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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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역류해도 재기동하는 나날
by 안단테♪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당시 베르너는 지질학 논쟁의 중심인물로서 수성론자의 핵심인물이었다. 그때는 거의 모든 암석은 마그마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화성론자와 이에 대립되는 이론으로 모든 암석들이 물에서 퇴적작용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수성론자가 있었다.

 베르너는 바로 수성론자의 우두머리였다. 당시 그의 논리를 정면으로 거부하기에는 지질학적 지식이 발전되지 못한 점도 있었지만, 당시 그의 지질학계의 영향력과 화술은 정말 대단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결국 대립되는 두 이론의 싸움에서 패배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지질학 발전에 남긴 공로는 결코 무시될 성격의 일이 아니다.


- 문희수, 보석, 보석광물의 세계, 자유아카데미, 123면 이하. -




 기원전 6세기에 이오니아에서 새로운 사조가 태동했다. 고대 이오니아 인들은 우주에 내재적 질서가 있으므로 우주도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자연 현상에서 볼 수 있는 모종의 규칙성을 통해 자연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연은 완전히 예측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자연에게도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

 탈레스가 내린 결론의 옳고 그름은 큰 문제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점은 문제 해결을 위해 그가 택한 접근방식에 있다. 신들이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고, 자연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물리적 힘의 결과로 만물이 만들어졌다는 생각이야말로, 당시 사고의 근본을 뒤흔드는 발상의 대전환이었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사이언스 북스, 343면 이하 -










■■■






(글을 쓸 때 들은 곡입니다.)







[그노시스 노이즈 - Paradigm Shift - (完)]


 「사람은 모두 평등하게 싸울 권리가 있다.」

 시원의 설계자Zero contactor 중 한 사람인 클로에 클로버 교수는 이렇게 선언하며,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만물의 이치를 개찬했다.

 이른바 선악미추Battlefield의 개막.
 사람의 관념에 고도의 물질성을 부여하는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를 통해 적용되는 그 새로운 세상의 법리는, 누구에게나 ‘싸우는 힘’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현자든 우자든 부자든 빈자든 성별도 나이도 국가도 인종도 사상도 이념도 관계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특정『병종兵種』을 타고나 고유의 갑주와 연동된 무기를 부여받는다. 거기엔 속성과 육성과 운용의 차는 있어도 근본적인 위력과 자원의 차는 없다. 이로써 사람은 ‘평등하게’ 원하는 것을 취하고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반으로 갈라진 셀레스티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가진 병종은 분기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누구나 기갑, 철갑, 포갑, 이렇게 크게 셋 중 하나에 속하지. 그리고 이 3병종은 각자 먹고 먹히는 관계에 있어.”

 우세한 기동력을 가진 기갑은 발이 느린 포갑에 강하다. 아무리 화력이 강해도 제대로 맞출 수 없는 포갑병종은 기갑병종에게 있어 좋은 표적에 지나지 않는다.

 두터운 장갑을 가진 철갑은 화력이 어중간한 기갑에 강하다. 아무리 맞추어도 철갑병종의 장갑을 제대로 관통시킬 수 없는 기갑병종은 끝내 지구력을 잃고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하기가 일쑤다.

 강력한 화력을 가진 포갑은 육중한 갑주 뒤에 숨는 철갑에 강하다. 방어를 뚫을 수 없는 기갑병종과는 다르게 껍질 그 자체를 불사르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들 병종의 상성관계는 단순한 특성의 차이가 아니야. 세계의 법칙으로써 직접적인 랭크에 두 단계나 관여하기도 하지.”

 상성에 따른 능력치의 하락penalty.
 가령 기갑병종은 화력을 A랭크 상당까지 끌어올린다 해도 C랭크밖에 안 되는 철갑병종의 장갑을 뚫을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포갑병종은 기동력이나 정밀성이 A랭크라 해도 고작 C랭크의 기동력을 가진 기갑병종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철갑병종 또한 아무리 장갑을 강화해도 두 단계 아래 랭크의 포갑병종의 일격에 간단하게 관통당하고 만다.
 그러니 철갑병종인 셀레스티나가 기갑병종인 베르길리우스에게 손쉽게 양단당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맞아. 나로서는, 내 병종으로는, 당신에게 이기기 힘들어.”

 그러나 셀레스티나는 살아 있었다. 상반신이 따로 놀고 있음에도 땅에 쓰러지는 일 없이 나비 날개와도 같은 갑주의 포문을 열어 베르길리우스를 조준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단티아에게 한 말을 그대로 돌려줄게. 그래도 ‘시간을 끄는 것’이라면, 충분해!”

 “!”

 피를 토하는 셀레스티나의 고함과 함께 지척에 있는 베르길리우스에게 포격이 쏟아졌다. 거의 자살에 가까운 일제사격. 이미 빈사상태에 있는 셀레스티나에게 있어 이 지근거리의 십자포화는, 스스로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다름없을 터였다.

 “초고속, 복원능력…….”

 베르길리우스의 감탄과도 같은 신음 소리. 셀레스티나는 불타오르는 자신의 갑주와 함께, 너덜거리면서도 하늘하늘 불길을 먹으며 빠른 속도로 재생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포갑은, 장갑을 강화해 봤자…… 기갑에게, 쉽게 뚫려. 반대로 철갑에게는, 상성우위로 장갑이, 강화되는 데다…… 애당초 오기 전에 처리하는 게, 정석이고. 그렇다면…….”

 아직 복원 중인 탓일까. 드문드문 이어지는 셀레스티나의 말을 베르길리우스가 받았다.

 “장갑에 돌릴 은화coin를 전부 특수기능의 강화에 썼다는 거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셀레스티나를 향해 베르길리우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치는 이해했다. 하지만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군. ‘통각’은 어떻게 된 거지?”

 제로 컨텍터Chloe Clover가 설정한 선악미추Battlefield의 전장에 서는 모든 사람은 절대 고통을 피할 수가 없다. 약물을 복용해도 신경계를 조작해도 심지어 온몸을 기계로 바꾸어도 ‘아픔’에서는 도망칠 수 없는 것이다.

 당연히 초재생능력이 있다 해도 몸통이 잘리고 전신이 불타는 격통은 피할 수가 없다. 아니, 오히려 당장 죽지 못하는 만큼 느껴지는 고통은 훨씬 심하리라.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를 통해 의식 그 자체에, 존재自我 그 자체에 정면으로 엄습해 오는 고통. 때때로 신화 속 영웅들마저 미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그런 고통에 셀레스티나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 걸까.

 “흥, 「아픔은 만인을 이해하는 기초다」. 클로버 교수가 그런 건방진 말을 남겼다고 하지, 아마? 그래서 관리체계의 중추영역에 고통만큼은 절대 삭제될 수 없도록 각인시켜 놓은 거고. 서로가 동등하게 싸울 수 있게 된 세계에서, 모두가 각자의 목소리만을 높이며 상대가 멸절할 때까지 싸우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거의 회복을 마친 셀레스티나의 말에 베르길리우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몰이해와 갈등은 존재한다. 설계자Chloe의 의도대로 아픔의 존재가 최후의 일선을 넘지 않도록 인류의 발목을 붙들어주고 있을지는 모르나, 역시 완전함에 도달하는 충분조건은 되지 않는 것이다.
 베르길리우스의 속내를 알 길 없는, 혹은 알아도 무시할 셀레스티나는 선언하듯이 외쳤다.

 “그런 거, 아픔 따위, 그저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잖아!”

 또 다시 지근거리에서 피아를 가리지 않고 작열하는 포화. 베르길리우스는 자기 살과 뼈마저 깎아내는 무지막지한 공격에 어쩔 수 없이 거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성가시군. 본인 스스로 죽지 않는 불길이 되어 상성에 따른 약점 그 자체를 상대와 함께 태우겠다는 거냐. 극심한 고통의 감수를 대가로.”

 베르길리우스는 페카토로 셀레스티나를 겨누며 다시 물었다.

 “너는 무엇을 바라지? 무엇을 위해 아픔을 참고 견디나.”

 “소중한 이들과 함께 하는 미래를 위해. 아픔 너머에, 아프지 않아도 되는 내일이 있기를 바라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흘러나온 붉은 소녀의 대답에 베르길리우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굉장한 걸. 즉답할 수 있다는 건 평소에 그만큼 고민하고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이지. 이거, 그 녀석에게 ‘아까운’ 여자일지도 모르겠군.”

 장난스러운, 하지만 진심이 담긴 베르길리우스의 평가에 잠시 멍해져 있던 셀레스티나는 씨익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 생각보다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네.”

 “그거 영광이군.”

 친근감 섞인 농담이 무형회랑의 중심을 교차하는 순간, 살의에 가득 찬 죄악의 칼날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연정의 포화가 세상을 쪼개고 태울 듯이 맞부딪쳤다.






 금은輝光으로 수놓인 밤하늘의 문을 열자 자수정의 미궁이 펼쳐졌다.
 지고천의 중추영역. 옥좌Core에 앉은 레지나의 심상法理이 소리 높여 노래 부르는 천체의 최심부. 찬란히 다듬어진 수정기둥에 빛이 반사돼 나른하게 졸고 있는 여왕Regina의 허상을 비춘다.
 단티아는 검을 바로잡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천체의 주인, 천상의 여왕, 도미넌트 레지나……. 지고천주 베아트리체.”

 폭포수가 떨어져 내리듯 화려하게 물결치는 풍성한 금발. 중추영역의 문과 같이 별이 빛나는 밤을 연상시키는 심원深源의 드레스. 세상만물을 살피는 제3의 눈으로써 기능하는 사슴뿔의 후광. 마치 이 지고천 자체가 사람의 형상으로 현현해 옷을 입고 있는 것만 같은 장엄함과 신성함.
 하지만 단티아의 심안深眼은 그 휘광 뒤에 숨겨진 쇠락의 그림자를 정확하게 포착했다.

 “지쳐있군. 베르길리우스보다도 더.”

 옥좌Core에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던 베아트리체는, 그 말에 이제야 간신히 눈을 열어 황금빛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했다.

- 맞아요. 여기 있는 건 과거 빛나던 시대의 잔해. 전부 불타버린 꿈들의 잿더미. 이제는 그저 흘러가는 세상을 지켜보는 망념일 뿐이지요.

 수정의 잔을 옥수로 울린 것만 같은 아름다운 목소리.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 음색에는 어딘가 생기가 결여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퇴색된 태피스트리.
 말하자면 말라붙은 오래된 거목.
 말하자면 박제된 맹금의 날갯짓.

 명화 속의 당장이라도 움직일 것만 같은, 하지만 절대 움직일 리 없는 여인의 미소를 보고 있는 기분으로 단티아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려와라. 앞으로 나아갈 의지가 없다면, 저리 비켜.”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게는 이곳을 지킬 권리와 의무가 있으니까요.

 단티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의 죽음과 세상의 비극을 방치하는 네게, 아직도 목적이 존재하나?”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 사람…… 베르길리우스에게도 들었을 겁니다. 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선, 미숙한 사람의 정신에는 ‘죽음’이 필요하다고.

 “그랬지. 분명 녀석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난 동의하지 않아. 60년은 너무 짧다.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사람은 더 멀리 보고,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어. 별빛에, 닿을 수 있단 말이다……!”

- 그건 착각입니다. 우리는, 나와 베르길리우스는, 과거에 보았습니다. 노물이 이윽고 퇴물이 되는 순간을. 변해가는 시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변하는 세상의 발목을 잡고,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의 미래를 가로막는 만행을.

 베아트리체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 이면에는 희미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있는 대로 소모된 레지나의 정신에도 열의가 존재했다. 그 열기憤怒가 바로 스스로를 ‘재’라고 칭한 그녀를 움직이는 원동력일 터였다.
 단티아는 목소리를 높였다.

 “너야말로 착각하고 있어! 구시대에는 아직 노화가 존재했다. 육체의 쇠락은 정신의 쇠약마저 가져오지. 그 퇴락이 쌓아온 경험을 압도하는 순간, 사람은 너의 말마따나 퇴물로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지금 시대의 사람에게 노화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야. 선천적인 결여도 후천적인 병마도 존재하지 않지. 이런 세상이라면, 사람의 정신은 그 시간에 비례해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어!”

- 낙관이 지나치군요. 전 사람의 정신에 그렇게까지 희망을 가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죽어야만 합니다. 후대를 위해, 자리를 비켜줘야만 합니다. 이 얼어붙은 보석의 천체가 증명하듯, 사람의 정신은 언젠가 결국 정체하고 말 테니까요. 만약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섣불리 불사성을 얻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인류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베아트리체의 음색에는,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이 특유의 절절한 진실성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단티아는 그 진실의 허점에 금방 눈치 챘다.

 “모순되어 있군. 그 말대로라면 너야말로 시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수 있을 텐데. ‘인류의 불사성’이라는 새로운 법리를 인정하지 못해 그저 거부하고 있을 뿐인 퇴물 말이지.”

 신랄한 단티아의 지적에 베아트리체는 솔직하게 그것을 인정했다.

- 그런 일면이 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때문에 베르길리우스는 제 곁을 떠났지요. 새로운 세상을 열 가능성을 키우기 위해. 그리고…….

 잠시 말을 끊었다 다시 입을 연 베아트리체의 어조에는 다소 힘이 들어가 있었다.

- 그 모순의 칼날은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로 돌아갑니다. 제가 진정 시대의 발전을 가로막는 퇴물이라면, 오히려 사람의 정신은 정체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제 이론의 타당성을 증명하는 게 될 테니까요. 그러니 우리는…….

 “선악미추Battlefield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거군.”

 단티아는 날카롭게 웃으며 베아트리체를 향해 포문을 겨누었다.
 베아트리체는 처음으로 옥좌Core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 천체의 지배자인 저는 올라운더이자 올마이티. 비겁하다고 말해도 손을 늦출 생각은 없습니다. 인류가 정체에 지지 않는다고 증명하고 싶다면, 인간이 만들어낸 신 정도는 스스로 뛰어넘으십시오.

 “그래. 그럴 생각이다. 자율적으로 부존을 증명하는 위신僞神 따위, 지금 당장 토벌해주지. 그걸 위해 여기까지 왔으니까.”

 단티아의 부름에 지고천의 하늘을 열고 출현한 색색의 9천체. 제어를 빼앗은 다른 아홉 천체들에게 일시적으로 권한을 이양 받은 단티아는 천상의 지배자Dominant Regina에게 선전을 포고했다.

 “자, 희망과 회한의 싸움을 시작하자.”






 영겁의 세월을 흐르는 광채天體에겐 찰나에 지나지 않을 일천년.
 그 흐름의 끝에 지고천 최심부에 위치한 밤하늘의 문은, 언젠가의 광경처럼 부서지듯 활짝 열렸다.

- 왔군. 옥좌Core의 빛에 매료된 애처로운 부나방들이.

 지고천체의 중추영역. 도미넌트 레지나의 심상法理을 비추는 흑요석의 성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날렵한 갑주로 몸을 감싼 13인의 찬탈자들이었다.

- 설마 베르길리우스와 셀레스티나마저 쓰러뜨리다니, 그 실력은 인정해줄 수밖에 없겠군. 그럼 묻겠다. 너희들은 무엇을 바라나. 이 옥좌Core에 앉아 무엇을 이루고 싶은 거지?

 레지나의 물음에 가장 앞에 선 단발소녀가 입을 열었다.

 “그, 그건……. 우, 우리가 원하는 건…….”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거인의 검을 가진 소녀는, 그러나 그 체구에 어울리는 소심한 성격을 하고 있었다.
 옥좌Core에 앉은 레지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 자기 생각을 표현할 줄도 모르면서 여기까지 올라온 건가? 정말 그저 빛에 취해 무작정 달려든 벌레였을 뿐이냐. 어처구니없군. 사람의 정신은 이렇게나 추락했단 말인가.

 “…….”

 그러나 그 모욕에도 불구하고 다른 12인의 소녀들은 일절 분노하는 기색 없이 따스한 눈빛으로 작은 소녀를 지켜볼 뿐이었다.
 동료들의 시선에 용기를 얻은 걸까. 거인의 검을 가진 소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의 권한을, 모든 이가 동등하게 공유하는 것……. 우리 모두가, 신이 되는 겁니다!”

 소녀의 외침에 레지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나? 지나친 힘은 자멸로 이어지는 무엇보다 확실한 이정표다. 넌, 인류를 멸망시킬 생각인가?

 “그, 그렇지 않아요! 우, 우리는……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습니다. 서로를 무작정 죽이거나, 미워하지도 않아요! 신적인 지배력을 가지게 된다고 해도, 잘 통제할 수 있어요!”

 소녀의 항의에 레지나는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 왜 그런 걸 원하지? 이미 인류는 병에서도 죽음에서도 해방됐다. 태양계를 벗어난 생활권은 은하 저편으로 뻗어나갔고, 발전된 문명은 다른 우주까지 넘보고 있는 수준이지. 여기서 무엇이 더 부족하단 말이냐.

 “부, 부족해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모든 생명이 행복해지기 위해선, 아직 더 힘이 필요해요!”

 필사적인 소녀의 외침에 레지나는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 모든 생명이, 행복해져……?

 거인의 검을 든 소녀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더 높은 단계에 오르기 위해선, 다 같이 신의 힘을 공유할 필요가 있어요. 설령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해도. 그것이, 우리가 옥좌Core를 바라는 이유에요.”

 더 이상 소녀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레지나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시간낭비였군. 광인의 말을 경청한 내가 바보였다. 세상을 멸망시키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라. 광언을 실현시켜 자멸하는 것은, 그건 너희愚者들의 자유다. 하지만 그 전에 날 넘어서야 할 것이다. 이제 마지막 남은 구시대의 생존자로서, 너희들의 우행을 막겠다.

 비로소 적의를 드러내 자신을 노려보는 소녀들을 응시하며, 지고천의 지배자Dominant Regina 단티아는 홀로 작게 속삭였다.

- 저 아이들이 옳은지 그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솔직히 내게는 파멸하는 미래밖에 보이지 않아. 하지만, 사람의 정신은 결코 정체하지 않았다. 설령 내가 져, 우려하던 최악의 미래가 도래한다 해도, 그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어.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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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7.02.15 14:43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아아, 결국 인류는, 세계의 역사는 같은 비극과 아픔의 연쇄를 반복하고야 마는 것일까요.

    이렇게 시점을 바꾸어 현상을 목도하니 과거의 어느순간 단티아 일행의 앞을 막아섰던 베아트리체의 심정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념이 들기도 하더랍니다.

    하지만 단지 꿈결과도 같은 권태감과 기계적인 망집에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던 그녀와 달리, 아직 보다 나은 지금의 일상과 그 너머의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고뇌하는 단티아의 모습을 보니 이번 순환 주기의 끝에는 전혀 새로운 가능성의 희망이 살포시 미소짓고 있을지도...? :D


    덧 - 새롭게 천체의 주인으로 거듭난 단티아를 보면서 순간 다크소울3의 화방녀의 이미지가 두둥실~

    덧 2- 그나저나 마지막의 저 장면, 무엇인가 학생회실에 무작정 난입하여 무리한 요구를 해대는 신입생들과 그 앞에서 이마를 감싼 채 절래 절래 고개를 흔드는 총학생회장의 구도일지도요?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7.02.19 17:31 신고 address edit/delete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처럼 작중 옥좌의 주인의 교체에는 단순히 비슷한 구도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제 나름의 시선에서 바라본 시대와 문명의 발전상이 반영되어 있네요.

      만약 마지막 파트의 소녀들이 단티아에게 승리를 거둘 경우, 세계사상관리체계는 현증법리체계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그것이 일전 '은세계의 은월'에서 각 관의 장들이 썼던 힘으로 이어지는 발판이 된다는, 아무래도 좋은 뒷설정이 존재하기도 해요. 즉 위의 단편은 은세계의 은월에서의 '홍채'가 태양계에 찾아오지 않았을 경우를 가정하고 전개된 내용이라 볼 수도 있어요.

      다만, 단편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제 가치관에 따른 진화이고 진보이기 때문에 다른 분들께서 보시기에는 그냥 이상한 이유로 싸우는, 별로 와 닿지 않는 이야기가 될지도^^;;



      (그녀처럼 매력적인 캐릭터가 될 수 있으면 좋겠네요^^)

      (헬싱 후기 만화처럼 표현해도 재미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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