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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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2017/12'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7.12.18
    [별세계의 별리] 5-03. 그래도 기만하지 않을 수 없다 (7)
  2. 2017.12.11
    국가, 민족, 그리고 자국 콘텐츠에 대한 단상 (2)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다음에는 래디오 시티에서 해마다 하는 크리스마스 쇼가 시작되었다. 천사의 무리가 사방에서 나왔는데, 손에 십자가를 든 사람이 무대 가득히 나와서는 일제히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미친 듯이 부르는 것이었다. 굉장했다.

 이것이 종교적이며 매우 아름답다는 것은 알지만 십자가를 들고 무대 전체를 메우고 있는 것은 결국 배우들이라는 사실에서 어떤 종교적인 것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 끝내고 무대에서 퇴장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담배를 피우기 시작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1년 전에도 샐리 헤이즈와 함께 이걸 본 적이 있는데, 샐리는 그 무대의 의상이나 장식이 정말로 아름답다고 계속 말하고 있었다. 나는 예수가 이런 호화찬란한 의상 따위들을 본다면 아마 구토를 참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샐리는 나더러 신을 모독하는 무신론자라고 했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예수께서 진정으로 호의를 보낼 사람은 그 오케스트라에서 작은 북을 치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은 내가 여덟 살 때부터 쭉 보아 왔는데, 부모들과 함께 보러 갔을 때 나와 동생 앨리는 이 사람을 더 잘 보기 위해 앞자리로 옮기곤 했다.

 그렇게 훌륭하게 북 치는 사람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한 곡에서 북 치는 기회란 단 두 번밖에 없는데, 북을 치지 않고 있을 때에도 그는 절대로 지루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러다가 북 치는 차례가 되면 심각한 표정을 하고는 그야말로 멋지고 아름답게 북을 치곤했다.


- J.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소담출판사, 187면. -










■■■








5-03. 그래도 기만하지 않을 수 없다 (7)


 - 자신과 닮은 누군가가 싫다면 그 감정은 자기혐오와는 관계가 없다. 단지 스스로의 결점을 직시하기 싫은 것뿐이다. 오히려 그 심리는 자기애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반론하고 싶어도 반론할 수가 없군요. 정말이지 이오니아 경은 죽어서도 불편한 사람이에요. 뭐 딱히 살아 있을 때 만나본 적도 없지만.”

 바다빛Aquamarine의 마녀巨匠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저는 온 신경을 집중해 귀를 기울였습니다. 세계적인 보석연마사로서 이름 높은 잔 노엘 타베르니에. 바로 그분이 제 작품을 봐주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저기,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요……?”

 긴장감을 견디지 못한 제 물음에 노엘 님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즉답했습니다.

 “네. 역시 연지 씨는 재능이 없네요. 연마사에는 안 어울려요.”

 “우…….”

 설마 이렇게까지 확실히 부정을 당할 줄이야.
 그야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거장Jeanne의 심미안에 제 보잘것없는 작품이 성에 차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각오를 해도 일말의 가능성조차 인정해 주지 않는 혹평에는 마음이 꺾일 것만 같네요.

 - 그렇게 지루하시면 제게 연마기술을 가르쳐주세요!

 그날 밤, 분명 가르침을 달라고 먼저 부탁한 것은 저였습니다. 공중에 둥둥 떠 희롱당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당연히 제 자신의 연마 실력을 향상시키고 싶은 마음이 더 컸습니다. 기억을 잃은 제가 그나마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보석연마밖에 없으니까요.

 - 네에? 하지만 연지 씨 재능 없는데요?

 물론 노엘 님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확실하게 제가 부족하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한 번 가르치기로 수락을 했다면 단순히 재능이 없다는 말로 끝내지 말고 조금은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네요.

 “잔.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죠. 아니면 설마 매도를 조언이라 착각하고 있는 건가요?”

 구원의 손길은 어린 주인님에게서 내려왔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종이로 된 편지를 읽고 계시던 티아나 님이 무심한 척 한 마디를 던지셨네요.

 참고로 보석으로 만든 종이는 보석실로 짠 천보다 훨씬 비쌉니다. 즉, 티아나 님이 읽고 계시는 편지는 매우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온 중요한 내용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편지를 눈에 두고 계시면서도 제 일까지 신경을 써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알고 있어.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현실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티아나 님의 신랄한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노엘 님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제가 만든 작품을 다시 한 번 손에 들고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알록달록 보석으로 치장한 큼직한 황금빛 달걀Easter Egg.
 평소보다 연마가 깔끔하게 잘 돼 나름 자신작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노엘 님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제 달걀에 시선을 줄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중입니다.  마침내 노엘 님이 불안한 침묵에서 벗어나 입을 열었습니다.

 “왜 이런 걸 만들었나요?”

 이, 이런 거라니…….
 딱히 비하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제작 동기를 묻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알고 있어도 여전히 칼날처럼 날카롭게 마음을 후벼 파는 질문입니다. 그래도 대답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과, 광명제는 다시 하루의 낮이 길어지는…… 즉, 태양의 부활을 기리는 축제 기간이잖아요. 그래서 부활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 형상을 찾다가, 마침 적당한 게 있어서…….”

 이스터 에그는 환상문명에서 유래한 구세주Messiah 전설과 관련이 있는 상징입니다. 구세주의 ‘부활’이라는 소재가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보석나무 과자와 비슷하게 상대방을 축복하거나 건강을 기원하는 선물로서 일부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있다고 하네요.

 “…보통 이스터 에그는 기조가 되는 붉은색이나 금색에 약간의 색채를 더하는 게 일반적이죠. 한데 이렇게 치장을 잔뜩 한 이유는 뭔가요? 그저 자기 실력을 과시하고 싶었나요?”

 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요. 노엘 님은 한층 미간을 찌푸리며 공격적으로 말을 던졌습니다. 전 주눅 들지 않게 노력하며 간신히 입을 열었습니다.

 “그, 그게…… 거, 거리의 풍경을 담아 보려고 했어요…… 노엘 님께서 내주신 과제가 「내가 좋아할 만한 것을 만들어 와라」였으니까요…….”

 “감사해라. 밖에 나가지 못하는 ‘불쌍한’ 날 위해 신경을 써주었다는 얘기군요.”

 우우. 노엘 님의 어조에 한층 독기가 서렸습니다. 확실히 동정심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의도를 섣불리 드러낸 것은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네요. 특히 노엘 님처럼 자존심이 강한 사람 앞에서는 더욱 더.
 제가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불쑥 어린 주인님이 끼어들었습니다.

 “잔. 연지에게 심술부리는 건 적당히 하는 게 어때요? 순수한 연지가 질척거리는 잔의 욕망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기다려,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무언가를 눈치 챈 노엘 님이 황급히 제지하려 했지만, 티아나 님은 그대로 말을 이었습니다.

 “즉 잔은 자기가 좋아하는 ‘어린 소녀’의 춘화를 그려오거나 동상을 만들어 오지 않았다고 트집을 잡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부당한 소리에 너무 마음 상해할 거 없어요.”

 “아――니야! 넌 대체 날 뭘로 보고 있는 거야!?”

 티아나 님을 노려보며 소리치는 노엘 님. 순간 주위의 가벼운 사물들이 염동칙에 의해 둥둥 뜰 만큼 흥분한 상태였지만, 어린 주인님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태연히 답했습니다.

 “네? 변태요.”

 “아――! 진짜! 지금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하여간, 할망구 다음에 만나기만 해 봐……!”

 차마 티아나 님에게 손을 댈 수 없었던 노엘 님은 여기 없는 누군가에게 분노를 쏟아 부으며 이번에는 저를 향해 시선을 돌렸습니다.

 “…설마 연지 씨도 같은 생각인 건 아니겠죠?”

 전 살기 위해 급하게 고개를 붕붕 저었습니다.

 “그, 그럴 리가요! 잔 노엘 타베르니에 님은 아름답고 총명하신 세계제일의 연마사…….”

 “내가 변태라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어요. 그쪽 말고, 내가 괜한 트집을 잡아 연지 씨를 괴롭히고 있는 것처럼 보이냐는 말이죠.”

 흔들림 없는 진지한 물음에 저도 같은 농도의 진중함으로 답했습니다.

 “아니요. 보석연마에 한해서 노엘 님은 결코 흰소리를 하지 않으세요.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믿고 있어요.”

 아직 이분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알 수 있는 건 있습니다. 기억이 없다고는 해도 저 또한 연마사 나부랭이. 노엘 님이 만드신 작품과 그 작품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이분이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보석연마에 관해 고민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그건 티아나 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아마도 방금 전의 농담은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흐르는 분위기에서 절 구해주려는 의도셨겠지요. 아무리 감사를 드려도 부족한 일입니다.

 “뭐 알면 됐어요. 티아나에게 이상한 오해를 받는 것도 싫으니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연지 씨가 만들어 온 이 ‘이스터 에그’에는 크게 3가지 문제가 있어요.”

 “예.”

 전 침을 꿀꺽 삼키며 노엘 님의 말에 집중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무리 아파도 피와 살이 되는 얘기일 테니까요.
 노엘 님의 말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사소한 부분인데, 이스터 에그와 관련된 ‘구세주 전설’에서 광명제 기간은 그 구세주의 ‘탄생’을 기리는 시기지, 부활을 기념하는 시기가 아니에요. 연지 씨는 단순히 낮이 다시 길어지는 ‘태양의 부활’과 연관을 지은 모양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고증오류가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아……!”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배움이 짧다는 게 여기서도 드러나고 마네요. 기억이 온전했다면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까요? 으, 모르겠습니다.
 노엘 님은 약간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너무 자책할 거 없어요. 미리 ‘사소한 부분’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건 학자나 학도들이나 신경 쓸 문제로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에요. 오히려 그런 식의 유연한 발상은 결코 나쁘지 않아요. 우리가 꼭 그 구세주 전설을 그대로 재현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다만, 연지 씨의 문제는 그걸 알면서 의미를 비튼 것이 아니라 모르는 상태에서 대충 끼워 맞추었다는 데 있어요. 지금은 우연히 잘 되었지만, 다음에도 또 그럴 수 있다는 보장은 없죠. 오히려 역효과를 가지고 오는 경우도 있을 테고.”

 “예, 조심하겠습니다……!”

 제 대답이 나쁘지 않았는지 노엘 님은 곧장 다음으로 넘어갔습니다.

 “두 번째는 지역적 특성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다는 것. 다른 지역公州에서 그 구세주 전설은 보석나무 일화와 같이 가볍게 다루어지고 해당 상품도 존재하지만, 이 황금산에선 그렇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구세주가 ‘신의 아들’이기 때문이지요.”

 “……!”

 이건 도저히 변명할 여지가 없는 제 실수입니다. 이스터 에그의 유래와 달리 정확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니까요. 과거 축성칙의 맹인이라는 자에게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있는 황금산에서 신에 관련된 소재는 철저히 금기시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보석인들이 추앙하는 대천사도 천신天神의 피를 잇는 자라고 볼 수 있지요. 하지만 태초신화에서 반신반인의 대천사는 부모 되는 천신을 살해해 인류를 그 지배에서 해방시킨 존재입니다. 반면 구세주 전설의 메시아는 신과 동일시되거나 그 뜻을 실현하는 자이니 서로 다를 수밖에 없지요.
 노엘 님은 긴 손가락으로 금란의 표면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내가 황금산 출신이 아니라는 걸 고려해 만들어 온 건가요?”

 “아니요…….”

 순간 유혹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전 사실대로 대답을 했습니다. 속일 수 있고 없고를 떠나 여기서 잠깐 곤경을 모면해 봤자 제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저를 위해 소중한 시간을 내주시는 노엘 님께도 예의가 아니고요.

 “솔직해서 좋군요. 뭐 어차피 연지 씨는 표정에 다 드러나니 거짓말 해봤자 알았겠지만. 그럼 마지막 문제점을 들자면…… 역시 연지 씨에겐 재능이 없다는 거예요.”

 아까부터 반복되는 말. 하지만 이는 단순한 폭언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습니다. 티아나 님도 이번에는 간섭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 추측이 틀리지 않은 듯싶습니다.
 노엘 님은 잠깐 뜸을 들인 다음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소위 예술가로 불리는 창작자들은, 모두 강한 자기애를 가지고 있어요. 또 어떻게든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가지고 있죠. 일견 겉으로는 심약하거나 겸손해 보이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에요. 애당초 그런 성정이 아니라면 무언가를 만들지도, 또 그걸 남에게 보여주지도 않을 테죠.”

 거칠게 뭉뚱그려 단정하는 노엘 님의 말에 티아나 님이 반론을 펼쳤습니다.

 “지나친 일반화가 아닐까요? 역사적으로 유명한 연마사 중 자기혐오가 강했던 걸로 알려진 인물도 있잖아요.”

 “그런 부류의 사람은 결국 ‘되고 싶은 자신’을 사랑했던 거야. 그러니 이상적인 자신, 즉 ‘진짜’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는 현재의 ‘가짜’ 자신을 미워한 거지.”

 망설임 없이 일축하는 답변에 티아나 님은 “뭐 추측에 추측을 더해봤자 의미가 없겠군요.”라며 특별히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노엘 님은 제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습니다.

 “사실 연지 씨의 연마기술은 이미 충분해요. 물론 배워야 할 것도 숙달되어야 할 것도 많지만, 그건 혼자 터득해야 하는 것이지, 남에게 가르침을 받아 성장할 단계는 지났어요. 그럼에도 만약 나랑 연지 씨가 서로 다른 작품을 만들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판다면, 설령 ‘이름을 가린다고 해도’ 내 작품이 훨씬 많이 팔릴 거예요.”

 자만이나 자신감조차도 아닌 당연한 사실을 담담이 제시하는 어투에 전 불쾌감을 느낄 새도 없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때 기습적으로 노엘 님의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아…… 그, 그야 노엘 님께서 실력이 훨씬 좋으시니…….”

 그러나 노엘 님은 고개를 저으며 의외의 말을 입에 담았습니다.

 “전혀요. 아주 복잡한 공정이나 속도를 겨루는 게 아니라면, 사실상 나와 연지 씨 사이에 유의미한 실력 차는 존재하지 않아요. 특히 전문가도 아닌 일반인들이 그 차이를 눈으로 보고 알아챈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죠. 둘 다 똑같이, 예쁘장하고 깔끔할 뿐인 지루한 연마기술을 가졌으니까요.”

 “지, 지루하다니…….”

 이건, 소위 지나친 겸손이라 부르는 표현일까요. 전 몰라도 노엘 님이 스스로의 실력을 지루하다고 깎아내리는 것은, 미인이 거울을 보고 참 심심한 얼굴이라고 불평하는 것만큼이나 어처구니없이 들리는 소리입니다.

 “지루해요. 어차피 우리의 연마방식은 원석의 더러움과 여분을 털어내고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게 다듬어 재배치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내가 만든 작품이 연지 씨 작품보다 많이 팔릴 거라고 장담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해요. 단지 제 작품이 ‘덜’ 지루할 테니까 말이지요.”

 “……?”

 아직도 노엘 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뜻은 결국 노엘 님의 실력이 저보다 낫다는 이야기가 아닌가요?
 하지만 노엘 님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내가 만든 작품들이 세간에서 어떤 면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지 혹시 알고 있나요?”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야, 야하거나 잔혹한 묘사가 매력적이라고…….”

 노엘 님의 유명한 작품은 주로 소녀의 육체가 가진 아름다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거나, 혹은 아예 그 신체를 해체해 그로테스크하게 재구성한 것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하얗고 고운 백수정의 손위에 놓인 두 눈이 뽑힌 어여쁜 소녀의 얼굴에서 홍옥수의 음료가 피눈물처럼 흘러나오는 분수장식 등이 좋은 예가 될 수 있겠지요.

 물론 가령 대천사의 동상이나 상상화처럼 관리기구의 공식행사에서도 쓸 수 있을 만큼 위엄 있고 멋진 정상적인 작품들도 잘 만들지만, 역시 널리 알려지고 찾는 사람이 많은 것은 노엘 님의 잔혹하고 야한 작품 쪽입니다.

 “맞아요. 그리고 그 작품들에는 내가 가진 성性이나 죽음에 관련된 충동들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어요. 내가 정말 좋아하고 보고 싶어 하는 것들을, 내가 가진 실력을 총동원해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표현하는 거죠. 그런 나와 같은 충동을 가졌거나, 혹은 불쾌하거나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외심을 느끼고 매혹당한 사람들이 내 작품을 원하는 거고요. 하지만 연지 씨에겐, 연지 씨가 만든 작품에서는 그런 ‘욕구’를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어요.”

 어떤 반론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확실히 지금까지 보석연마를 할 때 나 자신의 무언가를 표현해 봐야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연지 씨에겐 재능이 없다고 한 거예요. 기술적인 부분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 그러니 연지 씨에게 어울리는 건 연마사가 아니라 요리사 쪽이에요.”

 “요리, 사요……?”

 “네. 하는 일이 대부분 겹치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거의 구분을 하지 않고 딱히 구분할 필요도 없지만, 그래도 굳이 나누자면 연지 씨는 요리사로선 재능이 있어요. 기술은 충분하면서도, 자신의 충동이 아닌 타인을 위해 작품을 만드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

 말로 명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내 생각이나 욕구를 담기 위해 무언가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어도 달리 떠오르는 건 없지만, 다른 누군가가 즐거워할 만한, 또는 다른 누군가에게 어울릴 만한 것을 만들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발상이 떠오르니까요. 가령 자수정의 머릿결과 눈동자가 아름다웠던 그분을 위해 만들었던, 가을하늘을 닮은 푸른…….

 “잔의 말에만 너무 속박될 필요 없어요. 그건 그녀의 예술관일 뿐이에요. 실제로 세상에는 타인이 원하는 작품을 구현하는 데만 충실하게 전념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연마사도 있는 걸요. 오히려 자기 자신만의 독단적인 창작에만 고집하다 평단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대중에게도 버림받아 무명으로 흩어진 얼치기 예술가들이 훨씬 많지요. 연지는 이미 훌륭한 연마사에요. 잔에게는 기술만 훔치면 되니 좀 더 자신감을 가져요.”

 감미로운 목소리.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어린 주인님이 천으로 가린 제 한쪽 눈에 손을 대며 부드럽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그 탓에 무언가 떠올리려 했던 건 다시 잊고 말았지만, 덕분에 마음은 편해졌습니다.
 노엘 님은 자신의 의견이 부정당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쓰며 반론을 하려 했지만, 티아나 님은 차단하듯이 다음 말을 이었습니다.

 “이제 곧 유키를 마중 나가야 하지 않나요? 늦지 않으려면 슬슬 준비를 해야죠.”

 아, 맞습니다. 이제 곧 총재님의 업무가 끝날 시각. 총재님의 경호를 맡은 엘 씨를 데리러 가야 하네요. 시간이 그렇게 촉박한 것은 아니지만, 여유를 가지고 나서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그나저나 요즘 총재님을 떠올리면……후우. 여러모로 고민되는 게 많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저를 노엘 님의 목소리가 붙잡았습니다.

 “아직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네요. 당장 나가야 하는 게 아니라면 한 번 말해 봐요.”

 또 얼굴에 드러나고 만 걸까요. 평소라면 괜찮다고 얼버무렸겠지만, 근래 불안감이 커진 저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습니다.

 “저기, 총재님의 목숨을 노리는 무서운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분은 경호원을 잔뜩 고용하거나 하지 않으시는 걸까요? 그럴 만한 재력도 충분히 되시는 것 같은데…….”

 말을 꺼내놓고 아차 싶었습니다. 어린 주인님의 앞에서 꺼내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화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말에 먼저 답을 한 것은 티아나 님이었습니다.

 “그건 경호원들이 역으로 배신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에요.”

 “배신, 이요……?”

 이번에는 노엘 님이 뒤를 잇듯 입을 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몇 배나 되는 돈을 더 주고 암살대상의 경호원들을 암살자로 다시 사들이는 거죠. 실제로 그 방식에 멸문당한 가문이 있기도 해요.”

 “며, 멸문이요……!?”

 “네. 과거 황금산의 10대 재벌가 중에는 ‘오브라이언’이라는 가문이 있었다고 해요. 그 가문의 마지막 당주는 매우 야심 찬 젊은이였는데, 또 다른 10대 가문 중 하나인 루이스 가와의 충돌을 계기로 아예 다른 가문들과도 척을 지며 독주를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재벌가 사이의 담합을 무시하고 오브라이언가 혼자 이권을 독차지하는 등의 방식으로 말이죠.”

 갑작스럽게 큰 힘을 손에 넣은 사람이 흔히 하게 되는 착각. 사람의 인식에는 절대적인 한계가 존재합니다. 개미와 같은 미물에게는 자그마한 둔덕이나 끝없이 이어진 험준한 산맥이나 별 차이가 없을 것처럼, 일정 이상을 넘어가는 부와 권력을 손에 쥔 인간 또한 크게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네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이 무한하다고 감각적으로 혼동을 일으켜 무모한 행동을 서슴지 않게 되는 것이죠.

 “오브라이언 가의 마지막 당주는 딱 그 유형에 들어맞는 인물이었어요. 자기 가문이 가진 재력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생각해 황금산에 있는 모든 경비업체와 불법조직을 싹 고용해 10대 재벌과 전쟁을 벌이려 했죠.”

 “저, 전쟁이라니…… 하지만 결국 패배했다는 건…….”

 “가진 자 특유의 오만일까요? 오히려 높은 자리에 앉은 능력 있는 인물일수록 ‘자기가 할 수 있는 발상은 남도 할 수 있다’는 당연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더군요.”

 노엘 님은 한숨을 내쉬며 이미 정해진 결말을 이야기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10대 재벌들은 오브라이언 가문이 고용한 무장 세력을 고스란히 다시 사들여 맨손이나 마찬가지인 그 가문을 철저하게 짓밟아 아예 없애버렸다고 하네요.

 “소문에 의하면 경호원 한 사람마다 오브라이언 가에서 받기로 한 보수의 천배 이상을 주고 배신을 시켰다고 하더군요. 그 돈을 다 합치면 웬만한 공주公州의 1년 예산은 될 만한 금액이라든가. 물론 어차피 소문이니 전부 믿을 수는 없지만, 엄청난 돈을 뿌려 거의 대부분의 경호원들을 등 돌리게 만든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에요.”

 한 공주公州의 1년 치 예산. 솔직히 제대로 된 과거도 없고 일개 시녀에 불과한 저에게는 전혀 실감이 가지 않는 어마어마한 액수지만, 그래도 왜 총재님이 따로 경호원을 들이지 않는지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보수의 천배라면 평생을 놀고먹을 수도 있는 돈일 텐데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섣불리 사람을 잘못 고용했다가는 적을 늘리는 꼴밖에 되지 않겠지요.
 노엘 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습니다.

 “이런, 표정이 더 어두워졌네. 걱정 말아요. 긴 스스로 자기 앞가림은 알아서 잘 할 테니. 막말로 죽어도 자기 책임인 거고. 연지 씨나 괜히 옆에 있다 말려들지 않게 조심해요.”

 티아나 님도 옆에서 거들었습니다.

 “맞아요. 유키는 전혀 걱정할 것 없어요.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에 빠지면 신경 쓰지 말고 연지 혼자 도망쳐 버려요!”

 …뭐랄까. 가족이나 다름없는 지인들이 좀 심합니다. 물론 총재님을 진짜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기보다는 절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위악적으로 말씀하시는 거겠죠.
 저도 분위기를 바꾸는데 동참하기 위해 가벼운 말을 던졌습니다.

“하기야 제가 걱정해야 할 건 총재님의 경호가 아니라 식탁이겠네요. 한 번도 제 요리를 드신 적이 없으니 말이에요. 노엘 님께 열심히 배워 꼭 맛있다는 말씀을 나오게 해야겠어요!”

 살짝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는 일이지만, 지금까지 총재님은 잠깐 술잔을 기울이시는 걸 제외하면 제가 차려오는 보석을 드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게 제 요리를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일이 바쁘거나 밖에서 식사를 마치고 오기 때문에 따로 집에서는 들지 않는 것뿐이겠지요.

 “아, 그건…….”

 음? 전 농담 삼아 꺼낸 말이었을 뿐인데 노엘 님의 표정이 좀 곤란해 보입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 말실수라도 한 걸까요?
 그때 티아나 님이 옅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습니다.

 “식탁이 전장이라면 설령 상대가 유키라도 연지가 질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해요. 여기서 실력이 더 오른다면 말할 것도 없겠죠. 아까도 말했지만 잔은 기술만 빼먹고 버려도 돼요.”

 “잠깐! 아무리 그래도 말이 좀……!”

 노엘 님은 항의를 하려 했지만, 티아나 님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계속했습니다.

 “그보다 미안하지만 나가기 전에 침실에 데려다 주지 않을래요? 조금 졸리네요.”

 작게 하품을 하며 양팔을 벌리는 어린 주인님.
 전 “실례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티아나 님을 안아들었습니다.

 “고마워요.”

 간지러운 입김과 함께 귓가에 울리는 부드러운 속삭임. 그에 어린 주인님의 따스한 체온이 더해지자 제가 느낀 작은 위화감은 봄철의 눈처럼 소리 없이 녹아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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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김치 같은 브랜드를 통해 스스로 우월한 사회적 유전자를
가졌다는 걸 끊임없이 타자(他者)로부터 확인받으려는 경향이 있고,
이 타자는 대개 강대국 또는 강대국에서 온 사람들이다.

- 문화비평가 이택광 교수의 말 중 -



 이상과 같은 네 가지 요인들은 환경과 관련된 크나큰 차이점들로, 객관적인 측정이 가능하며 여기에는 논쟁의 여지도 없다. 뉴기니인들이 대체로 유라시아인들보다 똑똑하다는 나의 주관적인 생각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뉴기니가 유라시아에 비해 면적도 훨씬 좁고 대형동물의 수도 훨씬 적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학자들 틈에서 이 같은 환경의 차이들을 언급하기만 하면 당장 ‘지리적 결정론’이라는 딱지가 붙는데, 그러면 화를 내는 사람들이 생긴다. 이 명칭 속에는 어떤 불쾌감이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가령 인간의 창의성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뜻이냐, 우리 인간이 기후, 동물군, 식물군 따위를 통하여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수동적인 로봇에 불과하다는 것이냐, 하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이런 걱정들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창의성이 없었다면 우리 모두는 오늘날까지도 수백만 년 전의 선조들처럼 석기로 고기를 썰어 먹어야 했을 것이다. 모든 인간 사회에는 창의적인 사람들이 있다. 다만 어떤 환경은 다른 환경에 비해 더 많은 재료를 구비하고 있으며 발명품을 이용할 수 있는 제반 여건도 한결 유리하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 재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 문학사상, 621면 이하. -



 한국에서 자국의 문화 콘텐츠를 창작물에 접목시키기란, 아예 옛 시대를 다루는 사극 같은 특정 장르를 제외하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몇몇 작가분들처럼 아직 국가와 민족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시절에는 ‘한국식 ○○’을 만들어 보기 위해 나름 노력을 해보았지만, 그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창작자로서의 능력과 노력 부족’이라는 나 자신의 가장 큰 문제를 제외하면, 그 실패에는 크게 3가지 외부요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첫 번째는 순수하게 문화 자료와 장르 기반의 부족이다.
 우리의 문화는 식민통치로 인한 공동체의 좌절 및 단절과 한국전쟁으로 전국이 초토화되는 비극으로 인해 ‘리셋’이라는 표현이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한 번 백지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그 후에는 아무것도 없이 가난한 나라에서 다들 ‘먹고 살기 바빠’ 사회적으로 제대로 된 문화적 기반을 마련하기 힘들었으며, 그나마 성행하게 된 영화와 만화를 비롯한 대중오락 문화들도 군부정권의 검열 아래 철저히 유린되어 간신히 싹이 텄던 장르적 기반마저 심하게 위축되고 말았다.

 과학자들이 그렇듯 창작자들 또한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 난쟁이’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한국 판타지 소설을 부흥시킨 일등공신 중 한 명으로 평가 받는 이영도 작가의 초기작이 D&D 설정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은, 당시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던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참고할 수 있는 ‘자국 콘텐츠’가 없었던 탓도 있었다고 본다. 한복이나 김치만으로는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수 없다.

 두 번째는 창작자와 독자를 매료시킬 만한 한국 문화 고유의 매력이 없다는 데 있다.
 물론 이건 일부러 자극적으로 적은 것으로, 나 자신은 당연히 한국 문화에도 많은 매력이 잠재되어 있다고 본다. 이는 비단 한국 문화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문화가 각자 고유의 멋과 빛나는 개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첫 번째 이유에서 언급한 것처럼 문화에 관련된 기반이 부실한 사회에서는 그런 자기들 고유의 매력을 발견하기도 발전시키기도 어렵다. 가령 여성 한복의 경우 옷 자체는 매우 아름답지만, 부르카나 히잡 마냥 여성의 신체를 지나치게 감춰 - 실제로 중동 지역에서 대장금 등 한국 사극 드라마가 인기 있는 요인 중 하나가 바로 극중 여인들의 차림새가 자신들 문화와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신문기사가 나온 바 있다 - 현대에는 그 매력을 어필하기 힘들 수 있는데, 그에 대한 개선은 장기간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미라는 EBS방송의 개량한복 캐릭터가 당시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내며 상당한 인기를 누렸던 것도, 그동안 이미지가 일관되고 빈약했던 한복 차림새에 대한 반동이 아니었을까. 사실 전통한복에 대한 자료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중국의 한푸 복식을 보면, 꼭 개량한복이 아니더라도 현대에 충분히 통할 만큼 세련되고 맵시 있는 디자인이 많다. 하지만 인터넷 시대 전에는 그런 자료들을 일반 창작자가 발품을 팔지 않는 이상 쉽게 접하기는 힘들었고, 요즘에도 그 양이 많거나 잘 정리되어 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우리의 만주 웨스턴은 조선 독립이라는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절대치가 이미 주어져 있었고, 그것을 마음껏 우롱하거나 의심하는, 파격을 자행하는 자유와 생각의 여유가 없었다. 서슬 시퍼렇게 버티고 선 검열 앞에서 고만고만한 자기복제와 표절로 근근이 연명하다가 사라져버린 불쌍한 만주 웨스턴.

- 오승욱 감독의 저서 『한국 액션영화』에서 (나무위키 출처) -



 “네가 요스비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해 네게 있지도 않은 복수의 의무 따위를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다. 복수니 뭐니 하는 말을 꺼내기 전까지 너는 네 동족들에게서 도망쳐온 것을 부끄럽게 여기진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낸 지금 너는 부끄러워하고 있다. 왜 네게 있지도 않은 복수의 의무를 억지로 네 자신에게 뒤집어씌운 다음 그것을 실천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수치스러워 하는 거지? 단지 요스비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걸 위해서라면, 네 말처럼 네 모습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네 믿음이면 충분하고.”

- 이영도,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륜에게 건네는 케이건의 말 -



 마지막 3번째는 다름 아닌 지나치게 일본 문화를 적대시하는 것에서 오는 폐해를 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고 싶어 하지만, 한국 문화에는 일본 문화적인 요소가 이미 떼어내기 힘들 만큼 농밀하게 섞여 있다. 예전부터 있었던 역사적인 상호 교류에 더해 일제 식민시절 같은 체제에 속해 있었던 영향,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다들 쉬쉬하면서 발전된 일본을 롤 모델 삼아 그들의 방식을 답습해왔기 때문이다.

 한국의 80년대 시대상을 다룬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소설에도 그런 부분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작중 아직 백화점 알바라는 개념이 생소했을 무렵 팀장이 일본의 백화점 비디오를 보여주며 저렇게 고객을 대하라고 직원들을 교육시키는 장면이 있다. 이런 모방은 비단 백화점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온갖 곳에서 일어났던 현상이며 – 심지어 법조문이나 판례까지! - 창작물도 당연히 예외는 아니다.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결코 과거 일본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비판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에 따라 그들을 옹호하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일본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있는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해야 하며 왜곡이나 부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만약 사실을 사실 그대로 직시하지 않으면 한일 축구 경기에서 마징가Z 주제곡을 우리나라 노래로 착각해서 부르는 것과 같은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으며, 그건 단지 한때 수치스러운 꼴을 당하고 마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과장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런 태도는 문화사업 전반에 대한 쇠퇴나 정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서로 다른 문화끼리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설령 어느 문화가 일시적으로 우위를 점한다고 해도 전혀 부끄러워할 일도 우려할 일도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 자아는 압살되기 힘들며, 치명상을 입어도 끈질기게 다시 회복되기 쉬운 성질을 지녔다는 한나 아렌트의 말마따나 어느 고유의 문화 역시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난 생각한다.

 가령 한국을 포함해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럽의 세계화’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각국의 사람들이 입는 옷부터 먹는 음식까지 서구식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언뜻 비슷해 보이는 이 생활 양태는 시간이 흐를수록 각자의 문화가 결합되어 지역마다 고유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사라졌다고 생각한 과거의 전통도 변형된 형태로 부활하거나 재결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애당초 우리가 ‘전통문화’라고 부르는 것들도 처음부터 그 고유의 성격이 있었던 게 아니다. 각자의 생활환경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와중에 자생하거나 혹은 밖에서 들어온 외부요소가 시간이 흐르며 변형되고 결합돼 어떤 일정한 특징을 가지게 된 것에 불과하다. 이 흐름은 지금도 진행 중에 있으며,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아주 조금 각도를 달리하여 그은 두 선이 출발점은 같아도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그 격차가 서로 벌어지듯이 문화 또한 그러하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현생 인류의 출발지는 아프리카 대륙이라고 하는데, 우리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사람들은 아프리카인들과 굉장히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얼마나 그 흐름을 원활하게 잘 돌리느냐에 있는 것이지, 과거의 변화와 발전의 산물에 불과한 전통문화를 잘 지키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반면 한국의 정체성을 지킨답시고 자국 내 일본문화적인 요소를 병적으로 배제하려 든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태도는, 변화와 발전의 건전한 흐름을 저해해 한국 고유의 문화를 가꾸어 나가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

 일본 문화적인 요소를 배척하면, 그 일본 문화만 감쪽같이 쏙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와 결합되어 있는 한국 고유의 문화 역시 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한일전 마징가Z 합창 사건처럼 분명하게 일본의 영향을 받았는데도 그것을 쉬쉬하며 감추게 되면 무엇이 우리 문화인지 제대로 알 수 없게 돼 마찬가지로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는 모두 우리 문화의 정체로 이어진다.

 다시 반복하지만, 서로 다른 문화 사이에 영향을 주고받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상호 간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가령 유명한 일본의 ‘건담 시리즈’나 ‘은하영웅전설’과 같은 작품은 미국의 스타워즈 시리즈에 제법 영향을 받았다. 한데 재미있게도 이 스타워즈는 일본문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조지 루카스 감독은 일본 문화 애호가로 알려져 있으며, 그 이름 높은 제다이들의 컨셉은 일본의 사무라이, 유도, 검도 등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한다.

 또 일본의 유서 깊은 SF애니메이션인 마크로스 시리즈는 서양의 고전SF소설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매우 히트를 친 그 스타크래프트가 오마주를 한 작품들 중 하나에 바로 마크로스가 있다. 비슷하게 일본의 공각기동대는 서구의 고전SF소설과 심리학 저서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고, 워쇼스키 자매의 매트릭스에는 그 공각기동대가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의 한국에서는 이런 선순환이 상당한 지장을 받아왔다. 사실 일본이 가장 심했다 뿐이지 중국은 물론 때로는 미국 문화적인 요소마저 ‘전통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공격하거나 외면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창작자들은 그렇지 않아도 척박한 환경에서 ‘친○파’가 되지 않기 위해 ‘자기 검열’이라는 족쇄까지 차고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니 의욕 있게 작품 활동을 할 수도 없고, 수준 높은 결과물이 나오기도 힘들며, (극히 소수의 작가를 제외하면) 팬덤이 형성되기도 어려워 그동안 온전한 시장이 성립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일본 문화적 요소에 대한 병적인 금기시가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음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국가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돼.”

 “뭐 국가에 얽매이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라 봐요.”

 “물론 국가에 살고 있는 이상 그곳의 규칙은 지켜야겠지만.”

 “제가 목소리를 높여 말하고 싶은 건 말이죠. 정말 뭐라 해야 하죠, 다들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죠. ‘국가’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거예요. 사람을 위해서 국가가 존재하는 거지, 국가를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게 아니란 말이죠.”

 “그렇지. 그러니까 전체주의 같은 걸 경계해야지.”

 “아니아니, 오히려 지금 거꾸로 가고 있지 않나요?”

 “뭐 되돌아왔다고도 하지. 다들 역사에서 배워야하는데…….”

 “다들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죠. 나라의 긍지 따위를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잠깐만요!’라고 말하고 싶어요. 우리들은 딱히 나라를 위해서……아니,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그 사람들의 ‘삶의 편의성’을 위해 공동체로서 국가가 생긴 거죠. 혹은 그런 목적으로 만든 게 국가라는 공동체로서, 그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들이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다들 인식했으면 좋겠어요.”


- 동방Project 원작자 ZUN의 라디오 방송에서 -



 일전에도 가볍게 언급했지만, 일본의 유명 컨텐츠 동방Project는 한국과 중국은 물론 서양의 외국인들에게도 많은 인기가 있다. 한데 해당 시리즈에서 가장 유명세를 가지고 있는 동방홍마향은 흡혈귀, 마녀, 메이드 등 서구문화적인 요소가 다량 포함되어 있으며, 무녀 레이무와 함께 지속적으로 출연하는 또 다른 주인공 중 한 명인 마법사 마리사는 전형적인 서양 마녀의 복장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사소한 사례에서도 현재 우리네 세상이 얼마나 세계화가 되었는지, 동시에 타국의 문화가 자국 문화를 마냥 침범해 집어삼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조화를 이루어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단서를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민주사회가 성숙하고 경제발전과 더불어 인터넷 사회의 도래로 인해 대중들 사이에 폭넓은 정보의 공유화가 이루어지면서 소위 ‘국뽕’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국가주의적인 분위기의 쇠퇴와 함께 점차 한국 고유의 문화 컨텐츠도 발전해 나가고 있다. 민족주의자들의 거창한 바람과는 다르게 난 오히려 탈민족 · 탈국가적인 분위기 속에서야말로 각 문화의 고유한 멋이 살아나고, 또 그것을 뛰어넘는 융합과 발전이 있을 것이라 본다.

 난 어릴 적부터 학교와 사회에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주입당하며 살아왔고, 지금도 그것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잔재는 창작을 하는 데도 작품을 감상하는 데도 매우 방해가 되고 피곤하다. 조금이라도 그 틀에서 벗어나는 글을 쓰려고 하거나 그런 장면을 보게 되면 은연중 어릴 적 주입 받은 그 뇌 속의 검열기관들이 ‘거슬린다’고 경고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내게는 그 경고신호야말로 거슬린다.

 부디 후대의 아이들은 우리 세대와는 달리 좀 더 공정하고 객관적이면서도 자유로운 관점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창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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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7.12.11 20:35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강건한 국수주의의 기조는 필시 일제 강점기에 연이어 찾아온 6.25의 참상 속에서 국가의 자원과 국민들의 의사를 하나로 결집시켜 탄력적이고도 과감한 선택과 집중으로 그 위기를 극복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음에 틀림이 없어 보이지만, 이제 그 잔영을 그만 마음 속에서 놓아줄 때도 되었으니 말이예요.

    돌이켜보면 무수한 대학교의 교양 수업들에서도 국제화 시대의 자본과 문화, 인력은 국경의 경계를 초월하여 세계 곳곳을 끊임없이 순환한다는 내용을 가르치면서도, 정작 사회 전반은 지난 고도 성장기로부터 고착화된 사고의 틀은 넘어서지 못한 채 또다른 변혁의 시기-4차산업혁명-를 맞이하고야 말았으니 뭔가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분명 착실하게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으며, 세대를 거듭함에 따라 의식도 점차 성숙해져가고 있기에 수십년 후의 풍광은 분명 지금보다 많이 발전된 미래의 어느 순간을 비추고 있을 것이라 기대해봐도 되겠지요. :D

    덧 - 곧 출시를 앞둔 월드오브 워크래프트 신규 확장팩을 주제로 한 일러스트레이터 흑요석 작가님의 작품(https://goo.gl/AHXgA4) 또한, 안단테님께서 언급해주신 문화 콘텐츠 요소의 융합 및 상승 작용의 좋은 사례라고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7.12.12 06:29 신고 address edit/delete

      말씀처럼 민족주의 등은 위기를 맞아 휘청거리는 공동체에 효과적인 '지팡이' 노릇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강대국에서는 제국주의 침략에 그 민족주의가 이용되었지만, 반대로 강대국의 침략에 저항하는 약소국에서는 그 민족주의가 다시금 방패로 사용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한국의 좌파들이 외국과는 다르게 본래 우파의 정체성인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데서 연유하는 것이라 하더군요.)

      다만 "자신에 대한 환상은 혼자 걸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유익한 지팡이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허약함을 증대시킨다"는 에리히 프롬의 말마따나 그것을 오래 붙들고 있으면 반드시 여러 폐해가 발생한다고 봐요.

      현재 '국뽕'이라는 단어가 널리 유행하며 국가나 민족을 추켜세우는 방식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난 것도, 다들 이런저런 경로로 민족주의 등의 폐해를 실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저도 그 중 한사람이고요.

      말씀해 주신 것처럼 상황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데 저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럼에도 아직 갈 길이 녹록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에 미력이나마 한 목소리를 보태 보았네요^^;;


      덧. 링크해 주신 그림 잘 봤어요! 마치 흑인 성모나 한복 성모와도 같이 해당 게임의 이미지를 적절하고 멋지게 재해석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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