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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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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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혈마왕의 전후처리] 01. 마왕이 된 이유 (2)
  2. 2018.08.23
    [혼혈마왕의 전후처리] 00. 얼어붙은 시간 (2)
  3. 2018.03.13
    [단편] 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完) (2)
  4. 2018.03.12
    [단편] 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15) (2)
  5. 2018.03.10
    [단편] 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14) (2)
  6. 2018.03.09
    [단편] 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13)
  7. 2018.03.08
    [단편] 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12)
  8. 2018.03.06
    [단편] 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11)
  9. 2018.03.05
    [단편] 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10)
  10. 2018.02.16
    [단편] 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9) (2)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








01. 마왕이 된 이유


 헤미스피어 대도서관.
 인류의 빛나는 지혜들이 무수한 별처럼 반짝이는 서적의 바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제정시절 황제의 권위를 뽐내기 위해 지어진 이 반구형의 거대한 건축물은, 오로지 장서의 보관과 심미적인 외관에만 중점을 두고 설계된 탓에 이용자들의 편의는 조금도 고려되지 않은 게 특징이었다.

 그 비효율성을 극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바로 도서관 중심부의 풍경.
 장엄한 돔 아래 특수하게 가공된 합금서장이 벽을 따라 15층 건물의 높이까지 솟아올라 있고, 그 안에는 온갖 역사적인 장서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주위에는 책장을 밝힐 화려한 보석등불이 촘촘히 박혀 있으며, 오색으로 찬란한 색유리stained glass 아래 당대 유명한 예술가들의 대리석 조각상과 금은의 장식품들이 천상의 방문객 마냥 내부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
 계단도 사다리도, 그밖에 다른 무엇도 아무것도 없다. 하늘을 바라보듯 고개를 젖혀야 그 끝이 보이는 책장 저 끝까지 닿을 수단은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굳이 사람 키를 넘어서는 상단 부분의 책장까지 손을 뻗고 싶다면 고층 사다리를 준비하든지, 부유마법을 사용하든지, 아니면 최근 전쟁에서 발명된 부유석을 장착한 비행 장비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서적이 아닌 업적을 보는 공간.
 내용이 아닌 위용에 감탄하는 공간.

 호의를 갖고 포장하자면 풍성하고 강성했던 제국시절 최전성기의 흔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악의를 갖고 매도하자면 단순한 허세라고 일축할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단연 후자 쪽이라 생각하지만 말이야. 평범한 사람들도 종종 단 한번 읽어본 적 없는, 괜히 어려워 보이는 책들을 책장에 진열해 두곤 할 때가 있잖아? 남들이 그걸 보고 자신의 교양과 학식을 과대평가해주길 은근히 기대하면서. 이 도서관은 그런 흔해 빠진 심리가 국가적 규모로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아. 말하자면 이 도서관 전체가 황제의 책장이었던 셈이지.

 난 어둠 속에서 언젠가 지인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전적으로 그 의견에 동의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도서관 어딜 가나 중심부와 비슷한 꼴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책상과 의자가 생긴 것도 제정시절이 끝난 후대의 일로써 그 전까지는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조차 제대로 없었다고 한다.

 영원히 가는 영광이란 없다.
 한때는 수천의 보석등불이 도심지의 야경처럼 환하게 밤을 밝히던 도서관 내부도 지금은 여느 파괴된 도시들처럼 어둠에 잠긴 채 고요하다. 마왕군과의 극심한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해진 탓에, 더는 도서관에 연료를 공급한다는 ‘사치’를 부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뭐 내 입장에선 딱 좋지만.”

 슥. 난 책장을 넘기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빛도 사람도 없는 밤의 도서관은 독서를 하기에 정말 좋은 환경이다. 조용한 것도 조용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사람 눈치’를 전혀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주위에 보는 사람만 없다면 공중에 누운 채 아주 편한 자세로 책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어둠 또한 독서에 어떤 방해도 되지 않는다. 악마의 피가 흐르는 내게 있어 빛은 사물을 인식하는 필수조건이 아니니까.
 하지만 내 안식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 여어, 딸내미. 잘 있었냐. 여전히 우중충하게 살고 있군.

 세상을 한없이 잠식해 들어가는 검은 목소리. 불청객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마왕, 이클립스……!”

 마치 왕관처럼 머리를 감싸고 있는 큼직한 황금색 산양의 뿔. 그 아래 홍옥Ruby처럼 빛나고 있는 불타는 적색 머리카락. 박쥐를 닮은 표층차원의 흉측한 여섯 장 악마의 날개.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심층차원에 숨어 있는 열세장의 그림자 날개. 털 하나하나가 대마법을 행사할 수 있는 막대한 마력을 내포하고 있는 악마의 사자꼬리…….
 현재 인류의 최대 천적이라 할 수 있는 마왕이 지금 내 앞에 불쑥 나타난 것이다.

 “알비노스 왕국의 아크메이지 클래스의 마법장벽들은……. 쳇, 아예 발동조차 하지 않았군.”

 덤으로 내가 몰래 쳐놓은 다차원수호결계도 마찬가지.
 사실 충분히 힘 있는 존재에게 이런 방어막을 부수는 것쯤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힘 자체를 갖추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그러나 부수지 않고 그냥 통과한다는 것은 단순히 힘이 있고 없고의 문제를 떠나 또 다른 차원의 초월성이 요구되는 난제이다.

 가령 어떤 사람을 여러 겹의 튼튼한 줄로 촘촘히 묶어 두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줄 하나하나마다 조금만 흔들려도 심하게 소리가 나는 종을 잔뜩 매달아 두었다고 하자. 이야기 속의 영웅처럼 충분히 힘이 세다면 근육을 부풀리는 것만으로도 실처럼 줄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또는 관절을 기묘하게 빼거나 뒤틀 수 있는 재주를 가진 달인이라면 어떻게든 줄을 헐겁게 해 탈출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자들에게도 아예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속박에서 자력으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리라.

 이 여자가 마도사들의 마법장벽이나, 내 다차원결계를 무시하고 여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그런 종류의 기적 같은 솜씨에 가까웠다.
 과연 마왕. 악마들의 왕이자, 마법의 왕이라 불릴 만 하다.

 - 하하. 이봐, 딸. 너무 기죽을 거 없어. 다른 떨거지들과 다르게 네 다차원결계는 꽤 훌륭했으니까. 솔직히 좀 놀랐다. 설마 심원영역의 잠행까지 차단하고 들어올 줄이야. 역시 내 딸들 중에선 네가 제일 잔재주가 뛰어나.

 웃으며 말하는 마왕. 일단 딸이라고 치켜세워주는 걸까? 하지만 ‘잔재주’라 칭한 시점에서 이미 칭찬이고 뭐고 없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욕하는 걸로 간주하고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였을지 모르지만, 이 여자는 이게 순수한 감탄의 토로이니 상대하기 곤란하다. 뭐 싸워봤자 이길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니 무시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다.

 “……요즘 문명파괴에 다망하신 분이, 대체 무슨 일로 여기에 오신 건지?”

 잔뜩 비아냥거리며 물었지만, 사실 난 이 여자가 왜 날 찾아왔는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소름끼치도록 아름답고 차갑게, 달빛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마왕. 하지만 언제나 변함없을 것 같은 이 여자의 완결성에는 지금 작지만 커다란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비유 같은 게 아니다. 문자 그대로 마왕의 왼쪽 가슴은 심장과 같이 뻥 뚫린 채 피가 철철 흘러나오고 있었다.

 ‘설마 소문이 진짜였다니……. 낮의 소란은 이게 원인이었군.’

 영웅이 드디어 마왕을 쓰러뜨렸다는 사람들의 환호성. 이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나는 그저 헛소문이라고 치부했다. 사실 전쟁 중에는 사람들의 소망을 투영한 근거 없는 이야기rumor가 민들레 홀씨처럼 이곳저곳 떠도는 게 일상다반사다. 하지만 언제나 올바른 사람이 있을 수 없듯이, 언제나 틀린 소문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만큼은 소문이 진실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가 단지 부상만 입고 돌아온 줄 알았는데 이런 업적을 올렸을 줄은. 아무래도 내가 인간 측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 피들, 어떻게 하지?’

 마왕의 상처에서 쏟아지는 혈액은 순수한 마력덩어리라 전부 공중에 흩어질 뿐, 물리적인 흔적을 남기거나 하지는 않는다. 청소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건 좋지만, 고농도의 마력은 산소와 마찬가지로 생물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만약 이대로 두면 이 일대는 한동안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이 되고 말리라.

 물론 최악의 경우 내가 그 마력들을 먹어치우면 된다. 실제로도 그럴 생각이긴 하지만, 그때는 마성魔性이 짙어져 인간성을 아예 상실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어디선가 발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본적으로 이 도서관에서 책만 읽으며 지내고 싶은 내게는 매우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내 심정을 알 리 없는 마왕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 무슨 일로 왔냐고? 그냥 딸내미 얼굴 좀 보려고 왔지. 너 300년인지 400년인지 여기서만 계속 일하고 있던데, 지겹지도 않냐?

 “내가 여기 속하게 된 지는 이제 곧 100년이야. 지겹기는커녕 아주 잘 지내고 있고. 그리고 내 나이는 아직 300살. 400년 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어.”

 - 그랬나? 딱히 나이 같은 건 평소 생각해 본 적도 없어서 실수했군. 뭐 100년도 제대로 못 사는 인간들처럼 세월에 민감할 이유가 없으니 이런 쪽은 아무래도 둔감해지네. 네가 이해해라. 아! 근데 100년이라도 인간들 기준에선 꽤 긴 세월이잖아. 너 여기서 그렇게 오래 있어도 돼? 인간들은 수명이 짧아서 늙지 않는 존재는 이상하게 생각하던데. 음, 나도 그 아이…… 그러니까 네 모체 되는 여자랑 잠깐 같이 살 때 그걸로 좀 고생했지.

 여전히 무신경한 발언. 하지만 화를 내봤자 내 손해다. 어차피 죽어가는 괴물, 조금은 친절히 대해줘도 문제될 건 없으리라.

 “당신이 말하는 ‘잔재주’로 인식장애 마법을 걸고 있으니 괜찮아. 주기적으로 직급과 이름을 바꾸며 다른 사람처럼 꾸미고 있기도 하고.”

 - 그거 괜찮은 방법이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나도 그때 그런 방법이 떠올랐다면 그 애랑 좀 더 같이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는 듯이 탄식하는 마왕. 이해는 된다. 손짓 한번으로 가볍게 도시 하나는 소멸시킬 수 있는 존재가 인간들의 사고방식에 맞춰 자신을 꾸며야 한다는 발상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으리라. 오히려 나를 낳아준 어머니를 생각해 겉모습이나마 인간처럼 꾸미고 30년 넘게 같이 지냈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처럼 놀라운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쓸쓸한 죽음을 목격한 나는 이런 말을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무슨……. 당신이 우리 엄마를 사랑하기는 했어?”

 - 당연하지! 그렇지 않으면 네가 태어날 리가 없잖아. 아직도 그 아이는 내 기억 속에 선명해. 뭐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딱히 이 여자를 위해서가 아니다. 여기서 잘못 힘을 개방하면 내가 안식처로 삼고 있는 이 도서관 자체가 붕괴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후…….”

 진정하자. 이 여자가 무신경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까.
 200년 전에도, 이 여자는 불쑥 내 앞에 나타나 엄마를 찾았었다.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넘은, 끝까지 마왕을 그리워하다 외롭게 눈을 감은 우리 엄마를. 내가 엄마의 죽음을 전하자, 이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 아, 그러고 보니 인간들은 수명이 짧았지. 난 생각이 짧았고. 하하. 간만에 얼굴 좀 보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그 뒤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난 피투성이로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으니까.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변할 만큼 이성의 끈이 끊긴 내가 마왕에게 덤벼들었다가 도리어 신나게 얻어맞고 빈사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때 싸움의 여파로 대륙 북부의 산맥 하나가 등이 끊어지고 만 것은 내 부끄러운 사춘기의 흔적이다.

 - 응? 이 녀석이 날 죽이려고 한 게 아니었다고? 내 자리를 노리거나 날 넘어서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럼 왜 덤빈 건데? 엄마에 대한 애정에서 오는 섭섭함? 음, 잘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넌 인간들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

 참고로 내가 그 싸움에서 죽지 않은 것은 마왕의 자비 따위가 아니다. 이 여자는 설령 자기 딸이라도 덤벼온다면 용서 없이 처리하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살 수 있었던 것은, 마왕의 오랜 친구이자 비서관을 자처하는 한 몽마Succubus가 내 심정을 설명하며 죽이지 말 것을 요청한 덕분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때 이후로 난 이 여자에게 무언가 인간적인 감정을 기대하는 것을 포기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이 여자는 인간이 아니니까. 게다가 나도 이제 300살. 감정에 휘둘릴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나고 또 지났다.
 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입을 열었다.

 “빨리 용건이나 말해. 오늘은 읽고 싶은 책이 좀 많으니까. 정말 내 얼굴만 보러 온 건 아닐 거 아니야.”

 - 응. 맞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 말이야. 이런 어두침침한 데서 100년이나 일했다면 좀 지겹지 않냐?

 여전히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여자다. 하지만 대화를 포기할 게 아니라면 이쪽에서 맞춰주는 수밖에 없다.

 “아니, 아까도 말했지만 안 지겨워. 딱 내 성정에 맞고 좋아.”

 - 그러니까 말이지, 너 내 뒤를 이어라. 나 대신 마왕군 좀 지휘해. 그럼 심심하지 않고 딱 좋잖아? 어때 마음에 드는 제안이지?

 “…….”

 아, 진짜 대화를 포기하고 싶다. 여기가 내가 일하는 도서관만 아니었다면 이미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여자는 상대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강행수단’을 써서 억지로 말을 듣게 만든다. 물론 내 힘으로는 이 여자와 싸워서 이기는 건 무리라도 도망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유서 깊은 헤미스피어 대도서관은 폐허조차도 아닌 평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심장을 잃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해도 이 여자에게는 아직 그만한 힘이 남아 있다.
 그래도 역시 이 여자가 날 찾아온 이유는 예상한 대로다. 난 상대가 듣지 않는다 해도 최대한 진심을 담아 거절의 말을 꺼냈다.

 “싫어. 그런 건 당신의 다른 자식들, 내 언니들이나 동생들에게 부탁하라고. 혼혈인 나와 달리 순혈종인 그 녀석들이 어차피 나보다 힘도 세잖아. 당신 뒤를 잇기에는 더 강한 쪽이 낫지 않아?”

 내게는 위로는 언니가 넷, 아래로는 여동생이 둘, 배가 다른 자매들이 있다. 한명을 빼고는 다들 이 여자를 닮아 손쓸 도리가 없는 잔학한 폭군들이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이 여자를 닮아 힘만큼은 확실하다. 솔직히 마왕의 자리에는 나보다 다른 자매들이 훨씬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마왕은 고개를 저었다.

 - 언니들과 동생들이 아니라 ‘언니와 동생’이다. 나머지는 다 죽었어.

 “……뭐?”

 -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야.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자세한 얘기를 들으니 다른 자매들은 요 200년 동안 내가 관심을 끊고 있는 사이 전멸한 모양이다. 언니들 중 둘은 엄마인 마왕의 자리를 뺏기 위해 도전했다가 죽었고, 나머지 자매들은 서로 영역 다툼을 벌이다가 공멸했다고 한다. 그 싸움에서 언니와 동생 중 각각 하나가 살아남았지만, 둘 다 깊은 상처를 입고 잠에 빠져들어 향후 수백 년은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모양이다.
 ……과연 이 여자의 딸들답다. 동시에 내게도 같은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끔찍하다.

 - 그런 이유로 내 뒤를 이을 사람은 너밖에 안 남았다. 뭐 꼭 내 딸이 아니더라도 다른 능력 있는 녀석이 있으면 뒤를 물려줄 생각이었지만, 인간이나 용종들과의 싸움에서 많이들 죽은 탓인지 쓸 만 한 것들이 안 보이더라고. 해서 나를 빼면 현재 네가 실질적인 마왕군 2인자야. 기쁘지?

 아니 하나도. 그래도 이 여자가 내 기분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지껄여준 덕분에 나 역시 양심의 가책 없이 함부로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내 대답은 변하지 않아. 난 당신의 뒤를 이을 생각 없어. 마왕군 따위 망하든지 말든지. 아니 차라리 망하면 속 시원하겠군. 최소한 내가 사는 지역이 위협당할 일은 없어질 테니까. 무조건 인간들 편만 들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내게는 인간들이 더 친숙해. 인간들의 문명을 즐기는 내 입장에선 마왕군을 응원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 음, 그럼 우리 딸이 많이 곤란해질 텐데…….

 “하! 내가 왜? 곤란한 건 당신이겠지. 이제 곧 죽을 사람이 위협해봤자 소용없어.”

 - 응? 죽는다고? 누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는 듯이 묻는 마왕. 난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의 뻥 뚫린 왼쪽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성검에 심장이 꿰뚫린 당신이 죽지 내가 죽겠어? 설마 그런 어설픈 연기로 얼버무릴 수 있다고…….”

 - 아아! 그러고 보니 오늘 한방 먹었었지! 그래서 그런 착각을 하고 있었군. 잠시만 기다려.

 마왕이 가볍게 말하며 가볍게 손을 상처로 가져가자, 파괴된 심장이 단번에 재생하며 출혈이 멎고 뚫린 가슴이 순식간에 메워졌다.
 난 경악에 표정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다.

 “마, 말도 안 돼! 영웅의 성검, 센트럴 도그마에 심장이 뚫리고도 어, 어떻게……!? 그 성검은 예지계의 존재원형을 직접 파괴하는 살신殺神의 법리를 가졌어! 단지 물리적으로만 대상을 멸하는 게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세계에서 지우는 힘을 가졌다고! 초월자들조차 그 검 앞에서는…….”

 그러나 마왕은 이해하지 못하는 날 오히려 이해하지 못했다.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존재하는 데 왜 세계가 필요해? 나는 나로서 존재할 뿐인데. 그걸로 충분하잖아.

 질렸다. 이 여자가 상식을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난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던 모양이다. 대체 뭘 어떻게 실수하면 세상의 온갖 법칙을 무시하는 이런 무지막지한 존재가 튀어나올 수 있는 걸까. 이런 여자가 지금껏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다.

 - 이봐, 딸. 그게 네가 하고 있는 두 번째 착각이야.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한 마왕의 지적.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 난 딱히 세상을 멸망시키고 싶은 게 아니야. 단지 놀고 싶은 거지. 그걸 위해 이 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거고. 성과는 나름 있었어. 너도 봤다시피 내가 가슴에 입은 상처……. 분명 이건 인간들에게 영웅이라 칭송 받는 그 아이가, 이번에도 무력하게 쓰러질 거라 생각한 그 아이가, 예상을 뛰어넘고 죽을 각오로 없는 힘까지 짜내 내게 입힌 상처다. 박수를 보내 마땅한 투지였고, 실제로 나도 감동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물러나 주었지.

 마왕은 모험을 꿈꾸는 어린아이처럼 두근거리는 얼굴로 오늘의 싸움을 회상했다. 하지만 그 표정은 곧 유년기의 꿈을 잃은 지친 어른의 얼굴로 변했다.

 - 동시에 깨달았다. 이게 인간들의 한계라는 것을. 인간들의 세력이 최절정기에 달했을 때, 인간들 사이에 신들의 힘을 이어받은 역대 최고의 영웅이 등장했을 때, 신들마저 죽일 수 있는 최강의 무기가 그 영웅의 손에 들어갔을 때 싸움을 걸었지만, 그래도 인간들은 날 죽일 수 없었어. 물론 용왕들이나 내 힘을 이어받은 딸들마저도. 더 이상 내가 이곳에서 지금까지 얻은 이상의 자극을 얻을 리는 없겠지.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미친 괴물이라고는 알고 있었던 이 여자가 누군지 다시 모르게 되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반쯤은 알 수 없는 공포심에 쫓기며 물음을 던졌다.

 “당신은, 대체 뭘 할 생각이야?”

 마왕은 간명하게 대답했다.

 - 떠날 거다.

 “떠, 떠난다고? 어디로?”

 아직 감정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당혹해하는 나와 대조적으로 마왕은 표표한 시선으로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 아예 이 세계를 벗어나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떠나려고. 그렇군. 우선은 초차원성검을 벼려낸 초월자들의 세계에 가볼까. 그들이라면 충분히 내 상대가 될 수 있겠지.

 초월자. 다른 이름으로는 해탈자. 또는 먼저 떠난 이들. 혹은 앞서 빛이 된 자들.
 초월자란 인류나 다른 마물들이 있기 훨씬 전, 이 지구상에 존재했다는 전설 속의 첫 번째 종족을 가리키는 말로서, 초고도문명을 이룩한 끝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신적인 존재가 되어 상위차원으로 떠났다고 전해지는 이들이다. 인간들 사이에 신神으로 숭배되는 존재가 다름 아닌 그들로서, 성검 센트럴 도그마는 과거 이들 종족이 실존했다는 역사적 증거 중 하나였다.

 “이, 이길 수 있겠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마왕은 씩 웃으며 답했다.

 - 그걸 모르겠으니까 가보려는 거야.

 다시 꿈꾸는 아이 같은 표정을 짓는 마왕. 그 얼굴에 이것저것 모든 게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든 나는 큰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초월자들이 우리랑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엄청난 재앙이겠군. 난데없이 이세계에서 침략해 오는 마왕이라니, 완전 B급 소설이잖아. 뭐 잘 알겠어. 당신이 얌전히 다른 곳으로 떠나준다면, 우리 입장에선 참 고마운 일이지. 근데 내가 왜 떠나는 당신 뒤를 이어야 하는 거지? 이제 와서 당신이 이끌던 마왕군에게 책임감이라도 느끼는 거야?”

 마왕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상하군. 넌 내 딸들 중에선 제일 머리가 돌아가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도발 아닌 도발에 발끈한 나는 고속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각 개체는 강하지만 결속력이 없는 마물들…… 루치아의 기치 아래 단단히 뭉쳤지만 심하게 쇠퇴한 인간들……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용왕들……. 그렇군. 당신이 갑자기 사라지면 싸움이 한층 격렬해질 수가 있겠어. 자칫 멈춰야 할 시기를 놓치면 이 지상의 문명은…….”

 - 사라지거나, 적어도 엄청나게 퇴보를 하겠지. 그건 곧 네가 한가롭게 여기서 책을 읽을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잠깐, 뭐야. 그러지 마. 이제 와서 무슨…… 웃기는 소릴…….”

 믿을 수 없지만 예상되는 대답을 부정하기 위해 고개를 저었지만, 마왕은 언제나 그렇듯 거리낌 없이 자기 할 말을 했다.

 - 그래, 널 위해서다.

 전에 없이 진지한, 그리고 상냥한 눈빛. 사고가 정지된 내가 침묵하는 동안 마왕은 말을 이었다.

 - 나야 이 세계에 아무런 미련이 없으니 그냥 떠나도 상관없지만, 넌 아니잖아? 너 정도의 힘이라면 설령 세상이 멸망해도 혼자 살아갈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넌 지상의 문명을 사랑하는 모양이니 기회를 주는 거야. 내 뒤를 이어 상황을 수습하라고. 이 세상 문명의 몰락을 막으라고 말이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 거창하게 말하자면, 마왕이 돼 세상을 지켜라. 내 친구Succubus에게 말해 뒤를 이을 준비는 다 해뒀으니 넌 그냥 수락만 하면 돼. 물론 거절하는 것도 네 자유야. 그 결과를 네가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지.

 “잠깐, 잠깐만……!”

 - 그럼 작별이다.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래도 난 이 세계에서 제법 즐거웠어. 그러니 너도 즐겁게 살길 바란다, 내 딸아.

 마왕은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하며,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다는 듯이 사라졌다. 붙잡을 새도 한방 먹일 새도 불평 한마디 할 새도 없이.

 “빌어먹을……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무책임한 여자……!”

 확실히 마지막까지 이 여자는 최악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딸의 마음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딸이 즐겁기를 바란다는 그 유언 아닌 유언만큼은 진심이었다는 것을 어쩐지 알 수 있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이미 벌어진 일에 불평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어. 해야 될 건 문제에 절망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것. 최대한 빨리 세상에서 당신의 흔적戰災들을 지우고, 평온하게 살아주겠어!”

 그렇게 난 그 여자의 뒤를 이어 마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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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09.10 18:50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아앗... 이 것은 마치 잔뜩 망친 조별 과제의 마무리를 떠맡은 임시 조장(전임 조장은 도망감)의 기분! ㅠ_ㅠ

    만약 제가 작중 신임 마왕의 상황이라면 인류연합군측과의 협의를 거친 후 적절하게 짜여진 판에 마왕군의 병력을 의도적으로 축차투입•축차소모시키는 과정을 통하여 마왕군의 궤멸을 유도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난 이후에는 연합군 수뇌부측과의 사법거래(?)로 다시 평화로운 독서생활 속으로 Comeback & Dive~ >_<)/


    ... 하지만 이는 단지 막연한 계획일뿐 마왕군 세력 내부에도 나름의 신임 마왕의 능력 검증과 견제 및 감시를 위한 안전장치라든가 머리 좋은 책사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을테니 쉽지는 않을테지요. 흑흑(/orz)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9.12 06:57 신고 address edit/delete

      다음 편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별과제... 딱 적절한 비유를 들어주신 듯-_-b 오히려 중고등학교보다 대학교에서 무책임함이 난무하는 모습은 참 안타까웠던 기억이 나요ㅠ_ㅠ


      확실히 평온을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주인공인 마왕의 딸이 직접 마왕군을 내부에서부터 빠르게 붕괴시키는 것이겠지만, 말씀처럼 마왕군 수뇌부가 견제하는 것도 있고, 또 무엇보다 주인공 본인이 그런 일을 바라지 않고 있기도 하네요. 주인공은 비록 인간 쪽에 더 호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혼혈로서 나름 마물이라 불리는 다른 종족들에 대한 이해도 있는 편이라 더욱 대등한 관계에서 소강상태로 끌고 가려는 마음이 있기도 해요.

      저번 댓글에서도 살짝 말씀드린 것처럼 최대한 무겁지 않게 가려고 생각 중이기 때문에 작중에서는 이런 사정이 자세히는 나오지 않을 예정이지만, 분위기를 망치지 않는 선에서 위와 같은 내용도 다루어 보고 싶네요^^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








00. 얼어붙은 시간


 푸른 달빛이 흩어지는 폐허.
 한때 인류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수도의 중심부도 지금은 옛 위용은 온데간데없이 형태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스러질 수밖에 없다는 쓸쓸한 진리를 체현하고 있을 따름이다.

 돌이킬 수 없는 상실. 회복할 수 없는 영광.
 지상의 모든 것을 제패하고 천상까지 길게 손을 뻗으려 했던 고귀한 인간들의 도시는, 신이 아닌 마왕의 손에 의해 그 오만을 심판받았다.

 - 모든 것은 모래로 그린 그림…… 참으로 덧없군.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혼잣말. 마치 검정 물감으로 세상을 덧칠하듯, 스스로도 진저리가 날 만큼 오싹하고 눅눅한 음색이다. 확실히 본모습을 드러낸 나는, 세상 그 어떤 인간보다도 그 여자를 닮았다. 인간들의 세상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은 그 여자를.

 “아직, 우리는 끝나지 않았다.”

 그때, 내 우울한 감상에 저항하는 금빛 목소리가 짙은 어둠絶望 속에 맑게 울려 퍼졌다. 나는 뒤를 돌아 상대를 바라보며 음미하듯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 임페리얼 루치아. 인류의 마지막이자 첫 번째 희망, 루치아 안젤리나 임페리얼 제이드.

 밤을 밝히듯 춤추는 화려한 금색 머리카락. 불처럼 강렬하면서도 얼음 같은 침착함을 내포한 짙은 녹색 눈동자. 초연의 내음이 깊숙이 스며든 붉은 제복이 권위 있는 여왕처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그녀Lucia는, 실제로 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직위에 앉아 있었다.

 인류연합 최고대표. 인류군 총사령관.
 역대 그 어떤 권력자도 동시에 가져본 적이 없는 최고 권력을 양손에 쥐고 있는 루치아 임페리얼. 하지만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지금 그녀가 앉은 자리를 탐내거나 부러워하진 않으리라.

 “그야 그렇겠지. 너희들 마왕군의 공격에…… 아니, 마왕 이클립스의 힘에 유린당한 탓에 인류의 세력권은 절반 이상 축소되고 말았으니까. 패전의 책임에선 누구나 도망치고 싶어 하지.”

 내가 삼키고 있던 말을 눈치 챈 걸까. 루치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하지만 눈빛에는 확실한 분노를 담아 날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용기 있는 자들은 일찍이 다 죽었다. 다름 아닌 네놈들의 손에. 남은 건, 나 같이 어둠에 벌벌 떨며 간신히 서 있는 게 고작인 잔챙이들뿐. 아주 통쾌하겠군. 인간을 먹이로밖에 보지 않는 너희 마물 놈들에게는.”

 과소평가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지나친 자기비하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힘 있고 의무 있는 자들부터 도망친 최악의 상황에서도 무릎 꿇은 사람들을 독려하고 규합해 마왕군과 호각으로 맞선 그녀Lucia를 누가 비웃을 수 있을까. 아마 그녀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난 그녀야말로 진정한 인간들의 왕이라 생각한다. 그런 그녀를 조소하는 것은, 설령 그 본인이라도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입장상 난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밝힐 수는 없었다. 대신 난 한껏 폼을 잡으며 상대를 내려다보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 그런 것치곤 제법 배짱 있는 인간이군. 내 손짓 한 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약하고 미약하고 허약한 존재가, 겁도 없이 홀로 나와의 회담에 응하다니. 대담한 용기일까 아니면 단순한 만용일까. 어느 쪽인지 심히 궁금한데.

 떠보는 내 물음에 루치아의 입가가 살짝 비틀렸다.

 “미안하지만, 난 혼자가 아니야.”

 쿵. 굉음과 함께 하늘에서 떨어지듯 착지한 백은의 기사. 빈틈없이 갑옷으로 온몸을 감싼 하얀 영웅은 말없이 오색으로 찬란히 빛나는 검을 날 향해 겨누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난 모른 척하며 입을 열었다.

 - 그렇군. ‘선대’ 마왕의 심장을 꿰뚫은 초차원 성검…… 인류의 마지막이자 두 번째 희망인 반신demigod의 영웅이 함께라면 내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겠어.

 루치아가 인류의 정신적 지주라면, 이 백은의 기사는 물리적 지주.
 성검에게 선택 받은 영웅은 인류군이 무참히 패주하는 상황에서도 단신으로 마물들의 공세에 맞서 몇몇 도시들을 지켜냈다. 그 모습에서 다시금 희망을 찾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루치아와 함께 그 기사를 칭송하기 시작했다.

 「…….」

 말없이 노려보는 시선. 투구로 얼굴은 가려도 살기까지 감출 수는 없다.
 루치아는 그 무구한 살의의 대변자가 되어 입을 열었다.

 “경솔했군. 이런 자리에 어떤 대비도 없이 혼자 나오다니. 마왕이 죽은 지금, 구심점인 너마저 사라지면 마왕군은 더 이상 세력을 유지할 수 없다. 급속도로 붕괴하고 말테지. 너희 마물들은 ‘왕’없이는 절대 뭉치지 못하는 존재. 아무리 각 개체가 강하다 해도, 그것만으로 ‘인류’는 이길 수 없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정확한 지적. 지상을 지배하고 있던 인류문명을 붕괴직전까지 몰아넣은 이 악마 놈들이 얼마나 구제불능의 멍청이들인지는, 어떤 인간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애초에 내 몸에 흐르는 피의 절반은 그들과 같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난 입장상 그 말을 가만히 수긍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 글쎄, 그대라는 지도자가 없어지면 무너져 내리는 건 인간도 똑같지 않나? 오지 않을 구원자를 고대하며 발걸음을 멈추고, 누군가 이끌어주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야말로 인간들의 종족적 특성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물론 그 또한 인간의 나약한 일면이지. 하지만 사람에게는 그 나약함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강함이 있다. 설령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손에 죽는다 해도 결코 우리人間는 멈추지 않아. 다면성을 갖지 못하는 너희 악마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미래에 대한 신뢰로 강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사람을 향한 찬가를 노래하듯 선율과도 닮은 그녀Lucia의 목소리에 난 그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지금의 난, 싫어도 악마들을 대변해야만 하니까.

 - 시험해볼까. 정말 그대를 죽여도 인간들이 절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지를.

 눈을 가늘게 뜨고 힘을 아주 조금만 발산한다.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상대를 죽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럼에도 이 일대는 폭풍이라도 휘몰아친 것처럼 폐허의 잔해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역시 이 모습으로 힘을 조절하는 것은 어렵다.

 “이건, 교섭결렬의 의지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아니면 달리 해명할 말이 있나?”

 다행히 먼지가 걷힌 후 모습을 드러낸 루치아는 멀쩡했다. 백은의 기사가 성심력을 펼쳐 내 마력방출을 중화시킨 것이다. 난 내심 안도하며, 동시에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한층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과연 인간들의 영웅님. 이 정도는 문제없이 막아내는군. ‘마왕을 쓰러뜨릴 때 입은 상처’가 아직 남아 있다 해도.

 「……!」

 덜그럭. 짧지만 강렬한 동요. 하얀 기사는 아직 루치아만큼 능숙하게 마음을 다스리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뭐 잘 숨겼어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내게는 무의미한 일이었겠지만.
 난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인 하얀 영웅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 잠깐 기다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죽을 각오로 자살특공을 하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모든 일이든 서두르고 보는 건 짧은 시간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들의 좋지 않은 습성이지. 비록 그것이 때로는 신들조차 예상치 못한 위업을 달성하는 경우가 있다 해도. 뭐 좋다. 방금 질문에 대답해주마. 난 교섭결렬의 뜻으로 내 힘을 너희에게 보인 게 아니야. 단지 말 그대로 너희들을 시험해 봤을 뿐이다. 너희들이 날 ‘교섭이 가능한 상대’인지 가늠해 보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처럼.

 루치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Lucia는 손을 들어 기사의 성검을 내리게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좀 더 생각을 들려주면 고맙겠군.”

 이제부터가 진짜 승부. 난 미리 준비된 대답을 꺼냈다.

 - 그대의 말마따나 스스로의 힘에 취해 쉽게 통솔되지 않는 우리惡魔는, ‘왕’없이 오래 결속을 유지할 수 없다. 내가 분발해봤자 선왕처럼 무리를 규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지. 내게는 그만한 지도력charisma이 없으니까. 분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들이 다시 유리해질 것이라는 그대의 예측은 크게 빗나가지 않을 거다. 하지만…….

 난 루치아의 맑은 녹색 눈동자를 위안 삼아 내키지 않은 말을 이었다.

 - 고작 우두머리를 잃는 정도로 한번 결집한 세력이 하루아침에 쉽게 무너지지도 않지. 설령 너희가 이 자리에서 날 죽이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마왕군이 당장 해체되는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 오히려 일시적으로나마 마왕군 전체가 고무될 가능성마저 있다. ‘비겁한 수’에 선왕의 후임자가 암살당했다고 말이야. 우리 쪽에도 그 정도 기교를 부릴 책사 한둘쯤은 있으니까. 그런 상황이라면…….

 고맙게도 다음 말은 루치아가 대신 받아 이어주었다.

 “싸움은 한층 격렬해지는 동시에 교착상태로 접어들겠지. 마왕군이 당장 붕괴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로, 쇠락할 대로 쇠락한 인류 또한 당장 강성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거기에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용왕들이 개입이라도 하는 날에는…….”

 - 양쪽 모두 극심한 피해를 입을 테지. 운 나쁘면 사이좋게 공멸일 테고, 운 좋게 어느 한쪽이 이긴다 해도 상처뿐인 승리 그 이상 이하도 아닐 터. 더 이상 우리가 전쟁을 벌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내 결론을 들은 루치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 생각과 비슷하군. 다행이야. 그쪽이 마왕과 달리 말이 통하는 상대라서. 죽은 마왕과는…… 일전에 딱 한번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도저히 교섭이 가능한 상대가 아니었다. 혹시나 비슷한 성향일까 걱정했지만 그저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이군.”

 음. 이해한다. 확실히 어떤 대단한 화술을 지닌 인간이라도 그 여자와 무언가 교섭을 한다는 건 불가능했으리라. 기본적으로 그 여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밖에 하지 않는다. 예외적으로는 자기가 좋아하는 얘기밖에 하지 않고.

 “하지만, 과연 우리에게 교섭이 가능할까. 서로에게 타협의 여지가 있을까. 인류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희생을 치렀다. 마왕군의 공세에 멸망한 나라만 열셋, 파괴된 도시는 수천을 헤아린다.”

 웃음기도 잠시. 루치아의 얼굴에 다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여기엔 나도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너희 인간들이 도시를 세우기 위해 불태운 숲은 본래 누구의 것이었나? 너희들이 악마나 마물 등으로 뭉뚱그려 부르는 숲의 주민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이번 마왕군과의 전쟁에서 죽은 이들은, 공식적으로 사망이 확인된 자만 1억 명에 가깝다. 너희들은 너무 죽였어. 전쟁터의 병사들뿐만 아니라 민간인, 병자, 갓난아기까지 가리지 않고 전부 학살했지.”

 - 인간들이 지상의 패권을 쥔 이후 희생시킨 다른 존재들은 셈하지 않나? 보기에 멋지다고, 연금술에 도움이 된다고, 심지어는 맛있다고…… 너희들은 탐욕스럽게 인간 이외의 다른 종족들을 죽이고 범하고 사육하고 멸종시켰지. 이제는 지상에 단 한 마리밖에 남지 않은 일각수의 비극은, 결코 인간들의 유일한 죄악이 아니다.

 교차하는 시선과 시선. 충돌하는 주장과 주장. 이대로는 아무리 말을 나누고 또 나누어도 양자 간의 간극을 좁힐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입을 열면 열수록 앙금은 커지고 골은 깊어져만 갈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Lucia와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 그대와 나는, 우리와 너희는, 결코 타협할 수 없다.

 “우리가 서로 손을 잡기에는, 그 사이에 너무나도 많은 죽음이 가로막고 있다.”

 - 하지만 타협이란, 바로 타협할 수 없는 걸 타협하기 위해 하는 것이지.

 언젠가 들은 문장가의 말을 입에 담은 순간,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럼 협상을 시작해볼까, 마왕의 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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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08.24 14:09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와이, 와아아~ 안단테님의 신작이다요! >_<


    흡사 은세계의 은월을 떠올리게끔 하는 머나먼 미래의 포스트아포칼립스적 풍광에, 마왕용사의 첫화에서 느낄 수 있었던 산뜻함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는 것 같아 다시금 시선이 가네요.

    수많은 부조리와 참상의 연쇄 끝에 비로소 도달하게 된 화합으로의 길,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너무나도 많은 피해 앞에 벌어지고 곪아버린 서로의 물리적 상처와 심리적 거리감이 크나큰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것은 참 서글픈 일이 아닐까 해요.

    수많은 서브컬쳐계 창작물의 이야기 속 세력간의 대립이 그러했고, 현실의 한반도를 포함한 분단국가들의 현실이 그러하듯이...


    ... 하지만 중요한건 이게 아니라(?) 신작의 향후 전개가 기대된다는겁니다 +_+ 므흐흐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8.25 18:04 신고 address edit/delete

      이번에도 눈을 두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마왕과 용사가 실은 협력관계에 있다는 유명한 장르의 힘을 빌린다면 부족함이 많은 제 글에도 조금은 재미있는 요소가 생기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쓰고 보니 의외로 크게 변한 게 없는 것 같아 살짝 좌절하기도 했네요^^;; 그래도 다른 실력 있는 분들이 앞서 다져 놓은 장르의 힘을 믿고 시간 날 때마다 천천히 이야기를 진행시킬 생각이에요.


      말씀처럼 치열하게 대립하던 두 세력이 서로 화해하고 협력의 길에 도달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고, 현실에서는 오히려 그 시도가 좌절되는 경우가 압도적이지요.

      사실 이번 소설은 코미디(...)를 예정하고 있어 그런 암울하고 복잡한 배경에 대해 자세하게 다룰 예정은 없지만, 그래도 이른바 세상의 정의나 평화를 추구하는 데 있어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작중에서 조금이라도 표현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면, 제가 쓰는 글에도 얼마간 의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럼 다시 한번 읽어주신 데 감사의 말씀드리며, 좋은 하루되시길 바라요!











(글을 쓸 때 들은 BGM이 겻들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막장 스토리입니다)







BGM: 相州戦神館學園 八命陣 『Timnat-s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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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完)]


 부드럽게 하늘을 물들이는 석양 아래 마녀는 자신의 연인과 함께 인형사를 전송했다.

 「설마 네가 협조를 해줄 줄은 몰랐다. 덕분에 빨리 회복…… 아니 전보다 상태가 더 좋아졌을 정도야. 넌 날 성가시게 생각하지 않았나? 한데 왜 내게 손을 내민 거지?」

 유화는 고마워하면서도 자신이 입은 호의를 미심쩍어하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마녀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물론 성가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몸을 수리하는 데도 도움을 준 거고요. 빨리 고쳐야 빨리 나가실 거 아니에요.”

 그러나 유화는 마녀의 위악적인 태도에 넘어가지 않았다.

 「넌 계약의 마녀지. 아무리 바라는 게 있어도 아무런 대가 없이 호의를 베풀지는 않아. 내게 원하는 게 있다면 빨리 말해라. 그래야 나도 준비를 할 테니.」

 마녀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괜히 오래 산 게 아니라니까. 예, 사실 원하는 게 있어요. 별 건 아니고, 제게 도움을 받은 걸 빚으로 생각하신다면, 그걸 갚는 셈치고 앞으로 그 두 사람을 건드리지 않기를 부탁드리고 싶네요.”

 여기서 두 사람이란 진아와 나루를 뜻하는 말. 마녀는 두 사람의 일상을 더 이상 망가뜨리지 않을 것을 관리사에게 요구했다.

 「이건…… 네가 떠올릴 만한 발상이 아니군. 제안을 한 건 그쪽의 연인이신가?」

 유화는 칠흑 같은 검은 머리에 호수 같이 푸른 눈동자가 매혹적인 마녀의 연인, 설란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설란은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유화를 응시하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화는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마라. 이미 그 아이들의 운명은 바뀌었다. 그 진아라는 아이가 곁에 있는 한, 심애의 광인이 다시 눈을 뜨는 일은 없겠지.」

 확언을 받아낸 마녀는 다소 짓궂은 어투로 말했다.

 “당초 예상이 성대하게 빗나가고 말았네요. 당신이 본 미래에선 수백 명 이상이 죽어나가고, 그 미래를 막기 위해선 반드시 한명이 희생되어야했지만, 결국 아무도 죽지 않고 잘 끝날 수 있었으니까요. 어때요, 이만 자신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인정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의외로 용서 없는 추궁에 정원관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 일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해. 죽어서까지 잿더미나 마찬가지인 몸을 이끌고 헌신적인 희생을 한 유령, 그리고 선천적으로 영웅의 신체를 가지고 태어난 무신. 이 두 사람이 한 소녀를 위해 힘을 합친다는 기적적인 희생이 있었기에 이번 결과가 나올 수 있던 거다. 매번 이런 요행을 바랄 수는 없어.」

 마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뭐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요. 당신처럼 긴 시간 동안 줄곧 한길만 걸어온 사람이라면 더욱 더.”

 확실히 그 말대로. 300년 가까이 한 가지 방식을 고수해온 인형 같은 인형사가 이제 와서 변하기란 요원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유화에게는 아직 입으로 꺼내지 않고 가슴 속에 묻어둔 말이 있었다.

 - 사실 사람들은 알고 있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않고 있을 뿐이야. 현실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어릴 적부터 줄곧 간직해온 스승Master의 말. 여태껏 그 진의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유화는 스승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이 틀렸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아이들이 한 일이 올바르다는 사실. 그것만큼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정원관리사는 오랜 시간 고민해온 답에 작은 결론을 내린 채 석양빛을 받으며 마녀가 사는 도시를 뒤로 했다.






 떠들썩한 교실의 점심시간.
 진아는 은근슬쩍 자신을 훔쳐보는 이런저런 시선에 압박을 느끼며 눈앞의 상대에게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말이지. 나, 나 혼자 먹을 수 있는데…….”

 하지만 나루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숟가락을 진아에게 들이밀었다.

 “원래 왼손잡이라면서요. 나 때문에 다친 거니, 내가 책임져야죠. 자, 입 벌려요. 아~~하세요. 아~~”

 “으…….”

 며칠 전 나루의 광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분투했던 진아는 왼손에 심한 상처를 입어 붕대를 둘둘 말고 있었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붕대였지만 그건 마녀가 특별히 제작해준 일급품으로 형체만 남아 있다면 어떤 외상이든 회복시킬 수 있는 효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 다만 겉보기에는 다 나은 것처럼 보여도, 왼손에 예전처럼 힘이 돌아오지는 않을 거예요.

 진아의 손을 치료해준 마녀는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광기에 당한 상처는 보통 쉽게 낫지 않는다고 한다. 광인들의 힘에는 기초법칙과 궤를 달리 하는 이질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세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한 아무리 마법이라 해도 완전한 대응은 불가능하다는 모양이다.

 ‘뭐 다 나으면 일상생활은 가능하다고 하니…….’

 하지만 진아는 별로 괘념치 않았다. 이번에는 어쩌다 험한 일에 또 끼어들고 말았지만, 본래 그녀는 평범한 삶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가 벌인 일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고…….’

 나루가 폭주한 여파는 마녀와 관리사가 최대한 처리를 해 가스관 폭발 정도로 마무리가 되었고 한다. 사상자가 없는 덕분에 딱히 이슈화되지도 않았으니 금세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리라. 아마도 그녀들의 일상이 더 이상 위협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정말 문제는, 얘야……!’

 오히려 진아에게는 지나간 사건보다 최근 나루의 행동이 훨씬 난처하게 느껴졌다. 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마다 교실에 찾아와 손이 불편한 자신 대신 이것저것 수발을 들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마음은 고마웠지만 그때마다 교실의 이목이 집중되니 은근히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결국 진아는 포기하고 입을 벌렸다. 나루가 집요하다는 것은 다름 아닌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아에게 밥과 반찬을 먹여준 나루는 웃음을 지었다.

 “후후, 어때요? 맛있어요?”

 “으, 응…….”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그 대답은 진심이었다. 나루의 도시락은 정말 맛있었다. 선생님 대신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때 나루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쪽이 거짓말 했다는 건 알아요.”

 “응? 아, 아니야! 진짜 맛있…….”

 “아니요. 그거 말고. ……내가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워 구해줬다는 거 말이에요.”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살짝 목소리를 낮춘 나루. 담담한 음색이었지만, 역시 직접 입 밖으로 꺼내는 건 부끄러웠던 모양인지 얼굴이 조금 빨개져 있었다.

 “……거짓말은 아니야. 정말 그렇게 느낀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역시 선생님이 부탁한 영향이 더 컸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어.”

 얼버무려도 소용없다고 생각한 진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루는 자조하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아.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내가 생각해도 그쪽이 날 좋게 볼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목숨까지 던지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완전 놀아나고 말았네.”

 “그, 그건…….”

 진아는 변명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나루를 구하기 위해서였다고는 해도 ‘선생님의 유언’을 지키고 싶다는 자신의 독선으로 상대를 농락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루는 무언가 다짐하듯이 작게 중얼거렸다.

 “뭐 그러니 여기서부턴 내가 노력할 차례겠죠.”

 “응? 지금 뭐라고……읍!”

 나루는 아까보다 좀 더 붉어진 얼굴로 진아의 입을 막듯이 반찬을 집어넣었다.

 “음…….”

 역시나 맛있다. 문득 진아는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선생님도 집에선 항상 나루가 해주는 음식을 드셨겠지. 그런 연상을 한 것이다.

 마녀의 위화감 어쩌구 하는 마법 덕분인지 시진이 되살아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진아 일행밖에 없었다. 모두들 이시진 선생은 카페에서 충돌사고가 있었던 그날 죽었다고 알고 있다.

 선생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건 조금 쓸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시진의 그 일주일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었고, 그녀가 죽음에 저항한 덕분에 나루가 파멸로 향하는 미래를 막는 계기를 마련할 수가 있었다.

 ‘선생님…….’

 아직 진아는 첫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그건 나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통해 맺어진 인연 속에서 두 사람은 느리고도 착실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잿더미 속에서 꽃이 피어날 날은 언제 올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진아는 나루와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이제는 그다지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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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03.14 12:23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이, 이 것이 젊음...! (쿠쿵)

    역시 화끈한 사람은 뭔가 다르군요.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3.15 07:00 신고 address edit/delete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최대한 청춘 같은 분위기를 내고 싶었는데 잘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글을 쓸 때 들은 BGM이 겻들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막장 스토리입니다)







BGM: よるのないくに2 - Молчание и гнев






■■■








[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15)]


 세계를 수많은 법칙으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법전이라고 했을 때, ‘광기’라 불리는 힘은 그 세계대법전의 예외조항에 해당하는 현상을 통칭하는 말이다.

 마녀나 관리사들이 사용하는 일명 ‘마법’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힘.
 그들이 일으키는 마도현상은 직접적이건 간적접이건 간에 별의 의식구조체에 자극을 주어 관념을 물질화시키는 데 그 기본원리가 있다.

 하지만 ‘광인’이라 불리는 이능력자들은 개인의 심리心理를 통해 세계의 법리法理를 변형시킨다. 말하자면 침략자. 생물학적으로만 인간일 뿐이지 그 정신구조는 외계外界에서 침공해 들어오는 우주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아아, 또…… 또 떠나버렸어. 결국 마지막에 이기는 건 불행…… 언제나 내게서 소중한 것들을 가져가 버리고 말아…….”

 나루의 광기心理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심애深愛』.
 그 특성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협하는 그 모든 것을 베어낼 수 있는 참살법리. 나루狂人에게 ‘불행’으로 지정된 것은, 어떤 사물이건 어떤 사람이건 간에 처참히 난도질당할 운명에서 도망칠 수 없다.

 “불행은, 언제나 밖에서 와…… 아무리 잘라내도…… 아무리 베어내도…… 아무리 갈기갈기 찢어발겨도…… 계속, 계속, 계속 다시 나타나…….”

 나루는 어느새 다시 손에 식칼을 들고 있었다.
 물론 그 식칼은 실제 현존하고 있는 도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과거 자신을 지켜주었던 친언니의 상징으로서 매번 나루에게 소환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진정한 원흉은……!”

 촤악. 거세게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 나루는 식칼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그리고는 팔을 크게 휘둘러 그 피를 마치 행위예술가의 페인트라도 되는 마냥 공중에 흩뿌렸다.
 진아는 나루를 걱정할 새도 없이 그 기이한 광경에 멍하니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날개……?”

 공중에 흩뿌려진 핏줄기는, 그대로 땅에 떨어지지 않고 진아의 말마따나 나루의 등 뒤에 날개 같은 형상의 기이한 무언가를 형성했다.

 징벌의 천사, 타락한 천사, 또는 악마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핏빛의 무시무시한 구조물.
 그것은 위력 또한 그 겉모습만큼이나 흉포했다.

 “진짜 원흉은 바로 세계! 이 세상 자체야! 이 세상이 내게 자꾸 불행을 가져와! 그럼, 그럼 없앨 수밖에 없잖아? 원흉世界 그 자체를 잘라내는 수밖에 없잖아!?”

 피눈물을 흘리며 일그러진 웃음을 짓는 나루. 금색 눈동자가 강렬히 반짝이는 순간 등 뒤의 핏빛 날개가 거세게 움직였다.

 “……!”

 바둑판처럼 잘게 나뉘어 허물어지는 담벼락. 종잇장처럼 사정없이 찢겨나가는 승용차. 보이지 않는 거대한 괴수가 할퀴고 지나간 듯이 깊숙이 파인 콘크리트 바닥……. 나루의 피로 형성된 핏빛 날개는 그 자체가 거대한 칼날이나 마찬가지였다.
 유화는 쓰러진 채로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결국 저 아이는, 완전히 폭주發狂하고 말았다……. 내가 본 미래에선, 나와 마녀가 온전히 힘을 합쳐도…… 폭주한 저 아이를 막는데, 7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거늘……. 한데 지금 난 네놈에게 당한 덕분에, 행동불능이지……. 상황은, 최악이다…….」

 “…….”

 진아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유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멍청한, 놈…… 이제,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좀 알겠느냐……? 지나간 일을 탓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지……. 어서, 도망쳐라…… 그리고 마녀에게 가서, 협조를 구해……. 날 쓰러뜨린 그 실력이라면, 마녀의 제작품artefact으로 중무장을 하고 겨룬다면, 어쩌면 승산이…….」

 그러나 진아는 오히려 앞으로 한걸음을 내딛으며 불쑥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악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굳이 치자면 선한 쪽에 속하는 사람이겠죠. 보다 많은 사람들의 평온을 위해 스스로 죄를 짓는 걸 감수할 만큼은. 하지만, 당신의 방법은 분명히 잘못되었어요.”

 「또 그 얘긴가…… 그럼, 나도 다시 묻지……. 달리 방도가, 있나……? 난, 신이 아니야…… 원인을 미리 제거하는 데만도, 힘에 부친다…… 그런데도 넌, 사람들을 구할 방도가…… 달리 있었다고 말할 셈이냐……?」

 유화의 물음에 진아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아니요, 없어요. 하지만 그걸로 된 거예요. 어차피 사람은 ‘사람들’을 구할 수 없어요. 저도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질 수 없었겠죠.”

 「무슨, 뜻이지……?」

 “별 거 아니에요. 우리 손이 한줌밖에 안 된다는,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했을 뿐이에요.”

 더는 시간이 없다. 진아는 나루가 광기의 칼날을 사람들에게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진아의 기척을 느낀 나루가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응? 아직도 거기 있었어요? 내게 죽기 전에 도망치라고 최대한 무시하고 있었는데 스스로 찾아오다니 정말 바보 같네요. 음? 하지만 이 세상 모든 걸 다 찢어버릴 예정이니까, 어차피 지금 죽나 나중에 죽나 큰 차이는 없나? 아하하하하.”

 피눈물을 흘리는 금빛 눈동자. 진아는 밤의 그림자로 짜인 장갑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과연, 괜히 ‘광인’이라 불리는 게 아닌가 보네. 솔직히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언제나 불행이 세상을 통해서 온다면…… 아니 이 세계 자체가 불행이라면……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선, 세계를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는 걸요. 이제 언니들도 없는 세상이라면, 더는 미련 가질 것도 없으니 잘 됐죠!”

 나루의 등 뒤에 떠 있는 핏빛 날개 중 한쪽이 길게 늘어나 진아를 향해 덮쳐왔다. 하지만 진아는 가만히 나루의 얼굴을 마주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

 주룩. 진아의 목덜미에서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린다. 핏빛 날개는 진아의 목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주 살짝 방향이 빗나갔어도 절명했을 위험한 순간이었으나, 진아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루는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흐응. 왜 도망치지 않나요? 다음은 없다고요?”

 “알고 있어. 하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지. 그렇다면, 나도 널 믿을 뿐이야.”

 진아의 조용한 대답과 대조적으로 나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믿어? 믿는다고? 뭘? 누구를? 언제나 불행을 날아오는 세상을? 아니면 거기에 허덕이는 나를? 어느 쪽이든 역겨워…… 역겹다고요……!”

 재차 진아를 향해 뻗어오는 핏빛 날개. 이번에는 빗나가는 일 없이 정확히 진아의 목을 노려 날아들고 있었다.

 “한계를 넘어섰네. 뭐 좋아. 나도 처음부터 말로 끝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쩡! 진아는 칼날 그 자체인 나루의 날개를 피하지 않고 주먹으로 그대로 받아쳤다.




BGM: よるのないくに2 - 戦恋歌


 “……!”

 예상치 못한 충격에 비틀거리는 나루. 진아는 그 틈을 타 한발자국 더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가, 오지 마……!”

 나루의 강한 거절. 핏빛 날개가 어지럽게 요동을 치며 깃 하나하나가 칼날이 되어 진아를 절단하기 위해 쇄도해온다.

 “싫어.”

 쩡쩡쩡쩡쩡쩡. 진아는 놀리듯이 짧게 답하며 자신을 포위한 붉은 궤적을 한순간에 전부 쳐냈다.
 그 여파에 부셔지고 갈라지고 넘어가는 벽들과 차들과 나무들. 진아는 언뜻 토네이도라도 휩쓸고 지나간 것만 같은 참상을 곁눈질하며, 관리사가 이 근처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술법을 걸어놓아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나저나, 손에 통증이…….’

 어떤 충격도 흡수하는, 밤의 그림자로 짜인 검은 장갑. 이론상으로는 낙하하는 운석과 충돌해도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있지만, 광인의 힘은 그 어떤 추론도 무색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광기의 진정한 무서움. 개인 내면의 소우주가 세상 외부의 대우주를 압도해 집어삼키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쩡. 쩡. 쩡. 인체에 치명적인 급소를 노리고 들어오는 핏빛 날개를 모두 쳐내며 진아는 입을 열었다.

 “선생님을 잃어 슬픈 마음은 알아. 물론 주제넘게 네 슬픔을 전부 이해한다고 말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나도 선생님을 좋아했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

 그러나 진아의 말은 도리어 나루의 살의를 자극할 뿐이었다.

 “나와 슬픔을, 공유할 수 있다고……? 웃기는 소리! 그럼 왜 그렇게 멀쩡한 거죠!? 어째서 미치지 않을 수 있나요!? 언니를, 시진 언니를 죽게 내버려둔 세상을 어떻게 증오하지 않을 수 있죠!?”

 나루의 안광에 금빛이 더해지며 손에 들고 있는 식칼이 상어의 뼈를 닮은 흉측한 대검으로 크게 성장했다. 동시에 피로 물든 날개가 폭주해 주변을 더욱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윽……!”

 뚝뚝. 장갑의 찢어진 틈 사이로 핏방울이 떨어진다. 진아는 가까스로 자신을 향한 나루의 참격을 막아냈지만, 검은 장갑의 무효화 효과까지 뚫고 들어오는 충격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진아는 여전히 물러서지 않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맞아…… 분명 난 너만큼 선생님에게 마음을 쏟지 않았을지도 몰라. 연상의 멋진 동성을 동경하는, 그런 한때의 가벼운 감정이었을지 모르지. 그러니, 내가 네 슬픔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할 수도 있어…….”

 “알고 있으면, 좀 닥쳐―――!”

 정확히 진아의 심장을 노리고 질주하는 날개의 참격. 진아가 그것을 주먹으로 쳐내는 순간, 드디어 검은 장갑의 내구도가 한계에 다다랐는지 핏줄기가 사방에 튀었다.
 그럼에도 진아는 고통을 무시하고 나루를 향해 한층 거리를 좁히며 소리쳤다.

 “하지만, 하지만 사랑에 우열이 있는 거야!? 분명 내 마음은 너처럼 절실하지 않았을지는 몰라. 그렇다면 내 사랑은 가짜였던 거야……!?”

 “으……!”

 나루는 당혹감에 잠시 주춤거렸다. 누군가 함부로 자신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에는 분노했지만, 역으로 그녀는 사랑에 진지했기에 타인의 사랑 또한 함부로 비웃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 폭주發狂한 나루를 아직 일상으로 되돌릴 수 있는 단서가 있었다.
 바로 한발자국 앞까지 다가온 진아는 계속해서 외쳤다.

 “설령 너만큼 뜨겁진 않았다 해도, 선생님을 향한 내 마음은 진짜였어! 그리고, 난 그 사랑했던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부탁한 일을 반드시 해내고 싶어. 난 널, 너 자신의 광기로부터 지켜내고 싶어……!”

 너무 거리가 가까워 날개를 쓸 수 없는 나루는 상어뼈를 닮은 대검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나랑 상관없는 그런 독선적인 이유로, 날 방해하지 마……!”

 퍽. 진아는 대검을 왼손으로 받아냈으나, 검은 장갑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찢어지면서 칼날이 손바닥에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손이 잘리고도 남을 위력이었겠지만, 영웅의 신체를 가진 진아는 아직 얼마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멀쩡한 것은 아니다. 진아는 급속도로 왼손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끼며 속으로 ‘어쩌면 앞으로 손 못 쓰게 될지도 모르겠네’라고 떨면서도 고통을 꾹 참고 입을 열었다.

 “그, 그런 말을 네가 할 자격이 있냐고 묻고 싶지만, 뭐 그건 나중으로 돌리고…… 확실히 선생님의 뜻을 이어 널 구하고 싶다는 내 마음은, 독선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너랑 상관없다는 말은, 틀렸어…….”

 나루는 싸늘한 눈으로 진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랑 어떻게 상관있다는 거죠? 어디 한번 말해 봐요. 유언으로 들어줄 테니.”

 키리리릭. 핏빛 날개의 형태가 짧은 거리도 닿을 수 있게 변형되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아니 어떤 말을 내뱉든지 처참히 찢겨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 하지만 진아는 일절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나도 널 구하고 싶어. 선생님의 뜻만이 아닌, 내 스스로의 의지로 말이야.”

 동요한 걸까. 핏빛 날개가 부르르 떨렸다.

 “왜…… 어째서죠? 그쪽과 내가 만난 지는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는데…… 시진 언니를 빼면 아무런 접점도 없는 생판 남인 나를 왜…….”

 진아는 각오를 하듯 가볍게 숨을 들이쉰 후 답했다.

 “귀엽다고 생각했으니까. 처음 봤을 때부터.”

 “……네?”

 처음으로 나루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진아는 담담히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예쁜 애가 세상에 절망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너는 건 아깝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응. 뭐 흑심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네.”

 “무무무무무, 무, 무슨, 소리를……!”

 귀 끝까지 새빨개진 나루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너, 넌 지조도 없어요? 언니가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바람을 가르는 무서운 소리. 나루가 고함을 칠 때마다 핏빛 날개가 매섭게 움직여 진아에게 참격을 가했다.

 “아, 아니면 그건가요? 이상한 말로 날 방심시켜…… 기, 기습이라도 할 생각이었나요? 미, 미안하지만 난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아요!”

 붉은 궤적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볼에서 팔에서 다리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

 하지만 진아는 칼날을 붙잡은 채 나루를 가만히 응시할 뿐, 다른 움직임은 일절 취하지 않았다.

 “헉헉…….”

 나루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참격을 멈추었을 때, 진아의 주변은 돌멩이 하나 남아 있지 않을 만큼 모든 게 잘게 잘려 있었다. 하지만 진아 본인은 살갗에 살짝 베인 상처를 입은 것을 제외하면 무사했다.
 나루의 숨이 좀 진정되자 이윽고 진아가 입을 열었다.

 “널 처음 봤을 땐 솔직히 위험한 애라 생각했어. 그래서 피하고 싶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동시에 귀여운 애라 느꼈던 것도 사실이고.”

 “거짓말…….”

 “또 그렇게 가혹한 일을 겪고도 위축되지 않고 당차게 살아가는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야. 선생님이 없으면 세상이 멸망해도 좋다고 여길 만큼 사랑에 모든 걸 바치는 모습이 무서우면서도 예쁘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고.”

 “거짓, 말…….”

 나루는 못 믿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으나, 진아는 칼날을 잡은 손에 힘을 넣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널 구하고 싶다는 내 마음은, 진심이야! 선생님의 영향이 없다면 그야 거짓말이 되겠지만, 거기에는 분명 내 의지도 들어가 있어! 널 귀엽고 예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널 멋지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구하고 싶은 거라고!”

 “으, 그런 값싼 멘트로 누굴…….”

 즈즈즈즈. 하지만 말과 달리 나루의 등 뒤에 떠 있던 핏빛 날개는 서서히 날카로움을 잃고 크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나도 알아. 내가 주제넘다는 거. 너를 구한다느니 어쩌니 거창한 소리를 했지만,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어. 힘으로 널 제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선생님을 되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진아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쨍그랑. 어느새 상어뼈를 닮은 거대한 검은 평범한 식칼로 돌아왔고, 나루는 그것을 땅바닥에 힘없이 떨어뜨렸다. 떨어진 식칼은 금세 붉은 사철이 되어 시진이 그러했던 것처럼 바람에 날려 흩어졌다.
 진아는 아직 멀쩡한 오른손을 들어 나루의 피눈물을 닦아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역시, 너와 함께 슬픔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해. 같이, 불행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린, 서로 같은 사람을 좋아했으니까…….”

 “……!”

 빈손이 된 나루는 상처 입은 진아의 왼손을 감싸 쥐며 소리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나루의 눈동자는 금색에서 다시 원래의 밤색을 되찾았고, 다시 흘러나온 그녀의 눈물은 볼에 스며든 핏물을 조금씩 조금씩 씻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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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03.13 00:08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음음, 역시 사랑의 힘은 위대한 것!

    전통의 궁극기 민메이 어택(?)이 대성공했군요.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3.13 08:56 신고 address edit/delete

      All I need is love.

      이번 화를 한줄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될지도... 창작물에서 사랑의 힘이란 위대하죠!











(글을 쓸 때 들은 BGM이 겻들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막장 스토리입니다)







BGM: 結城友奈は勇者である 花結いのきらめきBGM - ボス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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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14)]


 그녀의 강함에는 이유가 없었다.
 날 때부터 주어진 힘.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하루 만에 걸을 수 있었고, 3살 때는 목줄이 풀린 맹견을 제압한 적도 있었다. 10살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이미 혼자서 차를 들어 올릴 수 있는 등 그 신체능력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있었다.

 더욱이 그녀의 강함은 괴력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거대한 힘을 적절히 다스려 행사할 줄도 알았다. 그녀의 움직임을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녀가 무언가 무도를 배운 사람일 거라 추측했으나, 그게 무엇인지는 아무도 맞추지 못했다.

 어쩔 수 없다. 정답이 없는 문제를 어떻게 맞출 수 있을까. 실제로 그녀는 어떤 단련도 어떤 무도도 한 적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타고난 감각으로 최적의 동작을 취한 것이, 주위의 눈에는 오랜 시간을 수련을 쌓은 움직임처럼 보인 것뿐이다.

 - 정말, 좋은 일이라곤 없었지.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 해야 할까. 괴물과 같은 힘을 지닌 그녀를 세상은 가만히 두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녀가 몸집도 가냘픈 어린 여자애라며 얕보고, 누군가는 도리어 그녀의 진가를 알아보고 이겨보고 싶은 호승심에, 누군가는 단지 그녀의 힘만을 이용하기 위해 접근해 끊임없이 그녀의 일상을 어지럽혔다.

 - 뭐, 내 책임도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녀 역시 중학시절까지는 자신의 힘을 행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가령 집단으로 폭행을 당할 뻔한 반 아이를 구해주고, 그에 앙심을 품은 가해자들이 더 큰 무리를 지어 몰려들면 그들 역시 박살냈다. 불법사채를 잘못 썼다가 끌려가는 채무자와 우연히 마주쳐 구출해준 일 때문에 사채업자의 배후에 있는 폭력조직과 시비가 붙은 적도 있었다. 물론 그 조직원들은 무사하지 못했다.

 - 이젠, 지쳤어…….

 그렇게 싸움에 싸움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던 그녀는, 문득 모든 것이 지겨워졌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고작 10대 중반의 나이에 떠오르는 추억이 대부분 누군가를 때려눕힌 것이라면 조금도 즐겁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싸움을 즐기는 전투광이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안타깝게도 그런 데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 이런 생활은 끝이야!

 마침 고교에 진학하며 이사 가는 걸 계기로, 그녀는 변화하기로 마음먹었다.
 소위 노는 애들처럼 머리도 옷차림도 화려하게 꾸미고, 싸우는 것 이외의 다른 취미에 몰두하며 평범하면서도 즐거운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녀는 딱히 몰두할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했고, 여전히 제일 잘하는 것은 싸움이었다. 그녀는, 진아는 줄곧 그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내게 힘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았다면, 좋아하는 사람이 가는 길조차 지키지 못했을 테니까.”

 중얼거리면서도 공격을 멈추지 않는 진아.
 공세는 압도적이었다. 유화는 관에서 은철의 장검을 꺼내 진아에게 대항하려 했지만, 그야말로 샌드백처럼 얻어맞을 뿐이었다.

 「이대로는……!」

 유화는 관속에서 10개의 장검을 튀어나오게 해 투척하는 걸로 일순 진아의 움직임을 막은 후 거리를 벌렸다. 잠시 여유가 생긴 정원관리사는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진아를 바라보며 진저리를 치듯 중얼거렸다.

 「무인…… 아니, 무신武神이라 해야 하나……. 그러니 충격을 흡수하는 장갑만으로, 충분했군…….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어…….」

 어떤 특수한 초능력도 없이 그저 선천적으로 ‘영웅’의 신체를 가지고 있을 뿐인 진아. 만약 그녀가 칼과 활이 활약하던 과거 전란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전설적인 무장으로 명성을 떨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현대문명이 번성한 도심지.
 이런 시대에 그녀가 가진 힘은 법과 질서를 훼손하고 본인의 일상마저 파괴하는 기이한 돌출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그녀 또한 그것을 자각했기에 앞으로는 평범히 살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아니었던가.
 진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말을 부정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가만 돌이켜보면, 이 힘 덕분에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죠. 무엇보다 지금 당신을 상대하는 데는, 제격이기도 하고요!”

 말이 끝나자마자 한달음에 거리를 좁혀 내뻗은 주먹.

 「……!」

 펑. 그 신속의 공격에 유화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쇠사슬로 동여맨 두터운 코트가 찢겨나가며 그 안에 숨겨진 하얀 드레스 자락이 바람에 펄럭인다. 장검과 함께 팔 한쪽이 날아간 유화는 열린 코트를 다시 여밀 수가 없었다.
 진아는 충격에 무릎을 꿇은 유화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역시…… 때릴 때 감각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거였군요.”

 덜그럭덜그럭. 치직치직.
 떨어져 나간 팔부위에서 쏟아지는 각종 기계부품들과 작게 불꽃이 튀는 전선들. 인형을 조종하는 인형사는, 그 자신의 몸마저 만들어진 것이었다.

 「내 몸의 7할 이상은, 인형이다……. 난 본래, 테러에 휘말려…… 죽을 몸이었지……. 그걸 스승Master께서 되살려, 주셨다……. 」

 유화의 담담한 말에 진아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미안하지만, 당신 스승에 대해서도 마녀에게 좀 들었어요. 훌륭한 분이셨다면서요! 당신처럼 미래를 보고, 전장이나 재해현장에서 수많은 사람을 구했다면서요! 근데 왜 당신은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거죠!? 당신 역시 그 스승님에게 구원 받았으면서 왜……!”

 「저 시진이라는 여자를 죽게 한, 음주운전자를 내가 미리 죽였다면…… 어땠을까?」

 “……!”

 불쑥 튀어나온 유화의 질문에 진아는 아무런 답변을 할 수 없었다.
 만약 그 음주운전자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사랑하는 선생님이 죽지 않았다면……. 이건 실로 악마의 질문誘惑이었다.

 「만약 내가, 저 나루라는 아이를 습격한…… 그 강도들을, 미리 죽일 수 있었다면?」

 “…….”

 이번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사라지기 일보 직전인 시진을 꼭 껴안고 있는 나루의 몸이 꿈틀거렸다. 어릴 적 가족들을 전부 잃고, 지금도 유일하게 의지하던 보호자가 사라지려고 하는 시점에서, 유화의 말은 나루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더욱이, 난 마스터만큼 미래를……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랬다면 너 같은 변수도, 예측하지 못했을 리가 없지…….」

 유화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계속 중얼거렸다.

 「분명, 난 마스터만큼…… 볼 수 없어. 그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웅. 목에 걸고 있는 펜던트에서 작은 빛이 새어나오는 순간 유화는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한쪽밖에 남지 않은 팔로 다시 진아를 공격했다.

 “윽, 아직도……!”

 핏. 진아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나이프. 생채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일절 닿지 않았던 공격이 처음으로 성공했다.

 “합!”

 진아는 자세를 바로하고 주먹을 내질렀으나 유화는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유화는 빠르게 단검을 휘둘렀고, 진아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갔다.

 ‘미리 알고 있는 듯이……?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진짜 미리 알고 있는 거야……!’

 진아는 직감적으로 유화의 변화를 눈치 챘다. 지금 인형사는 미래를 읽는 능력을 전투에 직접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아를 진짜 힘들게 하고 있는 건 자신의 움직임이 읽히는 것보다 유화가 내뱉는 ‘말’에 있었다.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던 마스터마저…… 끝내 자신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일이 터지고 난 다음에는, 너무 늦어……. 희생이 더 커지고, 구할 수 있는 사람마저, 구할 수 없게 된다……!」

 “……으.”

 「그렇다면, 방법은 없지 않나……. 불행의 원인을, 직접 제거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지 않느냐……!」

 “그, 그래도……! 그래, 도…….”

 어떻게든 반론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진아는 그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유화의 단검은 빨라졌고, 진아는 이제 공격을 포기한 채 회피에만 전념할 따름이었다.
 인형사의 외침은 계속됐다.

 「너처럼, 내 방식에 찬동하지 못해…… 막으려 한 자는 여럿 있었다……. 그자들은 다들 말은 번지르르했지만, 어떻게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지…… 그 방도는 찾지 못했지. 만약 그런 자들이 없었다면, 내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좀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었다면…… 사고를 일으킨 그 운전자도, 일가족을 몰살시킨 그 살인강도들도, 사전에 제거할 수 있었을지 몰라……!」

 “……!”

 결정적인 한마디에 진아의 움직임이 일순간 딱 멈추었다. 유화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진아의 배를 세게 걷어찼다.

 “…욱! ……!!……!!!”

 숨이 막힌 진아는 털썩 주저앉은 채 거칠게 기침을 내뱉었다. 아무리 영웅적인 신체능력을 타고 태어났다고 해도 심신이 동요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너희들이, 내 시간과 여유를 빼앗은 탓에…… 내가 놓친 미래의 살인마들이, 또 다른 비극을 일으키게 될지 몰라……. 물론, 네게 악의는 없었다는 건 안다……. 그러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반성하고, 잠들어라…….」

 유화가 작게 주문을 외자 은빛 단검의 칼날이 푸르게 변했다. 살짝 찌르는 것만으로 하루 종일 잠들게 만들 수 있는 술법. 만약 자신이 이 변수도 예측할 수 있었다면 미리 술법을 걸어놓았을 것이라고, 유화는 속으로 한탄했다.
 여유를 찾은 정원관리사가 무릎을 꿇고 괴로워하는 진아의 어깨를 찌르려고 하는 순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난, 나루를, 지키려 했을 뿐이야…….”

 시진의 혼잣말이 바람에 실려 진아의 귓가에 닿았다.

 「……!」

 탁. 보지도 않고 손을 휘둘러 유화의 단검을 날려버린 진아. 인형사는 급하게 진아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진아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선생님. 잘 알았어요. 역시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유화는 새 단검을 꺼내들어 재빨리 술법을 건 다음 진아를 향해 내찔렀다. 이번엔 조금이라도 스치게 하면 충분하다. 그 순간 깊은 잠에 빠지고 말 테니까. 하지만 진아는 그 칼날을 옷자락에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사람들을 구하려 죽음까지 미룬 게 아니야! 단지,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 했을 뿐이지……!”

 진아의 고함과 함께 덮쳐오는 주먹. 단지 여고생의 자그마한 손임에도 불구하고, 유화에게는 그것이 거대한 산처럼 보였다.

 「알고 있어도, 산사태를 막을 수는 없다는 건가…….」

 쾅. 마치 포탄이라도 맞은 듯이 뻥 뚫린 유화의 몸통. 거의 상반신만 남은 유화의 몸은 불꽃을 튀기며 스르르 허물어졌다.

 「마스, 터…….」

 딸깍. 가까스로 무사한 펜던트가 열리며 그 안에 오색으로 빛나는 보석 같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유화의 스승Master이 남긴 유일한 유품. 인형사는 스승의 유체의 일부를 이용해 본래 자신에게 없었던 미래를 읽는 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아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면목이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당신은 날 봐줬는데, 난 전력을 다해서. 하지만 마녀가 이 정도는 하지 않으면 당신을 멈출 수 없다고 해서……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는데, 실제로 보니까 알겠네요.”

 몸의 대부분이 기계로 되어 있는 유화는, 양손을 잃고 상반신만 남은 상태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안전한 장소에서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다시 예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문제는 그럴 시간이 과연 주어질 것인가 하는 데 있었지만.

 “역시, 내 제자야……. 솔직히, 제대로 가르친 건 없었지만…… 그래도 잘 받아줘서, 고마워…….”

 시진의 몸은 거의 가루로 변해 흩어지기 직전이었다. 잿더미로 만든 인간. 그녀의 덧없는 존재감은 바람만 불어도 흩어질 것 같은 인상을 주었으며,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생님…….”

 결국 사랑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걸로 진아는 만족했다. 시진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죽음에서 발버둥 친 인생에는 분명 의미가 있었다. 그 뜻을 이은 자신에게도.
 하지만 줄곧 잃어왔고 또 잃어야 하는 나루는, 진아처럼 평온히 정리할 수가 없었다.

 “언니…… 언니는, 절 사랑했나요……?”

 이미 눈물마저 말라붙어 퀭한 나루에게 시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물론, 이지…… 진짜 가족처럼, 널 사랑했다…….”

 거짓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온전한 사실도 아니다. 죽은 연인의 여동생에게서 서로 닮은 구석을 찾아내 조금도 연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 또한 거짓말이 되리라. 나루 역시 시진이 그것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날 언니처럼 사랑했다고. 내게서 연인을 느꼈다고.
 하지만 시진은 ‘어른’으로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넌, 나래의 동생이야…… 내가 사랑한 사람의 동생이라면, 너 역시 내 동생이나 마찬가지지……. 끝까지 함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나래와 함께 네 행복을…… 빌어, 줄게…….”

 끝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그래도 시진은 잿더미와 같은 몸을 지탱해 마지막까지 축복을 전할 수 있었다. 할 말을 마친 시진은 고요히 눈을 감았고, 그녀의 몸은 완전히 허물어져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하하, 하하하하……. 이제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네…….”

 바람에 시진의 잔해마저 놓친 나루는 허탈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루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한줄기 피눈물. 붉게 충혈된 그녀의 눈은 금색으로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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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03.11 12:51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아아... 나루야... ㅠㅠ

    실상 그녀와 유화는 서글프리만치 닮은 꼴의 소유자였던 것이로군요.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3.12 20:57 신고 address edit/delete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실히 그녀들은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ㅠ_ㅠ











(글을 쓸 때 들은 BGM이 겻들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막장 스토리입니다)







BGM: 相州戦神館學園 万仙陣 『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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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13)]


 통제를 잃은 쇳덩어리truck가 돌진한다.
 평소처럼 길을 걷다 난데없이 죽음의 위기에 맞닥뜨린 진아.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던져 가까스로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녀처럼 초상적인 신체능력을 지닌 게 아니다. 트럭은 그대로 카페를 들이박았고, 여러 사람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그중에는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도 있었다.

 - 기억났어. 전부.

 참사현장에 널브러진 한 여성. 피투성이가 된 채로, 필사적으로 어디론가 기어가려다 숨이 끊어진 이시진 선생님. 진아가 처음 손을 대본 사랑하는 이의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처음으로 느껴본 사랑하는 이의 감촉은 피에 젖어 끈적거리고 미지근했다.

 - 그때, 난 너를 만났어. 아니, 내가 찾아갔다고 해야 하나.

 정신적인 파장이 일치하고 무언가를 강렬히 이루고 싶은 소망을 가진 사람은, 마녀가 있는 공간의 틈새에 이끌리기가 쉽다. 꿈과 현실의 경계. 백일몽의 세상. 위화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마녀의 가게에서, 사람들은 무심코 자기 소망을 이야기한다.

 - 그래요. 당신은 처음에 선생님을 살려달라고 했지요.

 하지만 그건 이룰 수 없는 일. 죽은 이를 온전하게 되살리는 것은 마녀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몇 가지 편법으로 이 세상에 잠시간 붙잡아둘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도 일시적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 난, 약했어. 너무나도 비겁했어. 선생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는, 잊게 해달라고 했지. 선생님이 죽었다는 사실‘만’을.

 차라리 선생님 자체를 잊게 해달라고 빌었으면. 혹은 선생님을 사랑한 감정만을 잊게 해달라고 했다면.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복잡한 일에 휘말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도 인정한 것처럼 진아는 비겁했다. 선생님을 사랑했던 ‘좋은 기억’은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던 진아는, 선생님의 죽음이라는 ‘나쁜 기억’만을 잊기를 원했다. 그것이 어떤 사태를 초래하게 될지는 생각하지도 않고서.

 -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그곳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곳이니까. 그리고 들어준 건 저니까 혼자만의 책임도 아니고요.

 만약. 만약 빈사상태에 빠진 시진이 마녀를 찾아와 또 다른 소원을 말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진아는 아무 일 없이 평온한 생활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다시 선생님의 죽음을 알게 돼 새삼 슬픔에 빠졌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직접 현장에서 그 참상을 목격하는 것과는 충격의 강도가 비할 바가 아니리라. 아마도, 그녀는 고교를 졸업할 때쯤은 슬픔에서 벗어나 또 다른 사랑女性을 찾았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감사해. 내 약함에. 그리고 선생님의 용기에. 그렇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테니까.”

 뚜벅뚜벅. 진아는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주머니에서 검은 장갑을 꺼내 손에 끼었다. 이것은 마녀에게 받은, 말하자면 일종의 선불 같은 것이었다.

 - 당초 당신이 원했던 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잊게 해달라는 것. 그리고 제가 받은 대가는 바로 그 죽음에 대한 당신의 기억. 여기서 우리의 이해는 완벽하게 일치했죠. 한데 당신은 정말 놀랍게도 이미 ‘자력으로’ 기억을 되찾고 있으니 자동적으로 계약은 파기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남은 기억을 완전히 되찾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리겠죠.

 마녀는 무언가 항의하려는 진아를 제지하며 말을 이었다.

 - 전 계약의 마녀. 무상으로 남은 기억을 돌려줄 수는 없어요. 오히려 멋대로 계약을 파기하려는 당신에게 위약금penalty을 물려야 할 지경이라고요.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죠. 그러니, 새로운 계약으로 구계약을 대체하는 게 제일이에요.

 마녀의 요구는 단 하나. ‘귀찮은’ 정원관리사를 이 도시에서 쫓아내는 것. 진아가 낀 검은 장갑은 바로 그걸 위해 미리 건네받은 것이었다.

 「직접적으로는 방해될 일이 없을 것, 이라 했지. 대신 생각해낸 게, 이 구차한 잔꾀…… 애들이 생각할 법한, 유치한 발상이군.」

 유화는 신랄하게 평하며 인형들을 움직였다.

 「상관, 없어. 저 시진이란 여자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일을 끝내면 돼.」

 은빛 장검을 들고 나루를 제거하기 위해 쇄도하는 6체의 다크 레이븐. 나루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급하게 소리쳤다.

 “거기! 멍청하게 뭐하고 있는 거예요!? 저것들은, 그쪽이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녜요! 여, 여기는 내가 어떻게든 막아낼 테니까, 그쪽은 시진 언니를 데리고 도망…….”

 하지만 진아는 조용히 나루의 앞을 막아서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마. 넌 내가 지켜줄 테니까. 그러니 넌, 선생님의 마지막을 지켜줘.”

 “네? 그게 무슨…….”

 진아는 대답하는 대신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양방향에서 검을 내찌르던 2체의 인형들이 멀찍이 날아가며 얼굴이 박살났다.

 「……뭐?」

 “말도, 안 돼…….”

 이때만큼은 사이좋은 자매라도 되는 마냥 유화와 나루는 동시에 얼빠진 얼굴로 낮은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심화된 광기의 칼날조차 압도하고 부러뜨린 무적의 인형들이 너무나도 간단히 제압당했기 때문이다.
 유화는 정신을 가다잡으려 애쓰며 급히 상황을 분석했다.

 「저 장갑은, 마녀의 제작품artefact이군. 저게, 힘의 근원인 건가? 하지만 저건, ‘밤의 그림자’로 짜인 장갑일 뿐…… 단지 착용 부분에 닿는 충격을, 무효화하는 게 전부인데……?」

 유화가 느긋하게 진상을 파헤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남은 4체의 인형들은 은빛 장검을 교차시켜 사각 없이 상대를 압박했으나, 진아는 가장 앞에 있는 인형을 향해 빠르게 치고 나가 부수는 걸로 가까스로 공격을 회피했다. 인형들의 칼날은 진아의 옷자락을 베고 지나갔지만, 그 피부에는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

 「설마, 저 장갑은 단지 주먹을 보호하고 있을 뿐…… 순수하게 전부, 실력이란 말이냐……?」

 뒤늦게 유화가 상대의 특이성을 눈치 챘지만, 이미 상황은 되돌릴 수 없었다.

 “흡!”

 몸을 돌리자마자 짧은 숨소리와 함께 내질러진 주먹.
 좌측에 있던 인형은 내려친 동작을 수습하며 방어하려고 했지만, 진아의 주먹은 빠르고 정확했다. 인형의 몸통에 구멍이 뚫리는 동시에 우측에 있던 인형이 다시 칼을 내찔렀지만, 진아는 오히려 인형의 팔을 붙잡아 그대로 꺾었다.

 「―――!」

 반대로 꺾인 팔에 들고 있던 검으로 스스로의 몸통을 찔러버린 우측의 인형. 진아는 인형의 팔을 다시 꺾어 아예 그 몸통을 반으로 갈라 행동불능으로 만든 후 마지막 남은 인형을 향해 달려들었다.

 “……!”

 챙. 진아의 일격을 칼의 옆면으로 막아낸 인형. 마지막 남은 다크 레이븐의 움직임은 지금까지의 다른 인형들과는 달랐다. 그 사이에 박살 난 다섯 인형들의 경험치를 통합해 진아의 움직임에 대응을 한 것이다.

 「―――」

 인형의 맹공. 전세는 역전됐다. 인형은, 주먹이 막혀 잠깐 자세가 흐트러진 진아의 틈을 놓치지 않고 공세를 펼쳤다.

 선으로 점으로 그리고 다시 선으로.
 베고 찌르고 다시 베어 들어오는 은빛 궤적이 섬세하게 이어지면서도 강렬하게 진아를 덮쳐온다.

 “…….”

 그러나 그 유수와 같은 검격을, 진아는 손으로 칼날의 옆면을 쳐내는 것으로 간단히 밀어냈다. 회전하는 분쇄기 안에 손을 넣어 상처 하나 없이 그 안의 내용물을 꺼내는 것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묘기였으나, 그 진가는 아마도 인형사 본인마저 눈치 채지 못했으리라.

 “끝이네.”

 심드렁한 말투와 달리 강하게 뻗은 진아의 주먹에, 마지막 남은 인형은 몸통의 절반 이상이 날아간 채 잠시 비틀거리다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유화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안 돼……! 저 여자가 사라지기 전에, 어서 죽여야……!」

 유화는 관을 짊어진 채 나루를 향해 고속으로 돌진했다. 자신이 다루는 인형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신체능력. 찰나의 순간, 유화는 나루와 시진의 앞으로 이동해 관을 높이 들어 찍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그만해!”

 「……!」

 하지만 진아의 발차기에 유화가 맞고 날아가면서 그 시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치이이익. 간신히 땅에 착지한 유화는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다급하게 외쳤다.

 「방해, 하지 마……! 저 아이는…….」

 “알고 있어요. 마녀에게 들었어요. 당신은 미래를 볼 수 있다죠? 그 미래에서, 나루가 선생님을 잃은 충격으로 수백 명의 사람을 죽일 거라면서요.”

 담담한 진아의 말에 나루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언니가, 언니가…… 죽어? 죽는다고……?”

 나루의 품에 안겨 있는 시진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니, 난 죽는 게 아니야. 이미 죽어 있지……. 속임수를 써서, 잠시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뿐이니…… 하지만, 죽은 몸이었기에 볼 수 있는 것도 있었지…… 내가 본 미래 또한 분명…… 저 여자와 같은 것을 말하고 있었어…….”

 유명한 신곡을 비롯한 여러 전승에서 죽은 자가 미래를 본다는 이야기는 종종 전해 내려온다.
 시진은 죽기 직전, 관념체와 비슷한 존재가 되어 마녀가 사는 공간의 틈새에 들어갔다. 그 사이에 얼마 간 파장이 마녀들과 비슷한 시진은, 잠시나마 별의 의식구조체에 접해 미래를 엿볼 수가 있었다. 정확히는 별의 거대한 연산기능을 이용해 자신이 지금 가장 걱정하고 있는 나루의 앞날을 점쳐본 것이다.

 “그때 내가 본 건…… 끔찍한 파멸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난, 이대로 죽을 수 없었지……. 나루를, 나래의 동생을…… 끔찍한 살인마로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시진은 필사적으로 마녀에게 되살려 달라고 요구했다. 설령 완전한 부활은 불가능하더라도 홀로 남게 될 나루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도록 얼마간이라도 이승에 머물 수 있기를 바랐다. 그 소원은 낮은 확률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시진의 목소리가 점점 약해졌다.

 “하지만 난 결국…… 간신히 얻은 이 기회를, 별로 유용하게 쓰지 못한 것 같군……. 그래도, 참으로 염치없지만…… 부탁할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다행이야……. 부탁해도, 될까……?”

 자신을 향한 눈길에, 진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으로 소리 내어 대답하면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안 돼…… 안 돼요……! 언니가, 없으면…… 난 대체 어떡하라고…….”

 반면 나루는 허물어져 가는 시진의 몸을 부여잡은 채 눈물을 흘릴 따름이었다.
 유화는 어떻게든 공격할 기회를 엿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마녀의 말을 믿는다면…… 그리고 죽은 뒤에도 사람들을 염려해, 대량학살을 막으려 한 저 여자의 용기를 상찬한다면…… 날 막지 마라. 저 여자가 사라지기 전에, 저 아이는 빨리 치워야 해…….」

 시진의 죽음이 곧 나루가 폭주하는 기폭제.
 싸우는 동안 유화가 줄곧 시진에게 되도록 손을 대지 않으려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계에 다다른 몸이 자칫 부서지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을 한 것이다.
 하지만 진아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만 묻고 싶어요. 최근 벌어진 살인들…… 전부 당신이 저지른 짓인가요?”

 유화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규탄하고 싶다면, 해도 돼……. 하지만 난 미래의, 더 큰 살인들을 막은 거야……. 한명은, 5년 뒤 세상에 절망해 사제폭탄으로, 십 수 명의 사상자를 낼 운명이었다……. 다른 한명은, 3년 뒤 부주의로 화재를 일으켜, 백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낼 운명이었고……. 또 다른 한명은…….」

 진아가 손을 올려 말을 막았다.

 “그만. 그만 됐어요. 그런 식으로, 나루도 제거할 생각인가요?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로?」

 솔직히 대답하면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유화는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

 「그 미래는, 확정사안이다. 누군가 막지 않는 이상, 반드시 일어나……. 난, 저 아이를 죽이겠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

 말을 마치는 순간, 양자는 다시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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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막장 스토리입니다)







BGM: Blue Reflection - わたしの中の壊れていない部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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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12)]


 “하하. 하…….”

 이런 무력감은 얼마 만에 느껴보는 걸까.
 두 동강이 난 톱날검을 내려다보며 나루는 마른 웃음을 흘렸다. 부러진 톱날검은 얼마 되지 않아 평범한 식칼로 돌아갔고, 이윽고 그 식칼도 모래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정말, 상대가 안 되잖아…….”

 부러진 건 검만이 아니었다. 나루의 전의 역시 압도적인 힘 앞에 뚝 꺾이고 말았다.
 지금까지 나루와 싸운 수십 체의 인형들의 기억을 통합한 여섯의 다크 레이븐. 그 3번째 인형들은 나루의 힘, 속도, 전투방식 등을 전부 수집해 그에 맞춰 철저히 대응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놈들의 검이 성가셔…….’

 인형들이 들고 있는, 은철銀鐵로 제련했다는 장검. 일견 수수하면서도 예리한 그 검들은 강도마저 비할 데 없이 단단해, 콘크리트도 두부처럼 자르는 나루의 톱날검을 손쉽게 막아냈다. 오히려 칼날을 부딪칠 때마다 나루의 톱날검이 상해 이처럼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이다.
 나루는 한쪽 무릎을 꿇고 간신히 몸을 지탱한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분하지만, 나 같은 거보다 당신이 훨씬 괴물인데요? 무슨 근거로 내가 살인마가 될 거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보다 그쪽이 훨씬 위험한 거 아녜요?”

 그러나 유화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기 전에, 인간으로서…… 죽어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을 높게 치켜드는 인형들. 마치 사형수를 참수하는 집행인 같은 모습이다.
 나루는 죽음을 각오했다. 체력은 떨어지고 검은 무뎌지고 사방에는 건재한 검은 드레스의 인형들과 은빛 장검들. 설령 최후의 힘을 짜내 발버둥을 쳐 위기에서 잠깐 벗어난다 해도 곧 같은 꼴을 맞이하게 되리라.

 ‘그래도, 다행히 언니는 건드리지 않을 모양이니…….’

 나루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유화와 그녀의 인형들은 일절 시진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다. 처음부터 일관되게 오로지 나루만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인형들은 싸움의 여파에서 밀려나 다소 거리가 떨어져 있는 시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뭐 내가 위험한 인간이라는 건 사실이니까…… 내가 죽어도, 저런 놈이 사람들을 지켜준다면…… 그 안에서 언니도 분명…….’

 이것이 바로 나루가 죽음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였다. 지금 나루의 인생에서 제1순위는 어디까지나 시진 언니.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설령 팔다리가 끊어지더라도 몸통으로 기어 이빨로라도 물어뜯어 싸우겠지만, 자신만을 위해서라면 아무래도 삶의 동기가 약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상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

 다크 레이븐 중 1체가 나루를 향해 검을 내려치는 순간, 어느새 그 앞을 시진이 막아서고 있었다. 순간이동을 한 것이 아니다. 단지 인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속도로 달려와 인형들의 틈 사이에 끼어들었을 뿐이다.

 「안 돼! 멈춰!」

 “언니――!”

 교차하는 두 사람의 고함.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가까스로 제어하기는 했지만 인형의 칼이 시진의 어깨를 깊숙이 파고 들어간 것이다.

 “…….”

 하지만 시진은 개의치 않고 나루를 안아 올리고는, 방금 전과 같이 엄청난 빠르기로 인형들의 포위망을 빠져나왔다. 이상하게 인형들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는데, 한시가 급한 시진과 나루에게 지금 그 사실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윽.”

 그러나 두 사람의 도피행은 오래 가지 못했다. 얼마 거리를 벌리기도 전에 시진이 힘이 다해 땅바닥에 쓰러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시진은 자신의 몸을 아래에 두어 나루를 꼭 끌어안은 채 보호했다.

 “언니, 언니! 괜찮아요!?”

 나루는 충격에서 벗어나자마자 급히 몸을 일으켜 시진의 상태를 살폈다. 칼이 어깨에 박힌 상태에서 자신을 안고 달리다 넘어진 사람이 무사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특히 출혈이 걱정됐지만…….

 “언, 니……?”

 크게 찢어진 시진의 어깨에서는 소량의 핏자국만이 번져 있을 뿐 전혀 피가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상처가 아문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안에서 흘러나올 것이 없다는 것처럼. 뿐만 아니라 시진의 팔다리 또한 검게 변색돼 조금씩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시진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너무, 무리를 했나……. 시간이 조금, 앞당겨진 모양이군…….”

 “언니……?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시간이, 시간이 다 됐다니…….”

 현실을 인정할 수 없는 나루의 말에 답한 것은 시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선생님은, 선생님은 이미 죽은 몸이야. 그것도, 일주일 전에.”

 석양이 지고 어둑어둑해진 밤거리의 가로등 아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런 살벌한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차림새의 붉은 머리 여고생, 진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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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相州戦神館學園 八命陣 『幽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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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11)]


 키득키득. 44개의 살의가 일제히 쏟아진다.
 종횡縱橫으로 교차하는 연격과 연격 사이에 빈틈은 없다. 순백의 신부人形들은 춤을 추듯 은빛의 거대한 낫 사이로 화려하게 드레스 자락을 펄럭이며 나루의 주위를 돌고 또 돈다.

 “겨우, 이 정도야……?”

 하지만 나루는 바쁘게 검을 놀려 사방에서 쇄도하는 공격을 막아내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의 얼굴에는 살짝 실망감마저 떠올라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더 보여줄 게 없다면…….”

 나루는 인형들의 공세를 무시하듯 검을 높게 쳐들었다.

 “더는 쳐웃지 못하게 해주지!”

 기합소리와도 같은 외침과 함께 땅바닥으로 내리쳐진 상어뼈를 닮은 거대한 칼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오로지 한줄기 섬광과도 같은 우직한 일격이었으나 인형들은 그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

 낫을 든 그대로 절반으로 갈라진 3체의 인형. 거대한 낫의 날을 3겹이나 겹쳐 방어를 했지만 나루의 변형된 검 앞에서는 일절 소용이 없었다.

 “쉴 시간은 없다고……!”

 나루는 틈을 주지 않고 곧장 검을 옆으로 휘둘렀다. 한번 진형이 무너진 인형들은 마땅한 방어를 할 수 없었고, 이번에는 8체나 되는 인형이 동시에 조각이 나 흩어졌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뭘 기억해? 뭘 어쩌겠다고? 설마 날 웃겨서 죽일 생각인 건 아니겠죠?”

 윙. 나루의 광포한 웃음소리와 함께 푸른 안광이 한층 빛을 발하자 상어뼈를 닮은 대검의 주변에 붙어 있는 돌기들이 전기톱처럼 거칠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너희不幸들은 절대 용서 못해…….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잘게 썰어주마……!”

 마치 나루의 의지를 반영하듯 흉포하게 요동치는 톱날검. 나루의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인형들은 태세를 다시 정비할 새도 없이 문자 그대로 속절없이 썰려나갔다.

 날아가는 목. 갈라지는 몸통. 분쇄되는 팔다리.
 나루는 1분도 채 되지 않아 약속을 지켰다. 아름다운 드레스로 치장하고 적을 비웃으며 유린하던 44체의 인형들은, 어느새 입장이 역전돼 쓰레기 더미로 변해 땅바닥을 구르다 먼지처럼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소란이 일어나도 나와 보는 사람 하나 없다니…….”

 나루는 압도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냉정함을 되찾았다. 본래 조용한 주택가이긴 하지만 10분이 넘어가도록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땅이 파이고 벽이 무너지는 굉음에도 누구 한 사람 내다보지 않는 것은 명백히 ‘이상한 일’이었다.

 「이 아이들도 잠들 수 있었다면, 고통스럽지 않게 끝났을 텐데…….」

 이는 유화가 쓸데없는 희생자와 방해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이 일대 전체에 강력한 수면술법을 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나루는 그 사실을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직감적으로 이런 거대한 술법을 펼칠 수 있는 유화가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시, 본체부터 없애야……!”

 인형이 사라진 지금이 절호의 기회. 아까는 타이밍을 놓쳤지만 두 번 실수하는 일은 없다. 나루는 톱날검을 회전시키며 곧장 유화를 향해 돌진했다.

 「애송이가…….」

 50m 이상 되는 거리를 한순간에 좁힌 필살의 일격. 마치 순간이동처럼 보이는 나루의 공격을, 그러나 유화는 살짝 몸을 트는 것만으로 가볍게 피했다.

 “……윽!”

 옆구리에 느껴지는 강렬한 충격. 가까스로 칼날을 눕혀 방어하기는 했지만, 덤프트럭에 치인 것만 같은 충격에 나루는 다시금 멀찌감치 날아가고 말았다.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착지한 나루는, 자신을 날려버린 것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혀를 찼다.

 “쯧. 인형사 본인이 제일 세다니, 반칙이잖아……!”

 방금 나루를 공격한 것은 유화가 끌고 온 관이었다. 유화는 연결된 쇠사슬을 통해 관을 마치 철퇴처럼 사용한 것이다. 나루의 공격을 피한 민첩함에 거대한 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괴력. 인형 같은 인형사는 자신의 어떤 인형보다도 강해 보였다.
 하지만 유화는 조금도 의기양양해 하는 기색 없이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다크 레이븐, 전개.」

 또 다시 관 속에서 기어 나오는 인형들. 3번째로 출현하는 그것들은 지금까지의 인형들과 비슷하면서도 질적으로 다른 구석이 있었다.
 어딘가 까마귀 깃을 연상시키는, 윤기 없이 칙칙하게 늘어진 검은 드레스. 유화를 닮은 단아한 얼굴에는 어떤 안대도 천도 감겨 있지 않았지만 인형 스스로 눈을 감고 있다. 왼손에는 별다른 장식 없이 수수한 은색의 장검 하나만을 들고 있을 뿐이었는데, 대신 그 예리한 빛깔은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인형사 특유의 탐미적인 조형은 잊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전투를 우선시하고 있는 만듦새. ‘살의’와 ‘살상력’에 민감한 나루의 능력狂氣은 3번째 인형들이 지금까지 마주친 어떤 적보다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13체의 올드 다크, 44체의 블랙 세레나데…… 그 ‘기억’을 이어받은, 다크 레이븐……. 은철의 검을 들고 있는 이 아이들에게, 넌 절대 이길 수 없어…….」

 “하, 또 그 소리. 지겹지도 않나? 그런 말은, 이긴 다음에나 하라고요!”

 위잉! 나루는 톱날을 회전시키며 유화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상대가 위험하다는, 그래서 도망쳐야 한다는 직감은 무시. 이건 자만에 빠진 것도 공포에 현실을 외면한 것도 아니다. 단지 언니와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선 이 길밖에 달리 없었던 것이다.
 승부는, 당연하다는 듯이 결판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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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装甲悪鬼村正 Ost ~ BLADE ARTS 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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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10)]


 기릭기릭기릭.
 태엽이 돌아가는 마찰음과 함께 뚝뚝 끊어지는 부자연스러운 동작. 마치 경직된 시체를 억지로 움직이는 것만 같은 기괴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13체의 인형들은 민첩하게 나루를 향해 달려들었다.

 “너희들도 내게 불행을 강요하겠다면…….”

 나루는 손을 올려 칼자루에 입을 맞추었다.

 “다 잘라버리겠어!”

 은색의 식칼이 검붉게 물드는 동시에 붉은 궤적이 어지럽게 허공을 갈랐다.

 「―――」

 덜그럭. 달려들던 인형들 중 선두에 선 셋의 몸이 기우뚱거리더니 곧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어떻게 당했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빠른 신속의 공격. 하지만 과연 감정 없는 인형이라 해야 할까. 남은 10체의 인형들은 일절 동요하는 기색 없이 전방향에서 나루와 시진을 포위해 검을 내찔렀다.

 “언니에게, 손대지 마……!”

 나루는 노성을 지르며 칼을 든 손을 크게 휘둘렀다.
 동작은 분명 한번. 그러나 허공에는 열셋의 궤적이 현란하게 교차한다. 쇄도해오던 인형들은 그 참격의 그물에 갇혀 오체가 분열된 채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

 퍽. 나루는 갈라진 인형의 얼굴을 발로 밟아 완전히 가루로 만들며 외쳤다.

 “인형놀이는 이제 끝인가요? 이런 장난감으론 날 죽일 순 없어요. 생각 같아선 당신도 완전 조각조각내주고 싶지만…… 언니도 있고 하니, 다신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한번만 봐드리죠. 어서 꺼져요!”

 그러나 유화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것이 바로 광기狂氣……. 세상의 법칙에서 벗어난, 규율 밖의 힘……. 과연, 정원世界을 다스리는 우리와는 상성이 좋지 않아…….」

 “뭐라고 중얼거리는 건가요? 난, 당신네들 헛소리엔 관심 없다니까요! 당장 꺼지지 않으면 팔다리 하나둘 잃는 건 각오해야 할 걸요?”

 나루는 칼날을 겨누며 위협을 가했지만, 유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을 움직였다.

 「블랙 세레나데, 전개.」

 관이 덜컹거리며 다시금 그 안에서 인형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비슷하지만 다른 모습. 신부新婦처럼 새하얀 드레스로 치장하고 있는 인형들은, 날카롭게 물결치는 장검 대신 양손에 사신死神의 거대한 낫을 들고 있었다.

 킥킥. 킥킥킥.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웃음.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그것들의 입가는 초승달처럼 가늘게 찢어져 있었다. 순백의 옷차림으로 적을 비웃는 44체의 인형들.

 “완전 재수 없어. 저딴 기분 나쁜 취미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드러내네.”

 나루는 가벼운 어투로 상대를 조롱했지만, 속으로는 긴장하고 있었다. 싸움에서 수는 절대적이다. 아무리 하나하나가 약해도 무리를 이룬다면 그 단결력은 무시할 수가 없다. 더욱이 방금 전 싸움에서 봤듯이 저 인형들의 통제와 연계는 완벽했다. 나루는 고전을 각오했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시진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 몸 하나는 내가 지킬 수 있어. 그러니 난 무시하고 움직여.”

 지금 나루가 수세에 몰리고 있는 건 줄곧 시진의 곁에서 떠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방금 전만 하더라도 유화가 새로운 인형을 불러내는 시간은, 그 본인을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루는 혹시 모를 위협에서 시진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44체의 인형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관에서 기어 나와 포진을 완성할 수 있었다.
 나루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언니가 한때 꽤 날렸었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저것들은 한심한 양아치들과는 격이 다른 상대에요. 마음은 고맙지만 여긴 걱정 말고 제게 맡겨주세요.”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루가 가진 초상적인 힘에 눌려 제대로 위세를 떨치지 못했지만, 유화가 불러낸 인형들은 총알도 피할 수 있는 빠르기에, 동시에 총알도 막아낼 수 있는 강도를 지니고 있었다. 수십의 사람들이 중화기로 무장하지 않는 이상에야 저것들을 제대로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

 시진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즉 시진은 나루에게 자신을 버리고 혼자라도 살아남으라고 말한 것이다. 물론 나루가 그 제안을 수락할 리 없었고, 거절당한 이상 무력한 그녀는 방해가 되지 않게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집행.」

 기릭기릭. 유화의 짧은 한마디에 대낫을 든 인형들이 순백의 옷자락을 휘날리며 나루에게 덤벼들었다.

 “난 너희不幸들을…….”

 킥킥킥. 거슬리는 비웃음을 흘리며 덮쳐오는 인형들의 움직임은, 여전히 비인간적인 불쾌감을 주었지만 처음 13체의 인형들보다 훨씬 유연하고 또 빨랐다.

 “절대 인정하지 않아!”

 이에 맞서는 나루의 붉은 궤적들. 단 두 번의 칼질에 수많은 참격들이 마치 비가 내리듯 떨어졌다.
 챙챙챙챙챙. 강렬한 파열음. 나루와 시진의 주변에 몰려들었던 인형들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맞기라도 한 듯이 일제히 튕겨나갔다.

 “……!”

 킥킥. 킥킥킥.
 하지만 튕겨나간 인형들은 살짝 금이 가기만 했을 뿐, 손목 하나 떨어진 구석 없이 멀쩡했다. 서로가 서로의 낫을 이용해 나루가 쏟아낸 참격을 모두 버텨낸 것이다. 오히려 나루 쪽이 어딘가 상처를 입었는지 팔에서 가는 핏줄기가 흘러나와 손잡이를 살짝 적시고 있었다.

 「네 공격은, 이미 ‘기억’했다. 앞으로도, 기억‘당할’ 테고……. 승산은, 없어.」

 조용한 승리선언.
 그러나 나루는 유화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숙일 생각이 없었다.

 “그래? 그럼 어디 이것도 한 번 기억해 보시지!”

 마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를 마시듯 색이 짙어지는 식칼. 아니 그것은 더 이상 식칼이 아니었다. 색깔이 붉게 변하면 변할수록 그 크기 또한 점점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별체의, 비틀린 사념狂氣만으로…… 세계를 압도해, 독자적인 규칙을 구축하다니……. 역시 있어서는, 안 되는 힘…….」

 이윽고 칼날이 완연한 선홍빛을 띄게 되자 성장을 멈춘 나루의 검은, 마치 거대한 상어뼈를 연상시키는 흉측스러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자, 2회전을 시작해 볼까.”

 나루의 눈이 강렬한 푸른빛으로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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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よるのないくに - 錦上に花を添えるが如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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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9)]


 별의 의식구조체에 접해 관념을 물질화시킬 수 있는 것이 마녀라 불리는 이들의 선천적인 능력.
 무형정원의 관리사들은 후천적인 수단을 통해 그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세계를 하나의 커다란 신체라 가정할 때, 전기자극과도 같은 모종의 힘을 가해 일정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 이것이 바로 일반적으로 ‘마법’이라 불리는 현상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단순히 개념적으로만 보면 마녀와 관리사는 마치 상하관계에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으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가령 인간은 어떤 맹수보다도 약하지만, 인간이 만든 기중기는 그 어느 짐승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간접적이더라도 세계의 반응魔法을 이끌어내는 데 골몰한 관리사들의 힘은, 최소한 물리적인 파괴력에서는 결코 마녀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더욱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마녀들과 달리 관리사들은 ‘무형정원’이라는 하나의 조직을 이루어 협력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세력은 월등히 앞선다고 볼 수 있었다.

 - 힘을 가진 자의 의무는 뭐라고 생각해?

 관을 짊어진 금발의 소녀 유화流花는, 활동을 개시하기 전 언제나 스승Master과의 문답을 떠올리는 버릇이 있었다.
 기억 속의 유화는 이렇게 답했다.

 - 그 힘을, 남용하지 않는…… 것이요.

 기억 속의 스승Master은 웃음을 지었다.

 - 나쁘지 않은 대답이군. 하지만 충분한 대답은 아니야. 분명 사람들이 네가 말한 것만 잘 지킨다고 해도 세상은 훨씬 평화롭고 원활하게 굴러 가겠지. 대부분의 정치체제가 어떻게 하면 ‘권력의 남용을 막을 수 있나’라는 고민을 담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스템, 거시적인 시점에서의 대답이다. 힘을 가진 ‘개인’은 그보다 좀 더 멀리 보아야 해.

 기억 속의 유화는 다른 답변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직 그녀는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스승Master은 잠시 기다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넌 머리가 좋은 만큼 괜히 쓸데없이 복잡하게 생각하다 사고가 정지하는 게 흠이지. 답은 바로 ‘행동’하는 거야. 자신이 가진 힘을 올바른 일에 ‘행사’하는 거지.

 기억 속의 유화는 그 답의 허점을 금세 찾아냈다.

 - 무엇이, 올바른지…… 어떻게 알 수 있죠……? 그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악행을 저지르게 될 뿐인 건……? 그저, 남용에 불과하게…… 되지 않을까요?

 기억 속의 스승Master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 경우도 있지. 천국을 만들려는 시도가 지옥을 낳을 뿐인, 그런 불행한 경우가.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 사람들은 모르고 있을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제대로 알 수 없는 걸까?

 - 예? 그게, 무슨…….

 기억 속의 유화는 머뭇거렸지만, 기억 속의 스승Master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사실 사람들은 알고 있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않고 있을 뿐이야. 현실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그 후 기억 속의 스승Master은 더 이상 그 주제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는 유화의 영원한 숙제로 남고 말았다.

 「마스터는, 끝까지 힘 있는 자의 의무를…… 다하려 했어. 전쟁터에서도, 재난현장에서도……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구했지…….」

 질질. 질질. 쇠사슬에 이어진 은색 관을 끌며 유화는 중얼거렸다.

 「마스터의 뜻을 이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정원관리사로서, 세상의 올바른 흐름을 지키기 위해…….」

 석양을 등에 지고 나루와 대치한 유화는, 단호하게 매듭을 지었다.

 「지금부터, 정의를 집행한다.」






 시진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루는 관을 끄는 금발의 기묘한 소녀가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황하는 기색 없이 입을 열었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줄 알고 있었죠. 내가 이 능력에 눈을 뜬 날. 불행을 ‘참살’할 수 있는 힘을 얻은 날. 그때부터 쭉 생각했어요. ‘세상에 이런 힘이 존재한다면, 나만이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 텐데’ 하고 말이죠.”

 「현명한, 인식이야……. 보통 우발적으로 ‘힘’을 얻은 자들은, 폭주하기 십상이지……. 자기만이, 세상에서 특별하다는 착각에 빠져서…… 하지만 넌 그런 멍청이들과는, 다른 모양이군…….」

 “그거 고맙네요. 좋게 봐줘서. 전혀 달갑진 않지만. 아무튼 난 이 힘을 손에 넣은 덕분에 누가 얼마만한 ‘살상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누가 내게 ‘살의’를 가지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당신은 왜 날 죽이려 하는 거죠? 무슨 능력자들을 통제하는 단체에서 오기라도 했나요?”

 나루는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안광으로 날카롭게 상대를 노려보며 물었다.
 평소부터 줄곧 생각해 왔던 일. 세상에 어떤 초상적인 힘이 이미 법칙으로서 성립하고 있다면, 나만이 그 힘을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사람은 모두 세계라는 공통된 무대 위에 서 있으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수십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음에도 그런 능력자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단지 픽션 속 존재로만 여겨지고 있다. 이는 국가적 또는 초국가적 모종의 단체가 능력자들을 통제하거나 제거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이런 나루의 의문은 눈앞의 상대가 등장함에 따라 사실로 드러났다.

 「비슷해. 엄밀히는, 다르지만……. 하지만, 네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겠지. 내가 널 죽이는 이유는, 단 하나…… 결국 너도, 자기 힘을 다스릴 줄 모르는, 살인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무형정원의 관리사 유화는 쇠사슬을 크게 휘둘러 은색의 관을 나루와 시진을 향해 날려 보냈다.

 “……!”

 쿵. 나루는 시진을 보호하듯 막아서며 식칼을 꺼내들고 잔뜩 경계했지만, 유화가 날린 관은 두 사람을 멀찌감치 비껴서 떨어졌다.

 “빗나간, 건가? 아니…… 이제 시작이야……!”

 나루의 판단은 정확했다. 유화가 날린 관은 공격이 아니라 그저 공격의 신호에 불과했다.

 「올드 다크, 전개.」

 유화의 말에 호응하듯 관이 열리며 그 안에서 사람 같은 형상의 무언가가 하나하나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루는 시진을 지키기 위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좁은 데 어떻게 저게 다 들어 있었던 거지?”

 관에서 바깥으로 나온 것은 모두 열셋의 사람만 한 크기의 인형.
 소녀의 형상을 한 인형들은 하나 같이 검은 드레스 차림새에 한손에는 물결치는 칼날이 아름답고도 흉포한 검Flamberge을 한 자루씩 들고 있었다. 인형들의 얼굴은 유화와 매우 닮아 있었는데, 머리가 은발이고 눈동자가 붉어 실질적으로는 꽤 다른 인상을 주었다.
 양자가 충돌하기 직전, 이번에는 시진이 나루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넌 이 아이가 살인마라서 죽이겠다고 했나!? 그렇다면, 그건 오해야! 분명 이 아이는, 나루는 과거에 4명을 죽인 적이 있어. 하지만 그건 살인강도들이었다! 강도놈들에게 가족을 잃고, 자신마저 죽을 위기에 어쩔 수 없이 대응한 것뿐이야! 말하자면 정당방위…….”

 그러나 유화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난, 과거의 살인을…… 묻는 게 아니야. 미래의 살인을, 규탄하는 거지…….」

 “미래의, 살인……?”

 「그래. 네가 감싸는, 저 아이는 앞으로…… 700명 이상을 학살할 거야. 난, 그 비극을 막기 위해…… 이 도시에 온 거다.」

 “그게, 무슨…….”

 「더 이상, 말은 필요 없다.」

 정원관리사의 차가운 선고. 동시에 13체의 인형이 장검을 치켜들고 나루에게 덤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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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02.28 09:29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아앗, 아우프헤벤님이 좋아하시는 은발 적안의 전투인형들이 지금 여기에 등장!! >_<

    그나저나 유화의 다소 주저하는 듯한 어조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의, 그 누구보다도 세심하고 사려깊은 성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니 역시 사람은 첫인상만으로 판단하면 안된다는 점을 새삼 깨닫고 말았네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운명의 조율자라 생각했던 유화 본인의 행보조차 실질적으로는 세계라는 무대 위에서 춤추는 또 하나의 마리오네트에 불과하여, 이 날 나루와 시진을 습격한 일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시진에게 회복불가의 치명적 피해를 줌으로써 복수의 광기에 물든 나루가 미래의 살인귀로 거듭나게 하는 결정적 기폭제(Trigger)로 작용하고 마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감이 들기도 했답니다.

    덧 - 주위엔 다들 연인들뿐인데다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은 이미 반려가 있는 상황! 왠지 리얼충 폭발해라를 외치는 진아의 모습이 상상되는 것 같아요. ^^;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3.05 12:05 신고 address edit/delete

      헤벤 님께서도 은발적안의 캐릭터를 좋아하시는군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소녀 안드로이드 계열의 캐릭터는 역시 은발적안이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유화도 세심하게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실히 예언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오이디푸스의 얘기처럼 실제로 그것을 피하거나 막으려고 한 행위가 오히려 나쁜 미래를 현실로 만드는 비극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지요;;;

      또 무슨 짓을 해도 미래가 변하지 않는 세계관이 아니라면, 예언자가 미래를 본 것 자체가 본인을 비롯한 미래를 알게 된 관계자 전원에게 영향을 미쳐 변수가 다량 발생해 이번에는 반대로 아예 통제할 수 없는 미래를 맞이하는 경우도 있는 등 참 난점이 많은 것 같아요^^;;

      이번 소설은 그렇게까지 미래예언에 대해 깊숙이 파고드는 정교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재미는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은 마음이네요!


      (실은 리얼충을 향한 솔로의 분노를 폭발시켜 진정한 힘을 각성해 세계를 구원하는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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