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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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








06. 성녀 안젤라의 우울 (上)


 잔뜩 찌푸린 잿빛 하늘.
 영하로 떨어진 날씨와 언제 다시 눈이 내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난민촌의 분위기는 진흙처럼 칙칙하고 어두웠다. 제대로 된 벽도 지붕도 없이 낡아빠진 천막과 해질 대로 해진 모포, 그리고 넝마 같은 옷가지로는 도저히 앞으로 닥칠 겨울의 맹추위를 견딜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발, 부디…… 아이만이라도……!”

 배급소 천막에선 마침 직전에 딱 줄이 끊긴 어머니가 어린 딸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직원들에게 사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원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전쟁의 여파로 구호물자가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인지라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식량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보다 못한 자원봉사자 중 한명이 자신의 점심을 대신 내어주는 것으로 소녀는 간신히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하다못해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라도 있다면…….”

 추위와 굶주림에 몸을 떠는 피난민들은 원망스럽게 헤미스피어 시市의 성문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그나마 이 지역이 전쟁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받지 않아 상황이 좀 낫다는 얘기를 듣고 어떻게든 겨울을 나기 위해 힘겹게 먼 곳에서 찾아온 것이다. 제 기능을 하고 있는 도시에서라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구걸을 하거나, 최악의 경우 쓰레기더미를 뒤져서라도 연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길거리에서 노숙을 한다고 해도 광야에서 맨몸으로 눈비를 맞는 것보다 몇 배는 낫다.

 - 시민증이나 기타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 없이는 출입할 수 없습니다. 강행돌파 시 발포허가도 떨어져 있으니 아무쪼록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피난민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구형 전투골렘을 앞세운 경비병들의 서슬 퍼런 총구였다. 그들은 시장의 명에 의해 철저하게 난민들이 도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었다.

 시장이 피난민들의 수용을 거부하는 표면상의 이유는 헤미스피어 도서관과 그에 부속된 시 자체가 중요문화재에 속하기 때문에 관리차원에서 함부로 외부인을 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유는 도시의 질서와 치안을 이 이상 어지럽힐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시장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물자부족으로 민심이 흉흉한 판에 자진해서 골칫거리를 늘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몰래 침입할 수도 없고…….”

 물론 말과 달리 잠입 자체는 가능하다. 아무리 경비가 삼엄하다 해도 시로 통하는 모든 길을 24시간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피난민들은 함부로 시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으으, 으아아아아……….”

 힘없이, 그럼에도 소름끼치게 귓가를 때리는 누군가의 단말마. 지금 이 순간 난민촌의 천막 어딘가에서 생명의 불길이 사그라지는 소리였다. 사실 이 난민촌의 진정한 문제는 식량뿐만 아니라 의약품 역시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병자. 노약자. 부상자. 상이군인.
 피난 중에 부상을 입은 사람, 비위생적인 피난생활로 병을 얻은 사람, 전쟁에서 큰 상처를 입고 불구가 되어 퇴역했지만 돌아갈 고향이 없어 피난행렬에 참가한 사람 등등…….

 난민촌에는 당장 안정을 취하고 치료 받아야 할 환자들이 수도 없이 존재했으나, 그들은 하나 같이 제대로 된 조치를 받기는커녕 하루의 끼니를 채우는 것조차 여의치 않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미 많은 이들이 죽었고, 죽어가고 있으며, 죽어나갈 것이다.
 하지만 잿빛 구름을 뚫고 새어나오는 한줄기 빛 마냥 그들에게도 아직 희망은 남아 있었다.

 “교단의 태양과 나무 문양…… 서, 성녀님이다! 성녀님께서 우리에게도 찾아 오셨어!”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 마치 신화 속 바다가 열리는 기적 마냥 난민촌에 모여 있는 군중들이 절로 양쪽으로 흩어지며 널찍이 사람이 지나갈 길을 만들었다.

 “…….”

 실처럼 가늘고 긴 연갈색의 머리카락, 앳돼 보이지만 신념에 가득 찬 호박색 눈동자가 또렷이 빛나고 있는 단아한 얼굴, 금실로 수놓은 경전의 글귀가 찬란히 반짝이는 녹색을 기조로 한 신관의 복장……. 그녀가 바로 라 엘 벤투스 교단이 자랑하는 축복과 치유의 성녀 안젤라였다.

 “오오, 성녀님……!”

 기적을 바라며 안젤라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 하지만 그 몇몇 사람들의 손길은 차가운 칼집 앞에 막히고 말았다.

 “거기까지.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마시길 바랍니다.”

 성녀를 지키듯 사람들을 막아 선 것은, 칠흑 같이 어두운 검정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훤칠한 키의 경호원이었다. 검은 군복과 붉은 베레모를 쓴 그녀는 라온 공화국 외인부대 출신의 베테랑으로, 지금은 성녀를 수호하는 검술의 달인Swordmaster으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시온. 저는 괜찮으니 물러나세요.”

 성녀 안젤라의 상냥하지만 엄격한 목소리에 시온이라 불린 경호원은 말없이 뒤로 물러섰다. 안젤라는 몰려왔던 사람들 중 앉은뱅이 노파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죽은 고목처럼 말라붙은 그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그대에게 신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하기를.”

 축복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한 빛이 성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며 노파의 몸을 뒤덮었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안젤라가 왜 성녀로 불리는지 단번에 체감할 수 있었다.

 “아, 아프지 않네……? 응? 다, 다리가 움직여……!”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상처가 곪아 다리를 잘라내기 직전까지 갔던 노파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능숙하게 걷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노파의 얼굴과 손에 보이던 동상을 비롯한 여러 상처들도 순식간에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기, 기적이다! 기적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처음 안젤라를 맞이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큰 목소리로 환호성을 지르며, 교단에서 모시는 신과 그에 따르는 성녀를 소리 높여 칭송했다. 그럼에도 함부로 성녀에게 다가와 얼싸안지 못했던 것은 여전히 시온이 칼자루에 손을 댄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은연중 주변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어서 목숨이 경각에 달린 분들께 우선 저를 안내해 주세요. 물론 그렇지 않은 분도 나중에 모두 말끔히 낫게 해드리겠습니다. 신의 이름을 걸고.”

 단호한 결의를 담은 성녀의 음색. 결코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 중 그 선언과도 같은 구원의 말을 놓친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다시금 소리 높여 신과 성녀를 찬양하며 구호소가 있는 천막으로 안젤라를 안내하는 사람들. 그날, 난민촌의 수백이 넘는 병자와 부상자들은 모두 자리에서 무사히 일어날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안젤라 님.”

 시온은 급사를 대신해 성녀를 고급객실로 안내하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객실로 들어선 안젤라는 살며시 문을 닫으며 자그마한 입술을 열었다.

 “시온. 당신도 고생이 많았어요. 그나저나 어때요, 확인은 끝났나요?”

 “예, 철저하게 조사를 마쳤습니다. 이 방에는 어떤 마술적 기계적 도청장치도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방음도 확실하고 숨어 있는 사람 또한 없으니 안심하셔도 괜찮습니다.”

 시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안젤라는 훌렁훌렁 신관복을 벗어던지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 드디어 끝났다! 하여간 빌어먹을 교단 할매들! 성녀가 무슨 극한직업인 줄 알아. 하루 천명이 넘는 사람을 치료해 보긴 또 처음이네. 하! 신기록이야 신기록! 젠장!”

 순식간에 속옷차림이 된 안젤라는 객실의 소파에 뛰어들어 쿠션에 얼굴을 묻고는 버둥버둥 발버둥을 쳤다. 평소 성녀의 정숙한 모습밖에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기절할지도 모를 만큼 돌변한 행태. 그러나 시온은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안젤라가 벗어던진 옷가지를 주우며 입을 열었다.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제가 언뜻 보기에도 난민촌의 환자들 중 오늘을 넘기지 못할 만큼 심각한 사람만 백 명이 넘더군요. 일주일을 넘기지 못할 사람은 그 몇 배는 되었고요. 한데 안젤라 님께서 그들을 전부 완치시키셨으니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을 구하신 겁니다. 역사상 그 누구도 안젤라 님만큼 사람을 구하지는…….”

 “아, 입에 발린 소린 집어치워. 그게 뭐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한 건가? 다 교단을 위해서, 아니 교단의 이익을 위해서…… 아니아니! 교단 할매들의 시커먼 뱃속을 위해서 한 거지! 봤어? 오늘 쌓인 기부품들. 아니, 당장 제대로 잘 곳도, 먹을 것도 없는 사람들이 무슨 돈과 보석들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대!?”

 안젤라는 누운 채로 속옷마저 벗어 던지고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시온은 알몸이 된 안젤라를 안아들어 욕실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급하게 고향을 떠나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라도 귀중품을 챙길 여유 정도는 있지요. 오랜 세월 정처 없이 떠돈 부랑자나 노숙자라면 모를까, 피난민들의 대부분은 요 1, 2년 사이 생긴 전쟁 피해자들입니다. 각자 소중한 것 하나둘 정도는 몸에 지니고 있어도 이상할 것 없어요.”

 “그러니까 답답하다는 거야! 그렇게 소중한 거면 계속 가지고 있을 것이지, 왜 있지도 않은 신에게 감사해하며 그 소중한 걸 갖다 바치냐고. 내일 먹을 건커녕 다음 끼니도 걱정해야 되는 사람들이 말이지.”

 “있지도 않은 신…….”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너도 알잖아. 사람을 치유하는 성심력은 신의 기적 따위가 아니라는 걸. 그건 순전히 내 힘에 불과해. 그야 나도 교단이랑 손잡고 벌어먹는 주제에 큰소리칠 자격은 없지만, 신이라 불리던 초월자들은 단지 우리보다 앞서 있던 종족일 뿐이야. 그들이 지금 세계를 버리고 고차원으로 떠났을 뿐이라는 게 증명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신을 믿고 있냐고.”

 “…….”

 사람은 어려울 때일수록 의지할 대상이 필요하다는 말을, 시온은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안젤라 역시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시온은 팔을 걷고 옷이 물에 젖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안젤라를 씻기기 시작했다. 안젤라 또한 자연스럽게 그 손길을 받아들였는데, 그녀가 매우 고생을 한 날은 시온이 온갖 시중을 들어주는 것이 두 사람의 암묵적인 관례였다.

 “시온도 벗지 그래? 이왕이면 같이 씻으면 좋잖아.”

 도중에 안젤라가 한 마디 하긴 했지만, 시온은 잠시 주저한 뒤 살짝 얼굴을 붉히며 거절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나중에 씻겠습니다.”

 “흐응. 난 봐도 아무렇지 않은데. 뭐 시온이 신경 쓰인다면, 어쩔 수 없지.”

 안젤라가 관심 없는 척 고개를 돌리자 시온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을 움직였다.
 잠시 후. 샤워를 마치고 타월로 물기를 닦은 안젤라에게 시온이 가운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안젤라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거 말고. 내 외출복 챙겨 왔지? 그거 줘.”

 시온의 얼굴에 오늘 처음으로 당혹감이 떠올랐다.

 “설마, 또 밤거리에 놀러 나가실 생각인가요? 부디 오늘은 참으세요! 이렇게 고생하신 데다 모처럼 5성 호텔에 묵게 되었는데…….”

 “시끄러워! 그러니까 스트레스 풀러 나가야지! 어차피 내일은 시장이 데려온 병자들 치료하느라 시간 없을 거 아냐. 뭐 시장이 괜히 이런 최고급 호텔을 잡아줬겠어? 다 교단의 선전과 시장직 재선이라는 이익을 위해 기적의 행사라는 퍼포먼스를 부리는 대가로 대우해 주는 거지.”

 “그러니 그걸 누리시면…….”

 “미안하지만 난 그거 하나도 안 고맙거든? 내가 왜 이런 먼 곳까지 와서 쇼 하자는 얘기에 아무 불평 없이 순순히 동의한 줄 알아? 바로 이 도시가 전쟁피해를 아직 입지 않은 지역이라서 그래. 그 말은 상대적으로 다른 곳에 비해 놀 곳이 남아 있다는 뜻이잖아. 난 오늘 이 날만을 위해 답답한 수도원 생활을 6개월 동안 참았어. 오늘 못 나가면, 내일 아프다고 핑계대고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으…….”

 어린애 같은 협박이었지만, 대체할 인재가 없는 이상 그건 절대적인 압박이다. 결국 시온은 버티지 못하고 여행가방 속 챙겨온 외출복을 안젤라에게 건네주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

 딱 달라붙는 청바지에 가죽자켓, 여기에 추위를 대비해 털 달린 외투를 걸치고 거칠게 묶은 머리 위에 사냥 모자를 쓰자 기적과 치유의 성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거리의 불량소녀만이 남게 되었다.
 안젤라는 거울을 보고 일변한 자신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저번처럼 절대 몰래 뒤를 밟는다거나 그딴 스토커 같은 짓 하지 마.”

 시온은 난처해하면서도 힘껏 반론했다.

 “그건 스토커가 아니라 경호원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시면 어쩌려고…….”

 “뭐야, 혹시 내가 잘못되면 교단에 문책이라도 당할까 걱정하는 거야? 뭐 결국 당신도 자기 안부가 중요한 속물…….”

 “제게 안젤라 님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시온은 드물게 성녀의 말을 끊으며 상대를 진지하게 응시했다. 안젤라는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말을 더듬으면서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 아무튼 무슨 일이 생겨도 내, 내가 해결해! 그러니 시온도…… 나한테 신경 끄고, 모처럼 5성 호텔을 만끽하며 푹 쉬고 있으라고!”

 쾅. 안젤라는 문이 부서지도록 세게 닫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호텔 밖으로 뛰쳐나갔다. 급하게 달려 나가는 안젤라에게 몇몇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 눈길을 주긴 했지만, 아무도 그녀가 그 유명한 성녀일 거란 의심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고요한 듯 은근히 떠들썩한 도서관.
 직원들도 손님들도 둘 이상만 모이면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고 유명한 소문을 떠들기 시작한다. 그 소문이란 단연, 어제 난민촌을 방문한 성녀의 기적에 대한 것. 흔치 않은 일이다 보니 화젯거리가 되는 것도 이해는 하지만, 남들보다 귀가 많이 밝은 내게는 솔직히 조금 고역인 상황이다.

 ‘내가 왜 거처를 도서관으로 삼고 있는데…… 아, 짜증나. 진짜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차음마법 쓰고 잠이나 잘까.’

 평소 불량하다는 억울한 평가를 직접 실천해 버릴까 망설이던 중 일을 마친 네리가 쪼르르 내게 달려와 그 지겨운 화제를 입에 담았다.

 “선배선배선배! 들었어요? 우리 도시에도 그 성녀 안젤라가 왔데요! 벌써 어제는 난민촌에서 사람들을 치료하고, 오늘은 시 광장에서 환자들을 치료할 거라 하던데요?”

 “어. 들었어. 왜, 그게 그렇게 신기하냐?”

 일부러 시큰둥하게 답했음에도 네리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에이, 선배! 이런 일에 관심 없는 척 폼 잡아봤자 전혀 멋지게 안 보여요. 그냥 솔직하게 놀라고 궁금해 하는 편이 낫지. 성녀의 기적, 정말 굉장하지 않아요? 팔다리를 잃은 사람도 멀쩡하게 사지를 고쳐주고, 불치병에 걸린 사람도 완쾌시켜 준다니…… 진짜 기적이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네요!”

 흥분했는지 머리카락의 일부가 귀처럼 파닥거리는 네리. 난 성녀의 기적보다 저 머리카락이 움직이는 원리가 훨씬 더 궁금하다.
 내가 별 대꾸가 없자 네리는 혼자서 다른 미궁에 빠져들었다.

 “음, 근데 마법에는 그런 힘이 없는 걸까요? 어디서 듣기론 분명 치유마법도 있다고 한 것 같은데……. 근데도 마법으로 사람을 고쳤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아, 그건…….”

 내가 대답하려는 찰나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건 마력 자체가 사람에게 독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야. 치유마법으로 설령 상처나 병 자체는 낫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잔류하는 마력 탓에 결국 환자가 사망하거나, 심한 경우 마물 같은 존재로 변질되는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거든.”

 네리의 의문에 답한 것은 세실리아였다. 당연히 마도서를 다루는 유명한 가문의 후계자인 데다 정식마법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세실리아는 그 이치에 대해서도 훤했다.

 ‘생각해 보면 좋은 타이밍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일개 말단사서에 불과한 내가 마법에 대해 자세히 주절주절 떠드는 것도 좀 부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기우일지도 모르겠지만 난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정체를 감추고 생활한 지가 오래 되다 보니 내 입장에서는 당연히 알고 있는 것도, 지금 내 ‘위치’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을 자꾸 깜박하게 된다. 이전 카타리나와 같은 만능형 인물을 연기할 때라면 모를까, 지금의 내가 지나치게 지식을 드러내는 것은 적절치 않은 일이다.
 내 고민 따윈 알 바 없는 네리는 순수하게 놀라며 크게 입을 벌렸다.

 “우와, 마력이라는 게 그렇게 위험한 거였어요? 저항력 없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마력에 노출되면 자칫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 있긴 한데, 설마 사람을 괴물 같은 존재로 만들 수도 있다니…….”

 “이제 왜 나라에서 자격증 시험 같은 것까지 만들어 마법사들을 관리하는지 알겠지? 소위 불법 마도사, 불마라 불리는 것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 그렇다고 마냥 통제를 강화하면 정상적인 다른 마법사들의 연구나 활동에도 방해가 되니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그렇군요. 그럼 마법을 치유목적으로 사용하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인가요?”

 “거의. 원리적으로야 가능하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커. 차라리 치유대상이 죽으면 다행이지만, 아예 마물로 변질되게 되면, 대개는 이성을 잃고 엄청나게 난폭해지거든. 역사적으로도 끔찍한 사례들이 존재하는데…….”

 세실리아가 예로 든 사례들 중 몇몇은 내 기억에도 선명히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는 약 반세기 전에 있었던 동방국가들의 서부연합전선과 신성 벤투스 제국 간의 7년 전쟁 막바지에 있었던 사건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황제의 과대망상적인 정복욕에서 비롯된 신성제국의 침략전쟁은, 초기의 선전이 무색하게 결국 연합전선에게 밀려 무참한 패배를 눈앞에 두게 된다.

 하나둘씩 무너지는 전선. 전멸하는 부대. 빼앗기는 주요 고지들.
 국토를 유린당해 잔뜩 분노한 연합군은 백기도 무시한 채 제국군들을 상대로 무참한 학살을 계속했다. 여기에는 신성제국 황제의 비현실적인 진격명령도 한 몫을 했는데,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연합군의 항복권고를 무시하고 동방국가들을 조롱하며 자국신민들에게 무조건 항쟁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지원도 받지 못하고 연합군에게 포위된 한 제국군 요새 사령관은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건 다름 아닌 부대 내 막대한 부상자들을 전부 치유마법으로 완치시켜 싸움을 계속해 나간다는 것. 황제도 싸움을 강요하고 연합군도 항복을 받아주지 않는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결과적으로 참혹한 비극을 가져왔지.’

 지나친 마력수용으로 신체구조가 변질돼 괴물로 전락한 사람들의 숫자는 총 열셋. 그들은 소모당한 병사들의 원한이라도 풀 듯 하나 같이 엄청난 힘을 발휘했으며, 요새 안에 상주하던 제국군 병사 5천 명과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연합군 병사 3만 중 1만 명을 학살한 후에야 자가붕괴하고 말았다.

 “…소문에 의하면, 이번 전쟁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해. 단, 과거와 같은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명백한 사람의 의도 하에. 이른바 인간 폭탄이라고 해야 할까. 마물로 변질된 인간은 일시적으로 거대마수에 필적할 만큼 강대한 힘을 얻지만, 보통 3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신체구조가 무너진다고 하지. 그걸 이용해 부상자들에게 시한식 치유마법을 걸어놓고 부대를 후퇴시키는 거야. 마물들이 인간들이 버린 지역을 점령했을 때쯤에 그 부상자들이 괴물로 변해 닥치는 대로 날뛰며 주위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거지. 물론 마왕군도 포함해서 전부.”

 세실리아의 어두운 음색에 네리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지, 진짜 그, 그런 일이 있었나요?”

 “몰라. 나도 들은 것뿐이니까. 단순한 괴담일 뿐이라면 좋겠지만, 진짜 그런 일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전황은 절망적이었다고 하더라.”

 “으에…… 전쟁이 도중에 멈춰 정말 다행이네요…….”

 난 속으로 네리의 말에 적극 동의했다. 세실리아가 말한 전장의 끔찍한 소문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부 전선 지휘관은 루치아의 엄격한 금지에도 불구하고 그 금기에서 쉬이 손을 떼지 못했다. 그만큼 지난 전쟁은 인간들에게 불리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사실이 널리 퍼지지 못한 것은 그 여자, 그러니까 선대 마왕이 화젯거리가 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마물로 변한 인간들을 소멸시켰기 때문이다. 나도 한번 목격한 적이 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 인간은 인간인 채로 덤벼라. 너희들의 잠재력을 총동원해. 시시껄렁한 짓 하지 말고.

 뭐 그 여자답다면 그 여자다운 일. 단순히 힘만으로 겨룰 것이라면 애당초 악마들 중 귀족급 개체나 용왕을 상대하는 편이 더 낫다. 분명 그 여자는 인간만이 보일 수 있는 싸움에서 모종의 즐거움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리라.

 ‘젠장! 내가 왜 그 여자를 이해해야 하는데!?’

 바보 같이 혼자 달아올라 분노하려던 찰나, 머릿속에 누군가의 사념이 울려 퍼졌다.

 「지금 시간 괜찮아요? 잠깐 와줄 수 있어요?」

 이건 내가 특별히 접속을 허용한 도서관장의 전용채널로부터 전해오는 사념. 나는 내키지 않지만 일단 답변을 했다.

 「지금 애들이랑 얘기 중인데. 급한 일이야?」

 「급해요.」

 「얼마나? 또 신대륙에 커피콩 구하러 다녀오란 얘기면 무시할 거야.」

 「그것도 충분히 급한 일이지만, 더 급한 일이 있어요.」

 사념을 통해 전해지는 웃는 기색. 하지만 그 뒤에 전해져 온 사념은 거짓말처럼 진지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자세한 건 당신이 온 다음에 얘기할 생각이지만 요점부터 전할게요. 성녀 안젤라가 어젯밤부터 실종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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