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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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역류해도 재기동하는 나날
by 안단테♪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세상에는 크게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사람이 행복해지는 이야기와 불행해지는 이야기.

 그러나 사실은 네 가지여야만 한다. 하지만 나머지 두 가지는 인간이 어떻게 해보기에는 너무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기에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심히 불완전하다.
 그러니 그것을 창조하고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신밖에 없다. 실제로 교회는 사후의 세계에 그것을 약속한다.

“계속해서 행복할 수 있는 이야기.”


- 하세쿠라 이스나, 늑대와 향신료 5권, 학산문화사, 250면 이하. -




‘신에게 의지해야 이길 정도라면 처음부터 전쟁을 하질 말았어야지.’

 금발 청년은 그렇게 생각했다. 의지할 것은 자신의 능력과 이를 충분히 살리고자 준비한 전략적 조건. 그저 그뿐이 아닌가.

 자신들이 신에게 기도한다면 적도 기도할 것이다. 신이라는 것이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존재라면 아무리 기도해도 어느 한쪽의 기원은 뿌리칠 것이다. 신이 하나가 아니라면 인간과 마찬가지로 더 강한 신이 승리하리라. 겨우 그 정도 존재에게 기도하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지 않은가. 라인하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만일 신이라는 것이 실존하고 정의를 사랑한다면 왜 루돌프 대제가 수백억을 학살하도록 내버려두었는가? 왜 프리드리히 4세가 안네로제를 강탈하도록 내버려두었는가? 그것이 정의였기 때문에? 라인하르트는 수긍할 수 없었다.


-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외전 2권, 이타카, 231면. -










■■■








5-01. 그래도 몽상하지 않을 수 없다 (8)


 황금산과 흑색연맹의 주 경계선.
 여름이 찾아오면 때때로 녹음綠陰이 드리우기도 하는 이 영구동토의 끝자락도 지금은 겨울을 맞아 혹독한 눈보라가 사방을 강타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자연의 무구한 살의를 비웃기라도 하듯, 주 경계선 사이에 교묘하게 위치한 세계변혁위원회 제372지부의 지하신전은, 말 그대로 폭염暴炎에 휩싸여 있었다.

 신도들의 믿음狂氣을 불사르는 붉은 폭력.
 왼쪽으로 올려 묶은 머리를 경쾌하게 흩날리며, 홍옥수紅玉髓의 소녀 유라는 자신의 법칙을 유감없이 행사했다.

“간만에 마음껏 움직이니 속이 다 시원하네! 역시 난 이쪽이 체질에 맞다니까!”

 폭염칙. 몸의 일부를 마찰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불길을 일으키는 유라의 힘은, 대공 경선이 있었던 몇 년 전보다 훨씬 강화되었다. 보다 작은 마찰로, 보다 빠르게, 보다 큰 불길을 일으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깨작깨작 팔자에도 없는 시녀장 대리 노릇’을 하면서도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덕분이리라.

“아니면, 그동안 울분이 쌓인 탓인가?”

 화르륵. 유라가 가볍게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사방에 거센 불길이 일어나 그녀에게 날아드는 모든 광탄光彈을 순식간에 상쇄한다.

“이, 이 괴물은, 서, 설마…….”

 즐겁게 손가락을 꺾으며 전투의 희열을 즐기는 그녀와 달리, 성스러운 신전에 난입한 침입자와 대치한 신도들의 얼굴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저주 받은 지옥불의 악마……. 이프리트!”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백금총을 겨누는 한 신도의 외침에, 유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프……뭐? 혹시 그거 날 말하는 거냐? 내 별명이야?”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마치 지인에게 건네는 듯한 친근한 어조와는 대조적으로 신도들은 험악한 얼굴로 그녀의 물음에 대답 대신 방아쇠를 당겼다.

“퍼니셔도…… 슬래셔도…… 네년도…… 모두 지옥에나 떨어져라……!”

 그들 중 가장 필사적으로 외치며 적의를 숨기지 않고 총을 난사한 이는, 이곳의 지부장이자 사제인 한 여성이었다.

“남편은, 공사장에서 사고로 죽었다……. 아이들은, 내가 없을 때 배고픔에 밖을 헤매다 돌인형에게 잡아먹혔다……. 절망에 거리를 떠돌던 내게, 손길을 내민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하지만, 오로지, 오로지 그분만이, 성녀님만이 내 손을 잡아주셨다! 그분의 주님만이 내게 빛을 주셨어……! 그분의 신도만이 날 위로해 주었다고! 그 빛을, 우리들이 있을 장소를, 더 이상 빼앗길까 보냐!”

 체력이 바닥났음에도 극한의 정신력만으로 계속해서 광탄을 자아내는 여사제의 절절한 외침. 그 뒤를 잇듯 신도들도 자신들의 울분을 쏟아냈다.

“더 이상 맞고 사는 건 질색이야! 우리는 연맹 귀족들의 노예가 아니라고!”

“황금산의 갑부들이 우리에게 뭘 해줬냐! 그저 쥐어짜고 쥐어짜다 쓸모없어지면 물기 빠진 자갈처럼 버릴 뿐이지 않나!”

“그런 우릴 인간 취급 해주는 건 우리 주님뿐이시다! 그분의 사도들뿐이시다! 그분들만이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신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너희 악마들은! 우리의 마지막 안식처마저 빼앗을 생각이냐!”

“천신께서 다시 부활하신다면, 우린 구원 받을 수 있어! 죽은 우리 가족들도 되살아날 수 있다고! 우리의 낙원을 방해하지 마아아아아아아!”

 광탄에 섞여 울려 퍼지는 신도들의 토혈과도 같은 비명. 세상의 피해자와도 마찬가지인 그들에게 유일한 위안信仰을 빼앗으려 하는 유라는, 확실히 그들에게 있어 악마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잠시간 말없이 불길의 장막으로 신도들의 공격을 막아내던 유라는 이윽고 짧게 한 마디를 내던졌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군.”

 동시에 유라는 움직였다. 빗발치는 광탄을 따돌리며 지하신전의 어둠 속으로 질주하는 적색의 머리카락과 왼쪽 눈동자. 유라의 한쪽 눈은 평범한 녹색 눈동자였지만, 다른 한쪽 눈과 머리카락은 홍옥수의 보석으로 일치한다. 이른바 준準 천연석에 해당하는 순도로서 그녀의 신체능력은 평범한 모조석으로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수준에 달해 있었다.

“주, 주주, 죽어 버려어어어어!”

 신도들은 살의를 비명으로 바꾸어 마구 방아쇠를 당겼으나, 유라에게는 단 한 발도 닿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빠르게 그들 앞을 스치고 지나간 순간…….

“아아아아아아악!”

 거센 불길이 일어나며 거의 모든 신도들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해 심층계곡으로의 긴 여행을 떠나고 말았다.

“이, 이이이, 이 아, 악마……!”

 마지막 남은 한 명. 사제이자 지부장인 여성이 한계에 달한 육체를 정신으로 채찍질하며 유라를 향해 부들부들 백금총을 겨누었다. 그녀는 두려움에 몸을 떨고 분노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결코 총만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사람의 아픔을 모르는, 이 살인마……! 네가 남편을 잃은 슬픔을 알아? 자식을 잃은 슬픔을 아냐고!”

 사제의 절규에 유라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몰라. 강도에게 부모를 잃은 슬픔과 변태갑부에게 팔려갈 뻔한 공포라면 알지만.”

“……!”

 허를 찔려 일순 당혹해 하는 사제를 향해 유라는 재차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딱히 불행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동정해주길 원하지도 않아. 당신들의 불행에 함부로 침을 뱉을 생각도 없고. 단지 난 궁금할 뿐이야. 왜 당신들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현실과 싸우지 않는 거지?”

“현실과, 싸워……?”

 사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당신, 연맹 출신이지? 당신의 남편은 공사장에서 사고로 죽었다고 했는데, 연맹의 노동환경은 세계적으로도 열악하기로 유명하지. 당신의 아이들은 굶주림을 못 참아 밖으로 나갔다 돌인형에게 당했다고 했는데, 애당초 아이들을 굶게 만드는 사회제도가 이상한 거 아냐?”

“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싸워야 할 상대가 명확히 보이지 않냐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뭘 해야 되는지 말이야.”

 유라는 답답하다는 듯이 답을 재촉했지만, 사제의 지친 눈동자에는 의문만이 가득 차올랐다.

“그게 대체 무슨……. 세상을 바꾸다니, 그런 거창한……. 난, 그저 언제나 올바르신 천신님과 그 사도들을 따라 구원을…….”

“그 빌어먹을 천신 얘기는 좀 나중에 해! 당장 눈앞의 현실을 보고 문제점을 파악하란 말이야!”

 다혈질인 유라는 그만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상대의 심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그 고함이 모든 것을 끝장내고 말았다.

“감히 우리 주님을 모독하다니……! 역시 악마년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었어!”

 사제는 귀기 서린 얼굴로 총을 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쳇!”

 유라는 혀를 차며 간발의 차로 광탄을 스치듯이 피하며 사제의 가슴에 손을 댔다.

“유감이야.”

“……!”

 화륵. 순식간에 불길이 솟구치며 사제의 몸이 다른 신도들과 마찬가지로 잿더미로 변해 흩어졌다. 그나마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소멸했다는 점이, 즉 고통 없이 죽었다는 점이 그녀에게 있어선 유일한 구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쯧. 아무래도 난 말주변이 없어 안 되겠어. 이런 건 세라나 연주가 제격인데 말이야.”

 유라는 신도들 전원이 몰살당한 현장의 중심에서 머리를 긁적이며 혀를 찼다. 그녀는 방금 죽은 사제에게 자신의 뜻을 제대로 전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딱히 상대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는 식의 위선을 부릴 생각은 아니다. 이건 목숨을 건 사투였다. 전력을 다했기 때문에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었던 것이지, 만약 여유를 부리며 상대를 봐줬다면 머리와 가슴에 구멍이 뚫려 모래먼지로 흩어지는 쪽은 그녀였을 것이다.

“뭐, 내가 이해 안 돼 답답했던 것만큼 저 녀석들도 내가 답답하고 이해 안 됐겠지.”

 유라가 일반론으로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긴장을 풀려는 순간, 뒤에서 강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

 유라는 위기감에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상대에게 주먹을 내뻗었다.

“잠깐 진정…….”

 상대는 무언가 말을 꺼내려 했지만, 유라의 주먹은 이미 닿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제대로 공격이 통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라의 낯빛은 흙색이 되었다.

“으, 으아아아아! 저, 정주리 대공! 괘, 괜찮아!?”

 직전에 상대를 알아보았지만 힘의 발동을 멈출 수 없었던 유라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불길이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 자수정의 대공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주리는 손으로 막아낸 유라의 주먹을 놓아주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마라. 다행히 옷의 보호기능 덕분에 살았다.”

 물론 이는 거짓말이다. 지금 그녀들이 입고 있는 옷은 관리기구의 수행원 정복. 이것은 평소 주리가 걸치는 흑금강의 드레스와는 비교 자체가 직녀에게 실례가 될 만큼 기능이 형편없었다. 즉, 주리가 무사한 것은 순전히 본인의 상승된 기량 덕분인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유라가 살짝 볼을 부풀렸다.

“……무사한 건 다행이지만, 좀 자존심 상하네.”

 방금 전 세계변혁위원회의 신도들을 삽시간에 잿더미로 만든 불길의 배 이상은 될 위력의 공격을 받고도 주리의 몸에는 흠집 하나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평범한 재질로 만들어진 수행원 정복마저 그을린 구석 하나 없었다. 아마도 주리의 한계칙이 작용한 것이리라.

 하지만 이는 당연한 결과라 해야 할 것이다. 13번째 성흔聖痕과의 싸움에서 진정한 법칙의 해석을 이루어낸 주리는, 그 뒤로도 비약적으로 성장해 지금은 세계적인 강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수준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 존재감에 본능적인 위협을 느낀 유라가 자신도 모르게 공격을 해버릴 정도로.

 다만, 세상에는 아직 주리가 백기린 집사장의 보호 아래 무력했던 시절의 허수아비 대공으로 알고 있는 자들도 많다. 지금 수정계곡의 번영이 지속되는 것은 동일하게 아메트린의 칭호를 받은 노연주 대공의 우수함 덕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주리의 진짜 실력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유라는 위축되는 기분을 떨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밖은 다 정리한 거야?”

 하나마나한 질문이었지만, 주리는 성실하게 답했다.

“음, 일단 제압은 했다. 하지만 쓸 만한 정보를 가진 녀석은 없더군. 유라, 그대는 어떻지? 성과가 있었나?”

“어, 그게…… 특별히 없었어. 다 죽이고 마는 바람에……. 기껏 날 먼저 보내 줬는데……. 미안해!”

 유라는 난처해하며 머리를 긁다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지상입구에는 지하신전보다 훨씬 더 많은 신도들이 강력한 무기를 들고 진을 치고 있었다. 주리가 그들을 전부 떠맡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포로 하나 생포하지 못한 자신에게 유라는 새삼 한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군. 어쩔 수 없지. 너무 마음에 둘 것 없어. 오히려 주경대 이상으로 무장한 세력을 섬멸한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다.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

 주리는 잔뜩 움츠러든 유라에게 격려의 말을 보내주었다. 자수정의 귀인은 결코 자신을 기준으로 타인을 멋대로 재단하는 오만한 우는 범하지 않았다. 사람은 각자 할 수 있는 일이 다르다. 중요한 것은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리라.
 그래도 유라는 임무에 실패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저기, 혹시 내가 발목만 잡는 거 아냐? 사실 여길 제압하는 것도 너……가 아니라 대공 혼자 충분히 가능했을 거 아니야. 그랬다면 내가 죽인 사람들에게서 무언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유라가 입에 발린 말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주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부정했다.

“이 상황만 보자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여기보다 규모가 더 큰 곳이라면 어떨까. 인원이 더 많은 곳이라면? 어떤 급한 일이 연달아 동시에 발생한다면 어떻지? 다른 사람들처럼 내 능력에도 분명한 한계가 존재해. 모든 일을 나 혼자 다 대처할 수는 없어. 그대는 이미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고, 앞으로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괜한 생각으로 자신을 비하할 것 없어.”

“……응. 고마워.”

 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 사실 마음속으로 온전히 납득한 것은 아니지만, 이 이상 푸념을 늘어놓아봤자 단순히 어리광에 지나지 않으리라. 그럴 시간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진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스리고 정진하는 편이 낫다는 게 유라의 사고방식이었다.
 주리는 혹시라도 단서가 될 만한 게 있는지 지하신전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말이 나온 김에 나도 하나 묻고 싶군. 유라는 왜 날 따르겠다고 나선 거지?”

 교대시기를 맞아 1년 동안 대공직에서 자유로워진 주리는 자신의 행방불명된 가신들을 찾아 전세계를 떠돌 작정이었다. 당연히 힘든 여정이 될 테고 안전도 담보할 수 없어 본래 주리는 이번에 수행원은 그 누구도 대동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데, 놀랍게도 유라가 함께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아, 역시 내가 걸리적거리는 거야? 그렇다고 말해주면 나도 더 이상은…….”

 아직 자신감을 회복하지 못한 유라의 말을 황급히 막으며 주리가 명확히 속뜻을 밝혔다.

“아니, 절대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다! 음, 이건 내가 표현이 나빴군. 오히려 그 반대다. 왜 아무것도 득이 될 것 없는, 내 수행원을 자처한다는 손해 보는 역할을 굳이 맡았냐는 뜻으로 물은 거야. 물론 내게는 고마운 일이지만, 유라 입장에선 그대로 수정계곡에 남아 오랜만에 그대의 주군과 쌍둥이 동생과 회포를 푸는 편이 낫지 않느냐는 것이지.”

“아, 그거라면…….”

 유라는 살짝 밝아진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수정궁에서 시녀장 수업을 받는 게 지루했던 것도 있고, 메어리가 어느 정도 회복한 것도 있고, 그 때문에 루가 나한테서 떨어져 좀 섭섭한 것도 있고, 연주랑 세라가 뭔가 둘만의 비밀이 생긴 것 같아 좀 소외된 마음이 드는 것도 있고,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긴 하지만…….”

 두서없이 푸념에 가까운 말을 늘어놓던 유라가 갑작스레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마무리를 지었다.

“그게, 너…가 아니라 정주리 대공에게 배우고 싶어서 말이야.”

“내게?”

“응. 전에 나한테 그렇게 말했잖아. 차후 연주가 단독으로 대공 자리에 오를 때를 대비해 시녀장 임무도 숙지해 두라고. 그렇다면, 연주가 대공직에서 물러날 때를 대비해 다른 것도 이것저것 배워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자신의 머리카락만큼이나 새빨개진 유라를 향해 주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계속해서 모범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지.”

 이런저런 이유를 덧붙이긴 했지만, 결국 유라의 말은 주리를 인정하고 함께 있고 싶다는 뜻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성격이 직설적이고 타인의 감정에 둔한 면이 있는 주리는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납득했다.
 유라는 쑥스러운 기분을 감추기 위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 그나저나 정말 이 광신도들을 두드려서 사라진 사람들을 찾을 수 있는 거야? 연우나 단 녀석은 몰라도, 집사장 영감이 이런 것들에게 당할 것 같지는 않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현재로선 마땅한 단서가 이들밖에 없다. 또 평신도들과 달리 위원회의 고위 간부 중에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실력자가 있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주리는 반쯤 녹아 바닥에 굴러다니는 백금총에 눈길을 주며 말을 이었다.

“주경대나 그에 준하는 무력기관만이 소지가 허락되는 장비가 이렇게 대량으로 공급되고 있는 걸 보면, 이들의 배후에는 분명 어떤 거대한 세력이 도사리고 있을 테지. 그들의 존재가 우리 가신들의 실종에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일 테고. 지금은 가는 줄기부터 더듬어 나무기둥에 도달하는 수밖에 없다.”

 자수정의 대공은 일부러 생물에 연관된 비유를 들어 상황을 설명했다. 이는 그만큼 그녀가 은연중 가신들의 실종에 관여한 존재들에 대해 깊은 혐오와 적의를 품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유라는 턱으로 손을 가져가며 동의했다.

“하기야 무작정 서두른다고 안 될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 차근차근 안 될 일을 될 일로 만드는 게 우선이겠네.”

“알아주니 고맙군. 그럼 오늘은 돌아가서 충분히 쉬자. 내일은 또 다른 지부를 향해 떠나야 하니까. 아무래도 그쪽은 간부급 인사가 있다는 모양이니 조금은 기대해도 될 것 같더군.”

“뭐야, 벌써 위쪽에서 정보도 캐낸 거야? 으, 진짜 나 필요한 거 맞아? 너……대공 혼자서 다 해도 될 것 같은데…….”

 다시 침울해지려 하는 유라에게 주리는 진중하게 말했다.

“필요해. 난 틀린 말은 할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아. 반복되는 말이지만, 아무리 잘난 인물이라도 혼자서는 금방 한계가 드러나지. 애당초 난 그렇게까지 잘난 인물도 아니고. 그보다 내 쪽에서 하나 요청하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뭔데?”

“정 입에 익지 않으면 그냥 ‘너’라고 부르거나 이름으로 불러. 날 존중해 주려는 마음은 고맙지만, 불필요한 격식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지. 공식석상에서만 조심해주면 충분해.”

“아, 그건……. 정말, 그래도 돼?”

 아까처럼 빨개진 얼굴로 묻는 유라에게 주리는 미소로 화답했다.

“물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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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6.09.24 14:20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역시 어떠한 소중한 존재의 상실로 인하여 텅 비어버린 자리는, 어느사이엔가 그에 상응하는 무엇인가로 채워지기 마련인 것일까요.

    우수하기로 소문난 노연주 대공 일행 중에서도 특히나 진솔하고 따스한 성정을 지닌 유라가 주리의 곁을 자처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확실히, 일견 조용하고 지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냉혹한 세라보다는 그녀 쪽이 수정 계곡의 사람들에게도 잘 어울릴 듯 싶어요. :D

    덧 - 다시금 펼쳐지는 그와 그녀들의 대여정! 역시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오기 마련이군요. 후후... 이번 화에서는 불가항력적인 현실의 부조리와 그렇기에 더욱 달콤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었을 거짓된 구원의 이야기가 가슴 아프게 다가왔네요.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6.09.26 07:07 신고 address edit/delete

      어떤 참사가 일어났을 때 신이 진짜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보다는, 살아남은 이들과 그 유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한 시사 만화가의 말마따나, 사실 불행을 당한 이들이 기도하고 구원을 찾는 것에 냉정하게 이성의 칼날을 들이대는 것은 난폭하고 적절치 못한 면이 많지요...

      다만, '종교가 위로하는 힘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리처드 도킨스의 지적이나, 중환자 대기실에 있을 때, 수많은 불행한 이들의 간절한 기도가 조금도 통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많이 생각이 바뀌게 되었네요...

      가령 아직 돌도 안 된 것으로 보이던 어린 아기가 뇌수막염인지 머리에 큰 병을 앓아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젊은 부부가 지극 정성으로 병원을 오가며 매일 같이 새벽기도도 나갔지만, 결국......

      그런 모습을 보다 보니 아주 냉정하게 말하자면, 기도할 시간에 미래를 대비해 무언가를 하든지, 아니면 하다못해 본인 건강을 위해 푹 쉬거나 운동이라도 하는 편이 진짜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의 내용은 그런 면이 반영된 것도 있네요.


      오랜만에 등장한 그녀들의 이야기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점점 연재할 여유가 부족해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힘낼 수 있는 데까지는 힘내고 싶은 마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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