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툴바

푸른 종이 울리는 밤

블로그 이미지
Credens justitiam 절찬리 정진
by 안단테♪








(본편의 소설과는 별로 상관없는 인용)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한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분명 누군가의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추억이 되어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허나 그 또한 머지않아 사라져간다. 그러니 사람은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고 생각한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잊을 수 없도록…….

- J.C.STAFF, 그 여름에서 기다릴게 12화 中 -










■■■








01. 거짓된 소년 / 진실된 소녀 (3)


 나는 1년 전에 죽었다. 홍옥루(紅玉樓)의 성채석(星彩石)은 성흔(聖痕)의 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것은 곧 존경하는 대공을 따르는 힘없는 공주민(公州民)들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결과가 되었다. 사람들의 터전으로 쇄도한 성흔(聖痕)은 세계비보관리기구(世界秘寶管理機構)의 손에 의해 소멸되었지만, 홍옥루 거주구역의 약 1/5은 궤멸상태에 빠졌으며 나 또한 그 때 무사하지 못했다.

 허나 여동생 연희는 그런 오빠의 한심한 결말을 용납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동생은 죽은 나의 가슴을 열고 심장석을 꺼내 꿀꺽 집어삼켰다. 그렇게 내 영혼은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전에 의식만이 동생의 몸속에 안착하게 되었다.

 아주 작은 영혼의 파편만이 간신히 동생에게 기생하여 살고 있는 내게는 신체운영의 실질적인 주도권이 없다. 동생의 손짓 하나에 의식교체가 자유자재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향을 떠난 이래 일이나 노숙 등은 전부 내가 도맡아하는 반면에 동생은 맛난 것을 먹을 때나 편안한 잠자리에 누울 때만 나서는 경우가 반복되고 있다. 한 마디로 동생은 인생의 단물만 빨고 있는 것, 실로 재주는 지우(나)가 넘고 돈은 연희(동생)가 챙기는 셈이다.

 동생이 왜 내 영혼을 붙잡아두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홀로 남는 게 쓸쓸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단지 부려먹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물론 점점 후자 쪽의 의심이 더 강해지고 있다는 건 동생에겐 말할 수 없는 비밀이다.

 그래도 난 동생에게 감사한다. ‘새파란 풀밭을 맨몸으로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잠깐이나마 죽은 천신(天神)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있는 나로서는 어떤 식으로든지 생을 실감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죽은 뒤의 천국이니 낙원이니 이상향이니 하는 것들은 전부 환상이다. 직접 다녀온 내가 단언할 수 있다. 죽음은 그냥 허무하고, 끔찍하다.
 …하지만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는 말처럼 역시 이럴 때는 동생이 조금 원망스럽기도 하다.

“그럼 시작해볼까. 솔직하게 대답하면 별 탈 없이 두 발로 서서 나갈 수 있을 거야.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만.”

 단이라는 이름의 은발소년이 날카롭게 노려보며 말했다. 명백히 상대를 위압하는 매서운 눈초리. 겁이 많고 마음이 여린 나는 그저 어깨를 움츠리며 벌벌 떠는 수밖에 없다.

「연희야, 쟤 좀 어떻게 해봐! 으, 왜 대답이 없니…….」

 숲에서의 사건이 있은 직후, 나는 눈이 가려진 채 어디론가 끌려왔다. 눈을 가린 안대가 풀리자마자 펼쳐진 광경은 독방이나 다름없는 자그마한 석실과 의자 두 개. 명백히 퇴폐적인 귀족들이 수상쩍은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는 고문실 따위를 연상시키는 장소였다. 이곳에서 불안에 떨며 하룻밤에 보낸 후에야 비로소 저 은발소년이 찾아와 질문이 시작된 것이다.

 역시 이들은 주경(州警)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이 독자적으로 일을 처리할 생각인 것 같다. 사태가 커지지 않는다는 점은 환영할 만 했지만, 정작 중요한 동생이 아까부터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으니 곤란하기 짝이 없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탈출은커녕 여차할 때 몸을 지키기도 벅찰 텐데 걱정이다. 그러니 일단 사소한 질문은 순순히 대답해 불필요하게 상대를 자극하는 일은 피하는 게 좋으리라.

“우선 이름이 어떻게 되지?”

“호, 홍연우… 연우라고 해요.”

 ‘연우’라는 이름은 동생 ‘연’희와 나 지‘우’의 각각 앞뒤 글자를 따서 만든 가명이다. 홍옥루를 떠난 이후로는 줄곧 이 이름을 대왔다. 더 이상 우리 남매는 자신 있게 본명을 밝힐 수 없는 처지에 빠졌기 때문이다.

“출신지는 어디야. 아니, 물어볼 것도 없겠군. 그 머리색과 천박한 차림새로 봐선 홍옥루가 분명하겠지.”

 은발소년 단의 목소리에는 독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어떤 사람의 출신을 알아보는 데에는 해당지역 산출석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머리카락이나 눈동자의 색깔을 확인하는 것 외에도 복식을 살펴보는 방법이 있다.

 홍옥루는 오래 전부터 황금산(黃金山)과 교류가 지속돼 경제적인 면뿐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면에서도 영향을 깊게 받아왔다. 황금산은 상당히 부유한 공주(公州) 중의 하나로서 자유분방한 기풍과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중시한다. 그 때문에 옷차림 또한 감각적인 멋이나 활동성을 우선하는 경향이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내 동생의 사복(私服)은 길이가 짧아 다리를 훤히 드러내고 있는 옷이었다. 격식을 중요시하는 수정계곡에서는 보통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모습이리라. 허나 동생은 타인의 기준에 스스로를 맞출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언제나 얼굴을 붉혀야 하는 건 나다.
 짧은 치마를 입는 남자라니… 정신건강을 위해 사고를 정지합니다.

“처, 천박하다니 말씀이 너무 지나치시네요! 그냥 짧을 뿐이잖아요!”

 원래는 가만히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지만, 이렇듯 멋대로 입이 열렸다. 일시적으로 의식을 조종하고 있는 건 나일지라도 결국 이 몸의 주인은 동생, 당연히 나에 대한 모독은 동생에게 이어지는 셈이 된다. 특히 외견에 대한 것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는 일. 잠자코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무력한 내 항의의 목소리는 아주 간단히 경멸당했다.

“그게 바로 천박하다는 거다. 속살을 함부로 보여주는 것은 자유와 개방이라는 명목 아래 수치를 잊은 황금산 놈들의 못된 풍습 중 하나지. 홍옥루 또한 그 마수에 사로잡혀 갈 데까지 갔다고 들었는데, 과연 소문에 거짓은 없었던 모양이군.”

“으에…….”

 어쩌면 이리도 보수적일 수 있을까. 수정계곡 사람들이 꽉 막힌 부분이 있다는 건 지난 며칠 동안 종업원 생활을 하면서 얼마간 실감한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통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한데 이런 공주(公州)에도 추행범이 있는 걸 보면 문제아는 어느 사회나 존재하나 보다.
 그는 석실조명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자신의 은발을 만지작거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이런 건 다 사소한 일이다. 어찌 되건 상관없어. 정말 중요한 문제는 네 녀석이 우리 아가씨를 납치하려 했다는 거야. 좋게 말할 때 솔직히 목적과 배후를 불어!”

“아니, 아직도 그 소린가요!? 오면서 설명했잖아요. 전 그냥 쓰러진 당신네 아가씨를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세웠을 뿐이라고요!”

 지금 은발소년이 날 취조라도 하듯이 폼을 잡고 있긴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아까 이곳에 오는 도중에 집사장이라 불린 노신사에게 설명을 마쳤다. 물론 우리 남매의 비밀에 관련된 건 밝힐 수 없어 몇 가지는 불분명하게 둘러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전부 사실만을 말했다.
 그럼에도 그 집사장이라는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난 이 갑갑한 돌방에 갇혀 단이라는 소년에게 심문이나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정말 부조리하고 또 부조리하다.

“오호라, 어쩐지 한기가 들어 발걸음을 옮기니 마침 아가씨가 돌인형을 거의 다 해치우고 힘이 다하는 모습을 운 좋게 딱 목격했다는 말을 믿으라고… 스스로 변명하면서도 억지로 끼워 맞춘 티가 팍팍 난다고 생각하지 않냐?”

“사,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해요!”

 이야기에 구멍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 그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돌인형을 감지했다거나 심지어 단숨에 분열칙(分裂則)의 망자를 물리치기까지 했다는 사실은 천연석인 동생의 능력이 없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 부분을 대충 얼버무리니까 당연히 흐름이 엉성해지고 의심을 받는 것이다. 허나 사실을 밝힐 수 없는 이상 이대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다.
 단 소년이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사람을 아주 호구로 아는군. 한 가지 좋을 걸 가르쳐줄까? 비록 일순간이지만 난 아가씨가 계셨던 방향에서 높은 불길이 치솟는 모습을 봤다. 근데 우리 아가씨의 법칙에선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없지. 설령 돌인형이 진짜 그 자리에 있었다 하더라도 방금 네놈의 입으로 그 괴물은 ‘분열칙’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그 불길은 과연 누가 일으킨 걸까? 응?”

“윽…….”

 설마 동생의 염화(炎火)를 봤을 줄이야. 안 돼. 이러면 갈수록 톱니바퀴가 어긋난다. 적당한 말로 의심을 떨쳐내기에는 은발소년의 지적이 너무 예리하다.
 그의 눈매가 점점 가늘어졌다.

“내가 대신 대답해줄까? 당연히 그건 네 힘이다. 그래, 돌인형은 그 자리에 있었고 아가씨가 그것과 싸우시는 걸 봤다는 네 말은 사실일지도 몰라. 그 부분이야 천만다행으로 아가씨가 무사하시니 나중에 깨어나신 후 여쭈면 될 일이다. 허나 아가씨가 힘을 전부 소진하신 이유가 돌인형 때문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습격을 받은 탓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 습격자가 내 눈앞에서 시치미를 떼고 있는 여자가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 있지? 어디 한 번 반론을 들어보고 싶군.”

“으…….”

 자세한 내막을 입에 담을 수 없는 내 입장에서는 분하게도 반박하기 힘든 추론이다. 그 불길이 목격된 이상 어찌 손쓸 방도가 없다. 동생의 정체, 정확히 말하자면 내 정체는 끝까지 감추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심장석을 취해 한 몸에 둘 이상의 법칙을 상존시키는 행위는 세계비보관리기구(世界秘寶管理機構)가 혐오하는 최대의 금기다. 그런 짓을 허용했다가는 세상이 타인의 법칙을 강탈하려는 살인광들로 넘쳐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사회의 붕괴에 직결되는 첫걸음이기에 기구는 지나칠 정도로 타인의 영혼을 취하는 행위에 엄중한 제재를 가한다. 우리 남매가 이름을 바꾸고 정든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것 또한 익숙한 이웃들에게 동생이 날 먹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

 이제 남은 건 묵비권 행사뿐. 그나마 동생이 앞에 나서 있다면 불길에 관련된 법칙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속이는 수도 있겠고, 정 수가 틀리면 다 뒤엎고 도주하는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무력한 내게는 어느 쪽도 불가능하다.

“그러냐. 좋은 말로 해선 입을 열지 않겠단 거군.”

“……!”

 또 다시 사방에 출현하는 수십의 검. 이번에는 공간이 좁은 만큼 꼭 살인고문기구속이라도 들어와 있는 오싹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 감각은 크게 어긋난 것이 아니었다.

“죽이지 않고도 고통을 주는 방법 같은 건 얼마든지 있다. 침묵이 결코 미덕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지.”

 아무리 결심을 굳게 해도 이 상황에서 초연하기란 무리였다.

“뭘 그렇게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있나요!? 설마 그런 취향의 변태……!”

“아, 아니야! 누가… 누, 누가 변태냐! 난 그저 아가씨를 위해 충실한 것뿐이다!”

 윽, 진심으로 부정하는 게 진짜 긍정하는 진심으로 보여서 몽골이 송연하다. 저 사람, 분명 무엇이든지 아가씨를 위해서라고 말하면 합리화가 된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거겠지. 이런 가학행위 도착증 환자에게 고문살해 당하는 비참한 미래만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피하고 싶다.

“누, 누가 도착증 환자냐! 당장 그 말 취소 못해!?”

 아차, 또 마음의 소리가 새어나갔나 보다.

“누가 좀 살려줘요! 고문당해 죽겠어요!”

 결국 자기 힘이 미치지 못하면 주위에 도움을 구해야 하는 게 사람의 슬픈 숙명이다. 적지(敵地)나 마찬가지인 이곳에서 과연 얼마나 내 비명이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뭐든지 해보는 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당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시시, 시끄러워! 남들이 오해한다고! 자꾸 그러면 진짜 죽인다!”

 허둥거리는 단 소년. 최소한 그에게는 어느 정도 통하는 것 같다.

“그만하세요. 천신(天神)께선 말씀하셨습니다. 「절제하라. 지나친 욕망의 해방은 그대와 그대의 이웃을 망치리니」라고. 타인의 비명에 즐거워하는 일은 결코 바람직한 취미생활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 때 석실의 문을 열고 불쑥 나타나 폭주하기 일보 직전인 은발소년을 말린 구원의 손길은 물결치는 금발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이 금발금안(金髮金眼)의 여성은 자수정의 소녀가 입고 있었던 흑금강의 옷보다 약간 짧은 기장의 나비날개를 연상시키는 옅은 푸른색의 장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히 상식에 벗어나는 차림이 아니라 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황금산의 천연석이 여기에…….”

 수정계곡과 황금산은 여러 정치적인 역학관계 때문에 대대로 험악한 역사를 쌓아왔다. 그런 황금산의 귀인이 수정계곡의 복장을 하고 스스럼없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위화감에 중노동을 강요하는 것과 동위에 있다. 게다가 천신 운운하는 건 또 무슨 질 나쁜 농담일까? 허나 지금은 의문에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메어리! 멋대로 나타나서 멋대로 오해하지 말라고! 어째서 황금산 놈들은 이렇게 하나 같이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하는 거지… 아무튼 모든 건 오해다! 난 정상이야!”

 단 소년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금발금안의 여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천신(天神)께선 말씀하셨습니다. 「그대, 속이지 말지어다. 하나의 거짓은 열의 거짓을 낳는 법이니」라고.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세요.”

“아, 진짜 그런 거 아니라고! 그리고 방금 전에는 욕망을 절제하라며? 왜 말이 바뀌냐!”

 메어리라 불린 여성은 은발소년의 지적에 잠시 숨을 삼켰다가 재차 말을 이었다.

“…천신(天神)께선 말씀하셨습니다. 「악(惡)이란 넘치거나 모자라는 것이다」라고. 이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되 그 표출은 적당히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단 소년은 은발의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소리 질렀다.

“그 빌어먹을 말도 안 되는 천신타령…! 됐으니까 어서 용건이나 말해! 설마 나한테 싸움 걸려 온 건 아닐 테니.”

“아가씨가 깨어나셨습니다. 이 소녀를 데려오라 하시더군요.”

 금발여성의 말에 난 안도와 우려를 동시에 느꼈다. 자수정의 소녀가 무사히 정신을 차린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좋은 일이다. 허나 그녀는 내 가속칙(加速則)뿐만이 아니라 동생의 힘 또한 목격했다. 그녀가 우리 남매의 정체를 눈치 챘을 가능성은 적지 않다.

“후우, 아가씨 명령이라면 어쩔 수 없지. 쳇, 조금만 더하면 이것저것 캐낼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군.”

 혀를 차는 단 소년의 염장을, 메어리는 간단하게 질러버렸다.

“역시 이것저것 하지 못한 게 아쉽습니까? 하지만 천신(天神)께선 말씀…….”

“아, 그만! 젠장, 너 빨리 일어나. 아가씨를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냐!”

 괜한 불똥이 내게 튀었다. 왠지 앞으로도 계속 평탄치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몸이 떨려온다. 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 걸까. 뭘 뻔한 질문을. 오지랖 넓게 다른 사람에게 참견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지. 순간 동생의 한숨이 귓가에 들린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백수정의 기둥, 정결하게 다듬어진 대리석의 회랑, 은은하게 어둠을 밝히는 형석(螢石)의 등불… 가히 ‘수정궁(水晶宮)’이라는 명칭이 부끄럽지 않은 이 장엄한 건조물의 위용이 날 압도한다. 아까 그 답답한 석실은 이곳의 창고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자수정의 소녀가 지친 몸을 쉬고 있는 곳은 이 궁전에서 가장 침착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적당한 크기의 방이었다. 녹옥수(綠玉髓)의 실로 짜인 부드러운 장막이나 몇몇 연옥(軟玉)의 장식을 제외하면 딱히 필요 이상으로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화려함은 찾아보기 힘든 장소였다.

“고맙다. 그대 덕분에 살았어.”

 자수정의 소녀는 내가 들어오자마자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 감사의 인사부터 건넸다. 최악의 경우 당장 세계비보관리기구(世界秘寶管理機構)로 끌려가 대법정에서 사형판결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내 불안감은 고맙게도 망상적인 기우로 사라졌다.
 나는 말을 더듬으며 답했다.

“화, 황송합니다. 대, 대공 대행 님…….”

 이곳으로 오는 동안 집사장인 노신사에게 자수정 소녀의 신상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들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10년 전에 타계한 대공(부친)의 뒤를 이어 줄곧 그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즉, 그녀는 단순히 대공(大公)의 여식인 정도의 존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대공 본인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새삼스럽게 그녀의 높은 신분을 실감한 나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허나 그녀는 내 어색한 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행이란 호칭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내 이름은 정주리.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편하게 부르도록 해.”

 그러니까 그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선’이라는 게 무진장 알기 힘들답니다. 솔직히 어설프게 베푸는 관용만큼 골치 아픈 것도 없다고요.
 허나 그 사실을 지적할 용기가 없는 나는 무난한 표현을 빠르게 검토했다.

“그, 그럼 주리 아가씨라고…….”

“흠, 좀 더 친숙하게 불러도 괜찮은데… 비록 희미하다고는 해도 그대가 날 구해주었다는 사실은 기억 속에 확실히 남아있어. 그리고 난 생명의 은인에게 지나친 허식을 강요할 정도로 속이 좁은 인간이 아니야.”

“아, 아니에요! 지, 지금만으로도 전 만족하답니다. 오히려 과분할 정도에요!”

 아가씨의 뒤에는 과분해하지 않으면 나중에 두고 보자는 기세로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 사람도 있고 말이야. 애당초 대공(대행) 님과 유쾌하게 말을 틀 정도로 내 배짱은 크지 않다. 동생이라면 가능하겠지만 난 무리다. 응, 절대 무리야.

“그래… 그대가 그걸로 좋다면야…….”

 어, 어째서 어두운 안색으로 말끝을 흐리는 걸까. 혹시 진짜 친구처럼 살갑게 말을 거는, 뭔가 재치 있는 반응을 기대한 걸까? 죄송합니다. 좀 봐주세요. 전 그렇게 재미있는 인간이 아니랍니다. 반복하는 말이지만 제게는 목숨 걸고 왕에게 조롱으로 간언하는 어릿광대 난쟁이 같은 용기도 없고 말이에요.

 뭐, 아무튼 자수정의 소녀… 주리 아가씨의 기억이 온전치 못해 살았다. 법칙의 무리한 사용으로 탈진한 사람의 기억에 일부 혼란이 오는 경우는 그리 드물지 않다. 솔직하게 검은 속내를 드러내자면 이 주리 아가씨가 당시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리라는 기대 또한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정확히 동생이 구해준 사실은 어렴풋이나마 잊지 않고 있다니 이 얼마나 행운인가! 이제 은발소년이 본 불길에 대한 의혹만 어떻게든 잘 넘기면 되는 것이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혹사시키는 동안 갑자기 주리 아가씨가 반쯤 몸을 일으킨 채로 고개를 숙였다.

“내가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가신들이 그대를 구속하는 무례를 범한 모양이더군. 본의 아니게 은혜를 원수로 갚게 된 점, 진심으로 사과한다. 허나 그들도 어디까지나 날 위한다는 마음으로 지나치게 앞섰을 뿐, 그대에게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걸 믿어줬으면 좋겠어. 모든 건 내 불찰이니 부디 화살은 나 혼자에게만 돌려줬으면 해. 물론 이 부분에 대한 보상도 확실하게 하지.”

“아, 아니… 저, 정말 괜찮아요! 만약 저도 반대 입장이었다면 똑같이 의심했을 거예요.”

 이건 거짓 없는 말이다. 사실 당자사인 내가 개인적으로 억울할 뿐, 객관적으로 보자면 저들의 대처에는 크게 잘못된 점이 없다. 오히려 적일지도 모르는 상대를 상당 부분 정중하게 대해줬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동생이 날 말린 것은 정체가 발각될 위험성 외에도 이런 골치 아픈 오해에 휘말릴 가능성을 예측했기 때문이리라.

“맞습니다. 아가씨가 이런 여자에게 고개를 숙이실 필요 따윈 없어요! 사실 아직 모든 의혹이 해소된 것도 아닙니다.”

 단 소년의 외침. 세상에서 가장 달갑지 않은 동의가 들어왔다. 모시는 분이 저자세로 나가는 상황이 못마땅한 심정이 이해가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냥 이쯤에서 넘어가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주리 아가씨가 눈살을 찌푸렸다.

“의혹? 어떤 의혹을 말하는 거지?”

 발언의 기회를 얻은 단 소년의 눈이 빛났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홍옥루의 이방인이 왜 이 밤중에 계곡 바깥의 숲속을 배회하고 있었냐는 점입니다. 우리들이야 호기심에 숲으로 나간 아이들을 수색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발걸음을 옮긴 것이라 해도 보통 밤중의 숲속이란 자연물이나 돌인형에 대한 위협 때문에 대부분 접근조차 꺼려 하는 곳이지요.”

 뜻하지 않는 곳에서 의문이 풀렸다. 나야말로 왜 주리 아가씨 일행이 심야의 숲속을 헤매고 있었는지 궁금했는데 설마 아이들을 찾기 위해서였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이유였다.

 물론 아직 자연물이나 돌인형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아이들이 호기심 때문에 어른들의 주의를 무시하고 경계 바깥으로 넘어가 봉변을 당하는 사건은 홍옥루에서도 종종 벌이지는 일이다. 허나 그 수색을 주경(州警)이나 가신들에게만 맡겨두지 않고 대공(대행) 본인이 직접 나서는 모습을 난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정말 이 아가씨는 나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확실히 말하도록 해. 난 돌려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주리 아가씨의 재촉에 단 소년이 회심의 표정을 지었다.

“즉, 저 여자는 황금산, 혹은 황금산과 연결된 홍옥루의 간자(間者)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는 수정계곡의 정문을 통하지 않고 일부러 그런 곳에서 서성거릴 이유가 없지요. 어쩌면 처음부터 아가씨를 납치하는 등의 목적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고요.”

 내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엉터리 추리지만, 이 또한 객관적으로 봤을 때 상당 부분 정합성은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단속에 걸려 공동 집합소로 끌려가는 게 싫다고 해서 바깥으로 나와 잠을 청하는 노숙자 따윈 없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자연물은 물론이거니와 돌인형의 습격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동생이야 압도적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상관없지만, 보통은 고작 잠자리 하나에 목숨을 걸진 않는다.

 그에 더해 우리 남매가 홍옥루 출신이라는 점도 의심 받기에 충분한 요소였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처럼 반대로 적의 아군은 적이라 볼 수 있다. 수정계곡과 전통적으로 갈등이 있는 황금산과 사이가 좋은 홍옥루. 그곳 출신의 사람이 수상쩍은 거동을 보인다면 오히려 의심하지 않는 편이 어려울 것이다.

“음, 은인에게 의심의 화살을 돌리는 건 괴로운 일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단의 말 또한 일리가 있군. 거듭 무례를 범하게 되어 면목이 없지만 부디 그대가 이 자리에서 의혹을 해소해주었으면 좋겠어. 부탁해도 될까?”

 주리 아가씨는 공과 사의 경계에서 난처해하면서도 결코 양자를 혼동하지는 않았다. 난 오히려 그런 아가씨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다행히 우리 남매가 거기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단 소년이 목격한 불길보다는 해명하기 쉬운 편이기도 하다.

“무례라니 당치 않은 말씀이세요. 오히려 제가 오해 받을 만한 행동으로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는 게 잘못이지요.”

 비록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저쪽 단 소년의 눈빛이 ‘알긴 아는군. 하지만 넌 오해가 아니라 진짜 나쁜 놈이잖아. 해명할 수 있으면 어디 해보시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런 소리 없는 잡음은 무시하고 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좀 우울한 이야기가 되더라도 이 기회에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1년 전에 집과 가족을 전부 잃었습니다. 익숙한 거리가 파괴되고 친숙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끔찍한 광경을 눈앞에서 봐야 했지요.”

 될 수 있으면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 때의 일은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쩍쩍 금이 가고 만다. 그러는 와중에 일부의 사실을 감추는 것으로 거짓을 완결해야 하다니, 정말 못해먹을 짓이다. 하지만 살기 위해선 해야 하는 짓이기도 하다.
 주리 아가씨는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하는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1년 전이라… 분명 그 때 홍옥루에…….”

“성흔의 습격에 성채석이 패해 많은 사람들이 죽은 바로 그 일입니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집사장이 아직 기억이 혼란스러운 주리 아가씨에게 살짝 귀띔을 해주었다. 주리 아가씨의 표정이 “아……!”하면서 더욱 어두워졌다.
 나는 그 변화가 신경 쓰였지만 지금은 이야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관리기구의 지원 덕분에 거리는 금세 복구되었고 새로운 성채석도 선정이 되었어요. 하지만 한 번 부서진 일상은 그저 물질적인 회복만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더군요. 어디를 둘러봐도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오르는 탓에 결국 저는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요.”

 이는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분명 방랑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동생이 내 심장석을 취한 일을 숨기기 위해서였지만 가족과 이웃을 잃은 그곳에 계속 살아가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계기 자체는 단순하다 하더라도 그 계기를 성립시키는 원인은 항상 복합적인 법이다.

 이런 식으로 나는 숨겨야 될 진실만 감추며 이야기를 계속 했다. 1년 동안의 방랑, 기반이 없는 이방인이 겪어야 하는 고생, 최근에 흘러들어온 수정계곡에서의 고생… 동생이 사고를 쳐 가게에서 잘린 일은 대충 손님과 시비가 크게 붙은 것으로 얼버무렸다.

“…그렇게 일자리를 잃어 갈 곳이 없어진 저는 결국 바깥에서 노숙하기로 결심했어요. 숲이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바로 전날에 추행사건을 당하고 나니 집합소에서 사람들과 마주치기가 두렵게 느껴지더라고요. 지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당연히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당시에는 차라리 죽더라도 바깥에 나가는 편이 낫다고 여겼어요. 그러다 주리 아가씨가 돌인형과 싸우시는 모습을 보게 된 것으로… 어, 어라?”

 이야기가 거의 완결되어 가는 무렵 무심코 주위를 돌아보니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 같이 침통했다. 주리 아가씨는 왠지 울음을 참고 있었으며, 메어리는 살짝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집사장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심지어 단 소년마저 어딘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째서? 왜? 분명 내가 한 이야기는 그다지 유쾌한 사연은 아니다. 내 입장에서는 정말 끔찍한 불행임에 틀림없다. 허나 스스로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이 정도의 불행은 세상 어느 곳에서나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흔하게 벌어지는 일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마냥 곱게 자란 귀족가의 영애뿐이라면 또 모를까, 대공(대행)의 가신들까지 안색을 굳힐 만큼 특출 난 우울함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런 과잉적인 반응은… 혹시 뭔가 내가 모르는 속사정이 있는 걸까?

“아, 아무튼 그래서 말이죠…….”

“아니, 이만 됐다. 어때, 그대들도 이만 하면 충분하지 않나?”

 주리 아가씨는 손을 들어 어색한 분위기에서도 어떻게든 말을 이으려 하는 날 제지하며 주변에 양해를 구했다.

“예, 주리 님 말씀대로입니다.”

 집사장이 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천신(天神)께선 말씀하셨습니다. 「때로는 무관심이 약이다」라고.”

 메어리도 동의했다.

“단은? 아직 더 의심 가는 일이 있어?”

 주리 아가씨의 물음에 단 소년은 불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아닙니다. 이번 일은 확실히 제가 비약이 심했다고 생각합니다.”

 주리 아가씨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대에 대한 의혹은 다 풀린 것 같군. 다시 한 번 사과한다.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미안해. 날 구해준 감사에 더해 어떻게든 보상하마.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지 말하도록 해.”

 사람은 세상 기본법칙의 성립을 전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왠지 몰라도 잘 돌아가고 있는 일에 괜한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유의 규명은 나중으로 미루고 지금은 다가온 행운을 붙잡는 데 집중하자.

“아니, 사례라니, 무슨 말씀을… 전 그저 오해가 풀리고 주리 아가씨께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답니다.”

 어떤 걸 부탁할까. 일단 적당한 노잣돈을 받아 다른 공주(公州)로 옮길 채비를 하는 게 가장 무난하리라. 이곳에선 벌써부터 이런저런 일이 많이 있었다. 뭔가 다른 꼬리가 잡히기 전에 빨리 떠나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대체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해야 하는 걸까. 어딘가에 정착하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공주(公州)를 전전해야 하는 인생.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라는 말처럼 동생 몸에 얹혀사는 처지라 해도 한 번 생의 감각을 얻게 되니 슬슬 미래가 걱정된다.

“지나친 사양도 예의가 아니지. 물론 그대도 자신의 선의가 대가로 환산되는 건 내키지 않겠지만 여기선 내 체면을 세워줄 수 없을까. 나도 빚지고는 속이 편하지 않은 성격이라 말이야.”

 마땅한 기반이 없으니 헐벗고 굶주려야 하는 것도 문제지만 길을 이동할 때마다 조우하는 돌인형이나 성흔(聖痕)의 습격에 따른 위협도 만만치 않다. 물론 여태까지는 동생의 힘 덕분에 큰 위험 없이 무사할 수 있었지만 언제까지 그런 행운이 계속될지 알 수 없다. 실제로 지금 동생은 무슨 연유인지 일절 의식 바깥으로 떠오르고 있지 않기도 하다.
 그렇다면 무계획적으로 돈만 받고 길을 떠나는 것보다는 모처럼 한 공주(公州)의 최고 유력자와 맺게 된 인연을 최대한 활용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꼬르륵. 대답하려는 순간 내 뱃속에서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아무것도 속에 넣지 않았지. 너무 긴장한 탓에 허기도 잊고 있었지만 마지막에 조금 마음이 풀어졌나 보다. 지금 같아선 진흙에 버무린 자갈이라도 맛있게 씹을 수 있을 것 같다.

“천신(天神)께선 말씀하셨습니다. 「지나간 끼니는 무용하다. 매번 새로운 끼니에 대비하라」고.”

 엄숙한 메어리의 말에 주리 아가씨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갈수록 귀빈 대접이 변변치 못함이 드러나 면목이 없군. 아무튼 식사부터 하고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으, 하필 말을 꺼내려는 찰나에… 하지만 생리현상을 탓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위기를 기회로 바꿔 살려야 할 때! 차라리 잘 됐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의 진가를 보여줄 때가 온 것이다.

“저, 저기요! 요리는… 제게 맡겨주실 수 없을까요? 아가씨께 꼭 대접해드리고 싶어요!”

 손까지 모으며 간절하게 요청하는 내게 주리 아가씨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지금 그대는 손님이다. 게다가 사례를 해야 될 사람은 주인인 나고. 마음은 고맙지만 손님에게 일을 시킬 수는…….”

 나는 고개를 붕붕 저으며 부연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제 요리를 평가해주셨으면 해요. 만약 드셔보시고 합격점이라면 절 이곳의 연마사로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즉, 내 가신이 되고 싶다는 말이야?”

 나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예, 그게 바로 제가 받고 싶은 이번 일의 사례에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TRACKBACK 0 AND COMMENT 2

TRACKBACK http://garamdong.tistory.com/trackback/235 관련글 쓰기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2/05/13 21:14 address edit/delete reply

    이번 연재분의 서두에서 인용해주신 생의 증명과 그 흔적에 대한 단상(斷想)은 왠지 모르게 이토 준지의 괴담 시리즈 중 꿈속으로 여행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만드는군요.

    확실히, 남다른 업적을 달성하고 또한 그 선량함과 지혜로 칭송받은 현자나 영웅이든, 혹은 반대로 온갖 종류의 비난은 있는대로 몰아받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악인이든지간에 결국 그 사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물리적으로 남아있던 생의 흔적들은 점차 희미하게 사라져갈테니까요.

    어쩌면 어떠한 형태로든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다거나 대중의 인식 속에 각인되는 것이 가장 남는(?) 장사일지도 모르겠어요~ ~_~)y=3



    아, 물론 감상에서 주가 될만한 포인트는 역시 『별세계의 별리』 본문의 내용이라 할 수 있으니 그 부분으로 시점을 전환해서...


    기구한 운명의 흐름에 휘말려 의도치 않은 방랑을 계속하고 있는 연우 자매의 상황이 마침내(?) 새로운 전환의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군요.

    아무리 그래도 부실한 식사와 험한 잠자리는 몸을 상하게 하는 법인데다, 특히나 연희가 젊은 여성이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그로인한 감가상각비상의 손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갈 것이므로...

    비록 이런 저런 오해(?)를 사며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침내 안심하고 기댈 수 있는 일상의 안식처를 얻었다는 점에 기뻐해야하지 않나 싶어요~ :D



    더불어 연희의 경우에는 나름 상당한 능력의 소유자인만큼 고향에서 괜찮은 생활을 영위할 수도 있었을텐데( 심지어는 드높은 가문의 귀한 재녀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 단지 (어떻게 본다면 단지라는 매정한 표현으로 일축할 수없는 소중한 이유일지도 모르지만) 오빠를 구할 수 있다는 대가의 반대급부로써 평상시 영위하던 일상은 물론 그 자신에 대한 희생마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이 남다르게 다가오는 듯 합니다. (뭐 타인의 시점에서는 바보같은 희생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녀 자신에게는 그 것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행복일수도 있으니...)


    한편으로, 지우에게서는 상당한 화술의 재능이 보이는군요.

    주리와 집사장은 물론 고슴도치마냥 경계심을 세우고 있던 단의 마음마저 숙연하게 만들 정도의 호소력이라... 만약 그가 사고로 몸을 잃지 않았고 연애에 관심이 있었다면 꽤나 나쁜(?) 남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
    ㅎ.ㅎ); (퍽!;)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2/05/14 11:27 address edit/delete

      속 편하게 영혼의 존재와 그 불멸성을 믿는다면 별로 고민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 세상에 과연 '자신의 증명'이란 무엇이 되는지 정의하는 일은 참 복잡하고 흥미로운 주제인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페제의 이스칸다르가 역사서에 이름을 남기는 것 또한 일종의 불멸성일지는 모르나, 역시 스스로의 살아있는 육체가 필요하다는 말의 무게도 점점 실감이 가는 것 같네요. (그나저나 이토 준지의 그 에피소드는 아쉽게도 본 적이 없는데, 어떤 내용일지 흥미가 가네요+_+)

      이번 이야기는 각 마을을 떠도는 여행기(?) 식으로 구성할까도 생각해봤지만, 역시 제 기질이 방랑벽과는 거리가 한참 멀기 때문에 결국 정착하는 쪽으로 전개가 굳어지고 말았어요. 문득 진짜 '역마살'이라는 게 낀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할지 궁금해지기도^^;;

      연희의 경우는 말씀처럼 본래는 굉장히 출셋길을 달릴 수 있었던 인재 중 하나였어요. 대대로 별 볼일 없었던 평민 집안에서 갑작스럽게 출현한 돌연변이였기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기대가 컸는데, 예상치 못한 일로 전부 틀어지고 말았지요. 자세한 내막은 차후 전개에서 밝히도록 할게요~

      지우의 경우는 소위 말하는 천연바보 속성의 캐릭터지만, 어설프게 머리가 좋아 무의식적으로 뱃속 검은 짓을 하게 된다는 설정이에요. 굳이 말하자면 자기가 나쁜 짓을 하는 자각이 없으면서도 나쁜 짓을 하는 인물이랄까요^^;;

      이번에도 어지러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소디언 님도 좋은 한 주 보내시길 바래요~^^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222)
잡다한 일상단상 (60)
즐긴작품 떠들기 (56)
환상정원 가꾸기 (88)
타인정원 엿보기 (18)

CALENDAR

«   2012/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