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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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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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2.16
    [혼혈마왕의 전후처리] 06. 성녀 안젤라의 우울 (上)
  2. 2019.01.30
    [혼혈마왕의 전후처리] 05. 도서관의 어떤 손님들 (後) (2)
  3. 2019.01.19
    [혼혈마왕의 전후처리] 05. 도서관의 어떤 손님들 (前) (2)
  4. 2019.01.09
    [혼혈마왕의 전후처리] 04. 용왕의 숨결 (2)
  5. 2018.10.26
    [혼혈마왕의 전후처리] 03. 선택의 순간 (後) (2)
  6. 2018.10.21
    [혼혈마왕의 전후처리] 03. 선택의 순간 (前) (2)
  7. 2018.10.11
    [혼혈마왕의 전후처리] 02. 미로의 입구
  8. 2018.09.08
    [혼혈마왕의 전후처리] 01. 마왕이 된 이유 (2)
  9. 2018.08.23
    [혼혈마왕의 전후처리] 00. 얼어붙은 시간 (4)
  10. 2018.03.13
    [단편] 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完) (2)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








06. 성녀 안젤라의 우울 (上)


 잔뜩 찌푸린 잿빛 하늘.
 영하로 떨어진 날씨와 언제 다시 눈이 내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난민촌의 분위기는 진흙처럼 칙칙하고 어두웠다. 제대로 된 벽도 지붕도 없이 낡아빠진 천막과 해질 대로 해진 모포, 그리고 넝마 같은 옷가지로는 도저히 앞으로 닥칠 겨울의 맹추위를 견딜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발, 부디…… 아이만이라도……!”

 배급소 천막에선 마침 직전에 딱 줄이 끊긴 어머니가 어린 딸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직원들에게 사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원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전쟁의 여파로 구호물자가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인지라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식량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보다 못한 자원봉사자 중 한명이 자신의 점심을 대신 내어주는 것으로 소녀는 간신히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하다못해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라도 있다면…….”

 추위와 굶주림에 몸을 떠는 피난민들은 원망스럽게 헤미스피어 시市의 성문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그나마 이 지역이 전쟁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받지 않아 상황이 좀 낫다는 얘기를 듣고 어떻게든 겨울을 나기 위해 힘겹게 먼 곳에서 찾아온 것이다. 제 기능을 하고 있는 도시에서라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구걸을 하거나, 최악의 경우 쓰레기더미를 뒤져서라도 연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길거리에서 노숙을 한다고 해도 광야에서 맨몸으로 눈비를 맞는 것보다 몇 배는 낫다.

 - 시민증이나 기타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 없이는 출입할 수 없습니다. 강행돌파 시 발포허가도 떨어져 있으니 아무쪼록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피난민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구형 전투골렘을 앞세운 경비병들의 서슬 퍼런 총구였다. 그들은 시장의 명에 의해 철저하게 난민들이 도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었다.

 시장이 피난민들의 수용을 거부하는 표면상의 이유는 헤미스피어 도서관과 그에 부속된 시 자체가 중요문화재에 속하기 때문에 관리차원에서 함부로 외부인을 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유는 도시의 질서와 치안을 이 이상 어지럽힐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시장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물자부족으로 민심이 흉흉한 판에 자진해서 골칫거리를 늘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몰래 침입할 수도 없고…….”

 물론 말과 달리 잠입 자체는 가능하다. 아무리 경비가 삼엄하다 해도 시로 통하는 모든 길을 24시간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피난민들은 함부로 시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으으, 으아아아아……….”

 힘없이, 그럼에도 소름끼치게 귓가를 때리는 누군가의 단말마. 지금 이 순간 난민촌의 천막 어딘가에서 생명의 불길이 사그라지는 소리였다. 사실 이 난민촌의 진정한 문제는 식량뿐만 아니라 의약품 역시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병자. 노약자. 부상자. 상이군인.
 피난 중에 부상을 입은 사람, 비위생적인 피난생활로 병을 얻은 사람, 전쟁에서 큰 상처를 입고 불구가 되어 퇴역했지만 돌아갈 고향이 없어 피난행렬에 참가한 사람 등등…….

 난민촌에는 당장 안정을 취하고 치료 받아야 할 환자들이 수도 없이 존재했으나, 그들은 하나 같이 제대로 된 조치를 받기는커녕 하루의 끼니를 채우는 것조차 여의치 않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미 많은 이들이 죽었고, 죽어가고 있으며, 죽어나갈 것이다.
 하지만 잿빛 구름을 뚫고 새어나오는 한줄기 빛 마냥 그들에게도 아직 희망은 남아 있었다.

 “교단의 태양과 나무 문양…… 서, 성녀님이다! 성녀님께서 우리에게도 찾아 오셨어!”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 마치 신화 속 바다가 열리는 기적 마냥 난민촌에 모여 있는 군중들이 절로 양쪽으로 흩어지며 널찍이 사람이 지나갈 길을 만들었다.

 “…….”

 실처럼 가늘고 긴 연갈색의 머리카락, 앳돼 보이지만 신념에 가득 찬 호박색 눈동자가 또렷이 빛나고 있는 단아한 얼굴, 금실로 수놓은 경전의 글귀가 찬란히 반짝이는 녹색을 기조로 한 신관의 복장……. 그녀가 바로 라 엘 벤투스 교단이 자랑하는 축복과 치유의 성녀 안젤라였다.

 “오오, 성녀님……!”

 기적을 바라며 안젤라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 하지만 그 몇몇 사람들의 손길은 차가운 칼집 앞에 막히고 말았다.

 “거기까지.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마시길 바랍니다.”

 성녀를 지키듯 사람들을 막아 선 것은, 칠흑 같이 어두운 검정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훤칠한 키의 경호원이었다. 검은 군복과 붉은 베레모를 쓴 그녀는 라온 공화국 외인부대 출신의 베테랑으로, 지금은 성녀를 수호하는 검술의 달인Swordmaster으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시온. 저는 괜찮으니 물러나세요.”

 성녀 안젤라의 상냥하지만 엄격한 목소리에 시온이라 불린 경호원은 말없이 뒤로 물러섰다. 안젤라는 몰려왔던 사람들 중 앉은뱅이 노파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죽은 고목처럼 말라붙은 그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그대에게 신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하기를.”

 축복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한 빛이 성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며 노파의 몸을 뒤덮었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안젤라가 왜 성녀로 불리는지 단번에 체감할 수 있었다.

 “아, 아프지 않네……? 응? 다, 다리가 움직여……!”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상처가 곪아 다리를 잘라내기 직전까지 갔던 노파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능숙하게 걷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노파의 얼굴과 손에 보이던 동상을 비롯한 여러 상처들도 순식간에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기, 기적이다! 기적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처음 안젤라를 맞이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큰 목소리로 환호성을 지르며, 교단에서 모시는 신과 그에 따르는 성녀를 소리 높여 칭송했다. 그럼에도 함부로 성녀에게 다가와 얼싸안지 못했던 것은 여전히 시온이 칼자루에 손을 댄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은연중 주변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어서 목숨이 경각에 달린 분들께 우선 저를 안내해 주세요. 물론 그렇지 않은 분도 나중에 모두 말끔히 낫게 해드리겠습니다. 신의 이름을 걸고.”

 단호한 결의를 담은 성녀의 음색. 결코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 중 그 선언과도 같은 구원의 말을 놓친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다시금 소리 높여 신과 성녀를 찬양하며 구호소가 있는 천막으로 안젤라를 안내하는 사람들. 그날, 난민촌의 수백이 넘는 병자와 부상자들은 모두 자리에서 무사히 일어날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안젤라 님.”

 시온은 급사를 대신해 성녀를 고급객실로 안내하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객실로 들어선 안젤라는 살며시 문을 닫으며 자그마한 입술을 열었다.

 “시온. 당신도 고생이 많았어요. 그나저나 어때요, 확인은 끝났나요?”

 “예, 철저하게 조사를 마쳤습니다. 이 방에는 어떤 마술적 기계적 도청장치도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방음도 확실하고 숨어 있는 사람 또한 없으니 안심하셔도 괜찮습니다.”

 시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안젤라는 훌렁훌렁 신관복을 벗어던지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 드디어 끝났다! 하여간 빌어먹을 교단 할매들! 성녀가 무슨 극한직업인 줄 알아. 하루 천명이 넘는 사람을 치료해 보긴 또 처음이네. 하! 신기록이야 신기록! 젠장!”

 순식간에 속옷차림이 된 안젤라는 객실의 소파에 뛰어들어 쿠션에 얼굴을 묻고는 버둥버둥 발버둥을 쳤다. 평소 성녀의 정숙한 모습밖에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기절할지도 모를 만큼 돌변한 행태. 그러나 시온은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안젤라가 벗어던진 옷가지를 주우며 입을 열었다.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제가 언뜻 보기에도 난민촌의 환자들 중 오늘을 넘기지 못할 만큼 심각한 사람만 백 명이 넘더군요. 일주일을 넘기지 못할 사람은 그 몇 배는 되었고요. 한데 안젤라 님께서 그들을 전부 완치시키셨으니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을 구하신 겁니다. 역사상 그 누구도 안젤라 님만큼 사람을 구하지는…….”

 “아, 입에 발린 소린 집어치워. 그게 뭐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한 건가? 다 교단을 위해서, 아니 교단의 이익을 위해서…… 아니아니! 교단 할매들의 시커먼 뱃속을 위해서 한 거지! 봤어? 오늘 쌓인 기부품들. 아니, 당장 제대로 잘 곳도, 먹을 것도 없는 사람들이 무슨 돈과 보석들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대!?”

 안젤라는 누운 채로 속옷마저 벗어 던지고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시온은 알몸이 된 안젤라를 안아들어 욕실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급하게 고향을 떠나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라도 귀중품을 챙길 여유 정도는 있지요. 오랜 세월 정처 없이 떠돈 부랑자나 노숙자라면 모를까, 피난민들의 대부분은 요 1, 2년 사이 생긴 전쟁 피해자들입니다. 각자 소중한 것 하나둘 정도는 몸에 지니고 있어도 이상할 것 없어요.”

 “그러니까 답답하다는 거야! 그렇게 소중한 거면 계속 가지고 있을 것이지, 왜 있지도 않은 신에게 감사해하며 그 소중한 걸 갖다 바치냐고. 내일 먹을 건커녕 다음 끼니도 걱정해야 되는 사람들이 말이지.”

 “있지도 않은 신…….”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너도 알잖아. 사람을 치유하는 성심력은 신의 기적 따위가 아니라는 걸. 그건 순전히 내 힘에 불과해. 그야 나도 교단이랑 손잡고 벌어먹는 주제에 큰소리칠 자격은 없지만, 신이라 불리던 초월자들은 단지 우리보다 앞서 있던 종족일 뿐이야. 그들이 지금 세계를 버리고 고차원으로 떠났을 뿐이라는 게 증명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신을 믿고 있냐고.”

 “…….”

 사람은 어려울 때일수록 의지할 대상이 필요하다는 말을, 시온은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안젤라 역시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시온은 팔을 걷고 옷이 물에 젖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안젤라를 씻기기 시작했다. 안젤라 또한 자연스럽게 그 손길을 받아들였는데, 그녀가 매우 고생을 한 날은 시온이 온갖 시중을 들어주는 것이 두 사람의 암묵적인 관례였다.

 “시온도 벗지 그래? 이왕이면 같이 씻으면 좋잖아.”

 도중에 안젤라가 한 마디 하긴 했지만, 시온은 잠시 주저한 뒤 살짝 얼굴을 붉히며 거절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나중에 씻겠습니다.”

 “흐응. 난 봐도 아무렇지 않은데. 뭐 시온이 신경 쓰인다면, 어쩔 수 없지.”

 안젤라가 관심 없는 척 고개를 돌리자 시온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을 움직였다.
 잠시 후. 샤워를 마치고 타월로 물기를 닦은 안젤라에게 시온이 가운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안젤라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거 말고. 내 외출복 챙겨 왔지? 그거 줘.”

 시온의 얼굴에 오늘 처음으로 당혹감이 떠올랐다.

 “설마, 또 밤거리에 놀러 나가실 생각인가요? 부디 오늘은 참으세요! 이렇게 고생하신 데다 모처럼 5성 호텔에 묵게 되었는데…….”

 “시끄러워! 그러니까 스트레스 풀러 나가야지! 어차피 내일은 시장이 데려온 병자들 치료하느라 시간 없을 거 아냐. 뭐 시장이 괜히 이런 최고급 호텔을 잡아줬겠어? 다 교단의 선전과 시장직 재선이라는 이익을 위해 기적의 행사라는 퍼포먼스를 부리는 대가로 대우해 주는 거지.”

 “그러니 그걸 누리시면…….”

 “미안하지만 난 그거 하나도 안 고맙거든? 내가 왜 이런 먼 곳까지 와서 쇼 하자는 얘기에 아무 불평 없이 순순히 동의한 줄 알아? 바로 이 도시가 전쟁피해를 아직 입지 않은 지역이라서 그래. 그 말은 상대적으로 다른 곳에 비해 놀 곳이 남아 있다는 뜻이잖아. 난 오늘 이 날만을 위해 답답한 수도원 생활을 6개월 동안 참았어. 오늘 못 나가면, 내일 아프다고 핑계대고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으…….”

 어린애 같은 협박이었지만, 대체할 인재가 없는 이상 그건 절대적인 압박이다. 결국 시온은 버티지 못하고 여행가방 속 챙겨온 외출복을 안젤라에게 건네주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

 딱 달라붙는 청바지에 가죽자켓, 여기에 추위를 대비해 털 달린 외투를 걸치고 거칠게 묶은 머리 위에 사냥 모자를 쓰자 기적과 치유의 성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거리의 불량소녀만이 남게 되었다.
 안젤라는 거울을 보고 일변한 자신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저번처럼 절대 몰래 뒤를 밟는다거나 그딴 스토커 같은 짓 하지 마.”

 시온은 난처해하면서도 힘껏 반론했다.

 “그건 스토커가 아니라 경호원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시면 어쩌려고…….”

 “뭐야, 혹시 내가 잘못되면 교단에 문책이라도 당할까 걱정하는 거야? 뭐 결국 당신도 자기 안부가 중요한 속물…….”

 “제게 안젤라 님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시온은 드물게 성녀의 말을 끊으며 상대를 진지하게 응시했다. 안젤라는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말을 더듬으면서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 아무튼 무슨 일이 생겨도 내, 내가 해결해! 그러니 시온도…… 나한테 신경 끄고, 모처럼 5성 호텔을 만끽하며 푹 쉬고 있으라고!”

 쾅. 안젤라는 문이 부서지도록 세게 닫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호텔 밖으로 뛰쳐나갔다. 급하게 달려 나가는 안젤라에게 몇몇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 눈길을 주긴 했지만, 아무도 그녀가 그 유명한 성녀일 거란 의심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고요한 듯 은근히 떠들썩한 도서관.
 직원들도 손님들도 둘 이상만 모이면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고 유명한 소문을 떠들기 시작한다. 그 소문이란 단연, 어제 난민촌을 방문한 성녀의 기적에 대한 것. 흔치 않은 일이다 보니 화젯거리가 되는 것도 이해는 하지만, 남들보다 귀가 많이 밝은 내게는 솔직히 조금 고역인 상황이다.

 ‘내가 왜 거처를 도서관으로 삼고 있는데…… 아, 짜증나. 진짜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차음마법 쓰고 잠이나 잘까.’

 평소 불량하다는 억울한 평가를 직접 실천해 버릴까 망설이던 중 일을 마친 네리가 쪼르르 내게 달려와 그 지겨운 화제를 입에 담았다.

 “선배선배선배! 들었어요? 우리 도시에도 그 성녀 안젤라가 왔데요! 벌써 어제는 난민촌에서 사람들을 치료하고, 오늘은 시 광장에서 환자들을 치료할 거라 하던데요?”

 “어. 들었어. 왜, 그게 그렇게 신기하냐?”

 일부러 시큰둥하게 답했음에도 네리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에이, 선배! 이런 일에 관심 없는 척 폼 잡아봤자 전혀 멋지게 안 보여요. 그냥 솔직하게 놀라고 궁금해 하는 편이 낫지. 성녀의 기적, 정말 굉장하지 않아요? 팔다리를 잃은 사람도 멀쩡하게 사지를 고쳐주고, 불치병에 걸린 사람도 완쾌시켜 준다니…… 진짜 기적이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네요!”

 흥분했는지 머리카락의 일부가 귀처럼 파닥거리는 네리. 난 성녀의 기적보다 저 머리카락이 움직이는 원리가 훨씬 더 궁금하다.
 내가 별 대꾸가 없자 네리는 혼자서 다른 미궁에 빠져들었다.

 “음, 근데 마법에는 그런 힘이 없는 걸까요? 어디서 듣기론 분명 치유마법도 있다고 한 것 같은데……. 근데도 마법으로 사람을 고쳤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아, 그건…….”

 내가 대답하려는 찰나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건 마력 자체가 사람에게 독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야. 치유마법으로 설령 상처나 병 자체는 낫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잔류하는 마력 탓에 결국 환자가 사망하거나, 심한 경우 마물 같은 존재로 변질되는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거든.”

 네리의 의문에 답한 것은 세실리아였다. 당연히 마도서를 다루는 유명한 가문의 후계자인 데다 정식마법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세실리아는 그 이치에 대해서도 훤했다.

 ‘생각해 보면 좋은 타이밍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일개 말단사서에 불과한 내가 마법에 대해 자세히 주절주절 떠드는 것도 좀 부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기우일지도 모르겠지만 난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정체를 감추고 생활한 지가 오래 되다 보니 내 입장에서는 당연히 알고 있는 것도, 지금 내 ‘위치’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을 자꾸 깜박하게 된다. 이전 카타리나와 같은 만능형 인물을 연기할 때라면 모를까, 지금의 내가 지나치게 지식을 드러내는 것은 적절치 않은 일이다.
 내 고민 따윈 알 바 없는 네리는 순수하게 놀라며 크게 입을 벌렸다.

 “우와, 마력이라는 게 그렇게 위험한 거였어요? 저항력 없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마력에 노출되면 자칫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 있긴 한데, 설마 사람을 괴물 같은 존재로 만들 수도 있다니…….”

 “이제 왜 나라에서 자격증 시험 같은 것까지 만들어 마법사들을 관리하는지 알겠지? 소위 불법 마도사, 불마라 불리는 것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 그렇다고 마냥 통제를 강화하면 정상적인 다른 마법사들의 연구나 활동에도 방해가 되니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그렇군요. 그럼 마법을 치유목적으로 사용하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인가요?”

 “거의. 원리적으로야 가능하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커. 차라리 치유대상이 죽으면 다행이지만, 아예 마물로 변질되게 되면, 대개는 이성을 잃고 엄청나게 난폭해지거든. 역사적으로도 끔찍한 사례들이 존재하는데…….”

 세실리아가 예로 든 사례들 중 몇몇은 내 기억에도 선명히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는 약 반세기 전에 있었던 동방국가들의 서부연합전선과 신성 벤투스 제국 간의 7년 전쟁 막바지에 있었던 사건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황제의 과대망상적인 정복욕에서 비롯된 신성제국의 침략전쟁은, 초기의 선전이 무색하게 결국 연합전선에게 밀려 무참한 패배를 눈앞에 두게 된다.

 하나둘씩 무너지는 전선. 전멸하는 부대. 빼앗기는 주요 고지들.
 국토를 유린당해 잔뜩 분노한 연합군은 백기도 무시한 채 제국군들을 상대로 무참한 학살을 계속했다. 여기에는 신성제국 황제의 비현실적인 진격명령도 한 몫을 했는데,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연합군의 항복권고를 무시하고 동방국가들을 조롱하며 자국신민들에게 무조건 항쟁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지원도 받지 못하고 연합군에게 포위된 한 제국군 요새 사령관은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건 다름 아닌 부대 내 막대한 부상자들을 전부 치유마법으로 완치시켜 싸움을 계속해 나간다는 것. 황제도 싸움을 강요하고 연합군도 항복을 받아주지 않는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결과적으로 참혹한 비극을 가져왔지.’

 지나친 마력수용으로 신체구조가 변질돼 괴물로 전락한 사람들의 숫자는 총 열셋. 그들은 소모당한 병사들의 원한이라도 풀 듯 하나 같이 엄청난 힘을 발휘했으며, 요새 안에 상주하던 제국군 병사 5천 명과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연합군 병사 3만 중 1만 명을 학살한 후에야 자가붕괴하고 말았다.

 “…소문에 의하면, 이번 전쟁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해. 단, 과거와 같은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명백한 사람의 의도 하에. 이른바 인간 폭탄이라고 해야 할까. 마물로 변질된 인간은 일시적으로 거대마수에 필적할 만큼 강대한 힘을 얻지만, 보통 3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신체구조가 무너진다고 하지. 그걸 이용해 부상자들에게 시한식 치유마법을 걸어놓고 부대를 후퇴시키는 거야. 마물들이 인간들이 버린 지역을 점령했을 때쯤에 그 부상자들이 괴물로 변해 닥치는 대로 날뛰며 주위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거지. 물론 마왕군도 포함해서 전부.”

 세실리아의 어두운 음색에 네리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지, 진짜 그, 그런 일이 있었나요?”

 “몰라. 나도 들은 것뿐이니까. 단순한 괴담일 뿐이라면 좋겠지만, 진짜 그런 일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전황은 절망적이었다고 하더라.”

 “으에…… 전쟁이 도중에 멈춰 정말 다행이네요…….”

 난 속으로 네리의 말에 적극 동의했다. 세실리아가 말한 전장의 끔찍한 소문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부 전선 지휘관은 루치아의 엄격한 금지에도 불구하고 그 금기에서 쉬이 손을 떼지 못했다. 그만큼 지난 전쟁은 인간들에게 불리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사실이 널리 퍼지지 못한 것은 그 여자, 그러니까 선대 마왕이 화젯거리가 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마물로 변한 인간들을 소멸시켰기 때문이다. 나도 한번 목격한 적이 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 인간은 인간인 채로 덤벼라. 너희들의 잠재력을 총동원해. 시시껄렁한 짓 하지 말고.

 뭐 그 여자답다면 그 여자다운 일. 단순히 힘만으로 겨룰 것이라면 애당초 악마들 중 귀족급 개체나 용왕을 상대하는 편이 더 낫다. 분명 그 여자는 인간만이 보일 수 있는 싸움에서 모종의 즐거움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리라.

 ‘젠장! 내가 왜 그 여자를 이해해야 하는데!?’

 바보 같이 혼자 달아올라 분노하려던 찰나, 머릿속에 누군가의 사념이 울려 퍼졌다.

 「지금 시간 괜찮아요? 잠깐 와줄 수 있어요?」

 이건 내가 특별히 접속을 허용한 도서관장의 전용채널로부터 전해오는 사념. 나는 내키지 않지만 일단 답변을 했다.

 「지금 애들이랑 얘기 중인데. 급한 일이야?」

 「급해요.」

 「얼마나? 또 신대륙에 커피콩 구하러 다녀오란 얘기면 무시할 거야.」

 「그것도 충분히 급한 일이지만, 더 급한 일이 있어요.」

 사념을 통해 전해지는 웃는 기색. 하지만 그 뒤에 전해져 온 사념은 거짓말처럼 진지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자세한 건 당신이 온 다음에 얘기할 생각이지만 요점부터 전할게요. 성녀 안젤라가 어젯밤부터 실종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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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








05. 도서관의 어떤 손님들 (後)


 첫눈이 내렸다.
 온화하게 미소 짓던 가을의 햇살은 환상처럼 자취를 감추고 냉소하듯 차가운 겨울의 칼바람이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살갗을 사정없이 후벼 판다. 흘러간 계절을 아쉬워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자연의 섭리는 엄격해 지나간 것은 돌이킬 수 없다. 그저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릴 수 있을 뿐. 계절의 순환은 엄혹해도 확실하다.

 ‘진짜 눈을 볼 수 있어 다행이군.’

 어린애나 강아지가 아니라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궂은 날씨. 하지만 난 나풀나풀 공중에서 춤추는 눈송이에 반가움을 느꼈다. 만약 내가 우려했던 최악의 결과가 실현됐다면, 지금쯤 하늘에선 첫눈 대신 방사능 낙진이나 화산재가 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지금 상황이 달가운 것도 아니지만.’

 삭삭. 삭삭. 난 긴 빗자루로 눈을 쓸며 속으로 불평했다.
 아침 일찍부터 지루한 작업의 연속. 눈이 많이 쌓인 건 아니지만 도서관 넓이에 비해 인원수가 지나치게 적은 게 문제다. 아무리 눈을 치울 범위를 통행에 꼭 필요한 곳으로 한정했다곤 해도, 이대로 가면 적지 않은 시간과 노동력이 소모될 것임은 분명했다.

 ‘마음 같아선 다 싹 날려버렸으면 좋겠는데.’

 내 마법으로 이 일대의 눈을 전부 녹여 버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거에 이미 몇 차례 시도했던 전력도 있다. 관장이 무서운 눈초리로 노려보긴 했지만 전부 별 탈 없이 넘어갔다.

 ‘이번에도 그러기엔 시기가 안 좋아.’

 평시에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일도 전시에는 경계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비록 전쟁이 멈춘 지 2달이 넘었지만 아직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는 돌아오지 않았다.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사람들의 신경은, 작은 위화감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어? 왜 도서관 주변만 눈이 녹았지?’ 같은 별 거 아닌 의문이 누군가 내 정체를 파헤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책임질 게 있으니 멋대로 행동할 순 없어.’

 예전에는 혹시 정체가 들통 난다 해도 이름과 모습을 바꾸고 다른 곳에서 살면 된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현재의 난 마물들의 왕. 이형의 존재들을 이끄는 우두머리로서 인류군 총사령관Lucia과 비밀리에 손을 잡고 더는 전쟁이 계속되지 않도록 평화협정을 진행 중에 있다. 이 중대사를 그르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무책임하게 행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난, 그 여자와는 다르다.

 “하하, 선배 어때요? 예쁘지 않아요?”

 모처럼 사람이 진지하게 고민 중임에도 눈치 없이 말을 걸어오는 네리. 농땡이 치지 말고 빨리 맡은 구역에 돌아가서 눈이나 쓸라고 한소리 하려고 했던 내 입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다른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여긴 분명 도서관일 텐데.”

 고급 천으로 맵시 있게 재단된 원피스에 귀여운 프릴이 잘 어울리는 예쁘장한 에이프런. 평소 적갈색의 엄정한 사서 제복과는 다르게 화사함이 돋보이는 옷차림이다. 내가 일하던 곳이 도서관이 아니라 카페였나 하는 착각이 들 만큼. 그리고 덕분에 나는 저 차림새를 어디서 봤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거, 「호프」의 유니폼 맞지? 뭐냐, 그 옷은?”

 「호프」란 도서관 아래 삼거리의 잘 나가던 한 카페의 명칭이다.
 들여오는 콩의 질이 좋고 점장의 솜씨가 훌륭해 커피가 맛있을 뿐만 아니라 종업원들의 차림새도 예쁘고 귀여워 은근히 많은 손님들이 찾던 유명한 가게. 특히 거기 종업원 제복은 한때 디자이너였던 점장의 배우자가 직접 제작했다고 하는데, 그 유니폼을 입고 싶어 종업원 모집에 지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영광도 이제는 영원한 과거의 것.
 점장은 마왕군과의 전쟁에 참가해 1년 전에 전사했고, 남은 가족들은 카페를 더 이상 이어나가는 대신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쉬워했지만, 몇몇 골수 단골들은 눈물을 삼키면서도 그 결정에 박수를 보냈다. 어차피 이런 정세에선 제대로 된 커피콩을 구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커피의 맛도 떨어질 수밖에 없을 테니, 그건 도리어 죽은 점장의 명성에 누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들이 폐점에 찬성하는 이유였다.

 “후후, 부럽죠? 저도 정말 운 좋게 구한 거예요. 아시다시피 호프의 유니폼은 전부터 탐내는 사람이 많아 점장의 가족들이 가게를 처분할 때 기회를 노리던 사람이 즐비했죠. 부끄럽지만 저도 그 중 하나였고요. 하지만 불행히도 발 빠른 어떤 수집가가 그 제복들을 싹 사버려서 한 벌도 손에 넣지 못했어요! 한데 최근 그 싹쓸이 한 수집가도 생활형편이 썩 좋지 않은지 자기가 모으던 옷들을 다시 내놓고 있는 중이더군요. 소문을 듣고 가보니 마침 호프의 유니폼도 판매목록에 있어 큰마음 먹고 구입했답니다. 덕분에 보름은 반찬이 형편없어지겠지만요.”

 전혀 궁금하지 않은 구입경위를 장황하게 떠벌리는 네리. 난 이마에 손을 얹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궁금한 건 그 옷을 ‘어떻게’ 입게 되었는지가 아니야. 눈 치우는 데 멀쩡한 제복을 놔두고 ‘왜’ 그 옷을 입고 있느냐는 거지.”

 “음? 제복이 더러워지지 않으려면 마땅히 작업복을 입어야 하지 않겠어요? 작업복이 예쁘면 좀 더 기분 좋게 일할 수 있는 거고요.”

 왜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며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날 쳐다보는 네리. 그렇군. 이 아이에게는 아무리 마니아들 사이에서 고가로 거래되는 유니폼이라도 ‘본래 용도’ 이상의 가치는 없는 모양이다.

 “누구 목에 진주라고, 그럴 바에야 다른 마니아에게 팔리는 편이 훨씬…… 아니, 어떤 의미론 고이 모셔두는 것보다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편이 행복이라 할 수 있는 걸까.”

 하얀 입김과 함께 나도 모르게 새어나온 의문. 뭐 유치하고 낯부끄럽기 짝이 없는 무의미한 사고놀음이지만, 만의 하나 옷에도 옷 나름의 행복이 존재한다면, 역시 어떤 식으로든 써주는 게 고이 모셔두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다.

 “네? 그건 또 무슨 뜻이에요?”

 내 혼잣말이 들렸는지 네리가 정확한 설명을 요구해 왔다. 물론 조금도 응할 마음이 없었던 나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직 내가 소녀심을 잃지 않았다는 뜻이야.”

 “으음……?”

 제대로 접수가 되지 않았는지 네리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부연설명은 하지 않기로 했다. ……막상 말해놓고 보니 생각 이상으로 창피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전에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거기 두 사람 지금 뭐하는 거야? 담당한 구역은 다 쓸었어?”

 눈삽과 대비를 들고 지나가다 마침 수다 떠는 우리를 보고 목소리를 높이는 세실리아. 과연 성실한 그녀답게 이미 자기가 맡은 구역의 제설은 전부 끝낸 모양이다.
 갑작스러운 질책에 움찔했던 네리의 눈에 곧 장난기가 돌아왔다. 네리는 빠른 걸음으로 세실리아의 앞에 서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아가씨. 힘드셨죠? 자자, 빨리 안으로 들어가세요. 제가 따뜻하게 커피라도 한잔 타드릴게요.”

 네리의 태도는 입고 있는 옷과 어우러져 귀족가에서 일하는 메이드를 연상시켰다. 그 모습에 방금 전까지 눈을 치켜뜨고 있던 세실리아의 엄격한 얼굴이 당혹감에 무너졌다.

 “너, 너! 또 그런 장난을―――!”

 “하하하하!”

 귀까지 새빨개진 채 때릴 듯이 손을 드는 세실리아와 혀를 살짝 내밀며 도망가는 시늉을 하는 네리. 두 사람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에는 도서관 사람들만 아는 약간의 사정이 있었다.

 지금은 좀 나아진 편이지만, 세실리아는 처음 이 도서관에 들어왔을 때부터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이는 세실리아의 성격과 태도가 고지식하고 엄격한 탓도 있었지만, 주변에서도 구귀족 출신이자 재벌가 영애인 그녀를 어렵게 느껴 함부로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분위기를 단숨에 부순 게 네리였지.’

 네리는 낯가림이 거의 없는 살가운 성격에,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주변 분위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아직 전쟁이 심화되기 전, 연말에 도서관에서 열린 조촐한 송구영신 파티에서 아무도 감히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있던 세실리아에게 처음 다가간 것도 네리였다.

 - 아가씨, 파티는 재미있게 즐기고 계신가요?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면 부담 없이 말씀하세요. 제가 얼른 대령해 드릴게요.

 아마도 네리 딴에는 파티장 구석에서 홀로 음료만 홀짝이고 있는 세실리아를 위해 가벼운 농담을 건넨 것이리라. 그녀는 종종 상대를 부잣집 아가씨로 설정하고 자기는 메이드를 자처하는 장난을 칠 때가 있었다. 설마 진짜 재벌가 영애에게도 똑같이 장난을 칠 줄은 아무도 몰랐지만.
 문제는 세실리아의 반응.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네리의 앞에 서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 신분제는 이미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폐지됐어. 아직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안쓰러운 사람들도 있지만, 새로운 시대를 사는 우리가 그래선 안 돼. 너와 난 동등해. 위아래 없이 똑같은 시민이지. 부디 자신을 낮추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해.

 일순 파티장은 깊은 침묵 속에 가라앉았다 곧 네리를 필두로 시작된 웃음의 폭풍에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명백한 농담에 지나치게 진지하게 대응한 세실리아의 태도가 꼭 한편의 부조리 개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잠시 후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깨달은 세실리아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 할 만큼 부끄러워했고, 오히려 그 반응이 도서관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불러일으켜 서로 거리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세실리아는 그때 일을 꺼내면 당장 얼굴이 붉게 익을 만큼 창피해 한다.

 “아가씨, 커피가 싫으시면 홍차를 타드릴까요? 아니면 케이크?”

 “너, 너! 거, 거기 안 서!?”

 네리가 잡힐 듯 안 잡힐 듯한 거리에서 계속 메이드 행세를 하자 바닥의 눈을 뭉쳐 던지기 시작하는 세실리아. 답답할 정도로 엄격한 그녀도 네리 앞에서는 제 나이다운 소녀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왠지 흐뭇하다.

 ‘뭐 인간사회에서 세실리아 같은 계층의 사람들은 좀 재미없을 정도로 자기 절제가 돼야 권력의 남용이란 측면에서…… 음!?’

 나이 탓인지 하잘것없는 생각으로 꽉 차 있던 내 머릿속이 저편에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발견한 순간 단숨에 새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저 사람은……!’

 상복과도 같은 검은 드레스. 단단히 눈가에 둘러맨 검은 천. 위장마법에 가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이마에서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고 있는 보석의 뿔.
 일각수의 마지막 왕녀는 예고도 없이 내가 일하고 있는 도서관으로 불쑥 찾아왔다.






 “음, 저분 매우 아름답긴 하지만 분위기가 너무 어두워요. 입고 있는 옷이 검정일색인 것도 그렇고, 역시 미망인인 걸까요?”

 제설작업이 대충 마무리된 후. 네리는 이질적인 손님을 곁눈질로 훔쳐보며 내게 소곤소곤 말을 걸었다.
 난 관심 없는 척 다소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신경 꺼. 뭔가 곤란에 빠져 도와줄 일이 있다면 모를까,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갖는 것도 엄연한 실례야. 세실리아 선배를 본 받으라고.”

 참고로 세실리아 선배님은 근무시간에 눈싸움을 하며 장난치는 모습을 이용객에게 보였다는 사실에 엄청난 자괴감에 빠져 현재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로 장서목록 정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실수 없이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점은 확실히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궁금한 걸 어떡해요. 또 실제로 저분이 곤란해 하고 있는 걸 수도 있잖아요. 저런 천으로 눈을 다 가리고 있는데 제대로 앞은 보이는 걸까요?”

 하지만 네리는 내 태도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은 드레스의 여성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난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거짓을 입에 담았다.

 “걱정 마. 매직 아이템일 테니까. 오히려 맨눈보다 잘 보일 걸. 걸린 마법에 따라서는 안경이나 망원경의 기능까지 부여된 경우도 있으니까. 보통은 전장의 병사들이나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요원들이 애용하는 마법도구지만, 일반인이 마을 안에서도 저런 천으로 얼굴을 감추는 건, 보기 흉한 큰 상처를 가리기 위한 목적일 때가 많아. 그러니 반복해서 말하는 거지만, 신경 꺼. 상대의 마음에까지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면.”

 “음, 그런 거라면 조심해야겠네요…….”

 이제야 간신히 납득을 했는지 네리는 검은 여성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작은 문제가 해결된 것일 뿐, 난 조금도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없었다.

 ‘대체 저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녀의 이름은 트리슈아 라 오벨리오 베르나이드. 인간들에게 사실상 멸족당한 일각수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인간들이 지배한 세상을 보기 싫어 스스로 두 눈을 뽑아버렸다고 한다. 그 일화만으로도 그녀가 인간들에게 얼마나 깊은 증오심을 품고 있을지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을 터. 강대한 마력을 지닌 환수의 왕족이 여기서 난동이라도 피면 어떤 참상이 벌어질지 생각만으로도 두렵다.

 ‘하지만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벌써 일을 벌였을 테지. 장소도 좀 외딴 곳에 있는 이 도서관보다 거리 중심지로 나가는 편이 훨씬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을 테고. 이거, 혹시…….’

 날 찾아온 걸까?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난 마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몸이다. 그녀가 인간들에게 복수하러 이 도시에 온 게 아니라면, 날 만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러운 추측일 것이다.

 ‘내가 직접 만나긴 좀 그런데…….’

 솔직히 그녀와 같은 타입은 대하기 껄끄럽다. 문자 그대로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잃은 일각수의 마지막 왕녀는 엄연히 그들에게 복수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하지만 난 인간들과의 화평을 추진하고 있으며, 사적인 감정으로 옛일에 연연해 복수 대행자 노릇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녀의 처지는 동정하지만, 내가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뭐 그렇다면 목적은 역시 전쟁의 재개를 요청하는 것이려나? 직접 말을 걸어온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내 정체를 눈치 못 챈다면 가만히 있자.’

 난 일단 좀 더 트리슈아를 지켜보기로 했다.
 세상만물의 온갖 파장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일각수의 뿔. 분명 그 민감도 앞에서 웬만한 위장마법은 쉽게 들통이 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인간으로 변하는 원리는 단순한 변장이나 변신이 아니다. 이는 혼혈이라는 특성을 이용해 존재원형의 차원에서 ‘또 다른 나’를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최고위 마법으로도 내 정체를 드러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물론 네리가 내 마력의 잔향을 냄새로서 인식한 것처럼 우회적으로 탐지하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다.

 ‘그나저나 트리슈아는 얼음성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은지 100년이 넘었다고 하는데, 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거지? 혹시 누가 부추긴 건가? 대체 누가…… 아!’

 내 의문은 금방 답에 도달했다. 마왕군 안에서 그런 오지랖 넓은 짓을 할 만한 녀석은 단 하나. 지루함을 부모의 원수처럼 증오하는 문란한 악마trickster 루시 루시드 드림 외에 달리 있을 수가 없다. 나중에 만나면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줘야겠다.

 ‘휴우…….’

 결국 날 찾아내지 못한 걸까. 트리슈아는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몸을 일으켜 읽는 척 하던 책을 반납하고 도서관을 떠났다.

 ‘미안해요.’

 난 안도의 한숨과 함께 속으로 그녀에게 사죄의 말을 건넸다. 내게 그녀의 원한을 풀어주는 일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그럴 마음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녀와 같은 피해자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노력할 생각이다. 설령 그것이 그녀의 마음에 어떤 위안도 되지 못한다고 해도.

 “상복 입으신 분, 결국 그냥 가셨네요. 음, 역시 가서 말이라도 걸어볼 걸 그랬나.”

 트리슈아가 떠난 자리를 응시하며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네리. 난 그 말에 마지막 왕녀가 늦기 전에 자리를 떠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마 네리는 외로워 보이는 마지막 왕녀를 보고 선의로 그런 마음을 품은 것이겠지만, 인간들을 증오하는 그녀에게 인간 소녀가 친근한 척 말을 건네 봤자 절대 좋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반납 받은 책들을 정리하고 돌아온 네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번 주 들어서 찾아주시는 분이 좀 늘지 않았어요? 쓸쓸하지 않아서 좋긴 한데, 줄어든 인원수는 그대로다 보니 좀 바쁘게 느껴져요.”

 역시 이 아이는 언뜻 맹한 것처럼 보여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감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녀의 말마따나 몇 달 간 거의 텅 비어있다시피 한 도서관에도 이제는 듬성듬성 독서하는 사람들이나 책을 빌리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고 있었다.

 “전쟁이 멈춘 효과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걸까. 사람들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조짐이라면 참 좋을 텐데. 뭐 일이 잘 풀리면 다음 달 월급은 다시 돈으로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진심을 담아 장난처럼 던진 말에 네리는 킥킥 웃었다.

 “정말요. 그동안 발길을 끊으셨던 다른 분들도 다시 찾아주시면 정말 좋을 텐데…… 아! 얘기하기가 무섭게 저분도 오랜만에 와주셨네요!”

 살짝 들뜬 목소리와 함께 향한 네리의 시선 끝에는 선명한 은발과 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인 새하얀 피부의 서늘한 미인이 있었다.
 은회색의 군복으로 몸을 감싼 그녀의 이름은 리온 레오니스. 옷차림에서 바로 알 수 있듯이 인류군 소속의 장교로서 중위 계급장을 달고 있다. 단아한 외모에 이지적인 인상으로 네리가 좋아할 만한 타입의 미녀였다.

 “저분도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후후, 말없이 책을 들고 사람들 눈에 잘 안 띄는 구석 진 자리로 가시는 것도 여전하시네요. 음, 걸을 때마다 찰랑이는 저 머릿결도 건재…… 내 어수선한 머리카락과는 너무 달라서 부러워요…… 아니, 저 사람 정말 군인 맞아요!?”

 마지막은 살짝 질투심이 섞인 네리의 말에 난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한번 가서 물어보지 그래? 머리 관리 어떻게 하냐고 말이야.”

 네리는 잠시 망설이다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모처럼 오셔서 책을 읽으시는 데 그 시간을 방해할 수는 없죠.”

 붙임성 좋은 네리도 역시 동경하는 대상에게는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모양이다. 풋풋한 후배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던 나는 더 이상 화제를 이어가지는 않았다. 네리는 리온을 멍한 눈으로 응시하다 한번 고개를 저은 뒤 도서정리를 하러 자리를 떠났다.

 ‘네리에게 있어 리온 중위는 조용한 독서를 즐기는 냉정 침착한 멋진 군인인가. 녀석의 실체를 몰라 정말 다행이군.’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내가 혼자 있는 것을 확인한 리온은 저 멀리서 손짓으로 날 불렀다. 난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그래도 후배의 환상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럽게 리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리온은 작지만 흥분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마워! 네가 추천해준 책, 진짜 굉장해. 완전 잘 풀렸다고!”

 “뭐? 말도 안 돼. 그딴 걸로 정말……?”

 “응? 방금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정말 잘 풀렸나요?”

 반신반의하는 내 물음에 리온은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녀가 그렇게 좋아하는 거 처음 봤어. 이런 멋진 책을 추천해줘서 정말 고마워!”

 “아, 네…… 음, 잘 됐네요.”

 난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못해 그녀의 감사를 받았다.
 리온이 손에 들고 있는 책의 제목은 『당신이 사랑에 빠졌을 때』. 하도 리온이 좋아하는 여자와 잘 되고 싶은데 좋은 책 좀 없냐고 귀찮게 굴어서 어쩔 수 없이 추천해준 흔하디흔한 연애지침서 중 하나였다.

 ‘저딴 책이 진짜 도움이 될 줄이야…….’

 사서로서 실격일지 모르겠지만, 사실 난 리온을 골탕 먹일 생각으로 저 책을 권한 거였다. 연애는 어디까지나 실전. 사랑을 글로 배우려고 하다니, 내 입장에서는 언어도단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로라…… 보고 있냐. 네 망상도 전혀 쓸데없지는 않았나 보다.’

 저 연애지침서의 저자는 로라 윌리엄스. 그녀는 다작으로 유명한 100년 전의 소설가로, 소설 외에도 여러 잡다한 저서를 각기 다른 필명으로 남겼다. 난 생전의 로라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는데, 내가 알기로 그녀는 죽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다. 술에 취하면 본인이 자학하듯 떠들기도 했으니 아마 틀림없을 것이다.

 ‘평생 동정녀가 머리로만 쓴 연애지침서가 연애초심자에게 도움이 되다니. 로라 역시 넌 대단한 작가…….’

 ……일 리가 있냐!
 아마도 리온이 마음에 둔 상대는 저 둔감한 중위님이 눈치 채지 못했을 뿐이지, 분명 똑같이 리온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다. 네리도 겉만 보고 속고(?) 있는 것처럼 일단 리온 녀석 입만 다물고 있으면 엄청 미인이기도 하니 아주 허황된 가정은 아닐 것이다.

 “후후, 후후후후후. 이 책만 있으면 그녀의 마음을 손에 넣는 것도 시간문제……!”

 우와, 스토커 같이 기분 나쁜 웃음. 당장 네리를 이 앞에 끌고 와 이 꼴을 보여주고 싶은 가학심과 공간 자체를 차단해서라도 절대 목격하지 못하도록 막고 싶은 보호심이 동시에 들 정도다.

 그럼에도 표정은 조금도 무너지지 않은 채 여전히 이지적으로 보이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재능이라 할 수 있으리라. 아마 누군가 멀리서 지금의 리온을 본다면 이딴 한심한 발언을 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뭔가 철학서에 대해 고명한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게 틀림없다.

 “앞으로 네가 추천해주는 책은 전적으로 믿을게! 또 괜찮은 게 있으면 말해줘!”

 이런 말을 마치 궁지에 몰려 죽기 직전인 동료를 극적인 순간에 구하는 주인공 같은 얼굴로 입에 담는 리온.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여준 후 연애지침서에 몰두하는 그녀를 뒤로 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뭐 그래도…….’

 전장으로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군인이 사랑을 위해 책을 읽는 계절. 이런 걸 보람이라고 해야 할까. 굉장히 사소한 일이긴 하지만, 내가 루치아와 함께 만들어낸 평화의 실감이 이제야 비로소 느껴지는 것만 같다.

 ……분명 이때의 난 잊고 있었으리라. 타협의 이면에 웅크리고 있는 것, 빛이 있기에 생기는 그림자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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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9.01.31 01:42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와아아, 이번화에서 묘사해주신 카페 호프의 제복을 상상하고 있노라니 순간 파르페 쇼콜라 카토 레아의 화사한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_<

    아직 평화롭던 시절 전성기 호프의 이야기를 다룬 스핀오프격 외전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

    • Favicon of https://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9.02.01 06:46 신고 address edit/delete

      이번 화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중의 등장인물들에게 조금이라도 유명한 작품에 나오는 히로인들과 같은 매력이 느껴진다면 저도 기쁠 따름이네요^^

      저도 언젠가는 소위 키라라계 4컷 만화에 나올 법한 카페를 중심으로 아기자기한 일상을 담은 이야기를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한데 제게는 아직 개그나 훈훈한 일상물을 재미있게 다룰 실력이 너무 모자라 갈 길이 먼 것 같네요ㅠ_ㅠ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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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도서관의 어떤 손님들 (前)


 황금의 계절은 조금씩 그리고 확실하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위北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아 헐벗기 시작하는 나무들. 그 마른 나뭇가지들 사이에 힘없이 붙어 있는 몇 안 되는 단풍들은, 이 살기 좋은 가을도 며칠 지나지 않으면 끝이라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 마지막 낙엽이 질 무렵, 황금과도 같은 가을은 아쉬운 마지막을 고하고 기나긴 겨울이 혹독하게 그 시작을 알리리라.

 하지만 지금 거리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화제는 흘러가는 계절autumn에 대한 아쉬움도 다가올 계절winter에 대한 두려움도 아닌, 보급형 싸구려 매직스크롤에서 투영되고 있는 짤막한 영상들이었다.

 “우와, 용이라는 게 진짜 실존하는 거였어? 그저 전설이 아니라?”

 “보고도 못 믿겠냐? 저런 대함대를 인류군이 보유하고 있었으면 진작 전쟁에서 이겼지. 무엇보다 마치 산이 그대로 공중으로 솟아오른 것만 같은 이 공중요새를 봐봐. 이런 걸 띄우는 건 물자나 군비의 문제를 떠나 아예 우리人間의 기술력으론 불가능한 경지라고.”

 “하기야…… 진짜 용들이라도 나타나지 않았다면, 말이나 통할지 의심스러운 그 잔학무도한 마물 놈들이 갑자기 싸움을 멈추고 물러나지도 않았을 테지.”

 스크롤 영상의 내용은 인류군과 마왕군이 대평원에서 벌인 싸움에 용왕의 대함대가 개입하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었다. 시중에 나도는 이 매직스크롤들은 대개 세간에서 불법 마도사 또는 비인가 마도사라고 불리는 ‘무허가 마법사’들이 무분별하게 유포하고 있는 위법 영상물이었다.

 본래 마력을 다루는 것은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주변에도 매우 위험한 영향을 끼칠 수 있기에 거의 모든 국가에서는 그 사용자격을 엄격하게 법으로 통제하고 있다. 즉 정식으로 시험에 통과한 사람만이 마법사로서 활동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일명 상아탑이라 불리는 세계마법사협회에서 출제되는 최소자격요건 시험문제는 실기필기 모두 난도가 상당히 높은 편인 데다, 국가에 따라선 시험에 응시하는 비용 자체를 비싸게 받는 경우도 있어 설령 마력을 다루는 재능이 있다고 해도 아무나 마법사의 자격을 얻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실력이나 돈이 없는 마법사 지망생들은 종종 자격 없이 무허가로 마법을 사용하곤 했다. 물론 이는 엄연한 불법으로서 처벌대상이 되는 행위였지만, 마력을 통해 보통 사람들은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힘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게 속칭 불법 마도사로 전락한 이들은 법망을 피해 다양한 수단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그 중 하나가 전장이나 재해 현장과 같은 위험지역의 영상을 매직스크롤에 담아 흥밋거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팔아치우는 일이었다. 지금처럼 심각한 전쟁피해로 정부기관들이 상당 부분 제 역할을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이 유통시키는 정보는 아직까지 기능이 살아 있는 소수의 언론사와 함께 사람들 사이에서 큰 전파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평시라면 숨어서 돌려 봤을 전장의 불법영상기록을 당당하게 돌려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소문에 의하면, 어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불마가 찍은 스크롤에는 새로운 마왕이 영웅님과 싸우는 모습도 담겨 있다는 모양이야.”

 “진짜야!? 와, 그거 한번 보고 싶은데 어디서 팔지? 아, 잠깐 설마…….”

 “그래. 목숨 걸고 찍은 것인 만큼 엄청나게 비싸더라. 나도 궁금해서 살짝 알아봤는데, 적어도 보리 두 포대는 받겠다고 하더라고.”

 “엉? 전이라면 모를까, 요즘엔 거의 한달 밥값 수준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스크롤 한 장에 그 가격은 좀……. 아니, 근데 그걸 또 사서 보는 녀석이 있단 말이야?”

 “뭐 어느 때든 있는 놈은 있는 법이니까. 호기심에 내일을 잊고 일단 지르고 보는 얼간이도 있고. 삼거리 대장간 옆집에 앤이라고 알지? 걔도 샀어. 위대한 영웅께서 우릴 위해 사악한 마왕과 싸우시는 고귀한 영상은 꼭 소장해야 한다면서. 가지고 있는 옷의 절반을 팔았다지 아마.”

 “아…… 걔 영웅님의 추종자였지. 일해서 받은 돈 대부분을 드레스 수집하는 데 쓰던 애가 그걸 팔 정도면, 행동은 어쨌건 마음만은 진짜인가 보네. 아무튼 잘 됐다! 하루치 곡식 정도는 나눠줄 수 있으니 좀 보여 달라고 하면…….”

 “물론 이미 비슷한 제안을 해봤어. 단칼에 거절하더군. 비싸게 주고 산 스크롤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자기 우상이라 함부로 남 보여주기 싫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뭐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스크롤 따윈 존재하지 않고, 어디서 사기 당해 부끄러워 보여주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하하, 그런 거라면 정말 걸작이겠네! 그나저나…….”

 당연히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위법 스크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인류와 마물들 사이에 맺어진 휴전 협정 또한 시간을 때우기 좋은 화제 중 하나였다.

 “우리 인류를 수호하는 새하얀 기사님이라. 뭐 당연히 그 영웅님께도 감사하고 있지만, 난 역시 루치아 님이 더 좋더라. 멋지지, 아름답지, 카리스마 있지, 여러모로 최고 아니야?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린 이미 예전에 멸망했을 걸.”

 “음, 나도 얼마 전까진 비슷한 생각이었지만…… 최근 인류 대표의 행보는 좀 아니지 않냐? 아무리 그래도 마물 놈들과 손을 잡는 건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어. 그동안 죽은 사람들이 얼만데…… 게다가 싸움을 멈추는 조건으로 북쪽의 멸망한 공화국을 비롯한 몇몇 지역을 아예 마물들에게 넘겨줬잖아. 보기에 따라선 엄연한 인류에 대한 배신이라고. 난 테러에 절대 반대긴 하지만, 망국의 생존자들이 과격한 행동으로 나서는 것도 이해는 돼.”

 “그거야 뭐…… 하지만 이 상황에선 어쩔 수 없지 않냐? 마물들만으로도 벅찬데 용들까지 나섰으니…… 그래도 협정을 맺으면서 마왕군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의 7할 정도는 돌려받은 셈이라 실질적으로 이득은 우리가 봤다고 하던데. 특히 돌려받은 지역 중에는 주요 농업지대나 공업지대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신문에서…….”

 “야야! 그딴 어용신문 얘긴 집어치워! 농업지대든 공업지대든 되찾으면 뭐해? 저번 달보다 생활이 더 어려워지기만 했는데 무슨…… 게다가 마물들이 점령했던 땅들이 뭐 남의 땅이었냐? 다 우리 인간들 땅이었잖아! 뭘 뺏긴 걸 돌려받았다고 감사하고 있는 거야? 정신 차리라고!”

 “듣자 하니까…… 너야말로 정신 차려! 현실적으로 생각하라고! 꼭 용들이 아니었어도 우리가 마왕군을 이길 수 있었냐!? 솔직히 밀리고 또 밀리고 있던 상황이었잖아! 마물들이 점령한 지역이 본래 인간들 땅이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우리 힘으로 되찾을 수도 없었는데. 그걸 루치아 님이 협상을 통해 무사히 돌려받은 것에 박수는 보내지 못할망정, 하잘것없는 자존심으로 매도를 하면…….”

 “하잘것없는 자존심? 하! 너 그런 말 나라 잃은 사람들 앞에서 할 수 있냐?”

 “아, 그래서 니가 나라를 잃었냐? 군대도 가본 적 없는 주제에 입만 살아선……! 전장을 한 번도 본적 없으면 그냥 닥치고 있으라고!”

 “아이고, 고작 후방에서 보급품 관리나 하던 주제에 유세는 더럽게 부리네! 절벽에서 떨어지면 죽는다는 걸 꼭 경험해 봐야지 아냐? 요즘 대표가 하는 짓거리가 하도 도리에 어긋나 있으니 할 소릴 하는 것뿐이잖아! 너야말로 니가 지지하는 사람한테 싫은 소리 좀 한다고 감정적으로 나오지 말라고!”

 “먼저 감정적으로 나온 사람이 누군데 뻔뻔하기는……! 지금 니가 하는 게 정당한 비판이냐? 니 머릿속의 ‘멋지게 마왕군을 물치는 강력한 인류군’이라는 망상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니 그냥 떼를 쓰고 있는 거지. 진짜 루치아 님이 안 됐다니까. 너 같은 놈을 위해서도 밤낮 가리지 않고 고생하고 계시니.”

 “하! 됐다. 너 같은 빠순이랑 무슨 얘길 하겠냐. 그래도 한 가지 충고해줄게. 너 같은 애들이 대표를 싸고 돌수록 오히려 대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떨어져 나갈 뿐이야. 그것만큼은 알고 살아라.”

 “웃기고 앉았네! 만의 하나 루치아 님이 실패하면 너 같은 녀석들이 발목을 잡은 탓이야. 너야말로 그걸 잊지 말라고!”

 “지금 누구한테 책임 전가를……!”

 만물을 움츠리게 할 차갑고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오기 직전. 올해 가을의 막바지는 포근한 날씨에 햇볕은 따사로웠지만, 일부 사람들의 마음은 이미 계절을 앞서 황량해져 있었다.

 “…….”

 길을 가다 우연찮게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은 마왕이 된 마왕의 딸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도서관을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 선배! 어디 있었어요? 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더니. 혹시 밖에 나갔다 온 거예요?”

 도서관의 들어선지 얼마 후. 날 발견한 네리가 반가움과 불만이 7대3 정도 섞인 얼굴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나는 가볍게 손을 마주 흔들어주며 대답했다.

 “어. 관장님 심부름으로 잠깐.”

 네리가 장난기 섞인 얼굴로 되물었다.

 “정말요~? 세실리아 씨는 선배가 분명 일 빼먹고 어디선가 낮잠 자고 있을 거라 장담하던데요?”

 …대체 그 아가씨 머릿속의 난 얼마나 불량한 걸까. 약간 껄렁한 태도를 취한 적은 있어도 대놓고 일을 소홀히 한 적은 여태까지 한 번도 없었는데.

 ‘이래서 사람은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건가.’

 카타리나를 그만두고 지금의 나로 다시 도서관에 들어올 때, 사람들이 의존해오는 게 질색이었던 나는 몇 번 강렬하게 문제아를 연기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세실리아에게는 그때의 인상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리라. 왜냐하면 당시 그녀는 신입사서들의 교육담당이었기 때문이다.
 뭐 자업자득이니 어쩌랴. 스스로에게 떳떳하면 상관없는 일이다.

 “못 믿겠으면 관장님한테 직접 물어 봐. 분명 우리 모두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왔다고 대답할 테니.”

 실제로 난 당당했다. 관장의 부탁으로 바다 건너 옆 대륙까지 날아가 도서관 운영에 필요한 물품을 싸게 사왔기 때문이다. 마왕을 심부름꾼으로 부려먹는 사람은 아마 세상에서도 이 도서관 관장이 유일할 것이다.
 네리는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것도 없어요. 전 선배를 믿으니까요. 사실 아까도 세실리아 씨에게 선배가 낮잠 같은 걸 잘 리가 없다고 말했어요.”

 “…믿어주는 건 고맙지만 맹목적인 신뢰는 전혀 달갑지 않은데.”

 “맹목적이라니요, 합당한 추론이라고요!”

 “어떤 점이? 한번 읊어보시지.”

 “험험. 날이 좀 포근하게 느껴진다 해도 이제 좀 있으면 겨울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기온이 꽤 떨어진 편이죠. 한데 연료공급이 끊긴 지 오래인 우리 도서관에는 더 이상 난방이 되는 곳이 없어요. 즉 맘 편하게 한숨 자고 싶어도 추워서 도저히 눈을 붙일 수 없는 상황인 거죠. 고로 절대 선배는 낮잠을 자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리는 없는 거고, 세실리아 씨도 그 말에 납득했답니다. 좀 떨떠름해 보이긴 했지만.”

 거침없이 자신의 추론을 입에 담는 네리. 마치 당장이라도 얼굴에 Q.E.D.라는 글자가 떠오를 것만 같은 자신감이다. 뭐 애당초 난 이 아이들 앞에선 낮잠은커녕 졸아본 적 한번 없지만, 본래 사람의 인식이란 애매하고 적당한 것이라 있는 그대로의 진실보다는 스스로의 기대를 반영하기 마련이니 어쩔 수 없다.
 아무튼 날 무작정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에선 합격이다. 난 박수 치는 시늉을 하며 설렁설렁 입을 열었다.

 “아―― 엄청난 명추리였어. 최소한 내가 낮잠을 자지 않았다는 건 맞췄으니. 그럼 수고해. 난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그때 도서관 로비에서 떠나려는 내 앞을, 네리는 양팔을 활짝 벌리며 막아섰다.

 “……뭐야? 날 쓰러뜨리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다, 뭐 그런 거냐?”

 미간을 찌푸리며 던진 질문에 네리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비슷하지만 달라요! 의심 받아 마음의 상처를 입은 선배를 위로해 주기 위한 화해의 포옹이라 해야 할까요? 자, 제 품 안으로 뛰어 들…… 우와, 선배! 지금 얼굴표정, 엄청난 거 아세요? 꼭 돈 빌려줬다 못 받은 사람 같아요!”

 그게 대체 무슨 표정인데. 하지만 어이없고 짜증난다는 점에선 통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난 다른 방향으로 등을 돌리며 경고하듯이 말했다.

 “오늘은 좀 피곤하기도 해서 장난 칠 기분 아니야. 나중에 놀아줄 테니…… 하아.”

 덥석.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덮치듯이 껴안아오는 네리. 뭐랄까, 머리카락을 포함해 여러모로 푹신한 게 꼭 양을 업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너 사람 말 안 듣냐?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라고 말했…….”

 난 짐짓 엄포를 놓으며 네리를 떨쳐내려 했지만, 그 시도는 상대의 한 마디에 간단히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선배, 3년 동안 기분 좋은 날 한 번도 없었잖아요.”

 음. 들키고 말았나. 실은 내가 스킨십을 별로 안 좋아해 일부러 기분 나쁜 척 피하고 있었다는 것을.

 “후후! 이만 포기하고 얌전히 제 품에 안겨 계세요. 그거 아세요? 사람끼리 서로 껴안고 체온을 나누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연구결과도 있대요. 그러니 이건 다 선배를 위한 일이라고요.”

 “우, 웃기는 소리하지 말고 당장 떨어져……!”

 “아아, 역시 선배는 달콤한 냄새도 나고 따뜻해서 좋네요. 아무리 도서관이 추워도 선배만 있으면…….”

 “이, 이 녀석…… 사람을 난로 대용으로……!”

 어쩐지 날 찾을 때 반응이 요상하다 싶더니 이런 꿍꿍이가 있었을 줄이야. 만약 미리 알고 있었다면 네리 앞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좀 이상하군. 확실히 네리는 살가운 성격에 스킨십을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작년에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어. 유독 나한테 달라붙는 게 올해부터이긴 한데…….’

 네리가 내게서 느끼는 달콤한 냄새는 다름 아닌 마력의 잔향. 그렇다면 내게서 느끼는 온기 또한 숨겨진 마력을 공감각으로 치환해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아크메이지 클래스조차 탐지하지 못하는 인간상태일 때의 내 마력을 느낄 정도의 재능…… 마치 살아 있는 동물의 귀나 꼬리처럼 생기 있게 움직이는 머리카락…… 선조 중에 뭔가가 섞여 있고, 그 피가 요 1년 사이에 각성하기 시작한 거라면…….’

 “선배 완전 따뜻해…… 후후후…….”

 남의 몸에 체중을 잔뜩 실은 채 행복한 듯이 중얼거리는 네리. 그 태평한 목소리에 난 심각하게 고민하던 일들이 바보 같이 느껴졌다.

 ‘뭐 본인이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면 내가 괜히 헤집을 필요는 없겠지.’

 마음을 정한 내가 반쯤 졸고 있는 네리를 평소처럼 구박하듯이 깨우려고 할 때, 불쑥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저기, 두 분이서 사이가 좋아 보이는 건 매우 흐뭇한 일이지만 잠시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찾고 싶은 책이 있는데요.”

 말을 건 사람은 긴 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묶어 앞으로 넘긴 자주색 눈동자의 여성이었다.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좀처럼 보기 힘든 강렬한 빛깔이었지만, 입가의 검은 점과 어깨에 걸치고 있는 갈색 숄 덕분에 여성의 인상은 한없이 부드러워 보였다.

 “예, 말씀만 하세요! 어떤 책을 찾고 계신가요?”

 네리는 방금 전까지 남의 몸에 기대 졸고 있던 사람으로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벌떡 몸을 일으켜 활기차게 손님의 요청에 응했다.
 보라색 머리카락의 여성은 옅은 미소를 띠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원예에 관련된 책을 몇 권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웬만하면 제가 찾고 싶었는데, 이 도서관은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배열방식이 다른 듯싶네요.”

 “아 네. 도서관 자체가 문화재 취급이다 보니 좀 비효율적인 형식을 채택 중이라…… 음? 혹시 실례지만 다른 지역에서 오신 분인가요?”

 “예, 맞아요. 혹시 하멜른 호수 근처 림멜이라는 작은 도시를 알고 계시나요? 전 거기서 왔답니다.”

 보랏빛 여성의 말에 네리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난 슬슬 다른 방향으로 놀라고 있는 중이지만.

 “하멜른 호수라면…… 여기서 기차로도 꼬박 하루 종일 달려야 하는 곳 아닌가요!?”

 “책을 빌리러 오기엔 좀 먼 거리지요? 하지만 전쟁 탓인지 제가 사는 지역 근처엔 문을 연 도서관이나 서점이 하나도 없어서요. 물론 샅샅이 뒤져보면 정말 없지는 않겠지만…… 그럴 바에야 차라리 처음부터 제대로 된 곳을 찾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이곳으로 오게 된 거랍니다.”

 “으, 먼 곳에서 오시느라 많이 힘드셨겠어요. 걱정 마세요! 제가 필요하신 책들, 전부 찾아드릴게요. 아, 혹시 원예 분야에서도 어느 쪽을 원하시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상대가 보통 결의로 도서관을 찾은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네리 역시 사서로서의 사명감에 불이 붙은 모양이었다.
 자줏빛 눈동자의 여성은 손가락을 턱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음, 저도 전문가는 아니라 정확히 꼬집어 말씀드리기는 힘드네요. 장기간 집을 비운 탓에 정원이 엉망이라 겨울이 오기 전에 가볍게 손을 보려 하는데, 혹시 그쪽에 관련된 책도 있을까요?”

 “그거라면…… 네, 물론이요! 소냐라는 유명한 정원사가 남긴 저서 중 한권인데, 아마 원하시는 내용이 있을 거예요.”

 단번에 상대에게 필요한 책을 떠올리는 네리. 헐렁해 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네리는 의외로 자기 일에 진심으로 매달리는 성격이었고, 도서관의 장서 목록도 상당 부분 꿰고 있었다.
 책을 추천 받은 여성의 얼굴이 환해졌다.

 “소냐라면, 마지막 황제의 정원사로 유명한 그 사람 맞죠? 그런 전설적인 정원사의 저서까지 있다니…… 역시 헤미스피어 대도서관이네요. 오길 잘 했어요. 아, 근데 그런 귀중한 서적들도 대출이 가능한가요?”

 “네. 대부분 사본이니 원본을 뜻하는 붉은 띠지만 아니라면……. 아, 죄송해요. 이 도시에 사시는 분이 아니라면 신분증과 거주지가 확실하더라도 대출은 불가네요…….”

 면목이 없었는지 머리카락이 꾸중 맞은 강아지 귀처럼 축 늘어지는 네리. 몇 번을 봐도 재미있는 광경이긴 했지만, 지금 난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보라색 머리의 여성은 여전히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상냥한 음색으로 말했다.

 “그렇게 미안해하실 거 없어요. 당연한 조처인 걸요. 실은 이럴 줄 알고 베껴 쓸 준비도 해왔답니다. 필요한 부분만 적어가면 어떻게든 되겠죠.”

 “그럼 다행이지만…… 시간은 충분하시겠어요?”

 “일단 야간 기차를 잡긴 했으니 폐관 시간 안에 하는 데까진 해봐야죠.”

 자줏빛 여성의 말에 네리는 무언가 결심한 듯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네리는 다시 여성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제가 도와드릴게요! 둘이서 하면 분명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거예요.”

 “……괜찮으시겠어요?”

 “걱정하시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생긴 것과 다르게 제가 이래봬도 달필이라고 주변에서 칭찬 받는 편이거든요.”

 “아니, 그런 걱정을 말하는 게…… 후후, 고마워요.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자신만만한 네리의 장담에 여성은 좀 곤혹스러워 하면서도 이윽고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수락을 했다.

 “네!”

 네리는 힘차게 답하며 손님과 함께 우선 책을 가지러 도서관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 뒤를 따르며 가볍게 충격을 받은 머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생각을 정리했다.

 ‘지나치게 사기死氣를 빨아들여 보랏빛으로 물든 머리카락과 눈동자, 그리고 입가에 점, 무엇보다 억제하고 있어도 강하게 흘러나오는 마력…… 틀림없어. 설마 이런 데서 저 녀석과 만나게 될 줄은…….’

 그녀의 정체는 마검사 플랑. 본명은 아무도 모르는 채 그녀가 사용하는 무기의 특징을 따 주변에서는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그녀는 비록 성검의 기사에게 가려 이번 전쟁에서는 존재감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지만,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따지자면 인류연합군에선 실질적인 2인자라 할 수 있을 만한 강자였다.

 타고난 자체 마력생성체질과 죽은 환수들의 뼈를 제련해 만들었다는 마검 나흐트 힘멜. 그 두 힘을 휘둘러 적들을 찢어발기는 그녀는, 백은의 영웅만큼은 아니더라도 여러 전투에서 활약해 인류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영웅으로서 칭송 받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잔인한 성정에 따라 싸움과 유혈을 즐길 따름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는 여러 차례 자신의 공격범위에 아군이 포함돼도, 심지어 미처 도망가지 못한 민간인이 남아 있어도 마수들과 함께 가차 없이 도륙해 버린 전적이 있었다. 그로 인해 몇 번이고 군법회의에 처해지곤 했지만, 그녀는 매번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하얀 영웅 외에 그 마검사만큼 싸울 수 있는 인재가 인류군 안에서는 몇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몇 번 전장에서 저 마검사를 눈에 둔 적이 있었다. 그녀의 힘과 잔학함은 진짜였다.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거대한 마수를 한순간에 두 동강이 내고 달려드는 수십 명의 수인獸人들을 목만 남기고 사지를 절단해 꼼짝 못하게 만든 다음 죽을 때까지 짓밟으며 잔인하게 괴롭히던 그녀의 서늘한 웃음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인류군과의 힘의 균형을 위해 보호대상으로 지정된 주요인물만 아니었다면 가장 먼저 내 손으로 처단했을 것이다.

 ‘그런 녀석이 정원 손질이라…….’

 하지만 그 끔찍했던 마검사도 지금은 평상복을 입고 부드러운 웃음을 띤 채 일반인 사이에 섞여 꽃과 풀을 가꿀 궁리를 하고 있다. 이것이 휴전협정이 가져온 평화의 긍정적인 일면인지, 아니면 단순한 살인마의 변덕일 뿐인지, 혹은 다른 속셈이 숨겨져 있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 인간 쪽에서 먼저 사고를 치게 될 거예요. 언제나 평화를 먼저 무너뜨리는 건 그들이었으니.

 뇌리에 떠오르는 서큐버스의 불길한 말. 나는 그 예측을 부정하듯 고개를 저으면서도 네리와 담소를 나누는 플랑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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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9.01.20 12:5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앗, 아아... 36.5도의 생체난로로 혹한기를 대비하는 꽁냥꽁냥 커플이라니!

    리아쥬 폭발해랏!!! ㅠ_ㅠ)

    • Favicon of https://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9.01.20 17:30 신고 address edit/delete

      팬잔 고------!


      (커플들을 향해 굴러가는 수십 기의 팬잔드럼) <-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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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용왕의 숨결


 하늘을 나는 거대한 산.
 황혼을 머금은 짙은 구름을 헤치고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로제 아르카디아 평원에서 충돌한 마물과 인간들은 순간 웅장한 산맥의 일부가 공중에 떠올랐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용왕의 공중요새…… 이제야 행차하셨군.”

 루치아는 기함 임페리얼 제이드의 함교에서 상황을 주시하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일은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본격적으로 용종들의 힘을 눈앞에 목격한 이상 아무리 강철 같은 정신력을 가진 그녀도 긴장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뭐야, 저 어처구니없는 규모는……! 게다가 주변의 저것들 하나하나가 전부 이 기함과 같은…….”

 승무원들 사이에서도 기가 질린 음색이 바람 빠진 풍선 마냥 맥없이 흘러나왔다.

 산처럼 거대한 공중요새 주변을 마치 새떼처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호위함들. 적어도 수백 척, 어쩌면 천이 넘어갈지도 모르는 그것들은 하나 같이 인류연합군이 자랑하는 13척의 공중전함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게 전설 속, 용들의 힘…….”

 승무원들이 잔뜩 위축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용종들의 기술을 모방해 공중전함의 건조에 성공한 인류군은 단 십 수 척만으로도 마왕군과의 싸움에서 제공권을 지킬 수 있었다. 한데 용종들은 그런 공중전함을 수백 척 이상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공중전함이 작은 까마귀로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한 천공의 요새까지 보유하고 있다. 그 세력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는 개미와 코끼리를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명백했다.
 하지만 루치아는 언제까지 무력감에 떨고만 있지 않았다.

 “용들의 공격이 시작된다! 모두 충격에 대비하라!”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견한 인류군 총사령관이 명령을 내리기 무섭게 용왕의 공중요새와 그 호위함들의 포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지향성 파괴광선, 분열과 융합을 시작하는 열핵폭탄, 그리고 중첩된 차원결계마저 관통하는 특수철갑포탄들. 살아 숨 쉬는, 아니 형체 있는 모든 것들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막강한 섬멸병기들이 무차별적으로 마왕군과 인류군 양쪽을 향해 날아들었다.
 치열하게 격돌하던 적흑의 마왕과 백은의 기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싸움을 멈추고 용들의 군세를 향해 몸을 돌렸다.

 - 인사가 거칠군. 이런 데서 죽지 마라.

 마왕은 대상자 외에는 아무도 들을 수 없도록 집중된 사념을 영웅에게 날렸다.
 하지만 마왕의 씀씀이는 보답을 받지 못했다.

 「넌 죽어도 돼.」

 - 뭐……!?

 마왕은 발끈하며 한마디 하려 했지만, 영웅은 한발 앞서 용왕의 십자포화를 향해 고속으로 질주했다. 마왕 역시 가볍게 혀를 차며 뒤를 이어 영웅의 맞은편 하늘에 나란히 섰다.

 - 그럼 시작해 볼까!

 「…….」

 마왕과 영웅은 용왕의 무자비한 폭격breath으로부터 자기 진영의 병사들을 지켜내기 위해 각자 마력과 성심력을 있는 힘껏 전개했다.






 ‘이것이 휴전협정을 맺기 전, 인류와 마물 사이에 마지막으로 있었던 싸움의 결말…….’

 루치아는 지난 기억을 마치 서류라도 검토하듯이 차분하게 떠올렸다. 다행히 마왕과 영웅이 용왕의 공격을 막아주는 동안 양진영의 군사들은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지만, 드넓은 대평원은 말 그대로 초토화되고 말았다. 이처럼 전설 속에서 불쑥 현실에 개입한 용종들의 막강한 무력武力은 어느 쪽에도 강렬한 공포심을 심어주었고, 덕분에 양측이 싸움을 멈추기로 합의하는 데는 그리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예상대로다. 계획대로 잘 진행되었어. 하지만…….’

 루치아 또한 그 공포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우려라고 해야 할까. 용종들의 기술을 연구해 공중전함의 개발에 성공할 만큼 인류 총대표는 그들의 진정한 힘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직접 그것을 눈앞에서 실감하는 것은 머리로만 알고 있던 것과는 또 다른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인류멸망…… 그 농담 같은 말이 실현되지 않도록 한층 주의를 기울여야겠군.’

 루치아가 이처럼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눈앞에 ‘용궁의 사자使者’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묻겠습니다. 어째서 당신들은 우리의 땅을 함부로 침범한 것입니까? 분명 우리와 당신들 사이에 맺은 조약은 792년 245일의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극소수의 지성체밖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총대표 당신은 우리와 맺은 영토조약의 존재를 엄연히 인식하고 있는 개체 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조약을 어기고 군대를 이끌어 우리의 땅을 어지럽혔습니다. 용왕께서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하십니다. 변명할 말이 있습니까?」

 맑고 깨끗하지만 억양이 단조로워 무기질적으로 들리는 음색을 발하는 용왕의 사절.
 용종의 일원인 이 사절은 놀랍게도 인간 여성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외견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아름다운. 물론 어디까지나 인간과 비슷할 뿐 당연히 아주 같지는 않다. 특히 금속성의 뿔과 날개, 그리고 꼬리는 그녀가 사람과는 다른 존재임을 강렬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물들과는 또 달라. 굳이 말하자면 인공적인 조형물에 가까운 인상이군.’

 사절에게선 그 목소리만큼이나 전반적으로 생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전적인 여신상이 마법으로 그저 움직이고 있을 뿐인 것만 같다고 하면 올바른 비유가 될까. 사절의 탁한 잿빛 눈동자와 윤기 없는 머리카락도 그런 분위기에 일조를 하고 있었다.
 관찰은 여기까지. 루치아는 사절이 대답을 요구하며 재차 다그치기 전에 자연스럽게 준비된 답변을 입 밖으로 꺼냈다.

 “우선 조약을 어기고 함부로 땅을 침범한 것에 대해선 사죄하지. 전적으로 이쪽의 잘못이니까. 하지만 우리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걸 용왕께서도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건?」

 “우리 인류는 그간 마물들과의 전쟁으로 상당히 궁지에 몰려 있었다. 더 이상의 패배도 퇴각도 용납되지 않을 만큼. 그런 의미에서 로제 아르카디아 평원에서의 전투는 전략적으로 반드시 필요했다. 그곳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승률은 매우 희박했어. 우리의 생존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용왕께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한 것은 정말 죄송스럽지만, 귀하도 알고 있다시피 우리 쪽에서 그대들에게 먼저 연락을 취할 수단은 없지.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내 집무실까지 직접 찾아와 해명할 기회를 준 것은 고맙군.”

 루치아의 말에는, 말하지 않은 진실은 있어도 거짓은 없었다. 애초에 늦든 이르든 용왕이 사자를 보내 자신들의 뜻을 확인할 것임은 예상하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위가 아니라 진의. 용왕에게 적대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전달할 수만 있다면 성공인 것이다.

 「…….」

 하지만 루치아의 곁을 지키고 있는 백은의 기사는 그리 심정이 평온하지 못했다. 용궁의 사자는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 루치아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심야에 불쑥 집무실에 침입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만약 루치아가 말리지 않았다면 영웅의 성검은 이미 사자의 심장을 꿰뚫은 지 오래이리라.
 하얀 영웅이 흉흉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는 그때, 일순 사절의 눈이 다채로운 빛깔로 짧게 반짝였다. 사절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담담히 입을 열었다.

 「…용왕께선 일단 당신의 변명에 납득하셨다고 합니다. 대신 후일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사죄를 표명할 것과 영토조약의 재강화를 요청하셨습니다.」

 “관대한 조치에 감사드린다고 전해줘.”

 루치아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전하면서도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백은의 기사와 성검 센트럴 도그마가 있는 이상 용종들을 상대로도 쉽게 밀리지는 않겠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영웅과 그 성검 이외에 용들에게 대항할 방도는 현재 인류에게 없었다. 인류군의 주축인 창기병과 13척의 공중전함으로는 용왕의 대함대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할 것이다.

 싸우면 필멸.
 설령 영웅의 성검이 용왕의 목까지 칠 수 있다 해도, 그때쯤이면 인류는 그녀 외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 승리에 의미는 없다. 싸울 의사가 없다는 용왕의 전언에 루치아는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절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또한 용왕께선 말씀하셨습니다. 약자가 협상에 임할 때는 좀 더 솔직하게 속을 밝히고 순순히 고개를 숙이는 편이 좋다고. 그리고 두 번 다시 우리를 끌어들여 이형의 실험동물들을 견제하겠다는 얄팍한 수작은 부리지 않는 편이 좋다고. 다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질 경우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니 짧은 생각으로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금언, 명심하도록 하지.”

 루치아는 신랄한 말에도 불쾌한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인류의 여왕Lucia을 숭배하는 백은의 기사는 그 모욕을 가만히 참고 넘길 수가 없었다.

 「네놈들이 스스로의 힘에 취해 어떤 오만한 행태를 보이건, 그건 너희의 자유다. 하지만 나의…… 우리의 대표 앞에서는 예의를 갖춰라. 너희들은 과거 선대 마왕과의 싸움에서 크게 패배한 적이 있지. 그 마왕의 심장을 꿰뚫은 것이 누구의 검인지 기억해라.」

 루치아의 의지를 힘으로 대변하는 하얀 영웅은 평소 말수가 적었지만 결코 언변이 어눌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위협당할 때면 언제나 그녀는 말과 행동을 아끼지 않았다.

 「인과초월괴리체, 개체명 이클립스를 격퇴한 창세기의 유산聖劍…….」

 센트럴 도그마의 위협을 눈앞에 둔 용궁의 사자는 물끄러미 칼끝을 응시한 채 무언가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한번 시험해 보겠습니다.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 접속.」

 다시금 용종의 눈동자가 오색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는 순간 그녀의 뿔과 날개, 그리고 꼬리가 둔탁한 회색에서 에메랄드빛으로 선명하게 물들었다.

 「FDF 시동.」

 주문과도 같은 한마디가 입술에서 흘러나오자 용종의 주변에 수개의 칼날과 포대로 이루어진 개인화기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형성돼 추가되었다.

 「결국 실력 행사하겠다는 말이군!」

 하얀 영웅이 크게 소리치는 동시에 두 사람은 서 있던 자리에서 마술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곧이어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귀가 찢어지게 진동하는 총포음.
 고속으로 움직이는 영웅과 용종의 전투는 일반인의 눈으로는 쫓을 수 없어 그저 허공에서 불꽃이 튀고 엄청난 풍압이 휘몰아치는 것으로 무언가 주변에 있다는 것을 간신히 인식할 수 있을 뿐이었다.

 “…….”

 초단위로 폐허가 되어 가는 집무실에서도 루치아는 가만히 자리에 앉은 채 태연했다. 이는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질린 것도, 반대로 단순히 담이 크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단지 그녀는 자신의 검을 믿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래도, 우리가 약자인가?」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용종은 엉망진창이 된 채 땅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백은의 기사는 그 용종의 목에 칼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압도적인 승리. 뿔이 부러지고 날개가 잘리고 꼬리가 끊어진 용궁의 사자와 달리 하얀 영웅은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채 호흡마저 평안했다.

 「과연, 세상에서 도망친…… 배신자들의 직계……. 시공격절관통쇄기의 사용법은 제대로 숙지하고 있군요…….」

 그러나 사절은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져 있으면서도 표정 하나 일그러뜨리지 않았다. 고통을 참고 있다기보다는 아예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알아듣지 못할 너희들만의 흰소린 집어치워. 그보다 루치아에게…… 대표에게 네놈의 무례를 사죄해라. 그렇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하지만 사절은 영웅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대표를 끝까지 지킬 수 있겠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백은의 기사가 쥔 칼끝에 힘이 더 들어갔다.

 「무슨 헛소릴 하는 거냐. 여기 널브러져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얼마나 오만하면 패배를 받아들지 못해 심각한 인지부조화를…….」

 「전쟁은 저와 당신만이 하는 게 아닙니다.」

 사절의 짧은 한 마디에 영웅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손쉽게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대일의 싸움. 용왕의 공중요새에는 이런 용종들이 수천수만은 바글거리고 있을 터. 그에 일전 평원에서 봤던 대함대나 그밖에 용종들이 감추고 있을 다른 비밀병기들까지 생각하면 그 격전 속에서도 끝까지 루치아를 지킬 수 있을지, 영웅은 솔직히 조금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쯤하지. 용왕께서도 그 뜻을 충분히 이루었다고 생각하는데.”

 자신의 믿음대로 폐허가 된 집무실에서 옷자락 하나 찢어지지 않고 무사한 루치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백은의 기사가 마지못해 검을 치우자 용궁의 사자는 너덜너덜해진 몸을 간신히 일으키며 말했다.

 「당신들이 용왕의 호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확인했을 뿐이니 너무 불쾌하게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아닌 당신들의 평온을 위해서.」

 “걱정 마. 충고는 잘 받아들일 테니. 한데 부축은 필요 없나?”

 「괜찮습니다. 소동이 커지지 않도록 휘하 병사들의 관리나 부탁드립니다.」

 용궁의 사자는 끝까지 거슬리는 말을 남기며 찢어진 날개로도 하늘로 솟아올라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생각보다 일이 커지긴 했지만, 그래도 기대했던 것보다는 잘 풀렸군.”

 루치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켜 갑주로 몸을 감싼 영웅의 곁에 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지켜줘서 고마워. 나의 기사님.”

 오늘 용종의 방문을 예상한 루치아가 일부러 호위병을 멀리 배치했기 때문에 소란에 눈치 챈 사람들이 달려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있을 것이다. 루치아는 영웅의 투구를 살며시 벗겨, 그녀가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오늘 밤 모든 불쾌한 일과 피로가 말끔히 씻겨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북부 아이어스 공화국의 폐허.
 마왕군과의 전쟁에서 멸망당한 이 비운의 땅은 현재 마물들의 서식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곳은 마물들이 강제로 점령하고 있는 땅이 아니었다. 휴전협정의 조건 중 하나로 일시적으로나마 엄연히 마왕군 측에 정식으로 양도된 지역이 된 것이다.

 물론 그 협정조건에 대한 인류진영의 반발은 극심했고, 특히 공화국 생존자들의 반대는 루치아에 대한 테러로 이어질 만큼 격렬했다.
 하지만 당장 싸움을 멈추는 게 중요하다는 점, 꼭 조약이 아니더라도 이미 공화국은 멸망해 그 옛 땅은 마물들에게 점령된 상태라는 점, 공화국이 있던 그 북부의 땅은 춥고 빈한해 인류에게 이용가치가 덜하다는 점 등 때문에 결국 협정은 체결되고 말았다.

 반면 마물들 입장에서는 애당초 이번 전쟁 자체가 자신들의 서식지를 빼앗긴 데에서 유발된 것도 크기 때문에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지역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의의가 있어 휴전협정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인간들이 그렇듯 마물들 역시 이 휴전에 모두가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을 한입에 집어삼킬 만큼 큰 몸집을 한 흑사자 한 마리가 내 발 아래 깔린 채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 왕! 이건 아니지, 이럴 순 없지!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당해 왔는데 여기서 싸움을 멈추면 안 되지! 그러고도 네가 우리들의 왕이야? 응!?

 마왕의 모습으로 이 거대한 마수를 제압한 나는 그 위에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

 - 시끄러워. 졌으면 닥치고 내 뜻을 따라. 애초에 그런 약속으로 승부를 벌인 거잖아?

 하지만 검은 마수는 막무가내였다.

 - 아, 난 왕이라면 내 뜻을 알아줄지 알았지! 왕이라면 두목이잖아. 두목이라면 부하들이 떠받들어주는 대신 보살펴주고 책임져주고 억울함을 풀어주고, 뭐 그런 거 아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말투 자체는 투박했지만 의외로 이 흑사자는 ‘윗사람’의 본질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 그래서, 뭐가 그렇게 억울한데. 인간들이 너한테 뭐 했냐?

 - 아니. 감히 어떤 인간 따위가 날 건드릴 수 있다는 거야?

 쓰러진 채로도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젓는 흑사자.
 아, 머리가 아프다. 대체 그 여자는, 선대 마왕은 어떻게 이런 놈들을 다스릴 수 있었을까. 단순히 쥐어 팬다고 말을 듣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난 300년의 인내심을 끌어 모아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래, 그렇겠지. 벼락을 내리는 뿔을 가진 환수를 감히 그 누가 함부로 건들겠냐. 그러니 이상하다는 거다. 특별한 원한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인간들과 싸우고 싶어 하는 거냐. 단지 유혈을 원해서 그러는 거라면, 난 허락할 수 없다.

 하지만 흑사자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 원한이라면 있어. 인간 놈들이 내 먼지핥기들을 있는 대로 다 잡아먹었거든.

 여기서 이 흑사자가 말하는 먼지핥기란 거대한 마수들의 털에 엉킨 노폐물 등을 처리하며 마력과 영양분을 섭취하는 자그마한 새 종족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새들은 마수들과 공생관계에 있는 존재였는데, 인간들에게는 일부 지역에서 별미로서 소소한 인기가 있었다.

 - 아, 그야 안 된 일이지만…… 목욕이라면 인간형태로 변해서 하면…….

 - 그런 게 아니라고, 왕!

 다시 한 번 있는 힘껏 울부짖는 흑사자. 나는 내심 귀가 아프다고 불평하면서도 이 마수의 말을 마저 경청했다.

 - 먼지핥기들은 확실히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지만…… 그래도 항상 내 털을 깨끗이 관리해준 고마운 녀석들이었어! 근데 녀석들이 어린애들 몇만 남고 싹 몰살당하고 말았다고! 그걸 어떻게 참아? 난 녀석들의 두목으로서 원한을 풀어주어야만 해! 왕은 우리들 전체의 두목으로서 그걸 도와줘야 하고! 안 그래!?

 두터운 의리를 강조하는 흑사자. 마물들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에게는 믿어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 놈들도 단순해서 그렇지 따질 건 따지고 산다.

 ‘싸우고 싶어 하는 이유는 이제 이해가 되는군. 하지만 참 얄궂네. 먼지핥기들이 몰살당한 이유는 다름 아닌…….’

 마왕군이 일으킨 전쟁 탓.
 본래 먼지핥기는 별미이긴 해도 풍미가 독특해 호불호가 심하게 갈려 남획될 정도로 인기가 좋은 고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물자공급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많은 지역에서는 당연히 식량 또한 부족하게 되었고, 먹을 수만 있다면 살기 위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먹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얘기를 그대로 할 수는 없다. 어차피 납득도 하지 않을 테고. 난 전가의 보도 마냥 준비된 변명을 입에 담기로 했다.

 - 싸우지 말라는 게 아니야. 조금만 기다리라는 거지. 지금은 상황이 안 좋으니까. 너도 평원의 전투에 참여했으니 알겠지만, 용왕의 함대를 봤지?

 - 으, 엄청 났어. 그때 왕이 아니었다면 우린 다 죽었을지도 몰라. 정말 고마워.

 동물적인 감각으로 용종들의 위세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게 솔직하게 감사를 표하는 흑사자. 이런 점 때문에 인간들에 치우친 생활을 하면서도 난 이 놈들을 미워할 수 없었다.
 난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주저 없이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 아무리 나라도 용왕과 인간들의 영웅을 동시에 둘 다 상대하는 건 힘들어. 용들이 조용해지면 다시 인간들을 혼내줄 테니까 그때까지 잠시만 참아.

 - 아, 그 하얀 갑주를 뒤집어 쓴 놈도 무진장 강하지. 음, 그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네. 역시 왕! 다 우릴 위해서 행동하고 있었구나! 알았어. 그때까지 겨울잠이라도 자고 있지 뭐. 싸울 때 꼭 불러줘!

 흑사자는 납득을 했는지 몸을 일으켜 어슬렁어슬렁 자기 보금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 후우, 오랜만에 몸 풀었다 생각하자. 그럼 더 귀찮아지기 전에 어서…….

 기껏 사람이 기분을 전환하며 도서관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끈적거리는 목소리가 날 붙잡았다.

 “후후. 그런 거짓말도 아무렇지 않게 하시고. 이젠 꽤나 옥좌가 몸에 익숙해 지셨나 봐요? 하는 일은 마왕이라기보다는 인간들의 권력자에 가깝긴 하지만.”

 흰 드레스와 양산으로 몸을 치장한 순백의 서큐버스 루시 루시드 드림. 공간을 넘나드는 게 특기인 그녀는 예고도 없이 어디서나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난 목에 매달리는 루시를 밀어내며 말했다.

 - 쯧. 징그럽게 달라붙지 마. 이래서 빨리 가려고 했는데. 왜 루치아 측에서 연락이라도 왔나?

 루시가 공간의 틈새에 숨어 엿보고 있다는 건 아까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말과 다르게 루시를 진짜로 무시하고 떠날 수 없었던 것은, 그녀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먹잇감도 아닌 상대에게 찾아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래봬도 마왕군의 참모이자 마왕의 전속 비서관이기도 했다.

 “웅, 재미없게. 맞아요. 방금 용왕과 이야기가 잘 끝났다고 연락이 왔네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볼을 부풀리는 루시. 물론 이는 자신이 귀엽게 보인다는 것을 알고 하는 계산된 행동이었다. 나는 몽마에게서 용들의 땅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 이걸로 당분간 파멸의 위기는 피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기폭제는 도처에 깔려 있어. 과연 인간과 마물, 어느 쪽에서 먼저 폭발하게 될지…….

 뭉클. 내 팔에 달라붙는 부드러운 감촉에 항의하기도 전에 서큐버스는 자신만만하게 미래의 일을 입에 담았다.

 “인간 쪽에서 먼저 사고를 치게 될 거예요. 내기해도 좋아요. 언제나 평화를 먼저 무너뜨리는 건 그들이었으니. 만약 제 말이 틀리다면 마왕님께 제 순결을 바칠게요.”

 평화가 깨질 수 있다는 말에 잠시 경직된 나는 그녀의 말에 조금 늦게 반응했다.

 - …아니, 그런 거 줘도 필요 없어. 애당초 순결 같은 거 있지도 않잖아. 근데 어떻게 내기가 성립이 돼?

 당연한 지적에 루시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네, 말씀처럼 없는 걸 드릴 순 없으니 내기는 성립될 수 없죠. 그만큼 제 말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랍니다.”

 웃음기를 머금은 그녀의 얼굴은, 그러나 눈가는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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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9.01.09 19:30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으으... 마족들도 나름 정이 많고 따스한 성정을 지니고 있군요.

    여기에 정당한 투쟁의 이유들까지 밀접하게 얽혀있으니, 주인공인 마왕 입장에서도 쉽사리 내치고 도서관 생활로 돌아가기 힘들만도 하겠어요.

    게다가 어떠한 관점에서 본다면 인류보다 순수한 측면도 있고 말이예요. >_<)

    • Favicon of https://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9.01.10 07:01 신고 address edit/delete

      현실에서도 보면 일정 이상 되는 집단과 집단 간의 충돌에는 서로 나름의 정당한 이유나 물러설 수 없는 사정 등이 얽혀 있어 그 갈등을 풀기가 참 힘든 것 같아요ㅠ_ㅠ

      작중의 마물들도 말씀처럼 순수한 일면이 있는 반면 아무렇지 않게 인간들의 마을을 짓밟고 사람을 찢어발기며 먹어치우는 잔인한 일면 또한 있기 때문에 그런 비극을 당한 사람들 입장에선 화평이란 그야말로 인류에 대한 배신으로밖에 들리지 않겠지요;;;

      한국의 경우도 오랜 세월 주변국들의 힘 관계에 시달려 왔고 최근에도 이웃나라와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데, 부디 최대한 양자가 피해를 덜 입고 앙금을 덜 남기는 쪽으로 현명하게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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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선택의 순간 (後)


 “왜 마족 어린애가 거리 한복판에 있는 거지……?”

 자신의 허리를 꼭 붙들고 있는 녹색머리 소녀에게 세실리아가 보인 감정은 공포나 혐오 이전에 당혹감이었다. 그녀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이곳은 좀처럼 마물들을 찾아보기 힘든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도서관의 이름을 그대로 딴 이 헤미스피어 시市는, 인류의 세력권 깊숙이 위치하고 있다. 덕분에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도 ‘아직은’ 마물들의 위협이 직접적으로 닿지 않는, 몇 안 되는 안전지대 중 하나였다.
 난 잠시 상황도 살필 겸 우선은 사소한 사항부터 정정하기로 했다.

 “걘 어린애가 아닌데요. 엄연한 요정fairy의 성체에요.”

 “페, 페어리라고……? 그것들, 손바닥에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작은 게 아니었어!?”

 세실리아의 귀여운 오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하하, 소문은 과장이 섞이기 마련이죠. 이미 말했듯이 다 자란 게 저 크기인 데다, 개체의 따라선 더 작은 녀석들도 없는 건 아니니 그런 인식이 생길 수도 있겠네요.”

 “우……. 모를 수도 있지 웃을 것까지야…….”

 내 태도에 마음이 상했는지 세실리아는 살짝 눈을 흘기다 다시 자신의 허리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요정 소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아이, 덜덜 떨고 있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요정 소녀를 걱정하는 세실리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왕군을 용서할 수 없다는 그녀도 역시 이런 작은 아이에게까지 적의를 드러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난 그녀를 이중적이라 비난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적敵을 온전히 적으로밖에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의 적이 아닐까.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거, 생각보다 일이 귀찮아질 수도 있겠는걸.’

 요정fairy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부 ‘여왕’으로 분류되는 극소수의 특수개체를 제외하면 대부분 별다른 마력도 없고 육체적인 힘도 떨어지며 성격마저 소극적인 겁 많은 종족에 불과하니까. 다만 요정들은 정안淨眼이라 하여 선한 존재와 악한 존재를 간파할 수 있는 신비한 눈을 가지고 있다. 표현은 거창하지만 요는 누가 위험하고 그렇지 않은지 본능적으로 민감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는 뜻이다.

 ‘뭐 나보다 세실리아를 고른 건 그렇다 쳐도, 문제는 요정이 위협을 느끼고 도망치게 만든 누군가가 있다는 뜻인데…….’

 불길한 예감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아! 저기 있다! 거리까지 도망쳐 나오다니, 하여간 사람 귀찮게 하기는!”

 크게 소리 지르며 골목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두터운 방어구에 대검과 소총으로 무장한 험상궂은 인상의 한 용병이었다. 그녀가 용병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던 것은 딱히 내 통찰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의 기계식 의수와 의족에 용병협회의 인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용병은 천천히 우리에게 접근해오며 입을 열었다.

 “이봐, 거기 아가씨들! 내 페어리를 ‘보호’해줘서 고맙군. 많이는 못 주지만 조금은 사례할 테니 순순히 넘겨…….”

 - La___Da___De___Na___IE___Ah____!!!

 하지만 용병은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요정 소녀가 갑자기 울부짖으며 한층 세실리아에게 꼭 매달렸기 때문이다.

 “뭐, 뭐야!? 뭐라고 하는 거야?”

 혼란스러워 하는 세실리아를 향해 난 간단히 설명했다.

 “납치범에게서 살려달라고 하네요. 자기는 숲에서 과일을 따먹으며 지내고 있었을 뿐인데, 무서운 사람들이 와 다 불태우고 이렇게 낯선 곳으로 끌고 왔다는 모양이에요.”

 요정들의 말은 일종의 압축언어로서 발음뿐만 아니라 소리의 크기, 길이, 높낮이, 그리고 무엇보다 마력의 함유량이 한 단어에 복합적으로 들어가 중첩적으로 뜻을 이루고 있다. 때문에 지성 없는 마물들은 물론 학식 높은 언어학자들 중에서도 마력을 감지할 수 없는 사람은 요정들의 언어를 배울 수가 없었다.

 “저 짧은 말에 진짜 그런 뜻이……? 아니, 잠깐! 너 이 아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거야!?”

 멍하니 감탄하다 날카롭게 위화감에 눈치 챈 세실리아. 아니 실은 아직도 당황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눈앞의 용병보다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고 있는 걸 보면. 아무튼 실수한 건 어쩔 수 없으니 대충 얼버무리자.

 “아…… 실은 어렸을 때 요정들에게 납치Changeling당한 적이 있어서요. 다행히 무사히 돌아오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때부터 마물들이 하는 얘기를 대충 알아들을 수가 있네요.”

 “어쩐지…… 그래서 그런 성격이…….”

 아련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혼자 무언가 납득하는 세실리아. 음, 이런 허술한 변명에도 속아 넘어가는 건 다행이지만,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반면 우리에게 대놓고 무시당하고 있던 용병은 뭐가 좋은지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어이, 꼬맹이! 너 진짜 페어리 말을 알아듣는 모양인데! 마침 잘 됐어. 아무래도 요정언어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저 녀석도 좀 더 비싸게 팔아치울 수 있겠지. 이봐, 꼬마야! 이 언니 좀 도와주지 않을래? 용돈은 섭섭지 않게 쥐어줄게.”

 음, 꼬맹이라는 건 설마 할 것도 없이 날 말하는 거겠지. 게다가 자기 사업을 보조해주는 상대에게 지급하겠다는 대가를 용돈 취급. 처음부터 협조할 생각도 없었지만, 말할 것도 없이 사회적으로 절대 어울려서는 안 되는 신용 없는 부류다.
 하지만 내가 거절하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세실리아였다.

 “잠깐, 팔겠다니…… 설마 이 페어리를 인신매매하겠다는 건가요?”

 용병은 눈을 가늘게 뜨며 사납게 웃음을 지었다.

 “이봐이봐, 아가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 되지. 페어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어디가 ‘인신’매매라는 거냐?”

 “그, 그건…… 하지만 이 페어리는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고 독자적인 언어를 말할 줄 아는 지성체에요. 그렇다면 유사인류권익보호법에 저촉되는…….”

 “푸, 후하하하하하하하하하!”

 용병은 큰 웃음으로써 세실리아의 말을 무참히 묻어버렸다.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그럼에도 용병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웃었다. 그 웃음은 어쩐지 비명처럼 들리기도 했다.
 잠시 후 웃음을 멈춘 용병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전쟁에서 마물들에게 사람들이 얼마나 죽은 지 알고도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놈들의 이빨 앞에서도 어쩌구 보호법 얘기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

 세실리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물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개하다 이번에는 허울 좋은 법 규정을 들먹이며 이상론을 펼치는 자신. 내실 없이 상황에 따라 ‘멋진 모습’만을 취하려고 하는 자신이 얼마나 얄팍한지 모를 만큼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다.

 ‘변명이지만, 이게 내가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였지.’

 나는 인간들 쪽에 상당히 기울어진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인간들을 지키기 위해 마왕군에 맞서 싸운 적은 거의 없었다. 딱히 선대 마왕이 무서웠던 건 아니다. 문제는 내 망설임. 인간들이 다른 종족들에게 벌여온 갖은 만행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선뜻 마물들을 칠 기분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론 어느 쪽이든 크게 다르지 않아.’

 그렇다고 쉽사리 마물들의 손을 들어줄 수도 없는 것이, 그들 역시 과거 강성했을 때는 나약한 인간들을 한갓 먹잇감으로밖에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세력구도의 역전이 일어난다면 이번에는 인간들이 비참한 처지에 빠지고 말 것이다.

 - La___

 작게 소리 내어 울며 걱정스럽게 세실리아를 올려다보는 요정 소녀.
 자, 과연 이 아가씨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자기가 품은 모순을 인정하는 것도, 반대로 거기서 눈을 돌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악취미란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은 없지만, 난 그녀가 어떤 길을 고를지 궁금해졌다.
 세실리아는 고개를 숙여 요정과 한번 눈을 마주친 후 다시 시선을 앞으로 하며 입을 열었다.

 “…페어리들이 팔리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되죠?”

 “이봐, 아가씨! 괜한 생각 말라고. 아가씨가 거기까지 알 필욘…….”

 난 용병의 말을 끊으며 진실을 전했다.

 “마도연구의 실험재료로 쓰이는 게 일반적일 테지만, 요정들에겐 한 가지 용도가 더 있어요. 이들은 얌전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데다, 외부자극에 꽤 민감한 편이에요. 자신의 부적절한 욕망을 양심의 가책 없이 누군가에게 마음껏 풀고 싶은 사람들에겐 딱 좋은 대상이죠.”

 “…….”

 세실리아의 얼굴이 얼음 같이 딱딱하게 굳었다. 냉정해졌다기보다는 혐오와 분노가 허용량을 넘어서 다른 감정들을 억누른 탓에 결과적으로 무표정하게 보이는 것뿐이다.

 “잠깐 이 아이를 부탁할게.”

 세실리아는 허리에 매달린 요정 소녀를 부드러운 손길로 떼어내 내게 넘긴 뒤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 페어리는 포기하세요. 당신 같은 사람에게 넘길 순 없습니다. 불법포획에 대해선 눈 감아 드릴 테니…….”

 “보자보자 하니까…… 이 미친 도둑년이……!”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용병은 더 이상 말은 필요 없다는 듯 곧장 검을 뽑아 치켜세우고 달려들었다.

 “이, 이그니션!”

 세실리아는 당황하면서도 호신용 단검을 뽑아 시동어를 외쳤다. 검에 새겨진 마법문자가 반응해 내장된 마력으로 마도현상을 일으켰다.

 “……!”

 화륵. 용병을 감싸는 큼직한 불꽃. 하지만 용병은 그 불길 속에서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튀어나왔다.

 “싸워본 적도 없는 애송이가! 그딴 성냥불이 통할 것 같냐!”

 퍽. 용병은 검을 휘두를 것도 없이 비어 있는 다른 쪽 주먹으로 세실리아의 명치 부근을 가격했다.

 “컥…….”

 힘없이 허물어지는 세실리아. 예상대로 전장에서 돌아온 용병은 마법내성이 높은 장비들을 갖추고 있었다. 마물들과 사투를 벌여본 경험이 있는 베테랑 전사에게는 당연한 소양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용병은 괴롭게 숨을 헐떡이는 세실리아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난 전쟁에서 손과 발을 잃었다. 마물들에게 뜯어 먹혔지. 그래도 난 운이 좋은 편이야. 우리 부대원들 중에 살아남은 건 나를 포함해 딱 셋뿐이니까. 그렇게 불구가 돼 퇴역했지만 당연히 사회에서도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일상생활조차 어려웠으니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가. 결국 난 굶어죽지 않기 위해 용병협회에 빚을 지고 이 의수와 의족을 달았지.”

 “…….”

 “내가 이 녀석들을 팔아치우는 건 당연한 권리다! 이걸로도 한참 부족해! 내가 잃은 것들을 되찾기는커녕 입에 풀칠하기도 버겁단 말이지!”

 “아윽!”

 노성과 함께 세실리아의 옆구리를 걷어차는 용병. 땅바닥에 쓰러진 그녀는 무참하게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소동이 벌어지는 데도 그녀를 구하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작금의 불안한 정세 속 험한 일에 잘못 말려들어 피해를 입어도 제대로 보상 받을 길이 없으니 다들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이다.

 ‘슬슬 말릴 때가 됐나.’

 방금 전 감정에 찬 용병의 발길질은 전혀 힘 조절이 되어 있지 않았다. 아마 세실리아의 늑골 몇 대쯤은 부러졌으리라. 그녀가 어떤 답을 내릴지 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더 지체했다가는 경호대상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뭐, 경호라는 행위 자체는 이미 충분히 실패했지만. 나중에 녀석에게 무슨 잔소릴 듣게 될지.’

 어떻게 변명해야 도서관장의 귀찮은 추궁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하며 힘을 행사하려고 할 때, 세실리아가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화, 확실히 난…… 허울 좋은 소리만…… 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당신 같은 사람들이…… 지킨 평화 속에서…… 꿈만, 꾸고…… 있던 걸지도…….”

 “이제야 좀 주제 파악이 된 거냐? 늦게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군. 하여간 철부지들에겐 매가 약이라니까.”

 용병은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지만, 세실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결국 당신은…… 약자에게, 분을 풀고 있을 뿐이야……! 자기보다 약한 존재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 비열함이 올바른 현실이라면…… 난, 계속해서 꿈을 꾸겠어!”

 극도의 고통을 견디며 초점조차 맞지 않는 눈으로 호신용 단검을 상대에게 겨누는 세실리아. 그리고 그녀는 다른 쪽 손에 머리에서 풀린 붉은 리본을 꼭 쥐고 있었다. 그 리본은 내가, 정확히는 카타리나가 성목절 축제 때 건넨 선물이었다.
 용병은 잠시 세실리아의 모습을 지켜보다 의수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사람 제대로 돌게 만드는군. 그 적갈색 제복과 고급 장신구, 헤미스피어 도서관 소속의 귀족가 영애 맞지? 권력자 딸 건드려 봤자 좋을 거 없을 테니 웬만하면 일 크게 안 만들려고 했는데…… 안 돼. 도저히 안 되겠어.”

 성큼성큼. 칼을 들고 세실리아에게 다가가는 용병의 눈빛은 아까와는 달리 살기에 넘쳐 있었다.

 “어차피 이런 세상…… 잡힐 것 같으면 외국으로 튀지 뭐. 어디나 살긴 다 거지 같으니까. 그러니 넌 오늘…… 내 손에 죽어라!”

 심상치 않은 기색에 위기감을 느낀 세실리아는 시동어를 외쳤다.

 “이그니션!”

 “그딴 불장난 안 통한다고 했지!”

 용병이 크게 칼을 휘두르자 단검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은 연기처럼 간단히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 2차례 연달아 화염마법을 발동시켰지만 용병에게는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그리모어 없이는 역시…….”

 자신의 무력감에 한탄하며 분한 듯이 중얼거리는 세실리아. 본래 하이젠베르크 가家는 마도서를 해독하고 연구하는 일을 전문으로 삼는 일족이다. 특히 그들 일족에게 대대로 발현된다는 석안釋眼은 마법문자를 통해 직접적으로 마력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즉 평범한 마법사에게는 단순한 참고서밖에 되지 않는 마도서도 그들 손에 들어간다면 엄청난 마력 증폭기가 되는 셈이다. 대신 순수한 마법사로서의 기량은 결코 우수하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마도서 없이는 이처럼 무력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세실리아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리본을 활짝 폈다.

 ‘저건…….’

 리본에는 세실리아가 직접 마력을 담아 쓴 문자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마도 카타리나를 향한 남몰래 간직하고 있던 연심. 세실리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것을 소리 내어 외쳤다.

 “내 사랑은 변함이 없으리Meine Liebe ist grün! 설령 그분이 남긴 물건은 사라져도, 그분을 향한 내 마음은 영원해!”

 마력이 담긴 글자가 그 힘을 발휘하자 리본은 산산조각 찢어지고, 대신 호신용 단검에서 발하는 불길이 한층 그 기세를 더했다.

 “끝까지 발버둥치기는! 그래봤자 소용……윽!?”

 쩍. 용병은 그 자신만만한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가지고 있던 검이나 방어구 등 갖은 항마력 장비들에 금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 말도 안 돼! 이런 일이……!”

 거센 폭발음과 함께 방어구가 부서지며 저 멀리 날아가 잡동사니 속에 처박힌 용병. 조금 꿈틀거리는 것으로 보아 죽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타격이 심했는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난 쓰러진 용병을 향해 속으로 중얼거렸다.

 ‘끼어들어서 미안하군. 하지만 네 편을 들어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어.’

 확실히 세실리아가 최후의 기력까지 짜내 펼친 공격은, 본래대로라면 용병의 방어를 뚫을 수 없었다. 내가 슬쩍 마력을 보태지 않았다면 말이다.

 “으…….”

 한계에 다다른 세실리아는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크게 휘청거렸다. 다행히 나는 그녀가 땅바닥에 고꾸라지기 전에 부축할 수 있었다.

 “에고, 조심하세…….”

 “카, 카타리나 님……?”

 예상치 못한 세실리아의 말에 난 순간 자리에서 멈칫 했다.

 “아아, 카타리나 님……! 돌아와 주셨군요……!”

 손을 들어 내 볼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면서도 기쁘게 웃는 세실리아. 그녀의 눈은 흐린 채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은 상태였다.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로 심한 폭행을 당한 데다, 얼마 안 되는 마력을 있는 힘껏 쥐어짜내 사투를 벌인 탓에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것이다.

 즉 날 카타리나로 혼동한 것은 단순한 그녀의 착각.
 네리처럼 마력의 잔향이라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지금 보고 있는 카타리나는 완전한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내게 그 환상을 부정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훌륭했어요. 자부심을 갖고 편히 쉬세요.”

 난 세실리아에게 무릎베개를 해주며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네…… 카타리나 님…….”

 세실리아는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고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그 옆에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녹색 머리카락의 요정이 하나. 요정은 자신을 지켜준 용감한 소녀를 위해 조용히 숨겨둔 힘을 발휘했다.






 다음 날. 다행히 난 도서관장에게 세실리아가 상처 입을 때까지 내버려둔 일로 추궁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상처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녹색머리의 요정은 드물게 치유술을 행사할 수 있는 개체였는데, 그 힘으로 자신의 은인에게 보답을 한 것이다.
 하지만 부상에서 말끔히 회복된 세실리아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하아, 어째서 다들 믿지 않는 걸까. 어제 정말 카타리나 님이 날 구해주셨는데.”

 의식을 되찾은 세실리아는 기절하기 전에 본 환상과 기억이 이상하게 뒤섞였는지, 수년 전 도서관을 떠난 ‘카타리나 님’이 돌아와 자신을 구해준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물론 도서관의 동료들 중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쟁 후 행방이 묘연한 카타리나가 갑자기 그 순간에 나타나 백마 탄 영웅님처럼 세실리아를 구해주고 떠났다는 이야기 자체가 너무나도 작위적인 데다가, 실제로 거리의 군중들 중에는 세실리아가 화염마법으로 용병을 물리친 모습을 목격한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렇군요. 음, 어제 많이 힘드셨을 텐데, 오늘 하루는 푹 쉬시는 게 어때요?”

 세실리아가 흥분하며 카타리나의 활약을 전할 때마다 도서관 사람들은 애매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휴식을 권했다. 다들 그녀가 충격적인 일을 겪어 일시적으로 기억에 혼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상냥하게 응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당사자에겐 그 상냥함이 도리어 상처가 되는 모양이지만.
 여러 차례 같은 취급을 당한 세실리아는 볼을 부풀리며 내게 힐난하듯이 말했다.

 “너도 옆에서 같이 봤잖아!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상대하기 귀찮았던 나는 강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그나저나 그 용병, 잡히기 전에 도망쳤다고 하네요.”

 세실리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하지만 그 긴장은 두려움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내게 복수하러 온다면 언제든지 상대해 줄 생각이야. 그때야말로 전용 그리모어를 가지고 확실하게 쓰러뜨려 개심시키고 말겠어.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이 아가씨의 장점은 고지식한 만큼 자신의 결의에 대해서도 진지하다는 점이다. 아마 또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다음번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아, 그 요정은 어떻게 됐나요? 직접 보호소에 맡긴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난 아무렇지 않은 듯 짓궂은 질문을 던져봤다. 예상대로 세실리아는 말을 더듬었다.

 “으응? 아, 물론 그렇게 했어. 버, 법대로 해야지.”

 빤히 보이는 거짓말. 전쟁이 터지기 전이라면 모를까,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리 유사인류로 분류되는 종족이라도 마물로 취급되는 이상 좋은 대접을 받을 리 없다. 운이 좋아야 실험실 행일 테고, 운이 나쁘면 용병 대신 보호소 직원들에 의해 누군가에게 팔려나갈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런 시대였다.

 ‘뭐 다른 사람에겐 안 보이겠지만.’

 세실리아의 몸 전체에서 반짝이는 페어리의 날개가루. 그 가루들은 영체인지라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인체에 특별한 악영향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약간은 정신이 맑아지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정도 양이 몸에 묻어 나오려면 요정과 한곳에서 생활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강아지를 몰래 키우는 것도 아니고.’

 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하지만 그건 비웃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친근감을 느끼는 상대 앞에서 무심코 나오고 마는, 그런 편한 웃음이었다. 동시에 난 그녀에게 무언가 배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기 집 앞에 떨어진 아기 새 한 마리를 구하면, 그걸로 되는 걸까.’

 그 누구라도 세상의 모든 이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누군가를 돕는 일쯤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모든 이가 각자 누군가를 돕는다면 결국은 모든 이가 도움을 받는 것과 같다는 동화 같은 환상. 하지만 어쩌면 그게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참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네. 혹시 보, 볼 일이라도 보고 싶은 거야? 그럼 빨리 다녀와. 오늘은 망가진 책상과 의자들 수선해야 해서 바쁘니까.”

 다시 고지식한 태도로 돌아온 세실리아. 하지만 전처럼 그 모습이 답답하게 여겨지지만은 않았다. 나는 “이제 우리가 사서인지 잡일꾼인지 모르겠네요”라고 가벼운 말을 던지며 앞서 가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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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10.26 16:07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아아앗... 이 훈훈함의 폭풍, 견딜 수 없어요! >_<);;

    그러고보니 유기동물을 구조하여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캠페인 관련 문구 중 ‘하나의 버림받은 아이를 구한다고하여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그 동물에게 있어서는 세상 그 자체가 변하는 것이다’ 라는 내용이 문득 떠오르네요.

    이런 사람(?)이 신임 마왕이라면 인류와 마족 양측의 절묘한 힘의 균형을 유지시켜, 차선책으로써의 약 수십년간에 걸친 평화의 시대정도는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나요, 후후... :D (... 양제독님! 그립읍니다 ㅠ_ㅠ)

    • Favicon of https://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10.27 21:56 신고 address edit/delete

      너무 원만한 결말이라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좋게 봐주신 것 같아 안심이 되네요>.<

      동물보호 캠페인 문구 중 그런 멋진 말이 있었군요! 저 또한 위의 내용은 예전에 읽었던 한 순정만화에서 한때의 선의로는 모든 버려진 동물을 돌봐줄 수 없다는 냉정한 지적에 '각자가 자기 앞에 버려진 강아지를 한 마리씩이라도 구하는 걸로 충분'하다는 주인공의 말에 영향을 많이 받았네요.

      물론 사회적인 인식과 구조적인 시스템을 개선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지만, 애초에 그 인식과 시스템이 변화하기 위해선 개인들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주인공도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히 양 제독님을 비롯한 은영전의 멋진 캐릭터들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거대한 두 세력의 대립 간에 줄타기를 하면서도 소소한 일상을 보내는 모습을 재미있게 그리고 싶은 마음이에요.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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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선택의 순간 (前)


 칼날 같은 눈보라가 거세게 휘몰아치는 대륙의 최북단.
 자연의 눈먼 살의가 인간의 침입을 허용치 않는 이 만년설의 땅에는 일견 생명의 숨결이나 문명의 산물 따위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이 보인다. 하지만 날씨가 맑은 날 산맥들 사이를 잘 응시해 보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웅장한 겨울궁전이 풍경과 동화되듯 조용히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얼음궁전에 살고 있는 이는 단 하나. 이제는 세상에 단 한 마리밖에 남아 있지 않은 일각수Unicorn의 마지막 왕녀 트리슈아 라 오벨리오 베르나이드였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과 에메랄드빛을 띠고 있는 이마의 보석 같은 뿔.
 인간형태를 하고 있을 때의 그녀들Unicorn에게는, 어딘가 흉측하고 이질적인 구석이 있는 수인獸人들과는 다르게 마치 신화 속의 여신과 같은 고귀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지금의 그녀에게는 주변 분위기를 한없이 가라앉게 만드는 침울한 기색 또한 같이 풍기고 있었다.

 그녀가 상복처럼 걸치고 있는 검은 드레스. 이는 실제로 멸종당한 자신의 종족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입고 있는 것이었다. 또한 그녀는 눈가를 항상 검은 천으로 감아 숨기고 있었는데, 이는 인간들이 점령한 더러운 세상을 보고 싶지 않아 스스로 눈을 뽑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클립스 님…….”

 조용히 선대 마왕의 이름을 입에 담는 유니콘의 공주. 그녀에게 있어 증오스러운 인간들의 세상을 철저하게 유린한 선대 마왕은 신앙에도 가까운 숭배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영웅의 성검 센트럴 도그마에 쓰러졌다고 알려진 선왕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끔찍한 사실에 트리슈아는 한때 멀어버린 눈에서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 절망했었다.

 “하지만, 그분은 희망을 남기고 가셨어…….”

 이클립스의 뒤를 이은 마왕의 딸. 선왕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딸 역시 악마들의 정점에 서 인간세상을 부수기에 충분한 자격과 힘을 갖추고 있다. 비록 지금은 용종이라는 변수 때문에 잠시 싸움을 멈추고 있지만, 때가 되면 그분의 딸이 다시 분연히 일어나 더러운 인간들을 멸절시킬 것이라고 트리슈아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허락도 없이 남의 침실에 멋대로 숨어들다니, 여전히 불쾌한 녀석이군.”

 일순 온화했던 트리슈아의 어조가 날카로워졌다. 동시에 그녀의 이마에서 뿔이 빛나자 얼음궁전에 맺혀 있던 굵직하고 뾰족한 고드름 중 하나가 뚝 떨어져 벽 한쪽을 향해 고속으로 질주했다. 하지만 그 얼음말뚝은 벽에 부딪치는 일 없이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 우뚝 멈춰 섰다.

 “어머, 무서워라.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스르르. 허공에서 큼직한 얼음의 말뚝을 붙잡은 채 모습을 드러낸 금발의 미녀.
 트리슈아와는 대조적으로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성의 등에는 옷차림과 색을 맞추듯 백조를 닮은 두 장의 새하얀 날개가 돋아 있었다. 또한 금발의 머리에도 작은 날개가 돋아 있었는데, 그것은 앙증맞은 장신구처럼 여성의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하였다.

 인간들의 경전에서 전하는 천사를 떠올릴 만큼 청초하고 신비로운 인상. 하지만 이 여성은 엄연히 악마 일족 중의 하나로서,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인간의 정기를 주식으로 삼는 몽마Succubus였다.

 그녀의 이름은 루시 루시드 드림. 본명이 아닌 가명이었지만, 악마들 중에서 딱히 그녀의 진짜 이름을 궁금해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보다 그녀는 선대 마왕의 오랜 친구이자 자칭 비서관, 그리고 현 마왕군의 참모역할을 맡고 있는 서큐버스로 그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네놈이 내 성에 침입한 것만큼 기분 나쁜 일이 또 있을까. 네놈의 가식적인 옷차림에는 구역질이 난다.”

 트리슈아는 냉랭하게 상대를 매도했지만, 루시는 조금도 웃는 얼굴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제 자리에서 빙글 한 바퀴를 돌아 드레스 자락을 우아하게 춤추게 하며 말했다.

 “「악마는 모두 아름답다. 그래야 인간을 유혹할 수 있을 테니까.」 200년 전쯤 인간들의 어떤 신학자가 남긴 말이야.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악마란 실재하는 우리가 아니라 그네들 종교의 악역을 말하는 거지만, 최소한 우리 서큐버스에게는 정확히 해당돼. 단순히 천박하고 음란하기만 한 모습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쉽게 끌 수 없거든. 물론 이 드레스 속에는 매우 강렬한 자극이 숨어 있지만.”

 “눈이 썩겠군.”

 요염하게 미소 지으며 한쪽 눈을 깜박이는 서큐버스에게서, 유니콘의 공주는 천에 가린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루시는 개의치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시력을 버려도 다 보이는 모양이네. 과연 일각수의 초감각. 내 차림새는 물론 이공간은신까지 단번에 알아챈 걸 보면 오히려 눈이 멀기 전보다 감도가 더 좋아진 거 아니야?”

 세상만물의 파장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일각수의 뿔.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와 같은 보석을 닮은 그녀들Unicorn의 뿔은, 단지 장식품으로 보기에만 좋은 게 아니라 연금술의 소재나 만병을 통치하는 약재료, 일시적으로 신체를 강화하는 고급각성제의 원료로도 효능이 높았다. 그 결과 뿔의 가치를 탐낸 인간들의 무분별한 사냥으로 일각수들은 이 지상에 단 한 마리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
 루시의 말에서 아픈 과거를 떠올린 트리슈아는 더욱 거칠게 입을 열었다.

 “네놈이 쥐새끼처럼 침소에 숨어들었다는 건 뿔로 감지할 것도 없이 알 수 있었다. 그 시궁창 같이 역한 인간들의 냄새가 진동을 했으니까.”

 마지막 남은 일각수의 왕녀가 내뱉은 말은 절반 정도 사실이었다. 인간들을 증오하는 그녀는 그 냄새에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질색했는데, 수시로 인간과 정을 통하는 서큐버스에게서 어떤 냄새가 풍길지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하지만 루시는 서늘하게 웃으며 트리슈아가 숨긴 나머지 절반의 진실을 말했다.

 “한 가지 물어도 될까? 나는 그렇다 쳐도 넌 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그렇게 인간이 싫다면 평소에도 본모습으로 돌아가 있어야 하지 않아? 혹시 인간형태가 생활하기 편해서? 그럼 네 분노라는 건 고작 생활의 편의성에 접어둘 수 있을 만큼 하찮은 거였어?”

 “어디서 그런……! 날 모욕하지 마! 이 모습은 인간들의 전유물이 아니야! 원류를 따지자면 용종들의……!”

 “흐응, 그렇게 나오시겠다. 하지만 남에게 묻어온 냄새조차 역겨울 정도로 인간들이 싫은 건 사실이잖아? 그런데도 인간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인간들의 옷을 입고 지내는 건 모순이라 생각하는데.”

 “그건…….”

 말을 흐리는 트리슈아. 루시는 가차 없이 추궁을 계속했다.

 “내게서 풍기는 냄새가 역겨워? 그럴 리가! 본래 너희 일각수들은 순결한 동정녀의 영혼, 정확히는 어린 소녀들의 순수한 사념에서 큰 매력을 느끼는 성정을 가지고 있지. 내가 인간 여자들과 정을 통하며 배를 채우고 기쁨을 얻는 것만큼이나 순수한 소녀의 마음에서 평온을 얻는 것이 너희들Unicorn의 당연한 본능이야. 설마 고작 100년 전만 해도 나랑 같이 소녀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일을 잊었다고 하진 않겠지? 근데, 바로 어젯밤에도 세상모르는 어린 꽃 한 송이를 꺾고 온 내게서 역한 냄새를 느낀다고? 반대겠지! 넌 오히려…….”

 루시는 끝까지 말을 마칠 수가 없었다. 거대한 얼음기둥이 떠올라 그녀가 있던 벽 한쪽을 아예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릴 만큼 강하게 충돌했기 때문이다.

 “왜? 정곡을 찔렸어?”

 물론 루시는 무사했다. 순백의 서큐버스는 어느새 트리슈아의 뒤에 서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닥치고 사라져.”

 트리슈아는 힘의 행사도 포기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저 상대에게 여기서 나가라고만 명령조의 말을 무력하게 던졌다. 일각수의 왕족이 가진 환수로서의 잠재력을 생각하면 힘으로 서큐버스 한 마리쯤 강제로 내쫓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지만, 그녀에게는 더 이상 그럴 의욕이 남아 있지 않았다.
 루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시해라. 뭐 됐어. 나도 재미없는 상대에겐 흥미 없으니까. 그 아이한테나 가봐야지.”

 “…그 아이? 설마 그분의 따님을 말하는 거냐?”

 맥락상 대상을 알 수 없는 모호한 표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트리슈아는 단번에 루시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아차렸다.

 “뿔의 감지능력은 그런 데서도 발휘되는 거야? 굉장하네. 맞아. 난 아가씨의 참모니까 수시로 찾아가 뵙고 있어. 왜 부러워?”

 루시의 가벼운 도발에 트리슈아는 이를 갈았다.

 “어째서 너 같이 천박한 게 선왕뿐만 아니라 그분의 따님에게까지……!”

 “어머, 정말 모르겠어? 그건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야.”

 전에 없이 진지한 루시의 목소리. 여전히 몽마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지만 그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트리슈아가 입을 닫은 채 대답이 없자 루시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인간에게 절망해 떨고 있는 동안 난 줄곧 마왕님과 함께 전장을 달려 왔어. 네가 스스로 눈을 뽑아 세상을 거절하고 얼음동굴 속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난 줄곧 인간들을 탐하고 즐기고 죽이고 먹어치우며 그들을 배워왔고. 덕분에 여전히 난 인간들의 권위자야. 우리惡魔들 중 누구보다 인간들의 환심을 사 유혹하고 이용할 줄 알고, 반대로 인간들의 적의와 교활한 잔꾀를 알아채 함정을 피하는 법도 알고 있지.”

 “…….”

 “하지만 넌 어때? 네가 가진 뿔의 초감각과 강대한 마력은 마왕군에, 아니 마왕님께 어떤 도움이 되었지? 그리고 네가 가진 100년 전 인간사회의 지식은 현재에도 통용될 수 있을까? 또 서로 무리를 이루어 싸움을 벌일 때 힘을 쓰는 요령과 기본적인 전략들의 운용방법은? 이런 것들만 봐도 왜 네가 아니라 내가 마왕님께 신뢰를 얻고 있는지는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

 트리슈아는 시선을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시는 살짝 고개를 저은 뒤 허공에서 하얀 양산을 꺼내들며 다시 말했다.

 “옛정을 생각해 마지막으로 충고할게. 도망치는 것과 포기하는 건 전혀 달라. 언뜻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설탕과 소금만큼 다르지.”

 말을 마친 루시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양산을 활짝 펼쳤다. 순간 그녀는 수많은 꽃잎을 흩날리며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화창하고 맑은 날씨.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깊고 푸른 하늘.
 근 100년 동안 세상은 이상기후의 영향인지 여름과 겨울만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덕분에 그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선선한 봄과 가을은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산들바람만큼이나 짧아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슬퍼했다. 특히 가혹한 여름의 더위를 견디고 혹독한 겨울의 추위에 대비해야 하는 찰나의 가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야속함을 느꼈다. 동시에 그 가을의 존재가 전보다도 한층 귀하고 고맙게 여겨졌다. 그런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그 계절에 진한 애정과 아쉬움을 담아 새로운 수식을 붙여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황금의 가을’이라고.

 “이런 날 심부름이나 해야 하다니…….”

 절로 나오는 불평. 이처럼 공기만 마셔도 기분 좋은 날에는 햇볕 잘 드는 장소에서 한가롭게 책을 읽는 게 제일이다. 그럼에도 사무용품을 구입하기 위해 이리저리 발품을 팔며 소란스러운 거리를 돌아다녀야 하다니. 딱히 몸을 움직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게는 고역이나 다름없다.

 아니, 이렇게 좋은 날씨에 한해서라면 바깥에 나오는 것도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다. 문제는 역시 사람. 같이 나온 상대가 누구이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것이다.
 마침 서서히 물들어가는 단풍을 구경할 여유조차 주지 않고 갈 길을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꾸물거리는 거야? 빨리 움직여. 외출허가시간 내에 돌아가려면 좀 더 서둘러야 해.”

 가늘고 긴 백금색 머리카락을 보기 좋게 묶고 있는 붉은 리본. 새하얀 피부에 살짝 위로 치켜 뜬 눈매가 어딘지 여우같은 인상을 주는 얼굴. 정식으로 궁정예절을 교육을 받은 것이 분명한 품위 있는 몸동작과 고급스러운 귀걸이…….

 그녀의 이름은 세실리아 F. 하이젠베르크. 구귀족 가문의 영애로서 ‘현재의’ 나보다 3년 먼저 이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는 선임 사서이기도 하다. 물론 실제로는 내 쪽이 100년 정도 까마득한 선배이긴 했지만.

 “네네, 알겠어요.”

 난 대충 손을 저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새로 신분을 세탁한 이번의 나는 다소 무기력한 문제아를 연기하고 있었다. 이는 본래 내 성격이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지난번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안배이기도 했다. 다시는 그 바쁜 나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후배였던 선배의 뒤를 쫓으며 나는 속으로 불평을 토했다.

 ‘하다못해 네리랑 나왔다면 산책하는 기분이라도 들었을 텐데. 얘는 너무 딱딱해서 답답해.’

 이 세실리아라는 아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고지식한 귀족 아가씨’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인류연합에서는 공식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었다. 몇몇 소왕국들도 대부분 입헌군주정으로 전환했으며 기존의 귀족들은 법적으로 평민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동등한’ 신분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그동안 쌓아놓은 자산과 인맥으로 사업을 벌여 크게 성공해 다수의 기업체를 소유한 이른바 ‘자본귀족’으로서 여전히 과거의 지위와 영광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그런 재벌가의 여식 중 한 사람으로서 어릴 적부터 고급교육을 받아왔고, 이른바 귀족으로서의 의무noblesse oblige도 철저하게 몸에 익혀 왔다. 덕분에 다른 재벌가의 주니어들처럼 오만하게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예절과 규율을 깐깐하게 따지는 재미없는 성격이 된 것이다. 단적인 예로 네리와 함께 나왔다면 가벼운 간식거리라도 사먹을 수 있었을 테지만, 이 아가씨에게 그런 제안을 하면 당장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지금 우리는 업무시간 중이야. 그런 사적인 용도로 낭비할 시간은 없어. 더욱이 관장님의 명으로 공금으로 사무용품을 구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오해를 받을 만한 일은 더욱 해선 안 되지.”

 이것이 바로 도서관장이 세실리아에게 물품구입을 맡긴 이유.
 헤미스피어 도서관은 단순한 문화시설이 아니라 중요 문화재에 속하는 건축물로서 국가에서 상당한 지원금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물론 전쟁이 터진 뒤에는 그 액수도 꽤 줄었고, 심지어 직원들 급료조차 현물로 지급하는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지만, 아직까지 지원금 자체가 끊어지지는 않았다.

 설령 액수가 적다고 해도 명색이 국가에서 나오는 지원금인 만큼 그것들은 전부 질이 좋은 금화나 은화이다. 이것을 고지식하게 시장에서 그대로 거래하지 않고 환전소나 암시장에서 장난을 친다면 몇 배 이상으로 불리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공무원이 공금으로 그런 불법거래를 하는 것은 당연히 위법사항이지만, 요즘 같은 어려운 시절에도 그 유혹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 계신 고지식한 아가씨처럼 재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 거리에 나가 돈을 쓰기에는 제격인 것이다.

 반면 내가 세실리아의 동행으로 선정된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 쉽게 말해 난 그녀의 경호원인 셈이다. 이곳 도서관장은 내 정체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사실들을 알 길 없는 세실리아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본을 잘못 보인 걸까. 넌 정말 3년이 지나도록 변함이 없네. 하아, 카타리나 님이 계셨더라면…….”

 “네? 카타…… 아, 3년 전에 사서직을 그만두었다는 그 선배 말인가요?”

 “맞아. 카타리나 님은 내가 아는 한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완벽한 여성이셨어. 정말 유능하고 현명하고, 아름다우셨지. 그분이 계셨더라면 너도 분명 감화돼 제대로 일하게 되었을 텐데.”

 열띤 어조로 옛 선배에 대해 이야기하는 세실리아를 향해 난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카타리나 님’이라는 건 다름 아닌 지난번의 나였기 때문이다.

 ‘정말 미친 짓이었지.’

 한때 재미있게 읽었던 활극소설의 만능 주인공에게 영향이라도 받았던 걸까. 지난번 이름과 직급을 바꿀 때의 나는 인식장애뿐만 아니라 변신마법까지 사용해 스스로를 키 크고 멋진 여성으로 꾸몄었다. 단순히 외견뿐만 아니라 100년 동안 쌓인 사서로서의 지식과 마법의 힘까지 슬쩍 곁들여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했던 것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어.’

 모두에게 칭찬 받고 동경 받는 생활. 도서관의 직원들뿐만 아니라 거리의 사람들마저 내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고, 그중에는 대담하게 연심을 고백해오는 처녀들도 있었다. 이 정도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지 몰랐던 나는 한껏 들떠 한층 ‘완벽한 카타리나 씨’를 연기했다.

 ‘적당히 했어야 했는데.’

 의지가 의존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 관장이 따로 불러 우려를 표할 만큼 도서관 사람들은 모든 일을 일단 내게 물어보고 진행하게 되었으며, 사생활이 없어질 정도로 과도하게 달라붙으며 집착을 표하는 아이들도 생겨났다.

 나는 더 이상 그 숨 막히는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해서 어느 시골학교의 교사와 사랑에 빠져 그녀의 고향으로 결혼하러 떠난다는 거짓말로 ‘카타리나’를 떠나보내고는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신입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대체 어떤 암여우가 카타리나 님을 홀린 건지……! 전쟁만 터지지 않았다면 뒷조사를 했을 텐데……!”

 드물게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리는 세실리아. 당시 이 아이가 이 정도로 나를, 정확히는 카타리나를 좋아하고 있는 줄은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날 의지해온다거나 그밖에 다른 사적인 감정을 드러낸다거나 하는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강철 같은 자제력으로 참고 있었던 모양이다.
 난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뭐 그래도 전쟁은 이제 끝났죠. 아직은 별 실감이 나지 않지만 앞으론 점점 좋아지지 않을까요?”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거리 또한 전에 비해 활기가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지긋지긋한 더위가 끝나고 황금의 계절이 시작된 덕분도 있겠지만, 역시 당분간 마물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안심을 가져다주고 있는 게 아닐까. 적어도 난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야 내가 한 일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뜻이 될 테니.

 “과연 그럴까. 끝난 건 아무것도 없어. 이건 종전이 아닌 휴전에 불과하니까. 게다가 난 이 가짜 평화가 얼마나 갈지 의문이야.”

 가시 돋친 세실리아의 말에 내 눈썹이 꿈틀했다.

 “가짜, 평화요……?”

 “응. 물론 용왕들의 공중요새까지 모습을 드러낸 이상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극악무도한 마왕군과 평화협정을 맺는 일은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어.”

 “…놈들이 언제 약속을 깨고 뒤를 칠지 모르니까?”

 “그것도 있지만, 오히려 협정이 잘 지켜져도 문제야. 만약, 정말 만의 하나 이대로 싸움이 벌어지지 않고 평화가 오래 지속된다고 생각해 봐. 그럼 지금까지 죽은 사람들은 뭐가 되는 거야?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상처는 어디서 보상 받아야 하지? 마왕군과의 전쟁이 시작된 이래 공식적으로 사망이 확인된 사람만 1억 명에 가깝다고 하지. 생존자들 중에는 가족은 물론 고향, 심지어 나라까지 통째로 잃은 사람들도 적지 않아. 그들에게는 모두 자신의 원수에게 복수할 권리와 의무가 있어. 그럼에도 이 평화가 계속된다면, 그들의 마음은 대체 어디서 위로 받아야 하는 걸까…….”

 내게 대답을 요구한다기보다는 거의 감정의 토로에 가까운 세실리아의 말.
 확실히 분노를 머금은 그녀의 힐난에 가까운 물음은 지당했다. 서로 악수하며 화해한다고 깨끗하게 갈등이 해소되는 것은 동화책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환상이다. 개인 간의 싸움에도 화해의 이면에는 앙금이 쌓여 있는 경우가 허다한데, 국가 간 종족 간 전쟁에서 분노와 증오와 슬픔으로 뒤엉킨 질척질척한 감정들의 총량은 오죽하랴. 내가 루치아와 함께 추구하는 평화에 그 상처 입은 마음들을 짓밟는 측면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 마음들을 다 받아줄 수는 없어.’

 폐허에서 루치아에게도 한 말이지만, 마왕군에도 인간들의 도시에 밀려나 삶의 터전을 잃고 종족마저 멸살당해 ‘복수’를 위해 싸우는 이들은 다수 존재한다. 선대 마왕이 마물들에게 그토록 강력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여자가 가진 카리스마뿐만 아니라 그 전쟁 자체가 인간들에게 원한을 가진 마물들의 울분을 충분히 풀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여자를 필두로 단지 살육이나 사투가 좋아 참가한 구제불능의 멍청이들 또한 적지 않았지만.

 ‘뭐 애초에 칭찬 받으려고 하는 일도 아니니까.’

 난 파멸을 부르는 전쟁보다 나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생물에게 있어 생존이 최우선조건이듯이 일단 모두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일은 피하고 봐야하지 않을까. 난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말을 가볍게 내뱉는 사람을 경멸한다.
 그래서일까. 세실리아의 혼잣말이 내 귀에 무척 거슬렸던 것은.

 “나도 곧 19세……. 휴전협정만 맺어지지 않았다면, 창기병을 타고 전장으로 나가 의무를 다할 수 있었을 텐데…….”

 도서관에서는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 귀족 아가씨는 사실 전쟁에서 활약하는 기사라는 허상에 과도한 낭만을 품고 있었다. 지금도 입으로는 의무 운운했지만, 본심은 백은의 영웅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고 있는 자신을 망상한 것이다.
 도저히 불쾌한 기분을 참을 수 없었던 나는 한 마디를 툭 내뱉고 말았다.

 “3초.”

 세실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갑자기 무슨 말이야?”

 “3초 만에 살 거 사고 빨리 돌아가자고요.”

 물론 네가 전장에 나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이 3초라는 뜻이다, 이 철부지 아가씨야!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라 이건 냉혹한 사실이다. 인간과 달리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마물들은 완전히 죽지 않는 이상 다음 전장에 말끔히 회복된 상태로 복귀할 수가 있다. 덕분에 현재 마왕군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수인이나 마수들은 여러 차례 끔찍한 사투를 거치고 살아남은 정예 중의 정예들이다. 이들은 선대 마왕을 제하더라도 인류에게 큰 위협이 되는 막강한 존재들이었는데, 만약 인류연합군이 신형창기병의 보급과 공중전함의 개발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내가 개입하기 훨씬 전에 이미 궤멸적인 피해를 강요받았으리라.

 “음…….”

 세실리아는 내 부자연스러운 얼버무림에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역시 속마음까지는 간파하지 못했는지 우리와 주로 거래하는 도매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어두운 골목에서 무언가 툭 튀어나와 세실리아의 허리에 매달렸다.

 “꺅!? 뭐, 뭐야!? 어, 어린애……? 아니, 이건…….”

 난데없이 세실리아의 허리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것은, 녹색 눈동자에 녹색 머리카락 그리고 등에 반투명하고 옅은 잠자리 같은 날개가 돋아 있는 자그마한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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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10.22 00:2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차회 연재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_<)

    역시 양측의 인적 역학관계들이 복잡다단하게 얽혀있었군요... llorz

    자아 이 것으로 주인공도 루치아도 모두 이마의 주름살 증식 확정! (끌려간다)

    • Favicon of https://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10.22 22:48 신고 address edit/delete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세계를 양분하는 큰 싸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니 간단하게 넘기기 힘든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제 역량으로 모든 것을 잘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주인공들의 분투기를 될 수 있는 한 섬세하게 그려내고 싶은 마음이네요! >.<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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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미로의 입구


 드넓은 평원의 한편을 살벌하게 메우고 있는 갑주의 대열.
 인류연합군의 주축을 이루는 짙푸른 창기병들의 병장기가 석양빛에 반사돼 번쩍거리며, 곳곳에 설치된 둔중한 잿빛 포탑들이 그 거대한 구경을 뽐내며 군단의 진지를 지키고 있다.

 그 반대편 평원에는 지평선에 닿을 만큼 우글거리는 검붉은 이형의 무리들.
 언뜻 사람과 닮았으면서도 기괴한 짐승의 형상을 일부 몸에 품고 있는 수인獸人들부터 집 한 채는 그대로 집어삼키고도 남을 거대한 흰 뱀, 벼락을 부르는 신성한 뿔을 가진 흑사자, 전신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사조 등 온갖 마수와 환수들이 마왕군의 진영을 가득 메우고 있다.

 「…….」

 꽃잎을 연상시키는 유려한 투구와 갑주로 온몸을 감싼 백은의 영웅. 인류군의 최선두에 서 있는 그녀는 찬란히 빛나는 성검 센트럴 도그마를 양손에 쥔 채 눈앞의 마물들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루치아의 의지를 힘으로 옮기는 하얀 기사는, 비록 말수는 적었지만 그 압도적인 무력武力으로 전장의 병사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었다.

 「마왕의 딸…….」

 영웅의 시선은 마물들 중에서도 특히 가장 앞으로 나와 있는 새로운 마왕에게 가 있었다.
 피처럼 붉은 산양의 뿔, 칠흑 같이 어둡고 무거운 긴 흑발, 사상의 본질을 꿰뚫는 황금색 눈동자, 통상공간에 가시화 되어 있는 박쥐를 닮은 4장의 악마 날개, 심층공간에 숨어 있는 7장의 그림자 날개…….

 신들조차 능가할 것만 같은 절대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던 선대 마왕에 비하면 다소 위압감이 떨어지는 면은 있었지만, 그것도 백은의 영웅과 같은 동등한 수준의 실력자나 루치아와 같이 초월적인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나 식별이 가능한 차이. 달이나 태양이나 지상의 한갓 인간들에게는 똑같이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천체이듯이, 마왕의 딸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선대 마왕 못지않게 절망적인 공포 그 자체였다.
 새로이 등극한 마물들의 왕이 입을 열었다.

 - 빛에 눈이 멀어 어둠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이여. 죄의 늪에 빠져 그 진흙으로 함부로 세상을 더럽히는 그대, 비천한 인간들이여. 아직도 스스로의 아둔함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의 섭리에 그 녹슨 칼날을 겨누는가!

 강대한 마력을 품고 평원에 울려 퍼지는 마왕의 목소리. 그것만으로도 마왕군의 마물들은 온몸에 활력이 샘솟는 반면, 인간병사들은 그 기세에 눌려 주춤거리고 움츠러들었다. 그나마 신형창기병Gigantic-Frame이 갖춘 갑주의 보호기능이나, 마도사들이 미리 펼쳐놓은 항마결계 덕분에 이 정도 선에 끝날 수 있었던 것이지, 아무런 대비책도 없었다면 방금 고함소리만으로도 마음이 약한 이들은 제정신을 잃고 발광하고 말았을 것이다.
 마왕의 말은 계속됐다.

 - 난 섭리의 대행자, 위대한 선왕 이클립스의 후계자. 그대들이 지금이라도 뉘우치고 이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뒤를 쫓지는 않겠다. 세계를 독점하겠다는 오만을 버리고 세상 어느 한구석의 그림자를 벗 삼아 다시는 바깥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다면 종의 멸절만은 피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겠다. 하지만 그대들이 우둔하게도 내 손길을 뿌리친다면, 그대들이 저지른 온갖 죄악을 다름 아닌 그대들의 피로 씻어내야 할 것이다!

 쿵. 쿵. 쿵. 마왕의 외침이 재차 울려 퍼지자 전장의 창기병들 중 일부가 무릎을 꿇었다. 항마력 조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왕의 마력이 그 한계치를 돌파한 바람에 기력이 쇠한 몇몇 병사들이 기절하고 만 것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마물들은 마왕의 마력을 받아 점차 그 흉흉함을 더해가고 있었다.
 그때 마왕의 목소리에 대항하듯 낭랑한 보석의 음색이 인류군 병사들 사이에 울려 퍼졌다.

 「우리에게 밤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용종들의 부유석 처리기술을 훔쳐 개발된 13척의 공중전함. 그중 기함 임페리얼 제이드에 승선하고 있는 인류군 최고지도자인 루치아가 직접 확성장치를 통해 입을 열었다.

 「섭리는 따르는 것이 아니라 고르는 것. 우리人間는 언제나 길을 만들어 가고 싶은 곳을 향해 걸어왔다. 우리가 선택한 길은 밤이 없는 세상, 더는 어둠에 떨지 않아도 되는 백야의 세계. 어디서나 빛이 비춘다면 그림자는 생기지 않는다!」

 루치아가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 의지를 대변하는 하얀 기사가 성검을 휘둘렀다.
 세계에서 존재원형을 말살하는 법리의 일부가 구현된 파멸의 빛. 검에 직접 찔리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거기에서 파생된 참격은 수천수만 마리의 마물들을 단번에 일소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렬한 파괴력을 품고 있었다.

 - 어리석긴.

 그 빛을, 마왕은 한쪽 손을 휘두르는 것으로 간단히 튕겨내었다. 마왕의 손에 의해 궤도가 뒤틀린 성검의 참격은 평원 저편 산맥들의 산봉우리를 풀을 쳐내듯 말끔히 소멸시켰다.

 - 대답은 잘 들었다. 그것이 너희가 선택한 길이라면, 그 파멸의 대가도 감당해 보아라!

 적흑의 마왕과 백은의 영웅은 공중으로 떠올라 상공에서 치열하게 격돌했다.






 무너지는 마음.
 왜일까. 난 단지 봄날의 볼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햇살처럼 작은 행복을 바랐을 따름인데. 그런데도 어째서 세상은 자꾸만 멋대로 내 기대를 배신하는 걸까.

 내 바람이 그렇게도 몹쓸 것이었을까. 아무리 어지러운 세상이라도 정당한 대가를 꿈꾸며 하루라도 즐겁기를 바란 것이 그리도 과분한 것이었을까.
 하지만 언젠가 지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 세상이 널 배신한 게 아니야. 이미 네 기대가 세상을 배신하고 있었던 거지.

 기대란 객관적인 예측이 아닌 이기적인 소망.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니 기대란 언제나 현실의 조건을 무시한 채 보고 싶은 것만 보이게 하기 마련이다. 신랄하게 말하자면 어린애가 떼를 쓰는 심정에도 비슷한 것이다.
 지인의 냉정한 지적에는 십분 동의하는 바이지만, 역시 나는 눈앞의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 월급은, 현물지급…….”

 보리와 옥수수가 반 포대, 그리고 약간의 소금과 설탕. 이것이 바로 게시판의 공지사항에 적혀 있는, 금월 도서관 임직원들에게 주어지는 급료의 전부였다.

 …물론 안다. 알고 있다.
 패배 직전까지 몰린 마왕군과의 전쟁으로 나라의 재정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또 물자가 부족해진 탓에 물가가 있는 대로 치솟아 얼마 안 되는 급료보다는 차라리 소량이라도 현물이 훨씬 나을 수 있다는 것도.

 그럼에도 역시 급료로 돈 대신 곡식 꾸러미를 받는 것은 정신적으로 상당히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발군의 효과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처럼 지쳐있을 때는 더욱 더.

 “아하하하, 선배! 왜 이리 기운이 없어요? 잠 못 잤어요?”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부수고 들어오는 밝은 목소리. 동시에 몸이 붕 떠오르는 부유감이 느껴진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리. 난 고양이가 아니야. 당장 내려놓지 않으면 네 손가락이 창기병 다리처럼 변해도 책임 안 져.”

 군사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지만, 이번 인류군에 새로 보급된 신형창기병들은 모두 다리가 역관절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으음?”

 하지만 뒤에서 날 안아든 상대는 딱히 그쪽에 지식이 없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할뿐. 나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직접적으로 말했다.

 “손가락 꺾어버린다고.”

 “으헥!? 선배, 너무 폭력적이에요!”

 내 옆구리를 잡고 있는 손가락을 잡고 살짝 힘을 주자, 상대는 기겁을 하며 양손을 풀었다. 덕분에 공중에서 떨어진 나는 정말 고양이처럼 바닥에 착지하고 말았다.

 “와!”

 짝짝짝. 내 불쾌한 심정도 모르고 태평하게 박수를 치는 후배 녀석. 하지만 화를 내봤자 진만 빠지는 건 나다. 그녀 또한 선대 마왕과는 다른 의미로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네리 네리아우스.
 3년 전에 들어온 후임 사서로서, 양처럼 고불고불 말려 있는 머리카락과 풍만한 몸매, 그리고 낙천적인 성격이 특징인 여자애다. 전쟁이 터져 도서관의 인원충원이 중지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막내 자리에 있는, 한편으로는 불쌍한 녀석이었지만, 본인은 딱히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난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저리 가. 지금은 기분이 별로라서 놀아줄 마음의 여유가 없어.”

 “역시 수면부족이에요? 그럼 안 돼요! 잘 자야지 빨리 크죠. 아, 물론 선배는 그대로인 편이 귀엽긴 하지만…… 아무튼 졸려서 그런 거면 이리 오세요. 제가 무릎베개 해드릴게요!”

 네리는 왠지 모르게 살짝 흥분된 기색으로 내게 다가와 또 껴안으려고 했다. 그녀는 나보다 머리 두 개는 컸는데, 이는 딱히 후배 녀석의 신장이 평균을 넘어서는 게 아니라 내 키가 어린애 같은 것이었다. 마성을 드러냈을 때와 다르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내 덩치는 이상할 정도로 작았다.
 난 다가오는 네리의 얼굴을 밀어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졸린 거 아니니까 필요 없어!”

 정말 졸리지는 않다. 하지만 의외로 날카롭게 정곡을 찌른 부분은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요 한달 동안 연이어 전투를 치른 탓에 몸이 나른한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강행군이었어…….’

 일전 루치아와 가진 비밀회담에서 우리는 평화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양 집단의 우두머리가 멋대로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싸우지 않기로 결정한다고 해서 다른 구성원들 또한 그 합의에 순순히 따라준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전쟁처럼 서로 다른 종족 간에 원한이 쌓일 대로 쌓인 경우는 한층 일을 세심히 진행할 필요가 있다.

 ‘그걸 위한 평원에서의 대충돌…….’

 평화협정을 다른 이들에게도 납득시키기 위해 우리는 오히려 싸움을 크게 키웠다. 다섯 차례 연달아 양군의 무력을 총집결시켜 평원에서 대회전大會戰을 벌인 것이다. 물론 양측 병사들은 어디까지나 들러리. 무고한 희생을 줄이기 위해 양군의 무력을 대표하는 신마왕인 나와 인류군의 하얀 기사가 주로 일대일 대결을 펼치는 형식으로 싸움을 유도해 갔다.

 ‘뭐, 그렇다고 희생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아무리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도 휘말리는 자들은 반드시 나온다. 전장의 지형을 변형시킬 정도의 충돌이었으니 어쩔 수 없기도 했지만, 역시 해묵은 원한과 전쟁으로 인해 다시 새롭게 쌓인 원한으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달려드는 이들이 마왕군에도 인류군에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앞으로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죄업…….’

 정당화시킬 생각은 없다.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이란 말은 구역질이 난다. 설령 그것이 평화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해도 우리의 싸움에 휘말린 병사들의 죽음이 ‘개죽음’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 입장에서는 같은 죽음이라도 모순을 품은 평화보다는 미워하는 인류/마물을 멸절시키는 승리를 위한 초석이 되기를 바랐을 테니까.

 ‘그래도 원하는 건 거의 다 얻을 수 있었어.’

 결국 사람은 결과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걸까. 나와 영웅이 벌인 ‘보여주기 식 싸움’의 효과는 우리가 노린 것 이상으로 확실했다.

 우선 난 선대의 뒤를 이은 새로운 마왕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마물들은 내 힘을 경배하며 충성을 맹세했으며, 인간들은 내 힘에 절망하며 공포에 떨었다.

 백은의 영웅 또한 다시 한 번 인류의 구원자는 누구인가를 확실하게 모두에게 각인시켰다. 인간들은 신의 피가 섞인 성검의 소유자가 마왕의 딸에게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고무되었으며, 마물들은 인간들의 영웅이 자신들 중 가장 오래된 환수마저 간단히 도륙할 수 있다는 것에 전율을 느꼈다.

 ‘하여간 그 녀석, 죽일 기세로 달려들기는!’

 지난 싸움을 떠올리며 난 속으로 인간들의 영웅님을 향해 불평을 토했다.
 당연히 우리들 중 어느 한쪽이 진짜로 죽어선 안 되기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는 분명 적당히 힘을 조절하자고 합의를 했었다. 하지만 정작 싸움이 시작되자 그 아이는 성검의 힘을 조금도 억제하지 않고 발휘를 한 것이다.

 ‘아마도 절반 정도는 진짜 죽어도 괜찮다는 마음이었겠지.’

 선대 마왕에게 한 것처럼 정말 전력을 다한 공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당히 연기로 치부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공격도 아니었다. 사실 양자 간의 평화협정에 동의한 것은 루치아의 생각으로서, 영웅으로 칭송 받는 그 아이는 우리가 서로 손을 잡는 것에 꽤 회의적으로 보였다. 열렬히 루치아를 믿고 따르는 아이인 만큼 정면에 나서서 평화협정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갈 곳 없는 불만이 이런 식으로 분출된 것이 아닐까 싶다.

 덕분에 성검의 참격을 맨손으로 쳐낸 내 왼손에는 아직도 붕대가 감겨 있다. 평범한 상처라면 팔이 뜯겨나가도 금방 재생하겠지만, 센트럴 도그마에 당한 상처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잘 낫지 않는다. 그 성검의 특성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리라.

 그래도 ‘결과적으로’ 그 아이의 돌발행동은 성공적이었다. 덕분에 우리의 충돌이 한층 치열하고 거대하게 포장될 수 있었으니까. 만약 당초 계획대로 진짜 ‘연기’를 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잘 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끝내 놈龍들도 불러낼 수 있었으니.’

 우리가 로제 아르카디아 대평원에서 충돌을 벌인 진정한 이유. 그건 바로 용왕들의 개입을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로제 아르카디아는 일명 ‘용들의 정원’이라고도 불리는 곳으로서, 쉽게 말하자면 용족들의 영역 중 일부였다. 그런 장소에서 대놓고 수차례 싸움을 벌이며 땅을 망쳐 놓았으니, 세간에서는 거의 전설적인 존재로까지 여겨지고 있는 그들도 오랜 침묵을 깨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야말로 화룡점정, 이라 해야 할까.’

 인간들은 새로운 마왕을 보고, 마물들은 백은의 영웅을 보고 자신들로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강대한 적이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에 더해 초월자들 다음으로 한때 세상을 지배했다던 용왕들이 가진 거대한 힘의 편린을 목격하자 다들 본능적으로 위기를 자각하고 만 것이다.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이 싸움에 저들마저 개입하면 남는 건 파멸밖에 없으리라고.

 이렇듯 모두와 함께 위기의식을 공유하게 된 다음에는 상대적으로 일이 쉽게 풀렸다. 물론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시적으로라도 휴전을 맺자는 제안까지는 서로에게 납득시킬 수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앞으로의 노력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월급봉투는…….’

 오랜만에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왔지만, 상황은 금방 나아지지 않는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 나는 자꾸 옆에서 왜 기분이 안 좋으냐고 집요하게 묻는 후배 놈에게 현실을 들이밀었다.

 “게시판 공지 아직 안 봤냐? 눈이 있으면 읽어 봐.”

 “네? 뭐라고 적혀 있는데요?”

 네리는 눈을 크게 뜨고 이번 달 월급은 돈 대신 소량의 곡식으로 대신한다는 글을 천천히 읽었다. 잠시 동안의 침묵. 말은 없었지만, 그녀의 들뜬 머리 중 일부가 마치 강아지 귀처럼 축 늘어진 것으로 기분을 짐작할 수 있다. 근데 대체 저건 무슨 원리일까.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난 입을 열었다.

 “이제 내 마음을 알았지? 그러니 귀찮게 하지 말고 다른 데 가 있어.”

 쫑긋. 하지만 그녀의 강아지 귀 같은 머리카락의 일부가 다시 일어서는 순간 분위기도 반전됐다.

 “하지만, 선배! 뭐든 받잖아요!”

 “……뭐?”

 “물론 이걸로는 물물교환으로도 사탕이나 쿠키랑은 바꿀 수 없을 테니 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굶지는 않을 수 있으니 다행이지 않아요?”

 몸을 돌려 나와 눈을 맞추며 활짝 웃는 네리. 이 웃음이 진심인지 아니면 억지로 강한 척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는 내가 우울해 하고 있기 때문에 웃음을 지었다는 사실이다.
 그 상냥함에 차마 침을 뱉을 수 없었던 나는 그녀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래그래. 그렇게라도 생각해야지 별 수 있나. 그나저나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빨리 용건이나 말해. 참고로 사탕이라면 없으니까 기대하지 말고.”

 “앗, 정말 없나요!? 이상하네, 선배한테 분명 달콤한 향기가 나는데…….”

 “우와, 이 변태. 어딜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거야? 저리 꺼져.”

 질색하는 척 하며 가볍게 넘기긴 했지만, 사실 난 그녀가 말하는 ‘달콤한 향기’라는 것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건 다름 아닌 내 마력의 냄새다. 마도사로서 뛰어난 소질이 있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마력을 오감으로 감지할 수가 있는데, 네리의 경우는 그게 후각인 모양이다. 마성을 감춘 인간으로서의 나는 아크메이지라도 쉽게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을 텐데, 아무 지식도 없는 일반인의 몸으로 어렴풋이나마 내 마력을 감지하다니. 만약 그녀가 마도사의 길을 걸었다면 대성했을지도 모르겠다.
 난 마력의 냄새에서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나라고 언제나 사탕을 가지고 다니는 건 아니라고. 시절이 이렇다 보니 단 거에 끌리는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없는 건 어쩔 수 없으니 포기해.”

 네리가 내게서 사탕을 찾는 건 단지 마력을 후각으로 감지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에도 종종 나는 그녀에게 여러 번 사탕을 준 적이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마왕으로 불릴 만한 힘이 있고, 인간 기준으로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내게 있어 기호품을 손에 넣는 것쯤은 전란의 시대에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휴전을 이끌어 내기 위해 평원에서 피곤한 싸움을 벌이느라 도무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내 말에 네리는 뾰로통 볼을 부풀리며 입을 열었다.

 “우, 물론 주시면 감사하긴 하지만, 사탕 얻어먹으려고 선배를 귀찮게 하지는 않아요! 제가 선배를 찾은 건 관장님이 같이 풀 뽑으라고 시키셨기 때문이에요.”

 “……또?”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 전쟁이 길어지며 임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지급할 수 없게 된 도서관에는 말할 것도 없이 인원 또한 대폭 축소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본래는 청소부나 정원사가 해야 할 일도 남은 인원들에게 분배돼 사서가 직접 화장실 청소나 제초작업까지 해야 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요즘 날이 좋다 보니 풀들이 잔뜩 자라서…… 아, 근데 선배 손이 다쳤으니 작업을 할 수가 없겠네요!”

 붕대를 감은 내 왼손에 눈길을 주며 허둥거리는 네리. 일전 성검 센트럴 도그마에 당한 상처는 인간으로 돌아와도 물론 낫지 않고 회복에 시간이 걸리고 있다. 주변에는 대충 넘어져서 삐었다고 둘러대고 있는 형편이다.
 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딱히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풀 뽑는 것 정도는 문제 없…….”

 그러나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안 돼요! 다친 사람은 푹 쉬어야죠!”

 “그래? 그럼 미안하지만 맡길…….”

 “그러니 선배는 옆에서 봐주세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네리를 향해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라고?”

 “아뇨! 그늘에서 쉬거나 책을 읽어도 돼요!”

 “왜 굳이 그런 비효율적인 짓을…….”

 “음, 옆에 누가 있으면 힘이 되거든요. 그게 선배라면 더욱 더!”

 저런 부끄러운 말을 아무런 사심 없이 그냥 내뱉을 수 있다니.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나는 백기를 흔들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래 알겠어. 뒤뜰이지? 먼저 가 있을 테니까 너도 준비해서 와.”

 “네, 선배! 작업도구 가지고 금방 갈게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콧노래를 부르며 사라지는 네리. 나는 차가운 손을 화끈거리는 볼로 가져가 식히며 혼자 중얼거렸다.

 “나랑 있는 게 뭐가 즐겁다고 강아지처럼 따르는지 원.”

 일순 차라리 마력을 조금 살포해 도서관 주위의 풀들을 전부 죽일까도 생각했지만, 내 발걸음은 어느새 뒤뜰과는 반대방향으로 향해 있었다.

 “저 녀석, 준비하는 데 적어도 10분은 걸릴 테니 충분하겠지. 잠깐 다녀올까.”

 목적지는 종교도시 세인트 헬레나. 변경지역에 위치한 소도시로서 발전이 더딘 시골마을 같은 곳이지만, 전란의 중심지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덕분에 현재는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곳이기도 했다. 헤미스피어 도서관에서 고속철을 타고도 3일 이상은 달려야 하는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내 본모습으로 날아가면 1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그곳 수도원에서 만드는 것들은 하나 같이 질도 좋으니까.”

 세인트 헬레나의 특산품은 포도주와 잼, 그리고 수녀들이 만드는 빵과 과자들. 술은 안 되겠지만, 나머지 것들은 제초가 끝난 뒤에 먹으면 한층 맛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후배에게 간식을 사주기 위해 마왕이 되어 하늘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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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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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마왕이 된 이유


 헤미스피어 대도서관.
 인류의 빛나는 지혜들이 무수한 별처럼 반짝이는 서적의 바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제정시절 황제의 권위를 뽐내기 위해 지어진 이 반구형의 거대한 건축물은, 오로지 장서의 보관과 심미적인 외관에만 중점을 두고 설계된 탓에 이용자들의 편의는 조금도 고려되지 않은 게 특징이었다.

 그 비효율성을 극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바로 도서관 중심부의 풍경.
 장엄한 돔 아래 특수하게 가공된 합금서장이 벽을 따라 15층 건물의 높이까지 솟아올라 있고, 그 안에는 온갖 역사적인 장서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주위에는 책장을 밝힐 화려한 보석등불이 촘촘히 박혀 있으며, 오색으로 찬란한 색유리stained glass 아래 당대 유명한 예술가들의 대리석 조각상과 금은의 장식품들이 천상의 방문객 마냥 내부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
 계단도 사다리도, 그밖에 다른 무엇도 아무것도 없다. 하늘을 바라보듯 고개를 젖혀야 그 끝이 보이는 책장 저 끝까지 닿을 수단은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굳이 사람 키를 넘어서는 상단 부분의 책장까지 손을 뻗고 싶다면 고층 사다리를 준비하든지, 부유마법을 사용하든지, 아니면 최근 전쟁에서 발명된 부유석을 장착한 비행 장비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서적이 아닌 업적을 보는 공간.
 내용이 아닌 위용에 감탄하는 공간.

 호의를 갖고 포장하자면 풍성하고 강성했던 제국시절 최전성기의 흔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악의를 갖고 매도하자면 단순한 허세라고 일축할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단연 후자 쪽이라 생각하지만 말이야. 평범한 사람들도 종종 단 한번 읽어본 적 없는, 괜히 어려워 보이는 책들을 책장에 진열해 두곤 할 때가 있잖아? 남들이 그걸 보고 자신의 교양과 학식을 과대평가해주길 은근히 기대하면서. 이 도서관은 그런 흔해 빠진 심리가 국가적 규모로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아. 말하자면 이 도서관 전체가 황제의 책장이었던 셈이지.

 난 어둠 속에서 언젠가 지인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전적으로 그 의견에 동의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도서관 어딜 가나 중심부와 비슷한 꼴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책상과 의자가 생긴 것도 제정시절이 끝난 후대의 일로써 그 전까지는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조차 제대로 없었다고 한다.

 영원히 가는 영광이란 없다.
 한때는 수천의 보석등불이 도심지의 야경처럼 환하게 밤을 밝히던 도서관 내부도 지금은 여느 파괴된 도시들처럼 어둠에 잠긴 채 고요하다. 마왕군과의 극심한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해진 탓에, 더는 도서관에 연료를 공급한다는 ‘사치’를 부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뭐 내 입장에선 딱 좋지만.”

 슥. 난 책장을 넘기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빛도 사람도 없는 밤의 도서관은 독서를 하기에 정말 좋은 환경이다. 조용한 것도 조용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사람 눈치’를 전혀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주위에 보는 사람만 없다면 공중에 누운 채 아주 편한 자세로 책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어둠 또한 독서에 어떤 방해도 되지 않는다. 악마의 피가 흐르는 내게 있어 빛은 사물을 인식하는 필수조건이 아니니까.
 하지만 내 안식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 여어, 딸내미. 잘 있었냐. 여전히 우중충하게 살고 있군.

 세상을 한없이 잠식해 들어가는 검은 목소리. 불청객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마왕, 이클립스……!”

 마치 왕관처럼 머리를 감싸고 있는 큼직한 황금색 산양의 뿔. 그 아래 홍옥Ruby처럼 빛나고 있는 불타는 적색 머리카락. 박쥐를 닮은 표층차원의 흉측한 여섯 장 악마의 날개.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심층차원에 숨어 있는 열세장의 그림자 날개. 털 하나하나가 대마법을 행사할 수 있는 막대한 마력을 내포하고 있는 악마의 사자꼬리…….
 현재 인류의 최대 천적이라 할 수 있는 마왕이 지금 내 앞에 불쑥 나타난 것이다.

 “알비노스 왕국의 아크메이지 클래스의 마법장벽들은……. 쳇, 아예 발동조차 하지 않았군.”

 덤으로 내가 몰래 쳐놓은 다차원수호결계도 마찬가지.
 사실 충분히 힘 있는 존재에게 이런 방어막을 부수는 것쯤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힘 자체를 갖추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그러나 부수지 않고 그냥 통과한다는 것은 단순히 힘이 있고 없고의 문제를 떠나 또 다른 차원의 초월성이 요구되는 난제이다.

 가령 어떤 사람을 여러 겹의 튼튼한 줄로 촘촘히 묶어 두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줄 하나하나마다 조금만 흔들려도 심하게 소리가 나는 종을 잔뜩 매달아 두었다고 하자. 이야기 속의 영웅처럼 충분히 힘이 세다면 근육을 부풀리는 것만으로도 실처럼 줄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또는 관절을 기묘하게 빼거나 뒤틀 수 있는 재주를 가진 달인이라면 어떻게든 줄을 헐겁게 해 탈출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자들에게도 아예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속박에서 자력으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리라.

 이 여자가 마도사들의 마법장벽이나, 내 다차원결계를 무시하고 여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그런 종류의 기적 같은 솜씨에 가까웠다.
 과연 마왕. 악마들의 왕이자, 마법의 왕이라 불릴 만 하다.

 - 하하. 이봐, 딸. 너무 기죽을 거 없어. 다른 떨거지들과 다르게 네 다차원결계는 꽤 훌륭했으니까. 솔직히 좀 놀랐다. 설마 심원영역의 잠행까지 차단하고 들어올 줄이야. 역시 내 딸들 중에선 네가 제일 잔재주가 뛰어나.

 웃으며 말하는 마왕. 일단 딸이라고 치켜세워주는 걸까? 하지만 ‘잔재주’라 칭한 시점에서 이미 칭찬이고 뭐고 없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욕하는 걸로 간주하고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였을지 모르지만, 이 여자는 이게 순수한 감탄의 토로이니 상대하기 곤란하다. 뭐 싸워봤자 이길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니 무시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다.

 “……요즘 문명파괴에 다망하신 분이, 대체 무슨 일로 여기에 오신 건지?”

 잔뜩 비아냥거리며 물었지만, 사실 난 이 여자가 왜 날 찾아왔는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소름끼치도록 아름답고 차갑게, 달빛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마왕. 하지만 언제나 변함없을 것 같은 이 여자의 완결성에는 지금 작지만 커다란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비유 같은 게 아니다. 문자 그대로 마왕의 왼쪽 가슴은 심장과 같이 뻥 뚫린 채 피가 철철 흘러나오고 있었다.

 ‘설마 소문이 진짜였다니……. 낮의 소란은 이게 원인이었군.’

 영웅이 드디어 마왕을 쓰러뜨렸다는 사람들의 환호성. 이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나는 그저 헛소문이라고 치부했다. 사실 전쟁 중에는 사람들의 소망을 투영한 근거 없는 이야기rumor가 민들레 홀씨처럼 이곳저곳 떠도는 게 일상다반사다. 하지만 언제나 올바른 사람이 있을 수 없듯이, 언제나 틀린 소문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만큼은 소문이 진실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가 단지 부상만 입고 돌아온 줄 알았는데 이런 업적을 올렸을 줄은. 아무래도 내가 인간 측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 피들, 어떻게 하지?’

 마왕의 상처에서 쏟아지는 혈액은 순수한 마력덩어리라 전부 공중에 흩어질 뿐, 물리적인 흔적을 남기거나 하지는 않는다. 청소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건 좋지만, 고농도의 마력은 산소와 마찬가지로 생물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만약 이대로 두면 이 일대는 한동안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이 되고 말리라.

 물론 최악의 경우 내가 그 마력들을 먹어치우면 된다. 실제로도 그럴 생각이긴 하지만, 그때는 마성魔性이 짙어져 인간성을 아예 상실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어디선가 발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본적으로 이 도서관에서 책만 읽으며 지내고 싶은 내게는 매우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내 심정을 알 리 없는 마왕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 무슨 일로 왔냐고? 그냥 딸내미 얼굴 좀 보려고 왔지. 너 300년인지 400년인지 여기서만 계속 일하고 있던데, 지겹지도 않냐?

 “내가 여기 속하게 된 지는 이제 곧 100년이야. 지겹기는커녕 아주 잘 지내고 있고. 그리고 내 나이는 아직 300살. 400년 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어.”

 - 그랬나? 딱히 나이 같은 건 평소 생각해 본 적도 없어서 실수했군. 뭐 100년도 제대로 못 사는 인간들처럼 세월에 민감할 이유가 없으니 이런 쪽은 아무래도 둔감해지네. 네가 이해해라. 아! 근데 100년이라도 인간들 기준에선 꽤 긴 세월이잖아. 너 여기서 그렇게 오래 있어도 돼? 인간들은 수명이 짧아서 늙지 않는 존재는 이상하게 생각하던데. 음, 나도 그 아이…… 그러니까 네 모체 되는 여자랑 잠깐 같이 살 때 그걸로 좀 고생했지.

 여전히 무신경한 발언. 하지만 화를 내봤자 내 손해다. 어차피 죽어가는 괴물, 조금은 친절히 대해줘도 문제될 건 없으리라.

 “당신이 말하는 ‘잔재주’로 인식장애 마법을 걸고 있으니 괜찮아. 주기적으로 직급과 이름을 바꾸며 다른 사람처럼 꾸미고 있기도 하고.”

 - 그거 괜찮은 방법이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나도 그때 그런 방법이 떠올랐다면 그 애랑 좀 더 같이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는 듯이 탄식하는 마왕. 이해는 된다. 손짓 한번으로 가볍게 도시 하나는 소멸시킬 수 있는 존재가 인간들의 사고방식에 맞춰 자신을 꾸며야 한다는 발상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으리라. 오히려 나를 낳아준 어머니를 생각해 겉모습이나마 인간처럼 꾸미고 30년 넘게 같이 지냈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처럼 놀라운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쓸쓸한 죽음을 목격한 나는 이런 말을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무슨……. 당신이 우리 엄마를 사랑하기는 했어?”

 - 당연하지! 그렇지 않으면 네가 태어날 리가 없잖아. 아직도 그 아이는 내 기억 속에 선명해. 뭐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딱히 이 여자를 위해서가 아니다. 여기서 잘못 힘을 개방하면 내가 안식처로 삼고 있는 이 도서관 자체가 붕괴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후…….”

 진정하자. 이 여자가 무신경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까.
 200년 전에도, 이 여자는 불쑥 내 앞에 나타나 엄마를 찾았었다.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넘은, 끝까지 마왕을 그리워하다 외롭게 눈을 감은 우리 엄마를. 내가 엄마의 죽음을 전하자, 이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 아, 그러고 보니 인간들은 수명이 짧았지. 난 생각이 짧았고. 하하. 간만에 얼굴 좀 보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그 뒤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난 피투성이로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으니까.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변할 만큼 이성의 끈이 끊긴 내가 마왕에게 덤벼들었다가 도리어 신나게 얻어맞고 빈사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때 싸움의 여파로 대륙 북부의 산맥 하나가 등이 끊어지고 만 것은 내 부끄러운 사춘기의 흔적이다.

 - 응? 이 녀석이 날 죽이려고 한 게 아니었다고? 내 자리를 노리거나 날 넘어서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럼 왜 덤빈 건데? 엄마에 대한 애정에서 오는 섭섭함? 음, 잘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넌 인간들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

 참고로 내가 그 싸움에서 죽지 않은 것은 마왕의 자비 따위가 아니다. 이 여자는 설령 자기 딸이라도 덤벼온다면 용서 없이 처리하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살 수 있었던 것은, 마왕의 오랜 친구이자 비서관을 자처하는 한 몽마Succubus가 내 심정을 설명하며 죽이지 말 것을 요청한 덕분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때 이후로 난 이 여자에게 무언가 인간적인 감정을 기대하는 것을 포기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이 여자는 인간이 아니니까. 게다가 나도 이제 300살. 감정에 휘둘릴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나고 또 지났다.
 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입을 열었다.

 “빨리 용건이나 말해. 오늘은 읽고 싶은 책이 좀 많으니까. 정말 내 얼굴만 보러 온 건 아닐 거 아니야.”

 - 응. 맞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 말이야. 이런 어두침침한 데서 100년이나 일했다면 좀 지겹지 않냐?

 여전히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여자다. 하지만 대화를 포기할 게 아니라면 이쪽에서 맞춰주는 수밖에 없다.

 “아니, 아까도 말했지만 안 지겨워. 딱 내 성정에 맞고 좋아.”

 - 그러니까 말이지, 너 내 뒤를 이어라. 나 대신 마왕군 좀 지휘해. 그럼 심심하지 않고 딱 좋잖아? 어때 마음에 드는 제안이지?

 “…….”

 아, 진짜 대화를 포기하고 싶다. 여기가 내가 일하는 도서관만 아니었다면 이미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여자는 상대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강행수단’을 써서 억지로 말을 듣게 만든다. 물론 내 힘으로는 이 여자와 싸워서 이기는 건 무리라도 도망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유서 깊은 헤미스피어 대도서관은 폐허조차도 아닌 평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심장을 잃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해도 이 여자에게는 아직 그만한 힘이 남아 있다.
 그래도 역시 이 여자가 날 찾아온 이유는 예상한 대로다. 난 상대가 듣지 않는다 해도 최대한 진심을 담아 거절의 말을 꺼냈다.

 “싫어. 그런 건 당신의 다른 자식들, 내 언니들이나 동생들에게 부탁하라고. 혼혈인 나와 달리 순혈종인 그 녀석들이 어차피 나보다 힘도 세잖아. 당신 뒤를 잇기에는 더 강한 쪽이 낫지 않아?”

 내게는 위로는 언니가 넷, 아래로는 여동생이 둘, 배가 다른 자매들이 있다. 한명을 빼고는 다들 이 여자를 닮아 손쓸 도리가 없는 잔학한 폭군들이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이 여자를 닮아 힘만큼은 확실하다. 솔직히 마왕의 자리에는 나보다 다른 자매들이 훨씬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마왕은 고개를 저었다.

 - 언니들과 동생들이 아니라 ‘언니와 동생’이다. 나머지는 다 죽었어.

 “……뭐?”

 -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야.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자세한 얘기를 들으니 다른 자매들은 요 200년 동안 내가 관심을 끊고 있는 사이 전멸한 모양이다. 언니들 중 둘은 엄마인 마왕의 자리를 뺏기 위해 도전했다가 죽었고, 나머지 자매들은 서로 영역 다툼을 벌이다가 공멸했다고 한다. 그 싸움에서 언니와 동생 중 각각 하나가 살아남았지만, 둘 다 깊은 상처를 입고 잠에 빠져들어 향후 수백 년은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모양이다.
 ……과연 이 여자의 딸들답다. 동시에 내게도 같은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끔찍하다.

 - 그런 이유로 내 뒤를 이을 사람은 너밖에 안 남았다. 뭐 꼭 내 딸이 아니더라도 다른 능력 있는 녀석이 있으면 뒤를 물려줄 생각이었지만, 인간이나 용종들과의 싸움에서 많이들 죽은 탓인지 쓸 만 한 것들이 안 보이더라고. 해서 나 다음으로 현재 네가 실질적인 마왕군 2인자야. 기쁘지?

 아니 하나도. 그래도 이 여자가 내 기분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지껄여준 덕분에 나 역시 양심의 가책 없이 함부로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내 대답은 변하지 않아. 난 당신의 뒤를 이을 생각 없어. 마왕군 따위 망하든지 말든지. 아니 차라리 망하면 속 시원하겠군. 최소한 내가 사는 지역이 위협당할 일은 없어질 테니까. 무조건 인간들 편만 들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내게는 인간들이 더 친숙해. 인간들의 문명을 즐기는 내 입장에선 마왕군을 응원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 음, 그럼 우리 딸이 많이 곤란해질 텐데…….

 “하! 내가 왜? 곤란한 건 당신이겠지. 이제 곧 죽을 사람이 위협해봤자 소용없어.”

 - 응? 죽는다고? 누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는 듯이 묻는 마왕. 난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의 뻥 뚫린 왼쪽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성검에 심장이 꿰뚫린 당신이 죽지 내가 죽겠어? 설마 그런 어설픈 연기로 얼버무릴 수 있다고…….”

 - 아아! 그러고 보니 오늘 한방 먹었었지! 그래서 그런 착각을 하고 있었군. 잠시만 기다려.

 마왕이 가볍게 말하며 가볍게 손을 상처로 가져가자, 파괴된 심장이 단번에 재생하며 출혈이 멎고 뚫린 가슴이 순식간에 메워졌다.
 난 경악에 표정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다.

 “마, 말도 안 돼! 영웅의 성검, 센트럴 도그마에 심장이 뚫리고도 어, 어떻게……!? 그 성검은 예지계의 존재원형을 직접 파괴하는 살신殺神의 법리를 가졌어! 단지 물리적으로만 대상을 멸하는 게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세계에서 지우는 힘을 가졌다고! 초월자들조차 그 검 앞에서는…….”

 그러나 마왕은 이해하지 못하는 날 오히려 이해하지 못했다.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존재하는 데 왜 세계가 필요해? 나는 나로서 존재할 뿐인데. 그걸로 충분하잖아.

 질렸다. 이 여자가 상식을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난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던 모양이다. 대체 뭘 어떻게 실수하면 세상의 온갖 법칙을 무시하는 이런 무지막지한 존재가 튀어나올 수 있는 걸까. 이런 여자가 지금껏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다.

 - 이봐, 딸. 그게 네가 하고 있는 두 번째 착각이야.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한 마왕의 지적.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 난 딱히 세상을 멸망시키고 싶은 게 아니야. 단지 놀고 싶은 거지. 그걸 위해 이 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거고. 성과는 나름 있었어. 너도 봤다시피 내가 가슴에 입은 상처……. 분명 이건 인간들에게 영웅이라 칭송 받는 그 아이가, 이번에도 무력하게 쓰러질 거라 생각한 그 아이가, 예상을 뛰어넘고 죽을 각오로 없는 힘까지 짜내 내게 입힌 상처다. 박수를 보내 마땅한 투지였고, 실제로 나도 감동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물러나 주었지.

 마왕은 모험을 꿈꾸는 어린아이처럼 두근거리는 얼굴로 오늘의 싸움을 회상했다. 하지만 그 표정은 곧 유년기의 꿈을 잃은 지친 어른의 얼굴로 변했다.

 - 동시에 깨달았다. 이게 인간들의 한계라는 것을. 인간들의 세력이 최절정기에 달했을 때, 인간들 사이에 신들의 힘을 이어받은 역대 최고의 영웅이 등장했을 때, 신들마저 죽일 수 있는 최강의 무기가 그 영웅의 손에 들어갔을 때 싸움을 걸었지만, 그래도 인간들은 날 죽일 수 없었어. 물론 용왕들이나 내 힘을 이어받은 딸들마저도. 더 이상 내가 이곳에서 지금까지 얻은 이상의 자극을 얻을 리는 없겠지.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미친 괴물이라고는 알고 있었던 이 여자가 누군지 다시 모르게 되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반쯤은 알 수 없는 공포심에 쫓기며 물음을 던졌다.

 “당신은, 대체 뭘 할 생각이야?”

 마왕은 간명하게 대답했다.

 - 떠날 거다.

 “떠, 떠난다고? 어디로?”

 아직 감정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당혹해하는 나와 대조적으로 마왕은 표표한 시선으로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 아예 이 세계를 벗어나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떠나려고. 그렇군. 우선은 초차원성검을 벼려낸 초월자들의 세계에 가볼까. 그들이라면 충분히 내 상대가 될 수 있겠지.

 초월자. 다른 이름으로는 해탈자. 또는 먼저 떠난 이들. 혹은 앞서 빛이 된 자들.
 초월자란 인류나 다른 마물들이 있기 훨씬 전, 이 지구상에 존재했다는 전설 속의 첫 번째 종족을 가리키는 말로서, 초고도문명을 이룩한 끝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신적인 존재가 되어 상위차원으로 떠났다고 전해지는 이들이다. 인간들 사이에 신神으로 숭배되는 존재가 다름 아닌 그들로서, 성검 센트럴 도그마는 과거 이들 종족이 실존했다는 역사적 증거 중 하나였다.

 “이, 이길 수 있겠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마왕은 씩 웃으며 답했다.

 - 그걸 모르겠으니까 가보려는 거야.

 다시 꿈꾸는 아이 같은 표정을 짓는 마왕. 그 얼굴에 이것저것 모든 게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든 나는 큰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초월자들이 우리랑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엄청난 재앙이겠군. 난데없이 이세계에서 침략해 오는 마왕이라니, 완전 B급 소설이잖아. 뭐 잘 알겠어. 당신이 얌전히 다른 곳으로 떠나준다면, 우리 입장에선 참 고마운 일이지. 근데 내가 왜 떠나는 당신 뒤를 이어야 하는 거지? 이제 와서 당신이 이끌던 마왕군에게 책임감이라도 느끼는 거야?”

 마왕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상하군. 넌 내 딸들 중에선 제일 머리가 돌아가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도발 아닌 도발에 발끈한 나는 고속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각 개체는 강하지만 결속력이 없는 마물들…… 루치아의 기치 아래 단단히 뭉쳤지만 심하게 쇠퇴한 인간들……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용왕들……. 그렇군. 당신이 갑자기 사라지면 싸움이 한층 격렬해질 수가 있겠어. 자칫 멈춰야 할 시기를 놓치면 이 지상의 문명은…….”

 - 사라지거나, 적어도 엄청나게 퇴보를 하겠지. 그건 곧 네가 한가롭게 여기서 책을 읽을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잠깐, 뭐야. 그러지 마. 이제 와서 무슨…… 웃기는 소릴…….”

 믿을 수 없지만 예상되는 대답을 부정하기 위해 고개를 저었지만, 마왕은 언제나 그렇듯 거리낌 없이 자기 할 말을 했다.

 - 그래, 널 위해서다.

 전에 없이 진지한, 그리고 상냥한 눈빛. 사고가 정지된 내가 침묵하는 동안 마왕은 말을 이었다.

 - 나야 이 세계에 아무런 미련이 없으니 그냥 떠나도 상관없지만, 넌 아니잖아? 너 정도의 힘이라면 설령 세상이 멸망해도 혼자 살아갈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넌 지상의 문명을 사랑하는 모양이니 기회를 주는 거야. 내 뒤를 이어 상황을 수습하라고. 이 세상 문명의 몰락을 막으라고 말이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 거창하게 말하자면, 마왕이 돼 세상을 지켜라. 내 친구Succubus에게 말해 뒤를 이을 준비는 다 해뒀으니 넌 그냥 수락만 하면 돼. 물론 거절하는 것도 네 자유야. 그 결과를 네가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지.

 “잠깐, 잠깐만……!”

 - 그럼 작별이다.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래도 난 이 세계에서 제법 즐거웠어. 그러니 너도 즐겁게 살길 바란다, 내 딸아.

 마왕은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하며,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다는 듯이 사라졌다. 붙잡을 새도 한방 먹일 새도 불평 한마디 할 새도 없이.

 “빌어먹을……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무책임한 여자……!”

 확실히 마지막까지 이 여자는 최악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딸의 마음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딸이 즐겁기를 바란다는 그 유언 아닌 유언만큼은 진심이었다는 것을 어쩐지 알 수 있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이미 벌어진 일에 불평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어. 해야 될 건 문제에 절망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것. 최대한 빨리 세상에서 당신의 흔적戰災들을 지우고, 평온하게 살아주겠어!”

 그렇게 난 그 여자의 뒤를 이어 마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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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09.10 18:50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아앗... 이 것은 마치 잔뜩 망친 조별 과제의 마무리를 떠맡은 임시 조장(전임 조장은 도망감)의 기분! ㅠ_ㅠ

    만약 제가 작중 신임 마왕의 상황이라면 인류연합군측과의 협의를 거친 후 적절하게 짜여진 판에 마왕군의 병력을 의도적으로 축차투입•축차소모시키는 과정을 통하여 마왕군의 궤멸을 유도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난 이후에는 연합군 수뇌부측과의 사법거래(?)로 다시 평화로운 독서생활 속으로 Comeback & Dive~ >_<)/


    ... 하지만 이는 단지 막연한 계획일뿐 마왕군 세력 내부에도 나름의 신임 마왕의 능력 검증과 견제 및 감시를 위한 안전장치라든가 머리 좋은 책사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을테니 쉽지는 않을테지요. 흑흑(/orz)

    • Favicon of https://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9.12 06:57 신고 address edit/delete

      다음 편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별과제... 딱 적절한 비유를 들어주신 듯-_-b 오히려 중고등학교보다 대학교에서 무책임함이 난무하는 모습은 참 안타까웠던 기억이 나요ㅠ_ㅠ


      확실히 평온을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주인공인 마왕의 딸이 직접 마왕군을 내부에서부터 빠르게 붕괴시키는 것이겠지만, 말씀처럼 마왕군 수뇌부가 견제하는 것도 있고, 또 무엇보다 주인공 본인이 그런 일을 바라지 않고 있기도 하네요. 주인공은 비록 인간 쪽에 더 호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혼혈로서 나름 마물이라 불리는 다른 종족들에 대한 이해도 있는 편이라 더욱 대등한 관계에서 소강상태로 끌고 가려는 마음이 있기도 해요.

      저번 댓글에서도 살짝 말씀드린 것처럼 최대한 무겁지 않게 가려고 생각 중이기 때문에 작중에서는 이런 사정이 자세히는 나오지 않을 예정이지만, 분위기를 망치지 않는 선에서 위와 같은 내용도 다루어 보고 싶네요^^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








00. 얼어붙은 시간


 푸른 달빛이 흩어지는 폐허.
 한때 인류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수도의 중심부도 지금은 옛 위용은 온데간데없이 형태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스러질 수밖에 없다는 쓸쓸한 진리를 체현하고 있을 따름이다.

 돌이킬 수 없는 상실. 회복할 수 없는 영광.
 지상의 모든 것을 제패하고 천상까지 길게 손을 뻗으려 했던 고귀한 인간들의 도시는, 신이 아닌 마왕의 손에 의해 그 오만을 심판받았다.

 - 모든 것은 모래로 그린 그림…… 참으로 덧없군.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혼잣말. 마치 검정 물감으로 세상을 덧칠하듯, 스스로도 진저리가 날 만큼 오싹하고 눅눅한 음색이다. 확실히 본모습을 드러낸 나는, 세상 그 어떤 인간보다도 그 여자를 닮았다. 인간들의 세상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은 그 여자를.

 “아직, 우리는 끝나지 않았다.”

 그때, 내 우울한 감상에 저항하는 금빛 목소리가 짙은 어둠絶望 속에 맑게 울려 퍼졌다. 나는 뒤를 돌아 상대를 바라보며 음미하듯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 임페리얼 루치아. 인류의 마지막이자 첫 번째 희망, 루치아 안젤리나 임페리얼 제이드.

 밤을 밝히듯 춤추는 화려한 금색 머리카락. 불처럼 강렬하면서도 얼음 같은 침착함을 내포한 짙은 녹색 눈동자. 초연의 내음이 깊숙이 스며든 붉은 제복이 권위 있는 여왕처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그녀Lucia는, 실제로 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직위에 앉아 있었다.

 인류연합 최고대표. 인류군 총사령관.
 역대 그 어떤 권력자도 동시에 가져본 적이 없는 최고 권력을 양손에 쥐고 있는 루치아 임페리얼. 하지만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지금 그녀가 앉은 자리를 탐내거나 부러워하진 않으리라.

 “그야 그렇겠지. 너희들 마왕군의 공격에…… 아니, 마왕 이클립스의 힘에 유린당한 탓에 인류의 세력권은 절반 이상 축소되고 말았으니까. 패전의 책임에선 누구나 도망치고 싶어 하지.”

 내가 삼키고 있던 말을 눈치 챈 걸까. 루치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하지만 눈빛에는 확실한 분노를 담아 날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용기 있는 자들은 일찍이 다 죽었다. 다름 아닌 네놈들의 손에. 남은 건, 나 같이 어둠에 벌벌 떨며 간신히 서 있는 게 고작인 잔챙이들뿐. 아주 통쾌하겠군. 인간을 먹이로밖에 보지 않는 너희 마물 놈들에게는.”

 과소평가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지나친 자기비하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힘 있고 의무 있는 자들부터 도망친 최악의 상황에서도 무릎 꿇은 사람들을 독려하고 규합해 마왕군과 호각으로 맞선 그녀Lucia를 누가 비웃을 수 있을까. 아마 그녀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난 그녀야말로 진정한 인간들의 왕이라 생각한다. 그런 그녀를 조소하는 것은, 설령 그 본인이라도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입장상 난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밝힐 수는 없었다. 대신 난 한껏 폼을 잡으며 상대를 내려다보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 그런 것치곤 제법 배짱 있는 인간이군. 내 손짓 한 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약하고 미약하고 허약한 존재가, 겁도 없이 홀로 나와의 회담에 응하다니. 대담한 용기일까 아니면 단순한 만용일까. 어느 쪽인지 심히 궁금한데.

 떠보는 내 물음에 루치아의 입가가 살짝 비틀렸다.

 “미안하지만, 난 혼자가 아니야.”

 쿵. 굉음과 함께 하늘에서 떨어지듯 착지한 백은의 기사. 빈틈없이 갑옷으로 온몸을 감싼 하얀 영웅은 말없이 오색으로 찬란히 빛나는 검을 날 향해 겨누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난 모른 척하며 입을 열었다.

 - 그렇군. ‘선대’ 마왕의 심장을 꿰뚫은 초차원 성검…… 인류의 마지막이자 두 번째 희망인 반신demigod의 영웅이 함께라면 내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겠어.

 루치아가 인류의 정신적 지주라면, 이 백은의 기사는 물리적 지주.
 성검에게 선택 받은 영웅은 인류군이 무참히 패주하는 상황에서도 단신으로 마물들의 공세에 맞서 몇몇 도시들을 지켜냈다. 그 모습에서 다시금 희망을 찾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루치아와 함께 그 기사를 칭송하기 시작했다.

 「…….」

 말없이 노려보는 시선. 투구로 얼굴은 가려도 살기까지 감출 수는 없다.
 루치아는 그 무구한 살의의 대변자가 되어 입을 열었다.

 “경솔했군. 이런 자리에 어떤 대비도 없이 혼자 나오다니. 마왕이 죽은 지금, 구심점인 너마저 사라지면 마왕군은 더 이상 세력을 유지할 수 없다. 급속도로 붕괴하고 말테지. 너희 마물들은 ‘왕’없이는 절대 뭉치지 못하는 존재. 아무리 각 개체가 강하다 해도, 그것만으로 ‘인류’는 이길 수 없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정확한 지적. 지상을 지배하고 있던 인류문명을 붕괴직전까지 몰아넣은 이 악마 놈들이 얼마나 구제불능의 멍청이들인지는, 어떤 인간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애초에 내 몸에 흐르는 피의 절반은 그들과 같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난 입장상 그 말을 가만히 수긍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 글쎄, 그대라는 지도자가 없어지면 무너져 내리는 건 인간도 똑같지 않나? 오지 않을 구원자를 고대하며 발걸음을 멈추고, 누군가 이끌어주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야말로 인간들의 종족적 특성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물론 그 또한 인간의 나약한 일면이지. 하지만 사람에게는 그 나약함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강함이 있다. 설령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손에 죽는다 해도 결코 우리人間는 멈추지 않아. 다면성을 갖지 못하는 너희 악마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미래에 대한 신뢰로 강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사람을 향한 찬가를 노래하듯 선율과도 닮은 그녀Lucia의 목소리에 난 그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지금의 난, 싫어도 악마들을 대변해야만 하니까.

 - 시험해볼까. 정말 그대를 죽여도 인간들이 절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지를.

 눈을 가늘게 뜨고 힘을 아주 조금만 발산한다.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상대를 죽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럼에도 이 일대는 폭풍이라도 휘몰아친 것처럼 폐허의 잔해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역시 이 모습으로 힘을 조절하는 것은 어렵다.

 “이건, 교섭결렬의 의지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아니면 달리 해명할 말이 있나?”

 다행히 먼지가 걷힌 후 모습을 드러낸 루치아는 멀쩡했다. 백은의 기사가 성심력을 펼쳐 내 마력방출을 중화시킨 것이다. 난 내심 안도하며, 동시에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한층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과연 인간들의 영웅님. 이 정도는 문제없이 막아내는군. ‘마왕을 쓰러뜨릴 때 입은 상처’가 아직 남아 있다 해도.

 「……!」

 덜그럭. 짧지만 강렬한 동요. 하얀 기사는 아직 루치아만큼 능숙하게 마음을 다스리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뭐 잘 숨겼어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내게는 무의미한 일이었겠지만.
 난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인 하얀 영웅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 잠깐 기다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죽을 각오로 자살특공을 하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모든 일이든 서두르고 보는 건 짧은 시간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들의 좋지 않은 습성이지. 비록 그것이 때로는 신들조차 예상치 못한 위업을 달성하는 경우가 있다 해도. 뭐 좋다. 방금 질문에 대답해주마. 난 교섭결렬의 뜻으로 내 힘을 너희에게 보인 게 아니야. 단지 말 그대로 너희들을 시험해 봤을 뿐이다. 너희들이 날 ‘교섭이 가능한 상대’인지 가늠해 보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처럼.

 루치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Lucia는 손을 들어 기사의 성검을 내리게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좀 더 생각을 들려주면 고맙겠군.”

 이제부터가 진짜 승부. 난 미리 준비된 대답을 꺼냈다.

 - 그대의 말마따나 스스로의 힘에 취해 쉽게 통솔되지 않는 우리惡魔는, ‘왕’없이 오래 결속을 유지할 수 없다. 내가 분발해봤자 선왕처럼 무리를 규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지. 내게는 그만한 지도력charisma이 없으니까. 분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들이 다시 유리해질 것이라는 그대의 예측은 크게 빗나가지 않을 거다. 하지만…….

 난 루치아의 맑은 녹색 눈동자를 위안 삼아 내키지 않은 말을 이었다.

 - 고작 우두머리를 잃는 정도로 한번 결집한 세력이 하루아침에 쉽게 무너지지도 않지. 설령 너희가 이 자리에서 날 죽이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마왕군이 당장 해체되는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 오히려 일시적으로나마 마왕군 전체가 고무될 가능성마저 있다. ‘비겁한 수’에 선왕의 후임자가 암살당했다고 말이야. 우리 쪽에도 그 정도 기교를 부릴 책사 한둘쯤은 있으니까. 그런 상황이라면…….

 고맙게도 다음 말은 루치아가 대신 받아 이어주었다.

 “싸움은 한층 격렬해지는 동시에 교착상태로 접어들겠지. 마왕군이 당장 붕괴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로, 쇠락할 대로 쇠락한 인류 또한 당장 강성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거기에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용왕들이 개입이라도 하는 날에는…….”

 - 양쪽 모두 극심한 피해를 입을 테지. 운 나쁘면 사이좋게 공멸일 테고, 운 좋게 어느 한쪽이 이긴다 해도 상처뿐인 승리 그 이상 이하도 아닐 터. 더 이상 우리가 전쟁을 벌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내 결론을 들은 루치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 생각과 비슷하군. 다행이야. 그쪽이 마왕과 달리 말이 통하는 상대라서. 죽은 마왕과는…… 일전에 딱 한번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도저히 교섭이 가능한 상대가 아니었다. 혹시나 비슷한 성향일까 걱정했지만 그저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이군.”

 음. 이해한다. 확실히 어떤 대단한 화술을 지닌 인간이라도 그 여자와 무언가 교섭을 한다는 건 불가능했으리라. 기본적으로 그 여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밖에 하지 않는다. 예외적으로는 자기가 좋아하는 얘기밖에 하지 않고.

 “하지만, 과연 우리에게 교섭이 가능할까. 서로에게 타협의 여지가 있을까. 인류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희생을 치렀다. 마왕군의 공세에 멸망한 나라만 열셋, 파괴된 도시는 수천을 헤아린다.”

 웃음기도 잠시. 루치아의 얼굴에 다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여기엔 나도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너희 인간들이 도시를 세우기 위해 불태운 숲은 본래 누구의 것이었나? 너희들이 악마나 마물 등으로 뭉뚱그려 부르는 숲의 주민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이번 마왕군과의 전쟁에서 죽은 이들은, 공식적으로 사망이 확인된 자만 1억 명에 가깝다. 너희들은 너무 죽였어. 전쟁터의 병사들뿐만 아니라 민간인, 병자, 갓난아기까지 가리지 않고 전부 학살했지.”

 - 인간들이 지상의 패권을 쥔 이후 희생시킨 다른 존재들은 셈하지 않나? 보기에 멋지다고, 연금술에 도움이 된다고, 심지어는 맛있다고…… 너희들은 탐욕스럽게 인간 이외의 다른 종족들을 죽이고 범하고 사육하고 멸종시켰지. 이제는 지상에 단 한 마리밖에 남지 않은 일각수의 비극은, 결코 인간들의 유일한 죄악이 아니다.

 교차하는 시선과 시선. 충돌하는 주장과 주장. 이대로는 아무리 말을 나누고 또 나누어도 양자 간의 간극을 좁힐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입을 열면 열수록 앙금은 커지고 골은 깊어져만 갈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Lucia와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 그대와 나는, 우리와 너희는, 결코 타협할 수 없다.

 “우리가 서로 손을 잡기에는, 그 사이에 너무나도 많은 죽음이 가로막고 있다.”

 - 하지만 타협이란, 바로 타협할 수 없는 걸 타협하기 위해 하는 것이지.

 언젠가 들은 문장가의 말을 입에 담은 순간,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럼 협상을 시작해볼까, 마왕의 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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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08.24 14:09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와이, 와아아~ 안단테님의 신작이다요! >_<


    흡사 은세계의 은월을 떠올리게끔 하는 머나먼 미래의 포스트아포칼립스적 풍광에, 마왕용사의 첫화에서 느낄 수 있었던 산뜻함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는 것 같아 다시금 시선이 가네요.

    수많은 부조리와 참상의 연쇄 끝에 비로소 도달하게 된 화합으로의 길,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너무나도 많은 피해 앞에 벌어지고 곪아버린 서로의 물리적 상처와 심리적 거리감이 크나큰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것은 참 서글픈 일이 아닐까 해요.

    수많은 서브컬쳐계 창작물의 이야기 속 세력간의 대립이 그러했고, 현실의 한반도를 포함한 분단국가들의 현실이 그러하듯이...


    ... 하지만 중요한건 이게 아니라(?) 신작의 향후 전개가 기대된다는겁니다 +_+ 므흐흐

    • Favicon of https://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8.25 18:04 신고 address edit/delete

      이번에도 눈을 두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마왕과 용사가 실은 협력관계에 있다는 유명한 장르의 힘을 빌린다면 부족함이 많은 제 글에도 조금은 재미있는 요소가 생기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쓰고 보니 의외로 크게 변한 게 없는 것 같아 살짝 좌절하기도 했네요^^;; 그래도 다른 실력 있는 분들이 앞서 다져 놓은 장르의 힘을 믿고 시간 날 때마다 천천히 이야기를 진행시킬 생각이에요.


      말씀처럼 치열하게 대립하던 두 세력이 서로 화해하고 협력의 길에 도달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고, 현실에서는 오히려 그 시도가 좌절되는 경우가 압도적이지요.

      사실 이번 소설은 코미디(...)를 예정하고 있어 그런 암울하고 복잡한 배경에 대해 자세하게 다룰 예정은 없지만, 그래도 이른바 세상의 정의나 평화를 추구하는 데 있어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작중에서 조금이라도 표현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면, 제가 쓰는 글에도 얼마간 의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럼 다시 한번 읽어주신 데 감사의 말씀드리며, 좋은 하루되시길 바라요!

  2. BlogIcon HB 2019.01.21 09:07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오랜만에 들렀는데 신 연재가 있었네요. 항상 감사해요.

    • Favicon of https://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9.01.21 17:21 신고 address edit/delete

      오랜만에 안녕하세요! 이렇게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쓸 때 들은 BGM이 겻들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막장 스토리입니다)







BGM: 相州戦神館學園 八命陣 『Timnat-sera』






■■■








[가을빛 마녀와 잿빛 유령 (完)]


 부드럽게 하늘을 물들이는 석양 아래 마녀는 자신의 연인과 함께 인형사를 전송했다.

 「설마 네가 협조를 해줄 줄은 몰랐다. 덕분에 빨리 회복…… 아니 전보다 상태가 더 좋아졌을 정도야. 넌 날 성가시게 생각하지 않았나? 한데 왜 내게 손을 내민 거지?」

 유화는 고마워하면서도 자신이 입은 호의를 미심쩍어하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마녀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물론 성가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몸을 수리하는 데도 도움을 준 거고요. 빨리 고쳐야 빨리 나가실 거 아니에요.”

 그러나 유화는 마녀의 위악적인 태도에 넘어가지 않았다.

 「넌 계약의 마녀지. 아무리 바라는 게 있어도 아무런 대가 없이 호의를 베풀지는 않아. 내게 원하는 게 있다면 빨리 말해라. 그래야 나도 준비를 할 테니.」

 마녀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괜히 오래 산 게 아니라니까. 예, 사실 원하는 게 있어요. 별 건 아니고, 제게 도움을 받은 걸 빚으로 생각하신다면, 그걸 갚는 셈치고 앞으로 그 두 사람을 건드리지 않기를 부탁드리고 싶네요.”

 여기서 두 사람이란 진아와 나루를 뜻하는 말. 마녀는 두 사람의 일상을 더 이상 망가뜨리지 않을 것을 관리사에게 요구했다.

 「이건…… 네가 떠올릴 만한 발상이 아니군. 제안을 한 건 그쪽의 연인이신가?」

 유화는 칠흑 같은 검은 머리에 호수 같이 푸른 눈동자가 매혹적인 마녀의 연인, 설란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설란은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유화를 응시하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화는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마라. 이미 그 아이들의 운명은 바뀌었다. 그 진아라는 아이가 곁에 있는 한, 심애의 광인이 다시 눈을 뜨는 일은 없겠지.」

 확언을 받아낸 마녀는 다소 짓궂은 어투로 말했다.

 “당초 예상이 성대하게 빗나가고 말았네요. 당신이 본 미래에선 수백 명 이상이 죽어나가고, 그 미래를 막기 위해선 반드시 한명이 희생되어야했지만, 결국 아무도 죽지 않고 잘 끝날 수 있었으니까요. 어때요, 이만 자신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인정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의외로 용서 없는 추궁에 정원관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 일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해. 죽어서까지 잿더미나 마찬가지인 몸을 이끌고 헌신적인 희생을 한 유령, 그리고 선천적으로 영웅의 신체를 가지고 태어난 무신. 이 두 사람이 한 소녀를 위해 힘을 합친다는 기적적인 희생이 있었기에 이번 결과가 나올 수 있던 거다. 매번 이런 요행을 바랄 수는 없어.」

 마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뭐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요. 당신처럼 긴 시간 동안 줄곧 한길만 걸어온 사람이라면 더욱 더.”

 확실히 그 말대로. 300년 가까이 한 가지 방식을 고수해온 인형 같은 인형사가 이제 와서 변하기란 요원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유화에게는 아직 입으로 꺼내지 않고 가슴 속에 묻어둔 말이 있었다.

 - 사실 사람들은 알고 있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않고 있을 뿐이야. 현실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어릴 적부터 줄곧 간직해온 스승Master의 말. 여태껏 그 진의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유화는 스승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이 틀렸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아이들이 한 일이 올바르다는 사실. 그것만큼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정원관리사는 오랜 시간 고민해온 답에 작은 결론을 내린 채 석양빛을 받으며 마녀가 사는 도시를 뒤로 했다.






 떠들썩한 교실의 점심시간.
 진아는 은근슬쩍 자신을 훔쳐보는 이런저런 시선에 압박을 느끼며 눈앞의 상대에게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말이지. 나, 나 혼자 먹을 수 있는데…….”

 하지만 나루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숟가락을 진아에게 들이밀었다.

 “원래 왼손잡이라면서요. 나 때문에 다친 거니, 내가 책임져야죠. 자, 입 벌려요. 아~~하세요. 아~~”

 “으…….”

 며칠 전 나루의 광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분투했던 진아는 왼손에 심한 상처를 입어 붕대를 둘둘 말고 있었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붕대였지만 그건 마녀가 특별히 제작해준 일급품으로 형체만 남아 있다면 어떤 외상이든 회복시킬 수 있는 효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 다만 겉보기에는 다 나은 것처럼 보여도, 왼손에 예전처럼 힘이 돌아오지는 않을 거예요.

 진아의 손을 치료해준 마녀는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광기에 당한 상처는 보통 쉽게 낫지 않는다고 한다. 광인들의 힘에는 기초법칙과 궤를 달리 하는 이질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세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한 아무리 마법이라 해도 완전한 대응은 불가능하다는 모양이다.

 ‘뭐 다 나으면 일상생활은 가능하다고 하니…….’

 하지만 진아는 별로 괘념치 않았다. 이번에는 어쩌다 험한 일에 또 끼어들고 말았지만, 본래 그녀는 평범한 삶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가 벌인 일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고…….’

 나루가 폭주한 여파는 마녀와 관리사가 최대한 처리를 해 가스관 폭발 정도로 마무리가 되었고 한다. 사상자가 없는 덕분에 딱히 이슈화되지도 않았으니 금세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리라. 아마도 그녀들의 일상이 더 이상 위협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정말 문제는, 얘야……!’

 오히려 진아에게는 지나간 사건보다 최근 나루의 행동이 훨씬 난처하게 느껴졌다. 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마다 교실에 찾아와 손이 불편한 자신 대신 이것저것 수발을 들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마음은 고마웠지만 그때마다 교실의 이목이 집중되니 은근히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결국 진아는 포기하고 입을 벌렸다. 나루가 집요하다는 것은 다름 아닌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아에게 밥과 반찬을 먹여준 나루는 웃음을 지었다.

 “후후, 어때요? 맛있어요?”

 “으, 응…….”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그 대답은 진심이었다. 나루의 도시락은 정말 맛있었다. 선생님 대신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때 나루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쪽이 거짓말 했다는 건 알아요.”

 “응? 아, 아니야! 진짜 맛있…….”

 “아니요. 그거 말고. ……내가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워 구해줬다는 거 말이에요.”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살짝 목소리를 낮춘 나루. 담담한 음색이었지만, 역시 직접 입 밖으로 꺼내는 건 부끄러웠던 모양인지 얼굴이 조금 빨개져 있었다.

 “……거짓말은 아니야. 정말 그렇게 느낀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역시 선생님이 부탁한 영향이 더 컸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어.”

 얼버무려도 소용없다고 생각한 진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루는 자조하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아.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내가 생각해도 그쪽이 날 좋게 볼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목숨까지 던지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완전 놀아나고 말았네.”

 “그, 그건…….”

 진아는 변명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나루를 구하기 위해서였다고는 해도 ‘선생님의 유언’을 지키고 싶다는 자신의 독선으로 상대를 농락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루는 무언가 다짐하듯이 작게 중얼거렸다.

 “뭐 그러니 여기서부턴 내가 노력할 차례겠죠.”

 “응? 지금 뭐라고……읍!”

 나루는 아까보다 좀 더 붉어진 얼굴로 진아의 입을 막듯이 반찬을 집어넣었다.

 “음…….”

 역시나 맛있다. 문득 진아는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선생님도 집에선 항상 나루가 해주는 음식을 드셨겠지. 그런 연상을 한 것이다.

 마녀의 위화감 어쩌구 하는 마법 덕분인지 시진이 되살아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진아 일행밖에 없었다. 모두들 이시진 선생은 카페에서 충돌사고가 있었던 그날 죽었다고 알고 있다.

 선생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건 조금 쓸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시진의 그 일주일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었고, 그녀가 죽음에 저항한 덕분에 나루가 파멸로 향하는 미래를 막는 계기를 마련할 수가 있었다.

 ‘선생님…….’

 아직 진아는 첫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그건 나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통해 맺어진 인연 속에서 두 사람은 느리고도 착실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잿더미 속에서 꽃이 피어날 날은 언제 올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진아는 나루와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이제는 그다지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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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03.14 12:23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이, 이 것이 젊음...! (쿠쿵)

    역시 화끈한 사람은 뭔가 다르군요. @_@

    • Favicon of https://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3.15 07:00 신고 address edit/delete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최대한 청춘 같은 분위기를 내고 싶었는데 잘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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