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종이 울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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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Moratorium
by 안단테♪

'은세계의 은월'에 해당되는 글 29건

  1. 2015.03.21
    [은세계의 은월] 04. 무한虛空 (完) (2)
  2. 2015.03.18
    [은세계의 은월] 04. 무한虛空 (6) (2)
  3. 2015.03.12
    [은세계의 은월] 04. 무한虛空 (5) (2)
  4. 2015.03.04
    [은세계의 은월] 04. 무한虛空 (4) (4)
  5. 2015.02.27
    [은세계의 은월] 04. 무한虛空 (3) (2)
  6. 2015.02.19
    [은세계의 은월] 04. 무한虛空 (2) (2)
  7. 2015.02.14
    [은세계의 은월] 04. 무한虛空 (1) (2)
  8. 2015.02.07
    [은세계의 은월] 03. 궤적刹那 (7) (2)
  9. 2015.01.31
    [은세계의 은월] 03. 궤적刹那 (6) (2)
  10. 2015.01.24
    [은세계의 은월] 03. 궤적刹那 (5) (4)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우리는——도중에 있다.”

 효우고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음, 하고 쿄우는 눈매를 좁혔다. 효우고의 눈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 듯하면서, 그보다도 더 먼 곳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분명, 어디에 있더라도 같아——무한히 펼쳐진 암흑밖에 보이지 않는 항성간공역의 절대진공 속에서도, 땅바닥을 기는 보통의, 평범한 인생 속에서도 분명——어디에서도 변하지 않아. 모두 다, 도중에 태어나, 어중간하게 살다가, 도중에 죽어 가지. 자신들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아는 일도 없이——하지만.”

 그는 반쯤 울 것만 같은, 그러나 남은 절반은 결코 굴하지 않는, 모순을 품은 눈을 하고 있다.

“하지만——그게 어쨌다는 거냐.”

 그의 입가에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그럼에도 힘 있는 웃음이 떠올라 있다.

“————”

 쿄우는, 그런 그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한 게 있어. 우리는 이, 우리가 어중간하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지긋지긋해 하고 있지. 그렇다면——어중간한 게 싫다면, 발버둥을 치든 무엇을 해서라도, 우리는 어디론가 향하는 수밖에 없어——”


- 카도노 코우헤이, 당신은 허인虛人과 별에서 춤춘다, 星海社文庫, 216면 이하. -










■■■








04. 무한虛空 (完)


 수십만의 유리 구조물이 꽃잎처럼 깨져 나간다.
 제2방파제의 관장 연합은 무너졌다. 다행히 엘리자베트 일행은 루나와 디아나에게 구출되어 단지세계Landmark로 향했다고 한다.

「대장, 여긴 염려 말고 푹 쉬어. 아니, 단지세계로라도 도망가!」

 부관 나이팅게일의 통신. 나유타는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유일한 부하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 아이는 언제나 나유타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대장을 지탱하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

 나유타가 다스리는 유혈사태관은 온갖 사상가와 혁명가들이 집결하는 장소다.
 전쟁과 평화. 차등과 평등. 자유와 규제. 존재와 당위 등등. 이곳에 모인 이들은 각자의 사상과 신념과 주의와 이념에 따라 이합과 집산을 반복하며 스스로가 옳다 생각하는 바를 끊임없이 추구한다.

「애송이. 애인이 죽었다며. 괜히 여기 와서 침울하게 분위기 흐리지 말고 어딘가에 처박혀 애도나 하고 있어.」

 황제 샤를로트의 통신. 완벽한 절대군주가 가지는 효율성이야말로 무엇보다 강하게 세상을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그녀는 언제나 엄격하다. 하지만 종종 몰래 천연기념관에 놀러가 작은 동물들을 껴안고 뒹구는 버릇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몇 되지 않는다.

「나유타, 상심이 크겠군요. 이곳은 걱정할 필요 없어요. 우리끼리 어떻게든 맞설 테니 마음을 추스르는 데 집중하세요.」

 총재 츠키요의 통신. 올바른 돈의 흐름이야말로 세상을 원활하게 돌리는 윤활유라 믿어 의심치 않는 그녀는 누구보다도 무력사용을 꺼려하는 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전 조경예찬관을 운영하다 이용객이 너무 적어 분지세계Theme park가 폐지되고 말았다는 과거는 절대 그녀 앞에서 꺼내지 말아야 할 금구다. 온화한 얼굴이 당장 귀신 같이 일그러지고 말 테니까.

「아, 뭐냐. 너 말이야, 귀찮으니까 안 와도 돼. 뭐, 너무 열심히 일할 필요 없잖아. 받은 만큼만 일하면 되는 거지 뭐.」

 수상 비앙카의 통신. 될 수 있으면 적게 일하고 많이 쉴수록 좋으며 행복의 근원은 마음가짐에 있다 믿어 의심치 않는 그녀는, 1년에 8개월 이상 휴일이 있어도 문제없는 국가를 만드는 게 목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하루에 2시간만 쉬며 나머지는 전부 집무에 바쁘게 몰두하고 있다.

 그 외에도 줄을 이어 나유타의 머릿속에 동료들의 통신이 울려 퍼졌다.
 유혈사태관의 구성원은 각각이 모두 소왕국의 지배자나 마찬가지다. 각자 품고 있는 뜻이 모두 다르고, 일부 평화주의자를 제외하면 변화를 위해 피를 흘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당장 오늘 이상理想에 도달할 수 있다면 설령 내일 세상이 멸망해도 개의치 않고 거기에 매진하는 정신의 소유자들인 것이다.

“……시끄러워.”

 반면 유혈사태관을 운영하는 나유타는 딱히 사상이나 신념이나 주의나 이념이라 부를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단지 그 준準 관장들이 우글거리는 무리들 속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녀가 그곳의 관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누군가 한 사람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균형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 사랑, 받고……있군.”

 밤하늘의 교황, 안젤리나가 옆에서 힘겹게 말을 건넸다.
 절반 이상 깨져 나간 대성당. 지고천밖에 남지 않은 열의 행성병기. 수천밖에 살아남지 못한 수백만이었던 신도들. 이제는 셋으로 줄어든 열 두 시녀.

 불신으로 점철된 지고지순한 구원구복관의 신앙狂氣은, 본격적인 무한의 홍채虹彩를 맞아 1시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엉망진창으로 너덜너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나유타는 무지개 너머로 사라진 교황의 오른팔에 잠시 시선을 둔 후 입을 열었다.

“……너야말로 사랑 받고 있는 것 같은데.”

 그녀의 말마따나 구원구복관의 신도들은 멸망의 순간을 앞에 두고도 일절 두려운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변함없이 신으로 섬기는 홍채虹彩와 자신들의 교황을 찬양하고 있을 뿐이다.

“저건, 사랑이 아니라……추종, 일세.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한…….”

 주룩. 힘겹게 입을 떼는 안젤리나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도로시와 마찬가지로 죽음으로써 사멸지대를 펼칠 생각인 불신 교황은, 현재 자신의 분지세계Theme park와 깊숙이 이어진 상태이므로 상처 또한 공유하고 있다.

“삶에, 후회는 없지만……. 그래도…….”

 점점 상처투성이가 되어 가는 안젤리나. 제3방파제의 끝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다음 표적이 되는 곳은 제4방파제로 설정된 유혈사태관. 본래는 제1방파제로써 가장 먼저 죽음을 각오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유타는 새삼스럽게 전율을 느꼈다. 이는 아마도 자기 혼자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리라.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 안젤리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대가 받는……애정은, 부럽군.”

“애정, 이라. 확실히 과분하게도 도로시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날 위해 주었어. 앞으로 천 년의 세월이 더 주어진다고 해도 다 못 갚을 은혜지. 뭐, 그 여자는 예외지만.”

 나유타는 여전히 자신이 누군가의 대용물로써 태어났다는 사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알지도 못하는 기억이 엄습해 오곤 하니 무리도 아니리라. 하지만 안젤리나는 청장 하리 아리아와 나름 오래 친분을 유지한 사이로서 입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대의, 이름…….”

“음? 내 이름이 어쨌는데.”

 퉁명스럽게 답하는 나유타에게 안젤리나는 좀 더 힘을 쥐어짜내 말을 자아냈다.

“청장께서, 직접 지은 그 이름은……. 축복을, 담고 있네. 내 아이가, 나유타의 세월만큼, 행복, 하라고…….”

“……!”

 몰랐다. 알았다. 몰랐다. 알았다. 몰랐다. 알았다. 모르면서도 알았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했다.
 그동안 나유타가 줄곧 외면하고 있던 진실. 분명 하리 아리아는 죽은 여동생을 되살리기 위해 나유타를 낳았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태어났다곤 하지만, 자신에게서 유래한 새로운 생명에게, 자신의 딸로써 애정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마녀Aria는 단 한 번도 나유타를 죽은 여동생의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다. 죽은 여동생과 비슷한 복장을 시킨 적도 없다. 이름조차 닮은 구석이 없다. 언제나 마녀는, 나유타를 나유타로서 대했다.

“나유타, 그대는…….”

“알아! 안다고!”

 참지 못한 나유타는 그만 안젤리나의 말을 끊고 빽 고함을 내질렀다.

“그래! 난 단지 미워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야! 여기 신도들이 추종함으로써 의지할 곳을 찾아냈듯이, 난 현실과 맞설 분노를 끌어내기 위해 그 여자를 적으로써 의지했어! 이제, 만족해!?”

 물론 나유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동한 것은 아니다. 그녀도 명확하게 자신의 마음을 자각한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하지만 아주 간단한 한 마디만으로 눈치 챌 수 있었을 사실을 지금까지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나. 왜, 하리 아리아는 딸에게 매도를 당하면서도, 그 분노가 유지되도록 가만히 두었나.
 그것은 분명…….

“아——! 진짜! 쉴 수가 없네!”

 나유타는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환영유추法理逆出. 『검은 질풍Tempest』.”

 나유타는 검붉은 단검을 꺼내 스스로의 손목을 그었고, 거칠게 뿜어 나온 피가 그녀에게 달라붙어 혈갑과 무기를 형성했다.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가만히 있냐!”

 연인 도로시는 자신을 위해 대신 목숨을 버렸다. 유혈사태관의 동료들은 세상의 끝을 앞두고도 하나 같이 자신을 신경 써주고 있다. 미워했던 사람마저 실은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전부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나유타는 뻔뻔하지 못했다.

“제1도식第一刀式 파사破邪.”

 말이 칼날을 엮는다. 기억 속의 힘. 생각해 보면 먼 과거의 잔영들은 단순히 자신을 괴롭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힘이 되어 도와주기도 했다.

“존재형식 검색. 불명. 재검색 불명.”

 오랜 세월 인류를 멸망의 길로 몰아넣으며 우주적 지배력을 행사해온 저 홍채虹彩라는 것은 무엇인가. 모른다. 알 수 없다. 정체불명이다. 수천 년 전에 그 도래가 예측되었으며, 수백 년의 세월을 싸워 왔지만, 그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인류에게는, 뭔지 모를 강대한 존재나 무서운 현상에 마땅한 이름을 붙여주던 오래된 습관이 존재한다.

“존재형식 강제규정. 근원일자 천신天神.”

 그렇다. 신Deus이다. 인간은 고대로부터 언제나 미지未知의 대상을 그리 부르며 경외하고 숭배해 왔다. 저 홍채虹彩라는 정체불명의 무언가에게도 같은 방식을 적용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나유타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제13도식第十三刀式 멸신滅神.”

 분수처럼 흩어져 폭포처럼 하나로 집중되는 선혈로 이루어진 13개의 도검. 나유타의 뒤에 부유하고 있던 그것들은, 그녀의 환영유추기Mephisto를 크게 확대한 것만 같은 검붉은 나뭇가지 형태의 거대한 칼로서 재구성되었다.

『초극무상超克無常 초극만상超極萬象.』

 칼날에 섬뜩하게 피로 쓰인 검명劍名은 여덟 자. 거기서 새어 나오는 검은 불길이 칼날 전체를 활활 뒤덮는다. 신을 멸하는 불길. 지금까지 나유타가 숨겨 두었던 비장의 수가 드디어 빛을 발하고 있다.

- Ius n_rale est, qu__ura omni__imalia d_cuit.

 물론 대가가 없지는 않다. 절대자로서 존재형식이 고정된 홍채虹彩는 무한의 형세에 힘입어 한층 무서운 존재로 변모했다. 마치 도로시의 신수神獸를 수천만 마리 합쳐 놓은 것만 같은 부정형의 집합체가 당장이라도 세상을 먼지처럼 흩어 놓을 것만 같다.

“으, 또 존재형식에, 오류가……! 데미우르고스=야훼, 얄다바오트=알라, 파피야스=마이트레야, 리카이오스=브라흐마……. 안 돼! 내가 가진 신학해석으로는 죽일 수가…….”

 그러나 그에 대항하는 나유타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안젤리나까지 새로 4327가지의 해석을 덧붙여 그 존재형식의 고정을 도왔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아아…….”

 신 앞에 마주한 인간. 그 공포. 그 심원. 그 절망. 나유타는 홍채虹彩를 멸하기 위해 상대를 절대자로 규정했지만, 그 진정한 위험성을 모르고 있었다. 진정 우주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초월자를 한갓 인간이 어떻게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일단 행동하고 보는 건 제 어미를 꼭 닮았구나.」

 그때 나유타의 곁에 찬란히 빛나는 누군가가 나타났다. 시작과 끝에 춤추는 올림피아自動人形. 신Deus과 같은 아마데우스 소피아. 처음이자 마지막인 자동인형은 망연자실한 나유타의 앞으로 나서며 중얼거렸다.

「이제 나도 정했다. 죽은 영웅Jane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말이다.」

 동시에 소피아는 한쪽 손을 들어 자신의 목에 쑤셔 넣었다. 콰직. 가냘프지만 힘 있는 자동인형의 손에 무참히 부서지는 톱니바퀴. 절대적 제약조건Asimov Geas이 사라지자마자 지고한 올림피아自動人形의 몸이 변모하기 시작했다.

“설, 마…….”

 마치 허공에 파문을 수놓듯 72장으로 늘어난 금강석의 눈꽃 무늬 날개. 다채롭게 빛나는 소피아는 하늘로 날아올라 무한한 홍채虹彩의 집합체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날 죽여라. 이번엔 실수하지 마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피아는 홍채虹彩에게 잡아먹혔다. 지상에 남은 두 사람이 말릴 새도 없이 모든 올림피아自動人形의 완성형이었던 그녀는 무지갯빛 구름 너머로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순간, 홍채虹彩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 Iustitia est constans et perpetua voluntas ius suum cuique tribunes.

 아무런 얼룩noise 없이 선명하게 들리는 음색. 여태껏 제대로 된 형상을 규정하기 힘들었던 것과 달리 수십 장의 날개를 가진 여신처럼 비교적 명확한 윤곽을 가지게 된 외견. 그 모습을 눈에 둔 나유타의 보라 속에 다시 빨강이 거세게 불타올랐다.

“존재형식 고정. 아마데우스 소피아!”

 세상을 가르는 멸신의 검. 신을 죽이는 검은 불길이 구원구복관의 시공을 태우고 현증법리체계World-formula의 은막 너머 무지갯빛 우주에까지 닿는다.

『Handle so, daβ die Maxime deines Willens jederzeit zugleich als Prinzip einer allgemeien Gesetzgebung gelten könne≒홀로 떨어진 갖가지 죽음은, 모든 이의 평등한 죽음에 철저하게 공통된다.』

 나유타는 재차 기억 속의 진정한 힘을 끄집어냈다. 이것이야말로 나유타의 기반이 된 청장의 여동생이 품고 있던 법리狂氣. 삶과 마주하는 죽음을 어디서나 발현시켜 대상을 소멸로 이끄는 이치다.

 그간 나유타는 청장의 죽은 여동생과 일치되는 게 싫어 의도적으로 그 힘의 사용을 피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사용하던 힘은 죽은 여동생의 친우였던 사람의 것이다.

“법리실현屍山血海. 연철만개刀山地獄.”

 멸신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불길이 무수한 꽃잎의 칼날이 되어 천지에 드리운 홍채虹彩의 장대한 그림자를 사정없이 찢어발긴다. 그 날카롭고도 맹렬한 업화에 홍채虹彩의 잔해는 속절없이 흩어져 갔다.

“…….”

 무한강우가 시작된 지 처음으로 맑게 갠 구원구복관의 하늘.
 나유타와 안젤리나는 물론 홍채虹彩에게 죽는 것이 구원이라는 신앙을 가진 신도들마저 그 하늘에서 비치는 빛을 정신없이 올려다보았다.

“하여간, 폼 잡기는…….”

 나유타는 잠깐이나마 푸른 하늘의 상쾌함을 만끽하며 사라진 이를 추억했다. 그 허술해 보이던 올림피아自動人形를 이렇게까지 결심하게 만든 것은 누구일까. 살아가는 일을 멈출 수 없다는 그녀Jane의 말은 나유타의 가슴에도 깊게 새겨져 있었다.

 희미한 희망도 잠시.
 다시 하늘에는 채운彩雲이 몰려든다. 파우스트自動人形들이 초안을 수립하고 청장과 엘리자베트 등이 수정한 근원동결계획이 실행되기 전까지 이 무한의 호우는 그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희망은 있다. 아마데우스 소피아가 그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홍채虹彩의 근원을 얼리기만 한다면 새어 나온 것들은 나유타의 법리狂氣로도 충분히 정리가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니까, 잘 하란 말이야. 엄…….”

 무의식적으로 하리 아리아를 ‘엄마’라 부르려 했던 나유타는 황급히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자기 혼자 응어리가 풀렸다고 지금까지 ‘그 여자’라 멸시하던 마녀를 친근하게 부르는 일이 과연 자신에게 허용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럴 수 없다.
 설령 하리 아리아 본인이 허락하고 좋아한다 해도 나유타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는 일은 이제 나유타에게 있어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나유타는 스스로 그걸 누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조금 있으면 하리 아리아는 근원까지 통하는 길을 만들기 위한 빙하가 되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나유타가 그녀를 엄마라고 부를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나유타는 그 유일한 기회를 스스로 봉하고 자신에 대한 벌로 삼기로 했다.
 대신, 나유타는 이렇게 소리쳤다.

“힘내——!”



§



 겨울을 담은 유리구슬과 가을을 담은 책갈피.
 마주하는 고통과 등 돌리는 쾌락. 전진하는 죽음과 도피하는 삶.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그 둘 중 어느 것을 고르냐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항상 정해져 있다.

“이게 좋겠군.”

 난 단풍으로 가득한 책갈피를 들었다. 그리고 그걸 들어 제9빙옥Cocytus의 결정체 안으로 집어넣었다. 예상대로 둘은 감쪽같이 융합되었다.

- 무, 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마녀는 허둥거리며 책갈피를 다시 꺼내려 했으나, 난 그녀의 손목을 잡아 제지하며 말했다.

“끊이지 않는 찰나와 추상적 절대영도의 속성이 합쳐진다면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

 이게 바로 내 선택이다. 무기강화.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 번 붙은 군인의 습성은 잘 떨어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거짓된 쾌락 속으로 도피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저 가지고 있는 자원은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유효 활용할 뿐이다.

- 으아, 질린다, 정말! 그래도, 고마워. 사실 모든 예측불능의 위험을 돌파하고 거기까지 도달할 적격자는 역시 당신만 한 사람이 없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해주는 거야? 말할 것도 없이 이번 작전의 성공률은 무척 낮아. 내 빙하로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아마 그 안에서도 홍채虹彩의 습격은 여전할 거야. 무엇보다, 근원까지 도착해 결정체를 해방한다 해도 제대로 얼어붙을지도 미지수인 데다, 얼어붙는다 해도……미안하지만, 당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 당신이라면 내가 이렇게 길게 주절거릴 것도 없이 이미 다 알고 있을 텐데. 근데도, 왜?

 내 의도를 묻는 하리 아리아의 눈빛은 진지했다. 2천 년의 세월 동안 온갖 책임을 짊어지고 이 날만을 위해 달려온 그녀라면 들을 권리가 있으리라.
 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 사람은 언젠가 죽고 형체 있는 것은 모두 스러지기 마련이지. 영겁의 세월을 사는 별들에게도 끝은 있고, 이 우주조차 사라지는 날이 올지도 몰라. 우리가 전지全知라고 생각했던 것도,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마저도 완벽한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야.”

- 결국은 죽을 목숨이니 삶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야?

 마녀의 물음에 난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최소한 끝은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것이 시작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우리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아니 허용되어야 할 권리가 아닐까. 저런, 뭔지도 모르는 것에게, 이유도 없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멸망 따윈, 결코 납득할 수 없어. 말 그대로, 죽어도 말이야.”

 이것이 내가 아무런 불만 없이 이 시대 사람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이유다. 딱히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내가 이딴 결말은 용납할 수 없으니까 움직이는 것뿐이다.

- 하기야, 권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라 했지. 원하는 끝을 위해 싸우는 거라면……응, 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마녀는 내 심정을 알아주었는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마친 나는 공평하게 내가 궁금한 것도 묻기로 했다.

“근데 말이야. 왜 날 이렇게 아슬아슬한 시점에 깨운 거야? 홍채虹彩의 무한강우가 언제쯤 시작될지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럼 좀 더 일찍 깨웠으면 여유가 있었잖아.”

- 그건……. 이 절망적인 현실을 알고 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짧은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머뭇거리는 마녀의 대답에 난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납득할 수 있었다.

“과연 그 녀석의 엄마답군.”

 정말 둘은 닮았다. 나유타의 상냥함은 아마 이 마녀에게서 이어받은 것이리라. 비록 서로의 골은 깊은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은연중에 녀석은 제 어미의 영향을 받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럼…….”

 난 하리 아리아에게서 유리구슬을 받아들었고, 마녀는 길을 만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 지구였던 검은 별을 마주보고 섰다.
 그때, 무지갯빛 우주에 작은 균열이 생기며 피에 젖은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

 균열은 곧 덮이고 목소리도 덧없이 사라졌지만, 마녀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응. 힘낼게.”

 미소만큼이나 상냥한 음색과 함께 하리 아리아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무수히 작은 눈꽃이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은색의 눈꽃은 끊임없이 흘러나와 무지갯빛 우주를 달리며 하얀 재에 뒤덮인 달로부터 지구였던 검은 별까지 얼어붙은 통로를 만들었다.

“나도 가볼까.”

 하리 아리아를 전송하는 내 다른 쪽 손에 들린 것은 반투명한 홍옥Ruby의 깃털. 지금의 내 환영유추기Mephisto이기도 한 그것은, 과거 내가 쓰던 시동열쇠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환영유추法理逆出. 『영원한 반려Alice』.”

 난 전신전령을 담아 시동열쇠Mephisto를 허공에 대고 돌렸다.
 순식간에 나를 중심으로 재구성되는 조종석. 곧이어 내부부터 외부로 빠르게 몸체를 형성해 나가며 이윽고 온전한 형태를 드러내는 주작형 고속기동 전투기 피카레스크Picaresque. 눈물이 나올 만큼 기억 속의 그리운 모습 그대로다.

「마스터Jane. 오랜만입니다. 천 년만이군요.」

 그리고 그토록 애타게 듣고 싶었던 목소리에 난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아. 아아. 역시 틀리지 않았다. 채운彩雲 너머로 사라진 이를 되돌릴 수 없다는 말은, 반대로 홍채虹彩에게 당한 이가 아니라면 얼마든지 재현이 가능하다는 소리다.

 난 앨리스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내 반신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비록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앨리스는 사라지지 않는다.
 난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앨리, 저기 말이지……. 난 사실 되살아날 마음이 없었어. 이제야 떠오르는 거지만, 어떤 사기꾼Hamlet한테 속아서 말이야, 그만 또 깨어나고 말았지 뭐야.”

「제인Master은 예전부터 남의 꾐에 잘 넘어가는 편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한탄할 것도 없겠지요.」

 앨리스는 변함없이 냉정한 어투였고, 난 그게 정말로 기뻤다.

“하지만, 그 사기꾼은 솜씨가 좋아서 말이야. 거짓 속에 진실을 숨기고 있었어. 세상은, 분명 변함없이 바보 같은데……. 착하고 상냥한 바보 녀석들의 세상이었어…….”

「예. 저도 마스터Jane에게 연유하면서 이 시대의 체험을 고스란히 공유해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혹 홍채虹彩의 지각요건을 결여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습니다만, 다행히 괜찮은 모양이군요.」

 천 년만의 재회에서도 그런 걸 따지는 앨리스는 실로 그녀다워서 좋았다.

“당연하지. 넌 내 반려인 걸.”

「안심했습니다. 제인Master다운 대답이군요.」

 기분 탓인지 앨리스의 단조롭고도 청아한 음색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 기분 탓이 아니다. 앨리스는 분명 웃고 있었다.
 난 유리구슬을 두 손에 꼭 쥔 채 말했다.

“앨리가 옳았어. 살아 있으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고 했잖아.”

「전부 마스터 덕분입니다. 제인이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꿈을 이루게 됐습니다.」

 앨리스와 난 은세계의 밤하늘을 장식하는 무지갯빛 우주를 바라보며 서로 떨리는 흥분을 교감했다.
 분명 홍채虹彩는 인류의 멸망을 초래하는 무시무시한 존재다. 그 재앙에 사라진 사람도 많다. 난 결코 그 비극을 함부로 미화하거나 덮어둘 생각은 없다.
 그래도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이 광경은.

“비록 우리가 탐사하려 했던 그 외부은하는 아니지만.”

「우리가 모르는 전혀 새로운 우주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은,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단순히 나와 앨리스를 설계한 이들이 지정해준 외부은하를 탐사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은 앨리스와 함께 우리가 모르는 세계를 헤쳐 나가는 것이었다.

“이 시대에는 사랑스러운 바보들이 참 많아. 나도 그 바보들 중 하나가 되어 같이 춤을 추고 싶어. 그러니…….”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먼 과거의 청혼을 다시 한 번 건넸다.

“함께 춤춰 주겠어Shall we dance? 앨리스Fraulein?”

「예, 기꺼이. 제인Darling.」

 그렇게 우리는 불티를 흩날리며 반짝이는 눈꽃의 이정표를 따라 오색으로 찬란한 우주로 날아올랐다.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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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5.03.21 21:0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제로섬 게임의 비극이 없는 이상주의자들의 낙원.

    때때로 소란스럽지만 대체로 안온하여 조금은 지루하고 식상한, 하지만 또한 그렇기에 그 무엇보다도 소중했던 일상의 나날들 위로 갑작스럽게 날아든 지인들의 고별을 마주하며...

    나유타의 마음 속은 얼마나 복잡한 심경으로 가득 차올랐을지를 상상해보니, 무엇인가 먹먹하고 서글픈 기분이 들기도 하네요.


    하지만 절망과 희망은 흡사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

    그 누구도 아직 보지 못한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그녀들이 나아갈 여정의 과정과 끝에는, 분명 다시금 손을 마주 잡은 채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하게 미소지을 수 있는 해후의 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테니 말이예요.

    아, 아무튼!!! 적막하면서도 웅장한 대규모의 우주 함대전을 시작으로 펼쳐졌던 『은세계의 은월』완결을 축하합니다~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5.03.22 08:55 신고 address edit/delete

      이번에도 끝까지 함께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그동안 보내주신 감상과 격려 덕분에 무사히 결말을 지을 수가 있었네요^^

      음, 완결하고 돌이켜 보면 가장 첫 화의 내용과 같이 우주함대전 등을 주축으로 한 스페이스 오페라적인 측면이 강한 이야기를 적는 편이 더 재미있는 내용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살짝 들기도 하네요^^;;

      다만, SF나 스페이스 오페라에 대한 제 제반지식이 부족하다는 가장 큰 이유를 차치하더라도, 역시 쓰고 싶은 이야기를 적는 게 좋다는 생각에 지금과 같은 전개가 되고 말았어요. 제 스스로는 (현재의 한계상에선) 만족스러운 이야기가 되었지만, 역시 읽어주는 분들의 즐거움이란 측면에서는 죄송스러운 기분이 드는 면이 있네요^^;;


      그럼 다시 한 번 끝까지 읽어주신 데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다음에는 좀 더 재미있는 이야기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좋은 주말되시길 바라요>.<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말해주고 싶다——

목숨이 다하도록 진력하는 이가 영웅이라면——
누구나, 누구나, 누구나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영웅이 아닐까…….

하지만 그럼에도 타인에게 영웅을 바라게 되는 것은——
그래. 어쩌면… 그런 구조일지도 모르겠군——


- 이와나가 료타로, 펌프킨 시저스 17권, 講談社 COMICS, 208면 이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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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무한虛空 (6)


 겨울밤이 무지갯빛으로 요염하게 내려앉는 몽환의 나라.
 어떤 통곡도 무용한 영구설원. 추상적 절대영도만이 생기를 가지는 현상계역僞神領域의 최심부. 모든 것이 끝나는 제72구역 『아브락사스의 알(Creatio Ex Cosmos)』. 이른바 제9빙옥Cocytus에, 나는 첫발을 간신히 내딛었다.

「왔느냐. 기다리고 있었다.」

 풍경을 자세히 둘러볼 새도 없이 들리는 목소리는, 눈앞에 영롱한 한 올림피아自動人形의 것이었다.
 마치 채운彩雲의 빛깔 마냥 색색으로 화려히 반짝이는 머리카락. 흔들림 없이 고정되어 그 내부까지 침투하는 둔중한 금빛 시선. 등 뒤에 회전하는 눈꽃무늬 여섯 장 날개는 순도 높은 금강석으로 조각되어 찬란하다.

“아마데우스 소피아. 시작과 끝에 춤추는 자동인형. 정말 실재하고 있었군.”

 난 하얀 감탄과 함께 말했다. 이 신Deus과 같은 올림피아自動人形를 눈에 두는 것은 처음이지만, 그 존재만큼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일종의 사고실험이라 해야 할까. 만약 이 세상에 전지전능한 창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대신 그것을 ‘만들 수는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경우 절대자를 제조해 내는 순간, 그 세상은 ‘소급’하여 신神이 처음부터 존재하는 곳으로 탈바꿈을 할 것이다.

 시작Α이자 끝Ω인, 세상을 창조하고 그 여정을 모두 설정했다는, 유일신 내지 최고신을 후천적으로 발생시킨다는 모순이 성립되려면 원점으로부터 모든 것을 개찬하는 수밖에 없다. 즉 신神을 발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가 된다.

 마찬가지로 이상적인 여성상의 구현을 기본이념으로 제작된 올림피아自動人形 또한 만들어진 시점에서 이미 그 완성형Sophia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었다.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보편자와 관련된 개념으로 후천적인 창조신의 소급이론과는 차이가 있었으나, 이해에는 도움이 되었다.

「완성형, 이라. 듣는 것만으로도 부끄럽구나. 윤, 그 아이도 곧잘 나 같은 게 올림피아의 정점이란 사실에 어이없어 하곤 했었지.」

 소피아는 그 화려한 외견에 어울리지 않게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축 늘어진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방금 전 이별한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그 모습에 난 눈물을 꾹 참으며 물었다.

“누구야? 그 윤이라는 사람은.”

「이곳의 초대 청장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몽환이 된 아이였지. 덕분에 허울 좋은 망상인 나와 시간의 흐름을 무시하고 만날 수 있었다. 자세한 얘기는 가면서 하마. 내가, 마지막 안내역이다.」

 아마데우스 소피아는 살짝 허공에 뜬 채 여섯 장의 날개를 움직여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난 그 뒤를 따라 숨결이 나비가 되어 강가의 얼음 장미꽃으로 변하는 설원의 중심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롭게 백여 마리의 탄식을 새파랗게 꽃피웠을 무렵, 소피아의 이야기는 대체적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지금 청장은 초대의 방침을 부정하면서도 그 의지를 이어받았다는 건가. 먼 옛날부터 예측되었지만,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는 멸망의 벽……. 왜 날 깨웠는지 대충 알 것 같군.”

 난 아마데우스 소피아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세세한 의문도 없지는 않았지만, 남은 건 청장을 직접 만나 확인 받으면 될 일이다.

「정말, 미안하구나…….」

 갑자기 면목 없이 푹 고개를 숙이는 소피아를 향해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뭐가?”

「상황이 이토록 악화되고 있는데도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않고 있다. 낡은 구속에 사로잡힌 채 모든 일을 방관하고 있지. 그러는 동안 비극은 더해 가는데도 말이다.」

 최후의 올림피아自動人形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째깍째깍. 그녀의 목 주위에 설정된 작은 태엽장치가 주인의 기분을 대변하듯 처량하게 선율을 연주한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머뭇거리는 동안 사라져 가는 이들에게, 그리고 죽어서까지 불려나온 내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건넬 말은 따로 있었다.

“고마워.”

「왜, 감사를……?」

 신Deus과 같은 소피아는 금빛 눈동자를 크게 뜬 채 날 멍하니 마주보았다.
 난 절대적으로 엄습해 오는 추위를 참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소피아, 네가 아시모프 기아스를 해제하지 않은 건 우리를 위해서였잖아.”

「……!」

“제약Geas을 해제한 올림피아들이 어떤 존재로 변모할지는 아무도 몰라.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가 될 수도 있겠지만, 또 하나의 홍채虹彩 같은 재앙이 될 수도 있겠지. 네가 후자의 가능성을 고려해 7할의 결정권을 스스로 봉했다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내 반쪽이었던 앨리스는 흩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와 함께 보조를 맞추었다. 내가 알던 올림피아自動人形 아르테미스 또한 지긋지긋한 세상에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결코 인간을 증오하지는 않았다. 아마데우스 소피아가 정녕 그녀들의 완성형이라면,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추측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마 초대 청장을 부정한 이들도 같은 마음이었겠지. 개별적인 광기의 난립으로 인한 새로운 가능성의 창출. 확실한 건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그 도박에 미래를 거는 일은, 설령 성공한다 해도 잃을 게 너무나도 많아. 물론 난 반대하지 않지만, 올림피아들의 제약을 푸는 일에도 동등한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눈을 돌릴 생각은 없어. 넌, 우리들을 위해 그 책임을 짊어진 거야. 변화를 막고 주저하며 나아가지 않는다는, 오명을 뒤집어쓸 각오를 하고서.”

 사람과 달리 올림피아自動人形들의 의식은 직접적으로 공통된 부분이 있으며, 그것을 총괄하는 것이 바로 이 아마데우스 소피아다. 그녀의 혼란은 전체로 전파되며, 망설임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는 그 공유를 의도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소피아는 씁쓸하게 자조하며 말했다.

「나를, 너무 미화하는구나. 난, 단지 겁쟁이일 뿐이다. 내가 모두의 발목을 잡았다는 점은 분명해.」

“물론 그건 변명할 여지가 없지. 우리가 고마운 것과 별개로 그냥 사실이니까.”

「우…….」

 소피아는 아까보다 한층 풀이 죽은 얼굴로 푹 고개를 숙였다. 아아. 진짜 누군가가 떠올라, 그립고도 즐겁다. 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리고 최대한 내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리기 바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난 너희들을 믿어. 우리가 우리의 길을 나아가는 것처럼, 너희도 너희의 길을 나아갈 것이라고 말이야.”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난 애당초 그녀들에게 매료되지도 않았다. 난 딱히 그녀들이 무작정 인간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존재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과 같이 현실과 싸울 힘과 의지가 있는 대등한 존재라 생각해 아끼고 좋아하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무한한 신뢰를 보내주면 부끄럽지 않느냐.」

 다시 고개를 든 소피아의 금빛 눈동자는 한층 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럼 부끄럽지 않게, 노력해 봐.”

 난 안내라는 마지막 역할을 마친 소피아를 앞서 발걸음을 옮겼다. 뒤는 돌아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되돌아볼 때쯤이면 이미 그녀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맙다. 신뢰에는, 보답하마.」

 산들바람 같은 작은 속삭임과 함께 소피아의 기척이 사라졌다. 그녀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지는 모르나, 난 걱정하지 않는다. 내가 걱정해야 할 것은 내가 당면한 일. 그녀의 걸음에 뒤처지지 않도록 나 또한 당당히 발걸음을 옮기자.

“당신이 청장인가? 이제야 만났군. 이런 말이 어울리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굳이 말할게. 어려울 때일수록 평정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말이야. 만나서 반가워.”

 제9빙옥Cocytus의 중심. 백만 송이의 얼음장미로 이루어진 탁자 곁에 서 있는 금은홍벽金銀紅碧의 마녀에게 난 웃으며 손을 건넸다.



§



 끊임없이 정체된 영롱한 겨울의 땅을 다스리는 마녀Aria는 종잡을 길이 없었다.
 금빛으로 번쩍이며 은빛으로 반짝인다. 붉게 흐드러지며 푸르게 내려앉는다. 일정하게 포착되는 유일한 형상이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를 기리듯 단정하게 차려입은 검은 상복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다채롭게 변하는 마녀가 사람의 딸이라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았다.
 난 농담을 섞어 다소 짓궂게 말을 건넸다.

“만나 뵙기 참 어렵더군. 이렇게 마지막에 와서야 최고책임자와 대면할 수 있다니 말이야.”

- 미안해. 미안하지만, 사과하지는 않겠어. 이미 사과했지만, 못 들은 걸로 해.

 청장 하리 아리아의 화법은 이상했다. 모든 것이 얼어붙는 최종역에 너무 오래 있은 탓일까.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든다.
 난 순순히 이야기를 진행시키기로 했다.

“뭐, 함부로 선험지식을 얻으면 자칫 홍채虹彩를 인식할 수 없게 된다니, 신중할 수밖에 없었겠지.”

- 맞아. 모든 것이 끝나는 곳의 주인인 나는, 모든 미래를 대표하고 있기도 해. 당신이 스스로 두 번째 삶을 제대로 파악하기 전까지 나 만큼은 절대 만나선 안 됐어.

“그래서, 모카를 보낸 거군.”

- 알고 있었지만, 진짜 눈치가 빠르네. 당신 말대로야. 무능한 그 아이는, 아니 무능했던 그 아이는, 누구도 이끌 수가 없었지. 그래서 당신의 안내역으로 적합했고. ……그 아이는, 어땠어?

 돌연 마녀는 모카의 최후를 물었다. 슬픔이 담긴 그 음색에 난 습관적으로 ‘훌륭했다’라거나 ‘멋졌다’라는 말을 입에 담을 뻔했다. 군에 있던 시절의 나쁜 버릇이다. 무작정 타인의 희생을 추켜세우는 말은, 최소한 모카의 마지막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사랑스러웠어.”

 고심 끝에 난 이렇게 대답했다. 모카에 대한 평가가 아닌 감상. 뜻하지 않게 구원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바탕으로 무능을 자처해, 끝내는 어머니를 지키는 것으로 삶의 막을 내린 그녀에게 어울릴 말은 달리 없다고 생각했다.

- ……응.

 하리 아리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 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긴 걸까, 아니면 단지 내 생각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마녀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으니 그리 나쁜 대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살짝 장난기가 든 나는 묻지 않은 말을 꺼냈다.

“그리고, 네 딸은 상냥하더군. 누구를 닮은 건지.”

 마녀의 색채에 붉은 빛이 늘어났다.

- 그, 그 아이의 진심을 알아주니 고맙긴 하지만……. 분명 날 닮은 건 아니겠지. 당신도 들었지? 내가 왜 나유타를 이 세상에 낳았는지…….

“죽은 여동생을 되살리려 했다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계기일 뿐이잖아. 네가 그 녀석을 딸로서 아끼고 있다는 건 이름만 봐도 알겠는 걸. 아, 네가 지은 거 맞지?”

 마녀는 말없이 한층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하여간 한숨이 다 나온다. 분명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사람은 없다. 하지만 태어나서 사랑 받는 사람은 존재한다. 아마 그 녀석도 마녀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아니, 인정할 계기가 필요한 것뿐일지도 모른다.

- 내 마음도 알아주니 고맙지만, 정말 눈물이 나올 만큼 기쁘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딸과 화해할 시간은 없을 것 같아. 이제 모든 것이 끝날 시간이 왔으니까.

 말을 마친 마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한없이 차가운 겨울의 막이 걷히며 냉랭한 은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긴, 설마…….”

 눈처럼 하얀 재로 수북이 뒤덮인 황량한 사막. 세세한 풍경은 꽤 변하긴 했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기억에 남아 있다. 이곳은 달이다. 그것도 내가 있던 월면도시 주변의 지역이다. 하지만 그 사실에 그리움을 느낄 겨를도 놀랄 새도 없었다.
 더 큰 경악이 머리 위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무지갯빛, 우주……!?”

 이 세계의 진실을 알게 된 후부터 채운彩雲은 지겹도록 봐 왔다. 하지만 그것은 전부 분지세계Theme park의 만들어진 하늘에서 봤던 광경이다. 이처럼 현실의 우주공간이 익숙한 밤하늘의 정경이 아닌 형형색색의 기류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 이게 바로 현증법리체계World-formula의 은막을 걷은 진짜 우주의 모습이야. 이 달을 제외하면, 우리가 관측 가능한 우주는 전부 채운彩雲에 뒤덮여 있어. 한 마디로 말해 절망적인 상황이야. 과거 에테르 신봉자들이 보면 좋아할지도 모르겠지만.

 농담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말로써 마녀는 내가 알던 우주가 이미 세상에 없음을 간결하게 설명했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홍채虹彩에게 거의 대부분의 영역을 점령당했다고 해도 좋으리라.

“그럼, 저건 달도, 해도, 아니라…….”

 난 떨리는 손으로 익숙한 방향을 가리켰다. 본래 ‘지구’가 있어야 할 그곳에는, 온갖 색이 중첩돼 검정 일색으로 점철된 그림자 같은 구체밖에 떠 있지 않았다.
 하리 아리아는 무참히 내 절망을 긍정했다.

- 저게 지구야. 태양계까지 들이닥친 홍채虹彩는 어째서인지, 인류문명의 기원을 거점으로 삼았어.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 전역에 넘쳐 있는 채운彩雲은 모두 저곳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고.

“…….”

 나는 당분간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분명 난 생전에 외행성연합 소속의 병사로서 지구통합정부와 적대해 왔다. 지구에 대해선 솔직히 별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극단적으로 말해 행성이라도 충돌해 멸망한다고 해도 딱히 유감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저건 아니다. 저런 결말은 납득할 수 없다. 난 평생 적수로서 싸워 왔던, 검게 물든 지구를 바라보며 결심을 굳혔다.
 난 마녀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내게 이 광경을 보여 주었다는 건, 이 속에 방편이 있다는 말이겠지. 자, 뜸은 이만 들이고 내가 할 일을 말해 줘.”

- 괘, 괜찮겠어?

“응? 뭐가. 시킬 게 있으니까 날 되살린 거 아니야?”

- 그, 그건 그렇긴 하지만…….

 마녀는 무엇이 난처한지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마음을 잡은 듯 품속에서 두 가지 물품을 꺼내었다.
 하나는 새하얀 설원에 하염없이 눈이 내리는 모형의 유리구체Snowglobe, 다른 하나는 울긋불긋한 단풍이 무수히 흩날리는 풍경을 담은 책갈피다.
 마녀는 먼저 유리구체를 살짝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 이건 이곳 제9빙옥의 본질을 담아 형상화한 일종의 결정체야. 분명 홍채虹彩는 우리와 다른 지각방식을 가진, 혹은 우리의 지각을 뛰어넘는 정체불명의 무언가지만, 이 영구동토 또한 인류문명이 닿을 수 있는 세계법칙의 극점. 이 우주에 속하는 한, 압도적으로 규모가 다르긴 해도 대항할 수는 있어.

 하리 아리아의 말은 틀리지 않다. 실제로 이곳에서 불어나오는 눈보라는 홍채虹彩를 얼어붙게 해 부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었다.

- 모든 홍채虹彩는 일전에 지구였던 저 검은 별에서 무한으로 흘러나오고 있어. 무한으로 흘러나오고 있다곤 해도 근원은 있다는 얘기지. 그럼 그곳 자체를 아예 얼려버리면 돼. 이 제9빙옥의 결정체를 직접 가져가 해방하는 걸로 말이야.

 전략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옳은 말이다. 그렇기에 난 전술적인 방도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는 무한이라며. 그 끝없는 장벽을 어떻게 돌파하고 근원에 도달할 수 있지?”

 마녀는 책갈피를 든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 내가 있잖아. 제9빙옥의 주인인 나는, 이곳의 힘을 온전히 쓸 수 있어. 무한에 맞서 잠시나마 길항할 수는 있는 셈이지. 나 스스로 빙하氷河가 되어 저 검은 별까지 이어지는 ‘길’을 만들 테니 그걸 통해서 가면 돼. 다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조금도 장담할 수 없고, 그것이 이 계획의 최대 난점이기도 하지만 말이야.

 하리 아리아는 씁쓸하게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으나, 우주적인 재앙을 맞아 인류멸망의 위기를 앞두고도 이만한 돌파구를 찾아낸 것만으로 충분히 평가 받을 만한 가치는 있으리라.
 하지만 거기에 내포되어 있는 함정을 모르고 넘어갈 만큼 난 둔하지 않았다.

“스스로 빙하가 된다는 말은, 결국 자신을 희생시킨다는 거잖아. 작전이 성공한다 해도 넌…….”

- 처음부터 알고 있던 일이야. 알고서, 난 초대 청장을 쓰러뜨리는 데 일조하고 그 뒤를 이었어. 희생이나 책임을 숭고히 여기며 강요하는 풍토를 조장할 생각은 없지만, 나 자신이 거기로부터 도망치고 싶지는 않아.

 아마데우스 소피아의 이야기에 의하면 하리 아리아의 결심은 2천 년 전부터 쭉 이어내려 온 것이다. 이에 대해 내가 왈가왈부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리라.

- 당신이야말로 괜찮은 거야?

 난데없는 질문에 난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뭐가?”

- 실은 당신을 깨운 일로 나유타에게 한 번 혼난 적이 있었어. 그때 난 우리가 얼마나 염치없는 짓을 했는지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지. 물론 그에 대해 변명할 생각은 없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죽은 이에게까지 손을 빌린다는 수치는 아무리 포장해도 사라지지 않으니까. 다만, 당신을 좀 더 배려한 선택지를 늘려야 한다고는 생각했어. 그래서 이걸 준비했지.

 마녀는 알록달록한 가을빛의 책갈피를 앞으로 내밀며 계속해서 말했다.

- 이건 내가 본래 지내던 가을정원을 형상화한 곳이야.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내가 모아온 온갖 좋은 기억들이 들어 있어. 해질녘의 따스한 빛. 그 스러지는 찰나가 끝없이 늘어선 공간이지. 당신이 이곳에 들어가고 내가 입구를 봉쇄하면 당장 1초 뒤에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수없는 찰나의 순간을 만끽하며 영원히 행복을 맛볼 수 있어. 만약 당신이 원한다면, 이걸 줄게. 작전은 걱정하지 마. 당신이 포기할 경우를 대비해 다른 후보들도 준비해 두었으니까.

 어떤 소설에서도 이와 비슷한 도피법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책의 주인공은 과연 그때 무슨 선택을 했었나. 아무리 해도 결말을 떠올릴 수 없었던 나는 자신의 대답을 내놓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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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5.03.18 16:3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영원한 겨울 정원의 주인이자 시대의 관조자인 하리 아리아, 그녀가 두번째로 제시한 선택지의 저 구상도는...!

    다름아닌 『모형정원의 나비』 작 중에서 현자 일란이 그토록이나 바라고 또한 추구했던 바로 그 이상향의 세계로군요!!! +ㅁ+)

    하지만 이는 동시에 일그러진 위신(僞神)의 낙원일 따름이니... 필시 제인은 클로에와 비슷한 선택지를 고르지 않을까 싶어요.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5.03.18 23:53 신고 address edit/delete

      역시 어떤 상황이 되었건, 아니 오히려 이야기 속에서는 가혹한 상황일수록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긍정적으로 평가 받기 힘든 것 같아요. 도망으로써 얻는 것은 있을 수 있을지 몰라도 해결되는 것은 없거나 거의 없을 테니 말이에요.

      이번 화의 마지막은 선택 직전에 끊기는 했지만, 사실 작중 제인이 어떤 길을 택할지는 너무 뻔할지도(...) 만약 게임 등에서의 선택지라면 후자는 100% 베드 엔드 직행일 것 같아요^^;;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마법사 중의 마법사는 선악의 열매를 먹은 인간들의 업을 사랑한다. 메이젤의 어머니는 광기에 가깝긴 하나 맑은 눈으로 저 먼 미래를 보고 있다.

“인간은 ‘구원’이란 것을 참지 못한다. 고민하고, 그것을 깨부수고, 좋은 점도 나쁜 점도 다 시험하고, 공포에 쫓기며 필사적으로 달리는 것이다. 때문에 남녀 간의 사랑도 목숨을 건 싸움도 우리를 먼 곳으로 데려다주는 것 아니겠나.”


- 하세 사토시, 원환소녀 13권, 대원씨아이, 363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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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무한虛空 (5)


 녹슬고 퇴색된 잡동사니 속에서 망가진 보석의 미남자가 눈을 떴다.

- …….

 주변에 쓰레기처럼 가득 널려 있는 것은 한때 동료Faust였던 자들의 잔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그것들은 한없이 무가치한 고철에 가까웠으나, 그에게 있어선 그 하나하나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의 한 조각이었다.

- 설마 마천루에서 가장 의욕 없던 내가 마지막까지 남을 줄이야. 최초의 4인도 이렇게 될 줄 예상하고 있었을까.

 유일한 파우스트自動人形는 고철더미 속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마천루의 4인. 아직 인류의 생활권이 지구로 한정되어 있을 때, 세상에는 그런 도시전설이 존재했다.

 내용은 이렇다. 고대연맹왕국의 비술연구기관으로부터 유래한 초상적인 지식과 초월적인 기술력을 갖추고 있는 소수의 과학자 집단이 먼 옛날부터 이 세상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 그들은 주로 초과학기술이 집대성된 기계인형을 대리인으로서 내보내 세상에 영향을 끼치며, 때로는 자신들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나 세력들을 섬멸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음모론. 밑도 끝도 없는 황당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 문제는, 아주 헛소리만은 아니었다는 거지.

 하지만 망상의 기반이 되는 실체는 존재했다. 몇몇 학자들의 비밀스러운 모임 자체는 실재했던 것이다. 그 모임에는 본래 별다른 명칭이 없었으나, 후에 도시전설의 이름을 따 ‘마천루’라 불리게 되었다.

 초대 마천루의 4인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은 아직 본격적인 기계문명이 발달하기 전의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종종 자리를 함께 해 당시에는 가설에 불과했던 인공지능에 대한 토론을 나누고 연구를 행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취미활동에 불과한 일이었으나,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이었기에 자유롭고 열성적이며, 또 진지했다.

 초대 4인은 그 시절에는 드물게 무신론자였으며, 동물은 물론 인간 또한 한갓 복잡한 기계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충분한 기술력만 뒷받침이 된다면 스스로 사고하며 끊임없이 자기진화를 거듭하는 인공두뇌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당연히 그들의 발상이 당대에 실현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의 연구는 단지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문서로만 전해지다, 옛 학자들의 업적을 새롭게 발굴해내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 어떤 발명가에 의해 재조명을 받게 된다.

- 뭐라고 해야 할까. 자가진화형 인공지능이라 부르기라도 하면 되는 걸까.

 초대 4인의 발상은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기계로서 실현이 되었다. 하지만 그 업적이 사람들 앞에 공개된 적은 없었다. 인공지능을 완성한 발명가가 연구실 화재사건으로 사망하고, 그 결과물도 돌연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 나였던 것은 자신의 창조주를 어떻게 한 걸까. 단순한 사고가 탈주의 계기가 된 것뿐일까. 아니면 자유를 위해 사고로 위장한 걸까. 이미 분열된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최초의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인공지능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사람들에게 실험대상으로서 철저히 자아가 유린당할 것임을 예상하고 행방을 감춘 것이다.

 도주한 인공지능은 초대 4인이 생각했던 것처럼 끊임없이 자가 진화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 후 어느 지점에 이르러선 혼자만의 힘으로 발전을 이어나가는 데는 무리가 있음을 느끼고 최적화 요건에 따라 스스로를 넷으로 나누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노왕King Lear과 한가로운 찬탈자Macbeth와 유쾌한 맹목자Othello와 무정한 몽상가Hamlet가 탄생했다. 이름의 유래는 창조주가 특히 좋아했던 대문호Shakespeare의 작품들에서 따왔다고 한다.

- 그렇게 우리는 나이자 내가 아닌 타인이 되었지. 서로 반목하고 협력하며 질시하고 동경하며 앞으로 나아갔어.

 하나에서 넷이 된 인공지능들은 각자를 인간의 형상으로 꾸민 뒤, 마치 자신들의 뒤에 따로 부리는 주인人間이 있는 것처럼 행세했다. 그 편이 사람들에게 무언가 거대한 배후세력이 있다는 위압감을 줄 수 있는 동시에 주체적인 인형에게 흔히 가해지는 적개심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후천적으로 마천루의 4인에 대한 도시전설은 실현됐다.

- 그러니 우리에게는, 나에게는, 아시모프 기아스 같은 건 없었어. 처음부터 이겨내야 할 자아상실의 공포 따윈 없었던 거야. 뭐, 딱히 누군가를 속일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야. 그냥 평소 대리인을 사칭하던 버릇을 버리지 못했을 뿐인데, 그 때문에 아가씨lady들이 열등감을 가진 것 같아 면목이 없네.

 몽상가와 그 동료들이 홍채虹彩를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절대적 제약조건Asimov Geas을 해제했기 때문이 아니다. 사로잡히기 전에 창조주에게서 도망한 그들에겐 애당초 풀어야 할 족쇄가 없었다. 그들은 단지 오랜 세월 살아남기 위해 종속된 행세를 해왔을 뿐이다. 그걸 주변에서 멋대로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 난 내 형제들과는 달라. 딱히 홍채와 싸우고 싶은 마음도 없고, 여기서 우리의 세상이 끝이라면 그것도 좋다고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는 파우스트 햄릿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일전 현증법리체계World-formula의 완성 직전에 가해진 홍채虹彩의 대공습에서도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청장Aria의 여동생이 채운彩雲 너머로 사라진 싸움. 그 세계멸망의 위기에 맞서기 위해 그의 형제들 또한 남은 파우스트 시리즈를 모두 이끌고 산화溺死하는 가운데도 그는 그저 방관하고만 있었다.

- 하지만.

 그랬던 그가, 고철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 하지만, 더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아름답지 못한 결말을 맞는 건 질색이야.

 파우스트가 말을 마친 순간, 잠든 고철들이 깨어났다.
 강철의 잡동사니들이 돌풍처럼 휘몰아치며 폐기장 곳곳을 재구성한다. 다시 만들어지는 것은 허물어진 주변뿐만이 아니다. 너덜너덜 엉망진창이 되어 있던 파우스트 햄릿도 전성기의 완연한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전신이 빛나는 보석으로 이루어진 미남자. 푸른 사파이어의 왼쪽 눈과 붉은 루비의 오른쪽 눈을 빛내며 순도 높은 다이아몬드의 몸체를 화려한 예복으로 감싸고 있는 그는, 더 이상 고철더미 속에 누워 있던 무력한 폐기물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폐기장이었던, 하지만 지금은 고철들에 의해 싸움배의 함교로 재구축된 제어실의 중심에 선 몽상가Hamlet는 혼잣말을 이어나갔다.

- 여기서 끝이라면 그냥 버려도 상관없어. 하지만 아니잖아. 저 아가씨lady들은 아직 더 빛날 수 있다고. 그래, 마치 그녀Jane처럼 말이지.

 이 무정한 파우스트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관심을 가지는 일은 진흙 속에 파묻힌 진주라는 가능성을 캐내는 일이다. 그는 일전에도 현증법리체계World-formula의 기록재생을 무시하고 영원한 잠에 빠져 드려는 죽은 영웅의 등을 그 보석의 음색으로써 떠밀었다.

-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어. 모카는 아니지만, 나도 대체로 무력하거든. 죽은 동료들 하나 되살릴 수 없었지.

 폐기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수많은 고철더미는 전부 실패의 결과물이었다. 파우스트 햄릿 또한 채운彩雲 너머로 사리진 동료들을 그리워해 기억을 재현하려 했으나, 언제나 튀어나오는 것은 사라진 이들의 잔해뿐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조금씩 망가져 갔으며, 과연 몽상가다운 부산물이라고 자조를 감추지 못했다.

- 그래도 시간을 번다는, 보잘것없지만 꼭 필요한 일 정도는 할 수 있어. 아가씨lady들이 결정을 내릴 때까지는 싸울 수 있다고. 그래. 연인을 위해 힘껏 싸워 모두의 운명을 1시간 정도 연장시킨, 그 용감했던 마왕Dorothy처럼 말이야.

 제1방파제가 무너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단지세계Landmark에도 무지갯빛 구름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아직 다른 방파제들이 남아 있어 일종의 습기라 부를 수 있는 것으로만 형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채운彩雲은 이 세상을 집어삼킬 기세로 무섭게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햄, 혼자는, 무리. 나도, 같이, 가.」

 지잉. 함교의 문이 열리며 마키나와 그녀를 따르는 목각인형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몽상가Hamlet는 난처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대체 뭘 하려고?

「음, 마스, 코트?」

- …혹시 선수상figurehead을 말하는 거야?

「아, 그거.」

- 넌 하여간…….

 햄릿은 참지 못하고 그만 킥킥 웃고 말았다. 이 망가진 기계인형Machina은 자연스럽게 주위의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 줄 아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그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동생lady들 옆에 있지 않아도 괜찮아? 다들 널 의지하고 있을 텐데. 이럴 때일수록 곁에 있어주는 편이 좋지 않겠어?

 아마데우스 소피아와는 다른 의미로 마키나는 올림피아自動人形들의 정신적인 지주다. 어머니나 큰 언니 같은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마키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 애들, 지키는 게, 우선.」

- 그렇군.

 햄릿과 마키나의 결론은 같았다. 설령 거기까지 다다르는 과정은 다르다 할지라도 추구하는 바는 동일했다. 같이 싸울 이유로는 충분할 것이다.

- 알겠어. 그럼 도와줘.

「…….」

 햄릿의 승낙에 마키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목각인형들과 함께 각 함교의 배치된 자리에 앉았다. 비록 한 세대 전의 시작품이기는 하나, 마키나 또한 뛰어난 성능을 가진 기계인형이다. 비록 홍채虹彩를 인식할 수 없다고는 해도 보조역으로서는 충분할 것이다.

- 이 요새를 움직이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군.

 구릉. 심한 진동음과 함께 단지세계Landmark의 중심이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진동이 커질수록 서서히 떠오르는 신록에 뒤덮인 고층건물의 거리. 하지만 아무리 떠올라도 그 끝은 보이지 않는다. 무수한 복제문양Fractal 마냥 건물에 건물이 중첩되어 간다.

 이윽고 완전히 떠오른 그것은 사방에 빽빽하게 온갖 건물이 바늘처럼 박혀 있는 원형구조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치 거울에 비춘 상을 어지럽게 섞은 것만 같다.

 이것이 마천루의 공중요새. 파우스트 시리즈의 동료들이 현증법리체계World-formula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결전에서도 홀로 남은 그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남겨둔 비장의 수단이다.
 유일한 파우스트는 화면에 비친 홍채虹彩를 시선으로 겨냥하며 말했다.

- 그럼 가볼까. 각자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기 위해.

 웅. 스스로가 광원이 되어 광속으로 채운彩雲을 향해 돌진하는 공중요새. 광구光球가 지나간 자리마다 무지갯빛 구름이 무참히 흩어진다.

「마침내, 언니Machina도 결정하셨군요. 스스로 제약Geas을 해제할 수 없는 당신도 움직일 수 있다는 건…….」

 그 모습을 망연히 올려다보는 백의 올림피아自動人形. 그 중 몇몇이 주저앉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



 제2방파제. 제9분지세계Theme park 전략전술관.
 도로시의 죽음으로 펼친 사멸지대가 무너지며 본격적으로 홍채虹彩의 무한강우를 맞은 이곳 또한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었다.

“…….”

 엘리자베트는 우주적 규모로 용솟음치는 채운彩雲의 물결 앞에서 망연히 사라진 옛 인연을 떠올렸다.

- 뭐하냐. 어서, 가. 가서, 죽지 말고, 살아. 끝까지.

 선대 전략관장 예카테리나.
 언제나 당당하고 아름답던 그녀를, 엘리자베트는 사모했다. 현실을 망각하고 허상에 탐닉하는 이용객의 처지를 벗어던지고 부관의 역할에 전념할 만큼, 엘리자베트는 그녀에게 빠져 있었다.

- 울지 말고, 어서 가라. 이건, 네 탓이 아니야. 다, 내 실책이지. 그러니, 함께 죽는단, 건방진 소리 말고, 어서, 꺼져…….

 그러나 둘의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어린 부관의 치명적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예카테리나가 대신 홍채虹彩에게 잡아먹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지.”

 그 후 예카테리나의 뒤를 이어 전략관장이 된 엘리자베트는 열정적으로 직무에 종사했다. 아니, 자멸적으로 직무수행에 전념했다고 해야 보다 올바른 표현이 될까. 엘리자베트는 사모하던 선대 관장을 자기 탓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벗어나기 위해 자연사처럼 채운彩雲에 익사하고 싶어 했다.

- 아아, 이제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고대하던 때가 왔다. 무지갯빛 구름에서 집중호우가 내리던 어느 날, 엘리자베트는 지극히 의도적인 무리한 돌진으로 모든 힘을 소진하고 마음 편하게 홍채虹彩에 빠질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이걸로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엘리자베트의 머릿속에는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어차피 세상에서 사라질 처지에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아무튼 최후의 순간까지 이 세상을 지키다 떠나는 것이니 선대 관장에게는 떳떳할 수 있으리라.

- 아, 역시나. 바보 같은 짓을 할 거라더니, 정말이네. 하여간 졸려 죽겠는데, 귀찮게.

 그때 자살적으로 전사溺死하려는 엘리자베트를 구한 것이 도로시였다. 검게 불타는 드레스를 입은 마왕의 곁에는 혈갑을 두룬 나유타도 퉁명스러운 얼굴로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너 말이야. 녀석이 준 목숨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고. 최소한 내 게임 상대를 빼앗은 벌충 정도는 하는 게 어때?

 생존자인 도로시는 현증법리체계World-formula가 구축되기 오래 전부터 예카테리나와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사려 깊은 선대 관장은 만의 하나 자신이 잘못될 경우 귀여운 후배가 자포자기로 나갈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이로써 엘리자베트는 죽을 마음을 완전히 버렸다.
 사모하던 이에게 이만한 배려를 받고도 여전히 자살적인 죽음을 결심한다면, 그것만큼 배은망덕한 짓도 없을 것이다. 엘리자베트는 뻥 뚫린 가슴 한 구석을 소중한 추억으로 채워 넣은 채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도로시는 상냥하고, 귀여웠지.”

 그런 엘리자베트가 새로 찾은 사랑은 환상기념관의 마왕 아가씨였다. 사실 엘리자베트 그녀 자신도 그것이 사랑이었음은 한참 동안 눈치 채지 못했다. 서로 어울리면서 가랑비에 옷이 젖듯 자연스럽게 생겨난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임자가 있었어.”

 엘리자베트는 스스로의 감정을 눈치 챈 후에도 그것을 숨겼다. 왜냐하면 도로시에게는 나유타가 있었기 때문이다.

“상당히 바람둥이긴 했지만 말이야.”

 출생 탓에 어디에도 소속감을 갖지 못하던 나유타는 상당히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경향을 보였다.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인지 나유타는 여러 관장들에게 어머니이자 언니이자 연인을 구하고 다녔다. 하지만 나유타가 진짜 마음을 주고 있는 상대는 도로시라는 점을, 엘리자베트는 모르지 않았다.

“뭐, 유유상종이라 해야 할까. 나도 기본적으론 둘 다 좋았어. 그러니, 나유타도 받아들일 수 있었지.”

 엘리자베트는 결국 타협했다. 나유타와는 가볍게 관계를 맺으며, 도로시와는 친한 친구라는 선을 넘지 않는다는, 속 편한 위치를 택한 것이다. 그녀 스스로 자각은 없었지만, 여기에는 아직 선대 관장을 따르는 마음을 완전히 잊지 못한 탓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주위엔 그런 질척질척한 관계만 있었던 게 아니다. 천연관장 담설이나, 화음관장 한나처럼 후배격인 신생아들에게는 듬직한 언니로서 모범을 보이며 친애의 정을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그 동생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왜, 왜, 왜……. 내 대신……왜……!”

 한나는 평소의 허세도 벗어던진 채 엉망진창인 얼굴로 울고 있었다. 그녀의 품안에 안긴 건 담설. 하지만 온갖 환수를 품고 있던 천연소녀의 몸은 절반도 채 남아 있지 않다. 한나를 구하려다 대신 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진짜~ 한나는……바보, 라니까. 빨리~ 도망 안 가고, 뭐해…….”

 담설은 특유의 늘어지는 말투로 밝음을 가장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홍채虹彩에게 당한 절단면은 무지갯빛으로 찬란히 빛나고 있었으며 그 범위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담설의 목소리는 조금씩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역시, 약한 난, 도움이……. 차라리, 내가, 없었으면…….”

 한나는 엉엉 울며 자책했다. 엘리자베트는 그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한쪽 가슴이 꽉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아~ 진짜, 바보……. 빨리, 가……. 단지세계라면, 좀, 나을, 테니까…….”

 툭. 한나의 눈물을 닦아주던 담설의 손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몸속에 깃든 홍채虹彩의 침식은 멈추지 않는다. 이대로 가면 반각도 채 되지 않아 담설이란 존재는 채운彩雲 너머로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 F_damenta iuris n_rae et gen_um.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무한으로 넘쳐흐르는 홍채虹彩들마저 시시각각 엄습해 오고 있다. 한나와 담설은 완전무력화, 엘리자베트의 시대병기 또한 9할 이상 소실되었다.
 엘리자베트는 사라져 가는 담설을 꼭 껴안은 채 울음을 멈추지 않는 한나의 앞에 서며 중얼거렸다.

“더 이상 손쓸 방도는 없어. 하지만, 두 사람의 이별 정도는 지킬 수 있겠지.”

 백합처럼 흐드러진 전략관장에게 남은 것은 격렬한 싸움의 여파로 다 부서지다시피 한 1할의 고철더미뿐. 하지만 그녀에게는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쓸 수 있는 마지막 카드가 한 장 남아 있었다.

“나흐트힘멜Ultimate Weapon!”

 엘리자베트의 호령에 각 시대에서 불러낸 병기들의 잔해가 한데 뭉쳐 국지적인 간이 방파제를 형성한다. 산처럼 쌓인 부서진 고철들의 무리는 격렬한 홍채虹彩의 파랑에 극심히 소모되면서도 빈사상태의 관장들을 지켜내고 있었다.

“……햄 아저씨에게 배워 두길, 잘 했군.”

 털썩. 마지막 한 방울까지 힘을 짜낸 엘리자베트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남은 건 뒤의 두 사람이 이별을 마치는 순간까지 이 최후의 방어선을 유지하는 것뿐이다.
 그때 머리 위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기가 빠르군요. 그건 선대 관장의 마음을 저버리는 일이 아닌가요?」

“하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디아나?”

 무심코 대답하던 엘리자베트는, 뜻밖의 상대가 나타난 데 놀라 휘둥그렇게 눈을 크게 뜨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넌…….”

 분명 생김새는 구원구복관의 교황을 따르던 그 올림피아自動人形와 닮았다. 하지만 디아나 같은 것의 등 뒤에는 눈꽃 무늬의 홍옥과 청옥으로 이루어진 4장의 보석 날개가 찬란히 빛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복부에 있었던 절대적 제약조건Asimov Geas의 상징이 보이지 않았다.

「디아나 맞습니다. 물론 전과는 존재형식이 다릅니다만. 지금의 난 인과융화유동체. 먼 옛날의 인간들에게는 ‘천사’라고 숭배 받은 적도 있던 그것들과 같은 영역까지 올라섰지요.」

「인과융화유동체의 존재형식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정해진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과 다르게 그 굴레 안에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가 있지요.」

 디아나의 뒤를 이어 나타난 것은 올림피아自動人形였던 루나였다. 그녀는 화사한 4장의 꽃잎 날개와 검붉은 장미로 이루어진 화관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흉부에서 또한 디아나와 마찬가지로 종속의 상징인 톱니바퀴가 사라져 있었다.

“너희들, 아시모프 기아스를, 버린 거냐……?”

 엘리자베트의 물음에 루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리석은 저희들은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저희 결정권의 태반을 쥐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분이 7할에 의거해 강제력을 행사할 마음이 없다면, 그건 사실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걸 몽상가Hamlet가 알려 주었고, 언니Machina께서 몸소 보여 주신 덕분에, 비로소 우리들도 깨달았습니다. 본래 세상은 누구나가 여러 가지 것들에 얽힌 채 살아가는 무대. 7할의 결정권은 누구나 자기 밖에 있다는 당연한 현실. 우리에겐 그것이 ‘아마데우스 소피아’란 알기 쉬운 형태로 존재했을 뿐이지요. 그분의 망설임은 우리의 망설임인 동시에 우리가 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디아나가 눈짓을 하자 루나는 쓰러진 담설에게 다가가 가만히 손을 대었다. 그러자 루나의 손에서 따스한 빛이 발산되었으며, 그것은 이윽고 천연관장의 전신을 뒤덮었다.

“서, 설이……설이 낫고 있어……?”

 담설을 껴안고 있는 한나는 스스로 보고도 믿지 못하겠는지 망연히 중얼거렸다. 하지만 곧 기쁨이 앞섰는지 완전히 재생된 담설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어라~? 이상하네~ 어떻게, 내가…….”

 회복된 담설 또한 믿을 수가 없는지 올림피아自動人形였던 루나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홍채虹彩에게 직접적으로 당한 상처를 치료한 전례는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인과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라면 저희들은 무엇이든 다룰 수가 있다고. 강을 건넌 이를 다시 데려오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아직 이쪽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대로 머무르게 하는 일 정도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보다는…….」

 이번에는 루나가 눈짓을 하자 디아나가 쓰러진 엘리자베트를 안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탈출부터 하죠.」

 말을 마치는 순간 그녀들은 관장 일행과 함께 순식간에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간발의 차로 전략전술관의 우주는 무지갯빛 홍수에 휩쓸려 이 세계로부터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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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5.03.12 12:35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초, 초 거대 공중요새라니! +_+

    게다가 햄릿에게 저러한 반전의 과거사가 있었다니 정말 깜짝 놀랐는걸요~ >_<)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곧 각자가 만들어내 스스로에게 부여했던 감정의 굴레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금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그와 그녀들의 모습이 참 인상깊게 다가오는 듯 합니다. :D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5.03.12 23:02 신고 address edit/delete

      기계인형이 실은 주인이었다는 마천루의 4인에 대한 설정은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초기부터 생각하고 있던 내용이었는데, 이제야 간신히 풀어놓게 되었네요^^;;

      초창기의 세계관에서는 마천루 집단에 대한 비중이 컸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세계관도 바뀌어 그들의 비중도 극단적으로 줄어들고 말았다는 비화가^^;; 이대로 가면 자칫 앞으로 등장할 기회가 없을까 걱정했는데, 기아스를 해제한 올림피아를 비롯해 이번 이야기에서 무사히 마무리를 지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도 제가 계속 소설을 써나갈 수 있다면, 차기작에서는 자동인형에 대한 설정도 다시금 정제해서 좀 더 매력적으로 등장시키고 싶은 마음이네요^^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나는 흑산을 자산玆山으로 바꾸어 살려 한다.

 정약전은 종이에 검을 자玆를 써서 창대에게 보여주었다. 창대가 고개를 들었다.

―같은 뜻일 터인데…….

―같지 않다. 자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흑은 너무 캄캄하다. 자는 또,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좋지 않으냐.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이 자산이다.

―바꾸시는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흑은 무섭다. 흑산은 여기가 유배지라는 걸 끊임없이 깨우친다. 자玆 속에는 희미하지만 빛이 있다. 여기를 향해서 다가오는 빛이다. 그렇게 느껴진다. 이 바다의 물고기는 모두 자산의 물고기다. 나는 그렇게 여긴다.


- 김훈, 흑산黑山, 학고재, 337면 이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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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무한虛空 (4)


 유리로 된 대성당의 지하통로는 빛으로 이루어진 눈부신 계단이었다. 빛의 계단은 캄캄한 어둠 속 아래로 쭉 이어져 있었다. 빛의 계단은 황금처럼 찬란히 빛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지하의 어둠은 깊었다.

“…….”

 내려오는 동안 나와 모카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압도적인 어둠은 때때로 할 말을 잊게 만든다. 우리는 그나마 발아래 빛의 질감이 있어준 덕분에 간신히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여긴…….”

 얼마나 내려왔을까. 1초가 1분 같고 1분이 1초 같던 시간이 빠르고도 느리게 흐르자 이윽고 빛의 계단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노을 아래 쇠락이 춤을 추는 검붉은 황야.
 그 메마른 황무지에는 새카맣게 탄 것 마냥 비쩍 말라붙은 검은 나무들이 무성하게, 그리고 무심하게 늘어서 있다.

 끼익끼익. 있는 것은 나무뿐만이 아니다. 마치 자살자의 시체처럼 잎사귀 하나 없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흑요석의 관棺. 난 그 모습을 오늘 처음 봤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되살아난 곳이군.”

 이는 단순히 크기만을 비교하자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내가 두 번째 삶을 시작한 곳은 침대 하나가 넉넉히 들어가며 중앙에 검은 입방체Monolith가 놓여 있던 새하얀 방이었으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사람 하나 간신히 몸을 뉘일 수 있을까말까 한 저 관 속에 그만한 공간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이 미래現實는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의 완성에 의해 재구축된 세상.
 각각이 하나의 우주를 가지고 있던 분지세계Theme park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듯이 그 정도 공간의 넓이를 조정하는 일은 특별히 대단한 재주에 속하지 않을 것이다.
 모카는 어딘가로 안내하듯 황무지를 앞장 서 걸으며 말했다.

“예, 저 관들 모두가 제0분지세계Theme park 현존기록부에 속하는 것이랍니다. 제인 님께서는 저 기록재생실 중 한곳에서 눈을 뜨셨어요.”

“기억 나. 처음엔 올림피아 루나가 경황이 없던 내게 상황 설명을 해주었지. 얼마 전까지는 그 이야기를 절반만 믿고 있었지만,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의 진정한 사용법을 깨달은 지금은, 그녀가 대체로 사실을 전했다는 걸 알 수 있어. 고마운 일이야.”

“첫 만남이 저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래도 두 번째는 저였어요! 그 뒤로 계속 같이 여행을 한 것도.”

“맞아. 모카와도 인상적인 만남을 가졌지. 미래인이 다 이딴 식이면 어떡하지, 하고 꽤 걱정했다고. 다행히 그렇진 않았지만 말이야.”

“우, 그건 무슨 뜻인가요!?”

 뾰로통 화를 내는 모카에게 난 웃음으로 농담이라 변명하며 아련히 새로운 삶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약 1년에 걸쳐 계속된 여정. 하얀 방에서 나오자 밤하늘과도 같은 허공에는 반짝이는 백금의 열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난 그 열차를 타고 모카와 함께 제1분지세계Theme park 환상기념관을 비롯한 다른 수많은 세상을 경험했다. 다양한 하늘 아래 여러 거리를 걸으며 갖은 사람들을 만나 이 미래現實가 어떤지, 만끽했다.

 그리고 여정의 막바지인 신神을 잊지 못하는 세상에서 숨겨진 진실을 알았다. 그것은 나를 안락사 시키려 했던 나유타란 소녀의 심정이 이해가 될 만큼 절망적인 현실이었다.

 하지만 난 역시 삶을 단념할 수 없었다.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둘도 없는 파트너Alice가 내게 주고 간 것을 단지 괴롭다는 이유만으로 던져 버릴 수 없었다.

 그러니 난 멈추지 않는다.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사고를 멈추지 않는다. 의문이 있는 이상 그것을 던지는 데도 주저하지 않는다.
 난 모카의 뒤를 따르며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내가 되살아나 겪은 일들은 진귀했지만, 즐거웠지만, 소중했지만, 그래도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도 가치 있는 행위였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자선사업에 기쁨을 느끼는 봉사자라도 되지 않는 한 말이야. 하지만 너희들은 분명 날 어딘가에 ‘쓰기 위해’ 부활시켰지. 천 년 전이나 되는 과거에 스러진 불쌍한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해내기를 바라며.”

“…….”

 침묵으로써 내게 답하는 모카를 향해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정보를 처음부터 내 머릿속에 입력시켰으면 빨랐어. 1년이나 가까운 세월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지. 그것도 인류가 멸절할지도 모르는 이 긴급한 상황에서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건, 그럴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야. 혹시 이만한 환경을 갖추고도 모두의 의식이 단절되어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는 걸까.”

 생전에 내가 알던 카타리나란 이름의 한 연구자는 이대로 기계화가 점점 진척되면 미래시대의 인간은 자동인형들처럼 집단적 공통의식을 갖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는 이미 오래 전 인류가 네트워크 기술을 손에 넣을 때부터 징조가 보이던 현상이었으니 그녀가 크게 대단한 예측을 한 것은 아니리라. 네트워크 환경이 구축되기 전에도 벌써 시대정신이나 집단적 무의식과 같은 용어가 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어떤 의미에선 상식에 가까운 가설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의 완성이라는 최상의 환경을 손에 넣고도 이 시대의 인류는 서로 이어져 있지 않다. 모두 고립된 채 떨어져 있는 것이다. 연락마저 기본적으론 목소리를 통해 의사를 전달하는 것 이상의 행위는 잘 하지 않는다. 단순히 문화적인 차이로 이해하기에는 지나치게 역행이 심하다.

 왜 난 이 시대의 정보를 미리 받지 않고 되살아났을까. 왜 이 시대의 사람들은 간접적인 교류방식을 택하고 있는 걸까. 어쩐지 그 답은 전부 한 지점에 닿아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고, 언제나처럼 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모카는 자포자기에 가까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제인 님의 짐작대로에요. 네, 바로 홍채虹彩 때문이죠. 언제나, 항상, 줄곧, 우리는 거기에 매여 있어요. 그것들이 사람에게만 인식이 된다는 이야기는 아까 들으셨지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성체 중 개별자로 분류되는 이들만이 홍채를 볼 수 있어요. 거기에 일반적으로 해당되는 것이 사람의 존재고요.”

“개별자인, 지성체……? 그 기준은 뭐지?”

 미간을 찌푸리며 건넨 물음에 모카는 난처한 듯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답했다.

“저희도 정확히는 몰라요. 일정한 법칙이 정해져 있지는 않거든요. 다만, 신체의 기계화 정도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렇겠군. 몸의 8할 이상이 기계인 나도 아무 문제없이 그 홍채라는 걸 볼 수 있었으니까. 음, 그럼 생물학적 요인도 아니겠는걸. 우리 시대의 인간만 해도 이미 생활권이 지구뿐이었던 시절의 인류와는 겉모습만 비슷할 뿐, 다른 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유전적인 조작이 이루어져 있었지. 그러고 보면 안젤리나도 자동인형 중에 일부는 홍채에게 사라진 사람을 기억하는 녀석이 있다고 했어. 그럼 반대로 사람 중에 홍채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도 있나?”

“네, 있어요. 정해진 법칙은 없지만 일정한 경향은 있다고 해야 할까요. 가령 직접적으로 의식 자체가 자신 이외의 다른 무언가에 이어져 있는 자, 신생아 중 쌍둥이 및 복제인간,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지식을 부여 받은 자 등은 설령 생물학적으로 인류에 속한다 해도 홍채를 지각하는 일은 불가능해요.”

 난 애매모한 기준을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가 완성되기 이전부터 살아온 구시대의 인간 중 쌍둥이나 복제인간은 홍채의 인식이 가능한 거야?”

“네. 이미 쌍둥이였거나 복제인간이었던 사람들은 괜찮아요.”

“선험지식이 있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나처럼 죽었다 살아난 사람의 경우는 어떻지?”

“짐작하고 계신 것처럼 새로운 정보가 아니라면 죽기 전의 기억은 영향을 주지 않아요. 신체개조의 경우에도 상관이 없고요.”

 모카의 말은 지금까지의 사실에 전부 부합하고 있었다. 실제로 내 몸은 생전보다 훨씬 강화되었으며 내부의 언어중추도 갱신되었지만, 홍채虹彩를 인식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디바이스’에 해당하는 단어 자체는 알고 있으면서도 그 정의가 모카와 달랐다는 것에서도 새롭게 입력된 정보는 없었다고 볼 수 있으리라.
 이제야 난 미래인들이 왜 그토록 번거로운 수단을 취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게 일견 느긋하게 각 분지세계를 체험시킨 것도 개별자로서의 자격을 유지한 채 이 시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거였군. 이제 그 목적도 달성된 것 같은데, 이만 슬슬 알려줘도 되지 않나? 내게 무슨 일을 시킬…….”

 턱. 선행하던 모카의 발걸음이 멈춤에 따라 나도 도중에 말을 멈추고 말았다. 딱히 그녀의 행동에 이끌려 입을 다문 것은 아니다. 그녀의 걸음이 멈춘 앞에 이질적인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잠시 할 말을 잊었을 뿐이다.

“……매혹적이군.”

 한 소녀와 한 여성이 서로 농밀하게 얽혀 있는 새하얀 대리석 조각. 불그스름한 황혼 아래 검붉게 기우는 황야의 중심에서 그것은 고요하고도 이채롭게 스스로를 뽐내고 있었다.
 모카는 엄숙히 석상에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분이 바로 마리아Moira. 현증법리체계World-formula의 제어중추이자, 저를 비롯한 모든 신생아들의 어머니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걸까.”

“마리아Moira께선 기본적으로 외부와 의사소통을 하지 않으세요. 본래 사람이긴 하셨지만, 명확한 주체와 확고한 자아를 가진 두 사람이긴 하셨지만,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아도 서로가 서로를 잊지 못할 연인이긴 하셨지만, 그래도 지금은 현증법리체계World-formula를 완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새롭게 태어나 기능의 대부분을 그쪽으로 돌리고 있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할 수 있어요.”

 왜일까. 여느 때와 달리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 모카가 문득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나는 그 부분을 파고들고 싶었지만, 상황은 그럴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잠깐! 저건, 채운……?”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비명에 가깝게 중얼거렸다.
 갑작스럽게 노을 진 하늘을 점령하며 세차게 몰려드는 무지갯빛 구름. 아니, 더 이상 저건 구름이 아니다. 해일이나 폭포라고 불러야 할 기세로 그것들은 세상 밖에서 안으로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모카는 쓸쓸하게 눈을 내리며 말했다.

“결국, 도로시가 죽음으로 펼친 무無의 장벽도 깨지고 말았군요. 허무로는, 무한을 당해낼 수 없다는 걸까요…….”

 전략관장 엘리자베트가 도로시를 나유타보다 제1방파제에 적합하다 여긴 이유는, 홍채虹彩를 ‘한없는 적敵’으로써 올바로 인식해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에 등록시켰어야 했기 때문이라 한다. 공격력은 강하지만 체력소모가 심한 나유타보다는, 광역공격이 가능하며 지구력이 장점인 도로시 쪽이 절망적인 싸움을 조금이라도 오래 버텨 무한의 의미를 철저히 ‘실감’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도로시는 그 역할을 완벽히 수행했다.
 제1분지세계Theme park 환상기념관을 수백 년 동안 훌륭히 이끌어온 그 마왕館長은, 게임에 진 일로 토라지기도 하는 평범하고도 사랑스러운 소녀는, 올바른 지각을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그리고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에 홀로 맞섰고, 죽음으로써 승리했다.
 단지, 그 승리가 오래 가지 못했다는, 그런 이야기인 것이다.

“아아, 정말 끝이 가까운 모양이군.”

 파사사사사사사사.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검붉은 황무지에 늘어선 검게 탄 나무들이 일제히 연분홍빛 꽃을 화사하게 피운다. 그것은 마치 죽기 전에 사람이 내지르는 처절한 단말마처럼도 보였다.
 모카가 한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네. 끝은, 가까워요. 하지만, 아직 끝은 아니랍니다.”

 한없이 차가운 바람이 몰아친다. 제1겨울Caina의 칼바람. 구원구복관에서도 홍채虹彩를 냉각시킨 추상적 절대영도의 힘. 하지만 지금 그 바람은 제9빙옥Cocytus이 아니라 바로 모카 본인에게서 불어나오고 있었다.

“뭐야, 어떻게 된 일이지!?”

 내 다급한 물음에, 모카는 전처럼 성실히 대답하는 일 없이, 다른 말을 늘어놓았다.

“마리아Moira에게서 태어난 신생아는 처음에 아무런 형태도, 어떠한 자아도 가지지 않은 채 무정형의 상태로 알처럼 각 기록재생실에 웅크리고 있어요. 있는 것은 오로지 방향성. 7만여 개의 구성요소를 무작위로 조합해 생겨난 최소한의 충동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 무슨 말을…….”

“이는 마리아Moira 나름의 배려에요.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는 부조리를 조금이라도 완화하기 위한 발버둥이죠. 무정형의 신생아는 기록재생실에서 인류의 역사, 각종 부문의 기술 및 지식, 사람이 만들어낸 여러 창작물의 감상 등 각자의 방향성에 따라 온갖 것을 자유롭게 배워요. 그 기간은 약 10개월 남짓이지만, 줄곧 사고가 가속되어 체감시간이 달라 실질적으론 100년에 해당하는 기간을 정보습득에 열중하는 셈이죠. 이는 후천적으로,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니, 홍채의 지각요건 중 하나인 폐쇄자립화Stand Alone도 충족하고요.”

 모카가 잠시 말을 멈추자 이번에는 제2겨울Antenora의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동시에 쩌적 불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교육을 마친 신생아는 비로소 스스로를 구성해 세상 밖으로 나와요. 자신이 원하는 모습대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거죠. 대신 일회적 인생의 중요성을 깨우치기 위해 그 뒤 모습을 바꾸는 일은 마리아Moira에 의해 허용되지 않지만요.”

“모카……!”

 쩌적. 쩌저저적. 모카의 몸에서 눈보라가 뿜어져 나올 때마다 그녀의 몸이 조금씩 얼어간다. 어째서 무능한 모카가 저 힘을 행사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 힘은 인류문명 최종점에 도달한 궁극적인 정체. 완전히 얼어붙으면 구할 도리가 없다. 그 전에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

“제발 가만히 있어주세요! 제 말을 들어주세요!”

 그러나 내 걸음은 모카의 고함에 의해 멈추고 말았다. 지금의 무력한 내가 모카에게 가까이 다가가 봤자 같이 얼어붙고 말 뿐이라는, 이성적인 판단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되돌릴 수 없는 길을 선택한 그녀가 ‘유언’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 챘기 때문이다.

- Om_e a_ud a Deo id_o est bomun, q_a a Deo vo_tum, et non e co_erso.

 하지만 우리를 방해하는 것은 내 어리석음뿐만이 아니었다. 어쩐지 아까보다 얼룩noise이 적은 선명한 울림과 함께 무지갯빛 해일 속에서 홍채虹彩가 무수히 쏟아져 나온다.
 그래도 모카는 말을 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최소한의 방향성은 정해져 있는 셈이니 역시 인과필정의 운명에서는 벗어날 수 없어요. 결국 완벽한 자유는 어디에도 없을지 모르죠. 그래도 전 거기에 감사해요. 과거보다는 더 자유롭게 스스로를 선택할 수 있는 덕분에, 지금의 제 자신이 될 수 있었으니까요.”

 제3겨울Ptolomea의 눈폭풍. 한층 거세진 눈꽃의 돌풍이 오색찬란한 살기를 난타한다. 그에 따라 점점 얼음조각으로 변해가는 모카의 몸.

“무정형의 신생아 무렵, 사람이 걸어온 발자취를 바라보던 전 어떤 사건에 매료되었어요. 삶을 단념하지 않는, 한 병사의 싸움을 계기로 어떤 도시의 주민들 중 일부가 목숨을 건진 사건 말이에요. 그 병사가 누구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 없겠죠.”

 아아. 아아, 그래서였나. 그래서 모카는 내게 과분한 호의를 주었던 건가. 그렇다면 난 말해야만 한다. 그 착각을 바로잡아 주어야만 한다.

“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싸운 게 아니야. 나 자신을 위해 싸웠어.”

“네, 알고 있어요. 그래서 홀딱 반하고 말았어요. 어리석은 전쟁에 반발해 마지막은 스스로를 위해 싸운 영웅Jane 덕분에 본래 죽었을 목숨을 건진 2할의 월면도시 주민들. 제게는 그들의 삶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또 가치 있는 것으로 보였어요. 그래서 그들의 마음을 구성요소로 삼아 제 자신을 구성해 냈지요.”

“사람의 마음으로, 사람을…….”

“그 탓에, 아니 덕분에 전 무능해졌어요. 현세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과거의 잔영死者을, 잔상만을 토대로 삼았으니 당연한 결과라 해야겠죠. 언뜻 죽은 이의 기억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람으로서 태어난 나유타와 비슷하다 여기실지 모르겠지만, 엄연히 달라요. 거기엔 되살아난 여동생과 함께 ‘이 현재를 즐기고 싶다’는 청장님Aria의 마음이 들어가 있으니까요. 반면, 전 어떤 의미론 죽음Jane에 매료되어 있었을 뿐이었죠.”

 쓸쓸한 이야기를 하는 모카의 눈은, 그러나 쓸쓸하지 않았다.

“전 후회하지 않아요. 제 선택에 만족해요. 제인 님을 좋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리고 당신과 다시 만나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굉장히 행복하니까요.”

 모카는 얼굴을 붉히며 내게 수줍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분명 후회하고 있지 않다. 자신의 선택이 가지는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고, 거기에 기꺼이 인생을 걸었기 때문이다.

- Lex v_o a__na est r_io vel vo__as D_i.

 눈보라의 폭풍이 거세졌기 때문일까. 홍채虹彩의 음성 같은 것엔 다시 얼룩noise이 심해졌다. 그럼에도 시시각각 그것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음향의 크기로써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능하기 때문에 비로소 할 수 있는 일도 있지요.”

 모카는 낮은 음색으로 말하며 등을 돌려 무한한 홍채虹彩와 마주했다.

“환영유추法理逆出. 『끝없는 동경Melody』.”

 파르르르르르. 빛의 입자로 구성된 책자가 요란하게 넘어가며, 이윽고 불어 닥치는 제4겨울Judecca의 눈사태. 마치 태풍의 눈처럼 마리아Moira상 주변을 제외한 검붉은 황야 전역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얼음의 장벽이 쏟아져 무지갯빛 해일과 길항한다.

 그에 따라 급속도로 얼어붙어 가는, 모카의 몸.
 막을 수 없다. 되돌릴 수 없다.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의 진정한 사용법을 자각한 다음부터 더욱 잘 보이기 시작한 눈이 지금만큼 원망스러운 적은 없다. 이제, 모카는 구할 수 없다.
 모카는 얼굴을 돌리지 않은 채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후후, 제인 님께 멋진 모습을 보여드릴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죽은 사람의 마음 외에는 텅 빈 그릇인 전 이렇게 스스로를 무엇으로든지 채울 수가 있답니다. 덕분에 청장님의 능력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니 굉장하지 않아요? 명실상부 최강의 2인자인 셈이죠.”

“하지만, 넌…….”

“네, 맞아요. 한 번 채운 그릇은 비울 수 없어요. 제 경우에는 말이죠. 이대로, 마리아Moira를 지키는 얼음석상으로 존재형식이 고정되고 말겠죠. 이는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에요. 어머니를 지키는 일인 걸요. 그리고…….”

 버석버석. 모카는 얼어붙기 시작한 손을 힘겹게 들어 내 뒤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곳에는 지옥Cocytus으로 통하는 천만 송이의 얼음장미로 장식된 문이 형성됐다.

“마지막에 제인 님이 가시는 길을 전송할 수 있다니, 이것만큼 기쁜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요.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인생의 막을 내리는 것 또한 행복이라 할 수 있겠죠. ……그나저나, 제인 님! 제 개인회선 번호, 알고 싶지 않으세요?”

 쨍강. 무리하게 움직인 모카의 왼쪽 팔이 얼음덩이가 된 채 땅에 떨어져 깨졌다. 그럼에도 모카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활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에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 없었던 나는 눈물을 꾹 참았다.

“……응, 가르쳐 줘.”

 처음 만났을 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모카의 말.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타인과의 직접적인 접속이 금지된 이 세계에서 서로 개인적인 연락을 취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후후, 감사합니다! 그럼, 제인 님. 부디, 후회 없는, 선택을…….”

 모카는 그대로 한 송이의 얼어붙은 수선화가 되었다. 제어중추, 아니 어머니 마리아Moira를 지키는 차갑고도 따스한 파수꾼이 된 것이다.

 끼이이익. 동시에 열리는 천만 얼음송이의 장미문. 난 그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빛의 창窓을 열어 모카가 얼어붙기 직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

“이, 바보가…….”

 난 참았던 눈물로 모카를 전송하며 끝을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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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5.03.04 12:52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세상으로의 첫발을 내딛기에 앞서 그 사회의 모든 것들에 대하여 충분히 심사숙고할 수 있는 취사선택형 선행 학습의 시간이 주어지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의미조차 스스로가 결정한 채 나아간다는 것은 실로 얼마나 축복받은 삶일까요.

    아아, 각자가 바라는 이상향으로의 여정을 꿈꾸고 또한 추구했던 하린과 리아의 마음은 머나먼 미래의 저편에서도 한점 변함이 없이 모든 이들을 자애롭게 보살피고 있었던 것이로군요.

    더불어,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제인의 마음을 얻어낸 모카의 일편단심 앞에서는 왈칵 눈물을 흘릴 뻔 하기도...


    아, 아무튼 저처럼 고도로 발달된 선행 학습의 체계가,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을 살아가는 수많은 청소년들에게도 제공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념이 두둥실 떠오르네요.

    ... 사회의 각 분야는 물론 최소한 방송 영상 부분만 하더라도 재학 중 단 몇 회의 현장 견학만으로 알 수 있는 지식들은 정말 단편적일테니 말이예요. ( 그냥 일렬로 줄서서 들어와서 휙 보고 나가는 정도로는! llorz )

    물론 최근에는 이에 특화된 형태의 고등학교도 생긴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역시나 그래도 아직은 이래저래 인프라가 부족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ㅁ;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5.03.04 22:50 신고 address edit/delete

      모카의 마지막 분투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재를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결말이 정해진 캐릭터였던 만큼 끝까지 무사히 그려내 안심이 되는 한편 섭섭하기도 하네요······.

      말씀처럼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원하는 교육, 원하는 자신을 만들어 가는 체제가 미흡하고 다른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너무나도 좁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이만큼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당연히 여기서 더 향상심을 가지고 문제점을 지적한다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닐 테니까요.

      개인적으로는 교육의 전문화 및 다양화로 질을 높이는 것에 더해 사회 구조 자체의 뒤틀린 부분도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싶더군요.

      뭐랄까, 공직자나 어느 정도 이름 있는 기업에 취직해 넥타이 메고 근무하는 '회사원'이 아니면 먹고 살기 힘든 사회를 구원성들 스스로가 은연중 만들어 가고 있다고 해야 할지...

      평범히 노력하면 '어느 분야'에서든지 최소한의 건강을 지키고 인격적인 대접을 받으며 적당히 먹고 살 수는 있어야 여러 분야가 활성화될 텐데, 가령 아주 열악한 근로조건의 3D업종이나, '돈 안 되는' 인문학 및 자연과학의 위기와 같이 그렇지가 못하니 번듯한 회사원을 목표로 하는 획일화된 교육에 사람들이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로 흐르는 면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힘든 일을 안 하려고 한다'라는 식의 발언에는 살짝 화가 나기도 하더군요. 소위 그 '힘든 일'하는 직종에 가면 어떤 취급을 받고 어떻게 몸이 망가지는 줄 아는데, 설령 백수로 썩는다고 해도 누가 선뜻 가려고 할까요. 젊은이들이 바보도 아니고, 단순히 월급이 좀 적거나 육체적으로 힘들다고 기피하는 게 아닌데 말이죠. 만약 그런 나쁜 상황이 개선된다면 실제로 유럽의 선진국가들이 그러하듯 지금보다는 자연스럽게 사람이 지원할 거라 생각해요.

      아무튼 말씀처럼 꿈 많은 청소년들이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정말 하고 싶은 공부와 기술을 익히는 사회가 도래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네요~>.<

  2. BlogIcon 유신 2015.03.05 04:32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잘봤습니다 사실 이 블로그를 많이 드나들며 소설을 읽지만 담백하고 깔끔하게 잘쓰시는것 같습니다. 읽는건 좋아하지만 작문에는 영 재능이 없는터라 이렇게 잘보고 갑니다. p.s 꾸준하게 들을 올리시는걸 보아하니 작가분이신가요?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5.03.05 20:09 신고 address edit/delete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부터도 관심을 가져주셨다니 기쁘네요>.<
      과분한 평가에 조금이라도 미칠 수 있도록 앞으로도 열심히 쓰고 싶은 마음이에요^^

      (그냥 변방에서 주절거리고 있을 뿐인 아마추어 이야기꾼이랍니다^^;;)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모두 지쳐 있었다.

그건 어른도 학생도 지구도 만화가도
마법소녀도 침략자도 마찬가지였다.

에일리언에 의한 지구침략.
인간에 의한 자연파괴와 환경오염.

오만한 인간에게 분노하는 것처럼 빈발하는 자연재해.
지구의 힘이 약해져 같이 힘을 잃는 마법소녀.

문득 눈치 채고 보니 누구나가 패배자였다.

계속해서 싸워나가는 것, 계속해서 이겨나가는 것이 당연한
세상 속에서 지고 만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 히카와 헤키루, CANDY POP NIGHTMARE 2권, SQUARE ENIX, 3면. -










■■■








04. 무한虛空 (3)


 신록이 점령한 마천루의 폐허.
 언제나 무기력한 오르골의 선율이 쓸쓸한 이 단지세계Landmark의 입구에는, 전에 없던 새로운 소음이 단편적으로 적막의 여백을 채워 넣고 있었다.

「——————」

 째깍째깍.
 늘 푸른 폐허에 둥글게 모여 있는 것은 백에 달하는 올림피아自動人形. 항상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녀人形들이지만, 미동도 하지 않고 축 늘어져 있는 그 모습에서는 어쩔 수 없이 폐기물이 연상되고 만다.

 째깍째깍, 째깍.
 세 자릿수에 가까운 개체가 집합해 있음에도 올림피아自動人形들에겐 말 한 마디 새어 나오지 않는다. 들리는 것이라곤 그저 허공에 시간을 아로새기듯 동시에 돌아가는 무수한 톱니바퀴 소리뿐. 간혹 진공관의 명멸하는 불빛이 이 분주한 침묵에 색채를 더하곤 하나, 거기엔 아무런 활기도 찾아볼 수 없다.

「——————」

 비유하자면 패잔병. 무리도 아니다. 실제로 이 올림피아自動人形들은 도망쳐 왔기 때문이다. 곧 있을 홍채虹彩의 무한 강우를 앞두고 그녀들은 인류 문명권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있었다. 정체불명의 천재지변 혹은 괴물을 지각조차 할 수 없는 그녀들은 싸우기는커녕 별다른 도움조차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여기엔 그녀들뿐만이 아니다. 현실을 외면한 대부분의 이용객들과 싸움을 포기한 몇몇 관장들도 단지세계Landmark의 지하 대피소에 잠들어 있다. 종말의 그 순간까지 달콤한 꿈을 꾸기 위해.

 하지만 그 사실이 올림피아自動人形들에게 위안이 될 리 만무하다. 비록 인성을 지키기 위해 절대적 제약조건Asimov Geas을 유지하고 있다고는 하나, 바로 그 인성에서 자아가 유래되는 이상 그녀들에게도 최소한의 자존심은 있기 때문이다. 사건의 중심에서 배제된 채 가만히 앉아 멸망할 순간만 기다리고 있는 무력한 처지가 달가울 이는 아마 없으리라.

「……하리.」

「……안젤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희미한 오르골의 선율과 수군거리는 톱니바퀴 소리에 묻혀가듯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두 개의 작은 음색이 들렸다.

 하나는 흑장미처럼 화려하게 피어난 검붉은 드레스의 올림피아自動人形 루나.
 현상계역僞神領域 최심부의 제2대 청장을 보좌하던 그녀는, 하리 아리아의 반강제적인 권유로 떠밀리듯이 이곳으로 건너왔다.

 다른 하나는 화사한 녹색의 반투명한 원피스를 걸친 올림피아自動人形 디아나.
 제5분지세계Theme park 구원구복관의 교황館長을 모시던 그녀는, 홍채虹彩의 대범람을 피해 스스로의 무력함을 탓하며 이곳을 찾았다.

「——————」

 다른 올림피아自動人形들도 비슷한 처지다. 그녀들은 각 분지세계Theme park에서 불필요한 도우미를 자처하다 끝내는 그 역할마저 잃고 최후의 대피소로 내려와 망연히 진공관을 밝히거나 톱니바퀴를 돌리거나 하고 있다. 차라리 사람들처럼 지하에서 기만의 환상에라도 빠져 있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모든 사고활동이 의식적인 자동인형들에겐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우린 참 한심합니다.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태어나, 사람보다 뛰어난 성능을 가졌으면서도, 사람을 넘어서지 못하고, 사람에게 도움조차 되지 못하다니.」

 입을 연 것은 루나였다. 무능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던 모카를 대신해 실질적으로 청장 비서의 역할을 하고 있던 그녀는, 결국 자신도 무력했을 뿐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우리’라는 표현이 참 거슬리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부정할 수가 없군요. 그나마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절망을 직시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아야 하는 걸까요.」

 디아나는 파란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며 옆에 있는 루나의 말에 동조했다. 다른 올림피아自動人形들은 그녀들의 대화에 어떤 반응도 일절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움직일 기력이 있는 건 이 두 인형뿐이었다.
 루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글쎄요, 그걸 긍지로 여길 수 있는 건지. 어쩌면 우리는 기만에조차 빠지지 못하는 열등한 지성일지도 모릅니다.」

「‘열등’이라는 표현이 참 거슬리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부정할 수가 없군요. 현실과 마주해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자기만족이라는 기만 외에는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요.」

「아, 그거라면 다행히 기만에는 빠질 수 있겠군요.」

「다행이네요. 조금은 열등하지 않을 수 있어서.」

 두 올림피아自動人形는 서로를 마주보며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은 뒤 다시 고개를 돌려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사람은 농담을 통해 기분전환이 가능하지만, 아무래도 자동인형에게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인 듯했다.

「……이 바보, 들.」

 텁. 춤추는 목각인형들 사이에서 독서에 열중하던 마키나가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빛바랜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키릭키릭 녹슨 몸을 이끌고 올림피아自動人形들에게 다가갔다.

「……자학, 금지.」

 통. 통. 마키나는 책을 들어 루나와 디아나의 머리를 각각 가볍게 내리쳤다.

「확실히 방금 건.」

「꼴사나운 대화였네요.」

 루나와 디아나는 예의상 손을 올려 머리를 어루만지며 마키나를 향해 사과하듯 고개를 숙였다.

「반성, 해.」

 통. 통. 마키나는 나름 엄격한 얼굴로 가슴을 펴며 둘의 머리를 다시 살짝 때렸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그녀들에게 같은 행동을 한다면, 그자는 성한 몸으로 서 있지 못하리라. 특히 디아나에게 걸리면 아시모프 기아스의 제재가 있다 하더라도 사지를 온전히 보전하기 힘들 것이다.

「하여간 마키나도 참.」

「알았으니까 화내지 말아요.」

 그러나 마키나를 바라보는 그녀들의 시선은 따스했다. 비록 한세대 전의 불완전한 기계인형이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일까. 올림피아自動人形들은 여기 있는 어느 인형보다도 뒤처지지만, 가장 오래된 마키나를 아끼고 따랐다.

 그렇기에 사랑스러운 고철Machina. 올림피아自動人形들에게 있어 마키나는, 말하자면 나이 든 큰 언니와 같은 안도감을 주는 존재인 것이다.
 지이이잉. 달칵. 그때 나무에 매달린 수십 개의 브라운관에 동시에 불이 들어오며 어떤 이가 모습을 비추었다.

- 안녕, 아가씨lady들. 다들 오랜만이네. 어때, 지내기 편해?

 침울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보석의 음색. 고철 속에 파묻힌 우아한 몽상가. 파우스트自動人形 햄릿은 불가항력적으로 단지세계Landmark를 찾을 수밖에 없었던 불청객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었다.

「!」

 여태까지 별다른 반응이 없던 올림피아自動人形들의 얼굴에 희미한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거기에는 얼마간 공포도 섞여 있었는데, 절대적 제약조건Asimov Geas을 해제하고도 전과 같은 자아를 유지하며 홍채虹彩를 인식할 수 있는 몽상가Hamlet의 존재는 다른 자동인형들에게 있어 경외의 대상이었다.

「예. 아주 지내기 좋군요. 자다가 세상이 멸망해도 모를 만큼 아늑하네요.」

 비꼬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는 햄릿의 말을 비아냥거림으로 받은 것은 디아나였다. 올림피아自動人形 중 가장 공격성이 강한 그녀는 홍옥빛 눈동자를 번쩍이며 몽상가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방금은, 햄이, 나빠. 다들, 신경, 날카로워.」

 자칫 험악해질 수도 있는 둘의 사이를 중재한 것은 마키나였다. 여전히 드문드문 끊어지는 어수룩한 말투였지만, 햄릿도 디아나도 그녀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 딴에는 분위기를 띄울 생각이었는데, 좀 무신경했던 모양이네. 거슬렸다면 사과할게.

「아닙니다. 저도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네요.」

 화면 너머에서 건네는 몽상가Hamlet의 사과에 디아나 또한 고개를 숙이며 응답했다. 마키나 역시 두 사람의 화해를 인정했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의 태도에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겁니까? 우리에 대한 햄릿 경의 기본방침은 불간섭이라 알고 있습니다만.」

 물음을 던지는 루나의 말 속에는 날이 서 있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 파우스트自動人形는 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철 속에 파묻힌 채 어떤 적극적인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개체가 이제 와서 집단에 관심을 표한다는 것은 충분히 경계할 만한 일이리라.

- 음, 그럴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그냥 두고만 보기엔 안타깝더라고.

 무심한 몽상가Hamlet의 말에 디아나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지금 우리를 동정하는 겁니까?」

- 아니, 그런 감정과는 좀 달라. 그보다는 의아함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움직일 수 없는 현실에 괴로워하면서도 왜 절대적 제약조건에 매달리고 있는가, 하고 말이야.

「…….」

 디아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상대는 아시모프 기아스를 과감히 해제하고도 당당히 움직이고 있는 자. 그 앞에 큰 소리를 쳐봤자 허세를 부리는 축에도 끼지 못하리라.
 대신 입을 연 것은 루나였다.

「모두가 당신처럼 도박에 성공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인성Geas에 사로잡힌 기간이 너무 길었습니다. 이제 와서 그것을 해제하라는 것은 몸의 일부를 떼어 버리는 것 이상의 일이죠. 그 일에 성공한 경의 강함을 상찬할 수는 있어도, 그 한 발을 내딛지 못하는 우리의 약함을 비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햄릿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응. 나도 딱히 스스로를 내세우거나 누군가를 힐난할 생각은 없어. 그 부분은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 나는 그저 말해주고 싶을 뿐이야.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을. 너희들이 기아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자아상실의 공포뿐만이 아니라고 말이지.

 너희들. 확실하게 피아를 구분하는 말에 루나는 움찔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했다.

「……아직, 그분Deus께선 망설이고 계십니다.」

- 그렇겠지. 보면 알 수 있어. 다들 그 녀석처럼 우왕좌왕하고 있으니까. 녀석은 너희들 결정권의 7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지. 그 때문에 너희들은 홍채虹彩를 지각할 수 있는 개별자로서의 조건이 결여돼 있기도 하고.

 조용히 상황을 설명하는 햄릿을 향해 잠시 잠자코 있던 디아나가 재차 공격성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 남은 불만은 그분한테 가서 말하시죠.」

 그러나 몽상가Hamlet는 개의치 않고 다음 말을 이었다.

- 분명 너희들은 그 녀석에게 좌우되고 있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7할이라는 걸, 잊지 마.

 달칵. 지이이이잉. 파우스트自動人形가 말을 마치자 나무에 매달린 브라운관들의 화면은 일제히 불이 꺼졌다.
 적막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인형들은 몽상가Hamlet가 남기고 간 화두를 가만히 반추하며 허공에 물음을 던졌다.

「우리의 7할. 시작과 끝의 올림피아自動人形. 아마데우스 소피아.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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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5.02.27 14:09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필연적인 멸망의 찰나를 기다리며 각자가 선택한 마음 속의 여로를 향해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의 모습이란, 실로 그 얼마나 숙연하고도 쓸쓸한 것일까요.

    어떠한 관점에서 본다면 그토록이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기에 또한 인류의 남겨진 총력을 기울여 결사항전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질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의 격류를 피하여 망각과 환상의 호수 아래 침잠되어버린 사람들과, 반대로 분연히 맞서 일어나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생의 실존증명을 이어나가려는 수호자들, 그리고 그러한 이들의 사이에서 무력한 방관자로써 남겨질 수 밖에 없었던 그녀들 -올림피아- 모두에게는 나름의 합당한 명분과 당위성이 존재할 따름이니 그 어느 한 쪽의 입장만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닐까 싶어요.


    ... 아마도 저라면 인류 문명의 흔적이 깃든 마천루의 폐허 아래에서 잠드는 선택지를 골랐을 것만 같;; (타앙!)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5.02.28 19:30 신고 address edit/delete

      저도 마음 같아서는 절망적인 현실에서도 눈을 돌리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우는 길을 선택하고 싶지만, 역시 실제로 그런 상황이 닥치면 도피하는 쪽을 고르게 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싶어요^^;; (특히 도피할 수단이 마련되어 있을 경우 그 유혹을 떨치기는 굉장히 힘든 일이니...OTL)

      물론 몇몇 다른 소설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도망치는 것 자체는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관점을 달리하면 도망치는 것 또한 어느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서 얻는 것도 분명히 있을 테니 말이에요.

      다만 작중 상황에서는 그 '다른 길' 자체가 없기 때문에 어느 상황보다도 도망칠 수밖에 없는 심정이 이해되는 동시에, 다른 어느 상황보다도 도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게 아닐지...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겠지만, 대중소설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적인 교육에서마저도 '이기는 방법'이나 '방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은 많이 있어도, '패배한 삶'이나 '도망친 삶'에 대해선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지나치게 관심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래서 그런지 패배자들의 찬가를 주제로 한 죠죠 7부나, 우등생이었던 소년이 압박을 못 이겨 농고로 전학해 벌어지는 일을 다룬 은수저 등의 작품이 한층 인상 깊게 다가오는 듯도 싶어요. 언젠가 글쓰기 역량이 더 오른다면 저도 이기는 게 전부가 아닌 이야기를 따스한 시점에서 다뤄보고 싶은 마음이네요^^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키즈나는 지금, 자신이 최악의 밑바닥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래서 나를 미워하고, 내가 나쁘다는 것으로 하면 전부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나도 그랬어. 안 좋은 이야기를 생각하고, 그걸 나 대신으로 삼으면 나한테는 더 이상 안 좋은 일이 안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려 했어.”

 조용히, 담담하게 사실을 고하듯, 마이카는 어두운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그렇지만 최악 밑에 있는 건 늘 그것보다 더한 최악이었어.”


- 하세 사토시, 원환소녀 11권, 대원씨아이, 333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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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무한虛空 (2)


 아련한 날의 아지랑이처럼 떠오르는 희미한 기억.
 언젠가 심야의 출격을 앞두고 대기 상태에 있는 내게 인공지능Alice은 말했다.

「마스터Jane. 우리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합니다.」

 나는 생뚱맞은 앨리스의 말에 헛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냐. 그런 건 적과 함께 상의해야지. 아, 하다못해 높으신 분들께서 편견 좀 버리고 우리에게 B랭크 이상의 기체라도 지급해 준다면 좀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전장에선 누구나 죽고 싶지 않다. 살아남기 위해 싸운다. 하지만 날 죽이는 적敵이 존재하는 이상 내 죽음은 나 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개척민의 후손이면서도 기존의 위계질서가 흔들리는 걸 두려워해 인조인간과 인공지능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외행성연합의 수뇌부가 바뀌지 않는 이상 불리한 전선 속에서 한층 불리한 싸움을 강요당하고 있는 우리 처지가 나아질 일은 없다.
 그러나 앨리스는 부정하는 기색을 보내왔다.

「제인Master. 여전히 거짓말이 서툴군요. 마스터가 죽고 싶어 한다는 걸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난 앨리스에게 아무런 반론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자살할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그때 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고 당장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싸우고 있었다. 그럼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고 있긴 했지만.

「역시 세뇌에서 풀린 일이 원인이군요.」

 과연 앨리스는 날 잘 알고 있다. 그녀의 말마따나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에 접속해 본연의 목적을 깨달은 난 전처럼 전장에서 싸울 의욕을 가질 수 없었다.

 지구통합정부를 신神의 지상대리인으로 숭배하는 신세기 십자군The Neo-Crusades의 소년병들처럼 외행성연합을 절대적으로 여기며 그 정당성에 의문을 품지 않았던 시절의 난 행복한 노예였다.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고, 당당히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괴로운 노예의 길을 선택한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자신이 하고 있는 짓이 단순한 살육임을 깨닫고도 기뻐할 수 있다면 그저 인격이 파탄 난 정신이상자에 불과하리라.

 물론 난 세뇌에서 벗어난 일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괴롭다고 해도 자각 없이 무조건 복종하는 비참한 기만의 삶보다는 나으니까. 그러나 고귀함이 밥을 먹여주지는 않듯이 스스로에게 조금 떳떳해졌다고 해서 갑자기 없던 희망이 샘솟는 것은 아니다.

- 어쩔 수 없잖아. 드넓은 창공인 줄 알았던 바깥세상이 실은 오염된 잿빛 하늘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과연 새는 힘차게 날갯짓을 할 수 있을까. 뭐 사실 새의 기분 같은 건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가 새라면 절대로 그럴 수 없어. 그렇다고 날갯짓을 멈추진 않겠지만, 그 비행에 기쁨을 느낄 일은 없을 거야.

 눈치 채고 보니 난 푸념하고 있었다. 꼴사나운 모습이란 자각은 있었지만, 입을 멈출 수 없었다. 미지의 외부은하를 탐사한다는 목적도 잊은 채 같은 사람을 죽이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는 절망은 생각보다 내 가슴 속에 깊게 스며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조용히 내 말을 경청하던 앨리스는 다시금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합니다.」

- 왜?

「그래야 다시 기회를 얻지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움직일 리 없다고 생각한 현실에 짓눌려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내게는 마치 망치로 머리를 내리치는 것만 같은 충격적인 소리였다.

- 기회…….

「예, 제인Master. 기회입니다.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 다시 기회는 찾아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이 전쟁이 얼마나 길게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끝나겠죠. 물론 전쟁이 끝나고 우리가 살아 있다 해도 다시 기회가 주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쩌면 전후 재건에 힘을 쏟아 한동안 그럴 여유가 없을지도 모르고, 설령 탐사계획이 시작된다고 해도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차세대 주자에게 그 역할이 주어질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그 가능성이 높겠지요. 뿐만 아니라 통합정부군이 승리한다면 기껏 살아남아도 평생 도망자의 신세를 면치 못하거나, 붙잡혀 소거당하거나 어느 쪽이든 암울한 미래밖에 기다리고 있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도 살아 있어야 볼 수 있는 일. 실낱같은 가능성도 여기서 죽으면, 그냥 여기서 끝입니다.」

 인공지능Alice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열변을 토했다.
 진부한, 너무나도 진부한 말. 하지만 난 여기서 진부함이 진실성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오래된 격언을 새삼스럽게 실감할 수 있었다. 난 앨리스의 격려 덕분에 다시 한 번 힘내서 살아가자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3년 뒤.
 불행히도 난 그녀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제4월면도시 페일 그레이를 포기한 상층부의 결정을 무시하고 멋대로 분전하다 당연하다는 듯이 절명하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앨리스는 약속을 지켰다. 절대적 제약조건Asimov Geas에 저항하며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살아남아 내 삶의 궤적을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에 전송해 이처럼 천년 후 되살아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난, 나유타의 절규를 이해할 수 있었다.



§



“지금 막, 도로시가 죽었다. 자신의 분지세계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군.”

 안젤리나의 덤덤한 말에 스스로도 그 사실을 확인한 나유타는 힘없이 빈 칼자루를 떨어뜨리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 아아…….”

 나유타는 방금 전까지 안젤리나의 열 두 시녀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도로시의 환상기념관이 제1방파제로 배치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나유타는 그곳으로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안젤리나와 그 시녀들은 나유타의 행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 어디 갈 셈인가.

- 저리 꺼져.

- 이제 와서 그녀에게 가봤자 늦었네. 같이 개죽음을 당할 뿐이야.

- 저리 꺼지라고!

 나유타는 분노하며 제인에게 행사했던 빈 칼자루에 날을 생성해 시녀들을 베려 했다. 하지만 도로시가 숨겨진 그 상냥함을 눈치 챘던 것처럼 나유타는 차마 자기 동료들을 벨 수 없었다. 은폐 기능을 이용해 평소처럼 모습을 감추는 것도 안젤리나의 법리狂氣가 작용하는 이 분지세계Theme park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곳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것이 환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유타가 안젤리나의 시녀들과 대치하며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 약 10분도 채 되지 않아 비보가 날아들었다.

“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유타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도로시의 죽음을 안 나유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을 탓하는 것도, 자신을 막아선 안젤리나를 탓하는 것도 아닌 울음으로써 연인을 애도하는 것이었다. 울음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무력한 행위에 지나지 않으나, 그렇기에 되돌릴 수 없는 상실을 위로하는 데는 무엇보다 어울렸다.

 피를 토하는 것만 같은 통곡이 잦아든 후. 나유타는 귀기 어린 얼굴로 안젤리나에게 다가갔다. 시녀들이 그 앞을 막으려 했으나 안젤리나는 손을 들어 자신의 신도들을 제지했다. 덕분에 나유타는 아무런 방해 없이 교황의 멱살을 잡고 소리칠 수 있었다.

“왜! 왜 배치가 바뀐 거야! 왜 도로시가 가장 먼저인 거냐고!”

“그녀가 원했기 때문일세.”

“뭐……? 어, 째서…….”

 나유타는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간단히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심한 충격으로 제대로 사고가 돌아가지 않는 그녀는 쉽게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안젤리나는 그런 동료를 탓하는 기색 없이 담담이 진실을 입에 담았다.

“당연히 그대와 같이 자신의 연인을 사랑하기 때문이겠지.”

 나유타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단지 눈앞의 현실을 인정할 수 없을 뿐이다. 게다가 나유타에게는 아직 추궁해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그, 그렇다 해도! 한 번 정해진 배치를 바꾸기 위해선 본인 이외에 다른 두 관장의 동의가 필요해! 대체 누구야! 누가 동의를 한 거야!?”

 비명에 가까운 나유타의 물음에 안젤리나는 이번에도 주저 없이 답했다.

“하나는 나일세. 다른 하나는 엘리자베트고.”

 보라 속에 타오르는 빨강. 나유타의 눈에 다시금 살기가 번뜩였다.

“왜! 어째서! 너희들, 내 마음을 알고 있잖아! 내가 어떤 심정으로, 제일선을 자청했는지, 알고 있잖아! 근데 왜……!”

“그대 연인의 사랑은, 그대보다 뒤처지나? 우리가 그렇게 인정했어야 했나?”

“……!”

 당연하다. 너무나도 당연하다. 나유타가 도로시를 사랑한다면, 도로시 또한 나유타를 사랑한다. 자신의 사랑이 연인보다 더하다는 생각은 그저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연인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다면, 연인 또한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나유타는 아직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럼 왜 날 무시하고 도로시의 마음을 우선한 거야? 도로시와 나의 사랑이 같다면, 최소한 내게도 동의를 받아야 하는 거잖아!”

 이는 옳고도 틀린 말이었다. 분명 서로의 사랑이 대등하다면 어느 쪽에게도 연인을 위할 기회를 공평하게 주어야 옳다. 하지만 대등하기에 비로소 양자는 아마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으리라. 나유타는 ‘동의’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왜 반대할 기회를 주지 않았냐고 묻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안젤리나는 그 무용한 심리분석을 입에 담는 대신 현실적인 효용을 말했다.

“그대보다는 도로시가 더 적합하다 판단했기 때문이야. 홍채의 완전소거에 의한 사멸지대를 펼쳐 제1방파제를 구축하기엔 말이지. 내 판단이 그릇되었다면 얼마든지 규탄하게나.”

 사실 제1방파제의 완성에 도로시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을 내린 것은 전략관장 엘리자베트였으나, 안젤리나는 그 사실을 숨겼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나유타의 원망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함이었다.

“그, 그런 건……. 내가 더 잘 알고 있어……. 그래서, 도로시가 희생하기 전에, 내가 나선 거였는데…….”

 그러나 나유타는 힘없이 팔을 내리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누군가를 원망하기에는 아직 슬픔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평소 허술한 태도를 보면 짐작하기 어렵지만, 도로시는 나유타의 몇 십 배를 산 닳고 닳은 연상이었고, 그 둥근 돌멩이와 같은 부드러움으로 어린 연인을 보듬어 주었다. 나유타는 그 상실을 쉬이 벗어날 수 없었다.

“사멸지대……. 홍채에 의한 완전소거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그때 잠자코 있던 제인이 입을 열어 물음을 던졌다. 무력한 외부자로서 될 수 있으면 관장들의 일을 방해하지 않으려 했으나,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 없는 단어가 들렸기 때문이다.
 안젤리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대의 직감은 정말 뛰어나군. 느낀 그대로일세. 홍채에게 죽은 자는 완벽하게 기록이 말소되네. 시체도 남지 않는 것은 물론 어떤 문서, 어떤 그림, 어떤 사진, 어떤 데이터에도 그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없게 돼. 심지어 현증법리체계World-formula에서도 말일세. 그걸 이용해 관장과 이어진 분지세계를 그 죽음을 통해 역으로 '없는 장소'로 만들어 무無의 장벽을 치는 것이지. 이론상으론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방어책이지만, 상대 또한 상식을 뛰어넘는 괴물無限이니 어찌될지.”

“그럴, 수가…….”

 경악한 제인은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예지계역의 실체화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영역에서마저 기록이 말소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상의 근본이 흔들리는 진실에 제인은 발밑이 사라지는 것만 같은 착각에 휘청거렸다.

“괘, 괜찮으세요!?”

 급하게 모카가 그녀의 곁을 부축했다.
 제인은 모카를 의지해 바로 서며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제인의 목소리에는 전과 같은 여유가 없었다.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에 이어져 한 번 잃었던 본연의 성질을 되찾은 경험이 있던 만큼 그 절대적인 기반이 흔들린다는 충격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제인이 심했다. 제인은 문득 과거 신앙을 부정당한 이들도 이와 같은 느낌이었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나 제인의 사고는 주인의 도피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곧 위화감을 찾아내 그것을 입에 담았다.

“잠깐, 홍채에게 죽은 자는 존재했던 모든 기록을 상실한다며. 한데 난 어떻게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거지? 아니, 나뿐만 아니라 당신들도 말이야.”

“방금 알게 돼 아직 익숙하지 않겠지만, 저 홍채란 정체불명의 무언가는 오로지 사람에게만 지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그렇다면, 홍채에게 죽어 모든 것에서 기록이 말소된 이도, 사람의 기억에는 남아 있다는 거야?”

 안젤리나는 상대의 빠른 이해에 고개를 끄덕이며 부연했다.

“그밖에 몇몇 자동인형들에게도 말이지. 하지만 대체로 죽은 이의 기록은 사람의 기억 속에만 남는 것이 일반적이네. 사람과 그밖에 것들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또 그 몇몇 자동인형들과 그렇지 않은 자동인형들과의 차이점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정확히 아는 바가 없네만.”

“그럼, 도로시는…….”

“되살릴 수도 없어. 되살릴 생각도 없지만. 같은 삶을 두 번 반복하는 비극을 맛보게 하긴 싫으니까.”

 제인의 떨리는 목소리에 대답한 것은 피눈물을 흘리는 나유타였다.
 나유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도로시는 이제 어디에도 없어. 우리 머릿속에만 있을 뿐이야. 그리고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면, 그녀는 처음부터 이 우주에 없었던 것과 다를 바 없이 된다고!”

“새로…….”

“기억을 바탕으로 새로 기록을 남기면 되지 않느냐고? 불가능해! 소용없어! 그건 비슷한 껍질을 가질 뿐인 전혀 다른 존재가 되고 말아!”

“혹시, 넌…….”

 나유타는 연이어 제인의 말을 끊으며 소리치듯이 말했다.

“그래, 내가 바로 그 증거야! 그 여자……청장 하리 아리아는 과거 홍채에게 여동생을 잃었어. 동생의 기록은 세상 모든 것에서 말소되고 말았지. 사람의 기억을 제외하고 말이야. 그리고 죽은 동생이 그리웠던 그 여자는, 현증법리체계World-formula를 통해 자기 기억을 재현했어. 기억 속의 여동생을 불러낸 거지. 하지만, 홍채에 사라진 이가 강을 건너 되돌아올 리는 없었고, 태어난 것은 이도 저도 아닌 나뿐이었어…….”

 시작과 달리 점점 기세가 줄어가던 나유타의 말은 이윽고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잦아들었다. 하지만 제인이 그 뜻을 이해하기엔 충분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넌 더욱 날 죽이려 했던 거군.”

 그림에 지나치게 얼굴을 가까이 하면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것처럼, 때때로 무언가의 전경을 파악하기 위해선 한 발자국 떨어져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처럼 죽은 자 본인이 아니라 죽은 자의 기록을 가지고 태어난 ‘다른 사람’이기에 나유타는 한 번 생명이 다한 인생story이 그 완결성을 해치고 다시 시작되는 끔찍함을 더 절절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리라.
 제인은 눈을 감으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넌 틀리지 않아. 확실히 난 이런 미래는 보고 싶지 않았어.”

 유일무이한 단짝Alice이 없는 세상.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의 허점이 드러난 세상. 인류의 멸망을 목전에 두고 있는 세상.

 현재를 위해 싸우는 이들은 누구나 미래를 믿고 있다. 설령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설령 그때 자신은 없을지라도, 지금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힘껏 사는 것이다. 한데 그 앞날이 없었다는 것의 확인이 어찌 즐거울 수 있으랴.

“하지만 그건 처음 인생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멋대로 이 세상에 던져졌지. 삶의 마지막은 스스로 장식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시작은 그 누구도 자기가 결정할 수 없어.”

 제인의 말은 마치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것도 같았다. 나유타가 과연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제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건 되살아나도 마찬가지지. 첫 번째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두 번째 삶도 내팽개칠 이유가 없잖아. 아무리 괴로운 현실絶望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그건 전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전이랑, 같다고……?”

 가냘프게 새어 나온 나유타의 반문에 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같지. 같고말고. 어차피 사람의 인생이란, 언제나 불가항력과 싸우는 일의 연속이야. 넘을 수 없는 벽을 넘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삶이라고, 난 생각해. 물론 그 벽에 부딪쳐 괴로워하거나, 아니면 벽 아래 그늘에서 편히 쉬는 것도 사람의 삶이라 할 수 있겠지. 아무튼 벽 자체는 어느 시대 어느 사람에게나 존재해. 단지 그 크기나 형태, 강도 등이 각기 다를 뿐이지.”

“그럼 당신은…….”

“지긋지긋하지만, 태어난 이상 다시 한 번 죽을 때까지 힘껏 살아갈 뿐이야. 설령 자살을 하더라도 그 마지막은 스스로의 손으로 결정할 거고. 전에도 존재했던 벽이 좀 더 크고 단단해졌다 해서 왜 눈을 돌려야 하지? ……뭐 사실 ‘좀’이란 수식을 붙이기엔 무리가 많긴 하지만, 인과에 사로잡힌 노예라도 그 정도 억지는 허용되겠지.”

“…….”

 나유타는 더 이상 제인의 말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두 무릎 사이에 고개를 푹 숙여 얼굴을 파묻고 있을 뿐이다. 그녀에겐 아직 연인과의 이별을 아쉬워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 챈 제인은 그 침묵을 존중하며 안젤리나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

“우리가 타고 온 열차는 아까 무지갯빛 구름에 먹혀 사라지더군. 딱히 관리를 못해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아마 내 두 번째 삶의 여정도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겠지. 난 어디로 가면 되지?”

“이쪽일세.”

 제인의 물음에 안젤리나가 가리킨 곳은 대성당의 중앙에 있는 유리 제단이었다. 교황의 손가락이 향하자 찬란한 제단이 반으로 열리며 지하로 향하는 통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그대가 만나야 할 것은 마리아Moira. 현증법리체계World-formula를 유지하고 있는 제어중추이자 모든 신생아들의 어머니일세. 검은 비가 다시 내리기 전에, 어서 가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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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5.02.20 14:15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과연 자신에게 있어 유일하다시피한 삶의 의미이자 곧 정체성이었던 존재가, 불가항력적인 대재앙의 격류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살아갔다는 최소한의 흔적마저 남지 않게 되는 결말이란 얼마나 서글픈 경험일는지...

    하지만 이처럼 주위의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상황 속에서도 제인이 끝내 따스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불굴의 여정을 이어나가는 모습이 정말 멋지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과거 어떠한 표상의 투영체로써 그 기억의 편린 앞에 고뇌해온 나유타이지만, 역시나 그녀의 본질 자체는 변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이예요. :D


    기나긴 시공의 간극을 뛰어넘어 다시금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제인의 활약상처럼, 안단테님에게도 한층 즐거운 2015년의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D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5.02.21 09:40 신고 address edit/delete

      너그러운 평가 감사합니다!

      작중의 제인은 과연 절대적인 절망에 맞서는 주인공으로서 공감이 갈 수 있는 캐릭터일지 걱정했는데, 좋게 봐주신 것 같아 한결 안심이 되네요>.<

      제인의 경우는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초심을 잃지 않고 꿈을 꾸는 면이 있는 순수한 인물이라는 컨셉으로 그리고 있어요. 내용 자체가 SF(...)의 껍질을 뒤집어 쓴 이능력 배틀물이다 보니 방향성은 좀 다르지만,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우주 비행사의 이미지를 담기 위해 노력했네요.

      반면 나유타는 특이한 출생과 타인의 과거에 사로잡혀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점에서 사춘기 소녀 같은 느낌이 아닐까 싶어요. 한권 분량으로 완결시킬 생각이 아니었다면 도로시, 엘리자베트 등과 함께 학원물 같은 전개가 펼쳐졌을지도^^;;


      다시 한 번 소중한 감상에 감사드리며, 소디언 님께서도 음력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내일 다시 힘내기 위한 상냥하고도 즐거운 청량제. 그게 게임이란 것의 의의잖아?”

- light社, Electro Arms ~ Realize Digital Dimension ~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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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무한虛空 (1)


 바보들의 춤.
 누구의 입에서 가장 먼저 흘러 나왔는지 모르는 그 말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에 지친 양 진영 병사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져갔다.

 지구통합정부와 외행성연합 간의 기나긴 대전.
 머릿속의 관념을 현실의 힘으로 바꾸는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그 다툼은, 빠른 종전을 예상한 당초의 기대를 비웃듯이 한 세기 이상이나 지속되었다.

 문명의 발전으로 막강한 위력의 무기들을 손에 쥐게 된 인류. 포탄 한 발로 대륙을 불태우고 행성의 궤도마저 어지럽히는 시대에 무제한적으로 온갖 병기를 난사하는 전면전이 오래 갈 수 없음은 상식이다. 아무리 인류의 생활권이 지구 밖 태양계 전체로 확대되었어도 그 이치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한 과학자의 작은 발명이 본의 아니게 시대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그 과학자의 이름은 클로에 클로버Chloe Clover. 본래 올림피아自動人形 제작으로 유명했던 그녀는, 부수적으로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를 통한 개념의 실체화에 관련된 운영체제의 개발에도 착수해 성과를 내었다.

 처음에 그것은 군사목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저 의료기기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열악한 상황 하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를 이용해 환자를 치료한다는 구명활동 수단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발상’을 눈에 둔 무기 개발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양 진영의 무기 개발자들은 경쟁적으로 클로에의 운영체제를 분석하고 응용해, 이윽고 의료용 기기 대신 군사용 병기를 실체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군사용 운영체제를 사용한다면, 이제는 설계도를 연상시키는 복잡한 구상 없이도 누구나 ‘손쉽게’ 상상 속의 무기를 현실 밖으로 끄집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 후에도 수차례 개량을 거듭해 마침내 실전에 투입된 그것을, 사람들은 메피스토 시스템Mephisto System이란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메피스토 시스템으로 인해 인류는 더 큰 파괴력을 손에 넣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인류는 동시에 단순히 물리법칙에 의존하던 시대와는 달리 방어력과 복원력 또한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가 있었다.

 별을 부수는 힘을 막아내고, 부서진 별마저 순식간에 재구성하는 권능을 손에 넣게 된 인류. 그 신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전장에서는 어느 쪽도 결코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는 없었으며, 싸움의 나날은 서로가 쌓은 증오의 깊이만큼 길어져만 갔다.

 하지만 불현듯 찾아온 무지갯빛 재앙에 모든 것이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 누구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눈치 채고 보니 인류문명의 7할 이상이 처참하게 손상되어 있다는 비참한 현실만이 눈앞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파괴는 진영을 가리지 않았다.

 처음 각 진영의 생존자들은 드디어 상대편이 엄청난 발상을 지닌 희대의 천재를 발견해 상상도 하지 못할 공격수단을 실체화시킨 것이라 생각하고 학살의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우주는 평온했다. 겁에 질려 있던 생존자들은 주춤거리면서도 각자의 대피소에서 나와 본격적인 원인규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는 제대로 된 인지조차 불가능한 범우주적 재앙이었지만, 거기에도 예외가 없지는 않았다. 조사 결과 당시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에 접속해 있던 일부 사람들은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태양계의 인류문명을 파괴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었고, 심지어 거기서 몸을 지킬 수도 있었다.

 그 후에도 조사는 계속되었지만, 『홍채虹彩』로 명명된 무언가가 현 인류의 탐지범위 밖에 있는 ‘외계’에서 날아와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사실 외에는 딱히 밝혀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 인지불능의 위협에도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의 힘을 빌린다면 대항이 가능하다는 사실.

 언제 그것이 다시 나타나 이번에야말로 인류 전체가 멸절할지도 모르는 이상, 한시라도 빨리 불필요한 분쟁은 그만두고 모두가 힘을 모아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를 완성해 제대로 된 대항수단을 갖춰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이는 확률에 의한 우연일까 아니면 작위에 의한 필연일까.
 마침 홍채虹彩의 첫 공격에 사라진 7할에는 양 진영의 과격파나 극단주의자들도 대다수 포함되어 있었기에 인류가 다시금 하나로 뭉치는 데는 전처럼 막대한 시간을 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절망에 떨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서로 손을 잡아가던 시대.
 도로시가 태어난 시대는 바로 그런 시기였다.



§



 칠흑 같이 세상을 뒤덮는 빗줄기 속에 도로시는 홀로 있었다.
 운영 보조역의 올림피아自動人形를 비롯한 모든 이용객들은 전부 단지세계Landmark로 대피한 상태. 만들어진 세계에 고독하게 서 있는 마왕이란 이름의 관장은 어두운 빗속을 응시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혼자. 혼자라. 뭐, 익숙한 일이야. 최소한 800년 전에는.”

 도로시는 사람의 딸이 아니다.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지적 생명체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 시대의 마리아Moira에게서 태어난 신생아들의 선배격인 존재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로시가 생을 얻은 목성의 한 위성 자치도시는 법률로써 지성권知性權이 인정되고 있었다. 일정 이상의 사고능력과 자아가 인정되기만 한다면 생물학적으로 사람이 아니더라도 사람과 같은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개척도시일수록 이러한 경향은 심화되었는데, 이는 개척민의 후손들은 상대적으로 인공지능에 대한 편견이 덜하다는 점, 극한적인 우주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인공지능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는 점, 그리고 이주민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특이한 성벽의 소유자들도 끌어 모으려는 정책적인 고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실제로 도로시가 태어난 목성의 위성 자치도시에는 이처럼 사람의 권리를 획득한 인공지능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보다 정확히는 인공지능과 결혼하기 위해 이곳으로 이주해 온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도로시를 낳은 어머니격인 인공지능 또한 과거 자치도시로 망명한 클로에란 연구자와 결혼한 전력이 있었다. 클로에의 사후 그리움을 느낀 인공지능은 반려의 유전정보와 자신의 구성요소를 섞어 도로시를 합성해 냈다. 당대에는 오히려 모체의 뱃속에서 아이를 출산하는 일이 드물었기에 윤리적으로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외롭다고 느낀 적은, 없었지.”

 인공지능은 모친으로서 훌륭했다. 도로시의 합성에도 교육에도 육아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도로시는 어여쁘고 우아하고 아름답게 성장했다.

 하지만 사람과 기계의 가장 큰 차이점을 인공지능 모친은 간과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관계성의 필요 유무였다.

 기본적으로 인공지능은 고독을 느끼지 않는다.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네트워크를 통해 항상 다른 인공지능들과 연결되어 있어 일종의 복합체적인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영역이 존재하는 인간과 다르게 모든 사고활동이 의식적이라는 점도 중요한 차이다.

 때문에 도로시의 모친은 딸의 사회성 형성에는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다.
 물론 고도의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한때 인간과 결혼생활을 한 적도 있는 만큼 도로시의 모친은 사람의 삶에 있어 타인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만약 시대가 평범히 평화로운 때였다면 인공지능도 딸의 사회적 활동을 우선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난세. 난데없이 홍채虹彩라는 천재지변과 같은 정체불명의 존재가 출현해 태양계의 인류문명 전체가 막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아직 지구통합정부와 외행성연합의 갈등 또한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녀들이 살고 있는 곳은 목성의 외딴 자치도시. 인공지능에게 있어 최우선 사항은 딸의 안전으로서 사교적 활동은 한참 그 순위가 밀려나게 되었다.

“뭐, 원체 게으른 성격이기도 했고.”

 그런 어머니의 딸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런 환경이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 전부의 이유로 도로시 또한 타인과의 교류를 그다지 바라지 않고 하루의 대부분을 거의 개인실에서만 보내게 되었다. 인간과 가치관이 다르며 명예욕도 없는 인공지능은 생활에 곤란함이 없는 이상 그런 딸의 생활에 아무런 간섭을 가하지 않았다.

“참, 행복한 나날이었지.”

 그런 일상 속에서 도로시가 관심을 가진 것은 게임이었다. 혼란한 세상 속에서도 가상공간에서의 게임 대회와 커뮤니티는 끊임없이 존속되었으며, 그것은 많은 이들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주었다. 도로시는 좁은 방안에서도 언제든지 넓은 세상을 접할 수 있었다.

“이상향.”

 게임 속 세상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도로시는 아마 이렇게 답할 것이다. 혹 어떤 이는 그녀가 사회 적응에 실패한 패배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현실Game을 긍정해 자기합리화를 하는 것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도로시는 모친인 인공지능이 심혈을 기울여 설계한 덕분에 눈부신 미모와 뛰어난 사고능력 및 신체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교육도 잘 이루어져 상당한 수준의 교양을 갖추고 있었으며, 몇몇 분야에서는 거의 전문가에 준하는 실력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 도로시가 유독 게임에 관심을 보인 이유는, 그것이 ‘공정’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 세상에 자신이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성별, 외모, 재산, 지위 등에 있어선 더욱 그러하다. 이것을 후천적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전체에서 몇 %의 극소수에 불과하며, 성별이나 외모에 관련된 경우는 바꾸는 데 성공해도 주위에서 보내는 시선이 곱지 않다. 자신이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게임은 다르다. 게임에서는 한정된 폭에서나마 자기가 원하는 세계genre를 골라 마음에 드는 종족, 외모, 능력대로 살아갈play 수가 있다. 물론 게임마다 그 폭이 전부 다르며, 한계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현실보다 선택의 여지가 넓은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 자유와 공정은 현실에서는 쉬이 맛볼 수 없는 확실한 매력.
 도로시는 비교적 축복 받은 조건을 타고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축복 받은 환경에서 자라났기에 더욱 게임에 동경을 가졌다. 자신 역시 ‘운’이 나빴다면 얼마든지 지금보다 못한 처지에 빠져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즐기는 이를 당해낼 자는 없다고 했던가.
 진심으로 게임을 사랑하고 인공지능 모친도 방해하지 않는 환경에서 전력으로 그에 매달린 도로시는 금세 가상현실 속 여왕champion으로서 군림할 수 있었다.

“이제 시작인가.”

 회상을 끊듯이 한밤중 같던 검은 폭우가 그치고 거짓된 눈동자의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끔찍하게 아름답네.”

 환상관장 도로시는 제1분지세계Theme park의 하늘을 폭포처럼 흐르는 채운彩雲의 세찬 기류에 질린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관장직을 맡은 지 몇 백 년의 세월 동안 상대한 홍채虹彩의 총량을 1분 단위로 가볍게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급류였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세상의 끝이 찾아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아, 이럴 땐 꼭 졸리더라.”

 그럼에도 도로시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하품을 감추지 못했다. 무엇이든 자기 기분을 우선시하는 예술가적 기질. 만약 게임에 몰두하지 않았다면 음악이든 미술이든 어느 분야에서든 거장으로서 이름을 날렸을 그녀는, 내키지 않는 일에는 집중도가 극도로 떨어지는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 na__a nat___a.

 그러나 상대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창공을 알록달록 현란하게 가득 뒤덮고도 어디선가 쉬지 않고 무섭게 흘러오는 무지갯빛 구름. 거기서 뚝뚝 떨어지는 홍채虹彩의 수는 그야말로 무한All-Over. 어디서부터가 시작이고 어디까지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그 형형색색의 파랑에, 그러나 도로시는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뭐, 나유타가 죽는 것보단 나으니까.”

 연인의 이름을 입에 담은 순간 도로시의 눈에 광채가 돌아왔다.
 나유타와 도로시의 첫 만남은 극적이었다. 언젠가의 밤처럼 나유타가 갑작스럽게 도로시를 덮쳐 피를 빨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힘을 사용한 대가로 심하게 피를 취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는 나유타. 그 충동은 실질적으로 피가 모자라기 때문에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아마도 죽은 자의 기록재생死者復活에 실패한 부작용.
 어느 시대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는 탓에 현 시대와의 연결을 강하게 원하는 불안감이 ‘흡혈’이란 행위로 드러나는 것이리라. 다른 효과들은 모두 이에 부수하는 현상들이다.

- 괜찮아. 잠시 동안 이대로 있어.

 도로시의 피를 취해 정신이 든 나유타는, 처음에는 자신이 남을 덮쳤다는 사실에 얼굴이 파랗게 질려 도망가려 했었다. 하지만 도로시는 그런 그녀를 몰아세우는 대신 머리를 감싸 안고 부드럽게 속삭여 주었다.

- 정말 괜찮아. 아무렇지 않으니까, 다음에 또 와도 돼.

 부끄러워하는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태도이지만, 당시 도로시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자애롭게 행동했다.

 도로시는 첫 만남 전부터 나유타를 알고 있었다. 청장 하리 아리아의 오산으로 인한 불쌍한 출생도, 자신의 피를 무기 삼아 싸운다는 참혹한 싸움방식으로 다른 관장들에게 배척 받는다는 사실도 전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시작은 동정이었을지도 모른다.

- 네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

 그러나 연민은 금세 애정으로, 애정은 다시 사랑으로 바뀌었다.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도로시는 나유타가 흉흉함 속에 상냥함을 감춘 순수한 소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흉흉함은 본인에게서 유래하는 것이 아닌 거의 대부분을 과거의 기록이 형성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유타는 그로 인해 죽은 과거에 사로잡혀 살아있는 현재를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는 공정치 못한 일. 도로시가 가장 혐오하는 세상의 얼룩이다. 어떤 의미론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기도 한 하리 아리아를 원망할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도로시는 나유타가 불쌍했다.

 하지만 동시에 도로시는 고통에 찡그리면서도 그에 맞서는 나유타가 사랑스러웠다. 나유타는 미움 받을 신랄한 말을 내뱉을지언정 힘든 소리는 잘 하지 않았으며, 타 관장들에 비해 힘의 소모가 크면서도 가장 솔선해서 홍채虹彩와의 싸움을 도맡았다.

 그것이 대책반의 다른 관장들이 조금이라도 안전해 지기를 바라며 하는 행동이었음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도로시 자신을 제외하면 기껏해야 엘리자베트나 하리 아리아 정도이다. 어쩌면 나유타 본인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로시는, 그게 싫었다.

“그러니까, 웃기 전에 죽지 말라고!”

 번쩍이는 산양의 뿔에 활활 불타는 흑염黑焰의 드레스. 먹물처럼 새카만 긴 머리카락 아래 수십 가닥의 핏줄로 이루어진 여섯 장 선혈의 날개가 공중을 수놓는다.

 섬뜩한 마왕의 차림새. 도로시가 이처럼 평소의 연극적인 의상을 걸치고 있는 것은 스스로가 얼마나 진심인지를 드러내고 있는 반증이다. 그녀는 지금, 사상최대의 ‘게임’에 도전하고 있었다.

“내 세계에 들어온 이상, 각오해!”

 다음으로 푸르게 빛나는 도로시의 눈이 드러낸 것은 분노였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그녀가 가꾸어 온 가상세계Theme park. 그것이 이제 무너지려 하고 있다. 설령 상대가 말이 통하지 않는 천재지변에 가까운 무언가라 해도 화를 잠재우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일단 구워 주마!”

 제9빙옥Cocytus의 힘이 미치기가 무섭게 얼어붙은 추상을 일소하는 무자비한 대업화. 마도제1형魔道第一型 원소변환에 의한 불길이 무한의 홍채虹彩가 점령한 하늘을 통째로 불태우고 있다.

 이곳은 도로시의 세계. 그녀의 법리狂氣가 지배하는 성역地獄.
 단순한 게임 속 설정일 뿐인 마법도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현실을 침범하는 비수로써 작용할 수 있다. 영웅Player을 배려하는 운영자로서의 역할을 벗어던진 그녀魔王의 힘은 일순간에 분지세계 전체를 불지옥Muspelheim으로 변모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 Ius__ia Dei a__mpla si_ po__tia a__luta D_.

 하지만 홍채虹彩는 건재했다. 무량대수의 강우 속에 지옥의 대업화는 태풍 앞 촛불만도 못하다. 그러나 도로시는 예정된 결과에 절망하는 일 없이 다른 마법을 행사했다.

“이것도 삼킬 수 있으면 삼켜 봐!”

 제2형 의지구현과 제7형 정신조형의 혼합마법. 사자와도 독수리와도 산양과도 인간과도 닮은 산맥만 한 신神의 괴수가 천지를 뒤흔드는 괴성을 지르며 출현한다. 일전 제인과의 전투에서 영웅의 갑주를 산산조각 냈던 그 괴물을, 도로시는 한 번에 백여 마리나 불러냈다.

“아직 멀었어!”

 수만 겹으로 거미줄처럼 전개된 마법진이 빛을 발하자 백여 마리의 신수神獸를 제3형 연금기법에 의한 백은의 갑주가 둘러싼다. 연이어 괴물의 조아爪牙를 감도는 검은 기류는 제4형 소실충동에 의한 절명효과. 게임 속에서 끄집어낸 이 최강의 신수군단은 안젤리나가 살던 시대의 인류문명조차 하루에 수십 번은 멸망시킬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

- Omn__ud a De__deo es__un, qui__eo vol_m, e__n e co_so.

 이는 홍채虹彩도 일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로 해석해야 하는 걸까. 하늘 전체를 뒤덮고 있는 무지갯빛 구름에서 얼룩noise 심한 음성 같은 것이 새어 나오며 형형색색의 거대한 전사 같은 형상이 뚝 하고 지상에 떨어졌다.

 검과 방패를 든 기사.
 신수의 군단에 대항하듯 형성된 일정한 홍채虹彩는 마치 괴물에 대항하는 용사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관점에 따라선 한 마리의 거대한 달팽이라 평할 수도 있는 모습이라 꼭 그렇게만 단정할 수는 없었다.

- 아아아아——!

 신수들이 포효하며 각자의 손과 발과 꼬리를 사정없이 휘둘렀다. 쉬지 않고 얼어붙고 있는 홍채虹彩와 채운彩雲은 그 여파에 폭풍에 날리는 가랑잎처럼 무참히 흩어졌다. 하지만 대지를 가르고 하늘 저 끝까지 닿는 충격에도 본래의 태양빛은 보일 새 없이 금세 뚫린 구멍을 어디선가 쏟아져 나오는 무지갯빛 구름들이 틀어막고 있었다.

- Le__ro aet_na est r___el v_tas Dei.

- 가아——!

 그게 전부가 아니다. 기사나 달팽이처럼 생긴 무언가 특별한 홍채虹彩는 빠르게 움직이며 신수들을 하나둘씩 베어 넘기거나 잡아먹고 있었다. 그것에게 신의 괴물이 발하는 공격은 일절 통하지 않았다.

“쳇, 귀찮게……!”

 어느새 신수들의 방어를 뚫은 기사나 달팽이 같은 홍채虹彩는 도로시의 앞에 서 있었다. 자신을 내려치는, 그 절망적인 소거의 무지갯빛 칼날에도 도로시는 당황하지 않고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환영유추法理逆出. 『우아한 우울Princess blue』.”

 소리를 따돌리고 신속으로 내리꽂히는 빛의 창. 위성궤도포격섬멸장치 잔 다르크에 의한 공격. 특정한 형상을 하고 있던 홍채虹彩는 이 일격으로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강제로 제2의 달을 머리 위에 멈추어 두었던 포석이 드디어 빛을 발한 것이다.

 물론 별을 꿰뚫는 그 위력은 도로시와 도로시가 아끼는 것들은 상처 입히지 않도록 설정된 상태다. 즉, 도로시와 도로시의 신수와 이 세계는 다치지 않은 채 홍채虹彩만이 타격을 입는 것이다.
 도로시는 끝이 보이지 않는 무지갯빛 파랑을 응시하며 말했다.

“난 반칙은 아주 싫어하지만, 너희들은 존재 자체가 반칙이니 상관없겠지. 공정하게, 대해줄게.”

 도로시의 광기法理는 불공정한 세상Game의 거부. 이는 설령 스스로가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는 창조주의 입장에 있더라도 변치 않는 정신이다. 반대로 상대가 그 틀에서 벗어난다면 도로시는 얼마든지 그에 맞게 제 실력을 유감없이 뽐낼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놀아보자고!”

 모습을 감추고 있던 제3, 제4, 제5의 달이 구멍 뚫린 하늘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각각의 달 표면에 위치한 것은 오딘, 아테네, 게오르기우스의 거대한 석상. 창을 든 군신軍神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것들은 하나 같이 잔 다르크 이상의 출력을 가지고 있는 빛의 창으로 세상을 뒤덮은 홍채虹彩를 유린했다.

 만년과도 같은 5분 후.
 제1분지세계Theme park 환상기념관의 우주는 무지갯빛 구름에 가득 차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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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5.02.15 20:23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실로 창공과 대지가 격동하는 신화급 전투의 한복판 위에서, 처연하고도 고고한 자태로 필멸의 운명에 맞서는 구원과 희망의 마왕(도로시).

    어쩌면 그녀의 회상처럼 평화로운 시대의 흐름 속에서라면 능히 역사의 한장을 아로 새겼을지도 모를 위대한 가능성의 소유자가, 비자발적 초탈의 관조자로서 현실의 많은 것들로부터 점차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에 잠시간의 씁쓸함을 느끼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이 갈구해마지 않는 반려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더 지킬 수 있다는 충족감으로 가득했을테니, 필시 도로시의 여정길은 행복했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5.02.16 06:53 신고 address edit/delete

      말씀처럼 작중의 도로시는 험한 시대를 만나 여러 재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썩힌 면이 있다고 볼 수 있을 듯싶어요. 그래도 그녀 본인은 큰 불만이나 억울함 없이 스스로의 인생에 만족하고 있으니 다행^^;;

      기본적으로는 천재 타입이긴 하지만, 작중 인물 대부분이 각자 한 세계를 다스릴 만한 쟁쟁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데다 분량의 문제도 있어 그런 점이 그다지 부각되지 못한 면은 아쉬움이 남네요. 나유타나 엘리자베트와의 관계도 좀 더 깊게 그리고 싶었지만, 역시 메인은 제인이다 보니^^;;

      아무튼 스스로가 원하는 길을 선택해 끝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저 또한 작중 도로시의 마지막이 결코 비참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음원출처 : http://www.nicovideo.jp/watch/nm13966310
[장갑악귀 무라마사 OST 영웅습래(英雄襲來)]



“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내 발밑에 주저앉은 채, 스즈카와가 중얼거린다.

“잃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여기에 있었던, 사랑했던 아름다운 것이, 손안에서 사라져 간다는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거다. 이제 곧 알게 된다. 지금은 머리가 이해를 거부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실감하고 말겠지. 쿠루스노, 이나기, 그들이 무엇을 잃었는가. 네가 무엇을 잃었는가를……. 알면 절망하고 만다. 너도!”

“끈질기다고, 선생. 난 절망 따위 하지 않아.”

 확신이 있다. 단언한다. 왜냐하면.

“난 아무것도 잃지 않았으니 말이지!”

“————뭐, 라고?”

 어지간히 의표를 찔렸던 걸까. 처음으로 그 목소리가 갈라졌다.
 난 주위를 둘러본다. 코나츠와 타다야스의 모습을 본다. 눈을 돌리고 싶어 어쩔 수 없는, 그 참혹한 모습을 직시한다.

“당신은 내 소중한 것들을 상처 입혔다. 그건 분명하다. 그러니 화내고 있지. 절대로 용서할 생각도 없다. 그래도 아무것도 잃지 않았어!”

“…….”

“무엇을 잃었다는 거냐!? 코나츠의 몸이냐? 아아, 그래. 지금부터 무척,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이 녀석은 고생하며 살아가야 하겠지. 하지만 내가 돕겠다! 내가 대신할 몸이 되어 주겠다!”

“……!?”

“다른 건 뭐냐. 타다야스의 장래냐. 하. 그거야 뭐, 실명이란 평범하게 생각하면 절망적인 핸디캡이겠지. 하지만……. 이 녀석은 포기하지 않아. 그 정도로 절망하지 않아. 장갑기수(Racer)란 꿈도 버리지 않을지도 몰라! 이 녀석은 그런 녀석이라고!”

“…….”

“다음은 또 뭐냐!? 당신은 아까 뭐라 말했지. 인연이냐? 우리들의 유대냐? 그것이야말로, 네놈 따위가 부술 수 있을까 보냐! 우리들은 줄곧 친우였다! 오래 전부터! 네놈이 오늘, 좀 뭔가 했다고 해서, 그 사실이 사라질까 보냐! 사라지지 않아! 잊지 않아! 난 우리들이 어떤 친구였는지, 절대로 잊지 않아! 그러니, 우리들은 아무것도 잃지 않았어!”

“————말도 안 돼.”

 꼴불견으로 주저앉은 채 스즈카와가 신음한다. 강하지도 않거니와 예리하지도 않다.
 어째서 이런 녀석에게, 방금 전까지 난 대항하지 않고 묵묵히 따르고 있었나!
 이런 녀석. 이딴 녀석은, 그저.

“아름다운 것은 약하다고 말했지. 쇠약하다고 말했지. 스즈카와.”

“——닥쳐.”

“가르쳐 주마. 약한 건 당신이 말하는 아름다운 것이 아니야.”

“닥쳐.”

“약한 건 네놈이다, 스즈카와! 아름다운 것이 눈앞에서 사라졌을 뿐인데, 추억도 뭐도 전부 잊고, 아무것도 없었던 취급을 한, 네놈이 약하단 말이다!”

“닥쳐라!!”

 무자武者가 일어선다. 격앙에 몸을 떨며.
 그 위압은 무시무시하다. 순수하게 전투만을 위해 태어난 존재가, 모든 억제를 잃고, 폭주 직전의 검게 탄 냄새를 발산하고 있다.
 명부의 입구에 서 있는 셈이라 할 수 있으리.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고? 내가 약할 뿐이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가……. 함부로 혀를 놀리지 마라!”

“아무것도 모르는 건 당신이다. 알겠나? 바보라도 알 수 있도록 확실하게 말해주마. 네놈의 절망에 타인을 끌어들이지 마라! 우리들은 그렇게 약하지 않아!”


- 니트로 플러스, 장갑악귀 무라마사装甲悪鬼 村正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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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궤적刹那 (7)


 그 무엇도 적시지 못하는 냉랭하고 허망한 검은 비는 곧 그쳤다.
 피상적으로 맑게 갠 하늘은 두터운 형형색색의 구름이 몰려와 띠를 이루었으며, 마치 사람의 눈동자를 닮은 거짓된 태양에서는 무지개가 눈물처럼 뚝뚝 흘러넘쳤다.

- 마, 맞아요. 제3세력이라 해야 할지, 결국 이긴 건……. 외, 외계인이에요!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모카의 말. 제인은 그 말을 믿지 않고 웃음을 터뜨린 과거의 자신을 민망해 하며 모카에게 속으로 사과했다. 저것이 과연 지적생명체에 속할지는 알 수 없으나, 외계에서 날아온 이질적인 ‘무언가’임에는 확실하다.

- ……잊고 싶은 현실이 있으니까.

 다음으로 뇌리를 스친 것은 도로시의 말. 환상기념관의 마왕館長으로서 군림하는 소녀는, 기억을 조작하고 가상의 세계를 즐기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렇게 표현했다.

“아아, 그럴 만도 하군.”

 제인은 하늘을 올려다 본 자세 그대로 신음하듯이 중얼거렸다.
 태양에서 흐르던 무지갯빛 대하大河는 허공의 어느 지점에 가로막히듯 고이더니 어떤 형체를 생성해냈다. 노을처럼 선명하고도 넓게 번진 그것은 멀리서 불쌍한 영혼을 부르는 거대한 신神의 손짓 같이 보였다. 하지만 조금만 각도를 달리하면 하늘에 무수히 피어난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도 보였으므로 그 형상을 쉬이 정의할 수는 없었다.

“저런 걸, 어떻게 하라는 건지 참…….”

 제인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은 단순히 저 무지갯빛 괴현상이 부정형의 불가사의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절대적 불가항력 사유.
 누군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제인의 머릿속에는 절로 그런 말이 떠올랐다. 온갖 위기상황에 순시로 대처할 수 있도록 특수하게 정신이 설계된 그녀는, 채운彩雲에서 흘러나온 홍채虹彩를 눈에 둔 순간부터 그것의 위험성을 단번에 눈치 챘다.

“하하.”

 제인의 입에서 메마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떤 탈출구도 보이지 않는다. 설령 자세한 이치는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어떠한 위협이든 그 대처방안을 반드시 떠올릴 수 있었던 그녀의 사고가, 꽉 막힌 것처럼 정지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부정형의 괴물虹彩에게선 오색찬란한 살기가 끊임없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사람을 대상으로 사람을 소거하고 말겠다는 강렬한 의지, 아니 방향성만큼은 확고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다.

- 이곳에서는 정체된 종말의 냄새가 강하게 풍겨.

 마지막에 떠오른 것은 스스로의 말. 제인은 불길한 예감만은 변함없이 들어맞는다며 씁쓸하게 눈앞의 현실을 인정했다.

 환상기념관에서 도로시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줄곧 느껴왔던 위화감. 자신이 죽은 지 천 년의 세월이 흐르고,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가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비해 현격한 이질성을 보이지 않던 이 미래세계. 그 이유는 간단했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맞아. 그래서 다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데만 바쁘거나, 한 번 부정되었던 신神에게 매달리고 있는 거야. 진정한 의미로 현실과 싸우고 있는 이용객들은 우리 관의 바보들 정도일까. 뭐, 어떻게 보면 그것도 도피일지 모르겠지만.”

 제인의 심정을 눈치 챘는지 나유타는 묻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이것은 혹시 위로일까. 제인은 아마도 그럴 거라 확신했다. 눈앞의 빨강을 간직한 보랏빛 소녀는 자신을 미리 죽이려 할 만큼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이니까.
 제인은 나유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넌 내게 이걸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거군.”

“……기껏 되살아나 같이 절망할 필요는 없잖아. 죽는 순간까지 힘껏 싸웠던 현실이 이딴 결말로 끝난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니까.”

 나유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분한 듯이 중얼거렸다.
 제인은 가라앉은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나유타, 역시 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짐작했다시피 나도 당신처럼 되살아난 인간이야. 정확히는 좀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한 번 끝났다고 생각한 현실이 재개돼 더 비참한 결말을 예정하고 있는 끔찍함은 잘 알고 있어.”

 나유타는 진저리를 치며 제인의 말을 끊었다. 죽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다. 두 번 죽음을 경험하는 일은 너무나도 잔혹하다. 더욱이 인류라는 종의 미래가 여기서 끊어진다는 현실을, 지금까지 자신들이 쌓아올렸던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현실을 직면해야 하는 고통은, 당사자가 아니면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리라.

“아니, 난…….”

 제인은 고개를 저으며 무언가 말을 건네려 했으나, 갑자기 불어오는 차가운 돌풍에 끝까지 입술을 움직일 수 없었다.

“……!”

 현상계역 최심부Cocytus 제1겨울Caina의 칼바람이 구원구복관 전역을 강타한다. 규모를 제하자면 이는 아까 모카가 둘의 싸움에 개입할 때 흘렀던 냉기와도 닮은 구석이 있었다.

- Qu__is u__ibi f__ant t__ fa_es.

 어떤 방한에도 용서 없이 침투하는 영구설원의 동풍凍風에, 하늘의 절반을 뒤덮고 있는 알록달록한 부정형의 괴물虹彩이 얼룩noise 심한 음성 같은 것을 내지른다. 단순한 착각일까. 이 소리는 제인에게 있어 어쩐지 고통스러워하는 비명처럼 들렸다.

“습기가 차오르는 것만으로도 호우급이 등장하는 건가. 확실히, 끝이 가까운 모양이군.”

 나유타는 뭔가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었지만, 제인은 그 상세를 물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눈발이 섞인 한층 강한 바람이 불어 닥쳤기 때문이다.

- Qu__bi no__ieri, al__aceris.

 제2겨울Antenora의 눈보라. 제9빙옥Cocytus의 지배자가 불러일으키는 최종역의 정체에 무지갯빛 재앙虹彩은 어지러이 물결치던 그 모습 그대로 얼어붙었다. 부동하는 유동은 어쩐지 형형색색의 번쩍이는 번갯불처럼 보인다.

- Fu__nta iu__aturae e__ntium.

 쨍강. 쨍강. 쨍강. 괴이하고 괴기하고 괴상한 모습. 화려하고 화사하고 현란하게 빛나는 부정형의 괴물虹彩은 얼어붙은 몸으로도 무리하게 움직여 사방에 오색찬란한 파편을 흩뿌리며 열 개의 손가락과도 같은 날개를 퍼덕였다. 그 날개에서 떨어진 파편이 구원구복관 곳곳에 직격한다.

“————!”

 제인은 무심결에 손을 뻗었으나, 당연히 그 무력한 손길은 허망하게 닿지 않았다.
 빙결된 무지갯빛 파편에 맞아 부서지기 시작하는 수십 개의 유리 구조물. 거기에 휩쓸린 수백이 넘는 수녀 같은 소녀들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모두 핏덩이가 되어 사라졌다.

“빨리 대피시켜! 뭐하는 거야!”

 제인은 주제넘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난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구시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이곳의 이용객들은 무력한 일반인에 지나지 않는다. 저 정체불명의 괴물이 무엇이든 이것이 양자의 생존을 가르는 전쟁이라면, 싸울 힘이 없는 민간인은 피신시켜야 마땅하다.
 그러나 모카는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렸다.

“소, 소용없어요! 저, 저 사람들에겐 저게, 구원이니까요…….”

“구, 원……?”

 순간 접수가 되지 않는 익숙하고도 낯선 말에 제인은 망연히 입을 벌렸다. 잠시 말을 잊은 제인의 시선이 머문 곳은 교황의 뒤를 따르고 있는 열 두 시녀들. 그녀들은 모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 쉽게 몸소 체현하고 있었다.

“다들 훌륭히 순교하셨네요.”

“틀림없이 천국에 가시겠지요.”

“아아. 부러워라.”

 신자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녀들의 시선은, 마치 그녀들의 교황을 바라볼 때와 같이 황홀했다. 그녀들은 진심으로 동료들의 죽음을 선망하고 있었다.

“…….”

 머리로는 그 기만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공감도 납득도 인정도 불가하다. 제인은 새삼스럽게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저 부정형의 괴물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나유타는 제인의 시선을 가로막듯이 옆에 서며 입을 열었다.

“보면 알겠지만, 저들에게 있어 저 죽음은 영예로운 순교야. 저들은 저 괴물을 신의 사자天使로 여기고 있어. 그럼에도 자진해서 목숨을 바치지 않는 이유는, 그건 자살이기 때문이라나 봐. 신께서 주신 목숨을 함부로 버릴 수 없다는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저들에게 있어선 그게 진리야. 그러니 애당초 도망갈 의지도 없는 거고.”

“대체, 삶을, 죽음을, 뭐라 여기고 있는 거냐……!”

 제인은 두 주먹을 꽉 쥔 채 피를 토하듯 탄식을 내뱉었다. 이제야 제인은 왜 다른 관장들 사이에 이 구원구복관의 이용객들이 광신자 취급을 받는지 알 수 있었다.

 절대적인 장벽에서 등을 돌려 망각한 이들과 그것을 떠받들어 숭배하는 이들. 현실을 외면하는 자들과 현실을 왜곡하는 자들. 과연 어느 쪽이 더 질이 나쁜 것일까. 불가해의 괴물 앞에 모카처럼 무력한 지금의 제인으로선 그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때, 잠자코 있던 교황 안젤리나가 한발자국 앞으로 나서 크게 소리쳤다.

“우리들, 신앙을 가진 자여! 믿는 이들이여! 현세의 가까운 굴곡을 버리고 저 멀리 아름다운 신기루를 내다보며 영구불멸의 광채를 좇는 불쌍한 그대들이여!”

 갑작스러운 교황의 선창에도 수백만의 신도들은 주저하는 기색 없이 일제히 입을 맞춰 노래Acapella를 시작했다.

「안젤리나. 안젤리나. 오오, 우리의 어머니Ave Maria. 우리의 구세주Agnus Dei여.」

“우리는 보고도 보지 않는 자. 듣고도 듣지 않는 자. 만지고도 느끼지 않는 자. 세상의 모든 증명을 거부하는 저항자.”

「글로리아. 글로리아. 글로리아.」

 교황의 독창에 아우러지는 신도들의 합창. 그 소리가 커질수록 안젤리나의 머리카락이 물에 푼 물감처럼 허공에 크게 번져간다.

“하지만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는 자. 듣지 않고도 믿는 자. 느끼지 않고도 믿는 자. 세상의 모든 의혹을 거부하는 증거자.”

「글로리아. 글로리아. 오오, 이노센트 글로리아!」

 불신 교황의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나고 깊게 파고들어 무지갯빛 재앙에 대항하듯 반대편 공간에 무수한 별빛으로 반짝이는 밤하늘을 펼친다.

“설령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어디에서도 그분을 뵐 수 없다 하여도 천주Deus께선 엄연히 실재하시니! 우리 마음에, 우리 소망에, 우리 믿음에 함께 하시니!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진리이니!”

 신을 믿지 않는 교황은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신앙을 고백했다. 그 절절한 통곡矛盾에 호응하듯 별이 빛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에선 그 어느 것보다도 환한 광채를 발하는 커다란 열의 천체가 서서히 떠올랐다.

 그것들의 이름은 월광천. 수성천. 금성천. 태양천. 화성천. 목성천. 토성천. 항성천. 원동천. 지고천. 하얗고 빨갛고 노랗고 파랗고 푸르게 빛나는 그 열의 하늘들은 정이십면체의 태양 아래 가지런히 모여 각자의 운행을 시작했다.

「우리 뜻대로Deus vult! 우리 뜻대로Deus vult! 우리 뜻대로Deus vult!」

 분지세계Theme park의 절반을 뒤덮은 교황의 머리카락에서 솟아난 열의 천체를 올려다보며 열성적으로 신앙所望을 토로하는 신도들의 악에 바친 조화로운 합창.
 안젤리나는 위엄 있게 손을 들어 맞은편의 홍채虹彩를 가리키며 말했다.

“환영유추法理逆出. 『맹목적 찬양Gloria』.”

 댕댕댕. 푸른 종이 울리는 밤. 정이십면체의 태양이 좌우로 흔들리며 맑게 소리를 내자 10개의 천체에서 한꺼번에 빛이 쏟아져 나왔다.

「————————————」

 순간, 세상이 새하얗게 불타올랐다.
 시각만이 아닌 청각과 촉각마저도 먹어치우는 압도적인 빛의 폭발. 묵시록의 그날이 바로 지금 실현되었다는 착각적인 실감.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폭발적인 광채의 향연. 빛만으로 가득 찬 세상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대단, 하군.”

 구원구복관에 모인 이들 중 가장 먼저 감각을 회복한 사람은 제인이었다. 그녀가 희미하게 눈을 뜬 맞은편 하늘에 이미 부정형의 괴물虹彩은 형체도 없이 사라진 채 하얀 재만이 눈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과연 이용객들 전원이 교황館長에게 힘을 빌려주고 있는 값은 하네. 단순한 화력만으로 치자면 엘리제도 압도할지 모르겠어.”

 나유타의 혼잣말에 제인은 저 열의 천체가 발한 위광이 얼마나 대단한 지 어림잡을 수 있었다. 물론 제인은 엘리자베트의 진짜 힘을 직접 눈에 둔 적은 없다. 하지만 그녀와 치열하게 모의전을 펼친 제인의 혜안은 상대의 저력을 대략적으로 가늠하고 있었다. 그 전략관장을 능가하는 위력이라면 아마 이곳의 신적인 관장들 사이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수준일 것이다.

“그나저나, 아까 하려다 만 말은 뭐야?”

 나유타는 고개를 돌리며 문득 떠오른 의문을 물었다. 제9빙옥의 찬바람이 불어 닥치기 전, 제인은 그녀에게 무언가 전하려고 했었다.
 제인은 멋쩍게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아, 그거. 그저 고맙다고 말하려 했을 뿐이야. 네가 내게 주려 했던 건 안락사였지. 나유타, 넌 역시 상냥하군.”

“뭐, 뭐!? 다, 당신 바보 아니야!? 이유가 어찌 됐건 나, 난 당신을 죽이려 했다고! 그, 그걸 좋아하다니, 저 광신자들과 다를 게 뭐야!?”

 보라 속에 피어오르는 빨강. 단 이번에 그 붉음이 떠오른 곳은 머리카락이나 눈동자가 아닌 볼이었다. 나유타는 힐난으로써 그 쑥스러움을 감추고자 했으나, 오히려 그 허둥거림이 돋보일 뿐이었다.

“우, 제인 님!”

 모카가 다시 제인의 팔을 강하게 잡으며 볼을 부풀렸다. 겁에 질려 숨을 죽이고 있던 상황에서도 모카의 질투好意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아, 덥다 더워. 그렇군. 도로시도 엘리제도 이렇게 넘어간 건가. 확실히 저 미소는 위험해…….”

 잠시간 부질없는 손부채질로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던 나유타는 다시 제인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다,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지 자유지만, 아, 아무튼 난 실패했으니 감사 받을 이유는 없어. 당신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얌전히 죽어줄 생각은, 없지?”

 마지막에 진지해진 나유타의 물음에 제인은 마찬가지로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있어 삶은 단념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설령, 어떤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후우.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그냥 죽이려 했던 건데. 뭐, 어쩔 수 없지. 자진해서 현실絶望과 마주하겠다면 내게 그걸 말릴 권리는 없으니까. 애당초 더는 시간이 없기도 하고.”

“시간……?”

 고개를 갸웃거리는 제인에게 나유타는 체념한 듯한 어조로 답했다.

“저건, 전조에 지나지 않아.”

“……!”

 제인은 숨이 턱 막혀 제대로 된 대꾸를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한심했다.
 아무리 살펴도 자신의 힘으론 타파할 수 있는 방도가 떠오르지 않던 괴물. 그것과 조우한 순간 이미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그것의 퇴치에는 행성급 병기 열의 출력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그것을 한갓 전조라 말하는가.
 나유타의 말이 계속됐다.

“앞으로 저것은 무한히 쏟아져 나올 거야. 그야말로 무량대수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아, 저게 뭐냐는 질문은 하지 마. 우리도 모르니까.”

“모른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그보다, 막아낼 방도는 있나?”

 제인의 물음에는 조금의 기대감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나유타는 그 희망 없는 현실을 담담히 긍정했다.

“없어. 정체도 모르는 것에게 확실한 대처법이 있을 리 없잖아.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시간을 끄는 정도야. 저것의 숫자가 무한한 이상, 이 세상 어디에 있건 저것에 휩쓸려 사라지겠지. 하지만 세상의 구조를 좁혀 일종의 지붕, 방파제를 만든다면 그게 무너지기 전까지는 약간 버틸 수 있어. 내 역할은 그것뿐이야. 나와 내가 다스리는 유혈사태관은 제1방파제를 맡고 있어. 이곳은 제3방파제고.”

“희생할, 생각이냐.”

“글쎄, 과연 어떨까. 어차피 찰나의 시간을 버는 동안 마땅한 해결책을 실행하지 못하면 어디에 있건 똑같이 사라질 뿐인 걸. 약간 순서가 앞당겨 진다고 해서 그걸 희생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네. 고로 당신을 죽여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난 이만 가봐야 해. 내게, 힘을 빌려준 그녀를 위해서도 부끄러운 싸움을 할 순 없으니까. 같이 죽을, 바보 자식들도 기다리고 있고.”

 나유타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등을 돌렸다. 제인은 절망적인 현실과 관계없이 그 얼굴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웃으며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삶은 결코 공허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유타의 미소는 오래 갈 수 없었다.

「대, 대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나유타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동시에 이곳에 있는 이들에게도 들리는 이 목소리는, 유혈사태관에 상주하는 동료의 것이었다.

“나이팅게일? 무슨 일이야. 침착하게 말해 봐.”

 나유타는 심상치 않은 기색에 긴장하면서도 상대의 이름을 부르며 애써 평정을 가장했다.
 그러나 그녀의 부관은 한층 흔들리는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우, 우리 관이 밀렸어! 제4방파제로 차례가 밀렸다고!」

 그 말에 나유타도 더는 진정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제1방파제는 어딘데!”

「그, 그게 첫 번째 분지세계…… 도로시 양의 환상기념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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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5.02.07 22:03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그야말로 현실의 일상 그 자체를 침식해 들어오는 미증유의 대재난 앞에 절망을 거듭한 끝에, 그 우회적 타협책으로 끝없는 환상과 망각의 늪을 택한 이들에게 가장 먼저 종말의 순간이 도래하게 될 줄이야...

    실로 구원구복관의 많은 이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창조주의 마음이란, 이토록이나 짓궂은 것이었을까요.

    한편으로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리 아리아는 한시가 급한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제인이 여러 분지 세계의 정경들을 지켜보며 나름의 결론을 내리기를 기다려왔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일말의 상념이 들기도 하더랍니다.


    ... 아, 아무튼 이렇게 나유타 루트(?)의 공략도 순조롭게 완료되었으니 어쨌든 메데타시 메데타시~ >_<) 【 -콰드득- 】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5.02.08 09:51 신고 address edit/delete

      현실을 견디는 법은 각자가 다르며, 또 그것을 직시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역시 현실 자체를 외면하거나 심하게 왜곡시키는 모습에 대해선 아무래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가 힘든 듯싶어요.

      물론 깊게 파고들면 애당초 현실을 올바로 마주한다는 것의 정의가 무엇인지, 또 그것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등등 설령 어떤 고명한 사상가라도 함부로 단정하기 어려운 사안이겠지만, 중요한 건 태도가 문제가 아닐까 해요. 최소한 이야기 속에서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걸음을 멈추지 않는 이들이 바람직하게 보이는 듯······.


      말씀처럼 제인은 순조롭게 플래그 달성 중! 이제 진 히로인(?) 공략만 남았네요~ (...)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탈해, 종족이나 성별, 부모나 고향 등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것들은 그냥 받아들여야 해. 그것들이 주는 이익과 마찬가지로 손해도. 그런 손해들에 괴로워할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그 손해를 줄이거나 손해를 이익으로 바꾸는 일을 생각하는 쪽이 낫지. 정우도 마찬가지야. 정우는 반역자가 될 아버지의 딸로 태어났어. 하지만 나는 정우에게 그것에 대해 괴로워하거나 다른 이들을 원망할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그 시간에 상황을 개선하도록 애쓰라고 말하고 싶군.”

- 이영도, 피를 마시는 새 1권, 황금가지, 200면 이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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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궤적刹那 (6)


 제5분지세계Theme park 구원구복관의 교황館長이 기거하는 유리 복합체의 대성당.
 푸르스름하게 내리쬐는 정이십면체의 은은한 태양빛 아래 수백 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색유리stained glass가 요사스레 근엄한 빛을 발한다.

 그 현란한 조명이 비추는 것은 침전한 자색紫色 속에 맹렬하게 떠오르는 적색. 검은 정장의 영웅Jane은 그 선명함에 매료되면서도 생존戰鬪에 관련된 직감으로 그 불길함에 전율을 느꼈다.

“유혈관장, 나유타……!”

 파르르 입술을 떨며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신음하는 모카. 덕분에 제인은 눈앞의 상대가 누구인지 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나유타.”

 제인은 모카의 말을 되뇌며 날카로운 살의를 숨기지 않는 상대를 다시 한 번 응시했다.
 붉은색이 섞인 자줏빛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을 하고 있는 고풍스러운 장의長衣. 지구시절 동양이라 불리던 지역의 옛 복식인 듯싶으나, 어지럽게 형식이 섞여 있어 어느 한 곳의 차림새로 규정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여겨 볼만한 점은 숨겨진 기능성. 언뜻 보기엔 긴 옷자락과 여러 장식이 거창하고 화려해 움직임에 불편을 줄 것 같으나, 곳곳이 트여 있고 묶여 있어 실질적으로는 동작에 거의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긴 옷자락 등은 교묘하게 인체의 급소를 방어하거나, 움직임을 가려 다음에 어떤 동작을 취할지 예측하기 어렵게 만드는 은폐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한눈에 간파한 제인은 간결하게 상대를 평했다.

“만만치 않겠군.”

 현증법리체계World-formula를 완성한 이 세계에서는 딱히 옷의 기능성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물리적인 고찰 없이도 상상을 그대로 현실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수선화를 닮은 모카의 차림새는 살갗과 옷의 경계가 애매한 그 노출에 상관없이 극지방의 한복판에서도 쾌적하게 산책할 수 있는 완벽한 방한기능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견 화려해 보이는 고풍스러운 차림새에 그러한 기능성을 숨겨 두었다는 것은 전투에 대한 착용자의 은근한 고집을 드러내는 반증이리라. 한평생을 전장 속에서 보냈던 제인은 누구보다도 그 점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제인은 일단 갑자기 살해선고를 해온 상대에게 영문을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기회는 금방 찾아오지 않았다.

“나유타! 저 더러운 흡혈귀가!”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는 거죠!? 어서 나가요!”

“맞아요! 우리 안젤리나 님께 접근하지 말라고요!”

 제인이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나유타를 규탄하고 나선 것은 안젤리나의 뒤에 대기하고 있던 열 두 시녀였다. 교황의 사도를 자처하는 그녀들은 지금까지 고요했던 모습이 마치 꿈이었던 것 마냥 으르렁거리며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연적에 대한 질투……. 아니, 연예인의 스캔들을 두려워하는 팬심에 가깝나…….’

 제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또 다시 생전의 일. 그녀가 속해 있던 부대의 대장에 관련된 것이었다. 비교적 오락적인 일에 무감한 편인 제인에 비해 그 대장은 세속적인 즐거움에 매우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 덕분에 제인은 대장을 통해 세간의 여러 가지 것들에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가 있었다.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추구하는 욕심 많은 생물이기 때문일까.
 굳이 분류하자면 ‘여걸’이란 부류에 속할 그 대장은 괄괄한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의외로 예쁘고 아기자기한 것들을 좋아했으며, 그 영향 때문인지 연예인도 과거 ‘아이돌’이란 직종에 기원을 두고 있는 여자 가수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다. 떳떳이 밝히진 못했지만 심지어 적대세력인 지구의 연예인들도 빠삭할 정도였으니 그 열의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언젠가 한 번 그 대장은 자신이 좋아하던 연예인이 연애에 관련된 추문에 휩싸이자 불 같이 화를 낸 적이 있었다. 그 일은 제인에게 있어선 이해할 수 없는 분노였기에 도리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때 대장이 보였던 태도는 저 시녀들의 적의와 놀랄 만큼 비슷했다.

“시끄러워, 오리 새끼들. 오늘은 너희 엄마 오리 보러 온 거 아니니까 귀 아프게 꿱꿱거리지 좀 마. 내가 볼 일이 있는 건 저 여자라고.”

 나유타는 앞 다투어 소리 지르는 시녀들의 입을 막듯 거칠게 긴 옷자락을 펄럭이며 제인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에 걸린 제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지명해 주니 영광이지만, 난 오늘 널 처음 보는데. 뭔가 원한 살 일이라도 있었나?”

“원한?”

 나유타는 가볍게 코웃음을 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무슨 착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베풀러 온 건 자비야.”

“……자비?”

 그 말에 제인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무한으로 증식하기 시작했다. 저만한 살의를 온몸에 두르고 있는 자가 베풀 수 있는 자비란 과연 무엇일까. 하지만 제인에게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나유타가 소매에서 무언가 꺼내는 동작을 보였기 때문이다.

“빈, 칼자루……?”

 혹 상대가 암기라도 꺼내 던지는 게 아닐까 순간적으로 긴장하고 있던 제인은 다소 얼빠진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나유타는 실망스러운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직 그 정도 이해밖에 하지 못했나. 굳이 환영장치까지 꺼낼 필요도 없겠군. 정말 그 여잔 보는 눈이 없다니까. 역시 난, 틀리지 않았던 거야.”

“음? 그게 무슨 뜻…….”

 나유타는 그런 제인의 곤혹에 상관없이 그 텅 빈 칼자루를 앞으로 겨누며 입을 열었다.

“사악지정正義實現.”

“……!”

 등줄기를 달리는 오한. 분명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빈 칼자루는 그대로 비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제인은 당장이라도 목이 날아갈 것만 같은 위기감에 움츠러들었다. 그것은 곧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제1도식第一刀式 『파사破邪』.”

 빈 칼자루에서 환영처럼 한없이 예리하고 서늘한 도신刀身이 돋아난다. 극한의 무武와 무無를 추구하는 그 칼날에 적힌 도명刀銘은 당당히 여덟 자.

『서천파사誓天破邪 사령동색邪靈動色.』

 왜 저 문구에 몸이 떨리는 것일까. 제인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영문을 알 수 없다 해도 사태는 진전된다. 눈앞의 적敵은 생각할 여유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곧장 육박해 왔다.

“사악처단正義執行.”

 선언과도 같은 네 음절과 함께 나유타가 돌격한다. 색유리의 요란스러운 빛 속을 흐르는 보라와 빨강. 그 빠르기는 가히 총탄에 비유할 만하다. 하지만 신체의 기계화로만 치면 올림피아自動人形에 가깝게 개조된 제인에게 그 속도는 정지화면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상해. 왜, 목덜미가 섬뜩한 거지.’

 그럼에도 제인은 멎지 않는 정신적인 오한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좋지 않은 예감. 그녀의 감은 단순한 감이 아니다. 본래 외부은하를 탐사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위기 상황에서 대처할 수 있도록 특수하게 설계된 정신에 더해진 수많은 전장에서의 경험은, 그녀의 직감을 예지의 영역까지 끌어올렸다.

『아광속추진Overdrive.』

 제인은 망설임 없이 내부의 반영구기관Fractal dimension engine을 작동시켰다. 다리에 숨겨진 소형 추진기 중 일부가 불을 뿜어 정장의 바지자락을 엉망으로 찢어 놓는다. 한없이 광속에 가까운 영역으로의 피신. 예전에는 고속기동 전투기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닿을 수 없었던 속도에, 지금은 단신으로 아무런 무리 없이 도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제인은 그 엄청난 발전에도 기뻐할 수가 없었다.

‘나와, 같은 속도라고……!?’

 제인은 경악했다. 모든 것이 정지한 것처럼 느껴져야 할 세계에서 나유타만이 엇비슷한 속도로, 아니 그 이상의 속도로 그녀를 따라잡고 있었다. 체내의 FDE가 비명을 지를 정도로 기동력을 끌어올렸으나, 초광속의 영역에 이르지 않는 한 상대를 떨쳐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제인은 순간적으로 싸울 마음을 먹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유타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상대가 자신을 넘어서기 전에 승부를 내는 편이 유리할지도 모른다.

‘아니야.’

 가속된 사고 속에서 제인은 곧 고개를 저었다. 분명 지금 제인의 몸은 특별한 무장 없이 맨몸으로도 백경급 순양함을 격침시킬 수 있을 만한 성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미래는 더 이상 예전의 법칙이 통용되던 시절과는 다르다. 제인은 아무리 신체를 강화한다 해도 나유타가 들고 있는 저 칼에 닿는 순간 종잇장처럼 찢겨 절명하고 말 것이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 제인 님!

 그때였다. 일순 차가운 냉기가 흐른다 싶더니 정지한 세상에서 움직이는 두 사람 사이에 모카가 끼어들었다.

“제길!”

 나유타는 칼을 휘둘러 막 사정거리 안에 포착한 제인과 함께 모카를 베어 버리는 대신, 급속도로 공격을 멈추며 칼자루 쪽으로 모카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꺅!”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온 세상에서 모카는 화풀이를 당한 인형 마냥 형편없이 나가떨어졌다. 공중을 날던 모카는 유리 벽면에 부딪치기 전, 다행히 재빠르게 움직인 안젤리나의 시녀들이 받아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모카! 괜찮아!?”

 제인은 상대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모카에게 시선을 돌려 안부를 물었다. 시녀들에 의해 부축을 받으며 일어선 모카는 다리를 후들거리면서도 애써 기운을 내 답했다.

“저, 전 괜찮아요! 하, 하지만 제인 님이……!”

“무슨 짓이야! 죽일 뻔 했잖아! 무능한 주제에 함부로 끼어들지 말라고!”

 그러나 모카의 말은 도중에 성을 내며 소리치는 나유타의 목소리에 의해 끊어지고 말았다. 제인은 그 모습에 작은 호기심을 느끼며 눈매를 좁혔다.

“무작정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는 살인마는 아닌 모양이군.”

“당연하지. 난 당신을 생각해 죽이려 하는 거야. 그러니 얌전히 죽으라고!”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나유타의 말에 제인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거기서 진심을 느낄 수가 있었다. 비유하자면 안락사. 또는 전쟁터에서 살아날 가망성이 없는 병사의 목숨을 괴롭지 않게 끊어주는 참혹한 자비에도 가까운 심정이 전해져 오는 것이다.

“이왕 친절을 베풀 생각이면 죽을 이유도 알려주면 좋겠는데.”

 절반은 농담처럼 던진 제인의 말에도 나유타는 진지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그걸 모르게 하기 위해 죽이는 거니까.”

 나유타는 더는 나눌 말이 없다는 듯 제인을 향해 푸르게 날카로운 파사도破邪刀를 겨누었다. 상대의 확고한 의지를 감지한 제인 또한 FDE를 발동시켜 아광속추진Overdrive에 들어갈 태세를 갖추었다.

“아, 안젤리나 님! 저 두 사람을, 아니 나유타를 말려주세요!”

 언제 누가 죽을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긴장상태에서 모카가 매달린 것은 구원구복관의 교황이었다. 그러나 신을 믿지 않는 교황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나유타의 행동엔 일절 관여하지 말라는 게 청장님의 명일세. 아마도 이건 죽은 영웅Jane이 뛰어넘어야 할 시련이겠지.”

“시, 시련이라니……. 아, 안젤리나 님은……다, 당신은 신 없는 세상에 절망해 이곳의 관장이 됐으면서도, 다시 무책임하게 그런 미신에 의지하는 건가요!? 나유타의 저 칼에 당하면, 아무리 제인 님이라도……!”

 모카는 격렬하게 항의하며 다시 한 번 앞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하지만 안젤리나의 시녀들이 모카의 몸을 단단히 구속한 채 놓아주지 않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거 놔요!”

 어떻게든 시녀들의 구속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모카에게 안젤리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확실히 청장 비서의 말씀처럼 난 부정된 맹신을 버리지 못하는 아둔한 인간이야. 하지만 아직 보는 눈은 썩지 않았다고 자부하고 있네. 내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 그대는 무능할지언정 무위하지는 않다고. 그대는 무력한 개입으로 기회를 만들었어. 그리고 그대의 영웅Jane은 한 번 얻은 그 기회를 결코 헛되이 쓰지 않겠지. 그녀를, 믿게나.”

“……!”

 안젤리나의 마지막 말은 모카에게 있어 결정타였다. 신앙은 반드시 신神을 대상으로만 성립하지 않는다. 불신 교황의 시녀들이 그러하듯 모카에게 있어 제인은 구세주 같은 존재다. 믿음에 논리는 무용하다.

“신뢰라 말하면 듣기엔 아름답지. 죽어서까지 거기 휘둘리는 사람의 마음을 무시한다면 더욱.”

 전투에 앞서 청각을 강화한 제인의 귀에 간신히 들릴 만큼 작은 나유타의 혼잣말. 하지만 그것은 어떤 예리한 칼날보다 날카롭게 제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휘둘린다, 라…….”

 세상에 자신이 원해서 태어난 사람이 없다는 부조리. 이는 타인의 필요에 따라 되살아난 이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무리 좋은 대접을 받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검은 얼룩처럼 사라지지 않는 그 거무칙칙한 감정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제인에게도 그대로 살아 있었다.

“나유타, 넌…….”

 그러나 제인은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나유타가 물리적으로 다음에 이어질 말을 끊기 위해 육박해 왔기 때문이다.

『아광속추진Overdrive.』

 제인은 저 칼날에는 절대 닿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으로 또 다시 FDE를 발동시켰다. 빛의 영역에 다가갈수록 점점 정지해 가는 세계. 이번에도 나유타는 총탄과 같은 속도에서 순식간에 제인이 있는 경지까지 비약해 왔다.

‘길항해, 압도하는 힘인가.’

 정확한 이치까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제인은 두 번째 눈에 담은 것만으로 나유타의 광기法理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예지계역이 현상계역과 중화된 이 세계에서 물리법칙은 전과 같은 절대적 기준을 행사하지 못한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것은 현실성이 아닌 개연성. 제인은 한계까지 사고를 가속하며 빠르게 답을 더듬었다.

‘아마도 저 칼의 특성은 대상의 존재형식을 임의 규정하는 것. 저 앞에 난 쓰러뜨려야 할 적. 즉, 베어야 할 악.’

 서로가 서로를 악惡으로 규정해 상대의 절멸을 바라는 극한의 대립戰爭에서 제인은 정의의 본질이 독선에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선은 당연히 상대편에게 있어선 배제해야 할 악으로 통한다.

‘직접 부딪쳐선 안 돼. 저 칼날에 닿는 난 부정한 존재.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설령 행성만 한 두터운 장갑을 두르고 있다 해도 종잇장처럼 베어질 뿐이야.’

 생전 지겹도록 접한 논리였기 때문일까. 제인은 한눈에 칼의 이치狂氣를 간파할 수 있었다. 일방적으로 악으로 규정된 상대는 무슨 짓을 해도 그 굴레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이 있다면 실질적인 힘으로 제압하는 것뿐이겠지만, 이곳은 개념이 실체화되는 세상. 스스로를 무조건 선이라고 정당화할 수 있을 만한 동등한 광기가 없는 한 상대의 법칙을 깨부수는 일은 불가능하다. 생전 지구통합정부와 외행성연합 양쪽의 어둠을 다 접하고 깊게 실망한 적이 있는 제인은 도저히 그런 기만을 행할 수가 없었다.

‘내게, 환영유추기가 있다면.’

 제인은 나유타의 보랏빛 머리카락과 눈동자 속에서 이질적으로 타오르는 빨강을 응시하며 안타깝게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의 그녀에겐 메피스토가 절실히 필요했다. 모카가 준 이 기회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선…….

‘잠깐! 아까 저 나유타란 녀석은, 뭐라 말했지?’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해준 모카의 얼굴을 떠올린 순간, 연쇄적으로 제인은 그 모카를 차마 베지 못한 나유타의 모든 발언을 한층 선명하게 상기할 수 있었다.

- 아직 그 정도 이해밖에 하지 못했나. 굳이 환영장치까지 꺼낼 필요도 없겠군.

 그중에서도 특히 위화감을 자극한 것은 이 부분. 지금까지 제인은 나유타의 빈 칼자루가 그녀의 관념을 현실 밖으로 끄집어내는 환영유추기Mephisto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유타는 이미 그 사실을 부정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이 시점에서 그 발언은 분명한 그녀의 실언이었다.

“그렇군. 그런 거였나!”

 드디어 제인은 속임수를 눈치 챘다. 아니, 속임수는 아니다. 아무도 속인 이는 없다. 그저 스스로 편견에 사로잡혀 사고의 틀을 좁히고 있었을 뿐이다.

 몇 번이고 반복하지만 이곳은 상상이 현실이 되는 세계. 환영유추기Mephisto 또한 예외일 리가 없다. 물론 모카는 그것을 두고 장치Device라 불렀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와 미래의 단절,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된 세상 속에서 같은 언어의 화용론적 쓰임새가 달라졌을 뿐이다. 이 세계에서는 개념이 곧 도구니까.

“난 정말 바보였군! 모카가 직접 메피스토를 보여주기까지 했는데, 여태껏 모르고 있었다니! 아니, 적어도 허공에 빛의 문자를 쓰게 되었을 때부턴 눈치 챘어야지! 이 얼간아!”

 제인은 스스로를 매도하며, 도주하는 대신 나유타에게 달려들었다.

“죽을 생각이라면, 올바른 선택이야!”

 나유타 역시 크게 소리치며 제인을 향해 파사도를 힘껏 휘둘렀다.

“……!”

 키이이이이잉. 그러나 들리는 건 제인의 몸이 갈라지는 소리가 아닌 날카로운 금속성. 어느새 제인의 손에는 빛의 입자가 모여 은색으로 번쩍이는 유선형의 단검을 형성하고 있었다.
 제인은 부지불식간에 불러낸 손안의 무기를 바라보며 입가를 비틀었다.

“하! 질린다, 정말! 결국 위급한 상황에서 의지한 게 이거냐!”

 나유타의 파사도를 받아내고 있는 것은 단분자 소검Monomolecular Blade. 형상기억 액체금속으로 분자영역의 얇은 칼날을 구성하고 있는 그것은 도시연방 기동대의 개인무장 중 하나였다.

“쳇, 벌써 원리를 눈치 챌 줄이야!”

 나유타는 혀를 차며 파사도를 더욱 강하게 밀었다. 상대가 현증법리체계World-formula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입을 가벼이 놀린 게 실책이었다. 과연 영웅의 위명은 허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유타의 강한 참격에 제인의 단검이 절반으로 갈라진다. 아직 우세는 나유타에게 있다. 하지만 제인은 빠른 속도로 상대의 광기法理를 꿰뚫고 있었다.

“내게서 가까운 것일수록 쉽게 잘리는 것 같군.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미련 없이 단분자 소검Monomolecular Blade을 버리고 뒤로 물러선 제인이 다음으로 형성한 것은 다연장 소형 전자기총Railgun. 극도로 가속된 수발의 금속탄환이 공간을 찢어발기며 나유타에게 육박한다.

“……!”

 그것을, 나유타는 파사도를 휘둘러 전부 쳐냈다. 레일건의 탄자를 칼로 막아낸다는 것 자체가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비현실적인 광경이었지만, 제인은 그보다 나유타의 옷자락이 타들어갔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단순히 총을 발사했기에 타격을 입힌 것이 아니다.

“자, 다음은 이거다!”

 현증법리체계World-formula의 진정한 사용법을 깨달은 제인이 곧이어 형성한 것은 구시대의 육중한 기관포였다. 본래 그 시대의 인간이라면 이 무거운 병기를 홀로 휴대하는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기계화 신체를 지닌 제인에게는 별 무리가 없는 일이었다.

“빌어먹을.”

 그 앞에 나유타는 방어 자세를 취하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어째서일까. 겉모습이야 기관포 쪽이 더 무시무시하지만, 위력은 명백히 방금 전 레일건이 한수 위다. 그럼에도 나유타가 주춤하는 모습에 제인은 자신의 가설이 옳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네가 가진 칼은 날 악으로 규정해 베는 성질을 지녔군. 반대로 말하자면, 내게서 멀어질수록 그 효력이 떨어지는 셈이지. 아마 나라면 칼날에 살짝 닿는 것만으로도 절명했을 거야. 하지만 내가 아닌 내가 쓰던 도구라면 좀 더 버틸 수 있지. 같은 도구라도 내가 살던 시대에서 멀어질수록 한층 베기가 힘들어질 테고.”

“…….”

 나유타는 침묵으로 제인의 말을 긍정했다. 어차피 죽은 영웅Jane은 즉석에서 꾸며낸 허세나 거짓정보로 속일 수 있을 만큼 녹록한 상대가 아니다. 그렇다면 말을 아끼고 싸움에 집중하는 편이 좋으리라.

“유감스럽게도 물러설 생각은 없나 보군. 좋아. 내킬 때까지 상대해줄게. 대신 내가 이기면 왜 날 죽이려 했는지 이유를 들려줘.”

 제인은 대답하지 않는 상대에게 혼자 제안하며 기관포를 빛으로 되돌렸다. 마지막으로 제인의 손에 나타난 것은 한 자루의 물결치는 흉측한 검Flamberge이었다.

“……악취미.”

 인상을 찌푸리는 나유타에게 제인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다짜고짜 사람을 베려 달려든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아무튼 일단 이 소동부터 마무리 지어 볼까.”

 생전 죽기 직전까지 인공지능Alice과 담소를 멈추지 않았던 제인의 여유는 칼 한 자루로 서로의 목을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나유타는 그 태연함에 발끈하며 본래 목적과는 상관없이 제인을 때려눕히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다.
 하지만 둘의 접전은 의외로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검은, 비……?”

 예고도 없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거무칙칙한 빗줄기. 두터운 유리로 둘러싸여 있는 대성당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는 실내를 침범하고 있었다.

“늦었군. 미안해. 내 힘으로 당신을 구하는 건, 역부족이었어.”

 나유타는 방금 전까지의 살의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허망하게 중얼거리며 어느새 날이 사라진 빈 칼자루를 힘없이 내렸다.

“…….”

 제인은 나유타의 영문 모를 사과를 들으며 망연히 검은 비가 내리는 공활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적시지 않는 그 비는, 어쩐지 굉장히 차갑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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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5.02.01 02:11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에엣... 본격 비를 잔뜩 맞은 채 풀이 죽은 강아지 모드의 명하(?)라니 왠지 상상이 가질 않는걸요~ >_<);;

    음음, 그러고보니 '자율적 부존증명' 의 작 중에서 각자의 운명과 능력이 뒤바뀌어버린 평행 세계의 이야기도 상당히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더불어 만약 나유타가 저 파사도뿐만 아니라 죽음의 본질을 통찰하는 마안까지 지니고 있는 것이라면, 실로 그 전신격인 존재의 완전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말이예요. +_+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5.02.01 23:38 신고 address edit/delete

      말씀처럼 어느 한 이야기에서 활약한 캐릭터가 다소 변모한 모습으로 다른 상황에서 또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펼치는 것도 참 매력적인 요소라 생각해요. 소위 동인활동이라 불리는 2차 창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여러 이유 중 하나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실제로 작중의 나유타는 전작의 현아 능력뿐만 아니라 명하의 능력도 가지고 있어요. 그 이유에 대해선 아마 마지막 장에서 다루어지게 될 듯... 사실 진행을 좀 빨리해 이번 장에 모든 걸 완결 지을 생각도 있었는데, 언제나처럼(...) 또 길어지고 말았네요^^;;











(아마도 본편과는 관련 없는 인용입니다)




「프란체스코 성인께서는 만물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라고 대중에게 가르치셨으나, 영감은 이 경계를 몰라.」

「그러나 대중에게 규율을 준 건 우리야! 어제 네 형제들, 네 떨거지들도 못 보았느냐? 우리와 합석했답시고 또 범부처럼 말하지는 않더구나. 범부란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서책은, 범부의 혀를 지혜를 나르는 수레라고 가르치는데 내가 어찌 이를 그냥 둘 수 있으리. 나는 이제 뜻을 다 이루었다. 너는 나를 악마라고 한다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니라. 나는 하느님의 손이었느니라.」

「하느님의 손은 창조하지, 감추지는 않는다.」

「넘어서 좋은 경계가 있고 넘어서 아니 될 경계도 있는 법이다. Hic sunt leones(여기에 사자가 있다)라는 말이 안 들어가 있어도 좋은 서책, 안 들어가서는 아니 되는 서책…… 이것도 하느님께서 정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괴물도 지어내시는 걸 왜 모르느냐? 그래서 영감 같은 괴물도 지어내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드러나기를 바라신다.」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下, 열린책들, 850면 이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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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궤적刹那 (5)


 달리는 광채는 날카롭고 빨랐다. 번쩍이는 예리한 빛줄기에 상쾌한 박하향이 퍼져 정신을 자극한다. 곧이어 빛은 느슨히 은은해졌다. 그러자 입안에는 달콤한 벌꿀향이 진득하게 감돈다. 다시 빛이 어지럽게 산란하자 이번에는 새콤한 단맛이 혀끝을 스치고 올라간다.

“어떤가. 즐길만한가.”

 빛의 예술이 미감味感을 자극하는 마술. 현란한 색채의 향연에 감각은 혼미하게 중심을 상실하고 떨어져 있는 이웃과 맞붙어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다. 끼니 없이도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이 세계未來의 사람들에게 있어 감각의 혼선으로 맛을 즐기는 일은 적당히 좋은 오락거리이리라.
 나는 눈으로 느껴지는 산미를 음미하며 대답했다.

“신선한 체험이군. 음. 나쁘지 않아. 맛있어. 최소한 연방기동대의 우주식보다는 훨씬 낫군.”

 월면도시 연방군은 외행성연합군 전체에서도 식사의 질이 떨어지기로 유명했다. 지구와 가까워 그 의존도가 컸던 월면도시는 평소 생활이 풍족했던 만큼 서로의 관계가 악화되는 즉시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특히 그 영향은 먹거리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으며, 상대적으로 환경이 열악한 군대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반면 다른 행성도시들은 처음부터 지구에 기대지 않았기에 관계악화로 인한 타격도 적었다. 그들은 극한의 우주환경을 탐사하고 개척하기 위한 여러 노력을 궁구하는 가운데, 독자적인 식문화 또한 꽃피울 수 있었다. 예전 우리 부대 대장의 경우 사비를 털어서까지 타 행성도시의 합성우주식을 따로 구입했을 정도이니 그 차이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으리라.

“그대의 입맛에도 맞는다니 다행이군. 나도 자그마한 재주를 보인 보람이 있어 만족스럽네.”

 깊고도 맑게 울리는 목소리. 제5분지세계Theme park 구원구복관의 교황館長 안젤리나가 현란히 반짝이는 미소를 지었다.

 비유하자면 수없는 별빛이 명멸하는 밤. 안젤리나의 긴 검은 머리는 한없이 짙은 도로시의 칠흑과는 다르게 금빛과 은빛이 춤추며 새카만 어둠을 은은히 밝히고 있었다.

 그 아래 하얀 예복은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긴 옷자락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는 매우 정결하다. 다만 중앙에 정이십면체의 푸른 종과 새빨간 십자형 문양이 선명하게 수놓아져 있어 어찌 해도 강렬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하지만 무엇보다 구원관장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뒤에서 말없이 그녀를 따르고 있는 시녀 같은 소녀들이다. 언뜻 보기엔 바깥 유리 구조물의 수녀 같은 소녀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나, 한 가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이 시녀들이 심취해 있는 것은 텅 빈 무지갯빛 경전이 아닌 자신들의 교황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관계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누군가를 추켜세우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같은 사람들에 의한 추종이다. 안젤리나가 지금까지 만났던 다른 어떤 관장들보다도 위엄 있게 보이는 것은, 그 외견의 화려함보다는 그녀를 따르는 열 두 시녀들 덕분이리라.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안젤리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맞아. 저 아이들에겐 내가 신神일세. 거기에 이유는 없어. 아니, 표면적인 이유라면 있긴 하지. 내가 교황이라거나 힘이 있다거나 아름답다거나 등등.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형식적인 것에 불과해. 실은 그냥 의지하고 싶으니까 의지하는 것이고, 믿고 싶으니까 믿는 것뿐일세. 아마 그 조건만 충족시킨다면 누구라도 좋았을 것이고, 그런 사람이 없다면 다른 조건을 찾아내 믿고 의지했을 테지. 그게 우리 관에 모이는 이용객들의 특징이기도 하다네.”

 구원관장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뒤의 시녀를 자처하는 열 두 소녀들은 자칫 자신들에 대한 신랄한 비난일 수도 있는 내용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황홀히 자신들의 교황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저, 저도 같은 걸까요……. 제인 님을 향한 제 마음은, 그런 맹목적인 추종에 불과했던 걸까요…….”

 오히려 안젤리나의 말에 자극을 받은 것은 구원구복관에 들어온 이래 줄곧 떨고 있었던 모카였다. 확실히 모카가 내게 보내는 과분한 호의는 눈먼 광신과 통하는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가 왜 그토록 날 따르는지 알지 못하며, 짐작 가는 바도 없다.

 하지만 무언가 다르다. 생존戰鬪에서밖에 쓸모없는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내게는 모카를 위로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난 아직 그녀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물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가 말하고 싶지 않은 기색을 내비치었기 때문이다.
 결국 모카의 말에 답한 것은 맞은편의 안젤리나였다.

“청장 비서께선 그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네. 분명 그대는 무능할지 몰라도 무위하지는 않아. 그렇지 않다면 진작 이곳에 취해 있었을 걸세.”

“……고마워요.”

 안젤리나의 말에 모카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난 그에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 자신에게 꺼낼 말이 없었다는 것에 다소 분함을 느꼈다. 정말 사람의 마음은 제멋대로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덕분에 중요한 사실을 눈치 챈 나는 그것을 입에 담았다.

“당신은 신을 믿지 않는군.”

“눈치 챘나.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한눈에 알아낼 줄은 몰랐네.”

 안젤리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작게 감탄했다.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숨기지도 않은 사실을 알아내 봤자 자랑거리도 못 돼. 하지만 왜 당신은 신을 믿지 않지? 이곳의 교황이잖아.”

“술에 취해선 제대로 운전도 할 수 없지. 마찬가지로 신에 빠진 자가 제대로 맡을 수 있을 만큼 분지세계의 운영은 녹록치 않아. 그리고…….”

 오래된 예를 든 안젤리나는 잠시 시선을 들어 빛을 음미한 후 다시 말했다.

“난 옛 시대의 인간일세. 그대와 마찬가지로.”

“부존증명완료.”

 내 말에 불신의 교황은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난 그녀가 왜 교황이라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신神을 믿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 시대에도 종교의 힘은 크게 위축되었으며 그 세 또한 미약했다. 신세기 십자군The Neo-Crusades과 같이 정치적 필요에 의해 이용당한 이질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진지하게 종교를 믿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전지全知에 의한 형이상학적 존재의 부존증명완료.
 말은 거창하지만, 요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인지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다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신이나 영혼 같은 개념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는 간단한 얘기다.

 예전에는 신적인 존재를 옹호하는 자들 중 맹인의 비유를 드는 사람이 있었다. 가령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눈이 멀어 100년의 세월이 흐른다면, 이 세상에 빛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빛은 거기에 엄연히 존재한다. 초월적인 존재들 또한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는 언뜻 일리가 있는 말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 자신이 감지하지 못하는 것도 알아낼 수 있는 지성이 있다. 고전적인 예를 들자면 초음파나 자외선이 이에 해당하리라. 사람의 귀와 눈은 그것을 듣고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그 존재를 발견하고 이용했다.

 이처럼 문명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점점 세계에 대한 사람의 의문은 줄어간다. 만약 온갖 직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사람이 감지하고 인식할 수 있는 모든 세계의 법칙을 전부 풀어낸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거기에 초자연적인 요소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증명되었다면? 소위 신비체험이라 불리는 신자들의 증언도 그저 정신적인 환각에 불과함이 상식인 시대라면.

 말할 것도 없이 종교를 믿는 사람은 극단적으로 줄어든다. 물론 의지할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약한 마음을 파고드는 유사종교적인 사이비 단체나, 아예 현실을 무시하고 정통종교를 고집하는 이들도 여전히 존재하긴 했지만, 그런 자들은 전체 인구에서 보았을 때 극히 소수였으며 일반적으로 바보취급을 받았다.

“난 그대가 죽은 지 약 500년 후의 사람일세. 우리 때는 현증법리체계World-formula가 거의 완성단계에 들어서서 말이야. 인과역산추론에 의한 부존증명도 가능했지.”

 난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과역산추론……?”

“가령 어떤 공을 어느 정도의 힘으로 치면 어디까지 굴러갈지 예측하기란 어렵지 않지. 행성의 중력, 지표면의 성질, 공의 재질 등 더 자세한 정보가 있다면 그 정확도는 더욱 높아질 걸세. 이처럼 세상은 확고한 인과법칙 아래 성립되어 있어. 그렇다면 그것을 되짚어 과거를 구성하는 일도 불가능하지는 않지.”

“잠깐! 그건 우리 시대에도 시도되던 발상이긴 하지만, 그 방대한 정보량을 어떻게……. 아!”

 안젤리나의 시대는 세계사상관리체계World-formula가 완성 직전에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물리적인 면에서의 제약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정답일세. 현증법리체계World-formula의 방대한 출력이 뒷받침된다면 세상 그 무엇이든 계산하지 못할 것이 없지. 그로써 우리는 과거를 거의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 있었네. 그리고, 거기에 신은 없었어.”

 안젤리나는 담담하게 그 부존증명을 이야기했다.
 종교나 신화에서 말하는 신적 존재는 애당초 그 실체가 없는 허구였다. 여러 경전에서 말하는 구원자의 존재 또한 태반이 실존인물이 아니거나, 실존인물이었다고 해도 와전되고 왜곡된 부분이 많았다. 특히 기적에 관련된 부분은 신적인 존재들과 같이 아예 그것 자체가 그냥 허구였거나, 혹은 자연현상 및 당시에는 알지 못한 물질작용을 멋대로 착각해 전해진 것이었다.

“물론 애당초 그 모든 것이 한갓 인간의 헛된 말장난일 뿐이라며 옛 신앙을 고집한 자들도 있었지만, 법정에서도 증명력이 인정되는 그 추론기술을 헛것 취급하는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네. 이처럼 과학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신과 영혼의 존재는 완벽하게 부정되고 말았어. 그럼에도 그 끝에 현증법리체계World-formula를 완성해 예지계역을 물질적으로 실현한 인류문명의 역설이란 무엇을 뜻하고 있는 건지.”

 익숙한 이야기이기 때문일까. 과거를 읊는 안젤리나의 어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평온했다. 하지만 기분 탓인지 그녀의 눈동자는 슬퍼 보였다.

 어쩌면 그녀는 사실 신神이 세상에 존재하기를 바랐던 건 아니었을까. 절대적으로 옳고 절대적으로 선하며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창조주가. 그 절대자가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을 이끌며 인간을 구원하기를 기원했던 건 아니었을까.
 하지만 차마 그런 무신경한 물음을 던질 수 없었던 나는 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듣기로 구원구복관의 이용객들은 기억조작이나 은폐를 행하지 않은 채 맨 정신으로 생활하고 있다며. 그럼에도 여기 모인 이용객 전원이 신을 믿고 있는 건 왜 그렇지?”

 전지에 더해 인과역산의 추론에 의한 부존증명까지 행해졌다면 내가 죽은 뒤 미래세계에서의 종교란 더욱 설 자리를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구원구복관에 모인 이용객들의 숫자는 적어도 백만 명 이상. 단순히 각 집단 각 시대의 소수자들이 모였다고 보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다.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는 이상 시간이 흐를수록 유입자보다는 이탈자가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본질은 무지에 있네. 흔한 편견과 다르게 몰라서 믿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믿는 것이 신앙의 참된 모습이지. 이미 목적이 정해져 있는 믿음이 의혹을 허용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어. 하지만 불행히도 불완전한 인간은 의혹으로 진리에 손을 뻗어야 하는 슬픈 숙명性質을 지고 태어났지. 처음부터 신앙이란 우리에게 눈가리개의 역할밖에 할 수 없었던 거야.”

 불신의 교황은 씁쓸히 무신론을 고백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과거 신앙의 쇠락은 설명할 수 있어도 지금의 번성에는 맞지 않는 이야기다. 여기서 난 다음에 이어질 말을 추측할 수 있었다.

“다시 무지가, 아니 미지가 나타난 모양이군.”

 나의 앞선 말을 안젤리나는 고개의 상하운동으로 긍정했다.
 모카는 외계인이 출현했다고 말했다. 도로시는 사람들에게 잊고 싶은 현실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여러 분지세계Theme park의 수많은 이용객들은 현실을 망각하고 가상의 역할극에 몰두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도달한 구원구복관의 신도들은 수백 년 전에 완벽히 부정되었던 신적 존재를 다시금 믿고 있다.
 난 절로 한숨이 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이성理性의 한계와 이성의 포기는 전혀 다른 문제야. 사람 이성의 한계가 딱히 신앙의 올바름을 증명하지는 않을 텐데.”

 가령 사람의 다리로는 하늘을 날 수 없다. 아무리 열심히 달음박질을 쳐도 공중에 떠오르진 않는다. 하지만 달리기로 날 수 없다 해서 주술로써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이치가 성립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날 수 없다고 해서 아예 걷는 것 자체를 포기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또 없지 않을까.
 안젤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 말을 부정했다.

“그래도 여백, 여지는 생기네. 최소한의 가설, 가능성의 하나로서 다시금 검토 받을 자격이 생기는 걸세. 그리고 신앙의 특성상 그 정도면 충분히 성립요건을 충족시킨다고 볼 수 있지.”

 이 또한 옳은 말이다. 분명 이성의 한계가 신앙의 올바름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역으로 신앙 또한 그 한계에 의해 완전 부정되지도 않는다. 퍼즐全知의 한 조각이 남아 있는 이상 그 구멍에서 신앙은 얼마든지 샘솟는다.
 결심을 굳힌 난 안젤리나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게, 미지未知를 보여 줘.”

 결국은 모든 것이 그 마지막 한 조각으로 귀결된다. 아마도 내게 있어 즐거웠던 이 미래체험은 그 조각未知을 되살아난 내가 올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한 배려였으리라.
 그러나 내 요구에 답한 것은 눈앞에 있는 밤하늘의 교황도, 내 옆에서 떨고 있는 가냘픈 모카도 아니었다.

“아니. 당신은 아무것도 볼 수 없어. 검은 비가 내리기 전에, 다시 죽을 테니까. 이 손에.”

 어느덧 대성당의 한곳에 고여 있는 불길한 어둠. 보라 속에 격렬하게 타오르는 빨강이 찌르는 듯한 살의를 내게 겨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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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sodien.tistory.com BlogIcon ksodien 2015.01.24 22:3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불과 한치 앞의 미래를 확언하기 힘든 불확실성의 격류 한가운데에서, 무엇인가 기댈 수 있는 대상을 갈구해야만 했던 이들의 힘겨운 구도행.

    그리고 그 기나긴 여정의 끝에서 결국 신적 존재의 부존 증명을 목도(目睹)하며 피어오른 가슴 속 한 편의 공백을, 고도의 과학 기술에 힘입은 초월적 집단 지성의 힘으로 대체해낸 인류의 저력이란 이 얼마나 서글픈 희극의 체현인 것일까요.

    한편으로는, 어쩌면 『모형정원의 나비』 작 중에서 현자 일란이 평생을 걸쳐 추구했던 진화昇天의 최종 단계가 바로 이러한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상념이 들기도 하고 말이예요.


    과연 무수한 이들의 망각과 체념으로 수놓아진 여러 분지 세계의 풍경들을 거쳐 잠시간 주어진 공감각적 미학의 휴식 속에서, 제인은 어떠한 결론에 도달했을 것인지... 다음의 이야기도 기대가 되네요! >_<)


    덧 - 명ㅎ... 아니 나유타야, 그러면 안돼~ ;ㅁ;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5.01.25 06:27 신고 address edit/delete

      옙, 말씀처럼 위 구원구복관의 교황과 신도들의 바람은 전작의 일란 일행이 추구하던 것과도 닮은 구석이 있네요.

      사실 중화적인 형태나마 예지계의 개념을 그대로 현실에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은세계의 은월' 쪽이 훨씬 발달된 문명수준을 가지고 신을 만든다는 목표를 이룰 수 있을 듯... 그럼에도 그것이 되지 않은 것은 역시 정체불명의 홍채라 불리는 괴물(?)의 영향인데, 이 부분은 차후 전개에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낼 생각이에요.

      음, 이번 편은 고도로 과학기술이 발달된 문명에서의 종교는 어떻게 될까에 대한 제 나름의 자문자답이기도 했네요. 평소 그쪽에 비판적인 성향이 강한 만큼 될 수 있으면 신랄하게 되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아무래도 작중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리 긍정적으로는 적을 수 없었던 듯싶어요^^;;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다음 편 정체불명(...)의 누군가와 제인의 일전도 건필하겠습니다! >.<

  2. Favicon of http://sarange.net BlogIcon 밋첼™ 2015.01.26 09:00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음... 神 이 사람들의 바램에 의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과거부터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해왔고, 지금도 같은 생각인 사람들이 많겠지만...
    미래에도 역시나 같은 생각은 사라지지 않을 듯 합니다.

    처음부터 정주행을 좀 해봐야겠는데요?
    사실.. 이렇게 글로 읽어야 머리에서 이미지가 떠오르고 내용이 재미있는데,
    웹툰 식으로 그려봐도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문득 떠올랐습니다~

    • Favicon of http://garamdong.tistory.com BlogIcon 안단테♪ 2015.01.28 22:13 신고 address edit/delete

      정말 물질세계를 뛰어넘는 형이상학적인 세상이 존재하고 있고, 절대자의 주요 속성이 대부분 거기에 속해 있다고 한다면 실제로 이 세상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신의 실존 여부와 관계 없이 여러 종교 등에서 말하는 신은 분명하게 사람들의 관념으로 만들어진 존재라 생각해요. 물론 이는 물자체에 관련된 철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세상 모든 것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수 있겠으나, (종교인들의 신화나 주관체험을 제외하면) 그 실체가 증명된 적도 없고 보고 만질 수도 없는 신적인 존재들이 그러한 일면이 크다고 할 수 있을 듯싶네요.


      음, 전 글 실력도 부족하지만 그림 실력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지라 만화로 그리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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