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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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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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도서관의 어떤 손님들 (後)


 첫눈이 내렸다.
 온화하게 미소 짓던 가을의 햇살은 환상처럼 자취를 감추고 냉소하듯 차가운 겨울의 칼바람이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살갗을 사정없이 후벼 판다. 흘러간 계절을 아쉬워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자연의 섭리는 엄격해 지나간 것은 돌이킬 수 없다. 그저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릴 수 있을 뿐. 계절의 순환은 엄혹해도 확실하다.

 ‘진짜 눈을 볼 수 있어 다행이군.’

 어린애나 강아지가 아니라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궂은 날씨. 하지만 난 나풀나풀 공중에서 춤추는 눈송이에 반가움을 느꼈다. 만약 내가 우려했던 최악의 결과가 실현됐다면, 지금쯤 하늘에선 첫눈 대신 방사능 낙진이나 화산재가 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지금 상황이 달가운 것도 아니지만.’

 삭삭. 삭삭. 난 긴 빗자루로 눈을 쓸며 속으로 불평했다.
 아침 일찍부터 지루한 작업의 연속. 눈이 많이 쌓인 건 아니지만 도서관 넓이에 비해 인원수가 지나치게 적은 게 문제다. 아무리 눈을 치울 범위를 통행에 꼭 필요한 곳으로 한정했다곤 해도, 이대로 가면 적지 않은 시간과 노동력이 소모될 것임은 분명했다.

 ‘마음 같아선 다 싹 날려버렸으면 좋겠는데.’

 내 마법으로 이 일대의 눈을 전부 녹여 버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거에 이미 몇 차례 시도했던 전력도 있다. 관장이 무서운 눈초리로 노려보긴 했지만 전부 별 탈 없이 넘어갔다.

 ‘이번에도 그러기엔 시기가 안 좋아.’

 평시에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일도 전시에는 경계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비록 전쟁이 멈춘 지 2달이 넘었지만 아직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는 돌아오지 않았다.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사람들의 신경은, 작은 위화감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어? 왜 도서관 주변만 눈이 녹았지?’ 같은 별 거 아닌 의문이 누군가 내 정체를 파헤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책임질 게 있으니 멋대로 행동할 순 없어.’

 예전에는 혹시 정체가 들통 난다 해도 이름과 모습을 바꾸고 다른 곳에서 살면 된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현재의 난 마물들의 왕. 이형의 존재들을 이끄는 우두머리로서 인류군 총사령관Lucia과 비밀리에 손을 잡고 더는 전쟁이 계속되지 않도록 평화협정을 진행 중에 있다. 이 중대사를 그르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무책임하게 행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난, 그 여자와는 다르다.

 “하하, 선배 어때요? 예쁘지 않아요?”

 모처럼 사람이 진지하게 고민 중임에도 눈치 없이 말을 걸어오는 네리. 농땡이 치지 말고 빨리 맡은 구역에 돌아가서 눈이나 쓸라고 한소리 하려고 했던 내 입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다른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여긴 분명 도서관일 텐데.”

 고급 천으로 맵시 있게 재단된 원피스에 귀여운 프릴이 잘 어울리는 예쁘장한 에이프런. 평소 적갈색의 엄정한 사서 제복과는 다르게 화사함이 돋보이는 옷차림이다. 내가 일하던 곳이 도서관이 아니라 카페였나 하는 착각이 들 만큼. 그리고 덕분에 나는 저 차림새를 어디서 봤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거, 「호프」의 유니폼 맞지? 뭐냐, 그 옷은?”

 「호프」란 도서관 아래 삼거리의 잘 나가던 한 카페의 명칭이다.
 들여오는 콩의 질이 좋고 점장의 솜씨가 훌륭해 커피가 맛있을 뿐만 아니라 종업원들의 차림새도 예쁘고 귀여워 은근히 많은 손님들이 찾던 유명한 가게. 특히 거기 종업원 제복은 한때 디자이너였던 점장의 배우자가 직접 제작했다고 하는데, 그 유니폼을 입고 싶어 종업원 모집에 지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영광도 이제는 영원한 과거의 것.
 점장은 마왕군과의 전쟁에 참가해 1년 전에 전사했고, 남은 가족들은 카페를 더 이상 이어나가는 대신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쉬워했지만, 몇몇 골수 단골들은 눈물을 삼키면서도 그 결정에 박수를 보냈다. 어차피 이런 정세에선 제대로 된 커피콩을 구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커피의 맛도 떨어질 수밖에 없을 테니, 그건 도리어 죽은 점장의 명성에 누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들이 폐점에 찬성하는 이유였다.

 “후후, 부럽죠? 저도 정말 운 좋게 구한 거예요. 아시다시피 호프의 유니폼은 전부터 탐내는 사람이 많아 점장의 가족들이 가게를 처분할 때 기회를 노리던 사람이 즐비했죠. 부끄럽지만 저도 그 중 하나였고요. 하지만 불행히도 발 빠른 어떤 수집가가 그 제복들을 싹 사버려서 한 벌도 손에 넣지 못했어요! 한데 최근 그 싹쓸이 한 수집가도 생활형편이 썩 좋지 않은지 자기가 모으던 옷들을 다시 내놓고 있는 중이더군요. 소문을 듣고 가보니 마침 호프의 유니폼도 판매목록에 있어 큰마음 먹고 구입했답니다. 덕분에 보름은 반찬이 형편없어지겠지만요.”

 전혀 궁금하지 않은 구입경위를 장황하게 떠벌리는 네리. 난 이마에 손을 얹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궁금한 건 그 옷을 ‘어떻게’ 입게 되었는지가 아니야. 눈 치우는 데 멀쩡한 제복을 놔두고 ‘왜’ 그 옷을 입고 있느냐는 거지.”

 “음? 제복이 더러워지지 않으려면 마땅히 작업복을 입어야 하지 않겠어요? 작업복이 예쁘면 좀 더 기분 좋게 일할 수 있는 거고요.”

 왜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며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날 쳐다보는 네리. 그렇군. 이 아이에게는 아무리 마니아들 사이에서 고가로 거래되는 유니폼이라도 ‘본래 용도’ 이상의 가치는 없는 모양이다.

 “누구 목에 진주라고, 그럴 바에야 다른 마니아에게 팔리는 편이 훨씬…… 아니, 어떤 의미론 고이 모셔두는 것보다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편이 행복이라 할 수 있는 걸까.”

 하얀 입김과 함께 나도 모르게 새어나온 의문. 뭐 유치하고 낯부끄럽기 짝이 없는 무의미한 사고놀음이지만, 만의 하나 옷에도 옷 나름의 행복이 존재한다면, 역시 어떤 식으로든 써주는 게 고이 모셔두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다.

 “네? 그건 또 무슨 뜻이에요?”

 내 혼잣말이 들렸는지 네리가 정확한 설명을 요구해 왔다. 물론 조금도 응할 마음이 없었던 나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직 내가 소녀심을 잃지 않았다는 뜻이야.”

 “으음……?”

 제대로 접수가 되지 않았는지 네리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부연설명은 하지 않기로 했다. ……막상 말해놓고 보니 생각 이상으로 창피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전에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거기 두 사람 지금 뭐하는 거야? 담당한 구역은 다 쓸었어?”

 눈삽과 대비를 들고 지나가다 마침 수다 떠는 우리를 보고 목소리를 높이는 세실리아. 과연 성실한 그녀답게 이미 자기가 맡은 구역의 제설은 전부 끝낸 모양이다.
 갑작스러운 질책에 움찔했던 네리의 눈에 곧 장난기가 돌아왔다. 네리는 빠른 걸음으로 세실리아의 앞에 서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아가씨. 힘드셨죠? 자자, 빨리 안으로 들어가세요. 제가 따뜻하게 커피라도 한잔 타드릴게요.”

 네리의 태도는 입고 있는 옷과 어우러져 귀족가에서 일하는 메이드를 연상시켰다. 그 모습에 방금 전까지 눈을 치켜뜨고 있던 세실리아의 엄격한 얼굴이 당혹감에 무너졌다.

 “너, 너! 또 그런 장난을―――!”

 “하하하하!”

 귀까지 새빨개진 채 때릴 듯이 손을 드는 세실리아와 혀를 살짝 내밀며 도망가는 시늉을 하는 네리. 두 사람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에는 도서관 사람들만 아는 약간의 사정이 있었다.

 지금은 좀 나아진 편이지만, 세실리아는 처음 이 도서관에 들어왔을 때부터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이는 세실리아의 성격과 태도가 고지식하고 엄격한 탓도 있었지만, 주변에서도 구귀족 출신이자 재벌가 영애인 그녀를 어렵게 느껴 함부로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분위기를 단숨에 부순 게 네리였지.’

 네리는 낯가림이 거의 없는 살가운 성격에,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주변 분위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아직 전쟁이 심화되기 전, 연말에 도서관에서 열린 조촐한 송구영신 파티에서 아무도 감히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있던 세실리아에게 처음 다가간 것도 네리였다.

 - 아가씨, 파티는 재미있게 즐기고 계신가요?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면 부담 없이 말씀하세요. 제가 얼른 대령해 드릴게요.

 아마도 네리 딴에는 파티장 구석에서 홀로 음료만 홀짝이고 있는 세실리아를 위해 가벼운 농담을 건넨 것이리라. 그녀는 종종 상대를 부잣집 아가씨로 설정하고 자기는 메이드를 자처하는 장난을 칠 때가 있었다. 설마 진짜 재벌가 영애에게도 똑같이 장난을 칠 줄은 아무도 몰랐지만.
 문제는 세실리아의 반응.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네리의 앞에 서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 신분제는 이미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폐지됐어. 아직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안쓰러운 사람들도 있지만, 새로운 시대를 사는 우리가 그래선 안 돼. 너와 난 동등해. 위아래 없이 똑같은 시민이지. 부디 자신을 낮추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해.

 일순 파티장은 깊은 침묵 속에 가라앉았다 곧 네리를 필두로 시작된 웃음의 폭풍에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명백한 농담에 지나치게 진지하게 대응한 세실리아의 태도가 꼭 한편의 부조리 개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잠시 후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깨달은 세실리아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 할 만큼 부끄러워했고, 오히려 그 반응이 도서관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불러일으켜 서로 거리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세실리아는 그때 일을 꺼내면 당장 얼굴이 붉게 익을 만큼 창피해 한다.

 “아가씨, 커피가 싫으시면 홍차를 타드릴까요? 아니면 케이크?”

 “너, 너! 거, 거기 안 서!?”

 네리가 잡힐 듯 안 잡힐 듯한 거리에서 계속 메이드 행세를 하자 바닥의 눈을 뭉쳐 던지기 시작하는 세실리아. 답답할 정도로 엄격한 그녀도 네리 앞에서는 제 나이다운 소녀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왠지 흐뭇하다.

 ‘뭐 인간사회에서 세실리아 같은 계층의 사람들은 좀 재미없을 정도로 자기 절제가 돼야 권력의 남용이란 측면에서…… 음!?’

 나이 탓인지 하잘것없는 생각으로 꽉 차 있던 내 머릿속이 저편에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발견한 순간 단숨에 새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저 사람은……!’

 상복과도 같은 검은 드레스. 단단히 눈가에 둘러맨 검은 천. 위장마법에 가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이마에서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고 있는 보석의 뿔.
 일각수의 마지막 왕녀는 예고도 없이 내가 일하고 있는 도서관으로 불쑥 찾아왔다.






 “음, 저분 매우 아름답긴 하지만 분위기가 너무 어두워요. 입고 있는 옷이 검정일색인 것도 그렇고, 역시 미망인인 걸까요?”

 제설작업이 대충 마무리된 후. 네리는 이질적인 손님을 곁눈질로 훔쳐보며 내게 소곤소곤 말을 걸었다.
 난 관심 없는 척 다소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신경 꺼. 뭔가 곤란에 빠져 도와줄 일이 있다면 모를까,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갖는 것도 엄연한 실례야. 세실리아 선배를 본 받으라고.”

 참고로 세실리아 선배님은 근무시간에 눈싸움을 하며 장난치는 모습을 이용객에게 보였다는 사실에 엄청난 자괴감에 빠져 현재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로 장서목록 정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실수 없이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점은 확실히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궁금한 걸 어떡해요. 또 실제로 저분이 곤란해 하고 있는 걸 수도 있잖아요. 저런 천으로 눈을 다 가리고 있는데 제대로 앞은 보이는 걸까요?”

 하지만 네리는 내 태도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은 드레스의 여성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난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거짓을 입에 담았다.

 “걱정 마. 매직 아이템일 테니까. 오히려 맨눈보다 잘 보일 걸. 걸린 마법에 따라서는 안경이나 망원경의 기능까지 부여된 경우도 있으니까. 보통은 전장의 병사들이나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요원들이 애용하는 마법도구지만, 일반인이 마을 안에서도 저런 천으로 얼굴을 감추는 건, 보기 흉한 큰 상처를 가리기 위한 목적일 때가 많아. 그러니 반복해서 말하는 거지만, 신경 꺼. 상대의 마음에까지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면.”

 “음, 그런 거라면 조심해야겠네요…….”

 이제야 간신히 납득을 했는지 네리는 검은 여성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작은 문제가 해결된 것일 뿐, 난 조금도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없었다.

 ‘대체 저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녀의 이름은 트리슈아 라 오벨리오 베르나이드. 인간들에게 사실상 멸족당한 일각수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인간들이 지배한 세상을 보기 싫어 스스로 두 눈을 뽑아버렸다고 한다. 그 일화만으로도 그녀가 인간들에게 얼마나 깊은 증오심을 품고 있을지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을 터. 강대한 마력을 지닌 환수의 왕족이 여기서 난동이라도 피면 어떤 참상이 벌어질지 생각만으로도 두렵다.

 ‘하지만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벌써 일을 벌였을 테지. 장소도 좀 외딴 곳에 있는 이 도서관보다 거리 중심지로 나가는 편이 훨씬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을 테고. 이거, 혹시…….’

 날 찾아온 걸까?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난 마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몸이다. 그녀가 인간들에게 복수하러 이 도시에 온 게 아니라면, 날 만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러운 추측일 것이다.

 ‘내가 직접 만나긴 좀 그런데…….’

 솔직히 그녀와 같은 타입은 대하기 껄끄럽다. 문자 그대로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잃은 일각수의 마지막 왕녀는 엄연히 그들에게 복수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하지만 난 인간들과의 화평을 추진하고 있으며, 사적인 감정으로 옛일에 연연해 복수 대행자 노릇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녀의 처지는 동정하지만, 내가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뭐 그렇다면 목적은 역시 전쟁의 재개를 요청하는 것이려나? 직접 말을 걸어온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내 정체를 눈치 못 챈다면 가만히 있자.’

 난 일단 좀 더 트리슈아를 지켜보기로 했다.
 세상만물의 온갖 파장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일각수의 뿔. 분명 그 민감도 앞에서 웬만한 위장마법은 쉽게 들통이 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인간으로 변하는 원리는 단순한 변장이나 변신이 아니다. 이는 혼혈이라는 특성을 이용해 존재원형의 차원에서 ‘또 다른 나’를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최고위 마법으로도 내 정체를 드러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물론 네리가 내 마력의 잔향을 냄새로서 인식한 것처럼 우회적으로 탐지하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다.

 ‘그나저나 트리슈아는 얼음성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은지 100년이 넘었다고 하는데, 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거지? 혹시 누가 부추긴 건가? 대체 누가…… 아!’

 내 의문은 금방 답에 도달했다. 마왕군 안에서 그런 오지랖 넓은 짓을 할 만한 녀석은 단 하나. 지루함을 부모의 원수처럼 증오하는 문란한 악마trickster 루시 루시드 드림 외에 달리 있을 수가 없다. 나중에 만나면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줘야겠다.

 ‘휴우…….’

 결국 날 찾아내지 못한 걸까. 트리슈아는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몸을 일으켜 읽는 척 하던 책을 반납하고 도서관을 떠났다.

 ‘미안해요.’

 난 안도의 한숨과 함께 속으로 그녀에게 사죄의 말을 건넸다. 내게 그녀의 원한을 풀어주는 일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그럴 마음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녀와 같은 피해자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노력할 생각이다. 설령 그것이 그녀의 마음에 어떤 위안도 되지 못한다고 해도.

 “상복 입으신 분, 결국 그냥 가셨네요. 음, 역시 가서 말이라도 걸어볼 걸 그랬나.”

 트리슈아가 떠난 자리를 응시하며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네리. 난 그 말에 마지막 왕녀가 늦기 전에 자리를 떠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마 네리는 외로워 보이는 마지막 왕녀를 보고 선의로 그런 마음을 품은 것이겠지만, 인간들을 증오하는 그녀에게 인간 소녀가 친근한 척 말을 건네 봤자 절대 좋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반납 받은 책들을 정리하고 돌아온 네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번 주 들어서 찾아주시는 분이 좀 늘지 않았어요? 쓸쓸하지 않아서 좋긴 한데, 줄어든 인원수는 그대로다 보니 좀 바쁘게 느껴져요.”

 역시 이 아이는 언뜻 맹한 것처럼 보여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감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녀의 말마따나 몇 달 간 거의 텅 비어있다시피 한 도서관에도 이제는 듬성듬성 독서하는 사람들이나 책을 빌리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고 있었다.

 “전쟁이 멈춘 효과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걸까. 사람들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조짐이라면 참 좋을 텐데. 뭐 일이 잘 풀리면 다음 달 월급은 다시 돈으로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진심을 담아 장난처럼 던진 말에 네리는 킥킥 웃었다.

 “정말요. 그동안 발길을 끊으셨던 다른 분들도 다시 찾아주시면 정말 좋을 텐데…… 아! 얘기하기가 무섭게 저분도 오랜만에 와주셨네요!”

 살짝 들뜬 목소리와 함께 향한 네리의 시선 끝에는 선명한 은발과 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인 새하얀 피부의 서늘한 미인이 있었다.
 은회색의 군복으로 몸을 감싼 그녀의 이름은 리온 레오니스. 옷차림에서 바로 알 수 있듯이 인류군 소속의 장교로서 중위 계급장을 달고 있다. 단아한 외모에 이지적인 인상으로 네리가 좋아할 만한 타입의 미녀였다.

 “저분도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후후, 말없이 책을 들고 사람들 눈에 잘 안 띄는 구석 진 자리로 가시는 것도 여전하시네요. 음, 걸을 때마다 찰랑이는 저 머릿결도 건재…… 내 어수선한 머리카락과는 너무 달라서 부러워요…… 아니, 저 사람 정말 군인 맞아요!?”

 마지막은 살짝 질투심이 섞인 네리의 말에 난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한번 가서 물어보지 그래? 머리 관리 어떻게 하냐고 말이야.”

 네리는 잠시 망설이다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모처럼 오셔서 책을 읽으시는 데 그 시간을 방해할 수는 없죠.”

 붙임성 좋은 네리도 역시 동경하는 대상에게는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모양이다. 풋풋한 후배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던 나는 더 이상 화제를 이어가지는 않았다. 네리는 리온을 멍한 눈으로 응시하다 한번 고개를 저은 뒤 도서정리를 하러 자리를 떠났다.

 ‘네리에게 있어 리온 중위는 조용한 독서를 즐기는 냉정 침착한 멋진 군인인가. 녀석의 실체를 몰라 정말 다행이군.’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내가 혼자 있는 것을 확인한 리온은 저 멀리서 손짓으로 날 불렀다. 난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그래도 후배의 환상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럽게 리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리온은 작지만 흥분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마워! 네가 추천해준 책, 진짜 굉장해. 완전 잘 풀렸다고!”

 “뭐? 말도 안 돼. 그딴 걸로 정말……?”

 “응? 방금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정말 잘 풀렸나요?”

 반신반의하는 내 물음에 리온은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녀가 그렇게 좋아하는 거 처음 봤어. 이런 멋진 책을 추천해줘서 정말 고마워!”

 “아, 네…… 음, 잘 됐네요.”

 난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못해 그녀의 감사를 받았다.
 리온이 손에 들고 있는 책의 제목은 『당신이 사랑에 빠졌을 때』. 하도 리온이 좋아하는 여자와 잘 되고 싶은데 좋은 책 좀 없냐고 귀찮게 굴어서 어쩔 수 없이 추천해준 흔하디흔한 연애지침서 중 하나였다.

 ‘저딴 책이 진짜 도움이 될 줄이야…….’

 사서로서 실격일지 모르겠지만, 사실 난 리온을 골탕 먹일 생각으로 저 책을 권한 거였다. 연애는 어디까지나 실전. 사랑을 글로 배우려고 하다니, 내 입장에서는 언어도단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로라…… 보고 있냐. 네 망상도 전혀 쓸데없지는 않았나 보다.’

 저 연애지침서의 저자는 로라 윌리엄스. 그녀는 다작으로 유명한 100년 전의 소설가로, 소설 외에도 여러 잡다한 저서를 각기 다른 필명으로 남겼다. 난 생전의 로라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는데, 내가 알기로 그녀는 죽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다. 술에 취하면 본인이 자학하듯 떠들기도 했으니 아마 틀림없을 것이다.

 ‘평생 동정녀가 머리로만 쓴 연애지침서가 연애초심자에게 도움이 되다니. 로라 역시 넌 대단한 작가…….’

 ……일 리가 있냐!
 아마도 리온이 마음에 둔 상대는 저 둔감한 중위님이 눈치 채지 못했을 뿐이지, 분명 똑같이 리온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다. 네리도 겉만 보고 속고(?) 있는 것처럼 일단 리온 녀석 입만 다물고 있으면 엄청 미인이기도 하니 아주 허황된 가정은 아닐 것이다.

 “후후, 후후후후후. 이 책만 있으면 그녀의 마음을 손에 넣는 것도 시간문제……!”

 우와, 스토커 같이 기분 나쁜 웃음. 당장 네리를 이 앞에 끌고 와 이 꼴을 보여주고 싶은 가학심과 공간 자체를 차단해서라도 절대 목격하지 못하도록 막고 싶은 보호심이 동시에 들 정도다.

 그럼에도 표정은 조금도 무너지지 않은 채 여전히 이지적으로 보이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재능이라 할 수 있으리라. 아마 누군가 멀리서 지금의 리온을 본다면 이딴 한심한 발언을 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뭔가 철학서에 대해 고명한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게 틀림없다.

 “앞으로 네가 추천해주는 책은 전적으로 믿을게! 또 괜찮은 게 있으면 말해줘!”

 이런 말을 마치 궁지에 몰려 죽기 직전인 동료를 극적인 순간에 구하는 주인공 같은 얼굴로 입에 담는 리온.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여준 후 연애지침서에 몰두하는 그녀를 뒤로 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뭐 그래도…….’

 전장으로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군인이 사랑을 위해 책을 읽는 계절. 이런 걸 보람이라고 해야 할까. 굉장히 사소한 일이긴 하지만, 내가 루치아와 함께 만들어낸 평화의 실감이 이제야 비로소 느껴지는 것만 같다.

 ……분명 이때의 난 잊고 있었으리라. 타협의 이면에 웅크리고 있는 것, 빛이 있기에 생기는 그림자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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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9.01.31 01:42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와아아, 이번화에서 묘사해주신 카페 호프의 제복을 상상하고 있노라니 순간 파르페 쇼콜라 카토 레아의 화사한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_<

    아직 평화롭던 시절 전성기 호프의 이야기를 다룬 스핀오프격 외전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

    • Favicon of https://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9.02.01 06:46 신고 address edit/delete

      이번 화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중의 등장인물들에게 조금이라도 유명한 작품에 나오는 히로인들과 같은 매력이 느껴진다면 저도 기쁠 따름이네요^^

      저도 언젠가는 소위 키라라계 4컷 만화에 나올 법한 카페를 중심으로 아기자기한 일상을 담은 이야기를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한데 제게는 아직 개그나 훈훈한 일상물을 재미있게 다룰 실력이 너무 모자라 갈 길이 먼 것 같네요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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