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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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heavens divide
by 안단테♪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애국자들』의 정보통제는 끝났지만 국민의 규범은 변하지 않았다.”

 “규범…….”

 “그들이 사라져도 규범은 남았다. 배금주의, 전체주의, 물론 애국심도. 그들이 퍼뜨린 밈(Meme)은 스스로의 신념을 가지지 못한 자에게는 안성맞춤이었지.”

 “…….”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면 스스로를 갈고닦을 필요도 없어지고, 미국민이라는 것만으로 스스로를 뽐낼 수 있다. 금전만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면 사고를 정지하고 경제활동에 전념할 수 있지. 어떠냐? 참 멋진 규범이지 않나?”

 “어처구니없군…….”

 “일단 그 밈에 감염된 시민은 스스로 그것을 확산시켰다. 정보통제의 서버 따위 파괴해봤자 헛수고다. 지금은 아메리카의 선량한 시민들이야말로…… 실로 애국자의 자식들(Sons Of Patriot)이다!”


- 코지마 프로덕션 & 플래티넘 게임즈, 메탈기어 라이징 리벤전스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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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 그래도 추상하지 않을 수 없다 (6)


 한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광명제光明祭 기간.
 지고지순한 천상의 보석太陽이 다시금 그 빛을 되찾기 시작하는 시기를 기념하는 이 축제날은, 여느 때보다도 색색들이 화려한 불빛과 치렁치렁 현란한 장식들이 밤하늘의 별빛을 몰아내듯 환하게 어둠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본래 광명제의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운 곳은 흑색연맹의 옛 제도帝都 예카테리나였다. 하지만 계획된 사변으로 엉망이 된 그 오색찬란한 유리의 대도시는 올해 제대로 된 축제를 개최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광명제의 최대 규모는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2위의 자리에 있던 황금산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이는 많은 관광객들이 여행지를 금의 나라로 변경하는 길로 이어져 한층 이곳 축제가 번창하는 결과를 낳았다.

 번잡한 거리 속 금화처럼 피어나는 상인들의 웃음꽃.
 황금산의 공주민들은 현명하게도 라이벌격인 흑색연맹의 참사에 애도한다는 문구를 잊지 않았으며, 수익의 일부를 예카테리나의 복구사업에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관광객들이 좀 더 마음 편하게 돈을 쓸 수 있도록 도왔다. 이것을 두고 ‘선행이지만 기만’이라고 볼지, 아니면 ‘기만이지만 선행’이라고 볼지는 각자의 성향에 달린 일이리라.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7층 이하 저층지대에서의 일.
 B랭크 이상의 주민들이 사는 고층지대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번잡함은 사라지고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으면서도 깨끗하고 고요한 거리가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황금산에서는 돈이 있으면 ‘정적’도 살 수가 있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이 황금산 제3자연공원.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극thrill을 즐기기 위해 일부러 시원석 경계 바깥에 설치한 이 공원은, 비싼 이용료부터 철저한 자격요건까지 극히 일부의 상류층과 그 수행원들밖에 입장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고요한 밤을 잔혹하게 유린하는 오색찬란한 불빛 아래 기업연합 회장 대니얼 더글러스는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의 위대한 시조, 불굴의 개척자 알렉스 암스트롱 경은 이 지역에서 처음 시원석을 발견했을 때 나라의 이름을 ‘황금산’이라 지었습니다. 보다시피 이 지역은 작은 둔덕 하나 없는 드넓은 평야인데도 말이지요. 그 이름에 백금도를 비롯한 지금 시원 21주라 불리는 당대의 강국들은 우리를 모두 비웃었습니다. 각국에서 쫓겨난 초라한 이민자의 무리가 주제도 모르고 커 보이는 척을 한다고 말입니다.”

 대니얼이 꺼내는 민감한 화두에 자연공원에 모인 신사숙녀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공주민으로서 가지는 자부심의 근간을 건드리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대니얼은 참석자들의 반응에 만족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알렉스 경은 그 조소들에 코웃음도 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우리는 창대해질 것이다」라고. 비록 경께서는 생전에 그 꿈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우리는 바로 경의 꿈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길 보십시오!”

 철컥. 대니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동시에 미리 준비해둔 수십 개의 추가조명이 하늘 저 높이까지 솟아오른 황금산의 모습을 한층 환하게 비추었다.

 하늘을 떠받치는 신화 속 거인들의 기둥. 또는 우주를 관통하는 태초의 신비스러운 나무.
 오로지 보석인들의 기술과 능력만으로 쌓아올린 총 12층의 거대구조물 『황금산』은 한층 한층이 웬만한 공주公州의 절반에 달하는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그 높이는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봐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최상위층에는 공중전함의 수용도 가능한 공항시설까지 갖추고 있으며, 그곳에는 성천상제의 기함 무궁무진Incomparable호가 정박해 주인 없이도 위용을 뽐내고 있다.
 대니얼은 팔을 벌리며 소리치듯 목소리를 높였다.

 “황금산은 바로 저기 있습니다! 처음부터 주어진 산이나 계곡이 아닌, 바로 우리 가슴 속의 황금산을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대에 대를 거쳐 마침내 알렉스 경의 꿈을 실현해 냈습니다. 이번에는 우리들 자신의 차례입니다. 여러분 각자 안에 품고 있는 산을, 하늘을, 세계를! 여기 모인 여러분은 반드시 실현시킬 수가 있습니다!”

 확성장치가 필요치 않은 천연석 특유의 잘 울리는 정제된 목소리와 수십의 특대조명을 이용해 황금산 구조물을 재차 비춘다는 극적인 연출. 대니얼의 축사는 참석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모두의 영광을 위하여!”

 “위하여!”

 축사를 마치고 잔을 한껏 높이 들어 올리는 대니얼의 건배에 누구나가 경쟁하듯 뒤따르며 크게 소리를 쳤다.

 ‘촌극이군.’

 모두가 열광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식어 있는 사람은 항상 존재한다. 이 경우엔 시로가네 아와유키가 그러했다. 세계중앙은행의 총재로서 광명제의 개막식에 초대 받은 시로가네는 어떤 의미로는 황금산에서 ‘무시할 수 없는 명사’ 중 하나로 인정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그녀는 전혀 이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야쿠자mafia 놈들까지 기어들어와 있나. 쯧,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검은 정장으로 몸을 감싼, 근육질에 숱이 적은 머리카락의 여성을 발견한 시로가네는 짧게 혀를 찼다. 언뜻 몸집 좋은 경호원처럼 보이는 저 여성은, 실은 청부업자들과도 연결이 되어 있는 유명한 폭력단의 하위 간부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경유착만큼이나 기업과 불법조직과의 관계도 역사가 깊다.

 ‘오늘만큼은 대공 각하가 부러운데.’

 그레이엄은 그 ‘대공’이라는 직위 때문에 다른 공식적인 행사에 참석할 의무가 있어 이 자리에는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리고 시로가네는 그레이엄의 속내를 다 알 수는 없어도, 최소한 그가 여기에 얼굴을 비추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아는 황금산의 대공은 절대 이런 얼간이 같은 대화를 달가워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 여기 좀 보세요! 흠집이 있네요. 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이 모양인 걸까?”

 귀부인 중 한 명이 자연공원의 미술품 하나를 감상하다 호들갑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하하, 부인. 이건 총탄 자국입니다. 파인 형태와 주변에 탄화된 정도를 봐서는 백금총의 광탄이 스치고 간 흔적인 듯싶군요.”

 대니얼과 같이 붉은 색안경을 낀 금빛 단발의 여성이 맑게 웃으며 귀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여느 숙녀들과 다르게 드레스가 아닌 턱시도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이 귀밑에 찰랑이는 짧은 머리카락과 다소 낮은 목소리와 어우러져 언뜻 소년처럼도 보이는 중성적인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루시 루이스. 황금산 10대 재벌 중 하나인 루이스 가家의 셋째 딸인 그녀는 본래 이런 자리에 참석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된 연유인지 그녀는 대니얼의 초청장을 받았으며, 그 의도가 무엇이든 한 번 잡은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루시는 마치 감식이라도 하듯 조각상의 흠집을 더듬으며 말했다.

 “전에 저도 시험 삼아 쏴본 일이 있어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근처에서 누군가 돌인형과 치열하게 싸운 흔적이라 할 수 있겠군요.”

 귀부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도, 돌인형과……?”

 “네. 설마 여기가 어딘지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주변을 둘러싼 무시무시한 나무들, 어디선가 들리는 소름 끼치는 짐승의 울음소리……. 이곳은 그들의 영역입니다.”

 새삼스럽게 이 자연공원이 어디에 있는지 상기시키는 루시의 말에 주변의 다른 참석자들의 얼굴도 급속도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우습게도 그들은 자극thrill을 찾기 위해 이곳을 만들고 이곳에 방문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극의 원인에 대해선 별다른 인식을 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루시는 이대로 분위기가 불편해지도록 방치하지 않았다.

 “이런 무시무시한 공간에, 부인께선 그리고 우리 모두는 오늘 같이 기분 좋은 축제날에 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냥 들뜬 기분으로 그저 축제를 만끽하고 있는 그런 행복한 시간에 말이지요. 그래요, 우린 달라요. 그들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위협에 무감각해지지 않고 항상 그에 대비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 장소에 와 있는 겁니다. 남들이 다 편히 쉬는 때에도 공주公州를 이끄는 엘리트로서의 책무를 잊지 않기 위해서 말이지요. 전 부인과, 그리고 여기 모인 우리 모두의 고결한 정신에 건배를 드리고 싶군요.”

 루시가 말을 마치며 정중히 잔을 건네자 귀부인은 살짝 붉은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고 감사를 표했다. 주변에서 루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이들도 어느덧 밝은 표정으로 돌인형과 유기물의 무서움을 잊지 않기 위해 굳이 이런 ‘위험한 장소’에서 파티를 연 자신들의 용기를 서로 상찬하며 기분 좋게 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지랄들 하고 있네. 딱 그런 표정이신데요?”

 검은 정장을 입은 엘L이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며 시로가네를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는 현재 총재의 경호를 겸한 수행원 신분으로 이 연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시로가네는 빈 장죽으로 가볍게 엘의 머리를 치며 말했다.

 “누가 들을지 모른다. 입 조심해.”

 그러면서도 엘의 말을 부정하지 않은 것을 보면 확실히 총재의 심정 또한 자신의 수행원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엘은 과장되게 몸을 사리면서도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그럴 걱정은 없지 않을까요? 총재님은 왕따……가 아니라 모두에게 경외의 대상이라, 딱히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가 아니라 감히 엿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요.”

 “흥. 비아냥거릴 거면 당당하게 해. 어설프게 말 돌린다고 힘이 덜 들어가진 않으니까.”

 하지만 말과 달리 시로가네는 장죽으로 때리는 시늉만 할 뿐이었고, 엘은 맞장구를 치듯 호들갑스럽게 에구구 머리를 감싸는 흉내를 낼 뿐이었다.
 시로가네는 빈 장죽을 살짝 입에 물었다 때며 생각에 잠겼다.

 ‘내키진 않지만, 잔에게 고마워해야겠군.’

 총재가 관사를 나서기 전, 잔 노엘 타베르니에는 평소처럼 그냥 나가려는 친우를 말리며 자신의 고집을 밀어붙였다.

 - 긴! 나랑 동거하고 있는 이상 그 꼴로 파티에 참석하는 건 못 참아! 나도 연마사 나부랭이로서 자존심이 있다고!

 - 아니, 그건 디자이너나 코디네이터의 역할 아닌가?

 - 극을 추구하면 다 비슷한 거야! 아무튼 이대론 못 가!

 결국 시로가네는 잔의 고집에 못 이겨 친우가 마련해준 드레스를 걸치고서야 관사를 나설 수 있었다. 드레스 자체는 일류 연마사인 잔이 직접 선별하고 다듬은 것인 만큼 손색이 없었다. 문제는 드레스와 시로가네 본인의 조합이 치명적이라는 점. 그녀에게 그 드레스는 ‘지나치게’ 잘 어울렸다.

 평소 꼬리 아홉 달린 여우처럼 꾸미고 다니는 시로가네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시각적으로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게 한다. 그녀의 모습이 연상시키는 것은 보통 짐승도 아닌 환수幻獸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잔이 골라준 화려한 드레스는 ‘오로지 미美만을 중시’해 상대방이 위축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일절 고려하지 않아 어떤 의미로는 폭력이나 다름없는 위압감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덕분에 이렇게 혼자 술을 즐길 수 있게 됐지.’

 비유하자면 폭군 여제. 환상문명의 구전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눈의 여왕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무리 시로가네가 세계중앙은행의 총재직을 맡고 있는 주요 인사이며, 이 자리가 상류층끼리 교류를 다지기 위한 목적의 연회라 해도 이방인이자 실제로는 황금산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그녀에게 일부러 접근하는 괴짜는 없었다. 아니, 없을 것 같았다.

 “이거 총재님. 술잔이 빈 것 같군요. 제가 따라 드리겠습니다.”

 빙글빙글 웃으며 시로가네에게 다가온 것은 붉은 안경으로 눈을 감추고 있는 루시 루이스. 턱시도를 맵시 있게 소화한 그녀가, 화려하다 못해 위압적이기까지 한 드레스로 몸을 치장한 여우 총재에게 다가가는 모습은 언뜻 여왕을 알현하는 기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맙군.”

 시로가네는 조금도 고맙지 않았지만, 일단 형식상 감사의 말을 건넸다. 동시에 주변에서는 아까 귀부인과 총알 자국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루시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애송이가, 잔꾀를 쓰기는.’

 시로가네에게 루시의 속내는 빤히 보였다. 지위상으로도 분위기상으로도 감당하기 버거워 다들 은연중 기피하고 있는 어려운 상대에게 과감히 다가가 무난하게 대화를 성공시키는 자신만만한 젊은이. 일시적이긴 해도 그것만큼 단시간에 주변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연출도 드물다.

 설령 실패한다 해도 루시는 루이스 가문의 3녀이자 이제 간신히 성년식을 마친 새파란 애송이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명사들에 비해 극도로 위험부담이 적은 것이다. 오히려 시로가네가 루시를 매몰차게 무시한다면, 평가가 떨어지는 것은 여우 총재이며 그녀는 동정표를 얻게 될 가능성도 있다. 어느 쪽으로 구르든 절대 그녀에겐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무슨 의도로 내게 초청장을 보냈는지는 몰라도, 철저하게 이용해주지!’

 실제로 루시는 시로가네의 예상과 거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루이스 가의 셋째 딸에 불과한 그녀의 입지는 언제나 언니나 오빠에 비해 극도로 좁았다. 특히 천연석인 둘째 오빠가 차후 총수 자리에 오른다면, 그녀가 앞으로 가문의 사업에 참여할 기회는 영영 멀어지고 말리라.

 ‘어떻게든 내 힘으로 기어오르고 말겠어!’

 마냥 사람 좋은 첫째 언니와 달리 루시는 정계나 재계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욕망, 즉 강한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대니얼의 초청은 자신의 존재를 상류사회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반면 시로가네에게 있어 그녀는 얄팍한 속셈으로 겁도 없이 자신을 발판으로 삼으려 드는 주제 모르는 철부지에 지나지 않았다. 말을 걸어오니 일단 받아주고 있기는 하나, 그다지 온화한 심정은 아니었다.

 ‘쟤, 그냥은 안 끝나겠는데.’

 엘은 루시가 오기 전, 시로가네가 먹여준 보석알갱이를 입 안에서 굴리며 언제 총재의 인내심이 바닥날지 두근두근 지켜보고 있었다.
 시로가네는 결코 타협을 모르는 독선적인 성격도, 타인을 깔아뭉개는 권위주의적인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다. 이는 일개 경호원에 불과한 엘이 스스럼없이 총재와 농담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에서 쉬이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정말 옳다고 생각한 것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고집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정한 일정한 선을 넘어서는 행위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공격하는 무자비한 일면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능력도 통찰력도 여느 사람보다 뛰어난 그녀가 고향인 청옥루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쫓겨나듯 도망치거나, 망명 후 힘들게 얻은 총재직에서 다시금 황금산과 대립하는 위험을 부담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말입니다, 총재님.”

 잠시 후 얼마간 대화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루시는 한층 자신에 대한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만약 그녀가 이쯤에서 물러났다면 오늘 연회는 아무도 험한 꼴을 당하는 일 없이 잘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기어이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총재님께서도 우리 기업연합의 정책, 가령 등급별 임금지급제 등에 의견을 밝혀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아, 물론 기관의 수장으로서 함부로 어느 한쪽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비공식적으로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질을 주신다면, 우리에게 큰 힘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대니얼이 그레이엄 대공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에 대해선 10대 재벌가의 일원이라면 얼마간 그 진의를 알고 있었다. 루시는 초청해준 것에 대한 감사도 표할 겸 이 기회에 대니얼에게도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임을 각인시킬 생각이었다.
 시로가네는 잔으로 목을 축일 뿐 별 말이 없었지만, 루시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세간에는 총재님께서 황금산이나 기업연합과 대립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우리가 좋은 동반자 관계라는 것을 이 자리에 계신 분 중 모르시는 분은 아무도 없겠지요. 그동안 공정한 기관운영을 위해 중립을 지키신 총재님의 노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만 더 큰 대의를 위해 목소리를 내주셔도 될 때가 아닐까 싶군요.”

 물론 이는 논할 가치가 없는 기만이었다.
 실제로 세간의 인식은 정반대. 사람들은 세계중앙은행과 그 총재가 황금산의 수족 노릇이나 하고 있다며 비아냥거리고 있었지만, 오히려 여우 총재는 자신의 힘이 닿는 한 외부권력의 개입에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아무리 세계중앙은행의 총재라고 해도 황금산의 고위층이 집합한 자리에서 명시적으로 서로가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는 없다. 루시는 그 사실을 알고 겉으로나마 “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시로가네를 몰고 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라면 후환이 두려워 섣불리 그런 풋내 나는 싸움을 걸 수 없었으나, 루시는 가문의 3녀라는 중요하지 않은 위치와 새파란 애송이라는 사실을 역으로 무기로 내세워 총재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평가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하며.
 하지만 시로가네는 그녀의 기대에 장단을 맞출 생각이 없었다.

 “내가 왜 그런 얼간이 같은 정책에 찬동해야하지?”

 “……네?”

 침묵은 예상해도 신랄한 거절은 예상하지 못한 루시는 잠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눈만 껌벅거렸다. 시로가네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장죽으로 손바닥을 탁 치며 다시 말했다.

 “그 잘난 기업연합의 정책이라는 것에 내가 왜 지지를 해야 하는지 읊어 봐.”

 “아, 네, 예!”

 총재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고 생각한 루시는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한 번 숨을 가다듬은 후 입을 열었다.

 “더글러스 회장……저희 기업연합의 방침은 진정으로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평등과 공정?”

 “예. 능력 있고 노력하는 자가 그렇지 못한 자보다 더 많은 것을 취하는, 그런 당연한 이치를 성립시키고자 함이 저희의 목적입니다. 그렇게 제대로 된 대가가 지불돼 잘 살아야 할 사람이 잘 살고, 못 살아야 할 사람이 못 살아야 사람은 향상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게 되며 사회도 발전하게 되지요. 게으른 자들의 뻔뻔한 불평에 우리 노력한 자들의 것이 부당하게 빼앗기는 일은 이만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의미심장한 루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주위의 참석자들이 동의의 뜻으로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있어 사용인이란 자신들이 힘들게 키운 사업체에 달라붙어 꿀물만 빨려고 하는 기생충에 지나지 않았다.
 시로가네는 빈 장죽을 살짝 입에 댄 채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렇군. 좋은 말이야. 설득력이 있는데.”

 루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해해 주시는 겁니까!?”

 “음. 이해하고말고. 한데 왜 그 좋은 방침을 너부터 적용하지 않나? 왜 이 자리에 앉아 계시지? 어서 물러나지 않고.”

 웃는 얼굴로 칼을 찌르는 듯한 시로가네의 말에 루시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건 무, 무슨 뜻이십니까?”

 “무슨 뜻이긴. 말 그대로의 의미지. ‘능력 있고 노력하는 자가 그렇지 못한 자보다 더 많은 것을 취하는 게’ 진정한 평등이고 공정함이라면, 너 같이 무능력한 녀석은 부당하게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손에서 내려놔야겠지. 그런 게 형평성 아니겠나?”

 직설적인 시로가네의 모욕에 루시는 새빨개진 얼굴로 반박했다.

 “마, 말씀이 심하시군요! 비록 제가 부족함이 많긴 하지만, 사업체의 간부직에서 어떤 성과를 냈는지 아신다면…….”

 “아, 루이스 가문에는 우량 사업체들이 많지. 그리고 넌 다른 이들은 수많은 자격심사를 통과해야만 간신히 입사할 수 있는 곳에 처음부터 간부 자리에 있었고. 거기에 수십 년 잔뼈가 굵은 베테랑 사원들이 참모역으로 보좌까지 해주지 않았나? 막대한 지원금은 덤이고 말이야. 그걸 네 실력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응?”

 “그, 그건…….”

 시로가네의 지적은 용서가 없었다. 루시 자체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어도 루이스 가문을 비롯해 황금산의 재벌가 사정을 꿰고 있는 총재에게 어설픈 허세와 기만은 일절 통용되지 않았다.
 총재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더욱이 네가 맡은 사업체는 투자를 잘못해 작년에 제법 손실을 내기도 했지. 웬만한 중소기업이라면 도산할 정도의 엄청난 손실을 말이야.”

 “그건 이번 분기에 다 만회했어요! 제가 기획한 상품으로 말이죠! 실수 하나를 치사하게 물고 늘어지다니……!”

 루시는 점점 여유가 사라지는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반론을 했다. 하지만 시로가네에게 그 말은 통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업가들은 보통 그런 손실을 내면 끝장이야. 신용도는 추락하고 빚에 짓눌려 다시는 일어설 수 없어. 회사의 직원이라면 당장 그 자리에서 잘릴 테고. 실제로 널 보좌하던 몇몇 참모격의 베테랑 사원들은 그 일로 책임을 지고 회사에서 나와야 했지. 하지만 넌 어떻지? 단지 총수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리를 보전하고 다시 지원금을 받아 수익을 낼 ‘기회’를 얻었지. 그게 정말 자랑할 일이라 생각하나?”

 “그, 그래도 다른 경영자들도 제 나이에 그 정도면, 재능이 있다고……아앗!”

 “흥.”

 시로가네는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장죽을 휘둘러 솜씨 좋게 루시의 붉은 안경만을 낚아챘다.

 “도, 돌려줘요! 도, 돌려달라고요!”

 안경 뒤에 드러난 녹색 눈동자. 루시는 자신의 둘째 오빠와는 달리 천연석이 아니었다. 물론 이런 안경으로 얼굴을 가린다고 해도 그녀가 모조석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이 안경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감추는 일종의 무도회 가면persona이나 다름없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가면이 사라지자 루시에게 있던 일말의 자신감마저 안개처럼 무참하게 흩어지고 말았다.

 “도, 돌려주세요…….”

 하지만 시로가네는 루시의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추격타를 가했다.

 “자, 너만 보더라도 네가 말한 ‘평등과 공정’이라는 게 얼마나 기만에 가득 찬 헛소리인지 잘 알 수 있겠지. 다시 묻겠다. 넌 정말 방금 네 주장이 기업연합의 방침이라 생각하나?”

 “…….”

 “말해 봐. 스스로도 실천하지 못하는 미숙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 어리석은 주장이 정말 기업연합……아니, 더글라스 회장의 생각이냐?”

 재차 채찍질하듯 다그치는 힐난에 가까운 질문에 주변에 있는 참석자들이 긴장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시로가네의 매도에 가까운 신랄한 지적은 루시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상류층 인사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시로가네가 공격대상으로 한정한 것은 명백히 루시뿐. 명목상으로는 기업연합 전체를 겨냥한 공격이 아닌 것이다.

 더욱이 루시는 루이스 가문의 3녀로서 크게 중요한 위치도 아니며, 이제 갓 성년식을 마친 애송이다. 즉, 루시 개인에 대한 모욕은 상황과 상대에 따라선 가문 전체에 대한 시비로 이어지지 않을 수가 있다. 왜냐하면 루이스 가문도 고작 철부지 자식의 돌발행동으로 세계중앙은행 총재와 대립하는 부담을 지기는 싫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앞서 행동에 부담이 없다는 젊음의 특권이 고스란히 제대로 된 가문의 비호를 받을 수도 없다는 양날의 검으로 작용했다.

 “아, 아니요……. 제 개인의, 생각일 뿐입니다…….”

 결국 루시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주장은 논파되고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으며 안경까지 빼앗겨 정신적 장벽까지 사라진 그녀에게 달리 길은 없었다.

 “다행이군. 내가 그딴 얼간이 같은 정책 나부랭이에 찬동할 이유가 사라져서.”

 시로가네는 여전히 혀로 채찍질을 멈추지 않으며 루시에게 빼앗은 안경을 돌려주었다. 루시는 그것을 받아들자마자 황급히 모습을 감추려 했으나, 여우 총재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의견을 가져라. 가진 척을 하지 말고. 그렇지 않으면 넌 언제까지나 더글라스 같은 자들의 앵무새에 지나지 않아.”

 “애, 앵무새……?”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기 좋아하는 날짐승이라 하더군.”

 “……!”

 천연석의 신체를 가진 이가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이상 다른 이들에겐 들리지 않았을 작은 목소리. 하지만 그 음색은 지금까지 들었던 어떤 굉음보다 강렬하게 루시의 뇌리에 파고들었다.

 “나, 날…… 날, 짐승에……!”

 상대를 매도의 의미로 동식물 등의 유기물에 빗대는 것은, 보석인들 사이에서는 자갈모래먼지와 같은 욕설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상스럽고 천박한 어감은 아니지만, ‘그만큼 난 널 멸시한다’라는 강한 혐오감을 드러내는 표현인 것이다.

 “용서, 못해……!”

 루시는 복수를 다짐하며 자연공원에서 모습을 감추었고, 이로써 시로가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쓸데없는 데 심력을 낭비했군. 후, 집에 있는 녀석들은 좋겠어. 이런 바보 같은 짓에 어울릴 필요도 없을 테니까.’

 그 미래를 알 리가 없는 시로가네는 관사의 동거인들을 부러워하며 어서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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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7.06.20 21:03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끈끈하면서도 달콤한 거짓의 셔벗(sherbet) 속에 담긴 단 한조각의 진실과, 위신(僞信)의 공감대를 통해 형성된 허술하고도 견고한 사상누각의 구조체.

    이제 막 성인식을 통과한 소녀의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그 사회적 배경의 영향력을 제외하고서라도 충분히 유능한 인재임에는 틀림이 없을테지요.

    저토록이나 무시무시한 잠재력을 품은 재계의 신인을 적으로 돌리다니, 이거 이거 시로가네 총재가 또 사고를 치고 말았군요... llorz (역마살이 있는거 아닌지 점이라도 한번 쳐봐야...?;)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7.06.22 06:25 신고 address edit/delete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위의 루시 루이스는, 직전까지 '찰스 루이스'라는 이름으로 남자 캐릭터로 생각하고 있었네요. 한데 막상 쓰려고 하니 전 에피소드의 '일리야'와 캐릭터가 너무나도 겹쳐서(...) 살짝 변화를 주게 되었어요.

      또한 '잘난 여자 주역'에게 당하는 '못난 남자 조역'이라는 클리셰도 일종의 역차별(?)이라는 생각이 들어 자꾸 그런 구도가 반복되면 기분 나빠하시는 분이 계실까 바꾼 것도 있어요. 누구나 만족시킬 수 있는 정치적 올바름의 추구란 확실히 어렵다는 생각이 드네요^^;;


      덤으로 대부분의 설정과 전개는 양쪽이 거의 같지만, 찰스 루이스의 경우는 루이스 가의 '차남'이었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어요.

      루시 루이스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의도치 않게 나름 개성적인 캐릭터가 된 것 같아 마음에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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