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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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밤하늘의 지평'에 해당되는 글 53건

  1. 2014.01.13
    [밤하늘의 지평] 종장 / 그대를 위한 중창곡Ensemble (完) (2)
  2. 2014.01.10
    [밤하늘의 지평] 종장 / 그대를 위한 중창곡Ensemble (5) (2)
  3. 2014.01.07
    [밤하늘의 지평] 종장 / 그대를 위한 중창곡Ensemble (4) (2)
  4. 2014.01.03
    [밤하늘의 지평] 종장 / 그대를 위한 중창곡Ensemble (3) (2)
  5. 2013.12.29
    [밤하늘의 지평] 종장 / 그대를 위한 중창곡Ensemble (2) (2)
  6. 2013.12.27
    [밤하늘의 지평] 종장 / 그대를 위한 중창곡Ensemble (1) (2)
  7. 2013.12.23
    [밤하늘의 지평] 제6장 / 미완성 교향곡Symphony (9) (2)
  8. 2013.12.17
    [밤하늘의 지평] 제6장 / 미완성 교향곡Symphony (8) (2)
  9. 2013.12.15
    [밤하늘의 지평] 제6장 / 미완성 교향곡Symphony (7) (2)
  10. 2013.12.10
    [밤하늘의 지평] 제6장 / 미완성 교향곡Symphony (6) (2)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








종장 / 그대를 위한 중창곡Ensemble (完)


 누군가 살던 곳은 금세 그 사람에게 길이 들어버려 조금이라도 자리를 비우게 되면 빛을 잃고 점차 쇠락해간다. 그리고 그가 남긴 자취가 희미해질 무렵에서야 다른 것들이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새로운 광채를 뿜어내는 것이기에 그 전까지는 쓸쓸하고 황량한 공기가 가득 차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싸구려 아파트는 낡고 보잘것없어도 내가 생활하던 소중한 둥지였던 모양이다. 며칠 만에 돌아온 보금자리는 가볍게 입김이 나올 정도로 싸늘했고,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막했다.

 병원 4층 4호실에서 4일만의 퇴원. 예전 四와 死가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4라는 기호까지 꺼려지던 시절이었다면 어쩐지 불안하게 생각했을 숫자의 나열을 무시하며 나는 도망치듯이 황급하게 병원을 빠져나왔다.

 딱히 입원생활이 불편했기 때문은 아니다. 병원비는 이미 지불을 마쳤고, 갈아입을 속옷 등은 혜리가 신경써줬기에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다. 게다가 특실이었기에 대접도 좋았고, 나중에는 친구 녀석의 오지랖 넓은 참견 덕분에 오빠까지 만나러 와줬다.

 좋았으면 좋았지 싫어할 이유 같은 건 거의 찾아보기 힘든 4일간. 그럼에도 나는 단 한 가지, 이곳에 있는 한 리아는 만나러 와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던 것이다.

 대체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 그녀가 뭘 하고 있는지 자체는 대충 알고 있다. 그녀는 지금 뒷정리를 하고 있는 것이리라. 혜리가 별 생각 없이 이야기 해주는 바깥소식과 몇 가지 뉴스 등으로 나는 충분히 그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검은 안개. 제6현상이라고도 불리는 종말현상이 남긴 도시의 상흔. 인간의 상념과 잘못된 기적이 불러일으킨 재앙의 거대한 손톱에 두 번이나 깊게 파여 버린 이 도시는 지금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당장 가시적인 피해는 눈에 띄지 않겠지만, 아마 장기간에 걸쳐 그 여파는 서서히 드러날 것이며 눈덩이가 불어나 점차 커지듯 언젠가는 도시 전체를 휘청거리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까지 도시가 내지르던 소리 없는 단말마는 곧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한숨으로 대체될 것이다.

 리아는 바로 그런 끔찍한 미래를 막기 위해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고 있다. 비록 잡아먹힌 사람들 같이 절대 되돌릴 수 없는 문제도 있겠지만 - 또 그게 가장 중요하고 커다란 비극이겠지만 - 어쨌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남아 있었다.

“진짜… 대체 얼마나 오지랖이 넓은 거야…….”

 참 어이가 없어 질려 버릴 일이다. 그토록 자신을 위해 살아가라고 말했는데, 또 다시 남을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다니 도무지 충고한 보람이 없다. 정말 기적과도 같이 드물게 인간과 같은 지향점을 갖추게 된 그녀의 삶의 방식. 그렇다면 이왕 자신을 혹사하는 것보다 좀 더 사람들과 어울리는 즐거운 쪽에 신경을 기울인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여태까지 그녀가 겪어온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사실 인생의 옷자락만 살짝 잡아본 내 말은 그다지 무게감이 없다는 걸 여실히 통감할 수가 있다.

 비탄의 서적이 전해준 악마의 기록. 신부의 꾐에 넘어가 보게 된 그 끔찍한 기억들은 너무나도 부정적인 이 세상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을 실제로 체험했을 그녀가 세상이란 이름의 사슬에서 자유롭게 풀려나지 못할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그런 일들을 보고 겪은 사람들은… 아마도 죽도록 상대를 증오하거나, 아니면 다신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서로 사랑하는 수밖에 없을 거야.”

 신부를 비롯한 교회의 사람들은 전자를 선택한 것이고, 리아는 후자를 선택한 것뿐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일 뿐,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내게는 리아를 쫓는 신부를 미워할 자격도, 내 말을 듣지 않고 또 어디론가 나가버린 그녀를 탓할 자격도 없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이었으며 그 점만큼은 정말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리아는, 다시 곁으로 돌아올까…….”

 내게 돌아온다는 것은 그녀가 지금까지의 생활을 버리고 평화로운 일상을 선택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 손에 들고 지켜야 하는 건 세상 사람들의 안위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가족과 그리고 주변의 친한 몇몇 이들뿐이다.

 날 선택한다는 것은 그 외에는 짊어져서도 안 되고 짊어질 수도 없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 과연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르겠다. 그건 어디까지나 누군가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닌 그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문제이기에 나는 불안을 억누르면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

“……씻자. 씻자고.”

 보일러를 틀고 대충 집 정리를 마친 나는 약간 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돌아오는 대답은 공허. 춥다. 방은 따스했지만 더 추운 느낌이 들었다. 외로움을 불식시키기 위해 굳이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이었지만, 도리어 혼자라는 사실을 통감하게 될 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혜리가 “오늘 하룻밤 같이 잘까.” 하고 말했을 때 쓸데없는 오기 부리지 말고 받아들일 걸 그랬다.

 허나 울상 짓고 있어도 소용없는 일. 나는 기분전환으로 TV를 켤까 하다가 방금 전 혼잣말의 교훈을 상기하며 그대로 샤워하러 들어갔다. 보일러를 틀어둔 덕분에 곧 따스한 물이 흘러나왔고, 나는 지친 몸을 씻어 내리며 약간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자기 집이 최고며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처럼 아무리 병원대우가 좋았다고 해도 역시 집에서 쉬는 것만은 못하다. 설령 좀 보잘것없는 둥지라도.

“아, 눈 온다…….”

 샤워를 하는 도중 나는 바깥에 눈발이 휘날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상적인 시력을 잃어버린 대신 일정범위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게 변한 내 눈(目)은 창문 하나 없이 머리에 흠뻑 물을 뒤집어쓰고 있는 이 상황에서도 밖에 눈(雪)이 내린다는 걸 알아챌 만큼 비정상적인 기능을 하고 있었다.

 이는 정확히 말하자면 눈이 뭔가 신비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기보다는 공간정형의 능력이 없어진 시력을 대신 보충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으리라. 흔히 맹인들은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후각, 청각, 촉각 등 다른 감각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게 발달해 부족한 부분을 대체한다고 하는데, 그와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신부 아저씨가 새벽에 날 불러낸 날도 이렇게 눈이 왔었지. 덕분에 리아의 정체와 과거도 알게 되었고…….”

 신부의 서적을 본 것을 기점으로 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고 많은 일을 겪었다. 그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른 채 휘말렸을 뿐이었다면 그 후부터는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 것이다. 비록 그때 신부의 방식을 떠올리면 아직도 화가 날 정도로 싫었지만, 어쨌든 내게 진실을 알려준 것만큼은 감사하고 싶다.

“대체 뭘 하고 있으려나.”

 나는 샤워할 때도 목에서 떼놓지 않는 작은 은색 십자가를 손에 쥐며 그를 떠올렸다. 무뚝뚝하고 차갑고 강압적이기까지 했던 그의 성격은 결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처음 무너진 성당에서 만났을 때부터 몇 번이나 날 구해주었고, 귀중한 성물(십자가)도 주었다. 비꼬는 투라고는 해도 내가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충고해주었으며 마지막에 리아가 있는 곳까지 보내주는 등 가만히 돌이켜보면 은혜를 입어도 보통 입은 게 아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그의 모습은 마도사들에게 포위당한 채 싸우는 것이었다. 제발 무사히 헤쳐 나왔기를, 그리고 언젠가 재회할 수 있다면, 그때는 당당하게 성장한 모습으로 그를 비꼬아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복잡한 기분으로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나는 어느새 매우 지쳐버렸다.

“아아, 오늘은 일단 자고 싶어…….”

 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긴장이 풀린 탓일까. 병실에 있는 동안 그렇게 실컷 잤음에도 또 졸음이 몰려온다. 얇은 모포 한 장만 던져주면 툰드라 지대에서라도 9시간이고 10시간이고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 그런 나른한 기분으로 이불을 꺼내기 위해 비척거리며 장롱으로 향하는 순간, 나는 짧지만 강렬한 그리고 그리운 감각을 느꼈다.

“서, 설마……!?”

 어쩌면 기분 탓으로 생각될 정도로 잠깐 스쳐지나간 바람과도 같은 감각이었으나 절대 착각일 리가 없다. 세상의 흐름에 녹아들 것 같으면서도 반발하지 않고 확연한 자아를 유지하고 있는 그 파장은 그녀가 가진 종족 특유의 존재감임에 틀림없었다.

“리아……!”

 나는 급하게 옷을 챙겨 입은 후 부술 기세로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주 잠시 동안 느껴진 흐름이지만 절대 그 자취를 놓칠 염려는 없다. 정상적인 눈을 잃은 대신 비약적으로 발전한 나의 또 다른 감각은 분명하게 그녀가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지 가르쳐 주었다.

“…! ……!!”

 달린다. 달린다. 달린다. 아직 사물을 파악하는데 익숙해지지 않은 몸이지만 달린다. 만약 지금 놓쳐버리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기분은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단순히 사후처리를 할 요량으로 잠시 내 곁을 떠난 것일 뿐, 일주일 후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돌아올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그러나.

“그걸로, 만족할 것… 같아……!?”

 그렇다. 그런 걸로는 불충분하다. 그녀가 이 근처에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직접 달려가 붙잡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은 그녀가 스스로 선택했듯이 나 또한 그녀를 붙잡아 끌어올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아마 나 자신이 납득하지 못하리라. 이것은 리아를 위해 달리는 동시에 날 위해 달리는 것이기도 했다.

 바람에 실린 눈이 뺨을 차갑게 스치고 지나간다. 공중을 휘날리는 하얀 결정들은 가만히 집중하고 있으면 머리가 아파질 정도로 잔뜩 내리고 있었다. 아마 이대로 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은 하얗게 뒤덮일 것이다.

“뭐, 어차피 제대로 볼 순 없겠지만.”

 추운 건 싫어도 겨울이 만들어내는 새하얀 축복의 정경을 좋아하던 내게 있어, 앞으로 그 모습을 눈에 둘 수 없다는 건 참으로 쓸쓸한 일이었다. 꼭 눈만이 그런 게 아니다. 지금 이렇게 달리고 있는 순간에도 소중했던 풍경들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이건 마치 지도 속의 기호가 나열되어 있는 세상이나 마찬가지. 이렇게 눈 내리는 길거리를 뛰는 것 자체가 정신적으로 버티기 힘들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볍게 전락해버린 세상의 가치에 나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어느덧 나는 집 근처 머루공원으로 들어섰으며 예전 형사 아저씨와 곧잘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벤치를 스쳐지나갔다. 그곳을 기점으로 나는 재차 늘어진 뜀박질에 박차를 더했다. 아직 포기할 수는 없다. 허세를 부릴 여지는 남아 있는 것이다.
 즉, 억지로 이유를 찾자면…….

“여기서 멈추면, 비웃음… 당할 걸……!”

 날 위해 목숨을 버린 형사 아저씨를 위해서라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이대로 희미해진 세상풍경에 절망해 움직이지 않는 패배자가 되어버린다면 아저씨도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없으리라. 죽은 이에게 멋대로 자기만족에 가득 찬 이유를 밀어붙여 의욕의 원천으로 삼는다는 건 염치가 없는 일이었으나, 이 정도는 용서해 주었으면 한다.

 사람은 명분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 동물인지라 나는 약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런저런 이유를 구차하게 붙이면서 공원을 지나 숲속까지 들어섰다. 그녀의 파장은 이 숲에서 진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확실히, 여기 있어…….”

 숲 전체에 진동하는 강렬한 위압감과 살을 에는 것만 같은 거무죽죽한 살기는 이미 그녀가 전과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야 난 리아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사람을 벗어난 자신의 모습을 내가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 바보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온다. 리아가 설령 인성(人性)의 피를 내보냈다고 해도 나는 그녀가 그녀 자신인 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뭘 두려워한단 말인가. 그렇게 아직도 날 모르고 있나, 라는 생각에 약간 화가 나기도 한다.
 나는 신부가 건네준 은색 십자가를 움켜쥔 채 내 마음을 공간정형의 파동에 담아 있는 힘껏 전달했다.

『리아---! 도망치지 마---!』

 보통 사람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겠지만 영체에 깃든 존재에게는 그야말로 바로 귀에 대고 확성기로 고함을 지른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이 숲 어디에 있건 간에 내 목소리는 반드시 전해졌을 것이며 무시할 수도 없을 터였다.

“……!”

 지금까지 뛰어온 데다 갑작스럽게 힘을 사용한 반동으로 숨이 찼다. 보기 흉하게 헐떡거리는 건 싫었지만 리아를 불러낼 수 있다면 이 정도 추태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이제야…….”

 내 진심이 통한 걸까. 곧 수면에 큰 돌이 떨어진 것만 같은 거대한 파장과 함께 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찢어진 사제복 자락을 검은 날개처럼 휘날리며 나타난 그녀의 외견은 과거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나, 그 속에 감추고 있는 기척은 조금이라도 영감이 있는 이에게는 악몽 그 자체로 느껴질 만큼 흉악하게 날뛰고 있었다.

『하, 린…….』

 그녀가 작게 입을 열었다.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무거운 목소리가 뇌리에 직접 강타한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억제하고 있던 피를 흘려보내고 완연한 본래 모습을 되찾은 그녀의 힘은 단지 입을 여는 것만으로도 주변 생물을 떨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리아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내게 있어 그녀의 힘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나는 거친 호흡을 다듬고 그녀와 재회했다는 기쁨을 억누르며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리아, 지금 네 눈에 뭐가 비추고 있는지 알아?”

『그건…….』

 리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녀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답은 ‘없다’겠지. 그녀는 과도하게 힘을 끌어 쓴 대가로 내가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건 설령 수술을 해도 눈동자를 바꿔도 나라는 존재가 유지되고 있는 이상 결코 바뀌지 않을 기정사실이었다. 공간정형자로서 완전히 각성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그녀도 나 이상으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모르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아니, 방금 전까지는 나조차도 몰랐던 사실이다. 지금 그녀를 보고 나서야 깨달은 또 하나의 진실. 나는 그것을 알려준다는 기쁨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난 그 즐거움을 고했다.

“리아가, 보여. 너의 루비를 닮은 붉은 보석 같은 눈동자도, 빛이 어루만지는 듯한 투명하고 하얀 피부도, 밤의 적막과 같은 아름다운 검정 머리카락도, 전부 선명하게 말이야.”

 이는 혹시라도 내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리아를 위로하기 위해서 꾸며낸 말이 아니다. 이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별의 의식구조체의 단말로서 세상을 안정시키는 기둥이 되어버린 나. 이제 내게 있어 리아는 같은 세계의 직계인 친척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이는 내가 그녀를 통해 다시금 세상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해졌음을 뜻하기도 했다.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리아는 곧 내 말의 의미를 알아채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마치 춤이라도 권하듯이 그녀에게 장난스럽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만약 리아가 옆에 있어준다면 나는 계속해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 날, 책임져주지 않을래?”

 순백의 눈이 상처 입은 지상을 감싸듯이 부드럽게 내린다. 나무들은 그 속에 자그마한 봄을 간직한 채 앙상한 가지를 흔들며 바람에 춤추고 있다. 나는 눈조차 깜박거리지 않고 차분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리아는 수줍음에 잠깐 볼을 붉게 물들인 후 작게 하지만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대답했다.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녀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내 손을 마주잡았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분명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평탄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지, 어떤 슬픔이 닥쳐올지, 그리고 얼마만큼 수많은 눈물을 흘려할지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러나 지금처럼 서로 계속 손을 잡고 미소를 짓고 있는 한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을 것이라는, 아무 근거도 없는 확신이 들었다.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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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01.13 23:15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현재와 과거,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세계 속에서 자신을 지탱해줄 새로운 삶의 의미와 정체성을 마침내 찾아낼 수 있었던 그녀들의 작고도 큰 기적의 이야기...!

    그처럼 훈훈한 결말 덕분인지, 어쩌면 이번 화의 시작과 함께 흘러가는 만남과 상실 그리고 치유와 재생에 얽힌 사색의 대상이야말로 다름 아닌 하린의 공허한 마음 속 심정을 투영해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답니다.

    한편으로는 마침내 신하市와 그녀들의 일상, 나아가서는 세계의 운명 그 자체를 뒤흔들었던 대사건을 마무리짓고... 이제 조금은 나른하면서도 활달한 분위기의 어조로 독백의 회상을 이어나가는 하린의 모습으로부터,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이상향의 편린을 간직한 채 머나먼 곳으로 떠나버린... 자신의 소중한 정인(情人)을 기다리던 마토 사쿠라의 쓸쓸한 뒷모습이 떠오르기도 하고 말이예요. (... 후후후, 그래도 일단 이쪽 세계선에서는 배드 엔딩을 회피했군요!! ~_~b )


    에에~ 그리고 세상의 무수한 모든 이들을 위하여 결코 보상받지 못할 헌신 아래 덧없이 사라져갈 영웅이 되기보다는, 자신에게 소중한 단 한사람만을 위한 정의의 아군이 되기로 결심한 리아의 선택에도 박수를 보내며...

    그야말로 별의 총애를 받는 밤의 여왕으로서 무수히 오랜 기간을 살아온 리아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공간정형자로서의 숙명을 받아들인 끝에 이내 살아있는 신목으로서 化해야만 했던 하린.

    모든 것이 시작된 그날의 풍경과도 같이, 온 세상을 조금씩 덮어가는 백색의 정원 한가운데에서 다시금 만나 언제까지나 행복하기를 기원하고 또 바랄 따름이네요.



    아무튼 이렇게 그녀들의 기묘한 활극도 그 막을 내리고...

    한동안은 왠지 리아의 천진한 미소가 자꾸만 가슴 속에 떠오를 것만 같은 기분도 드네요; ㅠ_ㅠ);; 【 이, 이 것은 설마 세간에서 흔히 회자되는 미연시 클리어의 후유증...?;; ㅇ>-< 】

    잇힝, 그래도 분명 생전의 여환이었다면 저토록 필사적인 모습으로 리아를 향해 달려가는 하린의 모습을 보며 너털웃음과 함께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워줬을테니, 저 역시 이 커플을 축복해줘야겠습니다. (/+_+)/



    덧 - 아아앗, 왠지 마지막 화의 감상 후기를 다 쓰고보니 밤하늘의 지평에서 제가 미는 최애캐는 리아임에 틀림이 없다는 일말의 확신이 뙇!!!


    덧 2 - 그러고보니 어떠한 의미에서 하린은 베르나르도 신부와 신뢰로 맺어진 일종의 사제(師弟)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 즉, 앞으로 하린을 위협하는 자는 무시무시한 교회 특무 기관 본청의 제2실력자에게 순삭당하게 될 수도 있다는... ;ㅁ; )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01.14 09:48 신고 address edit/delete

      처음 밤하늘의 지평에서 하린과 리아의 이야기를 구상했을 때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말씀처럼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현실에 맞서 더 나은 미래로 향하는 인물들의 자세였네요.

      특히 흡혈귀로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리아와 그녀를 쫓은 교회 세력의 관계는 그러한 테마의 상징적인 구도이기도 해요. 작중에서 알렉도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네 삶의 모습을 보면 분명 표면적으로는 다들 올바르고 더 좋은 길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처한 상황이나 소속된 집단(국가, 민족, 종교, 조직 등)에 따라 그것을 택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되더군요.

      하린 같은 경우는 작중 주연들 중 (레지나를 제외하면) 가장 어리고 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대학생의 신분이라는 점도 있어 그러한 세상의 굴레에 안티 테제로 작용하게 된 면이 있는 듯싶어요. 비록 공간정형의 힘을 제외하면 지극히 무력하지만, 과거를 알면서도 그에 얽매이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저력 혹은 자세를 가지고 있기에 끝내 리아의 마음도 어루만져 주는 전개로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것은 그녀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베르나르도 신부라든지 죽은 여환 형사라든지 친구인 혜리라든지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네요. ...으, 역시 다시 생각해도 여환의 죽음은 개인적으로 좀 안타깝기도... 뭔가 더 제대로 활약을 시켜 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아요^^;;

      작중에서 리아를 가장 좋아해 주신다는 말씀과 또 하린과의 커플을 밀어주신다는 말씀을 들으니 참으로 기쁜 마음이 드네요~>.< 역시 굳이 분류를 하자면 소수자에 속하는 두 사람의 사랑이다 보니 백안시 당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은연중에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최근 가까운 지인에게 성 소수자는 역시 정신병자라고 생각한다, 같은 믿기 힘든 슬픈 말을 듣기도 해서...;;;) 물론 또 그만큼 이렇게 응원해 주시고 이해해 주시는 분이 계시면 배로 기쁜 마음이 드네요^^

      음, 차후 그녀들의 딸이 등장하는 자율증명도 이야기가 계속 진행된다면 하린과 리아의 미래 모습이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일단 리아는 크게 변함이 없지만, 하린의 경우는 상당히 빈틈없는 캐릭터로 성장했다는 설정인데, 언젠가 꼭 그려보고 싶어요^^

      날카롭게 간파하신 것처럼 차후 베르나르도 신부는 알게 모르게 이 커플들의 뒤를 봐주게 되네요. 특히 무형정원의 관리사들을 상대할 때 일종의 동맹관계를 맺는 전개가 종종 등장하기도... 이 또한 세계를 무대로 한 이들의 여정을 그릴 때 꼭 한번 써보고 싶은 이야기 중 하나에요~


      으~ 정말 이렇게 매번 격려와 함께 끝까지 읽어주시고 또 소중한 감상까지 남겨주신 것에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번에도 덕분에 힘을 내어 끝까지 무사히 퇴고를 마칠 수가 있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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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장 / 그대를 위한 중창곡Ensemble (5)


 혼잡한 지하철역. 나영은 자판기 옆 붉고 파랗게 칠해진 작은 의자에 앉자 곧 도착할 전철을 기다리며 조용히 떠나간 사람을 추모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선배의 시신은 경찰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채 곧 장례식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여환의 죽음은 순직 처리되었다. 나영은 며칠 동안 몇 가지 불법적인 노력을 거쳐 정보를 조작해 여환이 어느 조직폭력단에게 피살된 것처럼 가장할 수 있었고, 이제 그는 순직경관으로 추대되어 경찰청장(葬)을 치른 후 영예롭게 국립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솔직히 이런 짓을 한다고 해서 여환이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그녀가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가보지 않으셔도 되는 겁니까.”

 뒤에서 눈에 띠는 금발염색에 피어싱으로 귀를 장식한 화려한 남자, 정보원 트레즈가 말을 걸었다. 평소 경쾌한 그의 얼굴은 드물게 진지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나영은 조용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이미 애도는 충분히 했어요. 지금은 움직일 때죠. 그러는 편이 선배도 기뻐할 테고.”

 그녀는 새삼스럽게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여환을 죽인 범인수사를 해야 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더 이상 그의 죽음을 되새김질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읽었던 어떤 소설에서 ‘죽은 이를 기억해주고 있는 한 그는 아직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니다. 진정한 죽음이란 그 사람의 부재를 인정하고 잊어버리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떠올렸다. 그녀는 아직 그가 죽었다는 걸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장례식에 참석해 다시 한 번 그의 죽음과 맞이하게 되면 싫어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트레즈는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외모와 언사를 보고 유쾌하며 경박한 남자라는 인상을 받곤 했지만, 실상은 카페를 운영하면서 뒤에서는 정보원의 역할까지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상황을 살피는 데 있어 세밀한 남자였다.
 트레즈는 나영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진짜 가실 겁니까. 녀석들의 본거지까지…….”

 나영은 여전히 트레즈의 얼굴을 돌아보지 않은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계획은 바꾸지 않을 거예요.”

“한번 발을 내밀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경고하듯이 말하는 트레즈에게 나영은 코웃음을 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이미 버스는 떠났어요. 어차피 나는 녀석들의 제거대상이 되었을 테고, 가만히 앉아 당할 바에야 선수를 치는 게 낫죠. 게다가, 내가 여기서 멈춰버리면 당신 뺨에 있는 상처가 욱신거리지 않겠어요?”

 그 말에 순간적으로 트레즈는 뺨으로 손을 올렸다. 잘 생긴 그의 얼굴에는 큼직한 반창고가 붙여져 있었고, 주위에는 아직도 시퍼런 멍이 남아 있었다. 미인은 뭐든지 잘 어울린다는 말처럼 미남자인 그였기에 뭔가 큰일을 당한 우수 깊은 남자로 보이는 것이지, 아마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꽤나 꼴불견인 모습이었을 것이다. 점장의 얼굴 한쪽이 처참하게 부어오른 것에 대해서는 카페의 점원 사이에서도 이래저래 수많은 추측이 난무하였는데 그 상처를 낸 장본인은 다름 아닌 나영이었다.

 여환이 죽고 나서 사흘이 흐른 후 나영은 불쑥 트레즈에게 찾아왔다. 나영이 찾아왔을 때 카페는 ‘Closed’라는 팻말이 걸쳐져 있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거기에 있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요. 빨리 문을 열어요.”

 돌아오는 대답은 적막뿐. 그녀는 더 이상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지 않은 채 가게의 뒷문으로 돌아가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역시 예상대로 문은 잠겨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화를 억누르며 문을 걷어찼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소음기를 달고 그대로 손잡이에 2방을 내갈겼다. 강력한 폭력 앞에 미약하게나마 가게를 지키고 있던 장벽은 속절없이 무너졌으며 그녀는 그대로 가게 안으로 쳐들어갔다. 뒷문에서 바로 통하는 주방. 불을 꺼져 있어 어두침침한 그곳에 트레즈가 있었다.

“…너무 거칠게 들어오시는군요. 그렇게 위험한 물건을 들고 와서는 기물파손에 주거침입에… 이거 경찰이라는 분이 벌써 몇 개의 죄를 어기신 겁니까?”

 그는 총을 들고 있는 나영을 향해 어김없이 비꼬는 어투로 말했으나 평소와 달리 어쩐지 기운이 없었다. 그는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의자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힘없이 고개를 들어 나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왜 찾아왔는지 이유나 들어보죠.”

“…….”

 그러나 나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증오할 상대를 앞에 두고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으며 어둠 속에서는 거짓을 비추는 그녀의 한쪽 눈만이 불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 선배를 함정에 빠뜨린 거죠?”

“그런 적은 없습니다. 단지 상대에게도 공평하게 정보를 팔았을 뿐이죠. 전 정보원의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걸로 비난 받을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태연하게 말하는 트레즈의 태도에 순간적으로 나영의 이성은 끊겼다.

“웃기지 마!”

 그녀는 크게 고함을 치며 트레즈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체중의 힘에 회전까지 실린 펀치는 멋지다고 할 정도로 트레즈의 안면에 작열했으며 그는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으윽……!”

 얼굴을 강타한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신음소리를 내뱉는 트레즈를 향해 나영은 총을 겨누며 말했다.

“저번에 말했었죠. 한 번 더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고 말이에요.”

 예전 그녀의 현장을 덮치러 나갔던 동료는 트레즈가 상대조직에 판 정보 탓에 그들에게 역습을 당해 목숨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여환마저 그가 배신한 탓에 마찬가지로 죽어버렸다. 그녀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을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며 다시 경어로 돌아온 그녀의 말투는 도리어 그녀가 얼마나 화가 나있는지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그녀는 이 복수를 감정에 맡겨 쉽게 끝내고 싶지 않았으며 오기로라도 이성을 가지고 제대로 매듭을 짓고 싶었다.
 한 대 맞은 탓에 정신이 든 걸까. 트레즈는 아까와 달리 강한 눈빛으로 나영을 쏘아보며 말했다.

“저는 틀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한 일은 정보원으로서 당연한 일이었어요! 거기에 대해 당신은 할 말이 없습니다!”

“아직도 그런 말을……!”

 나영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이번에는 발로 트레즈를 걷어차려 했을 때 그는 으직 입술을 깨물며 소리치듯이 말했다.

“예, 정보원으로서는 전혀 부끄러울 일이 없는 당연한 일이었죠. 하지만 그건 결국 인간으로서 글러먹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웃으며 식사를 같이 하고, 차를 같이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을 죽게 만들다니…….”

“…….”

“젠장! 빌어먹을……!”

 그는 용서를 빌듯이 몸을 웅크리고는 땅을 내리치며 울부짖었다. 이건 나영에게 당할 것이 두려워 목숨을 구걸하는 연극적인 사죄가 아니었다. 그의 눈물은 지금은 이곳에 없는 누군가, 자신의 행동 때문에 결국 죽음을 맞이한 어떤 남자의 결말에 대한 탄식이었다.

 트레즈의 눈물을 본 순간 나영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딱히 그녀가 눈물에 약했던 건 아니다. 오히려 평소에 강인한 양어머니 밑에서 아래서 자란지라 남녀를 불구하고 쉽게 눈물을 보이는 사람은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트레즈가 흘리는 눈물은 그녀의 회색눈을 통해 그가 진정으로 자기가 했던 행동에 구역질을 느끼고 좌절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기에 나영은 이제 더는 악감정을 품을 수가 없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진정된 트레즈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저는, 전… 제가 한 일에 잘못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보원이란 직업은 본래 그런 것이고 우리에게 오는 이들은 전부 그런 걸 감수하고 찾아오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 환멸감은 도저히 떨쳐버릴 수가 없더군요. 사람은 참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여태까지 같은 짓을 수없이 해왔지만 죄책감 한번 들지 않다가 가까운 사람이 자기 탓에 죽게 되니 이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해왔는지 깨닫게 되다니 말이죠. 하하하…….”

 그는 허무하게 웃음을 터뜨린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자, 나영 씨는 절 죽이러 온 거죠? 그때 약속하신대로 마음껏 분풀이를 하세요. 어차피 정보원이 총을 맞는 일은 비일비재하니 나가실 때 자취만 남기지 않으신다면 아무 문제없을 겁니다. 어서 쏘세요.”

 트레즈는 허탈한 표정으로 말하며 양손을 벌리고 눈을 감았다. 이미 그의 마음은 일주일 동안 치밀하게 내적사투를 거치면서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있었고, 방금 전 나영이 죄책감을 자극한 것이 더해져 완전히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버렸다. 지금 그는 언제 죽어도 괜찮다는 심정이었으나, 나영은 그런 그를 죽일 수 없었다.
 나영은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 총구를 바닥으로 내린 후 침착하게 물었다.

“당신은 그걸로 미련이 없나요?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건가요?”

“글쎄요, 잘 모르겠군요. 이미 며칠 동안 카페도, 정보유통도 전혀 손대지 않았습니다. 그가 죽었다는 걸 알고부터는 손이 움직이지가 않아요. 더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그걸로 조금이라도 당신의 화가 풀릴 수 있다면 별로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내 목숨에도 그 정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나영은 중요한 말을 꺼내기 전에 잠시 공백을 두고는 한을 집어 삼키듯이 숨을 들이켰다. 사실 처음부터 그녀는 그를 죽이기 위해 여기에 찾아온 것이 아니다. 원래는 이 말을 하기 위해 굳이 그의 얼굴을 보러 왔던 것이다.

“그렇게 함부로 내던 질 수 있는 목숨이라면 내게 빌려줘요. 유용하게 써드리죠.”

“……예?”

 당장이라도 총을 맞아 죽거나 아니면 얻어맞아 죽을 거라 생각한 트레즈는 나영의 뜻밖의 말에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입을 벌렸다. 나영은 분노의 감정이 되살아나기 전에 빨리 일을 마쳐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사실 죽이고 싶도록 꼴 보기 싫지만 당신의 능력이 필요해요. 그러니 저를 도와주세요.”

“대체 뭘 도와달란 겁니까? 나영 씨는 무엇을 할 생각이죠?”

“선배를 죽인 녀석들에게 마찬가지로 되갚아 줄 거예요.”

 그것은 궁병대를, 더 나아가 무형정원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겠다는 말이었다. 트레즈는 무모한 그녀의 발상에 제정신이냐고 물으려다 한결 같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말할 것도 없이 온전한 정신이었으며 강한 의지와 고민 끝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임에 틀림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트레즈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는 더 이상 정보원을 할 수가…….”

 나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가가 주어지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정보를 파는 장사꾼이 되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앞으로 복수를 위해 움직일 나만을 위한, 아니 죽은 선배만을 위한 협력자가 되라는 거예요.”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일직선으로 걸어 나가는 강렬한 그녀의 의지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던 트레즈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는 나영의 흔들리지 않는 강한 성격에 이끌렸으며 또 한편으로는 여환에게 속죄하고 싶은 마음에 결국 그녀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아직도 열이 식지 않아 아픔이 남아있는 뺨의 상처는 트레즈에게 지난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리게 하였으며, 아마 상처가 사라지고도 그 때 일은 잊지 못할 것이다. 여환의 죽음과 나영의 주먹은 일은 그저 일일 뿐이라는 그의 냉철한 사고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결국 그것으로 인해 그의 인생은 당초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트레즈가 기억을 곱씹고 있는 동안 세찬 바람과 시끄러운 벨소리와 함께 전철이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는 뺨에서 손을 내리며 말했다.

“…아무쪼록 조심하십시오. 작은 지부라 하더라도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지금 나영은 트레즈의 정보를 토대로 신하시에 위치한 무형정원의 지부를 알아내 그곳으로 침입할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추적당할 것을 대비해 혼잡한 시간대에 대중교통을 이용해 접근하는 것으로 현재 그녀가 입고 있는 두터운 갈색 코트에는 몇 정의 권총이 숨겨져 있었으며, 들고 있는 검은색 스포츠 가방에도 여러 가지 위험한 무기들이 숨겨져 있었다. 우선 선배의 원수라 할 수 있는 궁병대에 관한 정보를 알아낼 계획이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전면전을 벌일 각오도 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일 뉴스에는 시내 한복판의 빌딩에서 일어난 폭발사고가 기사로 실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전철로 몸을 싣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트레즈에게 고개를 살짝 돌려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먼 곳에 있을 선배가 웃을 때까지는 죽어도 죽지 않을 테니까.”

 이제는 한편이 된 동료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을까. 억지로 꾸며낸 그녀의 미소는 오히려 그에게는 슬프게 우는 듯이 보였다.

“믿겠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허나 달리 전송할 말이 없었던 트레즈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거기에 다시 미소로 답하며 전철에 올라탔다.

‘바보 같아.’

 그녀는 유리에 희미하게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응시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복수를 한다고 해서 선배가 아마 웃어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싸우는 동안은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는 걸까.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왠지 머릿속에 깊게 잠식해 들어가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시야 아래 끝없이 펼쳐진 운해(雲海)는 태양의 축복을 받아 눈부신 광채를 반사했고 각도에 따라 여러 빛깔로 반짝였다. 이렇게 아름답고 드넓은 하늘의 바다에는 빠르게 기류를 헤엄치는 물고기가 한 마리 있었다. 사랑을 상징하는 붉은 빛의 동체에 생명을 상징하는 녹색의 줄무늬, 그리고 진리를 상징하는 금색의 십자가를 드높게 내걸고 자유로이 3만 피트 상공을 비행하는 물체는 바로 교황청 산하 비밀특무기관 『십자가를 짊어진 죄인들의 수호자』, 일명 십자죄인의 수송기인 성 요한(Saint John)호였다.

 이 수송기는 나선열차 로드 프랙탈을 통째로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몸집을 하고 있으면서도 속도는 여타 비행기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도록 특수설계된 것으로 그 비대한 모습은 수송기라기보다는 비행선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이런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십자죄인의 역량은 크게 상승해 과거 전성기에 비해 1/10에 불과한 인원으로도 전보다 더 넓은 지역을 관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구름의 바다를 헤엄치는 성 요한호의 모습은 마치 하얀 바다를 누비는 붉은 고래를 연상시켰다.

 기체의 상층부. 가장 전망이 좋은 위치에는 휴식을 위한 특별객실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기차의 4인용 특별객실을 본 딴 이 방은 만족스러울 만큼 넓은 건 아니었지만 여객기도 아닌 수송전용 항공기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감사드릴 만큼 여유로운 공간이었다. 그곳에서는 다양한 빛을 내뿜는 태양과 하얗게 용솟음치는 구름의 물결, 그리고 그 사이로 언뜻 보이는 녹색의 자연과 인공의 조밀하고 섬세한 도시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와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붉은빛이 감도는 긴 갈색머리의 여성, 이레네 수녀는 바로 창문 밖에 펼쳐진 사뭇 장엄하기까지 한 풍경을 옆에 두고도 아무런 감상 없이 오로지 무릎에 놓인 하얀 노트북 화면에만 정신을 집중해 무아지경으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거의 신경질적으로 빠르게 타자를 치고 있는 이레네 수녀 맞은편에는 만신창이가 되어 여기저기 붕대를 감은 레오 신부와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만 같은 섬세한 유리세공품처럼 가냘프게 보이는 레지나가 함께 앉아 있었다.

 사실 레오 신부는 지금이라도 의무실로 들어가 안정을 취해야 했으며 레지나 또한 심한 영력소모로 인해 하루 이틀은 깊은 수면에 들어야 할 만큼 지친 상태였으나, 긴 귀환길을 이레네 수녀 혼자 쓸쓸하게 보낼 수 없다는 이유로 억지를 부려 이곳에 같이 있는 것이었다.

 레지나의 경우는 그것 이외에도 다른 목적이 있었는지 레오 신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는데, 막상 당사자인 레오 신부는 아직 어린 그녀가 힘든 일이 있었던 만큼 어리광부리고 싶은 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며 반쯤만 제대로 여심을 헤아린 관용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이 그것을 용인하고 있었다.

 이레네 수녀는 돌아가는 동안 자신과 함께 있고 싶다는 그들의 말에 내심 기뻤던 것인지, 아니면 진정 거추장스럽게 생각했는지 “역시 다들 어리석어”라고 투덜거리며 이륙 이후 앞쪽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보고서 작성에만 열을 올렸다. 거칠면서도 단조로운 타자소리가 계속된 지 어언 2시간. 이윽고 이레네 수녀는 보고서를 마무리하며 기지개를 피었다.

“아, 다 끝났다. 속 시원하네.”

 레오 신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면서도 방금 전까지 대화를 쭉 이어온 사람마냥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 건 돌아가서 쓰셔도 좋았을 텐데요. 굳이 보고서를 제출해야 할 강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십니까?”

 십자죄인의 악마퇴치사제로 임명된 자들은 많은 부분에서 특권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의무에 있어서 자유로웠다. 그들이야말로 신의 반역자이자 인류최대의 적인 악마와 싸우는 최전선에 서 있는 자들. 사제들에게는 무제한의 물자지원권한과 제1급의 장소점거권한, 그리고 제2급의 악마분류․선정의 대리권 등 각종 권한이 인정되었다.

 또한 각종 보고서나 사유서도 특별히 문제가 되는 심각한 사안이 아니라면 제출할 필요가 없었는데, 그것은 그만큼 그들의 임무가 형식적인 면까지 신경 쓸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탓이기도 했고, 또 악마라는 존재들이 때로는 도저히 언어로는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기괴한 현상을 보여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밖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힘의 남용은 사제들의 열렬한 신앙심과 자존심, 그리고 무엇보다 파티마의 눈에 의한 감시로 인해 크게 문제될 일이 없었기에 그들이 특권을 향유하는 데 있어 심각한 이론(異論)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레네 수녀가 이토록 보고서 작성에 열중하는 것은 그녀가 현장에서 뛰는 악마퇴치사제인 동시에 무기개발부서라고도 할 수 있는 성물축성부(聖物祝聖部) 소속의 연구자였기 때문이었다.

“기억처럼 쉽게 변하고 잘 잊고 마는 것도 없어. 그러니 시간의 파도에 기억이란 모래성이 쓸려가기 전에 보존해두는 거야. 조금이라도 생생할 때 정리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골치 아파.”

 기억이란 애매하고 불확실한 것이다. 설령 성녀의 기적을 통해 사실을 기록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판단은 언제, 어디서,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레네 수녀가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신(神)과 자기 자신 뿐이었으므로 그녀는 조금이라도 감도가 떨어지기 전에 이번 사건에 대해 정리해두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녀가 작성한 현장보고서와 사견 및 연구내용은 성물축성부의 무기개발은 물론 여타 다른 사제들에게도 악마와 싸우기 전에 참고할 만한 주의사항으로써 널리 응용되고 있었다.
 평소 이레네 수녀의 비위를 맞추는데 익숙한 레오 신부는 별다른 반론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쨌든 다 끝내셨다니 이제 쉬실 수 있겠군요. 어때요, 카드놀이라도 할까요?”

 레오 신부는 품에서 트럼프를 꺼내들며 말했다. 설마 위험도 S급의 악마퇴치를 하면서도 저런 것을 가져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레네 수녀는 기가 막혀 혀를 찼다. 분명 지나치게 긴장하지 않고 언제나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는 건 그의 장점이었으나 현장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주는 걸 넘어서 물렁하게 만들 위험이 있는 건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라면 따끔하게 한마디 일러줄 터였으나 오랜만에 큰일을 겪어 지친 탓에 그녀는 가볍게 한마디만 했다.

“우린 놀러 온 게 아니야. 그보다 너희들 피곤하지 않아? 특히 렌은 다른 사람들처럼 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레네 수녀의 지적에 졸고 있던 레지나는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레지나는 희미하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괜찮아요. 저는 여기에 있는 게 좋아요. 느긋하게 언니랑 얘기할 수도 있고…….”

 본인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지만 레오와 마주잡은 레지나의 손에 살며시 힘이 들어간 걸 눈치 챈 이레네 수녀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레지나를 제외한 다른 성가대원은 모두 영력이 바닥나 기절한 채 로드 프랙탈 내부에 마련된 집중안정실의 관속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유독 개인으로서는 무진장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거대한 영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정도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인간의 체력이란 아무래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기에 막대한 힘을 소모한 그녀는 원칙대로라면 그들과 함께 잠들어 있어야 마땅했다.

 아마 이곳에 고지식한 베르나르도 신부가 있었다면 억지로라도 그런 조치를 취했을 터였지만 이레네 수녀는 순간순간의 감정과 그에 따른 행복에 몸을 맡기는 것이야말로 충실한 삶을 보낸다고 여겼기 때문에 레지나의 어리광을 알고도 못 본 체 했다.

“그래, 그런 걸로 해둘게. 어쨌든 트럼프는 금지야. 그냥 경치구경하며 이야기나 하다가 잠이나 자자.”

 현재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건 휴식이었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셋은 창밖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떤 사상자도 내지 않은 채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가는 그들의 마음은 가벼웠으며 평화로웠다.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태양과 하늘을 감싸듯이 넓게 펼쳐진 흰 구름은, 쉴 새 없이 변해가는 사람에 비해 이 자연은 얼마나 한결같은 존재인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레네 수녀는 이야기를 나누며 바깥을 바라보다 문득 “모든 세상은 평안하다”는 격언은 인간의 관점에서는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임에 틀림없으나, 이 별의 변치 않는 존재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며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기 자신은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존재의 관점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어느새 창밖은 지구 반대편인 밤의 영역으로 들어서 검게 변한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이윽고 레지나는 여전히 레오 신부의 손을 잡은 채 행복한 얼굴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꿈의 세상으로 여행을 떠난 게 확실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레오 신부와 이레네 수녀는 심각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딱히 레지나를 과잉보호하는 건 아니었지만 아직까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부분이 있는 아이였기에 될 수 있으면 어두운 화제는 꺼내지 않는 게 좋았다. 게다가 청초한 외모에 듣기 좋은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인상을 주었다.

“베르나르도 신부님은… 지금쯤 수술 시작했을까? 꽤나 부상이 심각했는데…….”

 이레네 수녀는 고개를 창밖에서 떼지 않은 채 칠흑 같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제6현상의 소멸을 확인한 후 그들은 한숨 돌릴 틈도 없이 파티마의 눈에게 연락을 받고 어떤 폐빌딩이 있는 자리로 베르나르도 신부를 구하러 달려가야 했다. 그곳에서 베르나르도 신부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그들을 맞이하였지만, 그의 온몸은 상처투성이에 피를 많이 흘려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했으며 무엇보다 팔 한쪽이 깨끗하게 잘려나가 있었다. 멀쩡해 보이는 태도와 달리 그는 상당히 위험한 상태였다. 베르나르도 신부는 간단한 응급조치를 받자마자 가장 먼저 특별 제트수송기를 통해 본국으로 이송되었다.

 평소 속이 꽉 막혔다며 베르나르도 신부에 대해 곧잘 악담을 하곤 했던 이레네 수녀였지만 속으로는 현장에서 뛰는 모든 사제들의 좌장격인 그에게 큰 신뢰감을 품고 있었기에 이런 상황에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레오 신부는 그녀의 불안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불식시켜주기 위해 평안한 어조로 말했다.

“분명 괜찮으실 겁니다. 제가 보증하죠. 그분이 강하다는 건 제자인 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와 다름없이 현장에 복귀하시겠죠.”

“하지만 팔을… 한쪽 잃었잖아. 그래도 또 싸우려고 할까.”

“그분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그러실 겁니다. 아마 블라시오 주교님과 마찬가지로 ‘성체’를 몸에 지니시겠죠.”

 성체(聖體). 이것은 십자죄인 전용의 의수․의족을 달리 일컫는 말이었다. 악마를 비롯한 여러 위험한 존재들과 맨몸으로 직접 대적해야 하는 십자죄인의 사제들은 몸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그렇기에 오래 전부터 교회에는 몸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부속품을 만들어내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지금은 오히려 인간의 수족(手足)이 가지고 있는 힘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까지 기술이 발달하였다.

 대개 성체를 착용한 사제들의 생존율은 그렇지 않은 사제들에 비해 배로 높았기에 멀쩡한 팔다리를 가지고도 오히려 의수․의족을 원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교회법상 어쩔 수 없이 불구가 된 이가 아니면 착용을 허가하지 않았기에 효용이 좋다거나 달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기실 베르나르도 신부처럼 오랜 세월 최전선에서 격렬한 악마퇴치를 행하면서도 여태까지 무사한 것이 기적적인 일이다. 그러니 이번 사건을 통해 의수를 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존엄이란 측면에서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게 되는 일일지 모르나, 더욱 힘이 강해지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기에 기능․효용성의 측면에서는 더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레네 수녀의 얼굴은 어두운 채 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체를 다는 데는 불구의 몸이 되는 것 외에 한 가지 더 조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종신의 악마퇴치 서약이었다. 현장에서 불구가 된 악마퇴치 사제들에게는 ‘은퇴하는 것’과 ‘성체를 다는 것’, 이 두 가지의 선택권이 주어진다.

 후자를 택할 경우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악마퇴치를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이 성체를 달 수 있는 조건 중 하나였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아무리 이 일을 하기 싫어도 죽기 전까지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성체를 달고 악마퇴치에 임한다는 건 바로 그런 각오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레오가 말한 것처럼 이레네 수녀 역시 베르나르도 신부가 그런 선택을 할 것이라는 것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악마퇴치가 이미 삶의 목적이라는 건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여실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지도 않았고, 이해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육체가 스러지고 영혼이 흩어질 때까지 악마퇴치를 계속해야 한다는 운명을 짊어질 베르나르도 신부의 미래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하지만 베르나르도 신부의 인생은 그만의 것으로 타인이 참견할 만한 일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간신히 불쾌감을 꿀꺽 삼키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결국 주범은 찾지 못했네. 성녀의 말로는 제6현상의 근본이 된 여자는 아직 살아있을 거라 했는데…….”

 제6현상의 중추였던 진가영. 죽은 연인의 영혼에 달라붙은 종말의 파편에게 기생 당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장본인.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했던 그녀의 행방은 사건종결 후에 감쪽같이 사라져 도무지 추적할 수가 없었다. 조사대의 손길에는 물론 성녀의 탐색에도 걸리지 않았기에 십자죄인의 수뇌부는 제6현상의 붕괴와 함께 중추 또한 함께 소멸했을 것이라 잠정결론을 내렸다.
 레오 신부가 말했다.

“흠, ‘그녀’의 말로는 믿을 만한 사람이 데려갔다고 했는데, 그 이상 추궁하지 않아도 괜찮았을까요?”

 모든 일이 끝난 후 리아 마리아는 전과 다르게 무서울 정도로 거무죽죽한 위압감을 풍기며 두 사람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 흡혈귀는 이번 일을 함께 해준 고마움을 표하러 찾아온 것이었으며, 그들은 베르나르도 신부가 맺은 계약에 따라 축복의 말과 함께 그녀를 그대로 보내주었다. 그녀는 떠나가면서 혹시 종말현상의 중추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느냐는 그들의 질문에 위와 같이 대답했던 것이다.
 이레네 수녀는 심드렁하게 답변했다.

“응, 그럴 필요 없어. 누가 종말현상의 중추를 맡았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니까.”

“저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군요. 괜찮다면 가르쳐주실 수 있습니까?”

“전능자야. 조금만 생각해 보면 간단히 알 수 있는 일이지. 그 도시에서 우리 성녀의 눈길을 피해 악마 - 아니 이제는 이단자라 해야 할까 - 를 숨길 수 있는 녀석은 단 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과연 그렇군요.”

 레오 신부는 이제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상층부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저 납득하며 끝날 일이 아니었지만 당연히 그들은 위에 보고할 생각이 없었다. 한번 악마에게 오염된 종말현상의 중추는 교회법상 화형에 처해질 것임에 분명했고 레오나 이레네는 그런 걸 원치 않았다.

 게다가 전능자의 손에 맡겨졌다면 어차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강대한 기적의 힘을 가진 그 소녀의 행방은 5년 동안 교회와 연맹이 끈질기게 행적을 추적해보아도 알 수 없었는 바, 이제 와서 수색한다고 해서 발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으리라.
 이레네 수녀는 시선을 창밖에서 레오에게 돌리며 물었다.

“그나저나 정말 머물지 않아도 괜찮았던 거야? 여기는 네 고향이잖아. 조사명목으로 일주일 정도 체재하는 건 내 권한으로도 허용해줄 수 있는데 말이야.”

 레오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어렴풋이 어릴 적 기억밖에 없는 곳인데다 그나마도 좋은 추억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제게는 휴른벨스타 성당이 편합니다. 지금도 빨리 제 방으로 돌아가 한 며칠은 잠만 자고 싶은 마음인 걸요.”

 레오 역시 악마에게 가족을 잃어 천애고아가 된 것을 교회에서 거두어들인 케이스로 특별히 자기 고향에 대한 애착은 없었다. 참고로 레오를 구한 것은 베르나르도 신부로서 블라시오 주교가 구한 베르나르도가 레오를 구하고, 그 레오가 레지나를 구했으니 십자죄인의 구성원들은 이처럼 기묘한 보은관계로 얽혀 있었다.

 그래서일까. 십자죄인의 악마퇴치사제들은 서로 동료애가 깊고 악마에 대한 증오심이 강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외부에서 들어온 이레네 수녀와 달리 가혹한 환경에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악마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는 레오의 성격은 한편으로는 매우 맑고 올곧다고 할 수 있으리라. 물론 그 대단함을 알아주는 건 주변의 몇몇 사람들뿐으로 다른 이들에게 레오의 인상은 우유부단하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녀석으로 비춰지곤 했다.
 이레네 수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어쨌든 태어나고 자란 곳인데…….”

“예?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아니, 아니야. 못 들었으면 됐어.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걸로 된 거지 뭐.”

 그녀는 황급히 말을 부정하며 입을 닫았다.
 레오 신부는 이레네 수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는 대충 이해할 수 있었지만, 자세한 속내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레오가 완전히 그녀를 이해하기에는 결정적으로 정보가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레네의 출생이 어딘지, 가족구성은 어떻게 되는지, 십자죄인에 들어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등등 그는 하나도 그녀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자기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 또한 굳이 캐묻는 것을 즐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 그래도 상관없나.’

 만약 누군가 레오 신부에게 이레네 수녀는 어떤 사람이라고 묻는다면 그는 아마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 그녀가 믿을 만한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있었으며,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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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01.10 22:55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일견 십자 죄인의 교단 상층부나 무형정원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현인회의 시점에서 볼 때에는 그저 무가치하고 덧없이 스쳐지나가는 존재로만 여겨졌을 여환의 죽음이, 기실은 정말로 많은 이들의 일상에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었군요.

    만약 그가 어떠한 형태와 방식으로든 이러한 변혁의 전조들을 지켜볼 수 있다면, 그래도 자신이 무엇인가 한가지는 이루어냈다며 잠시나마 미소를 지을수 있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이를 속절없이 떠나보내야만 했던 슬픔과 분노를 이내 증오의 연쇄로 치환하며 격류의 한복판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투사해내는 한명의 복수귀가 탄생하고야 말았으니, 과연 나영의 황폐화된 삶과 그 미래의 가능성은 어디가서 보상받아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일말의 상념이 들기도 했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필시 그녀가 지금까지 흘려왔고 또한 앞으로도 흘려야만 할 눈물만큼이나 무수하고도 많은 피투성이의 길 위를 걸어가야만 할테니 말이예요.... ;ㅁ;


    덧 - 얼핏 살펴볼 때에는 일방적인 론울프(lone wolf)의 성향 탓에 조직내에서 겉돌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던 베르나르도 신부의 존재가, 의외로 실질적인 측면에서 교회가 지닌 무력의 한축을 상징하는 일종의 정신적 지주로서 그 구성원 모두에게 경외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네요!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01.11 20:49 신고 address edit/delete

      말씀을 듣고 보니 쟁쟁한 각 조직의 상층부에서는 기껏해야 일반인 사망자1 정도로 치부되었을 여환의 죽음이 정말 눈에 보이지 않게 많은 것을 움직였다는 생각이 드네요+_+ 작중 주요 인물 중 여럿이 그의 행동이나 죽음에 영향을 받았으니 말이에요.

      이렇게 사람의 '마음'이라는 극히 측정하기 힘든 요소 또한 세상을 움직이는 큰 힘 중 하나이니 과연 세상사를 예측하기란 어려운 일일수밖에 없다는 거창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 밤이네요^^;;

      나영의 후일담은 정말 미래가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는 피에 젖은 길밖에 연상되지 않는 듯싶어요. 세계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는 거대한 조직에 대항하는 한 개인의 싸움... 이길 리는 만무하며, 그나마 죽지 않고 오래 버티는 것만 해도 기적 같을 텐데, 그 또한 지옥 같은 고통이 함께 하는 시련으로 가득 차 있을 테니 말이에요.

      그래도 캐릭터적으로는 좀 더 미래의 시간대를 다루는 에피소드에서 주인공 일행을 이끌어 주는 베테랑 저항자의 모습 등으로 나온다거나 하면 멋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스치고 지나가기도 했네요^^:;;


      덧. 옙, 오랜 세월 동안 현장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뛰는 실력자로서, 특히 아랫 사람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높은 편이네요. 물론 조직 내 정치에도 관심이 없고 명령에는 순종적이며 그저 악마퇴치에만 전념을 하는지라 윗 사람들의 평판도 나쁘지 않은 편이에요. 교회 조직에 한정해서는 존경을 받기 때문이든 이용해 먹기 좋기 때문이든 의외로 적이 적은 인물^^;;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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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장 / 그대를 위한 중창곡Ensemble (4)


 누가 퍼뜨린 소문일까. 명백히 계절을 착각한 한겨울의 괴담은 한동안 도시 뒤편을 떠들썩하게 장식했다. 대개 내용은 밤중에 가만히 인적 드문 거리를 걷고 있다 보면 어느새 그림자 같은 것이 귓가에 달라붙어 뭔가 무서운 말을 속삭인다든지, 거기서 뒤돌아보면 지금까지 아무도 없던 자리에 검은 개를 데리고 있는 유령 같은 여자가 서있다든지, 그리고 그 여자는 소리 없이 다가와 “지금 행복하세요?”라고 묻는데 예라고 대답하든 아니오라고 대답하든 어느 쪽이든 죽게 되니까 귀를 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까지 돌아와야 살 수 있다든지 하는 등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이었다.

 물론 그런 것들만이 아니라 달이 환하게 뜬 어떤 밤에 남쪽 숲 부근에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수십 번이나 내려쳤다든지, 늑대나 그 이상의 거대한 맹수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는 비교적 구체적인 소문도 같이 돌고 있었으나, 어느 쪽이든 간에 허황된 이야기라는 점은 변함없었다. 아마도 이러한 소문들은 사람들 사이에 기분전환용 화제 거리로 몇 번 오르내리다 점차 사그라질 것이다.

 어쨌든 이런 소문들은 몇몇 심약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혔고, 특히 겁 많은 이들은 밤늦게 혼자 거리를 걷다 제풀에 놀라 넘어지거나 하는 망신스러운 해프닝을 일으켰으니, 아주 문제가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런 소문이 도는 시기를 기점으로 실종신고도 자살사건도 전에 비하면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급격하게 줄어들었으며, 사람들은 이런 기묘한 괴담을 이야기하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서는 평온함을 느꼈다.

 하린이 병실에 입원했을 때는 이러한 도시괴담이 슬슬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을 시기였다. 물론 그녀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도 없이 단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는 데만 해도 정신이 없었다.

 그녀가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본 풍경은 붕괴된 제6현상의 중추에서 뛰쳐나오던 망자들의 무리였다. 갈 곳 잃어 방황하던 그들의 사념은 생자의 몸을 빼앗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고, 본래라면 그녀는 육체도 혼백도 그들에게 동화된 채 구천을 떠돌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렇게 눈을 떠보니 자신은 멀쩡하게 살아 있으며,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러있으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기억이 혼란한 척하면서 살짝 물어보니 아무래도 그녀는 트럭에서 떨어져 내린 운송 중이던 짐에 깔려 몸 곳곳에 상처를 입고 머리까지 부딪쳐 기절한 상태로 병원에 실려 왔다고 이야기가 되어있는 듯했다. 그녀가 지금 입원해 있는 곳은 1인 전용 병실로 보험처리도 입원 및 치료비 지불도 전부 끝나 있었다. 리아가 해준 일일까, 아니면 신부가 꾸민 일일까. 어찌 되었건 자신은 살아남았고, 이 도시도 안전한 걸로 봐서는 이미 뒤처리는 완벽하게 끝난 모양이었다.

 하린은 고개를 내려 자신이 입고 있는 흰 환자복을 바라보았다. 약간 구겨져 있었지만 옷은 청결했고 희미하게 흔히 말하는 병원냄새가 났다. 1인실은 햇빛이 잘 들어오고 벽지도 산뜻하며 곳곳에 그림이나 꽃병으로 장식되어 있는 등 굉장히 쾌적했지만, 평소에 병원 가는 일이 거의 없었던 그녀는 익숙지 않은 풍경에 그저 불안하기만 했다.

“리아…….”

 하린은 팔에 꽂힌 주사기를 통해 통통 떨어지는 영양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누가 도와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살아있는 건 축하할 일이다. 아무리 이런저런 구실을 갖다 붙여도 결국 죽는 건 두려운 일이며 허무하고 덧없기 때문이다. 특히 사자(死者)들의 아우성을 바로 앞에서 들은 지금의 하린은 죽음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다른 때보다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까. 생각하기도 싫지만 대신 목숨을 던져 죽은 걸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끔찍한 상상을 부정하기 위해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분명 망자들의 무리는 살아있는 자만을 노리고 있었다. 반면 흡혈귀의 본성을 되찾은 리아는 그들에게 있어 죽은 자나 마찬가지. 최소한 그들에게서만큼은 안전했을 것이다.

 혹은 교회의 사제들에게 쫓겨 어쩔 수 없이 도망친 걸까. 그럴 리가 없다. 그녀는 이 사태의 해결을 담보로 악마퇴치사제들과 행동을 같이 한 것이니, 계약을 완료한 이상 그 강직한 베르나르도 신부가 약속을 어길 리는 없을 것이다. 하린은 그 검은 신부를 싫어하긴 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신뢰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리아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녀는 분명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고 결심했고, 자신의 곁에 있고 싶다고 말했다. 혹시 인성을 버린 것 때문에 더는 이쪽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 걸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비록 인간의 피를 버린 그녀는 일순 이상해지긴 했지만, 수백의 세월 동안 인간의 초상을 그리며 쌓아온 본질적인 자아는 어느 하나도 변하지 않았었다. 새삼스럽게 그녀가 모습을 감출 일은 없는 것이다.

‘대체 뭐야. 정말…….’

 하린은 간호사가 들어와 검사를 하건 말건 1시간이 넘도록 멍한 표정으로 그 일만을 생각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었다. 근거 없는 추측만 무한히 순환하는 고리처럼 빙글빙글 맴돌다 사라질 뿐이었다.

“후우…….”

 생각하다 지친 그녀는 아껴둔 사과를 먹기 위해 옆의 선반으로 손을 뻗었다. 그 과일은 딱히 누군가 병문안으로 사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순전히 담당 간호사가 호의로 가져다 준 것뿐이었다. 아마 이틀 동안 정신을 잃고 있는데 아무도 병문안을 오지 않는 그녀에게 동정심을 느껴 신경 써준 것이리라. 어떻게 보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으나 그녀는 받아둘 것은 받아두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 사과를 먹기로 결심했다.

“앗…….”

 그러나 그녀의 손은 가까운 곳에 집기 좋게 놓인 사과를 집지 못하고 그만 땅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툭. 데굴데굴. 그녀가 손을 쓰기도 전에 붉게 잘 익은 둥근 사과는 한없이 굴러가더니 장식장 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역시, 아직 익숙하지 않네…….”

 하린은 떨리는 손을 품으로 되돌리며 숨을 골랐다. 어제 깨어났을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지만, 이런 사소한 일로도 절망스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그녀의 눈은 망가져 버렸다. 무리하게 힘을 행사한 대가로 시력을 별에게 빼앗긴 것이다. 물론 생물학적인 의미로 시력을 잃은 것은 아니기에 병원검사로는 그녀의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보이긴 하니까 먼 건 아니겠어.”

 현재 그녀에게 비치는 건 오로지 공간정형의 힘을 통해 느껴지는 ‘사물의 존재’뿐. 굳이 말하자면 레이더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 뭐가 있는지는 파악하고 있지만, 사람의 눈이 포착하는 정상적인 영상으로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면 일상생활은 충분히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이다. 오히려 가까운 곳이라면 벽 등의 장애물에 상관없이 마치 투시라도 하는 것처럼 모든 물체나 사람이 속속들이 파악되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는 전보다 낫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금 사과를 집지 못하고 떨어뜨리고만 것처럼 아직 미세한 부분까지 파악하는 건 힘들었고, 무엇보다 이제는 평범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는 충격이 그녀의 마음을 상처 입혔다.

“아… 바보 같아…….”

 하린은 그때 한계를 넘어서면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분명 각오하고 한 행동일 텐데 막상 시력을 잃게 되니 후회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후회하는 자신에 대해 실망감을 느꼈다. 그녀는 술 마시는 자신에게 화가 나 또 술을 마신다는 주정뱅이의 궤변이 이제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하린이 동굴을 파고 들어가고 있을 때 똑똑 하는 노크소리가 들렸고, 그녀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구…….”

“이 의리 없는 여자야!”

 크게 소리 지르며 들이닥친 건 혜리였다. 스키니진에 검은 블라우스, 그리고 갈색 반코트를 걸친 혜리의 목 언저리에는 그녀의 심정을 대변해주기라도 하듯이 붉은 목도리가 불꽃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혜리는 성큼성큼 병실 안으로 쳐들어오더니 문명선물로 사온 듯한 사과를 침대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무서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어떻게 여길…….”

 하린은 여기에 입원하고 있다는 걸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이틀 동안은 잠들어 있었으며 깨어난 후에도 그다지 누군가를 보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말 어떻게 혜리는 이곳에 찾아온 걸까. 하린이 그런 의문을 품고 있는 동안에도 혜리의 기분은 왠지 고양되어 가는 것 같았고, 목소리도 점차 커져갔다. 혜리는 하린의 질문을 무시한 채 씩씩거리며 말했다.

“정말이지 기분 잡치네! 난 그렇게 걱정해서 사방팔방 돌아다녔는데 넌 이렇게 태평하게 누워있다니……. 뭐, 어디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지만……. 아아, 정말 열 받네!”

“뭐, 뭘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묘한 박력에 눌린 하린이 무심코 입을 열자 이윽고 호통에 가까운 답변이 날아들었다.

“왜 화를 내냐고!? 친구가 연락이 끊기더니 난데없이 병실에 입원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냐? 움직일 수 있으면 전화 정도는 해달란 말이야!”

“으…….”

 하린은 대꾸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으며, 할 말이 있어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솔직히 하린은 혜리가 이 정도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알고는 있었을 터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년 동안 혜리가 보여준 우정. 일하는 카페에 난데없이 낯선 리아를 데리고 찾아갔을 때도 혜리는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그것은 단순히 혜리가 붙임성이 좋기 때문만이 아니라 친구인 하린을 믿어준 것이리라. 무엇보다 결전 전에 혜리에게 걸려온 전화를 떠올려 보면 그 후 그녀가 이렇게 걱정해 줄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린은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이 도시에 와서 처음으로 사귄 소중한 친우에게 전화를 걸었어야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린은 미안한 마음에 잔뜩 움츠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렇게 찾아다닌 거야……?”

“그래! 결국에는 도저히 실마리가 없어서 그 사람한테 머리 좀 숙였어. 너무 싫었지만 이 도시에서 아무 단서도 없이 무작정 사람을 찾는다는 건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니까.”

 ‘그 사람’이란 바로 혜리의 아버지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요직의 고위 공무원으로서 요즘도 심심찮게 매스컴을 타는 유명 인사였다. 그는 인덕과 카리스마가 있어 지지자가 많으며, 권모술수에도 능해 여러모로 정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부친의 그런 부정적인 면을 접해온 혜리는 아버지라면 질색을 하였으며, 아예 그 사람이라 부르며 따로 집에서 나와 살 정도였다. 그런 점은 가족의 답답한 분위기가 싫어 집에서 뛰쳐나오다시피 한 하린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그녀들은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 어쨌든 하린은 혜리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부친에게 부탁을 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배려라면 반대로 남에게 걱정하게 해주는 것 또한 배려이다. 이렇게도 혜리는 걱정해주고 있었는데 자신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 하린은 자기 일에만 빠져들어 망연자실하고 있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분명 병원공기가 좋지 않았던 탓. 하린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지금까지 혜리에게 해본 적이 없었던 말을 입에 담았다.

“……미안해.”

“……뭐?”

 순간 혜리의 얼굴이 멍해졌다. 확실히 이건 기습이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정확히 심장 한가운데를 노린 저격인 것이다.

 하린은 신하시로 올라온 이후 집에서 억눌려 살았던 작은 자신을 버리기 위해 항상 도도하게 굴려고 노력했다. 가장 친한 친구라 할 수 있는 혜리에게조차 무슨 일이 있어도 고맙다는 말을 할지언정 사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하린의 모습은 혜리에게 있어 언제나 차갑고 외로운 공주님으로 비춰졌다. 그러니 설마 그녀가 순순히 미안하다는 말을 꺼낼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예상치 못한 한수에 입을 봉쇄당한 혜리는 잠시 동안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 뭐라 그런 거야? 다시 말해 봐!”

“미, 미안하다고! 남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두 번 다시 말 안 할 거니까 한 번에 알아들어.”

 하린은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획 돌렸다. 어차피 공간정형의 능력과 깊숙이 연결된 그 눈으로는 고개를 돌린다 해도 혜리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지만 기분 상 그렇게 한 것이다.

“후우…….”

 예상지 못한 친구의 행동에 혜리는 잠깐 머리를 긁적인 후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일로 독기가 다 빠져버렸는지 혜리의 얼굴은 평소 느긋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으며, 그녀는 침대 한편에 앉아 자신이 가져온 위문품을 풀었다.

“특별히 뭐 먹지 말라는 말은 없었지? 원래는 너 좋아하는 초코 케이크나 사올까 하다가 입원하는 동안 살찔 걸 걱정할까 봐 이걸로 사왔으니 오늘은 그냥 먹어.”

 혜리는 같이 가져온 그릇과 칼을 꺼내 솜씨 좋게 사과를 깎아 나갔다. 그녀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온실 재배된 붉은 사과는 노란 속껍질을 드러내며 향긋한 냄새를 풍겼다. 혜리는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껍질을 깎는다는 작은 묘기를 선보이고는 곧 먹기 좋게 토막 내기 시작했다.
 혜리는 봉지 속에 같이 들어있던 플라스틱 포크를 꺼내 사과를 꽃은 후 그걸 하린의 입가로 가져가며 말했다.

“아, 해봐.”

 불쑥 당치도 않는 소리를 하는 혜리를 향해 하린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돼, 됐어! 그런 부끄러운 짓 따위 할 거 같아? 애초에 사과 정도는 혼자 먹을 수 있어!”

 그러니 일부로 놀리거나 야릇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가 아닌 듯 헤리의 눈빛은 진지했다.

“잔말 말고 먹어. 병자는 철저히 돌봐주는 게 내 신조니까. 빌어먹을 우리 집 가훈은 뭐든지 혼자 넘어서야 한다는 거지만 말이야.”

 신조니 집안 이야기니 하는 건 그만큼 자기 의지가 굳세다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하린은 이번만큼은 거절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얌전히 혜리가 내미는 사과를 깨물었다. 사각, 하는 좋은 감촉과 함께 입속에 과즙이 흘러넘친다. 하린은 뭔가 행복한 기분에 살짝 눈물이 날 뻔 했지만 간신히 내색하지 않고 혜리가 건네주는 사과를 받아먹었다.

 다음 하린과 혜리는 사과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제는 대개 가볍고 밝은 것으로 심지어 하린이 왜 다쳤는지조차 혜리는 물어보지 않았다. 본인이 무사하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미리 조사를 해본 것인지는 몰라도 확실한 건 하린을 생각해서 그랬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환자 앞에서 병이나 상처 이야기를 하는 건 사람에 따라 싫은 기억을 다시 되살리는 잔인한 일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도중에 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긴 했으나 하린이 잠깐 볼 일이 있어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고 하자 혜리는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 지 30분 정도 지나지 혜리는 시계를 보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너한테 감춘 게 하나 있어.”

“뭐야, 감춘 거라니?”

“잠시 후 누군가 찾아올 거야. 멋대로 한 일이라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일부러 주어를 빼놓고 말하는 탓에 하린은 혜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혜리는 후, 하고 한숨에 가까운 웃음을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이 일로 기분 상한다면 그건 미안해. 하지만 난 잘못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러니까 대체 무슨 말이야? 누가 오는데?”

 어리둥절한 하린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때 타이밍 좋게 노크소리가 들렸다. 진료시간도 아닌 데다 호출벨을 누르지도 않았으니 간호사나 의사일리는 없었다. 하린은 지금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이 혜리가 말하는 누군가라는 것을 깨달았다.

“만나보면 알아. 그럼 몸조리 잘 하고 있어. 내일 또 올게.”

 혜리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자 곧 그 누군가가 병실로 들어섰다.
 초대 받지 않은 두 번째 방문객은 병실로 들어온 이후에도 한참 동안 말을 걸지 않고 하린을 바라보기만 했다. 만약 그녀의 눈이 멀쩡했다면 단번에 그가 누군지 알아보고 놀랐으리라.

“…….”

 들어온 사람은 훤칠한 키에 비해 다소 왜소한 체구를 가진 20대 중후반의 남자였다. 그의 피부는 웬만한 여성보다도 하얗고 투명했으며, 단정히 정리한 흑발 아래 걸쳐있는 은테안경은 세련되고 지적인 인상을 주는 동시에 차갑고 답답한 고지식함까지 내포하고 있었다. 양복 차림에 검은 코트가 잘 어울리는 이 남자는 겉모습만으로도 그가 뼛속까지 전형적인 식자(識者)라는 걸 주위에 주장하고 있었다.

“……?”

 하린은 처음에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눈이 제 기능을 하지 않고 단순히 어떤 ‘존재’가 있다는 감각밖에 전달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뭔가 익숙하고 그리운 누군가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머릿속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에 해당하는 감각을 찾아내기란 아직 익숙지 않은 작업이었기에 시간이 걸렸다.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더듬던 하린은 이윽고 그 감각에 해당하는 사람을 짐작하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설마, 오빠……?”

 그랬다. 마치 병실을 잘못 들어온 사람마냥 주춤거리고 있는 이 남자야말로 하린의 오빠인 유하진인 것이다. 그녀가 그를 알아보자 이제야 말할 권리를 허락받았다는 듯이 하진은 안도하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 1년 만이구나.”

“왜 오빠가…….”

 하린은 아까 혜리에게 했던 질문을 그대로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번 일의 원흉이 누구인지 곧바로 추측이 되었기 때문이다. 멋대로 일을 벌였다는 건 바로 이런 뜻이었나. 혜리는 하린의 신변을 파악하는 동시에 그녀의 집에도 연락을 넣은 것이다.

 하린은 친구의 행동에 자신을 생각해줘서 고마워해야 할지, 아니면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화를 내야 할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분명 자신이 가족을 거부하려 한다는 건 혜리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자신이 입원했다는 걸 알려준 건 무슨 연유 때문일까.

 혜리는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건 가족인 이상 아무리 어색하고 싫다 하더라도 걱정해줄 역할은 빼앗지 말아야 한다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감상적인 기분으로 오지랖 넓은 행동을 한 것뿐일까.

 항상 커다란 그림자로 자신을 가려왔던 오빠란 존재를 앞에 두고 하린은 혼란스러운 마음에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린은 우선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겠다는 생각에 시시한 인사를 입에 담았다.

“오, 오랜만이야. 모처럼 만났는데 이런 곳이라서 좀 그러네.”

 왜 내가 쭈뼛거려야 하는 걸까, 하고 하린은 자문했다. 지금 움츠러드는 자신의 목소리가 그녀는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 1년 간 피나는 노력 끝에 용기 없고 볼품없는 자신은 떨쳐내고 도도하고 흔들림 없는 자신을 찾아냈다고 생각했지만, 오빠를 앞에 두고 나니 다시 작아지고 만 것이다.

 하진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없이 가까이 다가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하린은 오빠가 옆으로 다가오자 참을 수 없을 만큼 답답함을 느꼈다. 하린에게 있어 하진은 항상 물과 같은 존재. 깊은 호수 속에는 어떤 것이 들어가도 잔잔하며 아무리 물장구를 치고 돈을 던져도 곧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처럼 그녀의 오빠는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가족다운 반응을 보여준 법이 없었다.

“…….”

“…….”

 침묵이 계속되자 하린은 갈수록 버티기 힘들었다. 그녀는 속으로 이럴 바에는 차라리 오빠가 왜 다쳤느냐고 화를 내거나 괜히 병문안에 시간을 뺏게 만들었다고 불평을 토하는 편이 훨씬 속 시원할 거라 생각했다. 옆에서 아무 말도 없이 목석마냥 그저 있어주기만 하는 건 이제 사양이다. 그녀는 어떤 변화도 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 쇠락해가는 가족관계가 싫어 밖으로 나온 것인데, 밖에서조차 정체되어 있는 공기를 마셔야 한다는 건 정말이지 참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정말, 사람은 변하기 힘든 생물이야…….’

 혜리는 그녀가 다친 것을 계기로 친구의 가족관계가 다시 회복되기를 바란 모양이지만, 그건 짧은 생각으로 잘못 짚은 엄청난 착각이다. 애당초 자상하고 듬직한 아버지를 좋아하면서도 고위 공직자로서의 부정적인 모습에 애증(愛憎)을 품은 혜리와 자신은 다르다. 하린과 혜리의 사정은 가족끼리 서로 서먹서먹하다는 점에서만 닮았을 뿐인 것이다. 하린은 친구가 신경 써준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결국 가장 기피하고 싶었던 상황이 연출된 것에서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딱히 할 말도 없었고, 말하기도 싫었지만 이 끈적거리는 진흙까지 기분 나쁜 정적을 깨뜨리기 위해 하린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 그 동안 잘 지냈어? 몸은… 어때? 오빠도 겨울에는 약한 편이잖아.”

 머뭇머뭇 말을 꺼내면서도 하린은 속으로 실소를 했다. 대체 왜 환자인 자신이 병문안 온 사람의 건강을 물어야 한단 말인가. 보통은 저쪽에서 먼저 걱정해주는 말을 건네고 자신이 예의상 물어봐줘야 하는 게 아니었나. 꼭 그런 겉치레가 중요하다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까지 무시 받아도 기분 좋을 일은 아니었다.

“전보단 견딜 만 해. 그보다 넌 어때? 일단 문제없다고 들었는데, 정말 괜찮아?”

 이제야 물어봐주는군. 하린은 듣고 싶은 말을 들었지만 옆구리 찔러 절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응. 괜찮아. 머리 부딪친 게 조금 안 좋았을 뿐이지, 다른 곳은 멀쩡하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내일이나 모레면 퇴원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녀는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하며 답변했다.
 만약 지금 잔뜩 움츠러든 채 생기를 잃은 그녀의 얼굴을 혜리를 비롯한 대학친구들이 본다면 아마 죽을병에 걸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는 학교 안에서는 항상 필요 이상으로 도도함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그런 자신감에 찬 모습은 그녀가 스스로 원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나 오빠 앞에만 서면 이렇게 달팽이처럼 껍질에 처박혀 있고만 싶어진다.

‘대체 뭘 하는 건지…….’

 어릴 적부터 수없이 같은 생각을 했다. 무시당한 사랑의 표현들, 넓은 저택에 단 셋밖에 없는 가족이 하루에 만나는 건 아침밥 먹을 시간뿐이라는 고독감, 밖에서는 언제나 유 교수님의 딸이나 유하진군의 동생이라는 수식어만이 지겹게 따라붙는 일 등등. 이런 모든 것들이 그녀가 가족 앞에서 떳떳이 가슴을 펴고 따스함을 느끼는 게 아니라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정신적인 외상의 근본이었다.

“다행이다.”

 짧은 한 마디. 여전히 오빠의 목소리는 버들나무 가지에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듣기 좋고 부드럽지만 왠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허무한 울림. 설령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게 여동생 하린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 하더라도 전혀 그 음색은 바뀌지 않을 거란 생각에 그녀는 그만 슬퍼졌다.

“…….”

 또 다시 시작된 침묵. 간신히 무너뜨린 정적의 벽은 잠시 한숨을 돌린 사이에 마법처럼 견고한 성채로 돌변했다. 그녀는 그만 지쳐 버렸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1년 만에 만난 남매가 서로 나눌 만한 대화가 아니다.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분위기가 그렇다는 것이다. 오늘 처음 만난 새파란 타인이라 할지라도 이처럼 어색하지는 않을 것이고, 주눅 들게 만들지도 않으리라.

 하린은 고개를 돌려 오빠를 바라보았다. 망가진 눈에 보이는 건 아무런 반향 없는 방음벽마냥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인 남자.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 없이 그곳에 있는 존재만을 인지할 뿐인 그녀의 눈에 비치는 건 비어있고 서늘한 무(無)에 가까운 숨결에 불과했다.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진다는 게 바로 이런 걸까. 더 이상 이런 분위기에 숨이 막혀 견딜 수 없는 하린이 오빠에게 그만 쉴 테니 돌아가 달라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 뿌득하고 이빨을 깨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지. 난 이런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흩어진 숨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거친 혼잣말. 이 격정적인 목소리는 다름 아닌 하진의 말이었다.

“오, 오빠……?”

 하린은 짜증이 넘쳐 슬슬 쓰려오기 시작하는 뱃속도 당장이라도 토해버리고 싶은 입가의 구역질도 잊은 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녀는 자신의 오빠가 저런 식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드러내는 걸 난생 처음으로 봤기 때문이다. 혹시 자신이 스트레스 때문에 환청이라도 들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난 얼간이야. 여태까지 해오던 바보 같은 짓을 또 반복하다니…….”

 잘못 들은 게 아니다. 분명 하진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격한 감정을 내뱉고 있었다. 어째서 갑자기 오빠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하린의 머릿속은 삽시간에 뱅글뱅글 도는 의문점에 복잡해졌다. 그 중에서도 하나 어렴풋하게 오빠는 난데없이 저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여기 들어오기 전부터 참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진은 거칠어진 숨소리를 고른 후 마치 사죄라도 하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꼭 들어줬으면 하는 게 있어.”

“뭘……?”

“네가 타지에서 사고를 당해 입원까지 했는데도 우리 가족은 네 친구가 그 사실을 몰랐어.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도 아버지는 네가 크게 다치지 않았다고 하자 곧장 학술 세미나에 참석하러 가셨지. 그 점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내가 이렇게 사과할게.”

 정중하게, 그리고 약간 떨면서 말하는 하진의 모습은 예전에 그녀가 알고 있던 오빠가 아니었다. 그러나 하린은 너무나도 예고 없이 반전된 오빠의 태도에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었다.

“뭐, 뭐야… 갑자기…….”

 지금 그녀에게 드는 기분은 감동이나 고마움이라기보다는 의아함뿐이었다. 정말 대체 뭘까. 혜리는 이런 것까지 예측하고 우리 가족한테 연락을 한 걸까. 가족의 위기를 통해 결속이 단단해진다는 드라마 같은 예측이 맞아떨어지기라도 한 걸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이 정도로 변화할 관계였다면 애당초 이런 상황까지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병문안은 단순한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린이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는 동안에도 하진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까지 우리 가족은 비뚤어진 생활을 해왔지. 아버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걸 사과하고 싶어.”

“비뚤어졌다니……. 그리고 뭘 사과한다는 거야.”

 하진은 손에 깍지를 낀 채 고개를 숙여 이마를 댄 후 천천히, 그리고 조용하게 말했다.

“네가 그동안 외로워하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어. 나도, 그리고 아버지도, 너에게 많은 신경을 써주지 못했지.”

 참회에 가까운 고백, 그러나 하린의 태도는 냉담했다.

“전혀… 외롭거나 그렇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이제 와서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여기서 오빠의 말을 인정해버리면 모든 자존심이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분명 고독했던 건 사실이지만 자신을 그렇게 만든 당사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건 최악이다. 저 사람은 지금 버린 것을 언제든지 다시 주어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건 아니야…….’

 물론 그녀도 가족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며, 한때 단란한 가족관계를 꿈꾼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또 자기가 모르는 곳에서 무언가 시작돼 멋대로 결정돼 버리는 일은 원치 않았다. 오빠가 여기서 사과하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여태까지 가슴앓이를 해온 자신은 뭐가 되는가. 그녀는 오빠를 미워할 자유도 가족과의 관계회복을 시도할 기회도 빼앗기고 영문도 모른 채 난데없이 남들처럼 화기애애한 가족이 되는 것만큼은 절대 사양이었다.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 난 아버지나 오빠한테 불만 같은 거 없어.”

“어. 믿을게. 그럼 그냥 오빠의 푸념이라 생각하고 들어줘.”

 분노가 넘쳐흐르는 그녀의 음색은 닿은 곳이 뜨거워질 정도로 차가웠으나 하진은 말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것은 하린을 무시한다기보다는 이번을 마지막 기회로 생각하는 필사적인 느낌이었다.

“음…….”

 하린은 못마땅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진은 동생의 허락에 안도하는 건지 긴장하는 건지 알기 힘든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가족이 처음부터 그렇게 무관심하고 싸늘했던 건 아니야. 어머니가 살아계실 무렵에는 좀 더 화목하고 따스한 가정이었지.”

 그건 사실이다. 하린도 어렸을 때라 어렴풋하긴 하지만 그 시절에는 항상 포근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던 것만큼은 잘 기억하고 있다. 모든 건 어머니가 죽고 나서부터 무너져 내렸다.

“그래,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우리 가족에게 있어 큰 타격이었어.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말이야. 아, 오해는 하지 마. 네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내리까는 건 아니야. 단지 넌 그때 어렸으니까… 아버지가 얼마나 슬퍼하셨는지는 알지 못했다고 생각해.”

 그럴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보통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것이며, 그 상대가 죽었을 때 슬픈 건 당연한 감정이겠지.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딱히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성묘를 가는 것도 오로지 명절과 기일 때뿐이었고, 그마저도 일정이 있으면 빼먹기 십상이었다. 결국 벌초마저 업자에게 맡겨버린 아버지에게 과연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셨어. 그날 중요한 논문발표가 있었거든. 아버지의 명예를 반석 위에 굳힌 중요한 연구결과가 드러나는 날이었지.”

 웃기는 변명이다. 아내가 죽어 가는데, 그런 것쯤은 충분히 미뤄도 되는 일이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아버지는 분명 발표 전에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통보를 받으셨다. 그런데도 그곳으로 가지 않았다는 건 결국 아버지에게는 반려보다, 즉 가족보다 자신의 일이 소중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연구에만 틀어박혀 우리 남매에게 어떤 애정도 보여주지 않았던 게 그 증거다.

“아니, 아니야. 네가 그런 오해를 하고 있었다면 일찍 말해주는 편이 좋았을 텐데 후회스럽구나. 아버지는 말이지, 오지 않으신 게 아니라 오지 못하신 거야. 어머니가 오지 못하게 막으셨어.”

“엄마가, 막았다고……?”

“그래. 난 그때 옆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어. 어머니는 전화로 아버지에게… 제대로 숨 쉬는 것조차 힘든 몸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어. ‘내 탓으로 당신의 꿈에 조금이라도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건 싫어. 만약 일정을 미루거나 다른 이에게 맡긴 채 이곳에 얼굴을 내보이면 원망하며 죽을 거야’라고. 어머니도 본래 아버지와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시던 연구원이셨으니까, 누구보다도 그 꿈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계셨던 거야. 그리고 덧없이 죽어가는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아예 같이 이루고 싶었던 꿈을 맡긴 거지.”

“엄마가…….”

 하린은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3살이 채 되지 않는 어린 나이였고 낯선 병실에서 수척해진 엄마의 모습이 무섭고 눈물만 났기 때문이다.

“그 후 아버지는 더욱 연구에 매달리실 수밖에 없었어. 그게 단 하나뿐인 아내의 유언, 사랑하는 이가 남긴, 이제는 결코 변하지 않을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지. 거의 저주에 가까운 그 속박의 말에 아버지는 아직도 사로잡혀 계셔. 그리고 그건 평생 어찌할 수 없는 일이겠지. 아버지는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셨으니까.”

“말도, 안 돼……!”

 하린은 납득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확실히 아버지는 산속 저택까지 들어가 뭔가 자신을 몰아세우듯이 연구를 계속했다. 허나 그것은 더 이상 신경 쓸 상대가 없어졌기에 마음 놓고 연구에 몰두했던 게 아니었단 말인가.

“믿고 싶지 않다면 그래도 상관없어. 나 역시 그런 아버지 앞에서 도무지 가볍게 행동할 수 없어 너와 놀아줄 수도 없었다고 말해봤자 변명에 지나지 않겠지. 아니, 정말 변명에 불과해.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너마저 그런 어두운 과거에 사로잡혀 상처 입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말이야.”

“…….”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네가 조금 미웠어. 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슬퍼하고 있는데, 혼자 천진한 동생이 무신경하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네가 무거운 집안 분위기에 눌려 결국 풀이 죽었을 때는 약간 통쾌함도 느꼈어. 그때 너는 아직 다섯 살도 되지 않는 어린 나이였는데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달라. 어머니와의 약속에만 매달려 자식을 뒤돌아보지 않은 아버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자기 생각만 하느라 동생의 마음을 계속 죽여 온 나. 그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지 이제는 알겠어.”

 하진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들어 하린을 마주보고는 결심한 듯이 말했다.

“정말, 미안하다.”

 하린은 이제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계속 냉담한 태도를 유지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용서를 해야 할지. 아니면 반대로 아버지의 슬픔을 알아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자신이 사과를 해야 할지 도무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만약 이것이 타인의 일이었다면 듣기 좋은 말로 자기 방어를 하고 있다고 아버지와 오빠를 매도했을 것이나, 자신의 가족일이다 보니 그녀는 도무지 냉정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하린은 자꾸만 마음 한구석을 찌르는 의문에 신경이 쓰였다. 오빠는 절대 아무 일도 없이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오빠가 저런 태도를 보이는 데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하린은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자의 감이란 걸 느꼈다.

“오빠, 설마……. 소중한 사람이라도 생긴 거야?”

 순간 흡,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정곡을 찔린 모양이다. 익숙지 않은 하진의 모습에 혼란스러운 나머지 무심코 내뱉은 말이 정답이었던 것이다.

 하린은 오빠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 작은 기척만으로도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소에는 지나칠 정도로 변화가 없는 오빠였기에 한번 변화가 일면 세세한 부분이라도 금세 꼬집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게 진짜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녀는 “뭐어어어?”하고 놀라며 거의 소리치듯이 말했다.

“마, 말도 안 돼! 오빠한테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애인!? 어, 어쩐지 여기 찾아와준 것부터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런 일이……!”

“아, 아니… 아직은 애인이라 부를 만한 관계는 아니야. 단지, 그 녀석이… 비뚤어진 건 방치하면 방치할수록 손 쓸 수 없게 된다고, 그러니까 늦기 전에 행동하라고 등을 떠밀어줬거든. 그래서 이번 기회에 너에게 사과하기로 마음먹은 거야.”

 쑥스러운 듯이 머뭇거리는 하진의 말에 하린은 어떤 친숙한 걸 감지했다. 그건… 리아를 봤을 때, 또 그녀가 거울 속에 자신을 봤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그렇다. 바로 변화. 오빠도 변화한 것이다. 하린이 리아를 만나 변했듯이, 그리고 리아가 하린을 만나 변했듯이 하진도 어떤 이와의 만남을 통해 무언가를 깨닫고 한걸음 올라선 것이다.

“오빠도, 같구나…….”

 하린은 작게 중얼거리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가 어떻든 오빠가 어떻든 자신이 어떻든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마음속을 지배하던 분노나 슬픔이나 의심 같은 감정이 일소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저 그녀의 가슴에 느껴지는 건 이런 게 사는 거구나, 하는 따스함뿐이었다.
 뚝뚝. 뭔가 축축한 것이 떨어진다. 눈가를 가득 메운 그것은 볼을 타고 흘러내려 옷을 적시고 시트를 물들였다. 눈물, 흘러내리는 눈물을 하린은 멈출 수가 없었다.

“괘, 괜찮아?”

 눈치 채보니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하린을 보고 하진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몸이 아프거나 기분이 나빠진 게 아니냐고 당황해하는 오빠의 말에 하린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껴안아줘.”

“뭐……?”

“오빠는 지금까지 날 한 번도 안아준 적이 없잖아? 그동안 못해준 포옹을 해준다 생각하고 한번만 꼭 안아줘. 아마 다시는 이런 부탁을 할 일이 없을 테니까.”

“아아, 그렇구나. 그러고 보면 어릴 때 그렇게 업어달라고 보챘는데, 한 번도 안아준 적이 없었네.”

 하진은 잠시 당황했지만 동생의 어리광에 오빠노릇을 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자세를 낮춰 조심스럽게 하지만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 힘을 주어 하린을 감싸 안았다. 자신을 감싼 듬직하고 커다란 팔의 감촉에 그녀는 안심하고는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빠, 눈물은… 설령 보이지 않는다 해도 흘릴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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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01.07 20:44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이렇게 신하市를 무대로 진행되었던 한바탕의 기묘한 활극이 막을 내리고... 마침내 언제나와 마찬가지의, 따스하고도 안온한 일상으로의 회귀를 고하는 후일담이 펼쳐지는군요.

    비록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할퀴고 지나간 상처의 여파가 아직 남아있는데다, 하린 역시 미증유의 대격변에 휘말려든 대가로 두 눈을 잃기는 했지만 그 반대급부로 세계의 본질 그 자체를 통찰할수 있는 마안을 얻게 되었으니 역시나 주인공 보정의 위력은 무시무시한 것임에 틀림이 없... (콰직)

    에에, 그리고 한편으로는 서로의 마음에 조금씩만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더라면 전혀 다른 미래를 살고 있었을지도 모를 그들의 과거사에 일순간 안타까움과 함께 일종의 숙연한 기분이 들기도 했답니다.


    더불어, 혹시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에 시달릴지도 모를 하린에 대한 따스한 배려를 잊지 않은 그 누군가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의 감정과 함께, 이제는 모두가 좀 더 행복하게 미소지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를...


    덧 - 아앗... 아무래도 예전에 안단테님께서 살짝 언급해주신 것처럼 하진에게 작고도 큰 변화를 불러온 정인(情人)의 정체는 다름아닌 하린의 과거 절친인 미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_+) 흠흠, 만약 밤하늘의 지평이 공중파로 방영되는 드라마였다면 이번 화의 말미에서 살며시 포옹한 남매의 모습 위로 서서히 sepia tone의 물결이 덧입혀지며 카xx네의 배너가 뙇!!【 -어둠 속으로 조용히 끌려간다- 】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01.07 20:36 신고 address edit/delete

      해를 넘기며 연재된 문고본 2권 분량의 이야기도 꾸준히 관심을 가져주신 덕분에 이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네요^^ 앞으로 후일담은 2화가 더 전개된 후 막을 내릴 예정이에요.

      확실히 주인공 보정의 축복이란... 작중 사건에 휘말려 수백 명의 사람이 죽거나 크게 다친 상황에서, 하린은 특수한 능력 외에 일반인의 몸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원흉과 맞서 실질적인 상처는 거의 입지 않았으니 말이죠^^;;;

      말씀처럼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인물들이 큰 불행이나 아니면 작은 사건을 계기로 인생이 180도 달라지게 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그래서 그것을 등장인물과 함께 피부로 실감할 수 있는 여러 루프물 작품에서 온갖 불행을 겪은 주인공이 최후에 행복 또는 미래를 거머쥐는 것이 그처럼 애틋하게 다가오는 건 아닐까 싶어요.

      정말 요즘 국내 뿐만 아니라 국제정세까지 어지러워서 그런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며 따뜻하게 다가갈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한층 강하게 드는 것 같아요ㅠ_ㅠ


      덧. 옙, 정답~>.< 예전에 글을 쓸 때는 같은 시계열의 미리가 수용시설에서 탈주해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하린의 오빠와 가까워진다는 외전을 염두에 두고 넣은 장면이었는데, 결국 그쪽 이야기는 쓰지 못하고 말았네요^^;;

      (풋, 말씀하신 드라마의 마무리가 자연스럽게 연상이~)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








종장 / 그대를 위한 중창곡Ensemble (3)


 관리사의 저주는 신부의 시력을 점차 빼앗는 동시에 팔 다리까지 마비시켰다. 출혈은 멎었다고 하나 이미 상당부분 혈액이 빠져나간 그의 몸은 빈혈기와 오한을 호소하며 휴식을 주장했다. 그러나 신부는 지금 육체의 당연하고 긴박하며 정당하기까지 한 필수적인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눈앞에는 아직 궁병대가 남아있다. 비록 지휘관인 알렉이 패배하긴 했으나 그의 9명의 부하들은 여전히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모든 무기와 체력을 잃고 겨울의 허수아비마냥 무력하게 서있을 뿐인 신부가 그들에게 대항할 수단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관리사들의 결계는 붕괴했고, 파티마의 눈이 지켜보고 있는 이상 목숨을 빼앗는 싸움까지 갈리는 없었으나, 자신들의 대장을 잃은 그들이 쉽게 물러날 리가 없었다.
 베르나르도 신부는 허세를 부리는 걸 포기하고 땅바닥에 좌선을 하는 듯한 자세로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원통하지만 더는 싸울 힘이 없군. 내 목숨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작은 촛불 같은 신세지. 어떠냐. 대장의 원수를 갚아볼 텐가.”

 신부는 켈젠을 바라보며 말했다. 본래 궁병대에서 리더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 사이에선 계급의 서열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부는 알렉과 켈젠이 사제지간이라는 사실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직감적으로 누가 이 무리의 다음 우두머리 역할을 하게 될 것인지 파악하고 있었다. 실로 전투에 한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닦여진 감각이었다.
 켈젠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은 그만둬라. 너는 자신이 이미 안전하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우리들의 결계는 붕괴했고, 너희들의 성녀가 귀신 같이 눈을 밝히고 있는 이상 서로 싸우는 건 더 이상 불가능하겠지.”

 그러나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지금의 날 죽이는 건 굳이 여러 사람의 손을 빌릴 필요 없이 너희들 중 누구 한 사람 가볍게 손을 쓰는 걸로도 간단히 이룰 수 있을 터. 양자 간 충돌이 벌어졌을 때 양보 못할 중대한 일이 아니라면 말단을 잘라내는 걸로 상황을 무마시키는 건 십자죄인과 무형정원 간의 오랜 전통 중 하나다. 만약 궁병대가 아니라 개인의 이름으로 복수를 하는 거라면 아무 문제될 것이 없겠지.”

“……!”

 태연한 신부의 말에 켈젠의 얼굴이 모욕감을 이기지 못하고 실룩거렸다.
 지금 신부가 말하고 있는 것은 간단했다. 말하자면 그는 “너희들은 두 집단 간의 충돌을 염려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정말 대장의 원수를 갚고 싶다면 연맹에서 추방될 각오를 하고 날 죽여 봐라. 그걸 못하겠다면 너희들은 지휘관을 잃은 명예를 지키는 것보다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는 데 전전긍긍한 겁쟁이들이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즉, 신부는 명백하게 마도사들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었다.

 켈젠의 뒤에서 성난 소리와 함께 일괄되지 못한 술렁임이 들려왔다. 그건 미개하다고 생각한 신의 종자 따위에게 원력이학을 추구하는 지고한 관리사들이 모욕 받은 데서 오는 분노의 물결이었다.
 그러나 켈젠은 곧 표정을 다스리며 최대한 감정을 억제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사제의 기본소양은 위선과 음흉함이라더니 소문은 헛되지 않은 모양이군. 허나, 네 도발에 넘어갈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우리들은 한갓 인간이기 이전에 별의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이며, 궁병대는 현인회의 명에 의해 우리를 비롯한 모든 관리사를 수호하는 의무를 지고 있지. 한갓 개인적인 감정에 휩쓸려 복수 따위에 함부로 몸을 버리는 어리석은 짓 따위를 할 것 같나.”

 이건 신부에게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뒤에서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동료들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들려주는 말에 가까웠다.

 가까스로 감정을 다스린 켈젠은 동료들에게, 아니 이제 부하가 된 나머지 궁병대원에게 알렉의 시신을 옮겨가도록 명했다. 비록 같은 서열이라고는 하나 켈젠은 처음부터 알렉의 보조를 맡으며 부대장격인 지위에 있었으며 알렉이 죽은 이상 빠른 상하명령 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궁병대의 특성에 따라 자동적으로 이번 임무가 끝날 때까지 그가 임시로 리더의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다.

 방금 전 관리사들의 자긍심을 자극하는 켈젠의 말과 알렉이 죽은 이상 그가 자동적으로 리더의 역할을 맡게 된다는 암묵적인 규칙을 떠올린 그들은 곧 인간적인 감정을 죽이며 기계적으로 명령에 복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침착한 태도로 주변을 경계하며 본래 리아를 잡아넣으려 했던 흑관에 알렉의 시신을 눕혔다.

“자네들이 긍지 높으신 덕택에 목숨을 건졌군. 고맙다고 해야 하나.”

 공격적인 천성이 드러난 탓일까, 아니면 다른 의도한 바라도 있었던 걸까. 가만히 있으면 좋았을 것을 베르나르도 신부는 물끄러미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불쑥 한 마디 내뱉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궁병대원들이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몸을 돌리며 석궁을 겨누었으나 켈젠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만 둬. 광신자의 도발에 넘어가 귀중한 미래를 버리지 마라.”

“호오, 난 꽤나 진심인데 말이지.”

 명백히 비웃고 있는 신부의 얼굴을 노려보며 켈젠은 상처 입은 호랑이처럼 이를 갈았다.

“명을 재촉하는군. 걱정마라. 처음부터 네놈을 그냥 놓아줄 생각은 없었으니까.”

 켈젠의 얼굴에는 명백히 분노와 굴욕감이 떠올라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정원관리사의 자긍심을 내세우는 것으로 속으로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제하고 있었으나, 스승의 시신을 안치하고 나자 모든 제약이 풀린 것이다. 그는 손짓으로 다른 궁병대원들을 내보낸 다음 격정을 드러냈다.

“그는 분명 선량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능한 스승이었지.”

 간결하지만 증오에 불타는 언어가 용광로에 녹인 쇳조각처럼 부글부글 끓으며 켈젠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보통 평생 둘 이상의 제자는 두지 않는 관리사들의 오랜 전통 속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는 가히 부모 자식 간에 비유할 수 있었다. 비록 알렉은 단 한 번도 켈젠에게 따스하게 대해준 적이 없었으며, 켈젠 또한 알렉의 방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나, 자신에게 원력이학의 정수를 전수해주고 이 자리에 있기까지 도와준 스승의 고마움은 뼛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모든 건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눈치 챈다고 했던가. 눈앞에서 어이없이 스승이 패배해 죽고 그 원수에게 조롱까지 당하자 평소보다 격한 감정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긍지 높은 관리사이자 냉철한 궁병대의 일원이라는 점은 결코 잊지 않았다.
 켈젠은 분노에 미쳐 날뛰는 대신 조용히 원력변환식을 구성했다.

“Ashes to ashes, dust to dust.”

 켈젠은 오히려 눈앞의 신부에게 어울릴 만한 유명한 격언을 입에 담으며 마력을 증폭시켰고, 그의 손에는 황색의 진형이 기묘하게 일그러진 문양으로 빛나고 있었다.

 대개 진형이라는 것은 원력변환식이 구체화된 모습으로 술자의 마력을 증폭시키거나 규칙재현의 발생을 용이케 하는 성질을 지닌다. 그러나 켈젠이 사용하는 진형은 기존의 증폭제의 성질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마치 강인하게 짜여 진 거미줄을 걷어내듯이 진형을 움켜쥔 채 그대로 폐빌딩의 벽면에 집어던졌다.

 쉬익. 황색의 진형은 벽에 닿자마자 뭔가 타들어가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늘어났고, 그것은 잘못 풀린 실타래처럼 사방팔방으로 길쭉하게 뻗어가기 시작했다. 가는 실처럼 변한 진형의 잔해는 잔뜩 흥분한 사람의 팔뚝에 돋아난 징그러운 힘줄마냥 건물 전체를 장악하고는 한번 크게 빛난 후 모습을 감췄다. 그러자 곧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강한 진동과 함께 건물의 벽에 금이 가며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신부는 저주의 영향이 몸 구석구석을 지배해 이제는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며 말했다.

“머리를 썼군. 풍화작용을 급속도로 촉진시킨 건가.”

“이거라면 널 직접적으로 죽인 게 아니니 상관없겠지. 탈출하기 전까지는 시간이 충분히 있었으니 거기서 나오지 못한다면 순전히 네놈의 책임이다.”

 켈젠은 잔뜩 비웃음이 걸린 얼굴로 신부를 경멸했다. 교회의 사도는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은 모양이지만 그런 안일한 생각이야말로 제 무덤을 판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건 저주는 결계가 깨지기 전에 시도되었으며 기록에 남는 성질의 술법도 아니다. 또한 자신은 단순히 무너진 건물에 손을 대었을 뿐이며 신부는 거기에 말려든 것뿐으로 건물이 완전히 붕괴하기 전까지는 약 1분 정도의 여유가 있을 것이다. 십자죄인의 신부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았음에도 그 시간 안에 탈출하지 못한다면 그건 순전히 본인의 책임이니 이쪽에 추궁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도할 시간은 충분히 주었다. 마지막까지 생애를 반추해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겠지.”

 켈젠은 끝까지 잔뜩 비꼬는 말을 남기며 유유자적하게 밖으로 나갔다. 무너지는 건물 근처에 같이 있으면 위험할뿐더러 신부의 죽음을 지켜볼 의리 따위는 없다. 그는 이제부터 바쁜 몸이다. 수습한 스승의 유체를 모시고, 의원들에게 보고도 해야 한다. 확실히 정해진 건 없지만 아마 차기 궁병대의 리더는 자신이 될 터. 이런 곳에서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하하… 조금, 늦었나…….”

 살아있는 감각을 서서히 먹어치우는 저주의 고통에 신음하며 신부는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그는 자신이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무리 불가침의 맹약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덫에 걸린 늑대처럼 무력한 자신에게 그 여우 놈들이 아무 짓도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차피 성가대의 동료들이 이곳까지 도달하려면 꽤 시간이 걸린다. 쥐 죽은 듯이 얌전히 있거나 최대한 교섭을 한다고 해도 그때까지 그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멀쩡한 상태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손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길은 얼마 없다. 그는 하다못해 도발에 넘어간 상대가 자신을 ‘문제 되는 방법’으로 죽여 조직에서 쫓겨나는 신세라도 되게 할 생각이었지만, 결국 그 뜻조차 이루지 못했다.

 쩌적. 벽과 천정의 균열이 더욱 커져간다. 저번 재앙의 영향으로 몇 년 전부터 부담을 안고 있던 이 폐빌딩은 앞으로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이대로라면 신부는 꼼짝 없이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 죽을 것이다. 허나 그는 당장 압사할 위기에 처해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는 기색 하나 없이 가볍게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후우, 이걸로 끝인가. 마지막은… 인간이란 이름의 악마를 퇴치했군.”

 방금 전까지 불쌍한 노인을 위해 동정하던 시선은 온데간데없이 신부의 얼굴은 철저히 조각상 같이 엄숙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비록 저주의 영향으로 촉각은 반쯤 사라졌고 시야는 침침하며 귀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끝까지 악마퇴치사제의 정신을 견지했다.

 이는 그가 특별히 강하다거나 인간적인 감정이 적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앞두고 마음을 다잡고 있는 것이었다. 악마라는 재난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사고방식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침착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흔들림 없는 수면처럼 안정된 신부의 마음을 뒤흔드는 은색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뭐하는 건가요, 베르나르도 신부. 빨리 움직이세요.』

 높은 종탑 위에서 울리는 종소리처럼 맑은 음색의 주인공은 바로 성녀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완전히 파악한 파티마의 눈이 영자통신을 보낸 것이다.

『당신이라면 금방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아직 건물이 붕괴하려면 시간이 더 걸려요. 빨리 탈출하세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다는 성녀의 목소리는 완전무결한 신을 은유하기라도 하듯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화려하면서도 차가운 빛깔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마지막이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저주에 당해 기운이 빠진 탓일까. 신부는 평소에 그렇게 싫어하던 성녀의 영자통신에 조는 듯한 나른한 기분으로 별다른 거부감 없이 응했다.

『무리야. 뛰기는커녕 일어날 수조차 없어. 이미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말이지.』

 얼마 뒤 저주의 효력이 사라지면 금세 나을 증상이긴 했으나 지금은 그 짧은 시간이 목숨을 좌우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는 다면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신부는 그대로 생매장되고 말 것이다.

『곧 성가대가 그곳에 도착할 겁니다. 최대한 빠져나오려 노력하세요. 일단 살아 있기만이라도 한다면 치료는 가능해요.』

 그렇다. 신부의 수많은 타박상도, 그 잘린 팔도 일단 본청에 돌아간다면 적절한 조치를 받을 것이다. 피부의 완전재생까지는 불가능하겠지만, 블라시오 주교가 의수 정도는 만들어 주리라. 어쨌든 교회의 기술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특화되어 있다. 설령 사지가 뜯겨나간다 하더라도 뇌와 심장만 무사하다면 어떤 형태로든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걸을 수 없다면 기어서라도, 기어갈 수조차 없다면 이빨로 땅을 물어서라도 밖으로 몸을 빼라고 성녀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신부의 대답은 싸늘하기만 했다.

『사양이다. 그런 짓까지 하면서 살아남을 이유 따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군.』

『예……?』

 새하얀 물음. 그들이 대화를 나눈 이래 처음으로 성녀의 감정에 변화가 보였다.

『너도 알다시피 내 목적은 딱히 복수를 한다거나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게 아니야. 단순히 재앙을 일으킬 악마를 막는 것, 그것만을 위해 살아왔다. 그런데 더 이상 그 일을 만족하게 할 수 없다면 마지막 임무를 성공했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며 눈을 감는 편이 훨씬 좋겠지.』

 신부의 음색은 투명했다. 거기에는 어떤 망설임도 미련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상대방의 기분이 그대로 전해지는 영자통신에서는 그의 말이 한결 거짓 없는 사실임이 잘 전해졌다. 진실로 신부는 악마퇴치를 할 수 없는 몸이 된다면 이대로 죽어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왜 그렇게 자신을 쉽게 내던지는 거죠?』

 파티마의 눈이 내뱉는 목소리에는 물기가 섞여 있었다. 만약 지금 다른 십자죄인의 사제들이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누구나 깜짝 놀랐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성녀는 지상 누구보다도 하늘의 뜻에 가까운 존재로 인간다운 감정 따위는 이미 버렸다고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는 수많은 다른 십자죄인의 사제들과 통신을 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베르나르도 신부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는지, 그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고아원에 있던 시절이랑 전혀 변하지 않았군. 파티마의 눈을 계승하기로 한 이상 울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근데 이렇게 쉽게 감정을 내보여서야 원…….』

 신부는 한탄하면서도 어딘가 친근감을 담은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곧장 볼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그, 그건 당신이 함께 있어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나도 따라가기로 결정한 거잖아요! 그 때 끔찍한 피바다 속에서 당신이… 오빠만 살아남았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그날, 악마에게 들린 학사가 칼을 휘둘러 고아원의 모든 사람을 살해했을 때, 분명 베르나르도 신부는 혼자 살아남았다. 하지만 당시 또 한명, 수녀의 심부름으로 약국에 반창고를 사러 간 덕분에 그 끔찍한 현장에서 몸을 피한 아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마찬가지로 고아인 처지에 두 살 아래로 그를 오빠라 부르며, 잘 따르던 또 한명의 소녀가…….
 볼멘 목소리는 곧 울먹임으로 바뀌어 갔다.

『오빠가… 오빠랑 함께 있고 싶어서 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거란 말이에요.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이름도, 심지어 세월까지 버리고……!』

 악마가 저지른 살해의 현장을 목격한 두 사람의 처지는 곤란했다. 단순히 기억을 지워버려도 되었지만, 그 둘에게는 엄청난 재능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 소년은 드물게 성경을 다룰 수 있는 권능자였으며, 한 소녀는 파티마의 눈을 계승할 수 있는 인자를 품고 있었다.

 둘에게는 이대로 세상의 온갖 악마와 싸우며 가시밭길을 헤쳐 나가는 십자죄인의 일원이 될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을 잊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될 것인지 고려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별로 의미가 없는 선택지였다. 충격이 컸던 소년이 어떤 망설임 없이 피의 전장을 선택해버리자 가족을 잃고 오로지 그 소년만을 흠모하던 소녀 또한 내키지 않아하면서도 함께 있기 위해 같은 길을 택한 것이다.

『그거 미안하게 됐군. 분명 널 그렇게 이끈 건 나의 업이 되겠지. 하지만 그 후의 인생은 네가 직접 쌓아가는 거다. 네 업은 네가 지도록 해.』

『오, 오빠! 아, 아니 베르나르도…….』

 치익. 신부는 돌연 차갑게 내뱉으며 억지로 영자통신을 닫아버렸다. 파티마의 눈을 중심으로 성녀가 가진 기적의 힘을 이용해 방대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으로 서로 연락이 가능한 영자통신은, 본래 그녀 이외에는 함부로 여닫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영감과 함께 영력의 조작에도 뛰어난 소질을 가진 베르나르도 신부는 일시적으로나마 영자의 흐름을 방해할 수 있었다. 물론 성녀의 힘이라면 몇 분 이내에 다시 회선을 열 수 있을 테지만 그때 자신은 이미 이 세상에 없으리라.






 사념 속에서 이뤄졌던 만큼 대화는 짧았으나 그 사이에도 빌딩은 상당 부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쿵. 이윽고 저 위에서 거대한 덩어리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팔 하나를 재물로 바친 효과가 아직 있었는지 돌덩어리는 아직 내게 직접 떨어지는 않았지만 깔려죽는 건 시간문제다.

“하하, 왜 자신을 내던지느냐고…….”

 방금 전 성녀와의 대화를 반추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내던질 자신이라 할만 게 아직 내게는 남아있단 말인가. 자연스럽게 십자죄인에 들어온 후 싸움과 훈련으로 점철된 15년의 세월을 돌아보았다. 과연, 그 나날은 더없이 충실한 시간이었던 동시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일상이기도 했다. 오로지 악마의 멸절만을 바라며 전투기술을 갈고닦고 세상을 헤집고 다녔던 세월들. 악마가 사람을 해치는 현상이라면 자신은 재앙이란 이름의 파도를 막아내는 방파제에 지나지 않았다.
 뭔가 남은 건지, 아니면 남지 않은 건지. 몽롱한 의식 속에 어떤 물음이 들려왔다.


- 죽을 거야?


 글쎄, 지금 이 상태라면 무슨 마음을 품던지 간에 죽고 말겠지.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온다. 단지 그것이 빠른지 늦은지 행복한지 불행한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빠르고 불행한 죽음을 맞은 사람은 슬플 것이며 늦고 행복한 죽음을 맞는 사람은 기쁠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죽는다는 건 어떻게 죽던 간에 무섭고 허무한 일이다. 순교자들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건 죽음 뒤에 영원한 삶이 약속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지, 절대 죽음 그 자체를 기뻐하며 받아들인 게 아니다.


- 살고 싶어?


 아아, 굳이 삶과 죽음 중 어느 한쪽을 고르라면 당연히 살고 싶다. 허나 곰곰이 그 마음을 되새김질 해본다. 내게는 딱히 발악하면서까지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이제 와서 생각해 본다. 아니, 지금이니까 생각해 보자. 난 대체 여태까지 왜 이 목숨을 부지해왔단 말인가. 물어볼 것도 없지. 내가 추구해왔던 건 명백하다. 바로 악마를 퇴치한다는 것. 그렇다면 그 행동원리는 복수인가? 동정인가? 집착인가? 공포인가? 틀리다, 어느 쪽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잠깐, 이제야 떠오른다. 나는 그저 싫었던 것이다. 그 아이가 나와 같은 처지가 되는 걸 원치 않았다. 몸을 움직일 때 살랑거리는 긴 검은 머리가 예뻤고, 나를 바라볼 때 빠져들 것 같은 갈색 눈동자가 아름다웠으며 과자를 주었을 때 웃는 얼굴에 파이는 보조개가 마음에 들었던, 그리고 나를 오빠라 부르며 강아지처럼 따랐던 그 아이가 행복하게 살아갈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악마라는 재앙을 이 세상에서 소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소녀는 변했다. 머리카락은 북쪽의 설원처럼 은빛으로 물들었고, 악을 몰라 무구했던 눈동자는 모든 걸 바라보기 위해 만화경처럼 다채롭게 빛났으며,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미소를 보여주지 않을뿐더러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그 아이는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모든 걸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돌아와 여러 가지 진기한 이야기를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번 성녀로 떠받들어진 이상 거기서 탈출한 길은 없으며 그 아이는 죽기 직전까지, 그리고 그 눈을 누군가에게 계승하기 전까지 이름마저 버리고, 늙지도 않은 채 ‘파티마의 눈’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목숨이다. 말하자면 그 애는 유일하게 내 앞에서만 자신을 자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자마자 나도 모르게 흙을 불끈 움켜쥐었다.


- 그 소원, 들어줄게.


 들리지만 이해할 수 없는 언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것은 더없이 슬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없이 안도하고 있는 기묘한 속삭임이었다. 전부터 존재해왔던 모든 걸 기억하면서도, 또한 앞으로 다가올 것들을 위해 모든 걸 버려야 하는 숙명적인 순환장치.

 소원이란 무상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하나 빼앗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아직 닿지 않은 미래 중 하나를 양식으로 삼아 앞날을 개척하는 무한의 능력. 확실하게 대가는 받아가지만 크게 문제될 건 없다. 안개가 잔뜩 낀 숲에서 바라는 건 낭떠러지로 향하지 않고 제대로 밖으로 나가는 것이지, 결코 편한 길을 찾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눈이…….”

 어떤 밝은 빛줄기가 오랜 기도를 마치고 창문을 열었을 때 내리쬐는 햇빛처럼 눈을 찌른다. 내 시야는 10년을 넘게 구석진 방안에 갇혀 살다가 갑자기 드넓은 바다가 펼쳐진 해안가에 던져진 사람마냥 확 트였으며 팔 다리는 시합을 앞두고 긴장한 경주마처럼 억제할 수 없는 힘이 감도는 걸 느꼈다.

 누군가의 한 마디에 의해 날 속박하고 있던 칙칙한 저주는 사라졌으며 다시 한 번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일찍이 사람은 그것을 두고 신의 힘이라 불렀던가. 나는 더 이상 깊게 생각하는 걸 그만두고 정신없이 빌딩 밖으로 뛰쳐나왔다.






 오늘따라 보름달은 유난히 둥글고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건 지상만물을 감싸기 위함이 아닌 스스로를 치장하기 위한 빛이었기에 섬뜩하고 차가웠다. 밤 아래 벌어지는 모든 일을 보고 있지만 전혀 간섭할 수도, 그럴 생각도 없는 달은 철저히 방관하며 오로지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뽐낼 뿐이었다.

 달이 세상에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는 밤은 으레 싸늘하고 고독하기 마련이지만 도리어 그런 분위기를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도 세상에는 존재했다. 굳이 말하자면 베르나르도 신부가 그랬다. 그는 이렇게 철저하게 하늘에게 외면 받는 시간이야말로 긴장 없이 쉴 수 있기에 좋아했다.

 그는 전력을 다해 피로도 개의치 않고 지금까지 자신이 있던 빌딩을 바라보았다. 비록 낡았지만 한동안 든든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던 그 폐건물은 완벽하게 무너진 상태였다. 켈젠의 풍화촉진 술법은 너무 과했는지, 빌딩은 무너진 형체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잘게 부서졌다. 콘크리트 건물의 잔해는 붕괴되었다기보다 꼭 모래성이 허물어진 것처럼 보였다.

“또 살아남았군…….”

 신부는 마른 낙엽위에 털썩 하고 주저앉은 후 중얼거렸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건물로부터 200미터는 떨어진 숲의 입구였다. 몇 초 안 되는 사이에 어떻게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상식적으로는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 자신의 힘이 아니며 뭔가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작용한 결과임에 분명했다.
 신부는 크게 한숨을 내쉰 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숲을 돌아보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그냥 사라질 거냐. 잠깐 이야기를 나누어도 크게 문제될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놀라울 정도로 날카로운 감을 가졌네. 하지만 멋을 모르는 사내야. 이대로 사라지는 편이 운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무뚝뚝하게 되받는 말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긴 갈색머리를 기른 어떤 여자였다. 어쩐지 그녀의 눈매는 화난 사람처럼 살짝 올라가 있었고, 그 위에 걸친 반무테 안경은 그것과 어우러져 더욱 그녀의 인상을 차갑게 보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기에 전체적으로는 무섭다기보다는 자신감에 넘친다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신부는 눈길을 돌려 새하얀 달을 바라보며 말했다.

“생명의 은인을 그냥 돌아가게 하는 것도 멋없는 일이지. 당신이 바로 그 소문의 전능자군. 이 마을에 숨어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 당당히 돌아다닐 줄은 몰랐는데. 우리야 그렇다고 쳐도 현인회의 개들은 당신은 눈에 불을 켜라 찾고 있는데, 괜찮나?”

“상관없어. 어차피 내가 원하지 않으면 절대 그 사람들은 나를 볼 수 없을 테니까.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고.”

 신부는 킥킥 웃었다.

“과연, 썩어도 준치. 능력을 봉인해도 만능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는 건가. 이래서야 얕잡아 보일 만도 하군.”

 뒤에서 살짝 숨을 삼키는 기척이 들렸다. 그러나 곧 동요하는 기색은 사라졌고 여자는 전과 다른 없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알고 있었네. 천년의 경험을 가진 신부님의 눈에는 이것저것 다 보이는 모양이야?”

“만물을 통찰하는 건 내가 아닌 우리 성녀의 역할이지. 난 그저 추측했을 뿐이다. 전능자가 가진 힘은 말 그대로 올마이티,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이룰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이지. 사람이 감정을 가지고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채 살아가는 이상 반드시 마음에 안 드는 일, 혹은 이루고 싶은 일은 생겨난다. 아무리 강철의 의지를 지녔다고 해도, 또는 아무리 소극적인 선인(善人)이라 하더라도,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면 몇 년이고 잠자코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어. 하지만 당신은 5년이 넘도록 아무런 표상도 보이지 않고 조용했지. 그건 당신이 죽었거나, 능력을 잃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렇게 살아있고 능력도 잃지 않았어. 그렇다면 뭔가 스스로 제한을 걸었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지.”

 여자는 눈매를 가늘게 뜨며 웃었다.

“잘도 거기까지 짐작했네. 그럼 그렇게 잘 알고 계신 신부님께서 날 멈춰 세운 이유는 뭐지? 별로 감사를 표하기 위해 부른 건 아닌 것 같은데.”

 신부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이다. 사실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지. 어째서 날 살린 거냐.”

 여자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신부를 바라보다가 질렸다는 듯이 실소를 하면서 말했다.

“정말 모르는 거야? 생각보다 중증이네.”

“미안하군. 하지만 잠깐 생각해봤지만 도무지 이어지지가 않으니 어쩔 수 없어. 당신은 이번 일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지. 내가 보지 못한 곳에서는 어떤 행동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대국을 좌우할 만한 간섭이 아니었다는 건 확실해. 처음에는 당신이 이 마을에 없거나 모종의 이유로 능력이 사라졌기 때문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지. 아니면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다거나 오히려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을 즐기는 악취미일 수도 있고. 그러나 지금 일로 봐서는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군. 그렇다면 더욱 알 수가 없게 돼. 이 일로 죽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아. 그런데 이제 와서 굳이 날 구해준 이유가 뭐지? 말할 수 없는 거라면 더는 캐묻지 않겠다만, 괜찮다면 이야기해주지 않겠나?”

“…….”

 여자는 반쯤 눈을 감고, 반쯤 입가를 비튼 채 기가 막힌 표정으로 신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신부는 몸을 돌고 앉은 자세 그대로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곧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불만스럽게 툭 내뱉었다.

“그건 당신이 살고 싶어 했기 때문이야.”

“그게, 무슨 뜻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문이 들려오자 그녀는 “정말 꽉 막혔네.”라고 투덜거리며 신부에게 다가가 그 옆에 앉았다. 그녀는 다리를 모으고 고개를 들어 신부처럼 달을 바라보며 말했다.

“잠깐 옛날이야기를 할까? 5년 전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당신들도 대충 파악하고 있지?”

“최소한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천재지변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그때, 난 많은 걸 잃었어. 추억이 가득 쌓인 장소도, 친한 친구들도, 소중한 사람도 전부……. 모든 일이 끝난 후 나는 지쳤고, 더 이상 이런 일을 겪지 않도록 내가 가진 힘을 버리고 싶었지. 하지만 못하는 게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능력도 스스로 심장을 멈출 수 없는 것처럼 자기 힘을 없앤다는 선택은 불가능했어. 그래서 나는 내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몇 가지 명령을 내린 후 마지막 명령을 내렸지. 그건 바로 상대방의 소원이 있기 전까지는 절대 내 의지만으로는 힘을 사용할 수 없다는 금지어였어.”

“상대방의 소원에만 반응할 수 있다고? 그렇다면 나는…….”

 그녀는 망연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신부의 얼굴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

“그래, 이제 내 힘은 더 이상 나 혼자만으로는 쓸 수 없어. 상대방에게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고, 내가 그걸 수락해야지만 기적이 일어나. 즉, 당신이 무슨 이유에서건 살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거야.”

“음… 그건 충격적이군…….”

“왜? 혹시 ‘나는 삶의 갈망에서 벗어난 성인군자’라는 바보 같은 자만이라도 하고 있었던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단지…….”

 그렇다면 난 그 녀석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는 게 되지 않냐, 라고 말하려 하다가 신부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말해봤자 상대방은 어리둥절할 게 뻔하며 그렇다고 자세히 설명까지 해가며 남에게 밝힐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만 쑥스러워진 신부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보다 상대방의 소원으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면 어째서 이번 일을 해결하지 않은 거지? 제6현상을 없애고 싶은 녀석은 잔뜩 있었을 텐데 말이야. 네가 한 마디만 했다면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지 않았겠지.”

 그럴 의도는 딱히 없었지만 신부의 말에는 뼈가 들어 있었다. 으레 힘을 가진 자는 거기에 걸맞은 책임을 요구받게 마련이다. 물론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자유지만 마찬가지로 힘을 가진 자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을 때 비난을 할 수 있는 것도 세상 사람들의 권리인 것이다.
 여자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나도 안타까웠어. 단순히 살고 싶다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죽는지도 몰랐으니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마음도 없었지. 그리고…….”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슬픈 기색이 감돌았지만 어딘가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이 빛이 났다.

“무슨 일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누구도 하늘에서 가만히 해결해주겠지, 같은 마음 따위는 품지 않고 말이야. 비록 그 때문에 사태가 더욱 커지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그래도 난 그 사실이 기뻐. 그런 마음이 있는 한 사람은 절대 멈추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도 자랑스럽게 말하며 한여름에 꿈꾼 환상처럼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고, 신부는 한참 뒤에야 그 사실을 알아채고는 크게 그리고 뭔가 즐거운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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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01.03 21:47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일견 일방적인 헌신과 희생의 미덕이라는 가치 하나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투사해내는 듯 보였던 십자죄인의 사제와, 그 조직의 정점에 있는 성녀마저도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는 군중 속의 고독에 슬퍼하며 때로는 누군가의 온기를 갈구하는 한명의 인간이었던 것이로군요.

    게다가, 무려 드높고도 고귀한 파티마의 성녀가 과거 베르나르도 신부의 소중한 정인(情人)이었을뿐만 아니라 단지 그와 함께 살아가는 일상 속의 행복을 위하여 무겁고도 무거운 중책을 떠맡게 되었다는 충격적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그러한 그와 그녀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서, 어쩌면 파티마의 성녀에게 있어서 베르나르도 신부란 덧없는 신의 단말로 종속되어버린 자신에게 진정한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단 하나의 존재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그녀의 희생을 뒤로 한 채, 그저 오롯한 개인의 의지와 독단으로서의 자기 합리화 아래 그 어떠한 석별의 한마디 없이 그녀의 곁을 떠나가려 했다니...

    그 모습으로부터 왠지 모를 ★나쁜 남자★의 포스가 느껴지기도 하더라구요; 아하핫~ +_+);; 【 왠지 이제 본청에 돌아가면 성녀에게 단독 면담 형식으로 불려가서 등짝을 마구 맞을 것만 같...;; 】


    에에, 그리고 한편으로는 오로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다시는 악마의 내습(來襲)에 의한 절망과 상실의 아픔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또한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그녀의 미래를 위하여 잠시도 쉬지않고 달려온 여정의 끝에서... 베르나르도 신부 역시 이제는 그동안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조금은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상념과 함께, 왠지 이번 화에서 두 사람이 주고 받았던 영자 통신의 대화로부터 무엇인가 휴대폰으로 사랑 싸움을 하는 커플의 모습이 연상되어서 순간적으로 뿜을 뻔 했답니다아아아~;; (으아니, 잇살람이?;)


    아무튼 이 구제 받을 길 없는 쿨가이(...)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했던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마침내 한조각의 진심을 떠올리고, 이를 재차 확인하기까지 했으니 비록 한쪽팔을 잃기는 했을지언정 파티마의 성녀에게 있어서도 나름 관계 발전의 희망은 얻은 셈이로군요. 후후후...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01.05 00:13 신고 address edit/delete

      옙, 말씀처럼 베르나르도 신부와 파티마의 성녀는 본래 같은 고아원 출신의 '평범한 아이들'이었네요. 그것이 갈고닦은 혹은 계승 받은 힘과 세월의 흐름에 의해 많은 변화를 겪긴 했지만, 아직 그 깊숙한 저변에는 평화로웠던 시절의 기억이 자리잡고 있어요.

      특히 일상과 비일상의 괴리로 인한 고생은 성녀 쪽이 더 심하다고 할 수 있네요. 베르나르도 신부의 경우는 온전히 본인 스스로의 의지로 이 길을 택했다고 볼 수 있지만, 성녀의 경우는 그를 위해 따라온 면이 강하니... 물론 신부 역시 악마를 없애기로 결심한 가장 깊숙한 기원은 그녀를 지키기 위함이었으니 결국 잘 어울리는 한쌍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에요^^;;

      두 사람의 영자통신을 연인들의 핸드폰 사랑 싸움에 비유하신 것이나, 본청에 들어가 등짝을 맞을 것 같다는 등의 말씀에서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서스럼 없이 친밀한 둘의 관계를 그리는 것도 참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언젠가 그런 외전 스토리를 써본다거나 등등 상상의 나래가 활짝 펼쳐지는 기분이에요>.<

      확실히 이래저래 심하게 구른 신부지만, 아마 미래에도 크게 변하는 점은 없을 듯^^;; 십자죄인의 세력이 축소되는 다른 현대시점 세계관에서도 베르나르도 신부만큼은 강철 같은 의지로 변함 없는 활약을 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기도 해요. 그 명성은 미래에도 전해져 신부의 의지를 닮고 싶은 자들이 그 이름을 빌리기도 하는데, 언젠가 그런 내용도 한번 써보고 싶네요~


      여담으로 작중 파티마의 눈이나 진실/거짓을 밝히는 눈 등에서 언급되는 '계승'은 당시 재미있게 읽었던 강풀 작가님의 '아파트', '타이밍' 등에 나오는 저승사자 능력의 계승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기도 해요. 그저 이야기를 쓸 때마다 빚진 작품들이 많아 감사하고도 송구스러울 따름이네요^^;;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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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장 / 그대를 위한 중창곡Ensemble (2)


 테두리를 잃어버린 혼들이 폭주해 날뛰기 시작한다. 잡아먹힌 불우한 이들의 사념이 자신들을 구속하고 있던 종말현상의 사슬이 벗겨지자마자 생전의 모든 기억을 되살리며 울부짖는다. 하루하루 작은 즐거움에 작은 희망을 걸고 근근이 살아가던 이들에게 이러한 죽음은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 그들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삶을 빼앗기고 말았다. 뭔가 해보기도 전에, 뭔가 하는 도중에, 이제야 뭔가 해냈다고 실감하는 순간에, 그들의 세상은 어이없이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인생은 언제나 부조리하다. 납득할까 보냐. 이미 저승에 발을 들이민 이상 되돌릴 수 없다. 잠자코 있을까 보냐. 우리를 덮친 건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강대한 폭력이다. 용서할까 보냐. 아무리 원통함을 호소해도 바뀌는 건 없다. 이 한을 누군가에게 풀기 전까지 물러날까 보냐!

 종착점에 도달하기 전에 억지로 삶이란 레이스에서 끌어내려진 영혼들의 아우성이 파도처럼 몰아쳐온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도중에 끝나버린 슬픔, 괴로움, 분노. 이 모든 감정들은 한데 뒤섞여 절대 사그라지지 않을 하나의 거대한 검은 불꽃을 피워낸다. 가지지 못한 자의 억울함을 가장 효과적으로 풀어내는 방법은 가장 반대편의 있는 자를 자신들과 같은 위치로 끌어내리는 것. 그들이 노리는 건 확연했다. 그건 앞에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소녀의 목숨이었다.

『하린, 어서, 일어, 나……!』

 리아는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외쳤다. 계속 상처를 입어온데다 무리하게 힘을 사용한 그녀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아무리 종족 특유의 괴물 같은 회복력을 되찾았다 하더라도 본래의 체력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더 걸린다. 그 전까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소리를 치는 것뿐이다.
 허나 하린은 기절했는지 바닥에 흐트러진 옷자락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으……!』

 리아는 이를 악물며 땅바닥을 기었다. 초조함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건 자신에게 마음을 준 소녀만은 반드시 지켜 보이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그동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인성-피-을 내보낸 후 잠시 다른 존재처럼 보였던 그녀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을 추구해온 그녀는 더 이상 남에게 받은 인성의 도움이 없이도 지금까지 형성해온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마음만으로 이뤄지는 건 없다. 리아가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지금의 그녀는 무력했다. 곧 악령화한 수백의 망자가 하린에게 달려들어 육체는커녕 영혼조차 남겨두지 않고 먹어치울 것이다. 마법을 잃고, 종족의 힘도 회복되지 않은 리아가 취할 수 있는 수단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린. 갈 곳을 찾지 못한 채 차갑게 식어 방황하는 자신에게 또 한 번 온기를 나누어준 소중한 사람. 그 소녀가 죽는다면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 그것이 우정이든 애정이든 사랑이든 집착이든 그런 건 알 바 아니다. 중요한 건 그녀는 더 이상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다는 사실뿐이었다.

『아…….』

 절망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했던가.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린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리아의 눈동자가 서서히 빛을 잃기 시작한다.
 망자들의 무리가 내뻗은 말라붙은 손길이 하린에게 닿으려는 순간 땅이 열리며 보랏빛과 함께 뭔가 수많은 붉은 것들이 튀어나왔다.

『설마……!?』

 순식간에 땅을 뒤덮은 건 붉은 꽃잎의 피안화였다. 버드나무 가지처럼 긴 줄기를 늘어뜨리며 잘 익은 석류가 탐스럽게 속을 내보이듯 화사하게 피어난 붉은 꽃의 무리는 확연히 이 세상이 아닌 저편의 향기를 가득 물고 있었다.

- 건너지 말아야 하는 강을 건너고 말았으니 이를 어찌 하리오. 한번 건넌 이를 되돌리는 뱃사공은 없으니 이를 어찌 하리오.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구슬프고 느릿느릿하면서도 어쩐지 방울처럼 높게 들리는 아름다운 음색이다. 두 가지 상반되는 요소가 어우러진 진혼가는 아내를 잃은 이생의 단소처럼 영혼을 위로하는 힘이 있었다.

- 이제 떠난 건 되찾을 수 없으니 그대 슬픔 또한 헤아릴 수 없겠소. 그 한 달랠 길 없으나 내 그대 쉴 곳 마련하오니 부디 잦아드시오.

 짧고 서글픈 단가(短歌)가 반복된다. 확실히 망자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절대 없다. 애초에 죽은 이는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으니 어떤 의미 있는 일도 해내지 못한다. 그러기에 그들을 향한 위로 또한 무의미하며 그런 행위는 산 사람의 마음을 쓰다듬기 위함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밖으로 밀려난 그들의 원망스러운 눈물은 지옥을 둘러싼 대해(大海)를 가득 채우고도 남으니 그 무한대의 한탄을 대체 누가 받아줄 수 있단 말인가. 단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란 물러날 장소를 마련해주는 것뿐. 이 노래의 주인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키이이이익! 손을 뻗어 하린의 사지를 가리가리 찢고 그 영혼을 먹어치우려 했던 악귀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질주를 멈췄다. 방울 같은 목소리가 부르는 노래는 온화한 음색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어딘가 거부할 수 없는 강인한 명령을 담고 있었다. 그건 죽음 그 자체를 용인하면서도 산 이의 경계를 침범하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는 절대적인 순리의 규율이었으며 사자(死者)인 이상 그녀의 목소리에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박사박. 멀리서 어떤 여인이 천지에 뒤덮인 붉은 꽃의 강을 다소곳이 밟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보랏빛의 선의(仙依)로 전신을 감싸고, 입가는 한손에 쥔 검은 부채로 가린 채 망자를 돌려보내는 의식의 노래를 불렀다.

 그 모습을 본 리아는 몸에 전류라도 흐른 듯이 몸을 꼿꼿이 세웠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녀는 전혀 변하지 않았으며 리아 또한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으리. 저편에 서있는 선녀와도 같은 가련한 여인이야말로 리아의 은인이자 전설적인 대마도사 중의 한명인 순성(瞬星) 산호리였다.

 획. 산호리가 노래를 그치며 부채를 휘두르자 망자 무리는 비명을 지르며 하나하나 땅에 펼쳐진 꽃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모든 죽음의 현상을 관장하는 그녀의 언동에는 거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도리에 굴복한 불쌍한 사람들의 영혼은 모든 분노와 슬픔을 잊어버리고는 한 송이의 작은 꽃과 함께 잠들기 시작했다. 영혼을 머금은 꽃잎은 새하얀 도화지에 검은 먹물을 떨어뜨리듯 찰나의 순간에 붉은색에서 보라색으로 탈바꿈했다. 비련의 색을 담고 하늘하늘 길게 흔들리는 꽃들의 모습은 저승화라 불리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한없이 멈춰있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새 움직여 리아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산호리가 말했다.

- 근소한 차였지만 다행히 네가 지키려 한 아이는 멀쩡해. 단지 기절하고 있을 뿐이야.

『고마, 워. 난, 언제나, 당신에게, 도움만…….』

- 네가 답을 찾은 것 같아 기뻐. 그동안 많은 만남을 가져왔구나.

『모두, 당신, 덕분……..』

 5월의 산들바람 같이 스쳐지나가는 산호리의 목소리와 주위 모든 생물을 압도하듯이 울리는 리아의 음색은 대조적이었으나 조화된 악기의 연주처럼 잘 어울렸다. 실로 수백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다시 만나게 되었지만 둘 사이에 많은 대화는 필요 없었다. 서로의 눈빛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호리는 잔물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마침 이곳의 사기(死氣)가 내가 출현하기에 딱 알맞은 농도를 띤 게 행운이었어. 내 존재가 이렇게 도움이 되다니 정말 오랜만이네.

 산호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지만 리아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무수한, 어둠이… 당신에게……. 이제, 얼마나… 버틸 수, 있어……?』

 오랜 세월 동안 많은 것을 봐온 리아는 이제야 산호리의 진정한 슬픔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나타날 수 있는 곳은 반드시 생명이 사라지는 곳이어야만 한다. 억울하게 죽어가는 이가 내뿜는 사념만이 그녀를 불러낼 수 있는 촉매. 그것도 보통 죽음이어서는 안 된다. 끔찍하고, 비참하고, 잔인하고, 또한 많은 경우 수많은 생명이 단번에 목숨을 불사르는 곳에 그녀는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즉, 그녀가 보는 곳은 언제나 절망으로 가득 찬 지옥도(地獄圖). 지금이나 예전 리아를 관에서 꺼내줄 때처럼 운 좋게 사람을 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무의미한 시체유기장을 바라볼 뿐이다. 그것을 끝까지 반복해야만 하는 슬픔. 리아는 웃는 산호리의 이면에서 먹구름을 감지했다.

- 이제 그런 것도 알게 되었구나. 뭔가 감개무량한 걸. ……응. 솔직히 말하자면 난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 의식이 깨어날 때마다 마주쳐야 하는 건 무덤이고, 들어야 하는 건 단말마뿐이니. 내가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런 절망의 비가 내리는 순간밖에 없어. 오래지 않아 난 미쳐, 결국 살아있는 모든 것의 비명만을 원하는 끔찍한 존재가 되겠지.

『그, 굴레에서… 빠져나올, 방도는… 없어?』

 리아는 슬픈 눈으로 산호리를 바라보며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단 두 번뿐인 만남이라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을 되찾아준 잊을 수 없는 은인이다. 어떻게 해서든 해결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산호리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 마음은 고맙지만 손쓸 방도가 없어. 소실충동의 극의를 추구한 말로는 죽음의 현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그래도 반신(半身)은 분리할 수 있었어. 또 다른 내 자신은 내가 갖지 못했던 꿈을 찾을 수 있겠지. 그래서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산호리는 리아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가까이 다가가 입술을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 내가 미쳐버리는 그때, 내 반신과 함께 날 죽여줬으면 해. 이게 그 표식이야.

 말을 마침과 동시에 산호리는 리아의 목덜미에 작게 입을 맞췄다. 리아의 목에는 푸른색의 이상한 문양이 살짝 떠오르더니 곧 사라졌다.

- 이걸로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어.

『정말, 이걸로, 괜찮, 아……?』

- 응. 그러니 더 이상 이 얘기는 할 필요 없어. 그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지. 네가 원한다면 다시 줄게. 너희에게 물리고도 멀쩡한 인간은 나 정도밖에 없을 테니까.

 산호리는 자신의 앞섶을 살짝 풀어헤치며 리아에게 보여주었다. 다시 자신의 피를 빨아 인성을 취하라는 제안인 것이다. 리아는 그녀의 하얀 살결을 보고 순간 움찔했으나 곧 평정을 되찾았다.

『아니, 괜찮, 아… 난, 이대로… 계속, 나아갈… 수, 있어. 물론, 힘들겠지만…….』

- 그래, 그렇게 말하니 한결 안심이구나. 그 정도면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 강해졌네. 네 그런 모습을 보자면…… 아아,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시간이 부족해.

 산호리는 도중에 말을 멈추며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농도가 옅어지자 그녀도 다시금 죽음의 강으로 회귀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몸은 어느새 유령처럼 투명해졌으며 사방을 뒤덮었던 피안화의 무리도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귀찮은 일이 남았어. 넌 저 사람을 어떻게 하고 싶니?

 산호리가 손짓을 하자 방금 전까지 망자의 무리가 아우성을 치던 그 자리에 있던 꽃잎들이 흩어지며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죽은 듯이 기절해있는 그 검은 상복의 여성은 바로 가영이었다.

『살아, 있어……?』

- 그래, 네가 지키려는 작은 아이가 목숨을 건 덕분에 모두 살 수 있었어. 종말현상과 깊게 연결되어있던 저 아이까지 말이지. 필사즉생필생즉사(必死則生必生則死)라더니 정말 그 말대로구나. 아직 저 아이는 약간 힘을 가지고 있어. 이대로 둔다면 여러모로 문제가 될 가능성이 많겠지. 어쩌면 살아있는 쪽이 괴로울지도 모를 테고. 자, 어떻게 하고 싶어?

 이미 다 알고 있는지 산호리는 리아의 품속에 숨겨져 있는 은촛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가영은 제6현상의 구속에서는 풀려났으나 아직 미약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유일하게 어떤 한 영혼만이 가영의 몸과 완전히 융합되어 절대 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검은 안개에 오염된 그 영혼은 얼마간 힘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가영을 이대로 놔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가영이 정신을 차린 후 자신이 저지른 짓에 죄책감을 느낀다면 자살하거나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반대로 어떤 가책도 느끼지 못한다면 남은 힘을 가지고 규모는 작을지언정 또 다른 비극을 자아낼 수도 있다.

 레오 신부가 건네준 이 은촛대는 찔린 상대의 모든 삶의 의지를 빼앗아 어떤 술법으로 무장하고 있든지 이윽고 죽음으로 몰아넣는 궁극의 자기붕괴 촉진제다. 확실히 이걸 사용한다면 가영은 틀림없이 폐인이 될 것이며 모든 걱정은 사라질 터였다.
 리아는 검은 안개의 영양분으로 사라진 수백의 사람들을 떠올리고, 두 눈을 잃은 하린을 바라본 후, 조용히 그러나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당신은… 예전의, 내게… 살라고, 말했어……. 후회도, 슬픔도, 속죄도, 그 무엇도… 살아있어야, 할 수, 있다고……. 그러니, 이제는, 내 차례… 난, 저 가영이란, 여자가… 답을, 찾기를… 바라……. 살아가면서, 언젠가.』

 그 말에 산호리는 점차 희미해지는 몸만큼이나 희미한 미소를 지은 후 마침내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리아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으며 어딘가 살짝 가벼운 기분이 들었다. 아직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이 잔뜩 남아 있었지만 어떻게든 짊어지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리아는 지친 몸을 이끌며 정신을 잃고 쓰러진 하린에게 다가가 그 작은 소녀를 부드러운 손길로 안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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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3.12.30 16:54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그토록이나 많은 슬픔과 상실을 경험하고도 끝내 그녀에게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해주던 단 하나의 특질마저 포기해야 했건만, 역시나 리아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로군요.

    분명, 그동안 일상 속에서 쌓아온 찰나의 기억들이 쌓아올려져 이루어낸 필연의 결실이었던 것이겠지요.

    그러고보면 리아에게 있어서 하린이란 허무와 고독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에 어떠한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희망의 등불이자 이정표로서, 그녀와의 첫 만남이란 흡사 무채색으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빛을 잃지 않은 채 고고하게 흔들리는 이상의 지향점이나 마찬가지였을테니 말이예요. (왠지 이번 화에서 묘사해주신 리아의 과거 회상 장면을 보면서 그러한 느낌을 받았답니다)


    아무튼 예비된 운명의 해후를 통하여 다시금 새로운 구원을 받아, 이제는 하린과 함께 서로를 의지하며 또다른 미래를 향해 걸어나갈 일만 남은 셈이로군요.

    틀림 없이 그녀들의 미래에는 수많은 고난과 역경이 기다리고 있을테지만, 동시에 이 두사람이라면 충분히 웃으며 헤쳐나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잠시 미소를 지어보기도 했답니다.

    더불어, 지금 리아가 과거의 자신을 투영하며 선택한 이 작은 배려의 행동이 향후 다가올 결착의 순간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되리라는 일말의 예감이 들기도 하고 말이예요.


    부디, 이 비익연리(比翼連理)의 커플(!) 앞에 평온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바라고 또 기원해봅니다~ :D


    덧 - 역시나 저승의 강과 이를 인도하는 망자의 뱃사공이란 여러모로 매력적인 신화적 요소인 것 같아요!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3.12.31 11:42 신고 address edit/delete

      말씀처럼 그동안 쌓아올린 리아의 모든 것들이 산호리(인간)의 피에 의존하지 않고도 그녀가 인간으로서의 초상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네요.

      이 부분은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결국 인간을 인간으로서 결정 짓는 것은 생물학적인 특성보다는 그 초상을 좇는 자세에 있다고 할 수도 있을 듯싶어요.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제대로 '살고 있지 않은 자'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다소 과격한 생각으로도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요^^;;

      이 부분은 퇴고를 하며 문득 애니메이션 'Psycho-Pass'의 한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어요. 후반부 상상 속의 대담에서 마키시마 쇼고는 스스로의 의지에 의하여 행동하지 않는 자들은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에 반해 아카네는 인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며 살면서 노력하면 언젠가는 누구나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요.

      개인적으로는 마키시마 쇼고의 행동이 영화의 살인마 직소처럼 극단적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의외로 둘 다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두 사람 다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무언가가 있고,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의 생각이 같으니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할 버팀목이자 함께 이상적인 초상을 추구하는 동반자로 생각하는 작중의 리아와 하린의 관계는, 말씀처럼 신뢰가 향상심이 공존하는 전망 밝은 관계가 아닐까 싶어요. 그에 더해 무려 '비익연리의 커플'에 빗대어 말씀해 주시니 모 작품의 한 팬으로서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네요^^


      덧. 옙, 저도 카론을 비롯해 저승과 이승의 경계를 나누는 강과 그 뱃사공 등에 관련된 소재는 신비로운 낭만이 넘친다는 생각이 드네요>.<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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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장 / 그대를 위한 중창곡Ensemble (1)


 힘이 빠진다. 팔이 무너진다. 더 이상 작은 금속을 붙들고 서 있을 힘이 없다. 은색의 십자가는 아직도 은은히 빛을 내고 있지만 썩어빠진 내 몸은 어떤 여력도 남아있지 않다.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망자들의 덩어리는 지금까지 봐왔던 잡동사니 공간이나 무한회랑처럼 시간을 끌기 위한 것일 뿐, 중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우리가 그 애처로운 사념의 집합체를 상대하고 있을 때 제6현상을 조심스럽게 성체로서 완성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알아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인간이 손가락으로 개미를 날려버리듯이 엄청난 힘이 짓눌린 우리들은 그대로 저 멀리 날아가 처박혔다. 리아도 나도 그 충격으로 피범벅. 직접적인 외상을 입은 게 아니라 힘의 반동으로 속에서부터 상처를 입은 것이다.

 우리가 있던 로비 또한 산산이 흩어졌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건 잔뜩 찌푸린 회색하늘, 아무것도 태어날 리 없는 공허한 하얀 들판, 그 한편을 가로지르는 섬뜩한 피의 강과 검게 말라비틀어진 고목, 그리고 이 끔찍한 세계의 중심에는 제대로 응시하기조차 힘든 사람 형태의 눈부신 광채가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공간정형의 작용을 단번에 깨뜨릴 정도로 강대한 일그러짐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 사람형태를 한 빛이 제6현상의 새로운 중추임에 틀림없었다. 좀 더 시간이 흘러 세세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면 모든 게 끝장날 것이다.

『천사의, 기억, 잔존…….』

 리아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중압감을 느끼게 했던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빛을 잃고 있었다. 눈앞의 적이 강대한 탓도 있었지만 분명 그녀 또한 상처를 입고 지친 것이리라. 나도 그녀를 따라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곧 다시 가해지는 압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윽… 이, 이런…….”

 역설적이게도 눈앞의 찬란한 빛이 강해짐에 따라 주위에는 점차 검은 안개가 짙게 모여들었다.
 검게 퍼지는 안개. 그것을 막고 싶었지만 막을 수 없었다. 무언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해내지 못했다. 흰 풍경 속에 있을 수 없는 붉은 강을 바라다보며 넘치는 한탄을 느껴야만 했다.
 진력이 빠진 내가 맥을 못 추는 동안 리아는 필사적으로 규칙재현을 시도했다.

『R_UNA_GA_STER__OOM__!』

 이 공간의 주도권은 제6현상이 쥐고 있지만 내 힘이 발휘되는 범위 내에서라면 세계의 손길이 닿아 있다. 피와 함께 버린 인성은 되찾을 수 없어도 그 혈액을 담고 있는 코트를 입고 있는 동안이라면 잠시나마 세계를 속여 마도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왠지 모르게 그런 지식이 머릿속에서 퍼즐을 맞춰가듯이 형성된다. 분명 서적의 기억과 공간정형의 힘이 멋대로 상황을 유추해낸 것이리라. 하지만 그런 걸 알아낼 수 있다고 해서 대체 이게 지금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리아는 필사적인 외침에 답하듯 다채롭게 색을 발하는 거대한 거울장막 같은 것이 공중에서 나타나 우리 주변을 둘러쌌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별의 규칙을 재현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는지, 그녀의 표정은 갈수록 어두워졌고 어디선가 흘러내린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아아, 어째서 깨닫지 못했을까. 그녀는 단지 아름답고 강한 것만이 아니라 위험하기도 했다. 그 사실을 좀 더 빨리 알았다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노래하는 모습이 애처롭다. 조금 있으면 검은 안개가 모든 걸 뒤덮고 6장의 불길한 날개를 펼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최소한 이 도시는 탄식에 흠뻑 젖어버리겠지. 어떤 구원도 찾아오지 않는 안식의 잿빛 세계. 곧 나락이 온 세상에 내려앉는다.

 피에 물든 내 머리카락이 끈적거리며 눈가에 달라붙는다. 거치적거려 방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짧게 자르는 건데. 검은 신부(神父)가 한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는 내 머리는 짧은 편이 더 예쁘다고 했다. 한 번 더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이 모든 게 하룻밤 악몽이고 눈만 뜨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면. 이뤄질리 없는 덧없는 소망이지만 종말이 가까운 지금은 무엇보다 간절한 염원이다.

 부서지는 마음으로 눈을 감는다. 장막이 닫히고 어둠이 방문한다. 귓가에 울리는 바람소리만이 현실을 전해준다. 촉각 따위는 오래 전에 사라졌기에 눈만 감으면 다른 세상 같다. 자아, 다시 눈을 떠보자. 그럼 분명 밝은 아침 햇살과 반가운 이들의 얼굴이 보일 것이다.
 눈을 떴다.

“……!”

 앞에 보이는 건 하얀 얼굴이다. 아름답지만 위험한 그녀. 검은 단발머리, 흰 얼굴, 붉은 눈동자. 색의 대비가 선명한 그녀가 미소 짓는다. 화가 난다. 무력한 내 자신에 화가 난다. 안심하라는 듯이 억지로 웃음 짓는 그녀에게 화가 난다. 조금이라도 나를 지켜주기 위해 등을 돌려 밖의 위협으로부터 날 감싸는 그녀에게 화가 난다. 어째서 난 그녀를 두려워한 걸까. 어째서 난 움직이기를 주저한 걸까.

 또 오랜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펼쳐치며 점멸을 반복한다. 거기서 난 대체 뭘 배운 거냐. 그녀는 설령 별 하나 뜨지 않는 캄캄한 밤에 등불 없이 걸어야 한다 해도 언제나 멈추는 일이 없었다. 그걸 보고도 가만히 있는 건 삶에 대한 모욕에 지나지 않는다.

“이 멍청아아아아아!”

 화가 나서 진심으로 소리쳤다. 지금까지 포기를 재촉하던 이성의 끈이 끊어져 버린다. 전혀 움직일 수 없다고 포기했던 피투성이 팔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한다. 십자가는 빛을 발한다.

 핏핏핏핏핏. 작은 물방울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눈이 수많은 바늘로 찌른 듯 엄청나게 아파오며 시야가 서서히 핏빛으로 물든다. 과분한 힘을 사용한 것에 대한 대가. 아무래도 세계는 이 이상 힘을 빌리고 싶으면 눈동자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모양이다.

 그그극. 이를 있는 힘을 다해 깨물며 격통을 오기로 집어삼킨다. 리아의 마음과 내 의지를 두고 여기서 아픔 따위에 꺾일 수는 없다. 눈알? 가져갈 테면 가져가. 특별세일로 두 쪽 다 반값으로 넘겨줄게. 다만, 나 역시 그 대가는 톡톡히 챙길 거야. 내 앞에 거슬리는 저 빛만은 확실히 없애주겠어!
 리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만, 멈, 춰!』

 이제 더는 그녀의 목소리가 어색하지 않다. 저런 상황에서도 날 걱정해주는 걸 보니 리아는 역시 리아였다. 흡혈귀의 체질로 다시 돌아간 것에 살짝 두려움을 느꼈지만 한번 형성된 그 안의 본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 300년 동안 그녀가 쌓아올린 초상이 이 정도 일로 붕괴될 리가 없는 것이다.

『자칫, 실명. 아니, 목숨, 상실할, 위기…….』

 그렇다. 빛을 잃는 건 두렵다. 며칠 전, 난 힘을 과다사용한 부작용으로 실명상태를 경험하고는 엄청난 공황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 공포는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사실 지금도 한편으로는 그만 둘 수 있으면 그만 두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멈출 수가 없다. 그다지 세상을 구하고 싶다거나 우리가 실패하면 수많은 사람이 죽을 테니 그런 일은 막아야 한다든지 등의 영웅적인 사명감 때문은 아니다.

 단지 날 걱정해 전화까지 걸어준 혜리의 얼굴을 떠올리고,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미리의 편지를 떠올리고, 죽어가는 얼굴로 끝까지 날 도망시킨 형사 아저씨의 얼굴을 떠올리고, 마음에는 안 들었지만 결국 많은 도움을 준 신부의 얼굴을 떠올리고, 마지막으로 리아의 얼굴을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였을 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그러면서도 타인만을 위해 살아온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을 위한 길을 선택했다. 그것도 무려 나와 함께 하고 싶다는 소원인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 물러설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미래는 내가 열어준다.

“세상을 부정하는 얼룩은 별의 의지 아래 사라질 지어니……!”

 신부의 말투를 흉내 내어 강력한 부정의 언어를 입에 담는다. 그와 동시에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별에게 기도를 한다. 한계 따위는 초월해도 좋으니 제발 그 힘을 내게 다오. 아니, 이건 이미 기도 따위가 아니다. 거래를 하자. 약속대로 내 눈 같은 건 줘버릴 테니 필요한 만큼 힘을 내놔라!

『안 돼---!』

 콰직. 뭔가 뭉개지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점점 흐려진다. 정신을 잃을 만큼 격심한 고통과 미쳐버릴 것 같은 상실감이 온몸을 가득 채운다. 죽음과는 다른 의미로 칠흑의 세상이 주변에 내려앉으며 얼굴에는 뜨겁고 끈적거리는 액체가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입가에 흘러든 비릿한 맛을 느끼며 나는 실감했다. 아아, 대가로 내 눈을 가져가고 있구나. 하지만 나는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웃고 말았다. 왜냐하면 해일과도 같은 압도적인 녹색파도가 제6현상의 중추를 붕괴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빛을 볼 수 없을 거라는 슬픔과 함께 눈앞의 불쾌한 빛은 확실히 없앴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웃을 수 없었다. 5년 전 천사의 모습을 본 따 곧 성체로 거듭나려는 빛 덩어리가 해일에 삼켜 무너지는 동시에 그 속에서 불길하고 흉포한 것들이 뛰쳐나왔기 때문이다. 악귀처럼 달려드는 수백의 무리들을 마지막으로 내 시야는 완벽하게 어두워졌다.






 마른 모래처럼 허물어지는 부분을 통해 폐빌딩의 내부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전투는 짧지만 격렬했고 그 탓에 궁병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은폐공간이 견디지 못해 가장 취약한 윗부분부터 무너지고 있는 것이었다.

 결계가 붕괴되어가는 구멍으로 파티마의 눈이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이제부터는 십자죄인의 관측영역이다. 여기서 계속 전투를 벌인다면 교회와 정원과의 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 누구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으며 이렇게 그들의 싸움은 끝을 고했다.

 가식된 어둠으로 색칠된 공간에 붉은 피가 흐른다. 주르르륵. 철푸덕. 부서진 물통에서 물이 새어나가듯이 귀중한 생명의 흐름이 바닥으로 쏟아진다.

 베르나르도 신부의 왼쪽 팔은 팔꿈치 아래 부분이 썩둑 잘린 채 피에 물들어 있었다. 그는 이걸로 외팔이, 원소변환의 술법에 사라진 그 팔을 되찾는 건 다시는 불가능하리라. 그러나 신부는 처음부터 그곳에 팔 같은 건 달려있지 않았다는 듯이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눈앞의 상대를 노려보기만 했다.

“이제, 끝인가…….”

 무형정원의 궁병대 리더 알렉 비스콘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로 앞에 상처 입은 상대가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지만 왠지 그는 상대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싸우기 전에는 그렇게도 죽이고 싶은 상대였건만, 모든 게 끝나고 나니 밀려드는 건 가슴 속의 공허함 뿐이다. 알렉은 시선을 허공으로 던지며 오래 전에 놔두고 온,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예전 일을 떠올렸다.

 그건 아직 미숙했던 유년기. 이제는 반세기도 넘은 낡은 기억이었다.
 어렸을 때 알렉이 살던 나라는 큰 경제공황에 빠져 모든 기반이 무너져 버렸다. 되돌릴 수 없는 시대의 물결과 주변 국가들의 탐욕스러운 악의, 그리고 내부에서부터 진행된 어리석고도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나라 전체가 당분간 절대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 된 것이다.

 경제는 도탄에 빠졌고 모든 치안은 땅에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예전부터 대립하고 있던 민족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그의 조국은 내전상태로 접어들었다. 극도의 혼란기, 수년의 세월 동안 살상병기로 서로 싸우는 동안 수많은 사람이 죽고 나라는 더욱 피폐해졌다. 이때 그는 아버지를 잃었다.

 그러던 와중 한 광신적인 집단이 차례차례 다른 세력을 격파하고 정권을 잡기 시작했다. 그 수단은 어쨌든 정세는 점차 안정되어 가기 시작했으나, 이번에는 그 집단의 독재자가 인권을 무시한 지배를 하고 있다는 구실로 주변국들의 연합군이 거짓된 구세주처럼 등장해 사태를 더욱 어렵게 몰고 갔다. 그들은 정작 필요할 때는 손 놓고 있다가 엉뚱하게 강제 개입해 더욱 많은 사람을 죽이며, 이 나라를 신무기의 실험장으로 삼았다. 이때 그는 어머니를 잃었다.

 결국 연합군에게 무릎을 꿇은 독재자는 처형되었고 신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피폐해질 때로 피폐해진 국민의 삶, 땅에 떨어진 경제, 그리고 민족 간의 분쟁은 끝까지 평화의 발목을 잡았으며, 기아와 증오의 연쇄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때 그는 동생을 잃었다.

 알렉은 20대의 젊은 나이에 한 개인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을 겪었고, 이 모든 것들은 그를 궁지로 몰아세우기에 충분했다. 그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탱크에 깔려 얼굴도 알아볼 수도 없게 된 아버지, 폭격에 휘말려 시신도 거두지 못한 어머니, 굶주림에 시달리다 결국 아사해버린 동생……. 그밖에 모든 친했던 사람들도 대부분 죽거나 아니면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렸다. 너무나도 강력한 폭력으로 인해 다들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진과 이상기온으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으며, 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인간은 힘을 합쳐 어려운 이를 돕기보다는 서로 소중한 걸 빼앗고, 속이고, 철저하게 상대를 이용하고 만다는 사실에 알렉은 마음 속 깊이 경악했다.

 그때부터 그는 모든 믿음을 져버렸다. 인간은커녕 신조차 믿을 수 없었다. 세상이 이렇게도 잔혹한 이유는, 창조주가 인간을 만든 걸 저주하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희망을 잃은 그는 더 이상 살 용기가 없었고, 결국 전망이 가장 좋은 국립묘지 공원 시계탑에서 뛰어내리기로 결심했다. 작게는 이 나라, 크게는 이 세상에 공헌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잠자리에서 삶의 모든 걸 부정하는 자살이란 행위를 하는 건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력이 모자라 주변 경비는 소홀했고 그는 손쉽게 시계탑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 위에서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갖은 분쟁에 시달린 탓에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이 허덕이는 도시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고 죽겠다는 그의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그가 난간에 발을 걸치고 뛰어내리려는 순간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보게 젊은이. 이왕 죽을 거라면 그 목숨, 내게 빌려주지 않겠나?

 돌아본 곳에는 마치 뱃사람을 연상시키는 풍채 좋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낡은 정장을 빼입은 털북숭이의 어떤 중년 남자가 서있었다. 그 남자의 눈빛은 삶의 의지 전체를 불태우는 듯이 강렬했으며 그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끌려버렸다. 그것이 그의 스승, 지고한 정원관리사이자 현인회의 전(前) 의원 중 한 사람인 칼데른과의 첫 만남이었다.

 칼데른이 무슨 생각으로 알렉을 제자로 받아들였는지는 모른다. 단순한 변덕이었거나, 아니면 죽어가는 청년에 대한 동정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마법사는 알렉의 재능을 한눈에 꿰고 있었다는 점이다.

 알렉은 대기로부터 마력을 흡수하는 일에 능숙했으며, 그건 곧 제1원・원소변환과 제3원・연금기법의 숙달로 이어졌다. 또한 칼데른은 알렉에게 마도의 지식뿐만이 아니라 삶의 자세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었다.
 알렉의 스승은 어느 날 그에게 이상한 걸 물었다.

- 너는 왜 우리가 마법과도 같은 별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 감히 제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세계와의 계약에 따른 보수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원력이란 식사를 제공하는 대신 규칙재현 또는 마도현상이라고도 불리는 정당한 대가를 얻어내는 것이지요.

- 그래. 아주 틀린 대답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지. 어째서 별의 규칙을 재현할 수 있는 존재는 우리 인간만으로 한정되어 있는 걸까? 다른 생물 중에도 원력을 세계에 바칠 수 있는 것들은 여럿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확답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인간은 다른 존재와 다르게 하나의 독립된 자아를 가지고 세계와 동등한 입장에서 거래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의 스승은 고개를 저었다.

- 아니다. 그건 우리 인간들이 오만함에 넘쳐 멋대로 그렇게 해석하고 있는 것뿐이지. 잘 들어라. 별은 공평하지 않아 어떤 존재는 총애하며 어떤 존재는 증오한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편애를 보이지. 그러나 그런 세계라도 인간만큼은 싫어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아. 그 이유는 인간이 어떻게 되건 이 세상은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 그것이, 우리 인류가 별의 규칙을 재현할 수 있는 이유와 상관이 있는 겁니까?

- 그렇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는 것은, 즉 별은 우리 인간에게 힘을 사용한 만큼 책임을 물을 준비가 얼마든지 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걸 잊으면 안 돼. 우리가 사용하는 힘은 그야말로 마법(魔法). 그것은 인간을 위한 특권이 아니라 우리가 부담해야 할 부채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수많은 일들이 결정되어 버리고, 그 반동은 항상 술자에게 돌아오지. 그러니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 되는 힘이다.

 어떻게 보면 진부한 일반론이긴 했지만, 알렉은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지켰다. 스승은 말뿐만이 아니라 자신 역시 실제로 아무 일에나 힘을 남용하지 않았으며, 알렉은 더욱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렇게 알렉은 존경할 만한 스승 밑에서 얼마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지금 와서 떠올리면 신기루처럼 흔들거리기만 하는 추억이지만 분명 포근했다는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알렉은 다시 한 번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처럼 좋은 인도자가 있고 별의 힘마저 완벽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조금은 자기가 원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무형정원 내에서 인망 높은 칼데른의 영향력을 거슬리게 생각한 현(現) 의원들의 암투에 의해 스승은 희생되었으며, 제자였던 알렉은 그들의 압도적이면서도 비겁한 힘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스승을 죽인 원수들은 알렉의 전투능력을 높이 샀고 자신들의 파수꾼으로 부리기를 원했다. 그에게는 그걸 거부할 만한 힘이 없었다. 단숨에 목적을 잃어버린 그는 포기할 이유조차 찾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그들의 말에 따를 뿐이었다.

 그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냉정하게 정원관리사들의 수뇌부를 관찰했다. 고결한 의원이라 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원리에 여러 가지 그럴 듯한 이유를 붙이긴 했지만, 알렉이 보기에 그것은 속물적인 세속의 권력자들이 가지고 있는 탐욕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관리사라고 해도 사람. 사회는 어디를 가도 똑같은 과오가 되풀이 되는 것이다. 그의 위치는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전환된 것뿐, 부조리한 세상은 마법을 배워도 바꿀 수가 없었다.
 아직 새파랗게 젊었던 시절,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세상은 마법이 아니고서야 어찌할 도리가 없어.』

 하지만 그의 생각은 변했다.

『이 세상은 마법으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래도 그는 꾹 참았다. 살아있는 한 어떻게든 역전의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윽고 그는 빈틈없이 명령을 수행하고 꾸준히 실력을 갈고닦아 전투부대로서는 엘리트라 불리는 궁병대의 지휘관까지 되었다. 그는 항상 비정한 명령에 따라 불평 없이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누가 들으면 비웃을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건 처음 스승 아래서 마법을 배웠을 때 품었던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 그다지 큰 욕심을 바란 건 아니다. 그는 단지 올바른 사람들이 정당하게 살아갈 장소를 원했을 뿐이다.

 알렉은 힘든 일을 수행하고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을 때면 항상 스승의 유언을 떠올렸다.
 칼데른은 숨이 끊어지기 전에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 세상은 쇠사슬로 가득 차 있단다. 온갖 족쇄가 그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꽁꽁 묶고 있지.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하지만…….

 하지만, 다음에 뭐였지. 그 뒤는 생각나지 않는다. 스승의 죽음이 너무 충격이었는지라 기억에 문제가 있어 떠올릴 수가 없다. 그러나 이걸로도 충분했다. 쇠사슬로 가득 찬 세상. 그걸 전부 끊어버리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점은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50년에 가까운 세월을 최전선에서 암투를 벌여온 그는 처음으로 세상을 바꿀 힘을 찾아냈다. 그게 바로 전능자의 기적. 언어만으로 마음대로 세계를 변혁시킬 수 있는 그 힘만 있다면 반드시 모든 걸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 힘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대로 구원할 수 없는 세상이라면 아예 없어지는 편이 낫겠지. 그는 그런 마음으로 황혼의 지평선을 비호하고, 전능자를 눈에 불이 켜도록 찾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소용없는 짓이다.

“네놈이 이겼군…….”

 쿨럭, 알렉은 입에서 피를 한 움큼 뿜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심장은 단 한발의 총알이 관통해 이미 멎어있었다. 심장을 뚫리고도 즉사하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연금기법을 응용한 마도장비의 도움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할 터였다. 알렉의 죽음은 기정사실이었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한쪽 팔을 잃은 신부는 덤덤하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처음부터 신부는 궁병대를 이긴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머릿속에 있는 건 알렉을 죽인다는 집념뿐.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류의 멸망도 불사하겠다는 알렉의 사상은 신부에게 있어 악마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부는 그걸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10명의 고위 관리사가 내뿜는 강대한 규칙재현은 천 페이지의 성경을 일제히 전개해 막아내는 동시에 아무래도 좋을 공격에 일부러 자기 팔을 내어주는 것으로 전운(戰運)을 상승시켜 2차 공격인 화살탄막까지 회피하였다.

 그 후 지금까지 단련한 체술로 돌개바람 같이 돌진하여 그 자리에서 이스테링을 들고 알렉의 가슴에 영거리 사격을 먹인 것이다. 켈젠을 비롯한 9명의 관리사들은 알렉을 구하기 위해 예의 오감을 빼앗는 술법으로 신부를 구속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들은 바로 눈앞에서 자신들의 리더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알렉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나는 고작 운에 패배했다는 말인가. 과연, 천년의 기억을 머릿속에 담고 있다는 사내답게 비꼬는 것도 남다르군. 뭐, 확실히 난 예전부터 운이 없는 편이었지만 말이야.”

 알렉은 괴롭게 기침을 하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신부는 그에 대꾸하지 않고 불쑥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거지. 평소 네가 바라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 아닌가.”

 알렉은 킥킥 비웃으며 말했다.

“이상하게도 교회 녀석들은 정작 섬기는 신은 누군지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 천대하는 인간의 본질만큼은 잘 꿰뚫어본단 말이야…….”

 비꼬는 기색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점차 작게 잦아들었다. 무리하게 생명을 유지시켜주던 마도장비도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삶에 지치고 이 세상에 질린 건가.”

“그건 네놈이 태어나기 몇 십 년 전부터 그랬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논할 게 못 돼.”

“그렇다면 왜 그랬나.”

 신부의 어조는 내용과 달리 추궁한다기보다는 마치 참회라도 들어주는 듯한 포근함이 있었다. 그걸 눈치 챈 건가, 아니면 어찌 되었건 상관없이 단순히 말하고 싶었을 뿐인가. 알렉은 갈수록 희미해지는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했다.

“쇠사슬을… 이 세상을… 우리 삶을… 내 몸을… 칭칭 얽어매고 있는 쇠사슬을 끊고 싶었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야…….”

 잠들어가는 노인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자신과 마찬가지로 스승 칼데른이 죽어갈 때의 모습이었다. 스승은 죽으면서 분명 인간을 묶고 있는 쇠사슬이 문제라고 말했었다. 아니, 잠깐. 조금 다르다. 스승은 인간은 온갖 족쇄에 묶여있다고는 했어도 그게 문제라고 한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너무 오래된 일이라, 뭐라 말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신부가 불쑥 중얼거렸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그 쇠사슬은 인간이 메고 가야 할 짐이지 벗어던져야 할 족쇄가 아니야.”

 겨울철 얼음물에 몸이라도 담근 듯이 알렉의 눈동자가 놀람에 크게 확대되었다.

“아…….”

 그랬다. 분명 스승도 같은 말을 했었다. 쇠사슬은 인간을 구속하고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만들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이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이기에 주저앉지 말아야 한다고 스승은 죽는 그 순간까지 온화한 어조로 말했던 것이다. 그걸 어째서 잊어버린 걸까.

“그래도, 이게 저의 최선이었습니다. 스승님.”

 알렉의 오른쪽 눈가에서 한 방울 눈물이 주룩하고 흘러내렸다. 서서히 그의 몸이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숨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고, 동공 또한 움직이지 않으며 맥박도 멎어버렸다.

 그는 그렇게 숨을 거두었고, 신부는 아주 드물게, 울 것 같은 얼굴로 청년 시절의 이상(理想)을 죽는 순간까지 끌어안고 온 젊고 불쌍한 노인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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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3.12.28 01:22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무채색으로 점철된 허무와 죽음의 정원 한 가운데에서, 오롯이 숙명에 맞서는 리아와 하린의 모습에 자꾸만 시선이 가네요.

    한편으로는 결국 알렉 또한 현인으로서의 구도를 갈구하며 방황해온 한 시대의 피해자였을뿐이로구나 하는 상념이 들기도 했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그는 세상의 부조리를 규탄하며 이를 구축하고자 염원했을 따름이니까요.



    어느사이엔가 떠나보내야만 했던 지난날의 표상과, 그 파편을 끌어안은 채 끊임없이 걸어와야만 했던 그릇된 이정표 아래의 여정길 끝에서야 비로소 단 하나의 깨달음에 당도할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잔혹한 아이러니인 것일까요.

    어떠한 관점에서 본다면 無로써 항구적인 평온과 안식이 구현된 세계의 풍경이란 실로 기괴하고도 덧 없는 이상의 잔영일 뿐이었으니, 그가 저러한 회한(悔恨)의 눈물을 보이는 것 역시 결국 예비된 운명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그동안 그녀들이 하나 둘씩 쌓아올려온 비원의 조각들이, 마침내 작고도 큰 기적의 순간을 만들어내고야 말았으니 무릇 세상은 이처럼 일정한 균형을 유지하며 흘러가기 마련인 것이겠지요.


    부디 하린이 다시금 눈을 떴을 때, 이번에야말로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따스하게 미소지으며 맞이할 수 있는 일상의 나날들이 이어질 수 있기를 기원해봅니다~ :D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3.12.28 22:19 신고 address edit/delete

      하린과 리아는 절찬 최종보스전 중! RPG처럼 마땅한 파티원들이 있었다면 좀 더 수월했을 텐데 단 둘이만 맞서다 보니 아무래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네요^^;;

      알렉의 경우는 이른바 '사연 있는 악당'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재수 없는 젊은 엘리트처럼 등장하지만, 사실은 나이 많은 베테랑이었으며, 진정한 목적은 전능자의 힘으로 세상을 한결 더 좋게 바꾸는 것이었으니... 마지막 목적에 대한 부분은 딱히 의식하고 쓴 것은 아니지만, F/SN의 벌레 영감님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드네요^^;; (역시 은연중에 영향을 받...OTL)

      그밖에 개인적으로 알렉의 이야기는 한편으론 자계自戒의 의미도 강한 부분이었어요. 저부터가 구질구질한 현실을 타파하는 환상을 염원하는 마음이 강하다 보니... 하지만 일전 키류인 사츠키에 관련한 댓글에서 나누었던 이야기처럼 그러한 열망이 실제로 현실에 투영되면 아무래도 위험한 사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기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지붕을 쌓기 위해선 초석과 기둥이 필요하듯 현실의 던적스러움도 그것을 견디며 차근차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으면 (비록 생각하는 것과 다를지언정) 언젠가 이상(理想)이란 이름의 지붕을 쌓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마지막 쇠사슬을 짊어지고 걸어야 한다는 신부의 말에는 그러한 희망이 담겨 있기도 하네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하린과 리아의 릴리 로드...가 아닌 해피엔드! 무리 없는 결말이 될 수 있도록 퇴고 힘내겠습니다~>.<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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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 미완성 교향곡Symphony (9)


 사람은 모두 바보다.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전부 구제할 수 없는 멍청이들만 모여 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인간이란 미숙하고 불완전하며 제멋대로이기 때문에 이런저런 방법으로 지탱해주지 않으면 무너지고 마는 존재라 알고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 그 의미를 깨닫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왜냐하면 다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자기 자신만큼은 그렇지 않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이 내뱉은 실언은 마음 속 깊이 새겨진 신념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토한 망언은 어쩌다 보니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라 변명한다. 남이 저지른 과오는 지울 수 없는 각인이지만 자신의 잘못은 고칠 수 있는 실수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이렇게 사람은 타인에게는 엄격한 주제에 자기 자신에게만은 한도 없이 무른 것이다. 우스운 일이다. 사람이란 개개인 각자가 모여 형성된 집단이지 절대 개체를 표현하는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 착각을 하고 있다. 그러니 결국 스스로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나도, 나도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집안에서 존재감이 없고 쓸쓸하다는 이유로 마음속으로 가족을 저버리고 대학을 핑계 삼아 홀로 도회지로 뛰쳐나왔다. 내가 있을 곳과 걸어갈 길을 찾고 싶다며 거창한 이유를 대긴 했지만, 사실은 그저 투정부린 것에 지나지 않으리라.

 그건 리아와 만나서도 쉽사리 변하지 않았다. 리아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얼마나 위험한 일에 관계하고 있는지는 무시한 채 그저 그녀를 위한다는 위선만으로 영웅심을 불태우며 무리하게 이번 일에 끼어들었다. 그 결과 친하게 지내던 형사 아저씨는 날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렸고, 리아 또한 나와 함께 있기 위해 신부와 위험한 계약을 맺어 상관하지 않아도 될 사지(死地)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이 엉터리 같은 희극에 그저 입맛이 쓸 뿐이다.

 그러나 단 하나, 내게는 축복이 남아 있었다. 그건 바로 시간의 은혜. 내가 걸어온 길은 아무리 과오를 저질렀어도 살아있는 이상 어떤 형태로든지 내일을 위한 양식이 된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해야 하는 이유다.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오늘의 나로, 오늘의 나보다 더 나은 내일의 나 자신을 위해 걸어갈 수 있도록 말이다.

“조금만 더 가면 돼.”

 나는 숨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걸어 나갔다. 지금까지 앞길을 가로막던 잡동사니 공간은 모두 무너뜨리고 온 탓에 조금 속도는 더뎠지만 위험한 일은 없었다. 다행히 아직까지 종말현상과 싸우는 데는 아무런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다. 형사 아저씨의 목숨을 대가로 완전히 각성한 공간정형의 능력. 아마 예전이라면 이 뒤틀린 공간의 압박에 견디지 못해 주저앉았을 것이다.

 내 보잘것없는 힘은 처음 그것이 시간회귀의 능력이라 착각하고 있을 때보다 훨씬 굉장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나는 가슴께의 십자가를 움켜쥐며 생명의 은인인 아저씨와 이러니저러니 해도 등을 밀어준 신부에게 감사를 표했다.

 경계면이라 생각한 곳에 발을 옮긴 순간,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스케치북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구겨버리듯 일그러지는 풍경. 그 위에 한없는 심연을 둘러싼 무한의 회랑이 쭉 늘어선다. 각오하고 있었는데도 그만 놀라고 만다. 이런 경험은 심장에 안 좋다.
 난데없이 끝이 보이지 않는 회랑 한 가운데 서 있게 된 나는 전후좌우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라 고민에 빠졌다.

“뭐야, 바로 직전에 와서 이런 속임수라니…….”

 지금까지 손에 잡힐 듯이 한눈에 알 수 있었던 잡동사니 공간과 달리 이곳은 미로처럼 구조가 엉켜 있어 진짜 길이 어딘지 찾을 수 없었다. 적도 최심부만큼은 주의를 기울였는지 양방향 모두 거울처럼 같은 구성을 하고 있기에 중추로 향하는 길을 맞출 확률은 반반이다.

 물론 양쪽 다 함정일 가능성도 있지만 불완전한 종말현상의 상태를 볼 때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가영도 사람인 이상 무의식적으로 이곳에서 나갈 길을 원할 테니 그것까지 억제할 방도는 없으리라. 아마 이렇게 길을 양쪽으로 나눈 것이 그녀가 지배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가능한 마지막 한수였을 것이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고심하고 있을 때, 잔뜩 지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은… 막힌 길입니다. 그 반대편이, 맞는 방향이지요…….”

 나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앞에는 부드러운 인상의 한 신부가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이 회랑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우면서도 묘하게 사물만큼은 선명하게 보여 누가 있는지 식별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신부는 처참한 몰골이었다. 쓰고 있는 안경은 한쪽이 깨져 있었으며, 온몸에는 커다란 동물의 발톱 같은 것에 찢긴 흔적과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복장으로 봐서 베르나르도 신부의 동료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저 신부가 리아와 이곳으로 돌입한 사람이리라.
 나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를 부축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괜찮으세요? 리아는, 리아는 어디 있나요?”

 그러나 신부는 힘겹게 한손을 들어 내가 오는 걸 막았다.

“이쪽으로 오지 마세요. 그녀는 반대편으로 갔습니다. 제가 간 쪽이 함정이었으니 아마 중추와 대치하고 있는 건 그녀겠지요.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가서 그녀를 도와주세요.”

 정말 그렇다. 시간이 없다. 한시라도 빨리 리아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내 안의 양심은 이렇게 다친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고 가기를 원치 않았다. 리아 또한 그런 매정한 사람은 좋아하지 않으리라.
 내가 그쪽으로 다가가려 하자 신부는 재차 손을 들어 제지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응급처지는 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빨리 가세요. 꾸물거리다 일이 늦으면 어차피 여기 있는 모든 이의 미래는 없습니다.”

 갈색의 눈동자가 호소하듯이 강렬하게 나를 바라본다. 신부의 눈동자는 그의 말과 같이 빨리 가라며 내 등을 밀고 있었다. 확실히 내가 신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더 이상 여기에 있는 건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위선뿐이리라. 나는 다친 이를 내버려둔다는 죄책감을 한 구석에 던져버리고 돌아섰다.

“반드시 해결할 테니 조금만 버티세요.”

“예, 알겠습니다.”

 뒤에서 상냥한 목소리가 화답했다. 성직자다운 온화한 어조. 옷차림은 같았지만 목소리는 그 딱딱하기 그지없는 검은 신부와는 정반대였다.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오면서도 울 것 같은 기분이 든 나는 잡념을 떨치기 위해 달렸다. 곧 뒤에서는 뭔가 허물어지듯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절대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달렸다.






 어느 화창한 날의 오후.
 한 눈먼 여자가 외출을 나선다. 왼손에는 지팡이의 차가운 감촉. 오른손에는 연인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 여자의 손을 꼭 잡은 청년의 얼굴은 조금 차가운 인상이지만 애인을 바라보는 그 눈길은 매우 부드럽다. 두 사람은 조용히 숲의 오솔길을 걷는다. 잔잔한 미소와 따뜻한 담소가 봄 햇살과 아우러져 사랑의 아지랑이를 피어 올린다.

 여자는 음악에 재능이 있고 부모에게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같이 지낼 가족 하나 없는 외로운 처지다.
 남자는 유능함을 인정받아 한 유명기업의 주역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어릴 때부터 천애고아인 쓸쓸한 처지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은 행복했다. 옆에 자신의 고독을 메워줄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지 빈자리를 채워주기 위해 사랑에 빠진 건 아니다. 둘은 어렸을 때부터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하고 있었다. 결국 둘은 단순히 서로에게 필요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좋아하기 때문에 같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 이미 붙잡을 없는 과거의 기억이다. 비누거품처럼 예쁘지만 허무한 이 광경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기억의 단편에 불과하다. 이미 한유는 죽었다. 그가 죽었다는 과거는 기정사실이며 그건 아무리 추억을 들여다본다 해도 절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미래를 바꿀 수 있지만 과거만큼은 절대 바꿀 수 없다. 과거의 수정은 신의 업. 그리고 그는 결코 자신이 세상을 창조한 의미가 없어질 만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영은 필사적으로 추억의 바다에 빠져 있었다. 색과 소리만으로 세상을 인식했던 그녀에게 있어 이 즐거운 장면은 원래 가진 기억과 다른 일종의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그녀는 계속해서 바라본다. 몇 번을 반복해도, 몇 백 번을 반복해도, 몇 천 번을 반복해도, 몇 만 번을 반복해도 절대 눈을 돌리지 않는다. 질리지 않는 게 아니다. 가슴이 아프지 않는 게 아니다. 단지 죽을 만큼 괴로워도 이 모습을 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것뿐이다.

- 치사해…….

 어둠 속에 의식이 녹아드는 가운데 나, 리아 마리아는 중얼거렸다. 가영과 한유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자신과 디오를 떠올리게 만든다. 세상을 사랑했지만 결국 악의를 견딜 수 없어 미쳐 버린 청년과 끝없이 상처를 받아왔지만 한 사람의 온기에 마음을 발견한 소녀의 사랑은 그들과 서로 닮아 있었다.

- 비겁해…….

 나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이래서는 화를 낼 수가 없다. 마음의 약함에 짓눌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그녀에게 한소리 따끔하게 하고 싶었지만 저런 모습을 보니 같이 울고 싶은 기분밖에 들지 않는 것이다. 정말 약삭빠르다.

- 아…….

 의식이 흐려진다. 수백이 넘는 망자의 영혼이 떠도는 침식의 바다 속에 내 영혼 또한 녹아드는 것이다. 어느새 행복한 두 사람의 추억과 그것을 바라보는 가영의 모습은 사라졌다. 이대로 조금만 있으면 내 몸은 완전히 이들과 동화돼 이 세상에서 사라지리라.

 그것은 나쁜 일일까. 나는 문득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은 세상에 어울리지 못하는 존재다. 같은 동족끼리는 거의 교류를 나누는 일이 없고, 우연히 생각이 비슷한 인간에게는 미움을 받는다. 이럴 바에야 그냥 모두 하나가 되어 녹아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든다. 많은 이에게는 불행할 일이 될 테지만, 과연 나에게도 불행한 일일까.

 이제 조금만 더 가라앉으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왠지 모르게 오랜 옛날 잊어버렸을 어떤 미소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건 분명 디오와 만난 지 일주일이 흘렀을 때. 농작물에 도움이 되는 영양분을 연구하기 위해 철야를 하는 그에게 난 이렇게 물었다.

- 이해, 불능. 왜, 고생? 수면시간, 디오 수명, 함께 단축. 그래도, 선호?

 그 말에 디오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 나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웃을 수 있다는 건 기쁜 일이지요. 그래요, 내가 미소 지으면 당신도 같이 웃어주잖아요? 전 그게 말할 수 없이 좋답니다.

 구김살 없는 청년의 새하얀 웃음. 순수한 호의만을 사랑하는 따스함. 처음 청년과 만난 밤에 느낀 온기와 똑같다. 여전히 선명한 그 기억은 절대 잊을 수 없는 꿈의 한 자락. 그래, 잊은 게 아니다. 여태까지 그것만을 의지해서 살아왔다.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건 아마도 마음이 멋대로 만들어낸 이기적인 환상. 절대 변할 리 없는 과거 속의 디오가 천천히 돌아보며 말했다.

- 가시는 겁니까. 누군가 당신을 찾고 있나 보군요.

- 응. 디오처럼 위태, 사랑, 그 사람, 날, 고대…….

 너만큼 위태롭고, 또 사랑스러운 사람이 날 기다리고 있으니까.

- 그렇군요. 뭐 그 아이는 저보다 훨씬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리아가 함께 있어준다면 훨씬 행복할 겁니다. 제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죠.

- 유감, 디오, 혼자, 방치…….

 미안해. 이런 곳에 너 혼자만 남겨 둬서.

-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이곳은 리아가 있을 곳이 아닙니다.

 내가 가면 디오는 이런 곳에 홀로 남아 무한의 고독에 떨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 내색도 하지 않은 채 그는 상냥하게 날 보내주려 한다.

- 유감, 정말, 유감…….

 나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아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지만, 디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연구실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아아, 이 어찌 파렴치한 환상인가. 난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기억마저 멋대로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담긴 마음만큼은 절대 거짓이 아니다.

- 자, 어서 가세요. 리아 마리아. 당신의 현실을 위해.

 그는 빛이 비치는 문밖으로 내 등을 툭하고 밀었고, 나는 그곳에서 허공에 흐르는 녹색의 세찬 파도와 함께 세상을 보았다.






 세상은 사람에게 어떤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이 있어도 달라지는 건 없고, 없다고 해도 곤란할 것 또한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있으나마나한 존재. 누가 행복하든 슬퍼하든 살든 죽든 펼쳐져 있는 풍경에게 있어선 인간이란 하나의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란 존재의 극을 추구하는 생물이지만, 그 본질은 역설적으로 허무와 한없이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펼쳐져 있는 풍경을 눈 안에 담으려고 기를 쓴다. 살아있는 것에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에 도리어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는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어떤 존재에게도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세상은 그렇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치마저 소멸시켜버린다. 그런 세상에 의미를 규정짓는 거야말로 인간의 역할이며 사람은 각자 자신의 눈을 통해 각각의 세계를 소유하게 된다. 즉, 사람이 하나 태어난다는 건 하나의 세계가 창조된다는 것. 동일하게 사람이 하나 죽는다는 건 세계가 하나 멸망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금 하린의 눈앞에는 멸망한 세상이 잔뜩 쌓여있는 셈이었다. 괴롭게 아우성치는, 그러나 신음소리 하나 새어나오지 않는, 움직이는 시체의 산. 무의미하게 꿈틀거리는 종언은 모든 꿈을 먹혀버린 채 그저 정지한 세계의 축도를 여실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손이 나와 날갯짓에 지친 불쌍한 새를 난폭하게 끌고 들어간다. 그건 누구보다도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했던 존재가 모든 꿈끼리 먹어치워 사라지기만을 바라는 부패한 연못에 허우적거리며 빠져드는 광경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쇠락한 로비에서 하린은 세상을 축도한 납골당의 끔찍한 장소로 리아가 끌려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참을 수 없다. 입술을 깨문다. 더 이상 순결한 그녀를 더럽히는 건 용서할 수 없다. 찌릿한 통증과 함께 붉은 피가 혀를 자극한다. 이 거슬리는 공간은 오물, 다시는 세상에 발도 붙일 수 없도록 깨끗이 청소한다. 입술이 움직여 자기 암시의 주문을 자아낸다.

 본래 하린이 별에게 나누어 받은 힘을 끌어내기 위해 읊었던 자기암시의 주문은 발현을 3단계로 나누는 생성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이제 완전히 힘의 사용법을 익힌 그녀는 그런 번거로운 작업을 할 필요가 없었다.

“공간수복(空間修復).”

 짧게 울려 퍼지는 한 마디. 간단하다. 요는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기만 했어도 하린의 힘은 예전보다 무한히 불어날 수 있는 것이다. 본래 이 힘은 그녀 고유의 능력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하린은 별의 의지를 수신하는 대리인. 그녀라는 통신장치가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별은 아낌없이 그 힘을 빌려준다.

 별의 의식구조체마저 노리고 탐욕스럽게 달려드는 종말의 손길에 맞서 녹색의 파도가 일어난다. 커다란 나무뿌리를 닮은 것처럼 보이는 초록빛의 물결은 검은 사자(死者)의 썩은 꿈을 용서 없이 밀어낸다. 지금 존재하는 세상을 지탱하기 위하여 별이 빌려주는 힘은 막대한 것이다.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커다란 흐름 앞에서는 모든 것이 하찮아 보인다.

“무거워……!”

 그러나 망자 덩어리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성체로 완성되기 직전에 있는 종말현상의 힘은 세계의 주도권을 일시적으로 빼앗을 정도로 성장했고, 그건 세상을 지탱하는 신수(神樹)와 동급인 하린의 능력으로도 쉽게 억누를 수 없었다.

 세계의 목줄을 쥔 주도권 쟁탈전. 창조 없는 파괴만을 행하려는 어긋난 의지와 살아온 세상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정면충돌한다. 비등비등한 이들의 힘 대결은 어느 한쪽이 무너질 때까지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이다.

“리아……!”

 하린은 종말현상의 중추를 억제하는 데 정신을 집중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초조해지는 마음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리아가 저 안으로 끌려 들어간 지 이미 수초가 흘렀다. 보통 사람이라면 융화된 즉시 정신을 잃고 육체를 빼앗기며 영혼마저 흡수당할 것이다. 아무리 리아라고 해도 무사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린은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저곳에서 구출하고 싶었지만 검은 덩어리는 끈질기게 대항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약탈한 사람들의 사념을 중추로 모은 가영의 행위는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행한 일인지는 몰라도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 나락에 빠져 증오와 허무로 가득 찬 인간의 마음만큼 끈질긴 건 없었으며 그 힘은 능히 별의 강대한 의지에도 대항할 만 했다.

“으윽……!”

 눈이 아프다. 안구의 실핏줄이 팟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하린의 눈동자가 붉게 물든다. 머리에서부터 허리까지 커다란 바늘로 단번에 꿰어버리는 듯한 통증에 그녀는 바르르 몸을 떨었다.

 힘을 지나치게 사용한 대가. 인간이 사용하기에 별의 힘은 무한에 가까운 무량대수의 질량이지만, 수용체인 하린의 몸에는 한계가 있다. 요 한달 간 종말현상이란 인지를 넘는 존재를 향해 끊임없이 힘을 발산해온 부담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린은 힘을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한발자국 성큼 내밀며 크게 소리쳤다.

“죽게 내버려줄 것 같아!? 빨리 나오란 말이야!”

 고통을 참고 내지른 고함은 어느 때보다 훨씬 크게 울려 펴졌고, 거기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검은 덩어리의 중심에서 뭔가 새하얀 빛이 새어나왔다. 그건 하린의 기억에도 있는 빛줄기, 제2원・의지구현(第二園・意志具現)의 백색 광선이었다. 남극의 빙하와도 닮은 반짝이는 하얀 빛은 예리하게 망자들의 산 가운데 구멍을 뚫었고, 그 빛 속에는 한 여성의 모습이 있었다.

 물결치는 검은 머리에 병적일 정도로 하얀 피부. 홍화(紅花)의 눈동자에 망토처럼 긴 검은 사제복을 걸쳐 흑백적(黑白赤)의 대비가 확연한 그 모습은 익히 하린이 잘 알고 있는 리아 마리아였다.
 빛과 함께 하린의 옆까지 다가온 리아는 떨리는 손을 들어 친숙한 동거인의 뺨을 감싸며 말했다.

“하린……!?”

 신부에게 맡기고 왔을 터인 하린이 이곳에 있는 걸 본 순간 리아는 여기서 일어난 모든 걸 이해했다. 삶의 희망을 앗아가는 어둠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 세계의 주도권을 빼앗긴 공간에서 마법을 사용해 탈출이 가능했던 것, 그리고 힘의 반동으로 눈에 상처를 입어 피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얼굴. 모두 다 하린이 스스로의 의지를 통해 자신이 있는 곳까지 와 힘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의식 한 조각 한 조각까지 전부 잡아먹어치우는 침식 속에서 이렇게 밖으로 나온 리아는 삶의 공기를 실감하며 이렇게 하린이 와주었다는 사실에 감동해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나 하린은 그런 리아의 기분 같은 건 알바 아니라는 듯 약간 심통 난 얼굴로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통 때렸다.

“바보야! 여기서 대체 뭘 한 거야! 누가 멋대로 그런 계약을 맺고 혼자 가라 그랬어?”

“화, 났나요……?”

“당연하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잘 들어. 난 분명 리아와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고, 그건 변함없는 진심이야. 근데 네가 옆에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잖아!”

“하지만, 하지만 제가 아니었다면 하린은 평온한 일상을 보냈을 거예요. 그 형사분도 아마 돌아가시지 않았을지도…… 아얏!”

 하린은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리아의 말을 끊는 동시에 손을 들어 다시 한 번 그녀의 머리를 콩하고 때렸다.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니 착각하지 마. 하아, 그런 모습은 옛날의 너랑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정말 답답해.”

“미, 미안해요…….”

 리아가 시무룩하게 사과하자 하린은 표정을 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 난 네 그런 점이 좋으니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혼자 다 짊어지지는 마. 내게도 조금은 나눠 줘.”

 고백과 닮은 달콤한 말에 리아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제게, 그런 자격이 있는 걸까요……?”

 하린은 질렸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깊게 생각할 필요 없어. 간단한 일이야. 같이 저 녀석을 쓰러뜨리고 집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가서 맛있는 걸 해먹고 하루 종일 푹 자는 거야. 어때?”

“…….”

 리아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강렬했다. 이거 한방은 너무나도 강했다. 지인을 잃은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자신과 같은 괴물에게 이런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단 말인가. 문득 예전에 품었던 의문이 떠오른다. 자신은 하린이 정형자로서 마땅히 가져할 방향성에서 어긋나 있는 걸 보고 이상하게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이면 왜 그런지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어떤 상황이 와도 항상 걷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도 자신처럼 쓰러지지 않기 위해 걷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걷고 있다. 어떤 존재이건 ‘의지’란 중요하다. 때로 그 힘은 운명마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하여간, 정말, 리아는, 정말…….”

 웃고 있는 하린의 얼굴에는 살짝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 눈물에는 조용한 슬픔과 불안이 느껴진다. 지금까지 평범하게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 요 근래에 벌어진 일들은 그야말로 ‘재앙’이라 표현할 수밖에 없을 터. 그럼에도 그녀는 웃는 법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리아는 그 미소에는 아마 누구도 이길 수 없겠다고 생각하며 같이 웃음 지었다.

“돌아가라고 해도 듣지 않을 거죠?”

“뻔한 걸 묻네. 애초에 여기까지 왔으면 저걸 쓰러뜨리는 것 이외에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어.”

 공간정형자로서 자각한 하린이 하는 말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이제 그녀들에게는 저 거무죽죽한 덩어리를 없애는 것밖에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승산은 절반. 현재 하린의 공간정형과 종말현상의 세계침식은 비등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완전히 수평을 이룬 저울을 한쪽으로 넘어뜨리기 위해서는 특별한 수단이 필요했다. 결국 리아는 결심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저도 제가 원하는 대로 하겠어요.”

“잠깐 리아, 뭘 할 생각이야!?”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낀 하린이 말리기 위해 손을 내밀었으나 리아는 살짝 미소만 보여준 채 앞으로 나섰다. 하린이 검은 덩어리를 억제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느라 주춤하는 동안 리아는 이미 멀찌감치 전진하며 짧은 노래를 읊었다.

“BO_TUS_LEBO_CO__”

 이 주문은 세계를 움직이는 언어가 아니었다. 이것은 그녀 자신에게만 통용되는 계약파기의 주문. 운율이 멈추는 것과 동시에 뭔가 은색의 빛나는 것이 그녀의 손에서 광채를 띠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건, 오래 전 그녀의 심장을 찔러 힘을 봉인했던 은말뚝이었다.

“설마……!”

 하린 또한 비탄의 서적에서 그 기록을 봤기에 지금 리아의 손에 들려있는 게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었다. 어째서 저게 지금 그녀의 손에 있는 걸까. 그 의문에 고뇌하기도 전에 그녀를 중심으로 안정되는 공간을 보며 하린은 깨달았다.

“설마, 인성(人性)을 버릴 생각이야!?”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까지 저는 소중히 품고 있었던 걸 손에서 놓을 생각이에요. 한때의 기이한 만남. 제게 어울리지 않는 어떤 고귀한 이의 피. 제가 원력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전보다 더 인간에 가까운 방향성을 지향하게 된 것도, 전부 그 사람의 피 덕분이었어요.”

 말하는 순간에도 변모는 내부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검게 불타오르는 칠흑의 머리카락. 그 어둠을 밀어내듯 싸늘하게 빛나는 붉은 꽃의 눈동자. 피부는 더욱 하얗게 빛나며 실체가 흐릿해진다. 본래 반영체인 세계의 딸답게 리아의 몸이 다시 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변화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디서 새어나온 걸까. 그녀의 검은 코트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선홍빛의 물결은 교회에서 빌린 검은 사제복 자락을 완벽한 마(魔)의 색으로 휩쓸어버렸다. 그녀의 옷자락을 붉게 칠한 건 의심할 여지없는 인간의 피였다.

 그 정체를 알고 있는 건 아마 이 세상의 두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한 명은 리아, 그리고 다른 한명은 소실충동의 완성자인 순성(瞬星) 산호리. 리아의 몸속에서 빠져나와 그녀의 목숨과 연결된 코트를 붉게 물들이고 있는 건 그 대마도사의 피였다. 과거 죽기 직전 관에서 깨어난 리아가 산호리를 물었을 때 몸속으로 흘러든 그 혈액인 것이다.

 사람의 몸으로 죽음의 강이 되어버린 산호리의 피는 특별했다. 그녀의 몸은 인간의 형질을 유지하면서도 세계에 녹아들 수 있는 성질을 지닌 복합구조를 띠고 있었고, 그 때문에 흡혈귀인 리아에게 물려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당시 리아는 산호리의 도움을 받아 체내에 있는 마법사의 피를 강한 구속력을 지닌 교회의 은말뚝을 이용해 몸속에 봉인했다. 그 덕분에 리아는 산호리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형질을 띠게 되었으며, 세계를 속여 마도의 지식도 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 그걸 버린다는 건 여태까지 그녀를 그녀답게 있을 수 있도록 도와준 걸 포기한다는 것과 같았다. 하린은 리아가 산호리를 만난 일은 서적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기에 무슨 경위로 그녀가 그런 특수한 체질이 되었는지는 몰랐으나 공간정형의 힘을 통해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는지는 직감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리아는 앞만 바라본 채 전부 새빨갛게 물든 긴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호소하듯이 말했다.

“분명 전 예전과 다르게 변모해버릴 거예요. 어쩌면 기억이 없어질지도, 마음이 변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하린이라면……. 분명 그런 저도 받아들여줄 거라 믿어요.”

 그가 그랬던 것처럼, 하고 리아는 작게 중얼거리며 손아귀에 힘을 주어 들고 있던 은말뚝을 뚝하고 부러뜨렸다. 반으로 갈아진 은말뚝은 그대로 하얀 가루가 되어 공중으로 사라졌으며 리아의 붉은 코트는 더욱 그 빛을 진하게 띠었다.

“제발 그만 둬! 리아가 리아로 남는다는 보장이 없잖아. 그런 건 싫단 말이야!”

 소리치는 하린에게 리아가 고개만 살짝 돌리며 조용히 말했다.

『이미, 결정, 사항.』

 무겁고도 어딘가 결여된 목소리가 뇌리를 직접 강타한다.

“……!”

 늦었다. 잔잔하면서도 모든 걸 압도하는 기백은 이미 예전의 리아가 가지고 있었던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어설프고 불안했던 모습과는 달랐다. 대마도사의 피가 밖으로 빠져나가기 무섭게 그녀의 몸은 세계의 딸로서의 지위를 빠르게 되찾고 있었다.
 하린은 자기도 모르게 다리가 떨리는 걸 느꼈다.

“으……!”

 억지로 이를 깨물며 흔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단순히 리아는 고개를 돌리고 있을 뿐인데도 하린은 똑바로 그녀를 마주할 수 없었다.

 밤하늘의 걷는 자. 서적의 기억이 보여주었던 옛 사람들이 흡혈귀를 향해 경외를 담아 부르던 호칭이 떠오른다. 확실히 세계가 사랑하는 여식은 버림받은 인간에 비해 무서울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니고 있다. 겉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았는데도 지금까지 알고 지내던 리아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아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하린은 리아에게 생물적인 공포감을 느꼈다.

 그 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아는 아무 말 없이 앞으로 나섰다. 그건 무모한 짓이었다. 아무리 하린의 힘으로 억누르고 있다고는 하나 종말현상의 중추는 아직 건재했다.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면 검은 덩어리의 세력권이었으며 예상대로 아까 그녀를 집어삼켰던 수많은 검은 손길이 꿈틀거리며 뻗어왔다.
 그러나 검은 덩어리의 촉수는 리아를 털끝만큼도 건드릴 수 없었다.

『내게, 접촉, 불가.』

 리아의 그림자가 부풀어 오른다. 그림자가 아니라 이미 별개의 생물처럼 보이는 그것은 주인의 의지에 따라 여러 개의 날카로운 칼날로 변해 눈앞의 썩은 살집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수백이 넘는 망자들의 손이 리아를 둘러쌌지만, 그보다 더 많은 수천 개의 칼날이 그것들 전부를 말라비틀어진 쭉정이처럼 잘라버렸다.

 훼이이이이익!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 같은 것이 퍼져나간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와도 닮은, 그러나 왠지 쇳소리처럼 듣기 거북한 그 불쾌한 소리는 검은 덩어리가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세상 모든 걸 집어삼킬 수 있는 종말현상의 중추가 흔들거리면서도 날카로운 칼날에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리아의 그림자에서 뻗어 나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허영의 검들. 이 그림자 칼날은 지금까지 그녀가 써오던 마법과 다른, 어머니인 세계가 자식들에게 내려준 축복의 선물(Talent)인 것이다.

 ‘참영(斬影)’이라 이름 붙여진 이 능력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걸 베어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물질, 영체, 원력의 흐름, 심지어 공간 뒤에 숨어있는 존재까지 세계가 품고 있는 것이라면 그녀의 검은 모두 베어낼 수 있으며, 그 대상에는 이 망자들의 집합체도 예외는 아니다. 하린의 공간정형에 의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면, 아무리 종말현상의 중추라 해도 흡혈귀 본연의 힘을 막아낼 순 없었다.

『망자, 무리. 허무, 회귀.』

 망자들의 손을 모조리 잘라낸 흡혈귀의 그림자는 기세를 멈추지 않고 그대로 검은 덩어리 본체까지 유린했다.
 서걱. 수천의 칼날이 낙하할 때마다 수백의 머리가 하늘을 난다. 서걱. 수천의 칼날이 횡단할 때마다 수백의 몸통은 두 배로 늘어난다. 서걱. 수천의 칼날이 춤을 출 때마다 수백의 비명이 갈라진다.

“웁…….”

 하린은 참을 수 없는 메스꺼움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저녁 먹은 지 꽤 시간이 흘렀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속에 있는 걸 전부 쏟을 뻔 했다. 아무리 종말현상에 침식돼 인간의 형상을 벗어나 있어 생전 모습은 알아볼 수 없다 하더라도 사람이었던 것을 무참히 산산조각 내는 광경은 똑바로 마주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걸 무표정으로 거침없이 해내고 있는 리아는 대체 어떤 마음을 품고 있을까. 본래부터 인간이 아니기에, 그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인성마저 버렸기에 아무런 저항감이 없는 걸까. 그게 아니면 자신과 마찬가지로 끔찍하다 여기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참고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깊게 침잠되어 있는 그녀의 표정에서 그걸 읽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잡념을 버리자.’

 하린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자기 자신에게 조용히 들려주었다.
 리아가 어떻게 변했건 이미 벌어진 일, 최소한 종말현상과 싸워주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완전히 자신을 잊어버린 건 아니리라.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최대한 리아의 지원을 해주는 것밖에 방법은 없다.

 하린은 공간정형의 힘을 발휘하는 데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보통 술자의 술법은 술자의 정신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특히 하린이 가진 힘은 더욱 그런 성향을 띠고 있으며, 능력의 방향성을 깨우친 순간부터 그녀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하린이 힘을 강화함에 따라 허공을 가르는 녹색의 거친 물결이 기세를 더해 검은 덩어리를 압박하자 리아의 그림자 또한 검은 덩어리를 더 신속하게 해체하기 시작했다. 망자의 무리는 그저 비명만을 지르며 처참하게 사라져 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태산처럼 강대한 기운을 내뿜던 검은 덩어리는 어느새 언덕만큼 작게 오그라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리아의 칼날에 의해 가루도 남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그녀들의 승리는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하린은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몰아붙이고 있는데도 공간을 더럽히는 제6현상의 기능은 전혀 정지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그런 의문을 입 밖으로 내려 할 때, 이변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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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3.12.24 01:0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와아, 무엇인가 명멸하는 촛불의 군무 아래 이따금씩 흔들리는 암흑의 회랑 속을 표연히 걸어가며 나직한 어조로 독백하는 하린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만 같아요! >_<)b

    흡사 차분하면서도 맑은 음색의 목소리가 순간 순간 귓가에 자동 더빙되어 들리는 느낌이랄까요? ~(-_- )~ (으아니, 잇살람이?;;)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때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때로는 통로의 벽에 반사되는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존재의 의미와 그동안 지나온 여정 속의 풍경들을 다시금 떠올리며 사색하는 그녀의 모습이 팟하고 머릿 속으로 떠오르기도 하더랍니다.


    끊임없이 반복된 만용과 과오의 끝에 끌어안아야만했던 상실의 아픔과, 회피할 수 없었던 숙명의 얄궂음 위에서 비로소 찾아낼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새로운 희망.

    그리고 마음과 마음 사이의 불협화음이 만들어내는 자기 중심적 사고의 감옥 안에서, 결국 그녀들은 단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줄 수 있는 그 누군가를 간절히 원했던 것뿐일지도 모르겠다는 상념이 들기도 하고...

    하지만 하린 또한 리아처럼 어둠 속의 명상에서 어떠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으니, 이토록이나 험난했던 그녀들의 여정에도 최소한의 결실은 있었던 셈이겠지요.


    일개의 평범한 대학생으로부터 본격 별의 의지를 대행하는 공간 정형자( ... 라이프 스트림!!! )로서 거듭나기까지, 수없이 고생해야만 했던 하린의 앞에도 부디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기를 기원해봅니다~ 'w')/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3.12.24 22:57 신고 address edit/delete

      아앗, 소디언 님의 표현 덕분에 본편의 장면이 한결 멋지게 탈바꿈 했다는 생각이 드네요+_+

      작중의 내용은 저번부터 계속해서 하린의 각성타임(?)이 이어지고 있지요. 하린의 힘은 본인 스스로가 오랜 세월과 노력을 들여 갈고닦은 것이라기보다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수용체로서의 특질에 대부분 의존을 하는 능력이다 보니, 아무래도 자신의 감정이나 관점, 과거 등에 크게 좌우되는 면이 있네요. 아무튼 포텐셜로만 치면 최상급에 속하는 캐릭터이다 보니 이대로 상승기세를 타고 쭉쭉 나가는 중^^;;


      본편에서 리아가 본 디오의 환영은 그녀 스스로가 소중한 추억을 자아낸 것이기도 하지만, 얼마간은 하린의 힘에 영향을 받은 덕분도 있어요.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별의 기억 속에서 불려 나온 것이라 해야 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비록 환영이지만 한없이 디오 본인에 가까운 인물이 재생되어 마지막으로 리아의 등을 밀어주게 되었네요^^

      ...여담으로 위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디오와 만났을 때의 리아는 인간에 대한 이해는커녕 언어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던지라 사실 둘의 사랑은 일반적인 그것과는 굉장히 거리가 멀었네요. 육체적인 관계는 전무하다시피 하며 플라토닉 러브의 관점에서도 좀 옅은 편에 속했다고 해야 할까요.

      그럼에도 리아가 디오를 연인이라 칭하는 것은 역시 둘의 감정은 연정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건 디오도 마찬가지. 결국 표현은 못하고 죽고 말았지만요^^;;


      덧. 하린의 능력은 확실히 FF7의 라이프 스트림과 많이 닮았죠(...) 으, 역시 유년기 때 인상 깊게 즐긴 작품은 줄곧 강렬하게 영향을 미치는 듯싶어요^^;;;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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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 미완성 교향곡Symphony (8)


 더 이상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가 없다.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며 가영은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고개를 숙였다. 딱히 팔이 움직이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몸은 전보다 훨씬 건강해졌다. 희미한 빛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눈마저도 점차 흐릿하게 형체가 식별이 가능해지고 있다. 제6현상이 성장함에 따라 이에 직접 연결된 그녀도 숙주로써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유래 없을 쾌조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떤 연주도 할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예술이란 어디까지나 자신의 마음으로 행하는 것. 이미 검은 안개에 모든 걸 줘버린 그녀가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석화되듯이 점차 굳어가는 그녀의 의식은 이제 조금만 있으면 종말현상의 완벽한 중추로 탈바꿈을 할 것이며 그 순간 그녀의 존재 따위는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이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자아를 가지고 있을 때 최대한 연인의 기척을 느끼고, 또한 자신에게 대항하던 밉살스러운 적들을 품위 있게 맞이하고 싶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채고 방해를 해오던 신부, 마찬가지로 미성숙한 자신의 아이들을 무참히 짓이긴 세계에게 사랑받는 괴물, 아직도 바깥에서 소란스럽게 저항하는 교회의 무리들, 그리고 유일하게 천적이라 부를 수 있는 공간정형자…….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아무도 자신을 방해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은 한유의 기억만을 끌어 모아 누구에게도 피해 주는 일 없이 산속 저택에 틀어박혀 평생을 나오지 않았으리라. 그러니 방해를 해온 그들이 잘못한 것이다.

 물론 이건 거짓말이다. 그녀는 조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유의 기억을 그러모으기 위해서는 사람을 습격해야 했고, 그를 잃은 세상 따위 그녀에게 있어서는 털끝만한 가치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그녀가 원망하는 건 이런 방해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타격을 입은 탓에 자아의 붕괴속도가 빨라진 것뿐. 덕분에 한유를 공유할 수 있는 시간도 스스로 존재하고 있음을 실감하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연인의 기억을 잃고, 자아를 잃게 되는 거야말로 진정한 세상의 종말. 시간이 되었다. 저택의 문이 끼익하고 열리는 동시에 흑백의 흡혈귀가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세요. 어라, 처음 뵙는 분이네요. 초대한 기억은 없지만 그래도 이 저택에 찾아주신 이상 손님으로 대접해드려야겠지요. 누추한 저택이지만 편히 계세요.”

 1층 로비, 예전에는 햇살이 밝게 들어왔던 창가부분에 선 채 가영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건 정말로 상냥한 목소리였지만 살기 넘치는 주변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아 도리어 괴기스럽게 들리는 어조였다.

 그녀의 주변에는 여러 마리의 사냥개가 그녀를 호위하듯이 둘러싼 채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 괴물들은 지금까지 모습을 보였던 흰색의 걸어 다니는 고래나 검은 사냥개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호랑이만한 몸집에 회색의 털을 가진 녀석들은 커다란 새의 날개까지 가지고 있어 마치 천사의 시종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할은 회개한 자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하늘의 사자가 아닌 지옥에 찾아온 불청객을 산산조각 내는 명계의 파수꾼일 터였다.

“…….”

 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우선 주변 상황부터 살펴보았다.
 가영을 호위하고 있는 회색의 날개달린 사냥개는 9마리. 적진의 중심부인 만큼 방심할 수는 없지만 아마 더 이상 증가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만약 그럴 여유가 있다면 리아는 이곳에 도착하기 훨씬 전에 상대편 위장 속에 먹혀 버렸을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레오 신부가 함정에 빠져 무언가와 상대하고 있다고 한다면 더욱 가능성은 낮아진다. 애초에 이곳은 가영의 홈그라운드이기 이전에 배수진이기도 하다. 어설픈 속임수나 여유를 부리다가 일시에 당해버리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보다 문제되는 건 이 공간 자체다. 리아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찌릿찌릿하고 몸이 저려오는 걸 느꼈다. 제6현상의 본질 자체가 세상 모든 걸 먹어치우는 것이기에 그 영향을 받는 것이다. 다행히 원력을 사용하지 못할 만큼 침식당하지는 않은 듯하지만, 확실히 다른 어떤 곳보다 몸이 무거운 건 사실이었다.

“당신은 날 처음 보겠지만 난 당신을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이 내 애견을 쓰러뜨릴 때마다 그 모습을 항상 기억하고 있었지요. 당신의 본적은 본래 먼 서쪽일 터. 왜 이런 외진 곳까지 찾아와 이 불쌍한 나를 방해하는 건가요?”

 가영은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여 가녀린 인상을 더욱 선명하게 하는 긴 흑발을 앞으로 내려뜨리며 물었다. 얼굴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이 흐려 있으면서도 마치 기쁜 것처럼 밝게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허무하면서도 아무것도 태어날 수 없는 이 종말의 공간과 어딘가 닮아있었다.

 무너지고 있다. 리아는 목소리만 듣고도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 당장 눈치 챌 수 있었다. 레오 신부는 가영이 진정한 중추가 되기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리아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 되기 전에 마무리를 짓지 않으면 승부는 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숙주가 인간이라는 약점만 사라진다면 제6현상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팽창해나갈 것이다.
 리아는 잠깐 두 눈을 감았다가 살며시 한쪽 눈만 뜨며 말했다.

“바이올린, 켤 수 없지 않나요?”

 의외의 질문에 허를 찔린 가영은 말을 더듬었다.

“예? 그, 그게 무슨…….”

“당신은 분명 그 바이올린을 켤 수 없을 거예요. 그게 바로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에요.”

 말을 마친 동시에 리아는 빠르게 움직였다. 목표는 오로지 가영. 흡혈귀 특유의 속도만큼은 잃지 않은 리아라면 이 정도 거리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좁히는 게 가능했다.

 약간 거친 일이 되겠지만 그녀의 의식만 제거해버린다면 상황은 종료된다. 굳이 레오 신부가 넘긴 은촛대를 사용할 것도 없다. 어차피 가영은 아직 중추가 되지 못한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중추를 기절시키는 것만으로도 불완전한 종말현상은 상당부분 기능 정지할 것이며 밖에 있는 이레네 수녀와 성가대의 힘이라면 충분히 붕괴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가영 본인은 다소 후유증이 남을지도 모르지만 죽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헛소리를…….”

 킥하고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한 순간 리아는 곧장 얼굴을 노리고 달려드는 하얀 발톱에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뒤에서는 거대한 송곳니가 목덜미를 노리고 덮쳐왔고, 리아는 간발의 차로 그것을 회피한 뒤 본래 자리 잡고 있던 문가로 멀찌감치 자리를 피했다.

 리아가 예상했던 질주경로에는 어느새 회색개가 빈틈없이 방어를 굳히고 있었다. 리아는 맹수의 이빨에 스쳐 피가 흐르는 목덜미에 손을 대며 경악에 눈을 크게 떴다. 이 날개 달린 괴물개의 무리는 흡혈귀 이상의 스피드와 민첩성을 가지고 있었다.

“흡혈귀가 도리어 물려버리다니 우습네. 한번만 더 내 연주를 아는 척하기만 해 봐. 그때는 뼈 한조각 남기지 않고 먹어치울 테니까.”

 어느새 나긋나긋한 상냥함의 탈은 집어던진 가영은 험악한 어조로 협박하듯 말했다. 그녀는 얼굴 표정은 거의 바꾸지 않은 채 목소리에만 증오를 가득 실어 말하고 있어 더욱 무섭게 들렸다. 그러나 리아는 전혀 주눅 든 기색 없이 앞으로 한발 내딛었고 가영은 얼굴을 찌푸리며 명령을 내렸다.

“다가오지 못하게 해!”

 주인의 명령에 따라 회색개들은 날갯짓을 하며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그 괴기한 맹수들의 모습을 시야에 포착할 수 있었던 건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 곧 그것들은 한줄기 빛이 되어 탄환처럼 리아에게 달려들었다. 방금 전 리아를 견제했던 경이로운 스피드. 도저히 평범한 동체시력으로는 포착할 수 없어 마치 빛줄기처럼 보이는 회색개들은 리아를 향해 매섭게 덮쳐들었다.

 리아 또한 흡혈귀의 일족, 속도로만 따지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모든 걸 감싸는 대모(大母)의 총애를 한껏 받는 그녀에게 물리법칙의 구속은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리아는 서 있던 자리에 흐릿한 잔상만을 남긴 채 검은 화살이 되어 가영을 노리고 질주를 시작했다.

 그러나 회색개들은 리아가 단 1초도 되지 않을 그 짧은 거리를 좁히게 허락하지 않았다. 9마리의 흉포한 충견들은 금세 리아의 진로를 막아 한발자국도 가영을 향해 나아갈 수 없게 방해했다. 상대의 수가 많은데다가 점점 몸을 침식해오는 종말현상의 영향 때문에 리아는 본 힘을 발휘할 수 없었고, 곧 한계를 드러냈다.
 서로 뒤엉켜 맹렬한 기세로 로비 안을 질주하던 빛줄기 중 검은 형체 하나가 무리에서 튕겨져 나갔다.

“……윽!”

 다시 본래 위치로 돌아온 리아는 몸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린 채 신음을 내뱉었다. 회색개는 리아를 경계하듯이 더 이상 공격해 들어오지는 않고 가영의 주위를 맴돌며 으르렁거렸다. 가영이 그렇게 명령한 것인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중추의 신변을 보호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알고 있는 건지 회색개는 숙주의 주위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제 좀 자기 처지를 알았어? 얼마나 격차가 나는지 이해했다면 이대로 물러나, 줘, 제발……! 난 쓸데없이 힘을 쓰고 싶지 않아. 조금이라도 한유와 같이 있고 싶단 말이야!”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영은 방금 전까지 고압적인 태도와 달리 이번에는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하듯이 말했다. 그녀는 진심이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모래시계가 끝을 알려 자아를 완전히 잃어버리기 전에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한유의 기억 속에 잠겨있고 싶었다.

 그러나 리아는 그에 응하기는커녕 오히려 지금 가영의 말을 듣고 더욱 결심을 굳혔다. 이미 가영은 인간으로서 버틸 수 있는 한계를 오래 전에 넘겼다. 현재 그녀의 모습은 레오 신부의 말처럼 여태까지 종말현상에 흡수되지 않은 게 놀라울 지경이다. 그러니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어서 담판을 지어야 한다.

“예, 끝을 내도록 하죠.”

 단호하게 잘라 말하며 또 다시 앞으로 나서는 리아의 행동에 가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먹어치워!”

 주인의 호령에 회색개들은 견제하는 기색 없이 이번에는 리아의 숨통만을 끊어놓기 위해 돌진을 시작했다. 리아 역시 지지 않고 속력을 냈지만 결과는 뻔했다. 숫자는 상대방이 많았으며 스피드조차 공간의 특수성 때문에 뒤쳐지니 이대로는 아까처럼 상처를 입고 쓰러질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리아에게는 아직 기댈 구석이 남아있었다. 종말현상은 아직 불완전해 세계가 쥐고 있는 주도권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는 누구보다도 든든한 원군이 남아있는 셈이다. 그동안 몇 백 년의 세월을 거쳐 힘들게 마도의 지식을 쌓아온 건 무엇을 위해서였나. 그야말로 이럴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la________”

 리아의 노래가 폐쇄된 로비에 높게 울렸다. 원력을 담은 그녀의 목소리가 세계와 계약을 맺어 마법이라 불리는 규칙재현현상을 이끌어낸다.

“A__CU_A_TE__R_A_”

 짧지만 행진이라도 하듯 웅장하게 울리는 운율. 붉은 문장이 그녀의 주위에 진형을 새기자 텅 비어있을 공간에 천둥소리와 같은 파열음이 들리며 거대한 암석이 나타나 세찬 물줄기와 함께 사방으로 폭발했다. 수압의 영향을 받아 비산하는 날카로운 암석의 파편들. 피할 길 없는 그 공세에 정면으로 달려들던 3마리의 회색개는 그 자리에서 사지가 뜯겨나갔다.

 동료가 희생되자 나머지 6마리의 회색개는 주저하지 않고 진형을 바꿔 각자 흩어졌다. 리아가 가영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방어대형을 취했던 녀석들이 철저하게 공격진형으로 돌아선 것이다. 위와 앞으로 위치한 2마리는 미끼, 나머지 4마리는 리아의 사각으로 들어섰다.

 허나 리아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곧장 다음 구절을 노래했다. 하얗게 변화된 진형. 아직 제1원의 술수가 성립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변환식이 구성되고 있다. 인간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이중원력방출. 인간과 달리 성대에서 목소리를 내고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의 연동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고 영향을 끼치는 흡혈귀만이 가능한 기술이다. 물론 다른 흡혈귀는 규칙재현 자체를 성립시킬 수 없으니 크게 의미도 없는 일이었으나, 그녀는 특별했다.

“DE_OO_S_MAL__EUS!”

 희미하고 자잘한 입자가 빠른 속도로 모여 거대한 손을 형성한다. 공간을 찢고 나온 것처럼 보이는 거인의 손에는 그에 지지 않을 정도로 대형화된 붉은 망치가 들려 있었다. 동토의 신이 애용했던 신화속의 무기를 닮은 그것을 리아는 크게 휘둘렀다.

 캬아아아아아악! 짓이기는 기분 나쁜 소리와 귀를 찢는 단발마가 로비를 뒤흔든다. 회색개들이 덮쳐오는 타이밍을 노려 크게 휘두른 한방으로 사각으로 침범해오던 4마리는 전부 튕겨나갔으며 미끼역할을 했던 두 마리의 회색개들은 뼈째 으스러져 버렸다.

“으……!”

 상황이 이쯤 되자 가영의 얼굴도 흐려졌다. 가영이 중추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이상 회색개의 소멸은 그녀에게도 어느 정도 데미지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게다가 가양의 눈에는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 검정의 코트가 리아의 상처를 흡수하고 있는 게 보였다. 용의주도한 리아는 무한회랑을 걷는 짧은 순간을 이용해 이레네에게 받은 코트에 상처전이에 술법을 걸어두었던 것이다.

 가영의 표정은 눈에 띠게 험악해졌고, 그런 주인의 기분이 전해졌는지 나머지 회색개들의 태세도 더욱 치열해졌다. 날개 달린 괴물개들은 리아를 경계하며 정면에 위치한 후 자신들이 낼 수 있는 최속의 속도로 달려 나갔다. 그야말로 특공을 각오한 대형. 설령 마법에 사지가 박살난다 하더라도 반드시 리아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말겠다는 각오였다.

 돌진하는 4개의 잿빛 탄환. 리아는 정면으로 승부를 피해 미련 없이 이탈했고, 괴물들의 발톱은 매섭게 그녀가 있던 자리를 처참하게 으깨었다. 바닥은 굉음과 함께 폭탄이라도 맞은 듯이 움푹 파였으며 그 충격으로 옆에 있던 대리석 기둥 하나가 형체도 없이 날아갔다.

“……!”

 아픔을 참지 못하고 새어나오는 신음소리. 리아의 움직임은 인간의 동체시력으로는 잔상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으나 그녀는 회색개의 공격을 완전히 피할 수 없었다. 단지 스쳐지나가기만 했는데도 리아의 옆구리는 짐승의 손톱자국이 깊게 패여 피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주저할 틈은 없었다. 이 괴물들은 속도, 위력, 지능 그 어느 것 하나 뒤지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였다가는 그대로 끝장날 것이다. 그녀는 내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아픔을 견디며 다시 노래했다.

“NI_HE_RE_VO_TUS!”

 그녀의 발밑에 검고 거대한 진형이 형성된다. 극에 달하면 환수마저도 굴복시킬 수 있다는 제7원・정신조형(第七園・精神造形)의 술법. 검붉은 나비가 공중을 나는 환상과 함께 회색개들의 행동이 둔해진다. 현성(玄星)과 달리 아직 리아의 힘으로는 회색개를 완전히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으나 일시적으로 움직임을 봉하는 건 가능했다.

“아…….”

 순간 가영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휘청거렸다. 리아의 술법이 회색개를 부리는 가영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로 인해 회색개들은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 거렸으며 리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MO_RETAL_RIS_CC_OMEN_DO__”

 여느 때와 다르게 낮고 장중한 음계. 한편으로는 음산하게까지 들리는 그녀의 노래는 저승사자를 홀려 그로 하여금 구부러진 낫을 들고 천천히 다가오게 한다. 회색개 4마리의 몸에 새겨진 4획의 기묘한 문양. 시간이 흐를수록 문양은 한 획씩 사라졌고, 이윽고 문양 자체가 완벽히 자취를 감추자 회색의 날개 달린 괴물들은 처음부터 그 장소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공기 중에 녹아들어갔다. 제4원・소실충동(第四園・消失衝動)의 허위침식. 가장 쓰고 싶지 않은 원력변환식을 행사한 리아는 약간 안색을 찌푸린 채 가영을 노려보았다.

 리아의 주변에는 전투의 영향으로 피어오른 흙먼지에 규칙재현의 잔향인 여러 빛이 반사되어 찬란하게 반짝였다. 과연 7색다원의 후계자. 무지개색의 악마 리아 마리아. 9마리의 괴물을 전부 해치우고, 다채로운 빛깔에 둘러싸여 폐허가 된 로비위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섬뜩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제 가영의 주변에는 어떤 장애물도 보이지 않는다. 남은 4마리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할 때 충분히 기습할 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습격도 받지 않았다는 건 더 이상 남은 사냥개는 없다는 뜻이리라.

 이걸로 가영의 수족은 전부 잘라 내었다. 남은 건 중추인 가영을 이곳에서 빼내 제6현상의 자기붕괴를 노리는 것뿐. 무방비한 그녀를 기절시키는 건 몇 초도 걸리지 않을 간단한 작업이다. 그러나 리아는 왠지 모르게 쉽사리 그녀가 서있는 창가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 아직 그녀의 곁에는 위험한 무언가가 있다고, 리아의 본능이 소리 없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묘한 정적이 흐른 후, 우선 손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리아가 움직이려는 찰나 가영이 불쑥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째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 건가요?”

 방금 전까지 증오에 찬 새된 외침과는 다르게 나이팅게일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다. 회색개가 사라진 탓에 부담이 줄어든 탓일까. 가영의 눈에는 어느 정도 이성의 빛이 돌아와 있었다. 연인을 잃고 종말현상에 침식돼 광기에 찬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본래 그녀는 곱게 자란, 그리고 마음씨 상냥한 음악가였던 것이다.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우수에 찬 눈동자로 가냘프게 서 있는 가영을 마주보며 리아는 세상의 파도에 휩쓸려 망가진 아름다운 존재를 위해 속으로 애도를 표했다.
 리아는 하늘거리는 한탄의 거품을 꿀꺽 삼키며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멈춰있는 건 이제 질렸으니까요. 그리고 전 걷는 걸 좋아해요. 그러는 당신은 왜 잠들고 싶어 하나요? 스스로 문을 닫아버린 세상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도…….”

“그가 없는 세상에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당신과 같이 고독을 버린 존재에게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이해할 수 없겠죠.”

 약간 적의를 실어 단호하게 부정하는 가영의 말에 리아는 쓸쓸하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럴지도 모르죠. 본래 다른 존재를 완벽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그래도, 비슷한 기분이라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

 리아의 눈빛에서 진심을 읽은 걸까. 가영은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조용히 바이올린채를 들어 높게 소리를 울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무너진 세상을 다시 쌓아올릴 수 있을 만큼 강하네요. 하지만 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약한 나는 바뀌지 않은 채 언제까지 약할 뿐이에요.”

 리아는 한발 앞으로 나서며 손을 내밀었다.

“포기하지 않는 한 다시 걸을 수 있어요. 도와줄게요.”

 만약 가영이 살아갈 마음을 먹고 중추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희망은 남아있다. 아직 가영이 굳은 의지를 가지고 여기서 벗어나려고만 한다면 어떤 부작용도 없이 제6현상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것이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개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법이기에.
 그러나 리아는 한 가지, 너무 시간이 흘렀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고마운 말이네요. 하지만, 이미 늦었어요. 당신 말처럼 전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답니다.”

 가영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잠깐……!”

 리아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앞으로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검은 안개.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만 안개가 나타나 가영의 전신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숙주를 지배하기 위한 종말현상의 최종단계. 가영은 검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한유, 씨… 안녕…….”

 이것으로 마지막. 완벽하게 파묻힌 가영은 자취를 감추었으며 농도를 계속해서 높여가는 검은 안개는 마치 검은 액체 덩어리처럼 보였다. 리아는 동요를 감추며 재빠르게 그녀를 구하기 위한 원력을 말에 담아 읊었다.

“NU_F__E___!? 설마, 벌써 이렇게……!”

 한 구절을 채 마치기도 전에 리아는 목이 막히는 답답함을 느끼며 노래를 중단했다.
 원력의 흐름을 밖으로 내보낼 수가 없다. 세계가 계약에 응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니, 계약을 주고받을 세계 자체가 이미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도권은 종말현상에게 넘어가 버렸다.

“아윽!”

 리아는 양팔로 자신의 몸을 끌어안으며 쓰러졌다. 전신을 누르는 거대한 압박과 살을 파먹는 것만 같은 고통. 거의 완전하게 종말현상에게 잡아먹힌 이 공간의 모든 것이 리아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그녀는 순식간에 모든 저항력을 빼앗기고 자기 자신이 세상에서 사라지려고만 하는 것 같은 참을 수 없는 감각에 단순히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

“아…….”

 리아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점차 형체를 이뤄가는 검은 덩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시선, 그리고 멍해져가는 귀로 뭔가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건 웃음소리다. 몇 사람이, 아니 수십 명이, 아니 수백 명이 증오하며 깔보는 그 비웃음은 지금까지 들었던 어떤 비난보다 마음을 아프게 했다.
 찰흙이 반죽되듯 기분 나쁘게 꿈틀거리던 검은 덩어리가 마침내 명확한 형체를 드러냈다.

“역시, 잡아먹힌 사람들의 영혼은 모두…….”

 그건, 시체 덩어리였다. 수많은 망자들이 태우기 전 모아둔 낙엽더미처럼 아무렇게나 겹겹이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수백의 눈이 노려본다. 수백의 손가락이 경멸한다. 수백의 이빨이 적의를 드러낸다. 그리고 수백의 입술이 비웃는다.

 인간의 꿈이란 결국 상충할 수밖에 없는 법. 서로를 인정하지 못해 먹어치우기 시작한 그들의 영혼은 세상에 남겨진 하잘것없는 가치를 부러워하는 한편 또 증오하고 있다. 이미 나락에 꿈을 떨어뜨린 자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들은 영원히 정체할 수밖에 없으며 인간의 본성 또한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허무에 가득 찬 세상에 막을 내려라. 인간은 아무리 해도 화해할 수 없는 존재다. 하나의 꿈을 이룬다는 건 다른 누군가의 꿈을 짓밟는다는 것. 행복해질 수 없는 세상에는 대체 얼마나 가치가 남아 있는 걸까. 남아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어서 빨리 막을 내려주어라. 오로지 있어야 할 것은 허무. 그것이 인간의 종착점. 즉, 제6현상이라 불리는 종언의 이름이다.
 흐느적거리는 시체 덩어리에서 수많은 손이 뻗어 나온다.

“……!”

 움직일 수 없는 리아는 그대로 손으로 만들어진 그물에 잡혀 검은 덩어리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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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3.12.17 12:03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결국 제 6번째 종말의 경계선이란 다른 누군가의 불행과 상실감 위에 오롯이 선 채 미소 지을 수 있는 자들에게만 허락되는 이상의 아이러니와, 그 부조리에 냉소와 절망을 거듭한 끝에 세계의 멸망이라는 악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자들의 섬뜩하고도 서글픈 윤무였던 셈이로군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수많은 이들의 일상과 그 가능성을 희생시킨 후에야 비로소 직시할 수 있게 된 현실 속에, 가영이 그토록이나 바라던 지고의 행복은 결코 존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참 가슴아프게 다가오더랍니다.

    어쩌면 이번 화에서 그녀가 자조(自嘲)하듯 내뱉은 한 마디의 말처럼 상실에 따른 마음 속의 공허감을 이내 극복하고 그 빈자리를 다른 무엇인가로 채워나갈 수 있는 강함의 부재가 그녀들의 운명을 이토록이나 갈라놓은 것은 아닐는지...


    흠, 그나저나 흡사 신화와 전설 속의 군신과도 같은 위용을 뽐내던 리아가 한순간에 열세에 처하는 것을 보니 이제 하린이 멋지게 등장할 차례가 다가온 모양이로군요! (+ㅁ+

    이거 이거, 역시나 베르나르도 신부의 말마따나 리아는 마음이 너무 여린게 치명적인 단점인 모양이예요.

    뭐 그 덕분에 히로인으로서의 매력이 한층 빛나보이기도 하지만요. 냐하핫~ ~_~)b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3.12.18 00:13 신고 address edit/delete

      제6현상은 정반합적으로 서로 충돌을 하면서도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을 이루는 긍정적인 인간상에 대한 일종의 안티 테제이기도 해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이상(理想)을 한데 실현시켰더니 나타난 것은 파멸이었다는 이야기가 되니... 어떻게 보면 제로섬 게임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말씀처럼 가영의 경우는 하린/리아와 달리 상실의 슬픔을 딛고 일어설 만한 강함이 없었다는 게 비극의 원인이라 할 수 있을 듯... 그래도 살짝 가영에게 변명이 되는 말을 찾자면, 그녀의 마음은 일찌감치 종말현상의 파편에 침식 당하였기에 붕괴가 가속화된 면이 큰 것도 있어요.

      만약 종말현상의 파편이 아니었다면 시간이 걸려도 연인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하지만 애당초 종말현상이 아니었다면 연인이 죽지도 않았을 것이니 큰 의미가 없는 가정이긴 하네요^^;;


      ...사실 리아는 히로인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납치 당하기' 퀘스트를 열심히 수행 중~ 히로인 경력 페이지에 한줄을 더 써넣기 위한 그녀의 치열한 계산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 (탕)

      정말 여기서 하린이 구하러 온다면 전통적인(?) 주인공과 히로인의 구도가 형성될 듯싶네요~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








제6장 / 미완성 교향곡Symphony (7)


 리아와 레오 신부는 순조롭게 중심부로 향하고 있었다. 도중에 끈질기게 나타나는 도깨비불은 전혀 리아의 적수가 되지 못했으며 그들의 앞길을 막는 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하늘거리는 보리밭을 헤치고 지나가는 여행자마냥 두 사람은 아무런 곤란함을 겪지 않은 채 앞으로 나아갔다.
 소실충동의 원력으로 다가오는 도깨비불을 전부 일소한 리아는 더 이상 주변에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레오 신부의 말에 한숨 돌리며 말했다.

“생각대로 일이 잘 진행되어서 다행이에요. 본래대로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의 적이 되어 송곳니를 드러냈겠죠.”

 레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다행히 바깥쪽에서도 잘 해주고 있는 모양입니다. 끊임없이 외부에서 일정 이상의 충격을 준다면 체내에 침입한 독소에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할 것이라는, 이레네 수녀님의 예측이 확실하게 들어맞았군요. 이대로 우리만 중추에 접촉해 계획대로 움직인다면 모든 게 끝나겠지요.”

 양동작전은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완성되지 못한 종말현상은 조금이나마 틈이 있었으며 그들은 그 부분을 놓치지 않고 공략했다. 만약 리아 마리아와 레오 신부가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이 회색 숲에 들어왔다면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힘에 삼켜져 녹아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종말현상은 잔 다르크의 포격과 성가대의 노래에 상처를 입어 그것을 막아내고 복구하는 데 상당한 힘을 다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내부 침입자들에게 할애할 여력이 없었다. 고작 소화액에 불과한 도깨비불 같은 검은 개의 머리통만이 무력하게 다가오는 정도가 최선인 것이다. 물론 중추 쪽은 분명 이것보다 훨씬 방어를 굳히고 있을 게 틀림없으나, 그곳까지 무사히 갈 수 있는 것만 하더라도 큰 성과라 할 수 있었다.

“영기의 흐름이 이쪽에서 느껴지는군요.”

 레오는 정신을 집중해 가영이 내뿜는 특수한 영파를 탐색하며 말했다. 영적인 특성을 분간하는 일이라면 개의 후각 이상으로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중추를 보호하고 침입자를 교란시키기 위해 여러 겹으로 중첩된 이 미로 같은 공간에서 올바른 길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오감에 의해서는 방향은커녕 위아래 구별조차 확실치 않은 부정형의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이정표를 찾아낸 그는 목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아무런 의심 없이 앞으로 나선 순간 세상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설마 함정……!?”

 레오는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지만 붕괴되는 세상은 전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떤 규칙성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부정형의 공간은 더욱 더 혼란스러운 세상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대한 유리돔이 단숨에 흩어지듯이 산산이 박살난 풍경은 태초에 모든 건 하나로 이뤄져 있었다는 전설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빙글빙글 돌며 한군데로 뭉쳐갔다.
 리아는 당황해하는 신부의 팔을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

“진정하세요. 함정 같은 게 아니에요. 신부님은 올바른 길을 찾아오신 거예요.”

 그녀는 인간보다 훨씬 세계란 구조에 밀접하게 접해있기 때문에 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직감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무너졌다 재구성되는 주변 풍경은 모종의 공격 같은 게 아니라 단순히 다음 층에 들어섰기에 구조가 바뀌는 현상에 불과했다. 이건 레오 신부가 제대로 영파를 짚어 왔으며, 그들이 지금까지 있던 표층부보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섰다는 걸 의미했다.
 리아의 말에 판단력을 되찾은 레오는 마치 거대한 신의 손이 천지창조 때 진흙을 반죽하는 것만 같이 뭔가 잔뜩 형성되어 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지요. 그때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기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당시와 느껴지는 파동이 유사하군요.”

 그가 말을 하는 동안에도 풍경은 꾸준히 만들어져 마침내 완성되었다.
 넓고 끝도 없이 늘어선 회색회랑. 여태까지 그들을 둘러쌌던 탁 트인 엉망진창의 잡동사니 사막과는 전혀 다른 비좁고 정교한 공간이었다. 주변에는 희미하게 빛이 들어와 간신히 식별할 수 있지만 저 중앙은 뭐가 있는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어둠이 내리깔려 있었으며 앞뒤 모두 길게 늘어선 복도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레오 신부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무한회랑……! 아마도 여기가 경계영역이겠군요. 최심부는 이곳만 통과하면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잠시 중앙부의 어둠을 바라본 후 시선을 리아에게 옮기며 말을 이었다.

“혹시 회랑 밖으로 뭔가 실체를 가진 것을 보내주실 수 있습니까? 여기서는 제 총탄만으로는 아무래도 올바른 반응을 얻기 힘들 것 같군요.”

“예, 알겠어요.”

 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작은 구슬을 꺼냈다. 그녀는 그 위에 손을 올려놓은 후 한구절의 짧은 노래를 불렀다.

“M__AH__GAAA__"

 제2원・의지구현(第二園・意志具現)의 실체고정화. 그녀가 강하게 그리고 있는 형상이 희미한 빛을 발하며 구슬을 둘러싸자 그것은 곧 작은 파랑새의 형태를 갖추었다.

“사소한 거라도 놓치지 말고 살펴보렴.”

 일시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구조를 가지게 된 가짜 파랑새는 술사의 명에 따라 날개를 파닥이며 회랑을 밖으로 건너가 중앙의 어둠으로 향했다. 회랑 저편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세계였기에 리아가 만든 작은 새는 유독 아름답게 빛을 발했다. 파랑새는 광활한 밤하늘을 날 듯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자유롭게 가로 질렀다.

 그러나 그 비행은 오래 가지 못했다. 10미터도 채 가지 못한 지점. 유리가 갈라지는 파열음과 함께 파랑새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쥐어짜기라도 하듯이 괴롭게 몸을 비틀다 이윽고 파앗 하고 산산조각으로 갈라져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갑작스러운 대상물체의 파손은 마력의 흐름을 보내고 있던 리아에게도 반동을 가져온 탓에 그녀는 한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비틀거렸다.

“윽……!”

“괜찮습니까!?”

“거, 걱정 마세요……. 단지 따끔거린 것뿐이에요. 그보다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지 알아내셨나요?”

“예, 아마도 저곳은 종말현상의 위장 그 자체, 들어오는 모든 걸 소화시킬 수 있는 공간입니다. 지금 반응으로 봐서는 영력뿐만 아니라 원력까지도 흡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뿐만 아니라 어떤 생물이든 광물이든 빛이든 뭐든 간에 집어삼킬 수 있겠죠. 반대로 복도를 통한다면 아마 최심부까지 향할 수 있을 겁니다.”

 검은 안개가 만들어낸 회색 이공간은 자칫하면 세계를 집어삼킬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교회에 의해 6번째 ‘종말’로 지정된 위험한 현상이다. 저러한 사지(死地)가 존재한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다. 그러나 리아는 그런 것보다는 좀 더 단순하고 현실적인 위협에 의문을 가지고 입을 열었다.

“왜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는 걸까요? 우리가 이 지점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 이런 회랑 따위는 없애버리고 저 어둠 속으로 던져버렸으면 모든 게 끝났을 거예요. 밖에서 성가대와 이레네 수녀님이 활약해주시는 덕분에 수족처럼 부릴 검은 개와 같은 말단을 생성해낼 여유는 없다 하더라도 이미 있는 걸 이용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말이에요.”

 리아의 표정은 오히려 공간이 변화할 때보다 더 불안해 보였다. 이미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녀는 어떤 일이든지 그 뒤에 깔린 배경이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태가 잘 풀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마냥 좋아했다가는 반드시 그 부주의함에 상처 입게 된다.

 물론 그녀는 몇 백 년을 살아오며 마도의 지식을 궁구한 인간을 초월한 존재다. 굳이 레오 신부에게 묻지 않아도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허나 십자죄인은 악마와 종말현상에 관해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는 집단. 그녀는 함부로 속단하기에 앞서 그 조직의 선단에 서 있는 한 사람인 그에게 의견을 묻고 싶었던 것이다.

 분명 인간은 그녀 같은 존재보다 수명도 짧고 나약하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작은 힘이나마 적재적소에 사용할 지식이 있고, 또 그러한 지식을 다른 이에게 대대손손 전하는 지혜가 있다. 그건 분명 얕볼 수 없는 인간의 커다란 힘이었으며 그녀는 절대 그것을 무시하지 않았다.
 레오 신부는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이건 추측에 불과합니다만……. 제6현상은 우리 인간 따위가 길들일 수 있을 만한 힘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 6번째 종말(The Sixth Of Final Line)의 이명(異名)은 ‘천사의 실패한 낙원’. 한때 교회에서도 지고의 존재로 받들어졌던 인과율의 정점에 선 그들마저도 제어에 실패한 현상이지요. 거기다 지금은 뭔가 이물질이 섞여 들어가 이상하게 변모까지 한 상태입니다. 사실 그 가영이란 이름의 여자가 아직까지 자아를 유지하고 살아있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에요.”

“그건 그녀가 아직 완전한 주인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맞습니다. 이 세계에서 그녀의 위치는 창조주가 아니라 단순한 관리자에 불과한 것이겠지요. 본래 세상을 집어삼키는 일에만 최적화된 제6현상 안에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공간 자체에 생물이 살아갈 탈출구를 반드시 만들어 두어야만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있는 곳도 저 검은 구덩이에 삼켜져 버릴 테니까요.”

“그래서 아무것도 없어야 할 이곳에 우리가 서있는 회랑이 생긴 것이군요.”

“그렇긴 합니다만, 적도 보통 내기가 아니군요. 그런 상황조차 최대한 이용하려 하고 있어요. 역시 이곳은 함정이었습니다.”

 레오는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뜻이죠?”

“아까부터 쭉 살펴봤지만 영기가 두 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어요.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차이점을 모르겠군요. 이번만큼은 온힘을 기울인 모양입니다. 아마도 적은 우리를 두 패로 분산시키거나 혹은 잘못된 길로 인도해 시간을 벌려는 속셈이겠지요.”

 그는 앞뒤, 혹은 왼쪽 오른쪽으로 길게 뻗은 회랑의 복도를 둘러보며 말했다. 양쪽 모두 끝없이 늘어선 데다 어둠에 휩싸인 상태라 눈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수 없으며 중추에서 내보내는 영기의 흐름 또한 양자 모두 똑같은 파동을 보내고 있어 식별하는 건 불가능했다. 너무나도 의도가 빤히 보였지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몇 가지되지 않는다는 점이 되려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따로 떨어지는 건 위험하지만, 혹시 둘이 같이 길을 잘못 짚었다가는 돌이킬 수 없겠죠.”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레네 수녀님과 성가대의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반면 종말현상은 중추가 무사하고,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힘을 불려나갈 테고요. 둘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우리 역시 끝입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걸 예상하고 둘이 갈라지는 것이야말로 적이 노리는 걸지도 몰라요.”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단순히 제 생명만 저울 지는 일이라면 저도 과감하게 도박을 하겠습니다만, 이건 우리 목숨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에요. 역시 두 패로 나뉘는 게 최선입니다.”

“……예.”

 리아는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결국 신부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베르나르도 신부와의 계약을 통해 보조차원으로 이번 작전에 투입된 것에 불과한 그녀에게 결정권은 없다. 게다가 레오 신부의 말은 옳았다. 모 아니면 도인 도박에 자기를 포함한 수만 명의 명운을 가볍게 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찝찝하게 여긴 건 신부의 판단을 의심하기 때문이 아니라 별다른 방도 없이 상대방의 수에 말려들 수밖에 없는 불리한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서였다.

 하지만 이건 고민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그럴 시간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행동을 하는 편이 이득이리라. 그녀는 잔뜩 기합을 넣고, 신부가 선택한 길 반대편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잠깐, 이걸 가지고 가십시오.”

 레오 신부는 뒤돌아선 리아를 불러 세우며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그건 다섯 가닥으로 갈라진 은색으로 빛나는 긴 촛대였다. 신부가 가볍게 기도문을 외우자 은촛대의 한 부분이 뚝 꺾여 부러졌고, 그는 그걸 앞으로 내밀었다. 세련되게 세공된 은제품을 바라보며 리아는 흠칫 몸을 떨며 주춤거렸다.

“그건…….”

“역시 잘 알고 계시는군요. 오래 전 당신을 봉인했던 성물과 같은 것이지요.”

 레오 신부의 어투는 부드럽고 조용했으나, 그녀는 절로 손이 파르르 떨리는 걸 느꼈다. 옛 상처의 기억이 온몸을 덮쳐온 것이다. 이건 디오가 일을 저지른 후 성자들에게 잡힌 그녀가 봉인 당할 시 심장에 박힌 은말뚝과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은촛대였다.

“왜 그걸 지금…….”

“당신 앞에 이런 걸 꺼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중추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꼭 이것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위력은 몇 백 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화되었지요. 만약 우리의 짐작대로 그녀가 완전한 이곳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면 취할 방도는 단 하나뿐입니다.”

 레오의 손에 들린 건 흡혈귀마저 완전히 제압하는 것이 가능한 절대적인 봉인구다. 아마도 이 물건에 깃든 강대한 사념은 교회의 성자들이 신을 향해 성심을 다한 성스러운 기도문. 오로지 신의 적이 파멸하기만을 바란 그 강력한 저주는 찔린 자가 그 누구든 강력하게 속박해 어떤 행동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설령 그것이 살아가려는 행위일지라도 말이다.

“…….”

 레오의 손길에 그 은촛대의 일부를 받아들긴 했지만 리아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저주 받은 성물의 무서움은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이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예전 은말뚝에 찔렸을 때는 흡혈귀의 경이로운 회복력은 물론 살아가려는 의지마저 모두 꺾여버렸다. 그 시절보다 더욱 강화된 물건이라면 얼마나 상대방의 생명 그 자체를 빼앗을지 그녀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레오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획 돌리며 말했다.

“어느 쪽으로 향하든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함정에 빠질 겁니다. 우리가 망설였다 실패한다면 그건 우리 목숨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만 기억하세요.”

 그들은 다음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각자의 길로 걸어 나갔다. 두 사람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절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그 누구도 의지할 수 없으며 믿을 수도 없다. 오직 믿어야 할 건 자기 자신뿐. 시간은 넉넉지 않으며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최소한 신부는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계속 똑같은 길이 이어지고 사방은 어둠이 가득하면서도 주변만큼은 알 수 없는 빛으로 희미하게 밝아 어딘지 몽환적인 느낌이 든다. 덕분에 제대로 시간을 가늠할 수 없다. 1분이 지났는지 5분이 지났는지 아니면 1시간이 지났는지. 애당초 이곳은 바깥과 시공간이 괴리된 장소이니 일반적인 시간관념 따위는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어쩔 때는 잡념, 갑자기 덮치는 고독, 그리고 때로는 환상과도 싸우며 길게 늘어선 회랑의 복도를 걸어가던 그는 마침내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희미한 형체를 발견하고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했는데…….”

 앞에는 긴 머리의 창백한 피부를 가진 한 여성이 서 있다. 청초하고 가련한 느낌이 드는 미인이다. 방금 상이라도 치룬 것만 같은 검은 옷차림이 저승에서 돌아온 것만 같은 어두운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레오는 상대가 뭔가 말을 꺼내기 전에 지체 없이 소매에서 총을 꺼내들어 발사했다.
 강렬한 총성이 어두운 회랑을 뒤흔든다. 그러나 총에 맞은 여성의 형체는 전혀 반응도 하지 않다가 갑작스레 연기처럼 공중으로 흩어졌다.

“이거 꽝을 뽑아버렸군요.”

 연기만큼이나 허무하게 사라진 총성 대신 곧이어 맹수의 으르렁거리는 울음소리가 회랑을 가득 뒤덮었으며 칠흑 속에서는 새빨간 수십 개의 눈동자가 급속도로 피어났다. 길을 잘못 든 그는 괴물들에게 포위된 채 두 자루의 무장권총만을 의지해 어둠을 노려보았다.






 리아는 어둡게 흐린 회랑을 말없이 나아갔다. 대화할 상대가 없으니 할 말도 없는 건 당연했다. 어떤 사람들 중에는 불안하면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혹은 소수를 생각한다거나 하는 부류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녀에게 그런 습관은 없었다.

 애초에 흡혈귀는 고독에 강하다. 그들은 절대 무리 짓는 법이 없으며 대부분 따로 떨어져 살아간다. 만약 그들이 마음먹고 무리를 지어 행동했다면 지구상에서 인간의 주도권 따위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사라졌으리라. 그러나 인간에게는 다행히도 그들은 서로 너무나도 달랐으며 따라서 절대 어울리는 법이 없었다.

 흔히 사람들은 괴물 같은 힘을 가지고 사람의 피를 빠는 악마를 흡혈귀라 부르지만 실상 그중 들어맞는 건 인간과 닮은 외견일 뿐으로 존재형태에 있어서는 각기 다양한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리아처럼 인간의 초상에 홀린 자가 있는가 하면 마치 자신을 광물처럼 취급해 어느 한 장소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자도 있다. 혹은 발생 시 인간의 의지보다는 대자연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아 강대한 힘을 가지고도 아무런 목적 없이 단순히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이들도 있다.

 사실 인간사회에 알려진 흡혈귀란 굉장히 적은 수로써 실질적으로는 교회조차 전체적인 면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들 중 굳이 인간과 접촉하려 하는 괴짜는 리아와 같이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받아 비슷한 사고회로를 구축한 일부 무리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인간과 어울리게 된 그런 종류의 흡혈귀였기에 고독에 강할지언정 그것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무도 없는 무한회랑에 홀로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는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가장 마음을 사로잡는 생각은 역시 하린에 대한 일이었다. 그녀는 이제야 자신의 마음을 겨우 눈치 챌 수 있었다. 신부는 리아를 두고 그녀가 바랐던 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초상이었을 뿐이라 말했다.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 인간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치. 인간이기에 바랄 수 있지만 또한 인간이기에 완벽하게 추구할 수 없는 모습에 눈이 홀렸을 뿐이라 그는 지적했다.

 그건 분명 옳은 말이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틀렸다. 리아가 바란 건 인간의 초상 따위가 아니다. 그녀가 바란 건 단지 자신이 원한 단 한 사람의 온기였을 뿐이다. 그것이 옛날에는 디오였고, 이제는 하린이다. 그녀가 인간의 초상과 닮으려 한 건 자신이 좋아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원했던 사람이 바라는 이상형이기에 그것을 추구한 것이다. 그녀가 수많은 세월을 속죄하기 위해 뛰어다닌 건 디오의 과오를 속죄하기 위해서였지, 인간의 잘못을 씻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아아, 그렇구나. 나는…….”

 마치 색이 빠져나가듯이 그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져간다. 웃음기는 사라지고 딱딱하게 굳은 무표정. 그리고 그 위에는 다시 희미한 웃음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건 여태까지 그녀가 짓던 따스하거나 즐거워하거나 난처해하는 등의 인간다운 웃음이 아닌 모든 더러움을 제거한 순백의 미소였다.

 자고로 현자가 벗해야 할 것은 고독이라 했던가. 가영이 꾸민 계략에 걸려들어 시간을 끄는 동안 리아는 그동안 겪은 일을 정리하고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해답을 낼 수 있었다. 참으로 길고도 짧은 시간이었다. 수백 년을 넘나든 시행착오 끝에 그녀는 간신히 자신이 원하는 바가 어떤지 찾아낸 것이다.

“그저 함께 있어주기만 하면…….”

 그것이 기나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녀가 얻어낸 해답. 한심할 정도로 단순한 기분이었지만 그녀는 그걸로 만족했다. 아마 앞으로도 곤란한 일은 산더미처럼 쌓일 것이고, 흔들릴 때도 많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만 봐도 중추를 쓰러뜨려 살아남느냐, 아니면 신하시의 수십만의 인간들과 함께 먹혀버리느냐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다. 허나 자신이 뭘 위해 싸우는지만 알고 있다면 망설일 것은 절대 없다.

 그녀의 기분을 대변해주기라도 하듯이 한없이 늘어선 복도 앞에 문득 문이 하나 나타났다. 검고 희미한 세계에서 유독 혼자만 뚜렷하게 색깔을 과시하는 저택의 문은 마치 지옥의 입구를 나타낸 저명한 조각가의 작품을 연상시켰다.

“이 앞에 있어.”

 제비뽑기에 당첨된 건 바로 자신. 리아는 직감적으로 이 앞에 적이 있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품속의 은촛대를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검은 사제복 자락을 망토처럼 휘날리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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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3.12.15 14:00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아아, 작중의 세계관에서 손꼽힐만한 실력자 2人을 저토록 수세에 몰리게 만들다니...

    단지 과거의 파편 중 일부가 되살아난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을 보면서, 과거 제6번째 종말 현상의 실체는 정말로 무시무시한 수준이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실감할 수 있었답니다.

    심지어는 흡사 SF 장르의 서바이벌 호러물인 『데드스페이스』의 여러 공간들을 연상케하는 이질적 공간들을 지나,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되었다는 로댕의 역작 『지옥문』과도 같은 최후의 출구로 이어지는 종말 현상의 내부 묘사에서는 잠시나마 일종의 전율마저 느껴지더라구요~ +_+)b


    한편으로는 어떠한 의미에서 기묘하리만치 닮은 꼴의 두 사람이었으나, 기구한 운명의 변주 앞에 각자 물러설 수 없는 대척점에 서버리고야 만 리아와 가영의 상황이 일말의 안타까움으로 다가오기도 하더랍니다.

    만약 IF 시나리오의 흐름 중 하나로써 과거 리아의 연심을 잡아끌었던 디오가 희대의 악인으로, 또한 현대에서 가영이 연인의 사후 만나게 된 존재가 제6번째 종말 현상의 말단이 아닌 온전히 구현된 낙원의 경계선(즉, 『실패하지 않은 천사의 낙원』)이었다면 두 사람의 처지는 정 반대로 뒤집혀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예요. [ 이 상황이라면 가영이 일종의 성녀 포지션으로, 교회의 전적인 지원을 받으며 싸우고 있었을지도...? ]

    후후, 만약 그처럼 또다른 가능성의 세계를 다른 평행 차원의 이야기도 상당히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결국 그녀들은 너무나도 다른 존재였기에 묵상 속에서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얻은 한줄기 깨달음의 형태마저 크나큰 간극을 지니고 있었으니...


    뭐 어쨌든 승리는 극강 순애보의 眞히로인 속성 소유자인 리아에게 돌아가는 것이 당연ㅎ... (퍽퍽)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3.12.16 00:49 신고 address edit/delete

      말씀처럼 작중의 제6현상이 세계를 집어삼키는 강대한 힘이다 보니 그 파편조차 웬만한 실력자들은 범접하기 힘든 위협이 되어 버렸네요. 5년 전의 천사들이 관련된 대재앙에서도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전능자의 활약이 없었다면 자칫하면 지구 전체, 최소한 극동지역은 절멸지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위기였으니 주인공 일행이 그 잔재 처리에 고생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으, 부족한 글을 다른 유명한 작품에 견주어 너그럽게 봐주시니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저 조금이라도 내용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성공하여 재미있게 봐주셨다면 그만큼 기쁜 일도 없을 것 같아요^^


      음, 정말 다른 평행세계, 혹은 세계선 등에서 같은 인물들이 달라진 인과에 의해 또 다른 일면을 보이는 것도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슈타인즈 게이트에서 세계선에 따라 생판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오카린의 경우라든지, 올해 재미있게 즐긴 CCC에서도 기존 Fate 시리즈의 인물들이 별개의 평행세계에서 다른 인생을 살며 보이는 색다른 일면이 참 매력적이었던 기억이 나요(가령 린은 중동인과의 혼혈로 미래 서구재벌에 대항하는 금발의 레지스탕스라든지, 사쿠라는 문셀 측의 성배전쟁 도우미AI라든지 등등).

      저도 언젠가 기존인물들을 토대로 또 다른 세계에서의 색다른 이야기를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있네요~ ...물론 그렇게 하려면 지금 쓰고 있는 소설들의 토대부터 확실하게 다지는 것이 우선이겠지만요^^;;


      말씀처럼 리아는 작중에서 전투력으로만 따지면 최상위급임에도 불구하고 속성으로 따지자면 전통적인 히로인의 위치에 가까운 것 같네요. 사실 처음에는 하린이 그러한 위치에 있을 예정이었는데, 둘의 성격 탓인지 어느새 위치가 서로 바뀌고 만 듯^^;;;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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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 미완성 교향곡Symphony (6)


 검푸른 바다 위를 표류하는 상처 입은 고래처럼 제6현상에 오염된 회백색 숲이 거칠게 난동을 부린다. 늘었다 줄었다 하는 수만 가지의 괴기스러운 수목들과 보름달마저 일그러뜨릴 기세로 드높게 울려 퍼지는 포호는 살아있는 모든 걸 저주하는 또 다른 표현이다.

 숲은 이미 하나의 거대한 생물이었다. 종말이라는 태아를 잉태하고 있는 숙주.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괴물은 무사히 자신의 아기를 출산하기 위해 세계라는 양분을 섭취해야만 한다. 끝없이 확장하고 한없이 집어삼키는 것만이 최초 검은 안개의 모습을 띠고 있었던 종말현상이 가진 껍질의 궁극적인 역할인 것이다.

 그러나 괴물의 그 숭고한 활동은 한 무리의 작은 생물들에게 방해받고 있었다. 검은 사제복을 걸친 붉은 갈색머리의 수녀와 금발의 소녀를 필두로 한 흰색 예복의 성가대원들. 이들은 종말현상의 확장을 막고 안으로 침투한 리아 마리아와 레오 신부, 이 두 사람에게 닥칠 위협을 줄이기 위해 온힘을 다하는 중이었다. 비록 직접적인 타격은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밖에서 피해를 입히면 반드시 영향을 미쳐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전개가 될 것이라는 게 이레네 수녀의 생각이었다.

『언니, 비오 수사님이 쓰러지셨어요!』

 그러나 현실은 생각처럼 만만치 않았다. 레지나가 보낸 영자통신은 이걸로 벌써 3번째다. 여러 차례에 걸친 힘의 발산에 견디지 못하고 성가대 중 한명이 정신을 잃은 것이다. 이들처럼 목소리를 통해 영력을 제압하는 능력은 자신의 생명력을 온전히 방출하는 것으로써 레지나처럼 천부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을 제외하면 그밖에는 금방 체력을 소진하고 만다.

『어쩔 수 없어. 곧 공격을 재개할 테니까 그 때까지 조금만 버텨줘. 여기서 밀려버리면 우리는 둘째 치고 레오 녀석부터 당할지도 몰라.』

 이레네는 급하게 잔 다르크를 조정하며 통신을 보냈다.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는 만큼 아직 불완전한 부분이 많은 이 시험기의 가장 큰 결점은 무엇보다 장시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3번 연속으로 발사하는 게 한계였으며 그 이상 무리하게 쏴버리면 부서질 가능성이 컸다. 그뿐만 아니라 재차 포격하기 위해서는 열을 식히고 발사충격으로 손상 입은 부품을 그때그때 교체해주어야 했다. 그건 아무리 숙련된 솜씨를 자랑하는 그녀라 해도 얼마간 시간을 소모하는 일이었으며 횟수가 늘어날수록 조정시간도 비례해서 늘어났다.

『레오 신부님이……. 예, 알겠어요. 좀 더 힘내볼게요!』

 그의 안부가 염려된 걸까. 레지나의 굳은 의지가 영자통신을 타고 전달되는가 싶더니 일순 결원과 축적된 피로로 점점 약해져 가던 성가대의 힘이 다시금 강화되었다. 20명에 달하는 인원이 함께 발하는 광범위 위력행사에도 불구하고 레지나 혼자의 마음가짐으로 이 정도 상승을 보이다니, 확실히 교회의 수뇌부가 이 금발소녀의 능력을 탐하는 것도 아주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물론 이레네는 레지나가 십자죄인에 소속되는 걸 원치 않는다면 최선을 다해 밖으로 몸을 뺄 수 있게 도와줄 작정이었으나, 지금만큼은 순수하게 그녀의 재능에 감사했다. 솔직히 레지나가 없었다면 현재 성가대의 인원만으로는 얼마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현란한 금빛물결은 사나운 파도를 일으키며 회색 덩어리를 사정없이 압박해 들어갔다. 잔 다르크의 포격이 맹수를 다스리는 채찍이라면 성가대의 노래는 맹수를 가두는 우리. 만약 성가대의 힘이 없었다면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종말현상의 껍질에 상처를 입힌다 해도 멈추지 않는 숲의 증식은 이미 도시의 절반 이상 집어삼켰을 것이다.

“조정완료. 이걸로 10번째 포격이네.”

 이레네는 잡념을 떨치듯이 고개를 흔들고는 주변에 널려있는 수리장비와 엉켜있는 전선들을 신경질적으로 밀쳐내며 잔 다르크를 번쩍 들어올렸다.

『성녀님. 착탄지점의 정보수신을 부탁드립니다.』

『예. 공유합니다.』

 이레네 수녀의 요청에 따라 만물을 통찰하는 성녀의 눈은 그녀에게 순식간에 회색 숲 주변의 공간정보를 전송하였다. 영력이 높아 성녀의 힘에 대해서도 내성을 가지고 있어 극도의 불쾌감을 느끼는 베르나르도 신부와는 달리 도리어 이레네 수녀는 보통 사람 이하의 낮은 영감을 가지고 있는 덕분에 아무런 저항 없이 온전히 파티마의 눈을 빌릴 수 있는 것이다.

“제10파 발사!”

 수신된 정보해석이 끝난 이레네 수녀가 방아쇠를 당기자 잔 다르크는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빛을 방출했다. 성스러운 녹색의 빛은 불안정한 영자무리를 쉴 새 없이 자극했고, 곧 하늘을 뒤흔드는 폭발음과 대지를 작열하는 불꽃이 숲을 불태웠다.
 그와 동시에 쉬익 하는 수증기가 거대 라이플로부터 확 올라왔다.

“으, 뜨거워……!”

 이레네는 반발장갑을 꼈음에도 불구하고 후끈 달아오르는 열기에 그만 총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잔 다르크와 세심하게 연동된 그 특수장갑은 총의 무게나 반동은 확실하게 흡수할 수 있지만, 그 외의 힘까지 억제하는 건 아직 무리였던 것이다.

“후우, 이래선…….”

 다시 처음부터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마 잔 다르크의 내부는 엉망진창으로 이번에는 거의 새로 총을 하나 만드는 셈으로 부품을 갈아치워야 할 것이다. 그녀는 과열된 총신과 비명을 지르는 동력원의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우울한 추측이 맞아들었음을 확신했다. 이는 방금 떨어뜨린 충격 때문에 망가진 건 아니라 장시간 무리하게 혹사시킨 탓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사실 그녀는 도중에 수리를 겸했다고는 해도 10번이나 이 총을 큰 무리 없이 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잔 다르크에게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한없이 가느다란 유리세검으로써 그만큼 이 시험작은 불안정하고 섬세했다.
 이레네 수녀는 예비부품을 보관함에서 꺼내며 거칠게 소리쳤다.

“이게 전부 꽉 막힌 꼰대 탓이야!”

 그녀의 원망은 빈첸시오 추기경의 이름 아래 실질적으로 십자죄인의 통솔을 맡고 있는 블라시오 대주교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위치로 보나 나이로 보나 저 높은 곳에 있는 존경해야 할 상관이었으나 어차피 주변에는 아무도 듣는 이가 없으니 부담 없이 입이 열린 것이다.

 본래 그녀가 이 작전에 지원했을 때는 잔 다르크 3기를 소지할 수 있도록 요청서를 냈었다. 바로 지금 같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준비로써 부서지기 쉬운 잔 다르크 하나로는 유사시에 신속하게 대처하기가 어렵다고 판단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종결정권한을 가진 블라시오 주교는 어째서인지 단 1기밖에 사용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굳이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교회의 수뇌들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일개 수녀의 손에 이처럼 강력한 병기가 들어가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물론 그 걱정이 아주 일리가 없지는 않았다. 잔 다르크의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는 보다시피 지속적인 연사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3기를 한꺼번에 사용할 수 있다면 그 약점을 쉽게 극복할 수가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준비 여하에 따라 수녀 혼자 교황청을 테러하는 일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분명 이건 윗사람들이 달갑게 여길 수 없는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뛰는 입장으로서 이 기우 아닌 기우는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이쪽은 목숨을 걸고 있다. 지금도 레오 신부와 그 악마는 적의 뱃속에서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는 가운데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레지나를 비롯한 성가대원들도 혼절해가면서까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레네 수녀 역시 손에 기름때 묻혀가며 정신없이 사격과 수리를 반복하고 있는 형편이다. 만약 여기서 이들이 무너진다면 최소한 이 도시의 사는 사람들은 끝장이리라.

 그 늙은이들은 이 절실함을 알고나 있는 걸까. 이레네 수녀는 확신했다. 알고 있으리라. 알고 있으니까 하는 거다. 여기서 실패한다고 해도 당장 자신들에게 위협은 닥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이런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 이상의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이레네 수녀는 어지러운 머리를 붕붕 흔든 후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힘껏 소리쳤다.

“망할 노친네들! 노망이나 걸려버려라!”

 그녀는 “아, 개운하다”고 중얼거리며 레지나에게 영자통신을 보냈다.

『잠깐 쉬어도 좋아. 다들 15분 정도 휴식하고 있으라고 해.』

 방금 전까지 흥분한 채 씩씩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이레네 수녀의 감정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영자통신 시에는 상대방에게 기분까지 온전히 전달되기 때문에 그 전에 일부러 감정을 발산해 불안감이나 원망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을 싹 흘려버린 것이다. 확실히 그녀에게는 한 부대를 이끌 만한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이 있었다.

『그, 그래도 괜찮을까요? 종말현상의 힘을 계속 소비시키지 않으면 안에 들어간 레오 신부님이 위험한 게…….』

『아, 괜찮아, 괜찮아. 지금까지 계속 타격을 가했으니 당분간은 녀석도 수복하는 데 여념이 없겠지. 오히려 이 이상 공격하면 내부까지 손상을 입을지도 몰라. 자칫하면 같은 편을 쏘게 될 위험이 있어.』

『그, 렇군요. 그럼… 조금만, 조금만… 쉴… 게요…….』

 순식간에 기색이 약해진 것으로 봐서 아무래도 레지나는 곧장 잠들어 버린 모양이다. 선잠은 영자통신으로도 깨울 수가 있으니 기절한 것만 아니라면 어설프게 쉬는 것보다 훨씬 낫다.

“미안…….”

 이레네 수녀는 거짓말을 했다. 상황은 잠깐 쉬어도 될 만큼 낙관적이지 않았다. 지금은 아무리 포를 쏘고 쉬지 않고 성가를 불러도 부족할 만큼 위험한 지경인 것이다. 제6현상의 힘도 무한일 리는 없다고 그녀 자신의 입으로 말했지만, 그 추측을 무색하게 할 만큼 종말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는 무진무궁했다.

 하지만 마음만 앞선다고 대체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잔 다르크는 망가져 재발사까지는 최소 15분 이상 걸린다. 성가대의 노래는 원체 체력소모가 심한 데다 지금 같은 경우는 온힘을 다 짜내고 있기 때문에 더욱 버티기 힘들다. 만약 여기서 더 몰아쳤다가는 반시간도 되지 않아 절반 이상이 실신할 것임에 틀림없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지금은 이대로 잠깐 쉬게 해주는 편이 좋다. 싸움은 생각보다 길어질 것이다. 레오 신부와 리아 마리아를 믿고 그들이 중추를 제거할 때까지 이 이상 종말현상이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게 남은 이들의 사명인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는데도…….

“제길……!”

 그녀는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초조한 마음에 손이 떨려 기하학적으로 생긴 투명한 드라이버를 땅바닥에 떨어뜨린 것이다. 평소 1나노미터의 오차도 보이지 않고 정밀작업을 행하던 그녀답지 않은 실수였다. 스스로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가자!’고 마음먹었으면서도 뜻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숲을 불태우지 않으면 레오와 리아가 잡아먹히기라도 할 것만 같은 착각에 도저히 기분이 진정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단순한 착각만이 아닌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추측이기도 했다. 밖에서 계속 압박을 가하는 한 종말현상이 가진 힘 중 일부는 방어와 수복에 쓰일 테지만 공격을 끝난 지금 그 여분의 에너지가 어디에 사용될지는 굳이 상상해보지 않아도 쉽게 짐작되는 일이다.

“제발, 제발 멈춰라…….”

 그녀의 중얼거림은 어느새 기원으로 바뀌었다.
 손의 떨림이 잔 다르크를 수리하는 데 방해된다. 수리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의 목숨 또한 위험해진다. 아무리 마음만 급해봤자 그 둘에게는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라이플을 수리해 다시금 압박을 가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는 떨림이 멎기를 자신에게 끝없이 부탁하고 또 부탁했으나, 아무리 되뇌어도 쉽사리 불안은 가라앉지 않았다. 자기암시에 지친 그녀가 대신 신에게 불평을 토하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 언뜻 황금빛 구체가 보였다.

“설마, 저 빛은 베르나르도 신부님의……!”

 이레네는 잠시 총을 수리하는 것조차 잊고 하늘에 떠있는 황금의 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번 권능행사를 눈에 담은 자는 절대 그 광채를 잊지 못한다. 보는 이 모두의 눈을 빼앗는 올곧은 금색의 빛. 다채롭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영원무궁 변하지 않는 영세(永世)의 축복. 믿는 이들에게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계단을 약속하는 그 빛이 밤하늘의 한편을 밝히고 있다.

 금색구체는 잠시 허공에 멈춰 빛을 발하더니 다시 속도를 내며 낙하해 곧장 숲 안으로 들어갔다. 황금의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녀도 번뜩 정신이 들었다.

“성경의 권능은 자기 자신에게는 행사할 수 없어. 그렇다면 저건 공간정형자일 거야. 역시, 역시 전쟁광! 역시 베르나르도 신부님이야! 이 상황에서 설마 구원투수를 보내줄 줄이야……!”

 살짝 비아냥거림이 섞인 말을 기쁘게 늘어놓으며 이레네 수녀는 고개를 내려 잔 다르크의 수리에 온정신을 집중했다. 이제 그녀의 손은 전혀 떨리지 않았다.






 말려들었다. 지금은 시설에 끌려가고 없는, 내 오랜 친구 미리는 언젠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까. 아마 그건 독서실에서 공부를 끝마치고 커피를 한잔하던 내가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다 문득 감상적인 생각이 들어 이상한 질문을 한 게 시작이었을 것이다.

“원망스러워? 아니면 슬퍼?”

 난데없이 이런 말을 던진 건 비단 달이 아름다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옆에 잠자코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미리의 얼굴이 마치 울 것 같이 보였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나온 물음이었다.

 미리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병을 감추고 있었다. 그녀가 가진 병은 일종의 결벽증, 혹은 대인기피증에 가깝다. 그녀는 누군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대며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 참을 수 없는 감정에 결국은 폭발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병원에서 치료나 상담이라도 받으면 좋을 테지만, 얼마 전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은 곧장 시설에 강제 격리한다는 특별법이 제정된 탓에 그것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요 10년 사이 강력범죄가 꾸준히 증가해온 탓에 마녀사냥식의 여론이 조성돼 마침내 그런 정신 나간 법안이 통과된 것이다. 한번 시설에 끌려간 사람은 범죄자처럼 ‘주홍눈’이란 각인 남기 때문에 퇴원을 해도 정상적인 생활을 보낼 수가 없다. 일상을 지키고 싶다면 아예 처음부터 병을 감추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항시 사람들과 접촉하며 받게 되는 비정상적인 스트레스. 혹시 문제를 일으키면 당장 시설로 끌려갈지 모른다는 불안감. 미리는 다른 십대 사춘기 소녀들이 가지고 있을 만한 고민거리 외에 그런 커다란 짐들을 껴안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지금 상황은 위태로운 줄타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그녀는 별 감흥 없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둘 다. 하지만 조금 달라.”

“다르다니 어떻게?”

 난 이쯤에서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에서 나오는 질문을 막을 수가 없었다.
 미리는 조금 생각하더니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오히려 반문했다.

“너는 우리가 이 세상에 무슨 의미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해?”

 갑작스러운 화제전환에 나는 제대로 따라갈 수 없어 말을 더듬었다.

“그, 글쎄, 굳이 말하자면…… 아, 대답하기 힘드네. 그래도 뭔가 태어났다는 건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그걸 찾아가는 것도 인생을 사는 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 시절의 나는 신이라든가, 운명이라든가, 인과응보라든가, 뭐 그런 낭만적인 개념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다. 난 자신이 생을 받은 데는 분명 무슨 의미가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미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없어. 이 세상에는 말이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다른 누군가가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스스로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어. 그러니 의미 같은 건 없는 거야. 그런 건 전부 허상에 불과해.”

 놀랐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 미리가 그런 부정적인 발언을 했다는 것에 놀랐다. 이건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절대 낙관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던 그녀에게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난 무심코 꺼낸 주제넘은 질문이 뭔가 잘못 건드렸다는 걸 깨달았지만 도저히 대화를 멈출 수가 없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넌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

 미리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말려든 거야.”

“말려들었다고?”

“그래, 우리는 완전히 말려들고 말았어. 이미 누군가 제멋대로 구축한 세상에 원하지 않았는데도 태어나 처음부터 정해진 능력과 환경을 부여받고 거기에 맞춰 일생을 춤춰야 하지. 상황은 노력하는 것에 따라 바꿔갈 수 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것조차 허울 좋은 속임수야. 진짜 뭔가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인데다, 그 역시 정해진 한계에 포함되는 건데 말이야. 이런 걸 말려들었다고 말하지 않으면 뭐라 말하겠어?”

 염세적인 생각. 비관적인 말투. 선천적인 결함과 사회적인 부조리에 정면으로 맞서던 이 소녀의 입에서는 절대 나오지 않을 줄만 알았던 말이었다. 아니, 오히려 직접 마주하고 있었던 만큼 사실 그 마음은 전부터 부정적인 감정에 물들어 버린 건 아닐까.

 확실히 세상은 불공평하다. 전쟁, 평화, 공황, 왕족, 귀족, 천민, 부자, 서민, 거지, 남자, 여자, 선진국, 후진국, 천재, 범인, 장애인, 사생아, 고아……. 세상에는 정말 선택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며, 대개는 그런 것들이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난 가만히 유하린이란 자신의 짧은 인생을 돌아보았다. 마찬가지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연구에 바빠 자식들에게 무관심한 아버지, 책에 푹 빠져 곧잘 혼자만의 세계에 몰두하는 오빠, 천재인 아버지와 오빠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 그런 건 전혀 원하지도 않았는데 뭔가 스스로 해보기도 전에 전부 결정되어 지금은 자신의 인생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미리도 똑같다. 타인과 어울리기 힘들게 만드는 정신병. 그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생활기반이 무너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래서 결국 치료를 포기하게 만들어버린 이 사회. 그녀는 이러한 것에 가장 크게 좌지우지되고 있으면서도 어느 하나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분명 우리는 세상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존재인 것이다.

 나는 미리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위화감을 느꼈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미리는 전혀 절망적인 기색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화내용에 비해 미리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고 어조는 언뜻 밝아 보였다. 그러고 보면 방금 전 대화에서 그녀는 증오와 슬픔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난 그걸 생각하며 물었다.

“그래도 넌 싸우는 걸 포기하지 않고 있잖아. 노력해서 뭔가를 바꾸는 것조차 한계라는 범위에 포함된다면 모순되는 거 아닐까?”

 미리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간결하게 답했다.

“말려들었으니까.”

“말려들었으니까, 라고?”

 아까랑 같은 대답. 나는 앵무새처럼 미리의 말을 반복하는 자신이 참 한심하다고 느꼈지만 별다른 말을 찾을 수 없었기에 또 다시 반문하고 말았다. 뭔가 선문답이라도 하는 듯이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대화를 멈추기는 싫었다.

“응. 어이없지 않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정신 차리고 보면 뭔가 책임을 잔뜩 지고 있어. 정말 바보 같지. 근데 그 책임에 눌려버리거나 무겁다고 도망치는 건 더 바보 같아. 그래서 조금 더 나은 바보가 되기로 했어.”

 난 어쩐지 미리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오기라는 거네.”

“그런 셈이야. 게다가 설령 내가 멈춰 선다고 해도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세상은 내 짐을 덜어줄 사람은커녕 오히려 그 위에 더 얹어놓을 사람으로 가득하지. 그딴 불로소득자들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결국 끝까지 달릴 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혹시…….”

 미리는 살짝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계속 살다보면 혹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 어리석은 연쇄를 끊어줄 해답을 말이야.”

 그러니까 죽어도 포기할 수 없어.
 분명 바로 옆에 있는 나까지 잘 안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린 소리는 틀림없이 저런 말이었을 것이다. 미리와 어울리게 된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난 그녀가 어떤 성격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뒷말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병으로 고통 받고 있으면서도 맑고 투명한 성격이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그런 흘러간 추억을 떠올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절로 목소리가 싸늘해진다.

“기분 나쁜 공간이야.”

 사방은 온통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다. 그것도 본래 자리 잡힌 형태를 버린 채 우스꽝스러운 모양으로 아무렇게나 널려 있다. 한때는 익숙했던 풍경들은 비틀리고, 녹아들고, 변색되어 현실감을 잃어버린 광경은 구역질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이 질서 없고, 위치 없고, 존재조차 없이 한군데 녹아드려는 최악의 모습을 굳이 표현하자면 부정형의 공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란 인간은 아무래도 공간정형자라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것과 나는 천적,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힘을 쓰는 방법은 완벽히 숙지하고 있다. 여태까지 착각하고 있었지만 내 능력의 정체를 자각하자마자 단번에 쓰임새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아마 신부가 준 서적의 기억이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빠르게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으리라.

 난 알고 있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역겨운 풍경은 아주 간단히 없앨 수 있다. 오히려 이 공간은 신부와 처음 맞닥뜨렸던 검은 안개 속의 침식공간보다 어설프다. 여길 소거하는 건 옷의 먼지를 터는 것만큼 쉬운 일이다. 난 그저 명령만 하면 된다. 그래, 팔을 돌리듯이, 다리를 굴리듯이 자연스럽게…….

“으……!”

 그런데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아주 쉬운 일인데도 힘을 발휘할 수가 없다. 정말 손만 살짝 움직이면 될 정도로 단순한 일인데도 어떤 행동도 취할 수가 없다.

 숲을 감싸고 있는 이 회색의 이공간(異空間)에 대한 구조는 들어선 순간부터 단번에 파악했다. 지금 서 있는 곳은 입구에 지나지 않는다. 과일로 따지자면 껍질에 불과한 것이다. 씨앗이 있는 안쪽까지는 한참 파고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 껍질을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

“아…….”

 떨린다. 떨린다. 떨린다.
 아래는, 이 안쪽에는 무서운 것이 있다. 아주 어둡고 칙칙하며 끔찍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 또한 발을 디밀은 순간부터 알았다. 그 여자, 가영이란 이름의 맹안의 검은 마녀는 자신과 마주친 이후로 뭔가 확실한 걸 준비해온 것이다. 나는 그것이 내게 있어 죽음 그 자체가 될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눈치 챌 것이다. 여기서 소동을 부리면 그 괴물이 깨어날 것이다. 전과 달리 단번에 공간의 내용물이 파악되는 지금의 내게 있어 제6현상의 중추가 품고 있는 거무죽죽한 어둠은 바로 눈앞에 닥친 위협과도 같이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발을 움직이면 당장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나락으로 떨어져 버릴 것만 같은 착각에 난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가 없었다.

 종말현상이 이대로 계속 퍼져 나가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목숨이 위험하다. 신부는 목숨을 걸고 날 이곳으로 보내주었다. 리아는 날 위해 숙적이었던 교회와 손을 잡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만약 여기서 도망친다면 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나를 믿어준 이들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 된다. 그런 파렴치한 짓은 난 절대 하기 싫다.

 그래도 몸이 움직이지가 않는다. 입술이 열리지 않는다. 능력을 발휘해 이 더러운 공간을 치워버릴 수가 없다. 모든 건 두려움, 거대한 손아귀에 목이 졸려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죽어버릴 것만 같은 압박감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만큼 저 아래에 있는 건 압도적인 어둠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때 음악이 들려왔다.

 조용하고 느린, 마음이 차분해지는 아름다운 곡. 이런 뒤틀린 풍경이 아니라 본래 사람이 즐겨야 할 밤의 정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음악이다. 가슴 졸이는 이쪽 사정 같은 건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무심하게 흐르는 곡조가 버려진 것들이 춤추는 세상에서 선명하게 울린다.
 드비쉬의 달빛(Clair de Lune). 이건 내 핸드폰 벨소리였다.

“말도 안 돼…….”

 지금 이 공간은 바깥의 모든 것들과 차단되어 있을 터. 만약 가영이란 숙주가 사람이 아니었다면 분명 공기도 중력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철저하게 폐쇄된 공간에 전파 따위가 통할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핸드폰은 쉬지 않고 선율을 연주하고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찍혀있는 발신인은 ‘괴력녀’. 그건 내가 멋대로 정한 혜리의 별명이었다. 어째서 지금 그녀가 전화를 하는 걸까. 아니, 그 이전에 어떻게 할 수 있는 걸까. 쉬지 않고 떠오르는 여러 가지 의문으로 복잡한 머리를 기울이며 나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 세요?”

“왜 이렇게 늦게 받는 거야!”

 버럭 호통 치는 화난 목소리. 그건 틀림없는 혜리의 음성이다. 정말 그 녀석이다. 말도 안 된다. 방금 전까지 안테나는 단 한 개도 서있지 않았는데 어떻게 혜리가 전화를 할 수 있는 걸까.

“너 어떻게 전화를 건…….”

“너 지금 어디야?”

 상대는 말할 틈을 전혀 주지 않았다.
 나 역시 혼란스러웠던 탓에 그만 순순히 묻는 말에 대답하고 말았다.

“지금 숲속인데…….”

“뭐? 숲이라고?”

 소스라치게 놀란 음향이 귀를 때린다. 아차, 실수했다. 예상 못한 상황에 그만 넋을 잃고 사실대로 말해버린 것이다. 나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수습해야겠다고 느꼈다.

“아니, 집 근처 숲속에 있는 공원, 이야. 리아랑… 그래, 리아랑 산책 나왔어.”

 내가 생각해도 참 뜬금없는 답변이었지만 지금은 그 정도밖에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당연히 혜리는 “뭐야?”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밤중에 왜 그런 델 갔어? 위험하니까 빨리 들어가!”

 급박하고 흥분된 음성. 왠지 평소 혜리의 태도와는 뭔가 다르다. 애초에 그 녀석이 내가 왜 이 시간에 뭐하는지 신경 쓰는 걸까. 지금까지는 한 번도 이런 전화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화난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불안한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위험하다니 무슨 말이야?”

“……!”

 건너편에서 숨을 삼키는 기척이 들려온다. 순간 어떤 생각이 머리를 섬광 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혜리도 이 일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는 걸까? 지금 신하시를 감싸고 벌어지는 이 끔찍한 일에 대해서…….

 그렇다면 위험하다. 검은 안개는, 이 종말현상은 사람이 함부로 관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괜한 호기심을 가졌다가는 형사 아저씨처럼 죽고 만다.
 나는 조급한 마음에 추궁하듯이 다그쳐 물었다.

“응? 뭐야.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아니, 그게…….”

 혜리는 어딘가 찔리는 거라도 있는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역시 정곡을 찔린 건가. 녀석은 분명 검은 안개에 대해 알고 있는 거다. 그런데 막상 말을 꺼내려니 다른 사람이 쉽게 믿어줄 만한 내용이 아니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안개의 형상을 한 검은 괴물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말했다가는 보통 미친 사람 취급당할 게 분명하다.

“설마, 너…….”

“아니, 아니야! 갑자기 걱정된다고 전화한 건 아니니까 이상한 상상하지 마!”

“……뭐?”

“그냥, 요즘에 실종사건이 늘어났다는 말을 들어서……. 너 혼자 살잖아! 그래서 그냥 전화한 거야. 생각난 김에 말이지. 그래, 생각난 김에 한 것뿐이야. 그러니까 무사하다면 다행이지만 착각하지 말고 빨리 집에 들어가. 그럼 끊는다!”

 혜리는 잔뜩 높게 올라간 목소리로 지리멸렬한 말을 일방적으로 늘어놓고는 툭하니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건…….”

 다시 바라 본 핸드폰은 여전히 통화불능 상태였으나, 혜리와 어떻게 연결이 되었는지는 어쩐지 짐작이 간다. 전화를 끊는 순간 감지한 기척은 예전 내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밤에 만났던 어떤 사람의 분위기와 닮아 있었다. 그렇다면 분명 바로 그 사람은……. 하지만 그런 건 지금 별로 중요하지 않다.
 뚜-뚜-하는 통화음을 가만히 들으며 나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하, 하하하. 그 바보는, 정말…….”

 뭔가 뜨거운 게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가슴이 벅차다. 방금 전까지 귓가에 울리던, 혜리답지 않게 흔들리고 주춤거리던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나는 훌쩍였다.

 이런 나라도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 겁 많고, 이기적이고, 아무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어설픈 인생이지만, 그래도 떠올려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갈 수밖에 없다. 대신 목숨을 던진 아저씨를 위해서, 여기까지 무사히 보내준 신부님을 위해서, 날 걱정해주는 친구를 위해서, 그리고 먼 과거부터 고생만 해온 그녀를 위해서도 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럼 불안의 중심으로 뛰어들어 볼까.”

 물론 무서운 건 사라지지 않는다. 떨림도 여전하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발에 힘이 들어간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그저 이 더러운 공간을 깨끗이 만드는 것뿐. 그건 지금 어느 때보다 필요한,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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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3.12.10 23:21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잔다르크는 야전 시험 중인 프로토 타입의 병기답게, 막강한 위력은 물론 그에 상응하는 불안정성 역시 지니고 있었던 것이로군요.

    최소한 그 복잡한 설계 구조 및 내구도의 취약성을 고려해볼 때, 당초 이레네 수녀의 요청대로 추가적인 여분의 장비가 함께 지급되어야 했을 것인데...

    역시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라고 해야할까, 일견 퇴마행의 길 하나만을 바라보며 자신의 모든 것들을 내던질 수 있을 것처럼 보이던 십자죄인의 사제회 내부 역시 실상은 전장으로부터 다소 거리가 먼 고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소위 말하는 '어른의 사정'에 따른 이런 저런 고질적 문제들이 존재하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테니 말이예요.


    으음, 그리고 한편으로는 왠지 파티마의 성녀라는 자리도 알고보면 꽤나 고된 사실상의 명예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넓은 세계의 곳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 중인 여러 사건들을 주시하는 것은 물론 그에 따른 막대한 양의 정보들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분류하여 적재 적소의 시점에 분배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범인의 영역을 아득하게 뛰어넘은 것이기에...

    물론 그녀 단독으로 그 모든 과정들을 수행해내는 것은 아니겠지만, 얼핏 생각해 볼 때에는 십자죄인의 주요 거점에 SF 세계관 속에 간혹 등장하는 양자 컴퓨터급의 처리 능력을 갖춘 설비가 갖추어져 있다거나, 혹은 파티마의 성녀 자신이 올림피아 혹은 그에 준하는 어떠한 초월적 존재일 가능성을 그저 조심스럽게 추측해볼 따름이예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 화의 백미는 단연 소중한 친구와의 행복했던 기억의 편린과 현재의 이 순간을 함께 살아가는 수 많은 친우들과의 연결점을 통하여 마침내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다시금 확립하며 최종장의 무대로 뛰어드는 하린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_<)b

    끝내 자신이 지켜낼 수 없었던 과거의 아픔과, 어느사이엔가 그 빈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한 현재의 새로운 인연들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하여... 비일상의 경계 사이로 펼쳐진 초현실적 풍경 속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서는 그녀의 모습이 정말 멋지게 다가오더라구요. (크흑, 이 것이 젊음인가!!! ㅠㅠ )

    뭐 어떠한 관점에서본다면 하린이야말로 별의 총애를 받는 공간정형자로서, 종말 현상의 천적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이니 내부에 먼저 투입된 리아와의 상호 작용을 통하여 무시무시한 시너지 효과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봅니다~ :D


    덧 - 아아아앗, 알고보니 이레네 수녀도 나름 뒤끝이 있는 성격이었군요;; (/먼산)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3.12.11 07:48 신고 address edit/delete

      작중의 잔 다르크는 어떤 면에선 불안정한 상태로 완성된 무기라고도 할 수 있을 듯싶어요. 물론 기술의 발달이나 발상의 전환에 따라 더욱 완전한 형태로 업그레이드 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그것은 버전업한 잔 다르크라기보다는 아예 다른 차원의 무기라 할 수 있을지도^^;;

      이레네 수녀의 상층부 비판은 소위 데스크와 현장과의 갈등이라 할 수 있는데, 역시 약 7년 전의 이야기이다 보니 그때와는 또 생각이 달라지더군요. 당시 글을 쓸 때는 이레네 수녀 쪽의 입장에 공감을 하며 썼는데, 지금 다시 보니 당연히 일개 개인에게 자칫 조직 자체를 위기에 빠뜨릴 수도 있는 거대한 힘을 함부로 줄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뭐랄까, 그야말로 '이것이 젊음이구나' 같은 낯 뜨거운 감정을 느꼈다고 해야 할까요^^;; 물론 그렇다고 이레네 수녀가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며,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이 부족한 장비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지요. 그 딜레마의 중간 어딘가를 적절하게 택해 절묘하게 양쪽 다 만족시키고 상황 해결에 도움을 주는 것이 지휘관이나 정책 입안자가 해야 할 일일 텐데, 작중의 십자죄인은 그게 잘 안 되는 편이라 볼 수 있을 듯^^;;;

      정확하게 봐주신 것처럼 파티마의 성녀직은 결코 편하지 않은 고된 쪽에 가깝네요. '밤하늘의 지평'에서의 십자죄인은 여러 분지세계 중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최고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형편이라 분명 몇몇 오버 테크놀로지의 구사가 가능하지만, 성녀의 기적은 그와는 달리 오컬트적인 것에 가깝다는 설정이에요(다만 이는 그 시대의 관점으로써 그보다 더 발달된 미래에는 해명 가능한 현상). 성녀의 능력이나 그 인생의 일단에 대해서는 막바지에 밝힐 예정이랍니다^^

      말씀처럼 이번 편에서는 아직까지 상황에 휘둘리기만 하던 하린이 드디어 완전히 각오를 다지게 되었지요. 하린의 경우는 이전까지 초상적인 존재들과 별 인연이 없던 일반인이었는 데다, 딱히 '정의의 용사' 같은 갈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서 '싸울 마음'을 먹게 하는 계기를 찾는 게 역시 가장 어려웠던 기억이 나요. 사실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매우 답답할 수도 있는 주인공일 텐데, 괜찮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덧. 이레네 수녀는 머리가 좋다 보니 웬만해서는 원한을 쉽게 잊지 않는 편(...) 다만 성격이 좋고 자기통제가 확실한 사람이라 남에게 풀기 전에 대부분 일찌감치 소화해서 없애버리곤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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