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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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역류해도 재기동하는 나날
by 안단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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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님이 농부였습니다. 집에서 5킬로미터 바깥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시지만 자기 땅에 대해서는 토끼굴 하나까지 다 아시는 분이었지요. 무식하다고 말해지지만 사실은 아주 현명한, 그런 보통의 농부셨지요.”

- 이영도, 피를 마시는 새 1권, 황금가지. -



“늙으면 지혜로워진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농경시대의 꿈같은 소리입니다. 늙으면 뻔뻔해집니다.”

-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


 최근 태극기를 내세우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주범 및 공범들을 옹호하는 자칭 보수단체의 등장에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이런 단체들 자체는 이미 몇 년 전부터 활동을 해오고 있었지만, 부역자들의 죄상이 낱낱이 드러난 시점에서도 온갖 궤변과 괴담을 동원하여 추종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면에선 타진요보다도 훨씬 악질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극도의 인지부조화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그들에 대해 웹에서의 일반적인 반응은 ‘보수를 받아서 보수단체’라는 비아냥거림이다. 즉, 친정권적인 정치권 또는 재계의 검은 돈으로 어용시위를 벌이고 있는 게 아니겠냐는 것. 이는 언론에서 이 자칭 보수단체들이 정계나 재계의 지시와 지원을 받은 정황이 있다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한층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돈으로 움직이는 것일까. 이에 대한 내 생각은 약간 다르다.



Patriotism is the last refuge of a scoundrel.
애국심은 악당들의 마지막 피난처다.

- 문학가 새뮤얼 존슨 -



 전체주의 정부가 그 공개적인 범죄 행위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없이 매우 불안한 점이다. 그러므로 학자나 정치인이 종종 이 사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해도 그리 놀랍지 않다. 전자는 선전과 세뇌 공작의 마술을 믿기 때문이고, 후자는 아데나워가 반복하여 그랬듯이 단순히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SS 첩보부가 만든 전시(1939~44년)의 독일 여론에 관한 비밀 보고서가 최근에 출판되었는데, 그것은 이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선 주민들이 이른바 모든 기밀 사항 – 폴란드 유대인의 학살, 러시아에 대한 공격 준비 등 – 을 무척 잘 알고 있었고 또 선전의 희생자들이 어느 정도까지 독립적인 견해를 형성할 수 있는지를 이 보고서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요점은 그런 기밀 사항들이 히틀러 정권에 대한 일반인의 지지를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체주의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무지나 세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권, 한길사, 57면 이하. -


 물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전의 한국의 정치상황이나, 언론에서 파헤친 여러 정황들로 미루어 봤을 때 어용시위 의혹은 일정 부분 사실일 것으로 판단된다. 정권이 바뀌면 이들 단체에 대한 수사도 급물살을 타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들 단체의 참가자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위 인용에서 지적하는 맥락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애국’을 하고 있다고 믿을 것이며, 돈을 받았다 하더라도 애국활동에 대한 ‘정당한 지원금’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직장인들이 많이 모이는 몇몇 커뮤니티의 게시판을 살펴보면, 음식점에서의 노인들, 중년의 택시기사, 심지어는 자신의 부모나 장인어른이 촛불시위를 폄하하고 박근혜 피의자를 옹호하는 발언을 입에 담아 답답하고 안쓰러웠다는 경험담이 종종 올라오곤 한다.

 한나 아렌트의 말마따나 그들은 결코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미디어 매체를 통해 박근혜 피의자와 그 공범들에 대한 밝혀진 죄상과 밝혀야 할 의혹들을 전부 듣고도 일부러 귀를 닫고 카톡이나 폐쇄적인 인터넷 카페에 나도는 허위사실들에 취해 있는 것이다. “못 믿는 게 아니라 안 믿는 거잖아요.” 타진요에 대한 타블로의 일침은,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유효하다.



 전체주의 정권에서 일어난 것은 결코 독일과 러시아의 특별한 역사로 국한되지 않는다. 전체주의를 가능하게 만든 핵심적 요소는 당시 근대사회에 만연했던 ‘쓸모없는 존재’(superfluousness)의 경험이었다. 이 경험은 근대 국민국가가 몰락하고 현대적 대중사회가 출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의 세 번째 부분인 전체주의를 계급사회의 붕괴에 관한 서술로 시작한다. 대중이 없으면 전체주의적 운동이 일어날 수 없으며, 전체주의 운동이 없이는 전체주의적 국가체제가 형성될 수 없다.

 전체주의 운동을 구성하는 대중들은 정당이나 조합과 같은 확고한 조직에 소속되지 않고 표류하는 모래처럼 사회를 떠다닌다. “조직되지 않고 구조화되지 않은 대중, 절망적이고 증오로 가득 찬 개인들의 대중”이 생겨난 것이다. 아렌트가 주목하는 것은 이처럼 사회적으로 분리되고 원자화되고 그래서 지도자에게서 구원을 기대하는 대중을 둘러싼 전체주의적 운동이다. (중략)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아렌트는 ‘폭민’(mob, 暴民)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폭민은 사전적으로 ‘조직되지 않은 거대한 폭력적 군중’을 의미한다.

 폭민은 기존의 사회계급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발생했으며 계급과 국가, 어떤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는 조직되지 않은 잉여 집단이다. 자본주의는 잉여자본과 잉여 인간을 발생시켰는데, 제국주의가 잉여자본의 조직이라면 전체주의는 잉여 인간의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가들이 포착하지 못했던 사실은, 폭민은 성장하는 산업 노동자와도 또 더욱 분명하게는 국민 전체와도 동일시될 수 없으며, 실제로 모든 계급의 폐물들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조직하여 공허한 소속감과 정체성을 부여할 지도자를 기다린다. 이렇게 전체주의 정권은 탄생한 것이다.


- 이진우, 전체주의와 ‘정치적 자유’의 의미 中 -


 그들은 (설령 그것이 잘못된 교육과 불운한 환경에 의해 형성된 일그러진 자아라 할지라도) 엄연한 ‘자기 의지’에 따라 전체주의적인 봉건질서의 존속을 절실히 바라고 있다. 위의 인용에 따르면, 왜 친정권 시위에 유독 중년층 이상의 노인들이 지지를 보내고 있는지도 제법 설명이 가능하다.

 이미 사회의 주류에서 떨어져 나간 무력한 이들이 다시금 화려하게 권위의 망토를 두르고 무대 위로 복귀하기 위해선, 누구나 속할 수 있는 국가라는 상징물에 기대는 것이 가장 손쉬우며, 사실상 그것이 유일한 발판이자 지팡이이기도 하다. 그 구질서로의 회귀를 실행해줄 만한 지도자는 당연히 극우 인사들에게서밖에 찾을 수 없으니, 그들이 독재자의 딸과 그 부역자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으리라. 거창하게 말하자면, 본인들의 정치적 ‘실존’이 걸린 문제이니 말이다.



 “(세월호특별법 제정 반대 집회를 하는 노인들을 보면서) 젊은 사람들, 저기 저 노인들을 똑바로 봐요. 각성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거야. 노인들 욕하자고 그러는 게 아니라, 얼마나 잘못 배웠으면 그 세대가 그랬겠냐는 걸 나는 얘기하는 거지. 마음에도 든 거 없고, 머리에도 든 것 없고, 그건 그 사람들이 젊은 시절에 이미 오늘날 저런 늙은이 되게끔 엉터리로 배우고 엉터리로 살아서 그렇습니다. 그냥 늙기만 하면 다 저렇게 되는 게 아니라, 정말 부실하게 살아서 저렇게 된 겁니다. 지금 젊은이들도 부실하게 살면 얼마든지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걸 얘기하는 겁니다.”


-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



 “너무 화내지 말게.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환자니까.”

 슈나이더의 눈이 슬쩍 커졌다.

 “병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정신에 말일세.”

 메르카츠가 생각하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병이란 무의식 속의, 상처 입기 쉬운 자존심이었다. 본인은 그 사실을 알 리 없겠지만, 자신을 가장 위대하고 완벽한 존재라고 믿기 때문에 남에게 감사할 줄 모르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인정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와 다른 생각을 품은 자는 반역자로밖에 보지 않으며, 충고는 비방으로만 들린다. 따라서 슈트라이트와 페르너처럼 그를 위해 책략을 세워준 자들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오히려 그의 진영에서 쫓겨나고 만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기질을 가진 사람은 사회에 다양한 사상과 가치관이 존재한다는 것도 인정하지 못한다.

 “언젠가 말했던 500년에 걸친 귀족의 특권이 그 병을 키운 걸세. 공작도 사실 피해자라고 봐야겠지. 100년 전이라면 그것도 통했겠지만…… 불운한 사람이야.”

 아직 젊은 슈나이더는 상관만큼 관용을 가질, 혹은 체념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메르카츠 앞에서 물러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요새 전망실에 올라갔다. 반구형을 이루는 투명한 외벽 너머로 이리저리 얽힌 항성들의 무미건조한 빛이 매우 멀게 느껴졌다.

 “그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불운한 사람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에게 미래를 맡겨야만 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불운하지 않을까…….”


-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2권, 이타카, 243면 이하. -


 젊은 세대가 주축이 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래서 노인복지가 중요하다’는 식의 씁쓸한 농담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제 와서 그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재교육을 행한다고 해서 크게 바뀌는 것은 없다. 한 번 구축된 사람의 자아는 쉽사리 변하지 않으니 말이다. 다만, 앞으로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 나오지 않을 사회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불쌍하다고 해서 우리가 양보해야 될 이유도 없다. 위의 인용에서도 말하는 것처럼 그 아래서 당하는 사람들이 ‘더더욱’ 불운하다. 무엇보다 그들의 행위가 우리 아이들의 발목을 잡고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가 된다면, 동정은 할지언정 양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을 수 있지만, 노추老醜를 위한 나라는 없다.



 만약 우리가 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은 그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그러한 결과는 불가피했고, 따라서 이제 와서 그 결과를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주장이 되지 않을까?

 이와 같은 주장은 흔히 원인의 설명과, 정당화 또는 결과의 승인을 혼동하는 경향에서 기인한 것이다. 역사학적 설명의 목적은 그 설명 자체와는 별개의 문제다. 그리고 어떤 현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러한 결과를 반복하거나 영속시키기보다는 변화시키려는 용도로 사용될 때가 더 많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학자들은 살인자나 강간범의 심리를 이해하려 하고, 사회 역사학자들은 대량 학살이 일어나게 된 이유를 이해하려 하고, 의사들은 질병의 원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한 연구자들은 결코 살인, 강간, 종족 학살, 질병 등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원인을 이해함으로써 그 같은 인과관계의 사슬을 끊고자 한다.


- 재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 문학사상, 19면 이하. -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확신은 역사를 상투적인 틀로 해석하는 길로 이어질 수 있다. 이해란 잔악무도함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례에서 전례 없는 일을 추론하거나 현실의 영향과 경험의 충격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도록 만드는 유추와 일반화를 통해 현상들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이해는 오히려 우리의 세기가 우리 어깨에 지운 짐을 검토하고 의식적으로 떠맡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짐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그 무게에 패기 없이 굴복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이해란 현실에, 그것이 무엇이든 미리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주의 깊게 맞서는 것이며 현실을 견뎌내는 것이다.


-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권, 한길사, 34면 이하. -


 어떤 칼럼에서 ‘성찰 없는 늙음’을 경계해야 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노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방심하면 어느새 그들처럼 후대의 걸림돌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그들을 용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른바 ‘인과관계의 사슬’을 끊고자 함이다. 우리가 그들을 부정하는 것은, 언제까지고 젊을 것이란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처럼 ‘늙지 않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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