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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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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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용왕의 숨결


 하늘을 나는 거대한 산.
 황혼을 머금은 짙은 구름을 헤치고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로제 아르카디아 평원에서 충돌한 마물과 인간들은 순간 웅장한 산맥의 일부가 공중에 떠올랐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용왕의 공중요새…… 이제야 행차하셨군.”

 루치아는 기함 임페리얼 제이드의 함교에서 상황을 주시하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일은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본격적으로 용종들의 힘을 눈앞에 목격한 이상 아무리 강철 같은 정신력을 가진 그녀도 긴장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뭐야, 저 어처구니없는 규모는……! 게다가 주변의 저것들 하나하나가 전부 이 기함과 같은…….”

 승무원들 사이에서도 기가 질린 음색이 바람 빠진 풍선 마냥 맥없이 흘러나왔다.

 산처럼 거대한 공중요새 주변을 마치 새떼처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호위함들. 적어도 수백 척, 어쩌면 천이 넘어갈지도 모르는 그것들은 하나 같이 인류연합군이 자랑하는 13척의 공중전함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게 전설 속, 용들의 힘…….”

 승무원들이 잔뜩 위축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용종들의 기술을 모방해 공중전함의 건조에 성공한 인류군은 단 십 수 척만으로도 마왕군과의 싸움에서 제공권을 지킬 수 있었다. 한데 용종들은 그런 공중전함을 수백 척 이상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공중전함이 작은 까마귀로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한 천공의 요새까지 보유하고 있다. 그 세력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는 개미와 코끼리를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명백했다.
 하지만 루치아는 언제까지 무력감에 떨고만 있지 않았다.

 “용들의 공격이 시작된다! 모두 충격에 대비하라!”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견한 인류군 총사령관이 명령을 내리기 무섭게 용왕의 공중요새와 그 호위함들의 포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지향성 파괴광선, 분열과 융합을 시작하는 열핵폭탄, 그리고 중첩된 차원결계마저 관통하는 특수철갑포탄들. 살아 숨 쉬는, 아니 형체 있는 모든 것들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막강한 섬멸병기들이 무차별적으로 마왕군과 인류군 양쪽을 향해 날아들었다.
 치열하게 격돌하던 적흑의 마왕과 백은의 기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싸움을 멈추고 용들의 군세를 향해 몸을 돌렸다.

 - 인사가 거칠군. 이런 데서 죽지 마라.

 마왕은 대상자 외에는 아무도 들을 수 없도록 집중된 사념을 영웅에게 날렸다.
 하지만 마왕의 씀씀이는 보답을 받지 못했다.

 「넌 죽어도 돼.」

 - 뭐……!?

 마왕은 발끈하며 한마디 하려 했지만, 영웅은 한발 앞서 용왕의 십자포화를 향해 고속으로 질주했다. 마왕 역시 가볍게 혀를 차며 뒤를 이어 영웅의 맞은편 하늘에 나란히 섰다.

 - 그럼 시작해 볼까!

 「…….」

 마왕과 영웅은 용왕의 무자비한 폭격breath으로부터 자기 진영의 병사들을 지켜내기 위해 각자 마력과 성심력을 있는 힘껏 전개했다.






 ‘이것이 휴전협정을 맺기 전, 인류와 마물 사이에 마지막으로 있었던 싸움의 결말…….’

 루치아는 지난 기억을 마치 서류라도 검토하듯이 차분하게 떠올렸다. 다행히 마왕과 영웅이 용왕의 공격을 막아주는 동안 양진영의 군사들은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지만, 드넓은 대평원은 말 그대로 초토화되고 말았다. 이처럼 전설 속에서 불쑥 현실에 개입한 용종들의 막강한 무력武力은 어느 쪽에도 강렬한 공포심을 심어주었고, 덕분에 양측이 싸움을 멈추기로 합의하는 데는 그리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예상대로다. 계획대로 잘 진행되었어. 하지만…….’

 루치아 또한 그 공포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우려라고 해야 할까. 용종들의 기술을 연구해 공중전함의 개발에 성공할 만큼 인류 총대표는 그들의 진정한 힘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직접 그것을 눈앞에서 실감하는 것은 머리로만 알고 있던 것과는 또 다른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인류멸망…… 그 농담 같은 말이 실현되지 않도록 한층 주의를 기울여야겠군.’

 루치아가 이처럼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눈앞에 ‘용궁의 사자使者’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묻겠습니다. 어째서 당신들은 우리의 땅을 함부로 침범한 것입니까? 분명 우리와 당신들 사이에 맺은 조약은 792년 245일의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극소수의 지성체밖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총대표 당신은 우리와 맺은 영토조약의 존재를 엄연히 인식하고 있는 개체 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조약을 어기고 군대를 이끌어 우리의 땅을 어지럽혔습니다. 용왕께서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하십니다. 변명할 말이 있습니까?」

 맑고 깨끗하지만 억양이 단조로워 무기질적으로 들리는 음색을 발하는 용왕의 사절.
 용종의 일원인 이 사절은 놀랍게도 인간 여성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외견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아름다운. 물론 어디까지나 인간과 비슷할 뿐 당연히 아주 같지는 않다. 특히 금속성의 뿔과 날개, 그리고 꼬리는 그녀가 사람과는 다른 존재임을 강렬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물들과는 또 달라. 굳이 말하자면 인공적인 조형물에 가까운 인상이군.’

 사절에게선 그 목소리만큼이나 전반적으로 생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전적인 여신상이 마법으로 그저 움직이고 있을 뿐인 것만 같다고 하면 올바른 비유가 될까. 사절의 탁한 잿빛 눈동자와 윤기 없는 머리카락도 그런 분위기에 일조를 하고 있었다.
 관찰은 여기까지. 루치아는 사절이 대답을 요구하며 재차 다그치기 전에 자연스럽게 준비된 답변을 입 밖으로 꺼냈다.

 “우선 조약을 어기고 함부로 땅을 침범한 것에 대해선 사죄하지. 전적으로 이쪽의 잘못이니까. 하지만 우리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걸 용왕께서도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건?」

 “우리 인류는 그간 마물들과의 전쟁으로 상당히 궁지에 몰려 있었다. 더 이상의 패배도 퇴각도 용납되지 않을 만큼. 그런 의미에서 로제 아르카디아 평원에서의 전투는 전략적으로 반드시 필요했다. 그곳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승률은 매우 희박했어. 우리의 생존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용왕께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한 것은 정말 죄송스럽지만, 귀하도 알고 있다시피 우리 쪽에서 그대들에게 먼저 연락을 취할 수단은 없지.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내 집무실까지 직접 찾아와 해명할 기회를 준 것은 고맙군.”

 루치아의 말에는, 말하지 않은 진실은 있어도 거짓은 없었다. 애초에 늦든 이르든 용왕이 사자를 보내 자신들의 뜻을 확인할 것임은 예상하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위가 아니라 진의. 용왕에게 적대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전달할 수만 있다면 성공인 것이다.

 「…….」

 하지만 루치아의 곁을 지키고 있는 백은의 기사는 그리 심정이 평온하지 못했다. 용궁의 사자는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 루치아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심야에 불쑥 집무실에 침입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만약 루치아가 말리지 않았다면 영웅의 성검은 이미 사자의 심장을 꿰뚫은 지 오래이리라.
 하얀 영웅이 흉흉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는 그때, 일순 사절의 눈이 다채로운 빛깔로 짧게 반짝였다. 사절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담담히 입을 열었다.

 「…용왕께선 일단 당신의 변명에 납득하셨다고 합니다. 대신 후일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사죄를 표명할 것과 영토조약의 재강화를 요청하셨습니다.」

 “관대한 조치에 감사드린다고 전해줘.”

 루치아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전하면서도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백은의 기사와 성검 센트럴 도그마가 있는 이상 용종들을 상대로도 쉽게 밀리지는 않겠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영웅과 그 성검 이외에 용들에게 대항할 방도는 현재 인류에게 없었다. 인류군의 주축인 창기병과 13척의 공중전함으로는 용왕의 대함대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할 것이다.

 싸우면 필멸.
 설령 영웅의 성검이 용왕의 목까지 칠 수 있다 해도, 그때쯤이면 인류는 그녀 외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 승리에 의미는 없다. 싸울 의사가 없다는 용왕의 전언에 루치아는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절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또한 용왕께선 말씀하셨습니다. 약자가 협상에 임할 때는 좀 더 솔직하게 속을 밝히고 순순히 고개를 숙이는 편이 좋다고. 그리고 두 번 다시 우리를 끌어들여 이형의 실험동물들을 견제하겠다는 얄팍한 수작은 부리지 않는 편이 좋다고. 다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질 경우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니 짧은 생각으로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금언, 명심하도록 하지.”

 루치아는 신랄한 말에도 불쾌한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인류의 여왕Lucia을 숭배하는 백은의 기사는 그 모욕을 가만히 참고 넘길 수가 없었다.

 「네놈들이 스스로의 힘에 취해 어떤 오만한 행태를 보이건, 그건 너희의 자유다. 하지만 나의…… 우리의 대표 앞에서는 예의를 갖춰라. 너희들은 과거 선대 마왕과의 싸움에서 크게 패배한 적이 있지. 그 마왕의 심장을 꿰뚫은 것이 누구의 검인지 기억해라.」

 루치아의 의지를 힘으로 대변하는 하얀 영웅은 평소 말수가 적었지만 결코 언변이 어눌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위협당할 때면 언제나 그녀는 말과 행동을 아끼지 않았다.

 「인과초월괴리체, 개체명 이클립스를 격퇴한 창세기의 유산聖劍…….」

 센트럴 도그마의 위협을 눈앞에 둔 용궁의 사자는 물끄러미 칼끝을 응시한 채 무언가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한번 시험해 보겠습니다.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 접속.」

 다시금 용종의 눈동자가 오색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는 순간 그녀의 뿔과 날개, 그리고 꼬리가 둔탁한 회색에서 에메랄드빛으로 선명하게 물들었다.

 「FDF 시동.」

 주문과도 같은 한마디가 입술에서 흘러나오자 용종의 주변에 수개의 칼날과 포대로 이루어진 개인화기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형성돼 추가되었다.

 「결국 실력 행사하겠다는 말이군!」

 하얀 영웅이 크게 소리치는 동시에 두 사람은 서 있던 자리에서 마술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곧이어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귀가 찢어지게 진동하는 총포음.
 고속으로 움직이는 영웅과 용종의 전투는 일반인의 눈으로는 쫓을 수 없어 그저 허공에서 불꽃이 튀고 엄청난 풍압이 휘몰아치는 것으로 무언가 주변에 있다는 것을 간신히 인식할 수 있을 뿐이었다.

 “…….”

 초단위로 폐허가 되어 가는 집무실에서도 루치아는 가만히 자리에 앉은 채 태연했다. 이는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질린 것도, 반대로 단순히 담이 크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단지 그녀는 자신의 검을 믿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래도, 우리가 약자인가?」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용종은 엉망진창이 된 채 땅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백은의 기사는 그 용종의 목에 칼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압도적인 승리. 뿔이 부러지고 날개가 잘리고 꼬리가 끊어진 용궁의 사자와 달리 하얀 영웅은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채 호흡마저 평안했다.

 「과연, 세상에서 도망친…… 배신자들의 직계……. 시공격절관통쇄기의 사용법은 제대로 숙지하고 있군요…….」

 그러나 사절은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져 있으면서도 표정 하나 일그러뜨리지 않았다. 고통을 참고 있다기보다는 아예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알아듣지 못할 너희들만의 흰소린 집어치워. 그보다 루치아에게…… 대표에게 네놈의 무례를 사죄해라. 그렇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하지만 사절은 영웅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대표를 끝까지 지킬 수 있겠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백은의 기사가 쥔 칼끝에 힘이 더 들어갔다.

 「무슨 헛소릴 하는 거냐. 여기 널브러져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얼마나 오만하면 패배를 받아들지 못해 심각한 인지부조화를…….」

 「전쟁은 저와 당신만이 하는 게 아닙니다.」

 사절의 짧은 한 마디에 영웅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손쉽게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대일의 싸움. 용왕의 공중요새에는 이런 용종들이 수천수만은 바글거리고 있을 터. 그에 일전 평원에서 봤던 대함대나 그밖에 용종들이 감추고 있을 다른 비밀병기들까지 생각하면 그 격전 속에서도 끝까지 루치아를 지킬 수 있을지, 영웅은 솔직히 조금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쯤하지. 용왕께서도 그 뜻을 충분히 이루었다고 생각하는데.”

 자신의 믿음대로 폐허가 된 집무실에서 옷자락 하나 찢어지지 않고 무사한 루치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백은의 기사가 마지못해 검을 치우자 용궁의 사자는 너덜너덜해진 몸을 간신히 일으키며 말했다.

 「당신들이 용왕의 호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확인했을 뿐이니 너무 불쾌하게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아닌 당신들의 평온을 위해서.」

 “걱정 마. 충고는 잘 받아들일 테니. 한데 부축은 필요 없나?”

 「괜찮습니다. 소동이 커지지 않도록 휘하 병사들의 관리나 부탁드립니다.」

 용궁의 사자는 끝까지 거슬리는 말을 남기며 찢어진 날개로도 하늘로 솟아올라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생각보다 일이 커지긴 했지만, 그래도 기대했던 것보다는 잘 풀렸군.”

 루치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켜 갑주로 몸을 감싼 영웅의 곁에 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지켜줘서 고마워. 나의 기사님.”

 오늘 용종의 방문을 예상한 루치아가 일부러 호위병을 멀리 배치했기 때문에 소란에 눈치 챈 사람들이 달려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있을 것이다. 루치아는 영웅의 투구를 살며시 벗겨, 그녀가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오늘 밤 모든 불쾌한 일과 피로가 말끔히 씻겨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북부 아이어스 공화국의 폐허.
 마왕군과의 전쟁에서 멸망당한 이 비운의 땅은 현재 마물들의 서식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곳은 마물들이 강제로 점령하고 있는 땅이 아니었다. 휴전협정의 조건 중 하나로 일시적으로나마 엄연히 마왕군 측에 정식으로 양도된 지역이 된 것이다.

 물론 그 협정조건에 대한 인류진영의 반발은 극심했고, 특히 공화국 생존자들의 반대는 루치아에 대한 테러로 이어질 만큼 격렬했다.
 하지만 당장 싸움을 멈추는 게 중요하다는 점, 꼭 조약이 아니더라도 이미 공화국은 멸망해 그 옛 땅은 마물들에게 점령된 상태라는 점, 공화국이 있던 그 북부의 땅은 춥고 빈한해 인류에게 이용가치가 덜하다는 점 등 때문에 결국 협정은 체결되고 말았다.

 반면 마물들 입장에서는 애당초 이번 전쟁 자체가 자신들의 서식지를 빼앗긴 데에서 유발된 것도 크기 때문에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지역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의의가 있어 휴전협정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인간들이 그렇듯 마물들 역시 이 휴전에 모두가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을 한입에 집어삼킬 만큼 큰 몸집을 한 흑사자 한 마리가 내 발 아래 깔린 채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 왕! 이건 아니지, 이럴 순 없지!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당해 왔는데 여기서 싸움을 멈추면 안 되지! 그러고도 네가 우리들의 왕이야? 응!?

 마왕의 모습으로 이 거대한 마수를 제압한 나는 그 위에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

 - 시끄러워. 졌으면 닥치고 내 뜻을 따라. 애초에 그런 약속으로 승부를 벌인 거잖아?

 하지만 검은 마수는 막무가내였다.

 - 아, 난 왕이라면 내 뜻을 알아줄지 알았지! 왕이라면 두목이잖아. 두목이라면 부하들이 떠받들어주는 대신 보살펴주고 책임져주고 억울함을 풀어주고, 뭐 그런 거 아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말투 자체는 투박했지만 의외로 이 흑사자는 ‘윗사람’의 본질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 그래서, 뭐가 그렇게 억울한데. 인간들이 너한테 뭐 했냐?

 - 아니. 감히 어떤 인간 따위가 날 건드릴 수 있다는 거야?

 쓰러진 채로도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젓는 흑사자.
 아, 머리가 아프다. 대체 그 여자는, 선대 마왕은 어떻게 이런 놈들을 다스릴 수 있었을까. 단순히 쥐어 팬다고 말을 듣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난 300년의 인내심을 끌어 모아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래, 그렇겠지. 벼락을 내리는 뿔을 가진 환수를 감히 그 누가 함부로 건들겠냐. 그러니 이상하다는 거다. 특별한 원한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인간들과 싸우고 싶어 하는 거냐. 단지 유혈을 원해서 그러는 거라면, 난 허락할 수 없다.

 하지만 흑사자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 원한이라면 있어. 인간 놈들이 내 먼지핥기들을 있는 대로 다 잡아먹었거든.

 여기서 이 흑사자가 말하는 먼지핥기란 거대한 마수들의 털에 엉킨 노폐물 등을 처리하며 마력과 영양분을 섭취하는 자그마한 새 종족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새들은 마수들과 공생관계에 있는 존재였는데, 인간들에게는 일부 지역에서 별미로서 소소한 인기가 있었다.

 - 아, 그야 안 된 일이지만…… 목욕이라면 인간형태로 변해서 하면…….

 - 그런 게 아니라고, 왕!

 다시 한 번 있는 힘껏 울부짖는 흑사자. 나는 내심 귀가 아프다고 불평하면서도 이 마수의 말을 마저 경청했다.

 - 먼지핥기들은 확실히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지만…… 그래도 항상 내 털을 깨끗이 관리해준 고마운 녀석들이었어! 근데 녀석들이 어린애들 몇만 남고 싹 몰살당하고 말았다고! 그걸 어떻게 참아? 난 녀석들의 두목으로서 원한을 풀어주어야만 해! 왕은 우리들 전체의 두목으로서 그걸 도와줘야 하고! 안 그래!?

 두터운 의리를 강조하는 흑사자. 마물들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에게는 믿어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 놈들도 단순해서 그렇지 따질 건 따지고 산다.

 ‘싸우고 싶어 하는 이유는 이제 이해가 되는군. 하지만 참 얄궂네. 먼지핥기들이 몰살당한 이유는 다름 아닌…….’

 마왕군이 일으킨 전쟁 탓.
 본래 먼지핥기는 별미이긴 해도 풍미가 독특해 호불호가 심하게 갈려 남획될 정도로 인기가 좋은 고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물자공급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많은 지역에서는 당연히 식량 또한 부족하게 되었고, 먹을 수만 있다면 살기 위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먹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얘기를 그대로 할 수는 없다. 어차피 납득도 하지 않을 테고. 난 전가의 보도 마냥 준비된 변명을 입에 담기로 했다.

 - 싸우지 말라는 게 아니야. 조금만 기다리라는 거지. 지금은 상황이 안 좋으니까. 너도 평원의 전투에 참여했으니 알겠지만, 용왕의 함대를 봤지?

 - 으, 엄청 났어. 그때 왕이 아니었다면 우린 다 죽었을지도 몰라. 정말 고마워.

 동물적인 감각으로 용종들의 위세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게 솔직하게 감사를 표하는 흑사자. 이런 점 때문에 인간들에 치우친 생활을 하면서도 난 이 놈들을 미워할 수 없었다.
 난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주저 없이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 아무리 나라도 용왕과 인간들의 영웅을 동시에 둘 다 상대하는 건 힘들어. 용들이 조용해지면 다시 인간들을 혼내줄 테니까 그때까지 잠시만 참아.

 - 아, 그 하얀 갑주를 뒤집어 쓴 놈도 무진장 강하지. 음, 그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네. 역시 왕! 다 우릴 위해서 행동하고 있었구나! 알았어. 그때까지 겨울잠이라도 자고 있지 뭐. 싸울 때 꼭 불러줘!

 흑사자는 납득을 했는지 몸을 일으켜 어슬렁어슬렁 자기 보금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 후우, 오랜만에 몸 풀었다 생각하자. 그럼 더 귀찮아지기 전에 어서…….

 기껏 사람이 기분을 전환하며 도서관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끈적거리는 목소리가 날 붙잡았다.

 “후후. 그런 거짓말도 아무렇지 않게 하시고. 이젠 꽤나 옥좌가 몸에 익숙해 지셨나 봐요? 하는 일은 마왕이라기보다는 인간들의 권력자에 가깝긴 하지만.”

 흰 드레스와 양산으로 몸을 치장한 순백의 서큐버스 루시 루시드 드림. 공간을 넘나드는 게 특기인 그녀는 예고도 없이 어디서나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난 목에 매달리는 루시를 밀어내며 말했다.

 - 쯧. 징그럽게 달라붙지 마. 이래서 빨리 가려고 했는데. 왜 루치아 측에서 연락이라도 왔나?

 루시가 공간의 틈새에 숨어 엿보고 있다는 건 아까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말과 다르게 루시를 진짜로 무시하고 떠날 수 없었던 것은, 그녀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먹잇감도 아닌 상대에게 찾아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래봬도 마왕군의 참모이자 마왕의 전속 비서관이기도 했다.

 “웅, 재미없게. 맞아요. 방금 용왕과 이야기가 잘 끝났다고 연락이 왔네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볼을 부풀리는 루시. 물론 이는 자신이 귀엽게 보인다는 것을 알고 하는 계산된 행동이었다. 나는 몽마에게서 용들의 땅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 이걸로 당분간 파멸의 위기는 피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기폭제는 도처에 깔려 있어. 과연 인간과 마물, 어느 쪽에서 먼저 폭발하게 될지…….

 뭉클. 내 팔에 달라붙는 부드러운 감촉에 항의하기도 전에 서큐버스는 자신만만하게 미래의 일을 입에 담았다.

 “인간 쪽에서 먼저 사고를 치게 될 거예요. 내기해도 좋아요. 언제나 평화를 먼저 무너뜨리는 건 그들이었으니. 만약 제 말이 틀리다면 마왕님께 제 순결을 바칠게요.”

 평화가 깨질 수 있다는 말에 잠시 경직된 나는 그녀의 말에 조금 늦게 반응했다.

 - …아니, 그런 거 줘도 필요 없어. 애당초 순결 같은 거 있지도 않잖아. 근데 어떻게 내기가 성립이 돼?

 당연한 지적에 루시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네, 말씀처럼 없는 걸 드릴 순 없으니 내기는 성립될 수 없죠. 그만큼 제 말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랍니다.”

 웃음기를 머금은 그녀의 얼굴은, 그러나 눈가는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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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9.01.09 19:30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으으... 마족들도 나름 정이 많고 따스한 성정을 지니고 있군요.

    여기에 정당한 투쟁의 이유들까지 밀접하게 얽혀있으니, 주인공인 마왕 입장에서도 쉽사리 내치고 도서관 생활로 돌아가기 힘들만도 하겠어요.

    게다가 어떠한 관점에서 본다면 인류보다 순수한 측면도 있고 말이예요. >_<)

    • Favicon of https://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9.01.10 07:01 신고 address edit/delete

      현실에서도 보면 일정 이상 되는 집단과 집단 간의 충돌에는 서로 나름의 정당한 이유나 물러설 수 없는 사정 등이 얽혀 있어 그 갈등을 풀기가 참 힘든 것 같아요ㅠ_ㅠ

      작중의 마물들도 말씀처럼 순수한 일면이 있는 반면 아무렇지 않게 인간들의 마을을 짓밟고 사람을 찢어발기며 먹어치우는 잔인한 일면 또한 있기 때문에 그런 비극을 당한 사람들 입장에선 화평이란 그야말로 인류에 대한 배신으로밖에 들리지 않겠지요;;;

      한국의 경우도 오랜 세월 주변국들의 힘 관계에 시달려 왔고 최근에도 이웃나라와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데, 부디 최대한 양자가 피해를 덜 입고 앙금을 덜 남기는 쪽으로 현명하게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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