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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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모형정원의 나비'에 해당되는 글 50건

  1. 2014.12.24
    [모형정원의 나비] 07. 흩어지는 노을 (完) (4)
  2. 2014.12.21
    [모형정원의 나비] 07. 흩어지는 노을 (10) (4)
  3. 2014.12.19
    [모형정원의 나비] 07. 흩어지는 노을 (9) (2)
  4. 2014.12.16
    [모형정원의 나비] 07. 흩어지는 노을 (8) (2)
  5. 2014.12.15
    [모형정원의 나비] 07. 흩어지는 노을 (7) (2)
  6. 2014.12.13
    [모형정원의 나비] 07. 흩어지는 노을 (6) (2)
  7. 2014.12.12
    [모형정원의 나비] 07. 흩어지는 노을 (5) (2)
  8. 2014.12.10
    [모형정원의 나비] 07. 흩어지는 노을 (4) (2)
  9. 2014.11.08
    [모형정원의 나비] 07. 흩어지는 노을 (3) (2)
  10. 2014.09.27
    [모형정원의 나비] 07. 흩어지는 노을 (2) (2)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








07. 흩어지는 노을 (完)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겨울이 지배하는 슬픈 도시 코키토스. 계절은 혹독한 눈보라와 암흑물질의 침입이 성가신 안테노라를 지나 봄바람이 부는 톨로메아로 접어들었다. 물론 날씨는 여전히 겨울의 특징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가끔씩 비교적 따스한 기후를 보일 때가 있어 톨로메아의 계절은 상대적으로 코키토스에서는 봄이라 불린다.

 저번 계절은 혹독한 안테노라의 날씨만큼 참혹한 일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새로 맞이하는 계절을 환영했다. ‘플라톤 원리주의자들의 대란大亂’이라 불리는 테러리스트들의 시가지 및 천체습격사건은 코키토스 유사 이래 최고를 기록하는 사상자와 피해를 낸 대참사였다.

 덕분에 클로에의 병원 또한 유래 없는 성수기를 맞아 줄곧 분주하였다. 도시를 습격한 자들이 암흑물질에 오염된 질서이탈자인 만큼 그들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자들도 제법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의 상흔은 아직도 거리와 사람들의 마음 속 곳곳에 남아 있었으나, 위에서 내리쬐는 햇빛만큼 공평한 시간의 흐름은 그 모두를 점차 아물게 하였다.

 시각은 지고천의 조명이 어두워지는 저녁 8시. 이미 진료시간은 끝났지만 클로에는 시간 외 특별진료를 하고 있었다. 낮 시간에 방문이 힘든 3대 무력기관의 직무자들은 위한 일종의 서비스 진료였다. 고위직무자라 우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일하는 이들의 사정을 봐주는 것이다. 특히 그들 중에는 이번 사건으로 크게 후유증이 남은 자들이 많아 더욱 치료활동에 신경 쓸 필요가 있었다.

“자, 됐어요. 앞으로 경과를 봐서 두 번 정도만 더 오시면 될 것 같네요.”

 클로에는 암흑물질에 침식되어 변색된 환자의 팔에 중화물질을 주사하며 말했다.

“흠, 그거 다행이군. 솔직히 이 주사 너무 아파서 얼마나 더 맞아야 하나 끔찍하게 생각했어.”

 진료 받고 있는 환자는 역천사대의 신시아였다. 사건 당일 클로에와 함께 셀레스티나와 자웅을 겨루고 그 후 열에 달하는 이탈자들에게 둘러싸여 고전한 그녀는 전투 직후 몸 곳곳에 침식반응이 나타나 한때는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수술과 지속적인 중화치료를 통해 지금은 거의 완쾌상태에 있었다.

“엄살은. 신시아는 주사보다 약 먹는 걸 더 싫어하지 않았어요? 매번 시간마다 감시하지 않으면 자꾸 빼먹으려고 하고. 어떻게 아직도 알약을 잘 못 먹어요?”

 옆에서 핀잔을 주는 건 검은 제복의 클로디아였다. 신시아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흑천사대의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부대를 옮긴 것은 아니며 일시적으로 파견을 나온 상태였다.

 플라톤주의자들의 반란 이후 역천사대는 늑장 출동으로 인해 엄청난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정치적 중립성을 지킨다는 이후로 시민의 안전을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코키토스에서 최강 전력을 독점하고 있으면서도 체면치례를 위해 1사건 1인 출동 같은 말도 안 되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전통도 주공격대상이 되었다. 역천사대에서는 절대적인 힘을 상징하여 주민들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다는 구차한 변명을 들먹거렸으나, 천명이 넘는 사상자가 나온 참사 앞에서 그런 구실은 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역천사대의 권위는 도시주민들을 지킨다는 전제 아래 유지되었으나, 그것이 한 번 깨져버린 이상 예전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나마 역천사장 루터 킹의 강력한 카리스마 때문에 해체까지 가는 초유의 사태는 면할 수 있었지만, 작금의 사태 또한 그 역천사장의 고지식함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끝내 역천사대의 1사건 1인 출동의 규칙은 폐지되었으며 역천사대의 1/3에 달하는 인원은 이번 사건으로 심각한 인력소모를 겪은 타 무력기관으로 임시파견을 나가게 되었다. 파견인원은 총 14명으로 10명은 가장 피해가 심한 능천사대에 배치, 나머지 4명은 흑천사대에 배치되었다. 신시아는 흑천사대로 파견된 4명 중 하나였으며 전부터 면식이 있는 클로디아와 주로 짝을 이루었다.

“음, 전생에도 그렇고 평생 몸이 아파본 적이 있어야지. 약을 먹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정말 끔찍한 맛이라니까. 가루약은 쓰지, 알약은 삼키기 어렵지, 물약은 목구멍에 넘어갈 때 느낌이 최악이고……. 아, 클로에. 혹시 약을 달게 만든다거나 아무튼 맛있게 할 수는 없어?”

 신시아가 마치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묻자 클로디아는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클로에가 팔짱을 끼며 잠깐 고민한 후 입을 열었다.

“글쎄요, 행성시대에는 어린이용으로 향을 첨가한 약이 있었다는 모양이고, 해보면 못할 것도 없지만……. 별로 그럴 필요성이 없잖아요? 귀찮기만 하고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클로에에게 신시아는 아무런 반론도 할 수 없었다. 그 후 신시아는 클로에에게 몇 가지 건강상 주의를 받은 다음 클로디아에게 면박을 받으며 진료실을 떠났다. 클로에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참 사이가 좋은 두 사람이라 생각하며 살짝 웃었다.

 짤랑짤랑. 종이 울리는 소리.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이자 허공에서 디스가 나타나 환자가 방문했음을 알렸다. 클로에는 상냥한 목소리로 시종에게 들이라 전했다. 곧이어 오늘 마지막 환자의 똑똑 하는 노크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늦은 시각에 실례해서 죄송해요.”

 하얀 원피스에 붉은 카디건을 걸친 소녀가 절룩거리면서 진료실로 들어왔다. 환자의 복장은 톨로메아의 계절이 아니면 좀처럼 보기 산뜻한 차림새였다. 물론 밖에 오랫동안 나갈 일이 있다면 역시 코트 하나는 걸쳐야 하겠지만 말이다.

“별 말씀을. 언제든지 찾아주셔도 괜찮답니다. 그나저나 그건 웬 거예요?”

 원피스의 소녀, 피아 녹턴은 붉은 제라늄이 활짝 핀 화분을 하나 들고 있었다. 그녀는 약간 불편한 걸음걸이로 다가가 클로에에게 화분을 건네주었다.

“여기 병원 근처 꽃집 하나 있잖아요. 어제 다음 대의 꽃집 아가씨가 정식으로 가게를 맡게 되었는데, 그 취임기념으로 받은 거예요. 선생님께도 하나 갖다 달라고 부탁을 받아서.”

“고마운 일이군요. 언제 인사라도 한 번 가야겠네요. 근데 다음 대라니……. 운영하는 분이 바뀐 건가요?”

“모모라는 소녀였는데……. 누군지 모르세요?”

“음……. 예, 아쉽게도 기억에 없네요. 아마 병원에 오신 적이 없는 분이 아닐까요. 뭐, 제 입장에서는 환자분들이 없으면 심심……아니, 보람이 없으니 곤란하긴 해도 아프지 않고 건강하다면 그게 제일이죠.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저와 낯선 분들은 축복 받았다고 해야 할지도요.”

“그, 그렇군요. 하하…….”

 농담을 던지며 웃는 클로에에게 피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몇 차례 가벼운 담소를 나눈 후 클로에가 말했다.

“그럼 치료를 시작할까요? 이쪽으로 오세요.”

 클로에와 피아가 향한 곳은 집중치료실이었다. 티마이오스 시스템과 접속하여 그곳에 기록되어 있는 시민들의 생체정보를 바탕으로 어떤 상처나 장애든지 복원할 수 있는 소생관은 코키토스 현존의 최첨단 의료기기였다. 피아가 카디건을 벗고 소생관에 눕자 클로에는 곧장 결여된 생체정보를 채워 넣거나 복원하는 의료작업을 신속하게 실시하였다.

 현재 피아의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잔 다르크와의 싸움에서 분열검 렉스를 너무 과하게 사용한 부작용이었다. 인조혼인 피아는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혼백의 접속이 다소 느슨했기 때문에 한 번 붕괴하기 시작하면 그 속도는 주체할 수 없었다. 그나마 지금은 클로에의 치료를 통해 어느 정도 복구를 시키고, 진행을 늦추고 있는 형편으로, 만약 가만 놔둔다면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피아의 몸은 모래처럼 산산이 흩어질 것이다.

 지금 피아가 평소처럼 흑천사대의 검은 제복이 아니라 평복을 입고 있는 것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무기한 휴직상태에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본래 피아 같은 미등록자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6개월간의 자유휴가를 받고 그 혼은 원동천의 동력원으로서 회수되는 것이 법규였다. 하지만 이번에 새롭게 신설된 조항으로 인해 특별한 사정이 있다면 완쾌될 때까지, 항구적인 불구상태에 빠진 자라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정상적인 치료를 받으며 삶을 누리는 게 허락되었다. 물론 생활하는 데 필요한 보조금은 시市에서 지급되었다.

 현재 피아는 흑천사대를 나와 시내에서 살며 통원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그녀는 한 달 뒤에 반드시 완쾌돼 베르길리우스의 옆으로 복귀하겠다고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는데, 실현의 가능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낫고자 하는 환자의 열의가 높은 건 긍정적인 일이었다.

 1시간에 걸친 치료가 끝난 후 피아는 정중하게 클로에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아까는 절룩거렸던 그녀가 지금은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걸을 수 있었다. 소생관의 치료를 통해 결손부분이 일시적으로 회복된 덕분이었다. 물론 내일이면 또 몸이 허물어지기 시작하겠지만, 지속적인 치료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느슨했던 영혼이 다시 재결속하여 완쾌될 것이다.

“어때?”

 병원 밖에는 베르길리우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까지 사후처리로 바쁠 터인데도 그는 피아의 치료일만 되면 꼬박꼬박 차를 몰고 데려다 주었다.
 피아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역시 완전히 기억을 잃었습니다. 저를 비롯해 여태까지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았던 사람들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3년 전에 베아트리체 님께서 그녀에게 이식한 각종 정보는 자아의 기억으로 분류되지 않은 탓에 남아있어 정상적인 생활은 가능한 모양이지만…….”

“아니, 그것도 물어볼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네 몸이 어떠냐고 물은 거야.”

“아…….”

 피아의 볼이 조금 붉어졌다.
 베르길리우스가 다시 물었다.

“차도는 있는 것 같아?”

“무, 물론이에요! 보, 보세요!”

 피아는 들뜬 듯이 말하며 팔을 빙빙 돌리거나 가볍게 달리는 걸로 건재함을 과시했다. 치료 받은 직후라 통증이 심할 텐데 있는 힘껏 허세를 부리는 피아를 보고 베르길리우스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들고 있는 외투를 피아에게 입히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아무튼 타라. 오늘도 바래다주마.”

 피아를 대하는 베르길리우스의 목소리는 예전과 달리 매우 부드러운 음색을 띠고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변하고 있었다. 그는 요새 들어 사람을 잃는 게 매우 두려워졌다.

 예전의 그는 루치아만 있다면 다른 이들은 어떻게 되건 상관이 없다고 여겼다. 대상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에게 허식은 통하지 않으니 근본 자체가 아름다운 이밖에 사랑할 수 없는 그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변해가던 그의 마음은 이번 사건 이후로 큰 전환을 맞이하였다. 발단은 셀레스티나를 자기 손으로 원동천에 보내 버린 일.

 그는 의존의 감정을 사랑이라 착각해 날뛰는 옛 동료 하나 죽인다고 해서 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셀레스티나의 숨통을 끊은 순간 베르길리우스는 아주 조금이지만 작은 상실감을 느꼈고, 그 구멍은 시각을 더해갈수록 커져 갔다.

 지금 그는 몸이 허물어져 가는 피아가 언제 산산조각이 날지 몰라 마음이 조마조마했고, 자신에 대한 기억을 싹 잊어버린 클로에에겐 섭섭함을 느꼈다. 스스로 생각해도 낯부끄럽고 우스운 일이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은 숨길 수가 없었다. 루치아가 말하고 싶었던 건 이런 거였을까. 너무 빨리 완성된 탓에 자잘하지만 소중한 것들을 놓쳐왔던 사내는 만날 수 없는 연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 육안으로 봐도 수천수만이 넘는 가지각색의 별들은 각자의 빛깔을 자랑하며 각자의 노래를 불렀다. 귀가 아닌 눈으로 들을 수 있는 하늘의 교향곡은 지상의 관중들에게 아득한 환상과 평온한 안식을 가져다주었다.

 베아트리체는 별을 바라보며 한적한 오솔길을 걸었다. 금발이 물결치는 아름다운 시장 뒤로는 몽테크리스토, 메르세데스, 에데라 불리는 3체의 기계인형이 따르고 있었다. 3인 1조로 밀접하게 움직이는 이 오토마타들은 평소에는 좌천사장인 몽테크리스토를 필두로 천체의 업무를 맡고 있으나, 유사시에는 베아트리체의 호위를 우선했다.

 물론 마천루의 4인이라 불렸던 굴지의 과학자들이 만든 걸작 기계인형인 맥베스, 햄릿, 오셀로, 리어왕에 비할 바는 아직 못 되었으나, 베아트리체는 곧 자신의 작품이 동료들의 유품을 뛰어넘게 할 자신이 있었다.

 빛나는 밤하늘 아래 쭉 이어진 고적한 오솔길 끝에는 부드러운 곡선이 아름다운 원형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을 둘러싼 4개의 의자는 한 자리 외에는 모두 비어 있었다.

“여기까지 잘도 찾아왔네. 체셔 고양이라도 될 생각이야?”

 밤하늘을 바라보며 테이블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던 긴 검은 머리의 소녀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느 각도에서 바라보아도 제각각의 멋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조형은 어느 방향에서 시선을 주어도 어그러지지 않는 미를 품고 있는 베아트리체와는 상반된 매력이 풍겼다.

“절 빗대자면 엘리스겠죠. 체셔 고양이는 당신이에요, 루치아.”

 베아트리체는 주인의 허락에 따라 반대편의 빈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기계인형들은 말없이 자리를 비켜 멀찌감치 떨어져 대기했다.

 루치아는 홍차를 따라 베아트리체에게 대접했다. 베아트리체는 감미로운 향을 느끼며 홍차를 홀짝거렸다. 차를 좋아하는 베아트리체로서는 어떻게 하면 이런 맛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해 열렬히 추궁하고 싶었으나, 지금은 따로 물어야 할 게 있으니 참는 수밖에 없었다.
 베아트리체가 말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아마 제게 천사의 피가 섞여 있지 않았다면 당신이 숨어있는 틈새를 찾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겠죠.”

“응. 그렇겠지. 아니, 지금도 충분히 놀라는 중이야. 그리고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고. 줄곧 뱀 말고 다른 이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여기가 당신이 바라는 세상인가요?”

“정확히는 바라는 세상 중에 하나지. 드넓은 하늘, 빛나는 별들, 푸르른 숲, 고요한 시간……. 내 동경憧憬의 속성이 자아낸 무수한 공간 중에는 이런 곳도 있어.”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천문의 연주를 감상하는 루치아의 옆모습은 눈동자에 비치는 세상의 형상처럼 그녀가 즐기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시각적으로 체현하고 있었다. 베아트리체는 새삼스럽게 천사나 악마 같은 인류 고전적인 구분이 우습게 느껴졌다.

 대화의 편의상 그녀도 오래된 관습을 따르고 있긴 하지만, 사실 양자의 구분은 지극히 종교적인 관점에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매도하기 위해 조작된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대악마 월식의 분체는 옆에 있는 천사의 후손보다 훨씬 정제된 숭고함을 품고 있었다.
 베아트리체가 말했다.

“왜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 건가요? 당신이 맡긴 짐은 레이율에게는 너무 무거워요. 그녀는 날이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지요. 도시 또한 그녀와 닮아있고요. 당신에게 이런 부탁을 드리는 건 뻔뻔스러울지 모르겠지만 밖으로 나와 주실 수는 없나요? 전 그걸 부탁하기 위해 여기까지 다다르는 길을 쭉 찾아온 거예요.”

 베아트리체의 호소에 루치아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홍차를 마셨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달의 위치가 조금 바뀌었을 무렵 루치아가 입을 열었다.

“나는 나오지 않는 게 아니야. 나올 수 없는 거지.”

“무슨 뜻인가요?”

“음, 암흑물질의 침식이라든가, 뱀의 통제권 문제라든가, 이유는 여러 가지 있어. 물론 대부분은 번거롭다 하더라도 다른 식으로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는 일이지.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딱 하나 있어.”

“월식인가요…….”

“그래. 본래 우리 분체의 주인, 우리가 하나로 되었을 때 나타나는 진정한 모습이야말로 내가 너희 앞에 나설 수 없는 이유야. 너희들에게 대악마라 불리는 월식月蝕은 인간의 초상을 사랑해. 그녀가 사랑하는 건 초상肖像이기도 하지만, 초상超像이기도 하지. 월식은 너희들을 진정 사랑스럽게 여기며 더 높은 곳으로 데려다 주고 싶어 해.”

“설마 창신계획……. 신화계획을 세운 건 당신의 지식에서 유발된 게 아니라 그 성향에서 비롯되었다는 건가요?”

 놀라며 묻는 베아트리체에게 루치아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월식의 동경憧憬. 그녀가 원하는 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뤄버리고 말아. 만약 내가 표면으로 나서게 된다면 난 너희들을 신神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 거야. 그리고 나와 나머지 다섯 악마들을 막을 자는 코키토스에 아무도 없겠지.”

 베아트리체는 상상하기 싫은 미래에 몸서리를 쳤다. 동경이란 자고로 모든 것을 이끄는 깃발이나 마찬가지. 현재 월식의 분체가 베르길리우스 아래 있다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루치아에게 다스릴 권한을 양도 받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루치아가 깨어나게 된다면 자연히 악마들은 그녀를 따를 것이며 그들이 적대한다면 코키토스의 전병력을 동원해도 막을 수가 없다. 실례로 현존하는 인류 중 최고실력자인 잔 다르크도 무궁의 악마에게 무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루치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월식의 동경이지, 내 동경은 아니야. 난 너희들이 절대신 같이 무가치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지 않아. 그래서 베르길리우스와도 반드시 따스한 태양이 빛나는 봄날에 만나자고 약속한 거야.”

 베아트리체의 표정이 일순 어두워졌다. 솔직히 연적에게는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여기서 사사로운 정을 앞세울 수는 없었다.

“레이율도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응. 레이율은 울보이긴 해도 똑똑하니까 금방 알아차렸어. 그녀는 날 자신의 심층 속에 숨긴다는 일에 동의했지만 거기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지. 아무리 주의를 하고 강해진다 해도 결국 인간은 인간이야. 꼭 수명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죽을 운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지.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내가 표층으로 끌려나오고 신화가 시작될 거야. 그걸 최대한 억누르기 위해 레이율은 기억의 뱀을 끌어들여 한 가지 계약을 맺었어.”

“자신의 기억을 대가로 죽음을 피하는 술법을 쓴 거군요.”

“뱀은 사람의 기억을 아주 좋아하니까 말이야. 악질적인 장난을 즐기고, 인간을 파멸로 이끌어 영혼을 탈취한다는 전형적인 악마. 여하튼 뱀은 기꺼이 레이율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녀가 플라톤이 되어 도시를 지켜온 거야. 물론 도중에는 내 영향을 받아 변질된 모양이지만 너희들이 잘 막아주었으니 다행이지.”

“하지만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어요. 이대로 가다가는…….”

 베아트리체의 탄식을, 루치아는 단호하게 끊었다.

“그래도 버텨. 그렇지 않으면 길이 없어. 시간의 붕괴는 모든 걸 무無로 이끌고 있지. 그 속에서 너희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유有를 창조할 수 있는 절대신의 좌를 노리든가, 아니면 스스로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생산해 죽은 시간의 빈자리를 채우는 수밖에 없어.”

“별 도리가 없군요. 사실 여기까지 살아남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하는데 너무 많은 걸 바라고 말았네요.”

“걱정 마. 월식은 너희의 그런 뻔뻔한 면도 좋아하니까.”

“당신은 어때요?”

“비밀이야.”

 가볍게 농담을 나눈 천사의 후손과 악마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잦아들자 약속한 것처럼 침묵이 내려앉았다.

 두 사람은 조용히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홍차의 맛을 감미했다. 과연 언젠가 저 하늘을 되찾을 날이 올까. 베아트리체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겐 무한이니 영원이니 하는 개념은 너무나도 두렵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옛 하늘을 되찾고 싶다고 생각했다. 무한의 시간을 쌓아야 연주되는 별의 노래를 다시 듣기 위해.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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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who 2014.12.25 05:2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아 모형정원의 나비도 완결을 맺었군요. 즐겁게 보던 시리즈가 막을 내리니 섭섭한 기분이 가득 입니다. 다음 시리즈는 무엇이 나올지 기대가 되는군요. 아, 은세계의 은월이 남았군요. 거기서도 아직 크리스마스의 설램이 남아있을지 모르겠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12.25 22:19 신고 address edit/delete

      메리 크리스마스!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 올해가 가기 전에는 꼭 퇴고판을 다 올리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실현할 수 있어 저도 기쁜 마음이 드네요^^

      으, 은세계의 은월은 과연 재미있게 읽어주실 만한 내용이 될지 걱정....
      아무튼 열심히 쓰겠습니다! >.<

      그럼 얼마 남지 않은 성야, 편안하고 좋은 시간 되시길 바라요~!

  2.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12.25 11:29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그 끝을 기약할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 퍼져나가는 부조리와 고통의 파도 속에서, 무수한 감정의 퇴산(退散)을 거듭하며 일견 뒤틀린 광인의 기행처럼만 비추어지던 잔과 일란의 투쟁이 실상은 점차 사멸해가는 인류를 구원할 단 2개의 해결책 중 하나였다니...

    그러고보면 일란의 경우 정말로 기나긴 세월을 거쳐온 시대와 역사의 증명자일뿐만 아니라, 세계의 구조 그 자체가 무너져 내린 이후에도 플라톤의 측근이자 조언자로서 꾸준히 그 탈출구를 모색해온 현자였기에 누구보다도 빠르게 그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아아.. 자신이 못내 그리워하고 또한 바라마지 않는 루치아가 저러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베르길리우스가 알아챘더라면 코키토스의 운명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베르길리우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잠들어있던 따스한 마음의 빛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한만큼, 그 제1순위의 수혜자인 피아는 물론이고 나아가서 루치아나 클로에에게도 정말 잘 된 일이 아닐까 싶어요.

    음음, 왠지 루치아라면 천체 감상 중 느긋하게 홍차를 마시면서 '후후... 이제야 겨우 졸업을 시켰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남자라니까?' 하고 살며시 미소를 지을 것 같다는 예감이! 'w') 【 - 콰직 - 】

    아무튼 피아 입장에서는 완전 땡잡은 경우로군요~ +ㅁ+) 이제 저 상황을 피아가 눈치채고 베르길리우스를 조금씩 리드하기만 하면 일련의 철벽 방어 체제가 구축 가능하니 말이예요. ( 이겨라 피아!! >_< )


    덧 - 메리 크리스마스~!! :D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12.25 22:53 신고 address edit/delete

      말씀처럼 일란 일행이 추구한 목표도 작중의 절망적인 상황을 타파하는 데는 틀리지 않은 길이었기에 반드시 부정할 수만은 없지 않나 싶어요.

      사실 수단과 결과의 확실성이나,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내려지는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정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몇 년 후에 글을 다시 돌아보면서 더욱 강하게 들기도 하더군요^^;;

      신에 의한 구원과 의존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다리만으로 선다는 것은 분명 인류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긍정하는 멋지고 존엄한 일이라 생각하지만, 어찌할 도리 없는 현실에 고통 받는 사람일수록 그 허울만 좋은 소리에 진저리를 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유니콘 건담에서 마리다가 극한상황에서 신이나 지온에 의지하는 우주개척자들의 심리를 설명하며, 실체가 없는 것에 의지하는 이들을 바보 취급하는 자들은 "꽤나 행복한 녀석이거나, 세간에 관여하지 않는 녀석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라고 신랄하게 평하는 것도 아마 그런 맥락이 아니었을지...

      물론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른 것이 옳은 것이 될 수는 없으며, 현실에서도 불치병의 심한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후세계의 존재와 신에 의한 구원을 거부한 칼 세이건 같은 과학자도 있는 만큼 저도 끝까지 인간의 가능성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에요.


      베르길리우스는 단순한(?) 츤데레에서 내 여자에게는 따뜻한 차가운 도시 남자로 진화! (탕) 피아도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소설 중에서는 몇 안 되는(...) 노멀 커플인 만큼 행복해 졌으면 하는 마음이네요^^

      '밤하늘의 지평'에 이어 이번 퇴고판 소설도 끝까지 같이 달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이제 남은 옛 소설은 없는 만큼 갈수록 발전된 글을 올릴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

      (늦었지만 소디언 님도 메리 크리스마스~!)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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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흩어지는 노을 (10)


 코키토스 능천사대는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루카누스의 지상본부 습격 시 전력의 절반 이상이 괴멸되었으며 도시 전역을 습격해 들어온 이탈자과 싸우면서 또 절반 정도의 병력을 잃었다. 현재 능천사대에서 제대로 활약하고 있는 건 발자크 경감이 지휘하는 무장경관대의 몇 팀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과 활약 덕분에 코키토스 주민들의 피해는 사태에 비해 최소한으로 그쳤다고 할 수 있었다.

 능천사대장 진 호리츠는 현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지금 보이지 않는 전해질로 주변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특수능력을 통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치밀하게 읽고 있었다. 결과는 그가 바라는 최고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우선 능천사대의 쓸모없는 늙은이들이 사라진 게 그는 가장 만족스러웠다. 정말 효과적인 전화 한통이었다. 목숨 연명에만 급급하던 늙은 상급자들은 이탈자를 잡으면 수명연장의 포상을 준다는 말에 겁도 없이 루카누스에게 달려들었다가 전부 목숨을 잃었다. 이걸로 진 호리츠는 무능한 주제에 한 자리 차지하며 개혁에 방해가 되는 최대 장해물을 손쉽게 제거한 셈이 되었다.

 그밖에 능천사대 전원에게 실전을 경험하게 한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많은 숫자가 죽긴 했지만 어차피 머릿수만 채우는 녀석들은 있으나마나다.

 필요한 건 롬발트 경감 같은 고위의 권원자나 지금 부대를 이끄는 발자크 경감 같이 지휘능력이 특출한 부하들. 아마 이 싸움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사후관리만 잘해준다면 역전의 용사로 탈바꿈하리라. 그뿐만 아니라 구성원을 가장 많이 잃은 핑계와 시민들의 안전을 실질적으로 지켰다는 생색을 내어 앞으로 우수한 인재를 차할 때도 상당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점수를 벌 때가 왔군.”

 타이밍을 정확하게 잰 진은 발자크 경감의 부대가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의 권원을 발동해 지켜주었다. 지금 남은 대원들은 우수한 인재이니 실질적으로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직접 같이 싸우는 상사로서 존경심을 모을 목적이 동반된 극히 계산적인 등장이었다. 어차피 좀 있으면 적극적 방해배제 청구를 승인한 역천사대가 출동할 테니 그렇게 무리할 일도 없으리라.

 그에게 있어 이번 참사는 여러모로 수지맞는 장사였다. 그러나 그는 너무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여 플라톤의 황금시대가 도래할 경우 자신이 꾸민 온갖 계획이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는 위험성을 깨닫지 못했다.





 날카로운 궤적이 공중을 달렸다. 궤적은 하나가 아니었으며 방향도 자유자재였다. 난반사된 빛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사방에 퍼진 검의 궤적은 신시아에게 달려드는 이탈자 모두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입혀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질서이탈자들은 자신들처럼 상궤에서 일탈한 검의 궤적에 본능적으로 경계하며 접근을 꺼렸다.

“넌…….”

 신시아를 구한 건 굴절검의 클로디아였다. 클로디아는 암흑물질 퇴치임무가 끝나자마자 이곳으로 곧장 달려왔다. 신시아가 다수의 이탈자를 홀로 상대는 가장 위험한 처지에 빠져있다는 건 통신을 통해 모두에게 전달되어 있었다.

“대체 뭐하고 있는 거예요!”

 이탈자들이 거리를 둔 탐을 타 클로디아는 저 멀리 떨어진 신시아의 대도를 낑낑거리며 그녀에게 다시 던져주었다. 신시아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대도를 가볍게 한손으로 받았지만 손잡이를 쥐는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지쳤거나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 아니라 싸울 의욕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번 꺾인 그녀의 마음은 쉽사리 펴지지 않았다.

 신시아와 클로디아가 머뭇거리는 사이 어느 정도 전선을 가다듬은 이탈자들은 다시 공세로 전환했다. 클로디아는 잽싸게 샤벨을 고쳐 쥐고 돌격해 들어오는 이탈자를 견제했다. 그러나 신시아는 망연자실하게 손을 늘어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죽을 생각이에요?”

“왜 네가…….”

 클로디아가 급박하게 외쳤지만 신시아는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클로디아는 8명의 이탈자를 혼자 상대해야 했다. 클로디아는 특수한 검과 날랜 몸놀림 덕분에 다수의 적을 상대하면서도 궁지에 몰리지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그녀의 샤벨로는 이렇게 많은 적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더 다그치지 않기로 했다.

“제 전생은 코키토스 입국을 거부했던 5만 명 중에 한 사람이었어요.”

“뭐……?”

 넋이 나간 것처럼 기운을 잃었던 신시아도 난데없는 고백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로디아는 마치 춤을 추듯이 유연하게 이탈자들을 농락하며 말을 이었다.

“신생자의 탄생은 동력원이 되는 영혼 중에서 공평하게 뽑는다고 하지만, 실은 시스템에 따라 결정된 가치로 엄격하게 나눠져 있잖아요. 그래서 대개 고위직무자는 또 고위직무자로 태어나고, 하위직무자는 계속 같은 영혼을 대를 잇곤 하죠. 다들 모르고 있거나 쉬쉬하고 있을 뿐이지. 그건 최초에 도시동력 유지를 위해 학살당한 5만 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저는 원동천에 저장된 영혼 중에 무력기관의 고위직무자로서 역할을 수월하게 행할 가능성이 높아 이번에 태어나게 된 거예요.”

 물론 이런 사실을 클로디아가 기억하고 있을 리는 없다. 그녀에게는 생전의 기억이 전무하며 원동천을 떠도는 영혼이었을 때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라도 영혼의 선별이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면 어딘가에는 틀림없이 기준이 되는 자료와 기록이 있다는 소리가 된다.

 행성시대를 비롯해 코키토스가 숨기고 싶어 하는 과거에 관심이 많았던 클로디아는 이곳저곳 머리를 들이민 덕분에 여러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으며, 물론 거기에는 지금 자신의 근원이 되는 출생영혼과 신시아의 과거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클로디아는 지금 신시아가 무엇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지도 알고 있었다. 뻔뻔하리만큼 생존에 탁월한 신시아가 오점으로 느낄 사건이란 그녀의 인생 중 단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난…….”

 신시아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악몽이 현실이 된다는 게 이런 느낌인 걸까. 대학살 이후 한 번도 꺼내본 적이 없었던 뱃속의 내용물과 대면할 것 같은 거북한 기분이 들었다.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성격이 소탈한 그녀가 유일하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일인 만큼 충격의 여파는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신시아가 체험하고 있는 건 눈앞은 캄캄한데, 머릿속은 하얗다는 상반된 형용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죽여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하나? 아니면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대체……. 아아, 모르겠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입을 열 수가 없다는 게 이렇게 답답한 건지는 몰랐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처음부터 신시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전, 감사하고 있어요.”

“그게 무슨…….”

“물론 제 전생은 절대 용서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전 감사하고 있어요. 별로 사람을 죽이는 게 옳다는 것도, 그 학살을 미화하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단지 그 때 제 영혼이 암흑물질에 먹혀버리지 않은 것이,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지 이렇게 다시 태어나 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덤으로…….”

 클로디아는 덮쳐오는 이탈자의 긴 손톱을 피하고,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다른 셋에게 상처를 입힌 다음 한차례 숨을 고른 후 말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해를 기억하고 있는 당신에게도 감사하고 있어요. 자칫 상실되기 십상인 옛 기억을 그토록 선명하게 재생할 수 있는 당신의 존재에 기쁨을 느껴요. 제 전생의 인물은 어떨지 모르지만, 전 당신이 보여주는 잃어버린 시간의 풍경을 바라보고 힘을 얻어요. 언젠가 가졌던 것이라면 또 가질 수 있을 거라 희망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난…….”

“그냥 그 말만 전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다시 말하지만 전 절대 그 학살이 옳았다거나, 면죄부를 줄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거나, 변호를 하자는 게 아니에요. 단지 그 후에 이어진 가치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요. 이제 나머지는 스스로 결정하세요.”

 클로디아는 다소 엄격한 어투로 마지막 말을 남긴 뒤 신시아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생명력이 강한, 즉 시간을 더 많이 품고 있는 상대에게 이끌리는 이탈자의 특성상 적들은 전부 클로디아를 따라 움직였다.

 갑자기 덜렁 혼자 남게 된 신시아는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몸을 떨어야 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은 확실히 뻔뻔스럽다. 어릴 적부터 온갖 가치관이 붕괴한 곳에서 자라왔으니 타인과 감수성이 맞지 않는 건 당연하다. 그녀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악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인 동정심이라든지, 죄의식 같은 게 투철한 편도 아니다. 그녀가 다른 생존자들과 달리 행성시대를 떠올려도 별다른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 건 그런 연유 때문이었다.

 그런 신시아가 유일하게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대학살 사건. 자신만을 위해 타인을 죽인다는 철칙 깬 대가는 컸다. 신시아가 행성시대를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힘들지언정 잘못은 없다고 생각했던 과거로 그녀의 정신이 곧잘 후퇴했기 때문이다.

 신시아는 물끄러미 저 멀리서 다수의 이탈자를 상대로 불리한 싸움을 계속하는 클로디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혼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본래 저 이탈자들이 노리는 상대는 자신이었다. 그러니 저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 자신이다. 그녀가 자신의 짐을 짊어져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신시아는 자문했다. 대체 난 뭘 하고 있단 말인가. 물론 과거를 반성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재차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도, 그를 위해 고민하는 것도 전부 소중하다. 하지만 지금이 과연 그럴 때인가? 비록 기억은 없다고 하지만 자신에게 원한을 가져도 잘못될 것이 없는 소녀에게 도움을 받고, 또 그 소녀가 자기 대신 홀로 싸우게 놔두는 것이 잘하는 짓이란 것인가?

 신시아는 급속도로 머릿속이 명쾌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 한 번 죽도록 고민해보자. 허나 나중에.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괴로워하며 뒹구는 건 할 일을 끝마친 다음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니까. 신시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그녀는 지구를 휘감는 거대한 독사를 보았다 -






 엄연히 말하자면 일란은 어떤 인간에게도 지지 않았다. 현존하는 인간 중 가장 오래 살아온 현자는 이 도시의 누구보다도 현명했다. 클로에도, 베르길리우스도, 베아트리체도 전부 그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늙은 현자의 손에 놀아났을 뿐이다. 그러니 일란은 인간에게는 지지 않았다. 그가 패배한 상대는 다름 아닌 악마였다.

 일란은 알지 못했다. 루치아와 레이율이 비밀리에 어떤 계약을 나누었는지 그가 알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므로 일란이 클로에가 기억을 빼앗겼다 다시 되찾았다고 생각한 건 무리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으면 티마이오스 시스템의 관리자 권한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 베아트리체는 천사의 혼혈로서 적게나마 시간에 간섭하여 인간의 기억을 건드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일란의 착각은 오히려 타당하다고까지 할 수 있으리라. 그가 루카누스에게 당한 클로에가 멀쩡한 이유를 꿈의 수렴으로 판단한 것도 결코 잘못된 추론은 아니다.

 그러나 일란은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악마에게 혼을 팔아서까지 신념을 관철하는 인간의 의지였다.

“오늘 잠자리는 최악이네.”

 클로에는 피가 철철 넘치는 몸을 이끌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다. 몸이 재생될 때까지 기다릴 여유는 없다. 뭔가 소중한 걸 잔뜩 잊어버린 것 같지만 그것도 안타까워 할 여유는 없다. 지금 자신은 다시 태어난 몸이나 마찬가지. 그렇다면 또 다른 생애를 소중하게 쓸 뿐이다.

“안 돼!”

 일란은 뒤늦게 모든 잘못을 알아차렸다. 클로에의 부활은 꿈의 수렴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말 그대로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었다. 아마 그 대가로 바치는 건 일정량의 기억이리라. 클로에의 금발을 침식하는 루치아의 흑발을 보면 확실했다. 클로에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으로 치환해 분산시킨 것이다. 소중한 과거를 대가로 몇 번이고 개체를 유지해 이루고자 한 일을 완수할 수 있도록.

 일란은 예전에 한 번 클로에의 머리카락에 대해 의문을 가지긴 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걸 중시하지 않았다. 클로에의 그릇이 버티지 못해 루치아가 점점 바깥으로 나오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가설은 정확했다. 너무 정확했기 때문에 문제였다. 그는 그 점에 대해 더는 고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 뭐였더라. 당신 누구였더라. 왜 그렇게 울상인 거야?”

 클로에는 경악에 물들어 소리치는 일란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녀는 일란마저 잊고 만 것이다. 베아트리체, 정확히는 베르길리우스에게 패배할 시 백 단위에 달하는 죽음을 경험한 클로에는 거의 대부분의 기억을 잃었다. 3년 전 천체폭파사건 이후 무지를 이용당할 걸 걱정한 베아트리체에게 일정 부분 보충을 받았다고는 해도 어차피 그건 타인의 기억이지 자신의 것이 아니다.

 결국 그녀가 제물로 바쳐야 하는 건 3년 동안 쌓아온 작디작은 추억들. 그녀가 아주 소중하게 여겼던 일란과 잔 다르크의 기억을 잊는 건 합당한 대가였다.

“뭐, 중요한 일이면 생각나겠지. 그보다는…….”

“거기서 손을 떼!”

 일란은 그답지 않게 노성을 지르며 거칠게 달려들었으나 클로에의 손길이 더 빨랐다.

“난 이걸 용서할 수가 없어!”

 방금 죽음에서 벗어나 일란마저 기억 못하는 상황에서도 클로에는 자신이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메스를 휘둘러 무참하게 황금화를 잘라버렸다. 기억을 잃기 전의 클로에는 티마이오스 시스템의 관리자 권한을 버리고, 일시적으로 디스와 연결이 끊어져도 한 번 몸에 걸친 차라투스트라는 당분간 잔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설령 자신이 죽어 기억이 손실된다고 해도 목적만 잃지 않는다면 기회가 있을 거라 판단한 클로에는 옳았다.

 아니, 이건 판단력이라기보다는 용기와 의지의 승리라고 할 수 있었다. 클로에는 자신이 시스템 권한을 버리고 유스티티아에게 다가서는 순간 일란이 무슨 짓이든 해올 거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아! 아아아아아아!”

 바로 눈앞에서 계획이 파탄 난 일란은 울부짖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잔 다르크가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계산 같은 건 없었다. 그들은 당연히 신화를 이뤄낸다고 맹세했고 서약했다. 그러니 타인의 가능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길에만 온 신경을 다 쏟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일란은 포기하지 않았다. 매우 늦긴 했지만 이제라도 모든 구조를 파악한 건 다행이었다. 클로에가 기억을 대가로 목숨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 기억이 전부 말소될 때까지 죽이면 될 일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속에 품은 루치아가 깨어나고 말리라.

 본디 일란은 루치아의 뜻을 이끌어낸 플라톤을 대리자로 내세울 생각이었다. 사실 티마이오스 시스템은 아무리 황금화라 하더라도 마지막 순간에는 관리자의 승인 없이 완전히 장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단순히 열둘의 영혼에 사상을 덧씌워 재배시킨 황금화는 주로 그 완결성을 내재적으로 발휘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시스템의 중추는 루치아가 직접 설계한 것으로서 그와 동급인 황금화로서는 완벽한 해제가 불가능하다. 일란이 굳이 클로에에게 모습을 보이고 이곳까지 유인해 일대일 상황을 만든 건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플라톤이 이제 없는 인물이나 마찬가지라면 대신 루치아를 깨우는 수밖에 없다. 과연 그녀가 협력해줄지 어떨지는 미지수였지만, 플라톤의 계획이 동경의 악마에게서 유발된 점을 생각해 보면 그 가능성은 적지 않았다. 설령 지금 신화를 실패해 처음부터 계획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해도 만약 다른 다섯의 월식의 분체를 부릴 수 있는 그 악마가 협력해주기만 한다면 성공은 이미 예정된 일이나 마찬가지리라.

 일란은 아직 유지되고 있는 티마이오스 시스템의 일부 권한을 이용해 유스티티아를 움직였다. 유스티티아의 검이라면 효과적으로 클로에를 처단할 수 있다. 과연 그녀의 기억이 완전 말소되기 전까지 몇 번이나 죽여야 될까. 그런 건 모르다. 앞으로 다섯 번이나 열 번 정도일 수도 있고, 어쩌면 백 번은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몇 백번이고 내리치자. 루치아를 불러내 신화계획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면 그 정도 수고는 일도 아니다.

 살아나는 도중에 힘을 소비한 클로에는 상처가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아 대량의 피를 흘린 채 거의 정신을 잃고 있었다. 사死에서 생生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도중에 정신을 차릴 정도로 강한 집념은 감탄스러웠지만, 이 경우는 도리어 해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힘을 완전히 회복한 다음에 일란의 뒤를 쳤다면 그는 기사회생의 기회조차 꿈꾸지 못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허나 일란은 악마가 얼마나 악랄한 존재인지 아직까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일란이 유스티티아에게 처형의 손짓을 하려는 순간 클로에의 그림자가 불쑥 일어나더니 일란을 크게 비웃었다. 일란이 그 의미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디스가 장치해둔 특전이 발동했다.

“뭔가 했더니……. 이런 거였나.”

 클로에의 그림자를 통해 등장한 것은 베르길리우스와 그가 부리는 월식의 분체들이었다. 일란의 계책보다 한수 더 위를 읽은 디스의 수법. 반지나 머리장식 같은 매개재를 이용해 악마를 불러낼 수 있는 것처럼 같은 매개재의 소유자끼리 서로를 부르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정확히는 매개재의 소유자를 직접 불러낸다기보다는 다른 매개재의 악마를 억지로 소환하는 와중에 부수적으로 딸려오는 쪽에 가까웠으며,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재주도 아니었다.

“빨리!”

 그러나 이런 상황까지 와서도 일란의 집착은 여전했다. 그는 단 한 번이라도 더 클로에를 죽이고자 하였다. 혹시 다음 소생 시 클로에의 기억이 대해 루치아가 튀어나올지도 모를 일. 아무리 희박한 가능성이라 하더라도 일란은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유스티티아의 검은 클로에에게 닿지 않았다. 일란만큼은 아니지만 베르길리우스 또한 선천적인 통찰력을 통해 몇 초 안 되는 시간 동안 상황파악을 완료했다. 이미 클로에는 불굴의 악마가 보호하고 있었다.

“…잔!”

 이렇듯 할 수 있는 모든 시도가 막힌 후에야 일란은 파트너를 떠올렸다. 자신이 안 된다고 해도 아직 그녀가 남아있다. 그럼 자신이 해야 될 일은 그녀가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방해자를 들이지 않는 것이다. 일란은 월식의 분체를 상대로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간을 끌 요량으로 몇 가지 다른 진형을 발동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일란의 눈물겨운 노력은 시작하기도 전에 좌절을 맞이해야 했다.

“결국 불러냈군…….”

 베르길리우스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엄청난 굉음이 울리더니 대법정의 입구가 거인의 주먹에 맞은 것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폭발의 진원지에는 만신창이가 된 여기사 하나가 나뒹굴고 있었다.

“아아…….”

 잔 다르크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지만 한계를 맞이했음은 누가 봐도 명백했다. 빈틈없는 강도를 자랑하는 천사의 갑주는 어디론가 산산이 흩어져 있었으며 뚫지 못하는 게 없는 가시나무 창은 절반으로 부러져 있었다.

 그런 잔을 내려다보고 있는 건 왕과 해골의 머리가 한 몸에 공존하고 있는 무궁의 악마, 플루톤=플루토.

 허나 저승과 재보의 고대신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피아의 힘이 부족한 탓에 상체밖에 빼지 못했다 하더라도 한 때 신으로까지 떠받들어졌던 월식의 분체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고 있었다. 그가 쓰고 있는 왕관은 몇 군데 뿔이 부러졌으며 해골 얼굴은 반쯤 박살나 흉악함을 더했다.

 그래도 힘을 전부 소진한 잔에 비해 플루톤=플루토는 훨씬 여유가 있었고 상처의 회복도 빨랐다.
 무궁의 악마는 오른손에는 부상당한 피아를 보호하듯이 들고, 왼손에는 구부러진 흑요석의 검을 쥐고 있었다. 검에서 뿜어 나오는 광채는 눈부시게 찬란하면서도 목덜미에 칼을 들이미는 것처럼 어딘가 위협적으로 번쩍였다. 실제로 잔의 갑주와 창도 그 광채를 품은 플루톤=플루토의 검과 부딪치면서 전부 깨져나갔다.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불사자로서 새로운 인생을 맞은 이후 누구에게도 진적 없는 잔 다르크가 맥을 못 추는 것을 본 일란은 자신들의 패배를 시인했다.

 성공을 전제로, 성공을 약속하고, 성공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애초에 서로의 전력 차가 너무 심했다. 과거 플라톤이 패배할 때 적들의 힘을 모조리 파악하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물론 플라톤이 빠른 판단으로 자신들을 잘라내었기에 두 번째 시도를 위한 발판을 닦을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좌절하고 말았으니 헛수고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아니다. 여기서 마음을 약하게 먹을 수는 없다. 지금이라도 저들의 저력을 알아냈으니 다행이다. 다음에는 더욱 강대한 수단을 동원해 도전하면 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도 여기서 무너져서는 안 된다. 과연 일란은 천년을 넘게 수라장을 헤쳐 온 현자답게 패배의 충격을 극복하는 것도 빨랐다.

 아직 이 대법정 안에는 일란이 장치해둔 몇 가지 진형이 남아 있었다. 일란은 급히 쓰러진 잔에게 달려가 도망치기 위한 마술을 발동시켰다. 대법정 전체가 고열로 휩싸였으며 일란과 잔의 주변에는 구획폐쇄와 비슷한 장막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녹턴, 끝내버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와 피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베르길리우스는 석상의 여기사, 불굴의 악마로 자신과 정신을 잃은 클로에를 수호하는 동시에 삼두견인 집념의 악마를 보내 그들이 생성하는 장막에 화염을 토하게 했다. 덕분에 장막이 생성이 주춤한 틈을 타 피아의 부탁을 받은 플루톤=플루토가 힘껏 검을 내리쳐 두 사람에게 종언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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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who 2014.12.21 18:0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드디어 기나긴 여정의 끝맺음을 할 시간이 오고 있습니다.
    이번 소설은 유별나게 오랜시간동안 영화를 본 느낌입니다.
    별세계의 별리가 동화같고 은세계의 은월이 연극을 보는것만 같다면
    모형정원의 나비는 마치 영화같습니다.

    과연 우리의 현자는 여기서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다음주에 계속!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12.21 22:21 신고 address edit/delete

      아앗, 부족함이 많은 소설을 여러 매체에 비유해 주시다니 기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옙, 말씀처럼 이제 다음 편이 마지막 화가 되겠네요. 수정판의 연재는 불규칙하기도 했고, 또 용어수정 외에는 실질적으로 크게 고친 부분이 없기도 하여 여러모로 죄송스러운 마음이ㅠ_ㅠ 그래도 이렇게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그럼 조만간 최종화에서 다시 뵈어요~>.<

  2.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12.22 00:28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실로 무수한 이들의 피와 눈물 위에 조금씩 덧칠되어온 잔과 일란의 이상향.

    그 굴절된 영원으로의 장대한 여정이, 마침내 끝을 고하게 되었군요.

    과연 그와 그녀들이 추구해온 존재의 의미와 정체성, 그리고 그 가치에의 구도행(求道行)에 세계는 어떠한 해답을 제시하게 될 것인지...


    슬픈 도시의 전설 중 하나로 남게 될 대활극의 마지막 이야기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D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12.22 23:10 신고 address edit/delete

      작중 현자와 성녀는 악몽 같은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극단적인 수단을 통해 목적을 이루려 했으나, 끝내 그 마음도 시도도 닿지 못하고 말았지요······.

      사실 듣기에는 진취적이지만 실질적인 해결수단은 무엇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클로에 일행의 번지르르한 주장보다는, 어쩌면 구체적인 구원의 수단을 가지고 있는 현자 일행 쪽에 좀 더 정당성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 살짝 마음이 복잡하기도 하네요^^;;

      아무튼 이제 다음이 마지막 화... 이번 소설도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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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흩어지는 노을 (9)


 옛 사람들은 하늘의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을 천상의 누군가가 지상을 엿보기 위해 뚫어놓은 밤하늘이란 장막의 구멍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고대인들의 상상이 지금 여기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목성천의 초승달을 억지로 넓혀 하늘 아래를 내려다보는 검은 눈동자. 마녀들의 흉성凶星은 자신들의 일족과 천체가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나 출현했고, 그에 따라 지상에는 수정의 숲이 자라났다.
 잔 다르크는 하늘 위의 흉성과 사방에 돋아나는 자수정의 나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피아, 역시 넌 마녀의 딸이었어. 외톨이 마녀는 실패하지 않았던 거야.”

 있는 힘껏 힘을 소비한데다 부상까지 입은 피아는 정신이 몽롱했지만, 주변의 이변과 잔의 말을 통해 어떤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지 인식할 수 있었다.

“전, 원래 이걸 불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였으니까요…….”

 피아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오로지 마녀들의 별을 지상에 불러내기 위한 열쇠로서 제작된 것이 피아 녹턴이란 존재인 것이다.

 마녀들은 시간이 붕괴된 후에 코키토스에 입성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도피처를 따로 만들어냈다. 사람의 영혼에 직접 접속하여 그 심상을 통해 세계에 간섭할 수 있었던 마녀들은 서로 힘을 합쳐 외부의 어떤 작용에도 간섭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별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그 세계는 어떤 면에서는 플라톤이 태초에 세운 계획과 닮은 면이 있었다. 사람의 영혼과 거기서 파생되어 나오는 사상을 종합하여 이상향을 만든다는 발상은 양자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허나 마녀들의 세계는 오로지 마녀로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입성할 수 있었다.

 외톨이 마녀는 그 자질이 부족하지는 않았으나, 그 밀폐된 세상이 싫어 편입을 거부한 자였다. 그러나 코키토스를 비롯하여 시간의 붕괴에서 살아남은 다른 몇몇 세계도 결코 만족스러운 곳이 아니었기에 외톨이 마녀는 플라톤의 계획에 협력한 것이다.

 플라톤이 외톨이 마녀를 부른 이유는 신화神化 계획을 좀 더 탄탄히 다지기 위함이었다. 플라톤의 계획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몇 가지 존재했는데, 그 중 하나가 꽃의 재배를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해도 자립하여 절대성의 무한복제가 가능한 수준에 다다르기 위해선 다른 장치를 통해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 확산을 위해 이용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가 바로 티마이오스 시스템의 장악이었으며 또 다른 하나는 마녀들의 별을 불러내 꽃과 융합시키는 것이었다. 마녀의 흉성은 이미 그 자체로 어느 정도 완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위에 꽃의 방향성이 더해진다면 신화神化를 촉진적으로 유발시킬 수 있었다.

 마녀의 흉성은 자신들의 동족을 구원하고 별의 내구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같은 마녀의 일족 앞에만 나타나는 특성이 있었다. 그래서 외톨이 마녀는 피아를 만든 것이다. 외톨이 마녀는 최초의 편입거부 시 자격을 박탈당하여 흉성을 부를 수가 없었다.

 마녀의 일족이라는 열쇠가 있다면 흉성을 불러내는 방법은 다양했다. 마녀의 일족 스스로 간절히 염원하여 별을 불러낼 수도 있고, 일종의 강림의식을 치르는 것으로도 가능했다. 그리고 마녀의 일족이 한계를 넘어 힘을 발휘하려 하거나, 직접적으로 신체에 심대한 위협을 받아도 흉성은 반자동적으로 동료를 돕기 위해 나타났다. 그 때문에 베르길리우스는 피아에게 부담이 심한 렉스의 사용을 금하고, 잔 다르크와 싸우게 되면 클로에를 내버려두어도 좋으니 방심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다.

“자, 너도 구원해주마.”

 잔은 쓰러진 피아에게 다가가며 품속에서 오색으로 빛나는 꽃 한 송이를 꺼내들었다. 그 오색화는 베아트리체의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신화계획이 완성 직전까지 갔음을 증명하는 유물이었다. 일란은 치밀했다. 그 음흉한 현자는 과거에 재배가 거의 끝난 꽃을 재사용하지 않고, 굳이 새로 재배하는 걸 통해 선택의 여지를 넓힌 것이다.

“아, 안 돼……. 제발, 제발 그만두세요! 전 신 같은 건 되기 싫어요! 아무런 구별 없는 완벽 따위는 손에 넣기 싫다고요!”

 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으나 잔은 귀가 막힌 사람 마냥 모른 채 무시했다. 이미 잔의 결정은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세상에 절망해온 성녀는 이 불완전하고 더럽기 그지없는 인간에게 어떠한 가치도 찾지 못했다. 사람을 넘어선 숭고한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잔은 뭐든지 다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 울타리 안에 소중한 제자도 포함시키는 건 그녀 나름의 자비이자 애정표현이었다.

 이제 남은 한걸음. 피아를 양분으로 오색화를 황금화로 바꾼 다음 흉성이 사라지기 전에 그마저 꽃에게 바쳐버린다면 설령 일란이 티마이오스 시스템을 장악하는 일에 실패한다고 해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피아의 눈물과 애원과 절규에도 불구하고 잔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요. 전, 잔과 함께 하고 싶었는데…….”

“걱정하지 마. 완벽한 세상에서 앞으로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을 테니까.”

 제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상냥하게 말을 건넨 것이 잔의 크나큰 실책이었다. 그녀는 이걸로 모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아니요, 불가능해요. 잔의 여행은 여기서 끝나니까…….”

“……!”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잔 다르크가 손길을 서둘렀지만 한 번 흘러간 시간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다. 피아는 떨리는 손길로 아까부터 꼭 쥐고 있던 베르길리우스의 반지를 쓰다듬으며 외쳤다.

"A l'alta fantasia qui manco' possa!"

 베르길리우스로부터 전수받은 죽은 언어. 사라진 언어로부터 유발되는 건 똑같은 과거의 유물 뿐. 월식의 분체를 봉인한 베르길리우스의 반지에서 튀어나온 건 무궁無窮의 악마였다. 악마는 찬란한 왕관을 쓴 위엄 있는 왕의 얼굴 뒤에 썩어문드러져 해골만 남은 사신의 이면을 함께 갖추고 있었다.

 악마는 거대했다. 피아의 여력이 부족하여 아직 완전히 소환되지 않고 오직 얼굴과 상체 절반만 강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크기는 보통 인간의 열배에 달했으며 왼손에 들린 보석처럼 빛나는 일그러진 검에서는 인간은 절대 굴복할 수밖에 없는 재앙이 느껴졌다.

 악마의 이름은 플루톤=플루토. 저승과 재화를 지배하는 이 고대신은 순수한 파괴성만을 따지자면 월식의 분체 중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였다.

“어째서……!”

 잔 다르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저게 피아의 손에 있단 말인가.
 잔도 베르길리우스가 자신조차 감당하기 힘든 악마를 루치아에게 양도받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란도 최대한 베르길리우스가 이쪽으로 오지 않도록 여러모로 신경을 쓴 것이고, 잔 또한 일이 잘못되어 그와 싸우게 된다면 목숨을 걸 작정이었다.

 그러나 피아가 베르길리우스의 악마를 가지고 있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잔과 일란이 후천적으로 오랜 경험을 통해 세상의 본질을 깨닫고 절망했다면, 베르길리우스는 선천적인 능력 덕분에 짧은 시간 만에 그들과 같은 경지에 다다른 자이다.

 딱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베르길리우스에게는 루치아라는 의지할 수 있는 도피처가 존재했다는 것. 그렇기에 베르길리우스는 플라톤을 배신하고 신화계획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었다.

 허나 그건 반대로 말하자면 그의 입장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루치아 이외에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는 존재라는 뜻도 된다. 베르길리우스가 슬픈 도시를 지키는 건 루치아의 약속에서 비롯된 연장선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토록 헌신적이고 맹목적인 악마의 연인이 고작 자신의 시종 따위에게 그녀의 기원이 되는 월식의 분체를 맡긴다고? 잔과 일란이 알고 있는 한 베르길리우스는 결코 그럴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냉혹하다. 아무리 가설이 확고했다 해도 실제로 맞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피아에게는 베르길리우스의 반지가 있었고, 월식의 분체가 그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서 있었다.

“역시 신의 뜻을 가로막는 건 악마인가. 좋아. 이마저 넘어주도록 하지.”

 그러나 잔 다르크는 물러서지 않았다. 비록 상대가 아무리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

 물론 자신이 실패해도 일란이 성공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잔은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면이 있다면 절대 그 가능성에 의존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만의 하나 일란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자신이 반드시 계획을 실현시켜야만 한다. 그런 필사적인 정신이 아니라면 어떤 일이건 성취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화神化는 이미 천이 넘는 세월 동안 지옥에서 살아온 잔 다르크에게 있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가치보다도 확고한 구원이었다. 순교자란 때때로 눈이 멀어 지상의 이치 따위는 무시하고 무리한 수단을 통해 초인적인 힘을 내는 법. 잔은 죽어도 움직일 각오로 한때 신으로 숭배 받았던 악마에게 달려들었다.




 폐쇄된 구획 전체를 큰 불길로 전소시킨 셀레스티나는 충만한 기분으로 죽음을 기다렸다. 베르길리우스가 죽는다면 이 공간도 소멸할 테니 자신은 사랑하는 연인과 하나가 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플라톤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자신들은 엄연히 한 몸이 되어 영원의 순간으로 뛰어드는 기록을 남기게 될 터. 그 후에 모든 것이 의미를 상실한다 해도 셀레스티나는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베르길리우스의 테네브로소는 무너지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셀레스티나가 불길을 걷자 놀랍게도 베르길리우스는 그 화염 속에서도 그을린 구석 하나 없이 건재했다. 멀쩡한 베르길리우스의 모습을 본 셀레스티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셀레스티나가 눈길을 준 건 베르길리우스가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다른 존재였다.

 베르길리우스 옆에는 돌로 만들어진 한 조각이 서 있었다. 두터운 갑옷으로 몸을 감싼 아름다운 여기사의 형상으로 조각된 석상은 마치 살아있는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베르길리우스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이 석상의 힘 덕분이었다.

“말도 안 돼… 어째서 그런 게 당신 옆에… 대악마 월식의 분체, 불굴不屈의 악마, 지옥의 성벽이…….”

 셀레스티나는 생각이 모자랐다. 아카데메이아 시절에는 사랑에 취해, 그리고 지금은 힘에 취해 왜 베르길리우스가 고위 3계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지 깊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분명 페카토만 사용하는 베르길리우스라면 오히려 피아보다도 훨씬 그 힘이 떨어졌음에도 셀레스티나는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니 고위 3계라는 평가조차 그가 부리는 악마 중 1체 만에 해당하는 평가라는 것도 알 리가 만무했다.

“왜 당신이 그걸…….”

 그러나 행성시대를 모르고, 베르길리우스에게 의존만 하려 했던 셀레스티나도 기록을 통해서는 월식과 그 분체들이 어떤 존재인지, 얼마나 힘을 지니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한때 부학장직을 맡았던 몸인지라 공개된 지식만큼은 확실하게 입력되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셀레스티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사고가 유연하지 못한 셀레스티나는 힘으로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짝사랑 상대가 실은 코키토스 건립에 관계된 전설적인 존재였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연해 있는 셀레스티나에게 베르길리우스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진심으로 널 동정한다. 널 불쌍하게 생각해. 세상을 두려워하고 무언가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네 모습은 예전의 나와 많이 닮았어. 아마 나도 루치아가 없었다면, 그리고 그녀가 날 받아들여주지 않았다면, 너랑 똑같이 변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너에게 루치아가 내게 해줬던 것과 같은 빛을 베풀어줄 수가 없어. 내 인생은 2인승이고 그 옆자리는 이미 예약되어 있으니까. 그러니, 셀레스티나……. 하다못해 편하게 보내주마.”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베르길리우스의 마지막 말은 확실한 사형선고였다. 셀레스티나 또한 그 사실을 깨닫고 베르길리우스가 무언가를 벌이기 전에 재차 화염을 일으켰다.

 그러나 불굴의 악마는 아주 조그마한 불씨 하나조차 절대 베르길리우스의 몸에 닿게 하지 않았다. 사후세계의 죄인들을 수용하는 성벽으로까지 일컬어졌던 돌로 된 여기사는 자신의 몸은 물론이고 그녀가 인정한 사람에게까지 불가침의 장벽을 칠 수가 있었다.

“Conditio sine qua non.”

 죽은 언어와 함께 베르길리우스는 또 다른 악마를 불러내었다. 머리가 셋이 달린 집념執念의 악마. 고대에서 지옥의 파수꾼이라 일컬어지는 번견의 모습을 한 악마는 인간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몸집을 한 괴물개였다. 각각의 머리에서 새어나오는 파랗고 노랗고 붉은 불길은 암흑물질의 또 다른 현신이라 할 수 있는 셀레스티나의 불길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아아, 아아아…….”

 셀레스티나는 도저히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자신의 불길은 베르길리우스에게 닿지 않는 반면, 삼두견三頭犬의 불줄기는 정확하게 그녀를 노리고 뿜어졌다. 괴물개는 덩치에 맞지 않게 날렵했으며, 사냥개가 덫에 걸린 사냥감을 제압하듯이 나비날개를 가진 셀레스티나를 짓눌렀다.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칼날이 빈 페카토에 대對 암흑물질용 탄환을 넣어 셀레스티나의 머리와 심장에 각각 한발씩 쏘았다. 총탄은 정확하게 암흑물질의 중추를 관통하였으며 완전히 심신이 소비되기 전에 간신히 남아있던 셀레스티나의 영혼은 원동천으로 회수되었다.

 일을 끝낸 베르길리우스는 진저리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셀레스티나를 쏘는 순간 뭔가 가슴이 욱신거리는 게 기분이 영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적당한 설명을 채 붙이기도 전에 재차 이변이 발생했다. 그가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환희歡喜의 악마를 봉인하고 있는 반지가 멋대로 반짝였던 것이다.

“무슨 일이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특이현상에 베르길리우스가 관심을 갖고 유심히 반지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모습이 마치 공기 속에 비밀 문이라도 있는 것 마냥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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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12.19 13:58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장대한 역사적 흐름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그야말로 찰나의 반짝임에 불과할 인류 개개인의 삶과, 그 제한된 수명과 피육의 굴레로 말미암아 어떠한 이상향의 편린에조차 도달해보지 못한 채 사라져가야만 한다는 극도의 무력감.

    필시 이번의 신화 계획은 그 미래의 불확정성과, 한치 앞도 기약하기 힘든 세계의 굴절되고 갈라진 구조 속에서 잔과 셀레스티나가 평생에 걸쳐 바라고 또한 갈구해왔던 단 하나의 등불이었던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녀들에게 있어 정말로 소중했던 존재들이 준엄한 법관으로써 가차없는 심판을 행하게 되었으니... 그렇기에 또한 세상의 일이란 참 얄궂은 것이 아닐까 싶어요.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12.20 12:56 신고 address edit/delete

      셀레스티나의 경우는 결국 아름다운 꿈의 실현을 보는 일 없이 사랑하던 사람의 손에 의해 한 마리 무력한 나비처럼 덧없이 꺾이고 마는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지요.

      결말 자체는 아마 지금 다시 쓴다 해도 크게 변하지는 않겠지만, 역시 좀 더 행복하거나 의미 있는 마지막을 줄 수는 없었나, 하는 아쉬움은 남는 듯싶어요. 주제 넘게 모 작가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도 끝까지 캐릭터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하는 타입인지도 모르겠네요^^;;

      또한 잔 다르크나 일란의 경우는 좀 더 그들의 심정과 주장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 지금 다시 글을 쓴다면 그들 일행 쪽에 좀 더 무게가 실리는 전개가 펼쳐질지도... 작중 잔의 경우는 차후의 작품에서도 재등장을 생각하고 있기는 한데, 과연 언제 쓰게 될지는 언제나처럼 미지수네요^^;;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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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흩어지는 노을 (8)


 잘라라, 잘라라, 잘라라, 잘라버려라! 우리는 언제나 대속의 희생양을 원한다. 왕이든 왕비이든 사제이든 귀족이든 학자이든 독재자이든 상관없다. 책임을 물을 수 있다면 아주 만족한다. 우리를 즐겁게 하고, 우리의 결속을 강하게 해줄 수 있다면 그 누구의 머리라도 잘라버려라! 단두대에 올리는 건 그대의 머리, 그대의 머리는 축제의 제물. 자아, 어서 바쳐라!

 일란이 읊는 문구에 따라 출현한 처형대에 클로에의 몸이 묶인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일이 진행된다. 이곳은 오직 처형하기 위해서만 마련된 공간. 사형수로 지목된 자는 저항할 도리 없이 이 세계의 법칙을 따라야만 한다. 꼼짝 없이 결박된 그 위로는 단두대의 칼날이 시퍼렇게 빛나고 있다. 그 주위에는 하얀 가면을 쓰고 검붉은 예복을 입은 수 백 명의 집행인들이 깔깔 거리며 춤을 춘다. 단두대의 칼날을 묶고 있는 줄 곁에는 가면 쓴 덩치 큰 남자가 하나가 도끼를 내리친다.
 일란은 선고했다.

"Execution!"





 조여라, 조여라, 조여라, 조여 부숴라! 나는 너희들의 총의總意에 의해 태어난 자. 내 몸을 이루는 수없는 물고기의 파편은 전부 너희의 혈육. 내가 행사하는 전권은 모두 너희에게서 발의한다. 나는 너희의 대리자, 나의 뜻은 바로 너희의 뜻. 난 너희들의 편의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너희들이야말로 나의 편의에 맞추어 움직일 지어니. 무고한 날 매단 사형대는 조여 부숴버려라!

 클로에에 노래에 이끌려 바다의 괴물이 등장한다. 사람의 피와 살로 구성된 리바이어던에게 계약에 묶인 가면 쓴 집행인들은 거역할 수가 없다. 괴물이 몸부림치자 단두대는 박살나며 칼날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떨어진다.
 클로에는 선언했다.

"Not Guilty!"





 태워라, 태워라, 태워라, 태워버려라! 의심나는 건 뭐든지 화형대에 매달아라. 몽매와 무지가 지배하는 시대에 신비주의를 매장하라. 이단자를 죽이고, 마녀를 죽이고, 악마를 죽여라. 불은 모든 걸 정화해준다. 우리는 맹신자, 계약 따위 알 바 아니다. 착각해 무고한 이를 죽인다는 걱정은 하지들마라. 신은 자신의 자녀를 알아서 돌보신다. 그러니 우리에게 거슬리고, 우리에게 맞지 않고,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건 맹목적으로 태워 죽여라!

 괴물의 난동으로 가면에 금이 간 집행인들이 장작을 던진다. 화형장의 죄인이 된 클로에와 리바이어던은 꼼짝없이 기둥에 결박돼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진다. 이윽고 횃불이 던져지고 장작에 불이 붙자 그 열기를 이기지 못한 바다의 괴물이 먼저 증발하고 만다. 불길은 곧이어 클로에를 향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일란은 선고했다.

"Execution!"





 흩어라, 흩어라, 흩어라, 흩어 없애라! 신의 이름을 앞세운 폭도들의 어리석음을 경멸해라. 옥석 가리지 않고 군체의 안위만을 경계해 닥치는 대로 불어나 다른 이를 짓누르는 건 암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사람의 광기는 더욱 큰 광기로 다스리는 수밖에 없다. 늙은 용을 불러내라. 그에게 광야에 있는 자신의 성녀를 지키게 하라. 위대한 용이여, 꼬리를 흔들어 장작을 흩어 없애라!

 몸통이 붉고 여러 개의 머리에 왕관을 쓴 늙은 용이 나타나 화형장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용의 끓어오르는 유황은 형장의 불길보다 뜨거웠으며, 용의 거대한 꼬리는 장작과 함께 집행인들도 단번에 날려버릴 만큼 강인했다.
 클로에는 선언했다.

"Not Guilty!"





 쏘아라, 쏘아라, 쏘아라, 쏘아 죽여라! 우리에게 거역한 자는 모두 총살형이다. 총탄은 그것을 쏘는 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언제나 정직하다. 맞은 자는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것이 지극히 올바른 순리. 둔하게 빛나는 탄환의 궤도는 심판의 올바른 기치를 올리며 어떠한 동기마저 정당화한다. 반대자의 몸을 묶어 눈을 가린 후 쏘아 죽여라!

 하늘의 별만큼 무수한 총구가 사방에 출현한다. 그 숫자가 너무나도 많은 탓에 결집된 총들이 또 하나의 거대한 총처럼 보일 지경이다. 갖가지 크고 작은 검은 총구는 하나 같이 클로에와 늙은 용을 겨누고 있다. 이윽고 발사된 총탄에 늙은 용이 몸을 던져 클로에를 지키지만 비처럼 쏟아지는 집중사격을 받아 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닳아 없어지고 만다. 다음 2차 사격이 클로에를 향해 정조준된다.
 일란은 선고했다.

"Execution!"





 던져라, 던져라, 던져라, 몸을 던져라! 작은 동전에서 태어난 병사들은 수없이 분열하며 저항한다. 그대들은 스스로 분쟁을 일으키기 전까진 결코 멸하지 않는다. 황무지에서도 악착 같이 돋아나는 잡초처럼 끈질기게 악덕의 발목을 잡고 늘어선다. 그대들은 저들에게 풀뿌리의 무서움을 가르쳐 주어라. 너희들이 아무리 억눌러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가치를 가르쳐 주아라. 악성의 흉탄을 향해 몸을 던져라!

 클로에가 머리장식인 네잎클로버에서 튀어나온 동전을 던지자 거기서 인간이 하나 자라난다. 총탄을 맞고 부서지는 동전인간의 파편에서는 또 다른 동전인간이 자라나며 동전인간의 숫자는 그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별처럼 많은 화기의 총열이 녹아내릴 때까지도 동전인간의 증식은 여전히 멈추지 않는다.
 클로에는 선언했다.

"Not Guilty!"





 찢어라, 찢어라, 찢어라, 찢어발겨라! 아무리 용감한 무리라도 정도를 초월하는 고통에는 당할 수가 없다. 회피할 수 없는 절망 속에 신체의 모든 부위가 통각을 저주하며 비명을 지르게 하라. 우리는 질서를 바로세우기 위해서라면 끔찍한 형상을 통해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길을 잘못 든 심각한 죄인을 올바르게 인도하기 위해선 능지처참도 마다할 필요가 없다. 고개 돌리는 반역자를 붙잡아 찢어발겨라!

 여러 번의 격전을 통해 가면이 깨지고 옷이 찢겨져 나간 집행인들의 정체는 누렇게 삭은 해골이다. 엄청나게 불어난 동전인간들을 훨씬 상회하는 숫자로 구성된 망자亡者들의 군대는 들고 있던 총을 버리고 뼈만 남은 손을 내밀어 일일이 상대를 조각내기 시작한다. 죽은 자에게 직접 닿은 동전인간들은 분열하지 못하고 그대로 파괴된다. 주위를 둘러싼 동전인간들이 사라지자 망자들의 손은 클로에에게 향한다.
 일란은 선고했다.

"Execution!"





 숙여라, 숙여라, 숙여라, 고개 숙여라! 너희들은 어리석다. 너희들은 나약하다. 너희들은 왜소하다. 스스로의 야만성과 무지몽매함을 한탄하고 허리를 굽혀 더 높은 가치에 굴복해라. 언제까지 땅바닥에 기어 다닐 셈인가. 사람은 더 높은 경지를 노려야 한다. 정체도 알 수 없는 적의와 누구에게 향하는지도 모르는 폭력으로 타인을 벌하지 마라. 그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다. 자신을 보다 갈고 닦기 위해 고개를 숙여라!

 환하게 빛나는 제사장이 강령한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가 강한 탓에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지만 원대한 지식과 무한한 지혜를 품고 있는 성자聖者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히에로판테스의 빛에 망자들은 얼굴을 가리고 도망친다. 산 자라면 그의 가르침에 정신적으로 한층 높이 다가설 수가 있지만, 죽은 이들은 그저 스러질 뿐이다.
 클로에는 선언했다.

"Not Guilty!"





 달아라, 달아라, 달아라, 매달아 찔러라! 절대자는 한 분뿐으로 족하다. 진리의 말씀은 오로지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나머지는 배제해라. 가식의 신, 허식의 왕, 거짓의 주인. 오류와 독선으로 성립된 유일신의 독생자를 홀로 남은 참된 빛으로 위장하라. 그 외에는 전부 철저하게 규탄해도 좋다. 은폐하고 매장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우리의 가짜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십자가에 매달라 찔러버려라!

 망자들은 다시 가면을 쓰고 성스러운 제사장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들은 광신적으로 반대자를 제거해 자신들만의 착각을 세상에 남기겠다는 슬픈 역사를 재현할 생각이다. 보다 높은 곳을 지향하겠다는 숭고한 의지는 그저 세상의 구원구복만을 뻔뻔하게 요구하겠다는 탐욕으로 바뀌어 악취를 풍기기 시작한다. 클로에 또한 십자가에 매달려 손과 발에 못이 박힌다. 신화창조를 위해 다른 히에로판테스들의 시체는 말살된다. 하급병사의 복장을 한 망자 하나가 맹독이 칠해진 녹슨 창을 들고 꼼짝 못하는 클로에의 심장을 겨눈다.
 일란은 선고했다.

"Execution!"





 풀어라, 풀어라, 풀어라, 풀어헤쳐라! 아직도 너희들은 우상을 만들어 의존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느냐. 아직도 너희들은 자신의 우상을 좀 더 쉽게 접하고, 그 존재증명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다른 가치를 파괴하는 일을 쉬지 않고 있느냐. 왜 어째서 늙은 성자는 아직도 신이 죽었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가. 차라투스트라Übermensch는 여전히 동굴 속에서 탄식한다. 사람은 초극되어야 하는 그 무언가다. 부디 자신을 풀어헤쳐라!

 클로에는 다섯 번에 달하는 격전을 통해 일란의 비밀을 깨닫는다. 아직 그의 진형은 완벽하지 않다. 그의 처형장이 영원히 회귀할 것처럼 보이는 건 티마이오스 시스템에 몰래 기생하는 걸로 그렇게 위장한 것뿐이다. 만약 그녀가 디스의 시대정신의 조력 없이 시스템의 관리자 권한에만 의존했다면 절대 일란의 속임수를 밝혀내지 못했을 것이다.

"Not Guilty!"





 클로에는 선언과 함께 티마이오스 시스템의 관리자 권한을 일시적으로 포기했다. 일란이 이미 시스템을 침식하고 있는 이상 계속 농락당할 뿐이다. 시스템에서 벗어난 클로에에게는 이제 반대편의 출입구가 확실히 보였다.

 초극성을 통해 극도로 강화된 정신과 육체로 무장한 클로에는 처형장을 빠져나와 곧장 판사석의 유스티티아에게 향했다. 정의의 여신상이 들고 있는 천칭은 이미 꽃이 있는 쪽으로 상당 부분 기울어져 있었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클로에는 품에서 메스를 꺼내들었다. 어떤 신비적 효과도 없는 평범한 메스였지만 차라투스트라를 걸친 지금이라면 충분히 신의 꽃을 베어낼 수 있을 것이다.

 유스티티아에게 다다라 메스로 꽃을 내리치는 클로에. 일란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극도로 둔화된 시간 속에서 클로에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허나 방심이야말로 금물. 울음과 웃음은 의외로 구별하기가 힘들다. 일란의 찡그림은 비통이 아니라 환희를 품고 있는 것이었다. 클로에의 메스가 황금화를 양단하기 전에 일란이 크게 외쳤다.

“나는 이 순간을 향해 선언한다. 멈추어라, 너는 참 아름답다!”

 일란의 주문이 발동하자마자 클로에의 몸이 덜컹 정지했다.

“다, 당신… 설마……!”

 클로에는 간신히 움직이는 입을 열어 피를 토하듯이 들리지 않는 절규를 내뱉었다. 일란의 포석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이것이야말로 그가 진정히 노렸던 전개. 시스템 권한을 포기한 클로에는 일란의 진형에서는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을 보호해주는 강력한 갑옷을 벗어던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은 또 다른 진형을 설치해둔 일란은 클로에를 구속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한층 더 강화된 클로에의 머리장식 매개재는 일전의 세잎클로버처럼 무참하게 깨지진 않았지만, 기억의 뱀과 재접속이 이뤄지기 전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 잠깐의 틈을 일란이 놓칠 리 만무했다.

“현실을 공상으로 바꿀 수 있는 모든 분기를 차단했으니 이번에는 ‘꿈의 수렴’을 통해 되살아나는 건 불가능할 걸세. 자아, 시간은 많지 않지만 자네를 정화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 기뻐하게. 자네는 드디어 아름다운 예전의 모습 그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

 일란의 지시에 따라 유스티티아의 동상이 기긱거리며 움직였다. 정의의 여신상의 통제권마저 일란에게 넘어간 걸 확인한 클로에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통탄했다. 만약 티마이오스 시스템의 관리자 권한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면 유스티티아를 빼앗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허나 그 외에는 일란의 함정에서 빠져나올 방도가 없었으니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결국 클로에의 패배는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유스티티아의 검은 어떤 사상이든지 흑백으로 나누어 남겨놓고 멸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심판이 가능했다. 클로에는 일란의 의도를 이제야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는 코키토스 유일한 의자인 클로에 클로버를 삭제하고, 다시금 플라톤의 영혼만을 남겨두려는 작정인 것이다.

“아아…….”

 정의의 여신은 가차 없이 칼을 내리쳐 왼쪽 어깨부터 클로에의 심장을 두 동강 냈다. 클로에는 분수 같이 핏줄기를 쏟아내며 완전히 절명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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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12.17 14:24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인본주의 및 사회계약론적 사상에 입각하여 기존의 체계를 수호하고자 하는 클로에의 의지와, 초월적 영역으로의 집단 승천을 통하여 현실의 모든 고통을 일소하기를 갈망해온 일란의 승부가, 이렇게 일단락 되는군요.

    과거 행성 시대 인류 문명사의 궤적을 그대로 체현시킨 심상 세계 사이의 격돌 속에서, 과연 그와 그녀들은 무엇을 얻고 또한 무엇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것일지...

    하지만 왠지 모르게, 분명 최후의 순간에는 마침내 무겁고도 무거운 책무에서 해방되어 활짝 웃는 클로에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드네요~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12.17 18:04 신고 address edit/delete

      말씀하신 것처럼 각자가 추구하는 이념을 싸움 속에 스며들게 하기 위해 노력해 봤는데, 어땠는지 모르겠어요^^;;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느 쪽의 주장도 정당성 있는 만큼 없기에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치열한 대립이 되고 말았네요. 특히 일란 진영의 계획은 판타지 소설에서조차 비현실적인 면이 많은 부분이긴 하지만, 만의 하나 실현이 가능하다면 세상이 가혹할수록 한층 매력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싶더군요······.

      과연 작중 등장인물들의 마지막은 어떻게 될지... 조금만 더 함께 해주시면 감사드려요~>.<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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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흩어지는 노을 (7)


 무언가를 심판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건의 진부眞否를 판별해 가치의 유무를 정하고 사람의 선악을 가른다는 것은 상대적인 기준에 따라 절대적인 평가를 내려야 한다는 모순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그 해답은 오류로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다.

 본래 무게를 재는 것이 가능할 리 없는 허상을 저울로 다는 불합리한 분별을 해내야 하는 것이 법관의 업. 그렇기에 그들의 머리는 미궁처럼 복잡하고, 그들의 손은 구름처럼 덧없으며, 그들의 마음은 얼음처럼 차갑다.

 대법정의 문을 열고 들어간 클로에는 우선 부서진 사람의 형상에 인상을 찌푸려야 했다. 2구의 시체는 머리와 가슴에 깨끗하게 구멍이 뚫린 채 죽어 있었다.

 저항한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무서운 솜씨로 미루어 보아 잔 다르크의 소행이 틀림없다. 그러나 시체에서는 어떤 핏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으며 시간이 지나도 푸른 나비의 영혼이 빠져나와 육체가 모래로 흩어지는 일도 없었다.

 죽은 이들은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마천루의 걸작을 본떠 만든 인조인간. 불청객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반영구적으로 티마이오스 시스템을 수호하도록 명을 받은 오토마타Faust. 빌포르와 자베르라 불리는 베아트리체의 기계인형은 무참하게 파괴된 채 임무속행의 불가함을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법정 앞에 선 클로에는 순식간에 피고인이 되었다. 호랑이가 없는 굴에는 여우가 자리를 차지하는 법. 대법원장인 플라톤이 퇴출당하고 경계를 맡은 검사와 경감이 쓰러진 지금, 그 공석에 이방인이 끼어드는 건 당연한 순리였다.

 가짜 법관이 지배하는 부정한 공간에 몸을 던진 클로에는 이전의 권위 있는 도시의 지배자도, 법을 집행하는 냉혹한 심판관도,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숭고한 의사도 아닌 그저 기소 당해 죄를 성토당하는 죄인에 불과했다.

 가짜 법관, 일란이 걸치고 있는 건 검붉은 법복. 클로에는 수많은 유무죄의 사람들이 법정에서 흘린 피로 물든 장의를 걸친 그를 노려보며 경멸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흰옷은 벗어던졌네. 내가 입고 있는 백의가 그렇게 따분했어?”

 검과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상, 유스티티아의 동상 옆 판사석에 앉아있는 일란은 마음을 읽을 수 없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우문에 현답했다.

“자네가 입고 있는 건 백지가 아니라 백치의 색일세. 아무 것이나 물들일 수 있는 순수함이라면 나 역시 경이롭게 떠받들 마음이 없지 않아 있지만, 아무것도 물들일 수 없는 어리석음이라면 거부할 수밖에 없지. 설령 지나치게 짙어 더는 다른 색으로 바뀌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게는 이 옷이 잘 어울린다네.”

 일란은 자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법복의 권위를 클로에에게 보였다.
 허나 클로에는 여전히 험악한 눈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그토록 플라톤의 권능이 부러웠어? 누구에게도 간언諫言 받지 않고, 누구에게도 지탄 받지 않으며, 오로지 누구에게나 뜻대로 힘을 휘두르며 가치의 순위를 매길 수 있는 그 힘을 갖고 싶었던 거야?”

“그럴 리가 있나. 이건 어디까지나 자네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한 연출일 뿐이라네. 과거의 영광을 직접 눈앞에 접한다면 조금이라도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지. 하지만 내가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했나 보군. 자네의 철인哲人이 부재하는 동안 그 속에 쌓인 감언이설의 독은 보통 농도가 짙은 게 아닌 모양이야. 아마 태초의 주인을 전복시킬 수 있을 만큼 세력 있는 자아가 탄생했겠지. 그렇다면 베아트리체가 자네에게 기억과 실권의 일부를 돌려준 이유도 납득이 가는군. 이미 더럽힐 만큼 더럽혔다는 뜻이 아니겠나.”

 일란의 모욕적인 언사에 클로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클로에는 분노를 삭이며 가만히 일란의 말을 반추했다. 그는 지금 착각을 하고 있다. 잔도 마찬가지로 잘못 알고 있다. 그들은 그녀가 영원히 잃어버린 걸 다시 주어 담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녕 저 현자와 성녀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면, 착각한 그대로 내버려두자. 클로에에게 있어 이보다 더 좋은 호기는 없었다.
 생각에 잠겨 입을 다물고 있는 클로에에게 일란은 그동안의 공백을 보충하기라도 하듯이 길게 말을 늘어놓았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난 자네를 존중하겠네. 설령 자네가 과거의 자신을 부정한다 하더라도 난 여전히 자네를 떠받들 걸세. 동경의 악마에게 이끌어낸 섬광을 더욱 완벽한 빛으로 만든 우리의 업적은 자네가 없다면 시작하는 것조차 불가능했겠지. 불완전한 인간의 영혼을 한데 모아 결점을 보완하고, 그 위에 극한까지 연마한 완전무결完全無缺과 영원무궁永遠無窮과 전지전능全知全能의 사상을 덮어 우리 인간이야말로 처음이자 끝이며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존재하는 유일한 한 사람The One이 되자는 원대한 계획!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산 자도, 죽은 자도 남도, 나도 초월하여 모두가 합일하는 지고의 순리! 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난 자네의 계획이 실행 가능하다는 사실을 검증했을 때부터 온몸이 떨리는 걸 막을 수가 없었네. 그리고 자네와 자네의 계획을 숭배하기로 결심했지. 우리의 소원이 이뤄지는 그 날까지!”

 일란의 눈에는 광채가, 입에서는 환희의 노래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진심으로 가슴 들떠 기뻐하고 있었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플라톤의 계획이다.

 혼자서는 보잘것없는 사람의 영혼을 그 속성에 따라 열둘로 분류해 합치는 것으로 가상의 황금태양을 낳아 완전무결과 영원무궁과 전지전능을 끝없이 복제해 퍼뜨리는 작업. 그 공정이 완전히 자립해 외부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필요한 영혼의 숫자는 짜 맞춘 것처럼 도시를 반영구적으로 운영하는 데 필요한 약 20만의 영혼과 동일했다.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 그 짜임새는 코키토스 건립에 깊게 관여한 악마의 분체가 얼마나 인간의 초상을 사랑했는지 단적으로 나타내는 증거였다.

 신神이란 인간이 발명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마지막이자 최상위의 존재. 누구보다도 인간과 닮았으며 누구보다도 인간에게 득이 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인간의 분신이자 인간의 종착점이라 할 수 있는 신화神化의 길은 슬픈 도시의 건립부터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클로에는 열띤 일란과는 대조적으로 차갑게 식은 얼굴로 말했다.

“옛 플라톤도 당신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우리 자신이 신神이 되어 영원한 완벽을 손에 넣는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 아무런 의미도 없잖아! 그건 죽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어. 그저 종말이 완벽이란 이름으로 대체되어 찾아오는 것에 지나지 않아.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산 자도, 죽은 자도, 나도, 남도 넘어서 우리가 추구하는 지고지순한 진리만을 손에 넣어봤자 우리 자신이 개체로서 존재해 인식할 수 없다면 뭐가 즐겁고, 뭐가 행복하다는 거야?”

 일란은 진정 애처롭다는 눈빛으로 클로에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러니 자네의 중독이 심각하다고 말한 걸세. 어리석은 베아트리체와 베르길리우스, 그 두 사람은 지나치게 눈앞의 일만을 신경 쓰다 결국 그 위를 보지 못했지. 설마 자신들의 우둔함을 자네에게까지 전염시킬 줄이야. 알고는 있었지만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군. 자네가 바랐던,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완전무결하며 영원무궁하고 전지전능한 그 황금시대의 도래 너머에선 그와 같은 고민이 무의미하다는 걸 어째서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어리석은 이들이 우려하는 개체자아의 상실 또한 그 안에서는 영원의 한순간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왜 눈치 채지 못한단 말인가. 애당초 인간은 그 방향과 방법을 찾기 어려울 뿐, 스스로 완벽을 향해 나아가려는 욕구를 지닌 존재일세. 그건 나뿐만 아니라 자네도 마찬가지이며 이 도시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렇지. 전쟁의 포화에, 그리고 붕괴된 시간에 먹혀버린 행성시대의 죽은 이들 또한 그러했고. 우리의 계획은 언젠가는 모두가 다다를 길, 혹은 다다르고 싶어 하는 길을 필연으로 앞당기는 것에 지나지 않아. 그걸 왜 거부한단 말인가.”

 일란의 어조는 떼쓰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자애로웠다. 일견 이해해주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는 일란의 눈빛에 발끈한 클로에는 잠깐 숨을 들이쉰 다음 큰 소리로 외쳤다.

“백치는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왜 그쪽이야말로 두시에서 세시를 가리키는 것과 두시를 세시라고 부르는 건 엄연히 다르다는 걸 모르는 거지? 인간이 내세워야 하는 건 요상한 술수를 통해 근본이 변모한 무언가가 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행동에서 제시할 수 있는 자신의 가치여야 해. 인간이 아닌 존재가 돼서 인간의 이상理想을 구현해봤자 헛일이라는 건 누가 봐도 명확한 일이잖아!”

 클로에의 외침에 일란은 순간 얼굴을 찡그리며 고함을 질렀다.

“아아, 친애하는 플라톤이여! 이렇게까지 그들의 천박함에 물들었단 말인가! 어째서 자네가 그토록 가혹하고 잔인한 말을 쉽게 내뱉는 거지? 약자들의 절망에 누구보다도 마음을 앓아, 누군가를 희생시키느니 차라리 모든 이가 평등하게 구원 받는 편이 좋다며 위대한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한 자네가 어떻게 이리 변모할 수 있단 말인가! 아아, 요망한 베아트리체여, 끔찍한 베르길리우스여! 순백의 구원자를 진흙 속으로 타락시킨 사악한 그네들은 영원히 저주 받을 지어다!”

 서슬 퍼렇게 한바탕 노기를 드러낸 일란은 갑자기 무섭도록 침착한 얼굴로 돌아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한 가지 묻겠네만, 자네는 이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어떻게 변명할 작정인가? 코키토스의 사회질서 유지는 명백히 하위직무자들을 수탈하는 구조 위에 성립되어 있지. 자네를 비롯한 천사대의 고위직무자들이 호의호식하며 입으로는 고상한 가치를 부르짖을 수 있는 것도 전부 그들의 희생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지 않나. 그리고 무엇보다 암흑물질의 침식은 어떻게 할 텐가? 시간마저 무의미하게 만드는 황금시대를 도래시켜 우리가 그 빛나는 정원의 하나뿐인 주인이 된다면 멸망을 피할 수가 있는데, 그걸 마다하고 이대로 가만히 말라죽는 걸 기다리겠단 말인가.”

 일란의 물음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유치했지만 직설적이면서도 진심이 담겨 있었다. 확실히 그의 말은 과녁을 꿰뚫는 화살처럼 사태의 핵심을 명확하게 찌르고 있었다.

 수 백 년의 세월 동안, 그리고 그 기간이 지나면 다른 이유를 붙여 또 다시 만족스러운 삶이 허용될 클로에가 아무리 인간 스스로 쟁취한 승리를 노래한다고 해도 그건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가 배부른 소리를 할 수 있는 건 그 아래 있는 인간들의 시간과 생명을 약탈한 덕분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하위직무자들의 비참한 인생이 신神이 되어 모든 것을 초월하는 무가치함보다 더 낫다는 보장이 있단 말인가? 최소한 절대신화絶對神化는 공평하기라도 하다.

 두 번째는 그보다 더욱 중요한 암흑물질의 침식. 아직까지는 계산상 슬픈 도시의 내구성이 반영구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처럼 예상 밖의 사건을 겪어 지속적으로 깎여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멸망할 날이 오고 말 것이다. 바깥의 암흑물질, 즉 붕괴한 시간의 시체를 치우고, 다시금 정상적으로 시간의 물결이 흐르게 할 마땅한 방도가 없다면 플라톤의 계획을 받아들여 사태를 종결짓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잠시 동안, 하지만 충분히 신중하게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한 클로에는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양보할 수 없는 답을 내놓았다.

“조금씩 고쳐나가겠어. 지금 베아트리체가 노력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고 말이야. 당장 도시의 질서구조를 변경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좋으니 피해 받는 사람이 점차 줄어들게 할 거야. 암흑물질에 대한 대책은… 솔직히 지금은 별다른 방도가 없는 모양이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란 보장은 없겠지. 그래, 우린 여기서 살아가며 쭉 답을 찾아나갈 거야! 설령 그 길이 실패로 끝난다고 해도 자진해서 들고 있는 가치를 내던지고 도피하는 것보단 나아!”

“아아, 정말…….”

 일란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새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정말 저주스럽구나! 아아, 어찌 이렇게도 인간의 대책 없는 낙관과 나태함이란 끈질기게 달라붙는단 말인가! 난 천이 넘는 세월 동안 계속해서 봐왔다! 게으른 인간은 변화와 성장을 거부하다 결국 자신이 가진 힘도 주체하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지. 이번에도 어리석은 그 짓거리를 되풀이하겠단 말이냐. 내 존경하는 철인까지도 사로잡을 정도로 끈적거리는 점성은 대체 누가 붙여놓은 것이란 말인가! 아니, 설계한 자 따위는 없지. 없으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다. 신이 없다면 신을 만드는 수밖에! 신을 만들 수 없다면 스스로 신이 되는 수밖에! 그 유일한 일을 방해한다면 흉악한 범죄자로서 처벌을 내릴 뿐이지.”

“말도 안 돼! 언제 그런…….”

 일란의 장광설에 취해있던 클로에는 흥분해있는 것 같으면서도 뒤에서는 냉정하게 일을 진행시킨 일란의 술수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법정의 판사석 옆에 위치한 정의의 여신상 유스티티아. 티마이오스 시스템의 접속 단말로서 존재하는 그 동상의 천칭 한편에는 어느새 황금으로 빛나는 꽃이 한 송이 놓여 있었다. 열 두 명의 영혼이 결합되어 완전무결과 영원무궁과 전지전능을 구현한 첫 번째 플레넘 포르마룸. 시스템의 단말은 일란의 손에 의해 일부 장악되어 점차 침식당하고 있었다.

 꽃의 재배는 완벽했다. 암흑물질에 침식당해 본래는 절대 나을 리 없는 일란의 다리가 완쾌된 점과 침식당한 티마이오스 시스템에서 흘러들어오는 답답한 완결성이 그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아직 총량이 작아 외부로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는 황금의 꽃이 만약 도시주민을 통제하는 시스템 속으로 완전히 스며든다면 대부분의 시민들이 손 쓸 새도 없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 유일신으로서 재탄생하고 말리라. 그러니 꽃이 얹힌 천칭이 완전히 한쪽으로 기울기 전에 어서 치워야만 한다.

“이미 늦었네! 논의는 끝났으며 자네의 죄는 명확하지. 이제부터 판결을 내리도록 하지.”

 그러나 클로에가 달려 나가는 것보다 일란의 목소리가 한발 앞섰다. 그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드넓은 대법정은 복잡하게 뒤얽긴 미로로 공간이 전환되었다. 대법정과 일란의 모습은 사라지고 눈앞에는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어지러운 심연의 통로가 펼쳐졌다.

 마술을 업으로 삼는 일란에게 무대를 꾸미는 일은 기본 중의 기본. 눈속임과 장치를 통한 트릭에 능한 그는 클로에와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알아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꽃의 침식을 개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자신만의 진형陣形을 설치해둔 것이다.

 붉은 융단이 깔린 미로는 역천사대 철옹성의 내부와 비슷했다. 철옹성 미궁의 근간이 된 설계를 한 자가 일란이었으니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다만, 이 함정이 코키토스 최고 무력기관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현자의 미로에는 문이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우중충한 빛깔의 낡고 지저분한 석조 문에는 마찬가지로 칙칙한 빛깔의 절망적인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건 절대 얼빠진 실수나 혹은 살며시 베푸는 상냥함 같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밖에 없는 문은 반드시 클로에를 처단하겠다는 일란의 확고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일란은 비록 특별한 능력은 없었지만 불사의 심장을 얻어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온갖 신비를 터득한 노인이다. 그가 자신의 정수를 다해 펼친 진에서는 살의가 있는 대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안은 분명 결코 피할 수 없는 처형장일 터.

“하지만 여기서 머뭇거리면 꽃이 시스템을 먹어버릴 테니……. 선택의 여지가 없네.”

 클로에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에 꽂힌 네잎클로버 장식을 손으로 살짝 쓰다듬었다. 이제 남은 수단은 강행돌파뿐이다. 그동안 일란이 쌓아온 모든 것과 클로에가 흘리지 않은 남은 걸 있는 힘껏 부딪치는 수밖에 없다. 클로에는 약간 긴장하며 석조 문을 열고 들어갔다.

 들어선 순간 문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사라져버렸다. 시시각각 바뀌는 정다면체로 구성된 가상의 방안은 미묘하게 굴절되어 위아래와 거리감각을 파악하기 곤란했다.

“지금부터 『공포정치Divine Mind』를 시작하겠네. 자네는 사형이야!”

 이곳은 일란이 지배하는 처형장. 늙은 현자의 음색이 모든 방향에서 울려 퍼졌다.

“잘 부탁해……. 아니지, 이번엔 제대로 일해!”

 클로에는 누군가에게 속삭이며 매개재를 통해 『기억의 뱀Zeitgeist』을 불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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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12.15 14:30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참화와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했던 행성 시대의 잔영을 뒤로 한 채, 살아있는 망자들의 방주 속에서 다시금 재현된 '승자 없는 전쟁'의 비극.

    분명 클로에가 이 결전에서 일란을 쓰러트리고 그 계획을 무산시킨다 하더라도, 그의 말마따나 현재 코키토스가 당면한 여러 근본적 문제점들은 사라지지 않고 오래도록 남아 사람들을 괴롭히게 될테니 말이예요.

    현존하는 부조리와 고통의 존속과, 공허한 영원의 낙원 속 거짓된 행복의 표상 가운데에서 과연 유스티티아는 어느 쪽에 미소를 짓게 될까요...?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12.16 18:12 신고 address edit/delete

      '승자 없는 전쟁'이라는 말씀이 딱 적확하게 작중의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_-b

      실제로 애당초 지금의 클로에를 비롯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작중 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수단은 없다 보니, 더욱 일란 일행의 행위에 정당성이 생기는 면도 있는 듯싶어요.

      이 부분은 이야기의 마지막에서도 다시 한 번 다루게 될 텐데, 지금 생각해도 그 이상의 해결책은 없는 동시에 과연 그걸 해결책이라 부를 수 있는지 의심스러운 마음이 드네요...OTL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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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흩어지는 노을 (6)


 세상은 불투명하다. 진실은 어둠 속에 감춰져 있는 검은 장막처럼 찾기 힘들고, 미래로 향하는 좁고 복잡한 오솔길에는 항상 짙은 안개가 껴있다.

 한치 앞은커녕 코앞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둔함이 사람의 한계. 시간이 흐르건 멈추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 본질은 행성시대의 인간이나 슬픈 도시의 인간이나 한 결 같이 모두 장님처럼 어설프게 손을 더듬으며 비틀비틀 발걸음을 내딛게 만들었다.

 뿌연 세상 속에 사는 사람들은 차라리 어느 정도 둔한 편이 좋다. 적당히 눈을 감는다면 햇살이 밝게 비치건 날이 잔뜩 흐려있건 똑같이 어두운 것처럼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최고의 정신적인 안전장치는 무감각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눈꺼풀 없는 청년의 삶은 날 때부터 비극을 내포하고 있었다. 청년은 세상을 보는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악의 없는 허식으로 자신을 가장하고 남을 속여 암묵적으로 덧없는 행복을 느끼는 만인의 안전장치는, 그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다.

 청년은 마주하는 상대의 본질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마음을 읽는다든지, 취향을 파악한다든지, 하는 것과는 달리 좀 더 이질적이며 좀 더 깊숙한 영역에 접할 수 있는 힘이었다.

 그가 느끼는 건 사람의 근본적인 영역. 아무리 상대가 나약한 자신을 극복하고 훌륭하게 성장하였다 하더라도 청년은 본래 그가 가지고 있는 약함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지식과 인덕을 쌓았다 하더라도 청년은 본래 그가 숨기고 있는 광기를 짚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인간의 사회와 세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사람들은 오류 위에 성립한 세상도 엄연한 하나의 진실로서 받아들이고 나아갈 수가 있었지만, 오류 그 자체인 세상을 여과 없이 느껴야만 했던 청년은 그럴 수 없었다.

 더욱 불행한 것은 청년이 지극히 정상적인 이성理性의 소유자라는 점이었다. 만약 그가 미칠 수 있었다면 세상의 가식이 어떻건 진실이 어떻건 간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맘 편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리라. 허나 광기를 허락받지 않은 청년은 제정신으로 미친 세상과 마주해야했기 때문에 괴로워했다.

 죽을 것 같은 청년의 마음과는 별개로 그의 사회적 지위는 나날이 높아져 갔다. 청년이 살았던 행성시대의 말기는 폭력과 혼란으로 가득 찬 시기였으므로 사람들의 검은 속을 간파할 수 있는 청년의 재능은 아주 귀하게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청년은 멸망해가는 세상 속에서도 죽은 자들의 피와 살을 섭취하듯이 부귀해져갔으나 반대로 그 속은 텅 비어갔다.

 시체처럼 살아가던 어느 날. 청년은 구시대의 유물을 조사하다 한 악마를 깨우게 되었다.
 악마의 이름은 루치아. 대악마 월식月蝕의 동경憧憬이란 개념을 담당하는 13개의 분체 중 하나. 기질 자체가 아름답고 숭고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그녀에게 청년은 연심을 품었다.

 청년은 만약 세상에 자신이 태어난 의미가 있다면 바로 그녀를 섬기기 위함이라 생각할 정도로 악마에게 지극정성을 다했다. 근본이 아름다운 존재에게만 사랑과 기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체질로 태어난 그가 그녀에게 전헌신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이윽고 행성시대가 종언을 맞이하고 코키토스가 도래하고 말았다. 청년은 왜 루치아가 자신의 존재를 뒤로 감추었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구세계를 품은 기억의 뱀을 지키기 위함이라 해도 그녀가 정신과 육체의 주도권까지 레이율에게 넘겨줄 이유는 전혀 없어 보였다. 차라리 레이율이 그저 암흑물질의 촉수를 피하는 은폐막 역할을 하는 것에 그치고, 루치아가 직접 코키토스를 통치하였다면 상황은 이렇게까지 나삐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루치아는 동경의 악마인 자신이 인간의 수장首長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단언했다. 그녀는 인간은 사상을 따를 수는 있어도 사상으로 이뤄진 존재는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앞에 나서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 그 또한 청년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였다.

 이렇듯 완벽한 루치아가 뒤로 물러나고, 불완전한 레이율이 앞으로 나서면서 균열은 더욱 심해졌다. 플라톤이 자신의 계획을 진행시켜 마침내 그 전모가 밝혀졌을 때 청년은, 아니 베르길리우스는 도저히 플라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있기에 모든 것이 없는 플라톤의 황금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완벽함을 부여함으로서 역설적으로 온갖 가치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플라톤의 우행. 소중한 루치아를 품고 그녀의 지식을 이용해 도시를 통치하며 내놓은 결과물이 그리도 끔찍한 것이라니!

 만약 이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더 이상 루치아와 만날 수 없게 된다. 자연이 넘치는 밝은 햇살 아래서 재회하자는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다. 만나야 한다는 의미 자체가 박탈당하는 것이다. 베르길리우스의 눈에 그것은 암물질에 침식되어 시간이 상실되는 것과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베르길리우스는 플라톤을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루치아의 힘을 플라톤의 손에 두는 건 그가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지독한 모독처럼 느껴졌다. 결심한 그는 뜻을 같이 하는 대천사대의 베아트리체와 손을 잡고 동료였던 수호학사들의 뒤를 쳐 독재자를 몰아냈다. 그는 루치아와의 약속 때문에 완전히 플라톤을 말소할 수는 없었지만, 대신 레이율의 기억을 뱀에게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래도 아직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여전히 플라톤 원리주의자들은 어리석게도 레이율의 교지를 루치아의 진심으로 믿고 행동을 계속했다. 물론 계획의 초창기부터 관여한 대현자와 성녀는 플라톤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의지로 일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그 외의 무리들은 그저 유아등에 이끌리는 나방처럼 무작정 달려드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또 한 명. 헛되이 불빛에 달려드는 나방 한 마리가 도착했다. 로댕의 문을 지나 지고천으로 들어선 붉게 타오르는 괴물 나비, 전부학장 셀레스티나. 베르길리우스는 그녀의 등장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전 클로에의 저택에서 논했던 가설은 이걸로 파탄이 확실시되었다. 자신은 일란을 너무 얕본 모양이다. 플라톤 원리주의자들은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열쇠 따위는 진작부터 가지고 있었으며 그뿐만 아니라 꽃의 재배도 마쳤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곳에 잔 다르크나 일란이 아닌 셀레스티나가 왔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베르길리우스……. 이렇게 당신이 직접 맞아주다니 기뻐.”

 셀레스티나는 사모하는 상대를 앞에 두고 두 팔을 벌려 활짝 웃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슬픈 도시에는 결코 찾아오지 않을 봄철의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웠으나, 귀기 서린 표정은 안테노라의 눈보라를 그대로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전혀 변하지 않았군.”

 베르길리우스는 붉은 나비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투명하게 보였다. 그녀는 겉으로 사랑을 외치고 있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건 그저 ‘의존’에 불과하다. 약한 자신을 포장하고 불안한 세상에서 안식을 찾기 위해 무언가에 기대려하는 속성이 마땅한 껍질을 찾아 증폭된 감정. 그건 아무리 좋게 봐줘도 사랑이라 할 수 없었다.

 물론 셀레스티나에게는 그러한 자각이 없다. 이는 아마 그녀도 모르는 심층심리 깊숙한 곳에서의 외침. 그것을 바로 앞에서 노골적으로 소리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아니 느낄 수밖에 없는 베르길리우스는 혐오감을 넘어서 무덤덤한 감정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퇴장할 시간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짧게 선고하며 구획정리를 실시해 그들이 있는 공간을 폐쇄했다. 지고천은 코키토스의 중추시설이 밀집해 있는 두뇌와도 같은 곳. 자칫 싸움이 번져 운영기능이 저하되기라도 하면 도시 전체가 붕괴할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암막暗幕이 내려앉고 눈처럼 하얗게 빛나는 공허한 세상 속.
 루카누스처럼 신속迅速의 스피드를 발휘할 수 없는 셀레스티나로서는 설령 상대에게 승리를 한다고 해도 빠져나갈 길이 없다. 그러나 오히려 셀레스티나는 기쁨을 느꼈다. 목숨이 명재경각에 달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외다리나무에서 눈가리개 한 채 걸어 나가야 하는 것 같은 이 위태로운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가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누구와 어떻게 영원을 손에 넣느냐 하는 것뿐.

 베르길리우스가 이 자리에 있다는 건 그녀에게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아카데메이아 시절, 항상 베르길리우스를 유심히 봐온 셀레스티나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언뜻 가벼워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아주 냉철한 남자였다. 만약 이 뒤에 있을 베아트리체나 클로에가 진짜 소중한 존재라면 그는 셀레스티나와 싸운다는 선택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다른 부하동료에게 상황을 떠넘기고, 자신이 지키고 싶은 존재와 함께 멀찌감치 도피하였을 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건 이 뒤에 있는 그녀들이 그에게 있어선 아무래도 좋거나, 혹은 서 있는 입장 상 의무를 다하는 것에 불과한 존재란 뜻이다. 셀레스티나는 그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베아트리체나 클로에에게 가지고 있던 질투심이 싹 사라져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로 확인을 받고 싶었던 셀레스티나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굳이 묻지 않아도 되는 질문을 입에 담았다.

“대체 여기에 누굴 지키기 위해 있는 거야? 베아트리체?”

“아니.”

 베르길리우스의 대답은 간결했다.
 셀레스티나의 입가가 올라갔다.

“그럼 누구야? 클로에?”

“그럴 리가 없지.”

 일체의 망설임 없는 그의 대답에 셀레스티나의 입가는 더욱 올라가 이윽고 환희의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이것으로 만족했다. 역시 클로에가 베르길리우스의 연인이었다는 건 헛소리. 분명 그의 마음은 다른 곳으로 가 있다.

 루치아와 레이율의 비밀을 모르는 셀레스티나는 베르길리우스가 누굴 사랑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해 있을 것이라 생각할 만큼 아둔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녀는 베르길리우스의 마음이 가 있는 상대가 지금 이 세상에 없다는 걸 확신했다.

 그렇다면 현재 그와 가장 가깝게 있는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 이미 보답 없는 사랑에 익숙해진 셀레스티나에게는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마저 강렬한 연정으로 다가왔다.

“아아, 정말 멋져. 사랑하는 상대와 같이 영원을 손에 넣을 수 있다니!”

 셀레스티나는 자신이 바라마지 않던 결말을 앞에 두고 들뜬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일란과 잔 다르크가 일을 성공시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다면 문제없다. 베르길리우스가 자신을 죽여도, 자신이 베르길리우스를 죽이고 붕괴되는 공간 속에 갇힌다 해도, 두 사람은 죽음의 질긴 끈으로 묶여 함께 영원의 순간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가치를 전복시키고, 온갖 인과관계를 역전시키는 황금시대가 도래한다면 과거, 현재, 미래는 전부 하나가 되어 그 안에서 비극을 제거하고 희극만을 창출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특별하게 의미를 가지는 건 이미 벌어진 일도, 앞으로 벌어질 일도 아닌 황금시대에 돌입하는 순간에 생기는 일들뿐. 그 찰나를 어떻게 확정하느냐가 플라톤의 계획에 참가하면서부터 고민해온 셀레스티나의 지상과제였으며, 이미 그것은 거의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마지막 무도회, 날 즐겁게 해줘!”

 셀레스티나는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외치며 이탈자의 힘을 한껏 발산했다. 흑백黑白의 공간을 붉게 태우는 거대한 불길. 이에 베르길리우스도 일곱 개의 칼날이 달린 자신의 권총, 페카토를 응사해 맞섰다.

 베르길리우스의 총칼은 예부터 내려오는 거짓된 죄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층민을 용이하게 지배하기 위한 지배자들의 욕망과 사람들의 무지와 착각이 겹쳐 태어난 가책이란 이름의 속임수. 본래 어떤 일이든지 가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일부 군체의 생존을 위해 의도적으로 일그러뜨린 기만의 집합체. 엄연히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베르길리우스는 그 굴레를 자신의 무기로 이용할 수도 있었다.

 불길에 수호 받고 불길로 섬멸하는 셀레스티나에게 향하는 페카토의 칼날은 자만, 인색, 질투, 분노, 나태, 음욕, 탐식 총 일곱. 자만의 칼날은 한없이 늘어나 상대를 압박했고, 인색의 칼날은 한없이 작아져 상대의 빈틈을 노렸으며, 질투의 칼날은 아무리 도망쳐도 집요하게 끝까지 상대를 추적했고, 분노의 칼날은 뜨겁게 달아올라 상대의 장애물을 돌파했으며, 나태의 칼날은 그림자 밑으로 낮게 가라앉아 상대의 발목을 잡았고, 탐식의 칼날은 아무리 없애도 계속 재생하여 상대를 압박하였으며, 음욕의 칼날은 크게 폭발해 상대를 날려버렸다.

 베르길리우스의 이마에 새겨진 P자는 페카토의 칼날이 제 역할을 다 마칠 때마다 하나둘씩 지워졌다. 각각의 칼날은 확실한 적의를 가진 필살의 공격이었으나, 셀레스티나와 그 불길은 베르길리우스의 이마가 다시금 깨끗해지고, 그의 손에 들린 총이 장식 잃은 빈 권총으로 변할 때까지도 여전히 건재했다.

“안 돼……. 그 정도로는 당신의 사랑을 드러낼 수 없어. 날 죽일 수 없단 말이야!”

 셀레스티나는 발작적으로 불길을 크게 일으키며 외쳤다. 베르길리우스의 칼날은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하나 같이 예외 없이 그 불길에 녹아 사라지고 말았다.

 슬픈 도시에서 가장 질서이탈자로서 적합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 셀레스티나는 자신의 시간이 먹히면 먹힐수록 강대한 힘을 내었다. 이 세상에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없는 무언가에 의존하려는 그녀의 약한 마음은 암흑물질의 발현을 활성화시키기에 더할 나위 없는 극상의 촉매제였다. 그녀의 불길은 더 이상 무언가를 태우는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시간의 촉각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들을 통째로 먹어치우는 침식의 경지까지 다다라 있었다. 그 앞에 인간역사의 허식과 기만을 뭉쳐 만든 대죄大罪의 칼날 따위가 통할 리 만무했다.

 결국 베르길리우스는 탄환을 전부 소비해 손 쓸 도리 없이 궁지에 몰리고 말았고, 셀레스티나는 기쁘게 그 상황을 즐겼다. 이제 조금 있으면 자신의 소망이 이뤄진다. 사랑하는 이와 한 장소에서 하나가 되어 영원을 손에 넣는다는 지고의 행복에 그녀는 몸을 떨었다. 흥분한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시간을 태우는 불길은 베르길리우스의 상처 입은 몸을 덮으며 테네브로소를 꿰뚫고 나갈 만큼 높게 치솟았다.






 신시아가 회상하는 행성시대는 잿빛의 하늘과 핏빛의 살덩어리의 향연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그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왔는지 명확히 떠올리지 못했다.

 그녀의 정신적 외상은 성공적으로 덮이긴 했지만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을 만큼 깊은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녀는 클로에와 닮은꼴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행성시대의 말기는 참으로 가혹했다. 너무 오랫동안 맹신의 허상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걸 게을리 한 인류는 결국 지나치게 비대해진 힘을 주체 못하고 자멸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강력하게 사로잡던 옛 규율들은 의의를 잃고 통제권을 상실했으며 그에 따라 행사되는 무시무시한 폭력은 국가를 비롯한 사회집단의 근본을 허물었다.

 법과 질서가 사라진 시대의 사람들은 승자 없는 승리를 위해 전쟁을 계속하여 시체를 늘려만 갔다. 이건 더 이상 약육강식이라고도 불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승리한 것은 오직 죽음뿐. 사람들은 시체를 모아 시체를 행진시켜 시체를 쌓아올리기 위해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신시아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인체개조를 행한 몇 대 전의 선조에게 물려받은 괴력과 삶에 대한 병적일 정도의 집착 덕분이었다.
 어릴 적부터 가냘픈 몸으로 몸의 몇 십 배나 되는 기계를 내던질 수 있는 힘과 자다가도 목에 칼이 들어오면 즉각 반응할 수 있는 극도로 예민한 신경만이 그녀의 무기였다.

 사고방식 또한 그에 적합하게 형성되어 아무리 사람을 죽여도 죄책감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상식을 배우지 못한, 그리고 배워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야생아 같았던 신시아가 변하게 된 건 태산과도 같이 절대적인 강함을 지닌 한 흑인사내와 만나면서부터였다. 무너져가는 사회 속에서도 드물게 한때 양심이라 불렸던 양식을 가지고 살아가던 사내는 고아원을 세우고 집 없는 아이들을 돌봤다. 그리고 그 중에는 신시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즈음 그녀는 주변의 도움이 필요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 강해졌으나, 태산 같은 사내는 그녀에게 인간으로서 필요한 것이 결여되었다고 느꼈다. 그녀 또한 서로 죽이는 것 외의 다른 방식으로 타인과 교제를 할 수 있다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검은 사내의 고아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붕괴한 사회가 품고 있던 인간의 자질을 습득한 신시아는 말과 행동에 품위가 생기고 협력이라는 개념을 익히는 등 많은 것이 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살기 위해 목숨을 빼앗는 것만큼은 잘못되었다고 느끼지 않았는데, 그건 가혹한 행성시대의 말기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인간이 살아온 모든 시대를 통틀어도 그것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상황은 언제나 같았다.

 그러하니 태산 같은 사내를 따라 코키토스에 입성하게 된 신시아가 그것을 거부한 5만 명의 이탈자를 살육한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만약 그들이 슬픈 도시에 들지 않아 양분으로서 기능을 하지 않는다면 반영구적 동력원을 얻지 못한 도시는 머지않아 붕괴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민감하고 삶에 강한 집착을 가진 신시아는 그 때도 망설임 없이 무저항인 사람들에게도 손을 대었다.

 하지만 그 때의 살육은 예전과 딱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기의 차이였다. 신시아는 루터 킹의 고아원에 합숙하기 전까지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죽였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고아원의 동료들도 위해 사람을 죽인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타인을 위해 살인을 행한 신시아는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불쾌한 감정에 구토하고 말았다.

 그것이 그녀의 잘못, 최초의 오류였다. 타인을 위해 타인을 죽인다는 모순에서 오는 괴로움은 하얀 옷에 깊숙이 달라붙은 핏자국처럼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태양을 찾게 되었다. 행성시대를 살아갈 때도 태양을 좋아하긴 했지만, 코키토스에 들어서는 거의 숭상하다시피 했다. 왜냐하면 태양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빛을 나누어 주기 때문이다. 차별과 선별과 편견과 편애가 없는 그 사랑 아닌 사랑에서 신시아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렇기에 신시아는 눈보라가 휘날려 지고천의 조명을 가리곤 하는 안테노라의 계절을 질색했다. 눈송이들의 무력한 절규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역시 태양이 보이지 않는 건 아쉬웠다. 수 명의 질서이탈자에게 둘러싸여 퇴로를 잃고, 하나둘씩 몸에 상처를 늘려가는 와중에도 신시아의 머릿속에는 햇볕을 쬐고 싶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다수의 이탈자를 상대로 하는 연전連戰은 멈추지 않았다. 본래 이 싸움은 이렇게 오래갈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하위직무자가 변했다고 해도 열에 달하는 이탈자를 상대로 고작 중위급의 역천사가 당해낼 수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허나 신시아는 다른 무력기관의 천사들과는 차별되는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생존자. 그녀에게는 역사가 있었다. 미약하나마 행성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능력과 수없이 싸워온 경험이 있는 것이다.

 몸의 두 배가 넘는 대도를 가볍게 휘두르는 특유의 괴력, 시대적 상황에 의해 생명의 위기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체질, 그리고 생사를 드나드는 사투를 통해 단련된 감각의 조화는 단순히 평가기준으로 측정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강함을 자아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지금 그녀는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우선 잠복 조사를 위해 갑주가 아쉬웠다. 만약 인스티투치오넨을 입고 있었다면 방어와 회피에 신경 쓸 필요 없이 공세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은 셀레스티나와의 격전을 통해 소모된 체력과 판덱텐의 추진기의 연료소모가 뼈아팠다. 만약 몸의 상태가 온전했거나 추진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면 잡을 수 있었던 필승의 기회를 그녀는 몇 번이나 놓쳐야만 했다.

 그러나 신시아는 짙어지는 패색을 걱정한다거나, 혹은 제 실력발휘를 못해 분해한다거나, 혹은 동료들의 가세를 기다린다거나, 하는 초조한 기색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그저 덤덤하게 질서이탈자들의 손톱, 이빨, 그밖에 기상천외한 형태로 외부를 침식하는 뿔들을 피하거나 받아넘기며, 멍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태양만을 생각했다.

 신시아는 햇빛이 그리웠다. 그리고 자기 때문에 햇빛을 받지 못한 이들의 인생이 궁금했다. 아직도 살기 위해 죽인 일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진 않는다. 다만 살리기 위해 죽인 이들에 대해서는 가슴 한쪽이 꽉 차오르는 답답한 기분을 느꼈다.

 과연 산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내가 살리고 싶은 이들과 그들을 위해 죽인 자들의 차이는 뭐였을까. 신시아는 몸에 위기가 닥쳐오면 닥쳐올수록 선명하게 편애한 자들과 밀어낸 자들의 얼굴을 교차시켰다. 그 위에는 항상 같은 태양이 빛나고 있었는데, 양자 간의 분기는 대체 어디서 갈라지는 것인지 신시아는 그 답을 알 수가 없었다.

“……!”

 한동안 지루하게 밀리는 싸움을 지속하던 신시아는 이윽고 자라처럼 단단한 껍질을 가진 이탈자의 육탄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뒹굴었다. 순간적으로 대도를 던져 덮쳐오는 두 명의 이탈자에게는 중상을 입혔지만 남은 여덟을 막을 방도는 없었다.

 온몸을 조각낼 손톱과 어금니 앞에서 신시아는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녀는 딱히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알지 못할 답을 얻기 위해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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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12.15 13:47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무수히 분기하며 그 가지를 뻗어나가는 미래의 가능성 사이에서, 그와 그녀들 역시 최소한의 심리적 안정감을 위한 버팀목이자 이정표를 끊임없이 갈구해온 것이었군요.

    아마도 그 누군가에게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연옥이자 매몰지(埋沒地)로,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최후의 순간까지 본연의 의지를 불태울수 있는 하나의 원동력으로....

    하지만 저정도의 경험과 능력을 지닌 강자들조차 종국에는 일말의 쓸쓸함과 회한을 곱씹어야만 했다니, 무엇인가 서글픈걸요~ ;ㅁ;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12.16 18:04 신고 address edit/delete

      아무래도 작중의 상황은 꽉 막혀 미래에 대한 빛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만큼 결국 등장인물들도 어딘가 굴절된 일면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네요······.

      약간 맥락이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고인 물은 썪는다는 유명한 말처럼 조그맣고 닫혀 있는 공동체일수록 잘 운영되기보다는 전체적으로 편협해지고 뒤틀리기 쉬운 경향이 있다고 생각되더군요. 최소한 제가 알고 있는 사례와 경험상으로는 그러하여 작중에도 은연중 반영되지 않았나 싶어요^^;;

      아무튼 각 등장인물들 모두 반드시 행복한 결말은 아니라도 최소한 의미 있는 삶을 보내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네요!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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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흩어지는 노을 (5)


 한발 늦었다. 피아는 이미 클로에의 모습은 없고 대신 티마이오스 시스템의 중추로 들어서는 문을 떡하니 지키고 서 있는 여기사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베르길리우스는 잔을 상대로 한 눈 팔지 말라고 했지만, 그래도 피아는 가능하다면 클로에가 함정에 빠지기 전에 말리고 싶었다.

 아무리 상대가 연적이라 해도 죽을 곳으로 걸어가는 걸 멀쩡하게 지켜볼 만큼 피아는 마음이 독하지 못했다. 게다가 설령 클로에가 제거되는 걸 기뻐할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그 뒤에 돌아오는 건 한층 더 강력한 연적일 테니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피아는 지금 상황이 한탄스러웠다.

“많이 자랐구나.”

 잔 다르크는 부드러운 얼굴로 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잔…….”

 피아는 순간 왈칵 눈물을 쏟을 뻔 했다. 고독에서 태어나 차별 속에 자라온 피아는 타인의 정情에 약했다. 특히 사모하는 베르길리우스나, 엄한 스승이었던 잔은 피아에게 있어선 혈육 같은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피아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언제나 마음이 크게 흔들리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눈물을 머금고 사사로운 정은 끊어야 할 때. 자신의 마음과는 정반대로 차가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건 분명 인조혼의 장점이었다.

“저번에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피아는 일전 세인트헬레나 가의 격전에서 대적한 일을 떠올리며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그러나 잔은 여전히 온화하게 답할 뿐이었다.

“그때는 제대로 인사를 나눌 만한 상황이 아니었지. 이렇게 여유를 가지고 찬찬히 바라보니 정말 많이 컸다는 걸 알겠군. 열심히 정진해 성과를 냈구나. 잠시나마 널 가르쳤던 몸으로써 참 기쁘다.”

“윽…….”

 피아는 그만 한걸음 뒷걸음치고 말았다. 이렇게 물리적으로라도 거리를 벌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뛰어들어 안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잔 다르크는, 스승으로서는 엄격했으나 인간적으로는 따스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상냥한 자세로 나오면 도저히 전의戰意를 불러일으킬 수 없었다. 허나 그와 반대로 마음 한 구석에서는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건 분노였다.

“그럼,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제자의 성장을 정말 기쁘게 생각하신다면……. 어째서 지금 같은 행동을 하시는 거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내가 널 어여삐 여기는 것과 내 목적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모순되어 있잖아요! 잔은 제 성장을 보고 흐뭇하다고 말했지만, 당신의 목적을 이루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되죠. 잔이 바라는 세상이 도래하면 인간의 가치는 있으나마나 한 하잘것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마니까요. 그런데도 성장한 절 축복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어차피 무의미한 일인데! 만약 진정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왜 이런 일을 꾸미는 거죠? 어째서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시는 건가요?”

 피아는 격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외쳤다. 인조혼 특유의 감정통제도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아니, 피아 스스로 통제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피아는 앞으로 다시는 없을 기회를 맞아 있는 힘껏 잔에게 자신의 감정을 부딪치고 싶었다.
 잔 다르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성장한 너는 사람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고 있지?”

“예……?”

 의표를 찔린 피아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곧장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어떻게 대접을 받고 있냐니, 그건…….
 잔은 어린 제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난 모습을 감춘 후에도 쭉 이 도시의 모든 걸 유심히 봐 왔어. 비록 곁에서 떠나긴 했지만 네가 그동안 온갖 고생을 다하고 시련을 헤쳐 왔다는 것도 알고 있지. 넌 정말 최선을 다했어. 불우한 출생과 행복하지 못한 유년기의 기억을 극복하고 나 같은 되먹지 못한 스승 밑에서도 열심히 수련하여 상당한 실력을 쌓았으니까. 네가 도시를 위해 세운 공적은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흑천사대 안에서도 최상위권이야. 하지만 널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어떻지? 여전히 백안시하며 멸시하고 차별하고 있지 않나?”

“그, 그건 분명 그렇지만……. 하지만 베르길리우스 님이나 클로에 같이 잘해주는 사람들도…….”

 그러나 잔은 피아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고개를 저으며 가로막았다.

“난 지금 그런 사소한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야. 널 배척하는 자들이 왜 그러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한 번 생각해 봐. 단순히 그들의 마음이 좁기 때문에? 지루한 일상을 달래거나 정신적인 피로감을 풀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하기 때문에? 물론 그런 이유도 어느 정도는 있겠지.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 있어. 그들이 그래야만 하는 이유. 그건 바로 세상 자체가 인간이 골육상잔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야.”

 피아는 잔의 광기에서 살짝 눈을 돌리며 몸을 떨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결국 인간이 악하거나 약하다거나 하다는 소리인가요?”

“관점에 따라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건 어떻게 설명을 하건 어떻게 이름을 붙이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진짜 주의를 두어야 하는 건 사람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상황과 그 주변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도록 짜여 있는 인간의 근본적인 성질이다. 거기서 모든 비극이 탄생하는 거지.”

 피아는 잔의 광기를 마주보며 물었다.

“그래서 인간을 버리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 인간을 구제하겠다는 거다. 물론 너도 이 더러운 세상에서 건져주고 싶구나.”

 잔 다르크의 선언은 거창하고 오만하면서도 진지하고 필사적이었다.

“잔, 당신은…….”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피아는 지금 기뻤다. 설령 그 방향성이 뒤틀렸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강렬히 자신을 생각해주는 말을 듣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특히 피아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아온 사람에게는 더욱더 그 파괴력은 거대했다.

 그러나 피아는 쾌락에 취해 자아를 잃을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현명함을 가르친 건 베르길리우스, 그녀에게 굳셈을 가르친 건 잔 다르크. 두 부모의 장점만을 이어받은 아이는 마침내 처음으로 자신을 걸음을 내딛었다.

“웃기지마! 만약 퍼즐의 모든 구멍을 틀어막고 접착제로 단단히 붙여버리면 그게 더 이상 퍼즐일 것 같아? 한편의 아름다운 그림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퍼즐로서는 가치를 상실하고 폐기처분될 뿐이야. 잔, 지금 당신들이 하겠다는 건 그런 행위에 불과하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어? 인간이 완전한 절대자가 되어 이 세상을 초탈하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라고? 그게 그냥 죽는 것과 대체 뭐가 다른데? 난 그런 거,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설령 그 너머에 모든 기쁨과 행복과 즐거움이 담겨 있다 하더라도 내 촉각이 감지하는 게 아니라면 의미가 없잖아. 설령 추악함이 함께 한다 하더라도 난 자신의 감각으로 세상을 맛보고 싶어!”

 피아의 껍질이 벗겨졌다. 인조혼의 특질을 이용해 평소 극도로 감정을 억눌러온 만큼 한 번 폭발하게 되면 거의 인격이 변한다고 해도 좋을 만큼 피아는 거칠어졌다.

“역시 진정한 지옥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하는군…….”

 잔은 작은 탄식을 내뱉어 두 사람의 교섭이 완전히 결렬되었다는 걸 알렸다. 이제 남은 건 사제 간의 목숨을 건 대결뿐. 그녀들에게는 상대를 사랑하면서도 거꾸러뜨려야만 하는 물러설 수 없는 이유를 가지고 격돌했다.

“레히트 개방.”

 피아는 태엽검 트리아데를 급속히 톱날검으로 전환하였다. 은막의 날카로운 도신과 비취색으로 빛나는 흉악한 이빨이 빠르게 회전하며 상대를 위협했다. 사전에 통제를 해제시킨 피아는 이제 얼마든지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가 있었으나 그녀의 표정에는 일체 여유가 없었다. 지금부터 맞서야 하는 상대는 코키토스 최강의 여기사. 전력을 다한다 해도 마땅한 타격을 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만큼 무서운 상대였다.

 잔을 향해 신속으로 달려드는 형세는 제3식第三式 일지절단一枝絶斷. 가로막는 상대를 단번에 두 동강내는 정자세의 일섬. 피아의 검은 빠르며 흔들림이 없고 매서웠다. 허공을 가르는 섬광의 궤적은 취하지 못할 목이 없어 보였다.

“전보다는 군더더기가 줄었군.”

 그러나 피아의 공격은 너무나도 간단히 막혔다. 잔은 살짝 창대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극을 짚어 모든 종횡을 봉쇄하였다. 애당초 피아에게 무기 쓰는 법을 가르친 것은 잔 다르크. 막아내지 못하는 편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피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 실력을 갈고 닦았다고는 하나 하늘과 땅의 차이는 쉽사리 좁혀질 만큼 만만치 않았다.

“가볼까.”

 마치 산책이라도 가는 것 마냥 가볍게 말을 던지며 잔은 공세로 전환했다.

 길게 휘날리는 잔의 보랏빛 머리카락. 어두침침한 전장을 밝히는 자주색의 안광.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 죽음을 하나하나 애도해온 성녀는 이미 죽음에 깊게 물들어 있었다. 잔의 가시나무 창은 그녀를 따라 자색의 선을 공중에 수놓으며 피아를 압도해 나갔다.

 잔의 궤적은 올곧고 호쾌하면서도 그 빠른 속도 때문에 변화무쌍하게 보였다. 피아의 검은 머리카락에 따라 어지럽게 춤추는 은색과 비취의 선은 자색의 질주에 농락당해 태초의 강세强勢를 잃고 있었다. 피아는 조금이라도 강해졌다고 생각한 자신이 얼마나 큰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 통감했다. 성녀의 강함에는 한계가 보이지 않았다.

“한 번 시험해 볼까.”

 얼마간 피아를 압박하던 잔느는 창을 크게 휘둘러 그녀를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제1식第一式 분지영참分枝影斬.”

“윽……!”

 잔의 중얼거림에 피아는 전율했다. 잔은 자신보다 떨어지는 상대와 싸울 때는 항상 습관처럼 어떤 형세로 공격을 들어갈 것인지 예고하였는데, 그녀의 강함을 아는 사람은 상대에게 무시당했다는 분노보다는 사형선고와도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드르와 개방!”

 피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신속하게 검의 형태를 바꿨다. 전처럼 태엽검을 통해 방어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분지영참은 한 번의 공격으로 7군데를 베는 비기. 베르길리우스와 같이 믿을 만한 파트너가 엄호를 해주는 상황이 아니라면 자칫 방어태세로 잘못 들어갔다가는 그 후 제대로 검도 휘두르지 못하고 당할 수가 있었다. 잔을 상대로는 어디까지나 공격이 최선의 방어. 아무리 힘들더라도 같이 맞부딪치는 수밖에 없다.

“어서……!”

 피아의 다급한 외침에 호응하기라도 하듯이 톱날검은 빠르게 탈바꿈을 진행하였다. 톱날검의 외면이 조각조각 분리되어 아주 가는 세검으로 바뀌고, 떨어져 나간 조각들도 공중해서 각기 큼직한 단검으로 변화했다.

 산탄검 드르와Droit로의 전환. 그녀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공중의 단검은 총 여섯. 들고 있는 세검과 합쳐 7자루의 검이라면 잔의 공격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잔의 창은 피아의 검이 변형을 맞추자마자 곧장 내질러졌다. 아슬아슬하게 타이밍을 맞춘 피아는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반사적으로 가시나무 창의 분기되는 궤적을 차단해 나갔다.

 승부는 일순간. 하얗게 빛나는 피아의 세검과 단검들은 철저하게 주인을 수호하며 적에게 참격을 날렸다. 허나 7개의 칼날은 그 어느 하나 잔에게 닿지 못했다.

 오히려 잔의 궤적 하나가 피아의 공세를 뚫고 배에 옅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만약 잔이 제자에게 맞춰 종횡으로 상대하지 않고 본래 창술을 고수했다면 피아는 지금쯤 꼬챙이 신세가 되어 제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잔, 반드시 후회… 할 거예요!”

 그러나 피아는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낙담하지 않고 6개의 단검을 움직여 압박해 들어갔다. 처음부터 인간의 한계를 넘어 최고의 경지에 들어선 전쟁터의 성녀를 상대로 정정당당한 승부를 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피아가 노린 건 오로지 잔의 방심뿐. 제자와의 싸움을 대련쯤으로 생각하는 스승의 느슨함만이 피아가 노릴 수 있는 최고의 승기였다.

“……흠.”

 피아의 공세는 거칠었지만 틈이 없었다. 피아는 잔에게 절대 공세를 취할 기회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손을 봐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기회를 준 건 분명 잔의 실책. 다시는 없을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피아는 한걸음, 한걸음 잔 다르크를 뒤로 밀고 나가며 외쳤다.

“제발, 다시 돌아오세요! 이런 바보 같은 짓은 그만 두시고요! 잔이 뭘 보고 절망했는지 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당신과 함께 보낸 날들은 힘겨워도 즐거웠어요!”

 잔은 전혀 손을 못 쓸 것 같은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노도와 같은 피아의 참격을 막아내며 말했다.

“그래. 분명 널 가르친 나날은 내게도 몇 안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지.”

“그럼……!”

“안 돼. 난 지금 수많은 시체 위에 서 있고, 그 망자들은 날 절대 놓아주지 않아. 비극의 원천을 끊을 때까지 난 결코 안주할 수 없어. 그러니,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계속 피아의 공격을 방어하던 잔이 돌연 자세를 바꿔 창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7개의 칼날을 두고 방어를 허문다는 건 곧 난도질당하겠다는 의사표시에 다름없었다. 허나 피아의 검은 여전히 잔에게 닿지 않았다.

“그랑기뇰, 개막.”

 잔의 작은 속삭임. 그와 동시에 잔이 입고 있던 푸른 경갑이 일제히 떨어져 나갔다. 조각조각 분리되어 허공을 날아 피아의 검을 전부 막아낸 잔의 갑옷은 마치 피아의 태엽검 트리아데에 닮아 있었다. 사실 올바르게 말하자면 피아의 태엽검이 잔의 그랑기뇰을 닮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본래 피아의 무기는 천사가 만든 원형을 베아트리체가 본 딴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잔 다르크의 주변을 떠도는 작은 방패는 총 열 셋. 상황은 단번에 역전됐다. 천사의 갑주는 필사적인 피아의 공격을 간단히 차단하였다. 결국 피아는 몇 안 되는 승기를 놓친 채 잔의 창에 의해 멀찌감치 떨어져야 했다.

“제1식 분지영척分枝影刺.”

 온몸을 달리는 오한. 방금 전 선언으로 피아는 잔이 진심인 것을 알았다. 지금까지 잔은 어디까지나 피아의 검술에 맞춰서 싸우고 있었다. 당연히 잔의 긴 창으로 검의 궤적을 따른다는 건 지극히 효율이 좋지 않은 일이다. 허나 잔 다르크가 자신이 들고 있는 무기의 본분에 충실하기로 마음먹는다면 현재 이 도시에서 그녀에게 정면으로 대항해서 이길 상대는 없었다.

“렉스, 해방.”

 그러나 할 수밖에 없었다. 잔은 여기서 반드시 자신의 검으로 쓰러뜨려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그녀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피아는 떨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다중검이 숨기고 있는 마지막 형태를 스승을 향해 선보였다.

 분열검 렉스. 피아의 인조혼의 특성을 전제한 최종형태. 이것만큼은 잔의 무기를 모방한 것이 아닌 이 검이 독자적으로 갖추고 있는 고유의 힘이었다. 결합이 견고한 천연적인 인간의 영혼과 달리 인조혼인 피아는 다소 혼의 형태가 확정되지 않아 어느 정도 분할이 가능했다. 그 성질을 베르길리우스의 권원인 연계변환에 의해 들고 있는 무기에 투영하여 동일한 특성을 발휘시키는 것이다.

 피아의 공중을 떠돌던 피아의 여섯 단검은 들고 있는 세검과 하나가 되어 재차 모습을 바꾸었다. 2m에 가까운 길이의 장검이 된 피아의 검은 손잡이부터 도신까지 검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실제로 검의 색깔이 검은 것이 아니라 검이 품고 있는 모든 가능성의 색깔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섞이는 바람에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었다.

“으으으으……!”

 오랜만에 개방한 렉스는 피아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었다. 직접 영혼과 연결된 만큼 힘의 소비를 급속도로 빨랐으며 이것을 상대의 무기와 부딪치게 한다면 심한 통증이 몰려올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을 앞두고는 도피할 수 없이 이를 악물고 각오를 해야만 했다.

“조금만 참아라. 곧 편하게 해주마.”

 진심으로 안쓰럽다는 듯이 부드럽게 말하며 잔은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본연의 힘을 되찾은 잔의 제1식 분지영척. 총 13개소의 동시공격이 가능한 척살집행. 그리고 그녀의 몸을 떠돌며 자동방어를 행하는 그랑기뇰의 방패 또한 13개. 지금 그녀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한순간에 27번 이상을 베거나 찌를 수 있는 신기를 행해야만 했다.

 이제 맞서는 피아의 제2식 운산무해雲山霧海. 구름과 같이 가벼우며 산과 같이 무겁고, 안개와 같이 덧없으며 바다와 같이 끝이 없는 검의 궤적. 피아는 광속의 영역에서도 계속해서 자신을 검을 늘려나갔다.

 태엽검, 작열검, 톱날검, 절명검, 유리검, 파쇄검, 산탄검……. 날과 날끼리 맞부딪치는 찰나의 일순간에 백이 넘는 칼들이 중첩되어 한꺼번에 폭산했다. 그녀들의 주변은 온통 칼자국으로 가득 차 잘게 다져져 가루가 되었다.

 피아는 자아가 분열되어 몸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지만 절대 힘을 아끼지 않았다. 설령 영혼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진행을 멈출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 26개의 창벽을 넘고 잔을 행동불능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영영 곁에 있을 수 없게 된다!

 피아의 일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목성천의 푸른 초승달이 갑자기 둥글게 차더니 불타는 태양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표면에는 무수한 흑점이 떠올라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기분 나쁜 형태를 만들었다. 흉성凶星의 빛이 지상에 내리쬐는 순간 양자의 승부는 결판이 났다.

“아아, 아아아…….”

 쓰러진 건 피아 녹턴. 배와 어깨에 큰 상처를 입은 그녀는 입으로 피를 흘리며 검을 손에서 놓쳤다. 반면에 상처 하나 없이 건재한 잔은 달에서 태어난 태양을 쳐다보며 웃는 듯 우는 듯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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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12.13 15:40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자신을 둘러싼 세계 그 자체의 구조와 인간의 본질적 한계 앞에서 하나둘씩 쌓아올려진 절망과 분노의 감정들.

    그리고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내려놓을 수 없었던 이상향의 편린이, 그녀를 이 지경까지 몰아붙인 것은 아니었을는지...

    한편으로는 다양성의 공존에 따른 불가항력적 불협화음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또한 그렇기에 각자의 자유 의지로써 한걸음씩 나아가는 생에 의미가 있음을 강변(强辯)하는 피아의 모습이 한층 멋지게 다가오네요.


    아아, 하지만 노력하는 범재는 결국 천재의 그늘을 넘어서기 힘든 것이었을까요... ;ㅁ;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12.13 21:20 신고 address edit/delete

      말씀처럼 작중의 잔 다르크는 생전에는 가혹한 시대에 신음해야 했고, 그 후에는 수 천 년의 세월 동안 온갖 비극을 접해 왔기 때문에 한층 그것들을 일소해 버리고 싶은 욕구가 광적으로 큰 면도 있네요.

      이에 반론하는 피아의 말은 아직 잔만큼은 겪어 보지 못한, 시쳇말로 젊으니까 나올 수 있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또 그렇기에 굴절되지 않고 올바로 바라보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피아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력적인 부분에서는 역시 기본적인 포텐셜과 수천 년의 경험차가 있다 보니 쉽게 좁힐 수 없는 거리가...OTL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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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흩어지는 노을 (4)


 그저 그녀는 모든 이들이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저 그녀는 선한 절대자의 의지를 믿고 세상이 평안하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것만이 그녀가 원하는 세계였으며 그것만이 그녀의 갈망이었다. 그건 아주 소박한 소망이었지만, 그러나 동시에 역사상의 그 어떤 영웅조차 단 한 번도 달성한 적이 없는 난제難題이기도 했다.

 세상은 언제나 그녀의 바람을 저버렸다.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대지는 넘치는 피로 갈증을 해소했고, 그 위를 거니는 사람들은 밤을 떠도는 원귀寃鬼와 다를 바 없었다. 한겨울 깊은 산속에 소복하게 쌓여 있는 새하얀 눈과 같이 순수한 그녀는 어째서 세상이 이렇게 굴러가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녀는 절대 아둔하거나 착하기만 한 백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현명한 축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왜 싸우고, 왜 죽여야 하는지, 그 이치를 모르는 바는 결코 아니었다.

 사람들은 매우 제한된 시간과 지극히 한정된 재화만을 가지고, 각기 다른 소망을 이뤄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그러니 서로 죽고 죽이는 다툼이 벌어지지 않을 리가 없다. 그녀가 이해하지 못한 건 이 단순하다 못해 구역질 날 것 같은 지상의 순리가 아니라, 왜 천상의 은덕이 그 아래와는 합치되지 못하는지 그 근본적인 이치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줄곧 절대전능하시며 만물을 창조하여 다스리시고 인간을 사랑해마지 않는 조물주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의 품안에 감싸여 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잔혹하고 무서웠다.

 그것을 두고 근엄한 사제들은 “신의 뜻은 함부로 헤아릴 수가 없다”거나, “모든 건 우리를 더욱 높은 곳으로 이끌기 위한 시련이니 견뎌야 한다”와 같은 궁색한 변명을 들이밀었다. 심지어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즉 원죄를 지고 있기에 세상이 비극으로 넘치고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느 가설도 그녀의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지 못했고 그녀가 고민하는 동안에도 세상의 통곡은 늘어만 갔다. 아직 어렸던 그녀는 답을 내지 못한 채 그저 신의 의지가 실현되기만을 강렬하게 바랐다.

 그리고 그녀는 천사를 보았다. 본래 평범한 인간은 절대 포착할 수 없는 시간의 분침. 태생적으로 눈雪처럼 맑은 눈目을 지닌 그녀가 아니었다면 아마 당대의 사람들은 그 어느 누구도 인식하지 못했을 환상 속의 존재.

 천사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용모에 빛나는 날개를 가진 성스러운 모습으로 강림했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사실 천사란 신神의 사자使者 따위가 아닌 그저 인간과 다른 그 무엇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때는 주어진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기도에 신께서 응답하신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여섯 장의 보석 같은 날개를 지닌 천사는 지금까지 인간과 접촉한 일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천사를 인식하지 못했으며 천사에게도 인간은 있으나마나 한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인식하고 강렬한 감정을 품는 존재를 만나게 된 천사는 그녀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천사는 그녀의 소원을 듣고 힘을 내려주었다. 앞을 가로막는 어떤 상대도 꿰뚫을 수 있는 가시나무 창槍과 사방에서 적대하는 어떤 악의도 막아낼 수 있는 청은靑銀의 갑주. 시간의 샘에 가까이 닿아있는 천사들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었으며, 그녀와 마주친 천사는 유별히 그 분야에 뛰어난 존재였다.

 천사가 그녀에게 간섭을 한 이유는 단 하나. 천사는 궁금했다. 과연 자신을 인지할 수 있는 인간이 그들의 허술한 굴레를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면 어떻게 변하게 될지 호기심을 느낀 것이다.

 결과는 참으로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녀는 천사에게 힘을 받고도 여전히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인간이라는 쇠사슬에 더욱 강하게 얽혀버렸다. 그녀는 천사를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늘이 보낸 심부름꾼이라 착각했다. 그녀는 사명감을 품었다. 그녀는 자신이 신의 도구로서 영광스럽게 쓰이기를 원했다.

 그녀의 바람은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단 한 가지뿐. 사심邪心 없는 사람들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장소를 원했다. 인간이, 인간이 생각한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가기를 원했다. 그리고 모든 게 절대자의 뜻대로 이뤄지기를 믿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바람을 신의 의지를 대행한다는 명분으로 치장하고 말았다. 그것이 그녀가 범한 태초의 잘못. 교회가 말하는 원죄란 신화 속의 조상이 저지른 과오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인간이 처음부터 스스로 발을 잘못 내딛는 분기점을 가리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눈치 채지 못했다.

 힘을 얻은 그녀는 기적적인 능력으로 절망에 빠진 왕세자를 일으켜 구국성녀救國聖女가 되었다. 그녀에게 있어 신의 뜻을 어지럽히는 건 타국의 악의. 구해야 하는 건 자국의 군주. 지상에 신벌神罰을 내리는 그녀는, 그 스스로가 그 벌이자 죄인이었다. 그녀는 전쟁을 없애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그녀는 학살을 없애기 위한 살육을 일으켰다. 그녀는 지옥을 없애기 위한 나락을 구현했다.

 여기서부터는 진부한 이야기. 구국의 영웅은 구해야 할 나라가 있거나, 혹은 나라가 구해야 할 위기에 처해야만 의미를 가지는 법이다. 사람이란 결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다. 사람의 위치란 한없이 유동적이고 미약하기 마련. 나와 남의 관계는 상대적이며 끊임없이 변동한다.

 결론을 서두르자면 위기에서 벗어난 군주는 그녀를 버렸다. 구국성녀가 지닌 드높은 영향력은 배가 부른 지배자에게 있어선 또 다른 위협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교묘하게 속아 넘어가 천사의 무기를 바꿔치기 당하고, 불리한 정황에 빠진 그녀는 마침내 패배해 붙잡히고 말았다. 한때 그녀만이 희망이었던 군주는 사로잡힌 그녀를 무시했다. 백합의 성녀는 순식간에 진흙탕의 마녀로 전락해 화형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는 비로소 어릴 적의 해답을 손에 넣었다. 세상은 결코 신의 작품이 아니다. 설령 신이 만들었다고 해도 더 이상 신의 손길은 지상에 뻗어있지 않다. 세상은 악마의 품에 안겨 있다. 아니다. 처음부터 세상은 그냥 그런 것이다.

 인간이 악한 게 아니다. 인간이 악하게 행동할 수밖에 세상이 성립되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선악善惡이란 자연과 시간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이쪽 산맥의 정의는 저쪽 산맥에서는 불법일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키고 싶었던 가치란 무엇인가. 신에 대한 열망, 선에 대한 열망, 평화에 대한 열망, 인간에 대한 열망……. 그건 꿈이다.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루고 싶은 환상인 것이다.

 죽음을 기다리는 마지막 밤. 섬광과 같은 깨달음을 얻는 그녀의 마음은 평온했다. 꿈은 무너지고 길은 끊겼다. 절망이란 희망이 있어야 생기는 법. 바라는 것이 없는 이에게는 고통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녀의 색깔이 점차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최후의 일색一色이 벗겨지고 무색無色이 되려는 찰나, 어두운 감옥 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났다.

 동굴의 은자, 광야의 현자, 스러지지 않는 불사의 현자, 일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들이 시간 죽이기로 입에 담는 전설 속의 노인이 눈앞에 현현했다. 그녀는 노인 또한 환상이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속임수를 즐기는 마술사인 노인은 세상이 바라는 현자와는 거리가 먼 성질의 소유자였으나 엄연히 실체를 가지고 있었다.

 노인은 그녀에게 물음을 던졌다. 자네가 바라는 건 무엇인가. 그녀는 대답했다. 이제는 바랄 수가 없다.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인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뤄질 수 없는 소원이기 때문이다. 노인은 껄껄 웃었다. 아직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소원이라 부르는 게 아닌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말장난하지 마라. 이뤄질 수 없는 것과 이뤄지지 않은 것은 엄연히 다르다. 노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의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을 뿐일세. 그녀는 조소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노인은 온화하게 답했다. 원한다면 나와 함께 그 진위를 확인해보지 않겠나. 그녀는 침묵했다. 그건 긍정이란 이름의 정적이었다.

 아무리 올곧고 청량한 정신을 가졌다고는 하나, 아니 오히려 그런 정신의 소유자였기에 그녀는 몰락한 자신의 꿈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술사의 계약서에 서명했다. 악마와 맺는 계약보다 훨씬 질이 나빴지만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현자라는 이름의 마술사는 약속을 지켰다. 우선 노인은 그녀를 당면한 위기에서 빠져 나가게 해주었다. 모두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게 만들면서도 실은 그렇지 않게 꾸미는 교묘한 속임수. 일은 간단할수록 견고한 결과를 가져온다.

 노인은 자신이 가진 불사의 심장을 반으로 나눠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절반의 불노불사를 가지게 된 그녀는 화형 당해 재가 되었다가 한참 후에야 되살아났다. 심장이 절반밖에 되지 않아 회복이 더디긴 했지만 분명히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언제나 마술의 정체는 알고 보면 싱거운 법이다.

 잿더미 속에서 되살아난 그녀는 자신을 배신하고 마녀로 몰아 죽였던 왕과 교회가 실질적인 위협이 사라지자 다시금 자신을 성녀로 떠받드는 걸 보고 그만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실소 같은 게 아니었다. 순수하게 웃음이 터져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끝을 모르는 현자와 끝을 바라는 성녀의 여행이 시작됐다. 그들의 방향성은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바라는 바는 같았다. 세상은 구제할 수 없다. 구제할 수 없는 걸 구제하기 위해서는 절대자가 필요하다. 이 세상에 절대자는 없다. 절대자가 없다면 만들면 된다. 만약 만들 수도 없다면…….

“우리가 절대자가 되어야 한다.”

 깊숙한 심연 속을 헤엄치는 잔 다르크의 의식을 끊고 날카로운 음색이 들려왔다. 마치 잔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선수를 쳐 목소리를 울린 상대는 다름 아닌 클로에 클로버였다.

“그대와 만나는 건 실로 3년 만이군. 잘 있었나.”

 성녀는 죽일 듯이 노려보는 백의의 의사를 무심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아니, 당신들 탓에 죽을 지경이야. 무슨 일을 이리 크게 벌리는 거야. 다른 것도 아니고 그 따위 하잘것없는 목적으로 도시 전체를 뒤집어엎다니 정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쳐.”

 클로에의 음색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이미 일란과 조우해 모든 사정을 꿰뚫고 충격에서 벗어난 클로에는 그리운 옛 동료와 재회했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별다른 동요를 보이진 않았다. 물론 속으로는 당장 끌어안고 싶을 만큼 반갑기도, 반대로 당장 후려치고 싶을 만큼 화가 나기도 했지만, 있는 대로 오기를 부려 절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의 갈망을 하잘것없다고 치부하나. 그대는 항상 과거를 부정하는군.”

 작게 중얼거리는 잔의 목소리는 쓸쓸했다. 정말 눈앞의 상대는 변화무쌍하다. 멸망해가는 세상에 절망하여 울부짖던 레이율 단티아, 월식의 일부를 품어 강철 같은 의지로 단호하게 황금시대를 도래시키려 했던 플라톤, 베아트리체에게 패배한 후 기억을 빼앗겨 어린양처럼 떨던 3년 전의 클로에 클로버, 천체폭파사건 이후 다시 과거를 알고 새로운 기억을 쌓아 날카롭고 위태로운 자아로 자신을 드높이는 지금의 클로에……. 그녀는 옷을 갈아입듯이 수없이 자신을 바꿔왔다.
 클로에는 코웃음을 쳤다.

“당신들이 너무 과거에 얽매이는 거야. 중요한 건 지금을 살아가는 나 한 사람뿐. 과거도 미래도 내 알바 아니지. 내 손이 미치지 않은 수많은 시간에게 나는 어떤 애착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리고 과거든 미래든 현재에 비추어 잘못된 바가 있다면 난 절대 그걸 옹호할 생각이 없어!”

“그렇군…….”

 잔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창을 고쳐 쥐었다. 기세등등한 클로에도 그 순간만큼은 바싹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순수한 천사에게 힘을 부여받아 헤아리기 곤란한 세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의 원석을 갈고닦은 구국성녀의 일섬은 절대 가벼이 볼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저택의 악마를 부려 대항하려는 클로에에게 잔은 고개를 저으며 싸울 의사를 부정했다.

“내 상대는 그대가 아니야. 그대를 기다리는 사람은 저 안에 따로 있지.”

 잔의 부드러운 어조에 클로에는 한순간에 사태를 파악했다. 지금 이곳은 목성천 티마이오스 시스템의 내부. 죄과를 판단하는 정의의 여신상이 모셔져 있는 대법정의 문 앞. 잔은 문지기 역할에 불과했다. 어느 때보다 시스템과의 깊게 접속되어 있는 클로에는 저 너머에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그리고 저 뒤에서 잔에게 달려드는 상대가 누구인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클로에는 잔 다르크를 거쳐 대법정의 문을 열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당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전부터 쭉 그래왔겠지.”

 클로에는 그 한마디만을 남기고 늙은 현자가 기다리는 또 다른 전장을 향했다.

“…잠깐!”

 가만히 클로에의 말을 귀담아 듣던 잔은 뭔가 거슬리는 감각에 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어째서 남에게 전해 듣는 것처럼 말한단 말인가. 그녀는 기억을 돌려받은 게 아니었단 말인가!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클로에는 대법정 안으로 들어섰고 문은 굳게 닫혔다. 지금쯤 안에서는 한참 일란의 진형이 펼쳐지고 있을 터. 섣불리 방해했다가는 모든 걸 그르칠 수가 있다.

 잔은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 노인이 누구인가. 분명 일란이 어떻게든 잘 해낼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일을 성사시키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렇다면 남은 건 믿고 최선을 다하는 것뿐.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다면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다. 자신이 맞아들여야 할 손님은 따로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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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12.10 18:55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무릇 세상의 모든 이들을 위하여 품었던 원대한 비원의 결착점이, 역으로 그녀 자신과 수많은 이들의 기약 없는 고통으로 치환되고 말았다는 잔혹의 아이러니.

    그 길고도 힘들었던 구도의 여정이 이처럼 씁쓸한 여운만을 남기게 될 줄은 클로에도, 잔도, 심지어 그녀들의 뒤에서 암약했던 일란마저도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아아, 과연 무구한 세월 속을 걸어온 현자 일란이 장고 끝에 내놓은 하나의 해답 앞에서 클로에는 어떠한 변증(辨證)으로 맞서게 될는지...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12.11 08:00 신고 address edit/delete

      목적이 정당해도 수단이 가혹하고 옳지 않다든지, 혹은 추구하던 와중에 그 목적마저 변질되는 경우는, 아무리 숨겨진 의도가 좋다고 해도 역시 인정 받기 힘들지 않나 싶어요.

      그런 부분은 Fate 시리즈의 벌레영감이나, 사이코패스의 시빌라 시스템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문득 마키시마 일당의 제안을 거부하며 사람들을 서로 죽이게끔 조작한 너희들부터 죽으라는 카가리 군의 외침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이제 점차 내용도 클라이막스... 다음에는 잔 vs 피아, 클로에 vs 일란의 싸움이 펼쳐질 예정이에요.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힘내겠습니다~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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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흩어지는 노을 (3)


 쌓이지 않는 눈보라를 뚫고 잿빛하늘을 빠르게 비행하는 붉은 나비는 크게 광소를 터뜨렸다. 거치적거리는 명예역천사대원은 지금쯤 십 수 명의 이탈자에게 둘러싸여 죽을 지경에 빠졌을 터. 셀레스티나는 과연 불사의 현자는 대단하다며 기쁨과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분명 자신들이 멋대로 행동해도 그에 발을 맞추어 줄 것이라는 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악랄한 수법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도시를 뒤덮는 이탈자의 숫자를 보아하니 아마 소각청의 회색신사들을 전부 변모시킨 모양이다. 치천사장 자리까지 거절하고 타인과 타협하기를 무엇보다 꺼리는 그 맥거핀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지금 상황이 그녀에게 있어 절호의 기회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이제 셀레스티나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신시아에게 당한 상처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거의 완쾌되어 가고 있었다. 자아가 지나치게 강한 탓에 암흑물질의 침식에 괴로워하는 루카누스에 비해 의존성이 강하며 허무감에 경도되는 셀레스티나는 기질적으로 이 도시의 누구보다도 질서이탈자의 적성에 맞았다.

 암흑물질의 침식이란 바꿔 말하자면 여태까지 쌓아온 역사의 상실을 뜻한다. 그리고 이탈자가 지닌 강대한 힘은 상실되어 가는 시간의 빈 공간에 새로운 구조물을 자유롭게 쌓는 것으로 발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자신의 안에서 자아내는 태피스트리를 기본으로 삼는 루카누스는 질서이탈과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고, 반면에 자신이 좇는 꿈이나 동경하는 대상자의 빛을 받아 허상을 만드는 걸로 삶을 영위하는 셀레스티나는 사라지는 시간의 공백을 마음껏 채울 수 있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이렇듯 점점 이탈자로서 강대해지는 셀레스티나는 이윽고 산자의 시간을 먹어치우는 암흑물질 본연의 성질까지 체득하게 되었다. 그녀는 마치 개라는 동물이 민감한 후각으로 사물을 판별하듯이 길가에 남겨진 시간의 자취를 보고도 상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배신자이자 연적이 남긴 시간의 자취는 모모의 꽃집을 돌아 슬픈 도시 유일한 병원에서 끊어져 있었다.

“기껏 한다는 게 자기 굴속으로 꽁무니를 빼는 거야?”

 셀레스티나는 경멸스럽게 클로에의 저택을 일별한 후 거대한 불길을 일으켰다. 트라팔가르 거리에서 빌딩을 전소시킨 불길보다 몇 개는 거센 화염이다. 불길을 일으킨 셀레스티나 본인조차 견디기 힘들어 자리에서 물러날 정도로 강렬한 힘의 행사였으나, 놀랍게도 저택은 그을린 구석 하나 없이 말짱했다.

“과연 뱀이 도사리고 있는 대저택……. 쉽게 무너지지는 않나 보네.”

 셀레스티나는 한껏 얕봤던 태도를 버리고 다시금 전열 가다듬은 후 저택으로 접근했다. 그녀 역시 일전 아카데메이아의 부학장이었던 만큼 월식의 분체 중 하나인 기억의 뱀이 봉인당해 있는 저택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곳은 예전에는 플라톤의 거처였으나 베아트리체의 반란에 의해 정권이 교체된 후 코키토스 유일한 의사를 자처하는 클로에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도 셀레스티나는 비겁하게 악마의 비호 아래 숨어든 클로에를 용서할 수 없었다.

“잠깐만요. 그 이상 접근하시면 별로 좋지 못한 꼴을 당하실 텐데요. 환자도 손님도 아닌 불청객은 이만 돌아가 주시죠.”

 셀레스티나가 저택부지로 들어서려는 순간 가벼운 어투지만 묘한 중압감이 있어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택정원에는 어느새 짙은 연미복 차림의 디스가 나와 빙글빙글 웃으며 공중의 셀레스티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

 명확히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를 오한에 위험을 느낀 셀레스티나는 곧장 디스를 향해 연달아 불길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디스와 그 주변은 탄 자국 하나 없이 멀쩡했다.
 셀레스티나는 당황하지 않고 저택 주변을 선회하며 시범삼아 다른 곳에 불길을 일으켜 보았다. 역시 그녀의 불꽃은 저택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차원이 어긋나 있는 건가…….”

 몇 차례 실전을 거친 탓인지 셀레스티나는 슬슬 예상 밖의 사태에도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디스를 비롯해 이 저택을 일소하기 위해서는 직접 상대의 영역 안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상대가 정체 모를 악마시종인 만큼 위험부담은 크겠지만 여기서 있어봤자 속절없이 시간만 흐를 뿐 클로에를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택부지 안으로 들어서려 하는 셀레스티나를 디스가 다시 한 번 제지했다.

“음, 들어오시면 정말 후회하게 될 텐데요.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하게 될 걸요.”

 허세는커녕 장난치는 걸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으나, 이상하게도 셀레스티나는 마지막 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저택부지에 들어서는 순간 어떤 거대한 존재에게 잡아먹힐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이다. 셀레스티나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아 어쩔 줄 모르는 자신에게 채찍질을 가했다.

 이제 와서 뭘 두려워하는 건가. 디스란 저 악마시종이 대악마 월식의 분체라는 사실을 빼면 그가 위험하다는 어떤 근거도 없지 않은가. 그에 비해 자신은 질서이탈을 통해 상궤를 벗어나는 힘을 몸에 익혔다. 이 두려움은 모두 환상이다. 어서 돌진해라!

“으, 으으…….”

 그러나 셀레스티나의 몸은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고 그저 떨고 있을 뿐이었다. 셀레스티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을 타파하기 위해서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럼, 나보고 여기서 그냥 물러나라는 거야? 클로에 클로버……. 그 배신자를 여기 남겨두고 떠나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녀석의 시종이 하는 말을 내가 순순히 들을 것 같아?”

 역시 말이란 중요하다. 비록 말뿐이긴 해도 상대에게 있는 대로 적의를 부딪치는 행위만으로 셀레스티나는 몸을 지배하고 있던 오한이 서서히 자신의 불길에 사라져가는 걸 느꼈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다. 상대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저택 안으로 돌진해 모든 불안감을 불식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디스의 대답은 셀레스티나의 발길을 잡기에 충분했다.

“누가 누구의 시종이라는 겁니까?”

“뭐……?”

“전 언제나 아가씨의 시종일 뿐입니다. 별로 클로에 클로버를 섬기고 있는 게 아니지요. 제가 이 저택을 지키고 있는 건 이곳이 클로에 클로버의 거처라서가 아니라 아가씨의 쉼터이기 때문입니다.”

 디스의 말에 셀레스티나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렇다면 뭐야. 이 악마는 딱히 클로에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 여전히 옛 주인을 섬기고 있단 말이야? 하지만 그래서는 여전히 저택에 자신을 들여놓지 않으려는 태도가 설명되지 않는다.

“웃기지 마. 그럼 왜 클로에를 비호하는 거지? 그녀가 바로 네 주인을 배반했잖아!”

 셀레스티나의 외침을 들은 순간 디스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눈앞의 있는 상대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동정하는 듯한, 그리고 상대를 불쌍히 여기기에 누구보다도 조롱하는 듯한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그러나 디스의 기묘한 미소는 셀레스티나가 착각이라고 생각할 만큼 일순간에 사라졌으며 다시 그는 본래의 가벼운 미소로 돌아와 말했다.

“누가 누구를 비호한다는 말입니까? 클로에 클로버는 여기 없습니다만.”

“여기 없다니, 그럼…….”

“베아트리체의 주치의인 그녀는 자택에 곧장 각 천체로 이어지는 게이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쯤 아마 지고천의 가짜 성녀 뒤에라도 숨어있겠지요. 그녀는 참 약한 사람이니까요. 그러니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이 안으로 들어와 봤자 시간 낭비할 뿐이라고.”

 능굴 맞은 디스의 말에 셀레스티나는 어떻게 해야 될지 고민에 빠졌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클로에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디스의 불순한 태도나 묘하게 여유 있는 모습으로 봐서는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아까부터 오한을 통해 느껴지는 본능적인 경고음이 그녀를 더욱 더 주저하게 만들었다. 이토록 강대한 힘을 지니게 되었지만, 아니 오히려 강대한 힘을 손에 넣었기에 더욱 셀레스티나는 디스가 자기 영역 안에 들어온 외적을 아주 손쉽게 해치울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평소라면 상대의 거짓말과 허세에 속는 게 싫어서라도 억지로 불길한 예감을 확인해봤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오기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뭐, 좋아. 어차피 베아트리체도 요절내고 싶은 상대 중 하나였으니까. 만약 네가 거짓말을 한 거라면 다시 돌아와 전부 불태워주겠어!”

 셀레스티나는 허세를 부려 상대에게 한껏 위협을 한 후 그 자리를 떠났다.

“그래, 먼저 그 여자부터……!”

 처음에는 거의 자기합리화에 가까운 생각이었지만, 점점 셀레스티나는 베아트리체를 먼저 처단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 여기게 되었다. 그곳에 클로에가 있다면 일석이조이며, 그렇지 않다 해도 베아트리체 또한 셀레스티나에게 있어서는 역전이자 역적 중에 한 사람이니 충분히 처단할 만한 이유가 있기 떄문이다.
 셀레스티나가 떠난 후 디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아쉽군요. 저런 모순에 가득 찬 상대는 직접 뱃속에 넣고 지긋이 감미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의 곁으로 보내는 편이 훨씬 숙성된 일품의 맛을 느끼게 해주겠지요.”

 인간의 영혼을 탐하는 기억의 뱀은 아쉬워하면서도 기쁜 듯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빛과 세상을 차단하는 칠흑의 장막이 내려온다. 롬발트 경감의 구획정리에 의해 폐쇄된 공간은 완벽하게 세상과 단절되고 말았다.

 테네브로소il tenebroso. 발동자가 사망하거나 스스로 해제하기 전까지는 절대 풀리지 않는 봉인암막封印暗幕. 그러나 그 내부는 암흑물질을 연상시킬 정도로 새카만 차단벽과는 다르게 눈이 시릴 만큼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외부를 거절하는 검은 막 아래 내부를 포옹하는 하얀 들판이라는 배합은 그야말로 부패한 시간에서 도망친 코키토스의 축도縮圖였다.

 롬발트 경감은 이제야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설령 일이 잘못된다고 해도 죽는 건 자신밖에 없으며 최소한 눈앞의 상대 또한 같은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폐쇄된 구획에 상대를 끌어들인 이상 이제 부하들은 안전하다.

 물론 그렇다고 롬발트 경감이 딱히 죽을 생각으로 상대를 이곳에 끌어들인 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자기희생에서 비롯되는 도취적인 파멸욕구를 혐오하는 성격에 속한다. 그가 안도한 이유는 하나는 가능성의 문제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이렇게 단둘밖에 없는 공간이라면 자신도 마음껏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깥에서는 주변에 확산되는 그의 권원의 특성상 부하들이 휘말릴까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이라면 얼마든지 상대와 부딪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아까와는 다르게 여기서는 부하들의 지원이 없는 만큼 딱히 유리하다고 말할 건 아니었지만, 그는 이왕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특히 전투는 마음이 꺾인 자부터 틀림없이 죽고 만다.

 암막il tenebroso이 전개된 이후 늑대의 팔을 가진 질서이탈자는 일시적으로 공격을 멈추었다. 꼼짝없이 함정에 빠진 자신의 처지를 당혹스럽게 여기는지, 아니면 냉철하게 탈출할 방법을 모색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단독으로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만은 자명해 보였다.
 이탈자가 정지한 덕분에 그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게 된 롬발트 경감은 상대의 얼굴을 알아보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루카누스 전학장. 설마 일전 광장에서 놓친 이탈자가 당신이었을 줄은 몰랐소.”

 청회색의 토가를 걸친 루카누스가 심연과도 같은 음색으로 대답했다.

“롬발트 라티오. 내가 맡았던 아카데메이아에서 가장 우수했던 학생이 이렇게 전락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착잡하군. 넌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어찌하여 그리 총명했던 네가 이렇게 가짜 성녀의 앞잡이로 전락하고 만 것이냐. 대체 무엇에 그리 현혹 당했단 말이냐.”

“난 어떤 것에도 홀리지 않았소. 겉멋만 든 역천사대를 거부하고 인재가 부족한 능천사대로 내려올 때도 그러했으며, 당신네들의 미치광이 놀음에 가담하지 않고 베아트리체에게 협력할 때도 그러했지. 언제나 난 스스로의 마음이 발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오.”

 매섭게 노려보는 롬발트 경감의 눈빛에 맞서 루카누스가 깊게 으르렁거렸다.

“내 어쩔 수 없이 질서를 이탈하는 바람에 눈이 멀어 정상적인 시력을 잃었다 하지만, 네놈은 허식의 조명 아래 마음의 눈이 멀고 만 모양이군. 플라톤의 황금시대가 도래하는 의미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어찌 그런 우둔한 마음을 품을 수 있단 말이냐!”

“눈이 먼 건 당신들이지! 오히려 나야말로 묻고 싶군. 어째서 당신이야말로 플라톤의 계획에 찬성한 거요? 어째서 지금도 자기 몸을 분쇄하면서까지 허망한 꿈에 매달리는 것이오? 우리 인간 모두를 멸망시키는 그 계획이 어디가 그리도 매력적이었단 말인지 난 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

“어찌 그걸 멸망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냐. 그건 구원이다. 벌레처럼 땅바닥을 기어 다녀야만 하는 우리 인간들에게 내려지는 진정한 구제책이란 말이다. 진정 모르겠느냐. 플라톤의 계획이 실행되면 우리는 이 더러운 지상에서 벗어나 어여쁜 날개를 가지고 황금벌판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가 있다는 것을!”

 루카누스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말은 중요한 의식을 집전하는 사제의 언어처럼 묵직하면서도 환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롬발트 경감은 그에 공감하지 못하고 머리를 붕붕 흔들 뿐이었다.

“아니, 아니오! 그 황금벌판에서 부유하는 나비는 절대 우리가 아니오! 당신이 우리 인간을 벌레라 칭하든 더럽다고 생각하든 내 알바 아니지만, 당신이 싫다고 해서 인간의 정의가 바뀌는 게 아니라는 것만큼은 말해두지.”

“그렇다면 그건 무엇이냐. 황금벌판의 나비가 인간과 다르다면 진정한 인간은 따로 있단 말인가?”

“그건 나도 모르오. 당신은 수 천 년이 넘게 위대한 선인들이 고민해도 마땅한 답을 내지 못한 물음에 대한 답변을 지금 내게 요구하고 있군. 난 무엇이 인간이라 단언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식견을 갖추지는 못했소. 허나 무엇이 인간이 아닌지 만큼은 판별할 제대로 된 상식은 가지고 있지. 당신들이 꿈꾸는 초인超人은 인간이었던 것도, 인간을 닮은 것도, 인간을 극복한 것도 아닌, 그저 인간을 발판으로 삼은 것에 지나지 않소!”

 노기에 찬 롬발트 경감의 외침에 루카누스는 안쓰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 네 말대로 분명 우리가 그리는 낙원의 나비는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지.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하기야 그 혼의 근본된 자와 다르게 일생을 오로지 이 미친 도시에서만 살아온 네가 알 리가 없지. 너는 우리의 과거를 보지 못했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난 당신처럼 행성시대를 거쳐 오랫동안 살아온 것도, 구세계가 멸망하게 된 신화전쟁에 참전한 것도 아니니, 시야가 협소한 건 틀리지 않을 거요. 분명 당신은 내가 모르는, 다른 치유할 수 없는 아픔과 절망을 마주해 왔겠지. 허나 그렇기 때문에 눈에 잔뜩 먼지가 껴 보지 못하는 것도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소? 플라톤을 비롯한 당신들은 지나치게 위만 바라보고 있소. 당신들이 말하는 이상향의 도래란 바꿔 말하자면 인간의 멸절이라는 걸 아직도 모르겠단 말이오?”

“너는 인간의 겉껍질을 지키는 데 연연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인간이란 버려야 될 무언가다. 극복한다든지, 뛰어 넘는다든지 그런 안이한 방법으로 어떻게 될 존재가 아니야. 인성人性이란 아예 뿌리째 뽑아버려 없애버려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단 말이다!”

 붉게 일렁거리는 루카누스의 멀어버린 눈동자를 바라보며 롬발트 경감은 대화를 포기했다. 저건 절대 변하지 않는 과거의 망령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헛된 수고에 불과하다. 한 번 흘러가버린 시간을 다시 붙잡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마주하고 있는 상대 또한 영원히 변질되지 않는 형태로 고착되고 말았다.
 롬발트 경감은 반발장갑을 고쳐 끼며 나직하게 말했다.

“어차피 당신에게 미래는 없소. 난 코키토스의 한 시민으로서 할 일이 남아 있으니 애초에 질 생각도 없지만, 설령 날 쓰러뜨린다고 해도 발동자의 죽음으로 같이 붕괴하는 이 구획 속에선 당신도 같이 매장당할 뿐이오. 아, 물론 그렇다고 항복하면 나가게 해주겠다든지, 그런 모욕적인 제안을 할 생각은 없소이다. 나 역시 이제 와서 시민들을 배반하고, 내 수많은 부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당신 같은 이를 용서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래도 한때는 아카데메이아의 학장이었던 자에게 경의를 표해 죽기 전에 원 없이 있는 힘을 다하라고 미리 일러드리는 것이외다.”

 위풍당당한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허세도 실려 있지 않았다. 역시 자신이 죽는다 해도 동귀어진은 확실하다는 것에서 나오는 고양감인 걸까. 그의 마음속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으나 루카누스는 일단 상대의 안식처 하나를 꺾어주기로 했다.

“뭘 착각하고 있군. 분명 네놈이 죽는다면 이 공간도 같이 붕괴해 말려든 모든 사람들이 파멸의 운명을 맞이하고 말겠지. 허나 탐욕스러운 원동천의 혼백수집기능은 나 같은 이탈자를 제외한 모든 이의 영혼을 동력원으로서 섭취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건 이 폐쇄된 구획에 있는 네놈의 영혼 또한 예외가 아니야. 그 틈을 내가 놓칠 것 같나!”

 루카누스는 말을 마치자마자 롬발트 경감의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오른팔의 늑대를 움직여 돌격해 들어갔다. 과연 방금 전 고한 사실에 동요했는지 롬발트 경감의 권원은 조금 늦게 발동되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루카누스의 늑대는 그 작은 구멍을 놓치지 않고 확실하게 롬발트 경감의 옆구리를 물어뜯었다.

“윽……!”

 롬발트 경감은 심한 통증을 느끼며 곧장 분쇄파동의 힘을 강화하였고, 일단 루카누스는 뒤로 멀찌감치 후퇴했다. 롬발트 경감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는 금세 경관복을 검붉게 물들였고, 그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져 갔다.

 결정적인 타격은 아니었지만 그리 나쁘지 않은 시작이다. 이미 롬발트 경감은 이어지는 격전으로 인해 많이 지쳐 있었으므로 상처로 인한 피로누적도 만만치 않은 족쇄가 될 터였다. 물론 그건 암흑물질과 상성이 좋지 않은 루카누스도 마찬가지였으,나 최소한 육체적인 상처는 없는 만큼 훨씬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그 후 루카누스는 눈으로 제대로 식별이 가지 않을 만큼 빠르게 오른팔의 늑대를 움직여 롬발트 경감을 압박했다. 검은 늑대는 이리저리 미친 듯이 날뛰며 분쇄파동의 장벽이 약해진 부분을 귀신 같이 노려 지쳐 있는 경감을 점점 나락 속으로 빠뜨려갔다.

 사실 순수한 힘만으로 따지자면 중위급의 롬발트 경감은 고위급의 루카누스에게 한참 뒤떨어지는 약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호각으로 맞붙을 수 있는 건 자신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온갖 것들을 타파할 수 있는 롬발트 경감의 권원이 직접적으로 타격해야 하는 루카누스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딱 적합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금 롬발트 경감과 루카누스는 최강의 방패와 최강의 창과도 같은 상태였다. 만약 롬발트 경감의 상대가 루카누스가 아닌 셀레스티나였다면 제대로 손을 써보기도 전에 불에 타 끝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호각은 일순뿐. 상황은 점점 롬발트 경감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건 계속된 권원의 발동과 방금 입은 상처로 인해 체력이 급격히 소모되는 것뿐만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부분의 결점이라 할 수 있었다.

 비록 롬발트 경감의 분쇄파동은 권원자를 중심으로 원의 형태로 주변 성진을 격동시키는 힘의 분출이었지만 기본적인 기점이 양손인 만큼 방어선이 골고루 완벽한 원형을 그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므로 롬발트 경감의 움직임에 따라 얼마든지 옅은 장벽이라든지 사선이 생겨날 수 있었으며 루카누스의 늑대는 그런 부분은 절대 놓치지 않고 매섭게 파고들었다. 그때마다 롬발트 경감은 조금씩 작은 상처를 입거나 무리하게 힘을 증폭시키거나 하는 바람에 소모가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루카누스는 침착하고도 확실하게 서서히 롬발트 경감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롬발트 경감에 비해 루카누스의 상황도 그리 썩 좋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루카누스는 자신의 자아와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키는 암흑물질의 침식현상 때문에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내부 깊숙한 곳에 균열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벌써 그의 눈은 거의 희미한 잔상밖에 세상을 포착하지 못하며 다른 오감도 비슷한 지경이다. 오로지 멀쩡한 건 오른팔의 늑대뿐. 루카누스는 자기마저 잡아먹는 저주스러운 맹수의 감각에 의존해 필사적으로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루카누스의 몸은 망가지면 망가질수록 단단해지고, 오른팔의 늑대는 자아가 상실되어 가면 상실되어 갈수록 날카로워져가며 힘을 더했다. 암흑물질을 억누르던 루카누스의 구속이 풀리자 자연스럽게 질서를 이탈한 본연의 힘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물론 루카누스 본인이 죽는다면 그의 몸에 기생한 암흑물질 역시 사라지겠지만,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는 한없이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더욱 빠르게. 더욱 강하게. 루카누스는 몽롱한 정신으로 검은 맹수에게 채찍질을 가했다. 오른팔의 늑대는 주인의 피와 살을 양식으로 사냥감을 최후의 순간으로 몰아넣어갔다. 그리고 루카누스는 자신마저 먹어치우는 식인맹수를 통해 사냥감의 살점 맛을 느꼈다.

 얼마나 많은 핏방울을 들이마신 후일까. 루카누스는 살과 함께 뼈가 부서지는 감촉을 생생하게 전달받았다. 아마 롬발트 경감의 다리든지 팔인지 결정적인 부분을 물어뜯은 것 같았다. 오감五感을 잃어 오관五官을 통한 인식이 거의 불가능해진 루카누스조차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심대한 타격이었다. 롬발트 경감은 크게 비틀거렸으며 루카누스와 그 늑대는 상대의 허점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콰직. 아까보다도 훨씬 요동치는 육질감이 전해온다. 늑대의 입에서 위의 천체와 연결된 따스한 존재가 느껴지는 것으로 봐서는 아마 목이나 머리를 집어삼킨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할 것도 없이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 암막il tenebroso에 미세한 바람구멍이 나는 걸 포착했다.

 분명 롬발트 경감의 영혼을 회수하기 위한 원동천의 수집이 시작된 것이리라. 루카누스는 그 틈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이미 이성理性이 희미해지고 오른팔의 늑대와 거의 일체화되다시피 한 루카누스는 지금이라면 코키토스의 누구보다도 빨리 질주할 자신이 있었다.

 롬발트 경감의 영혼을 잡아채기만 한다면 무너지는 폐쇄구획 안에서 뛰쳐나오는 건 일도 아니다. 루카누스는 테네브로소에서 탈출하기 직전의 그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잃었던 오감이 돌아온다. 가슴은 답답하고 온몸은 뜨거우면서도 점차 차갑게 식어간다.






 롬발트 경감은 루카누스의 질주를 전혀 잡아챌 수가 없었다. 공방攻防이 동시에 가능한 그의 권원도 능천사의 강화안이 잡아내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질주하는 상대에게는 통용이 되지 않는다. 그저 결정적인 타격을 입지 않도록 방어하는 것만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루카누스의 늑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나워졌으며 분별이 없어졌다. 늑대는 이미 루카누스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오로지 감각 만에 의존해 육박해 들어오는 짐승은, 그러나 루카누스가 확실하게 고삐를 잡고 있을 때보다 훨씬 위협적이었다. 이미 롬발트 경감의 몸은 성한 곳이 한군데도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이빨에 뜯겨 상처투성이였으며 경관제복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롬발트 경감의 얼굴에는 이해할 수 없는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누가 봐도 엄연히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웃고 있었다.

“당신의 정신이,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소…….”

 롬발트 경감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다. 그에게 있어서 점차 힘을 불려가는 늑대의 존재는 처음부터 위협이 아니었다. 그가 걱정한 건 다름 아닌 루카누스의 강인한 정신력. 그러나 그 강철의 의지도 이제는 금이 가고 있었다. 롬발트 경감은 손을 쓸 때가 왔다고 느꼈다.

 크르릉. 또 다시 롬발트 경감의 사각을 노리고 들어오는 늑대의 이빨. 그는 여태까지와 달리 그 공격을 무리하게 방어하지 않았다. 검은 늑대는 크게 입을 벌려 롬발트 경감의 어깨를 한 움큼 덥석 물어갔다.

“크으, 으으으윽!”

 롬발트 경감은 심한 통증에 터져 나오는 비명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탈자의 공격은 단순히 물리적인 차원을 넘어 영혼 자체에 간접적인 타격을 입히기 때문에 이중으로 찾아오는 고통은 정신을 놓아버릴 만큼 강렬했다. 그러나 참아야만 한다. 아직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흉포한 맹수는 당연히 룸발트 경감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어깨의 일부를 잃고 비틀거리는 그에게 늑대는 사정없이 달려 들었다. 구체적으로 형체를 이룬 죽음의 그림자를 앞에 두고 롬발트 경감은 필사적으로 몸을 돌려 목이나 몸통이 아닌 늑대가 먹다 남은 어깨가 달려있는 팔을 한 짝 그대로 내주었다.

 생명이 파괴되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사방에 피가 튀며 아까보다 훨씬 강렬한 통증이 덮쳐왔지만, 롬발트 경감은 결사의 각오로 그것을 또 다시 넘겼다. 이제 포석은 전부 깔았다. 롬발트 경감은 늑대가, 정확히는 루카누스가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기 전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테네브로소를 해제했다. 찰나의 순간을 건 도박. 만약 루카누스가 조금이라도 이성을 되찾고 있다면 절대 승리할 수 있을 리 없는 내기였다.

“아, 아아…….”

 내기는, 롬발트 경감의 승리였다.
 상황을 제대로 판별할 수 없었던 루카누스는 자신이 물어뜯은 팔뚝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해제되어 가는 어둠의 장막이 상대가 죽었기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라 착각했다. 그리고 루카누스는 그가 예고한대로 그 자리에서 탈출하기 전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주 잠시, 정말 잠깐 동안 정지한 것이지만 처음부터 그것만을 노리고 있던 롬발트 경감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아아아아!”

 기합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고함을 지르며 롬발트 경감은 루카누스의 심장에 아직 건재한 다른 주먹을 꽂아 넣었다. 마치 해면처럼 흐늘거리는 질서이탈자의 심장을 움켜쥔 롬발트 경감은 마지막 남은 분쇄파동의 권원을 짜내어 그것을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다.

“하, 하하…….”

 분쇄파동의 여파에 의해 심장과 함께 몸의 절반이 날아간 루카누스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채 마른 웃음을 흘렸다. 땅바닥에 쓰러진 그는 눈을 뜨고 있되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아, 아아… 여기가… 여기가 바로… 아아, 인간이 없는… 추악함이 없는… 우리들의 낙…….”

 루카누스의 말은 마지막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졌다. 내부를 침식하는 암흑물질과의 지속된 충돌로 이미 닮아 없어지다시피 한 그의 몸은 롬발트 경감의 결정적인 일격에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먼지처럼 부서지는 루카누스의 육체에 따라 그에게 달라붙어있던 암흑물질도 소멸해갔다. 달라붙은 숙주의 시간의 샘이 끊어지면 살아있는 시간을 잡아먹기 위한 죽은 시간의 촉각 또한 제 역할을 마치고 무無로 되돌아감이 지금 있는 우주의 순리였다.

“아슬아슬 했군…….”

 롬발트 경감은 끊어질 듯 미약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지상경찰청의 무너진 폐허에 털썩 드러누웠다. 이겼다. 살아남았다. 처음부터 철저히 계산된 일었다고는 해도 정말 기적 같은 승리였다.

 만약 루카누스와 좀 더 일찍 교전에 들어갔거나 아니면 아예 그가 정신을 잃어 탈출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는 상태였다면 그는 살아남을 수 없었으리라. 비록 한쪽 팔을 잃기는 했지만 혼자서 능천사대 전원을 상대할 수 있는 위험한 강적에게 거둔 공을 생각하면 절대 그 의미는 작지 않았다.
 롬발트 경감은 폐허 속에 누운 채 품속으로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다행이군… 망가지지 않았어…….”

 그가 떨리는 피투성이 손으로 끄집어낸 건 에스텔 스텔라의 영혼이 들어있는 회중시계였다. 결국 그는 이 시계가 가지고 있는 권원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니, 해서는 안 됐다. 분명 죽은 에스텔의 힘을 빌렸다면 충분히 루카누스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었을 테고 지금처럼 만신창이가 되지 않고 승리를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반대로 진 호리츠에 대한 완전한 패배를 의미한다. 에스텔 스텔라의 권원을 이용한다는 건 이유가 어찌 되었건 진 호리츠의 방침을 긍정한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롬발트 경감은 절대 그 음흉한 능천사장의 계략대로 일이 굴러가게 놔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두고, 보자고…….”

 하지만 그는 지금 너무 지쳐 있었다. 승리의 기쁨을 자축하고 싶기도, 주변에 없는 부하들이 어디 갔는지 살피고 싶기도, 방심할 수 없는 진 호리츠를 감시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눈꺼풀이 무거웠다. 결국 롬발트 경감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회중시계를 꼭 손에 쥔 채 스르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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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11.09 00:30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증오와 질투의 연쇄가 빚어낸 감정의 연옥과, 그 안에서 던져진 존재의 의미와 정체성에 대한 한줄기 자문(自問).

    이는 필시 셀레스티나와 루카누스는 물론 영원한 겨울 속의 슬픈 도시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안고가야할 하나의 난제(難題)이자 언젠가는 도달하게 될지도 모를 이상향으로의 실마리였던 것이겠지요.

    바야흐로 육신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한 초월과 인간의 순수성 보존에 의한 점진적 진화 지향의 가치관이 격돌하는 방주 속의 전장에서, 모쪼록 새로운 미래로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기를...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11.09 09:16 신고 address edit/delete

      말씀처럼 사실상 모든 것이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닫힌 세상에서 줄곧 살아가다 보니 결국은 그 모든 것을 단숨에 해결한 이상향으로 향하는 추구에 극단적으로 매달린 면이 있는 듯싶어요.

      그 마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단순히 고통과 절망에 둔감한 것뿐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끝까지 치열하게 초월성을 추구하는 것이 용기인가, 아니면 그 초월성의 추구를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용기인가, 하는 문제는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숙제 중 하나일지도... 문득 제들마이어인가 하는 사람이 말했다는, '인간은 신을 버릴 수는 있어도 초월성에 대한 열망은 버릴 수 없다'라는 구절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옛 소설의 수정판입니다.)









■■■








07. 흩어지는 노을 (2)


 어둠침침한 방. 빛이 희귀한 그곳은 오래된 먼지가 섞인 눅눅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건 낡고 정체되어 잠시라도 눈을 멈춰 감상할 만한 빛나는 가치는 어느 부분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세월의 흐름에서 동 떨어진 그 장소에는 몸이 불편한 한 남자가 절룩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한 사람이면서도 두 사람이었다. 동일한 존재인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백의를 걸친 ‘가짜 의사’였고, 다른 하나는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검붉은 옷을 입은 사내였다.
 흰 옷을 입은 사내가 탄식했다.

“아아, 결국 병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 세상을 뒤덮은 질병의 힘은 너무나도 강대하다. 빠르게 이전하는 암癌을 적출하기 위해선 대수술을 해야 하지만 이미 쇠약해진 환자에게 그것을 버틸 체력 따위는 남아 있지 않다.”

 검붉은 옷을 입은 사내가 가짜 의사를 훈계했다.

“뭘 그렇게 고민하나. 의사의 본분은 병자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병과 싸우는 것이다. 환자의 구제는 어디까지나 질병이 퇴치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를 명심하지 않는다면 의사는 병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최적의 수단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고 환자도 죽어나갈 뿐이다. 부디 눈앞의 위선을 지키고자 더 많은 가치를 져버리는 우행을 저지르지는 마라.”

 그러나 가짜 의사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

“아아, 나는 두렵다. 그릇된 판단, 잘못된 선택, 고칠 수 없는 결과. 그 모든 것이 나를 짓누른다. 환자가 죽어나갈 때마다 의사의 양심은 비명을 지른다. 미래의 가능성, 인생의 무거움, 생명의 가치……. 말로 내뱉는 것조차 송구스러운 소중한 것들이 내 선택 하나에 좌우된다니 그것이 어찌 인간으로서 견딜 수 있는 짐이란 말인가. 아아, 나는 할 수 없다. 아니, 하기 싫다! 스스로 죄를 짊어지고 싶지 않다!”

 흰 옷의 사내는 피 맺힌 절규를 내뱉었다. 어두운 방안에 쩌렁쩌렁 울리는 비탄은 듣는 이의 심장을 죄는 마력이 있었다. 허나 검붉은 사내는 상대의 절망을 온몸으로 마주하고도 조롱 섞인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착각하지 마라! 죄의 유무를 심판하는 건 법관의 몫이지 의사 나부랭이가 고심할 문제가 아니다. 그저 자네는 온갖 힘을 다해 치료에 전념하기만 하면 된다. 설령 일을 그르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태만과 무능에서 비롯된 것만 아니라면 용서받을 수 있다. 대수술을 받아야 할 환자는 이르건 빠르건 어차피 죽음에 한 발 깊숙이 몸을 들여놓은 자들뿐이다. 이미 그들에게 있어 수술과 치료가 성공한 다음의 인생은 그야말로 여생餘生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여분의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고, 나에게는 그것을 누리게 해줄 의무가 있다. 어찌 그 막중한 의미를 앞에 두고 눈을 돌릴 수 있으랴!”

“다시 한 번 말한다. 착각하지 마라! 그리고 스스로를 과신하지 마라! 의사의 의무를 판단하는 것도, 환자의 권리를 판단하는 것도, 임무의 경중을 판단하는 것도, 목숨을 천칭에 다는 것도 전부 법관의 소관이다. 어리석게 자신의 팔이 닿지 않는 타인의 영역에 눈을 돌려 쓸데없이 주저할 필요는 없다.”

 냉혹한 검붉은 사내의 말에 다리를 저는 흰옷의 사내는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그렇다면 내게는 광인을 자유롭게 해줄 권리가 없단 말인가? 언제까지 폐쇄된 상자 속에 갇힌 이들을 내버려둬야 한단 말인가? 그들의 꿈을 존중하고, 그들의 삶을 걱정하고, 그들의 마음에 공감하는 게 불가능하단 말인가?”

 가짜 의사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에서 검붉은 사내는 여전히 냉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불가하지는 않다. 하지만 무용하다. 병자에게 필요한 건 의사의 동정이나 양심의 가책 따위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치료만이 구원이다. 설령 치료가 잘못된다 하더라도 그들의 희생은 다른 병든 이들의 구원으로 이어진다. 치료 받는 목숨 중에 헛되이 버림받는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난…….”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비워라. 심판을 내리는 건 법관의 몫이다. 그리고 의사의 유무죄 여부는 오로지 최선을 다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만 달려있다. 한계까지 힘을 드러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지 후회할 것도, 고민할 것도, 반성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놀라워할 것도 없다. 허나 일이 잘 되었을 때 기뻐하는 것만큼 허용된다. 자네가 자비에 기대어 움직인다면 만사가 순탄하다.”

“병이 나을 수 있다면 환자의 친지도, 환자의 감정도, 환자의 인생도, 심지어 환자 본인의 생사조차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건가. 그렇다면 우리는…….”

 말끝을 흐리는 가짜 의사의 말을 검붉은 사내가 단호하게 이어받았다.

“모든 이를 광신병狂信病에서 구원한다.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광기를 버리고 광기 그 자체를 현실로 만들 것이다.”

 검붉은 사내는 허리를 굽혀 가짜 의사에게 자신의 법복法服을 넘겨주었다. 피로 젖은 사법권을 받아든 순간 흰 옷의 사내는 기적같이도 절룩거리던 다리가 완치돼 당당하게 일어설 수가 있었다. 이로써 가짜 의사는 가짜 법관이 되었다.






 푸르스름한 초승달 아래 허식의 하늘을 찌르듯이 우뚝 서 있는 하얀 구조물. 슬픈 도시의 전시민을 합장할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관처럼 보이는 저 웅장한 건물에 바로 목성천의 티마이오스 시스템이 안치되어 있었다.

 흔히 티마이오스 시스템의 중추는 항성천 또는 원동천에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건 보안을 위한 거짓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는 안전성을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해 이처럼 코키토스에서 가장 견고한 곳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목성천에 그 실질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 내부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드높은 천장과 흐릿한 조명이 함께하는 어두운 복도가 계속되었다. 그 끝에는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상이 각각 한 손마다 칼과 천칭을 들고 판사석을 차지하고 있는 엄준한 대법정이 펼쳐져 있었다.

 일란과 잔 다르크는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느긋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앞으로 법정으로 향해 걸음을 내딛어 갔다. 일란은 더 이상 휠체어에 타고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황금의 꽃이 단지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상자의 결여된 부분을 수복하는 축복을 베풀었다.

“이곳에서 세월을 따지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난 건 실로 몇 백 년 만에 보는군요. 오랜만에 걷는 소감이 어떤가요?”

 복도에 낮게 울리는 잔의 말에 일란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글쎄, 솔직히 말하자면 딱히 새로운 감회는 없군. 내 다리는 시간의 촉각, 암흑물질에 닿아 소실되었던 만큼 아예 태어날 때부터 없었던 것 같은 감각이었지. 그리고 이렇게 플레넘 포르마룸에 의해 상실한 일각을 되찾은 것 또한 날 때부터 건장했던 것처럼 느껴지는지라 뭐라 대답하기 참 난감하다네. 그렇지, 굳이 예를 들자면 책 속의 등장인물이 이렇게 되거나 저렇게 되거나 하는 걸 읽은 것과 비슷한 감각에 가깝지 않을까 싶군.”

 잔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군요. 아무튼 기적의 은혜를 받고도 아무런 위화감도 들지 않는다는 건 우리가 진정한 황금의 꽃을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는 반증. 이걸로 세상 사람들은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구원 받을 수 있겠지요.”

 성녀의 찬사에 현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직 방심해서는 안 되네. 이미 우리는 손에 들고 있는 카드를 전부 보여 주었지만, 루치아의 연인은 여전히 조커를 소매 속에 숨기고 있지. 그가 심혈을 기울여 조합한 우리의 패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자칫 판 자체가 뒤집어질 수도 있어. 그를 얕봐서는 안 되네.”

 잔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 점조차 계산에 넣고 계획을 짠 것이 선생의 두려움 아닌가요. 인위적으로 다수의 이탈자를 생성해 도시 전체를 혼란에 빠뜨린 것만 해도 이미 지고천의 가짜 성녀와 악마의 연인은 우리에게 대응할 수를 다수 잃었지요. 그에 그치지 않고 뜻을 이루는 수단을 동시에 3책이나 전개한 선생 쪽이 나는 더 무섭군요.”

“그렇지. 우리는 분명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썼고 현재까지는 순조롭게 진행 중에 있어. 가장 하책下策은 루카누스와 셀레스티나가 베아트리체를 축출하고 지고천을 몰아내는 것. 당장 뭐가 어떻게 변하는 건 아니지만 하책이 성공할 경우에는 설령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가능하지. 가장 효율이 좋지 않지만 가장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길이야. 그리고…….”

 자연스럽게 잔이 일란의 말을 받았다.

“중책中策은 내 제자, 피아 녹턴을 통해 마녀의 흉성凶星을 불러내는 것. 그 경우에는 굳이 티마이오스 시스템을 장악하지 않아도 완전한 꽃을 통해 별을 움직여 황금시대를 강림시킬 수가 있지요. 마지막으로…….”

 마치 공을 주고받듯이 재차 일란이 재차 그녀의 말을 이었다.

“상책上策은 본래 티마이오스 시스템의 주인을 통해 그 중추를 완전히 통제하는 것. 상책이 성공한다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우리 모두는 구원받을 수 있네.”

“그러니 선생이 무섭다는 거예요. 이중 하나만 성공한다고 해도 우리의 염원은 틀림없이 달성될 수 있는 것을, 셋 다 전부 실현직전을 앞두고 있으니.”

 그러나 일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힘만으로는 도저히 달성할 수가 없었을 걸세. 특히 자네가 협력해주지 않았다면, 애당초 3년 전의 죽음을 연출하는 것도, 아카데미의 옛 학장들이 질서이탈의 힘을 얻는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 베르길리우스가 몸을 움츠리는 것도 불가능했을 거야. 자네라는 최상급의 위협이 존재하기에 그는 판단을 그르쳐 스스로 지고천을 수호하고 외톨이 마녀의 유산을 우리에게 보내게 될 테니 말이지.”

“확실히 그의 입장에서는 우리의 꽃이 완전히 재배되었는지 모르는 이상 도시의 지배권을 송두리째 빼앗길 위험이 있는 지고천이 좀 더 중하게 느껴지겠죠. 그러니 확고하게 지킬 수 있는 그 스스로가 중요한 위치에 서려고 할 것이고. 그로 인해 하책의 실현은 요원해지지만 나머지 중책과 상책의 길은 활짝 열리지요. 몇 번이고 반복하지만 그렇게까지 상황을 유도한 선생 쪽이 분명 그보다 한 단계 위임에 틀림없어요.”

 이상할 정도로 진지한 잔의 표정에 일란은 의문을 느끼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그저 상대 듣기 좋으라고 추켜세우는 건 신조에 반하는 게 아니었나?”

“맞아요. 허나 이건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선생에게 아첨하는 것도, 선생을 신격화해서 불안감을 속이려 하는 것도, 하물며 벌써 우리가 이긴 것처럼 때 이른 승리의 잔을 들고자 함도 아니에요. 나는 지금 아주 당연한 말을 하고 있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당연해야 하는 말을 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앞으로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일은 내 평생, 그리고 미래영겁 영원히 반드시 성취되어야만 하는 숙원. 실패란 절대 생각할 수 없고, 패배란 절대 인정할 수 없지요. 이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일.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온갖 가능성을 소비한 이상 반드시 이뤄진다는 전제 아래 행동함이 당연해요.”

 푸른 불빛이 번뜩이는 잔의 눈을 바라보며 일란은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자네의 말대로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조차 사치스러운 풍류에 지나지 않지. 그래, 아무리 상대가 월식의 4개 분체를 통해 인류예지人類叡智를 뛰어넘는 은총을 받은 악마의 연인이라 하더라도 더 이상 위험부담 따위는 상정해서는 안 될 터. 약속하네. 이 광야의 현자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겠다고.”

“나 역시 맹세합니다. 오늘 이 시각을 기해 이제껏 지상의 지옥을 떠돈 모든 이들을 반드시 구원하겠다고.”

 성전聖戰의 성녀와 광야의 현자는 오래된 계약을 상자 속 깊은 곳에서 끄집어내 다시금 새롭게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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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4.09.28 14:07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과연, 잔과 일란 또한 나름의 확고한 이상향과 올곧은 의지를 품은 채 비원의 그 순간을 향해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역사의 주역들임에 틀림이 없어 보이네요.

    하지만 과거의 일란이 끝내 가슴 속에서 떨쳐버리지 못했던 한 조각의 우려가 현실의 표면으로 급부상 할 가능성 역시 상존하고 있으니...

    모쪼록 구도자의 길을 향해 멀고 먼 여정을 이어온 그들이 마침내 그 짐을 내려놓고 한껏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하며, 다음주의 일상도 힘차게 달려보자구요!!!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4.09.28 18:16 신고 address edit/delete

      이번 장을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도 드디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네요~

      작중 일란과 잔의 진정한 목적이 과연 읽어주시는 분들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것일지 걱정되는 마음도 들어요^^;; 아무래도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 부분도 많이 있다 보니... 그래도 그들의 여정 또한 끝까지 잘 퇴고하고 싶은 마음이네요^^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눈을 두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소디언 님께서도 남은 주말 평안한 시간 되시고, 새로운 한 주도 힘차게 시작하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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