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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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








05. 도서관의 어떤 손님들 (前)


 황금의 계절은 조금씩 그리고 확실하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위北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아 헐벗기 시작하는 나무들. 그 마른 나뭇가지들 사이에 힘없이 붙어 있는 몇 안 되는 단풍들은, 이 살기 좋은 가을도 며칠 지나지 않으면 끝이라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 마지막 낙엽이 질 무렵, 황금과도 같은 가을은 아쉬운 마지막을 고하고 기나긴 겨울이 혹독하게 그 시작을 알리리라.

 하지만 지금 거리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화제는 흘러가는 계절autumn에 대한 아쉬움도 다가올 계절winter에 대한 두려움도 아닌, 보급형 싸구려 매직스크롤에서 투영되고 있는 짤막한 영상들이었다.

 “우와, 용이라는 게 진짜 실존하는 거였어? 그저 전설이 아니라?”

 “보고도 못 믿겠냐? 저런 대함대를 인류군이 보유하고 있었으면 진작 전쟁에서 이겼지. 무엇보다 마치 산이 그대로 공중으로 솟아오른 것만 같은 이 공중요새를 봐봐. 이런 걸 띄우는 건 물자나 군비의 문제를 떠나 아예 우리人間의 기술력으론 불가능한 경지라고.”

 “하기야…… 진짜 용들이라도 나타나지 않았다면, 말이나 통할지 의심스러운 그 잔학무도한 마물 놈들이 갑자기 싸움을 멈추고 물러나지도 않았을 테지.”

 스크롤 영상의 내용은 인류군과 마왕군이 대평원에서 벌인 싸움에 용왕의 대함대가 개입하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었다. 시중에 나도는 이 매직스크롤들은 대개 세간에서 불법 마도사 또는 비인가 마도사라고 불리는 ‘무허가 마법사’들이 무분별하게 유포하고 있는 위법 영상물이었다.

 본래 마력을 다루는 것은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주변에도 매우 위험한 영향을 끼칠 수 있기에 거의 모든 국가에서는 그 사용자격을 엄격하게 법으로 통제하고 있다. 즉 정식으로 시험에 통과한 사람만이 마법사로서 활동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일명 상아탑이라 불리는 세계마법사협회에서 출제되는 최소자격요건 시험문제는 실기필기 모두 난도가 상당히 높은 편인 데다, 국가에 따라선 시험에 응시하는 비용 자체를 비싸게 받는 경우도 있어 설령 마력을 다루는 재능이 있다고 해도 아무나 마법사의 자격을 얻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실력이나 돈이 없는 마법사 지망생들은 종종 자격 없이 무허가로 마법을 사용하곤 했다. 물론 이는 엄연한 불법으로서 처벌대상이 되는 행위였지만, 마력을 통해 보통 사람들은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힘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게 속칭 불법 마도사로 전락한 이들은 법망을 피해 다양한 수단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그 중 하나가 전장이나 재해 현장과 같은 위험지역의 영상을 매직스크롤에 담아 흥밋거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팔아치우는 일이었다. 지금처럼 심각한 전쟁피해로 정부기관들이 상당 부분 제 역할을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이 유통시키는 정보는 아직까지 기능이 살아 있는 소수의 언론사와 함께 사람들 사이에서 큰 전파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평시라면 숨어서 돌려 봤을 전장의 불법영상기록을 당당하게 돌려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소문에 의하면, 어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불마가 찍은 스크롤에는 새로운 마왕이 영웅님과 싸우는 모습도 담겨 있다는 모양이야.”

 “진짜야!? 와, 그거 한번 보고 싶은데 어디서 팔지? 아, 잠깐 설마…….”

 “그래. 목숨 걸고 찍은 것인 만큼 엄청나게 비싸더라. 나도 궁금해서 살짝 알아봤는데, 적어도 보리 두 포대는 받겠다고 하더라고.”

 “엉? 전이라면 모를까, 요즘엔 거의 한달 밥값 수준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스크롤 한 장에 그 가격은 좀……. 아니, 근데 그걸 또 사서 보는 녀석이 있단 말이야?”

 “뭐 어느 때든 있는 놈은 있는 법이니까. 호기심에 내일을 잊고 일단 지르고 보는 얼간이도 있고. 삼거리 대장간 옆집에 앤이라고 알지? 걔도 샀어. 위대한 영웅께서 우릴 위해 사악한 마왕과 싸우시는 고귀한 영상은 꼭 소장해야 한다면서. 가지고 있는 옷의 절반을 팔았다지 아마.”

 “아…… 걔 영웅님의 추종자였지. 일해서 받은 돈 대부분을 드레스 수집하는 데 쓰던 애가 그걸 팔 정도면, 행동은 어쨌건 마음만은 진짜인가 보네. 아무튼 잘 됐다! 하루치 곡식 정도는 나눠줄 수 있으니 좀 보여 달라고 하면…….”

 “물론 이미 비슷한 제안을 해봤어. 단칼에 거절하더군. 비싸게 주고 산 스크롤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자기 우상이라 함부로 남 보여주기 싫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뭐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스크롤 따윈 존재하지 않고, 어디서 사기 당해 부끄러워 보여주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하하, 그런 거라면 정말 걸작이겠네! 그나저나…….”

 당연히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위법 스크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인류와 마물들 사이에 맺어진 휴전 협정 또한 시간을 때우기 좋은 화제 중 하나였다.

 “우리 인류를 수호하는 새하얀 기사님이라. 뭐 당연히 그 영웅님께도 감사하고 있지만, 난 역시 루치아 님이 더 좋더라. 멋지지, 아름답지, 카리스마 있지, 여러모로 최고 아니야?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린 이미 예전에 멸망했을 걸.”

 “음, 나도 얼마 전까진 비슷한 생각이었지만…… 최근 인류 대표의 행보는 좀 아니지 않냐? 아무리 그래도 마물 놈들과 손을 잡는 건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어. 그동안 죽은 사람들이 얼만데…… 게다가 싸움을 멈추는 조건으로 북쪽의 멸망한 공화국을 비롯한 몇몇 지역을 아예 마물들에게 넘겨줬잖아. 보기에 따라선 엄연한 인류에 대한 배신이라고. 난 테러에 절대 반대긴 하지만, 망국의 생존자들이 과격한 행동으로 나서는 것도 이해는 돼.”

 “그거야 뭐…… 하지만 이 상황에선 어쩔 수 없지 않냐? 마물들만으로도 벅찬데 용들까지 나섰으니…… 그래도 협정을 맺으면서 마왕군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의 7할 정도는 돌려받은 셈이라 실질적으로 이득은 우리가 봤다고 하던데. 특히 돌려받은 지역 중에는 주요 농업지대나 공업지대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신문에서…….”

 “야야! 그딴 어용신문 얘긴 집어치워! 농업지대든 공업지대든 되찾으면 뭐해? 저번 달보다 생활이 더 어려워지기만 했는데 무슨…… 게다가 마물들이 점령했던 땅들이 뭐 남의 땅이었냐? 다 우리 인간들 땅이었잖아! 뭘 뺏긴 걸 돌려받았다고 감사하고 있는 거야? 정신 차리라고!”

 “듣자 하니까…… 너야말로 정신 차려! 현실적으로 생각하라고! 꼭 용들이 아니었어도 우리가 마왕군을 이길 수 있었냐!? 솔직히 밀리고 또 밀리고 있던 상황이었잖아! 마물들이 점령한 지역이 본래 인간들 땅이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우리 힘으로 되찾을 수도 없었는데. 그걸 루치아 님이 협상을 통해 무사히 돌려받은 것에 박수는 보내지 못할망정, 하잘것없는 자존심으로 매도를 하면…….”

 “하잘것없는 자존심? 하! 너 그런 말 나라 잃은 사람들 앞에서 할 수 있냐?”

 “아, 그래서 니가 나라를 잃었냐? 군대도 가본 적 없는 주제에 입만 살아선……! 전장을 한 번도 본적 없으면 그냥 닥치고 있으라고!”

 “아이고, 고작 후방에서 보급품 관리나 하던 주제에 유세는 더럽게 부리네! 절벽에서 떨어지면 죽는다는 걸 꼭 경험해 봐야지 아냐? 요즘 대표가 하는 짓거리가 하도 도리에 어긋나 있으니 할 소릴 하는 것뿐이잖아! 너야말로 니가 지지하는 사람한테 싫은 소리 좀 한다고 감정적으로 나오지 말라고!”

 “먼저 감정적으로 나온 사람이 누군데 뻔뻔하기는……! 지금 니가 하는 게 정당한 비판이냐? 니 머릿속의 ‘멋지게 마왕군을 물치는 강력한 인류군’이라는 망상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니 그냥 떼를 쓰고 있는 거지. 진짜 루치아 님이 안 됐다니까. 너 같은 놈을 위해서도 밤낮 가리지 않고 고생하고 계시니.”

 “하! 됐다. 너 같은 빠순이랑 무슨 얘길 하겠냐. 그래도 한 가지 충고해줄게. 너 같은 애들이 대표를 싸고 돌수록 오히려 대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떨어져 나갈 뿐이야. 그것만큼은 알고 살아라.”

 “웃기고 앉았네! 만의 하나 루치아 님이 실패하면 너 같은 녀석들이 발목을 잡은 탓이야. 너야말로 그걸 잊지 말라고!”

 “지금 누구한테 책임 전가를……!”

 만물을 움츠리게 할 차갑고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오기 직전. 올해 가을의 막바지는 포근한 날씨에 햇볕은 따사로웠지만, 일부 사람들의 마음은 이미 계절을 앞서 황량해져 있었다.

 “…….”

 길을 가다 우연찮게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은 마왕이 된 마왕의 딸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도서관을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 선배! 어디 있었어요? 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더니. 혹시 밖에 나갔다 온 거예요?”

 도서관의 들어선지 얼마 후. 날 발견한 네리가 반가움과 불만이 7대3 정도 섞인 얼굴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나는 가볍게 손을 마주 흔들어주며 대답했다.

 “어. 관장님 심부름으로 잠깐.”

 네리가 장난기 섞인 얼굴로 되물었다.

 “정말요~? 세실리아 씨는 선배가 분명 일 빼먹고 어디선가 낮잠 자고 있을 거라 장담하던데요?”

 …대체 그 아가씨 머릿속의 난 얼마나 불량한 걸까. 약간 껄렁한 태도를 취한 적은 있어도 대놓고 일을 소홀히 한 적은 여태까지 한 번도 없었는데.

 ‘이래서 사람은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건가.’

 카타리나를 그만두고 지금의 나로 다시 도서관에 들어올 때, 사람들이 의존해오는 게 질색이었던 나는 몇 번 강렬하게 문제아를 연기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세실리아에게는 그때의 인상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리라. 왜냐하면 당시 그녀는 신입사서들의 교육담당이었기 때문이다.
 뭐 자업자득이니 어쩌랴. 스스로에게 떳떳하면 상관없는 일이다.

 “못 믿겠으면 관장님한테 직접 물어 봐. 분명 우리 모두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왔다고 대답할 테니.”

 실제로 난 당당했다. 관장의 부탁으로 바다 건너 옆 대륙까지 날아가 도서관 운영에 필요한 물품을 싸게 사왔기 때문이다. 마왕을 심부름꾼으로 부려먹는 사람은 아마 세상에서도 이 도서관 관장이 유일할 것이다.
 네리는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것도 없어요. 전 선배를 믿으니까요. 사실 아까도 세실리아 씨에게 선배가 낮잠 같은 걸 잘 리가 없다고 말했어요.”

 “…믿어주는 건 고맙지만 맹목적인 신뢰는 전혀 달갑지 않은데.”

 “맹목적이라니요, 합당한 추론이라고요!”

 “어떤 점이? 한번 읊어보시지.”

 “험험. 날이 좀 포근하게 느껴진다 해도 이제 좀 있으면 겨울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기온이 꽤 떨어진 편이죠. 한데 연료공급이 끊긴 지 오래인 우리 도서관에는 더 이상 난방이 되는 곳이 없어요. 즉 맘 편하게 한숨 자고 싶어도 추워서 도저히 눈을 붙일 수 없는 상황인 거죠. 고로 절대 선배는 낮잠을 자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리는 없는 거고, 세실리아 씨도 그 말에 납득했답니다. 좀 떨떠름해 보이긴 했지만.”

 거침없이 자신의 추론을 입에 담는 네리. 마치 당장이라도 얼굴에 Q.E.D.라는 글자가 떠오를 것만 같은 자신감이다. 뭐 애당초 난 이 아이들 앞에선 낮잠은커녕 졸아본 적 한번 없지만, 본래 사람의 인식이란 애매하고 적당한 것이라 있는 그대로의 진실보다는 스스로의 기대를 반영하기 마련이니 어쩔 수 없다.
 아무튼 날 무작정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에선 합격이다. 난 박수 치는 시늉을 하며 설렁설렁 입을 열었다.

 “아―― 엄청난 명추리였어. 최소한 내가 낮잠을 자지 않았다는 건 맞췄으니. 그럼 수고해. 난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그때 도서관 로비에서 떠나려는 내 앞을, 네리는 양팔을 활짝 벌리며 막아섰다.

 “……뭐야? 날 쓰러뜨리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다, 뭐 그런 거냐?”

 미간을 찌푸리며 던진 질문에 네리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비슷하지만 달라요! 의심 받아 마음의 상처를 입은 선배를 위로해 주기 위한 화해의 포옹이라 해야 할까요? 자, 제 품 안으로 뛰어 들…… 우와, 선배! 지금 얼굴표정, 엄청난 거 아세요? 꼭 돈 빌려줬다 못 받은 사람 같아요!”

 그게 대체 무슨 표정인데. 하지만 어이없고 짜증난다는 점에선 통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난 다른 방향으로 등을 돌리며 경고하듯이 말했다.

 “오늘은 좀 피곤하기도 해서 장난 칠 기분 아니야. 나중에 놀아줄 테니…… 하아.”

 덥석.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덮치듯이 껴안아오는 네리. 뭐랄까, 머리카락을 포함해 여러모로 푹신한 게 꼭 양을 업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너 사람 말 안 듣냐?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라고 말했…….”

 난 짐짓 엄포를 놓으며 네리를 떨쳐내려 했지만, 그 시도는 상대의 한 마디에 간단히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선배, 3년 동안 기분 좋은 날 한 번도 없었잖아요.”

 음. 들키고 말았나. 실은 내가 스킨십을 별로 안 좋아해 일부러 기분 나쁜 척 피하고 있었다는 것을.

 “후후! 이만 포기하고 얌전히 제 품에 안겨 계세요. 그거 아세요? 사람끼리 서로 껴안고 체온을 나누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연구결과도 있대요. 그러니 이건 다 선배를 위한 일이라고요.”

 “우, 웃기는 소리하지 말고 당장 떨어져……!”

 “아아, 역시 선배는 달콤한 냄새도 나고 따뜻해서 좋네요. 아무리 도서관이 추워도 선배만 있으면…….”

 “이, 이 녀석…… 사람을 난로 대용으로……!”

 어쩐지 날 찾을 때 반응이 요상하다 싶더니 이런 꿍꿍이가 있었을 줄이야. 만약 미리 알고 있었다면 네리 앞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좀 이상하군. 확실히 네리는 살가운 성격에 스킨십을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작년에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어. 유독 나한테 달라붙는 게 올해부터이긴 한데…….’

 네리가 내게서 느끼는 달콤한 냄새는 다름 아닌 마력의 잔향. 그렇다면 내게서 느끼는 온기 또한 숨겨진 마력을 공감각으로 치환해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아크메이지 클래스조차 탐지하지 못하는 인간상태일 때의 내 마력을 느낄 정도의 재능…… 마치 살아 있는 동물의 귀나 꼬리처럼 생기 있게 움직이는 머리카락…… 선조 중에 뭔가가 섞여 있고, 그 피가 요 1년 사이에 각성하기 시작한 거라면…….’

 “선배 완전 따뜻해…… 후후후…….”

 남의 몸에 체중을 잔뜩 실은 채 행복한 듯이 중얼거리는 네리. 그 태평한 목소리에 난 심각하게 고민하던 일들이 바보 같이 느껴졌다.

 ‘뭐 본인이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면 내가 괜히 헤집을 필요는 없겠지.’

 마음을 정한 내가 반쯤 졸고 있는 네리를 평소처럼 구박하듯이 깨우려고 할 때, 불쑥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저기, 두 분이서 사이가 좋아 보이는 건 매우 흐뭇한 일이지만 잠시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찾고 싶은 책이 있는데요.”

 말을 건 사람은 긴 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묶어 앞으로 넘긴 자주색 눈동자의 여성이었다.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좀처럼 보기 힘든 강렬한 빛깔이었지만, 입가의 검은 점과 어깨에 걸치고 있는 갈색 숄 덕분에 여성의 인상은 한없이 부드러워 보였다.

 “예, 말씀만 하세요! 어떤 책을 찾고 계신가요?”

 네리는 방금 전까지 남의 몸에 기대 졸고 있던 사람으로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벌떡 몸을 일으켜 활기차게 손님의 요청에 응했다.
 보라색 머리카락의 여성은 옅은 미소를 띠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원예에 관련된 책을 몇 권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웬만하면 제가 찾고 싶었는데, 이 도서관은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배열방식이 다른 듯싶네요.”

 “아 네. 도서관 자체가 문화재 취급이다 보니 좀 비효율적인 형식을 채택 중이라…… 음? 혹시 실례지만 다른 지역에서 오신 분인가요?”

 “예, 맞아요. 혹시 하멜른 호수 근처 림멜이라는 작은 도시를 알고 계시나요? 전 거기서 왔답니다.”

 보랏빛 여성의 말에 네리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난 슬슬 다른 방향으로 놀라고 있는 중이지만.

 “하멜른 호수라면…… 여기서 기차로도 꼬박 하루 종일 달려야 하는 곳 아닌가요!?”

 “책을 빌리러 오기엔 좀 먼 거리지요? 하지만 전쟁 탓인지 제가 사는 지역 근처엔 문을 연 도서관이나 서점이 하나도 없어서요. 물론 샅샅이 뒤져보면 정말 없지는 않겠지만…… 그럴 바에야 차라리 처음부터 제대로 된 곳을 찾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이곳으로 오게 된 거랍니다.”

 “으, 먼 곳에서 오시느라 많이 힘드셨겠어요. 걱정 마세요! 제가 필요하신 책들, 전부 찾아드릴게요. 아, 혹시 원예 분야에서도 어느 쪽을 원하시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상대가 보통 결의로 도서관을 찾은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네리 역시 사서로서의 사명감에 불이 붙은 모양이었다.
 자줏빛 눈동자의 여성은 손가락을 턱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음, 저도 전문가는 아니라 정확히 꼬집어 말씀드리기는 힘드네요. 장기간 집을 비운 탓에 정원이 엉망이라 겨울이 오기 전에 가볍게 손을 보려 하는데, 혹시 그쪽에 관련된 책도 있을까요?”

 “그거라면…… 네, 물론이요! 소냐라는 유명한 정원사가 남긴 저서 중 한권인데, 아마 원하시는 내용이 있을 거예요.”

 단번에 상대에게 필요한 책을 떠올리는 네리. 헐렁해 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네리는 의외로 자기 일에 진심으로 매달리는 성격이었고, 도서관의 장서 목록도 상당 부분 꿰고 있었다.
 책을 추천 받은 여성의 얼굴이 환해졌다.

 “소냐라면, 마지막 황제의 정원사로 유명한 그 사람 맞죠? 그런 전설적인 정원사의 저서까지 있다니…… 역시 헤미스피어 대도서관이네요. 오길 잘 했어요. 아, 근데 그런 귀중한 서적들도 대출이 가능한가요?”

 “네. 대부분 사본이니 원본을 뜻하는 붉은 띠지만 아니라면……. 아, 죄송해요. 이 도시에 사시는 분이 아니라면 신분증과 거주지가 확실하더라도 대출은 불가네요…….”

 면목이 없었는지 머리카락이 꾸중 맞은 강아지 귀처럼 축 늘어지는 네리. 몇 번을 봐도 재미있는 광경이긴 했지만, 지금 난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보라색 머리의 여성은 여전히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상냥한 음색으로 말했다.

 “그렇게 미안해하실 거 없어요. 당연한 조처인 걸요. 실은 이럴 줄 알고 베껴 쓸 준비도 해왔답니다. 필요한 부분만 적어가면 어떻게든 되겠죠.”

 “그럼 다행이지만…… 시간은 충분하시겠어요?”

 “일단 야간 기차를 잡긴 했으니 폐관 시간 안에 하는 데까진 해봐야죠.”

 자줏빛 여성의 말에 네리는 무언가 결심한 듯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네리는 다시 여성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제가 도와드릴게요! 둘이서 하면 분명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거예요.”

 “……괜찮으시겠어요?”

 “걱정하시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생긴 것과 다르게 제가 이래봬도 달필이라고 주변에서 칭찬 받는 편이거든요.”

 “아니, 그런 걱정을 말하는 게…… 후후, 고마워요.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자신만만한 네리의 장담에 여성은 좀 곤혹스러워 하면서도 이윽고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수락을 했다.

 “네!”

 네리는 힘차게 답하며 손님과 함께 우선 책을 가지러 도서관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 뒤를 따르며 가볍게 충격을 받은 머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생각을 정리했다.

 ‘지나치게 사기死氣를 빨아들여 보랏빛으로 물든 머리카락과 눈동자, 그리고 입가에 점, 무엇보다 억제하고 있어도 강하게 흘러나오는 마력…… 틀림없어. 설마 이런 데서 저 녀석과 만나게 될 줄은…….’

 그녀의 정체는 마검사 플랑. 본명은 아무도 모르는 채 그녀가 사용하는 무기의 특징을 따 주변에서는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그녀는 비록 성검의 기사에게 가려 이번 전쟁에서는 존재감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지만,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따지자면 인류연합군에선 실질적인 2인자라 할 수 있을 만한 강자였다.

 타고난 자체 마력생성체질과 죽은 환수들의 뼈를 제련해 만들었다는 마검 나흐트 힘멜. 그 두 힘을 휘둘러 적들을 찢어발기는 그녀는, 백은의 영웅만큼은 아니더라도 여러 전투에서 활약해 인류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영웅으로서 칭송 받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잔인한 성정에 따라 싸움과 유혈을 즐길 따름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는 여러 차례 자신의 공격범위에 아군이 포함돼도, 심지어 미처 도망가지 못한 민간인이 남아 있어도 마수들과 함께 가차 없이 도륙해 버린 전적이 있었다. 그로 인해 몇 번이고 군법회의에 처해지곤 했지만, 그녀는 매번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하얀 영웅 외에 그 마검사만큼 싸울 수 있는 인재가 인류군 안에서는 몇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몇 번 전장에서 저 마검사를 눈에 둔 적이 있었다. 그녀의 힘과 잔학함은 진짜였다.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거대한 마수를 한순간에 두 동강이 내고 달려드는 수십 명의 수인獸人들을 목만 남기고 사지를 절단해 꼼짝 못하게 만든 다음 죽을 때까지 짓밟으며 잔인하게 괴롭히던 그녀의 서늘한 웃음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인류군과의 힘의 균형을 위해 보호대상으로 지정된 주요인물만 아니었다면 가장 먼저 내 손으로 처단했을 것이다.

 ‘그런 녀석이 정원 손질이라…….’

 하지만 그 끔찍했던 마검사도 지금은 평상복을 입고 부드러운 웃음을 띤 채 일반인 사이에 섞여 꽃과 풀을 가꿀 궁리를 하고 있다. 이것이 휴전협정이 가져온 평화의 긍정적인 일면인지, 아니면 단순한 살인마의 변덕일 뿐인지, 혹은 다른 속셈이 숨겨져 있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 인간 쪽에서 먼저 사고를 치게 될 거예요. 언제나 평화를 먼저 무너뜨리는 건 그들이었으니.

 뇌리에 떠오르는 서큐버스의 불길한 말. 나는 그 예측을 부정하듯 고개를 저으면서도 네리와 담소를 나누는 플랑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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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9.01.20 12:5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앗, 아아... 36.5도의 생체난로로 혹한기를 대비하는 꽁냥꽁냥 커플이라니!

    리아쥬 폭발해랏!!! ㅠ_ㅠ)

    • Favicon of https://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9.01.20 17:30 신고 address edit/delete

      팬잔 고------!


      (커플들을 향해 굴러가는 수십 기의 팬잔드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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