산)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6.04.04 14:05 신고 address edit/delete

      아무래도 이번 주인공은 '약함'이 컨셉(?)이다 보니 별다른 활약이 없었던 것 같아요.

      읽어주시는 분들께도 답답하지 않았을지 조금 걱정^^;;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꿈이 작은 자를 경멸하십니까, 라인하르트 님?”

“꿈의 크기는 둘째 치더라도, 약한 놈은, 아니, 약함에 안주하는 놈은 경멸해.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자는 타인이 정당한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 공범이 되지. 그런 놈들을 좋아할 수가 있겠어……?”

-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외전 1권, 이타카, 191면. -










■■■








[내 피는 영원과 같이 (17)]


 현란한, 압도적인 폭력.
 수만 송이의 붉은 꽃다발로 이루어진 거대한 손 또는 날개. 부정형으로 빛나는 엘리자베스의 혈갑血花이 봄바람에 춤추는 꽃잎처럼 자유롭게 적을 유린한다.

「…….」

 한걸음 가볍게 내딛는 엘리자베스. 찰랑이는 흑발. 허공을 수놓은 핏빛 문양들이 어지럽게 흔들린다.

「!」

 사각을 노리고 돌진해오다 피안개가 되어 흩어지는 천사 셋. 흔들리는 추상血甲에 닿은 천사들Powers은 이처럼 무력하게 그 결합을 잃고 해체되었다. 순혈 흡혈귀의 일격도 견디던 대리석의 신체도 은철의 갑옷도 핏빛 물결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

 흩어지고, 또 흩어지는 천사들. 방금 일시적으로 엘리자베스를 제압했을 때처럼 수십의 천사가 한꺼번에 달려들었지만, 이번에는 그저 희생자를 늘릴 뿐이었다.

“굉장해…….”

 회복되기 시작한 목에서 절로 감탄이 흘러나온다.
 중과부적에 침을 뱉는 싸움. 강자가 곧 정의고 선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옳은 것은 내 혈주였다. 힘이 없어 사랑하는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하는 내게는 지나치게 매력적인 모습. 하지만 난 거기에 마냥 눈을 빼앗기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 불안감은, 뭐지……?’

 상황은 순조롭다. 엘리자베스가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이미 천사들은 열 이상이 흩어져 사라졌다. 카린은 일어서려는 노력조차 포기한 채 드러누워 있을 뿐이고, 율리아나 또한 다른 수가 없는지 천사들을 지휘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 이상해요. 아무리 조사해 봐도 율리아나의 곁에는 다른 동료가 없는 것 같더군요. 전투사제단도 무장수녀대도 그 누구도 대동하고 있지 않아요.

 내가 이 무너진 성당으로 오기 전 마녀는 이렇게 말했다. 숙련된 악마퇴치사가 순혈 흡혈귀를 단독으로 상대하는 것은, 베테랑 등산가가 허술한 장비로 고산등반에 도전하는 것만큼 위화감이 드는 일이라고.

‘처음에는 카린의 협력을 얻기 위해서나 검은 경전의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보다시피 선배 혈속은 어린애 팔목 비틀리듯이 간단하게 당해 버렸고, 검은 경전이 형성한 천사들도 엘리자베스의 혈갑 앞에서는 무력하게 허물어지고 있다.

‘이런 사태를 예상 못했다고? 수백 년이나 마물들과 싸워온, 교단의 엘리트가?’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현실에서도 종종 각 분야의 권위 있는 전문가나 잔뼈가 굵은 지도자가 어처구니없는 오판을 내릴 때가 있으니까.

 결국 세상은 누구나가 암중모색이다. 가설 속 절대자라도 되지 않는 이상 이 방대하고 복잡한 변수투성이의 세상을 온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라도 그 사람이 모든 걸 다 알고 올바르게 행동할 것이라 믿는 것은, 미인은 화장실도 안 갈 거라 우기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공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눈동자에, 흔들림이 없어.’

 율리아나의 얼굴은, 계산이 빗나간 사람이라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만큼 침착해 보였다. 이 또한 단지 그녀가 숙련된 악마퇴치사로서 소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지만…….

‘역시, 불안해…….’

 싸움의 여파로 은촛대의 불이 꺼져 어두침침한 성당 안. 하지만 곧 갈라진 천장 틈새로 달빛이 새어 들어와 환하게 내부를 비춘다. 물론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여전히 어둡게 보이겠지만, 흡혈귀의 시력에는 충분한 밝기였다.

‘그러고 보면 흡혈귀는 오히려 낮에 더 강하다고 했지. 달빛에 힘을 얻는 것도 그것이 햇빛이 반사된 것이라 그렇다고. 그럼 낮에는 얼마나 더 괴물처럼 강한…….’

 며칠 전에 엘리자베스가 해준 이야기를 멍하니 반추하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토했다.

“그랬어! 성녀의 목적은 바로 그거였나……!”

 이제야 머릿속의 퍼즐이 하나하나 맞춰진다. 확실한 물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상황에서 율리아나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내 눈에는 명확하게 보였다.

“……젠장.”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까 꿈틀거리는 지렁이처럼 저항할 때 힘을 다 쏟은 모양이다. 그래도, 가지 않으면…….

“어딜 가려는 거야?”

 날 부르는, 친숙하고도 무서운 목소리.

“……!”

 다미다. 어찌된 일인지 다미가, 입술에서 피를 흘리며 내 앞에 서 있다. 저 상처는, 아까 천사에게 뺨을 맞을 때 생긴 걸까. 본래라면 다미가 상처 입었다는 사실에 화를 내야 하겠지만, 지금은 덮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목, 말라…….’

 갈증. 카린이나 천사에게 몇 번이고 당해 심한 상처를 입고 재생한 내 몸은, 겉으로는 멀쩡해도 속은 너덜너덜한 상태다. 소모된 힘을 보충해야 한다는, 즉 피를 취해야 한다는 생존욕구가 근저에서 강하게 치고 올라오는 것이다.

‘안, 돼……. 제발, 떨어져……!’

 목소리를 낼 여유조차 없는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지금의 내게 다미는, 단지 ‘먹잇감’으로만 보일 뿐. 이성理性으로 간신히 그 본능적인 욕구를 억제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보다, 왜 내게…….’

 재차 솟아오르는 의문. 다미는 이제 내가 괴물이라는 걸 알고 있다. 실제로 내 모습에 경악하며 고개도 돌렸었다. 한데 왜 계속해서 내게 손을 내미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걸까. 헛된 희망은, 오히려 고통스러울 뿐인데도.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알아.”

 다미는 갑자기 쭈그리고 앉아 뭔가 화난 표정으로 날 노려보았다.

“자, 잠깐, 떨어…….”

 간신히 목소리를 내어 내가 덮치기 전에 거리를 두라고 말하려는 순간,

“이 바보야!”

“윽!”

 다미는 내 머리를 부여잡고 그대로 자신의 머리를 부딪쳤다.

“너, 내가 자신을 괴물이라 여긴다고 충격 받았지?”

 이마를 맞댄 채 가까이서 느껴지는 다미의 숨결. 하지만 그 달콤함보다도, 피를 원하는 심한 갈증보다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울컥하는 기분이 모든 걸 압도했다.

“그, 그럼 아니야!? 너 실제로 고개도 돌리고 내 쪽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았잖아!”

“그, 그야, 무서우니까 그랬지!”

“거 봐! 날 괴물이라 생각하니까…….”

“친구가, 피범벅이 된 게 무서웠다고!”

 ……아. 다미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든다. 그렇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마음속으로 되뇌었던 것처럼, 다미는 평범한 여자애일 뿐이다. 소꿉친구가 피투성이가 되어 흡혈귀랑 사투를 벌이는 광경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만큼 특이한 정신성의 소유자가 아닌 것이다.
 다미는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전설로만 듣던 그런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는 말을, 난 처음에 믿지 않았어. 하지만, 직접 그런 모습을 보게 되니, 혼란스럽기도 하고, 또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다미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가장 친한 친구인데도……. 네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어 하고 있었는지, 하나도, 모르고 있었어……. 미안해…….”

 아아. 난 얼마나 구제받을 수 없는 인간이란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다미의 우는 얼굴이 참 예쁘다고 느끼고 있다니.

 동시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다미는 역시, 다미였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아무리 평범해 졌어도, 아무리 변했어도, 바뀌지 않은 것 또한 있다. 어릴 적, 다른 애들이 내 이름을 놀리고 내 체구를 무시할 때도 쭉 내 곁에 있어주며 위해주었던 그녀는, 변함없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고마워……. 이런 날, 믿어줘서, 고마워.”

 미안하다는 다미의 말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마 이것밖에 없으리라. 사실 난 다미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내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녀가 내게 미안함을 느낀다면, 내가 돌려줄 말은 고맙다는 말 외에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서로의 감정이 통했다는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미는 눈물을 닦으며 폭탄선언을 했다.

“있잖아, 날 물어. 내 피를 빨아.”

“……응?”

 다미는 곤혹스러워하는 날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 이대로 있으면 위험한 거 아니야? 아까 저 율리아나라는 여자도 네가 오기 전까지 그런 얘기를 신나게 떠들던데. 흡혈귀는 사람의 피에서 힘을 얻는다고 말이야. 그럼 내 피를 마시면 너도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는 뜻이잖아.”

 ……정정한다. 아직 어린 시절의 기사님은 다미의 속에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난 역경이 닥쳐 봐야 그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다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 왜냐하면 그건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 대다수의 약자들을 무시하는 말이니까 – 어려움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 정신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순수하게 기쁘다.

“괜찮, 겠어……?”

 주춤거리는 내 물음에 다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응. 설마 죽는다거나 나도 같이 흡혈귀가 된다거나 하면, 좀 곤란하겠지만 말이야.”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의하면, 우리의 흡혈은 일종의 의식적인 행위라 필요로 하는 양 자체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상대를 흡혈귀로 만드는 것 또한 혈주가 되는 쪽에게 존재형식을 변모시킬 만한 상당한 힘이 있어야 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줄곧 약하다는 소리만 듣는 내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그럼…….”

 다미와 난 서로 수줍게, 하지만 거부감 없이 몸을 겹쳤다.

“음……!”

 다미의 살갗에 송곳니를 박아 넣어 피를 취한 순간, 지금까지 날 괴롭히던 갈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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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죽으면 육신이 없어지고 마음도 없어진다.
소리는 육신의 일이고 마음의 일이다.
살아서, 들릴 때만이 소리이다.

- 김훈, 현의 노래, 생각의 나무, 54면. -










■■■








[내 피는 영원과 같이 (16)]


 단아하게 빛나는 새하얀 대리석의 신체. 그 무정한 아름다움을 감싸고 있는 은철銀鐵의 갑주. 등 뒤에서 은은히 어둠을 밝히고 있는 두 쌍의 빛의 날개.

 율리아나의 검은 경전이 불러낸 수십의 천사들은, 하나 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왼손에는 구불거리는 흉측한 검을 든 채 전방위로 엘리자베스를 포위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십자죄인이 자랑하는 단죄자能天使. 악마를 처단하는 강대한 권능Powers에 대한 신학자들의 구상을, 제 능력狂氣으로 현실에 실체화시킨 것입니다. 자기 혈속을 구하러 온 이상,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들을 상대로는 쉽게 벗어날 수 없을 테죠.”

 율리아나는 마치 선전포고라도 하듯이 당당하게 말했으나, 카린은 일그러진 얼굴로 외쳤다.

“약속이, 틀리잖아……! 내가 죽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말에, 인질극 같은 유치한 짓거리에, 협력했는데……. 겨우, 겨우, 이딴 걸로, 내 혈주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그러나 율리아나는 카린을 무시하며 천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세요. 가서, 저 악마를 토벌하십시오.”

「Deus vult.」

 성녀의 지시에 천사들은 기계음에 가까운 음색을 발하며 엘리자베스에게 달려들었다.
 크게 빠르지는 않지만, 마치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질서정연한 연계. 찌르고 베는, 점과 선의 연격이 어떤 빈틈도 주지 않은 채 사방에서 밀려들어온다.

 그것을, 엘리자베스는 간단히 막아냈다.
 챙챙챙챙챙. 단지 소맷자락을 한 번 크게 휘둘렀을 뿐인데도 복수의 파열음을 울리며 멀리 밀려나는 천사들. 마치 가을바람에 낙엽이 날리는 것 같이 처참한 모습이다.

“……!”

 그러나 언뜻 힘의 우열이 확실하게 정해진 듯 보이는 이 상황에서, 미간을 찌푸린 것은 성녀가 아닌 흡혈귀였다.

“공격이, 통했어……?”

 얼빠진 목소리로 내 경악을 대신해주는 카린.
 방금 전, 엘리자베스는 성당의 벽과 기둥을 부수고 산 저편에까지 닿은 카린의 참격에도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엘리자베스의 손등과 볼에서는 희미하게나마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

 엘리자베스는 말없이 가장 가까이 있는 천사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으!”

 쿵. 무시무시한 압력.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리게 될 만큼 강한 바람이 휘몰아치며 성당의 한쪽 벽면이 포탄이라도 맞은 것 마냥 크게 구멍이 뚫렸다.

 카린을 손날로 쳐내 반으로 갈랐을 때에 비하면 몇 배는 더 힘이 담겼을 엄청난 일격.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니 웬만한 흡혈귀조차 저 공격 앞에서는 제대로 된 형체 하나 보존하기 힘들 것이다.

「————」

 그러나, 이번에도 천사는 무사했다. 꼴사납게 땅바닥을 뒹굴고 있긴 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먼지 속에서 곧장 몸을 일으킨 것이다.
 또각또각. 성녀는 제단 아래로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소용없습니다. 이들은 악마를 벌하는 신의 힘. 단순한 물리적인 공격에는 어떤 상처도 입지 않지요. 또 반대로 이스테링의 속성을 빌어 인간 아닌 ‘괴물’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도 있고요. 그렇군요. 가령 당신 같은 순혈의 흡혈귀라면 생채기 정도에 끝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녀가 손짓을 하자 천사들 중 하나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무지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카린에게 당한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아 도망칠 수가 없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보다시피 이런 흡혈귀 나부랭이에겐 아주 잘 통하지요.”

 성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사는, 구불거리는 칼을 내 등에 찔러 넣었다.

“————!”

 난, 비명을 지른 걸까.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하는, 그럼에도 흡혈귀 특유의 재생능력 탓인지 완전히 하얗게 변할 수 없는 고통에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 짓을, 천사는 여러 번 반복했다. 쉼 없이 끊어졌다 이어지는 고통의 파랑.

“그만해!”

 노성을 지르며 날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엘리자베스. 하지만 재차 하얀 세상이 시야에 가득 찼다 사라졌을 때, 내 혈주의 모습은 무더기로 달려드는 천사들에게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그, 그만해요!”

 그때, 머릿속마저 찢어발기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놓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미약한 소리였지만, 그건 분명 다미의 음색이었다.

“그만하라고요!”

 언젠가의 나처럼 덜덜 떠는 다리를 간신히 일으켜 내 쪽으로 달려오는 다미. 그러고 보면 그녀는 아까도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왜. 어째서. 괴물이 된 날 보고 겁에 질려 고개를 돌리고 있던 게 아니었나. 근데도 왜 아직 날…….

“꺄악!”

 이제 와서 부질없는 의문에 신경 쓰는 날 벌하기라도 하듯 왼손으로 날 찌르고 있던 천사가 빈 오른손으로 다미의 뺨을 때려 쓰러뜨렸다.

“이, 개자식이……!”

 천사에게 맞고 쓰러지는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은 순간, 세상이 붉게 변했다.

「!」

 어디서 그런 힘이 솟은 걸까. 난 반쯤 몸을 일으켜 이번에야말로 허리를 끊어놓겠다는 듯이 내려치는 천사의 칼날을, 손으로 잡았다.

“윽!”

 치이이이익. 칼날을 잡은 손에서 푸른 불길이 일렁이며 피가 땅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증발한다.
 마魔를 멸하는 성스러운 불꽃. 어쩐지 그런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날 고통스럽게 하던 것은 단순히 칼날의 날카로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함부로, 다미한테, 손대지 마!”

 내 분노는, 진짜였다. 설령 세상에 진실로 절대자가 실존하고, 그가 궁극적인 선이며, 난 그의 기준에 따라 악으로 분류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얼굴에 한 방 먹이고 싶은 심정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신념에 등을 돌리고 불의를 용납하면서까지 힘을 원하는 이유가 있듯이, 약하다는 건 결국, 죄였다.

“……, ……, ……!”

 내 손을 가르고 목을 찢고 들어오는 천사의 칼날. 소리는커녕 흘러넘치는 피조차 제대로 토할 수가 없다.

“……!!!”

 치이이이익. 그대로 목구멍을 태우는 정화의 불꽃. 등을 찔릴 때의 수배는 더 되는 고통이 엄습했지만, 역시나 어중간하게 강화된 내 신체는 의식의 끈이 끊어지도록 놔두지 않았다.

“과연 순혈의 혈속. 그만한 상처를 입어도 절대 소멸은 하지 않는군요. 하지만 상처는, 꼭 몸에만 입힐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성녀가 눈짓을 하자 천사는 내 목에서 칼을 뽑고 다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대체 뭘 하려는 걸까. 목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아 아무것도 묻지 못하는 날 비웃듯이 내려다보며 성녀가 입을 열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상처는, 평생을 가도 지워지지 않더군요. 마음속에서.”

“……!”

 성녀의 지시에 다미를 향해 칼을 내리치려 하는 하얀 대리석의 천사. 그러나 말도 힘도 잃은 나는, 무력하게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이대로라면, 그녀가 영영 내 곁을 떠나게 될지도 모르는데!
 내가 피를 토하며 다미를 향해 땅을 기고 있을 때,

「그만들 좀, 해라.」

 소름 끼칠 만큼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엘리자베스를 짓누르고 있던 천사들이 자갈처럼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날 미워하는 것도, 상관없다.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지. 네놈들이 멋대로 삶에 지치고 절망하는 건,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허공에 수를 놓듯, 엘리자베스의 뒤에 핏자국이 번져 나간다. 손자국 같기도 한편으로는 꽃잎처럼도 보이는 섬뜩하고도 추상적인 문양들.

「살겠다는 이들의, 살고자 하는 의지까지는 꺾지 마라. 자신들이 움직이기 싫다고, 다른 사람의 입까지 막으려 드는 얼간이들처럼은, 굴지 말란 말이다!」

 엘리자베스의 색이, 점점 짙어진다. 눈동자의 핏빛에 동조라도 하듯 금색에서 적색으로, 이윽고 검게 변색되는 머리카락.

“후후후……하하하하!”

 철퍼덕. 그런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바라보며, 카린은 자신의 피 웅덩이에 드러누워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야, 혈주놈이 싸울 마음을 먹었군! 교단의 개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론 잘 됐어. 이젠 나도, 죽을 수 있을 테니까.”

“죽을 수, 있다고……?”

 마찬가지로 내 중얼거림이 들린 걸까. 저편에 있는 카린이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애송아! 어차피 마지막 광경이 될 테니 잘 봐 둬라. 저게 바로 우리 주인의 혈갑인, 혈화血花다.”

 카린이 말을 마치는 순간 엘리자베스를 둘러싸고 있던 천사 중 셋이 피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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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미국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취임 연설에서 수심 가득한 대공황 시대의 미국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했다. “제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뿐입니다. ……그것은 후퇴를 전진으로 바꾸는 노력을 마비시킵니다.”

 그런데 루스벨트의 이 말은 옳은 것일까? 누군가를 설득하려고 할 때 두려움은 그의 말처럼 상대를 마비시키는가? 아니면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는가?

 대다수 연구 결과들은, 두려움을 일으키는 커뮤니케이션은 보통 메시지 수신자로 하여금 위협을 줄이는 방안을 찾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중요한 예외가 있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메시지가 위험을 묘사하기만 하고 그 위험을 줄일 수 있는 명확하고 구체적이며 효과적인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메시지 수신자는 메시지를 아예 ‘차단’하거나 본인에게 적용하기를 거부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의지는 사실상 마비되어 버려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 로버트 치알디니 外, 설득의 심리학 2권, 21세기북스, 58면 이하. -










■■■








[내 피는 영원과 같이 (15)]


 별의 총애를 받는 딸들.
 어떤 사람들은 순혈의 흡혈귀들을 이렇게 일컫는다고 한다. 일시적으로 공간 속에 녹아들어 순식간에 다른 장소로 이동할 수 있는 그녀들의 능력은, ‘세계’가 허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재주이기 때문이다.

- 이학사들은 의식구조체와 관념구조체 간의 유사성이 우리가 가진 능력의 원인일 거라 짐작하고 있지만, 정확한 원리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 아무튼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본 300년 전의 어떤 연금술사는 이렇게 말하더군. ‘마치 밤하늘을 걷는 것 같다’고.

 언제나처럼 그리움이 섞여 있는 엘리자베스의 어조에 난 장난스럽게 물었다.

- 뭔가 어설프게 낭만적인 표현이네. 혹시, 예전 애인이 한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 그 연금기법의 이학사는 나 말고 다른 녀석의 연인이었다. 음, 엄밀히 말하자면 그 둘의 사이는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에 더 가까웠지만 말이야.

 그렇군. 흡혈귀에게도 일단 연애감정은 있는 건가. 당시는 그 정도 감상밖에 떠오르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하얀 손을 뻗으며 나타나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에는, 확실히 옛 연금술사의 표현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게 될 만큼 눈을 홀리는 마성이 있었다.

“…….”

 카린 또한 엘리자베스의 등장에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넋을 잃고 있었던 이유는 나와는 전혀 달랐던 모양이다.

“빌어먹을, 혈주놈……. 드디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군! 나탈리아……아니, 지금은 엘리자베스였던가? 뭐 이름 같은 건 이제 와서 아무래도 상관없어. 자, 어서 계약을 이행해! 약속을 지켜라!”

 카린은 피로 형성된 낫을 엘리자베스에게 겨누며 크게 소리쳤다.

“아직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군.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줄 수는 없나?”

 언뜻 당당하면서도 어딘가 잔뜩 움츠러든 기묘한 어조. 엘리자베스는 슬픈 빛이 감도는 음색으로 애원하듯 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피를 토하듯 절절한 외침이었다.

“내 결심은 변하지 않아! 헛소리 말고 당장 날 죽여! 내 삶을 가져가란 말이다!”

“죽이라고……? 우리를, 어떻게……?”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카린은 귀기 서린 얼굴로 날 노려보며 말했다.

“하! 꼴을 보니 혈주놈이 모든 사실을 밝히지 않은 모양이군. 아마 혈주가 죽지 않는 한 혈속도 죽지 않는다는, 그런 말밖에 듣지 못했겠지? 응?”

 내가 침묵으로 물음을 긍정하자 카린은 그럴 줄 알았다면 입가를 비틀었다.

“교활한 혈주놈! 이젠 제 혈속에게조차 제대로 알리지 않다니! 잘 들어라, 애송아. 우리가 죽을 수 있는 조건에는, 혈주를 죽이는 것보다 훨씬 간단한 방법이 하나 더 있다. 한 번 생각해 봐. 우리에게 생명永遠을 준 사람이 누구지?”

 이만큼 친절하게 단서를 던져준다면 싫어도 눈치 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마, 엘리자베스는, 혈주는, 우리에게서 다시 영원을 빼앗을 수도 있단 말이야……?”

 떨리는 내 목소리에 카린은 흉흉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바로 저 여자血主가 네놈에게 숨겼던 진실이다. 그리고 내가 놈의 혈속이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맺은 계약이기도 하고.”

 이제야 난 엘리자베스의 이야기에 내재한 모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그건 모순조차도 아니었다. 카린의 말마따나 그녀가 내게 모든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이다. 엘리자베스가 건재함에도 카린과 나 외에는 다른 혈속들이 없는 이유. 그건 단지 엘리자베스 본인의 손에 진정한 안식을 맞이했을 따름인 것이다.

“이해했나 보군. 짐작한 대로다. 나처럼 삶에 지친 혈속들이나 아니면 폭주해 진짜 괴물이 된 녀석들은, 전부 저 여자血主의 손에 죽었지. 한데…….”

 휑. 카린이 낫을 다시 한 번 세차게 휘두르자 주변의 잡동사니가 전부 깨끗하게 날아갔다. 카린은 그 기세에 자신의 목소리를 실었다.

“한데, 왜, 왜 나만 죽이지 않는 거냐! 내가 마지막 남은 혈속이라서? 아니겠지. 보다시피 당신은 저 애송이 같은 새로운 혈속을 또 만들었으니까. 그럼 내게 더 이상 가치는 없잖아! 가장 소중한 첫 번째 혈속Octavia도 죽인 당신이 왜 나 같은 걸 끝까지 살려두는 거지?”

“…….”

“난, 지쳤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내 소중한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에 썩어 없어졌고, 내가 믿었던 이상理想도 무너진 지 오래야. 죽은 듯이 잠만 자는 것도 이젠 질렸어. 대체 이런 삶에 무슨 의미가 있지? 이건, 가축보다도 못한 삶이야. 가축도 나보단 의미 있게 살아가고 있다고. 당신은 몰라도, 사람은 그딴 무의미를 견딜 수 없단 말이다!”

“…….”

“영원을 받아들일 때 이런 걸 예상하지 못했냐는 힐난은 듣지 않겠어. 난 충분히 예상했고, 그래서 당신과 계약을 맺었지. 언젠가 내가 삶에 지쳐 죽고 싶어지면 당신이 직접 내 목숨을 거두어 주겠다고. 난 그걸 믿고 당신의 피를 받아들인 거잖아!”

“…….”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대꾸 없이 침묵을 고수했다.
 마침내 카린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난, 삶의 노예가 아니야——!”

 쿵. 굉음이 귀에 닿았을 때 카린의 몸은 이미 엘리자베스의 사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흡혈귀로서 강화된 내 동체시력으로도 제대로 포착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 그런 카린의 낫을 엘리자베스는 보지도 않고 한 손으로 막아냈다.

“날 죽일 생각이 없다면, 내 손에 죽어! 내가 죽을 수 있도록, 내게 죽으란 말이다!”

 절규에 섞여 이어지는 매서운 공격. 곡선을 그리는 낫의 궤적이 너무나도 빠르게 중첩돼 마치 허공에 구체가 출현한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윽!”

 그런 빠르기에 비례하듯 하나하나에 확실하게 힘이 들어가 있는 일격. 거기서 발생하는 충격파만으로도 옆에 서 있던 나는 꼴사납게 저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날 죽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내게 죽지도 않고……. 당신은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건재했다. 충격파만으로도 사람이 날아가고 바닥이 움푹 파이는 수십의 공격을 단지 맨손으로만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코트자락은 너덜너덜해졌지만 드러난 살갗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대체, 당신은…….”

 낫을 높게 치켜드는 카린. 피로 형성된 날이 살아 있는 것처럼 기괴하게 꿈틀거리며 거대하게 늘어나 검붉은 빛을 발한다.

“뭘 하고 싶은 거냐고!”

 모든 것을 가르는 횡일자의 붉은 궤적. 엘리자베스를 지나친 카린의 일격은 성당의 굵은 기둥을 반으로 가르고도 힘이 남아 벽을 뚫고 멀리까지 뻗쳐 나갔다.
 쿵쿵. 잠시 후 들려오는 작은 진동. 부서진 벽의 구멍을 통해 바깥의 어둠을 응시한 난 진부하지만 경악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말도, 안 돼…….”

 저편 산맥의 나무 몇 그루가 작은 먼지를 풍기며 넘어지는 광경.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흡혈귀로서 강화된 내 시력에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포착됐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이만, 만족했나.”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엘리자베스는, 카린의 그 일격을 받고도 멀쩡했다. 흡혈귀 특유의 불사성으로 재생을 한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상처 하나 입지 않은 것이다.

“빌어먹을! 웃기지 마——!”

 하지만 카린은 재차 검붉은 낫을 내세우며 돌진했고 엘리자베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차례 손날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카린은 자신의 혈갑과 함께 반으로 갈라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커, 흑……!”

 피를 토하며 괴롭게 몸부림치는 카린. 재생은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아직은 상처 쪽이 더 크다.
 난 흠집조차 낼 수 없었던 상대를 간단하게 무력화시킨 엘리자베스는, 그러나 그 압도적인 강함에도 불구하고 애원하듯이 입을 열었다.

“부탁한다. 조금만, 조금만 더, 살아주지 않겠나? 살다 보면 분명, 좋은 일도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웃기지, 말라고……! 좋은 일 따위, 없으니까, 죽으려는 거 아니냐……. 애당초, 그럴 거면……. 약속대로, 죽여주지 않을 거라면……. 왜, 그녀를, 왜, 옥타비아는, 죽인 거냐……. 하다못해 그녀라도 곁에 있어 줬다면, 난……! 왜, 그녀는 죽이고, 나만, 나만 남긴 거냐고……. 대답해!”

 카린은 핏속을 허우적거리며 핏빛 섞인 울음을 토했다.

“…….”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변함없이 대답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눈동자가 진심을 전해줄 수 있다고 믿듯이 슬프게 몸부림치는 혈속Carine을 바라보기만 할뿐. 하지만 당연히 그건 착각이다. 눈빛만으로는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다. 그저 오해만을 증폭시킬 뿐.

“빌어먹을, 혈주놈……!”

 카린이 분노에 다시 몸을 일으키려 할 때, 제단 근처에 서 있던 성녀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제가 대신 대답해 드리죠. 그녀는, 저 순혈의 흡혈귀는, 그저 지쳤을 뿐입니다.”

“지쳤, 다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카린의 물음에 율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과 마찬가지에요. 삶에 지쳐, 이제는 누군가를 죽일 기력조차 없는 겁니다. 슬픔을, 더는 감당할 자신이 없는 거죠.”

“슬, 픔……?”

 카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으나, 율리아나는 무시한 채 엘리자베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의 긴 여정도 여기서 끝입니다. 제가, 막을 내려드리죠.”

“그게 무슨…….”

 뜻이냐고, 엘리자베스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성녀는 검은 경전을 활짝 펴들었다.

“……!”

 찬란하게 금빛을 발하며 허공을 춤추는 수십 장, 아니 수백 장의 종잇조각. 그 눈부신 휘광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녀 자신, 혹은 경전에서 직접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든 올바름은 내게 있다≒Veritas, non auctoritas facit legem.」

 서로 한데 합쳐지며 더욱 환하게 광채를 발하는 황금색 종잇장들. 그 빛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폐허가 된 성당에 출현한 것은 47명의 천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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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6.03.25 01:35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그야말로 건곤일척의 승부수...! 아아, 도입부의 그 이야기는 바로 이번화의 전개를 위한 안배였던 것이로군요. 엘리자베스와 율리아나 둘 다 참 안됬어요... ;ㅁ;

    실로 아련하고도 가혹한 지난날의 과오와, 애써 외면해왔던 마음 속 벽장으로부터 꺼내 들이밀어진 진실의 독촉장 바로 앞에서 그녀들은 과연 어떠한 것을 얻고, 또한 어떠한 것을 잃게 될까요.

    한편으로는 정말 오랜만에 리아의 옛 연인 이야기를 듣게 되어 왠지 모를 그리움이 들기도 했답니다.


    덧 - 이 필살기(?)마저 빗나가면, 성녀는 정말로 빈털털이 신세가아아아!!! llorz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6.03.25 18:12 신고 address edit/delete

      앗, 흘러간 이야기의 등장인물도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정말 그때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처음 소설 사이트에 올렸을 때는 2007년, 블로그에 다시 올리기 시작한 시점으로 따져도 2013년이니 벌써 3년째가 다 되어 가네요;;; 으으, 시간이여ㅠ_ㅠ


      말씀처럼 위 이야기도 서서히 종반부에 접어들고 있네요. 단편(...)이라고 적었지만, 사실상 중편 분량이 넘어가고 있어 굉장히 찔리기도^^;; 아무튼 등장인물들의 궤적이 어그러지지 않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잘 마무리 짓고 싶은 마음이에요! >.<


      (운을 조작한 영향으로 통장 잔고가 날아가는 건 베르나르도 신부의 고유능력! <- )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그 사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지금의 후회를 조금은 줄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결국 〈그때〉의 인간처럼 무능한 인간은 없다.

-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예담, 217면. -










■■■








[내 피는 영원과 같이 (14)]


 피에 일그러져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녀怪物를 바라보며 성녀는 소리 죽여 그리운 이름을 불렀다.

“소피…….”

 아직 율리아나가 싱그러운 갈색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을 무렵. 세상의 흐름에서 멀찌감치 벗어난 그 작은 마을은, 그녀들의 전부이자 낙원이었다.

“아아, 소피…….”

 첫눈과도 같은 아이. 율리아나는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그런 인상을 받았다. 그 무엇보다 깨끗하지만 자칫 금방 더러워질 것만 같은 위태로운 순수함. 세상 모든 일을 소위 시적인 감수성으로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그녀의 곁에서, 율리아나는 이 순결이 영원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영원 따윈 없었지.”

 울음을 씹어 삼키듯 중얼거린 율리아나의 입술에 작은 핏방울이 맺힌다.

“내가, 모든 걸 망쳤어.”

 순혈의 흡혈귀 엘리자베스. 당시 율리아나는 그녀가 전설로만 듣던 무시무시한 괴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이렇게나 아름답고 품위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한층 즐거워질 거라는 순진한 믿음을 가졌을 뿐이다.

 그래서, 율리아나는 엘리자베스가 자신들의 곁에 있는 것을 환영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소피의 순수함을 지켜줄 거라는 공상적인 기대를 품고서.

“왜, 난 그때 괴물에게 도움을 청한 걸까.”

 끝은 갑자기 찾아왔다.
 사고. 발을 헛디뎌 머리를 세게 부딪친 소피는 살아날 가망성이 거의 없었다. 이런 시골 마을에 제대로 된 의사가 있을 리 만무했으며, 설령 있었다고 해도 당대의 의학 수준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 알겠다. 내 피를 주마.

 그러면 살 수 있다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율리아나는 피투성이가 된 소피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어떻게든 살 수만 있으면 된다고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인간이 아닌, 괴물로서 되살아나는 것이라는 의미도 모르는 채.

- 시간이, 새하얘.

 흡혈귀로서 재구성된 소피는, 새로운 신체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몸보다는 마음의 문제. 본래부터 민감한 감수성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괴물의 감각으로 새롭게 몰려들어오는 이질적인 세상을 견딜 수가 없었다.

- 아아아아아아!

 미쳐버린 그녀. 괴물의 피에 오염당한 소녀는, 끝내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마을 전체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 아, 아아……!

 살육의 현장. 눈처럼 순수했던 소녀는 이제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괴물에 불과하다. 그녀들을 낳고 그녀들의 전부였던 작은 세상은, 이로써 완벽하게 종언을 고했다.

 이 일로 율리아나는 광기를 각성해 교단에 들어가 오랜 젊음을 손에 넣고 성녀라 불리는 위치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이 행운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오직…….

“시작하자. 끝의 시작을.”

 율리아나는 익숙한 기척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손에는 금빛 문자가 빼곡히 수놓아져 있는 검은 경전이 들려 있었다.






 붉다.
 모든 것이 붉고, 뜨겁다.

“아아, 아가가아아아……!”

 이건,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일까. 의미를 알 수 없는 괴성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튀어나온다. 그때마다 심한 격통이 전신을 달리지만 이상하게도 기력은 넘쳐난다.

“뭐야, 혈갑이잖아. 두를 줄 알았던 거냐?”

 내 선배격에 해당하는 카린의 거슬리는 목소리. 혈갑? 혈갑이 뭐였더라. 아, 지금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이 걸리적거리는 핏덩이들을 말하는 건가. 거칠게 파도치는 의식의 물결 속에서 엘리자베스의 말이 떠오른다.

- 혈갑血甲이란 그 이름처럼 우리 자신의 피로 이루어진 갑옷 같은 거다. 하지만 보통은 무기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지. 또 드물긴 하지만 몇몇 개체는 자신의 혈갑을 통해 이학사들처럼 무언가 신기한 재주를 부릴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런 건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는 내 질문에, 엘리자베스는 검지를 입술로 가져갔다.

- 음, 글쎄……. 혈갑은 우리 자신의 성질이나 정신성에 크게 영향을 받는 모양이라 딱히 정해진 방법 같은 건 없어. 그렇군. 굳이 비유하자면 팔다리를 움직이는 방법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왜 팔다리가 움직이는가에 대해선 생물학적이나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각 개인의 감각을 설명하기란 매우 어렵겠지. 결국 스스로 알아내는 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엘리자베스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 혈갑은 될 수 있으면 볼 일이 없는 게 나아. 이학사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건 우리의 생존본능이나 공격성이 표면화된 것이라 하더군. 생명의 상징이자 우리 힘의 원천인 피를 통해서 말이야. 즉, 혈갑을 두를 일이 생긴다는 건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란 뜻이지.

 아마 엘리자베스의 말은 옳을 것이다. 생명의 위기와 상대에 대한 적개심. 지금의 난 두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아아아아!”

 치직. 마치 수신 상태가 나쁜 영상 마냥 사고가 잠시 끊겼다고 느낀 순간, 난 이미 괴성을 지르며 카린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엄청난 고양감. 그리고 속도. 힘. 막 흡혈귀가 되었을 때도 내 신체능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해 있었지만, 혈갑을 두른 지금의 나에 비하면 그건 거북이걸음 같은 것이었다. 난 평상시의 수십 배는 능가할 속도로 상대를 꿰뚫기 위해 길게 늘어난 핏빛 가시를 내질렀다.
 그러나 카린의 태도는 여전히 태연했다.

“신체의 각 중요한 부분을 감싸는 동시에 강화하는 형태라. 연금술사 나부랭이들이 하는 짓에 꼭 닮았군. 양팔에 돋은 가시는 무기인 셈인가? 공방을 둘 다 중시한 신중함이 돋보인다고 칭찬해주고 싶지만…….”

“!?”

 카린은 맨손으로 가시를 잡은 뒤 발로 내 몸을 걷어차며 크게 외쳤다.

“달리 말하면 그저 어중간할 뿐이다, 얼간아!”

“욱……!”

 차가 와서 부딪친 충격이 이러할까. 고통 이전에 숨이 턱 막히며 정신이 멀어져간다.

“아직도 자신이 인간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나? 우린 괴물이다! 탄환을 보고도 피할 수 있는 신체능력과 아예 그 총에 맞아도 멀쩡한 신체강도를 지니고 있지. 어설프게 몸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카린은 땅바닥에 뒹구는 날 내려다보며 길게 자란 송곳니에 자신의 손등을 그었다.
 촤악. 선명한 곡선을 그리며 허공에 솟구치는 피. 핏빛 궤적이 공중에서 그대로 굳으며 일정한 형태를 만들어간다.

 기괴하게 뒤틀린 거대한 낫. 저게 바로 카린의 혈갑이리라. 그리고 이 무너진 성당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내 몸을 가른 것도 분명 저것이라고, 난 직감적으로 확신했다.
 카린은 낫을 내쪽으로 겨누며 입을 열었다.

“다시 덤벼 봐라, 애송아. 어중간한 게 왜 안 좋은지 직접 가르쳐 주마.”

“으……!”

 카린의 도발에 난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일어섰다.
 한 대 얻어맞은 덕분에 머리에서 혈기라도 빠진 걸까. 아까보다 훨씬 머릿속이 진정된 기분이다.

‘저런 건, 못 이겨.’

 상대는 나보다 최소 200년 이상을 묵은 흡혈귀 선배. 방금 맨몸으로도 내 공격을 제압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몇 번이고 정면에서 부딪쳐 봤자 승산은 없다. 그보다는 ‘왜’ 엘리자베스의 혈속인 그녀가 성녀에게 협력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 다미를 구하기 위해서도…….

“……!”

 무심코 성녀의 곁에 있는 다미에게 눈을 돌린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다미는, 아예 눈을 돌린 채 이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있었다.

“아, 아…….”

 이해는 한다. 몸이 찢어지는 엄청난 상처에도 금방 되살아나고 기괴한 혈갑을 걸치고 있는 내가 그녀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그런 내가 이성을 잃고 있는 대로 살의를 드러내며 누군가를 죽이려 든 것이 그녀에게 어떻게 다가왔을지. 끔찍하겠지. 괴물 같겠지. 눈을, 돌리고 싶겠지. 아마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이해는 한다. 머리로는. 하지만 마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

 다시금 멀어지는 정신. 제어를 잃은 내 몸은 절규하듯이 소리치며 바닥이 움푹 파일 만큼 강하게 카린을 향해 도약했다.

“역시, 쭉정인가.”

 날렵하게 검붉은 낫을 휘두르는 카린. 화가 날 만큼 우아하고 아름다운 동작에 눈을 뺏길 새도 없이, 그 핏빛 궤적에 스치는 순간 내 혈갑은 무력하게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도톨아!”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 아아.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도, 설령 귀가 먼다 해도,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있다. 우스꽝스러운 그 이름이 이렇게 반갑게 들릴 줄은. 그렇다. 다미는, 아직 날 이름으로 불러주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다.

“…….”

 척. 튕겨나가 넘어지기 직전에 간신히 중심을 잡고 바로 섰지만, 다리에는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한계. 바로 앞에는 카린. 그 너머에는 율리아나. 한 명만으로도 절망적인 벽을 어떻게 넘어서야 할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래도, 다미가 아직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정말, 근성만큼은 있군. 좋아. 아프지 않게 죽여주마. ……어차피 혈주놈이 있는 한 곧 다시 살아나겠지만.”

 카린은 사형집행인처럼 낫을 들고 천천히 날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니, ‘처럼’이 아니라 그냥 사형집행인 맞나.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게 어떤 감각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날 밤’의 재현이라면, 끔찍하다.
 하지만 재현은 그날 밤의 일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마녀가 전해달라는군. 미처 인질이 잡힐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이야.”

 일렁이는 공간 속에서 튀어나오는 새하얀 손. 그리고 펄럭이는 화려한 코트자락. 엘리자베스는 또 다시 날 구하기 위해 적대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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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전쟁은 예술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기성세대는 후방에서 애국적 수사(修辭)를 늘어놓으면 그만이었지만, 젊은 세대는 직접 군인이 되어 공포와 충격을 몸으로 겪어야 했다. 프란츠 마르크, 안토니오 산텔리아, 아폴리네르 등 수많은 시인과 예술가들이 그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실제로 체험한 전쟁의 참상과 국가에서 외치는 구호 사이에는 당연히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이 괴리 속에서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뻔뻔한 허위와 기만을 보았다. 기성의 모든 것을 불신하게 된 젊은이들은 당연히 예술에서도 모든 형식적 권위, 모든 전통적 양식을 증오하게 되었다. (중략)

 후에 ‘다다이스트’라고 불린 이들은 전쟁을 혐오하고, 전쟁을 부추긴 민족주의와 식민주의, 부르주아적 이해관계를 증오했다. 그들에게 국가는 “모리배 모피상이나 피혁상의 카르텔에 불과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독일인들과 같이 배낭에 괴테의 책을 넣고 행진하다 러시아인이나 프랑스인을 보면 총검으로 찔러 죽이는 문화적 연합체”에 불과했다. 또한 그들에게 그런 “국가의 이념을 위해 총알에 관통되는 것도 불사하는 용기”란 무의미한 것이었다.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 휴머니스트, 179면. -










■■■








[내 피는 영원과 같이 (13)]


 난 영웅이 될 수 없다.
 그런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힘이 세든 머리가 좋든 성격이 대범하든 외모가 아름답든. 영웅의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남이 추앙할 수 있을 만한 ‘특별함’을 하나 이상은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게는 그것이 없다. 난 지극히 평범하다. 아니, 체력적인 부분에서는 보통 이하에 속할 만큼 약하기도 하다. ‘모든 강자가 영웅은 아니지만 모든 영웅은 강자’라는 공식에 따르자면, 나는 결코 그에 속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노력하면 사랑하는 사람 한 명은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특히 흡혈귀의 혈속이 되어 비약적으로 신체능력이 상승한 지금이라면 더더욱. 인질로 사로잡힌 다미를 데리고 탈출하는 일쯤은 내게도 가능할 거라, 근거 없는 희망을 은연중 또 품고 말았다.
 결과는, 역시 비참했다.

“……!?”

 가로로 거의 반 정도 잘린 몸에서 피가 하염없이 쏟아져 나온다. 따뜻하면서도 차갑고 매끄러우면서도 질척거리는 기분 나쁜 감각. 간신히 한쪽 끝만 붙어 있는 처참한 몰골로 난 내 핏속을 허우적거렸다.

“뭐야, 혈갑도 형성할 줄 모르냐? 아니, 못하는 건가. 나 참. 혈주 자식이 질리지도 않고 또 노예를 만들었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완전 빗나갔군. 이렇게까지 약골이었을 줄이야.”

“……?”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힘겹게 시선을 올리자 그곳에는 두터운 밤색 코트로 몸을 감싼 한 여성이 서 있었다. 불꽃처럼 새빨갛게 이글거리는 거친 머리카락과 오로지 적의만을 담고 있는 듯한 붉은 눈동자.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을 무심코 입에 담았다.

“카, 린……?”

“뭐야, 이미 혈주 놈한테 내 이야길 들은 거냐? 그래, 내가 네 선배님이시다. 본래 노예 1호는 따로 있었지만, 지금은 내가 1호라고 해야겠지.”

 붉은 머리카락의 여성, 카린은 엘리자베스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 카린이 어떤 사람이냐고? 그렇군. ‘여걸’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아이였다. 거칠고 적극적인 성격에 여러 방면으로 재주가 뛰어났지만, 시대적 한계에 부딪쳐 여성의 몸으로는 활약할 수 없는 자신을 분하게 여겼지. 또 가문이 정해준 원치 않는 결혼을 피하고 싶어도 했고. 정략결혼 자체를 싫어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녀는 같은 여자를 좋아했거든. 그런 면에서도 카린은 옥타비아와 꼭 닮았었지.

 지난밤,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엘리자베스는 크게 개의치 않고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카린도 첫 번째 혈속이었다는 옥타비아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지위에 따른 여러 가지 쇠사슬에 얽힌 자신의 상황에 답답해하며 어떻게든 거기서 벗어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중 우연히 엘리자베스와 알게 된 것을 계기로 자진해서 혈속이 되었다는 것이다.

- 그녀들은 ‘흡혈귀가 된다 해도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원치 않은 구속을 피할 수는 있다’라며 기꺼이 내 피를 받아들이더군. 실제로 우리는 인간만큼 의식주에 크게 구애 받지는 않거든. 가령 아무것도 먹지 않고 설산 속에서의 생활도 충분히 가능할 정도니까. 또 평범한 인간을 상대로는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이 떼로 몰려와도 쉽게 물리칠 만한 힘도 있고.

 옥타비아와 카린은 그런 흡혈귀의 특성과 힘을 이용해 필요할 때만 인간사회에 모습을 비춰 자신들의 입지를 점차 독자적으로 확보해 나갔다고 한다. 두 사람에게는 인간을 버려서까지 달성하고 싶은 분명한 꿈이 있었다.

 위대한 고대 제국의 부활.

 두 사람의 꿈을 단적으로 압축하자면 아마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가짜 귀족들과 무도한 평민들이 설치는 이 혼란스러운 시대를 종식하고, 현명한 절대군주와 ‘진짜’ 귀족들을 필두로 과거의 옛 영광을 재현하는 일. 옥타비아와 카린은 그 꿈만을 위해 수백 년의 세월을 쉬지 않고 달려 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대를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녀들의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꿈을 잃고 실의에 빠진 옥타비아는 죽음을 맞이하고 – 어떻게 그녀가 죽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엘리자베스는 입을 열지 않았다 – 카린은 세상과의 연을 끊고 어디론가 종적을 감췄다고 한다.
 그렇게 은거하고 있는 줄만 알았던 내 하나뿐인 선배 혈속이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다.

“딱, 히……? 당신 얘긴, 잘 몰라. 그냥, 이름만 들었지. 그저, 그쪽에게서, 엘리 씨……혈주랑, 같은 냄새가 나, 알아차렸을, 뿐이야…….”

 난 오기로 거짓말에 진실을 섞어 그녀의 말을 부정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애썼다. 경이로운 흡혈귀의 회복력.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고 있긴 하지만, 반으로 갈린 내 몸은 벌써 아물고 있는 중이다.

“으……!”

 물론 그 재생은 공짜가 아니다. 고통만큼이나 극도로 정신을 압박하는 갈증. 엘리자베스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는 한 몇 십 년은 피를 취하지 않아도 내 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 했다. 그 말은 반대로 죽을 지경에 빠지면 그만큼 피를 보충할 필요가 있다는 뜻도 된다. ……아, 정말, 목마르다.

“하, 개도 덩치가 작은 놈일수록 더 시끄럽게 짖어대지. 약한 주제에 강한 척하기는. 뭐, 질질 짜는 것보다는 나은 편인가.”

 카린의 어투는 모멸적이었지만 무조건 날 부정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이대로 상대의 근성을 인정해 서로를 이해하는 꿈같은 전개로 나아간다면 좋겠지만, 저편에서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가 내 환상을 여지없이 깨부수었다.

“어때요? 이제 제 말을 믿을 수 있나요? 더 이상 당신 친구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무시무시한 괴물의 동족이 되었지요.”

 은촛대가 은은히 어둠을 밝히고 있는 쇠락한 제단. 은발의 성녀는 처음 봤을 때의 그 거추장스러운 신관 같은 차림새로 푸른 눈동자를 차갑게 빛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신경은 그 옆의 익숙한 얼굴에 쏠려 있었다.

“다미, 야…….”

“너, 설마……진짜, 괴물이……!”

 다미는 입을 감싸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오로지 이 자리에 데려오는 것만이 목적이었는지, 그녀는 딱히 묶여 있지도 그밖에 다른 위해를 당한 것 같지도 않았다. 다미가 무사한 건 정말 다행한 일이었으나, 이걸로 난 녀석들의 의도를 명백히 알 수 있었다.

“대체…….”

 아아. 날 보고 겁먹은 다미의 표정. 당연하다. 거의 몸통이 절반으로 잘려 피투성이가 되고도 멀쩡하게 되살아나는 광경을 봤는데, 어떻게 내가 정상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대체 뭐가…….”

 아마 성녀는 다미를 납치한 뒤 인식왜곡을 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으리라. 인간의 평온을 위협하는 악마에 대해. 엘리자베스에 대해. 즉, 흡혈귀에 대해. 물론 좋지 않은 쪽으로. 그리고 내가 바로 그 흡혈귀가 되었다고 고발했으리라.

 다미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겠지. 무엇보다 갑자기 이런 곳에 끌려와 경황도 없어 제대로 이야기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테고. 하지만 이렇듯 내가 괴물임을 몸소 증명해 보인 상태에서 다미는 율리아나의 말이 사실임을 강렬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는 소리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대체, 뭐가 목적이냐!”

 그저 날 죽이거나 고문하거나 어딘가 봉인해 두는 거라면, 당연히 싫고 저항이야 하겠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 성녀와 성녀가 속한 기관은 악마를 퇴치하는 것이 주목적이며 난 분명 더는 인간이 아니니까.

 무력충돌이 금지된 도시 밖으로 날 유인하기 위해 다미를 납치한 것 또한 용납은 못해도 이해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굳이 내가 괴물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나? 비록 지금의 난 흡혈귀 나부랭이 같은 존재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엄연한 사람이었다. 그런 내 일상의 잔해를 이처럼 산산이 부술 필요가, 정말 있단 말인가? 어디에?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잔인한 처사다.
 그러나 성녀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목적이요? 물론 당신의 친구에게, 아니 친구였던 사람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악마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며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말이지요.”

 푸른 안광에 담긴, 너무나도 뻔뻔한 대답. 날 거절하듯 떨리는 다미의 눈동자. 어째서인지 성녀에게 협력하며 날 적대하는 선배 혈속 흡혈귀. 그 모든 것이 진심으로 화나며, 슬프고, 또 거슬린다.

“용서, 못해……!”

 한가득 바닥에 쏟아진 내 피가 마치 위로 흐르듯 솟아오른다. 살아 있는 뱀처럼 또는 넝쿨처럼 날 휘감는 핏빛 물결. 이윽고 강철 같이 딱딱하게 굳은 검붉은 그것은, 신체의 각 부분을 감싸는 갑옷이자 양팔에 칼날 같이 삐죽하게 솟아오른 무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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