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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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작중 등장인물은 전원 여성이며 정통 판타지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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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마왕이 된 이유


 헤미스피어 대도서관.
 인류의 빛나는 지혜들이 무수한 별처럼 반짝이는 서적의 바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제정시절 황제의 권위를 뽐내기 위해 지어진 이 반구형의 거대한 건축물은, 오로지 장서의 보관과 심미적인 외관에만 중점을 두고 설계된 탓에 이용자들의 편의는 조금도 고려되지 않은 게 특징이었다.

 그 비효율성을 극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바로 도서관 중심부의 풍경.
 장엄한 돔 아래 특수하게 가공된 합금서장이 벽을 따라 15층 건물의 높이까지 솟아올라 있고, 그 안에는 온갖 역사적인 장서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주위에는 책장을 밝힐 화려한 보석등불이 촘촘히 박혀 있으며, 오색으로 찬란한 색유리stained glass 아래 당대 유명한 예술가들의 대리석 조각상과 금은의 장식품들이 천상의 방문객 마냥 내부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
 계단도 사다리도, 그밖에 다른 무엇도 아무것도 없다. 하늘을 바라보듯 고개를 젖혀야 그 끝이 보이는 책장 저 끝까지 닿을 수단은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굳이 사람 키를 넘어서는 상단 부분의 책장까지 손을 뻗고 싶다면 고층 사다리를 준비하든지, 부유마법을 사용하든지, 아니면 최근 전쟁에서 발명된 부유석을 장착한 비행 장비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서적이 아닌 업적을 보는 공간.
 내용이 아닌 위용에 감탄하는 공간.

 호의를 갖고 포장하자면 풍성하고 강성했던 제국시절 최전성기의 흔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악의를 갖고 매도하자면 단순한 허세라고 일축할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단연 후자 쪽이라 생각하지만 말이야. 평범한 사람들도 종종 단 한번 읽어본 적 없는, 괜히 어려워 보이는 책들을 책장에 진열해 두곤 할 때가 있잖아? 남들이 그걸 보고 자신의 교양과 학식을 과대평가해주길 은근히 기대하면서. 이 도서관은 그런 흔해 빠진 심리가 국가적 규모로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아. 말하자면 이 도서관 전체가 황제의 책장이었던 셈이지.

 난 어둠 속에서 언젠가 지인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전적으로 그 의견에 동의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도서관 어딜 가나 중심부와 비슷한 꼴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책상과 의자가 생긴 것도 제정시절이 끝난 후대의 일로써 그 전까지는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조차 제대로 없었다고 한다.

 영원히 가는 영광이란 없다.
 한때는 수천의 보석등불이 도심지의 야경처럼 환하게 밤을 밝히던 도서관 내부도 지금은 여느 파괴된 도시들처럼 어둠에 잠긴 채 고요하다. 마왕군과의 극심한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해진 탓에, 더는 도서관에 연료를 공급한다는 ‘사치’를 부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뭐 내 입장에선 딱 좋지만.”

 슥. 난 책장을 넘기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빛도 사람도 없는 밤의 도서관은 독서를 하기에 정말 좋은 환경이다. 조용한 것도 조용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사람 눈치’를 전혀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주위에 보는 사람만 없다면 공중에 누운 채 아주 편한 자세로 책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어둠 또한 독서에 어떤 방해도 되지 않는다. 악마의 피가 흐르는 내게 있어 빛은 사물을 인식하는 필수조건이 아니니까.
 하지만 내 안식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 여어, 딸내미. 잘 있었냐. 여전히 우중충하게 살고 있군.

 세상을 한없이 잠식해 들어가는 검은 목소리. 불청객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마왕, 이클립스……!”

 마치 왕관처럼 머리를 감싸고 있는 큼직한 황금색 산양의 뿔. 그 아래 홍옥Ruby처럼 빛나고 있는 불타는 적색 머리카락. 박쥐를 닮은 표층차원의 흉측한 여섯 장 악마의 날개.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심층차원에 숨어 있는 열세장의 그림자 날개. 털 하나하나가 대마법을 행사할 수 있는 막대한 마력을 내포하고 있는 악마의 사자꼬리…….
 현재 인류의 최대 천적이라 할 수 있는 마왕이 지금 내 앞에 불쑥 나타난 것이다.

 “알비노스 왕국의 아크메이지 클래스의 마법장벽들은……. 쳇, 아예 발동조차 하지 않았군.”

 덤으로 내가 몰래 쳐놓은 다차원수호결계도 마찬가지.
 사실 충분히 힘 있는 존재에게 이런 방어막을 부수는 것쯤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힘 자체를 갖추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그러나 부수지 않고 그냥 통과한다는 것은 단순히 힘이 있고 없고의 문제를 떠나 또 다른 차원의 초월성이 요구되는 난제이다.

 가령 어떤 사람을 여러 겹의 튼튼한 줄로 촘촘히 묶어 두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줄 하나하나마다 조금만 흔들려도 심하게 소리가 나는 종을 잔뜩 매달아 두었다고 하자. 이야기 속의 영웅처럼 충분히 힘이 세다면 근육을 부풀리는 것만으로도 실처럼 줄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또는 관절을 기묘하게 빼거나 뒤틀 수 있는 재주를 가진 달인이라면 어떻게든 줄을 헐겁게 해 탈출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자들에게도 아예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속박에서 자력으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리라.

 이 여자가 마도사들의 마법장벽이나, 내 다차원결계를 무시하고 여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그런 종류의 기적 같은 솜씨에 가까웠다.
 과연 마왕. 악마들의 왕이자, 마법의 왕이라 불릴 만 하다.

 - 하하. 이봐, 딸. 너무 기죽을 거 없어. 다른 떨거지들과 다르게 네 다차원결계는 꽤 훌륭했으니까. 솔직히 좀 놀랐다. 설마 심원영역의 잠행까지 차단하고 들어올 줄이야. 역시 내 딸들 중에선 네가 제일 잔재주가 뛰어나.

 웃으며 말하는 마왕. 일단 딸이라고 치켜세워주는 걸까? 하지만 ‘잔재주’라 칭한 시점에서 이미 칭찬이고 뭐고 없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욕하는 걸로 간주하고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였을지 모르지만, 이 여자는 이게 순수한 감탄의 토로이니 상대하기 곤란하다. 뭐 싸워봤자 이길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니 무시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다.

 “……요즘 문명파괴에 다망하신 분이, 대체 무슨 일로 여기에 오신 건지?”

 잔뜩 비아냥거리며 물었지만, 사실 난 이 여자가 왜 날 찾아왔는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소름끼치도록 아름답고 차갑게, 달빛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마왕. 하지만 언제나 변함없을 것 같은 이 여자의 완결성에는 지금 작지만 커다란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비유 같은 게 아니다. 문자 그대로 마왕의 왼쪽 가슴은 심장과 같이 뻥 뚫린 채 피가 철철 흘러나오고 있었다.

 ‘설마 소문이 진짜였다니……. 낮의 소란은 이게 원인이었군.’

 영웅이 드디어 마왕을 쓰러뜨렸다는 사람들의 환호성. 이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나는 그저 헛소문이라고 치부했다. 사실 전쟁 중에는 사람들의 소망을 투영한 근거 없는 이야기rumor가 민들레 홀씨처럼 이곳저곳 떠도는 게 일상다반사다. 하지만 언제나 올바른 사람이 있을 수 없듯이, 언제나 틀린 소문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만큼은 소문이 진실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가 단지 부상만 입고 돌아온 줄 알았는데 이런 업적을 올렸을 줄은. 아무래도 내가 인간 측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 피들, 어떻게 하지?’

 마왕의 상처에서 쏟아지는 혈액은 순수한 마력덩어리라 전부 공중에 흩어질 뿐, 물리적인 흔적을 남기거나 하지는 않는다. 청소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건 좋지만, 고농도의 마력은 산소와 마찬가지로 생물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만약 이대로 두면 이 일대는 한동안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이 되고 말리라.

 물론 최악의 경우 내가 그 마력들을 먹어치우면 된다. 실제로도 그럴 생각이긴 하지만, 그때는 마성魔性이 짙어져 인간성을 아예 상실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어디선가 발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본적으로 이 도서관에서 책만 읽으며 지내고 싶은 내게는 매우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내 심정을 알 리 없는 마왕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 무슨 일로 왔냐고? 그냥 딸내미 얼굴 좀 보려고 왔지. 너 300년인지 400년인지 여기서만 계속 일하고 있던데, 지겹지도 않냐?

 “내가 여기 속하게 된 지는 이제 곧 100년이야. 지겹기는커녕 아주 잘 지내고 있고. 그리고 내 나이는 아직 300살. 400년 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어.”

 - 그랬나? 딱히 나이 같은 건 평소 생각해 본 적도 없어서 실수했군. 뭐 100년도 제대로 못 사는 인간들처럼 세월에 민감할 이유가 없으니 이런 쪽은 아무래도 둔감해지네. 네가 이해해라. 아! 근데 100년이라도 인간들 기준에선 꽤 긴 세월이잖아. 너 여기서 그렇게 오래 있어도 돼? 인간들은 수명이 짧아서 늙지 않는 존재는 이상하게 생각하던데. 음, 나도 그 아이…… 그러니까 네 모체 되는 여자랑 잠깐 같이 살 때 그걸로 좀 고생했지.

 여전히 무신경한 발언. 하지만 화를 내봤자 내 손해다. 어차피 죽어가는 괴물, 조금은 친절히 대해줘도 문제될 건 없으리라.

 “당신이 말하는 ‘잔재주’로 인식장애 마법을 걸고 있으니 괜찮아. 주기적으로 직급과 이름을 바꾸며 다른 사람처럼 꾸미고 있기도 하고.”

 - 그거 괜찮은 방법이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나도 그때 그런 방법이 떠올랐다면 그 애랑 좀 더 같이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는 듯이 탄식하는 마왕. 이해는 된다. 손짓 한번으로 가볍게 도시 하나는 소멸시킬 수 있는 존재가 인간들의 사고방식에 맞춰 자신을 꾸며야 한다는 발상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으리라. 오히려 나를 낳아준 어머니를 생각해 겉모습이나마 인간처럼 꾸미고 30년 넘게 같이 지냈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처럼 놀라운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쓸쓸한 죽음을 목격한 나는 이런 말을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무슨……. 당신이 우리 엄마를 사랑하기는 했어?”

 - 당연하지! 그렇지 않으면 네가 태어날 리가 없잖아. 아직도 그 아이는 내 기억 속에 선명해. 뭐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딱히 이 여자를 위해서가 아니다. 여기서 잘못 힘을 개방하면 내가 안식처로 삼고 있는 이 도서관 자체가 붕괴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후…….”

 진정하자. 이 여자가 무신경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까.
 200년 전에도, 이 여자는 불쑥 내 앞에 나타나 엄마를 찾았었다.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넘은, 끝까지 마왕을 그리워하다 외롭게 눈을 감은 우리 엄마를. 내가 엄마의 죽음을 전하자, 이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 아, 그러고 보니 인간들은 수명이 짧았지. 난 생각이 짧았고. 하하. 간만에 얼굴 좀 보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그 뒤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난 피투성이로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으니까.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변할 만큼 이성의 끈이 끊긴 내가 마왕에게 덤벼들었다가 도리어 신나게 얻어맞고 빈사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때 싸움의 여파로 대륙 북부의 산맥 하나가 등이 끊어지고 만 것은 내 부끄러운 사춘기의 흔적이다.

 - 응? 이 녀석이 날 죽이려고 한 게 아니었다고? 내 자리를 노리거나 날 넘어서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럼 왜 덤빈 건데? 엄마에 대한 애정에서 오는 섭섭함? 음, 잘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넌 인간들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

 참고로 내가 그 싸움에서 죽지 않은 것은 마왕의 자비 따위가 아니다. 이 여자는 설령 자기 딸이라도 덤벼온다면 용서 없이 처리하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살 수 있었던 것은, 마왕의 오랜 친구이자 비서관을 자처하는 한 몽마Succubus가 내 심정을 설명하며 죽이지 말 것을 요청한 덕분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때 이후로 난 이 여자에게 무언가 인간적인 감정을 기대하는 것을 포기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이 여자는 인간이 아니니까. 게다가 나도 이제 300살. 감정에 휘둘릴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나고 또 지났다.
 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입을 열었다.

 “빨리 용건이나 말해. 오늘은 읽고 싶은 책이 좀 많으니까. 정말 내 얼굴만 보러 온 건 아닐 거 아니야.”

 - 응. 맞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 말이야. 이런 어두침침한 데서 100년이나 일했다면 좀 지겹지 않냐?

 여전히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여자다. 하지만 대화를 포기할 게 아니라면 이쪽에서 맞춰주는 수밖에 없다.

 “아니, 아까도 말했지만 안 지겨워. 딱 내 성정에 맞고 좋아.”

 - 그러니까 말이지, 너 내 뒤를 이어라. 나 대신 마왕군 좀 지휘해. 그럼 심심하지 않고 딱 좋잖아? 어때 마음에 드는 제안이지?

 “…….”

 아, 진짜 대화를 포기하고 싶다. 여기가 내가 일하는 도서관만 아니었다면 이미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여자는 상대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강행수단’을 써서 억지로 말을 듣게 만든다. 물론 내 힘으로는 이 여자와 싸워서 이기는 건 무리라도 도망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유서 깊은 헤미스피어 대도서관은 폐허조차도 아닌 평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심장을 잃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해도 이 여자에게는 아직 그만한 힘이 남아 있다.
 그래도 역시 이 여자가 날 찾아온 이유는 예상한 대로다. 난 상대가 듣지 않는다 해도 최대한 진심을 담아 거절의 말을 꺼냈다.

 “싫어. 그런 건 당신의 다른 자식들, 내 언니들이나 동생들에게 부탁하라고. 혼혈인 나와 달리 순혈종인 그 녀석들이 어차피 나보다 힘도 세잖아. 당신 뒤를 잇기에는 더 강한 쪽이 낫지 않아?”

 내게는 위로는 언니가 넷, 아래로는 여동생이 둘, 배가 다른 자매들이 있다. 한명을 빼고는 다들 이 여자를 닮아 손쓸 도리가 없는 잔학한 폭군들이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이 여자를 닮아 힘만큼은 확실하다. 솔직히 마왕의 자리에는 나보다 다른 자매들이 훨씬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마왕은 고개를 저었다.

 - 언니들과 동생들이 아니라 ‘언니와 동생’이다. 나머지는 다 죽었어.

 “……뭐?”

 -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야.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자세한 얘기를 들으니 다른 자매들은 요 200년 동안 내가 관심을 끊고 있는 사이 전멸한 모양이다. 언니들 중 둘은 엄마인 마왕의 자리를 뺏기 위해 도전했다가 죽었고, 나머지 자매들은 서로 영역 다툼을 벌이다가 공멸했다고 한다. 그 싸움에서 언니와 동생 중 각각 하나가 살아남았지만, 둘 다 깊은 상처를 입고 잠에 빠져들어 향후 수백 년은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모양이다.
 ……과연 이 여자의 딸들답다. 동시에 내게도 같은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끔찍하다.

 - 그런 이유로 내 뒤를 이을 사람은 너밖에 안 남았다. 뭐 꼭 내 딸이 아니더라도 다른 능력 있는 녀석이 있으면 뒤를 물려줄 생각이었지만, 인간이나 용종들과의 싸움에서 많이들 죽은 탓인지 쓸 만 한 것들이 안 보이더라고. 해서 나를 빼면 현재 네가 실질적인 마왕군 2인자야. 기쁘지?

 아니 하나도. 그래도 이 여자가 내 기분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지껄여준 덕분에 나 역시 양심의 가책 없이 함부로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내 대답은 변하지 않아. 난 당신의 뒤를 이을 생각 없어. 마왕군 따위 망하든지 말든지. 아니 차라리 망하면 속 시원하겠군. 최소한 내가 사는 지역이 위협당할 일은 없어질 테니까. 무조건 인간들 편만 들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내게는 인간들이 더 친숙해. 인간들의 문명을 즐기는 내 입장에선 마왕군을 응원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 음, 그럼 우리 딸이 많이 곤란해질 텐데…….

 “하! 내가 왜? 곤란한 건 당신이겠지. 이제 곧 죽을 사람이 위협해봤자 소용없어.”

 - 응? 죽는다고? 누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는 듯이 묻는 마왕. 난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의 뻥 뚫린 왼쪽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성검에 심장이 꿰뚫린 당신이 죽지 내가 죽겠어? 설마 그런 어설픈 연기로 얼버무릴 수 있다고…….”

 - 아아! 그러고 보니 오늘 한방 먹었었지! 그래서 그런 착각을 하고 있었군. 잠시만 기다려.

 마왕이 가볍게 말하며 가볍게 손을 상처로 가져가자, 파괴된 심장이 단번에 재생하며 출혈이 멎고 뚫린 가슴이 순식간에 메워졌다.
 난 경악에 표정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다.

 “마, 말도 안 돼! 영웅의 성검, 센트럴 도그마에 심장이 뚫리고도 어, 어떻게……!? 그 성검은 예지계의 존재원형을 직접 파괴하는 살신殺神의 법리를 가졌어! 단지 물리적으로만 대상을 멸하는 게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세계에서 지우는 힘을 가졌다고! 초월자들조차 그 검 앞에서는…….”

 그러나 마왕은 이해하지 못하는 날 오히려 이해하지 못했다.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존재하는 데 왜 세계가 필요해? 나는 나로서 존재할 뿐인데. 그걸로 충분하잖아.

 질렸다. 이 여자가 상식을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난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던 모양이다. 대체 뭘 어떻게 실수하면 세상의 온갖 법칙을 무시하는 이런 무지막지한 존재가 튀어나올 수 있는 걸까. 이런 여자가 지금껏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다.

 - 이봐, 딸. 그게 네가 하고 있는 두 번째 착각이야.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한 마왕의 지적.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 난 딱히 세상을 멸망시키고 싶은 게 아니야. 단지 놀고 싶은 거지. 그걸 위해 이 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거고. 성과는 나름 있었어. 너도 봤다시피 내가 가슴에 입은 상처……. 분명 이건 인간들에게 영웅이라 칭송 받는 그 아이가, 이번에도 무력하게 쓰러질 거라 생각한 그 아이가, 예상을 뛰어넘고 죽을 각오로 없는 힘까지 짜내 내게 입힌 상처다. 박수를 보내 마땅한 투지였고, 실제로 나도 감동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물러나 주었지.

 마왕은 모험을 꿈꾸는 어린아이처럼 두근거리는 얼굴로 오늘의 싸움을 회상했다. 하지만 그 표정은 곧 유년기의 꿈을 잃은 지친 어른의 얼굴로 변했다.

 - 동시에 깨달았다. 이게 인간들의 한계라는 것을. 인간들의 세력이 최절정기에 달했을 때, 인간들 사이에 신들의 힘을 이어받은 역대 최고의 영웅이 등장했을 때, 신들마저 죽일 수 있는 최강의 무기가 그 영웅의 손에 들어갔을 때 싸움을 걸었지만, 그래도 인간들은 날 죽일 수 없었어. 물론 용왕들이나 내 힘을 이어받은 딸들마저도. 더 이상 내가 이곳에서 지금까지 얻은 이상의 자극을 얻을 리는 없겠지.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미친 괴물이라고는 알고 있었던 이 여자가 누군지 다시 모르게 되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반쯤은 알 수 없는 공포심에 쫓기며 물음을 던졌다.

 “당신은, 대체 뭘 할 생각이야?”

 마왕은 간명하게 대답했다.

 - 떠날 거다.

 “떠, 떠난다고? 어디로?”

 아직 감정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당혹해하는 나와 대조적으로 마왕은 표표한 시선으로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 아예 이 세계를 벗어나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떠나려고. 그렇군. 우선은 초차원성검을 벼려낸 초월자들의 세계에 가볼까. 그들이라면 충분히 내 상대가 될 수 있겠지.

 초월자. 다른 이름으로는 해탈자. 또는 먼저 떠난 이들. 혹은 앞서 빛이 된 자들.
 초월자란 인류나 다른 마물들이 있기 훨씬 전, 이 지구상에 존재했다는 전설 속의 첫 번째 종족을 가리키는 말로서, 초고도문명을 이룩한 끝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신적인 존재가 되어 상위차원으로 떠났다고 전해지는 이들이다. 인간들 사이에 신神으로 숭배되는 존재가 다름 아닌 그들로서, 성검 센트럴 도그마는 과거 이들 종족이 실존했다는 역사적 증거 중 하나였다.

 “이, 이길 수 있겠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마왕은 씩 웃으며 답했다.

 - 그걸 모르겠으니까 가보려는 거야.

 다시 꿈꾸는 아이 같은 표정을 짓는 마왕. 그 얼굴에 이것저것 모든 게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든 나는 큰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초월자들이 우리랑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엄청난 재앙이겠군. 난데없이 이세계에서 침략해 오는 마왕이라니, 완전 B급 소설이잖아. 뭐 잘 알겠어. 당신이 얌전히 다른 곳으로 떠나준다면, 우리 입장에선 참 고마운 일이지. 근데 내가 왜 떠나는 당신 뒤를 이어야 하는 거지? 이제 와서 당신이 이끌던 마왕군에게 책임감이라도 느끼는 거야?”

 마왕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상하군. 넌 내 딸들 중에선 제일 머리가 돌아가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도발 아닌 도발에 발끈한 나는 고속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각 개체는 강하지만 결속력이 없는 마물들…… 루치아의 기치 아래 단단히 뭉쳤지만 심하게 쇠퇴한 인간들……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용왕들……. 그렇군. 당신이 갑자기 사라지면 싸움이 한층 격렬해질 수가 있겠어. 자칫 멈춰야 할 시기를 놓치면 이 지상의 문명은…….”

 - 사라지거나, 적어도 엄청나게 퇴보를 하겠지. 그건 곧 네가 한가롭게 여기서 책을 읽을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잠깐, 뭐야. 그러지 마. 이제 와서 무슨…… 웃기는 소릴…….”

 믿을 수 없지만 예상되는 대답을 부정하기 위해 고개를 저었지만, 마왕은 언제나 그렇듯 거리낌 없이 자기 할 말을 했다.

 - 그래, 널 위해서다.

 전에 없이 진지한, 그리고 상냥한 눈빛. 사고가 정지된 내가 침묵하는 동안 마왕은 말을 이었다.

 - 나야 이 세계에 아무런 미련이 없으니 그냥 떠나도 상관없지만, 넌 아니잖아? 너 정도의 힘이라면 설령 세상이 멸망해도 혼자 살아갈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넌 지상의 문명을 사랑하는 모양이니 기회를 주는 거야. 내 뒤를 이어 상황을 수습하라고. 이 세상 문명의 몰락을 막으라고 말이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 거창하게 말하자면, 마왕이 돼 세상을 지켜라. 내 친구Succubus에게 말해 뒤를 이을 준비는 다 해뒀으니 넌 그냥 수락만 하면 돼. 물론 거절하는 것도 네 자유야. 그 결과를 네가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지.

 “잠깐, 잠깐만……!”

 - 그럼 작별이다.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래도 난 이 세계에서 제법 즐거웠어. 그러니 너도 즐겁게 살길 바란다, 내 딸아.

 마왕은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하며,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다는 듯이 사라졌다. 붙잡을 새도 한방 먹일 새도 불평 한마디 할 새도 없이.

 “빌어먹을……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무책임한 여자……!”

 확실히 마지막까지 이 여자는 최악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딸의 마음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딸이 즐겁기를 바란다는 그 유언 아닌 유언만큼은 진심이었다는 것을 어쩐지 알 수 있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이미 벌어진 일에 불평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어. 해야 될 건 문제에 절망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것. 최대한 빨리 세상에서 당신의 흔적戰災들을 지우고, 평온하게 살아주겠어!”

 그렇게 난 그 여자의 뒤를 이어 마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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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8.09.10 18:50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아앗... 이 것은 마치 잔뜩 망친 조별 과제의 마무리를 떠맡은 임시 조장(전임 조장은 도망감)의 기분! ㅠ_ㅠ

    만약 제가 작중 신임 마왕의 상황이라면 인류연합군측과의 협의를 거친 후 적절하게 짜여진 판에 마왕군의 병력을 의도적으로 축차투입•축차소모시키는 과정을 통하여 마왕군의 궤멸을 유도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난 이후에는 연합군 수뇌부측과의 사법거래(?)로 다시 평화로운 독서생활 속으로 Comeback & Dive~ >_<)/


    ... 하지만 이는 단지 막연한 계획일뿐 마왕군 세력 내부에도 나름의 신임 마왕의 능력 검증과 견제 및 감시를 위한 안전장치라든가 머리 좋은 책사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을테니 쉽지는 않을테지요. 흑흑(/orz)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8.09.12 06:57 신고 address edit/delete

      다음 편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별과제... 딱 적절한 비유를 들어주신 듯-_-b 오히려 중고등학교보다 대학교에서 무책임함이 난무하는 모습은 참 안타까웠던 기억이 나요ㅠ_ㅠ


      확실히 평온을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주인공인 마왕의 딸이 직접 마왕군을 내부에서부터 빠르게 붕괴시키는 것이겠지만, 말씀처럼 마왕군 수뇌부가 견제하는 것도 있고, 또 무엇보다 주인공 본인이 그런 일을 바라지 않고 있기도 하네요. 주인공은 비록 인간 쪽에 더 호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혼혈로서 나름 마물이라 불리는 다른 종족들에 대한 이해도 있는 편이라 더욱 대등한 관계에서 소강상태로 끌고 가려는 마음이 있기도 해요.

      저번 댓글에서도 살짝 말씀드린 것처럼 최대한 무겁지 않게 가려고 생각 중이기 때문에 작중에서는 이런 사정이 자세히는 나오지 않을 예정이지만, 분위기를 망치지 않는 선에서 위와 같은 내용도 다루어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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