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블로그 이미지
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별세계의 별리'에 해당되는 글 169건

  1. 2018.01.13
    [별세계의 별리] 5-03. 그래도 기만하지 않을 수 없다 (8) (2)
  2. 2017.12.18
    [별세계의 별리] 5-03. 그래도 기만하지 않을 수 없다 (7)
  3. 2017.11.08
    [별세계의 별리] 5-03. 그래도 기만하지 않을 수 없다 (6)
  4. 2017.10.15
    [별세계의 별리] 5-03. 그래도 기만하지 않을 수 없다 (5) (2)
  5. 2017.10.07
    [별세계의 별리] 5-03. 그래도 기만하지 않을 수 없다 (4) (2)
  6. 2017.09.26
    [별세계의 별리] 5-03. 그래도 기만하지 않을 수 없다 (3) (2)
  7. 2017.07.28
    [별세계의 별리] 5-03. 그래도 기만하지 않을 수 없다 (2) (2)
  8. 2017.07.19
    [별세계의 별리] 5-03. 그래도 기만하지 않을 수 없다 (1) (2)
  9. 2017.06.30
    [별세계의 별리] 5-02. 그래도 추상하지 않을 수 없다 (7) (2)
  10. 2017.06.20
    [별세계의 별리] 5-02. 그래도 추상하지 않을 수 없다 (6) (2)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올바른 민주사회는 피지배자들의 동의(consent of the governed)라는 원칙에 기초를 두어야만 한다. 이 원칙은 보편원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때로는 너무 강경하고 때로는 너무 미약한 원칙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지배받고 통제 받아야만 한다는 뜻을 품고 있기 때문에 너무 강경한 원칙이지만, 한편으로는 비인도적인 지배자까지도 폭력으로만이 아니라 지배받는 사람들의 동의를 일정하게 묻고 보편적인 동의를 얻어내야 하기 때문에 너무 미약한 원칙이다.

 여기에서 나는 자유와 민주를 추구하던 나라들이 이런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 왔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오랫동안 민중의 힘은 더 많은 몫을 얻어내려 싸웠고, 많은 실패를 겪었지만 일정한 정도의 보장을 받아냈다. 그동안 민주주의에 저항하던 소수집단의 논리를 정당화하려는 이론도 더불어 발전해 왔다. 따라서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를 만들어 가려는 사람은 현실적 실천에만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그 실천을 떠받쳐주는 이론적인 틀에도 관심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250년 전,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이런 문제를 처음으로 거론했다. 흄은 다수가 소수의 의해 지배되는 편안함, 결국 다수가 소수의 지배자에게 운명을 내맡기는 암묵적인 굴복이라는 현상에 흥미를 느꼈다. 힘은 언제나 지배받는 다수에게 있었기 때문에 너무도 놀라운 현상이었다. 사람들이 그런 힘의 논리를 깨닫게 된다면, 언제라도 궐기해서 지도자를 전복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흄은 정부가 여론의 통제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달리 살펴보면, 이는 가장 전제적이고 가장 군사적인 정부뿐만이 아니라 가장 자유롭고 가장 민주적인 정부에까지 확대되는 원리였다.


- 노암 촘스키,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모색, 66면 이하. -










■■■








5-03. 그래도 기만하지 않을 수 없다 (8)


 깊은 공동의 짙은 어둠을 밝히듯 쉴 새 없이 반짝이는 영상장치monitor의 불빛들. 거대한 생물의 내장처럼 어지럽게 얽혀 있는 굵직한 전선들.

 세계중앙은행 총재 시로가네 아와유키의 직속 연구원, 리자 윌리엄스는 개인연구실에서 처리석 실험체L의 연구결과를 검토하며 불현듯 옛일을 떠올렸다.

 “인간은, 불평등한 우연의 산물…….”

 어린 시절의 리자는 관리기구 산하 학술기관Academy의 중등부에 소속된 학생이었다. 그리고 세상일에는 관심도 없이 연구에만 몰두하는 지금의 허약하고 병적인 인상과는 다르게, 아카데미 시절의 리자는 뒤에서 학도들을 주름 잡는 폭력배의 ‘우두머리’였다.

 - 나이 좀 먹었다고 나대지 마라. 뭉개지고 싶지 않으면.

 경화칙硬化則을 통해 백금총의 광탄도 통하지 않을 만큼 몸을 단단히 굳힐 수 있는 리자는 싸움에서 패하는 법이 없었다. 상급생은 물론 뒷골목에서 시비가 붙은 청년들마저 때려눕힌 전적이 있는 것이다. 그런 소문이 널리 퍼지자 그렇지 않아도 공부를 목적으로 들어온 아카데미의 학생들 사이에서 리자에게 감히 대적하려 드는 이는 없었다.

 - 빌어먹을…… 다 거지 같아…….

 그러나 힘으로 동년배를 제패해도 리자의 마음이 충족되는 일은 없었다. 애당초 리자는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무력기관에서 몸을 움직이고 싶었지만, 고위 공직자인 아버지가 억지로 그녀를 아카데미에 집어넣은 것이다.

 - 아주, 거지 같아…….

 리자는 스스로도 자신의 분노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물론 억지로 아카데미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녀는 공부에도 흥미가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낙제점을 받아 퇴학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분노가 어디에서 오는지, 처음으로 싸움에서 패배를 맛본 다음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 방해하지 마시죠. 전 바쁩니다.

 건방진 신입생. 자신의 패거리를 조금도 무서워하는 기색 없이 무시하듯 공부에만 집중하는 한 소년에게 리자는 직접 싸움을 걸었다. 비록 그 소년이 ‘천연석’이긴 했지만, 리자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이길 것이라 확신했다.
 그 결과, 그녀는 어떻게 당했는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어느새 땅바닥을 뒹굴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하하, 하하하하…….

 비참한 패배자Lisa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마른 웃음. 하지만 이는 패배의 충격이 아닌 이제껏 간단한 사실 하나 깨닫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 내 능력이란, 고작 이 정도에 불과했군.

 백금총 앞에서도 몸을 지킬 수 있을 만큼 단련한 개별칙. 때로는 뒷골목의 어른들과도 싸우며 수년간 쌓아온 수많은 실전경험. 그 모든 노력의 결정체가 하루 종일 책만 읽는 천연석 어린애의 주먹 한 방에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단지 태어난 것만으로 압도적으로 상회하는 선천적인 재능의 차.
 그리고 리자는 그 부조리에서 자신 또한 깨끗할 수 없음을 알았다.

 - 바보 같기는…… 나도 다를 바 없잖아……!

 어째서 자신은 아카데미의 학생들 위에 폭력으로써 군림할 수 있었나. 어째서 자신은 거리의 어른들과 싸워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나. 그건 바로 자신이 강철보다도 몸을 단단히 만들 수 있는 경화칙을 타고 태어난 덕분에 지나지 않는다.

 - 그래서 화가 났던 건가…….

 이제야 간신히 눈치 챈 사실.
 리자가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 그녀에게는 남몰래 친하게 지내던 소꿉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 아이는 상냥하고 아는 것도 많았지만 집이 매우 가난했다. 어린 나이에도 집안에 보탬이 되기 위해 일을 나가야 했던 리자의 소꿉친구는, 끝내 몸을 망쳐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리자가 아카데미에 들어오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후였다.

 - 그 애와 나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어. 아니, 오히려 그 애가 나보다 성격도 좋고 머리도 좋았지. 근데도, 그 아이는 죽고 난 이렇게 고급학교에 다니고 있어…….

 왜 둘은 이렇게도 다른 결말을 맞이하게 된 걸까. 간단하다. 리자의 부모는 부유했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 덕분에 리자는 어릴 적부터 잘 먹고 잘 입고 잘 교육 받을 수 있었지만, 그녀의 소꿉친구는 어쩔 수 없이 어려서부터 일을 나갈 수밖에 없었으며, 그래서 죽고 만 것이다.

 - 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조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선천적인 우연. 그걸로 이미 많은 게 정해져 버리고 말아…….

 하다못해 자신의 경화칙을 그 아이가 타고 태어났다면. 그러면 그 아이는 고생은 해도 죽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의 우연은 그런 행운조차 그 애에게 허락해 주지 않았다. 결국 멀쩡히 살아 있는 건 몸을 지킬 수 있는 개별칙을 갖고 좋은 집안에 태어난 자신. 그런 자신조차 방금 수년간의 노력을 일순간에 부정당했다.

 - 아아, 진짜 거지 같네…….

 리자는 거칠게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뒤로 몇몇 보복에 맞대응한 것을 제외하면, 일체 싸움을 버리고 공부에만 전념했다.

 - 위에는 더 위가 있는 법이라고. 하여간 이런 애들은 좀 맞아 봐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아카데미의 학도들은 조용해진 리자를 천연석의 위엄에 꼬리를 내린 개로 생각하고 비웃었다. 흔히 있는, 세상 물정 모르던 철부지가 처음으로 패배를 경험하고 풀이 죽은 경우로 치부한 것이다.

 - 철이 좀 들었나 보군. 그래. 주경대나 군에 들어가 봤자 몸만 축나고 제대로 돈도 못 만진다는 걸 이제라도 깨달아 다행이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얘기가 있지. 세상에 몸으로 뛰며 돈을 버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 돈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위치. 앉아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지위. 그런 자리를 얻기 위해 노력해라. 그러라고 비싼 돈 들여 아카데미에 보낸 거니까.

 리자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드디어 사춘기의 미몽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했다. 싸우는 영웅에게 동경심을 품는 건 어린애juvenile의 특권이다. 그리고 똑똑한 어린애일수록 그런 망상이 부질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는다. 최소한 리자의 부친은 그렇게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딸아이의 ‘성장’이 내심 기쁘고 반가웠다.

 - 머저리 같은 행성엔 머저리밖에 없는 법이지. 물론 나까지 포함해서.

 그러나 학업에 열중하는 리자의 속마음은 주변 사람들의 추측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 있던 싸움에 져서 상심한 것도, 사회의 쓴맛을 알고 안전한 대로를 고른 것도 아니었다.

 - 모두가 진정으로 ‘평등’해질 수 있는 방법. 난 그걸 찾고 싶어.

 어떤 의미로 리자는 예전보다 더 큰 사춘기juvenile의 꿈을 꾸고 있었다. ‘누구나’ 천연석이 될 수 있는 원리의 발견. 물론 설령 그 아득한 목표를 실현한다 해도 갑자기 세상이 평등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성과가 ‘진정한 평등’이란 원대한 꿈으로 가는 한걸음은 될 수 있을 것이다.

 - 뜻깊은 연구를 하고 계시는군요. 저희에게 오시죠. 얼마든지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지 10년. 보석인의 순도를 올리는 처리석 실험의 권위자로 알려지기 시작한 리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기업은 많았다. 심지어 타주의 주립연구기관에서도 그녀에게 이주를 권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 희망은, 있는 건가…….

 예상치 못한 주위의 호응에 칙칙한 안개 속에 갇혀 있던 것만 같은 리자의 마음에 한줄기 빛이 들어왔다. 처리석 실험 관련 분야는 원체 연구자도 적고 주어지는 예산도 얼마 없어 그동안 연구에 별다른 진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기업의 연구팀에 망설임 없이 이적을 결심했다.

 하지만 리자는 곧 왜 처리석 분야가 이토록 척박한 환경에 있었는지, 왜 고작 10년 정도 연구를 지속했을 뿐인 자신이 ‘권위자’ 소리를 듣게 되었는지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었다.

 - 빌어먹을…… 다들 관심은 딴 데 있었어!

 물론 기업에서는 리자의 연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단 부수적인 부분에서.
 가령 천연석의 순도를 일시적으로 향상시키는 약품을 통해 전투력을 강화하는 연구라든지, 오래된 역사적인 세공품의 복원을 꾀하는 연구라든지, 연마를 마친 보석요리의 신선도를 오래 지속시킬 수 있는 연구라든지 등등…….

 하지만 아무리 이직을 거듭해도 어느 기업도 처리석 실험의 본래 목적인 ‘모조석을 천연석으로 바꾸는’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해주는 곳은 없었다.

 - 그렇군. 다들 빼앗기기 싫다는 건가……!

 기업들이 처리석 실험에 본격적인 지원을 해주지 않는 표면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인체실험’의 비윤리성 때문이었다. 처리석 연구를 진전시키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모조석 실험체를 통해 직접 실험을 해보는 수밖에 없는데,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 엄청난 비난과 함께 공주법이나 관리기구의 제재를 감수해야만 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그런 위험부담을 함부로 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 사람을 소모품 취급하는 녀석들이 뚫린 입이라고 잘도……! 더한 짓들도 얼마든지 하는 주제에!

 하지만 최소한 황금산에서는 그런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황금산의 기업들은 필요하다면 암살이나 인신매매 같은 불법적인 일도 스스럼없이 저지르기 때문이다. 인체실험 역시 자신들이 원하는 단가에 맞는 신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실행한 전적이 있었다. 당장 황금산의 빈민가에 내려가면 돈에 눈이 멀어 어떤 실험에도 자원할 밑바닥 인생들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 가치를 빼앗기는 게 무서운 거지.

 기업들이, 정확히는 기업들의 수뇌진이 처리석 실험을 외면하는 진짜 이유. 그건 약자들에게 추월당하기 싫다는 공포심 때문이다.

 현재 보석인들의 사회는 천연석들이 지배하고 있다.
 관리기구의 고위직은 물론 대공직, 기업의 총수 자리마저 대개는 천연석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자기 자식 중에 모조석밖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양자를 들여서라도 천연석의 후계자를 만드는 일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중이다. 앉아서 머리를 쓰는 일조차 좀처럼 지치지 않는 천연석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의 하나 누구나가 천연석이 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그런 이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이는 단순히 지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천연석이라는, 자신이 천연석의 부모라는, 자신이 위대한 천연석을 배출한 가문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이, 즉 남들보다 낫다는 ‘우월성’이 송두리째 뿌리 뽑히고 마는 자아정체성의 문제인 것이다.

 이는 타주의 주립연구기관이나 관리기구 산하의 공공기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성흔聖痕의 위협에 맞서는 게 주목적인 대공들이나 관리기구의 고위 공직자일수록 처리석 실험을 기피하는 경향이 심했다. 그들이야말로 본인들이 천연석이라는 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심층계곡의 괴물들에게서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그걸 위해서라면 더욱 이 연구를 지원해줘야 하잖아! 결국 자기 보신밖에 관심 없는 머저리 새끼들……!

 하지만 욕설을 내뱉는다고 해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수십 년 간 여러 곳의 연구기관을 전전하던 리자는 잔뜩 마모돼 이윽고 자기 꿈을 포기하기 직전까지 갔다.

 - 뭐야, 리자. 못 본 사이에 눈이 많이 탁해졌군. 그래도 일말의 빛은 간직하고 있어. 어때?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면 지원해줄 마음이 있는데.

 그때 만난 이가 바로 시로가네 총재. 관리기구의 연구시설에 몸을 담고 있을 때 개인적인 친분을 쌓은 적이 있는 상대였다. 리자는 줄곧 외면당해온 자신의 연구를 지원해주겠다는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최후의 기력을 짜내 상대의 손을 붙잡았다.

 “총재는 약속을 지켰어. 덕분에 내 연구는 계속될 수 있었지. 이번에는 내가 약속을 지킬 땐가…….”

 리자는 연구 자료에서 눈을 떼며 바로 실험체L의 영상을 담은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남은 건 최종검토뿐. 내 인생의 숙제, 내 50년 연구의 전부를 담은 답, 심안칙의 공주님이라면 한순간에 알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답이, 이제 곧 나와. 답이 나오면, 알 수 있을까? 만약 일찍 이 연구가 완성되었다면 그 아이를, 상냥하고 똑똑했던 어린 로제타를, 구할 수 있었을지 없었을지 그걸 알게 될 수 있을까.”






 C랭크 이하의 주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거주하는 저층구역.
 운 좋게도 높은 분들에게 거두어져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던 저에게 이 구역은 여러모로 충격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숨이 막히는 탁한 공기, 보석이 잡동사니 쓰레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지저분한 거리, 내일이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과격하게 행동하는 거친 사람들.
 이런 식의 표현이 떠오르는 것에는 굉장한 죄책감이 들지만, 마치 황금산의 폐기물을 다 몰아넣었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네요.

 - 죄스럽게 여길 거 없어. 전부 사실이니까. 아, 물론 그 구역들이 진짜 쓰레기장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야. 그러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황금산의 구조 자체가 상류층이 본래 져야 할 부담을 하층민들에게 전부 떠넘기는 식으로 성립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곳 사람들이 쓰레기 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황금산이 정책적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그곳을 쓰레기장 취급하고 있다는 말이지.

 엘L 씨를 데리러 가기 위해 처음 저층구역을 방문하고 왔을 때 제 표정을 읽은 총재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황금산 출신자가 아니기 때문일까요. 그분은 황금산의 폐부를 찌르는 데 전혀 거침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충격을 받고 있는 건 저층구역의 열악한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그야 처음 봤을 때는 워낙 고층구역과 비교가 되는 모습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곳의 풍경 자체는 금방 익숙해 졌습니다. 오히려 살짝 그리운 기분까지 드는 걸 보면 아마 기억을 잃기 전의 저 또한 그다지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는 않은 것이겠지요.
 지금 제가 당혹감을 감출 수 없는 것은 동행자의 기묘한 행동이었습니다.

 “앨린, 내가 없는 동안 잘 있었어? 이런, 이번에도 많이 남겼네. 난 괜찮으니까, 많이 먹어도 된다고 했잖아. 그래야 빨리 건강해지지.”

 마치 병석에 누운 환자에게 말을 걸듯이 상냥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엘L 씨. 언뜻 대화 자체만 듣는다면 특별히 이상할 게 없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 여기 이쪽은 연지 씨라고 해. 내 파트너야. 물론 인생의 파트너라는 소리는 아니고. 일을 같이 하는 사이지. 후후, 걱정 말라고. 내게는 앨린이 제일이니까.”

 하지만 엘 씨가 말을 거는 대상은 눈을 감은 채 침묵을 지키고 누워 있을 따름입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죠. 저 여성은 이미 ‘끝났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현란하게 빛나는 4개의 커다란 전기석Tourmaline을 동력으로 작동하는 투명한 유리관.
 엘 씨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계속 말을 걸고 있는 여성은 바로 그 유리관에 누워 있습니다. 저 유리관은 일명 ‘동결장치’라고도 불리는데, 본래는 돌이킬 수 없는 중상을 입은 사람을 오로지 심층계곡에 보내지 않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구입니다. 주로 상제급의 강력한 힘을 가진 보석인이 무시무시한 13번째 성흔聖痕으로 돌아오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제작되었다고 하네요.

 ……음? 13번째 시련이 죽은 자의 귀환이라는 사실은 성채석의 대공과 그 금홍석 가신들에게만 알려지는 관리기구의 극비사항일 텐데, 어째서 제가 그런 걸 알고 있는 걸까요? 뭐 지금은 아무래도 좋은 일입니다.

 아무튼 이 동결장치의 유리관은 곧 용도가 폐기되어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상제급의 강자가 중태에 빠질 정도의 위기라면 애당초 목숨 자체를 온전히 보전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또 그 정도 능력자라면 많은 경우 고순도의 천연석일 텐데, 그런 분들은 설령 중태에 빠졌더라도 목숨을 부지해 잘 치료받는다면 높은 확률로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즉 효용도가 전혀 없는 셈이지요.

 그런 물건을 어떻게 엘L 씨가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안에 들어가 있다는 건 일절 되살아날 가망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저 유리관은 치료기기가 아니라 단지 목숨‘만’을 이 세상에 붙들고 있는 연명장치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럼에도 엘 씨는 마치 상대가 눈앞에 일어나 앉아 있는 것처럼 활달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자 연지 씨, 인사해. 이쪽은 앨린. 친언니는 아니지만 내게는 가족 같은, 아니 가족보다도 훨씬 소중한 사람이야. 앨린이 아니었다면 난 아마 이렇게 연지 씨랑 얘기하고 있지도 못 했을 걸.”

 “아, 안녕하세요…… 앨린 씨…….”

 기세에 눌려 인사를 했지만, 당연히 유리관에 누운 여성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습니다.
 실제로 유리관에 누워 있는 이 탁한 금발의 여성은, 생전이라면 제법 어른스러운 분위기의 미녀였을지 모르나, 지금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당장이라도 모래로 변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덧없는 아름다움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엘 씨 앞에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지만, 신화시대 이전에 존재했다는 ‘사람의 시신’이 아마도 저런 느낌이었겠지요.
 하지만 엘 씨는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앨린이란 여성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응? 갑자기 왜 손님을 데려왔냐고? 아, 내가 수행하는 총재님이 광명제 기간이라고 여러 곳에서 엄청나게 선물을 받았는데, 그중에 특히 먹거리 부분은 혼자 처리할 수가 없으니 내게도 나눠 주신 거야. 한데 그 많은 걸 나 혼자 들고 올 수도 없으니 여기 있는 연지 씨가 도와준 거고.”

 그 말대로입니다. 우선 총재님을 관사까지 모셔드린 후 그분의 명령에 따라 다시 이륜차에 엘 씨와 선물을 싣고 처음 그녀의 집을 방문했네요. 암살과 관련해 혼자 계실 – 정확히는 노엘 님도 있지만 – 총재님의 신변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들이 절대 관사는 습격할 리가 없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는 모양입니다. 하기야 엘 씨라면 모를까, 제가 있어 봤자 별다른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요. 그래도 걱정되는 건 걱정되는 거지만.

 “이것 좀 봐. 보석나무 과자 같은 것도 있어! 으, 이럴 줄 알았으면 저번에 사지 말 걸 그랬네. 뭐 비싼 만큼 맛은 확실하니 여러 번 먹을 수 있으면 좋은 일이지. 여기 놔둘 테니까 앨린도 좀 먹어.”

 엘 씨는 들뜬 어투로 선물의 포장을 풀어 유리관 옆에 두었습니다. 물론 그 안에 누워 있는 여성이 일어나 그것을 집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쩐지 무서워진 저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는 채 입을 열었습니다.

 “저기 엘 씨…….”

 “응? 연지 씨 무슨 일…… 으!”

 뒤로 돌아서며 평소와 같은 어투로 대답하던 엘 씨가 갑자기 통증이 느껴지는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전 황급히 옆으로 달려가며 외쳤습니다.

 “괘, 괜찮으세요!?”

 “으, 응. 괜찮…아. 잠깐, 어지러웠을… 뿐이야.”

 “……!”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서려는 엘 씨.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본 저는 간신히 비명을 삼키는 것 외에는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습니다.

 - 제게는, 시간이 얼마 없어요. 죽기 전에 죽어도 돈을 벌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얼굴을 감쌀 때 너무 세게 움켜쥐었는지 끈이 끊어진 안대. 꽃잎이 수놓인 그 큼직한 장막이 걷힌 뒤에 드러난 엘 씨의 오른쪽 눈가는, 망가진 도자기 인형 마냥 심하게 금이 가 있었습니다.






TRACKBACK 0 AND COMMENT 2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01.22 20:3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아아... 어찌하여 비극과 부조리의 마수란 세간의 노래 가사처럼, 리자의 자조섞인 독백과도 같이 기구하고도 서글픈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유독 그 심술을 부리고야 마는 것일까요.

    이로써 겨울 정원에 또 한마리의 탄식으로 빚어진 나비가 날아오르게 될테지요.

    ... 뭐 그래도 연우와 헬가만 행복하면 그 것으로 OK, OK! >_<) (본격 편애의 화신)

    덧 -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안단테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한층 안온하고도 즐거운 2018년이 되기를 기원해봅니다. :D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1.23 06:42 신고 address edit/delete

      오랜만에 안녕하세요! 이렇게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소디언 님께서도 좋은 일이 가득하신 한 해되시길 바라요! >.<


      예전 작품도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이번 작품의 인물들도 행복하다고 하기에는 힘든 환경에 처해 있네요... 그래도 말씀하신 헬가와 철옹성은 시련을 딛고 건재하게 운영 중! 언젠가 작품 전체의 결말도 훈훈하게 지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다음에는 래디오 시티에서 해마다 하는 크리스마스 쇼가 시작되었다. 천사의 무리가 사방에서 나왔는데, 손에 십자가를 든 사람이 무대 가득히 나와서는 일제히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미친 듯이 부르는 것이었다. 굉장했다.

 이것이 종교적이며 매우 아름답다는 것은 알지만 십자가를 들고 무대 전체를 메우고 있는 것은 결국 배우들이라는 사실에서 어떤 종교적인 것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 끝내고 무대에서 퇴장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담배를 피우기 시작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1년 전에도 샐리 헤이즈와 함께 이걸 본 적이 있는데, 샐리는 그 무대의 의상이나 장식이 정말로 아름답다고 계속 말하고 있었다. 나는 예수가 이런 호화찬란한 의상 따위들을 본다면 아마 구토를 참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샐리는 나더러 신을 모독하는 무신론자라고 했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예수께서 진정으로 호의를 보낼 사람은 그 오케스트라에서 작은 북을 치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은 내가 여덟 살 때부터 쭉 보아 왔는데, 부모들과 함께 보러 갔을 때 나와 동생 앨리는 이 사람을 더 잘 보기 위해 앞자리로 옮기곤 했다.

 그렇게 훌륭하게 북 치는 사람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한 곡에서 북 치는 기회란 단 두 번밖에 없는데, 북을 치지 않고 있을 때에도 그는 절대로 지루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러다가 북 치는 차례가 되면 심각한 표정을 하고는 그야말로 멋지고 아름답게 북을 치곤했다.


- J.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소담출판사, 187면. -










■■■








5-03. 그래도 기만하지 않을 수 없다 (7)


 - 자신과 닮은 누군가가 싫다면 그 감정은 자기혐오와는 관계가 없다. 단지 스스로의 결점을 직시하기 싫은 것뿐이다. 오히려 그 심리는 자기애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반론하고 싶어도 반론할 수가 없군요. 정말이지 이오니아 경은 죽어서도 불편한 사람이에요. 뭐 딱히 살아 있을 때 만나본 적도 없지만.”

 바다빛Aquamarine의 마녀巨匠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저는 온 신경을 집중해 귀를 기울였습니다. 세계적인 보석연마사로서 이름 높은 잔 노엘 타베르니에. 바로 그분이 제 작품을 봐주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저기,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요……?”

 긴장감을 견디지 못한 제 물음에 노엘 님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즉답했습니다.

 “네. 역시 연지 씨는 재능이 없네요. 연마사에는 안 어울려요.”

 “우…….”

 설마 이렇게까지 확실히 부정을 당할 줄이야.
 그야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거장Jeanne의 심미안에 제 보잘것없는 작품이 성에 차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각오를 해도 일말의 가능성조차 인정해 주지 않는 혹평에는 마음이 꺾일 것만 같네요.

 - 그렇게 지루하시면 제게 연마기술을 가르쳐주세요!

 그날 밤, 분명 가르침을 달라고 먼저 부탁한 것은 저였습니다. 공중에 둥둥 떠 희롱당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당연히 제 자신의 연마 실력을 향상시키고 싶은 마음이 더 컸습니다. 기억을 잃은 제가 그나마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보석연마밖에 없으니까요.

 - 네에? 하지만 연지 씨 재능 없는데요?

 물론 노엘 님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확실하게 제가 부족하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한 번 가르치기로 수락을 했다면 단순히 재능이 없다는 말로 끝내지 말고 조금은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네요.

 “잔.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죠. 아니면 설마 매도를 조언이라 착각하고 있는 건가요?”

 구원의 손길은 어린 주인님에게서 내려왔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종이로 된 편지를 읽고 계시던 티아나 님이 무심한 척 한 마디를 던지셨네요.

 참고로 보석으로 만든 종이는 보석실로 짠 천보다 훨씬 비쌉니다. 즉, 티아나 님이 읽고 계시는 편지는 매우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온 중요한 내용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편지를 눈에 두고 계시면서도 제 일까지 신경을 써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알고 있어.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현실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티아나 님의 신랄한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노엘 님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제가 만든 작품을 다시 한 번 손에 들고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알록달록 보석으로 치장한 큼직한 황금빛 달걀Easter Egg.
 평소보다 연마가 깔끔하게 잘 돼 나름 자신작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노엘 님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제 달걀에 시선을 줄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중입니다.  마침내 노엘 님이 불안한 침묵에서 벗어나 입을 열었습니다.

 “왜 이런 걸 만들었나요?”

 이, 이런 거라니…….
 딱히 비하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제작 동기를 묻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알고 있어도 여전히 칼날처럼 날카롭게 마음을 후벼 파는 질문입니다. 그래도 대답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과, 광명제는 다시 하루의 낮이 길어지는…… 즉, 태양의 부활을 기리는 축제 기간이잖아요. 그래서 부활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 형상을 찾다가, 마침 적당한 게 있어서…….”

 이스터 에그는 환상문명에서 유래한 구세주Messiah 전설과 관련이 있는 상징입니다. 구세주의 ‘부활’이라는 소재가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보석나무 과자와 비슷하게 상대방을 축복하거나 건강을 기원하는 선물로서 일부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있다고 하네요.

 “…보통 이스터 에그는 기조가 되는 붉은색이나 금색에 약간의 색채를 더하는 게 일반적이죠. 한데 이렇게 치장을 잔뜩 한 이유는 뭔가요? 그저 자기 실력을 과시하고 싶었나요?”

 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요. 노엘 님은 한층 미간을 찌푸리며 공격적으로 말을 던졌습니다. 전 주눅 들지 않게 노력하며 간신히 입을 열었습니다.

 “그, 그게…… 거, 거리의 풍경을 담아 보려고 했어요…… 노엘 님께서 내주신 과제가 「내가 좋아할 만한 것을 만들어 와라」였으니까요…….”

 “감사해라. 밖에 나가지 못하는 ‘불쌍한’ 날 위해 신경을 써주었다는 얘기군요.”

 우우. 노엘 님의 어조에 한층 독기가 서렸습니다. 확실히 동정심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의도를 섣불리 드러낸 것은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네요. 특히 노엘 님처럼 자존심이 강한 사람 앞에서는 더욱 더.
 제가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불쑥 어린 주인님이 끼어들었습니다.

 “잔. 연지에게 심술부리는 건 적당히 하는 게 어때요? 순수한 연지가 질척거리는 잔의 욕망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기다려,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무언가를 눈치 챈 노엘 님이 황급히 제지하려 했지만, 티아나 님은 그대로 말을 이었습니다.

 “즉 잔은 자기가 좋아하는 ‘어린 소녀’의 춘화를 그려오거나 동상을 만들어 오지 않았다고 트집을 잡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부당한 소리에 너무 마음 상해할 거 없어요.”

 “아――니야! 넌 대체 날 뭘로 보고 있는 거야!?”

 티아나 님을 노려보며 소리치는 노엘 님. 순간 주위의 가벼운 사물들이 염동칙에 의해 둥둥 뜰 만큼 흥분한 상태였지만, 어린 주인님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태연히 답했습니다.

 “네? 변태요.”

 “아――! 진짜! 지금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하여간, 할망구 다음에 만나기만 해 봐……!”

 차마 티아나 님에게 손을 댈 수 없었던 노엘 님은 여기 없는 누군가에게 분노를 쏟아 부으며 이번에는 저를 향해 시선을 돌렸습니다.

 “…설마 연지 씨도 같은 생각인 건 아니겠죠?”

 전 살기 위해 급하게 고개를 붕붕 저었습니다.

 “그, 그럴 리가요! 잔 노엘 타베르니에 님은 아름답고 총명하신 세계제일의 연마사…….”

 “내가 변태라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어요. 그쪽 말고, 내가 괜한 트집을 잡아 연지 씨를 괴롭히고 있는 것처럼 보이냐는 말이죠.”

 흔들림 없는 진지한 물음에 저도 같은 농도의 진중함으로 답했습니다.

 “아니요. 보석연마에 한해서 노엘 님은 결코 흰소리를 하지 않으세요.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믿고 있어요.”

 아직 이분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알 수 있는 건 있습니다. 기억이 없다고는 해도 저 또한 연마사 나부랭이. 노엘 님이 만드신 작품과 그 작품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이분이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보석연마에 관해 고민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그건 티아나 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아마도 방금 전의 농담은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흐르는 분위기에서 절 구해주려는 의도셨겠지요. 아무리 감사를 드려도 부족한 일입니다.

 “뭐 알면 됐어요. 티아나에게 이상한 오해를 받는 것도 싫으니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연지 씨가 만들어 온 이 ‘이스터 에그’에는 크게 3가지 문제가 있어요.”

 “예.”

 전 침을 꿀꺽 삼키며 노엘 님의 말에 집중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무리 아파도 피와 살이 되는 얘기일 테니까요.
 노엘 님의 말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사소한 부분인데, 이스터 에그와 관련된 ‘구세주 전설’에서 광명제 기간은 그 구세주의 ‘탄생’을 기리는 시기지, 부활을 기념하는 시기가 아니에요. 연지 씨는 단순히 낮이 다시 길어지는 ‘태양의 부활’과 연관을 지은 모양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고증오류가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아……!”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배움이 짧다는 게 여기서도 드러나고 마네요. 기억이 온전했다면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까요? 으, 모르겠습니다.
 노엘 님은 약간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너무 자책할 거 없어요. 미리 ‘사소한 부분’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건 학자나 학도들이나 신경 쓸 문제로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에요. 오히려 그런 식의 유연한 발상은 결코 나쁘지 않아요. 우리가 꼭 그 구세주 전설을 그대로 재현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다만, 연지 씨의 문제는 그걸 알면서 의미를 비튼 것이 아니라 모르는 상태에서 대충 끼워 맞추었다는 데 있어요. 지금은 우연히 잘 되었지만, 다음에도 또 그럴 수 있다는 보장은 없죠. 오히려 역효과를 가지고 오는 경우도 있을 테고.”

 “예, 조심하겠습니다……!”

 제 대답이 나쁘지 않았는지 노엘 님은 곧장 다음으로 넘어갔습니다.

 “두 번째는 지역적 특성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다는 것. 다른 지역公州에서 그 구세주 전설은 보석나무 일화와 같이 가볍게 다루어지고 해당 상품도 존재하지만, 이 황금산에선 그렇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구세주가 ‘신의 아들’이기 때문이지요.”

 “……!”

 이건 도저히 변명할 여지가 없는 제 실수입니다. 이스터 에그의 유래와 달리 정확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니까요. 과거 축성칙의 맹인이라는 자에게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있는 황금산에서 신에 관련된 소재는 철저히 금기시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보석인들이 추앙하는 대천사도 천신天神의 피를 잇는 자라고 볼 수 있지요. 하지만 태초신화에서 반신반인의 대천사는 부모 되는 천신을 살해해 인류를 그 지배에서 해방시킨 존재입니다. 반면 구세주 전설의 메시아는 신과 동일시되거나 그 뜻을 실현하는 자이니 서로 다를 수밖에 없지요.
 노엘 님은 긴 손가락으로 금란의 표면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내가 황금산 출신이 아니라는 걸 고려해 만들어 온 건가요?”

 “아니요…….”

 순간 유혹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전 사실대로 대답을 했습니다. 속일 수 있고 없고를 떠나 여기서 잠깐 곤경을 모면해 봤자 제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저를 위해 소중한 시간을 내주시는 노엘 님께도 예의가 아니고요.

 “솔직해서 좋군요. 뭐 어차피 연지 씨는 표정에 다 드러나니 거짓말 해봤자 알았겠지만. 그럼 마지막 문제점을 들자면…… 역시 연지 씨에겐 재능이 없다는 거예요.”

 아까부터 반복되는 말. 하지만 이는 단순한 폭언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습니다. 티아나 님도 이번에는 간섭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 추측이 틀리지 않은 듯싶습니다.
 노엘 님은 잠깐 뜸을 들인 다음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소위 예술가로 불리는 창작자들은, 모두 강한 자기애를 가지고 있어요. 또 어떻게든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가지고 있죠. 일견 겉으로는 심약하거나 겸손해 보이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에요. 애당초 그런 성정이 아니라면 무언가를 만들지도, 또 그걸 남에게 보여주지도 않을 테죠.”

 거칠게 뭉뚱그려 단정하는 노엘 님의 말에 티아나 님이 반론을 펼쳤습니다.

 “지나친 일반화가 아닐까요? 역사적으로 유명한 연마사 중 자기혐오가 강했던 걸로 알려진 인물도 있잖아요.”

 “그런 부류의 사람은 결국 ‘되고 싶은 자신’을 사랑했던 거야. 그러니 이상적인 자신, 즉 ‘진짜’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는 현재의 ‘가짜’ 자신을 미워한 거지.”

 망설임 없이 일축하는 답변에 티아나 님은 “뭐 추측에 추측을 더해봤자 의미가 없겠군요.”라며 특별히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노엘 님은 제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습니다.

 “사실 연지 씨의 연마기술은 이미 충분해요. 물론 배워야 할 것도 숙달되어야 할 것도 많지만, 그건 혼자 터득해야 하는 것이지, 남에게 가르침을 받아 성장할 단계는 지났어요. 그럼에도 만약 나랑 연지 씨가 서로 다른 작품을 만들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판다면, 설령 ‘이름을 가린다고 해도’ 내 작품이 훨씬 많이 팔릴 거예요.”

 자만이나 자신감조차도 아닌 당연한 사실을 담담이 제시하는 어투에 전 불쾌감을 느낄 새도 없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때 기습적으로 노엘 님의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아…… 그, 그야 노엘 님께서 실력이 훨씬 좋으시니…….”

 그러나 노엘 님은 고개를 저으며 의외의 말을 입에 담았습니다.

 “전혀요. 아주 복잡한 공정이나 속도를 겨루는 게 아니라면, 사실상 나와 연지 씨 사이에 유의미한 실력 차는 존재하지 않아요. 특히 전문가도 아닌 일반인들이 그 차이를 눈으로 보고 알아챈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죠. 둘 다 똑같이, 예쁘장하고 깔끔할 뿐인 지루한 연마기술을 가졌으니까요.”

 “지, 지루하다니…….”

 이건, 소위 지나친 겸손이라 부르는 표현일까요. 전 몰라도 노엘 님이 스스로의 실력을 지루하다고 깎아내리는 것은, 미인이 거울을 보고 참 심심한 얼굴이라고 불평하는 것만큼이나 어처구니없이 들리는 소리입니다.

 “지루해요. 어차피 우리의 연마방식은 원석의 더러움과 여분을 털어내고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게 다듬어 재배치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내가 만든 작품이 연지 씨 작품보다 많이 팔릴 거라고 장담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해요. 단지 제 작품이 ‘덜’ 지루할 테니까 말이지요.”

 “……?”

 아직도 노엘 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뜻은 결국 노엘 님의 실력이 저보다 낫다는 이야기가 아닌가요?
 하지만 노엘 님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내가 만든 작품들이 세간에서 어떤 면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지 혹시 알고 있나요?”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야, 야하거나 잔혹한 묘사가 매력적이라고…….”

 노엘 님의 유명한 작품은 주로 소녀의 육체가 가진 아름다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거나, 혹은 아예 그 신체를 해체해 그로테스크하게 재구성한 것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하얗고 고운 백수정의 손위에 놓인 두 눈이 뽑힌 어여쁜 소녀의 얼굴에서 홍옥수의 음료가 피눈물처럼 흘러나오는 분수장식 등이 좋은 예가 될 수 있겠지요.

 물론 가령 대천사의 동상이나 상상화처럼 관리기구의 공식행사에서도 쓸 수 있을 만큼 위엄 있고 멋진 정상적인 작품들도 잘 만들지만, 역시 널리 알려지고 찾는 사람이 많은 것은 노엘 님의 잔혹하고 야한 작품 쪽입니다.

 “맞아요. 그리고 그 작품들에는 내가 가진 성性이나 죽음에 관련된 충동들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어요. 내가 정말 좋아하고 보고 싶어 하는 것들을, 내가 가진 실력을 총동원해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표현하는 거죠. 그런 나와 같은 충동을 가졌거나, 혹은 불쾌하거나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외심을 느끼고 매혹당한 사람들이 내 작품을 원하는 거고요. 하지만 연지 씨에겐, 연지 씨가 만든 작품에서는 그런 ‘욕구’를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어요.”

 어떤 반론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확실히 지금까지 보석연마를 할 때 나 자신의 무언가를 표현해 봐야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연지 씨에겐 재능이 없다고 한 거예요. 기술적인 부분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 그러니 연지 씨에게 어울리는 건 연마사가 아니라 요리사 쪽이에요.”

 “요리, 사요……?”

 “네. 하는 일이 대부분 겹치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거의 구분을 하지 않고 딱히 구분할 필요도 없지만, 그래도 굳이 나누자면 연지 씨는 요리사로선 재능이 있어요. 기술은 충분하면서도, 자신의 충동이 아닌 타인을 위해 작품을 만드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

 말로 명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내 생각이나 욕구를 담기 위해 무언가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어도 달리 떠오르는 건 없지만, 다른 누군가가 즐거워할 만한, 또는 다른 누군가에게 어울릴 만한 것을 만들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발상이 떠오르니까요. 가령 자수정의 머릿결과 눈동자가 아름다웠던 그분을 위해 만들었던, 가을하늘을 닮은 푸른…….

 “잔의 말에만 너무 속박될 필요 없어요. 그건 그녀의 예술관일 뿐이에요. 실제로 세상에는 타인이 원하는 작품을 구현하는 데만 충실하게 전념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연마사도 있는 걸요. 오히려 자기 자신만의 독단적인 창작에만 고집하다 평단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대중에게도 버림받아 무명으로 흩어진 얼치기 예술가들이 훨씬 많지요. 연지는 이미 훌륭한 연마사에요. 잔에게는 기술만 훔치면 되니 좀 더 자신감을 가져요.”

 감미로운 목소리.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어린 주인님이 천으로 가린 제 한쪽 눈에 손을 대며 부드럽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그 탓에 무언가 떠올리려 했던 건 다시 잊고 말았지만, 덕분에 마음은 편해졌습니다.
 노엘 님은 자신의 의견이 부정당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쓰며 반론을 하려 했지만, 티아나 님은 차단하듯이 다음 말을 이었습니다.

 “이제 곧 유키를 마중 나가야 하지 않나요? 늦지 않으려면 슬슬 준비를 해야죠.”

 아, 맞습니다. 이제 곧 총재님의 업무가 끝날 시각. 총재님의 경호를 맡은 엘 씨를 데리러 가야 하네요. 시간이 그렇게 촉박한 것은 아니지만, 여유를 가지고 나서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그나저나 요즘 총재님을 떠올리면……후우. 여러모로 고민되는 게 많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저를 노엘 님의 목소리가 붙잡았습니다.

 “아직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네요. 당장 나가야 하는 게 아니라면 한 번 말해 봐요.”

 또 얼굴에 드러나고 만 걸까요. 평소라면 괜찮다고 얼버무렸겠지만, 근래 불안감이 커진 저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습니다.

 “저기, 총재님의 목숨을 노리는 무서운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분은 경호원을 잔뜩 고용하거나 하지 않으시는 걸까요? 그럴 만한 재력도 충분히 되시는 것 같은데…….”

 말을 꺼내놓고 아차 싶었습니다. 어린 주인님의 앞에서 꺼내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화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말에 먼저 답을 한 것은 티아나 님이었습니다.

 “그건 경호원들이 역으로 배신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에요.”

 “배신, 이요……?”

 이번에는 노엘 님이 뒤를 잇듯 입을 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몇 배나 되는 돈을 더 주고 암살대상의 경호원들을 암살자로 다시 사들이는 거죠. 실제로 그 방식에 멸문당한 가문이 있기도 해요.”

 “며, 멸문이요……!?”

 “네. 과거 황금산의 10대 재벌가 중에는 ‘오브라이언’이라는 가문이 있었다고 해요. 그 가문의 마지막 당주는 매우 야심 찬 젊은이였는데, 또 다른 10대 가문 중 하나인 루이스 가와의 충돌을 계기로 아예 다른 가문들과도 척을 지며 독주를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재벌가 사이의 담합을 무시하고 오브라이언가 혼자 이권을 독차지하는 등의 방식으로 말이죠.”

 갑작스럽게 큰 힘을 손에 넣은 사람이 흔히 하게 되는 착각. 사람의 인식에는 절대적인 한계가 존재합니다. 개미와 같은 미물에게는 자그마한 둔덕이나 끝없이 이어진 험준한 산맥이나 별 차이가 없을 것처럼, 일정 이상을 넘어가는 부와 권력을 손에 쥔 인간 또한 크게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네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이 무한하다고 감각적으로 혼동을 일으켜 무모한 행동을 서슴지 않게 되는 것이죠.

 “오브라이언 가의 마지막 당주는 딱 그 유형에 들어맞는 인물이었어요. 자기 가문이 가진 재력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생각해 황금산에 있는 모든 경비업체와 불법조직을 싹 고용해 10대 재벌과 전쟁을 벌이려 했죠.”

 “저, 전쟁이라니…… 하지만 결국 패배했다는 건…….”

 “가진 자 특유의 오만일까요? 오히려 높은 자리에 앉은 능력 있는 인물일수록 ‘자기가 할 수 있는 발상은 남도 할 수 있다’는 당연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더군요.”

 노엘 님은 한숨을 내쉬며 이미 정해진 결말을 이야기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10대 재벌들은 오브라이언 가문이 고용한 무장 세력을 고스란히 다시 사들여 맨손이나 마찬가지인 그 가문을 철저하게 짓밟아 아예 없애버렸다고 하네요.

 “소문에 의하면 경호원 한 사람마다 오브라이언 가에서 받기로 한 보수의 천배 이상을 주고 배신을 시켰다고 하더군요. 그 돈을 다 합치면 웬만한 공주公州의 1년 예산은 될 만한 금액이라든가. 물론 어차피 소문이니 전부 믿을 수는 없지만, 엄청난 돈을 뿌려 거의 대부분의 경호원들을 등 돌리게 만든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에요.”

 한 공주公州의 1년 치 예산. 솔직히 제대로 된 과거도 없고 일개 시녀에 불과한 저에게는 전혀 실감이 가지 않는 어마어마한 액수지만, 그래도 왜 총재님이 따로 경호원을 들이지 않는지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보수의 천배라면 평생을 놀고먹을 수도 있는 돈일 텐데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섣불리 사람을 잘못 고용했다가는 적을 늘리는 꼴밖에 되지 않겠지요.
 노엘 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습니다.

 “이런, 표정이 더 어두워졌네. 걱정 말아요. 긴 스스로 자기 앞가림은 알아서 잘 할 테니. 막말로 죽어도 자기 책임인 거고. 연지 씨나 괜히 옆에 있다 말려들지 않게 조심해요.”

 티아나 님도 옆에서 거들었습니다.

 “맞아요. 유키는 전혀 걱정할 것 없어요.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에 빠지면 신경 쓰지 말고 연지 혼자 도망쳐 버려요!”

 …뭐랄까. 가족이나 다름없는 지인들이 좀 심합니다. 물론 총재님을 진짜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기보다는 절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위악적으로 말씀하시는 거겠죠.
 저도 분위기를 바꾸는데 동참하기 위해 가벼운 말을 던졌습니다.

“하기야 제가 걱정해야 할 건 총재님의 경호가 아니라 식탁이겠네요. 한 번도 제 요리를 드신 적이 없으니 말이에요. 노엘 님께 열심히 배워 꼭 맛있다는 말씀을 나오게 해야겠어요!”

 살짝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는 일이지만, 지금까지 총재님은 잠깐 술잔을 기울이시는 걸 제외하면 제가 차려오는 보석을 드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게 제 요리를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일이 바쁘거나 밖에서 식사를 마치고 오기 때문에 따로 집에서는 들지 않는 것뿐이겠지요.

 “아, 그건…….”

 음? 전 농담 삼아 꺼낸 말이었을 뿐인데 노엘 님의 표정이 좀 곤란해 보입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 말실수라도 한 걸까요?
 그때 티아나 님이 옅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습니다.

 “식탁이 전장이라면 설령 상대가 유키라도 연지가 질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해요. 여기서 실력이 더 오른다면 말할 것도 없겠죠. 아까도 말했지만 잔은 기술만 빼먹고 버려도 돼요.”

 “잠깐! 아무리 그래도 말이 좀……!”

 노엘 님은 항의를 하려 했지만, 티아나 님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계속했습니다.

 “그보다 미안하지만 나가기 전에 침실에 데려다 주지 않을래요? 조금 졸리네요.”

 작게 하품을 하며 양팔을 벌리는 어린 주인님.
 전 “실례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티아나 님을 안아들었습니다.

 “고마워요.”

 간지러운 입김과 함께 귓가에 울리는 부드러운 속삭임. 그에 어린 주인님의 따스한 체온이 더해지자 제가 느낀 작은 위화감은 봄철의 눈처럼 소리 없이 녹아내렸습니다.






TRACKBACK 0 AND COMMENT 0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합법성은 행위에 제한을 가하지만 행위를 일으키지 않는다. 법은 인간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할 뿐, 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유 사회에서 법의 위대성이면서 동시에 법이 지닌 난제이다.

-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2권, 한길사, 265면. -










■■■








5-03. 그래도 기만하지 않을 수 없다 (6)


 - 천연석 같이 예쁜 아이야.

 『독아Venom』의 브로커로 알려진 올가가 어릴 적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 비슷한 수준의 외모를 가지고 있는 보석인의 경우, 미美의 기준은 얼마나 높은 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즉, 일반적으로는 모조석보다 천연석이 미인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올가는 평범한 흑수정의 모조석이면서도 천연석 같이 아름답다는 평을 곧잘 듣곤 했다. 소위 준準 천연석이라 불리는 이들처럼 딱히 모조석치고는 순도가 높은 편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가진 보석인으로서의 질은 평균 이하에 속할 만큼 탁했다.

 - 정말 아무리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아.

 그럼에도 올가가 예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녀가 가진 ‘외모’덕분이었다. 보석인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완벽한 신체비율과 단아한 조형미를 뽐내는 얼굴 생김새. 보석인들의 기준에서도 이 두 가지 요소가 월등히 뛰어났던 올가는 모조석임에도 불구하고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달이 지고 해가 뜨고.
 세월이 흐를수록 올가의 미모는 쇠하기는커녕 물이 오르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청혼이 쇄도했으며, 그중에는 천연석의 청년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그녀가 살고 있는 지역이 흑색연맹이 아니었다면 비슷한 숫자의 여자들에게도 구혼을 받았을 것이다.

 - 아아, 세상은 참 멋져.

 그런 올가의 인생에 최고의 향신료가 된 것은 다름 아닌 그녀가 가진 독심칙이었다. 타인의 심층의식을 읽을 수 있는 올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호의’ 역시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물론 타인의 속마음이 언제나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많은 사랑을 받는 그녀를 시기하는 적대심도, 또 그녀로서는 조금도 응할 마음이 없는 불쾌한 망상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공존하고 있었다.

 - 그만큼 내가 무시할 수 없는 존재란 소리지.

 하지만 올가는 때로는 무서워하고, 때로는 불쾌해 하며, 때로는 상처 받으면서도 사람들의 호의 못지않게 그 적의나 망상들도 똑같이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그 하나하나가 모두 자신의 ‘미모’가 뛰어나다는 확고한 증명이 되니까. 자신의 자아를 확립하는 데 있어 타인의 반응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하지만 쭉 계속될 것만 같았던 올가의 행복은 가족들의 죽음과 함께 느닷없이 무너져 내렸다.

 - 미안, 하구나…….

 피투성이가 된 집안. 그리고 그 핏자국마저 가족들의 시신과 함께 모래먼지로 흩어지기 시작하는 광경.
 귀족 가문의 말단 가신인 줄만 알았던 그녀의 아버지는, 사실 한 범죄조직mafia의 주요 간부 중 한사람이었다. 그 탓에 조직 간 항쟁에 휘말려 집이 습격당해 가족이 몰살당하고 만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공허한 사죄였다.

 - 잠깐, 이 녀석은 돈이 되겠는데.

 본래라면 올가도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여기서 가족들과 운명을 함께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미모’는 그 운명마저 바꾸어 버렸다.

 다른 조직의 습격자들은 그녀를 지하 노예시장을 통해 황금산의 변태 부호에게 팔아넘겼다. 당연히 그 가격은 모든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그리고 올가에게 있어선 진정한 지옥이 시작됐다.

 - 오오, 정말 아름답군! 이런 아이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니……!

 사람들이 행하는 부적절하지만 대표적인 성적 망상 중 하나는, 보잘것없는 자신이 엄청난 미인을 마음껏 ‘유린’한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보석인들의 세계에서 그런 짓을 실현에 옮기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보석인들에게 있어 순도는 ‘미’인 동시에 ‘힘’을 뜻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경우 천연석이라면 설령 어린애라 할지라도 성인 모조석을 자칫 주먹 한 방에 절명시킬 수 있을 만큼 양자 간에는 결정적인 힘의 차이가 있다.

 그렇기에 지하 노예시장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 바로 준準 천연석이라 불리는 모조석들이다. 주로 머리카락과 눈 한쪽이 같은 보석으로 일치하는 특징을 보여주는 이들은, 천연석에 가깝게 순도가 높으면서도, 즉 아름다우면서도 제대로 단련을 하지 않으면 모조석의 근력 그대로인지라 입맛에 맞게 노리개로 삼을 수 있었다.

 - 아아, 정말 좋군! 돈을 들인 보람이 있어!

 그리고 타고난 외모만으로 천연석에 가까운 기적적인 미모를 소유한 올가의 경우 그보다 더한 가치가 있었다. 준準 천연석보다 훨씬 무력한 데다 가지고 있는 개별칙마저 어떤 물리력도 동반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나도 그때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부호에게 팔려온 지 며칠 후.
 말과 시선을 잃은 올가는 언제나 같은 생각만 하게 되었다. 그녀가 가족의 원수들에게 품은 감정은, 가족을 죽였다는 원한이 아니라 왜 그때 자기도 같이 죽여주지 않았느냐는 원망이었다.

 - 그만, 그만해! 듣고 싶지 않아! 그만―――!

 소리 없는 마음속의 비명. 올가를 진정 괴롭게 하는 것은 부호가 행하는 온갖 변태적인 행위에서 오는 수치와 고통이 아니었다. 아니 물론 그것들도 끔찍하긴 했지만, 그녀를 정말 참을 수 없게 만든 것은 싫어도 들리는 그 부호의 ‘속마음’이었다.

 어떻게 하면 더 비명을 지르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비참하게 땅을 기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굴욕적으로 짓밟아 줄 수 있을까. 이걸 끝내면 다음에는 또 뭐하지? 또 뭐할까? 다음에는…… 다음에는…… 아아, 나는 너무나도 즐겁다!

 - 더는, 듣기 싫어……!

 한때 올가에게 존재의 긍정이라는 기쁨을 가져다주었던 독심의 능력은, 이제 정반대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부호의 속마음을 들을 때마다 올가는 자신이 한갓 노리개에 불과하며 이 고통이 내일도 또 내일도 계속될 거라는 약속絶望밖에 얻어내지 못했다.

 - 아, 이제는 좀, 조용해…….

 그래도 필사적인 노력 끝에 올가의 독심칙은 바로 입 밖에 꺼내기 전의 속마음이 아니면 들을 수 없을 만큼 약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그녀의 고통을 덜어주진 못했다.

 그런 지옥과도 같은 나날이 1년 이상 지속되었을 때.
 구원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올가를 지옥에서 구해낸 것은,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과 똑같은 사건이었다.

 이른바 조직 간 항쟁.
 올가를 산 황금산의 부호는 그곳에 존재하는 여러 마피아 보스 중 한사람이었다. 제법 일대를 주름 잡는 거물이었던 모양이지만, 경쟁조직인 독아Venom에게 허를 찔려 순식간에 살해당하고 만 것이다.
 습격당할 당시 침실에 있었던 부호는 죽는 순간에도 올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아, 안 돼…… 그 애만큼은, 저것만큼은 내 꺼……!

 - 시끄럽다.

 총성이 한 발. 짧은 한 마디와 함께 날아온 광탄에 부호의 머리가 산산조각 났다.

 - 아…….

 올가는 그 광경에 무섭다기보다는 상쾌함을 느끼며 예기치 못한 자신의 구원자를 올려다보았다.
 움직일 때마다 어지럽게 휘날리는 칙칙한 금발에 망토처럼 두른 어두운 코트. 그리고 왼손에 든, 지긋지긋한 부호의 머리통을 날려버린 대구경 백금권총.

 그녀의 이름은 바이올렛. 대담하게도 손수 경쟁조직의 두목을 제거하러 온 그녀가 바로 당대 베놈의 보스였다.
 바이올렛은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 올가의 알몸을 가려주며 입을 열었다.

 - 넌 이제 자유다. 아무데로나 떠나. 다른 놈들한테 또 잡히기 전에.

 그러자 옆에 있던 뱀 같은 인상의 참모격인 남자가 입을 열었다.

 - 아니, 보스. 사람들이 다 보스 같다고 생각하면 곤란하죠.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는 이런 여자애를 그냥 밖에 내보내 봤자 또 똑같은 꼴만 당할 걸요?

 - 그것도 맞는 말이군.

 바이올렛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벽면 한쪽에 장식된 큰 그림을 향해 권총을 한 방 쐈다. 그러자 숨겨져 있던 비밀금고가 부서지며 안에서 온갖 문서와 보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 계약서 쪼가리야 가져봤자 쓸데없을 테니 세공품만 들고 가라. 들 수 있을 만큼 잔뜩 들어. 그리고 이 아래 감정소에 가서 내 코트를 보여주고 베놈의 이름을 대면 적당히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값을 치러줄 거다. 그 다음부터는 알아서 살아남아.

 바이올렛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올가는 정신없이 바닥에 구르는 고가의 세공품들을 잔뜩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바이올렛 일행이 나가기 전에 급하게 그것들을 그들의 앞에 내밀었다.
 바이올렛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이게 무슨 짓이지?

 - 아, 아아……. 아아…….

 줄곧 입을 열지 않았던 올가에게선 제대로 된 목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뱀 같은 남자가 그녀의 의향을 짐작해 주었다.

 - 아무래도 이걸 대가로 자신을 거두어 달라는 뜻인 것 같은데요.

 속마음을 정확하게 대변한 그 말에 올가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올렛의 눈썹이 한층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 난 위안물 따위 필요 없어. 어서 꺼져라. 아니면 더는 앞날을 고민할 필요 없이 여기서 편하게 만들어 줄까?

 하지만 올가는 물러서지 않았다.

 - 아, 아…… 저, 저도…….

 - 음?

 1년 만에 처음으로 올가의 입에서 제대로 된 말이 터져 나왔다.

 - 저도, 더는, 더 이상은, 누군가의 위안물이, 되기…… 싫어요……!

 그 작지만 힘찬 외침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바이올렛이 다시 입을 열었다.

 - 각오는 되어 있나?

 - 예!

 그렇게 소녀는 자신의 운명外貌을 바꿀 첫발을 내딛었다.






 마치 감은 듯이 가늘게 뜬 작은 눈. 세모처럼 뾰족한 턱에 속마음을 알 수 없는 능글맞은 미소. 결코 추악한 얼굴은 아니지만 어딘가 뱀을 연상시켜 기분 나쁜 인상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때는 참 귀여웠는데 말이죠. 지금 생각하면 좀 아까운 짓을 했어요.”

 올가 앞에서 겁도 없이 옛일을 끄집어 낸 남자의 이름은 제이. 돌인형 청소를 맡은 주거정비과의 총반장이기도 한 그의 실체는 범죄조직 베놈의 주요 간부 중 한사람이었다.

 “지킬 힘과 지혜가 없으면 미모 따위 좋은 먹잇감에 지나지 않아. 난 먹히고 싶은 생각은 먼지 한 톨만큼도 없어.”

 올가는 씩 웃으며 굵직한 자기 팔뚝을 위협하듯이 내보였다. 약물과 시술과 단련에 의해 강화될 대로 강화된 그녀의 우람한 육체에서 더 이상 어렸을 때의 아름다웠던 모습은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죽은 부모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자기 딸을 알아보지 못하리라. 하지만 올가는 자신이 버린 미모가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하하. 실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제가 괜한 말을 했군요.”

 제이는 짐짓 머쓱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지만, 올가는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넌 절대 괜한 말을 하지 않지. 굳이 옛날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내게 초심을 상기시키기 위함인가. 그렇다면 내가 이번에 맡아온 일에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

 날카로운 올가의 눈빛에 제이도 웃음을 거두었다.

 “거기까지 알고 계신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세계중앙은행 총재의 암살…… 이건 단순히 총재를 제거하고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기업연합, 그것도 더글라스 회장의 사주를 받은 탓에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앞으로 재벌 가문들의 암투에 조직이 끌려 다니는 형국이 되고 말 테죠. 위험부담이 너무 커요. 현재 위축된 우리 손에는 너무 버겁지 않겠습니까?”

 올가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맡은 거야. 위험부담이 큰 만큼 보상도 어마어마하니까. 주저앉은 조직을 일으켜 세우기에는 아주 좋은 기회지.”

 제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대모 바이올렛의 죽음은 당신 탓이 아닙니다.”

 “그럴지도. 하지만 그 후에 베놈의 무시무시한 독기光彩가 형편없이 빠져버린 건 전부 내가 제대로 운영을 못한 탓이야. 대모님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말았지. 난 그 책임을 져야만 해.”

 강박에 사로잡힌 올가의 말을 제이는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본래 우리 조직Venom은 대모의 카리스마 하나로 돌아가던 곳이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다른 간부들은 모두 대모의 들러리이자 못난 자식들이나 마찬가지였죠. 다들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고, 아무런 불만도 없었으며, 그리고 아무도 대모의 자리를 대신하려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대모가 세상을 떠나고도 이렇게 조직이 유지되고 있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입니다. 그건 순전히 당신의 공이에요. 당신이 정말 대모를 존경하고 있다면 베놈의 몰락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또 대모의 흔적을 지키고 있는 자신에게 좀 더 자신감을 가지세요.”

 올가는 인상을 찌푸리며 가만히 말을 듣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며 어렵게 인정했다.

 “그래. 당신 말이, 틀리지는 않아. 확실히 내가 품은 소망은, 주제넘은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단지 베놈의 전성기를 되찾고 싶다는 일념만으로 무리하게 일을 떠맡은 건 아니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맡은 거라고. 회장의 제안을 검토한 부분은 네게도 말해준 걸로 기억하는데. 내 판단이 역시 경솔했나?”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겠지요. 회장의 제안을 거절하는 일 또한 결코 리스크가 적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제가 이것저것 트집을 잡은 것은, 혹시라도 당신이 과거에 사로잡혀 앞으로의 판단을 그르칠까 우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정말 괜한 참견을 한 모양이군요.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제이를 향해 올가는 손을 저었다.

 “미친 자가 스스로의 광기를 확인할 방도는 없지. 언제나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그럼 일은 예정대로 부탁할게.”

 “예. 양동에 필요한 인원은 금방 모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침 써먹기 적당한 인물이 있으니까요. 그보다 한 가지 보고할 게 있습니다만…….”

 드물게 말끝을 흐리는 제이에게 올가는 대답을 재촉했다.

 “뭐지? 너답지 않군. 중요한 일이라면 부담 없이 말해 봐.”

 “아, 그게…… 다행히 적임자와 접촉에 성공했습니다. 한데 그자가 직접 얼굴을 보고 싶다고…….”

 제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굉음과 함께 간부 회의실 문이 날아가며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님을 너무 기다리게 하는군! 매복 중이라면 모를까, 그 외의 일에 난 그다지 참을성이 좋지 않아. 아아, 걱정하지 말라고. 여기 널브러진 녀석들, 죽이진 않았으니까.”

 있는 대로 다 녹슨 철기인. 금방이라도 사철로 변해 흩어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노화가 심한 몰골이었으나,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자라면 어느 누구도 얕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늙은 살인마. 눈먼 학살자. 공공의 적.
 오랜 세월 관리기구의 추적자들을 따돌리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 온 대형범죄자 베오불프 오토가 바로 눈앞의 다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검붉은 머리카락의 철기인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그쪽을 상대로는 무리한 부탁이었군요. 대체 여기는 어떻게 찾아낸 겁니까? 분명 다른 지부에서 기다리게 했을 텐데요.”

 올가를 지키듯이 일어섰던 제이는 살짝 몸의 힘을 빼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질문을 던졌다.

 “난 이게 매우 좋거든.”

 오토는 자신의 코를 가리키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물론 이는 진짜 냄새를 맡고 쫓아왔다는 소리가 아니라 ‘감’이 좋다는 뜻이었다.

 “천부적인 전투광은 당해낼 수가 없군요. 뭐 그래서 그쪽에게 의뢰를 한 것이기도 합니다만.”

 질렸다는 듯이 손을 드는 제이에게 오토는 흥분하며 소리쳤다.

 “그래! 강한 놈이랑 싸울 수 있다고 해서, 또 거물을 죽일 수 있다고 해서, 난 네놈들의 의뢰를 받아들일 마음이 든 거다! 하지만 그게 시시한 속임수나 함정이 아니라는 법 또한 없지. 싸우다 죽는 거야 바라마지 않는 일이지만, 허무하게 뒤통수를 맞고 가는 건 사양이거든.”

 “그래서 보스를 직접 만나고 싶다는 겁니까?”

 제이의 물음에 오토는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사람 보는 눈은 좀 있어서 말이야. 최소한 배신을 할 놈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지. 참고로 넌 아무렇지 않게 뒤에서 방아쇠를 당길 놈이다. 평소라면 그딴 놈의 의뢰는 거절하겠지만, 이번만큼은 사냥감이 구미가 당겨서 말이지. 너희들의 보스를 본 다음에 의뢰를 수락할지 말지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릴 생각이다.”

 제이는 고개를 돌려 태연히 의자에 앉아 있는 올가에게 물음을 던졌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소개해 줘.”

 짤막한 올가의 대답에 제이는 한발자국 옆으로 비켜서며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신 이분이 우리 베놈의 보스, 올가 바이올렛 님이십니다. 외부에는 일개 브로커로 알려져 있으니 아무쪼록 비밀을 지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토의 눈동자가 약간 크게 열리며 입가가 길게 찢어졌다.

 “자세히 얘기해 봐. 어떻게 총재를 죽일지. 그리고 난 어떻게 움직이면 되는지.”






TRACKBACK 0 AND COMMENT 0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형 D. B.에 대해서 언짢게 생각되는 것은 그토록 전쟁을 싫어하면서도 지난여름엔 내게 《무기여 잘 있거라》라는 책을 읽어 보게 한 사실이다. 형은 굉장한 작품이라고 말했지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헨리 중위라는 사나이가 등장하는데 아주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형은 군대니 전쟁이니 하는 것을 그토록 싫어하면서 왜 그런 엉터리 같은 책을 좋아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내 말의 뜻은 저런 엉터리 같은 책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예컨대 링 라드너의 작품이나 그가 미치고 있는 또 하나의 책인 《위대한 개츠비》 같은 것을 어떻게 좋아할 수 있는지 난 도무지 알 수 없다.


- J.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소담출판사, 191면. -










■■■








5-03. 그래도 기만하지 않을 수 없다 (5)


 저 별빛에 손이 닿을 거라 믿고 있었다.
 찬란히 밤하늘을 밝히는 무수한 별들. 고요한 밤, 어린 시절의 그는 하늘을 올려다 볼 때마다 쏟아질 듯 반짝이는 천상의 보석에 매료돼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심원本質을 들여다보는 그의 눈동자는, 언젠가 자신도 심연虛無의 우주를 밝히는 저 지고한 광채 중 하나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소년이 청년이 되었을 때.
 세계는 너무나도 거대했다. 그의 심안深眼이 분명한 진실이라 생각하며 붙잡았던 것은 구름 위까지 솟아오른 거인의 머리카락 한 올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은 땅을 기는 한갓 돌멩이 같은 일개 인간일 뿐.
 아무리 순도 높은 천연석이라도 저 장엄한 하늘 너머 무한한 우주를 떠도는 영겁의 천체와도 같은 존재가 될 수는 없다. 세계는 그저 자신의 옷자락을 슬쩍 내보인 것만으로 청년에게 절대적인 한계를 가르쳤다.

 - 그래도 사람은, 언젠가 저 빛에 닿을 수 있습니다.

 밤하늘의 지평을 노리는 청년의 꿈은, 퇴색되었을지언정 아직 무너지지는 않았다. 설령 영원한 천체와 같이 숭고한 존재는 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천체들이 떠도는 장소理想에는 올라설 수 있으리라. 현실에 깎여나가긴 했어도 그의 꿈은 아직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년에서 어른이 된 지금의 그에게 그 꿈은…….

 “분에 넘치는 소망이었습니다. 사람은, 땅위에 발을 딛고 스스로 일어서는 것조차 힘든데, 하물며 하늘 너머에 손을 뻗는다니…….”

 자조를 닮은 혼잣말이 그레이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 큰 목소리가 아니었는데도 들린 걸까. 곧이어 저편에서 누군가 급히 달려오는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공님! 혹시 부르셨나요?”

 모습을 드러낸 이는 그레이엄의 경호원이자 비서관인 에드워드. 모르는 이가 보면 단발의 소녀로 착각할 만큼 예쁘장하게 생긴 소년은, 요리를 준비 중이었는지 흙먼지가 묻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그레이엄은 고개를 돌려 보이지 않는 눈을 에드워드에게 향하며 말했다.

 “이런, 괜히 신경 쓰게 만든 모양이군요. 별 일 아닙니다. 그냥 혼자 시시한 푸념을 늘어놓았을 뿐이에요.”

 “푸념이라면 나중에 실컷 들어드리죠. 그러니 지금은 아무 생각 말고 우선 푹 쉬세요!”

 에드워드는 질책하듯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천을 새로이 가져와 그레이엄의 눈가에 다시 얹었다. 그레이엄은 과열된 눈을 식히는 냉기에 기분 좋은 상쾌함을 느끼며 누운 채로 감사를 전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고맙습니다.”

 경옥Jadeite으로 짜인 그 녹색 천은 보석인의 회복능력을 촉진시키는 효과를 가진 의료품 중 하나였다. 좀처럼 몸이 상하기 힘든 고순도의 천연석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물건의 힘까지 빌려야 하는 걸까.
 에드워드는 한숨을 내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으며 입을 열었다.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니 마음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보다 이렇게까지 ‘눈’을 혹사시키시다니…… 급히 ‘계산’하셔야 할 만큼, 뭔가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요?”

 황금산의 대공은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음, 여러모로 걱정을 끼치는 것 같아 정말 면목이 없군요. 에드 군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닙니다. 그저 제가 이기지 못했을 뿐이에요. ‘미래’를 보고 싶다는 충동을 말이죠.”

 그레이엄이 가지고 있는 심안深眼.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그 눈은, 단순히 현상을 해석하거나 진위를 가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단련하기에 따라선 몇 수 앞의 가까운 미래마저 읽어낼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에드 군도 알다시피 제 눈은 급수가 낮아 문제지요. 가끔 ‘쫓겨난 공주님’이 참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조금만 욕심을 부려도 이렇게 무리가 생기니까요.”

 아예 심안深眼 자체를 개별칙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고순도의 혼합천연석과 같은 예외 중의 예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심안자들에게는 미래를 내다보는 행위 자체가 몸에 큰 부담을 준다.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온갖 방대한 요소의 조합未來을 스스로의 몸을 연산기 삼아 억지로 출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무지막지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데도 과부하가 걸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이리라.
 에드워드의 어조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듣기로는 그 전설의 집사장은 「미래를 읽어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애당초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이다」라며 심안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일을 피했다고 하던데요. 대공님도 조금은 본받으시는 게 어떨까요?”

 하지만 그 어떤 주의를 듣는다 해도 일정한 수준에 달한 심안자들은 미래를 보고 싶다는 유혹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한다. 단 하루라도 미래의 일을 미리 알고 있다면 살아가는 데 유리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단순히 ‘호기심’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심안자 중에는 그 충동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좀 더 앞을 보기 위해 욕심을 부리다 끝내 실명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는 이가 종종 나오기도 한다. 에드워드가 신랄한 말을 내뱉으면서까지 자신의 주인을 걱정하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는 것이다.

 “결국 제어를 제대로 못해 드러누워 있는 형편이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군요. 그래도 변명을 하자면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눈을 혹사시킨 것만은 아닙니다. 미리 대비하고 있어야 할지도 모를 사안이 좀 있어서요.”

 고순도의 천연석이긴 해도 심안深眼 자체는 대단한 수준이 못 되는 그레이엄은, 다소 변칙적인 방법으로 그 능력을 활용하고 있었다. 미래 자체를 직접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세운 가설이나 추측의 실현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를 검토하는 데 눈을 쓰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유가 있다 해도 쓰러지신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대공의 구차한 변명은 충실한 비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레이엄은 상황을 모면할 겸 그리고 정보를 공유할 겸 빠르게 다음 말을 이었다.

 “일단 들어보세요. 음, 그렇군요. 제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에드 군이 아직 말하지 않고 있는 수집정보를 미리 맞춰 보죠. 기업연합 쪽에서, 정확히는 루이스 일가 쪽에서 시로가네 총재의 암살을 계획하고 있지요?”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푹 쉬시라고 다시 한 번 못 박을 생각이었던 에드워드의 눈동자가 놀라움에 커졌다.

 “어, 어떻게 그걸…… 호, 혹시 저 말고 다른 정보원이 보고를 마친 건가요?”

 그레이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제 밑에 있는 사람들 중에 에드 군만큼 정확한 정보를 신속하게 가져오는 사람은 달리 없습니다. 전부 제 ‘눈’으로 본 추측일 뿐이에요.”

 에드워드는 지금 그레이엄이 자신의 붉어진 얼굴을 볼 수 없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 어설프게 칭찬하셔도 안 넘어갑니다!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보실 정보는 아니었으니까요. 총재를 견제하기 위한 암살시도는 전부터 쭉 있었던 일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실제로 루이스 가를 은연중 조종하고 있는 것은 대니얼 더글라스 회장이며, 이번에야말로 단순한 견제가 아닌 진짜 죽일 생각으로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고 해도 말입니까?”

 불쑥 끼어든 그레이엄의 말에 에드워드는 연이어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결국 소년은 항복을 선언하듯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것도 눈으로 직접 보신 겁니까?”

 그레이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상의 본질을 꿰뚫는 심안深眼은 보이는 것에 한계가 있을지언정 그 눈에 비치는 것 자체는 진실이다. 물론 전설적인 집사장의 말마따나 ‘눈에 보인 진실未來을 바꿀 수 있다면 과연 그 눈에 비친 것은 정말 진실인가’ 하는 역설의 의문은 남지만, 최소한 심안자가 본 미래의 실현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레이엄은 현재 판단자료들을 통해 일정한 예측을 하고 그것을 다시 심안深眼을 통해 진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를 판별하는 식으로 능력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쭙잖게 미래의 한두 장면만 보고 호언장담하는 자칭 예언가들보다 훨씬 정확하게 미리 벌어질 일들을 알 수가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네요. 몇 년이고 총재를 방치하고 있던 회장이 왜 이제 와서 총재를 제거하려 드는 걸까요?”

 “답은 얼마 전 에드 군이 보고한 자료에 있습니다. 제3자연공원에서 열린 광명제 야회…… 그곳에서 시로가네 총재와 루이스 가의 셋째 딸 사이에 심한 마찰이 있었다고 하지요.”

 그레이엄의 말에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혹시나 해서 저도 루이스 가의 동향을 살피다 그들이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걸 알아낸 것이고요. 하지만 살인청부업의 의뢰처도 언제나처럼 총재와 암묵적인 합의로 손을 늦추고 있는 베놈이라 단순한 경고차원에 지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물며 배후조종자가 더글라스 회장이라니…….”

 혼란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에드워드에게 그레이엄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야회에서 총재가 겨냥한 상대는 분명 루시 루이스 한 사람이었지만, 총재의 진실에 가까운 매도에 해당되는 것은 그 자리에 있는 전원이었습니다. 즉 총재는 그녀 스스로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기업연합 전체를 모독한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그 정점에 있는 ‘회장’을 포함해서 말이지요.”

 에드워드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겨우, 겨우 그런 이유로 총재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단 말입니까? 동네 양아치도 아니고, 싫은 얘기 좀 들었다고……?”

 “공정하게 말하자면, 물론 그것만은 아니에요. 에드 군도 알고 있는 것처럼 총재는 그간 우리 황금산에, 그리고 기업연합의 독과점 지배에 방해가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처음부터 회장을 포함한 10대 재벌가들에게 있어선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셈이죠. 하지만 총재 본인의 정치적 수완, 되도록 약점을 만들지 않는 원칙에 따른 임무수행, 그리고 무엇보다 시황상제와의 연줄 때문에 함부로 건들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죽이거나 밀어내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출혈이 더 크다고 판단했을 테니까요.”

 “그렇, 겠군요. 설령 힘들게 총재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다음 총재직에 다시 황금산의 입김이 닿은 인물을 앉힐 수 있다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가뜩이나 경옥대전이나 흑색연맹의 견제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니…….”

 에드워드의 추측에 그레이엄은 동의를 표했다.

 “맞습니다. 그나마 시로가네 총재는 황금산의 지원으로 총재 자리에 오른 인물이니 우리 쪽 요구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는 만큼 미염공이나 과거 자칭 황제 쪽의 인사보다는 다루기 쉽겠다는 계산도 작용했겠지요. 뭐 그런 이해관계가 일치해 그동안은 큰 충돌이 없었던 것입니다만…….”

 “일리야의 난…… 뇌운공 아나스타샤 카잔차스키의 사망…… 흑색연맹의 수도궤멸…….”

 정보를 정리하듯 중얼거리는 에드워드의 말에 그레이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염공도 무시 못 할 인물이긴 하지만, 경옥대전은 어디까지나 타주의 간섭을 배제하는 자주보호정책에 치중하고 있는 만큼, 흑색연맹만큼 대놓고 우리와 대립하고 있지는 않지요. 그런 상황에서 연맹의 세력이 급속도로 약해지니 시기가 딱 좋다고 생각한 겁니다. 마침 총재의 언행에 재벌가 일원들이 공분하고 있는 상황이라 뜻을 하나로 모으기도 쉬웠을 테고 말이지요.”

 “확실히 저번에 회장은, 알렉세이라는 애송이가 연맹의 대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가 기회이니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야 한다고 했지요. 그런 움직임의 일환이라고 보면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 한데 그때 그 사람, 암살은 ‘어리석고 야만적인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렇게 말한 본인이 며칠도 안 돼 암살을 주도하겠다고요……?”

 대니얼을 진심으로 싫어하는 에드워드의 말투에 혐오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레이엄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분명 더글라스 회장은 대범하게 보이길 좋아하고 실제로도 대범한 사람이지만, 결국은 한갓 인간일 뿐이지요. 저나 에드 군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세상에서 대범하다고 말해지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허용량’이 조금 큰 것뿐이에요. 그걸 넘어서면 사람이 보이는 행태는 대개 비슷해집니다. 단…….”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라는 말을 그레이엄은 애써 삼켰다. 모든 면에서 상궤를 벗어난, 자신이 꿈꾸던 별과 같은 존재가 된 남자는 더 이상 인간의 틀에서는 판단할 수 없으리라. 어쩌면 그조차도 허용량이 ‘무한’일 뿐인 평범한 인간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레이엄은 잡념을 떨치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단, 회장 본인에겐 자각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암살이란 방식으로 거칠게 일을 해결하려는 게 아니라 마침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을 ‘세련되게’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이지요. 실은 시로가네 총재의 말에 자신도 울컥해 최후의 한발을 내딛은 것에 불과한데도.”

 사람의 마음은 자기 자신밖에 모른다는 말도 있지만, 그 본인조차 스스로를 속이며 헤매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아니,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오히려 더 드물 것이다.
 진중히 그레이엄의 말을 듣고 있던 에드워드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음? 잠깐만요! 시로가네 총재가 정말로 암살당한다면, 그건 엄청 큰일이잖아요!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게…….”

 “어디가 좋지 않은 상황이죠?”

 지금까지의 부드러운 어조와 달리 살짝 서늘한 기운이 서린 그레이엄의 말에 에드워드는 주춤 대답을 망설였다.

 “아, 그…… 역시 세계중앙은행 총재 같은 영향력 있는 인물이 암살당한다면 큰일이…….”

 “예, 분명 큰일이지요. 하지만 어디가 좋지 않은 상황일까요? 시로가네 총재에게? 아니면 우리에게?”

 “아……!”

 이제야 에드워드의 얼굴에 이해의 빛이 떠올랐다. 때때로 좋고 나쁨의 기준은 잔혹하리만큼 철저하게 상대적이다.

 “앞서 말했듯 시로가네 총재는 우리 황금산에 결코 호의적이지도 협조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녀가 제거된 후 차기 총재 자리에 더 심각한 인물이 선정돼 우리를 방해할 수도 있는 노릇이겠습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 그 반대의 가능성도 그만큼 존재하죠. 그런 상황에서 당장 황금산과 수면 하에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총재가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가 손해 볼 것은 없습니다. 기업연합의 회장이 암살을 추진하고 있는 표면적인 이유 또한 그러하고요.”

 “그리고 설령 암살에 실패한다고 해도 ‘우리’가 손해 볼 일은 없겠군요. 암살자들이 무언가 흔적을 남긴다면 그대로 기업연합을 견제할 수 있는 약점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살아남은 총재와 재벌가의 사이가 험악해질수록 ‘우리’가 가지는 운신의 폭은 넓어질 테니까요.”

 이해가 빠른 에드워드의 말에 그레이엄은 빙긋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거기까지 욕심을 부리다 이렇게 눈에 무리가 오고 말았습니다만, 그래도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변하지 않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총재와 재벌가 양쪽의 동향 감시. 그리고 총재습격의 규모가 커질 것을 대비해 암살예정일에는 적절한 사유를 통한 공주민들의 대피조치. 이 정도가 우선될까요.”

 “정답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그레이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으나, 에드워드의 표정은 아직 그렇지 못했다.

 “죄송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두 가지 더 있습니다.”

 “뭐죠?”

 “대공님께서 푹 쉬시는 것. 그리고 제가 식사를 만들어 오는 것이네요.”

 단호한 에드워드의 말에 반쯤 몸을 일으켰던 그레이엄은 졌다는 듯이 두 손을 올리며 얌전하게 다시 자리에 누웠다.






TRACKBACK 0 AND COMMENT 2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7.10.19 20:01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과연 유수의 열강들 사이에서도 독보적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답다고 해야할지, 역시나 많은 것을 손 안에 움켜쥔 자는 그 보전을 위해 시시각각 엄습하는 불안과 공포 그리고 유형무형의 실질적 위협에 직면해야만 하는 것이겠지요.

    ... 그렇다곤 해도 지난 흑색연맹의 쿠데타를 둘러싼 각종 암투들이 담백하다못해 귀엽게 느껴질 정도의 진창이라니, 아무래도 연우 남매가 있어야 할 곳은 수정 계곡이나 철옹성인 것 같아요.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7.10.20 06:34 신고 address edit/delete

      말씀처럼 세계 최강국에 위치하는 지역으로서 이런저런 암투가 전개되다 보니 꽤 내용도 살벌해지고 말았네요. 그 탓에 부족한 제 필력으로는 개그와 시리어스의 간극을 조절하기가 어렵기도...OTL

      확실히 흑색연맹이나 황금산 분위기에 비하면 초반 에피소드의 공주公州들은 평화롭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번 에피소드가 끝나면 다시 한 번 초심으로 돌아가봐야겠네요^^;;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언젠가 그로스는 자신을 비난하는 좌익 동지들의 비판에 이렇게 답했다.

 “종종 동지들은 내가 노동자를 묘사하는 방식에 반대한다. 나의 프롤레타리아가 진짜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프티브루주아가 만들어낸 인공적 형상, 즉 아나키스트 예술가 그로스가 바라본 노동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볼셰비키 만세’의 요구에 따라 노동자를 단정히 머리 빗고 늙은 영웅의 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그리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다.

 나는 아직도 그들이 사회적 위계의 맨 아래에서 억압받고, 남루한 옷을 입고, 저임금에 시달리고, 냄새나는 집에 살면서 종종 ‘정상에 오르라’는 부르주아적 욕망에 지배당한다고 본다. 게다가 일방적이고 그릇된 프로퍼갠더의 이상화에 따라 찬송가를 부르는 것으로 그들에게 봉사할 수 있다고는 절대 믿지 않는다.”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 휴머니스트, 263면. -










■■■








5-03. 그래도 기만하지 않을 수 없다 (4)


 - 세계는 인식이다.

 언젠가 들은 자수정의 목소리. 떠오르지 않아도 어딘가 한없이 그리운 그 음색이 뇌리에서 조용히 울려 퍼집니다.

 - 개개인의 심상은 모두 각자에게 귀결하지. 안타깝게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모두 같은 세계를 보고 있지 않아.

 확실히 그 말대로.
 가령 전 울창한 숲을 멋지다고 생각하며, 풀벌레의 울음소리나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서 마음의 평온을 얻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다른 보석인들은 제가 좋아하는 그것들을 끔찍하다고 여깁니다. 또한 그 보석인들 사이에서도 서로 선호하는 보석의 종류나 색상 등이 각각 다르기도 하지요.

 심지어 제가 평화롭다고 느끼는 숲의 풍경도 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치열한 생존경쟁의 현장입니다. 일전 며칠 숲에서 지냈을 때 그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네요. ……음, 근데 대체 전 언제 숲을 헤매고 다닌 적이 있는 걸까요.

 아무튼. 제가 한가롭게 듣는 풀벌레 소리나 새소리도 어쩌면 그들 나름의 처절한 비명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반대로 열렬한 사랑고백일지도 모를 일이죠. 그럼에도 전 그 소리들을 단지 듣기 좋은 ‘풍경음’ 중 하나로만 인식하고 있습니다. 분명 우리가 보는 세상은 본질과는 동떨어져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모두가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는, 아니 들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밤거리의 평온한 귀갓길이 총재님의 한 마디에 순식간에 설원의 칼바람이라도 분 듯 얼어붙고 만 것은.

 “엘. 넌 내일부터 나오지 않아도 돼.”

 “……네?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무런 예고 없이 불쑥 던져진 시로가네 총재님의 말에 엘 씨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며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했습니다. 그렇군요. 표정이 사라진다는 건 바로 이런 얼굴을 두고 하는 말이었군요.

 “더 이상 경호원으로 안 쓰겠다고. 즉, 해고야.”

 오해할 여지없이 단호하게 확언하는 총재님.
 아아,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어떤 전조도 없이 오히려 서로 웃으며 이런 대화를 나누었을 정도입니다.

 - 이거 총재님도 인기가 떨어진 거 아니에요? 며칠 동안 ‘손님’이 아무도 찾아오지 않잖아요.

 여기서 엘 씨가 입에 담은 손님이란 총재님을 노리는 ‘암살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동안 행적이 행적인 만큼 총재님은 이곳저곳에 정적이 매우 많습니다. 돈으로 대부분의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황금산에서는, 물론 살인 청부업자를 고용해 경쟁자를 제거하는 일도 딱히 드물지는 않습니다. 총재님은 그런 정적들이 보내는 암살자들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시달려 왔지요.

 한데 그 암살자들의 발길이 근래 축제 기간에 즈음해서 뚝 끊기고 말았네요. 엘 씨가 건넨 말은 바로 그런 상황에 대한 그녀 나름의 블랙 유머라고 할 수 있겠지요.

 - 흥. 그런 인기는 필요 없어. 뭐, 정말 놈들의 관심 밖으로 벗어난 거라면 다행이지만…….

 빈 장죽을 습관적으로 입에 물며 말을 흐리는 총재님. 괜한 이야기를 꺼내 분위기가 어색해졌다고 생각한 걸까요. 엘 씨는 불쑥 제게 고개를 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 확실히 저도 그런 프러포즈는 질색이네요. 특히 연지 씨가 있을 때 놈들이 덮쳐오면 무섭기도 하고요. ……주로 연지 씨가 지르는 비명이.

 - 아, 정말 오싹하긴 하지. 무섭다고 소리 지르면서도 상대는 확실하게 쓰러뜨리니까 말이야.

 킥킥 웃으며 동의하는 총재님에게 전 항의의 목소리를 올렸습니다.

 - 잠깐만요! 누가 들으면 실은 유혈을 즐기고 있는 성격파탄잔 줄 알겠어요!

 - 아니야?

 - 당――연하죠! 저도 살기 위해 있는 힘껏 발버둥치고 있을 뿐이라고요!

 하지만 제 혼신의 힘을 다한 호소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 하하하.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들 하지.

 - 그렇죠. 후후후.

 의기투합하듯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두 사람.
 으, 확실히 위기에 처했을 때는 이상할 정도로 몸이 신속하게 반응하는 제 자신에게 스스로도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기억을 잃기 전의 전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저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는, 뭔가 좋지 않은 일을 하던 막돼먹은 인간만은 아니었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 음, 그래.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오늘은 한 번 거리로 나가볼까.

 - 네? 저, 정말요?

 엘 씨와 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총재님을 멀뚱히 바라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간 총재님은 자신이 번화가로 나가면 일반인들이 암살시도에 말려들어 피해를 입을 수 있고, 또 그걸 빌미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위험해질 수 있다며, 줄곧 인적이 드문 우회로를 통해 귀가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아무리 근래 습격이 뜸해졌다고 해도 그건 좀 안이한 생각이 아닐지요. 어쩌면 놈들이 노리는 게 바로 그런 방심일 수도 있는데…… 아, 잠깐! 설마…….

 경호원으로서 총재님께 반대의견을 올리던 엘 씨가 갑자기 무언가 깨달았는지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 이해했나 보군. 그럼 가볼까.

 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엘 씨는 납득했는지 약간 긴장된 얼굴로 말없이 총재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총재님의 판단이 옳았는지 이처럼 간만에 함께 거리에 내려와 여러 곳을 돌며 축제 분위기를 즐겼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네요. 총재님의 정적들도 이만 무익하고 무해하고 어리석고 끔찍한 일련의 시도暗殺들을 포기한 걸까요.

 그렇다면 참 좋을 텐데. 앞으론 노엘 씨까지 포함해 다 같이 마음 편하게 이곳저곳 구경하며 즐길 수 있으면 참 즐거울 텐데…….

 이런 속 편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난데없이 엘 씨를 해고하겠다는 총재님의 폭탄선언이 떨어진 것입니다. 제3자인 저조차 황당하고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힘든데, 당사자인 엘 씨는 오죽할까요.
 엘 씨는 잔뜩 굳은 얼굴을 억지로 움직여 간신히 말을 자아냈습니다.

 “아, 아아. 혹시 제게 무슨 결례가 있어 해고를 하시는 건가요? 혹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실수를 했나요? 그렇다면 무엇이든 시정할 테니 다시 한 번만 기회를…….”

 고용주의 입지가 매우 강한 황금산에서는 아주 사소한 일로도 쉽게 사용인을 내칠 수가 있습니다. 가령 딱 한 번 단 1초라도 지각을 한다거나, 실수로 유니폼의 단추를 하나 잠그지 않는다거나 하는 사유만으로도 해고가 가능하다고 하네요.

 그나마 이렇게 형식적인 해고사유라도 필요하게 된 것조차 어떤 큰 사건을 겪고 나서라고 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300년 전, ‘축성칙의 맹인’이라 불렸던 이가 반란을 일으켜 황금산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갔을 때 저임금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그 봉기에 참가한 것이 해고사유가 만들어진 계기 중 하나라고 하네요. 겉치레로나마 노동자를 위하는 규정을 만들어 조금이라도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말이지요.

 하지만 형식은 어디까지나 형식일 뿐.
 상대적으로 압도적인 권력을 가진 고용주 입장에선 자그마한 트집을 잡아 사용인을 내쫓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설령 재판에 승소해 자리를 보전할 수 있다고 해도 그 뒤에 이어질 온갖 음성적인 보복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총재님은 그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답했습니다.

 “아니, 넌 잘못한 거 없어. 그저 내 변덕일 뿐이야. 위약금이라면 당장이라도 줄 수 있다.”

 또 하나 황금산에서 고용주를 위해 마련한 우회로가 바로 이 위약금 제도입니다. 대개는 통상 임금의 2배 정도의 위약금을 지급하면 사유 없는 해고에도 법적하자가 없다고 하네요.
 당연히 엘 씨가 그런 말에 납득할 리가 없습니다.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해 봐.”

 “설마, 요즘 좀 조용해졌다고 해서 절 필요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따지듯이 묻는 엘 씨의 말에 총재님은 코웃음을 쳤습니다.

 “네 앞에서 그런 얼간이로 보일 만큼 멍청한 짓을 한 적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왜 절 빼신다는 건가요? 총재님의 신변도 신변이지만, 아직 리자 씨의 연구에는 제 데이터가 더 필요할 텐데요. 제게 어떤 문제가 있다거나 제 경호가 못 미덥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라면, 죄송하지만 전 물러날 수 없습니다!”

 연구? 데이터? 대체 무슨 말일까요. 궁금증은 일지만 지금은 두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게 우선입니다.

 “…어쩔 수 없군. 얘기하기 전에 잠깐 걸을까.”

 총재님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짓을 했습니다. 확실히 방금 전 엘 씨가 목소리를 높인 탓에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이상 자리를 옮기는 편이 좋겠네요.

 잠시 후. 적당히 사람들이 있어 인파에 묻히면서도 이동하기에는 불편함이 없을 만큼 한산한 지역을 걸으며 총재님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너는 오늘 내가 왜 거리에 내려왔는지 눈치 챘나?”

 “시험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놈들이 우리를 방심시키기 위한 잔꾀를 부리는 것인지, 아니면 대규모 공세를 펼치기 전에 숨을 고르는 중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요. 물론 답은 후자일 테고요.”

 망설임 없이 단숨에 대답하는 엘 씨. 그 말에 한심하게도 전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대, 대규모 공세요!? 무서운 일들은 이제 끝나는 게 아닌가요?”

 “그럴 리가. 날 진짜 죽일 생각이든 단순히 정신적으로 압박할 속셈이든 청부업자를 고용해 암살시도를 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부담risk을 짊어지는 일이야. 한데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도 못하고 하루아침에 뜬금없이 그런 짓을 그만둘 이유가 없지. 게다가 날 노리던 놈들은 한둘이 아닌데, 갑자기 그자들이 전부 날 견제하는 일을 포기한다는 우연은 있을 수가 없어.”

 고개 대신 장죽을 흔들며 답하는 총재님. 엘 씨도 그 말에 동조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각기 놀던 그 배후의 권력자들이 한데 뜻을 모은다는 것도 있기 힘든 일이죠. 각자 자기 기업체나 고위 공직에서 아랫사람들에게 왕처럼 떠받들어지는 데 익숙한 작자들이니까요. 그럼에도 놈들이 일제히 똑같은 움직임을 보인다는 건, 더 큰 권력자의 지령이 있었다는 뜻이겠죠. 왕보다 높은 황제 같은 자. 가령 기업연합의…….”

 그때 총재님이 장죽을 들어 엘 씨의 입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 이상은 말하지 않는 게 좋아. 어디서 귀찮게 발목을 잡힐지 모르니까.”

 “예. 죄송합니다.”

 엘 씨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동안 전 새롭게 생겨난 의문을 입에 담았습니다.

 “저기, 그것만으로 상대가 대대적으로 밀고 들어올 거라 추측하는 건, 죄송하지만, 너무 비약이 심한 게 아닐까요? 확실히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는 건 분명한 것 같지만…….”

 “아, 타당한 지적이군. 뭐 여긴 한 가지 판단재료가 더 있다고 해야 할까. 음, 연회석에서 그만 참지 못하고 내가 저지른 게 있어서 말이야.”

 드물게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운 듯 빈 장죽으로 톡톡 자기 어깨를 치는 총재님.
 엘 씨도 무슨 사정인 줄 아는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후후. 총재님도 아직 젊으시던 걸요.”

 “시끄러워. 아무튼 알아봤자 좋을 거 없으니 자세한 얘긴 할 생각 없지만, 놈들에게 공분을 살 빌미를 줄 일이 있었다. 겨우 이 정도 일을 계기로 본격적인 승부에 나설까 긴가민가하긴 했지만, 최근 놈들의 움직임을 보면 확실하다고 봐야겠지.”

 황금산의 초고위층만 참석하는 자연공원에서의 연회. 아무래도 그날 밤 좋지 않은 일이 있었나 봅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총재님께서 말씀해주실 생각이 없다니 저로선 더 이상 추론할 도리가 없어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래도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살짝 엘 씨에게 물어봐야겠네요.

 “총재님과 제 상황인식은 같은 모양이군요. 근데도 왜 절 빼시겠다는 거죠? 물론 제가 진짜 천연석들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텐데요. 설령 제 실력이 부족해 다른 경호원을 더 쓰신다고 해도 ‘신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절 옆에 두시는 편이 여러모로 ‘보험’이 될 테고요.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총재님 정도 되시는 분이 돈 때문에 그러는 것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장난기 있는 웃음을 거두고 정색하며 묻는 엘 씨. 그 적나라한 물음에 총재님은 칼로 찌르듯 날카롭게 입을 열었습니다.

 “죽을 생각이냐?”

 어스름한 형석의 불빛 아래 매섭게 번쩍이는 청옥Sapphire의 서늘한 눈동자.
 하지만 엘 씨는 그 위세에 눌리지 않고 외눈으로 그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대답을 던졌습니다.

 “아니요. 제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빠져라. 앞으로 있을 습격暗殺은 지금까지의 견제와는 격이 다를 거다. 반쯤은 알면서 질 낮은 청부업자를 보내는 알선책broker의 수작에 속아준 것과 달리 진짜 위험한 것들을 보내려 하겠지. 내가 추가로 다른 경호원을 대거 고용해 전력을 강화한다 해도 네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

 “그건…… 실험체의 손실을 우려해 내리신 판단인가요?”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 여기서 총재님이 고개를 끄덕였다면 엘 씨는 순순히 물러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상대에게 성의를 다하기 위함이었을까요. 총재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은 녀석을 걱정한 판단이다.”

 아마도 이는 총재님의 본심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엘 씨 또한 물러날 수가 없었던 거겠지요.

 “그런 거라면 지금처럼 곁을 지키겠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총재님은 빈 장죽을 입에 물었다 떼며 깊은 한숨과 함께 물었습니다.

 “왜지? 살아남아 해야 할 일이 있는 게 아니었나?”

 엘 씨는 외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예. 그 제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게 바로 ‘돈을 버는 것’입니다. 그러니 총재님의 경호에서 빠지고 싶지 않네요. 이 일만큼 ‘정당하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건 달리 없으니까요. 제게는, 시간이 얼마 없어요. 죽기 전에 죽어도 돈을 벌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애당초 그걸 위해 실험에 자원했고, 그걸 위해 아직도 살아 있는 거니까요.”






TRACKBACK 0 AND COMMENT 2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7.10.08 00:1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역시 시로가네 총재님!

    통찰력이 날카로우신걸요, 후후... >_<)b

    저 말을 연희 본인이 들었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상을 해보면서 왠지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더랍니다.

    덧 - 남은 추석 연휴도 즐거운 시간 되시기를 바라요!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7.10.09 07:42 신고 address edit/delete

      아무래도 세계급 실력자에 속하는 캐릭터이다 보니 알게 모르게 이것저것 눈치 채고 있는 게 많죠^^;;

      연희는 성격이 대범한 편이다 보니 작중 총재와 같은 캐릭터와 잘 어울릴 수도 있을 듯싶어요.

      문득 만약 연희를 메인 인격으로 내세우고, 가끔 소심한 지우가 갭 모에(?)처럼 가끔씩 나오는 구도로 갔다면 훨씬 매력 있는 주인공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만, 그럴 경우 "아카이누가 주인공이었다면 그는 원피스를 1년 안에 완결낼 만큼 강합니다"라는 오다 작가의 말마따나 별세계의 별리도 이미 연재가 종료되었을지도^^;;



      (소디언 님께서도 연휴의 마지막, 즐거운 하루 되시길 바라요!)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홉스는 제대로 인정받은 적은 없었지만 진정한 부르주아 계급의 철학자였다. 끝없는 과정으로 사유된 부의 획득은, 축적 과정이 조만간에 존재하는 모든 지역 경계를 개방하라고 강요할 것이므로 정치권력의 점유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무한한 획득의 길로 들어선 사회는 이에 상응하는 권력 생산의 무한한 과정에 적합한 역동적인 정치 조직을 설계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미리 내다보았다. 심지어 그는 순전히 상상의 힘으로 그런 사회와 그 전체적인 정치 체제에 꼭 들어맞을 새로운 인간 유형의 주요한 심리적 특성의 윤곽을 그릴 수 있었다.

 홉스는 이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필연적으로 권력 자체를 숭배할 것임을 예견했으며, 설령 실제로는 사회가 그가 가진 모든 자연적 힘, 미덕과 악덕을 양도하도록 강요하며 또한 그를 전제정치에 대항하여 봉기할 권리도 없는 불쌍하고 온순한 하찮은 사람으로 또 권력을 추구하기는커녕 기존의 모든 정권에 복종하며 심지어 가장 친한 친구가 고위 권력의 불가해한 국가 이성에 무고한 희생자가 되어도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권력에 목마른 동물이라고 불리면 우쭐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왜냐하면 개개의 구성원이 축적하고 독점한 권력에 기반을 둔 국가는 필연적으로 각 개인을 무력하게 만들고 그의 자연적 · 인간적 능력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을 권력 축적 기계의 한 부품으로 강등시키고, 이 기계 궁극적 운명에 대해 장엄한 사유를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도록 내버려둔다.


-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권, 한길사, 300면 이하. -










■■■








5-03. 그래도 기만하지 않을 수 없다 (3)


 찬란한 햇살처럼 만인에게 두루 미치는 넓고도 얕은 사랑. 작은 촛불처럼 주위만 간신히 밝혀도 뜨겁게 집중된 사랑.
 그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단연――






 힘이 필요하다.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구차하게 내일을 구걸하며, 엘L은 간절히 자신에게 없는 것을 바랐다.

 - 음? 깼어요? 미안해라. 이 밤중에 어디 가냐고요? 아, 실은 심야 교대 인원 중 한 명이 급사……갑자기 일을 그만두는 바람에 급하게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요. 후후, 덕분에 추가 수당도 벌 수 있고 잘 됐죠. 아침에 돌아올 때 맛있는 거 사올 테니까, 릴리는 아무 걱정 말고 푹 자고 있어요.

 창백한 안색으로, 그럼에도 밝게 미소를 짓는 앨린.
 엘도 실은 알고 있었다. 저 미소가 단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쥐어짜낸 허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대로라면 앨린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임을.

 - 난…….

 하지만 엘은 또 알고 있었다. 나이도 어리고 몸도 약한 자신이 ‘죽는 것’ 외에는 앨린에게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음을. 그리고 자신에겐 죽을 용기조차 없다는 것을.

 - 아, 혹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죠? 전에도 말했지만, 릴리가 곁에 있어준 덕분에 난 힘을 낼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 릴리는 건강을 회복하는 일만 생각해요.

 - 응. 고마, 워…….

 엘은 그 말에 기대었다. 있는 힘껏 체중을 실어 앨린의 상냥함에 기생했다. 힘이 없는 것을 핑계로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언제까지나 같은 일상이 반복될 것이라 헛된 꿈을 꾸고 있었다.

 - 후후. 돈이 제법, 모였네요. 조금만 있으면, 한 단계 더 높은 주민권을 살 수 있어요. 더 좋은 곳에서 산다면 분명 릴리의 몸도 좋아질 거예요…….

 앨린의 안색이 나빠질수록 그 목소리는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사람은 희망에 촉발되어 꿈을 보기도 하지만, 종종 절망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꿈을 꾸기도 한다.

 - 앨린이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이미 현실감각을 상실한 엘은 막연히 절망에서 오는 앨린의 꿈을 믿었다.
 당시 엘은 앨린이 도산한 회사에서 급료 대신 받아온 구식 현출판을 통해 여러 활극소설들을 읽고 있었다. 간단한 집안일을 제외하면, 병약한 엘이 할 수 있는 그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끝에는 분명, 잘 풀릴 거야. 우리가 이대로, 무너질 리가 없어…….

 점차 이야기에 감화된 엘은 갖은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행복ending을 거머쥐는 주인공들의 모습에 자신들을 겹쳐 보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읽는 도중 명백히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었지만, 그녀는 애써 그것을 무시하며 절망을 비료로 화사하게 피어난 꽃夢에서 환상이란 이름의 꿀을 탐했다.

 - 앨린! 앨린이…… 앨린이, 눈을 뜨지 않아…….

 과로로 쓰러진 앨린이 더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압도적인 현실 앞에 짧고도 달콤한 꿈은 산산조각 났다. 동시에 엘은 자신이 이야기 속 주인공들에게서 모른 척하고 있었던, 마음에 ‘걸리는 것’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었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어째서 역경을 극복해 행복을 손에 쥘 수 있었는가.

 - 힘이, 있으니까……!

 그렇다. 힘이다. 그들에게는 힘이 있었다.
 언뜻 무력해 보이는 주인공조차 남들보다 특출 난 어떤 ‘재능’이 있기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재능 덕분에 주인공은 위대한 존재들의 눈길을 끌어 조력을 얻거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별다른 능력이 없다 해도 용모가 뛰어나거나 운이 비정상적으로 좋다거나 하는 등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남들과 차별화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 내겐, 그런 힘이 없어…….

 왜 이제야 깨닫고 만 걸까. 이미 모든 것이 늦어버린 지금에 와서야 왜. 아니,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왔기 때문에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던 걸까.

 - 이대로, 있을 순 없어……!

 엘은 무작정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구걸을 시작했다. 원하는 것은 실력으로 쟁취하라고 가르치는 황금산에서 가장 멸시 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행위를.

 쓰레기가. 역겨워. 모래먼지보다 못한. 벌레새끼. 구정물보다. 죽어라. 냄새 나. 무능. 인생의 낭비…….

 무작정 엎드려 금전을 구하는 엘을 향해 온갖 경멸과 매도가 쏟아졌다. 엘은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하면서도 비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현재 그녀가 앨린을 구할 수 있는 방도는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경험도 인맥도 전무한 그녀는 어디서 돈을 빌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다행히 앨린은 아직 숨이 붙어 있어. 서두른다면, 늦지 않을 거야……!’

 보석인은 그 강인한 신체구조의 특성상 당장 절명하지만 않는다면 설령 의식불명의 중태에 빠진다 해도 제법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다. 물론 시간을 오래 끌수록 소생가능성이 낮아지긴 하지만, 희망이 아예 없지는 않은 것이다.

 ‘하다못해 진료비라도 벌어야 해. 그 정도 돈은 있어야 치료사가 관심을 가질 거야. 집을 담보로 잡히는 건, 우선 최소한의 치료라도 받고 난 다음이어야 해.’

 오랫동안 환상에 허우적거리던 엘에게 빠르게 현실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본래 그녀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었으며, 날 때부터 보고 자란 빈민가의 사정에도 밝았다. 단지 지금까지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대로는, 늦어……!’

 그럼에도 여전히 현실은 압도적이었다. 엘의 손바닥에 떨어지는 건 환멸과 함께 돌멩이 대신 던져진 몇 개의 싸구려 동전뿐. 이런 속도pace로는 며칠을 길바닥에 죽치고 있어도 최소한의 진료비조차 모을 수 없을 것이다.

 - 필사적이군.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만큼. 시야가 좁은 녀석들에겐 이 구걸覺悟의 의미가 보이진 않겠지만.

 척. 엘은 누군가 자기 앞에 서는 기척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 좋은 얼굴이야. 각오가 되어 있군. 그래도 굳이 소리 내어 묻겠다. 말은 중요하니까. 의지에 형태를 부여하고 그것을 전달할 수 있으니까. 너, 돈만 벌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나?

 엉망으로 헝클어진 풍성한 금발에 아무렇게나 걸친 긴 백의.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올려다보던 엘은 곧 끌리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예!

 이것이 실험체 L과 연구원 리자의 첫 만남. 이미 이야기의 환상을 버린 엘이었지만, 그때만큼은 소녀의 눈에 리자의 백의는 마법사의 망토자락처럼 보였다.






 축제의 밤이 깊어질수록 욕망의 불빛은 찬란해져만 간다.
 금화로 꿈을 사고파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언제나처럼 소란스러운 거리. 하지만 녹금강의 소녀 엘L의 마음은 여느 때와 다르게 잔잔한 겨울 호수처럼 평온했다.

 “사버렸어, 어린애처럼…….”

 자조하듯 중얼거리는 혼잣말과 달리 엘의 어조는 그 마음만큼이나 온화했다. 그녀가 품에 안고 있는 것은 유명 연마사가 운영하는 제과점의 인기상품. 일명 ‘보석나무 과자’라 불리는 것이었다.

 “이젠, 그런 속설을 믿을 나이도 아닌데 말이지.”

 보석나무 이야기. 이는 명칭이나 결말은 조금씩 달라도 전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비슷한 내용의 어떤 전승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야기의 서사는 매우 단순.
 어떤 길을 잃은 나그네가 며칠이나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굶주리며 숲속을 헤맨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나그네는 우연히 말 그대로 열매 대신 보석이 열리는 신비한 나무를 발견한다. 나그네는 보석열매로 배를 채우고 무사히 숲을 빠져 나간다……. 이런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지역에 따라선 너무나도 굶주린 나그네가 실은 환각에 빠져 진짜 열매를 보석으로 착각하고 먹은 탓에 그 유기물의 독성으로 죽고 만다는 반전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나무를 발견하기 전까지의 내용은 대체로 유사했다.

 “어느 시대나 사람 사는 꼴은 비슷하다는 건가…….”

 이런 이야기가 세계 곳곳에 전해 내려오는 이유는, 마찬가지로 그 전승의 내용만큼이나 단순하다. 즉 ‘배불리 먹고 싶다’는 소망의 투영. 전승이 ‘시작된 과거’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보석산출량이 빈약했고, 삶의 터전이 될 시원석을 찾아 목숨을 걸고 황야를 헤매던 개척민의 무리들도 존재하던 때였다.

 아사餓死가 자연사만큼이나 흔하던 시절. 배를 주리다 못해 진흙이라도 핥던 사람들이 못 먹는 나무에서 보석이라도 열렸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고, 또 그 염원이 이야기가 되어 전해져 오는 현상에 하등 이상할 것은 없으리라.

 “그런 절박함도 예쁘게 포장해 팔아먹겠다는 발상이, 참 뭐라 해야 할지……. 뭐 거기 넘어간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황금산의 명물 중 하나인 보석나무 과자는 바로 그 전승을 ‘상품화’한 것이다.
 만드는 방식은 보석인의 먹거리치고는 복잡한 편이었다. 우선 갈색과 녹색 계통의 보석을 연마해 보석과자를 매달 나뭇가지 형상과 그 주변을 꾸밀 나뭇잎 장식을 만든다. 다음 9할 이상 연마를 마치고 아슬아슬하게 일부분만 원석 상태로 두어 신선도를 유지한 보석열매를 그 나뭇가지에 부착시킨다. 이 과정이 깔끔하게 잘 이루어져 있다면, 보석열매를 나뭇가지에서 뚝 떼는 순간 연마가 자동적으로 완성돼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수정계곡의 한 연마사가 자신이 자리를 비웠을 때에도 자수정의 대공이 양질의 식사를 할 수 있도록 고안한 방법과 같은 원리로서 보기보다 높은 숙련도가 요구된다. 연마가 조금이라도 지나친다면 아예 원석 부분이 사라져 신선도가 떨어지기 십상이며, 반대로 약간 모자란다면 먹는 이가 손수 흙먼지 등을 털어줘야 하는 번거로움을 부담해야하기 때문이다.

 “숙련된 연마사가 아니면 제대로 소화할 수 없는 기술…… 그러니 비싼 것도 있지만…….”

 보석나무 과자의 이른바 브랜드 가치를 높여주는 두 번째 요소는 다름 아닌 유래가 된 전승을 기반으로 꾸며낸 ‘사는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선전문구catchphrase에 있었다. 길 잃은 나그네가 보석나무라는 ‘기적’을 만나 굶주림을 해소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 과자를 구입하는 사람도 같은 행운을 만날 수 있다는 사탕발림을 눈앞에 흔드는 것이다.

 신神이 없는 이 세계에서는 그 어떤 간절한 기원도 닿을 곳이 없다. 하지만 사람弱者에게는 어딘가 매달릴 곳이 필요하다. 혼자만의 힘으로 두 다리를 지탱하기에 사람이 사는 세상은 괴로움이 많다. 특히 약육강식適者生存을 기조로 내세우는 엄혹한 황금산에서는 더더욱.

 구원을 바라는 사람의 약한 본성, 평소 각박한 생활 현실, 그리고 여기에 축제기간의 들뜬 분위기가 더해지면, 기업의 상술을 어린애 눈속임이라고 비웃던 자칭 냉철한 사람들도 1년에 한번쯤은 지갑을 열고 싶은 유혹에서 쉬이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앨린…….”

 물론 엘도 이것이 기만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한갓 과자 따위를 산다고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기에 그녀는 너무 많은 좌절現實을 겪어 왔으니까.

 “마음이, 중요하지…….”

 그렇기에 이것은 기원이 아닌 다짐. 이 과자는 앨린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산 것이지, 결코 요행이나 기적을 바라 손에 넣은 것이 아니라고, 엘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들뜬 마음으로 동굴 같은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TRACKBACK 0 AND COMMENT 2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7.09.26 16:3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마음 속 벽장 깊숙한 어딘가에 못내 감추어두었던 지난날의 추억들과, 그 행복의 상실을 재차 인지하며 찾아오는 일련의 공허감.

    어쩌면 지금의 엘과 주리의 심정은 놀라우리만치 닮은 꼴이 아닐까 싶어요.

    아무튼 여기에서 연우의 주리 무한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군요! 분발해라 헬가!!!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7.09.27 06:47 신고 address edit/delete

      일반적으로 사랑이라 불리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그저 차별일 뿐이라고, 바이킹 족을 중심으로 한 중세만화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으며 저도 상당 부분 그 말에 납득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사랑은 '누구나'가 아닌 '누군가'를 생각하는 행위가 아닐까 싶어요.

      좀 야한 어떤 능력자 배틀물의 말을 빌리자면 '어느 목숨이든 평등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자는 신이든지 혹은 그 누구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입장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물론 이런 말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차별이나 편애를 정당화할 수는 없고, 또 실제로 옹호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 부분은 남에게 부당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공정성'의 관점에서 봐야 할 문제이겠지요.

      작중 인물들의 사랑도 허울만 좋은 박애가 아니면서도 공정성을 해하지 않는 개인적인(하지만 중요한) 감정의 차원에서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이에요.

      (지난 에피소드의 히로인도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사람의 삶은 아이들에게 유전정보를 전하는 것만이 아니다. 사람은 유전자로는 전달하지 못하는 것을 전달할 수가 있지. 언어나 문자나 음악이나 영상을 통해 보고 듣고 느낀 것…… 분노, 슬픔, 기쁨…… 난 그걸 전하겠다. 전하기 위해 살겠다.

 우리들은 전해야만 한다. 우리들의 어리석고도 서글픈 역사를. 그것들을 전하기 위해 디지털이라고 하는 마법이 있지. 인간이 멸종한다 해도, 다음 종이 이 지구에 태어난다고 해도, 이 별이 일생을 다한다고 해도…… 생명의 잔향을 후세에 전할 필요가 있다. 미래를 만드는 것과 과거를 전하는 것은 같은 일이다.”


- 코지마 히데오, 메탈기어 솔리드 2 SONS OF LIBERTY 中 -










■■■








5-03. 그래도 기만하지 않을 수 없다 (2)


 아직 세상이 하나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보석인들의 나라가 ‘기구’로서 통합되기 전의 기억을 가진 세대가 살아 있고, 각국에 군대가 건재하며, 상제직도 단 셋밖에 존재하지 않던 시절.
 취옥Emerald의 소녀는 최전선에 있었다.






 - 절망이 웃고 있다.

 장렬한 화염에 휩싸여 하늘에서 추락하는 수백의 싸움배. 주변에 파편을 흩뿌리며 산사태처럼 허물어지는 수십의 육상전함. 땅과 하늘을 잇는 거센 돌풍에 종잇장처럼 찢겨나가는 수천의 초음속 전투기들. 비처럼 쏟아지는 벼락에 검게 타버린 수천수만의 전차와 보병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결성된 전세계 55개 공주公州 연합군은 30만이 넘는 그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처참하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 허언에 허무를 담아라.

 성혈聖血 『편익片翼의 웃는 사서』. 세계비보관리기구가 설립된 이후 첫 번째로 그 공식적인 출현이 확인된 심원 제5급 이상의 성흔聖痕.

 - 절망이, 웃고 있어.

 소녀는 초토된 바닥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입술을 깨물듯 중얼거렸다. 그녀는 취옥의 천연석으로 그 재능을 인정받아 어린 나이에도 영예롭게 1개 소대의 지휘를 맡게 되었지만, 소대원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흑요석의 한쪽 날개를 매섭게 뽐내며 초승달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웃는 거인聖痕.
 그것은 소녀의 말마따나 절망의 구현이었다. 그 심원급 성흔 앞에 지금은 쇠퇴된, 당대 최첨단 병기로 무장한 공주연합군의 공격은 일절 통용되지 않았다. 그 어떤 포탄과 폭탄도 대지를 가르고 산을 깎아낼 수는 있어도 성혈聖血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못한 것이다.

 - 허수를 세어 허공을 재라.

 허공에 떠 거인聖痕의 주변을 맴도는 여러 보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13권의 책. 그것들은 거인이 무언가 중얼거릴 때마다 각각 호응하듯 반짝이며 불이나 얼음이나 돌풍이나 벼락이나 지진 등의 재해를 일으켰다. 그 초자연적 권능 앞에 공주연합군의 전투 병기는 무력했다.

 - 왜, 왜 후퇴하지 않나! 퇴각명령은 아직이냐!?

 전선에 선 병사들이 절망에 몸을 떨며 하나 같이 입을 모아 외쳤지만, 지휘관들은 침묵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뒤에는 시원 21주 중 하나인 녹주관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퇴각은 불허한다. 녹주관의 대공은 우리를 믿고 자신들의 터전을 전장으로 빌려주었다.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

 공주연합군 총사령관이자 제3대 성천상제聖天上帝 로한 레프로보스는 단호하게 참모들의 퇴각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참모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 이미 우리 군의 손실률은 전멸상태에 다다라 있습니다.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지기 전에 퇴각해 태세를 다시 갖추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재기불능의 손실을 입는다면 자칫 녹주관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제 로한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 번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 녹주관의 위대한 결단 덕분에 우리 군은 그 시원석의 가호를 받아 돌인형이 될 우려를 불식하고 싸움에 임할 수 있었다. 그 신뢰를 배반할 수는 없다.

 사실 이는 단순히 고리타분한 의리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여기서 녹주관을 포기한다면 다시는 어떤 공주公州도 관리기구에 협력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공주연합군은 해체될 것이며 관리기구는 유명무실해져 최악의 경우 각국이 뿔뿔이 흩어져 대립하던 시절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 로한은 그 퇴보를 참을 수 없었다.

 ‘보석인들의 진정한 미래는 지금부터다. 이런 데서 발목을 잡힐 수는 없어!’

 아직 모든 공주公州가 관리기구에 참가하기 전, 젊은 시절의 그는 전쟁터에 있었다. 공주연합군의 신참 장교로서 전세계의 여러 분쟁지역에 개입해 그 실상을 직접 경험했다.

 ‘민족주의, 국가주의, 전체주의. 그에 기반한 국민감정에서 유발되는 심각한 대립. 그 모든 것이 낭비다. 소중한 인명과 귀중한 재산을 자부심이라는 이름의 쓰레기통에 버리는 처참한 낭비에 지나지 않아!’

 그의 눈에 국가나 민족에 의한 갈등은, 자신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선조들의 헛된 명예나 앙갚음에 집착해 벌어지는 비합리적인 우행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가령 아무도 부모의 죄를 자식에게 묻지는 않는다. 부모가 무능력하다 해서 자식도 그럴 것이라 단정 짓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국가나 민족에 관련된 사안이면 다른 논리가 적용된다.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국민 개개인과 일치시켜 그에 관련된 명예나 치욕을 스스로의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것이다.

 ‘추악한 발상이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광채로 빛나야 하지. 하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참을 수 없는 어떤 자들은 어떻게든 그 너머에 손을 뻗기 위해 전체와 개인을 동일시하려 들어. 그래야만 하나로 집중된 「거대한 힘」을 자신의 자부심으로 삼을 수 있으니까. 그 위대한 전체强者가 별 볼일 없는 자신弱者과 같다고 「착각」할 수 있으니까.’

 물론 그런 심리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가지고 있다. 전체의 힘을 개인의 긍지에 직결시키고 싶어 하는 욕구 자체를 아예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어쩌면 더 발전된 사회제도, 더 성숙된 정신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 그것이 여의치 않다는 것은 로한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다. 갑자기 모든 사람이 성자가 될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그 발판을 만들어야 해. 쓸데없는 대립으로 미래로 향하는 발걸음을 저해하는 환경부터 개선해야 한다.’

 그 결론이 바로 하나가 된 세계. 로한이 낸 답은 세계기구의 통치 아래 민족과 국가의 차를 없애고 모든 역량을 효율적으로 집중시켜 더 나은 사회의 발전을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뒤로 물러설 수는 없다. 여기서 역사를 후퇴시킨다는 것은, 지금까지 어리석은 대립에 낭비된 인생들을 헛되이 만드는 것에 다름없다. 물론 병사들에게만 희생을 강요할 생각은 없어. 나도 목숨을 걸도록 하지.’

 로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전장으로 향할 것을 결정했다.

 ‘이미 전권은 부사령관과 제2사령부에 양도했다. 내가 죽는다 해도 지휘계통에 심각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겠지. 그보다는 눈앞의 싸움에 집중하자.’

 로한은 기함의 격납고로 향해 자신의 전용기 앞에 우뚝 섰다.
 흑금강의 몸체와 홍옥의 무장으로 번쩍이고 있는 검붉은 거인. 먼 훗날 흑색연맹의 주력기 『차르巨人』의 원형이 되는 신체확장형 강화골격Gigantic-Powered Suit. 보석인들의 기술문명이 정점에 이른 이 시대의 온갖 첨단기술이 집약된 이 전투 병기야말로 로한이 꺼낸 비장의 수였다.

 - 자, 신의 주구聖痕를 섬멸하자. 빛나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공주연합군이 괴멸한 책임을 제3대 성천상제 로한 레프로보스에게 전적으로 돌리는 것은 분명 부당한 일일 것이다.
 그는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틀리지 않아도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단순하고도 가혹한 이야기일 뿐이다.

 아직 이 시대에는 성체관측소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지 않았으며, 관측정보의 부족으로 인해 성흔聖痕의 강도深度와 그 출현공식mechanism에 대해서도 부정확한 면이 많았다. 성채석 제도도 구상만이 있었을 뿐 실현되지 않았으며, 성흔에 대한 대처도 천연석의 강력한 개별칙보다는 발전된 기술문명에 의존하던 시기였다.

 로한 레프로보스는 범재였다. 어디까지나 천연석 기준에서이긴 했지만, 그는 오늘날의 상제들처럼 단신으로 공주公州 하나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초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상제의 자리에 올라 심층계곡의 괴물聖痕에게서 전세계 공주민들을 지킬 무력장치로써 대규모 공주연합군을 조직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심층계곡의 주박만 아니었다면 별의 바다를 누빌 수도 있었던 당대 보석인들의 전투 병기로도 심원급의 성흔聖痕에게는 일절 대항할 수 없었다.

 - 우리는, 졌어…….

 소녀는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인정했다. 죽은 것은 그녀의 소대원들만이 아니다. 30만 공주연합군의 반수 이상이 성혈聖血의 붉은 하늘 아래 찢기고 불타고 짓눌려 모래먼지로 변해 흩어졌다. 더 이상 연합군 병사들에게는 싸움을 계속할 의지도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 하지만, 난 아직 지지 않았어!

 그럼에도 소녀는 일어섰다. 고순도 천연석으로서의 강인한 내구도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팔다리가 움직인다는 사실이었다.

 - 죽인 만큼, 죽여주마.

 순수한 살의. 소녀가 가진 순화칙純化則은 구사자의 감정이나 의지가 다른 잡념이 섞이는 일 없이 한결 같을수록 강한 힘을 발휘하는 성질을 띠고 있었다.
 취옥의 소녀는 근처에 반파된 전차로 달려가 다연장 전자포를 뜯어내 웃는 사서聖痕를 겨누었다.

 - 그 불쾌한 비웃음을 당장 멈춰!

 소녀의 일갈과 함께 대구경 레일건에서 일제히 탄환이 사출됐다. 레일건을 움직이는 데 드는 막대한 전력은 순화칙에서 생성되는 에너지로, 레일건 자체의 무게와 반동은 오로지 천연석의 육체만으로 감당하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 탄환은 제대로 웃는 사서聖痕의 두부를 노리고 허공을 질주했다.

 - 허상에 허식을 더해라.

 웃는 사서聖痕의 중얼거림에 보석의 책이 반응하는 순간 주변의 암석들이 떠올라 즉석에서 몇 겹의 거대한 장벽을 생성해냈다.

 - 그딴 걸로 막을 수 있을 것 같냐!

 하지만 레일건에서 발사된 금속탄들은 그 장벽들을 돌파했다. 소녀의 순화칙에 영향을 받아 그 위력이 수십 배 이상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발사된 총 5발의 탄환 중 4발은 도중에 소실되었지만, 단 한발만이 끝까지 살아남아 기어코 웃는 사서聖痕의 가면에 정통으로 직격했다.

 - 하하, 꼴좋다. 괴물, 자식…….

 털썩. 레일건을 발사하는 데 힘을 전부 소진한 취옥의 소녀는 쓰러지듯 그 자리에서 뒤로 넘어갔다. 아직 능력의 사용이 미숙한 탓도 있었지만, 당대의 기술문명에 의한 전투 병기들은 개별칙의 에너지를 환산하는 데 효율이 좋지 않은 탓이 더 컸다. 구사자의 개별칙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는 흑요석제製 무기나, 별다른 손실 없이 개별칙의 힘을 그대로 파괴력으로 치환할 수 있는 백금총화기의 발명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 젠, 장…….

 성혈聖血과의 싸움이 시작된 이래 첫 유효타. 그러나 먼지가 걷힌 후 모습을 드러낸 웃는 사서는, 가면에 약간의 금이 가 있을 뿐 멀쩡했다. 소녀가 온힘을 다한 필살의 일격은 성흔聖痕에게 생채기를 입히는 정도로 끝난 것이다.

 - 허체를 들어 허구로써 허신을 불러라.

 웃는 사서聖痕의 책들이 빛나며 거대한 화염과 벼락을 불러냈고, 그것은 전부 쓰러져 있는 취옥의 소녀에게 향했다. 그만큼 상대를 위협으로 인정했다는 뜻이겠지만, 당연히 소녀는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 미안해, 다들. 나도, 여기까지인가 봐…….

 소녀가 먼저 죽은 전우들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을 때,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등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일순간에 성혈聖血이 내뿜은 화염과 벼락을 흩어버린 검붉은 거인.
 상제 로한의 결전병기가 전장에 도착했다.






 일순이나마 자신을 구한 영웅上帝의 말로이기 때문일까.
 취옥의 소녀는 개안된 눈을 통해 냉정하게 그 패배를 분석했다.

 - 역시 불순물이 많으면 놈들에게 이길 수 없어.

 로한의 결전병기 흑금강의 검붉은 거인Gigantic-Powered Suit은, 성혈의 웃는 사서聖痕를 상대로 얼마간은 선전을 펼칠 수 있었다.

 17개의 단분자 블레이드를 주축으로 부수적인 실탄병기를 쏟아 부으며 성혈聖血을 밀어붙이는 로한의 전투법.
 이는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인간형 기갑전투병기의 기동력과 내구성에 힘입어 웃는 사서의 보석책을 절반 이상 파괴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돌풍과 벼락을 일으킬 수 없게 한 것은 확실한 전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그 필사적인 맹공의 대가로 로한의 거인병기는 탑승자마저 팔다리를 잃어 움직일 수 없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채 쓰러지고 말았다. 아직 절반의 책과 성혈聖血 본체가 무사함에도 불구하고.

 - 굳이 인간형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나? 그건 단지 본인과 거인을 동일시해 확장된 힘을 과시하려는 헛된 만족감에 지나지 않잖아. 무리하게 인간형을 유지하는 데 집착하지 않고 그냥 일반적인 공중전함을 만들었다면 같은 비용으로 비슷한 성능의 병기를 열은 제작할 수 있었을 텐데.

 만약 로한의 전용기와 같은 성능의 공중전함이 10척 정도 더 있었다면, 승무원의 숙련도가 충분하다는 전제 하에 심원급의 성흔聖痕과도 꽤 호각으로 겨룰 수 있었을지 모른다. 최소한 이 절망적인 전황 속 30만 대군이 괴멸당하는 비참한 처지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잔인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 비효율적이야. 실로 끔찍한 낭비야.

 이것이 바로 제3대 성천상제 로한 레프로보스가 자신이 구한 소녀에게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물론 소녀에게는 은인을 매도하겠다는 배은망덕한 마음은 일절 없었다. 단지 극한상황에서 몸과 정신을 혹사한 결과 순화칙과 연동된 정안淨眼을 각성해 얻게 된 분석을 망아지경의 상태로 악의 없이 중얼거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로한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는 않았다.
 그가 시간을 끌고 성혈聖血을 약화시킨 덕분에 후진에 대기하고 있던 옥황상제의 원군이 문자 그대로 공주연합군이 ‘전멸’하기 전에 도착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대 옥황상제는 지금의 상제들처럼 고순도의 천연석이었으며, 또한 자기 휘하에 강력한 개별칙의 구사자들로 구성된 비밀특수부대Nameless Force를 두고 있었다. 이들의 공격은 지금까지의 희생이 허무할 만큼 성혈聖血에게 효과적이었으며, 제법 사상자를 내긴 했지만 마침내 웃는 사서를 토벌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싸움으로 인해 고심도의 성흔聖痕에게는 기초법칙에 의거한 전투 병기보다는 강한 파괴력을 가진 개별칙이 훨씬 유효하다는 점이 입증되었으며, 그로 인해 많은 것이 변화했다.

 우선 성채석 제도가 확립되었고, 각주에서는 빠르게 군대가 해체되었다.
 보석인들의 기술문명 또한 천천히 하지만 착실히 퇴보하기 시작했다. 세계의 존망을 건 성흔聖痕과의 싸움에서 무력한 모습밖에 보이지 못한 과학기술의 산물兵器에 각주의 지도자들은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대중들은 영웅적인 천연석의 활약에 눈을 빼앗겼다.

 기술문명이 점차 쇠퇴함에 따라 점점 사회에서는 선천적인 신체의 차, 즉 천연석과 모조석의 차이가 중요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한때 평등했던 양자의 관계는 다시 기울어 사회 요직의 대부분을 천연석이 차지하고 마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의 기점이 된 로한 레프로보스는 희대의 실책을 범한 무능한 상제로서 역사 속에 기록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 세계를 강제적으로 하나로 합치려 한 점, 성흔聖痕의 특성을 파악하지 않은 채 기계병기에 의존한 군대를 편성해 수많은 희생자를 낸 점, 참모들의 진언을 무시하고 이미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공주연합군에게 싸움을 강요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힌 점, 비효율적인 결전병기를 만든 점 등등. 이 모두가 그의 무능과 독선을 입증하는 확실한 사실들입니다.






 꿈에서 과거를 본 그녀는 어둠 속에서 취옥의 눈동자를 반짝이며 작게 입을 열었다.

 “그는 순수하지 못했어. 언제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지. 타인의 어리석음을 경멸하며 그 자신도 같은 어리석음에 물들어 있었고. 그는 최선을 다했어. 그는 틀리지 않았어. 하지만 끝내 그가 내포한 불순물이 모든 걸 망쳐 버렸지. 놈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무엇보다 그 목적에 있어 순수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지 못했어.”

 그녀는 침대에 누워 고이 자고 있는 연지를 내려다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반면 너는 순수해. 정말 보기 드문 심성의 소유자야. 과연 그 순수함은 널 어디로 데려가고 내게 무엇을 보여줄까. 난 그것이 정말 기대 돼.”

 사랑스럽다는 듯이 잠든 연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여성은, 한때 최전선에 선 젊은 장교少女였고, 후에는 제5대 성천상제였으며, 지금은 시황상제의 자리에 있는 셀레스티나 트리슈아였다.






TRACKBACK 0 AND COMMENT 2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7.07.31 22:10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저토록이나 찬란히 빛나던 최첨단 기술 문명과 그 기저의 사회 의식이 수백년 단위로 쇠퇴해버리다니...

    과연 카타리나가 통탄할만한 상황이 아닐까 싶어요.

    그나마 저 영광된 시대의 잔광을 조금이나마 유지한 곳이 황금산일테지요...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7.07.31 22:40 신고 address edit/delete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국 작중 로한이 우려하며 막고 싶어 했던 그릇된 시대의 물결은 거스르지를 못했지요. 그나마 작중의 관리기구가 해체되지 않았다는 점이 그에게 있어선 유일한 위안이 되지 않을지......


      현실 속 우리 생활이나, 역사 속에서도 아무리 미래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기술도 당장 실용성이 없거나 없는 것처럼 보이면 관심과 투자를 받지 못해 정체하거나 퇴보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듯싶어요.

      그렇기에 문명끼리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데는 어느 정도는 운적인 측면이 작용하는 듯싶으며, 미래에 어느 문명의 요소가 도움이 될지 모르니 최대한 다양성을 존중해야 된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인간은 참 우매해. 그 빛이 실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걸 모르니까. 하나의 전구를 터질 듯 밝히면 세상이 밝아진다고 생각하지. 실은 골고루 무수한 전구를 밝혀야만 세상이 밝아진다는 걸 몰라. 자신의 에너지를 몽땅 던져주고 자신은 줄곧 어둠 속에 묻혀 있지. 어둠 속에서 그들을 부러워하고... 또 자신의 주변은 어두우니까... 그들에게 몰표를 던져.

 가난한 이들이 도리어 독재 정권에게 표를 주는 것도, 아니다 싶은 인간들이 스크린 속의 인간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헌납하는 것도 모두가 그 때문이야. 자신의 빛을... 그리고 서로의 빛을

 믿지 않기 때문이지, 기대하지 않고... 서로를 발견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야. 세상의 어둠은 결국 그런 서로서로의 어둠에서 시작 돼.


-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예담, 186면. -










■■■








5-03. 그래도 기만하지 않을 수 없다 (1)


 창천을 담은 창과 화살이 최후의 힘을 짜내 녹슨 괴물魔獸을 노리고 질주한다.
 삐걱거리는 철의 짐승은 자신을 겨냥한 그 보석의 조아爪牙를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견고한 철갑이 뚫려 피부가 갈라지고 뼈가 부서지는 끔찍한 소리. 짐승은 철철 피를 흘리며 격통 속에서도 소리 높여 기쁘게 외쳤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삶이다!”

 녹슨 강철을 두른 늙은 살인마, 공공의 적 베오불프 오토는 상제의 사냥꾼들이 쏘아낸 온갖 공격을 한 몸에 받은 채 새하얀 설원을 붉게 물들인 자신의 흔적血痕을 내려다보며 흡족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괴물이었나…….”

 옥황상제 직속의 특수부대Nameless Force, 『무명無名』 제3부대의 부대장인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는 청금강의 눈동자로 오토를 올려다보며 질린 듯이 중얼거렸다. 저런 처참한 몰골이 돼서도 싸움에서 기쁨을 찾는 늙은 살인마의 이질적인 정신성은 그의 이해를 아득히 넘어서는 것이었다.

 “너희들은, 정말 강했다.”

 오토는 비틀거리면서도 무명의 사냥꾼들에게 마지막 예의라도 갖추듯 자세를 바로하며 입을 열었다.

 “특히 너의 강함에는, 살아온 나날을 헛되이 하지 않은, 진정으로 삶을 사랑한 이의 광채가 있었다. 난 그 강함을 긍정하고 그 강함에 상찬을 보낸다.”

 뚝뚝. 녹슨 철의 맹수가 흘리는 피에 다시금 설원은 한줄기 붉은 꽃을 피어냈다. 이 근처에 있는 녹주관綠柱館은 보석으로 만들어낸 꽃의 정원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주公州였으나, 오토는 싸우는 자들이 피우는 혈화야말로 이 세상 그 어느 꽃보다도 아름다운 것이라 여겼다.

 “그렇다. 너의 광채는 아름답다. 그리고 난 그 아름다움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힘껏 싸운 아름다운 자가 스스로를 잃고 추악한 돌인형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난 보고 싶지 않다.”

 뚜벅뚜벅. 오토는 설원 위에 널브러져 있는 안토니우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제3부대원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는, 그러나 하반신이 없는 처참한 몰골로 언제 죽음이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은 지경에 있었다.

 “그거, 고맙군.”

 안토니우스는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비웃듯이 답했다. 몸의 절반 정도를 온전히 남긴 상태에서, 시원석의 영향권을 벗어난 이 설원에서 숨을 거둔다면 높은 확률로 돌인형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주겠다는 오토의 제안은, 그에게 있어 확실히 고마운 것이었다.
 푸른 장발의 미남자는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며 속으로 부하들에게 사죄의 말을 건넸다.

 ‘미안하다. 내가 판단을 그르친 탓에 너희들까지 희생되고 말았다. 설마 저 남자의 위협이 온전히 스스로에게 연유한 것이었다니……. 부디 심층계곡에서 어리석은 날 얼마든지 매도해다오.’

 안토니우스의 사죄는 다른 두 사람에게도 향했다.

 ‘아메트린 공, 유라 님. 죄송하지만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자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전할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총명한 당신들이라면 저희의 패배에서 많은 것을 읽으실 수 있겠지요. 뒤는 부탁드리겠습니다.’

 죽음의 시간. 안토니우스가 힘겹게 미련을 끊어내는 동안 어느새 오토는 그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편히 쉬어라. 너의 피와 살은 내가 함께 데려가주마.”

 기긱. 기기긱. 오토의 팔이 흉악한 맹수의 머리로 변모해 그 거대한 입을 쩍 벌렸다.

 ‘상제님 감사합니다. 당신이 계셔, 전 행복했습니다.’

 안토니우스가 생애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그의 은인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흔한 불행.
 그는 술에 취하면 언제나 폭력을 휘둘렀다. 아내는 비명을 질렀고 어린 아들은 어둠 속에서 떨고만 있었다.

 흔한 우행.
 그는 구제할 도리 없는 중증의 도박꾼이었다. 자신의 돈이든 남의 돈이든 일단 돈이 생기면 언젠가 반드시 행운이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며 언제나 주사위에 모든 것을 투자했다.

 흔한 파행.
 빚에 짓눌려 더 이상 집안에 팔 물건이 남아 있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아내와 자식을 팔았다. 물론 그의 입장에선 그것은 결코 가족에 대한 배신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가족을 담보로 자금을 마련해 큰 승부賭博에서 이겨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한 포석일 뿐. 그는 자신의 주사위가 이번에야말로 운명을 붙잡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흔한 결말.
 그는 분명 운명을 붙잡았다. 파멸이라는 이름의 운명을. 언제나 그랬듯 그는 마지막 도박에서도 실패했고, 그의 아내와 어린 자식은 사채업자의 배후에 있는 폭력단mafia에 의해 노예처럼 팔려나갔다.

 - 오늘부터 넌 황금산의 적을 쏘는 한발의 총탄으로써 단련된다.

 팔린 자식, 에드워드 그레이스를 사간 곳은 황금산의 비밀암살부대, 실버 블릿의 육성기관이었다.
 보통 실버 블릿의 암살자 후보에는 은현탑의 속주민이 선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그것은 절대적인 규칙 같은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저항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로서 속주민들을 선택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황금산의 공주민 중에서도 에드워드처럼 궁지에 몰린 어린애들이 암살기관에 팔리는 일 또한 간혹 일어나곤 했다. 물론 이곳에는 단순히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에드워드의 경우는 그가 가진 개별칙이 암살에 적합하다는 점, 그리고 외모가 곱상하여 상대를 방심시키거나 유혹하는 임무 등에 쓸모가 있을 수 있다는 판단 하에 후보자로 키워질 수 있었다.

 훈련은 가혹했다. 종종 사망자가 발생할 정도로.
 애당초 대개는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암살자를 양성하는 기관인 만큼 대상자의 사정을 봐주며 훈련을 시킬 리 만무했다. 과정을 따라가지 못하는 후보생 중에는 점점 강도 높은 훈련을 강요당하다 목숨을 잃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 여기선, 이유 없이 맞지 않아도 돼.

 하지만 소년은 행복했다. 최소한 이곳에서는 ‘부당하게’ 구타당하는 일은 없었고, 길고 힘든 훈련이 끝나면 식사와 수면시간만큼은 확실하게 보장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실버 블릿의 양성기관 또한 과거에는 교관들이 후보생들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음성적인 부조리와 부정부패가 성행했다고 한다. 어떤 사회적 보호도 기대할 수 없는 밑바닥의 약자들을 어떻게 대우하건 별다른 반발도 처벌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를 일신한 것이 바로 성천상제의 반려이자 현 실버 블릿의 총책임자이기도 한 빈센트 맥스웰이었다.

 - 황금산의 돈을 들여 키운 인재를 해하는 일은 황금산을 직접 해하는 것과 같다.

 무분별한 인적자원의 마모를 막는다는 확고하고도 흔들림 없는 대의명분 아래 빈센트는 실버 블릿의 부정부패와 부조리를 일소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리 훌륭한 공적을 세우고 실력이 뛰어난 교관이라도 위반자라면 과감하게 엄벌에 처하고 담당자를 교체했다.

 - 상제의 첩이 실버 블릿을 말아먹으려 한다.

 빈센트의 개혁이 처음부터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새로운 규칙에 적응하지 못한 교관들은 여전히 구시대의 폐습을 반복했으며, 가장 심했을 때는 전체 교관의 80%가 반년 만에 전부 교체된 적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직이 제대로 기능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 환부를 째려면 아픔이 동반되는 법이지. 병상에서 일어나려면 회복기간이 필요한 법이고.

 하지만 빈센트는 주위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천상제의 전적인 지원을 얻어 개혁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실버 블릿은 2년 후에 더 강대한 조직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실행부대 개개인의 전투력이 높아진 것은 물론 인격적인 면에서도 안정된 자원이 늘어나 운이 좋다면 암살부대에서 고위층의 개인 경호원이나 정상적인 군의 특수부대 쪽으로 차출되는 경우도 생기게 된 것이다.

 - 전 이 소년이 마음에 드는군요. 그를 데려가겠습니다.

 에드워드는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다름 아닌 황금산 대공의 눈에 들어 그의 전속 경호를 맡게 되었으니 말이다. 더러운 일을 떠맡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암살부대의 생활에 비하면 금전 면에서도 대우 면에서도 가히 신분상승이라 할 만한 일이었다.

 ‘대공님은 날 인간으로 대해주셨다.’

 하지만 무엇보다 에드워드의 마음을 울린 것은 그레이엄의 태도였다. 천연석과 모조석. 일개 빈민가 출신의 암살자 소년과 저명한 광물학자이자 세계최강주의 최고책임자인 고위층 인사. 둘의 사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가 벌어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 에드 군. 오늘도 고마웠습니다.

 그럼에도 그레이엄은 그런 권위의식은 먼지 한 톨만큼도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에드워드를 스스럼없이, 그리고 상냥하게 대해주었다. 또한 그레이엄은 심안深眼의 힘을 빌려 에드워드의 사무처리능력을 파악해 비서관으로서의 길도 열어주었다.
 이는 일찍이 에드워드가 그의 변변찮은 부모로부터도 실버 블릿의 차가운 교관들로부터도 경험한 적이 없었던,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어른’의 모습이었다.

 ‘평생 누군가를 섬겨야 할 운명이라면, 이분이 좋다.’

 그렇게 에드워드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신의 주인을 결정했다.






 “……군. ……드 군. 에드 군.”

 잠결에 들리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 그 기분 좋게 잘 울리는 부드러운 음색이 꿈속에 부유하는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엄연히 현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에드워드의 정신은 빠르게 수면 위로 부상했다.

 “대공, 님……?”

 정갈하고 간소한,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방안 풍경. 푹신하지만 명백히 자신의 것이 아닌 침대. 그리고 앞치마를 두르고 눈앞에 서 있는 금발의 미남자.
 아직 잠에서 덜 깬 에드워드가 이곳이 어제 머무른 그레이엄 대공의 방이며, 그 대공이 지금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몇 초가 더 소요되었다.

 “대, 대공님!? 이게, 무슨……. 절 깨워주셨으면……!”

 모시는 분이 먼저 일어나 식사를 차리고 있다는 데 당황한 에드워드의 입에서는 제대로 된 문장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레이엄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진정하세요. 그냥 먼저 눈이 떠져 준비했을 뿐이니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아요.”

 “죄, 죄송합니다…….”

 침대에서 일어나서도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에드워드를 향해 그레이엄은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에드 군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결과적으론 그렇게 된 모양이군요. 어제 밤새도록 제 경호를 맡았으니 피곤한 건 당연한 일이지요. 아무것도 부끄럽게 생각할 거 없어요.”

 광명제의 시작을 알리는 전야축제. 그레이엄 대공은 여러 공식행사에 참석하느라 매우 분주했고, 당연히 전속 경호원인 에드워드 또한 그의 곁을 지키느라 강행군을 소화해야 했다.

 행사는 모두 무사히 마쳤으나, 모조석이자 아직 나이가 어린 에드워드는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상당히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에드워드가 새벽에 홀로 돌아갈 것을 걱정한 그레이엄은 적당한 핑계를 대어 그를 자신의 관사에 묵게 한 것이다.

 “그러니 에드 군은 오늘 푹 쉬는 게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 단지 에드 군을 괴롭히려고 여기 묵게 한 셈이 되고 말지요. 설마 절 악덕 상사로 만들 생각은 아니겠지요?”

 그레이엄의 장난스럽지만 진심이 담긴 말에 에드워드는 어쩔 수 없이 항복을 선언했다. 자존심을 지키고자 상대의 배려를 지나치게 거절하는 것도 결국은 실례가 되고 말 것이다.

 “알아주니 고맙군요. 자, 그럼 늦은 아침brunch을 먹도록 하죠.”

 그레이엄은 앞치마를 벗으며 웃는 얼굴로 에드워드에게 자리를 권했다. 식탁에는 그레이엄이 직접 차린 식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잘 숙성된 금강석에 적당히 열에 녹인 황금을 듬뿍 바른 간소한 보석요리. 조리법 역시 그 차림새만큼이나 간단했지만, 단맛이 강하고 식감이 풍부해 의외로 포만감을 주는 황금산의 전통요리 중 하나였다.

 다만 천연석은 자신과 일치하는 보석은 입에 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었기 때문에 이 요리는 황금산에서는 모조석의 하층민들이나 입에 담는 천한 식사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그레이엄은 남 앞에서 대공 행세를 해야 할 때가 아니라면 그런 시시한 불문율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저기, 죄송하지만 저도 일단은 남에 속합니다만…….”

 에드워드는 일말의 거리낌 없이 황금을 바른 금강석을 입으로 가져가는 그레이엄을 향해 다소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긴장이 풀리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살짝 장난기가 돈 것이다.
 하지만 에드워드에게 돌아온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전 에드 군을 단순한 남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잠시간 대공의 말을 접수하지 못해 침묵을 지키던 에드워드는, 이윽고 그 진의를 깨닫고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가 오늘 입에 담은 보석요리는 여느 때보다도 훨씬 달았다.






TRACKBACK 0 AND COMMENT 2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7.07.19 19:12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이번 화의 서두에서 인용해주신 독백의 내용처럼, 세계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구성원 각자가 내딛는 한걸음의 총합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그렇기에 별세계의 별리 작중 초강대국의 상대적 우위 유지를 위한다는 명분과 기치하에 온갖 신자유주의적 부조리와 비극이 횡행하는 황금산의 내부 사회 체계가 온전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일테고 말이예요.

    그러한 점에서 볼 때 수정 계곡도 지도자를 참 잘 만났음에 틀림이 없어요. 후후... (기승전 ☆주리 찬양☆)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7.07.22 12:30 신고 address edit/delete

      그런 면에서 볼 때 이상理想을 추구하는 것과 그 이상에 단지 휘둘리고 있는 것은 언뜻 비슷하면서도 실상은 매우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령 성공하거나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이른바 롤모델 내지 멘토 등으로 삼고 정진한다든지, TV속의 예쁜 연예인, 창작물 속의 멋진 주인공 등의 모습에 즐거움을 얻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겠지요.

      하지만 거기서 길을 벗어나 해당 인물들을 맹신적으로 추종하며 자신이 가진 많은 것들을 갖다 바치고 심지어 타인에게도 그럴 것을 강요하다시피 하는 지경까지 나아가면, 위의 인용에서 비판하는 인물유형과 같이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또한 모 사이트에서 소위 '있는 자'들을 지나치게 옹호하는 사람들에 대해 '자기나 자기 자식들이 언젠가 대기업 간부되고 사업체 오너될 것으로 착각하는 인간들'이라는 신랄한 댓글을 본 적이 있는데, 그처럼 설령 지금 자신도 착취당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나나 내 자식이 그 자리에 올라 남을 착취할 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착취하는 구조' 그 자체는 없애는 데 반대하고 유지하고 싶어 하는 어리석은 심리를 가진 사람들도 종종 발견할 수 있는데, 그런 사람들도 이에 해당된다고 보이더군요.

      저를 비롯한 우리 시대의 많은 분들이 그런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 올바르게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비난하기는 쉬운 일이다. 왜 그렇게밖에 못 사느냐고 힐난하기도 쉬운 일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는 이유가 있고, 한 사람을 지금의 그 사람으로 만든 환경이라는 게 있다.

 우리가 가진 한계는 바로 그런 것들을 고려하지 못하고 그 말과 행동 뒤에 감춰진 진실을 알아내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자신 역시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이들의 약함이 이해가 안 되고 용서가 안 되는 것이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남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에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시작되고 긴장이 퍼져나간다.


- 손성경, 『이단자의 상속녀』 역자 후기 중 -










■■■








5-02. 그래도 추상하지 않을 수 없다 (7)


 ‘총재를 죽이게.’

 화사한 연회석에 어울리지 않는 살벌한 말이 대니얼에게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언어를 귀에 담은 사람은 이 자리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심지어 대니얼 본인마저도. 왜냐하면 이건 단지 그의 ‘생각’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위협이 아닌, ‘진짜로’ 말씀이십니까?”

 그럼에도 그의 말에 답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정장으로도 미처 숨길 수 없는 근육질의 몸매와 간편하게 자른 숱이 적은 짧은 머리가 특징적인 여성. 마치 경호원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그녀의 정체는 『독아Venom』라는 범죄조직의 간부 중 한 사람으로 사건을 덮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청부업자들을 소개하고 있는 알선책broker이기도 했다.

 ‘그래. 여우는 점점 통제를 벗어나고 있어. 룰에 따르지 않는 말piece은 더 이상 판 위에 필요 없지. 이만 퇴장할 때가 됐네.’

 베놈의 브로커, 올가의 머릿속에 다시 한 번 대니얼의 소리 없는 말이 울려 퍼졌다.
 그녀가 가진 법칙의 이름은 독심칙讀心則. 모조석이자 법칙개화도 얼마 이루지 못한 그녀의 능력으로는 고작 말하기 직전의, 이른바 ‘목구멍까지 올라온’ 사고를 읽는 것이 한계였으나, 사용하기에 따라선 이처럼 중요한 자리에서 밀담을 나누는 데 유용할 수 있었다.

 더욱이 이 자리는 대니얼의 수하들이 차음효과를 지닌 법칙을 전개하고 있으며, 자신도 그늘에서 등을 돌린 채 다른 방향을 경계하는 척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 때문에 입술을 읽힐 가능성도 적다. 대화도 대니얼의 목소리는 새어나가지 않으니 설령 누군가 엿듣는다고 해도 치명적인 실책으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다.
 올가는 최소한의 긴장을 유지하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녀는 아직까지 대공 각하에게 협력적이라 알고 있습니다만. 성천상제의 빈자리를 지키는 데는 그녀의 한 표가 중요할 텐데요.”

 대니얼은 단호하게 부정하는 생각을 보냈다.

 ‘난 오히려 빨리 성천상제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된다고 보네.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지금 우리가 얼마나 정치적 부담을 지고 있는지 알고 있나? 그건 시간이 길어질수록 반드시 우리 황금산에, 그리고 기업연합에 불리하게 다가올 거야. 물론 대공 각하와 백금도의 애송이도 무언가 계획이 있으니 출혈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겠네만, 그들도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는 보장은 없지. 누군가 등을 밀어줄 때가 왔어.’

 남은 틀려도 나는 올바를 것이라는 그 사고적 모순을, 당연히 올가는 지적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계약상대일 뿐, 대니얼에게 간언을 할 가신도 빈틈을 보좌할 부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 올가는 현실적인 문제를 입에 담았다.

 “그럼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는 업자를 수배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식 의뢰인으로 등록해 드려도 문제없으시겠습니까?”

 계약체결의 의향을 묻는 올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총재 암살이라는 위험부담을 떠맡게 되는 이상 ‘책임소재’는 명확히 해둘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니얼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아니, 의뢰인은 내가 아닐세. 저 아이가 하게 될 거야.’

 그의 손에 들린 시가는 막 시로가네에게 창피를 당하고 연회석을 황급히 떠나는 루시 루이스의 뒷모습을 향하고 있었다.
 올가의 얼굴에 곧 이해의 빛이 떠올랐다.

 “왜 저런 철부지 아가씨가 이 연회에 참석하고 있는지 의문이었습니다만,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요. 회장님의 포석에는 감복할 따름이지만, 그래도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까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 말입니다.”

 다소 건방지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올가는 서슴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자칫 조직Venom의 존부를 결정할 수도 있는 의뢰이니 만큼 최대한 신중해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니얼은 오만하긴 해도 부조리하진 않았다.

 ‘자네의 의문은 지당해. 하지만 나도 아무 근거 없이 말하는 건 아닐세. 저 루이스 가의 여식에 대해선 우리 참모진의 심리 분석이 이미 끝났고 차후 계획도 세워 두었네. 다행히 예상대로 저 아이는 오늘 자리에서 총재에게 멋대로 시비를 걸다 훌륭하게 자폭을 해주었지. 다음은 저 아이와 친분이 있는 내 조카딸이 사연을 들어주며 공분하는 척 자네의 명함을 건네줄 예정이네.’

 “죄송하지만, 그다지 세련된 계획이라 할 수는 없겠군요.”

 올가는 가차 없이 감상을 말했다. 대범하게 보이길 좋아하고 실제로 대범한 대니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하지만 루이스 가의 여식이 예상과 달리 자네에게 총재 암살을 의뢰하지 않거나, 다른 조직에 의뢰한다고 해도 상관없네. 그때는 내가 다시 정식 의뢰를 하면 될 일이야. 어차피 혐의는 저 아이에게 쏠릴 테니까.’

 여기서 대니얼이 말하는 ‘혐의’란 단순히 사람들이나 수사기관의 의심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말하자면 구실. 설령 대니얼이 총재를 암살했다고 확실한 심증을 갖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가 가진 재력과 권력이라면, ‘총재에게 수치를 당한 루이스 가문의 셋째 딸’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을 재료로 얼마든지 그녀를 배후인물로 몰아갈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해 두셨다면 감히 제가 드릴 말씀은 거의 없겠군요. 그럼에도 실례를 무릅쓰고 한 말씀만 더 올리겠습니다. 루이스 가문은 괜찮은 겁니까?”

 만의 하나 대니얼의 포석에 빈틈이 생겨 총재 암살의 배후가 밝혀지게 될 경우, 당연히 범인으로 몰릴 셋째 딸의 처지를 루이스 가문의 총수가 마냥 지켜보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더글라스 가와 루이스 가. 황금산의 10대 재벌에 속하는 두 대가문의 충돌에 올가가 속한 한갓 범죄조직의 운명은 폭풍 속의 낙엽보다도 하찮을 것이다. 대니얼에게 이 만약의 사태에 대한 방비가 없다면 앞으로 일거리가 많이 줄게 되더라도 여기서 물러나야겠다고, 올가는 생각했다.
 대니얼은 그녀가 원하는 답을 주었다.

 ‘자네는 정말 신중하군. 그 때문에 자네를 부른 것이긴 하지만. 그것도 걱정할 것 없네. 사실 저 아이는 루이스 가에서도 은근한 골칫덩어리거든.’

 “야망, 때문입니까?”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 맞아. 저 아이는 분에 넘치게도 차기 총수 자리를 노리고 있네. 천연석인 손위 형제가 있는데도 말이야. 본인 딴에는 감추고 있을 생각이겠지만, 오늘 연회에서의 소란을 보더라도 옆에서는 빤히 보이는 일이지. 잭……현 루이스 가의 총수는 이것이 장차 가문 자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불화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있네. 자네라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대니얼의 물음에 올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딸인 만큼, 그리고 아직 확실하게 위협으로 드러나지 않은 만큼 적극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을 테지만, ‘불의의 사태’로 인해 루시가 실각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면 루이스 가는 체면치레를 위한 최소한의 비호 이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눈엣가시가 알아서 제거되는 셈이니 말이다.

 “곧장 수배에 들어가겠습니다.”

 올가는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고, 대니얼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기쁘고 즐겁고 신나고 행복한 일뿐만 아니라 슬프고 괴롭고 힘들고 불행한 일마저도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귀중한 영양분으로써 받아들이려 합니다. 짧고도 긴 인생. 언젠가는 그 기억들이 도움이 될 것이라 믿으며.
 그렇다면 지금 제가 체험하고 있는 일은 언제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묻고 싶습니다.

 “저기, 죄송하지만 이만 내려주시지 않겠어요?”

 공중을 날고 있는 술병들. 노엘 님의 염동칙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마치 손가락 끝처럼 세밀하고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노엘 님은 일상생활의 온갖 곳에서 그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하하하하하! 보기 좋은데 뭐 어때요? 재밌지 않아요? 전 재밌어요. 재미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재밌어요! 그러니 연지 씨도 재밌을 테죠.”

 지리멸렬한 노엘 님의 반론. 보다시피 이분은 취했습니다. 그것도 잔뜩 취했습니다. 천연석이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취했다는 것은, 제 기준에서는 치사량에 달하는 술을 마셨다는 뜻이 됩니다. 실제로 주변에는 조금 과장을 섞어 작은 성벽을 쌓아도 될 정도의 술병이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노엘 님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하나도 재미없어요! 그러니 이만 내려……아앗! 흐, 흔들지 마세요!”

 그러나 제 무력한 호소는 그저 기분을 상하게 했을 뿐인 모양입니다.

 “연지 씨, 진짜 너무한 거 아녜요!? 친구라는 긴은 무정하게 혼자 파티에 참석하고, 그나마 보고 있으면 눈이라도 즐거운 티아나도 없고, 하나밖에 없는 시녀는 술도 마실 줄 모르고, 근데도 난 이 즐거운 축제날에 관사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이건 실질적으로 연금생활이나 다름없잖아요! 이대로는 지루해서 죽는다고요! 그러니, 이런 장난에라도 어울려달라고요!”

 노엘 님은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리며 또 술잔을 입으로 가져갑니다. 아무리 취해도 술병을 직접 입에 대거나 하지 않고 꼭 잔에 따라 얌전히 마시는 것은 과연 교육을 잘 받은 분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그렇다고 제가 받는 피해酒邪가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나 해서 사족을 달자면, 제가 술을 마실 줄 모르는 게 아니라 노엘 님이 너무 술을 많이 마시는 겁니다. 전 이분처럼 술을 마시면 죽습니다.
 전 차라리 숙취에 시달리는 게 낫겠다는 결심으로 재차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저, 저도 최대한 어울려드리고 싶지만, 소, 솔직히 무섭단 말이에요! 조금이라면 같이 마셔 드릴 테니까 제발 내려주세요!”

 술병과 같이 공중을 날고 있는 나. 아까부터 제가 노엘 님께 제발 좀 멈춰달라고 계속해서 호소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몸의 자유를 빼앗긴 채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는 게 이렇게 불안해지는 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아, 흰색이네.”

 “지, 지금 어딜 보신 건가요!?”

 다급히 치마를 누르며 반문하는 제 말에 노엘 님은 능글능글 웃으며 답했습니다.

 “네? 연지 씨 목덜미요. 어라? 난 피부가 참 하얗고 곱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연지 씨는 무슨 생각을 한 건가요? 네? 한 번 말해 봐요.”

 으아, 이 변태가!
 노엘 님의 주사가 정말 질이 나쁜 것은 도중에 빠른 속도로 술이 깬다는 데 있습니다. 차라리 아예 판단력이 마비돼 드러눕기라도 하면 나을 텐데, 어정쩡하게 정신이 돌아오면 다시 술을 마셔 알딸딸하게 취한 상태로 절 괴롭히니 미칠 지경입니다.

 ‘뭐, 몇 달을 갇혀 있었으니…….’

 사실 노엘 님이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벌써 이분은 수개월 이 관사에서의 외출을 허락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머물고 있는 곳이 관사이기에 멋대로 공방으로 개조할 수도 없어 작품 활동도 여의치 않은 상황입니다. 여기에 연중 최대 축제날을 맞아 집안에 가만히 있기만을 강요받아야 한다면, 확실히 누구라도 제정신을 유지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하다못해 티아나 님이 계셨으면…….’

 하지만 어린 주인님은 시황상제님과 단 둘이 만나기 위해 외출을 하셨습니다. 역시 두 분이 모녀관계라는 세간의 소문은 사실인가 봅니다. 이런 뜻깊은 축제날, 가족끼리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살짝 섭섭한 마음도 들지만 참을 수 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건 노엘 님의 술주정입니다.
 아무튼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전 나름의 위로를 건네 봤습니다.

 “노엘 님이 답답하신 건 이해해요. 하지만 그건…….”

 “다 나를 위한 거라고요? 암살위협에서 날 지킬 수 있도록?”

 미리 앞지른 노엘 님의 말에 전 가만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엘 님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습니다.

 “흥. 연지 씨도 알고 있는 걸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요. 성천상제 일파로 분류되는 난, 그 인간의 실종이 확실시된 시점부터 반대파 인사들에겐 좋은 먹잇감이죠. 나 자신은 어느 쪽도 손을 들어줄 생각이 없지만, 주변에서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니까요.”

 맞습니다. 시황상제나 백금도의 대공, 그리고 성천상제의 반려로 유명한 빈센트라는 분과도 친분이 있는 잔 노엘 타베르니에라는 연마사는, 아무리 본인이 부정한다고 해도 그쪽 계파로 분류될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연마사로서 노엘 님의 명성을 생각하면 반대파 사람들이 부담으로 여겨 제거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당연히 찬성할 수는 없지만요.

 “말하자면 난 성천상제 일파의 구멍, 쇠사슬의 가장 무른 부분이라 할 수 있어요. 뭐 분하지만 인정해요. 내가 싸움 못하는 건 사실이니까.”

 대놓고 말하자면, 노엘 님은 약합니다. 천연석인 데다 법칙사용이 능숙한 분이긴 하지만, 전투기술과 전투경험이 거의 없고, 본인 스스로가 싸우는 일에 일절 관심이 없습니다. 거리의 불량배들이라면 모를까, 전문적인 암살자나 집단으로 움직이는 사병들에게는 전혀 대응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런 노엘 님은 이른바 성천상제 일파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절호의 표적입니다. 지속적으로 살해위협을 가하는 걸로 주의를 분산시킬 수도 있고, 아예 납치해 인질로 삼아 교섭재료로써 삼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일류 연마사로서 영향력만큼은 있는 분이니 만약 노엘 님이 살해당한다면 성천상제 일파에 큰 동요가 일 것입니다. ‘이 정도 되는 사람도 지키지 못한 계파에 과연 미래는 있는가’하고 말이지요.

 “알고 있다고요, 나도. 그런 건 나도 다 알고, 있는데……. 알고 있어도, 너무 답답하다고요…….”

 점점 잦아드는 노엘 님의 목소리. 얼마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이렇게까지 괴로워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바깥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제가, 갇혀 지내다시피하는 노엘 님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완전한 교감이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벌어진 거리를 좁히는 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도 모르게 불쑥 이런 말을 내뱉고 만 것은.

 “그, 그렇게 지루하시면, 제게 연마기술을 가르쳐주세요!”

 “네에? 하지만 연지 씨 재능 없는데요?”

 딴에는 용기를 쥐어짜내 꺼낸 말이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매몰찼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매몰차다기보다는 노엘 님 나름의 저에 대한 엄밀한 평가겠지요.
 그래도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그, 그러니까 배우겠다는 거죠! 재능이 있으면 왜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겠어요?”

 물론 재능이 있다 해도 배움의 중요성은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억지라도 부리지 않으면 다른 설득할 말이 떠오르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네요.
 노엘 님은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가며 말했습니다.

 “음, 그렇군요. 연지 씨 말마따나 어차피 시간도 남아도니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가, 감사합니……아앗!”

 갑자기 부력을 잃고 낙하하는 제 몸.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전 노엘 님의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후후후. 그럼 수업료를 미리 받아볼까요?”

 귓가에 맴도는 음흉한 목소리에 소름이 쫙 돋습니다.

 “지, 지금 어딜 더듬는……! 노, 노엘 님은 어, 어린애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전 수비범위 밖이라면서요!”

 “연지 씨는 좀 앳된 면이 있으니까요. 술 마시면 잠깐 자신을 속이고 할 수 있답니다!”

 “하기는 뭘 해요! 누, 누가 좀……!”

 도와달라고 외치려는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관사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하아, 이제야 해방된 기분이군. 정말 끔찍한 시간이었어. 자, 얘들아. 이 엄마가 맛있는 거 사왔단다. 우리 딸들은 어디 있……너희들 뭐하는 거냐.”

 파티에서 돌아온 총재님이 드물게 농담을 입에 담다가 거실에서의 참상, 특히 절 껴안고 있는 노엘 님의 모습을 보고 순간적으로 우뚝 굳고 말았습니다.

 “서로 사랑을 나누고 있는 중이야! 물론 합의하에!”

 “총재님 살려주세요! 저 잡아먹혀요!”

 거의 동시에 소리를 친 저와 노엘 님. 총재님은 말없이 가볍게 한숨을 내쉰 다음, 이쪽으로 다가와 장죽으로 노엘 님의 머리를 치며 그 품 안에서 절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전 당연히 생명의 은인에게 하듯 열렬히 감사를 드렸지만, 노엘 님은 입을 삐죽 내밀며 불평을 토했습니다.

 “진짜 너무하네! 친구를 못 믿는 거야?”

 “아니, 믿고 있어. 네가 변태라는 걸 말이야.”

 “…….”

 과연 아무리 노엘 님이라도 이 대답에는 달리 반박할 말이 없나 봅니다. 총재님은 공중을 날거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수십의 술병에 다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습니다.

 “아무리 취했어도 잡혀가고 싶지 않으면 장난은 적당히 쳐. 연지 이 녀석은 기본적으로 진지한 성격이라 진짜로 받아들인다고.”

 아, 다행이다. 이런 변태랑 앞으로 어떻게 같이 살지 걱정하고 있었는데, 좀 지나친 장난에 불과했나 보네요. 될 수 있으면 지나치지 않은 장난을 쳐주었으면 좋겠지만, 그 ‘지나침’의 경계가 사람마다 다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요.
 하지만 쉽게 인정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요. 노엘 님은 고개를 획 돌리며 어린애처럼 부정했습니다.

 “아닌데? 진심이었는데? 멋대로 판단하지 말지?”

 “……음. 그러냐. 잘못 봐서 미안하군. 즉 넌 지금 ‘욕구불만’이라는 뜻이지? 아무나 상관없이 덮칠 만큼.”

 웃으며 말하는 총재님. 하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노엘 님의 변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요, 욕구불만?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 그래! 맞아. 그냥 장난이었어. 하하하.”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 챈 노엘 님이 급하게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총재님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잘 됐군. 사실 나도 오늘 기분이 별로라서 말이지. 좀 거칠게 몸을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야. 이리 와! 안아주지!”

 “아아아아아! 그러니까, 농담이었다고! 뭘 벗으며 다가오는 거야!? 자, 잠깐! 연지 씨! 어딜 가는 거죠!? 이 사람 좀 말려줘요! 도와달라고요!”

 전 거실에서 물러나려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노엘 님께 웃는 얼굴로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럼 두 분, 즐거운 시간 되세요.”

 인과응보. 아아. 좋은 말입니다.






TRACKBACK 0 AND COMMENT 2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7.06.30 18:4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오늘도 절찬리에 지우의 주변은 아수라장의 연속!

    주리가 보면 기겁할 광경들은 보너스!!!

    어서 연희가 돌아와야겠어요~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7.07.02 09:38 신고 address edit/delete

      그동안 지루한 내용이 많이 이어져 나름 막장스러운 재미를 표현해 보려고 했는데 어땠을지 모르겠어요^^;;

      저 스스로는 막 나가는 개그 작품도 좋아하는 편이긴 한데, 막상 제가 쓰려고 하면 어렵네요...OTL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애국자들』의 정보통제는 끝났지만 국민의 규범은 변하지 않았다.”

 “규범…….”

 “그들이 사라져도 규범은 남았다. 배금주의, 전체주의, 물론 애국심도. 그들이 퍼뜨린 밈(Meme)은 스스로의 신념을 가지지 못한 자에게는 안성맞춤이었지.”

 “…….”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면 스스로를 갈고닦을 필요도 없어지고, 미국민이라는 것만으로 스스로를 뽐낼 수 있다. 금전만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면 사고를 정지하고 경제활동에 전념할 수 있지. 어떠냐? 참 멋진 규범이지 않나?”

 “어처구니없군…….”

 “일단 그 밈에 감염된 시민은 스스로 그것을 확산시켰다. 정보통제의 서버 따위 파괴해봤자 헛수고다. 지금은 아메리카의 선량한 시민들이야말로…… 실로 애국자의 자식들(Sons Of Patriot)이다!”


- 코지마 프로덕션 & 플래티넘 게임즈, 메탈기어 라이징 리벤전스 중 -










■■■








5-02. 그래도 추상하지 않을 수 없다 (6)


 한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광명제光明祭 기간.
 지고지순한 천상의 보석太陽이 다시금 그 빛을 되찾기 시작하는 시기를 기념하는 이 축제날은, 여느 때보다도 색색들이 화려한 불빛과 치렁치렁 현란한 장식들이 밤하늘의 별빛을 몰아내듯 환하게 어둠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본래 광명제의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운 곳은 흑색연맹의 옛 제도帝都 예카테리나였다. 하지만 계획된 사변으로 엉망이 된 그 오색찬란한 유리의 대도시는 올해 제대로 된 축제를 개최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광명제의 최대 규모는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2위의 자리에 있던 황금산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이는 많은 관광객들이 여행지를 금의 나라로 변경하는 길로 이어져 한층 이곳 축제가 번창하는 결과를 낳았다.

 번잡한 거리 속 금화처럼 피어나는 상인들의 웃음꽃.
 황금산의 공주민들은 현명하게도 라이벌격인 흑색연맹의 참사에 애도한다는 문구를 잊지 않았으며, 수익의 일부를 예카테리나의 복구사업에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관광객들이 좀 더 마음 편하게 돈을 쓸 수 있도록 도왔다. 이것을 두고 ‘선행이지만 기만’이라고 볼지, 아니면 ‘기만이지만 선행’이라고 볼지는 각자의 성향에 달린 일이리라.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7층 이하 저층지대에서의 일.
 B랭크 이상의 주민들이 사는 고층지대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번잡함은 사라지고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으면서도 깨끗하고 고요한 거리가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황금산에서는 돈이 있으면 ‘정적’도 살 수가 있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이 황금산 제3자연공원.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극thrill을 즐기기 위해 일부러 시원석 경계 바깥에 설치한 이 공원은, 비싼 이용료부터 철저한 자격요건까지 극히 일부의 상류층과 그 수행원들밖에 입장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고요한 밤을 잔혹하게 유린하는 오색찬란한 불빛 아래 기업연합 회장 대니얼 더글러스는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의 위대한 시조, 불굴의 개척자 알렉스 암스트롱 경은 이 지역에서 처음 시원석을 발견했을 때 나라의 이름을 ‘황금산’이라 지었습니다. 보다시피 이 지역은 작은 둔덕 하나 없는 드넓은 평야인데도 말이지요. 그 이름에 백금도를 비롯한 지금 시원 21주라 불리는 당대의 강국들은 우리를 모두 비웃었습니다. 각국에서 쫓겨난 초라한 이민자의 무리가 주제도 모르고 커 보이는 척을 한다고 말입니다.”

 대니얼이 꺼내는 민감한 화두에 자연공원에 모인 신사숙녀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공주민으로서 가지는 자부심의 근간을 건드리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대니얼은 참석자들의 반응에 만족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알렉스 경은 그 조소들에 코웃음도 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우리는 창대해질 것이다」라고. 비록 경께서는 생전에 그 꿈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우리는 바로 경의 꿈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길 보십시오!”

 철컥. 대니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동시에 미리 준비해둔 수십 개의 추가조명이 하늘 저 높이까지 솟아오른 황금산의 모습을 한층 환하게 비추었다.

 하늘을 떠받치는 신화 속 거인들의 기둥. 또는 우주를 관통하는 태초의 신비스러운 나무.
 오로지 보석인들의 기술과 능력만으로 쌓아올린 총 12층의 거대구조물 『황금산』은 한층 한층이 웬만한 공주公州의 절반에 달하는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그 높이는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봐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최상위층에는 공중전함의 수용도 가능한 공항시설까지 갖추고 있으며, 그곳에는 성천상제의 기함 무궁무진Incomparable호가 정박해 주인 없이도 위용을 뽐내고 있다.
 대니얼은 팔을 벌리며 소리치듯 목소리를 높였다.

 “황금산은 바로 저기 있습니다! 처음부터 주어진 산이나 계곡이 아닌, 바로 우리 가슴 속의 황금산을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대에 대를 거쳐 마침내 알렉스 경의 꿈을 실현해 냈습니다. 이번에는 우리들 자신의 차례입니다. 여러분 각자 안에 품고 있는 산을, 하늘을, 세계를! 여기 모인 여러분은 반드시 실현시킬 수가 있습니다!”

 확성장치가 필요치 않은 천연석 특유의 잘 울리는 정제된 목소리와 수십의 특대조명을 이용해 황금산 구조물을 재차 비춘다는 극적인 연출. 대니얼의 축사는 참석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모두의 영광을 위하여!”

 “위하여!”

 축사를 마치고 잔을 한껏 높이 들어 올리는 대니얼의 건배에 누구나가 경쟁하듯 뒤따르며 크게 소리를 쳤다.

 ‘촌극이군.’

 모두가 열광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식어 있는 사람은 항상 존재한다. 이 경우엔 시로가네 아와유키가 그러했다. 세계중앙은행의 총재로서 광명제의 개막식에 초대 받은 시로가네는 어떤 의미로는 황금산에서 ‘무시할 수 없는 명사’ 중 하나로 인정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그녀는 전혀 이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야쿠자mafia 놈들까지 기어들어와 있나. 쯧,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검은 정장으로 몸을 감싼, 근육질에 숱이 적은 머리카락의 여성을 발견한 시로가네는 짧게 혀를 찼다. 언뜻 몸집 좋은 경호원처럼 보이는 저 여성은, 실은 청부업자들과도 연결이 되어 있는 유명한 폭력단의 하위 간부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경유착만큼이나 기업과 불법조직과의 관계도 역사가 깊다.

 ‘오늘만큼은 대공 각하가 부러운데.’

 그레이엄은 그 ‘대공’이라는 직위 때문에 다른 공식적인 행사에 참석할 의무가 있어 이 자리에는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리고 시로가네는 그레이엄의 속내를 다 알 수는 없어도, 최소한 그가 여기에 얼굴을 비추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아는 황금산의 대공은 절대 이런 얼간이 같은 대화를 달가워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 여기 좀 보세요! 흠집이 있네요. 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이 모양인 걸까?”

 귀부인 중 한 명이 자연공원의 미술품 하나를 감상하다 호들갑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하하, 부인. 이건 총탄 자국입니다. 파인 형태와 주변에 탄화된 정도를 봐서는 백금총의 광탄이 스치고 간 흔적인 듯싶군요.”

 대니얼과 같이 붉은 색안경을 낀 금빛 단발의 여성이 맑게 웃으며 귀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여느 숙녀들과 다르게 드레스가 아닌 턱시도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이 귀밑에 찰랑이는 짧은 머리카락과 다소 낮은 목소리와 어우러져 언뜻 소년처럼도 보이는 중성적인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루시 루이스. 황금산 10대 재벌 중 하나인 루이스 가家의 셋째 딸인 그녀는 본래 이런 자리에 참석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된 연유인지 그녀는 대니얼의 초청장을 받았으며, 그 의도가 무엇이든 한 번 잡은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루시는 마치 감식이라도 하듯 조각상의 흠집을 더듬으며 말했다.

 “전에 저도 시험 삼아 쏴본 일이 있어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근처에서 누군가 돌인형과 치열하게 싸운 흔적이라 할 수 있겠군요.”

 귀부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도, 돌인형과……?”

 “네. 설마 여기가 어딘지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주변을 둘러싼 무시무시한 나무들, 어디선가 들리는 소름 끼치는 짐승의 울음소리……. 이곳은 그들의 영역입니다.”

 새삼스럽게 이 자연공원이 어디에 있는지 상기시키는 루시의 말에 주변의 다른 참석자들의 얼굴도 급속도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우습게도 그들은 자극thrill을 찾기 위해 이곳을 만들고 이곳에 방문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극의 원인에 대해선 별다른 인식을 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루시는 이대로 분위기가 불편해지도록 방치하지 않았다.

 “이런 무시무시한 공간에, 부인께선 그리고 우리 모두는 오늘 같이 기분 좋은 축제날에 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냥 들뜬 기분으로 그저 축제를 만끽하고 있는 그런 행복한 시간에 말이지요. 그래요, 우린 달라요. 그들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위협에 무감각해지지 않고 항상 그에 대비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 장소에 와 있는 겁니다. 남들이 다 편히 쉬는 때에도 공주公州를 이끄는 엘리트로서의 책무를 잊지 않기 위해서 말이지요. 전 부인과, 그리고 여기 모인 우리 모두의 고결한 정신에 건배를 드리고 싶군요.”

 루시가 말을 마치며 정중히 잔을 건네자 귀부인은 살짝 붉은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고 감사를 표했다. 주변에서 루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이들도 어느덧 밝은 표정으로 돌인형과 유기물의 무서움을 잊지 않기 위해 굳이 이런 ‘위험한 장소’에서 파티를 연 자신들의 용기를 서로 상찬하며 기분 좋게 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지랄들 하고 있네. 딱 그런 표정이신데요?”

 검은 정장을 입은 엘L이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며 시로가네를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는 현재 총재의 경호를 겸한 수행원 신분으로 이 연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시로가네는 빈 장죽으로 가볍게 엘의 머리를 치며 말했다.

 “누가 들을지 모른다. 입 조심해.”

 그러면서도 엘의 말을 부정하지 않은 것을 보면 확실히 총재의 심정 또한 자신의 수행원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엘은 과장되게 몸을 사리면서도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그럴 걱정은 없지 않을까요? 총재님은 왕따……가 아니라 모두에게 경외의 대상이라, 딱히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가 아니라 감히 엿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요.”

 “흥. 비아냥거릴 거면 당당하게 해. 어설프게 말 돌린다고 힘이 덜 들어가진 않으니까.”

 하지만 말과 달리 시로가네는 장죽으로 때리는 시늉만 할 뿐이었고, 엘은 맞장구를 치듯 호들갑스럽게 에구구 머리를 감싸는 흉내를 낼 뿐이었다.
 시로가네는 빈 장죽을 살짝 입에 물었다 때며 생각에 잠겼다.

 ‘내키진 않지만, 잔에게 고마워해야겠군.’

 총재가 관사를 나서기 전, 잔 노엘 타베르니에는 평소처럼 그냥 나가려는 친우를 말리며 자신의 고집을 밀어붙였다.

 - 긴! 나랑 동거하고 있는 이상 그 꼴로 파티에 참석하는 건 못 참아! 나도 연마사 나부랭이로서 자존심이 있다고!

 - 아니, 그건 디자이너나 코디네이터의 역할 아닌가?

 - 극을 추구하면 다 비슷한 거야! 아무튼 이대론 못 가!

 결국 시로가네는 잔의 고집에 못 이겨 친우가 마련해준 드레스를 걸치고서야 관사를 나설 수 있었다. 드레스 자체는 일류 연마사인 잔이 직접 선별하고 다듬은 것인 만큼 손색이 없었다. 문제는 드레스와 시로가네 본인의 조합이 치명적이라는 점. 그녀에게 그 드레스는 ‘지나치게’ 잘 어울렸다.

 평소 꼬리 아홉 달린 여우처럼 꾸미고 다니는 시로가네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시각적으로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게 한다. 그녀의 모습이 연상시키는 것은 보통 짐승도 아닌 환수幻獸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잔이 골라준 화려한 드레스는 ‘오로지 미美만을 중시’해 상대방이 위축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일절 고려하지 않아 어떤 의미로는 폭력이나 다름없는 위압감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덕분에 이렇게 혼자 술을 즐길 수 있게 됐지.’

 비유하자면 폭군 여제. 환상문명의 구전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눈의 여왕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무리 시로가네가 세계중앙은행의 총재직을 맡고 있는 주요 인사이며, 이 자리가 상류층끼리 교류를 다지기 위한 목적의 연회라 해도 이방인이자 실제로는 황금산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그녀에게 일부러 접근하는 괴짜는 없었다. 아니, 없을 것 같았다.

 “이거 총재님. 술잔이 빈 것 같군요. 제가 따라 드리겠습니다.”

 빙글빙글 웃으며 시로가네에게 다가온 것은 붉은 안경으로 눈을 감추고 있는 루시 루이스. 턱시도를 맵시 있게 소화한 그녀가, 화려하다 못해 위압적이기까지 한 드레스로 몸을 치장한 여우 총재에게 다가가는 모습은 언뜻 여왕을 알현하는 기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맙군.”

 시로가네는 조금도 고맙지 않았지만, 일단 형식상 감사의 말을 건넸다. 동시에 주변에서는 아까 귀부인과 총알 자국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루시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애송이가, 잔꾀를 쓰기는.’

 시로가네에게 루시의 속내는 빤히 보였다. 지위상으로도 분위기상으로도 감당하기 버거워 다들 은연중 기피하고 있는 어려운 상대에게 과감히 다가가 무난하게 대화를 성공시키는 자신만만한 젊은이. 일시적이긴 해도 그것만큼 단시간에 주변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연출도 드물다.

 설령 실패한다 해도 루시는 루이스 가문의 3녀이자 이제 간신히 성년식을 마친 새파란 애송이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명사들에 비해 극도로 위험부담이 적은 것이다. 오히려 시로가네가 루시를 매몰차게 무시한다면, 평가가 떨어지는 것은 여우 총재이며 그녀는 동정표를 얻게 될 가능성도 있다. 어느 쪽으로 구르든 절대 그녀에겐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무슨 의도로 내게 초청장을 보냈는지는 몰라도, 철저하게 이용해주지!’

 실제로 루시는 시로가네의 예상과 거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루이스 가의 셋째 딸에 불과한 그녀의 입지는 언제나 언니나 오빠에 비해 극도로 좁았다. 특히 천연석인 둘째 오빠가 차후 총수 자리에 오른다면, 그녀가 앞으로 가문의 사업에 참여할 기회는 영영 멀어지고 말리라.

 ‘어떻게든 내 힘으로 기어오르고 말겠어!’

 마냥 사람 좋은 첫째 언니와 달리 루시는 정계나 재계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욕망, 즉 강한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대니얼의 초청은 자신의 존재를 상류사회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반면 시로가네에게 있어 그녀는 얄팍한 속셈으로 겁도 없이 자신을 발판으로 삼으려 드는 주제 모르는 철부지에 지나지 않았다. 말을 걸어오니 일단 받아주고 있기는 하나, 그다지 온화한 심정은 아니었다.

 ‘쟤, 그냥은 안 끝나겠는데.’

 엘은 루시가 오기 전, 시로가네가 먹여준 보석알갱이를 입 안에서 굴리며 언제 총재의 인내심이 바닥날지 두근두근 지켜보고 있었다.
 시로가네는 결코 타협을 모르는 독선적인 성격도, 타인을 깔아뭉개는 권위주의적인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다. 이는 일개 경호원에 불과한 엘이 스스럼없이 총재와 농담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에서 쉬이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정말 옳다고 생각한 것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고집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정한 일정한 선을 넘어서는 행위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공격하는 무자비한 일면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능력도 통찰력도 여느 사람보다 뛰어난 그녀가 고향인 청옥루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쫓겨나듯 도망치거나, 망명 후 힘들게 얻은 총재직에서 다시금 황금산과 대립하는 위험을 부담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말입니다, 총재님.”

 잠시 후 얼마간 대화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루시는 한층 자신에 대한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만약 그녀가 이쯤에서 물러났다면 오늘 연회는 아무도 험한 꼴을 당하는 일 없이 잘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기어이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총재님께서도 우리 기업연합의 정책, 가령 등급별 임금지급제 등에 의견을 밝혀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아, 물론 기관의 수장으로서 함부로 어느 한쪽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비공식적으로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질을 주신다면, 우리에게 큰 힘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대니얼이 그레이엄 대공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에 대해선 10대 재벌가의 일원이라면 얼마간 그 진의를 알고 있었다. 루시는 초청해준 것에 대한 감사도 표할 겸 이 기회에 대니얼에게도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임을 각인시킬 생각이었다.
 시로가네는 잔으로 목을 축일 뿐 별 말이 없었지만, 루시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세간에는 총재님께서 황금산이나 기업연합과 대립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우리가 좋은 동반자 관계라는 것을 이 자리에 계신 분 중 모르시는 분은 아무도 없겠지요. 그동안 공정한 기관운영을 위해 중립을 지키신 총재님의 노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만 더 큰 대의를 위해 목소리를 내주셔도 될 때가 아닐까 싶군요.”

 물론 이는 논할 가치가 없는 기만이었다.
 실제로 세간의 인식은 정반대. 사람들은 세계중앙은행과 그 총재가 황금산의 수족 노릇이나 하고 있다며 비아냥거리고 있었지만, 오히려 여우 총재는 자신의 힘이 닿는 한 외부권력의 개입에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아무리 세계중앙은행의 총재라고 해도 황금산의 고위층이 집합한 자리에서 명시적으로 서로가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는 없다. 루시는 그 사실을 알고 겉으로나마 “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시로가네를 몰고 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라면 후환이 두려워 섣불리 그런 풋내 나는 싸움을 걸 수 없었으나, 루시는 가문의 3녀라는 중요하지 않은 위치와 새파란 애송이라는 사실을 역으로 무기로 내세워 총재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평가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하며.
 하지만 시로가네는 그녀의 기대에 장단을 맞출 생각이 없었다.

 “내가 왜 그런 얼간이 같은 정책에 찬동해야하지?”

 “……네?”

 침묵은 예상해도 신랄한 거절은 예상하지 못한 루시는 잠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눈만 껌벅거렸다. 시로가네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장죽으로 손바닥을 탁 치며 다시 말했다.

 “그 잘난 기업연합의 정책이라는 것에 내가 왜 지지를 해야 하는지 읊어 봐.”

 “아, 네, 예!”

 총재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고 생각한 루시는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한 번 숨을 가다듬은 후 입을 열었다.

 “더글러스 회장……저희 기업연합의 방침은 진정으로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평등과 공정?”

 “예. 능력 있고 노력하는 자가 그렇지 못한 자보다 더 많은 것을 취하는, 그런 당연한 이치를 성립시키고자 함이 저희의 목적입니다. 그렇게 제대로 된 대가가 지불돼 잘 살아야 할 사람이 잘 살고, 못 살아야 할 사람이 못 살아야 사람은 향상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게 되며 사회도 발전하게 되지요. 게으른 자들의 뻔뻔한 불평에 우리 노력한 자들의 것이 부당하게 빼앗기는 일은 이만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의미심장한 루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주위의 참석자들이 동의의 뜻으로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있어 사용인이란 자신들이 힘들게 키운 사업체에 달라붙어 꿀물만 빨려고 하는 기생충에 지나지 않았다.
 시로가네는 빈 장죽을 살짝 입에 댄 채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렇군. 좋은 말이야. 설득력이 있는데.”

 루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해해 주시는 겁니까!?”

 “음. 이해하고말고. 한데 왜 그 좋은 방침을 너부터 적용하지 않나? 왜 이 자리에 앉아 계시지? 어서 물러나지 않고.”

 웃는 얼굴로 칼을 찌르는 듯한 시로가네의 말에 루시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건 무, 무슨 뜻이십니까?”

 “무슨 뜻이긴. 말 그대로의 의미지. ‘능력 있고 노력하는 자가 그렇지 못한 자보다 더 많은 것을 취하는 게’ 진정한 평등이고 공정함이라면, 너 같이 무능력한 녀석은 부당하게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손에서 내려놔야겠지. 그런 게 형평성 아니겠나?”

 직설적인 시로가네의 모욕에 루시는 새빨개진 얼굴로 반박했다.

 “마, 말씀이 심하시군요! 비록 제가 부족함이 많긴 하지만, 사업체의 간부직에서 어떤 성과를 냈는지 아신다면…….”

 “아, 루이스 가문에는 우량 사업체들이 많지. 그리고 넌 다른 이들은 수많은 자격심사를 통과해야만 간신히 입사할 수 있는 곳에 처음부터 간부 자리에 있었고. 거기에 수십 년 잔뼈가 굵은 베테랑 사원들이 참모역으로 보좌까지 해주지 않았나? 막대한 지원금은 덤이고 말이야. 그걸 네 실력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응?”

 “그, 그건…….”

 시로가네의 지적은 용서가 없었다. 루시 자체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어도 루이스 가문을 비롯해 황금산의 재벌가 사정을 꿰고 있는 총재에게 어설픈 허세와 기만은 일절 통용되지 않았다.
 총재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더욱이 네가 맡은 사업체는 투자를 잘못해 작년에 제법 손실을 내기도 했지. 웬만한 중소기업이라면 도산할 정도의 엄청난 손실을 말이야.”

 “그건 이번 분기에 다 만회했어요! 제가 기획한 상품으로 말이죠! 실수 하나를 치사하게 물고 늘어지다니……!”

 루시는 점점 여유가 사라지는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반론을 했다. 하지만 시로가네에게 그 말은 통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업가들은 보통 그런 손실을 내면 끝장이야. 신용도는 추락하고 빚에 짓눌려 다시는 일어설 수 없어. 회사의 직원이라면 당장 그 자리에서 잘릴 테고. 실제로 널 보좌하던 몇몇 참모격의 베테랑 사원들은 그 일로 책임을 지고 회사에서 나와야 했지. 하지만 넌 어떻지? 단지 총수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리를 보전하고 다시 지원금을 받아 수익을 낼 ‘기회’를 얻었지. 그게 정말 자랑할 일이라 생각하나?”

 “그, 그래도 다른 경영자들도 제 나이에 그 정도면, 재능이 있다고……아앗!”

 “흥.”

 시로가네는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장죽을 휘둘러 솜씨 좋게 루시의 붉은 안경만을 낚아챘다.

 “도, 돌려줘요! 도, 돌려달라고요!”

 안경 뒤에 드러난 녹색 눈동자. 루시는 자신의 둘째 오빠와는 달리 천연석이 아니었다. 물론 이런 안경으로 얼굴을 가린다고 해도 그녀가 모조석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이 안경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감추는 일종의 무도회 가면persona이나 다름없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가면이 사라지자 루시에게 있던 일말의 자신감마저 안개처럼 무참하게 흩어지고 말았다.

 “도, 돌려주세요…….”

 하지만 시로가네는 루시의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추격타를 가했다.

 “자, 너만 보더라도 네가 말한 ‘평등과 공정’이라는 게 얼마나 기만에 가득 찬 헛소리인지 잘 알 수 있겠지. 다시 묻겠다. 넌 정말 방금 네 주장이 기업연합의 방침이라 생각하나?”

 “…….”

 “말해 봐. 스스로도 실천하지 못하는 미숙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 어리석은 주장이 정말 기업연합……아니, 더글라스 회장의 생각이냐?”

 재차 채찍질하듯 다그치는 힐난에 가까운 질문에 주변에 있는 참석자들이 긴장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시로가네의 매도에 가까운 신랄한 지적은 루시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상류층 인사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시로가네가 공격대상으로 한정한 것은 명백히 루시뿐. 명목상으로는 기업연합 전체를 겨냥한 공격이 아닌 것이다.

 더욱이 루시는 루이스 가문의 3녀로서 크게 중요한 위치도 아니며, 이제 갓 성년식을 마친 애송이다. 즉, 루시 개인에 대한 모욕은 상황과 상대에 따라선 가문 전체에 대한 시비로 이어지지 않을 수가 있다. 왜냐하면 루이스 가문도 고작 철부지 자식의 돌발행동으로 세계중앙은행 총재와 대립하는 부담을 지기는 싫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앞서 행동에 부담이 없다는 젊음의 특권이 고스란히 제대로 된 가문의 비호를 받을 수도 없다는 양날의 검으로 작용했다.

 “아, 아니요……. 제 개인의, 생각일 뿐입니다…….”

 결국 루시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주장은 논파되고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으며 안경까지 빼앗겨 정신적 장벽까지 사라진 그녀에게 달리 길은 없었다.

 “다행이군. 내가 그딴 얼간이 같은 정책 나부랭이에 찬동할 이유가 사라져서.”

 시로가네는 여전히 혀로 채찍질을 멈추지 않으며 루시에게 빼앗은 안경을 돌려주었다. 루시는 그것을 받아들자마자 황급히 모습을 감추려 했으나, 여우 총재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의견을 가져라. 가진 척을 하지 말고. 그렇지 않으면 넌 언제까지나 더글라스 같은 자들의 앵무새에 지나지 않아.”

 “애, 앵무새……?”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기 좋아하는 날짐승이라 하더군.”

 “……!”

 천연석의 신체를 가진 이가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이상 다른 이들에겐 들리지 않았을 작은 목소리. 하지만 그 음색은 지금까지 들었던 어떤 굉음보다 강렬하게 루시의 뇌리에 파고들었다.

 “나, 날…… 날, 짐승에……!”

 상대를 매도의 의미로 동식물 등의 유기물에 빗대는 것은, 보석인들 사이에서는 자갈모래먼지와 같은 욕설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상스럽고 천박한 어감은 아니지만, ‘그만큼 난 널 멸시한다’라는 강한 혐오감을 드러내는 표현인 것이다.

 “용서, 못해……!”

 루시는 복수를 다짐하며 자연공원에서 모습을 감추었고, 이로써 시로가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쓸데없는 데 심력을 낭비했군. 후, 집에 있는 녀석들은 좋겠어. 이런 바보 같은 짓에 어울릴 필요도 없을 테니까.’

 그 미래를 알 리가 없는 시로가네는 관사의 동거인들을 부러워하며 어서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TRACKBACK 0 AND COMMENT 2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7.06.20 21:03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끈끈하면서도 달콤한 거짓의 셔벗(sherbet) 속에 담긴 단 한조각의 진실과, 위신(僞信)의 공감대를 통해 형성된 허술하고도 견고한 사상누각의 구조체.

    이제 막 성인식을 통과한 소녀의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그 사회적 배경의 영향력을 제외하고서라도 충분히 유능한 인재임에는 틀림이 없을테지요.

    저토록이나 무시무시한 잠재력을 품은 재계의 신인을 적으로 돌리다니, 이거 이거 시로가네 총재가 또 사고를 치고 말았군요... llorz (역마살이 있는거 아닌지 점이라도 한번 쳐봐야...?;)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7.06.22 06:25 신고 address edit/delete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위의 루시 루이스는, 직전까지 '찰스 루이스'라는 이름으로 남자 캐릭터로 생각하고 있었네요. 한데 막상 쓰려고 하니 전 에피소드의 '일리야'와 캐릭터가 너무나도 겹쳐서(...) 살짝 변화를 주게 되었어요.

      또한 '잘난 여자 주역'에게 당하는 '못난 남자 조역'이라는 클리셰도 일종의 역차별(?)이라는 생각이 들어 자꾸 그런 구도가 반복되면 기분 나빠하시는 분이 계실까 바꾼 것도 있어요. 누구나 만족시킬 수 있는 정치적 올바름의 추구란 확실히 어렵다는 생각이 드네요^^;;


      덤으로 대부분의 설정과 전개는 양쪽이 거의 같지만, 찰스 루이스의 경우는 루이스 가의 '차남'이었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어요.

      루시 루이스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의도치 않게 나름 개성적인 캐릭터가 된 것 같아 마음에 드네요^^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678)
잡다한 일상단상 (144)
즐긴작품 떠들기 (35)
타인정원 엿보기 (23)
환상정원 가꾸기 (476)

RECENT TRACKBACK

CALENDAR

«   2018/09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