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블로그 이미지
<●> 99
by 안단테♪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








07. 악마대공의 우아한 휴일 (上)


 선명한 별들이 강처럼 흐르는 아름다운 밤. 무수히 무리지어 홀로 빛을 발하는 별들의 고독은 신의 존재증명에 다름없었다. 조물주가 아니라면 그 누가 밤하늘에 저 영롱한 보석들을 달아놓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감히 답을 하는 자는 그리 많지 않으리.

 하지만 그 아래 펼쳐지고 있는 광경은 신의 존재를, 적어도 신께서 사람을 보살피신다는 종교적 믿음의 대전제를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찬란한 별의 빛, 지상에는 검붉은 피의 강.
 자그마한 등불로 어둠을 밝히며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은 이미 온데간데없다. 웃음이 비명으로 바뀌고, 그 비명이 다시 침묵으로 소멸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을 요하지 않았다.

 - 선생…님…….

 피 웅덩이 속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잡동사니들을 치우며, 자꾸만 감기는 눈을 압정으로 고정하듯 억지로 치켜뜬다. ……그리고 절망과 마주한다.

 - 아아……!

 마물들의 습격.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이형의 존재들에게 산기슭 작은 마을 사람들은 저항다운 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몰살당하고 말았다.

 낙엽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누군가의 팔다리. 통나무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는 누군가의 몸통. 썩은 과일처럼 반쯤 찌부러진 채 데구루루 굴러다니는 누군가의 목…….

 마물들은 희희낙락 기성을 지르며 아직 살아 있는 생존자를 찾아 마저 죽이고, 주변에 널려 있는 사체를 게걸스럽게 입에 넣으며 시산혈해라는 이름의 주지육림을 즐기고 있었다.

 - 아, 니야……아니, 야……아니…야……아니야……아니야……! 그럴…리가…… 그럴, 리가……그럴 리가, 없어……!

 사람들과 친하게 지낸 일이 이처럼 후회스러울 줄은 몰랐다. 무참하게 유린당한 저 사체들이 전부 누구였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폐부를 깊숙하게 찌르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 선생, 님……!

 마물들에게서 사람들을 지켜줄 만큼 강하면서도, 마을 사람 누구나가 친근감을 느낄 만큼 상냥했던 스승이, 지금은 사지가 전부 잘린 채 - 그럼에도 아직 숨은 붙어 있는 채 - 상반신만 사람 모습을 하고 있는 괴물 새들에게 뜯어 먹히고 있었다.

 - 당장, 떨어져어어어어어어!

 스승이 괴물들에게 능욕당하는 모습을 본 순간, 이미 몸은 튀어나가고 있었다. 혼자서라도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 남은 마력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 무형의 칼날을 만들어 사방으로 방출했다.
 드물게 분노가 도운 걸까. 급조한 마력의 칼날들은 놀랄 만큼 정확하게 표적들에게 명중했다.

 - 카아아아아악!

 목이나 날개가 잘린 괴물 새들은 그 자리에서 절명해 쓰러지거나 비명을 지르며 어디론가 흩어져 달아났다. 곧 다른 마물들이 몰려올 거라는 걱정은 할 틈도 없이 급하게 스승에게 달려갔지만, 이미 배가 다 열려 절반 이상 내용물이 사라진 그녀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다.

 - 왜, 나왔어…… 숨어 있지, 않고…….

 이런 상황에서도 부드럽게 입을 여는 스승. 그리고 그걸로 전부 이해했다.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스승님 덕분. 마물들의 공격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 못난 제자를 죽은 걸로 위장해 어딘가에 숨겨두었던 것이리라.

 - 선생님…….

 하염없이 흘러나오는 눈물. 다시 사지로 기어 나온 이 행동은 분명 스승의 희생을 무위로 만드는, 최악의 어리석은 짓이리라. 그럼에도 신기하게 후회스러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 이건, 자업자득…… 내, 업보…… 그러니 넌, 도망, 치렴…….

 툭. 힘없이 떨어지는 스승의 가냘픈 손. 그녀는 덧없이 숨을 거두었다. 처음부터 무참히 지기 위해 피어난 꽃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게.

 - 아아.

 어느새 바글바글 몰려든 마물들 앞에서도, 공포심은 일절 일어나지 않았다. 오로지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스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켰다는 작은 안도감과,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저주하고 또 저주해도 결코 사라질 일 없는 거대한 분노뿐.

 - 용서, 못해……!

 온몸에, 마력이 흘러넘쳤다.






 시대에서 유리된 무채색의 거리.
 색도 소리도 잃은 잿빛 도시의 한가운데를, 극채색의 악마는 조용히 가로질러나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현란한 빛의 입자를 흩뿌리는 악마의 우아한 몸동작. 그러나 오래된 침묵의 도시는 ‘시간이 멈출 만큼 아름답다’고 칭송 받는 로열 블러드의 방문에도 변함없이 아무런 답을 건네지 않았다.

 “…….”

 어지럽게 뒤틀린 아스팔트 도로. 어떤 거대한 충격에 흉하게 갈라지고 툭 튀어나온 검은 길 위에 부러진 가로등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다. 기적적으로 상처 없이 우뚝 서 있는, 다시는 불이 들어올 일 없는 신호등 뒤로는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들이 섬뜩한 철골을 드러낸 채 무참히 기울어져 있다.

 - 이건…….

 아름다운 악마는 문득 허리를 굽혀 바닥에 굴러다니던 무언가를 주워 올렸다. 그것은 곰 인형이었다. 한때는 귀엽고 앙증맞았을, 하지만 지금은 눈 한쪽이 떨어져 나가고 반쯤 불에 타 흉측하고 볼품없이 변한 아이들의 친구. 빛바랜 꼬리표에는 'Made in――'이라는 문자가 적혀 있었지만, 그 뒤는 희미하게 뭉개져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잠시간 곰 인형을 들고 이리저리 관찰하던 악마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 순순히 나올래, 아니면 끄집어낼까?

 악마의 금빛장의가 펄럭이며 그림자 안에 숨어 있는 100개의 눈이 일제히 대상을 포착했다. 그 시선에 사로잡힌 서큐버스는 공간의 틈새 속에서 꽃잎을 흩날리며 화려하게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대공님. 오늘도 여전히 매력적이시네요. 그 천년 미모의 비결을 부디 제게도 알려 주시지 않겠어요?”

 몰래 훔쳐 보다 걸렸음에도, 루시는 태연하고도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이 서큐버스는 자신의 은신이 귀족이나 왕족으로 분류되는 고위악마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걸릴 것을 전제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대공이라 불린 악마는 오색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위로 올렸다.

 - 흠, 딱히 비결이라 할 만한 게 있을까. 대부분 타고난 거라.

 “어머나, 부러운 말씀. 부스러기를 노리고 몰려드는 하찮은 벌레처럼, 한갓 비천한 몽마인 저 역시 위대한 대공께 뭔가 떨어지는 게 있을까 기대하고 왔는데, 아무래도 분에 넘치는 헛된 바람이었나 보네요.”

 있는 대로 자신을 비하하며 눈물 흘리는 척을 하는 루시. 하지만 인간에 치우친 서큐버스의 자학적인 비아냥은 악마대공에게 조금도 통용되지 않았다. 악마대공은 매끄러운 자신의 팔을 순백의 몽마를 향해 뻗었다.

 - 정 그러면 한동안 같이 다녀볼래? 뭔가 얻는 게 있을지도 모르지.

 아무렇지 않게 내밀어진 그 손은, 오색으로 찬란히 빛나는 악마의 휘광에 어우러져 마치 신의 사자가 강림해 내미는 구원의 손길처럼 보였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천연의 매력. 그러나 누군가를 사로잡는 일을 업으로 삼으며 ‘매혹’이라는 현상 자체에 상당한 내성이 있는 루시는 그 빛에 쉬이 눈이 멀지 않았다.

 “참으로 감사한 제안이지만 거절할게요. 대공님 상대로는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테니까요. 양식이 되지 않는 잠자리는 사양이랍니다.”

 빙그르 하얀 양산을 돌리며 고개를 젓는 루시의 대답에 색정광으로 악명 높은 악마대공은 짐짓 아쉬운 척을 했다.

 - 그거 유감이군. 인간과 달리 너희 서큐버스는 오래 즐길 수 있어 좋아하는데.

 “그래서 저희들은 당신을 피하는 거랍니다. 저희에게 있어 잠자리의 쾌락은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 그 쾌락이 단순한 노동으로 전락하는 순간 저희들은 존재이유를 잃고 죽어가니까요.”

 - 살기 위한 노동이 도리어 허용되지 않는 몸이라니, 마치 저주나 다름없군. 인간 신학자들이라면 꽤나 재미있어 할지도 모르겠어. 한데, 그럼 넌 왜 내 근처를 알짱거리는 거지? 너희들에게 있어 난 피하는 편이 더 나은 존재라며.

 “흥미로운 곳Divine City에서 재미없는 물건에 관심을 보이시는 것 같아서요. 몽환경으로 이것저것 엿보다 그만 호기심이 동해 직접 발걸음을 옮기고 말았네요.”

 - 언젠가 호기심이 널 죽일지도 모르겠군.

 서늘한 악마대공의 말에도 밤의 쾌락을 양식으로 삼는 몽마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게는 지루함보다 차라리 죽음이 나아요. 그러니 직접적으로 물을게요. 그 망가진 인형에 혹시 제가 모르는 다른 특별한 가치라도 있는 건가요? 너무나도 신경 쓰이네요.”

 서큐버스의 희고 가는 손가락은 방금 전까지 악마대공이 주시하고 있던 볼품없는 곰 인형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색으로 찬란한 악마는 침묵에 잠긴 폐허의 도시를 슬쩍 둘러본 후 다시 시선을 손에 들고 있는 곰 인형으로 옮기며 입을 열었다.

 - 가끔 이런 신인神人들의 유적을 찾을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고위존재가 되어 상위차원으로 떠날 만큼 위대한 이들이 진정 실재했다면, 이 세상에 뭔가 굉장한 걸 남기고 가지 않았을까?

 “굉장한 거라면 이미 남기고 가지 않았나요? 성검 센트럴 도그마. 그분先王의 심장을 꿰뚫은 시공분쇄기. 인간들은 물론 용종들조차 재현 불가능한 그 성검이라면, 충분히 ‘굉장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갸웃거리며 의아해하는 몽마의 말에 악마들의 대공은 고개를 저었다.

 - 그런 단순한 파괴병기 말고. 뭔가 정신적으로 무척 자극적이고도 획기적인 예술품이라든가, 전혀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의 가르침이라든가……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아무튼 그런 거 말이야.

 서큐버스의 동공이 크게 열리며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말이 흘러나왔다.

 “…그 여자와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 그 여자라니, 누구를 얘기하는 거지?

 악마대공은 교활한 몽마의 작은 틈을 날카롭게 눈치 챘지만, 마왕의 비서관은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이라 설명하기가 애매하네요. 사실 저도 상당 부분 잊어버린 터라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나저나 고대 유적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역시 더 안으로 들어가실 생각인가요? 여기는 고작 입구에 불과하죠. 특별히 눈에 둘 만한 것들도 없고요. 설령 있었다 해도 이미 인간 도굴꾼들이 전부 가져갔을 테니.”

 루시가 시선을 옮긴 곳은 반쯤 무너진 건물들 저 너머, 거대하고 반투명한 돔에 둘러싸인 유적의 최심부였다. 그 내부의 정경은 유리막 같은 것에 가려져 고위마족의 눈을 가지고도 제대로 살필 수는 없었지만, 명백히 유적 근처의 폐허와는 건축양식을 달리하는 유선형의 대형빌딩이나, 용종들의 공중전함과 닮은 형상도 희미하게나마 엿볼 수 있었다.

 - 신시의 유적중추, 『아브락사스의 알(Creatio Ex Cosmos)』. 물론 나도 저 안에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악마대공이 작게 중얼거리며 좀 더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리며 반투명한 돔 쪽에서 무언가 고속으로 날아와 굉음과 함께 착지했다.

 「주의. 기밀지역에 접근하는 생명체 복수포착. 지성체로 추정. 지금부터 신원조회를 실시함.」

  잿빛 머리카락에 회색 눈동자, 그리고 금속성의 뿔과 날개. 돔에서 날아온 무언가는 일전 루치아를 비밀리에 방문한 용종과 매우 비슷한 외견의 여성이었다. 특히 단아하지만 무기질적인 인상을 주는 용모는 마치 서로가 자매처럼 닮은 느낌이었지만, 용종과는 다르게 피부와 머리카락 군데군데가 검붉게 변색되어 있었으며, 그 억양만큼이나 동작 또한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딱딱해 보였다.
 루시는 악마대공을 방패삼을 수 있는 위치로 슬쩍 이동하며 작게 입을 열었다.

 “고대룡Machina…… 역시나 이곳에도 신시의 파수꾼이 지키고 있군요.”

 ‘마키나’라 불리는 이들은 세계 곳곳 신인들이 남겼다는 유적을 수호하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유적 근처의 오래된 폐허에는 누가 발을 들여놓던 일절 간섭하지 않았지만, 그 이상 깊숙이 접근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조회종료. 좌측. 존재형식 인과굴절변이체. 우측. 존재형식 인과굴절변이복합체. 양측. 정통인류의 존재형식과의 유사점 찾아볼 수 없음. 접근허용금지.」

 작게 명멸하던 마키나의 잿빛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변하는 동시에 그 발밑에서 두 개의 거대한 회색관이 튀어나와 활짝 열렸다. 그 안에는 길고 큼직한 포신의 중화기부터 날카로운 톱날이 매서운 근접무기까지 수많은 병기로 가득 차 있었다.

 - 역시 여기서도 안 되나.

 악마대공의 혼잣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폐허 전체에 치직 노이즈 섞인 방송이 울려 퍼졌다.

 「경고합니다. 이곳은 아크 테라리아 사社의 사유지입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지역이오니 생체인식코드를 가지고 있지 않은 분, 사원증 및 기타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지 않은 분은 속히 퇴거하시기 바랍니다.」

 - 답은 이미 나왔지만, 그래도 한번 시험해 볼까.

 저벅. 악마대공이 한발자국 앞으로 나아가자 반대편에 서 있는 마키나가 주저 없이 포신을 위로 올려 상대를 겨누었고, 다시 한 번 방송이 흘러나왔다.

 「경고합니다. 더 이상 접근할 경우 세계질서유지연합 특별보안조치법에 의거해 제압사격을 실시하겠습니다. 빠른 퇴거를 권고합니다.」

 - 역시나. 하다못해 신원을 식별하는 기준이 뭔지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악마대공은 짧은 한숨과 함께 등을 돌려 뒤로 발걸음을 옮겼고, 마키나 역시 겨누었던 포신을 발아래로 내렸다.
 순백의 서큐버스는 유적에서 멀어져 가는 악마대공의 뒤를 따르며 입을 열었다.

 “이대로 물러나실 생각이세요? 전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이실 줄 알았는데요.”

 - 음, 그런 충동이 아예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저 녹슨 용들은 한번 싸움이 벌어지면 점점 숫자가 늘어나 성가셔. 한 마리 부수면 두 마리가, 두 마리 부수면 네 마리가… 어디선가 계속해서 튀어나오지. 들고 나오는 무기도 점점 강해지고.

 “어머, 벌써 싸워보신 건가요? 전 마키나들은 용종과 달리 시스템 접속권한이 없다고 들어 훨씬 약할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나 보네요?”

 - 그럼 벌써 오래 전에 유적의 신비가 벗겨졌겠지. 나도 신대륙의 유적에서 한번 강행돌파를 시도해 봤지만, 저놈들이 500마리 이상 튀어나온 시점에서 그냥 그만두었어. 힘의 여유는 있었지만 녀석들의 한계를 가늠할 수가 없었거든. 자칫 싸움이 예상보다 커져 유적 자체가 날아가면 본말전도이기도 하고.

 유적 밖으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곰 인형을 한손에 든 채 주변 곳곳에 눈길을 주는 악마대공. 루시는 이제야 그녀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대공님은 신시의 파수꾼에게 자격을 인정받을 만한 것을 찾고 계셨던 거군요. 어때요, 저도 좀 도와드릴까요? 오래된 용들이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 흥미가 생겼거든요.”

 - 모처럼의 제안은 고맙지만 사양할게.

 “웅, 아까 제가 할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계셨나요? 흑, 설마 그렇게 속이 좁으셨을 줄은.”

 토라진 척 눈물짓는 서큐버스의 말에 악마대공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 그런 게 아니야. 단지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말이지. 이만 가봐야 해.

 “선약이요……?”

 - 여동생과 데이트하기로 했거든.

 악마대공은 밝게 대답하며 최대 1km까지 늘어날 수 있는 에테르의 날개를 활짝 폈다. 그녀는 주변 모든 것들을 날려버릴 기세로 힘차게 날아오르며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루시에게 말을 던졌다.

 - 아, 그리고 그분의 따님에게 전해드려. 딱히 인간들이 먼저 손을 대기 전까진 멋대로 행동할 생각 없으니 감시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야.

 찬란하고 우아한 악마는 순백의 몽마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이미 훌쩍 저 먼 곳으로 날아갔다. 홀로 남은 루시는 점차 꽃잎으로 변해 꿈과 현실의 경계 속으로 모습을 감추며 중얼거렸다.

 “참으로 빈틈없으신 분. 역시 그분 다음으로 제가 좋아하는 분답네요. 하지만 취향은 여전히 고약하세요. 꽃은 꺾을지언정 짓밟는 게 아니랍니다.”






 은은히 빛나는 예술의 도시 생트레망.
 라온 공화국 굴지의 관광지 중 하나인 이곳은, 수백 년 전의 건축물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 문화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높은 도시였다. 야트막한 오래된 건물들이 주가 되어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대신 각 건물들이 시 차원에서 유지보수가 되고 있고, 풍경에 맞지 않는 건물을 함부로 세울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어 거리에는 고풍스러운 멋이 세월의 흐름에도 풍화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근처에는 신시의 유적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는 편이 이상하지.”

 나는 적당히 붐비는 거리를 지나치며 한숨 섞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형식상 문화재 도시라고는 하지만, 헤미스피어 도서관 외에는 특별히 거리정경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돈과 권력에만 관심 많은 어딘가의 꼬맹이 시장님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뭐 녀석이 속물인 덕분에 어려운 시절에도 잘 굴러가고 있는 면도 있으니 꼭 나쁘게 볼 건 아닌가.”

 국가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생트레망 시와 독립자치시인 헤미스피어 시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 확실히 참혹한 전쟁의 여파로 전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녀석은 잘해주고 있었다.

 ‘그래도 물가만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덕분에 이런 데까지 소금을 사러 나오게 되었지.’

 그렇다. 소금. 내가 이 멀리 떨어진 라온 공화국 최대 관광도시까지 발걸음을 옮긴 것은, 문화예술과는 하등 상관없는 지극히 궁상맞은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 도서관 식당에 소금이 부족하다고 하는군요. 어디서 좀 싸게 구할 수 없을까요.

 말하자면 장보기. 실질적으로는 명령이나 다름없는 도서관장의 부탁에 이번에는 소금을 싸게 사기 위해 난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다. ‘예술의 도시’라는 거창한 명칭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생트레망 가까이에는 소금광산 또한 위치해 있었다.

 ‘이곳도 다행히… 활기가 되살아나고 있군.’

 소금주문을 마친 나는 준비가 끝날 때까지 가볍게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세실리아가 곁에 있었다면 한소리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나 혼자인 데다 솔직히 바다까지 건너왔는데 이 정도 보상도 없으면 못 해먹을 짓이다.

 ‘너무 붐비는 건 싫지만…… 적당히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 건 역시 듣기 좋네.’

 인파 사이에서 동전 받을 모자를 놓고 바이올린을 켜는 연주자. 연인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절반 이상은 테이블이 차 있는 카페들…….

 헤미스피어 시와 달리 생트레망은 격전지에서 꽤 가까운 지역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물들의 습격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이는 마왕군과의 전쟁에서 불리해질수록 오히려 자신들의 문화도시를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라온 공화국 시민들의 필사적인 분투 덕분이었다고 한다. 물론 신시유적의 고대룡들이 의도치 않게 거대한 산맥처럼 시로 침입해 들어오는 길을 상당 부분 차단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봐야 하리라.

 ‘그러고 보면 시온 녀석, 꽤 마음에 두고 있는 눈치였지. 전혀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닌데도.’

 얼마 전 인연이 있었던 성녀의 경호원이 속해 있었던 라온 공화국의 외인부대. 시온이 성녀의 곁에 있기 위해 부대를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이 터졌고, 공화국의 칼과 방패로 기능하기 위해 차별 없이 받아들여졌던 부대원들은 온갖 혹독한 작전에 투입돼 빛나는 전과를 올리며 목숨을 잃었다. 생트레망 시 방어전투 역시 그 격렬함에 비례해 외인부대들의 희생 또한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잠깐 동안의 만남이었지만, 그럼에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시온은 극도로 진지하고 성실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가 속해 있던 당시의 부대원들은 현재 대부분 전사. 확실히 시온은 운 좋게 부대를 빠져나와 살아남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전쟁이 터질지 몰랐다 해도 그녀는 자기 혼자 꿈을 좆아 동료들을 버리고 죽음에서 도망쳤다고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그렇다면 당당히 가슴을 펴. 누군가를 위해 휘두르는 검은 하나같이 숭고하니까. 사람을 구하는 성녀를 위해 헌신한 네 궤적은,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전우들과 같은 빛을 향하고 있어.’

 하지만 난 이 말을 가슴에만 간직한 채 시온에게 직접 건네지는 않았다. 이런 종류의 죄책감은 본인이 스스로 떨쳐내지 않는 한 아무리 남이 말로 해봤자 소용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걱정하지 않는다. 그 안젤라라면 반드시 자신의 파트너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테니까.
 그렇게 지난 인연을 떠올리며 멋대로 훈훈한 기분에 빠져들었던 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하는 감각에 무의식적으로 등을 돌렸다.

 ‘이 거무칙칙한 마성은……!’

 시선이 향한 끝에 포착된 것은 내가 정말 만나기 싫은 최악의 상대 중 하나. 색정광으로도 악명 높은 악마대공 얄다바오트 레오였다. 사실 줄리아의 말마따나 내가 멋대로 낮춰 부르고 있을 뿐, 실제로는 도시 하나쯤은 반시진도 되지 않아 초토화시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마물이다. 그런 거물급 마족이 왜 인간으로 꾸미고 내려와 이런 관광도시의 카페 한구석에 있는가.

 ‘음? 잠깐. 동행이 있어……?’

 잘 보니 악마대공의 맞은편에는 예쁘장한 노란 드레스를 잘 차려입은 단발머리 소녀가 앉아 있었다. 악마대공은 왜인지 뾰로통한 얼굴로 새침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소녀에게 젤라토를 한 스푼 떠서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이거 생각보다 맛있군. 자, 앙~ 해봐.”






TRACKBACK 0 AND COMMENT 0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693)
잡다한 일상단상 (144)
즐긴작품 떠들기 (35)
타인정원 엿보기 (23)
환상정원 가꾸기 (491)

RECENT TRACKBACK

CALENDAR

«   2019/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