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블로그 이미지
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라이트 노벨'에 해당되는 글 143건

  1. 2014.04.04
    [모형정원의 나비] 04. 흩날리는 꽃잎 (1) (2)
  2. 2014.03.28
    [모형정원의 나비] 03. 요동치는 벌떼 (7) (2)
  3. 2014.03.25
    [모형정원의 나비] 03. 요동치는 벌떼 (6) (2)
  4. 2014.03.19
    [모형정원의 나비] 03. 요동치는 벌떼 (5) (2)
  5. 2014.03.17
    [모형정원의 나비] 03. 요동치는 벌떼 (4) (2)
  6. 2014.03.10
    [모형정원의 나비] 03. 요동치는 벌떼 (3) (2)
  7. 2014.03.07
    [모형정원의 나비] 03. 요동치는 벌떼 (2) (2)
  8. 2014.03.04
    [모형정원의 나비] 03. 요동치는 벌떼 (1) (4)
  9. 2014.02.28
    [모형정원의 나비] 02. 바람 부는 언덕 (7) (2)
  10. 2014.02.23
    [모형정원의 나비] 02. 바람 부는 언덕 (6) (2)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








04. 흩날리는 꽃잎 (1)


 지고천. 평의회실評議會室. 정식시민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 가능한 원탁의 방. 허나 실제로 발언권이 있는 오로지 시장과 천사장뿐. 공식화되어 있지는 않으나 그것이 우리 도시의 절대적인 관례.

(본래 평의회에는 시장의 참여도 가능했다. 그러나 이 늙은 여우와도 같은 천사장들은 베아트리체가 플라톤에게 강제적으로 권력을 이양 받는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빚을 진 것을 빌미로 시장의 평의회 참석을 아예 배제시켜버린 것이다.)

<코키토스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기관은 모든 사람들의 혼을 수집하고 분배하는 원동천이다. 제9옥의 시민들은 인간의 혼 그 자체를 막대한 자급자족의 에너지로 삼아 이 도시에서 버텨나가고 있다. 실제로 슬픈 도시의 시민 수는 약 20만에 가까우며 실생활을 하는 것은 약 14만, 그리고 나머지 6만 정도는 항상 예비시민이자 주 에너지원으로 활용되고 있는 형편이다.>

 현재 이 방에 있는 건 총 여섯 명의 천사장. 치천사장熾天使長인 나 데미안을 비롯해 주천사장主天使長 클라리사 그란디아, 역천사장力天使長 루터 킹, 능천사장能天使長 진 호리츠, 권천사장權天使長 아이리스 페일그레이, 그리고 흑천사장黑天使長 러셀 크로스오버.

(우리가 앉은 자리는 원탁이다. 먼 옛날로부터 전해지는 전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기에 참석하는 자들은 모두 평등하다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허나 당연히 그런 건 가식에 불과하다. 실질적으로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인원은 14만 여명의 시민 중 한 자릿수에 지나지 않는 지도층에 불과하며 여긴 모인 자들 중에서도 나 같은 신생자는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조차 힘들다.)

<잘 알려지지 않은, 아니 일부러 통제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사실상 사람의 영혼에 가치 차이는 없다. 최소한 영혼을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과정과 결과만을 놓고 봤을 때는 그러하다. 어떤 사람이건 한 사람의 영혼이 뽑아낼 수 있는 에너지는 항시 일정하다. 그렇기에 누가 어떤 적성을 가졌고, 어떤 권원을 가졌느냐에 따라 상하수직적인 등급을 나누는 티마이오스 시스템은 혼백연구자인 우리 치천사들의 시선으로 본다면 근거도 없이 사람을 차별하는 말도 안 되는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도 변함없이 결석자가 있군요. 좌천사장은 어쩔 수 없다지만 그녀는, 지천사장智天使長은 어째서 모습을 비추지 않는 건가요?”

 암묵적으로 회의를 주도하고 있는 건 의장격인 주천사장 클라리사 여사. 푸른 드레스와 하얀 장갑, 그리고 장미문양이 그려져 있는 작은 손부채가 어울리는 우아한 중년 여성. 그녀가 바라보며 대답을 요구한 상대는 나. 물론 회의가 시작되기 전 미리 보고를 드렸지만 아마 다른 이에게도 공지할 필요성을 느낀 모양.

(나는 베아트리체가 좋다. 나는 베르길리우스가 좋다. 그 두 사람은 내 영혼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외양, 그들의 마음, 그들의 사상, 그들의 바람. 이 모든 것은 지극히 숭고하며 자신뿐만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도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들은 생존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행복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걸 잊지 않는다.)

<그러나 내 권위로는 티마이오스 시스템을 철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기실 이 시스템은 ‘사회’를 유지시키는 데 무엇보다 특화되어 있다. 사람이 평등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사회에 여유가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래야 상황에 따라 한시적으로, 혹은 국지적으로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특질도 끌어안고 갈 여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허나 지금 우리 도시에 그런 공백 따위는 없다. 오로지 얼마나 주어진 일을 능률적으로 처리하고, 암흑물질에 맞서 싸울 수 있는지 만이 우리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뿐. 나 또한 그 기준에 적합했기에 이런 자리에까지 앉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행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기쁘지는 않다.>

“예, 전언은 제가 직접 받았습니다. 지천사장 만리 유지호는 대도서관의 방비로 도저히 몸을 뺄 수 없다고 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보안을 강화하고 싶다고 하는군요.”

 클라리사 여사의 만족스러운 웃음. 이 귀부인은 자신이 직접 보고를 하는 건 품위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에 많은 경우 이 회의에서는 내가 그녀의 입을 대신하고 있음. 어차피 신생자로서 발언권이 약한 내게 있어 그녀가 뒤를 봐주는 건 든든한 일이기에 상호이득적인 관계.

(그런 면에서 지천사들의 태평스러움은 가끔씩 화가 난다. 소위 마법이라 불리는 신비한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그들이 전력을 다한다면 좀 더 도시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도 가능할 터인데, 그들은 주어진 임무와 자신들의 연구 외에는 별 관심이 없다. ‘우리가 원력이학을 구현할 수 있는 한 별은 살아 있다’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함께 은연중에 이해할 수 없는 희망에 넘쳐 있는, 상대하기 피곤한 무리들이다.)

<영혼이란 행성시대의 오래된 미신처럼 영원불멸하지 않다. 특히 어딘가 신이 있어서 죽은 자들이 그런 곳에 향해 자신의 업보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말을 들으면 실소마저 터져 나올 지경이다. 관습에 따라 혼령이나 혼백이라는 말을 쓰고 있기는 하나 실제로 영혼이란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거 참 굉장한 일이군요. 언젠가 대도서관은 코키토스의 기능이 정지한다 해도 한 달 이상은 문제없이 암흑물질 속에서조차 견딜 수 있다고 들었는데. 그럼에도 만전을 기하기 위해 얼굴도 볼 수 없을 만큼 분주하시다니 설렁설렁 회의에 참석한 저로서는 부끄러움 때문에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지경이외다.”

 어조는 부드러우나 더할 나위 없이 비웃음이 담긴 발언을 한 자는 흑천사장 러셀 크로스오버. 백발의 머리에 흰 수염을 단정하게 길러 온화해 보이는 인상의 노신사이나, 그 눈매는 족제비처럼 날카로움. 기본적으로 모든 것에 적대하는 회의주의자로서 역천사장과는 특히 사이가 좋지 않음.

(지천사들은 자신들의 일터인 천체연구소보다는 코키토스 건립 이전부터 존재해온 대도서관에 상주하는 걸 좋아한다. 본래 그곳은 과거 마도사 혹은 관리사 불리던 이들이 현대 문명이 발달하면서 쇠퇴할 자신들의 입지를 예견하고, 온갖 정수를 동원해 반영구적으로 원력이학을 전수할 수 있도록 만들어낸 비밀스러운 서고였다고 한다. 시공간을 중첩하여 어떤 악의적인 공격과 천재지변에도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되었다고 하는데, 그 원천되는 기술은 실로 놀라운 발상으로 가득해 코키토스 건립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원칙적으로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도 소멸한다. 영혼이란 거칠게 말하자면, 살아있는 자가 내뿜는 특수한 파장이 강하게 세상에 잔류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죽은 뒤에도 영혼이 남아 있는 사례도 있으나, 그것은 생전 발산하던 파장이 매우 강력한 경우 그 여파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것에 불과한 현상이다. 간혹 육체의 도움 없이 스스로 파장을 발생시킬 정도의 정신생명체로 자립 진화한 개체는 정령이나 신령으로 불리는데, 현재 코키토스의 윤회판은 그 현상을 기술적으로 구현시킨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제9옥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과거의 관점에서 판단하자면 사후세계의 인간들과 상당히 흡사할지도 모른다.>

“우리 각 천사장 사이에는 그 누구도 마음대로 서로에게 간섭할 권한은 없소. 그녀에게는 그녀의 임무가 있는 모양이니 딱히 비뚤어지게 볼 필요는 없겠지. 회의참석 또한 강제된 일은 아니오. 도리어 의사결정에 참여하지 않은 만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불이익이 있다 봐야 할 테니 그것까지 감안할 만큼 중요한 일이 있는 모양이 아니겠소?”

 예상대로 좌중을 압도하는 굵은 목소리로 받아친 건 역천사장 루터 킹. 왼쪽 눈을 망가뜨린 긴 칼자국 상처가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흑인 사내로서 회의에는 검소한 양복을 입고 출석했지만 본격적으로 임무에 들어가 싸울 때는 두터운 갑옷을 입고 적을 격퇴하는 코키토스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최고무장 중 한 사람.

(사실 내가 그들에게 함부로 말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생존자들이 쌓아놓은 기반 위에 탄생한 신생자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내 삶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 위에 성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중에는 본래 이 영혼을 소유하고 있던 자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허나 그렇기에 나는 더더욱 이의를 제기하고 항의하고 싶다. 태어난 이상 태어난 책임을 다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코키토스의 기술력으로도 같은 사람을 재차 완벽히 구현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영혼의 파장을 기록해 그것을 다시 실체화시키는 건 간단하지만 그자가 쌓아온 것까지 재구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 연구는 최종적으로 파장의 재구성과 기록의 완벽재현, 말하자면 사자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경지를 노리고 있지만 솔직히 결과는 회의적이다.>

“오오, 그러니까 당신은 너무 순진하다는 거요. 그 쓸데없는 희망으로 가득 찬 도서관장(지천사장)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건 오히려 자기 의견을 더욱 확고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지.”

“그건 대체 무슨 뜻이오?”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우리 도시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 중 하나인 대도서관을 강화하겠다는 명목으로 회의에 불출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지요. 즉, 이건 ‘나는 플라톤 원리주의자들의 위협을 심각하게 보고 있으며 그에 따른 가장 강력한 조치를 행해주었으면 좋겠다’라는 뜻을 행동으로 내비친 거라 해석해야 옳을 것이오. 당신은 의결에 참여하지 않는 건 자신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아 불이익이 된다고 했지만, 코키토스 평의회처럼 실질적으로 10명도 채 안 되는 인원만으로 사안이 결정되는 곳에서는 불출석도 때로는 강대한 의사표명이 될 수 있소.”

 러셀의 반론에 루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음. 공감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딱히 반대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인지는 거의 표정변화가 없는 그의 검은 얼굴에서는 전혀 읽어낼 수가 없음. 호적수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러셀은 입가를 비틀며 다른 쪽으로 공격을 행함.

(허나 내 이상은 쟁쟁한 천사장들과 마주치는 이 회의실에 들어오기만 해도 곧 꺾여버릴 만큼 가냘프다. 이곳에는 동료라 부를 사람이 없다. 클라리사 여사와는 동맹관계일 뿐, 그녀에게는 별다른 목적의식은 없으며 그저 내가 예우를 지키는 한 애완동물에게 호의를 베풀 듯이 지원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유일하게 같은 신생자 출신의 천사장인 진 호리츠 또한 내가 내미는 제의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기 야망을 우선해 행동하는 걸 가장 좋아하니까. 이 자리에서 진정 베아트리체를 위해, 베르길리우스를 위해, 그리고 우리 도시를 위해 움직일 사람은 그나마 러셀 크로스오버밖에 없다고 해야겠지만…….)

<티마이오스 시스템에 접속해 슬픈 도시 누구보다도 기록을 재현하는 일에 능숙한 클로에 클로버조차 육체의 복구 외에 정신적인 결손까지 재구성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원동천의 윤회판까지 본격적으로 다룰 수 있는 권한을 준다면 과연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처럼 지나친 모험은 피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위험하다. >

“이럴 바에야 그 몽테크리스토를 회의에 참석시키는 게 낫지. 최소한 경보다는 머리가 잘 돌아갈 테니 말이오. 사실 그렇지 않소? 단순히 지식을 피로하고 판단을 내리는 능력만 보자면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날 그를 배제시키는 건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오. 저는 지금이라도 시정을 요구하고 싶습니다만.”

 좌천사장座天使長 몽테크리스토. 유일하게 천사장 중에는 사람이 아닌 자동인형. 한때 마천루의 4인이라고 불리던 행성시대 굴지의 연구기관이 만들어낸 기계인형의 복제품으로 영혼은 없지만 사람 못지않은, 아니 웬만한 사람보다는 훨씬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음. 허나 플라톤의 시정 시 영혼이 없는 자는 평의회에 참석할 수가 없었고, 그것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은 관례로서 전해 내려오고 있음.

(러셀은 명백히 이상하다. 본래 흑천사대는 예전에 무장학사대를 수용하는 대천사대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으며 대천사장으로는 베아트리체가 앉아 있었다. 러셀은 오랜 세월 베아트리체의 휘하 아래 움직였으며 플라톤의 음모를 저지할 때도 흔쾌히 베아트리체를 위해 싸웠다.)

<개인적으로 연구대상으로 삼고 싶은 건 베르길리우스의 시종인 피아 녹턴이다. 그녀는 외톨이 마녀가 만들어낸 인조혼. 본래 보존만이 가능한 영혼의 파장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내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업적이다. 허나 도시의 법률과 사람들의 편견은 귀중한 인조혼을 아주 쓸모없는 존재로 몰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나 또한 함부로 연구를 한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다. 만약 그녀의 존재가 우리 영혼을 더욱 완벽히 보존할 수 있는 단서라는 걸 안다면 사람들은 큰 혼란을 일으킬 것이며 기뻐하기 이전에 그녀를 죽여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가 불행해지는 건 베르길리우스가 절대 원치 않을 터이며 난 그의 마음을 최대한 존중해주고 싶다.>

“기분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그 안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논의해보기로 하죠. 그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죠. 아이리스 페일그레이. 지금까지 파악된 플라톤 원리주의자와 관련된 현황에 대해 간단하게 말해줄 수 있나요?”

 과연 클라리사 여사. 역천사장 루터가 화를 내기 전에 절묘하게 회화의 흐름을 끊음. 지목 받은 아이리스 페일그레이는 풍성한 머리숱을 이용해 다양한 머리장식으로 멋을 내 매우 화려해 보이는 여성이지만, 외견과 달리 목소리는 무뚝뚝하고 성격은 매우 사무적임. 권천사장인 그녀는 코키토스의 문화전반에 대한 관리를 맡고 있는데, 그 휘하에는 방송·신문사 같은 언론기관도 포함되어 있음.

(그러나 막상 베아트리체가 시장 자리에 앉고, 대천사대가 시장 직속 기관인 흑천사대로 재편되어 러셀이 그 책임자로 임명되자마자 그는 갑자기 냉소적으로 돌변했다. 전부터 그런 경향이 있다고 하지만 그 염세적이며 비꼬기 좋아하는 성질이 특히 심해진 것이다.)

<마녀의 정원에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관리사들과는 또 다른 분파를 이루는 마녀들은 무슨 방법을 썼는지 도시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존속할 수 있는 자신들만의 주거지를 만들어 버렸다. 지천사들에게 탐색을 부탁해도, 그들은 그녀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어디 있는지는 도저히 감지할 수 없다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보인다.>

“이번 플라톤 원리주의자들의 집단 질서이탈 사건은 우리 도시와 천사대에게 무시할 수 없는 타격을 입혔습니다. 능천사대의 무장경관대의 절반, 2개 소대가 전멸했으며 권원자인 스텔라 경위가 사망한 것이 무엇보다 가장 큰 손실입니다. 흑천사대는 각 대원들의 피로누적이 심각한 수준이며 3대 무력기관 중 유일하게 건재한 건 역천사대뿐입니다.”

“그야 우리들이 발이 닳도록 뛰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 어느 한쪽이 차면 다른 한쪽이 비게 되어 있는 건 이 세상의 당연한 순리요. 역천사들이 지금까지 멀쩡할 수 있는 건 능천사 대원들의 피와 우리 흑천사 대원들의 땀 위에 성립되어 있다는 걸 부디 잊지 말아주셨으면 하는군요.”

 여전히 표정은 드러나지 않지만 오로지 역천사대만이 무사하다는 말에 자랑스럽게 어깨를 쫙 펴고 있는 루터 킹에게 일침을 날리는 러셀 크로스오버. 순식간에 얼어붙는 회의실 공기. 지긋지긋한 해충을 상대하듯이 아까부터 자신을 도발하는 러셀을 엄숙한 눈으로 노려보는 루터. 그에 지지 않고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더욱 도발적인 태도를 취하는 러셀. 검은 암석과 하얀 족제비의 대립. 슬픈 도시 최고 실력자들의 신경전.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날카로운 나이프에 목덜미가 위협 당하는 것만 같은 압박감.

(어째서일까. 권력을 쥐고 보니 인생의 무상함이라도 느낀 걸까. 아니면 막상 베아트리체도 딱히 플라톤보다 선정을 베풀지 못하자 실망한 것일까. 하지만 그건 비겁한 변명이다. 무리하게 정상에 오른 베아트리체는 조력자가 부족하다. 평의회의 참석권한을 잃어버린 것만 해도 돌아가는 사정을 뻔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족한 부분을 우리들이 지지해야줘야 할 게 아닌가!)

<인조혼의 생성에 성공한 외톨이 마녀 또한 본래는 마녀의 정원에 속해 있던 일원이라는 걸 감안할 때, 마녀들은 분명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비밀을 움켜쥐고 있을 것이다. 만약 마녀들과 우리 치천사들이 힘을 합쳐 연구를 재개한다면 어쩌면 이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날 돌파구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손실은 우리의 손실이고, 우리의 손실은 한 사람의 손실이기도 합니다. 암흑천지를 여행하는 한 배에 몸을 실은 이상 피아彼我의 경계를 나누어봤자 어리석은 짓이겠지요. 아이리스 페일그레이, 계속해주세요.”

“예, 그란디아 여사님. …무장천사대보다 시민들의 피해상황은 훨씬 심각합니다. 안테노라의 계절을 맞아 암흑물질의 침수도가 다른 계절에 비해 10배 이상 상승한 데다 이탈자들의 산발적인 각성이 무엇보다 큰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아카데메이아의 전 부학장이었던 셀레스티나의 이탈에 의해 세인트헬레나 5번가는 궤멸상태에 빠졌고, 현재 거리의 복구사업은 완료되었지만 상주하는 시민들은 2/3 정도밖에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이번 일련의 사태로 인해 사망자 수는 총 253명이며 그 중 암흑물질에 침식당한 영혼은 총 13명입니다. 도시의 보존에너지는 이번 계절을 맞이하면서 0.0043% 하락하였으며 만약 이와 비슷한 결손이 매년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3천년 후에는 도시의 유지시스템이 반영구적이지 못하게 되는 기점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이리스의 보고에서 희망적 관측은 찾아볼 수 없음.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단조로운 선율은 우리가 얼마나 종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자각시키는 마왕의 조소. 허나 절호의 기회. 아마 클라리사 여사는 일부러 아이리스의 보고를 유도했을 터.

(어쨌든 그는 이제 누군가를 깔아뭉개는 것에만 관심이 지대하다. 특히 행성시대로부터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는 역천사장 루터 킹에게는 상당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도 관록 있는 클라리사 여사가 중재에 나서지 않았다면 저 두 사람의 신경전으로 몇 번이나 회의가 파탄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사실 오래 전 딱 한 번 마녀들이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비친 적이 있다고 한다. 허나 자신이 인정한 깨끗한 영혼 외의 다른 이물질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던 플라톤은 마녀들의 제안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무장학사대를 보내 공격하는 것으로 적대감을 분명히 표시했다고 한다. 그 이래로 마녀들은 우리를 믿지 못해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으며, 외톨이 마녀만이 특이하게 거리 안에 숨어살다가 발각되어 제거 당했다.>

“역시 상황이 심각하군요. 이대로 플라톤 원리주의자들을 그대로 놔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제안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어떤 제안이지요? 기탄없이 이야기해주세요, 데미안 아브락사스.”

“감사합니다, 그란디아 여사님. 이미 예상하신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역천사에 의한 ‘적극적 방해제거 청구권’을 행사하고 싶습니다. 이미 사태는 관망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빨리 모래시계를 뒤집지 않으면 그 안에 있는 모래는 전부 떨어져 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움직이지 않은 시간만큼 그것은 확실하게 자신을 공백 속에 방치한 보복을 해오겠지요.”

 적극적 방해제거청구권. 만약 이것이 평의회에서 받아들여진다면 역천사대는 1사건 1인 배당의 구속에서 벗어나 마음껏 자신들의 힘을 펼칠 수 있음. 반수 이상이 고위급의 힘을 가지고 있으며 상대를 파괴하는 데 적합한 권원을 가지고 있는 44인의 역천사가 총출동한다면 제 아무리 암흑물질의 부정한 기운을 빌린 질서이탈자의 무리라 하더라도 견뎌낼 도리가 없을 터.

(만약 클라리사 여사가 호의를 보내는 가운데 러셀이 날 도와주기만 했다면 아주 손쉽게 회의의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러셀이 주도하는 가운데 내가 지원을 하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허나 그는 절대 손을 내밀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 혼자서라도 움직일 수밖에 없다. 베아트리체와 베르길리우스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천사대를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역시 남은 건 피아 녹턴밖에 없다. 사람들은 그녀의 가치를 모르고 있다. 어떻게 하면 베르길리우스를 배신하지 않으면서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 그녀의 몸을 연구할 수만 있다면 뭔가 새로운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길을 찾아낼 수도 있을 텐데 가만히 보고 있어야만 한다니 너무 답답한 일이다. 더욱이 그녀가 근무하는 흑천사대는 언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을지 모르는데…….>

“아주 제멋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군. 그럼 하나 묻고 싶소만, 과연 세상에 흘려도 되는 피가 있다고 생각하오?”

“…무슨 의도로 하신 말씀이신지 재차 물어도 될까요?”

“벌써 잊었다고는 하지 못할 거요, 그란디아 여사, 아브락사스 군. 베아트리체 시장이 정권을 탈취할 때 우리는 플라톤 전前 시장의 요청에 따라 경들을 제압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소. 그건 우리 역천사대가 오로지 코키토스의 존속에만 힘을 다하는 중립적인 기관으로서 그 맡은 바 임무를 다하기 위함이었다는 건 그대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강대한 힘에는 그만큼 책임이 동반되어야 하지. 역천사대는 제9옥, 더 나아가 인류를 혁신하는 어떠한 도전에도 칼날을 들이대지 않을 것이며, 오로지 그 결과만을 담담이 수용하고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행할 것임을 다시 한 번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오.”

 루터답지 않은 열정적인 장광설. 그에 반해 점차 안색이 굳어가는 귀부인. 반발을 받는 데 익숙하지 않은 클라리사 여사는 꽤나 모욕적으로 생각하는 모양. 방금 전 러셀과 신경전을 벌였을 때와는 또 다른 불편한 분위기가 회의장 전체에 만연.

(예상대로 루터 킹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언제나 역천사대는 절대 중립을 고수한다. 오직 그들이 움직이는 건 암흑물질을 비롯한 도시의 해가 될 무리들을 소거할 때뿐이다. 단순한 권력다툼에는 절대 끼어들지 않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다. 베아트리체 역시 그가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했기에 대천사대를 이끌고 플라톤과 대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꼭 인조혼에 대한 비밀을 밝히는 게 아니더라도 영혼 그 자체에 대한 탐구는 사람을 흠뻑 빠져들게 하는 맛이 있다. 영혼이란 참 흥미로운 존재방식이다. 영혼은 마치 빛이 사라지면 형태를 잃고 마는 그림자처럼 그 존재가 참으로 확정하기 어려우나 그 개개의 특성은 너무나도 강렬하게 드러난다.>

“플라톤 원리주의자들은 그 저주 받은 암흑물질에 몸을 더럽히면서까지 잃어버린 권위를 되찾기 위해 온갖 횡포를 부리고 있소. 일선에서 죽어나가는 우리 천사들은 물론 시민들이 당한 피해를 보고도 그것이 수용해야 할 ‘도전의 결과’라고 자신할 수 있단 말이오?”

 기대하지 않았던 러셀의 반격이 시작됨. 허나 이것은 내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이 아니라 단지 루터 킹이 마음에 들지 않기에 포격을 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 클라리사 여사는 모욕당했다는 불쾌감을 삼키기 위해 당분간 논의에 참가하지 않을 가능성이 큼. 애초에 저 귀부인은 중재자 역할의 고상함에 목을 매고 있기에 가열된 자리에 직접적으로 끼는 건 취향이 아님.

(허나 언제까지 그들이 그런 태도를 취하게 놔둘 수는 없다. 최소한 내가 지키고 싶은 꿈을 두고도 방관하는 건 결단코 용납할 수 없다. 이기적이라는 말을 들어도 상관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역천사들이 이번 일에 발을 디밀게 만들어야 한다.)

<세상에는 절대 동일한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인간의 몸속에 수개의 영혼이 발생되는 일은 있을지언정 쌍둥이 영혼은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무수하게 분파된 영혼의 특성은 마치 옛 인류가 가정했던 우주의 무한함을 대위하고 있는 것만 같다.>

“물론 우리를 상자 속에 갇혀 사는 가련한 존재로 전락시킨, 그 저주 받은 암흑물질을 반입하는 행위를 절대 용납하지는 않겠소. 역천사대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안테노라의 계절에 침수하는 형상체와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이탈한 불손한 무리들이 출몰할 경우 제거하는 데 망설이지 않을 것이오.”

“허, 궤변이군. 암흑물질은 용납할 수 없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이들은 그대로 놔두겠다는 말인데, 무슨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소리를 하고 싶다면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렸다고 미리 친절하게 말씀드리겠소이다. 뭐, 좋아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득을 가져다주는 시도와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는 행위를 가르는 기준은 대체 무엇인지 궁금하군. 좀 가르쳐주지 않겠소?”

“내 친절하게 최소한 경들에게 그 기준을 판단할 자격은 없다는 말씀은 드리리라.”

 과연 확고한 루터의 태도. 드물게 러셀이 단순히 비꼬는 것만이 아니라 제대로 논란이 될 구석을 비집고 들어갔지만 그는 전혀 상대할 기색을 내비치지 않음. 러셀이 몇 번 더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으나 루터는 여전히 부동의 자세를 고수.

(이제 말을 움직일 때가 왔다. 기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눈물 날 만큼 적다. 혹 이런 계산을 하지 않고 말을 꺼낸다 해도 아마 회의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더욱 신기한 것은 이 모든 영혼들은 각자 퍼즐조각처럼 딱 들어맞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퍼즐이란 말에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처음부터 한 갈래였던 것이 분파되었다기보다는 서로 전혀 다른 면면이 마주칠 때마다 상대와의 접합면을 새로이 생성하는 모습에 가깝다.>

“무례라는 걸 알면서도 감히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킹 장군. 아무리 생각해도 플라톤 원리주의자들 같은 도시파괴자들이 당시 내부에서부터 점진적인 변혁을 꿈꾸던 베아트리체 시장 같은 정치사상가와 어째서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아, 물론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있는 시도를 존중하고 싶은 장군님의 고상한 사상은 공감하고 있으며 저 또한 지지하는 바입니다. 허나 때로는 발아하기 전부터 가망이 없다고 선고를 받은 ‘악의 꽃’도 건강한 신록의 새싹들과 같이 자라날 수 있는 법입니다. 만약 허락된다면 지금부터 코키토스를 변혁해온 여러 위대한 도전들에 비해 지금 플라톤 원리주의자들이 행하고 있는 파괴적 활동이 단순히 우리의 삶을 나락으로 몰아넣는 비참한 추락에 불과하다는 것을 감히 증명하고 싶습니다만…….”

“흠…….”

 하찮은 벌레를 바라보는 눈으로 나에게 멸시를 보내는 루터 킹. 허나 내가 허락을 구한 상대는 그가 아님. 혼자서 불명예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통쾌하게 갚아줄까 궁리하는 고상한 귀부인과 사사건건 그에게 트집을 잡는 오랜 숙적.

(내가 생각한 건 정말 별 거 아니다. 그저 여기 모인 이들의 대립을 이용하는 것만이 전부인 것이다. 아마 다른 상황이라면 별다른 도움이 안 되었을 계책이었을 것이다. 허나 이곳은 코키토스. 14만 명의 억눌린 시민들과 10명도 안 되는 소수의 권력자가 모든 걸 결정하는 도시. 이들을 자극하는 것이 곧 도시의 힘을 움직이는 결과로 직결된다.)

<만약 다른 영혼과 영혼을 조합한다면 어떻게 될까. 가령 코키토스에 수용되어 있는 20만의 영혼의 접합면을 찾아내어 하나로 합친다면? 만약 시도해 볼 수만 있다면 끝도 없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실험이 될 테지만 아쉽게도 내게 그런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다.>

“발언을 허가합니다. 그에게 명쾌하게 이번 사태의 위험성과 부당함을 설명해드리세요.”

“아니아니, 잠깐만! 설마 평의회에서 치천사장의 강의를 개시할 생각입니까? 다들 좀 진정하세요. 대체 뭘 위해서 이런 자리에 모였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타협 좀 합시다. 타협 좀.”

 생각대로 학을 떼며 만류하는 진 호리츠. 여태까지 귀를 후비거나 하품을 하는 등 지루하다는 기색을 역력히 내비치던 그에게 있어 더 이상 회의가 길어진다는 건 감당하기 힘든 고문일 터. 원체 뻔뻔하고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인지라 다른 천사장들도 새삼스럽게 기가 막혀 하기 보다는 그가 무슨 제안을 하고 싶은지 궁금해 하는 듯. 그래도 예의를 중시하는 클라리사 여사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러셀은 관심 있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음.

(내심 진이 가만히 있을까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걸려들었다. 아니면 그 역시 내가 생각하는 바를 알고 움직인 걸까. 혹은 나랑 상관없이 그저 회의가 길어졌다면 같은 참견을 했을지도 모르지. 아무튼 그런 건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중요한 건 앞으로 그가 어떤 말과 태도를 보이느냐 하는 것이다.)

<영혼과 영혼의 결합은 미지의 영역이다. 원동천의 윤회판에 부속되어 있는 고도의 시뮬레이터를 돌려봐도 일관된 결과는 얻을 수 없었다. 즉 아무 일도 없을지, 아니면 순식간에 도시가 붕괴할 정도로 위험할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호오, 거창하게 평의회의 목적 같은 걸 들먹이는 걸 보니 뭔가 좋은 수라도 있는 게지? 무슨 타협을 생각하고 있는지 한 번 말해줄 수 있겠나?”

“그 전에 한 번 상황을 정리해보죠. 간단히 말하자면 결국 플라톤 원리주의자들을 제압하는데 역천사의 힘을 빌리고 싶은 거 아닙니까. 하지만 루터 경은 고리타분한 원칙을 지키기 위해 그걸 반대하고 있고, 러셀 영감님과 클라리사 여사님은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거고요. 또 우리 데미안 군은 불쌍하게 거기 끼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죠. 아아, 아이리스 아가씨는 통계내고 분석하는 게 즐거운 것뿐, 실은 이런 사건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어 한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이제 와서 관심 있는 척하시지 않아도 돼요.”

“서, 서론이 길군요, 진 호리츠. 그래서 무슨 대책이 있다는 건가요?”

“성격도 급하시군요. 클라리사 여사님. 뭐, 좋습니다. 뜸 들일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니고. 요는 서로 조금씩만 양보하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전 ‘단독파견명령’을 제안 드리고 싶습니다만.”

 싱겁다는 표정으로 내뱉는 갈색 제복의 젊은 능천사장. 순식간에 술렁이는 회의장. 어깨를 들썩거리는 루터 킹, 얼굴을 일그러뜨리지 않기 위해 표정관리에 힘쓰는 클라리사 그란디아, 킥킥거리며 즐겁게 웃는 러셀 크로스오버, 새침하게 발언자를 흘겨보는 아이리스 페일그레이. 물론 나는 당황한 것처럼 연기.

(과연! 기대한 것 이상이다. 다른 기관들에 비해 권위가 부족한 혼백연구소를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해 굽실거려야 하는 나와 달리 별로 거칠 것 없는 진은 항상 자유분방하다. 그라면 거리낌 없이 선배 천사장들의 체면에 침을 뱉고 저 제안을 해줄 거라 생각했다.)

<우리처럼 고립된 환경에 사는 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위험부담이 큰 모험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전에 실험에 희생될 영혼을 선정하는 것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일이다. 결합에는 최소 둘 이상 필요하니 백보양보해서 내가 실험에 몸을 던진다고 해도 다른 누군가에게 위험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흐음, 큰 소리 친 것치고는 좀 부족하네만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하지만 과연 그런 소극적인 조치로 이번 사태를 억누를 수 있을까?”

“어차피 러셀 영감님도 역천사대의 힘이 진짜 필요하다기보다는 그냥 물고 늘어지고 싶으셨던 거죠? 솔직히 흑천사대만 해도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잖아요. 물론 이례적일 만큼 이번 플라톤 원리주의자들의 이탈은 치명적이고, 저희 쪽도 무장경관대를 2개 소대나 잃을 만큼 큰 타격을 입은 처지이긴 하지만, 꼭 적극적 방해제거청구가 긴히 요구되는 사안이 아님에는 분명하죠. 그러니, 역천사 대원 한 명 고생시키는 것으로 이번 회의는 좀 끝냈으면 좋겠군요.”

 말을 마칠 때는 다시 지루한 표정으로 돌아와 머리를 긁적이는 진 호리츠. 허나 클라리사 여사와 러셀 대장은 그의 발언에 꽤 솔깃한 모양. 물론 그들도 이런 해결책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기보다는 자신들에게 적대적으로 나서는 루터 장군을 고립시키기 위해 일부러 찬동하는 면이 더 큼.

(파견명령이란 평의회 출석인원의 만장일치를 통해 규정되어 있는 역천사대의 정식출동 이외의 임의적인 사안에 역천사 한 명을 지속투입할 수 있는 예외적인 조치를 말한다. 역천사대 전원이 출동하여 도시의 적敵을 말살시킬 수 있는 적극적 방해제거에 비해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 이면에 깔려있는 관계는 절대 그렇지 않다.)

<사실 나 이상으로 열정을 가지고 기꺼이 몸을 던져줄 사람을 딱 한 명 알고 있으나 불행히도 그는 더 이상 치천사대에 없다. 허나 그가 있었다 하더라도 당연히 경솔하게 자신과 동료를 내던지는 실험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건 내가 있기에 비로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 자신을 버려야 한다면 그것처럼 본말전도도 없을 것이다.>

“동의할 수 없소. 어차피 파견명령은 평의회 참석자들의 만장일치가 있어야 효과를 가질 수 있는 법. 하나를 내주면 결국 열을 내주어야 한다는 말이 있지. 난 어떤 방식으로든지 절대 양보하지 않겠소.”

 그러나 루터는 여전히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임. 러셀이 또 다시 치고 올라와 일을 복잡하게 만들기 전에 다시 한 번 내가 나설 차례. 아마 조사한 바가 들어맞는다면 틀림없이 러셀은 내가 기대하는 대응을 보일 터.

(만약 파견명령을 받은 역천사가 임무에 실패한다면 자동적으로 또 다른 역천사가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되어 있으며 사안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적극적 방해제거로 돌입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단순히 암흑물질과 관련된 사안에만 조처를 내리겠다는 현재 역천사대의 방침과는 질을 달리하는 것이다.)

<물론 두려워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렇기에 난 연구를 멈추지 않는 것이며 조금이라도 우리 연구소가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남들 비위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난 영혼의 비밀을 완전히 밝히는 일이 바로 우리가 이 정체된 우리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저는 신시아 솔에게 파견임무를 맡기는 것이 적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변치 않는 44번은 역천사대의 명예대원이기도 하니 어떤 면에서는 장군님의 신념에도 반하지 않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신시아 솔이 명예대원의 위치에 있는 건 우리가 그녀를 업신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존경하기 때문이다. 그녀도 엄연한 우리 부대의 일원,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아니, 잠깐 기다리시오. 당신이 부하를 애지중지하는 마음은 참 잘 알겠소만……. 이걸 보고도 어떻게 생각하실지 참 궁금하구먼.”

 내가 가장 기대하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드는 러셀. 그가 손을 탁자 밑에 설치된 버튼을 누르자 순식간에 평의회실 천장에 어떤 영상이 상영됨. 화면에 비추는 건 절대 우리 도시에는 있을 리 없는 푸르른 초원과 밝게 빛나는 진짜 태양, 그리고 그 아래 모습을 드러낸 건 흑천사대의 피아 녹턴과 클로디아 프락시, 그리고 역천사대의 신시아 솔.

(러셀이 루터를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 이 영상을 준비했다는 건 사전조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이런 식으로 카드를 쓸 예정은 결코 아니었을 테지만. 덤으로 상대가 신시아 솔이라는 것도 매우 운이 좋은 일이다. 그녀는 역천사의 기준으로 보자면 하위권에 해당하는 전력으로 실력보다는 생존자이기에 존중을 받는 면이 크다. 만약 그녀 수준에서 아무 일 없이 해결될 만한 일이라면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일 테고, 만약 임무수행 중 죽어버린다면…….)

<결국 모든 문제는 별을 비롯한 우주를 먹어치운 암흑물질에서 비롯되는데, 그 암흑물질이 사람의 영혼을 침식할 때 특히 극렬한 작용을 보이니 서로 연관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영혼의 모든 구조를 파악할 때 역으로 암흑물질이 어떠한 것인지도 알아낼 수 있으리라.>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기무실에서 보고 받은 영상을 띄웠소. 저 장소는 우리 부대의 지하수련실이오. 수련자 마음대로 원하는 상황이 구현 가능한, 일종의 모의전투장이라 할 수 있지. 물론 우리 천사장들 사이에서는 별로 기밀이라고 할 건 없지만, 다른 직무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소. 치천사장과 능천사장을 제외하면 다들 알고 계시는 것처럼 여기 펼쳐져 있는 광경은 지구의 풍경을 구현한 것이오. 저기 보이는 우리 부대의 두 사람이 신생자라는 걸 감안하면 이런 풍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 당신네 명예대원밖에 없소. 이런 경우 설령 우리 애들이 같이 공모했다 하더라도 함부로 타부대의 보안구역에 침입한 그녀의 죄가 훨씬 무겁겠지. 만약 내가 강력히 요구한다면 그녀의 옷을 벗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거라 생각되오만. 저 애송이 말대로 이쯤에서 현명하게 타협하는 게 좋지 않겠소?”

“…으음. 이렇게까지 해서 나에게 대체 뭘 원하는 거요.”

“난 그저 당신이 굴복하는 걸 보고 싶을 뿐이오.”

“…이 대가는 반드시 비싸게 치르게 될 것이오.”

“바라던 바요.”






TRACKBACK 0 AND COMMENT 2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04.05 04:01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아아, 영혼과 존재의 정체성이란 실로 그 얼마나 매력적인 소재인 것일까요...

    어쩌면 그렇기에 사실상 전설과 신화의 영역에 도달한 초고도 과학 문명의 사회, 코키토스에서조차 결코 자유로울수 없었던 인간의 본질적 고뇌이자 무한한 탐구의 대상으로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보면 SF 계열의 애니메이션 『제가페인』의 작중 세계관에서 언급되는 양자 텔레포트의 기술 역시, 이번 화의 기나긴 마라톤 회의 속에서 흘러가는 데미안의 내적 독백처럼 여러가지 복잡한 윤리와 철학적 문제들이 얽혀있었지요.


    설령 철저하게 계산된 시뮬레이션 과정을 통하여 인간을 양자 단위로 분해한 후 다시금 완벽하게 재구성해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 영혼의 존재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아온 기억과 가치관까지 그대로 재생시킬 수 있는가 - 과연 그는 분자 재조립의 과정 이후에도 정말로 동일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가?- 의 여부가 큰 관건으로 남게되니 말이예요.

    그러한 측면에서 생각해본다면 흡사 과거의 정원관리사들처럼 지식의 추구에 점차 매몰되어가는 데미안의 사고 또한 어떠한 위험성을 초래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과연 그가 가져올 미래로의 변수는 어떠한 것이 될지 사뭇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w') 【 ... 흑흑, 어찌보면 데미안은 지천사쪽으로 배치가 되었어야할 인물이 아닐까 싶기도;; 】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04.05 18:34 신고 address edit/delete

      역시 지성을 가진 생명체에게 있어 자아정체성과 그 존속성 여부란 현실적인 생존의 문제이건 형이상학적인 관념론의 문제이건 빼놓을 수 없는 필수적이고 매력적인 요소라는 생각이 들어요.

      영혼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도 단순히 죽음에 대한 공포 이외에 누구도 확실하게 증명하고 보장해 줄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불멸의 표식을 원하는 사람의 바람이 구현된 게 아닐까 싶더군요.

      아마 눈치 채셨겠지만, 제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유물론과 기계론에 바탕하고 있는 면이 크기 때문에, 작중의 방주도시와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영혼 또한 미증유의 멸망에서 살아 남기 위해 고도의 기술력으로 '만들어낸 것'이네요.

      그리고 거기서 더 한 발자국 나아가는 어떤 일을 실현하는 것이 현자 일란과 성녀 잔의 목적인데, 그 부분은 차후 전개에서 자세히 밝혀질 예정이에요^^


      음, 말씀하신 양자 텔레포트와 같은 전송기술의 경우는 정말 당사자의 동일성 혹은 유일성 문제에 커다란 균열을 낸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것이 동일한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세계에서 분자 재조립이 가능하다는 것은, 즉 해당 개체에 대한 완벽한 정보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 사람을 양산해낼 수 있다는 뜻도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이런 문제 때문에 유물론/기계론적인 세계관에 혐오를 드러내는 사람도 많다고 알고 있는데, 전 그렇기에 오히려 개인의 정체성 위기를 정면으로 마주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령 공의 경계에서도 최고위의 인형사 아오자키 토우코는 자신과 완전히 똑같은 인형을 만들어내 스스로를 그 인형으로 아예 대체해 버리는 경지까지 도달했죠. 그리고 '자신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떻게 자아가 붕괴하지 않을 수 있냐'는 아르바의 경악에 찬 질문에 토우코는 '그딴 지성은 2류'라고 단호하게 받아치고 말이에요. 개인적으로는 그런 토우코의 경지에 도달하는 게 바람직한 자세라고 보고 있어요.

      말씀처럼 작중의 데미안은 전형적인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길로 빠져 들고 있는 듯(...) 확실히 성향적으로 따지면 과거 정원관리사를 기반으로 두고 있는 지천사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네요^^;;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








03. 요동치는 벌떼 (7)


 슬픈 도시의 기밀을 관장하는 토성천의 주요시설은 전부 천체의 지하 부분에 숨어 있었다. 단순히 외견만이 감춰진 것이 아니라 보안도 철저해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보통 수개의 안전장치를 돌파해야 했으며, 1급 기밀이 다뤄지는 장소들은 무려 수 십 개가 넘는 온갖 논리·물리적 장벽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암호를 입력한다거나 석상을 움직인다거나 음성인식을 필요로 한다거나 특정지식을 요한다거나 하는 모든 번거로운 안전장치 해제작업을 빠르게 수행하며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마침내 그가 도착한 곳은 토성천 내에서의 최하층부인 로댕의 방이었다.

 그곳에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한 거대한 문이 존재한다. 아우성치는 많은 사람들이 녹아들듯이 한데 엉겨있는 녹색의 문은 괴기스러우면서도 어쩐지 격동하는 인간의 정신세계가 역류하는 것만 같은 상징성에 눈을 뗄 수 없는 걸작이기도 했다.

 이 청동문은 토성천의 최심부를 비롯해 슬픈 도시에는 총 11개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그것은 각 천체와 천체 간을, 그리고 천체와 지상도시를 잇는 유일한 통로였다. 천체에서 지상도시로 내려가는 데에는 천상계단을 이용할 수도 있었으나, 지상도시에서 천체로 올라가거나 천체에서 다른 천체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문을 지나야만 했다.

 공중에 떠있는 열의 천체는 그 형태가 육안으로 식별될 만큼 서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으나, 그 사이의 시공간은 뒤죽박죽 섞여 있기 때문에 절대 물리적인 방법으로 도달할 수 없었다. 그건 어떤 이능을 가진 자에게도 세상을 침식해버린 암흑물질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법칙이었기에 한편으로는 도시를 움직이고 지탱하는 각각의 천체들을 예기치 못한 위협으로부터 지켜주는 작용을 겸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3년 전 월광천에서 벌어진 천체폭파사건은 내부인물의 소행이거나 협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었으나, 결국 플라톤 원리주의자들 외에는 다른 공범자를 찾아낼 수 없었다.

 이렇듯 천체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만큼 로댕의 방의 출입은 엄격했으며 설령 문이 있는 장소에 다다른다고 해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곳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열쇠’가 필요했다. 열쇠란 특수하게 제작된 일종의 인식표로서 원동천의 방대한 혼의 기록을 통해 아무런 하자가 없는 극히 일부분의 직위자에게만 주어졌다.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의 열쇠를 꺼내 잠긴 문을 열고 지고천으로 향하는 통로에 발을 걸쳤다. 문까지 도달하기 위한 소모한 수많은 노력에 비하면 정작 문을 통과하는 일은 너무나도 싱거웠다. 어둠 속에 늘어선 다른 10개의 하얀 계단 중 원하는 쪽을 골라 보통 건물 1층 분량의 높이를 올라가면 또 다른 문이 있고, 그것을 열고 나오면 거기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베르길리우스는 지고천에 도달했다. 지고천의 문은 토성천과 달리 시청 청사가 훤히 바라보이는 바로 앞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 문은 일방통행의 들어오는 문일 뿐, 나가는 문은 다른 건물에 따로 있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시청 내부에 출입자가 들락거리는 것보다 보안유지에 안전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곳은 잡동사니의 천국이었다. 코키토스를 관리하기 위한 수많은 세부기관들이 집중되어 있는 탓에 천체는 온통 난립한 건물이나 기계장치들로 혼잡했다. 널려 있는 구조물들은 하나하나 세련미와 기능미가 집약된 품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미인들의 우수한 부분만을 모아 한데 합친다 해도 최고의 미인이 되지는 않는 것처럼 무절제한 혼돈은 그저 기괴할 뿐이었다. 이곳은 그야말로 슬픈 도시라는 거짓된 삶을 찍는 영화세트장의 뒤틀린 축소판이었다.

 베아트리체가 집무하는 시청 청사는 지고천의 가장 중심부에 있었다. 반투명하고 새하얀 빛을 내는 그 유리건물은 백조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멋이 있었으나, 조화되지 않은 지고천의 전체 풍경에서 바라보자면 단순히 폐기장에 꽂혀 있는 깨진 유리병처럼 보이기도 했다. 개개물이 지닌 고유의 가치가 이리 심각하게 어울리지 못하는 정경을 바라보며 베르길리우스는 살짝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고민거리가 그리 많으시기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시나요?”

 저 앞에서 들려오는, 그러나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만 같은 감미로운 중성적인 목소리에 베르길리우스는 시선을 움직여 상대를 찾았다.

“데미안. 데미안 아브락사스. 자네가 왜 여기 있지? 시 평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나?”

 베르길리우스는 손을 들어 반갑게 인사하며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다가갔다. 데미안이라 불린 청년. 목소리만큼이나 고운 하얀 얼굴과 갈색의 긴 머리에 다소 여성스러운 더블코트를 입은 그의 차림새는 영락없이 여성으로 오인받기 충분한 모습이었다.
 데미안은 소녀처럼 수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전 들러리나 마찬가지니까요. 시간 맞춰 얼굴만 내밀어도 크게 상관은 없어요.”

“겸손도. 대체 누가 치천사장의 발언권을 우습게 여기겠어. 보나마나 다른 흥미 있는 일이라도 생긴 거겠지.”

 베르길리우스는 코웃음을 치며, 그러나 애정을 듬뿍 담아 말했다.
 데미안은 그 유약해 보이는 외견과 달리 실제로는 치천사Seraphim로 통칭되는 원동천 혼백연구소의 소장이라는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천사장들 가운데는 능천사장에 이어 두 번째로 천사장이라는 중임을 맡은 신생자인 것이다. 비록 그의 연혁은 짧았으나, 아카데메이아 시절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성으로 생존자 학사들의 열렬한 지원을 받은 만큼 그 입지는 결코 무르지 않았다. 베르길리우스 또한 아카데메이아의 수호학사를 역임하고 있을 때 그와 인연을 맺어 지금은 이처럼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역시 학사님……. 아니, 베르길리우스 님은 뭐든지 다 꿰뚫어보시네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는군. 그래, 대체 뭘 하고 왔기에 그렇게 피곤해 보여?”

“아, 그렇게 힘든 건 아닌데……. 실은 잠깐 상황조사를 할 게 있어서 지천사대에 다녀왔거든요. 음, 설마 얼굴에 드러날 줄은 몰랐네요. 그 사람들한테는 실례가 되었겠군요.”

“…알만 하군. 그곳 공기는 참 괴롭지. 괜찮아. 어차피 녀석들은 머릿속이 봄으로 꽉 차 있는지라 우리 표정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을 테니.”

 베르길리우스는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지천사Cherubim. 지고천에 위치한 천체관측소를 가리키는 이명異名으로서 그들은 전부 행성시대에 마도사 혹은 정원관리사라 불리던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의 본업은 슬픈 도시 내에 출몰하는 암흑물질의 침수 정도를 감지하고 예보하는 것. 또한 그들은 고래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원력이학原力理學’을 이용해 다른 신비한 일도 행할 수 있었다. 어딘가 무기력한 코키토스의 다른 시민들과 달리 그들은 묘하게 활기에 넘쳐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그들이 행하는, 일명 마법이라고도 불리는 원력이학의 구사가 가능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원소변환, 의지구현, 연금기법, 소실충동, 미래관망, 만물소생, 정신조형. 이렇게 7가지 계통으로 분류되는 그들의 원력이학은 각각 상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술법을 성립시키기 위한 공통분모, 즉 ‘세계의 존재’라는 하나의 큰 대전제를 필요로 했다.

 별을 하나의 인간으로, 그 안에 펼쳐지는 세계를 하나의 신체로 치환했을 때 원력은 일종의 혈액과 산소, 그리고 관리사의 원력변환식은 전기자극이 되며, 그것을 통해 몸을 반응시키는 작용이 바로 법칙구현, 즉 마법魔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있어 원력이학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암흑물질에 휩쓸려 소멸된 것으로 판명된 행성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엄연한 증거였다. 물론 그것은 관리사들에게만 증거력을 가지는 이야기라 공식적으로 암흑물질이 먹어치운 모든 행성은 사라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공지를 믿지 않았고, 언젠가 다시금 자신들의 별과 우주를 되찾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 탓인지 지천사들은 이상할 정도로 언제나 기운이 넘쳐흘렀으며, 그 이질적인 모습은 은연중에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패배감에 사로잡힌 코키토스의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게 있으니 어쩔 수 없었어요. 또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고는 하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니까요.”

“그건 그래. 그나저나 넌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난 시장님께 보고드릴 게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하는데.”

“저도 이만 평의회에 참여하러 갈 거예요. 여유 부리는 건 좋지만 지각했다가는 다들 애송이가 건방지다고 생각하실 테니 자중해야지요. 또 제가 가지 않으면 누가 베아트리체 님을 지지해드리겠어요?”

“벌써부터 뭘 그렇게 짊어지려고 하는 거냐. 그저 넌 영감탱이들한테 잡아먹히지나 않도록 조심하면 돼. 특히 우리 능구렁이 대장이나 역천사장에겐 거스르지 말고.”

“예, 충고 감사드려요.”

 베르길리우스와 데미안은 서로 인사를 나눈 후 각각 시청 청사와 로댕의 방이 있는 방향으로 헤어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베르길리우스는 시장에게 사후보고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리고 데미안은 쟁쟁한 천사장들이 참석하는 시평의회에 얼굴을 내밀어야 한다는 긴장감에 마음이 편치 않아 평소처럼 살가운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베르길리우스는 멀어지는 데미안의 가냘픈 어깨를 바라보며 나중에 맛난 식사라도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피아도 그렇고, 데미안도 그렇고, 식사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신생자들은 먹는 것의 즐거움 또한 잘 모르기에 선배이자 아득한 연장자로서 꼭 가르쳐줄 필요가 있는 일이었다. 전통문화의 전승이란 어느 시대나 가치를 지니고 있는 법이다.

“그럼…….”

 데미안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베르길리우스는 호흡을 고른 후 임무태세로 전환했다. 그는 자신이 거느리는 인조혼의 시종처럼 자유자재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오랜 수련 끝에 어느 정도는 뜻대로 들뜬 마음을 다스리거나 반대로 열의를 불태우는 것이 가능했다.

 멀리서 보면 일그러진 조화에 흉하게 보이는 시청건물도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아름다웠다. 과연 베아트리체는 사물을 만드는 데 천부적인 재주가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그녀 자신의 무수한 노력과 창의력도 곁들어 있겠지만,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혈통의 영향이 큰 것이리라. 코키토스의 명칭상의 천사가 아닌 진짜 행성시대의 천사는 창조의 재능이 있었다고 하며, 베아트리체는 그런 천사와 인간의 혼혈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선 베르길리우스는 순간적으로 어지러운 시계에 지끈거리는 눈을 손으로 압박했다. 무수히 반사되는 찬란한 빛, 수없이 대칭되는 허상의 그림자, 층위에 층이 덮여지고 단위에 단이 쌓이며 장위에 장이 겹쳐지는 커다란 규칙 안에 분방한 무질서. 청사 내부는 완벽한 미궁이었다.

 반투명한 유리건물의 내부는 크리스털 거울로 사방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형형색색 빛나는 붉고 파랗고 노랗고 하얗고 푸른 수정이 비추는 세계는 어떠한 규칙도 없이 대상을 투영하여 복제하고 있었기에 사방팔방이 방향은커녕 위아래도 제대로 식별하기 힘든 환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는 잠시간 눈을 진정시킨 후 어떤 망설임도 없이 성큼성큼 미로 안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보통 사람이라면 서 있는 것조차 힘들 것 같은 공간을 빠른 걸음으로 스쳐 지나갔다. 놀랍게도 그는 아예 눈을 감고 있었으나, 걷는 동안 단 한 번도 어딘가 부딪치거나 두리번거리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자신의 불확실한 눈보다 더 확실한 다른 눈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낀 오른손의 4개의 커다란 반지들은 쉴 틈 없이 빛을 발했다.

 마침내 그는 미로를 빠져나와 베아트리체의 집무실에 도달했다. 청사 내 어디 위치해 있는지 도저히 짐작가지 않는 그곳은 보석거울의 영향으로 뒤죽박죽 세상인 건 여전했으나, 하얀 크리스털이 금색 빛을 뿜어낸다는 점이 달랐다. 그 빛은 베아트리체의 광채였다.

“베르길리우스 카르디날. 내 영원한 벗. 이렇게 와주어서 고마워요.”

 베아트리체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사방에서 들려왔고,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나 담겨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환영이 아니라 동일하게 나열된 실체라는 걸 알고 있는 베르길리우스는 진짜 그녀가 어디 있는지 찾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고 수많은 영상 중 하나를 마주보며 예를 표했다.

“설령 그곳이 지옥이라 하더라도 당신께서 부르시는데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후 정적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동안 상대를 지긋이 응시하던 두 사람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이렇게 장난을 쳐보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베르길리우스.”

“그렇군요, 베아트리체. 예전에 연극할 때는 정말 부끄러운 대사였는데 지금은 그저 그립기만 합니다.”

 두 사람은 플라톤이 플라톤이라 불리지 않고, 베아트리체가 베아트리체를 뜻하지 않으며, 베르길리우스가 베르길리우스가 아니었던 시절을 회상하며, 애틋한 미소를 지었다. 그로부터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그들은 아득한 세월을 걸쳐 꾸준하게 마모되는 자신들의 마음속에 아직도 옛일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와 두려움을 느꼈다.

“그럼 보고를 부탁드려요.”

 먼저 정신을 다잡은 건 베아트리체였다. 베르길리우스는 살짝 쓴웃음을 지은 후 시청 앞에 들어가기 전 준비했던 임무태세로 돌아가 세인트헬레나 5번가에서 있었던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시장에게 지시를 받고 세인트헬레나 5번가로 출동한 시각, 도착했을 때 이미 질서이탈자의 폭력에 능천사대가 희생된 현장, 그 질서이탈자가 전 아카데메이아의 부학장인 셀레스티나였던 사실, 거의 제압할 뻔한 질서이탈자를 회수해간 그녀의 등장까지. 베르길리우스는 최대한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 노력했다.

 본래 이런 보고는 흑천사대의 대장에게 먼저 해야 했으나, 베아트리체의 특명에 의해 베르길리우스 본인이 직접 전달하게 된 것이다. 어차피 흑천사장은 긴급평의회에 출석해야 했으며, 흑천사대 자체가 시장 직속의 특무기관인데다 예전에는 대천사대란 이름이었고, 당시 대천사장은 베아트리체였기에 실질적으로는 크게 문제될 게 없었다.
 베르길리우스가 보고를 마치자 베아트리체는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마술사와 성녀는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요. 이대로 간다면 충돌을 피할 길이 없겠네요.”

“그렇습니다. 이미 3년 전에 결정된 일이라 봐야겠지요. 아니, 인류가 암흑물질의 공포에 잠식당하기 이전에 시작되었을 겁니다. 우리가 아직 대지에 땅을 딛고 있었을 무렵부터 현자賢者와 기사騎士는 없는 것을 만들어내기로 마음먹고 있었으니까요.”

“곤란하게 되었네요. 마술사도 문제지만 성녀는 행성시대 전무후무한 최강의 기사. 아마 무력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겠지요. 역천사대의 적극적 방해제거 청구가 승인되면 모를까…….”

“죄송스럽지만, 힘들다고 생각되는군요. 역천사장은 누구보다도 도시의 안전과 균형만을 중시하는 인물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플라톤을 봉할 때도 잠자코 있지만은 않았겠지요. 물론 데미안이 힘써보기는 하겠지만 녀석의 천재성은 화술에서 드러나는 게 아니니……. 설령 우리 꼬마가 뱀의 혀를 가졌다고 해도 태산 같은 그분을 움직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겠군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확실하게 고지 받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베아트리체는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살짝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만약, 만약에 성녀가 날 노린다면 어쩌죠? 우리 부대에서 그녀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걱정 마십시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 위대한 기사가 노리는 건…….”

 베르길리우스의 말을 끊듯이 사방에 펼쳐져 있던 그녀의 실체들이 동시에 사라졌다. 그리고 단 한 명의 물결치는 금발머리의 여인이 베르길리우스의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그런 건 알고 있어요. 그래서 만약이라고 했잖아요. 대답해줘요.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누가 날 지켜줄 수 있나요?”

“그건…….”

“빈말이라도 내가 나서겠다고 말해줄 수는 없어요?”

“…….”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어색한 침묵만이 이어졌다. 베아트리체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서 떨어졌고, 다시 방안에는 11개의 실체가 사방을 차지했다.
 베아트리체는 웃는 듯 마는 듯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전부터 당신은 이런 종류의 농담에는 약했지요. 다른 건 잘 받아치는 주제에 말이에요.”

“천성이 못나서 어쩔 수 없습니다. 그보다…….”

“알아요. 위험한 건 내가 아니라 우리 의사선생님이죠. 가세요. 가서 당신의 옛 연인을 지키세요. 설령 그대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TRACKBACK 0 AND COMMENT 2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03.28 02:37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아아앗, 클로에가 잃어버린 기억의 편린 속에 이러한 과거사가 있었다니...! (쿠쿵)

    크흑;;; 결국 베르길리우스는 본격 나쁜(?) 남자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인가요오오오; 【 -잠깐, 그러고보니 피아도 있는데!!!;;- 】

    아무튼 토성천의 다중 보안 체계에 대하여 묘사해주신 내용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RPG 장르 컨텐츠에서 간혹 등장하는 퍼즐 형식의 던전 구조가 생각나서 간만에 이런 저런 추억 속에 빠져들기도 했답니다~ :D ( 에에... 예를 들자면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라거나!! )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03.28 21:55 신고 address edit/delete

      작중의 베르길리우스를 보면 은근히 카사노바(?) 기질이 있지요. 뭐랄까, 요즘 같으면 "리얼충 폭발해라!" 같은 대사를 듣기에 딱 좋을지도^^;;

      한데 사실 연인이었다고는 해도 두 사람의 관계는 전작 '밤하늘의 지평'에서 디오와 리아와 같이 플라토닉 러브에 가까운 것이라 조금 심심한 면이 없지 않나 있네요.

      또 작중의 시대는 가족개념도 형해화 되어 있고 생식도 무의미해진 터라 현대와는 연애 관념이 살짝 달라진 것도 있어요. 친구 사이보다 좀 깊숙이 사적인 영역까지 들어가도 되는 관계가 작중의 연인 사이에 가깝네요^^;; (...허나 무엇보다 문제는 베르길리우스에게 진짜 본심인 상대가 따로 있다는 것...;;; 이쪽은 차후 다루게 될 예정이에요.)

      앗, 말씀을 듣고 보니 위에 등장하는 보안체계는 확실히 게임의 퍼즐을 푸는 감각에 가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본격 지능계발 암호풀기! (...)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








03. 요동치는 벌떼 (6)


 세인트헬레나 5번가의 영구차가 도착한 곳은 코키토스 서부 외곽의 ‘죽은 자들의 쉼터’라 불리는 숲속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가 짙게 끼는 것으로 유명한 그 숲에는 말라비틀어진 몇 구루의 나무들 외에는 달리 눈을 둘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기에 어째서 영구차가 이곳으로 와야 하는지 의문을 품게 만드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허나 이 안개 숲에는 일반 시민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아니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숲에 도착한 영구차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마치 무언가를 은폐하고 있는 것처럼 겹겹이 싸인 안개를 뚫고 나아가자 곧 크고 하얀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콘크리트 덩어리로 만들어진 입방형의 전형적인 근대 건축물은 귀족의 저택이나 잘 꾸며진 수도원처럼 보이는 클로에의 병원보다도 훨씬 행성시대의 일반적인 의료시설 관념에 적합한 외견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9옥에 병원이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건 티마이오스 시스템에 의해 철저하게 정해진 규칙이었기에 이곳은 절대 병원일 수가 없었다.

 소각청燒却廳. 이 건물이 수행하고 있는 기능을 아는 자들은 모두 이곳을 그렇게 부른다. 다른 은유나 비유적인 명칭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반입되는 것을 태워 없애버리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목적에 걸맞게 소각청의 내부는 언뜻 번듯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숨이 답답한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구질구질한 회색양복에 검은 마스크로 입가를 가리고 있는 우중충한 사내들이었다. 잿빛신사라 불리는 이 소각청의 직원들은 이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소각로의 문을 열어 수많은 것들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들이 태우는 것은 주로 암흑물질에 오염된 코키토스의 폐기물이었다. 어떠한 보충도 없이 오로지 자체적으로 가진 것만을 영구히 순환시켜 살아가야만 하는 슬픈 도시의 가장 큰 적은 다름 아닌 유실물. 한갓 돌멩이부터 인간의 영혼까지 철저하게 재활용을 하는 이 놀라운 시스템 하에서도 암흑물질과 대치하며 잃게 되는 부분은 어찌할 수가 없었으며, 그것은 느리면서도 철저하게 한걸음씩 멸망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저주 받은 표식이었다.

 그러나 암흑물질에 완전히 침식되지 않은 대상물은 아직 회생의 가능성이 있었으며, 이 소각청은 그 오염된 물질들을 갱신시켜 조금이라도 도시의 유실물을 줄이기 위해 존재했다.

“빨리 움직여라. 곧 일거리가 쏟아질 거야. 원활하게 끝마치려면 평소보다 배는 민첩하게 움직여야 한다.”

 소각청의 최고관리자이자 모든 직원들의 감독을 맡고 있는 장의사 맥거핀이 목소리를 높여 직원들을 독려했다. 다른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멋없는 쥐색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그러나 다른 이들과 다르게 마스크를 쓰지는 않았으며 대신 그 자리에는 삐죽삐죽 거칠게 뻗어나간 풍성한 턱수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의 인상은 뱃사람처럼 매우 험악하게 보였으며 동시에 표정을 잘 읽을 수도 없었다.

“젠장, 벌써 도착했군.”

 배치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손놀림이 미숙한 부하 직원에게 본을 보이던 맥거핀은 창밖에 영구차에 도착한 것을 보고는 짧게 혀를 찼다. 어제 저녁 질서이탈자가 대대적으로 난동 피웠다고 하는 저 지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폐기물은 분명 장난이 아닐 것이다. 그의 짐작대로 10대에 가까운 영구차에서 잿빛 신사들이 운반하는 폐기물의 양은 평소의 다섯 배는 되어보였다.
 맥거핀은 창문을 열고 바깥의 직원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우선 사람부터 가져와, 사람부터! 유기체였던 건 죽어서도 침식이 멈추지 않는 일도 있단 말이다!”

 맥거핀의 호통에 몇몇 직원들이 재빠르게 폐기물을 뒤져 죽은 경관이나 시민들의 시신부터 운반하기 시작했다. 본래 코키토스 내에서 죽은 이들의 시체는 곧장 결합이 와해돼 성진으로 돌아가고, 그 영혼은 나비의 형상이 되어 원동천의 윤회판에 회수되었으나, 이탈자의 공격에 직접적으로 당해 오염된 시체는 유기구조가 변경돼 성진으로 돌아가는 일 없이 서서히 암흑물질로 변해 가며, 영혼도 그 죽은 육체에 사로잡혀 떠나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불꽃을 통해 정화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맥거핀의 독려에 잿빛신사들은 이탈자에게 죽은 이들의 시신을 재빠르게 소각로에 집어넣었고, 곧 불이 붙어 모든 걸 순식간에 재로 바꾸어 놓았다. 그 안에서 비로소 저주 받은 육체의 속박에서 풀려난 나비들이 애처롭게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이것이 바로 소각청의 맥거핀이 장의사란 꺼림칙한 별명으로 불리는 이유였다. 그가 장사지내는 건 시체뿐만이 아니라 도시 안의 온갖 폐기물이었으나, 역시 사람은 가장 인상에 강하게 남는 부분만을 멋대로 떼어내어 별명을 짓는 법인 것이다.

 간신히 시체처리를 완료한 후에야 맥거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암흑물질에 완전히 점령당하게 되면 시체라 하더라도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요즘 직원들은 그 위험성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다. 하기야 관리자인 자신을 제외하고는 전부 중위이하의 직무자인 이들은 수명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그런 위협을 피부로 실감하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죽은 채로 질서이탈자가 된 시체가 소각청을 반파시킨 사건이 일어난 지도 꽤 시간이 흘렀으며, 현재 이곳에서 그 악몽을 경험한 건 맥거핀 외에는 한 명도 없었다.

“지겹지 않나?”

 급한 일을 무사히 완료해 한숨 돌리는 맥거핀의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모든 직원들의 모습과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맥거핀은 금세 그 음성이 생소한 것이라는 걸 깨닫고 약간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어디서 들어왔는지 휠체어 탄 노인 하나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흰 가운을 입은 그자의 차림은 자연스럽게 의사를 연상시켰으나, 맥거핀은 제9옥의 유일한 의사는 저런 늙은 사내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상대가 가짜 의사라는 걸 금방 눈치 챘다. 어느새 주변에는 직원들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나 맥거핀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맥거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홀로 소각작업을 재개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세상에 어디 지겹지 않은 일이라도 있소? 모든 일은 익숙해지면 지겨운 법이요.”

“하지만 지겨운 일이라도 보람이 있을 수는 있지. 자네가 하는 일은 어떤가?”

“그런 게 다 뭔 소용이요. 어차피 우리는 모두 종말을 향해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것을.”

“그렇겠지. 자네들이 여기서 뭔가를 태운다는 건 이미 소실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 전제된 것이니 말일세. 아무리 이론상으로는 영구히 유지될 수 있는 순환체계라 하더라도 암흑물질의 침입이 계속되는 이상 끝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뭘 묻는 거요.”

 맥거핀은 본래 붙임성이 좋은 편이라 할 수 없었지만, 가짜 의사가 나타난 이후로는 더욱 심기가 불편한 듯했다. 그러나 가짜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럼 왜 내가 살아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 라고 질문을 바꿔볼 걸 그랬나?”

“그것도 놀랍지 않소. 당신은 가짜 신부나 가짜 의사이기 이전에 탁월한 마술사요. 당신이 관객을 현혹하는 뛰어난 무대연출가라는 사실은 익히 잘 알고 있소이다. 먼 옛날, 백합문장의 구국성녀를 구할 때 이미 그 뛰어난 수법을 만천하에 공개했으면서 이제 와서 뭘 새삼스럽게 놀라기를 바라시오?”

“뛰어난 마술은 몇 번을 봐도 설레는 법이지. 설령 그 실체를 알았다고 해도 나오는 것은 실망이 아닌 탄성의 목소리고.”

“난 마술 자체가 싫소이다.”

 맥거핀은 명백하게 대화가 계속되는 걸 원치 않고 있었다. 단지 일에 전념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눈앞의 가짜 의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그는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상대의 말을 쳐내버렸다. 허나 가짜 의사 또한 녹록치 않았다.

“걱정 말게. 실은 나도 마술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네.”

“그럼 왜 찾아온 거요. 한가하게 유랑하고 다닐 정도로 사정이 좋지는 않은 걸로 보이는데.”

“물론 엄연히 목적이 있어 왔네. 난 자네가 왜 이 세상을 용납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걸 묻고 싶어 왔어. 이 좁은 세상에서 자네처럼 매일매일 이 세상의 종말을 마주 접하는 자도 없지. 한데, 어째서 절망하지 않는지 그게 의문이라네. 학자 나부랭이의 몹쓸 천성이지.”

“맞는 말이군. 잘 알고 있으면 빨리 고치시오. 그리고 난 이 세상을 용납하고 있는 게 아니오. 그저 아무런 희망도 가지고 있지 않을 뿐이지. 희망이 없다고 해서 꼭 절망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소.”

“음,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하기에 절망할 의의조차 두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럴 듯하게 꾸미자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거요. 솔직히 나는 왜 베아트리체가 플라톤에게 그리 반감을 가지는지 이해할 수가 없소. 오히려 플라톤의 방식이 조금이라도 이 도시의 내구성을 길게 지속시킬 가능성이 크지 않소? 최대한 버티는 동안 이 빌어먹을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을지도 모를 노릇이고. 대체 이런 상황에서 조금 인간답게 생활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냔 말이오. 어차피 그 물이나 이 물이나 똑같이 똥물은 마찬가지인데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건지 원…….”

 맥거핀은 그답지 않게 툴툴거리며 불만을 토했다. 시민의 대다수가 환영하는 베아트리체의 정권교체를 맥거핀은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굳이 구분을 하자면 차라리 플라톤 원리주의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플라톤의 마지막 계획이 결국 빛을 보지 못한 걸 아쉽게 생각했다.

 본래부터 철저한 통제정책을 펴오던 플라톤은 말년에 비밀리에 어떤 계획을 세웠다. 간단명료하게 ‘완전통제정책’이라 불리는 이 계획은 모든 시민들의 감정을 봉쇄하고, 그 숫자도 필요최소한만을 운영하여 최대한 에너지 결손을 막아보겠다는 극단적인 방책이었다.

 결국 이 시도는 사전에 밝혀져 사람들의 공분을 사게 되었으며, 전부터 플라톤의 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대천사장 베아트리체가 일종의 쿠데타에 성공함으로써 현재 시장에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시민 대다수는 자신들의 삶과 의지마저 철저하게 시스템 하에 종속시키려 한 플라톤을 증오하고 그것을 막아낸 베아트리체에게 감사를 표했으나, 맥거핀과 같이 주류와는 생각을 달리 하는 사람도 많았으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이들이 바로 플라톤 원리주의자였다.
 가만히 맥거핀의 말을 경청하던 가짜 의사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만약 어떤 대가를 치르는 대신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자네는 어떻게 하겠는가?”

“이 껍질만 남은 가짜 인생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을 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겠소.”

“설령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된다 하더라도 말인가?”

“그렇소. 애당초 내게는 지금 이 순간순간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오. 지금도 이미 내가 나로서 제대로 살고 있다고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상태지. 그럴 바에야 목숨을 잃건 기억을 잃건 무엇을 잃건 내가 어떻게 되든 간에 이 썩은 물에서 빠져나오는 걸 우선할 것이오.”

"훌륭한 대답이네! 그 보답이라 하기에는 우습지만 특별히 자네에게는 내 멋진 것을 보여주지.”

 가짜 의사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품속에서 오색으로 빛나는 유리로 만들어진 무언가를 꺼냈다.

“그게 뭐요. 꽃?”

“잘 보게나.”

 가짜 의사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소각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폐품더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맨손으로 만진다면 건드린 사람까지 침식당할 가능성도 있는 오염상태가 심각한 폐기물이었다. 맥거핀이 말릴 틈도 없이 가짜 의사는 그것을 집어든 후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는 꽃을 가까이 대었다. 그러자 환한 빛이 나면서 폐기물에 붙어있는 암흑물질이 깨끗이 씻겨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맥거핀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가짜 의사가 들고 있는 정체불명의 꽃에서 발산하는 빛은 파괴하여 정화하는 소각로의 불꽃과 달리 본래 그 사물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회복시키며 더러운 어둠의 성분만 감쪽같이 털어내는, 어떤 의미로는 거의 창조에 가까운 현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암흑물질을 처음부터 없는 것처럼 배제할 뿐만 아니라 침식당한 사물까지 되돌리는 마술은 그에게 있어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가짜 의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경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장의사를 향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술이 싫다면 기적은 어떤가?”






 우리는 실패했다. 그녀를 낳아준, 아니 만들어낸 부모라고 할 수 있는 외톨이 마녀는 입버릇처럼 그런 말을 하곤 했다. 외톨이 마녀는 언제나 음울한 얼굴로 곧잘 한숨 섞인 푸념을 늘어놓았고 피아는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들으며 구성됐다.

 아이는 부모를 닮는다고 했던가. 피아 역시 지금처럼 기분이 어둡게 가라앉는 날이면 어김없이 실패한 이야기들이 떠올라 버렸다. 그녀가 떠올린 실패는 두서없이 중구난방이었다. 사람의 실패, 구원의 실패, 플라톤의 실패, 베아트리체의 실패, 마녀의 실패, 베르길리우스의 실패, 그리고 스승의 실패…….

“시끄러워!”

 피아는 거칠게 소리치며 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규정상 미등록자 혼자서는 칼집에서 검을 뺄 수가 없었기에 둔중하게 허공을 가르는 감촉이 탐탐치 않았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휘두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계속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쓸데없는 생각 때문에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피아가 현재 있는 곳은 흑천사대의 지하숙련실이었다. 이 장소는 행성시대 인류의 온갖 정수를 모아 건립된 코키토스 안에서도 특별한 공간이었다. 이 숙련실에서는 환상을 거의 실재와 같이 구현할 수 있는 특수한 기능이 부가되어 있었고, 흑천사들은 자신의 상상력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갖은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거치며 실력을 쌓아갈 수 있었다. 이런 시설물의 구축은 사물을 구성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베아트리체만이 해낼 수 있는 위업이었으며, 슬픈 도시의 시장은 자신의 직속 기관인 흑천사대에게만 특별히 혜택을 베풀어주었다.

 많은 것이 제약되어 있는 피아에게도 흑천사대의 숙련실만큼은 자유로운 이용이 허가되었기에 그녀는 생각을 정리할 일이 있으면 자주 이곳에서 마음을 다스렸다. 물론 다른 사람이 있다면 감히 소리를 지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으나, 그녀의 주인은 사후보고를 하기 위해 지고천에 올라가 있었고, 다른 대원들은 여전히 곳곳에서 출현하는 암흑물질과 질서이탈자의 대응에 바빠 숙소는 텅 비어있었기에 지금은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마음껏 원하는 환상을 풀어내어 화풀이를 할 수 있을 터였지만 현재 피아의 주변에는 짙게 깔린 어둠만이 빈 공간을 점령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로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잡념이 사라지기를 원한 그녀는 무아지경으로 허무의 공간에 보이지 않는 궤적을 그리는 일에만 몰두했다.

 허나 아무리 몸을 혹사시켜도 잡념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잡념은 망념으로 변해 더욱더 그녀의 정신을 옭아매었다. 난 실패했어. 그녀는 어느새 질색이었던 외톨이 마녀의 입버릇이 옮았다는 걸 깨닫지도 못한 채 끊임없이 속으로 그런 말을 되뇌었다. 결국 자신은 세인트헬레나 5번가를 폐허로 변하는 걸 막지 못하고, 질서이탈자까지 놓쳐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을 굳게 믿어준 주인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런 자기혐오가 그녀의 마음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잔, 어째서……!”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그녀를 괴롭게 만든 건 스승의 배신이었다. 물론 스승이 변절했다는 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직접 날붙이를 마주한다는 건 생각보다 견디기 힘든 경험이었다. 단련을 위한 보살핌과 목숨을 빼앗기 위한 흉수는 비슷해 보여도 그 뒤에 숨어있는 살의의 총량은 천양지차였고, 그 간격만큼이나 충격도 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는 스승에게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오로지 슬프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토록 실패만 거듭해 온 스승이 어째서 인류의 종착점이라 부를 수 있는 이 슬픈 도시에서도 어김없이 곤두박질치려 하는지, 스승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피아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도 불행하면서 왜…….”

 피아는 외톨이 마녀가 멋대로 도시 안에 숨어살며 금지된 인조혼의 연구에 손을 대었다는 죄목으로 퇴치 당한 후 갈 곳 없이 처분만을 기다리다 극적으로 베르길리우스에게 거둬졌다. 그 후 피아는 베아트리체의 배려에 의해 같은 미등록자이자 행성시대를 기준으로 잡아도 오래된 연혁을 자랑하는 위대한 영혼인 잔 다르크에게 훈육을 받았다.

 자원의 낭비와 불확정요소의 출현을 피하기 위해 본래라면 소거되었어야 할 피아가 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흑천사의 위협적인 칼날로서 제련되어 쓸모를 보이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같은 미등록자로서 슬픈 도시의 냉혹함을 잘 알고 있는 잔은 주어진 기간 동안 온 힘을 다해 피아를 단련시켰다.

 겨우 묘령의 나이에 천사의 계시를 받아 가냘픈 여자의 몸으로 불리한 전쟁을 뒤집고, 배신당한 후에도 죽음을 위장해 역사의 그늘 속에서 수많은 수라장을 헤쳐 온 잔 다르크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기사였기에 그 아래 철저하게 수련을 받은 피아는 일취월장 성장해 나갔다.

 시간이 촉박한지라 잔의 단련은 엄격하고 힘들었지만 꼭 괴롭지만은 않았다. 잔은 무뚝뚝하고 대쪽 같으면서도 상냥한 성품의 소유자인지라 육체적·기술적인 단련 외에도 과거 자신이 행성시대에서 겪었던 여러 무용담을 들려주며 피아에게 버팀목이 될 만한 삶의 지침 등을 전수해주었다.

 스승이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는 눈을 빛내며 귀담아 들을 만큼 흥미진진했으나, 잠들기 전 곰곰이 떠올려보면 우울해지는 비극적인 일화이기도 했다. 원래대로라면 화형 당해 죽었어야 할 그녀가 반영구적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일들은 하나 같이 실패로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피아는 감히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은 잔을 이해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녀가 뭘 원하고 있는지, 어디에 매달리고 있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거기서 유추할 수 있는 잔의 바람은 인간이 제작하여 불완전한 영혼을 소유하게 된 피아에게는 너무나도 슬프게 느껴졌다.
 피아는 그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참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며 자문자답하듯이 외쳤다.

“그래서 당신은 신神을 바라는 거야? 그래! 언젠가 흩어질 우리들은 너무 덧없을지도 몰라. 그에 비하면 영속적이고 완벽한 절대자는 참으로 매력적으로 보일 거야. 그래도 우리는…….”

 그러나 피아는 끝까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무無에 근접한 어둠자락이 점령하고 있던 숙련실의 풍경이 갑자기 오색찬란하게 빛을 발하며 변모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건 누군가의 상상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마 대원들 중 몇몇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피아가 숙련실의 장치를 작동시키지 않은 건 눈을 현혹시킬 환경을 만들지 않아 잡념을 떨칠 의도도 있었지만 동시에 누군가 이 근처에 왔을 시 빨리 알아챌 목적도 겸하고 있었다. 주인인 베르길리우스나 거의 유일한 이해자인 룸메이트 클로디아를 제외한 다른 흑천사 대원들은, 기숙사 수위인 화이트헤드만큼은 아니더라도 미등록자이자 인조혼인 피아를 별로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불청객과 마주치기 전에 어서 숙련실을 떠나기로 했다.

 피아는 특유의 감정처리로 방금 전까지 고양되었던 흥분을 재빨리 가라앉히고 뒷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한걸음만 더 떼면 나갈 수 있는 순간 그녀는 점차 형체를 이루는 풍경을 바라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건 대체…….”

 변모를 마친 주변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녹색 들판, 그에 짝을 이루듯이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하늘, 그리고 그 위에는 지고천의 조명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는 구체가 하나 떠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그것이 책에서나 본 태양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피아는 도무지 눈을 땔 수가 없었다. 난생 처음 보는 풍경이라 그렇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환상의 무게가 달랐기 때문이다. 보통 그녀 자신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만드는 환상은 아무리 감쪽같아도 곧 허물어질 것 같은 모래성 같이 엉성한 이질감이 내포되어 있었으나 눈앞에 펼쳐진 이 풍경에는 그런 허점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녀가 살아가는 코키토스보다도 훨씬 현실감 있는 질감이 느껴졌다. 항상 얼어붙은 겨울의 풍경만을 알고 있는 피아에게 있어 생명과 빛으로 가득 찬 초원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어라, 피아! 돌아왔네? 먼저 와 있었으면 있다고 말하지 그랬어.”

 환상에 눈이 멀어있던 피아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그녀는 아차, 하면서 입술을 깨물었으나 숙련실에 들어온 사람이 다름 아닌 클로디아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클로디아. 잠시 딴 생각을 좀 하느라… 그런데 옆에 그분은 대체 누구시죠?”

 믿을 만한 사람을 만나 마음을 놓고 있던 피아의 눈매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클로디아의 옆에 어떤 여성이 서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붉은 기가 도는 긴 갈색머리를 늘어뜨린 젊은 여성은 비록 흑천사대의 제복을 입고 있기는 했으나 여태까지 한 번도 접한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피아는 아무리 흑천사대에서 받는 대우가 나쁘다고 해도 자기 부대의 대원들 신상은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새로운 대원이 들어온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었기에 곧 이 정체불명의 여성이 위장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무엇보다 여성은 자기 몸보다도 훨씬 커다란 대도를 마치 손가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손으로 가볍게 들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경계심이 솟구쳤다.
 찌릿찌릿 하는 긴장된 공기를 읽은 클로디아는 급히 중재에 나섰다.

“아, 미안해. 소개부터 했어야 했는데 그만 깜빡했네. 이쪽은 역천사대의…….”

“신시아 솔이야. 잘 부탁해.”

 여성은 클로디아가 소개를 마치기도 전에 앞으로 한걸음 나와 자기 이름을 밝히며 손을 내밀었다. 피아는 그녀의 손을 잡는 대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역천사 분이셨군요. 저는 피아 녹턴이라고 합니다.”

“알고 있어. 다중검의 피아 녹턴이라면 우리 대원들 사이에서도 유명하거든. 인과융화유동체, 진짜 천사에게 받은 성물을 복제한 무기라니,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거니까.”

 신시아라고 이름을 댄 여성은 전혀 어색한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내민 손을 거두어드리며 추켜세우는 말을 건넸다. 사실 피아가 유명한 건 그녀가 가진 무기보다는 인조혼 주제에 처분 받지 않고 오히려 준準 고위직무자로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으나, 신시아는 굳이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허나 피아는 그 어설픈 배려가 어딘지 동정이나 조롱처럼 들려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피아는 화를 참기 위해 특별히 신시아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클로디아를 향해 조용하지만 어딘가 가시 돋친 어조로 추궁하듯이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외부인을 숙련실에 들이는 건 중대한 규정위반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으음, 그건 피아만 입을 다물어주면 괜찮아.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암흑물질 소거에 정신이 없어서 신시아가 여기 온지도 모를 걸?”

 자유분방한 클로디아는 다들 미등록자라고 꺼리는 피아와 사이좋게 지낼 만큼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인 만큼 한편으로는 웬만한 일은 들키면 범죄가 아니라는 다소 위험한 사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피아 역시 클로디아가 걱정되어 신경을 곤두세운 것뿐, 그녀가 괜찮다면 특별히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경계심을 조금 늦추었다.

“후우, 어쩔 수 없네요. 알았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고마워!”

 클로디아는 어린애처럼 기뻐하며 피아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피아는 살갑게 구는 클로디아의 행동이 싫지는 않았지만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는 아무래도 부끄러웠기 때문에 재빨리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 그나저나 저분은 무슨 일로 데려오신 건가요? 혹시 대련이라도 하실 생각이세요?”

 흑천사대의 숙련실은 어떤 상황이든지 당사자의 상상력이 닿는 한 구현이 가능하기에 혼자 기술을 갈고닦는 건 물론 대련이나 단체모의전을 하기에도 제격이었다. 물론 클로디아는 딱히 호승심이 강한 성격이 아니었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신시아라는 역천사가 들고 있는 포악해 보이기까지 하는 큼지막한 대도를 보자 자연스럽게 그런 연상이 되었던 것이다.
 클로디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이 풍경을 보여 달라고 하고 싶었어.”

“설마…….”

“응. 신시아도 네 마스터와 마찬가지로 생존자야. 과거 이야기는 들려줄 수 없다고 해서 하다못해 그 시절에 관련된 환상이라도 보고 싶다고 했지. 근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멋져서 두근거려! 정말 굉장하지 않아?”

 이제야 피아는 왜 클로디아가 무모하게 역천사에게 제복까지 빌려주어 이런 금단의 장소에 몰래 들어오게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평소 클로디아는 제9옥이 세워지기 전에 인간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던 소위 행성시대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으며, 정보제한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 탐구에는 열의가 붙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가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생존자와 알게 되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시절의 일을 끌어내려 노력할 것은 명약관화였다.

“어쩐지 풍경이 너무 생생하다 싶더니만……. 이게 바로 행성시대의 진짜 하늘이 품고 있는 모습이었군요.”

 경계심이 사라지자 피아는 다시금 솟구치는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슬픈 도시의 정경보다도 더욱 실재 같은 옛 자연의 모습은 그 축복 아래서 자라지 못한 이들의 마음을 꽉 움켜쥐는 신비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머릿속에는 이런 의문도 생겨났다. 어째서 사람들은 이런 풍경을 잃게 된 것일까. 인류가 이 작은 도시에 갇혀 살게 된 재앙이 벌어진 건 거대한 전쟁의 발발이 그 시초라고 들었는데 대체 이런 하늘 아래서 어떻게 싸울 수가 있단 말인가.
 이래저래 복잡한 기분으로 골치를 썩이는 피아와 달리 클로디아는 순수하게 기뻐하며 말했다.

“아아, 책으로만 보던 모습을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다니……. 정말 고마워요, 신시아!”

 신시아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야말로 고맙지. 비록 환상이라고는 해도 생전에 봤던 태양을 또 한 번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말이야. 하여간 베아트리체 님도 너무하다니까. 우리한테도 이런 시설 좀 마련해주면 얼마나 좋아?”

“후후, 그러게요.”

 클로디아와 신시아는 킥킥거린 후 다시 행성시대의 자연을 감상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들뜬 기분으로 사방에 눈을 옮기느라 바쁜 클로디아와 넓고 푸르른 창공을 그리운 눈으로 올려다보는 신시아. 특히 한손으로 쏟아지는 빛을 가리면서 해바라기처럼 태양을 좆는 우수에 젖은 신시아의 눈동자를 훔쳐보며 피아는 처음 경계하느라 잔뜩 가시를 세운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겼다.

 신시아 솔. 거짓 없이 드높은 창공 아래서 자라왔을 그녀에게는 얼마나 지고천의 인공조명이 시시하게 느껴질까.






TRACKBACK 0 AND COMMENT 2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03.25 15:34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점차 결손 부분이 증대되어가며 자체수복기능 상의 균열이 발생하는 코키토스와, 그 궤적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 필연적 멸망의 숙명을 유예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영웅들의 이야기...!

    그 장엄한 서사시의 궤적 위에서, 코키토스의 향방을 결정지을 또다른 대사건의 전조가 펼쳐지려 하고 있군요.

    과연 각자의 비원을 품고 모여든 그와 그녀들은 어떠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인지 다음 화의 이야기도 사뭇 기대가 되네요~ >_<)


    덧 - 세인트 헬레나 5번가를 덮친 대참극의 잔영들을 하나 둘 일소해나가는 소각청의 황량한 풍경 위로, 불현듯 매스이펙트 3에서 등장하는 크로건 여성의 장례식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답니다. 아아, 필시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행복의 가능성을 강탈당한 채 속절없이 떠나가야만 하는 자와 그를 바라보는 이들의 심경이란 얼마나 쓸쓸하면서도 서글픈 것일까요... ;ㅁ;

    덧 2 - 아앗, 잔 다르크에게 이러한 반전이...!!;;; (두둥)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03.26 00:44 신고 address edit/delete

      말씀처럼 작중의 코키토스는 극도로 폐쇄된 공간인 데다 새로운 물자 등의 유입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점차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지요.

      이 방주형 도시의 인류는 유한을 통해 무한을 만들어야 한다는 모순적인 과업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에 한층 그 결손이 치명적으로 다가오는데, 이 부분은 차후 전개에서 좀 더 자세하게 밝혀질 예정이에요.

      으, 기대하시는 바에 조금이라도 미치는 내용이 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과연 어떠할지 두근두근하네요^^;;; 아무튼 힘내겠습니다!


      덧. 아쉽게도 말씀하신 작품을 즐겨보지는 못했지만, 유명한 게임의 한 장면을 떠올려 주실 만큼 일부라도 괜찮은 부분이 있었다면 참 기쁠 듯싶어요>.<

      ...음, 정말 누려야 할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비명횡사한 이들의 모습과 이야기는 언제 보고 들어도 안쓰럽지요······. 그런 면에선 모든 선행이 보상 받고 모든 악행이 처벌 받는 사후세계를 꿈꾸는 심정도 아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덧2. 작중 잔 다르크의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종종 등장할 예정~ 제 이야기의 잔 다르크도 부디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하는 수많은 그녀들과 구별될 만한 차이점이 있다면 좋겠어요^^;;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








03. 요동치는 벌떼 (5)


 어두침침한 방. 빛이 희귀한 그곳은 오래된 먼지가 섞인 눅눅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건 낡고 정체되어 잠시라도 눈을 멈춰 감상할 만한 빛나는 가치는 어느 부분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세월의 흐름에게 버림받은 그 장소에는 휠체어에 탄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는 한 사람이면서도 두 사람이었다. 동일한 존재인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가짜 신부’였고, 다른 하나는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흰 옷을 입은 사내였다.
 가짜 신부는 비탄에 잠겨 입을 열었다.

“아아,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우리는 신神을 잃고 말았다. 만물을 창조하고 세상에 이치를 다스리고 시작이자 끝인 그는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정녕 죽고 만 것임에 틀림없다!”

 흰 옷의 사내가 잔뜩 조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무슨 우스운 소리를 하나. 조물주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 신이란 그저 사랑, 정의, 우정과 같이 사람이 만든 한갓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완벽하면서도 불완전한 세상을 만들고, 신성의 극치라면서도 인격적이며, 시작과 끝을 아우른다면서도 현재에 포착되지 않는 그런 존재 따위는 있을 수도 없거니와 있다 하더라도 간섭은커녕 양자 간 서로 인식조차 할 수 없다. 그러하니 신이 죽었다는 말은 자칫 그릇된 착각을 유도할 수 있는 매우 잘못된 발언이다. 진정한 의미로 신의 죽음을 말해야 한다면 그저 그의 부존不存을 깨달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가짜 신부는 팔을 크게 저으며 항의했다.

“어찌하여 자네는 그리 침착할 수 있는가! 우리는 신을 잃었기에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다. 사랑하는 별을 잃고 어둠에 갇혀 벌벌 떠는 벌레만도 못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아! 어째서 우리는 신을 구하지 못한 것인가! 신을 죽인 건 치명적인 실수였다. 우리는 그를 살려두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런 신세가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흰 옷의 사내는 험상궂은 인상을 지으며 가짜 신부를 질책했다.

“정신을 가다듬어라! 신이란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니라 단지 처음부터 없었다는 거라 이미 가르쳐주지 않았는가. 자네는 여전히 착각을 하고 있다. 사람은 신을 잃었기에 멸망한 게 아니라 너무 늦게까지 그것을 붙잡고 있었기에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우리는 좀 더 신의 그림자에서 빨리 벗어나야 했다. 그렇다. 사람이 간신히 신이란 허상이 내리는 저주에서 벗어나 넓은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는 이미 지나치게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정신에 비해 가지고 있는 힘은 주제넘게 비대했다.”

 가짜 신부가 힘없이 팔을 내리며 동의했다.

“맞다. 그래서 우리는 신의 죽음에 진정 비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무엇이든지 될 수 있고, 어디든지 갈 수 있으며, 어떤 미래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아서는 안 되었다. 주체 못할 힘은 결국 스스로를 멸하는 독毒밖에 되지 않는 법. 우리는 만물의 ‘아버지’를 설정하고 따르는 것으로서 자제해야 했던 것이다.”

 흰 옷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부존하는 창조주의 기만에서 벗어나 직접 고개를 들 수 있게 된 건 눈물을 흘리며 기뻐해야 할 영광스러운 순간이다. 그 가치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는다. 비록 뒤늦게 깨어난 자유로운 정신이 제대로 자리 잡히기도 전에, 기나긴 세월 동안 사람을 속박해온 신의 저주로 우리 자신이 스러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하더라도, 각성의 순간은 변할 수 없는 엄연한 진리의 한 장면인 것이다.”

 가짜 신부는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 안으며 흐느꼈다.

“아아,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신이 있건 말건 사람이 위대하건 보잘것없건 그런 건 전부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중요한 건 이미 사람은 사람이 아니게 되었고, 종언을 체현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아, 하늘의 아버지시여! 불쌍한 저희를 도우소서…….”

 흰 옷의 사내가 진저리를 쳤다.

“그런 쓸데없는 기도는 집어치워라! 아무리 기다려도 그자는 오지 않는다. 하염없이 기다려봤자 주어지는 건 실망과 절망뿐이다. 희망은 그곳에 없다. 그렇기에 오지 않는 이를 그린 사람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여러분, 여기에는 신은커녕 철학이나 사상조차 없습니다. 그저 광대들을 보고 웃고 집에 돌아가서 인생이나 곰곰이 씹으면 되는 겁니다!』라고.”

 그러나 가짜 신부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에게 돌아갈 집 따위는 없다.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니 곱씹을 ‘인’생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면 남은 건 기다리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아아, 아버지시여…….”

 흰 옷의 사내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쩔 수 없구나. 정녕 신의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가짜 신부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오오, 무슨 수라도 있는 건가? 부디 들려주길 바란다.”

 흰 옷의 사내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이것을 보아라.”

 가짜 신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그 꽃봉오리는…….”

 흰 옷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껍질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이 꽃 또한 잎을 풀어헤치고 피어날 것이다.”

 가짜 신부는 경이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아, 자네는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

 흰 옷의 사내가 엄숙히 선언했다.

“없다면 만들어낼 뿐이다.”

 흰 옷을 입은 사내는 천천히 또 다른 자기 자신에게 다가가 입고 있던 백색의 가운을 벗어 그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이로써 휠체어에 앉아있던 ‘가짜 신부’는 ‘가짜 의사’가 되었다.






 지고천의 태양은 언제나 같은 시간에 떠올라 같은 빛의 총량으로 도시를 비춘다. 모모는 어김없이 밝아지는 바깥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쫙 폈다. 오늘 아침은 매우 상쾌하다. 비록 저 푸른 하늘이 인공으로 만들어진 방천경의 색깔이라 해도 한없이 펼쳐진 창공은 올려다보는 이로 하여금 개운한 기분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모모는 한 번도 진짜 하늘을 본 적이 없었기에, 그녀에게 있어서는 저 인공의 천체가 떠있는 허공이야말로 진짜 하늘이었다.

 오늘은 눈보라가 불지 않는 화창한 아침이었다. 안테노라의 계절에는 곧잘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눈보라가 불어 닥치곤 하지만 항상 그런 험악한 기후가 계속되는 건 아니다. 때때로 이렇게 따스한 햇살이 도시 전체를 포근하게 감싸는 날도 있는 것이다.

 물론 애초에 제9옥에 구름 따위는 없고, 눈보라 또한 외부우주의 간섭에 의해 발생하는 부작용 같은 것이다. 눈 폭풍이 거리를 강타하는 날도 밝은 햇빛은 여전히 쏟아졌으며, 그 지고천의 태양광에 눈송이들이 반짝거려 꽤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모모는 역시 오늘처럼 맑은 날이 좋았다.

 대충 준비를 끝낸 모모는 푸르게 펼쳐진 창공에 맞춰 하늘색 에이프런을 꺼내 입었다. 이 앞치마는 선대 모모가 직무를 완료하고 마지막 남은 6개월의 휴가를 떠나기 전에 남기고 간 것이다. 좀 낡긴 했지만 부드러운 옷감에 즐거운 추억이 한데 얽혀 있는 소중한 물건이었다. 모모가 이 앞치마를 입는 날은 어지간히 운수가 좋다고 여겨지는 날뿐이었다.

 모모는 꽃집을 열었다. 물론 여기서 열었다는 건 가게영업을 시작했다는 의미로 문을 활짝 열어두거나 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날씨가 좋다 해도 코키토스는 얼음의 도시. 이곳의 비정상적으로 얼어붙은 공기는 모모 자신에게도, 그리고 그녀가 돌보는 꽃들에게도 좋지 않았다.

“많이 배고팠지? 오늘도 무럭무럭 자라렴.”

 모모는 별빛 뿌리개를 가져와 꽃들에게 양분을 주며 미소 지었다. 가게 안을 화사하게 꾸미고 있는 이 모든 화초들은 생긴 모습과 다르게 진짜 식물은 아니었다. 행성시대에 있었다는 동·식물은 거의 다 사라진 채 몇몇 종자만이 태양천太陽天에 엄중히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

 모모가 키우고 있는 꽃들은 코키토스의 지하공장에서 만들어낸 일종의 광자체光子體였다. 빛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이들 식물 유사품은 행성시대의 산소와 질소처럼 제9옥에 가득 차 있어 사람들의 호흡을 가능하게 해주는 성진星塵의 도움으로 이렇게 구체화되어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모모가 들고 있는 물뿌리개에 담긴 ‘별빛’은 그러한 성진을 액상화시킨 것으로 이들 유사 식물들에게 있어서는 필수적인 영양요소였다.

“후후. 얘들아, 어때? 맛있니?”

 모모는 가게의 꽃들을 ‘아이들’이라 부르며 매우 아꼈다. 티마이오스 시스템에 의해 강제로 심어진 관념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모모의 꽃에 대한 사랑은 선대 어떤 모모보다도 순수하고 깊었다. 엄밀한 의미로는 생명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이 가짜 꽃들을 돌보기 위해 그렇지 않아도 얼마 안 되는 수명이 더 줄어들었다는 것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가게의 꽃들을 애지중지하는지는 명확했다.

 1시간에 걸쳐 가게 안의 모든 꽃들에게 별빛을 투여한 모모는 이제야 한숨 돌려 늦은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대개 코키토스의 주민들은 식사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위 직무자 이상의 사람들에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모모와 같이 하위직무자에게는 그들처럼 굶어도 체력을 유지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식사와 수면을 제때 취해주지 않으면 건강을 상할 염려가 있었다.

 모모의 아침식사는 전에 시장에서 사온 인스턴트 파스타였다. 그녀는 대부분 식사를 인스턴트식품이나 통조림으로 해결했다. 그녀는 요리하는 법을 몰랐다. 태어날 때 주어진 세계관과 상식에는 요리하는 법까지 입력되어 있지 않았으며 제대로 손발을 놀리게 된 후부터는 가게를 이어받고 꽃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요리를 가르쳐 줄 사람이 없었다. 요리책을 사기에는 가게를 유지하고 생필품을 사는 데도 급료가 너무 빠듯했으며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것도 그녀 같은 하위직무자는 이런저런 절차가 까다롭기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모모가 돈을 내지 않고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클로에의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일뿐이었다. 그것도 그나마 베아트리체 시장의 복지정책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플라톤 시대에는 죽기 전 반년휴가는커녕 수명검진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낙천적인 모모는 그 사실에 대해 별다른 불평을 갖지 않았다. 어쩌면 그 또한 티마이오스 시스템에 의해 입력된 감정에 불과할지 모르나, 그녀는 어찌할 수 없는 일로 고뇌하는 것보다는 그저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는 걸 즐겼다. 몇 년 안 되는 짧은 인생이기에 되돌아볼 추억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모모는 반추를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모모가 떠올리고 있는 추억은 언젠가 클로에와 에스텔과 함께 진짜 파스타 가게에 찾아갔던 일이었다.

 클로에와 에스텔은 우연한 기회에 서로 식성이 비슷한 걸 깨닫고 의기투합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위직무자들은 필요성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하위직무자들은 평범하게 생활하기에도 벅차기 때문에, 음식 자체에 대해 별 흥미가 없는 이 도시에선, 먹거리에 관심이 있다는 취미 자체가 식성을 떠나 동질감을 느낄 만한 요소이기도 했다. 어쩌면 외견상 비슷해 보이는 동년배의 여성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정체된 슬픈 도시에서는 직장동료 외의 친구를 찾는 일도 결코 쉽지 않았다.

 언뜻 그런 두 사람의 관계에 모모가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어 보였다. 클로에는 코키토스의 유일한 의사, 에스텔은 능천사대의 경찰간부. 고위직무자인 두 사람에게 설령 차별적인 의식이 전혀 없다 하더라도 하위직무자 중에서도 가장 바닥에 속하는 단순노무자인 모모와는 벽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선 물리적으로 같이 어울릴 시간이 부족했다. 클로에의 경우 병원이 한가한 것도 있지만 확실하게 쉬는 날이 보장되어 있었다. 에스텔 또한 특별한 사건이 없는 경우에 한해서 비번인 날에는 마음대로 자기 시간을 활용할 수 있었다. 반면 모모는 주7일 근무로 모두가 잠드는 저녁시간을 제외하고는 규정상 한시라도 가게를 뜰 수 없었다. 그러나 클로에의 변덕스럽고 매사 강하게 밀어붙이는 성격이 모든 걸 가능하게 했다.

 어느 날 가게에 꽃을 사러 온 클로에는 갑자기 놀러나가고 싶어졌다며, 평소 아끼는 모모와 몇 안 되는 친구인 에스텔을 불러 거리로 나가자고 했다. 에스텔은 다행히 비번이었지만 휴일이란 개념 자체가 없는 모모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난처해하는 그녀를 보고 클로에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곧장 시청에 전화를 걸어 급속으로 수속을 완료해 모모의 일일휴가를 얻어냈다. 고위직무자 중에서도 가장 상위에 위치한 S급 직무자이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 아니면 다른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모모는 자기 입장에서는 감히 우러러볼 수도 없는 시장에게 사적인 통화를 걸어 허가를 받아내는 클로에에게 일종의 경외감마저 느꼈다.

 허나 그녀들과 함께 거리로 놀러나간 모모는 곧 불편한 마음을 잊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맛본 휴식인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클로에와 에스텔, 두 사람이 매우 친절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모모를 하위직무자라기보다는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처럼 대했다.

 물론 다른 상위직무자라 해서 하위직무자를 가혹하게 대하는 건 아니었지만 진심으로 마주보는 경우는 일절 없었기에 모모에게는 매우 인상 깊은 경험으로 다가왔다. 그날 먹었던 식사 중에서는 특히 파스타가 맛있었으며 그렇기에 모모는 지금도 싸구려 인스턴트를 먹으며 그 때의 즐거운 추억을 회상할 수 있었다.

“그럼 어디…….”

 식사를 마친 모모는 아직 여유가 조금 남아 있기에 새벽에 받은 신문을 펼쳐 들었다. 몸집 작고 어린 외견의 그녀가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린 채 신문을 보는 모습은 무리하게 어른 흉내를 내는 어린이를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올 만큼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으나, 그녀는 신문을 읽는 걸 좋아했다. 바깥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시간이 없는 그녀에게 있어서 신문은 일종의 대리만족이 되었다. 식비를 줄이는 한이 있어도 신문을 끊지 못하는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처럼 폐쇄되고 정체된 도시에 대체 무슨 재미난 소식이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작고 고립된 집단일수록 평소 부족한 자극을 충족시키기 위해 별 거 아닌 일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법이다.

 코키토스의 언론관련 종사자들이 B급 제1종 이상의 중고위 직무자로 평가 받는다는 사실을 보면 그들이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간접적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 신문을 배달하는 사람은 모모와 같은 적은 수명의 하위직무자로서 그러한 단순노무자는 언론관련 종사직에 속하지 않았다. 이 구역에 신문배달을 맡은 이는 모모도 몇 번 본적이 있는데, 멜빵바지를 입은 십대 초반의 외견을 가진 소년이었다. 아마 조금 있으면 직무를 종료하고 생애 마지막 휴가를 받는다는 모양이었는데, 모모는 만약 그가 자기 가게로 찾아오면 그동안 신문을 배달해준 감사를 담아 예쁜 꽃다발을 선물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잠깐, 이게 무슨 일이야!?”

 한가롭게 흐뭇한 생각을 하며 크게 인쇄된 1면에 눈을 돌린 모모는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제9옥의 신문은 언제나 자질구레하고 평화로운 기사만 실리는 편이었으나, 오늘은 보는 이 누구나 놀랄 만한 큼직한 사건이 지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질서이탈자 출현’, ‘세인트헬레나 5번가 대참사’, ‘무장경찰 2소대 전멸’, ‘역천사대 긴급투입 논의’ 등등 평소에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던 흉악한 소식에 모모는 아연실색했다. 출간 전에 언론 통제를 받아 질서이탈자를 놓쳤다는 내용은 쓰여 있지 않았지만 이미 이 자체로만 해도 충분히 뒤숭숭한 기사였다.

“아아…….”

 특히 ‘사망자 명단’쪽은 읽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떨리고 숨이 답답했다. 죽은 이들은 대개 성씨姓氏없이 이름만 적혀있었다. 지면상 생략된 게 아니라 전부 모모와 같은 하위직무자란 뜻이었다.

 하루살이와 같은 목숨을 부여받고 빨리빨리 교체되는 그들에게는 성씨가 부여되지 않는다. 특별히 이들의 이름이 많이 보이는 건 아마 대피 시 우선대상 순위에서 밀려났기 때문에 차마 피하지 못하고 사건에 말려든 탓일 것이다. 능천사대도 습격 받아 전멸했는데 중고위 직무자의 사망자는 극히 적은 것으로 보아서는 틀림없었다.

 모모는 괴로움과 싸우면서도 죽은 이들에 대한 왠지 모를 부채감과 의무감 때문에 꼼꼼히 사망자 명단을 읽어나갔다. 일반인 사망소식을 다 읽고 마음에 담아둔 후 이번에는 순직한 경관들의 이름을 찾아보려는 찰나 뭔가 시끄러운 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설마 저건…….”

 마주보고 있던 창문 밖으로 영구차 몇 대가 스쳐 지나갔다. 이 무슨 우연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지. 행복은 언제나 혼자 찾아오지만 불행은 항상 친구를 같이 끌고 온다고 했던가. 모모는 순식간에 피상적인 지면 위의 불행이 현실화되어 다가오는 것을 체험하고 말았다.

 모모는 문득 극심한 두려움을 느끼며 더 이상 무서워서 신문을 읽을 수가 없었다. 이미 기분 좋은 아침은 물 건너갔다.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신문을 안 보이는 곳에 치워두고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녀는 경관사망자 목록의 ‘에스텔 스텔라’라는 이름을 발견하지 못했고 충격을 받을 일도 없었다.






TRACKBACK 0 AND COMMENT 2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03.19 23:38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하루가 다르게 가속화되어만가는 기술의 발전과, 이를 미처 따라잡지 못한 영혼의 성숙도는 실로 최악의 상호 작용을 일으켜...

    부지불식간에 무한대의 영지(英智)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인류는, 이내 그 가능성의 격류에 삼켜지고야 만 것이었군요.

    과연, 그들이 만들어 낸 초월적 존재(deus ex machina)가 보여줄 또다른 가능성의 미래란...



    흠흠, 그리고 한편으로는 모든 환경적 요소가 고도의 복합적 인공지능 연결망에 의하여 통제되는 코키토스의 환경제어체계를 보면서 순간적으로 에반게리온 新극장판에서 묘사되는 제3신동경시의 아침 풍경이 떠오르기도 했답니다! (/~_~)/

    또한 오히려 극도로 폐쇄된 구조의 코키토스이기에 일견 사소해보이는 일들 하나조차 언론 취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모모의 회상 장면 위로 문득 이웃집의 숫가락 갯수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지내는 농경 사회의 모습이 투영되면서 왠지 모를 푸근함에 잠시간의 미소를 지어보기도 했구요.

    ... 아앗! 그러고보니 이번 화에서 살짝 언급된 액상화 성진을 병기나 능력 발동의 촉매제로 이용하는 방안도 나름 고려해볼만 하지 않을까 싶어요~ >_<)



    덧 - 잇힝, 소소한 오타 제보랄까요오오오~~;

    모모가 꽃집을 여는 장면에서 '아무리 날씨가 좋다 해도 코치토스는...' 이라고 적힌 부분입ㄴ... (콰득)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03.20 07:50 신고 address edit/delete

      말씀처럼 작중의 종언적 상황은 급속한 기술의 발전에 사람의 정신이 제대로 맞추어 가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비극이기도 해요.

      그리고 여기서의 '정신적 성숙'이란 흔히 과학기술 비관론자들이 제시하는 도덕이나 종교에 의지한 퇴보적이고 비굴한 겸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높은 지성과 이성적 통찰력을 통해 가지고 있는 힘에 완벽히 적응해 그것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는 상태를 뜻하고 있어요.

      위의 '모형정원의 나비'나, '죽은 달의 여신', 그리고 '그노시스 노이즈' 이후 펼쳐지는 '아포토시스 도미노' 등의 배경은 오히려 종교나 도덕 등에 지나치게 의존해 발전해 가는 기술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해 벌어진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이라는 설정을 바탕으로 전개가 되고 있네요^^;;


      말씀하신 에반게리온 신 극장판의 한 장면을 비롯해 타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인공적인 도시의 풍경들도 자연풍경과는 다른 독특한 맛이 있어 좋더군요~ 과거의 작품들은 대개 자연을 찬양하고 그러한 인공물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아무래도 저희 세대는 도시생활에 익숙하다 보니 인공물에 대한 평가도 점점 긍정적으로 변해 가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해요^^ (가령 사키 전국편 최근화에서도 모 캐릭터가 '별은 보이지 않지만 동경의 야경은 별빛 같아 아름답다'고 말하는데, 저도 비슷한 심정으로 도시 야경을 좋아하네요^^;;)

      폐쇄적인 사회의 작은 공동체는 확실히 알콩달콩한(?) 푸근함의 장점도 있지만, 역시 현실은 시궁창이라 그런지 지나친 간섭이나 집단 괴롭힘이 심화되는 경향도 강해 씁쓸한 기분이 들더군요······.

      제 경우는 대도시의 개인주의적인 생활을 선호하긴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몇 번 그런 공동체에 속한 적이 있었는데, 마치 '쓰르라미 울 적에' 같은 작품에 등장할 법한 부정적인 모습에 진저리를 쳤던 기억이 나요...OTL

      물론 그러한 단점보다는 소규모 공동체 특유의 정情이 잘 살아 있는 곳도 많다고 생각해요. 역시 어느 곳이나 속해 있는 사람 나름인 듯^^;;


      덧. 수정 완료! 감사합니다~>.<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








03. 요동치는 벌떼 (4)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다. 아니, 모든 걸 바라기에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라 해야 할까. 이 세상 전부를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건 전지전능한 절대자의 영역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리 세상이치를 뛰어넘는다고 해도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사실 그녀는 왜 신神이 죽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영웅과 동일하게 필요에 있어 발명된 존재이기에 자립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에는 구원구복, 다른 반대편에는 악멸구축이 동일한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형태의 신이란 그림자는, 시련이 없으면 표상하지 못하는 영웅과 같이 인간이 진정한 진리의 빛을 손에 넣는 순간 사라져 버리고 만다. 원초부터 존재하지 않고 그저 성립되어 있을 뿐인 존재의 허울은 얄팍할 수밖에 없는 법. 그것이 바로 신이라 부르는 전능자가 소멸한 근본적인 원인인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해야 될 일은…….

『아가씨. 걷는 도중에 주무시다니 재주도 좋으시군요.』

 현실을 비집고 들어오는 악마의 달콤한 목소리에 클로에의 몽롱한 정신이 깨어났다. 깜박 잠들고 말았던 걸까. 이런저런 상념이 머릿속을 꽉 차지해 역설적으로 그 외의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 모양이다. 그녀는 잠에 취해 있을 때 뭔가 잊고 있는 것을 떠올린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생각나지 않았기에 반추를 단념했다. 어차피 잊는 건 익숙하다. 중요한 일이라면 또 기억나겠지.
 머릿속을 정리한 클로에는 태연하게 시종의 말을 받아쳤다.

“아까 눈보라 속에서는 꿈도 꾸면서 걸었어. 잠깐 눈 붙이는 거야 일도 아니지.”

『불쌍한 우리 아가씨! 그런 몽유병 기질까지 있으셨다니 미처 몰라 뵈었군요. 앞으로는 문단속을 철저히 해야겠습니다. 산기슭을 그리워하던 소녀가 잠결에 밖으로 나가는 탓에 온 집안사람들이 유령 소동으로 법석을 떨었던 일 같이 불미스러운 사건이 벌어진다면 남 보기 부끄러우니까요.』

“어차피 우리 저택에는 나 빼면 너 하나밖에 없잖아. 유령 친척이 유령소동으로 놀란다니 웃기지도 않아.”

『무슨 말씀을!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건 같은 사람이라는 말씀도 들어보지 못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유령에게 가장 무서운 것도 유령일 가능성이 크겠지요. 뭐, 그 이전에 저는 유령이 아니긴 합니다만…….』

“나도 유령이 아니니까 걱정 마.”

『그거 다행이군요. 그나저나, 슬슬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연결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아서요.』

 디스의 말대로 클로버 머리핀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전보다 멀게 들리는 감이 있었다. 클로에는 언제나 까불거리는 시종이 불안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 속삭이듯 말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조악한 연출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디스와의 대화로 완전히 정신이 맑아진 클로에는 자신이 어디쯤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뒤죽박죽이네…….”

 실로 그런 감상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탈자를 쫓아 들어온 이 비통제구역의 터널 속은 뭔가 공간의 어그러짐이라도 발생했는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어 보였다. 물론 제9옥은 공간중첩이나 공간확장의 비전기술을 이용해 본래 물리적인 크기보다 수배는 넓게 조성된 도시였기에 이런 현상이 크게 특이하다고 할 것까지는 없었지만, 그 안을 구성하고 있는 풍경은 아무리 봐도 정상이라 할 수 없었다.

 어떤 의미로 보자면 비통제구역의 터널 속은 세상의 축도縮圖였다. 꿈의 집합체. 기억의 편린. 과거의 발자취. 조금 낭만적인 울림을 담자면 이런 식으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터널 안은 크고 넓고 어두운 채 텅 비어 있었지만, 그 벽면에는 온갖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왔던 모든 흔적의 단편적인 한 장면들이었다. 벽화에는 지금 코키토스의 모습과 비슷하게 아스팔트와 빌딩이 세워진 거리에 차들이 매연을 뿜으며 다니는 모습도 보였고, 혹은 전차나 전투기 등을 앞세워 병사들이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는 그림도 눈에 띄었다.

 그런가 하면 뜬금없이 해안지역 길드상인들의 생활상이 그려지기도 했으며, 토가를 입은 옛 귀족들이 무언가 열렬히 토의를 하는 모습도 있었다. 몸이 검은 이들이 초원을 달리는 역동적인 그림도 스쳐 지나갔으며, 고원지대의 피라미드와 석상을 쌓는 이들도 눈길을 끌었다.

 또한 용을 상징으로 하는 황제의 군대들이 대선단을 이끌고 주변국들을 복속시키는 장면도 돋보였으며, 푸르게 빛나는 아름다운 도자기를 구워내는 장인의 얼굴도 선뜻 스쳐 지나갔다. 그런 와중에 뜬금없이 시간이 미래로 도약해 우주로 로켓을 발사하는 장면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렇다. 여기에 그려진 모든 벽화는 느릿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벽화는 움직일 때마다 새로운 그림을 그려내었으며, 그것은 알고 있는 혹은 알지 못하는 행성시대의 모습을 조금씩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생존자이면서도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클로에는 벽화가 어떤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는 걸 눈치 채기는 했어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희미한 빛을 내며 움직이는 터널의 끝없는 벽화는 아름답고 장엄한 광경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괴기하며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풍경이기도 했다. 특히 벽화의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녀에게 있어서는 왠지 모르게 불쾌감마저 느껴졌다.

“흥,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러나 클로에는 약한 소리를 내뱉는 대신 이탈자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 불안감을 억눌렀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수상한 자가 없는지 노려보았다. 비록 주위에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녀는 그렇기에 신독하기로 했다. 쓸데없는 오기를 부려 자존감을 굳게 다지는 것만이 그녀가 스스로 자아를 지키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과거가 없는 자가 도도하게 살기 위해서는 억지로라도 다잡는 수밖에 없었다.

 터널은 마치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이 쭉 이어졌다. 클로에는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도록 내심 디스가 뭔가 시답지 않은 시비나 농담이라도 걸어주기를 기대했으나, 이런 상황에 한해서 그 쓸모없는 시종은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아마 우연이라기보다는 그녀의 마음이 불안한 것을 알고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상황을 즐기려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더욱 질 수 없다. 여기서 불안에 떤다면 디스의 만족을 채워주는 것이고, 견디지 못해 그에게 말을 걸다면 굴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물론 기분 나쁜 벽화와 언제 이탈자가 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바싹 긴장하고 있는 클로에에게 지금 어느 쪽으로도 넘어지지 않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필사적인 자신의 모습 자체가 악마시종에게 탐탁지 않은 즐거움을 주고 있다는 것까지 미처 생각이 닿지 못했음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그나저나 이상하군요, 아가씨.』

“으, 음? 뭐, 뭐가? 뭐가 이상햐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디스가 갑작스럽게 입을 연 탓에 클로에는 그만 놀라 목소리가 갈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얼굴이 붉어질 만큼 창피했으나, 평소 주인의 약점이라면 언제나 주저 없이 찔러오는 건방진 시종이 이번만큼은 더 중요한 일이 있는지, 아무 말 하지 않고 넘어가 주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비통제구역을 걸으면서 암흑물질과 단 한 번도 조우하지 않다니 이상한 일이지요. 물론 녀석들과 마주치지 않는 것만큼 좋은 일도 없긴 하지만 너무 부자연스럽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공포와 그에 맞서려는 집념 머릿속이 꽉 차 있던 클로에는 이제야 디스가 발견한 위화감에 눈치 채고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총애하는 집사가 지적한대로 비통제구역이란 본래 암흑물질의 침수도가 극심해 격리된 지역으로서 이토록 장기간 체류하며 전혀 그것들의 습격을 받지 않는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위기감을 느낀 클로에의 사고회로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비통제구역의 침수도는 항상 경보상태일 텐데, 2시간에 가까운 체감시간 동안 전혀 암흑물질을 볼 수 없다는 건 이미 이 지역이 침식에서 벗어났다거나, 혹은 누군가 더 강대한…….”

『아가씨, 조심하십시오! 저 앞에는…….』

 디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기나긴 벽화의 통로가 끝나며 앞에는 뜬금없이 광대한 신전의 모습이 펼쳐졌다. 새하얀 대리석 기둥이 서있는 신전은 전체적으로는 순백의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군데군데 갈라진 부분과 파손된 고대신들의 석상이 신전의 쇠락함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디스, 디스, 디스!”

 클로에는 급변한 상황에 당황하며 시종의 이름을 다급하게 불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대신 핏 하는 소리와 함께 반으로 쪼개진 클로버 모양의 머리장식이 땅으로 떨어져 산산이 흩어졌다.

“함정……!”

 온몸을 압박하듯이 조여 오는 공기, 시야가 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좁은 화병에 갇힌 듯한 밀폐감, 마치 자신이 난쟁이라도 되어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

 사방에 요동치는 이탈자의 기척을 감지하며 클로에는 자신이 어리석게도 상대가 설치한 거대한 덫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와 시종을 연결하고 있는 생명선과도 같은 머리핀은 상대편이 펼친 진형陣形의 영향으로 부서져버린 것이다. 그녀는 디스의 매개물을 강제로 파괴시킬 만큼 강력한 진을 펼칠 수 있는 상대를 지금껏 본적이 없었다.
 당황해 하는 그녀에게 신전 전체를 무겁게 진동시키는 엄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설마 죽을 장소에 스스로 뛰어들 줄이야. 가짜 신부의 예측대로인가.”

 클로에는 정말 입에 담기 싫은 진부한 질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딱히 꺼낼 다른 말이 없다는 걸 깨닫고 진저리를 치며 입을 열었다.

“거기 숨어 있는 건 누구지? 모습을 드러내. 뭐, 어차피 기척으로 상대를 유인해 이런 얄팍한 함정에 빠뜨리는 걸 보니 음흉한 녀석이겠지만.”

 끝머리에 도발적인 언어를 섞은 건 클로에가 간신히 짜낸 여유였다. 그녀의 속내는 사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초조했다. 무섭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저 상대가 완전히 뿌리를 내린 이탈자라면 악마와의 접속이 끊어진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대응할 방책이 없다는 걸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클로버 머리핀은 단순히 디스와 수다만 떨 수 있는 편리한 통신기가 아닌 그가 가지고 있는 악마의 힘을 빌려올 수 있는 일종의 주술도구이다.

 클로에는 어디까지나 의사지 전투원이 아니었기에 디스 없이는 하위下位 제6계第六階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먼 옛날 의학과 주술은 분화가 미비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간단한 마술은 부릴 수 있었지만, 그걸로 이탈자를 상대하기를 바라는 건 지나치게 분에 넘치는 욕심일 것이다.

“이 지혜는 내가 짜낸 것이 아니지만 그 비난은 내게 돌려도 하등 상관없다. 죽기 전에, 혹은 죽은 뒤에 마음껏 원망하도록 해라.”

 암반처럼 단단한 의지를 담은 목소리와 함께 검은 망토로 온 몸을 감싼 남자가 기둥의 그림자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다부진 얼굴과 검게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보기 좋게 자라난 굵은 턱수염에서 강한 인상이 느껴지는 사내였다.

 그의 이름은 루카누스. 코키토스 아카데메이아의 전前 학장이자 지금은 플라톤 원리주의자들의 수장격인 인물이었다.
 클로에와 마주 선 루카누스는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재회하는구나, 클로에 클로버! 아니, 배신자 단티아라고 해야 하나.”

 루카누스는 분노를 주체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딘가 그리워하는 듯한 시선으로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그의 감정을 순식간에 짓밟는 것이었다.

“…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배신자? 단티아? 미안하지만 난 당신을 처음 봐.”

 약간 얼빠진 듯한 클로에의 말에 루카누스는 이를 뿌득 갈았다.

“그래……. 또 전부 잊어버리고 말았군. 자신의 죄도, 책임도, 갚아나가야 할 부채도 그런 식으로 어둠 속에 묻어버리는 거냐.”

“자, 잠깐! 나는…….”

“좋아, 상관없다! 난 여기서 널 죽이고 그분의 이상理想대로 모든 걸 올바르게 진행시킬 뿐이다!”

 루카누스는 클로에의 말을 무시한 채 갑자기 노성을 지르며 전속력으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심상치 않은 상대의 모습에 미리 대비를 하고 있던 클로에는 전력을 다해 몸을 던져 피했다. 비록 디스의 도움이 없어 대단찮은 힘밖에 낼 수 없는 그녀였으나, 고위직위자 태생인 만큼 기본적인 체력과 운동신경은 월등한 편이었다.

 그러나 인지를 초월한 이탈자의 앞에서 클로에의 움직임은 전혀 통용되지 않았다. 상대편이 자세를 잡는 순간 이미 눈치를 채고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클로에가 서있던 자리가 움푹 파이는 동시에 그녀는 저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단지 조금 스쳤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찢어발길 정도의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으윽……!”

 허나 클로에의 몸은 멀쩡했다. 그녀는 고통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처박힌 기둥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 일격으로 곳곳이 찢어진 갈색코트 틈으로는 그녀가 안에 입은 의사가운이 하얗게 빛을 발했다. 베아트리체의 성의聖衣가 마치 갑옷처럼 그녀의 몸을 지켜준 것이다. 루카누스는 클로에의 몸에서 새어나오는 광자光子를 포착하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저주 받을 그 여자의 흉장凶裝인가. 부끄럼 모르는 배신자에게는 딱 어울리는 물건이야. 그렇다면 더 이상 손을 봐줄 필요는 없겠군. 단번에 죽여주마.”

 루카누스는 거칠게 중얼거리며 걸치고 있던 검은 망토를 걷어 왼쪽 팔만을 내보였다. 그의 팔은 이미 인간의 팔이 아니었다. 꼭 야수의 앞발처럼 난폭한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그림자가 실체화한 것처럼 심연의 어둠을 간직한 색과 여러 부수물이 흉기처럼 중구난방으로 뻗어있는 모습은 동물적이라기보다는 기하학적으로 보였다.

“저건……!”

 망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루카누스의 팔을 보고 클로에는 자기도 모르게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숨을 삼켰다. 클로에는 그동안 여러 번 질서이탈자의 변모한 신체를 봐왔지만, 하나 같이 전부 잊어버렸기에 아무리 봐도 그것은 새롭고 꺼림칙한 광경이었다.

“내 울분의 미진이라도 느껴봐라!”

 루카누스는 이제는 몸에 완벽하게 스며들어 자신의 혈액처럼 익숙한 암흑물질을 통해 오른팔을 폭주시켰다. 아직 윤회판에 속해있을 시절에 기대었던 권원의 껍질을 이용해 정제된 능력을 세련되게 발휘하는 셀레스티나와 달리 루카누스는 암흑물질 특유의 무질서를 그대로 끌어내는 방식을 취했다. 요동치는 검고 불길한 기운은 루카누스의 야성에 따라 맹수의 형태를 띠는 동시에 그가 추구하는 차가운 이성의 조정을 받아 다각적으로 억제되어 발현하는 기묘한 구성을 이뤄갔다.

“웃기지 마…….”

 한편 클로에는 확실하게 엄습하는 죽음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별로 죽는 게 두려운 건 아니다. 단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대로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다. 이 저주 받은 새장 속에 갇혀 자유롭게 날개를 펴보는 일도 없이 소중한 사람들의 억울함도 풀어주지 못하고 사라져야 한다면 그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일란과 잔이 죽었다. 롬발트 경감은 중상을 입고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잠에 빠져 들었으며, 그를 아버지처럼 따르는 친우 에스텔은 눈물이 마를 정도로 울음을 터뜨렸다. 수많은 시민과 능천사대의 경관들이 녀석들의 그릇된 신념에 목숨을 잃었다.

 대체 저 녀석들은 뭐란 말인가. 무슨 권리가 있기에 그나마 작은 행복을 부여받은 이들의 삶마저 처참하게 빼앗으려 한단 말인가.

 누군가 인간은 죽기 위해 살아간다고 했지만, 그건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가하는 무책임한 모독에 불과하다. 누구나 죽고 싶지 않으니까, 허무의 영역에 빠져들고 싶지 않으니까, 비로소 최선을 다해 발걸음을 움직인다. 설령 언젠가는 쓰러져 숨이 다한다고 해도 그 순간까지 있는 힘을 다해 달려 나간다. 그것은 매우 숭고하고 소중한 일이다.

 그렇기에 클로에는 플라톤 원리주의자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얼마나 위대한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의 행복마저 박탈할 권리는 없을 터.

“멋대로 설치게 놔둘 줄 알고……!”

 클로에는 다가오는 검은 폭력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들었다. 아끼는 메스를 담고 있는 휴대용 보관함. 대부분의 치료는 토성천과 연결된 의료기기로 행하였기에 이제는 실질적으로 쓸 일이 거의 없는 과거의 유물이기는 하나, 명색이 의사인 클로에는 자신의 메스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소중한 물건을 함부로 굴리고 싶지 않았지만, 클로에는 상황이 상황인 만큼 빠른 결단을 내렸다. 이 케이스는 단순히 날카롭고 작은 쇠붙이를 보관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의 눈을 속이는 마술장치로서도 기능을 할 수 있는 진품이었다.

 크릉. 아까보다 거리가 떨어져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이미 맹수의 앞발인지 발톱인지 혹은 어금니인지 식별이 불가한 형태로 변모한 루카누스의 오른팔이 클로에를 해체하기 위해 지척까지 덮쳐왔다. 클로에는 더 망설일 틈 없이 재빨리 케이스에서 중간 크기의 은색의 메스를 꺼내 들어 하나의 마술을 펼쳤다.

 클로에가 들고 있는 메스를 집어던지자 꺼낼 때 하나였던 그것은 순식간에 끝없이 불어났다. 한없이 흩어지는 은색 성운의 별무리. 클로에의 호신을 위해 디스가 심혈을 기울여 장치한 마술로서 말 그대로 무한히 불어난 메스의 칼날이 상대를 육박하는 난폭한 속임수였다.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메스가 흉측하게 아가리를 벌린 루카누스의 팔에 박혀 들었다.

- 카아아아아!

 고래로부터 늑대인간과 은銀은 상성이 좋지 않다. 루카누스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을 뿐이었지만, 그의 오른팔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어디가 눈인지 모르는 부분에서 검은 혈루를 흘렸다.

 분명 효과는 있었다. 하지만 클로에의 두 번째 마술장치가 줄 수 있는 영향은 그게 전부였다. 고통 따위는 이미 익숙한지 루카누스는 전혀 개의치 않고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메스의 빗줄기를 뚫고 나와 클로에를 향해 분노의 일격을 내질렀다.

“죽음으로 속죄해라, 단티아!”

 미친 듯이 날뛰는 그의 오른팔은 발톱인지 이빨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흉기를 섬뜩하게 빛내며 그녀에게 쇄도했다. 제9옥 유일의 의사가 모처럼 꺼내든 카드는 전혀 이탈자를 상대로 통용되지 않았다. 허나 클로에의 노림수는 한층 더 깊이 숨겨져 있었다.

“당신이야말로 지금까지 죽인 자들에게 사죄해!”

 루카누스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클로에 또한 감정에 복받쳐 쏘아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이미 준비하고 있던 마지막 마술장치, 황금색의 가장 커다란 메스를 발동시켰다. 손바닥 크기만 했던 금색의 메스는 클로에가 마술을 작동시키자마자 순식간에 거대한 창처럼 길게 늘어나 루카누스의 배를 꿰뚫었다.

“크, 쿨럭… 이, 이런 잔꾀를……!”

 베르길리우스에게 전수받은 비장의 술법. 루카누스는 은색 메스의 소나기 속에서 예기치 못하게 갑자기 튀어나온 거대화된 금색 메스에 배가 찔린 채 저 멀리 나가 떨어졌다. 메스는 끝도 없이 늘어나 낡은 신전의 천장에 구멍을 내었으며 거기에 꼬챙이처럼 꿰인 루카누스는 도중에 배가 찢어져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상처의 범위나 흘러나오는 출혈량으로 보나 그는 심각한 중상을 입은 것임에 분명했다.

“……! ……!!”

 클로에는 사활을 건 자신의 작전이 성공했음을 깨닫고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부상당한 루카누스의 꼴은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처참했으나, 클로에에게 그를 동정할 정신적 여유는 없었다. 현재 그녀는 가까스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 그 빈틈은 그녀에게 있어 목숨을 빼앗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먹어 치워라!”

 소름이 끼칠 만큼 살벌하게 신전을 울리는 루카누스의 굵은 목소리에 클로에는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루카누스의 오른팔. 비록 루카누스 본인은 타격을 입고 저편에 쓰러져 있었지만 그의 오른팔은 멀쩡했던 것이다.

 그에게서 떨어져 나와 늑대인지 뱀인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독립해 있는 이탈자의 괴기한 일부는 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클로에에게 달려들어 소유자의 바람대로 그녀의 몸통을 흔적도 없이 한입에 잘근 씹어버렸다.






TRACKBACK 0 AND COMMENT 2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03.17 22:09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클로에와 디스 사이의 온갖 언어유희로 가득한 만담으로부터, 일순간 생사의 기로에 선 채 각자의 정의를 단호히 강변하는 그와 그녀의 대치 장면까지... 이번 화의 이야기도 보는 이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느낌이랄까요~ >_<)b

    에에, 그리고 한편으로는 비일상과 신비의 영역이 교차하는 비통제구역 내의 각 벽화들로부터 왠지 턴에이 건담의 작중에 등장하는 인류 전쟁사의 축약판 영상 기록이 떠오르기도 했답니다.

    아아! 어쩌면 일견 저토록이나 극단적으로 묘사되는 플라톤 원리주의자들 역시 종국적인 관점에서는 단지 ' 찬란햇던 대 영광 시대의 위업들을, 지금 이 순간 다시 여기에...' 라는 하나의 순수한 이상 아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었던 일련의 구도자이자 현인들의 모임이었던 것은 아닐는지... =_=)y=3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03.18 07:04 신고 address edit/delete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클로에와 디스의 대화 캐치볼은 당시 '늑대와 향신료'에서 호로와 로렌스의 관계에 자극을 받아 나름 재미있게 그려 보려고 노력을 했었네요^^;;

      벽화의 장면들은 행성시대의 인류 역사를 단편적으로나마 담아 보려고 시도를 했었는데, 역시 제 실력의 한계가... 확실히 턴에이의 건담의 흑역사 부분과도 비슷한 느낌인 듯싶어요^^

      말씀처럼 작중의 플라톤 원리주의자들도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중이지요. 하지만 역시 대의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희생을 당연시 여기는 사고방식은 아무래도 찬성을 받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








03. 요동치는 벌떼 (3)


“나의 주인. 베르길리우스 카르디날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에 의거해 레히트를 해방한다.”

 피아의 입술에서 자아낸 명령은 하나의 주문이 되어 곧 세상에 변화를 가져왔다. 장치와 속임수를 동원해 상식의 인지로는 뒤쫓을 수 없는 기묘한 현상을 연출하는 것이 마술魔術이라 한다면 지금 이 순간 피아는 마술사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증된 그녀의 명령어가 흘러들자 태엽검은 극적인 변동을 시작했다. 허공에 전개되어 불의 산성비를 막아내던 갖가지 잡동사니 부속품들은 다시 피아의 검으로 몰려들어 재구성되기 시작해 선과 선이 이어지고 면과 면이 겹쳐지며 톱니와 톱니가 맞물렸다. 나사는 빈틈없이 결여된 부분을 메웠고 그 위로는 다시금 이음새를 은폐하는 은막銀幕이 덮어 씌워졌다.

 마침내 그녀의 손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방금 전까지 위태위태하게 간신히 형태만 유지하고 있던 태엽검의 부실한 구조가 아니라 백금으로 둘러싸여 강인함을 자랑하는 동시에 비취빛의 한없이 날카롭게 솟아오른 수많은 톱날을 과시하고 있는, 마치 상어의 이빨과도 같은 무시무시한 장검이었다.

 톱날검 레히트. 다중검의 두 번째 형태로서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참살목적으로 만들어진 무기였다. 피아는 들고 있는 검이 마치 자신의 어금니라도 되는 듯이 혼연일체의 기세로 선풍과도 같이 거대한 붉은 나비를 향해 뛰어들었다.

『위험해…….』

 잠시 분노에 이성을 잃었던 셀레스티나의 눈빛이 본능적인 위기에 맞서 강제로 되돌아왔다. 셀레스티나는 부나방처럼 어리석게 거센 불길에 뛰어드는 저 무모한 소녀가 실은 치명적인 독침을 품은 말벌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정확한 인과관계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셀레스티나는 직감적으로 피아의 톱날검이 무엇이든지 자를 수 있는 위협적인 무기라는 것을 깨닫고 방어에 돌입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날아서 도망치는 것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셀레스티나는 비행할 수가 없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 그녀는 날고 있다기보다는 떠있는 것에 가까웠고, 어느 정도 높이에서는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높이 날거나 빠르게 움직이는 건 무리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덤벼드는 상대를 제거해 종국적으로는 위협을 종식시켜 몸을 보호하겠다는, 고래로부터 전해지는 최선의 방어비법을 시도했다.

 우선 셀레스티나는 분노에 떠는 몸을 진정시키며 마구잡이로 난사했던 자신의 힘을 진정시켰다. 그렇게 불의 비가 그친 사이 피아는 더더욱 그녀를 향해 거리를 좁혀왔지만 셀레스티나는 초조해하지 않고 침착하게 자신의 권원權原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윤회판에서 이탈해버린 셀레스티나는 더 이상 권원을 사용할 수 없었으나 그 껍질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에 부족한 내용물은 암흑물질에서 발현하는 한계가 보이지 않는 힘을 불어넣어 전과 비슷하게 다룰 수가 있었다.

 셀레스티나의 권원은 구조역설構造逆設. 구성물질의 기질, 특히 불을 다스리는데 특화된 그녀의 능력은 흩어져 있는 열기를 고도로 집중시켜 쉽게 해체되지 않는 갱생의 불꽃을 창조해냈다.

『더럽고, 추하고, 흉하고, 비천하고, 추레하고, 필요 없고, 가치 없는 이 온 세상의 죄악을 불태우겠어. 전부 깨끗해지는 거야!』

 셀레스티나는 날카롭게 소리 지르며 강인한 의지로 생성해낸 두 개의 크나큰 불의 채찍을 거칠게 휘둘렀다. 그녀의 손에 들린 화염으로 구성된 불줄기는 지금까지 간헐적으로 쏟아져 내리던 불의 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굵고 난폭했으며 그것이 날뛰는 광경은 마치 두 마리의 이무기가 날뛰는 태풍 부는 바다를 연상시켰다.

“윽……!”

 한발자국만 더 내딛으면 양단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갔던 피아는 어쩔 수 없이 분통한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괴물나비가 휘두르는 불의 채찍은 이미 폐허로 변한 도시를 다시금 잿더미로 되돌리겠다는 듯이 맹렬한 기세로 춤췄고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도망치는 것 외에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아직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군. 나도 그렇지만 저 녀석도 전혀 변하지 않았어. 아직 한참 멀었다는 점에선 말이지.”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는 중력을 무시하는 듯한 좌충우돌 운행으로 오토바이를 몰아 화염의 재앙을 피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베르길리우스의 왼손에 끼인 4개의 반지는 무언가를 신호하는 것처럼 쉼 없이 깜박거렸으며 그에 따라 그는 궤도가 불분명한 이탈자의 공격을 회피했다.

 베르길리우스는 한손으로만 핸들을 잡은 채 다른 한손으로는 페카토를 들어 옛 동료를 겨냥했다. 그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총을 든 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자신의 권원인 연계변환連繫變換에 의거해 페카토와 신체의 접속을 이었다.

 주체와 객체 간의 단기융합을 원활하게 성립시키는 그의 능력은 사물의 힘을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피아의 다중검도 베르길리우스의 권원에 기대어 원활하게 형태를 바꿀 수 있는 것이었다.

 순조롭게 페카토와 접속을 마친 베르길리우스의 이마에는 'P'라는 7개의 문양이 문신처럼 새겨졌다. 그는 이마의 표식을 습관적으로 한 번 쓰다듬은 후 이탈자를 향해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탄피가 튀고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총구에서는 아무런 총탄도 발사되지 않았고, 대신 뛰쳐나간 건 흉물스럽게 페카토의 총신에 박혀 있던 7개의 칼날 중 하나였다.

“녹턴, 죄의 그림자를 따라라.”

 베르길리우스는 작게 속삭였고 그 목소리는 베레모에 달린 무전기를 통해 피아에게도 전해졌다. 피아는 주인의 말에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곧장 몸을 움직여 붉은 나비를 물어뜯기 위해 쇄도하는 페카토의 첫 번째 칼날을 따라잡았다.

『지울 수 없는 원죄라고? 그런 기만 따위, 내 업화로 전부……!』

 공중을 나는 작은 칼날에 셀레스티나는 이상할 정도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불의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자 두 마리의 용이 되지 못한 거대한 뱀은 허공의 흉기와 그 뒤를 따르는 어린 흑천사를 뭉개기 위해 동체를 요동쳤다.

"Plus exemplo quam Peccato nocent."

 베르길리우스는 이제는 서적 속에나 남아 있는 실종된 언어를 중얼거리며 이마에 달린 'P'의 표식을 손톱으로 긁었다. 그의 손길이 닿자 'P'의 표식은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으며 그와 동시에 허공을 달리는 칼날은 부존의 자리를 대신하기라도 할 듯이 커다랗게 부풀어 올라 극도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마치 거인을 처형하는 기요틴의 시퍼런 날과도 같이 흉악하게 팽창한 페카토의 칼날은 죄악을 쇄신하기 위한 성스러운 불뱀을 여러 갈래로 찢어버렸다.

『내 불꽃이…!? 말도 안 돼…….』

 암흑물질과 융합해 무한에 가까운 힘을 휘두르게 된 셀레스티나는 설마 자신이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정하지 않았기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자 경악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강제적인 방법으로 질서의 위상을 세우는 수호학사 출신으로 수많은 전투경험을 쌓은 베르길리우스와 달리 학구적인 열정만으로 부학장직을 맡고 있었던 셀레스티나는 돌발적인 사태에 신속한 대응을 할 수 없었으며 그건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작지만 큰 오판이 되었다.

 페카토의 ‘오만’이 단죄의 불길을 가르고 길을 만들자 피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장 검을 앞세워 셀레스티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섬뜩한 날을 파랗게 빛내는 피아의 검이 가져오는 근원적인 소멸의 공포에 셀레스티나는 몰려나듯 혼란에서 회복했지만 이미 상대는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후였다.

 어쩔 수 없이 셀레스티나는 이글거리는 불길의 날개를 접어 몸을 감싸는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벗어나고자 했다. 어린애가 팔을 올려 부당한 폭력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듯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생각에 불과했으나 그녀의 날개는 이탈자의 변모를 통해 웬만한 무기로는 상처 하나 낼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된 부산물이었기 때문에 방어로는 최적의 행위라고 할 수 있었다.

 피아 또한 심안深眼으로 인해 괴물나비의 날개가 얼마나 강도가 높으며 그 위에 타오르는 불길만으로도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것을 잘 정리된 서류의 목록처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피아는 우회하는 대신 망설이지 않고 검을 높게 들어 내리쳤다.

“으……!”

 강철이라도 자를 것 같은 피아의 일격은 허무하게 튕겨져 나왔다. 레히트의 날카로운 톱날은 상대에게 전혀 타격을 입히지 못했으며 괴이한 붉은 나비의 날개는 건재했다. 피아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재빨리 칼의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순간 톱날검의 손잡이가 움직여 주인의 권총과 같이 방아쇠가 나타났고 피아는 그것을 세게 당겼다.

 격철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탄피가 튀어 오르거나 총알이 발사되는 일은 없었다. 변화는 다름 아닌 칼날 부분에 있었다. 피아가 방아쇠를 당긴 것을 신호로 레히트의 톱날이 서서히 돌기 시작했으며 이윽고 고속으로 회전하는 푸른 톱날은 마치 빛의 띠처럼 보였다.

“찢어발겨주지!”

 싸움을 통한 흥분 때문에 일시적으로 자제력을 잃어버린 피아는 고양된 목소리로 외치며 다시 한 번 자세를 고쳤다. 높게 검을 치켜세운 자세는 제3식第三式 일지절단一枝絶斷. 몸에 각인된 참격의 도식이 자연스럽게 최적의 공격지점을 찾아 자세를 잡았고 피아는 그대로 팔을 휘둘러 상대를 베었다.
 키이이잉. 쇠를 자르는 것 같은 불쾌한 소리가 진동하며 레히트는 그대로 거대나비의 붉은 날개를 찢어발겼다.

『---!!!』

 살갗이 통째로 뜯겨져 나가는 감각에 셀레스티나는 차마 육성으로는 표현되지 않는 비명을 내지르며 황급히 방어를 풀고 뒤로 물러섰다. 무엇이든 절단할 수 있는 검. 다중검 최고의 예리함과 난폭함을 자랑하는 톱날검 레히트의 폭력에 셀레스티나는 결국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한 발만 더 내딛어 검을 휘두르며 상대의 목을 취할 수 있을 터. 그러나 피아는 더 이상 이탈자에게 공격을 가할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곧 죽어야 할 상대를 보고 동정심이나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곳에 정신을 팔다가는 목이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다는 비이성적인 육감을 느낀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불길한 예감이 아니라 확실한 직감이었다는 것은 통신기에서 들려오는 주인의 목소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녹턴, 조심해! 그녀가 왔다!”

 베르길리우스의 경고가 들리는 것과 거의 같은 순간에 피아는 7번에 달하는 신속의 찌르기가 자신의 급소를 노리고 날아드는 것을 눈치 챘다. 그것은 매우 빠르고 날카로웠으며 사납고도 무자비한 습격이었지만 익숙한 공격이기도 했다.

 제1식第一式 분지영참分枝影斬. 한번 내지르는 것으로 수개소의 부위를 동시에 꿰뚫는 스승의 비기秘技. 피아가 그런 무시무시한 공격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스승에게 무기를 다루는 법을 배울 때 단 한 번도 그것을 성공시킨 적이 없었으며 시범삼아 대련을 했을 때 역시 단 한 번도 방어에 성공한 적이 없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그렇기에 피아는 위험을 무릅쓰고 고통스러워하는 적을 마저 벤다든지, 대항할 수 없는 공격에 무모하게 맞서는 우를 범하는 것보다는 무사히 살아남는 쪽을 택했다.

“초기화, 전방위전개!”

 피아의 긴급명령에 따라 톱날검은 태엽검으로 돌아올 틈도 없이 곧장 해체돼 내장물을 흩뿌리는 것으로 섬광 같이 쇄도해 들어오는 점의 일격 하나하나를 막아냈다.

“…으윽!”

 피아는 꾹 참았지만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혈투에 끼어든 제3자의 개입은 날카로우면서도 교묘해 조악하게 펼친 방어막으로는 제대로 막아내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다행히 몸에 직접적인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피아는 아픔을 억누르며 저 멀리 나가떨어져 버렸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이탈자를 구해낸 건 나뭇가지처럼 선단이 기묘하게 갈라진 검은 창을 든 아름다운 여기사였다. 창기사는 움직이기 쉽게 간편해 보이면서도 금색의 십자가가 수놓아져 우아하게 보이는 하얀 예복과 고풍스러운 백합이 그려진 푸른색의 경갑을 입고 있었다. 여기사의 머리카락은 깊고 선명한 보랏빛으로 코키토스의 거짓된 태양의 석양빛을 받아 일부러 물인 들인 것만 같이 불그스름하게 반짝였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군.”

 베르길리우스는 빠르게 오토바이를 몰아 땅바닥에 나뒹군 피아의 앞을 막아서며 새로이 나타난 훼방꾼을 초조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베르길리우스는 전황을 일변시킨 여기사가 꼭 거창한 종교화에나 등장할 것 같은 악마와 싸우는 천사장의 모습과 닮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직책상의 이름뿐이라고는 해도 천사는 자신들이었으며 악마 같은 이탈자를 보호하는 건 저 창을 든 품위 있는 여기사였기에 그는 참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속으로 작게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다, 당신은…….”

 심대한 타격을 입은 탓인지 어느새 셀레스티나의 붉은 나비날개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녀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비록 다친 곳은 사라진 날개 부분이었지만 환통이라도 느껴지는 것일까. 셀레스티나는 양팔로 몸을 부여안고 눈썹은 있는 대로 찡그린 채 생명의 은인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여기사는 셀레스티나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베르길리우스를 응시하며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이쯤 했으면 좋겠군. 우리는 이만 물러날 생각인데 놓아주지 않겠나?”

“뭐……!”

 어떻게 들으면 비굴하게 들릴 수도 있는 창기사의 말에 셀레스티나는 발끈하며 반론하려 했으나 온몸을 달리는 격통이 그녀의 입을 움직이게 놔두지 않았다. 결국 셀레스티나는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고 말았으며 사방에는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게 좋겠군요. 당신이 다른 뜻이 없다면 저도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베르길리우스는 여전히 평정을 가장한 가면으로 여기사의 눈에 대응하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베르길리우스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야 했다. 대체 누가 누구를 놓아준단 말인가. 베르길리우스는 저 창기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 제9옥에서도 단 3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고위高位 제1계第一階의 위치에 속해 있는 강자다. 설령 셀레스티나가 다쳤다고 하나 그녀 혼자만으로도 이 상황을 타파하는 데 아무 어려움도 느끼지 않을 터였다. 물론 그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베르길리우스는 현재 상황을 그렇게까지 절망적으로 몰고 나가는 건 원치 않았다. 그리고 그건 다행히 상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고맙군. 그대는 여전히 자비로운 사람이야.”

 진심으로 예를 표하는 여기사의 정중한 어투에 베르길리우스는 끝내 웃고 말았다.

“그만두세요.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낯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과유불급. 은근무례. 겸손이 지나쳐도 상대방에게 모욕이 되는 법입니다. 더 이상 볼일이 없다면 셀레스티나를 데리고 물러나주십시오. 저도 뒤를 쫓거나 하지 않겠습니다.”

“…미안하군. 실례했다.”

 다시 한 번 절도 있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것을 보고 베르길리우스는 화낼 의욕도 상실했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사람은 마침내 그 방향성마저 화석처럼 굳어져 버리는 걸까. 그는 언제나 변함없는 그녀의 모습이 부럽기도 한 동시에 불쌍하게도 생각되었다.

 창기사가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진 셀레스티나를 가볍게 한 손으로 들고 몸을 돌리려는 찰나 재구축된 태엽검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몸을 일으킨 피아가 쥐어짜내듯이 목소리를 냈다.

“잠깐, 잠깐만요……. 잠깐, 기다려주세요!”

“아직 볼일이 남았나?”

 여기사는 유연하게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피아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어딘지 부드러웠다. 피아는 그런 그녀의 시선에 잠깐 동요했으나 인조혼의 뛰어난 장점을 이용해 억지로 감정을 되돌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계속하실 생각인가요?”

“그래.”

“이미 배신당했으면서도…… 또 매달리실 건가요?”

“필요하니까.”

“하지만 없잖아요!”

“없다면 만들어낼 뿐이다.”

 여기사는 단호하고 짧게 대답한 뒤 중천에 떠있으면서도 저물어가는 기묘한 태양 아래서 모습을 감추었다. 피아는 사라지는 그녀의 잔영을 붙잡듯이 손을 내밀어 움켜준 후 세게 땅을 내리쳤다. 모든 게 불타 잿더미로 변한 폐허의 중앙. 도시와 시민을 지킨다는 임무에 실패한 두 명의 흑천사는 차가운 안테노라의 눈보라가 잃어버린 영향력을 되찾는 걸 느끼면서 한동안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TRACKBACK 0 AND COMMENT 2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03.11 13:50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와앗, 왠지 셀레스티나와 대치하는 피아의 모습으로부터, 영화 『반지의 제왕 1부 - 반지 원정대』의 말미 부분에서 뇌전의 빛에 휩싸인 글람드링(Glamdring)을 거머쥔 채 화염의 채찍으로 쇄도해오는 발록에게 맞서던 간달프의 모습이 팟 하고 떠오르는 느낌이 드는걸요! >_<)b


    하지만 단신으로 심연의 공포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사해야만 했던 간달프와 달리 피아는 결코 혼자가 아니며, 또한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등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듬직한 전우이자 연인 -베르길리우스- 이 바로 옆에 서 있다는 차이점이 있기에 이번화에서도 멋진 활약상과 함께 다시금 자신의 소중한 일상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실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의 7대 원죄와 그 속박 아래에서 고뇌하는 영웅들의 행보가 과연 어떠한 결말로 이어지게 될 것인지...


    다음번의 이야기도 기대 기대 중입니다~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03.11 22:37 신고 address edit/delete

      제 부족한 소설에서 그런 명작의 멋진 장면을 떠올려 주시다니 쑥스러운 한편 기쁜 마음도 드네요^^;; 그저 조금이나마 그러한 경지에 근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말씀처럼 피아는 그녀 혼자서는 이겨내기 힘든 가혹한 일들도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하는 덕분에 어떻게든 헤쳐 나가고 있는 중이에요. 문득 사운드 호라이즌 크로니클 2nd 앨범의 '뇌신의 계보' 트랙에서 홀로는 감당할 수 없는 힘도 둘이서라면 괜찮을 것이라며 악신에게 맞서는 두 연인의 노래 구절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작중 베르길리우스의 그리스도교 7대 죄악을 상징하는 페카토 권총 사용은 신곡에서 단테가 연옥에 들어서며 천사에게 P의 문장이 이마에 새겨지는 부분을 모티브로 하고 있어요. 원작에 충실하자면 위에서도 단테에 해당하는 인물이 저 총을 사용해야 하겠지만, 제 소설은 어디까지나 모티브만 살짝 차용한 것이라 제가 좋을 대로 아무 데나 갖다 붙인 면이^^;;

      아무튼 다음 이야기도 재미있게 읽어주실 수 있도록 힘내겠습니다~!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








03. 요동치는 벌떼 (2)


 아카데메이아의 전前 부학장인 셀레스티나는 억제하지 못한 감정폭발에 조금 당황했다. 그녀는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항상 자신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자부하고 있었던지라 방금 전 느낀 순수한 살의의 충동은 쉽게 인정하기 힘든 입맛 쓴 경험이었다.

 하지만 다소 고양감은 있었다. 암흑물질을 몸속에 정착시켜 얻은 질서이탈자의 힘은 그야말로 거대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지막지한 힘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기쁨은 그녀로 하여감 자기혐오를 느끼게 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꺾이지 않는 자신감을 가져다준다는 모순된 결과를 낳고 있었다.

 그래도 불바다로 변한 거리와 무참하게 파괴된 무장경찰대의 모습은 참혹했고, 언제나 공정한 비판자를 자처했던 그녀는 역시 자부심보다는 자기혐오를 좀 더 강하게 느꼈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흥분한 것이다.

 내부의 암흑물질로부터 용솟음치는 기운은 윤회판의 속박되어 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막대했다. 그녀는 무한한 해방감을 실감했다. 그러자 여태까지 꽁지 빠져라 도망쳐왔던 능천사대의 특수부대 앞에서 떠오르는 건 공포보다는 분노의 감정이었고, 그녀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동안의 울분을 마음껏 풀었다.

 모든 걸 뭉개고, 불태웠다. 짜릿했다. 전율이 느껴졌다. 왜 그 긴 세월 동안 겁먹고 도망쳐 다녀야했는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도 벌레 같은 녀석들이 어째서 아카데메이아의 지고한 학사들을 핍박할 수 있었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모든 걸 없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우선 배제하고 보는 것이 사람의 본성. 실체변이로 인해 일시적으로 이성의 장벽이 얕아졌던 그녀는 마음껏 인간본성의 우수성을 펼쳤다.

 그 결과 세인트헬레나 5번가에 남은 건 단순명쾌한 파괴의 흔적뿐이었다. 플라톤 시절의 수호학사를 대체하기 위해 발족한 능천사대의 특수기동대는 전혀 그녀에게 대응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 사실에서 쾌감을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순순히 인정했다. 설혹 잠자리에 들 때 천박한 쾌감에 몸을 맡겼던 일을 떠올리며 자기혐오에 빠진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웃지 않고 견딜 수가 없었다. 보아라! 의심할 여지없는 대승이다! 플라톤의 의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사람의 유지를 이은 우리가 이렇게 돌아왔다! 우리를 부정한 자들에게 복수를 시작하리라! 어느 쪽 정의가 옳은지 이제부터 천천히 증명해주마!

“우… 아아…….”

 그때 셀레스티나의 절정을 방해하는 불쾌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마땅치 않은 눈으로 자신의 숭고한 기쁨에 훼방을 놓는 눈치 없는 벌레에게 눈을 돌렸다. 뒤집힌 순찰차와 푸른 나비로 변해 사라지는 능천사들의 유해 속에서 연약해 보이는 여경관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 여경은 손에 산탄총을 들고 있었다. 대對 암흑물질 소거용의 특수탄환이 장착된 대구경 산탄총이었다. 이미 이탈자로서 변모한 그녀에게는 그다지 위협이 될 물건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향해 무기를 겨눈다는 사실 자체가 기분 나빴다. 그것도 상대가 벌레 같은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그 역겨움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롬발트 경감님…….”

 여경이 잘 안 들리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셀레스티나는 귀찮다는 듯이 날개를 움직여 적대하는 벌레를 뭉개버렸다. 이윽고 소음은 잠잠해졌고 셀레스티나는 다시 흥분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빌어먹을…….”

 폐허가 된 세인트헬레나 5번가를 눈에 담은 베르길리우스의 입에서 처음 흘러나온 말은 욕지거리였다. 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주인과 한 치의 빗나감 없이 같은 심정이었다.

 너무나도 소름끼치는 광경이다. 몸에 오한이 드는 건 꼭 거리가 엉망으로 파괴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너진 게 건물만이라면 다시 세우면 해결될 일. 특히 제9옥의 거리에서 거리를 수복한다는 건 때로는 깨진 유리창을 갈아 끼우는 것만큼이나 용이한 일이기도 다다. 모든 것은 도시의 천체에 기록되어 있으며 마땅한 원동력만 공급된다면 복구는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방을 가득 채운 암흑물질 특유의 이질감과 살해당해 육체를 잃고 원동천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작고 푸른 나비로 변한 사람들의 영혼이었다. 살아있는 의미를 한없이 가볍게 만드는 그 모습은 같은 생명을 가진 자라면 누구라도 눈을 돌리고 싶어질 구역질나는 광경이었다.

 허나 이미 온갖 수라장을 봐온 베르길리우스에게 죽음이란 친숙하지는 않아도 익숙한 정취 중 하나였기에 이런 광경은 좋아하지는 않아도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그가 욕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건 안테노라의 눈보라마저 상쇄시킬 정도로 강렬한 열풍과 여느 질서이탈자와는 확연히 차이가 있는 상대의 모습이었다.

 겨울의 도시에 있을 리 없는 여름의 재래를 가져온 것은 한 마리의 거대한 붉은 나비였다. 거인의 천개天蓋와도 닮은 두 쌍의 큰 날개는 대기의 흐름과 중력의 관계를 일절 무시한 채 공중에 부유하고 있었고, 그 중앙에는 바닥을 기어 다니는 벌레 대신 풍성한 은발에 붉은 옷을 입은 한 여성이 등의 날개만큼이나 꺼림칙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람에게서 날개가 돋은 건지, 날개에 사람이 매달린 건지 알 수 없는 비례가 안 맞는 구조를, 그녀는 누구보다도 신비스러운 존재로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외양만으로 보자면 동화 속의 요정을 닮은 구석이 있었지만 그 거대함과 적색휘광이 내뿜는 압도감은 어쩔 수 없이 신적인 존재를 연상시켰다.

 대개 맹수나 현묘한 기하학적 형태로 변모하는 다른 이탈자의 흉측한 모습에 비하면 나비의 형태를 빌린 눈앞의 이탈자에게는 상당히 심미적인 멋이 있었으나, 그녀의 외견은 베르길리우스의 마음에 평온을 가져오기보다는 도리어 불안감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보통 이탈자는 내면의 붕괴를 견디지 못해 기괴한 모습으로 바뀌어 간다. 허나 저처럼 안정된 아름다움이 상존하고 있다는 건 상대의 기량이 만만치 않음을 뜻하고 있었다.

 베르길리우스가 뭔가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선수를 치듯이 이탈자가 입을 열었다. 거대한 붉은 나비의 목소리는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려왔다.

『뻔뻔하게 내 앞에 잘도 나타났네. 이 배신자.』

 이탈자의 목소리는 신성한 외양의 걸맞게 영롱했으나, 그 이면에는 섬뜩한 살의가 담겨 있었다. 피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 적의에 반응해 반사적으로 칼집을 움켜쥐었다.

“살아 있었나. 셀레스티나.”

 베르길리우스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머릿속에 순간 여러 가지 복잡한 상념이 거쳐 갔으나 동요를 최대한 내보이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 그는 일단 냉정해져야 한다고 속으로 강하게 되뇌었다. 거의 중얼거리는 수준의 작은 목소리였으나 이탈자에게는 문제없이 들리는 듯 셀레스티나는 조롱하며 대답했다.

『애써 평정을 가장해봤자 소용없어. 넌 설마 우리가 이렇게까지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야. 아니, 바라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진정 원했다면 배신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정곡을 찔렸군.”

 베르길리우스는 부정하지 않고 솔직히 인정했다.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변함없이 침착했으나 세상을 인지할 무렵부터 쭉 그와 함께 해온 피아는 자신의 주인이 내심 괴로워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피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과거의 누군가가 주인과 아는 체 하는 것도 싫었으며 더욱이 주인을 괴롭히고 있는 것도 질색이었다. 왜 저 질서이탈자가 주인과 아는 사이인지, 왜 주인이 배신자라 불려야 하는지 등등 격렬하게 요동치는 의문은 전부 밀어둔 채 피아는 오로지 대화의 끈을 끊어버릴 요량으로 임무를 우선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스터. 렉스의 사용허가를 내려주십시오. 시장의 명에 따라 지금부터 질서이탈자 소거에 들어가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반론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베아트리체의 권위를 들먹였지만 돌아온 대답은 존경하는 주인의 음색이 아니었다.

『정말 갈 데까지 갔구나. 그래도 한 때는 수호학사로 이름 높던 네가 그런 부정한 애완동물까지 기르는 처지가 되다니. 고작 그 따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플라톤 님과 우리를 배신한 거야?』

 셀레스티나의 말에는 빈정거림뿐만이 아니라 분노까지 담겨져 있었다. 명백하게 자신과 시종을 무참히 모욕하는 도발에 베르길리우스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피아에게 고개를 돌려 조용히 말했다.

“안 돼. 허가는 레히트에 한정한다.”

“마스터! 상대는 보통이 아닙니다. 아마 고위급의 역천사에 필적하는 힘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겠지요. 게다가…….”

 피아는 그 뒤로 차마 “겁도 없이 우리를 깔아뭉갰으니 본때를 보여줘야 합니다.”라는 말은 덧붙일 수가 없었다. 임무태세로 전환한 뒤라 자극적인 감정이 후순위로 밀려난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주인에게 싸구려 시종처럼 비춰질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허나 어찌 되었건 대치하고 있는 이탈자는 2개 소대의 특수기동대를 전멸시킬 만큼의 위험대상이다. 그런 상대에게 최강의 무기를 꺼내지 않으면 대체 언제 써야 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베르길리우스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충분해. 너와 나라면 할 수 있어.”

“…예, 알겠습니다.”

 피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겁하다. 저렇게 나오면 반론할 기운이 사라져 버린다. 주인의 신뢰만으로 살아가는 시종에게 그것이 주어졌으니 어떤 불만도 일어나지 않는 게 당연했다. 피아는 만족스러운 가운데도 자신은 도무지 고양이는 될 수 없겠다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자신은 없다는 듯이 취급하는 베르길리우스의 태도에 셀레스티나는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대할 것임은 예상된 일이기도 하다. 물론 그녀는 화려하게 귀환한 자신의 복수전에 배신자인 그가 당황해하기를 바랐지만 한편으로는 헛된 기대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베르길리우스는 예전부터 그랬다. 속으로는 온갖 고민과 불안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절대 그러한 감정을 바깥으로 꺼내는 일은 없었다. 실은 예기치 못한 고난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겉으로는 이미 당연히 벌어진 일은 받아들이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가 좋으면서도 증오스러웠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의 배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좋아. 이제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겠어. 솔직히 왜 플라톤 님의 고고한 이상보다 베아트리체의 추악한 위선에 매료되었는지 듣고 싶었어. 우리가 한갓 사람으로서 이곳에 머물러 있어봤자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야. 결국 베아트리체가 하는 일은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아. 슬픈 도시에서 시민들의 행복에 연연하는 건 잔인한 기만에 불과해. 그건 너도 알고 있을 거야. 가장 처음 그 사실을 내게 알려준 건 너니까. 그런 네가 왜 우리를 배신했는지 난 이해할 수가 없어. 아마 넌 말해주지 않겠지. 나도 이제 듣고 싶지 않아. 그러니 너를…….』

“셀레스티나.”

 베르길리우스는 폭포처럼 장황하게 쏟아지는 옛 동료의 말을 끊었다. 그의 음색은 어쩐지 다정함을 담고 있었기에 셀레스티나는 그만 기대감을 가지고 배신자를 바라보았다. 피아는 그런 이탈자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주인이 과연 무슨 말을 할까 불안했다.
 잠시 뜸을 들인 베르길리우스는 선언하듯이 입을 열었다.

“난 후회하지 않아.”

『……!』

 결정적이었다. 상대가 품고 있는 것이 상냥함이 아니라 동정심이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셀레스티나의 날개는 막을 기세 없이 격렬하게 퍼덕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도무지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고상한 존재가 되기 위해 인간적인 감정을 유지했던 셀레스티나의 이성은 또 다시 사람의 본성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____!』

 그녀는 포효했다. 그건 이미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기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어떤 목소리보다 살벌하고 적의로 가득 찬 비명이 불타는 폐허를 뒤덮어가는 건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뒤덮은 건 절규뿐만이 아니다. 눅눅하게 눈보라를 상쇄하고 있던 열풍이 더욱 강한 기세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피아는 어떻게 나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탈자가 어떻게 무장경찰대를 몰살시켰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셀레스티나가 퍼덕인 날개에서는 꽃가루 대신 화살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 불줄기가 수도 없이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그 모든 위협이 주인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피아는 사이드카에서 일어나 검을 빼들었다. 피아가 뽑은 검의 형태는 어떻게 그런 기괴한 칼날이 칼집에 들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당연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 검에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날이라 부를 날카로운 검신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태엽, 나사, 볼트, 핀, 쇠공 등과 같은 갖은 부속품들이 위태롭게 간신히 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부서진 괘종시계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태엽검 트리아데.
 그녀가 자랑하는 다중검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생긴 것과는 다르게 최강의 방어순도를 자랑하는 무기였다.

“마스터!”

 피아는 짧게 외치며 자신과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당연하게도 태엽검을 불안하게 유지하고 있던 갖가지 부속품들은 거친 충격에 부실한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듯이 사방으로 산개했다. 허나 그건 부서진 게 아니라 전개된 것이었다. 부속품들은 하나하나 실에 조종되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부자연스러운 궤도를 그리며 그들을 향해 덮치는 불비를 막아냈다.

 그 사이에 베르길리우스는 빠르게 오토바이를 몰아 2차 공세를 피하는 동시에 공격하기에 좋은 위치를 찾아 움직였다. 베르길리우스는 허리에 찬 7개의 날이 달린 대구경 권총 페카토를 꺼내며 말했다.

“그럼 가볼까. 빨리 끝내고 밥 먹어야지. 오늘도 점심을 걸렀더니 배고프다.”

 언제나처럼 긴장감 없는 주인의 말에 시종은 안도했다.

“예, 마스터.”

 대답을 마치자마자 피아는 사이드카에서 발을 차고 나섰다. 일반적으로 달리는 오토바이에서 뛰어내리는 건 위험한 일이었으나 흑천사의 전투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상식이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피아의 이동속도는 오토바이를 따라잡을 만큼 빨랐다. 에스텔의 순시순속瞬時瞬速과 같은 경이로운 속도는 아니었지만 괴물을 상대하는 데는 하등 부족함 없는 능력이었다.






TRACKBACK 0 AND COMMENT 2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03.07 13:1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지난번에 올려주셨던 『모형정원의 나비 - 바람 부는 언덕 제5화』의 마지막 장면을 또다른 시점에서 그려주셨군요!! >_<)

    으음, 이번 화의 내용 중에서는 특히나 베르길리우스가 플라톤의 前 수호학사였다는 사실과 의외의 외유내강형 인물이라는 점에 시선이 가네요.

    실로 파란만장한 굴곡의 여정을 거쳐... 지난날의 영광과 표상, 그리고 이상의 편린에게 작별을 고하는 그의 앞날에 새로운 행복과 희망의 빛이 함께하기를 다시금 기원해봅니다. ( 피, 피아가 있으니 어떻게든...!!! )


    덧 - 코키토스 역시 『라비린스 신드롬』에 등장하는 요새 도시, 추밀市와도 같은 고도의 자동 수복 기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로군요! 과연 초과학문명의 유산이란...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03.08 08:32 신고 address edit/delete

      앗,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해주시니 기쁜 마음이 드네요~>.< 정확하게 봐주신 것처럼 에스텔이 사망한 장면을 셀레스티나의 시점으로 본 것을 다시 도입부로 삼았네요.

      베르길리우스의 경우는 플라톤 시절의 학사들 사이에서도 모종의 계획을 실현하는 데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지라 옛 동료들의 배신감도 한층 심한 감이 있네요. 거기에 셀레스티나는 남녀 관계의 애증까지 겹쳐진 상태라(...)

      반면에 피아의 경우는 쇄신한 이후의 베아트리체 시정에 편입된 인물이라 과거에 대해 모르는 면도 많고, 또 그만큼 (주인에 관련된 사항에 한해) 질투심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기도 해요. 이 부분은 차후에 좀 더 자세히 그려질 예정이에요^^


      덧. 옙, 역시 고도문명의 산물답게 알아서 고쳐지는 편리한 면이^^;; 기술적으로는 추밀시의 성능보다 몇 단계 상위급이기도 해요. 기록된 데이터를 그대로 불러내어 파손된 물질을 수복하는 일종의 가상현실의 물질화(?) 같은 개념인데, 차후 '그노시스 노이즈'를 쓰게 된다면 거기서 좀 더 자세히 다루려고 생각 중에 있어요^^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








03. 요동치는 벌떼 (1)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제9옥의 태양은 거짓되었다. 지고천에서 쏟아지는 찬란한 빛줄기는 더 이상 만물을 비추는 생명의 근원 같은 숭고한 지위는 박탈당한 채 지금은 그저 엉성한 무대를 꾸미는 보잘것없는 조명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기만적인 빛조차 하계를 밝히기 위해 몸을 불사르는 숭고한 행위가 아니라 단지 슬픈 도시를 움직이는 과정에서 새어나오는 사소한 부산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시아 솔은 지고천의 빛을 좋아했다. 좀 더 살을 붙인다면 대체할 태양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좋아한다고 해야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태양을 사랑했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햇볕이 내리쬐는 밝은 풍경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 탓에 그녀는 설령 지고천의 빛이 진짜 태양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식이라 해도 다른 태양이 없는 이상 호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신시아는 특별했다. 슬픈 도시에서 가장 강대한 무력집단인 역천사대의 일원이니 당연히 특별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할 것이나, 그녀는 44명밖에 없는 자신의 소속집단 중에서도 돋보이는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 특이함이란 딱히 능력이 뛰어나다거나 힘이 굉장하다는 뜻은 아니다. 중위中位 제1계第一階로 평가되는 그녀의 실력은 절반 이상이 고위급의 랭크를 가지고 있는 역천사대에서는 오히려 모자란 축에 속한다. 물론 그 정도 능력만 되어도 흑천사대에서는 상위, 능천사대로 내려가자면 견줄 자를 찾기 힘들 만큼 강하다고 할 수 있을 터이나, 역천사대를 기준으로 보자면 그저 그런 편이었다.

 신시아가 특별하다는 건 바로 그녀가 진짜 태양을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그녀는 생존자였다. 이제는 이 도시에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행성시대부터 살아온 사람인 것이다. 비록 티마이오스 시스템에 편입되면서 노화가 정지돼 용모는 젊은 시절 아름다운 그대로였지만, 살아온 세월은 열손가락을 수 십 번 접었다 펼 수 있을 만큼이나 되었다. 아마 생일축하를 위해 제대로 초를 꼽으려면 웬만한 케이크 한 두 개로는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시간이 망가진 슬픈 도시에서 나이 따위를 헤아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으며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의 나이를 잊었다.

 그래도 그녀는 태양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과거 암흑물질이 온 세상을 뒤엎기 전의 하늘 위에는 해가 빛나며 모든 것을 축복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축복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그녀만큼은 자연의 선물을 마음껏 만끽했다. 그리고 그 버릇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았기에 그녀는 지고천의 가짜 태양에게라도 위안을 얻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 상황은 신시아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슬픈 도시 최서단에 있는 비비안 호수였고, 이곳은 울창한 숲과 짙은 안개 때문에 지고천의 빛이 거의 닿지 않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각오하셔. 못생긴 아저씨.”

 신시아는 원망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마치 먼 옛날 얼어붙은 땅의 신화에서 전사들의 영혼을 낙원으로 데려간다는 전투의 여신처럼 빛나는 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으며, 손에는 아름드리나무조차 단 칼에 몇 구루는 벨 수 있을 것만 같은 살벌한 대도가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판덱텐이라 불리는 자신의 애검을 마치 한손검처럼 가볍게 휘둘렀다.

- 이, 이, 이… 베아트리체의… 앞잡이가……!

 그녀가 상대하고 있는 건 어떤 질서이탈자였다. 곰과 거미를 기묘하게 합성시켜 놓은 것처럼 괴기한 모습의 이탈자는 비비안 호수의 숲을 엉망으로 망쳐놓으며 슬픈 도시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사납고 엉망진창인 질주였지만 노리는 방향이 워낙 정직했기에 이탈자가 무엇을 목표로 달리고 있는지는 명백했다. 괴물은 도시에서 지고천으로 이어지는 하늘의 음계를 노리고 있었다.

“끈질긴 자식!”

 신시아는 자신의 일격에 몸의 일부를 잃고도 여전히 속도를 줄이지 않는 이탈자를 뒤쫓으며 진저리를 쳤다. 이 근처는 숲이 우거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물이 얼지 않는 신비한 호수의 영향으로 안개까지 자욱해 자칫하면 흔적을 놓칠 수도 있었다. 만의 하나 괴물이 도시 내부로 돌입하는 걸 허용한다면 큰 비극이 일어날 것이다.

“에휴, 내가 생전 무슨 죄를 졌다고…….”

 보통 사람의 힘이라면 서너 명이 달려들어도 들기 힘들 푸른 대검을 가냘픈 팔뚝으로 거뜬하게 들고 달려가면서 신시아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았지만 행성시대 이후의 자신은 다른 생을 살고 있노라고 여겼으며 조금만 힘들거나 골치 아픈 일이 있으면 입버릇처럼 전생을 들먹거리곤 했다. 그녀의 입장에서 안테노라는 추운 날씨와 암흑물질의 형상체만 해도 골치 아픈 계절인데, 거기에 더해 이탈자까지 처리해야 하다니 근로과다처럼 느껴졌다.

 사실 그녀는 무고한 자신이 억울하다는 듯이 내뱉는 한탄과 다르게 일반적인 도덕관념에 비추어 보자면 죄라고 볼 수 있는 짓을 ‘생전’ 많이 저질렀었다. 그녀는 과거에 사람을 잔뜩 죽인 전력이 있었다. 물론 그 시대에는 폭력과 살생이란 밥 먹는 것 이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므로 지금의 도덕적 잣대를 가지고 소급적용하는 건 조금 가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숫자가 한 둘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녀가 해치운 머릿수를 모으면 아마 야산 하나는 충분히 쌓고도 남을 것이다. 그 일이 흉악한 짓이었다는 건 그녀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였다.

 아무튼 그런 신시아도 이제는 엄연히 시민들의 안전을 염려하는 훌륭한 수호자의 일원이었다. 그녀는 이탈자의 속도가 떨어지지 않는 것에 점점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괴물을 시야에서 놓치는 건 시간문제다. 그녀는 절대 느린 편이 아니었지만 자신보다 날렵한 상대가 오로지 질주에만 목숨을 걸고 있는 걸 따라잡을 정도로 충분히 빠르지는 않았다.

 동료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신시아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재 그녀는 혼자 파견 나와 있는 상태였다. 항상 짝을 지어 임무를 수행하는 흑천사대나 아예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능천사대와 달리 역천사대는 단독파견이 기본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시민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충분한 위엄과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이다.

 역천사대의 존속과 활동에는 그 자체에 이미 큰 상징적인 의미가 부여되어 있었다. 그들은 절대적인 힘을 프로파간다용으로 홍보하기 위해 능천사나 흑천사의 힘으로는 도저히 숨길 수 없을 만큼 공식적이고 커다란 위협을 제압하는 데만 직접 나섰다. 그리고 그 경우는 항상 단 한 명의 역천사만을 파견해 압도적인 무력을 과시해 모든 것을 징벌하는 형태로 끝을 맺었으며 그들이 보여주는 절대성의 환상은 시민들에게 안도감을 주는 동시에 질서유지의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다.

 그렇기에 안테노라의 공식적인 암흑물질 소거활동에 나설 때도 역천사들은 홀로 파견되었으며, 지금처럼 무력한 시민들에게나 위협이 되는 형상체 대신 이탈자가 출현한다는 예기치 못한 사정이 벌어지는 때에도 그 규칙에 변함은 없었다.

 신시아는 이탈자가 시민들의 일상구역에 뛰어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는 그 참혹한 결과에 몸서리를 쳤다. 모든 시민들이 자신들 역천사처럼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 수많은 희생자가 나올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저 이탈자는 여기서 붙잡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녀의 간절한 바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탈자와의 거리는 계속 벌어지기만 했다. 평범한 시력으로는 제대로 포착하기도 힘든 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였으나, 나뭇가지에 긁히든 나무에 부딪치던 개의치 않고 투명한 바람처럼 폭주하는 이탈자를 따라잡는 건 무리였다.

 이윽고 인내심이 바닥난 신시아가 이판사판으로 들고 있는 검이라도 던져볼까 하는 판단력이 저하된 방책을 시도하려고 했을 때, 저 멀리 달리고 있던 이탈자를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놀란 그녀는 급히 혜안을 발동시켜 이탈자만큼이나 예기치 못한 구원자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 포착된 상대는 놀랍게도 검은 제복과 붉은 베레모를 쓴 흑천사였다.

 예고 없이 등장한 흑천사는 날렵한 샤벨을 들고 있는 호리호리한 몸집에 검은 단발머리를 한 여검사였다. 어쩐지 장난스러워 보이는 밝은 인상과 달리 흑천사는 이탈자를 막아서자마자 맹공을 개시했다.

- 워어어어어!

 이탈자는 길게 포효하며 거미처럼 긴 여덟 개의 곰 앞발을 동원해 방어하려 했으나 아무리 팔을 내저어도 괴물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날 뿐이었다.

“저건……!”

 신시아의 혜안이 날카롭게 빛났다. 흑천사가 들고 있는 샤벨의 칼날은 어딘가 기묘했다. 마치 흐린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는 것처럼 분명치 못하고 뒤틀려 보이는 것이다.

 굴절검. 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낮게 신음했다. 이탈자가 저렇게 맥을 못 추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한시적으로 존재확률이 난수화된 칼날을 막아낸다는 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게다가 굴절검을 다루고 있는 흑천사는 당연히 그것의 취급에 익숙한지 마구잡이로 출현하는 칼날을 적절히 이용해 자신에게 들어오는 공격은 모두 막아내고, 반대로 상대편의 방어는 전부 돌파해 타격을 입히는 불합리한 맹공을 펼치고 있었다.

 마침내 괴물은 버티지 못하고 뒤로 길게 뛰어올랐다. 이성을 거의 잃은 이탈자라 해도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죽게 될 거라는 걸 직감한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도약이야말로 신시아가 노리던 바였다.

“다신 보지 맙시다!”

 허공으로 뛰어오른 이탈자는 어디에도 피할 길 없이 무방비 상태로 아주 좋은 표적이었다. 신시아는 만의 하나라도 실패하는 걸 피하기 위해 판덱텐의 비기를 사용했다. 신시아가 대도를 휘두르는 순간 날 부분에 장착된 추진기가 불을 뿜었고, 그녀와 그녀의 대도는 폭발적으로 날아올라 이탈자를 한순간에 일도양단했다.

- 카아아아…….

 너덜너덜해진 채 반 토막이 된 이탈자는 치명적인 죽음의 손길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허공에서 먼지로 변해 흩어졌다. 일말의 자비 없는 거대한 일격에 숙주가 사망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거기에 들러붙었던 암흑물질도 소멸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는 분이네요.”

 하마터면 놓칠 뻔한 이탈자를 간신히 처리해 한숨을 돌리는 신시아에게 흑천사가 다가와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사람이라면 편견도 없을 거야, 라는 편견이 들만큼 구김 없는 인상과 밝은 어조였다. 만약 특유의 흑색제복이 아니었다면 얼음의 도시에서 가장 추운 계절을 맞아 성황을 누리고 있는 꽃집 아가씨로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신시아는 인사에 답하는 것보다 우선 의문점부터 해소하기로 했다.

“어째서 흑천사가 이 구역에 있는 거지? 짝은 어디다 팽개치고?”

 현재 제9옥은 비상사태다. 안테노라를 맞아 암흑물질의 침수는 격렬했고, 설상가상으로 거의 궤멸됐다고 알려진 플라톤 원리주의자들까지 활동을 재개해 슬픈 도시의 3대 무력기관은 하나 같이 정신없이 혹사당하는 형편이었다. 구성원이 많은 것만이 자랑인 능천사라면 모를까 역천사대만큼이나 만년 인력부족에 시달리는 흑천사대의 일원이 지정 외 구역에서 배회하고 있는 모습은 아무래도 수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흑천사대의 기본방침은 2인 1조의 팀 구성이었기에 저렇게 홀로 다니는 흑천사는 임무수행 중 파트너가 사망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허나 눈앞의 상대가 평소 동료를 원수처럼 생각하고 있었거나 정신이상자가 아닌 이상에야 파트너를 잃고 저리 밝을 리는 없을 테니 신시아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그러나 흑천사 소녀는 고민하는 그녀가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간단히 하나하나 해답을 제시했다.

“여긴 제가 맡은 구역이에요. 아마 질서이탈자를 쫓느라 정신이 없으셨나 봐요.”

 살짝 웃음기 섞여 있는 흑천사의 말에 신시아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울창했던 숲은 어느덧 사라지고 주변에는 말라붙은 나무가 쓸쓸하게 뒹굴고 있었으며 저 멀리 도시의 풍경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녀들이 살고 있는 이 공간 자체가 슬픈 도시 코키토스라 불리긴 하지만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일상거주구역을 일반적인 의미를 도시라 칭할 경우, 이곳은 도시에서 살짝 벗어난 서쪽 숲의 중심이었다.

“그렇군. 어느새 죽은 자의 쉼터까지 왔다니 눈치 채지 못했어. 그럼 어째서 혼자 있는 거지?”

“대원구성이 홀수거든요. 아, 전체 인원은 짝수지만 대장님은 다른 할 일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할 때가 많아요.”

 이걸로 신시아는 위화감을 전부 해소할 수 있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생쥐를 쫓던 자신은 스스로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도 못할 만큼 정신이 없던 것이고, 마침 만난 상대는 일반적인 원칙에서 벗어난 예외인 것뿐이다. 신시아는 혜안이 설정된 자신이 이렇게 통찰력이 없어야 되겠냐고 속으로 킥킥거렸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 길 없는 흑천사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고마워요. 제 무기로는 단숨에 죽이기 어려워 걱정했는데 수고를 덜었네요.”

“흥. 지나친 겸손은 자만이라고 하지. 나야말로 덕분에 살았어. 고맙군, 클로디아 프락시.”

 신시아는 까칠한 말투와 다르게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클로디아라 불린 흑천사는 고양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어라, 제 이름을 알고 계시네요. 설마 저 유명인이었나요?”

“아닐 걸.”

“에이, 그렇군요. 살짝 기대했는데 실망이에요. 그럼 어떻게 아신 건가요. 혹시 저랑 면식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설마 저에게 관심이…….”

 클로디아의 얼굴이 불그스름해지기 전에 신시아는 황급히 손을 흔들며 부정했다.

“아니, 아니야. 너무 앞서나가지마. 지극히 간단한 추측이었을 뿐이야. 대부분 흑천사대는 근대무기를 쓰잖아? 그 중에서 창검을 고집하는 사람이라곤 단 셋밖에 없는데, 아무리 봐도 눈앞의 소녀가 대장 영감은 아닌 것 같고, 다중검의 피아 녹턴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경애하는 자신의 마스터에게 껌 딱지처럼 붙어 다닌다고 하니, 남은 건 너밖에 떠오르지 않더라고. 굴절검의 대행자라면 소문을 들어 알고 있지. 다들 네 특이한 검에 흥미가 많거든.”

 클로디아는 약간 과장되게 실망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흑, 저보다는 강철쪼가리한테 관심이 있는 거군요. 아아, 사람보다 물질이 중시되는 시대라니 슬프네요. ……근데 근대무기?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아, 미안해. 신생자에겐 익숙지 않은 말이었겠군.”

“신생자……? 앗, 혹시 생존자 분이세요? 그렇다면 당신이 역천사대의 신시아 솔!”

 신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클로디아의 얼굴이 화색으로 물들었다.

 신생자와 생존자. 이것은 제9옥이 설립된 후 계급 외에 비공식적으로 시민을 양분하는 또 하나의 경계선이었다. 인류가 슬픈 도시에서 살아간 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행성시대로부터 살아온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수가 줄어들었다. 지정된 수명이 다하거나 사고로 죽거나 혹은 살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은 원동천의 윤회판에 의해 회수된 후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행성시대로부터 살아온 이들을 ‘생존자’라 칭하고, 새로이 목숨을 부여 받은 자들을 ‘신생자’라 불렀다. 현재는 그 비율이 완벽히 깨져 시민들의 9할 이상은 모두 신생자였다.

“나야말로 유명했던 모양이군. 아니면 설마…….”

 무뚝뚝 보이는 것과 달리 유머를 사랑하는 신시아는 클로디아의 우스운 오해를 똑같이 흉내 내려 했으나 시도하기도 전에 손을 잡혀 채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반가워요! 예전부터 정말 만나고 싶었어요!”

“왜?”

 신시아는 이름만 알고 있는 초면의 흑천사가 왜 갑자기 과도한 호의를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클로디아는 별로 숨길 것 없다는 듯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행성시대가 어떤지 궁금했거든요. 우리 부대에도 대장님이나 베르길리우스 님 같이 생존자 분이 계시긴 하지만 도무지 예전 일은 말씀을 해주시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다른 생존자 분을 만나면 꼭 옛날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신시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건……. 미안하지만 말할 수 없어.”

“예? 어째서죠?”

“…규정위반이거든. 행성시대와 관련해서는 코키토스에 사는 다른 이는 물론 자신과 관련된 과거도 밝히지 않는 게 규칙이야. 몰랐어도 어쩔 수 없지. 생존자들에게만 특별히 내려진 일종의 함구령이니까.”

“음……. 어쩐지. 그럼 신시아 씨 이야기는 딱 빼고 들려주실 수 없나요?”

“그것도…… 좀 힘들어.”

 신시아는 차마 “듣는 쪽이 괴롭거든”이라는 말을 덧붙일 수가 없었다. 상대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어본 것에 불과한 듯하니 괜히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기야 과거를 추억하는데 자기 얘기를 빼고 말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곤란한 부탁을 드린 것 같아 저야말로 죄송해요.”

 클로디아는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더 이상 조르지는 않았다. 다행히 클로디아는 멋대로 오해해주었고, 신시아는 조용히 안도했다.






TRACKBACK 0 AND COMMENT 4
  1. Favicon of http://doelnom9999.tistory.com BlogIcon 될 놈 마인드 2014.03.05 01:10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추천 누르고 갑니다.

  2.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03.05 13:47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진정 소중한 것은 이를 상실하기전까지 결코 깨닫지 못한다고 했던가요...?

    필시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여겨질법한 태양의 풍광마저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어버린 상실의 시대와, 그 위를 기약 없이 표류해야만 했던 인공 천체의 거주자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기록에 대한 명시적 언급을 기피하는 것은 분명 일방적인 자기애나 과시의 이유가 아닌... 극도로 참혹하고도 암울했던 당시의 사건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생존자에게 있어서는 미증유의 대재앙에 대한 깊고도 쓰디쓴 트라우마를, 신생자에게는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크나큰 마음의 충격을 초래할 일말의 가능성을 경계한 탓이겠지요.


    심지어 그 일란과 잔 다르크마저 가능한 은유 등의 간접적인 접근 방식을 선호할 정도였으니...

    그러고보니, 그처럼 복잡다단하면서도 방대한 규모의 사건들 사이에서 인류가 외우주로 필사의 대탈주를 감행했던 시기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장대한 서사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답니다.

    왠지 그 시대의 잔과 신시아라면 서로 극명히 대비되는 위치에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을 것 같기도 한데... 이와 관련된 외전격 에피소드가 나오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_< )


    덧 - 아앗... 베르길리우스 역시 행성 시대로부터의 생존자였군요!! (+ㅁ+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03.05 23:57 신고 address edit/delete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이 실은 당연하지 않았을 때 느껴지는 충격과 과거에 대한 그리움은 참으로 큰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하물며 그것이 긍정적인 혹은 시대의 어쩔 수 없는 변화 같은 것이 아니라 모종의 재난이나 전쟁 등의 부정적인 요인으로 인한 퇴보 및 상실일 경우에 감당해야 하는 괴로움이란 어떠할지...

      말씀처럼 행성시대의 생존자들에게 과거 일을 언급하는 것이 금지된 것은 말하고 듣는 각 개인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해요.

      특히 과거에 여러 가혹한 경험을 하고 그 후에도 기나긴 세월을 살아온 생존자들의 경우는 정신성의 마모를 막는 것이 가장 시급한 사안이네요. 물론 생존자 인증을 받을 만한 인물들은 대개 범인凡人을 아득히 뛰어넘는 초인의 영역에 달한 자들이 대부분이나, 세상에 절대적인 것이란 없으니^^;;

      신생자가 과거 일을 듣는 것이 금지된 것은 정신성의 오염을 막는 것에 더해 '쓸데없는 발상'을 떠올리지 못하도록 막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네요. 보통의 사회라면 역사를 배우고 연구하는 것이란 중요한 일이 되겠지만, 작중의 방주도시는 극도의 통제사회이다 보니 불확정 요소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걸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 여러모로 제약이 많다는 설정이에요.

      과거 행성시대의 인류나 생존자들의 과거는 작중에서 간간히 압축된 서술로 간략하게 언급이 될 예정인데, 말씀처럼 그러한 배경에서 등장인물 중 하나를 잡아 외전을 쓰는 일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덧. 예, 거기에 대해서도 차후 이야기가 전개될 예정이랍니다~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








02. 바람 부는 언덕 (7)


 시간은 악마만큼이나 거짓말쟁이다. 그것은 정확히 측정될 수 있다는 매력적인 유혹으로 어김없이 사람들의 의식을 붙잡아 끝없는 미궁으로 던져놓고 헤매는 모습을 즐기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목의, 탁상의, 벽걸이의, 탑 위의 바늘이 공정할 거라 굳게 믿는 어리석고 순진한 사람들은 항상 시간에게 그 허를 찔려 농락당하고 만다.

 그렇기에 현명한 사람은 시간을 믿지 않는다. 현자라면 누구나 시간 따위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오로지 인생의 문제만을 직시한다. 의지할 것 하나 없이 떠다녀야 하는 이 세상에 확고하게 존재하며 결코 좌표를 잃지 않는 표류물이 있다면 그건 어디에나 산재해 있는 문제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이유가 있든 미친 듯이 눈 폭풍이 불어 닥치는 날씨에 길거리를 나다니는 클로에는 절대 현명한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없으며, 당연히 그녀는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흰 미로 속에서 그녀는 얼마나 시간이 경과했는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일분이 지났을까, 한 시간이 지났을까, 아니면 하루가 지났을까.

 시간이란 생의 뗄 수 없는 동반자이기에 시간을 놓치면 삶 또한 불분명해지게 된다. 클로에는 의식을 다잡아 보려 애썼지만 점점 희미해지는 시간감각만이 살아있는 자라면 누구보다도 친밀히 접해야 할 동반자가 실은 가장 믿을 수 없는 상대라는 점을 끊임없이 일러줄 뿐이었다. 물론 그건 준동하는 변덕스러운 진실 중 하나로 이 상황만 벗어나면 금방 잊게 될 터였다.

 클로에는 평소 현인을 자처하는 근거 없는 자부심을 되살리기 위해 시간이라 하는 신뢰할 수 없는 지표를 던져버리고 곧 문제에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문제만은 언제나 어디서나 사라지는 일 없이 그녀의 곁에 있었다. 영웅은 없을지언정 괴물은 존재하는 법. 클로에는 자신이 무엇을 쫓고 있는지 잊지 않고 있었으며 광장에서 붙잡은 가냘픈 흔적에 온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눈앞을 가린 눈의 장막이 사라지며 정상적인 시력이 돌아왔다.

『아가씨는 역시 굉장하시군요. 안테노라의 하얀 미궁에 얼마나 빠져 계실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빨리 벗어나시다니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린 클로에의 귓가에 들려온 건 찬사를 가장한 조롱이었다.

“흥. 네 녀석이 방향 유도를 멈췄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그저 이 따위 수준 낮은 현혹은 금세 떨쳐낼 수 있으니까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야.”

 클로에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안테노라의 눈보라는 단순히 매서운 바람과 시야를 가리는 폭설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계절에 몰아치는 폭풍에는 사람을 환상에 빠뜨려 잠들게 하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는 것이었다. 만약 누군가 이야기 상대가 있어 대화만 할 수 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홀로 길을 걷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환상에 빠져들어 방황하게 되는 불가해한 현상이었다.

『오해를 하고 계시는군요. 힘의 유동을 따라 플라톤 원리주의자들의 뒤를 쫓는 건, 저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목적지가 있다면 방향을 말씀드릴 수 있었겠지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절대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디스는 변명했지만 물론 거짓말이었고, 클로에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광장에 남은 이탈자의 흔적을 잡아내는 건 그녀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허나 그녀가 눈보라 속에서 헤매지 않게 말을 걸어주는 것쯤은 충분히 할 수 있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악마청년이 입을 다문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눈 속에서 갈피를 못 잡는 자기 주인의 한심한 작태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디스의 소망을 눈치 채고 있었던 클로에는 자신의 시종이 기망을 하였다는 사실에 분노를 터뜨리기보다는 그 기대를 멋지게 배신했다는 점에 쾌감을 느꼈다.

“잠깐, 설마 여기는…….”

 자신을 거꾸러뜨리려던 상대를 도리어 한방 먹였다는 기쁨에 취해 있던 클로에의 들뜬 마음은 주위를 둘러보자마자 급속하게 식어갔다. 현혹하는 눈보라를 뚫고 겨우 목적지에 도착한 그녀의 앞에는 반쯤 무너진 회색 터널이 죽어버린 거대한 고목처럼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폐허 앞에 사람의 출입을 막기 위해 금줄처럼 처져 있는 노란 테이프와 붉은 바리게이트는 그녀가 당도한 장소가 어떤 곳인지 잘 말해주고 있었다.

“비통제구역…….”

 어두운 안색으로 중얼거리는 그녀의 심상치 않은 음색은 이곳이 통제를 제한할 만큼 위협적인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정황증거로서 제시하고 있었다. 그렇다. 마치 사건현장을 막아둔 것만 같은 저 세련되지 못한 표식은 슬픈 도시의 주민들에게는 더없이 불길한 암시인 것이다.

 코치토스는 분명 인류 역사상 그 어느 국가보다도 철저한 통제가 행해지고 있는 곳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구역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지는 못했다. 언제나 세상에는 인지를 뛰어넘는 일이 발생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고립된 슬픈 도시에도 그 엄격한 지배가 닿지 못하는 부분이 몇몇 존재했다.

 예를 들자면 그건 마녀들의 숲이었고, 예를 들자면 그건 망자들의 마천루였으며, 예를 들자면 그건 봄의 벌레들이었다. 그것들은 하나 같이 절대적으로 보이는 천체의 지배를 벗어나 불가사의한 원리로 시공간을 표류하며 이 세상 어딘가에 남몰래 숨 쉬고 있었다.

 비통제구역이란 암흑물질에 침식당한 구역을 뜻하는 일종의 은어로서 다른 전설적인 불가지에 비해 좀 더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었다. 제9옥의 일부 구역에는 비정상적으로 침수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장소가 있었으며, 비록 외부우주의 암흑물질은 오로지 따스한 피를 가진 생명체만을 노릴 뿐 차가운 무기질의 물체에는 깃들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지역은 도시통념상 침식되었다고 불렸다.

 비통제구역은 플라톤의 시정시절에는 훨씬 그 수가 적었다. 무슨 사건이 벌어졌다거나 환경이 달랐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정책상의 차이였다. 굳이 분류하자면 비둘기보다는 매파라고 칭해야 할 플라톤의 통치는 도시의 완결성을 침해하는 그 어떤 얼룩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모든 걸 힘으로 배제하려 했기 때문에 전前 시장의 시대에는 많은 이들이 비통제구역의 암흑물질을 무리하게 몰아내려하다가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었고 오히려 시정 말기에는 시민의 일부를 그 근처로 이주시켜 생활터전을 만들기까지 했다. 물론 그건 아무런 사태의 해결이 되지 못한 채 또 다른 희생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기약 없는 암흑물질과의 사투는 새로운 시장 베아트리체가 비통제구역에 대한 통제권의 완전포기를 선언하면서 겨우 멈추게 되었다. 소위 비통제구역이라 불리는 지역에 침수가 잦은 건 도시의 구조적인 결함으로 암흑물질의 침입이 용이해진 것이었기 때문에 코치토스의 외벽 자체를 다시 구성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대책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 침수지역의 암흑물질을 배제하려는 시도는 마치 과거 바다라는 곳에 있었다는 밀물과 썰물 자체를 제어하려는 것에 진배없는 무의미한 소모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베아트리체는 그런 무모한 도전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울렸지만 베아트리체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스릴 수 없는 지역에 헛되이 들일 에너지와 인력을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는 다른 지역으로 돌렸다. 그 패배적인 행정에 모욕감을 느낀 사람은 많았지만,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째서 이런 곳에……. 아니, 당연한가.”

 왜 이탈자의 흔적이 이 앞에서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했던 클로에는 곧 혼란에서 벗어나 뭔가 납득했는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베아트리체의 시정 이후 버려진 이 지역이라면 설령 암흑물질에 동화 당할 위험성은 높다고 해도 은신하기에는 최적인 장소일 터. 시장에게 반대해 도시 전체를 상대로 폭력적인 투쟁을 행하고 있는 플라톤 원리주의자에게 있어서는 암흑물질보다는 오히려 거리를 순찰하는 능천사나 강대한 무력을 자랑하는 역천사 쪽이 훨씬 위험한 존재일 것이다.

『그 사람들도 필사적이군요. 호랑이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뱀 아가리로 뛰어드는 건 대체 어떤 심정일까요?』

 조롱과 감탄이 반반씩 섞인 디스의 중얼거림이 머리핀을 통해 흘러나왔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그로서는 말 그대로 남 일에 지나지 않았으니 강 건너 불구경하듯 긴장감 없는 말투였으나, 실제로 직접 그 뱀 아가리를 앞에 둔 클로에는 한가롭게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주인이 장차 겪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에 대해 무신경한 시종을 꾸짖는 것보다는 평소처럼 냉정하게 분석하는 걸 통해 마음의 평정을 찾기로 했다.

“그래도 필경 호랑이보다는 나을 테지. 범은 강력한 앞발과 날카로운 어금니를 가지고 애처로운 사냥감을 사냥하지만 뱀의 식도는 최소한 들어온 모든 걸 공평하게 녹일 뿐 적의나 악의나 증오에 의해 공격하지는 않잖아? 위액에 녹지 않을 자신만 있다면 뱀의 몸통에 숨는 것도 의외로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그거야 물론 잡아먹힌 들쥐가 소화되지 않을 자신만 있다면 확실히 호랑이, 아니 쥐를 예로 들었다면 역시 고양이보다는 뱀이 나을지도 모르죠. 허나 과연 그들에게 그런 저력이 있을까요? 비통제구역은 과거 플라톤 님이 많은 영혼을 소비하고, 현재 베아트리체 님은 아예 포기한 지역인데요. 만약 그들에게 침수지역을 제압할 힘이 있었다면 우리 시장님은 지금보다 좀 더 골치를 썩이셔야 했을 걸요.』

 디스는 침착하게, 하지만 어딘가 재반박 당하기를 기대하는 미묘하게 들뜬 어조로 결과론적으로 수긍할 수밖에 없는 지적을 내놓았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그들에게는 확실히 비통제구역을 제어할 만한 여력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플라톤 원리주의자로 통칭되는 구시대의 회귀자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또 하나의 코치토스를 이루는 ‘밤의 시민들’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수의 무리들이 강대한 지배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대현자 플라톤의 지위를 뻔뻔스럽게 강탈한 악녀 베아트리체를 용서할 수 없었던 플라톤 지지파는 스스로를 돌격대라 칭하며 자신들의 결의를 직접 행동에 옮기곤 했던 것이다.

 그 도화선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은 게 바로 3년 전에 일어났던 천체폭파사건이었다. 세간에는 막연하게 월광천을 겨냥한 테러행위라고만 밝혀졌지만 실제로 그 목표는 미등록자 영혼이면서도 당당하게 추대를 받던 일란과 잔 다르크를 노린 것으로 잠정결론이 지어졌으며, 그것을 신호로 다른 천체는 물론 종국적으로는 지고천의 베아트리체를 거꾸러뜨리는 게 그들의 목적이었다고 한다.

 허나 플라톤 원리주의자들의 과감한 반역행위는 첫 봉화를 올리는 것 이상으로는 더 진전될 수 없었다. 그동안 다소 무르다고 생각될 정도로 반대자들에게 온건한 처분을 내리던 베아트리체조차 그때만큼은 위기를 느낀 것인지, 아니면 폭발을 통해 목숨을 잃은 고귀한 영혼들에 대한 순수한 분노에서인지는 몰라도 드물게 몸소 흑천사대를 이끌고 나왔기 때문이다. 베아트리체는 새 시대를 받아들일 줄 모르는 폭력적인 그들에게 노도와도 같이 더욱 강력한 폭력을 선사해 그들 조직의 대다수를 궤멸시켜버렸다.

 결국 지금 플라톤 원리주의자들은 당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몇몇 학사들과 사정상 소위 불의에 대한 ‘항쟁’에 참가하지 못한 극소수의 비전투요원들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예전과 같은 강대함은 절대 회복할 수 없게 되어버린 그들이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간간히 소형폭탄을 품은 자살테러로 불쌍한 능천사 경관들의 영혼을 원동천으로 회수시키는 저항이 전부였다. 전성기에 비하면 아예 바닥에 떨어졌다 해도 지나칠 것이 없는 플라톤 원리주의자들의 잔당이 그들의 신봉하는 플라톤마저 결국 정복에 실패한 지역을 은신처로 삼을 위업달성을 꾀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클로에는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또 하나의 결과론으로 디스의 주장을 반박했다. 분명 플라톤 원리주의자들은 약화되었긴 하나 아직 스러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간헐적으로나마 폭탄테러를 통해 능천사대를 괴롭히고 있었고, 플라톤이 도시의 안정을 위해 절대 용납하지 않았던 미등록자까지 유괴 - 아마 죽였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 하고 있으며, 에스텔의 정보에 의하면 엄중히 관리되고 있는 방천경까지 빼돌려 암흑물질을 도시 내에 침수시키는 만행까지 저지르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그에 합당한 조직력이 갖춰지지 않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규모의 일이다. 무엇보다 광장에서 롬발트 경감과 조우했다는 이탈자의 자취가 바로 이 앞에서 풍기고 있으니 결과론을 따지자면 디스보다는 클로에의 주장이 훨씬 우수했다. 그에 더해 클로에는 빈약하긴 하나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할 이론적인 근거까지 가지고 있었다.

“플라톤은 비통제구역을 완전히 정화시키고 싶어 했기 때문에 많은 희생이 필요했던 거고, 베아트리체는 그런 희생을 거쳐도 저곳을 행정구역으로서 쓸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버린 거야. 하지만 단순히 숨어 사는 거라면 그런 수고는 들지 않아. 눈앞의 형상체에게 도망칠 빠른 발과 잠자는 도중 암흑물질의 흐름에 먹히지 않을 정도의 예민한 주의력만 갖추면 불안하긴 해도 몸을 숨기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겠지. 여차하면 비통제구역 밖으로 벗어나면 되는 거고. 저 안에서는 그들에게도 지켜야 할 명령이나 집 같은 건 없을 테니까.”

 그녀의 말처럼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건 오로지 빼앗는 것뿐. 어떻게 보면 안쓰러운 처지였지만 자칫 빼앗겨야 되는 위치에 있는 그녀로서는 그들에게 분노했으면 분노했지 어떤 동정심도 일지 않았다. 몸을 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터. 그들은 싸움과 멸망의 길을 자신들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다.

『아가씨 말씀이 맞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그 사람들에게도 아직 밟으면 꿈틀할 정도의 기력은 남아 있는 모양이군요.』

 시종이란 처지에 어울리지 않게도 주인과 벌이는 자그마한 말싸움 하나하나 지기 싫어하는 디스였지만 이번만큼 기분 나쁠 정도로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클로에는 그 이유를 싫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기에 전혀 의문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건방진 시종의 사고방식 따위는 별로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데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다.
 디스는 클로에가 짐작한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럼 이제 돌입하시는 거군요. 녀석들은 잡고 싶고, 다른 천사들의 지원을 기다릴 수 없다니 선택의 여지는 없겠지요.』

 디스가 순순히 클로에가 옳다는 걸 받아들인 이유는 명백했다. 바로 자신의 억측이 틀려야 클로에가 뱀 아가리 - 비통제구역 - 으로 들어갈 구실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주인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인 그로서는 클로에가 저 안으로 들어가는 걸 꺼려하는 마음이 있다는 걸 알자 더욱 기뻐하고 있었다.
 클로에는 무너진 터널 사이로 펼쳐져 있는 어둠을 응시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흐… 흥! 그렇지 않아도 비통제구역은 어떤 곳일까 한 번 보고픈 마음도 있었는데 바라던 바야. 녀석들도 끝장내고, 비경탐사도 하고 일석이조지.”

『비경이 아니라 그냥 위험지역입니다만.』

“시끄러워. 넌 오늘 혹사당할 각오나 단단히 해!”

 클로에는 건방진 시종의 말대꾸에 성을 내는 건지, 공포를 쫓기 위해 허세를 부리는 건지, 아니면 둘 다인 건지 알기 힘든 태도를 취하며, 큰 동작으로 노란 테이프와 붉은 바리게이트 사이를 훌쩍 넘어 금지된 구역으로 발을 디밀었다.






TRACKBACK 0 AND COMMENT 2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02.28 11:27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그, 그렇군요!

    비경 탐사라...(+ㅁ+

    후후후, 이제 그저 뚜벅 뚜벅 걸어가기만 하면 경험치와 아이템이 자동으로 인벤토리 안에!!! (으아니 잇 살람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얏!!;;; )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02.28 23:54 신고 address edit/delete

      본격 레벨 업을 위하여 던전 탐사!

      악마 집사의 서포트를 받으며 미지의 지역을 탐험한다는 점에서
      문득 그 유명한 프린세스 메이커2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








02. 바람 부는 언덕 (6)


 베르길리우스 카르디날과 피아 녹턴은 토성천으로부터 하늘의 음계를 타고 질서이탈자가 출현했다고 하는 북부 구역으로 내려왔다. 하늘의 음계란 공중에 떠 있는 천체와 지상을 연결 지어주는 계단으로서 공중에 뜬 섬돌의 모습이 마치 악보를 연상시킨다는 누군가의 시적인 발상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러나 낭만적인 명칭과는 달리 천사들이 그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오는 건 긴급을 요하는 흉흉한 일이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하계에서 천체로 향하는 건 소수의 제한된 지정구역을 통해야 하지만, 천체에서 하계로는 어느 구역이든지 갈 수 있게 되어 있었기에 흑천사대의 두 사자는 금세 세인트헬레나에 도착했다. 베아트리체가 현장에서 활동 중인 다른 천사들을 파견하지 않고 굳이 토성천에 머물고 있는 이들을 보낸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천체에서 뻗은 수많은 줄기가 닿은 뿌리 부분에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천사들의 전용 무인無人 간이차고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베르길리우스는 그 속에서 산길조차 거침없이 가로지를 수 있을 것만 같은 두툼한 타이어와 은색의 몸체가 인상적인 대형 오토바이를 한 대 꺼내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망설임 없는 태도로 털썩 걸터앉았고, 피아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뒤에 앉아 그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출발한다. 꽉 잡아.”

 한때 4자리가 훌쩍 넘어가는 배기량을 자랑하며 마니아들의 과시욕을 자극했던 행성시대의 이륜차는 전신을 진동시키는 엔진소리와 함께 현재 이탈자가 난동을 부리고 있다는 5번가를 향해 출발했다.

 비록 한치 앞도 제대로 분간하기 힘든 눈보라 속이었지만 베르길리우스는 속도를 줄이는 법이 없었고, 피아 또한 그의 무모한 주행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지금 내리는 눈은 몸을 차갑게 하고 시야를 가린다는 것 외에는 그들에게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도 엄청난 폭설이 내리고 있었지만 거리에도, 지붕에도, 나무에도, 심지어 사람의 몸에도 눈은 절대 쌓이지 않았다. 눈송이가 환상인 건 아니다. 이건 분명 제9옥의 두 번째 계절에 내리는 명실상부한 얼음결정체였다. 그러나 마치 도시가 눈을 거부하는 것처럼 눈은 확실하게 내리고 있으면서도 땅에 떨어진 이상 잠시라도 그 형체를 유지하지 못했다. 녹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상황이 순조롭게 차량을 운행할 수 있는 날씨가 아님에는 분명했다. 시야가 완벽히 차단된다는 문제점은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운전을 한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얀 장벽 사이를 헤매다 어딘가 들이박고 사고 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는 맑은 날과 마찬가지로 시계가 멀쩡하다는 듯이 거칠게 철마를 몰고 있었다. 심지어 주춤거리는 일조차 없이 잘 아는 길인 것 마냥 골목이 복잡하기로 유명한 세인트헬레나의 도로를 쏙쏙 빠져나갔다. 무슨 심안이라도 열린 맹인달인과도 같은 놀라운 질주였으나 그를 잘 아는 사람에게는 하등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오른손에 끼고 있는 4개의 큼직한 반지 속에 그를 제외한 또 다른 이들의 여러 눈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들 말고는 아무도 대화를 엿들을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베르길리우스는 베아트리체조차 누군가 훔쳐 들을 가능성을 생각해 직접적으로 입에 담지 않았던 사실을 피아에게 말했다.

“조심해라. 이번에 대면할 상대는 보통이 아닐 거야. 아마 둘 중에 하나겠지.”

“예? 무슨 말씀인가요, 마스터?”

 베르길리우스는 고글의 앞을 가리는 거친 눈보라 너머에 있는 아직 보이지 않는 적을 가만히 응시하며 지금까지 생각을 정리하듯이 조용히 말했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이탈자의 출현은 전부 예측해 격퇴할 수 있었어. 단 한 건을 제외하면 우리 손을 벗어난 사건도 없었고 말이지. 만약 지금 이탈자들의 정체가 외부에 공표된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해.”

 피아는 상대에게 보이지 않을 거라는 걸 깜박 잊고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겠죠. 설마 아카데메이아의 옛 학사들이 플라톤 원리주의자였다는 사실이 흘러나가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테니까요”

 아카데메이아란 제9옥의 소년소녀들을 가르치는 모든 교육기관을 총괄해서 일컫는 말이었다. B급 이상의 수명을 60세 이상 부여받은 직위자들은 처음부터 대략적인 지식과 상식을 주입받고 급히 성장해야 하는 하위직무자들과는 달리 스스로 의사를 형성시킬 권리를 부여받아 어릴 적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S급 이상의 직위자들에게는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엄격한 심사를 거쳐 아카데메이아의 학생들 중에 한 명을 뽑아 가정을 이룰 수 있는 특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기에 어떤 아이들은 그런 행운에 당첨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아카데메이아란 제9옥 주요직위자들에게 있어선 공통된 고향이나 마찬가지였고,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학사들 또한 부모처럼 존경을 받았다. 만약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옛 학사들이 사실은 아직 죽지 않고 베아트리체에게 반대하는 플라톤 원리주의자로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 파급효과는 시장의 권위 자체를 근본부터 뒤흔드는 파장을 가져올 것이다.
 베르길리우스의 주행이 약간 거칠어졌다는 걸 알아차린 피아는 불안해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역천사들조차 그 사실을 눈치 챈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고지식한 그들은 설마 파견순서가 조작돼 자신들에게는 오로지 암흑물질의 처리만이 돌아오고 이탈자의 상대는 거의 우리가 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겠죠. 설령 알아챈다고 해도 이탈자를 처리하는 궂은일은 전부 음습한 우리들이 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며 깊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슬픈 도시를 유지하는 무력기관武力機關 중 역천사대는 합법적인 권위를 떨치기 위한 군대와도 같은 조직이었다. 능천사대로서는 힘에 벅찬 소요를 막아낸다든지, 암흑물질의 침입이 당연시되는 안테노라의 계절에만 시민의 안전을 위해 공식적으로 소거활동을 펼치는 게 그들의 주된 임무였다. 만약 타 도시와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 슬픈 도시 외에는 모든 인류가 어둠 속에 삼켜져 그럴 일은 없겠지만 - 선봉에 서는 건 틀림없이 역천사대일 것이다.

 반면 흑천사대는 역천사대의 특수부대 같은 성격으로서 주로 시민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혹은 알아서는 곤란한 비밀스럽고 위험한 안건을 도맡아 처리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들의 가장 대표적인 활동은 안테노라의 계절 외에 출현하는 암흑물질의 처리였는데, 언제나 화려하고 과격하게 일을 마무리하는 역천사대와 달리 흑천사대는 최대한 암흑물질의 침입을 극력으로 숨길 의무가 있었다. 만약 1년 내내 암흑물질의 공포에 떨어야 한다는 사실을 시민들이 알게 되면 공황상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폐쇄된 도시에서 분란이 일어난다면 그건 곧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의미했기에 조금이라도 위험요소가 존재한다면 신중히 처리해야만 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질서를 해하는 반란분자의 숙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 나도 굼뜬 그 녀석들이 뭔가 알아차릴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 오히려 문제는 매번 거리를 순찰하는 능천사쪽이지. 결국 롬발트 경감은 자력으로 플라톤 원리주의자들의 발자취를 쫓아 이탈자와 조우하기도 했고 말이야. 사실 그것도 크게 문제될 건 없었어. 그는 말이 통하는 남자니 혹 죽이지 않고 사로잡는다 해도 우리 쪽으로 이탈자의 신병을 넘겼을 테고, 쓸데없는 말도 흘리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는 실패했어요. 이렇게 말하는 건 그에게 죄송하긴 하지만 의식이 없을 정도로 크게 다친 탓에 아무에게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다행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의 부하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기색이고 직접 싸운 그는 침묵하고 있으니 누구에게도 플라톤 원리주의자들의 정체가 새어나갈 일은 없어요.”

 피아는 자신 있게 말했지만 베르길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는 실패하지 말았어야 했어. 분명치 않은 내 짐작일 뿐이지만 어쩌면 베아트리체 님은 인원수가 부족한 우리가 이탈자를 놓칠 가능성까지 상정해 지상에선 가장 유능한 집행관인 롬발트 경감에게도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이 높아. 그렇지 않다면 시청-지고천-에서 직접 관리하는 방천경을 누군가 일부 빼돌렸다는 사실을 능천사대의 정보력만으로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었겠지.”

“그럼 역시…….”

“그럴 테지. 롬발트 경관을 단숨에 격퇴하고 이탈자를 구해낼 기행을 행할 사람은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거기에서 유추하기에 그녀는 한 사람 더 보호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보기에 항거하는 학사들 중 그 정도 잠재력을 가진 사람은 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현재까지 6명이 넘는 이탈자를 소거한 걸 생각하면 우리가 조우할 그 녀석은…….”

“…갑자기 머리가 아프군요.”

“맞아. 그래서 조심하라고 한 거야.”

 베르길리우스는 기어이 자신의 우울함을 시종에게도 전염시키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싸우기 전에 이런 식으로 전의를 떨어뜨리는 건 절대 좋은 방법이 아니었지만, 피아의 경우에는 감정통제가 뛰어나 어떤 정보든지 흔들리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특기가 있었기에 굳이 어두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지금 오히려 부담을 느끼는 것은 싸움을 목전에 두고 다시 한 번 꺼림칙한 이야기를 검토하면서 마음이 무거워진 베르길리우스였다. 피아는 그렇게 될 걸 알면서도 자신을 위해 일부러 경고를 해준 주인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마음은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았다. 거슬리는 이름이 귀를 때렸기 때문이다.

“클로에 녀석도 문제군.”

“예? 병원에서 잘 뒹굴고 있을 그녀가 뭔가 문제죠?”

 피아는 순간 까칠하게 대답한 자신의 입을 책망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는 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더욱 문제야. 롬발트 경감의 수술은 일단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들었는데, 그럼 남은 건 소생관의 치료와 본인의 회복능력에 달려있지. 이틀 동안 아무 소식도 전해 받지 못한 그 불량의사는 아마 좀이 쑤셔 못 견딜 지경일 테고 혼자 뛰쳐나갔을 수도 있어.”

“디스가 잘 말리겠죠. 설마 이런 날씨에 자기 주인을 밖으로 보낼 정도로…….”

“멍청하지. 아니, 녀석의 경우에는 확신범이라 해야 하나. 자기 주인이 곤경에 빠지는 걸 좋아했으면 좋아했지 마다할 이유는 없잖아. 악마니까.”

 피아는 순간 아무 반론도 할 수 없었다. 미등록자로서 주인을 모시고 있는 비슷한 처지라고 해도 디스가 가지고 있는 충성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충성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피아는 베르길리우스를 안심시킬 대답을 찾아냈다.

“괜찮습니다, 마스터. 설령 그 방만한 의사와 음흉한 시종이 아무리 개념이 없다고 해도 단서 하나 없이 이 폭설을 헤치고 나선다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요. 무작정 거리를 배회하는 거라면 몸은 좀 추울지 몰라도 크게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만, 얼마 동안 에스텔 경위가 그녀랑 같이 있었지. 내가 듣기론 경위는 오늘 직무에 복귀하기 전까지 쭉 롬발트 경감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고 하니 그 사이 클로에가 뭔가 캐물었을 가능성도 있어. 몇 가지 단서와 자취를 쫓을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이 더해진다면 어쩌면 의외로 그들의 은신처를 찾아내버릴지도 몰라.”

 클로에 이야기가 나오면 신경을 곤두세울 만큼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피아도 이번만큼은 과연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음, 아무래도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녀석의 병원으로 가야겠어. 혼자 튀어 오르기 전에 잡아두지 않으면 모든 게 어그러질지도 몰라.”

 베르길리우스는 힘을 잔뜩 준 채 오토바이의 속도를 높였다. 대형 이륜차는 소용돌이치는 눈보라에 지지 않겠다는 듯이 굉음을 내뿜으며 질주했고 그들은 곧 목적지에 닿을 수 있었다.

 세인트헬레나 5번가. 그들이 베아트리체가 지시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이미 눈보라는 그쳐 있었다. 정확히는 눈이 그친 게 아니라 하늘에서 내리는 폭설 자체가 다른 거대한 힘에 의해 제거되어 있었던 것이다. 안테노라의 차가운 흰 어금니는 살을 태우는 강철 같은 열풍에 무력하게 부러지고 말았다. 이 비정상적인 상황에 베르길리우스는 심장이 빠르게 뛸 정도로 불안했고 그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세인트헬레나 5번가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시민들은 미리 대피한 모양이었으나 건물은 전부 처참하게 파괴되었으며, 능천사의 무장경관대로 짐작되는 차량들은 심하게 일그러진 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죽은 이들의 몸에서 빠져나오는 가지각색의 영혼의 나비들만이 원동천에 회수되기 위해 애처롭게 공중을 날고 있었다.

 파괴와 죽음과 정적으로 가득 찬 폐허의 중앙. 이탈자를 처리하기 위해 눈보라를 뚫고 힘겹게 도착한 두 명의 흑천사를 반기는 건 아름다운 붉은 날개를 위협적으로 펼친 거대한 나비 한 마리뿐이었다.






TRACKBACK 0 AND COMMENT 2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02.24 00:11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와앗, 왠지 황금빛으로 물든 채 무수하게 펼쳐진 구름의 숲 아래로 끝없이 이어지는 대리석 계단들의 윤무(輪舞)가 떠오르는 도입부가 아닐까 싶어요! +_+

    그리고 한편으로는 하늘의 음계를 통한 특수 요원들의 급파(急派) 장면으로부터 톰클랜시의 엔드워에서 묘사되는, 행성 정지 궤도상의 시설을 통한 전세계 각지로의 병력 고속 투입 체계가 떠오르기도 했답니다.

    게다가 흡사 『밤하늘의 지평』 작 중에서 등장하는 '파티마의 눈' 시스템에 버금갈만한 시야 공유망 기술까지 지니고 있다니... 과연 신화의 영역에 도달한 과학 문명의 유산이란 그 존재감 역시 남다를 수 밖에 없는 모양이예요.


    물론, 미려한 디자인의 최첨단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베르길리우스와 피아의 모습 역시 이번화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겠지요? :D

    우으음... 무엇이라고 해야할까, 왠지 긴박감이 넘치는 테크노풍의 음악과 함께 대영광시대의 거대한 유적 사이를 가로지르는 장면이 자꾸만 연상되더랍니다.

    그와 동시에, 지표면에 닿은 눈송이들이 그 즉시 소멸된다는 이야기에서 혹시나 제9옥의 거주 지역에는 초고밀도 나노로봇들의 군체에 의한 환경 유지 및 정화 시스템이 상시 동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일말의 추측을 해보기도.... (크흑, 역시나 Baldr Sky 시리즈에 너무 깊이 빠져버린 모양이예요;; Orz )


    그러고보면, 얼핏 생각해보기에는 탄생의 시점부터 어느정도 완성된 존재로서의 지식과 신체적 조건을 부여받는다는 제9옥의 사회 체계에 나름의 매력적인 측면이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적도 있었는데...

    실상은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삶과 그 미래의 가능성 하나하나가 극도로 치밀하게 사전 설계된 계획의 일부일 따름이며 또한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 어떠한 유보의 여지도 없이 사라져야만 하는 운명인만큼, 2014년의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자의 시점에서 볼 때에는 일견 지극히 평범해보이기까지 하는 아카메데이아 학사들의 삶이야말로 축복받은 것임에 틀림이 없겠지요.

    하지만 그처럼 최고의 혜택과 권위ㆍ그리고 존경을 받는 사회 지도층의 산실에서 가장 극렬한 위험분자들의 집단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제9옥의 공동체에 찾아올 충격이란 이루말할 수 없는 수준일테니 베아트리체가 저토록이나 특단의 예외적 조치를 감행하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어요.


    진공의 바다에서 살아가던 인류의 마지막 안식처이자 보루로서 남겨진 코키투스의 존립이 걸린 대사건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과연 주인공들은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될 것인지 다음 화의 이야기도 잔뜩 기대가 되네요~ >_<)


    덧 - 아앗, 설마 저 것은 별세계의 별리에 나오는 성흔(聖痕)...!! [어둠 속으로 조용히 끌려간다]


    덧 2 - 잇힝;; 소소한 오타 제보랄까요오오오~;

    베르길리우스와 피아가 오토바이로 이동하는 장면 중 '베르길리우스는 맑은 날고.... ' 라고 적힌 부분입니다!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02.24 08:21 신고 address edit/delete

      개인적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계단이란 시각적으로도 웅장하며 상징적으로도 신비로운 인상이 강해 마치 맛이 보장된 풍만한 디저트처럼 좋은 느낌이라 마음에 들더군요^^

      아앗, 그 유명한 톰 클랜시 작가님의 세계관 속에서 펼쳐지는 게임에 비유해 주시다니 뭔가 황송스러운 느낌... 위 이야기의 경우 판타지적인 배경에서도 은근슬쩍 SF적인 느낌이 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썼던 지라 한층 기쁜 마음이 드네요>.<

      말씀처럼 작중의 기술력은 마법과 구별이 가지 않는 수준까지 도달한 고도문명의 산물이지만, 멸망 직전에 오로지 살아 남는 것을 목표로 억지로 짜낸 면도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문제도 많네요^^;; 그 부분은 차후 이야기에서 언급될 예정이에요.


      사실 베르길리우스와 피아의 오토바이 동승질주씬은 처음에는 무려 연애적인(...) 요소로 넣었던 것인데, 눈 폭풍이나 그밖에 심각한 대화 내용이 강조가 되다 보니 아무래도 오토바이가 더 돋보이게 된 것 같아요^^;; 하지만 대신 소디언 님께서 멋지게 묘사해주신 것을 들으니 지금 느낌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안테노라의 눈송이는 작중에서 자세한 설정은 언급되지 않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 외부우주에서 침입하는 압력에 대항하는 도시의 방어작용의 결과인 지라, 말씀하신 추측과 상당 부분 비슷한 듯싶어요!

      ...사실 저 역시 발드 스카이를 플레이하면서, 특히 이번 제로 편에서는 평소 생각하고 있던 SF설정이 그 일련의 작품에서 훨씬 멋지고 재미있게 구현되어 있는 것을 보고 역시 스스로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네요. 음, 그것을 극복해야 라비린스 신드롬도 연재를 재개할 수 있을 텐데... 일단 지금은 이것저것 다른 작품과 교양서를 읽어 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아요^^;;


      확실히 처음부터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조건도 다 갖추어진 사회란 '고민할 필요'가 없어 어떤 면에선 굉장히 마음 편한 공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변에서도 현실에 지친 나머지 '차라리 군대에 있을 때가 마음은 편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나, 혹은 '모든 것은 신께서 다 정해놓고 이끌어 주신다'라고 믿는 종교인들이 그러한 예에 해당하는 것 같더군요.

      이는 저도 한가지 목표에 수동적으로 매진하게 될 때의 책임 없는 안도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일견 납득이 가는 감정이기도 해요. 다만, Psycho-Pass에서도 집행관으로서 범죄자를 사냥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카가리가 '무엇이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었던 조부모 세대'를 부러워하듯이 막상 그런 세계가 실현되면 - 특히 거기서 상위권자가 아니라면 - 그 답답함에 매우 괴로울 것 같더군요. 또 근대 이후의 미학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도 수동적인 삶이란 전-혀 멋지지 않기도 하고 말이에요^^;;

      반면 신이 아닌 몸으로 그 모든 요소를 예정조화로 이끌어야 하는 베아트리체 시장의 부담은 상상 이상의 것일 듯... 사실 이러한 정치체제는 그나마 이야기 속에선 능력 있고 고결한 인물이 얼마든지 구현이 가능해 성립이 되는 것이지, 현실에서는 부패하거나 능력이 부족한 지도자에 의해 금세 파탄에 이르게 되겠지요^^;; (플라톤도 철인이 통치하는 이상국가의 이론을 실제로 실천하려다 쓴맛을 본 후 법치에 의한 시스템 통치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입장이 완화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럼 보내주시는 기대에 미칠 수 있도록 다음 편도 힘내겠습니다~>.<


      덧. 정답! 성흔과 설정적인 연관은 없지만, 1부에 등장하는 전前 대공의 모습은 바로 저기서 따왔네요^^;;

      덧2. 수정 완료! 지적 감사드려요~>.<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674)
잡다한 일상단상 (143)
즐긴작품 떠들기 (35)
타인정원 엿보기 (23)
환상정원 가꾸기 (473)

RECENT TRACKBACK

CALENDAR

«   2018/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