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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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








03. 선택의 순간 (後)


 “왜 마족 어린애가 거리 한복판에 있는 거지……?”

 자신의 허리를 꼭 붙들고 있는 녹색머리 소녀에게 세실리아가 보인 감정은 공포나 혐오 이전에 당혹감이었다. 그녀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이곳은 좀처럼 마물들을 찾아보기 힘든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도서관의 이름을 그대로 딴 이 헤미스피어 시市는, 인류의 세력권 깊숙이 위치하고 있다. 덕분에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도 ‘아직은’ 마물들의 위협이 직접적으로 닿지 않는, 몇 안 되는 안전지대 중 하나였다.
 난 잠시 상황도 살필 겸 우선은 사소한 사항부터 정정하기로 했다.

 “걘 어린애가 아닌데요. 엄연한 요정fairy의 성체에요.”

 “페, 페어리라고……? 그것들, 손바닥에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작은 게 아니었어!?”

 세실리아의 귀여운 오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하하, 소문은 과장이 섞이기 마련이죠. 이미 말했듯이 다 자란 게 저 크기인 데다, 개체의 따라선 더 작은 녀석들도 없는 건 아니니 그런 인식이 생길 수도 있겠네요.”

 “우……. 모를 수도 있지 웃을 것까지야…….”

 내 태도에 마음이 상했는지 세실리아는 살짝 눈을 흘기다 다시 자신의 허리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요정 소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아이, 덜덜 떨고 있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요정 소녀를 걱정하는 세실리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왕군을 용서할 수 없다는 그녀도 역시 이런 작은 아이에게까지 적의를 드러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난 그녀를 이중적이라 비난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적敵을 온전히 적으로밖에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의 적이 아닐까.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거, 생각보다 일이 귀찮아질 수도 있겠는걸.’

 요정fairy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부 ‘여왕’으로 분류되는 극소수의 특수개체를 제외하면 대부분 별다른 마력도 없고 육체적인 힘도 떨어지며 성격마저 소극적인 겁 많은 종족에 불과하니까. 다만 요정들은 정안淨眼이라 하여 선한 존재와 악한 존재를 간파할 수 있는 신비한 눈을 가지고 있다. 표현은 거창하지만 요는 누가 위험하고 그렇지 않은지 본능적으로 민감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는 뜻이다.

 ‘뭐 나보다 세실리아를 고른 건 그렇다 쳐도, 문제는 요정이 위협을 느끼고 도망치게 만든 누군가가 있다는 뜻인데…….’

 불길한 예감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아! 저기 있다! 거리까지 도망쳐 나오다니, 하여간 사람 귀찮게 하기는!”

 크게 소리 지르며 골목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두터운 방어구에 대검과 소총으로 무장한 험상궂은 인상의 한 용병이었다. 그녀가 용병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던 것은 딱히 내 통찰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의 기계식 의수와 의족에 용병협회의 인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용병은 천천히 우리에게 접근해오며 입을 열었다.

 “이봐, 거기 아가씨들! 내 페어리를 ‘보호’해줘서 고맙군. 많이는 못 주지만 조금은 사례할 테니 순순히 넘겨…….”

 - La___Da___De___Na___IE___Ah____!!!

 하지만 용병은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요정 소녀가 갑자기 울부짖으며 한층 세실리아에게 꼭 매달렸기 때문이다.

 “뭐, 뭐야!? 뭐라고 하는 거야?”

 혼란스러워 하는 세실리아를 향해 난 간단히 설명했다.

 “납치범에게서 살려달라고 하네요. 자기는 숲에서 과일을 따먹으며 지내고 있었을 뿐인데, 무서운 사람들이 와 다 불태우고 이렇게 낯선 곳으로 끌고 왔다는 모양이에요.”

 요정들의 말은 일종의 압축언어로서 발음뿐만 아니라 소리의 크기, 길이, 높낮이, 그리고 무엇보다 마력의 함유량이 한 단어에 복합적으로 들어가 중첩적으로 뜻을 이루고 있다. 때문에 지성 없는 마물들은 물론 학식 높은 언어학자들 중에서도 마력을 감지할 수 없는 사람은 요정들의 언어를 배울 수가 없었다.

 “저 짧은 말에 진짜 그런 뜻이……? 아니, 잠깐! 너 이 아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거야!?”

 멍하니 감탄하다 날카롭게 위화감에 눈치 챈 세실리아. 아니 실은 아직도 당황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눈앞의 용병보다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고 있는 걸 보면. 아무튼 실수한 건 어쩔 수 없으니 대충 얼버무리자.

 “아…… 실은 어렸을 때 요정들에게 납치Changeling당한 적이 있어서요. 다행히 무사히 돌아오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때부터 마물들이 하는 얘기를 대충 알아들을 수가 있네요.”

 “어쩐지…… 그래서 그런 성격이…….”

 아련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혼자 무언가 납득하는 세실리아. 음, 이런 허술한 변명에도 속아 넘어가는 건 다행이지만,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반면 우리에게 대놓고 무시당하고 있던 용병은 뭐가 좋은지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어이, 꼬맹이! 너 진짜 페어리 말을 알아듣는 모양인데! 마침 잘 됐어. 아무래도 요정언어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저 녀석도 좀 더 비싸게 팔아치울 수 있겠지. 이봐, 꼬마야! 이 언니 좀 도와주지 않을래? 용돈은 섭섭지 않게 쥐어줄게.”

 음, 꼬맹이라는 건 설마 할 것도 없이 날 말하는 거겠지. 게다가 자기 사업을 보조해주는 상대에게 지급하겠다는 대가를 용돈 취급. 처음부터 협조할 생각도 없었지만, 말할 것도 없이 사회적으로 절대 어울려서는 안 되는 신용 없는 부류다.
 하지만 내가 거절하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세실리아였다.

 “잠깐, 팔겠다니…… 설마 이 페어리를 인신매매하겠다는 건가요?”

 용병은 눈을 가늘게 뜨며 사납게 웃음을 지었다.

 “이봐이봐, 아가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 되지. 페어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어디가 ‘인신’매매라는 거냐?”

 “그, 그건…… 하지만 이 페어리는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고 독자적인 언어를 말할 줄 아는 지성체에요. 그렇다면 유사인류권익보호법에 저촉되는…….”

 “푸, 후하하하하하하하하하!”

 용병은 큰 웃음으로써 세실리아의 말을 무참히 묻어버렸다.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그럼에도 용병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웃었다. 그 웃음은 어쩐지 비명처럼 들리기도 했다.
 잠시 후 웃음을 멈춘 용병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전쟁에서 마물들에게 사람들이 얼마나 죽은 지 알고도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놈들의 이빨 앞에서도 어쩌구 보호법 얘기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

 세실리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물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개하다 이번에는 허울 좋은 법 규정을 들먹이며 이상론을 펼치는 자신. 내실 없이 상황에 따라 ‘멋진 모습’만을 취하려고 하는 자신이 얼마나 얄팍한지 모를 만큼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다.

 ‘변명이지만, 이게 내가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였지.’

 나는 인간들 쪽에 상당히 기울어진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인간들을 지키기 위해 마왕군에 맞서 싸운 적은 거의 없었다. 딱히 선대 마왕이 무서웠던 건 아니다. 문제는 내 망설임. 인간들이 다른 종족들에게 벌여온 갖은 만행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선뜻 마물들을 칠 기분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론 어느 쪽이든 크게 다르지 않아.’

 그렇다고 쉽사리 마물들의 손을 들어줄 수도 없는 것이, 그들 역시 과거 강성했을 때는 나약한 인간들을 한갓 먹잇감으로밖에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세력구도의 역전이 일어난다면 이번에는 인간들이 비참한 처지에 빠지고 말 것이다.

 - La___

 작게 소리 내어 울며 걱정스럽게 세실리아를 올려다보는 요정 소녀.
 자, 과연 이 아가씨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자기가 품은 모순을 인정하는 것도, 반대로 거기서 눈을 돌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악취미란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은 없지만, 난 그녀가 어떤 길을 고를지 궁금해졌다.
 세실리아는 고개를 숙여 요정과 한번 눈을 마주친 후 다시 시선을 앞으로 하며 입을 열었다.

 “…페어리들이 팔리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되죠?”

 “이봐, 아가씨! 괜한 생각 말라고. 아가씨가 거기까지 알 필욘…….”

 난 용병의 말을 끊으며 진실을 전했다.

 “마도연구의 실험재료로 쓰이는 게 일반적일 테지만, 요정들에겐 한 가지 용도가 더 있어요. 이들은 얌전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데다, 외부자극에 꽤 민감한 편이에요. 자신의 부적절한 욕망을 양심의 가책 없이 누군가에게 마음껏 풀고 싶은 사람들에겐 딱 좋은 대상이죠.”

 “…….”

 세실리아의 얼굴이 얼음 같이 딱딱하게 굳었다. 냉정해졌다기보다는 혐오와 분노가 허용량을 넘어서 다른 감정들을 억누른 탓에 결과적으로 무표정하게 보이는 것뿐이다.

 “잠깐 이 아이를 부탁할게.”

 세실리아는 허리에 매달린 요정 소녀를 부드러운 손길로 떼어내 내게 넘긴 뒤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 페어리는 포기하세요. 당신 같은 사람에게 넘길 순 없습니다. 불법포획에 대해선 눈 감아 드릴 테니…….”

 “보자보자 하니까…… 이 미친 도둑년이……!”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용병은 더 이상 말은 필요 없다는 듯 곧장 검을 뽑아 치켜세우고 달려들었다.

 “이, 이그니션!”

 세실리아는 당황하면서도 호신용 단검을 뽑아 시동어를 외쳤다. 검에 새겨진 마법문자가 반응해 내장된 마력으로 마도현상을 일으켰다.

 “……!”

 화륵. 용병을 감싸는 큼직한 불꽃. 하지만 용병은 그 불길 속에서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튀어나왔다.

 “싸워본 적도 없는 애송이가! 그딴 성냥불이 통할 것 같냐!”

 퍽. 용병은 검을 휘두를 것도 없이 비어 있는 다른 쪽 주먹으로 세실리아의 명치 부근을 가격했다.

 “컥…….”

 힘없이 허물어지는 세실리아. 예상대로 전장에서 돌아온 용병은 마법내성이 높은 장비들을 갖추고 있었다. 마물들과 사투를 벌여본 경험이 있는 베테랑 전사에게는 당연한 소양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용병은 괴롭게 숨을 헐떡이는 세실리아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난 전쟁에서 손과 발을 잃었다. 마물들에게 뜯어 먹혔지. 그래도 난 운이 좋은 편이야. 우리 부대원들 중에 살아남은 건 나를 포함해 딱 셋뿐이니까. 그렇게 불구가 돼 퇴역했지만 당연히 사회에서도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일상생활조차 어려웠으니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가. 결국 난 굶어죽지 않기 위해 용병협회에 빚을 지고 이 의수와 의족을 달았지.”

 “…….”

 “내가 이 녀석들을 팔아치우는 건 당연한 권리다! 이걸로도 한참 부족해! 내가 잃은 것들을 되찾기는커녕 입에 풀칠하기도 버겁단 말이지!”

 “아윽!”

 노성과 함께 세실리아의 옆구리를 걷어차는 용병. 땅바닥에 쓰러진 그녀는 무참하게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소동이 벌어지는 데도 그녀를 구하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작금의 불안한 정세 속 험한 일에 잘못 말려들어 피해를 입어도 제대로 보상 받을 길이 없으니 다들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이다.

 ‘슬슬 말릴 때가 됐나.’

 방금 전 감정에 찬 용병의 발길질은 전혀 힘 조절이 되어 있지 않았다. 아마 세실리아의 늑골 몇 대쯤은 부러졌으리라. 그녀가 어떤 답을 내릴지 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더 지체했다가는 경호대상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뭐, 경호라는 행위 자체는 이미 충분히 실패했지만. 나중에 녀석에게 무슨 잔소릴 듣게 될지.’

 어떻게 변명해야 도서관장의 귀찮은 추궁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하며 힘을 행사하려고 할 때, 세실리아가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화, 확실히 난…… 허울 좋은 소리만…… 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당신 같은 사람들이…… 지킨 평화 속에서…… 꿈만, 꾸고…… 있던 걸지도…….”

 “이제야 좀 주제 파악이 된 거냐? 늦게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군. 하여간 철부지들에겐 매가 약이라니까.”

 용병은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지만, 세실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결국 당신은…… 약자에게, 분을 풀고 있을 뿐이야……! 자기보다 약한 존재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 비열함이 올바른 현실이라면…… 난, 계속해서 꿈을 꾸겠어!”

 극도의 고통을 견디며 초점조차 맞지 않는 눈으로 호신용 단검을 상대에게 겨누는 세실리아. 그리고 그녀는 다른 쪽 손에 머리에서 풀린 붉은 리본을 꼭 쥐고 있었다. 그 리본은 내가, 정확히는 카타리나가 성목절 축제 때 건넨 선물이었다.
 용병은 잠시 세실리아의 모습을 지켜보다 의수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사람 제대로 돌게 만드는군. 그 적갈색 제복과 고급 장신구, 헤미스피어 도서관 소속의 귀족가 영애 맞지? 권력자 딸 건드려 봤자 좋을 거 없을 테니 웬만하면 일 크게 안 만들려고 했는데…… 안 돼. 도저히 안 되겠어.”

 성큼성큼. 칼을 들고 세실리아에게 다가가는 용병의 눈빛은 아까와는 달리 살기에 넘쳐 있었다.

 “어차피 이런 세상…… 잡힐 것 같으면 외국으로 튀지 뭐. 어디나 살긴 다 거지 같으니까. 그러니 넌 오늘…… 내 손에 죽어라!”

 심상치 않은 기색에 위기감을 느낀 세실리아는 시동어를 외쳤다.

 “이그니션!”

 “그딴 불장난 안 통한다고 했지!”

 용병이 크게 칼을 휘두르자 단검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은 연기처럼 간단히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 2차례 연달아 화염마법을 발동시켰지만 용병에게는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그리모어 없이는 역시…….”

 자신의 무력감에 한탄하며 분한 듯이 중얼거리는 세실리아. 본래 하이젠베르크 가家는 마도서를 해독하고 연구하는 일을 전문으로 삼는 일족이다. 특히 그들 일족에게 대대로 발현된다는 석안釋眼은 마법문자를 통해 직접적으로 마력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즉 평범한 마법사에게는 단순한 참고서밖에 되지 않는 마도서도 그들 손에 들어간다면 엄청난 마력 증폭기가 되는 셈이다. 대신 순수한 마법사로서의 기량은 결코 우수하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마도서 없이는 이처럼 무력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세실리아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리본을 활짝 폈다.

 ‘저건…….’

 리본에는 세실리아가 직접 마력을 담아 쓴 문자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마도 카타리나를 향한 남몰래 간직하고 있던 연심. 세실리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것을 소리 내어 외쳤다.

 “Meine Liebe ist grün! 설령 그분이 남긴 물건은 사라져도, 내 사랑은 변하지 않아!”

 마력이 담긴 글자가 그 힘을 발휘하자 리본은 산산조각 찢어지고, 대신 호신용 단검에서 발하는 불길이 한층 그 기세를 더했다.

 “끝까지 발버둥치기는! 그래봤자 소용……윽!?”

 쩍. 용병은 그 자신만만한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가지고 있던 검이나 방어구 등 갖은 항마력 장비들에 금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 말도 안 돼! 이런 일이……!”

 거센 폭발음과 함께 방어구가 부서지며 저 멀리 날아가 잡동사니 속에 처박힌 용병. 조금 꿈틀거리는 것으로 보아 죽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타격이 심했는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난 쓰러진 용병을 향해 속으로 중얼거렸다.

 ‘끼어들어서 미안하군. 하지만 네 편을 들어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어.’

 확실히 세실리아가 최후의 기력까지 짜내 펼친 공격은, 본래대로라면 용병의 방어를 뚫을 수 없었다. 내가 슬쩍 마력을 보태지 않았다면 말이다.

 “으…….”

 한계에 다다른 세실리아는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크게 휘청거렸다. 다행히 나는 그녀가 땅바닥에 고꾸라지기 전에 부축할 수 있었다.

 “에고, 조심하세…….”

 “카, 카타리나 님……?”

 예상치 못한 세실리아의 말에 난 순간 자리에서 멈칫 했다.

 “아아, 카타리나 님……! 돌아와 주셨군요……!”

 손을 들어 내 볼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면서도 기쁘게 웃는 세실리아. 그녀의 눈은 흐린 채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은 상태였다.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로 심한 폭행을 당한 데다, 얼마 안 되는 마력을 있는 힘껏 쥐어짜내 사투를 벌인 탓에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것이다.

 즉 날 카타리나로 혼동한 것은 단순한 그녀의 착각.
 네리처럼 마력의 잔향이라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지금 보고 있는 카타리나는 완전한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내게 그 환상을 부정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훌륭했어요. 자부심을 갖고 편히 쉬세요.”

 난 세실리아에게 무릎베개를 해주며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네…… 카타리나 님…….”

 세실리아는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고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그 옆에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녹색 머리카락의 요정이 하나. 요정은 자신을 지켜준 용감한 소녀를 위해 조용히 숨겨둔 힘을 발휘했다.






 다음 날. 다행히 난 도서관장에게 세실리아가 상처 입을 때까지 내버려둔 일로 추궁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상처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녹색머리의 요정은 드물게 치유술을 행사할 수 있는 개체였는데, 그 힘으로 자신의 은인에게 보답을 한 것이다.
 하지만 부상에서 말끔히 회복된 세실리아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하아, 어째서 다들 믿지 않는 걸까. 어제 정말 카타리나 님이 날 구해주셨는데.”

 의식을 되찾은 세실리아는 기절하기 전에 본 환상과 기억이 이상하게 뒤섞였는지, 수년 전 도서관을 떠난 ‘카타리나 님’이 돌아와 자신을 구해준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물론 도서관의 동료들 중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쟁 후 행방이 묘연한 카타리나가 갑자기 그 순간에 나타나 백마 탄 영웅님처럼 세실리아를 구해주고 떠났다는 이야기 자체가 너무나도 작위적인 데다가, 실제로 거리의 군중들 중에는 세실리아가 화염마법으로 용병을 물리친 모습을 목격한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렇군요. 음, 어제 많이 힘드셨을 텐데, 오늘 하루는 푹 쉬시는 게 어때요?”

 세실리아가 흥분하며 카타리나의 활약을 전할 때마다 도서관 사람들은 애매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휴식을 권했다. 다들 그녀가 충격적인 일을 겪어 일시적으로 기억에 혼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상냥하게 응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당사자에겐 그 상냥함이 도리어 상처가 되는 모양이지만.
 여러 차례 같은 취급을 당한 세실리아는 볼을 부풀리며 내게 힐난하듯이 말했다.

 “너도 옆에서 같이 봤잖아!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상대하기 귀찮았던 나는 강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그나저나 그 용병, 잡히기 전에 도망쳤다고 하네요.”

 세실리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하지만 그 긴장은 두려움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내게 복수하러 온다면 언제든지 상대해 줄 생각이야. 그때야말로 전용 그리모어를 가지고 확실하게 쓰러뜨려 개심시키고 말겠어.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이 아가씨의 장점은 고지식한 만큼 자신의 결의에 대해서도 진지하다는 점이다. 아마 또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다음번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아, 그 요정은 어떻게 됐나요? 직접 보호소에 맡긴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난 아무렇지 않은 듯 짓궂은 질문을 던져봤다. 예상대로 세실리아는 말을 더듬었다.

 “으응? 아, 물론 그렇게 했어. 버, 법대로 해야지.”

 빤히 보이는 거짓말. 전쟁이 터지기 전이라면 모를까,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리 유사인류로 분류되는 종족이라도 마물로 취급되는 이상 좋은 대접을 받을 리 없다. 운이 좋아야 실험실 행일 테고, 운이 나쁘면 용병 대신 보호소 직원들에 의해 누군가에게 팔려나갈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런 시대였다.

 ‘뭐 다른 사람에겐 안 보이겠지만.’

 세실리아의 몸 전체에서 반짝이는 페어리의 날개가루. 그 가루들은 영체인지라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인체에 특별한 악영향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약간은 정신이 맑아지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정도 양이 몸에 묻어 나오려면 요정과 한곳에서 생활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강아지를 몰래 키우는 것도 아니고.’

 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하지만 그건 비웃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친근감을 느끼는 상대 앞에서 무심코 나오고 마는, 그런 편한 웃음이었다. 동시에 난 그녀에게 무언가 배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기 집 앞에 떨어진 아기 새 한 마리를 구하면, 그걸로 되는 걸까.’

 그 누구라도 세상의 모든 이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누군가를 돕는 일쯤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모든 이가 각자 누군가를 돕는다면 결국은 모든 이가 도움을 받는 것과 같다는 동화 같은 환상. 하지만 어쩌면 그게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참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네. 혹시 보, 볼 일이라도 보고 싶은 거야? 그럼 빨리 다녀와. 오늘은 망가진 책상과 의자들 수선해야 해서 바쁘니까.”

 다시 고지식한 태도로 돌아온 세실리아. 하지만 전처럼 그 모습이 답답하게 여겨지지만은 않았다. 나는 “이제 우리가 사서인지 잡일꾼인지 모르겠네요”라고 가벼운 말을 던지며 앞서 가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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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10.26 16:07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아아앗... 이 훈훈함의 폭풍, 견딜 수 없어요! >_<);;

    그러고보니 유기동물을 구조하여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캠페인 관련 문구 중 ‘하나의 버림받은 아이를 구한다고하여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그 동물에게 있어서는 세상 그 자체가 변하는 것이다’ 라는 내용이 문득 떠오르네요.

    이런 사람(?)이 신임 마왕이라면 인류와 마족 양측의 절묘한 힘의 균형을 유지시켜, 차선책으로써의 약 수십년간에 걸친 평화의 시대정도는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나요, 후후... :D (... 양제독님! 그립읍니다 ㅠ_ㅠ)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10.27 21:56 신고 address edit/delete

      너무 원만한 결말이라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좋게 봐주신 것 같아 안심이 되네요>.<

      동물보호 캠페인 문구 중 그런 멋진 말이 있었군요! 저 또한 위의 내용은 예전에 읽었던 한 순정만화에서 한때의 선의로는 모든 버려진 동물을 돌봐줄 수 없다는 냉정한 지적에 '각자가 자기 앞에 버려진 강아지를 한 마리씩이라도 구하는 걸로 충분'하다는 주인공의 말에 영향을 많이 받았네요.

      물론 사회적인 인식과 구조적인 시스템을 개선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지만, 애초에 그 인식과 시스템이 변화하기 위해선 개인들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주인공도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히 양 제독님을 비롯한 은영전의 멋진 캐릭터들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거대한 두 세력의 대립 간에 줄타기를 하면서도 소소한 일상을 보내는 모습을 재미있게 그리고 싶은 마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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